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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50/75)

50화

그녀가 발신인을 확인하곤 그에게 말했다.

“고모 전화예요. 잠깐 나가서 받고 와도 되나요?”

“응.”

이훤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덧붙였다.

“대신 보이는 곳에 있어. 걱정되니까.”

통화 내용은 그다지 궁금하지 않으나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건 싫었다. 영기도 없는데.

“네.”

순순히 대답하는 그녀를 미소로 보내 주었다.

혼자 된 그는 커피로 목을 축이고 테이블 가운데 놓인 두 개의 카늘레 중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프랑스식 작은 과자였다.

이쯤 되니 이 식당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상당히 궁금해진다.

이제야 고개를 휘휘 둘러 가게 안을 자세히 살펴보는 이훤이었다.

* * *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고모가 하는 말들을, 사빛은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해서 목소리가 저절로 떨려 나왔다.

[네 고모부가 갑자기 취업이 되어서 해외 나가야 한다고. 엄마 어디 있는지 문자 찍을 테니까 앞으로 네가 모셔. 여기 있는 짐 어떻게 할지도 알려 주고.]

얼마 전 고모는 할머니 수술을 시켜 드렸고 회복 중이라는 사진을 보내왔다. 곧 다시 요양원으로 모실 줄 알고 서울 올 때마다 몰래 가서 살펴야지 했는데.

“정…… 말 제가 모셔도 돼요?”

목이 메어서 말이 잘 안 나왔다.

[그렇다니까. 이만 끊자. 나 여권이고 뭐고 할 일 많아. 그 위자료, 그것도 안 줘도 돼. 그 돈으로 할머니 잘 모셔. 끊는다.]

빠르게 말하는 고모의 목소리가 왠지 쫓기는 듯했지만 그런 걸 따질 만한 여력이 없었다.

전화를 끊은 사빛은 그 자리에 웅크리듯 주저앉았다.

한참 숨만 색색 내쉬는데 어느새 이훤이 앞에 와 서 있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 걱정되어 나온 모양이었다.

쭈그려 앉은 채로 고개를 꺾어 올려다보았다. 그는 말없이 눈을 마주하다가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물었다.

“괜찮아?”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지 않았다.

“집에 가자.”

“…….”

“업어 줄까?”

그의 물음에 사빛이 멍한 눈으로 그의 눈을 바라봤다.

낯선 배려였다. 누군가의 등에 업혀 본지가 언제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주 어렸을 때 사진 속 모습 외에는 생각나질 않았다. 그녀는 이미 초등학교 4학년 때 할머니보다 키가 컸다.

어쨌든 염려해 주는 건 고마웠다.

“이훤 씨 창피해서 안 돼요.”

“창피하지 않아. 업혀.”

그가 그녀의 팔을 당겨 자연스럽게 등에 업고는 몸을 일으켰다. 허공으로 붕 올라가는 기분. 단호한 움직임에 거부할 틈도 없었다.

그렇게 얼떨결에 업히게 된 그의 등은 참 넓고 따뜻했다. 싫다고 마다할 땐 언제고 뺨까지 붙인 채 한참을 기대어 있었다.

정신이 좀 들 때쯤 사빛이 조용히 이야기했다.

“고모가 앞으로 할머니 저보고 모시래요. 갑자기 해외 나가게 되었다고. 한참 못 돌아온다고.”

그는 느린 걸음으로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잘됐네.”

마치 다 알고 있던 일인 양 덤덤하게 대꾸한다. 혹시 그가 한 일일까?

의문이 들었지만 사빛은 선뜻 물을 수 없었다. 그가 했다고 한들 거부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스스로 힘으로 할머니를 건사할 거라고 큰소리 땅땅 친 게 불과 얼마 전이었다.

사빛은 마음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말과 다짐은 그랬지만 사실 막막한 일이었다.

우선 얼른 졸업하고 좋은 곳에 취업해서 대졸자 평균 임금을 벌어야 했다. 그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런 다음 대출을 알아보고 어쩌고저쩌고.

그렇게 안개 낀 가시밭길처럼 느껴졌던 어려운 여정이 아무것도 아닌 양 단번에 해결되었다.

그가 한 게 맞는다면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데 사빛은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미안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그녀를 더욱 미안하게 만들었다.

“사실 나, 전에 너랑 같이 가 본 네 고향 집 샀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의 등에서 얼굴을 떼어 내는 사빛의 눈이 멍하게 벌어졌다.

“알아보니 샀던 사람이 네 친모의 남자였더라고. 할머님이 네 대학 학비 때문에 그들 집 앞에 찾아간 적이 있으셨나 봐. 그게 싫어서 그랬대. 그러니까 딱히 사용할 생각 없이 그냥 사 뒀던 거더라고. 팔라고 하니까 팔던데?”

이훤의 설명을 듣는 동안 사빛의 벌어진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할머니가 그 길 위에서 어떤 모습이었을지 너무도 생생하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대체 그깟 대학이 뭐라고…… 안 다녀도 된다니까…….

거기다 이 사람은…… 이 사람은 대체…….

이 사람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걸까. 심장이 먹먹하여 제대로 된 사고가 힘들었다. 차오른 눈물이 그녀의 두 뺨 위로 후드득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이훤이 말했다.

“회복하시는 동안 얼른 수리해서 모시자. 간병인도 좋은 사람으로 구하고. 진현당에서 가까우니까 자주 찾아가 뵙자.”

한참 대꾸 없이 조용하던 사빛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훤 씨.”

“응?”

“이훤 씨는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 줘요?”

“또 그 질문이야? 전에 말해 줬잖아. 내 아내니까 잘해 준다고.”

그가 타박하듯 말하고는 다른 답도 보태 주었다.

“그리고 예뻐서 잘해 줘. 남자들은 원래 제 눈에 예쁜 여자한테 잘해 주거든.”

“…….”

“할머니 병원비랑 생활비도 내가 책임질 거야. 부담스러워하지 마. 네가 능력이 안 되어서가 아니고 나 나름대로 사위 된 도리 하는 거니까. 너 이만큼 키워 주셨는데 내가 잘 모셔야지. 이건 네가 아무리 돈이 많았대도 내가 했을 거야.”

“그건…….”

“여기까지는 나도 양보 못 해. 네 마음만 편하면 다냐? 내 입장도 좀 생각해 봐.”

이훤 씨의 입장.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할 말이 없어진 사빛이 그만 입을 다물었다.

잠시 말없이 걷다 보니 어느덧 본가의 대문 앞에 다다랐다.

오는 내내 이훤 몰래 눈물을 흘렸던 사빛은 얼른 주먹으로 눈가의 물기를 닦아 내고 그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내려 줘요.”

“괜찮겠어?”

“네. 어른들 보시면 민망해져요. 내려 줘요.”

그가 픽 웃으며 그녀를 내리는데, 어른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이 그들을 보았다.

주원이 귀에 큰 헤드폰을 낀 채 털레털레 언덕에서 내려오다가 매우 황당한 걸 봤다는 얼굴로 입을 떡 벌리고는 멈춰 섰다.

손에 든 보자기를 보니 심부름 온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헛것을 본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듯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그들 부부를 쳐다봤다.

그 하는 양에 이훤이 인상을 좀 썼다.

“뭐 하냐?”

“와, 씨. 진짜 맞네. 내가 뭘 본 거냐.”

혼잣말을 참 크게도 한다.

밖에까지 새고 있는 헤드폰 속 음악 때문인가 보았다. 쿵작쿵작, 아주 신나게도 흘렀다.

* * *

꿈같은 시간이 흘렀다.

할머니를 뵙고 의사에게 수술이 잘 되었다는 소리를 들었고, 이훤의 고집으로 좀 더 큰 병원의 1인실로 모셨다.

디스크로는 매우 권위 있는 박사님이 운영하는 전문 병원이었다. 집이 지어지는 몇 달 동안 여기 계시며 재활까지 마치면 된다고 했다.

원래는 특실을 알아보려는 그를 만류하느라 혼났다. 바깥으로 작은 정원이 내다보이는 1인실에 할머니만 전담해서 살펴 주는 간병인. 이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간병인은 동남아시아 사람이었다. 현지 종합 병원에서 간호사로 오래 근무하다 한국으로 시집오셨다고 한다.

그런 후 자식들 독립시키고, 나이 차가 많았던 남편을 먼저 하늘로 보내셨다고.

후덕한 인상이고, 한국에 오래 살았던 탓에 의사소통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한국에 와서도 쭉 간병 일을 했기에 전문가였다. 이분이 앞으로도 할머니와 함께 살며 도와주기로 했다.

처음 할머니를 다시 만났을 때, 사빛은 누워 있는 할머니의 두 손을 꼭 붙잡고 울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썼다.

내가 씩씩한 모습을 보여야 할머니도 씩씩하게 일어나실 거였다.

할머니가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물었다.

“저분은……?”

할머니는 사빛이 병원비 마련을 위해 산에 있는 굿당에서 혼례식을 올렸다는 사실부터 몰랐다.

자신 때문에 사빛이 한 일을 알면 크게 마음 아파하실 거였기에 고모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 부탁했었다.

그때는 그게 다인 줄 알고 그리 말했지만, 이젠 아니었다. 말씀드려야 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씀드려야 할까. 할머니는 노인이고, 아직 병자였다. 마음을 힘들게 할 수 없었다.

사빛이 어떻게 설명할까 잠시 생각하는 사이 이훤이 성큼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인사가 늦었습니다.”

고민하는 사빛과 달리 그는 거침이 없었다.

“결혼했다고?”

짧은 설명을 들은 할머니가 깜짝 놀라셨다.

“예. 제게 사정이 좀 있어 서두르느라 할머님께 허락도 못 구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뒤부터는 사빛이 조곤조곤 설명했다. 사빛이 병원비 마련을 위해 고민 중에 고모의 주선으로 결혼하게 되었다고.

거기까지만 말했지만 할머니는 고모의 주선이란 말에 이미 상황을 대충 파악하셨다.

할머니의 두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갑자기 요양원으로 옮겨진 후, 사빛이 영 안 보여서 어디 갔냐고 물어도 돈 벌러 멀리 갔다고만 했다. 1년 후에 올 거라고. 지금은 못 온다고.

몸을 가눌 수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겨우 누군가에게 부탁해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영 엉뚱한 사람이 받고는 번호가 바뀌었다고만 했다.

얼마나 애가 탔는지 모른다. 그런데 지선이의 주선으로 결혼했다고…….

그렇다면 뻔했다. 친정 사정 때문에 돈 받고 시집가는 여자들을 그녀라고 왜 모를까.

그리고 저런 멀쩡한 허우대의 젊은 사람이 신부를 샀다면 뭔가 흠이 있는 게 분명했다. 아까 남자도 말하지 않았는가. 자기에게 사정이 있었다고.

그 사정이 뭘까. 가장 의심 가는 것이 이룡살이었다.

할머니가 통탄하려 하자 사빛이 얼른 밝게 웃었다.

“할머니, 나 괜찮아. 이 사람이 엄청나게 잘해 줘. 아무런 문제 없이 사랑받고 잘살고 있어. 결혼사진 보여 줄까?”

사빛이 얼른 휴대폰을 열어 진현당에서의 결혼식 사진을 보여 드렸다.

그러나 할머니는 잠깐 보다가 또 울었다.

“미안하다. 나 때문에. 내가 딸을 잘못 키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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