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그런데 이 놈팡이 녀석, 요구하는 양육비가 일반적인 양육비 수준이 아니었다. 한몫 뜯으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열나게 패 주고는 애들 시켜 사연을 알아봤다.
놈팡이는 같이 살지도 않는 고모부란 놈이었다. 고모란 것도 매한가지였다. 빚에 허덕이며 어린 손녀 키우는 노모를 나 몰라라 한 채로 살고 있었다.
그 일로 딸아이가 생각났는지 성산리에 내려가 몰래 지켜봤다기에 태연도 흠씬 패 주었다.
그러자 다시는 만나지도, 관심을 두지도 않겠다며 무릎 꿇고 싹싹 빌었다.
― 그렇지. 그래야 내 예쁜 태연이지.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4년 전 겨울. 태연의 집으로 퇴근하는 길이었다.
웬 노파가 집 앞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대문 안쪽을 기웃거리며 초인종을 누를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돌아가는 거였다.
― 뭐야, 저건. 따라가 봐.
알아보니 성산리 노인이었다. 태연의 옛 남자의 모친. 즉, 태연의 딸을 키우고 있다는 노파.
주변 사람들 말로는 손녀딸 대학 등록금이 없어서 여기저기 꾸러 다닌단다. 아마 그래서 태연의 집 앞을 서성인 모양이었다.
집까지 내놓았는데 사겠다고 보러 오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해서 중희 이름으로 사 주었더니 잠잠했다.
그런데 몇 달 전, 그의 사업과 관련해서 세간현에게 뭐 좀 묻고 답을 받아 오라는 심부름을 보냈던 태연이 희한한 말을 했다.
― 가온 방직 물류 건, 재계약 성사시키면 내가 원하는 걸 하나 해 줄 수 있나요.
얼마 전 정실 마누라가 사망한 직후였다. 아무래도 그 자리가 탐나는 모양이었다.
― 그게 무슨 소리야? 가온 건을 가져온다니.
들어 보니 그럴듯했다.
가온 방직 창업주의 장녀인 윤여란 여사의 손주. 즉 이솔 그룹의 장손이 이룡살이라 특별한 신부가 필요한데, 그들이 원하는 여자가 바로 자기가 낳은 딸아이라는 것이다.
둘 다 아주 특이하게 하나는 극명한 불이요, 하나는 극명한 물이라고 한다.
수극화에 대해서는 방중술에 관심이 있었던 그도 들은 바가 있었다. 물이 불을 이기는데, 불만 사그라드는 게 아니라 물도 기를 다하여 쇠잔해진다는 상극 조합이었다.
― 딸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상관없다는 건데…… 우리 태연이 많이 변했네?
어쨌든 그로서는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제 하나뿐인 아들의 어미이고 사업도 살려 준다는데 마다할 게 무어인가. 이 나이에 새파란 년 구해 새 장가갈 것도 아니고.
여자로서 안는 맛이 사라졌다고 하나 그거야 죽은 전 마누라도 마찬가지였고 재미는 다른 곳에서 찾으면 된다.
황 사장이 흔쾌히 태연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렇게 일이 잘 풀리고 얼마 전 듣게 된 태연의 한 가지 원.
태연이 그에게 들어 달라 요구하는 것은 그가 예상한 바와 전혀 달랐다. 그건 바로 정규가 고등학교 졸업하는 즉시 떠나게 해 달라는 거였다.
혼자 살고 싶단다. 연예계도 은퇴할 생각이란다.
― 내가 당신 곁을 떠날 방법은 하나잖아요. 당신이 나를 놓아주는 거. 그걸 해 달라는 거예요.
황당했다. 아무리 둘째 마누라라지만 그간의 정은 다 어디 가고? 그들이 함께한 세월이 무려 20여 년이었다.
태연 없는 자신을 상상해 보았다. 기분이 엿 같았다.
그건 정실 마누라처럼 명이 다해 죽어 사라지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사나이 황성재가 한 입으로 두말할 수는 없고, 하여 열심히 설득하는 중이었다. 매일 태연의 집으로 퇴근하면서.
“아, 그리고.”
중희의 다음 보고가 황 사장의 상념을 깨웠다.
“어, 말해.”
허벅지를 내리며 자세를 잡은 황 사장이 또다시 조그마한 공을 쳐올렸다. 도르르 굴러간 공이 이번에도 챙그랑 소리를 내며 홀 안으로 들어갔다.
저 소리가 참 듣기 좋다.
“성산리 시골집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할마씨 집 말이야?”
“예, 밀고 전원주택을 짓고 싶다고요. 갖고 있으라고 하셔서 우선은 팔 생각이 없다고 전달했는데요.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연락 달라고 했답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래? 전 주인하고 관련 있는 사람인가?”
“글쎄요. 젊은 남자라는 말뿐 그런 말은 없었는데, 알아볼까요?”
잠깐 생각한 황 사장이 별일 아닐 거란 생각에 입을 한 번 씰룩거리곤 대꾸했다.
“됐어. 그냥 팔아.”
사실 가지고 있어 봐야 쓸모도 없는 물건이었다. 하룻저녁 술값이었고.
임자가 있을 때 넘기는 게 속 편했다.
“예.”
“그 할마씨는 어때?”
태연의 말대로 다른 업체에 넘어갈 뻔했던 가온 방직과의 재계약이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태연은 이솔 가에 당사자나 그 노파 대신 고모를 연결해 줬다. 좀 더 수월할 거라고.
돈에 환장하는 놈팡이 부부가 나서자 일은 무리 없이 착착 진행되었다.
문제는 태연의 딸이 그 집에 들어가야 할 적에 생겼다. 놈팡이 부부가 미리 이야기를 안 해 줘서 뭉그적거린다는 것이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릴 수 없어 중희를 시켜 그 할마씨를 계단에서 밀어 버렸다.
그 할마씨를 위해서는 뭐든 하는 앤데 돈은 한 푼도 없는 애라니까.
“수술 일정 잡혔고, 수술받고 재활하면 일상생활은 가능할 거라고 합니다.”
“그렇군.”
황 사장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하곤 또다시 굴러 나온 흰 공을 쳐올렸다.
* * *
며칠 후, 성산리에 있는 <복> 공인 중개 사무소.
황 사장의 명으로 산 집을 팔기로 하고 명의자인 중희가 내려왔다.
차를 세우고 들어서 보니 의외의 사람이 소파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큰 키와 운동으로 다져진 몸. 검은색 반소매 니트에 슬랙스 차림이었다.
멋에 신경 안 쓴 듯한 모습이었지만 값비싼 명품들로 도배되어 있다. 특히 손목의 시계는 평범해 보이지만 9억짜리로 유명한 한정판이었다.
밖에 있는 차도 그렇고, 웬만해선 기나 태로 밀리지 않는 중희지만 잠깐 움찔했다.
무엇보다 눈빛. 이무기가 들었다더니 젊은 놈의 기세가 실로 상당했다.
비좁은 소파 테이블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아 느른한 숨을 내쉬며 무표정하게 이쪽을 쳐다보는 자.
실물을 처음 보지만 분명 그였다. 권이훤.
그가 말했다.
“잠깐 자리 좀 피해 주겠습니까?”
부산 떨며 계약을 준비하던 중개사가 간이 의자에 앉으려던 행동을 멈추고는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예? 저요?”
“네, 조용히 할 이야기가 좀 있어서요.”
중개사가 눈을 몇 번 끔뻑거렸다. 여긴 제 가게였다. 보통 이런 경우 자기들이 잠깐 나가서 이야기하고 들어오지 않나?
“아, 네. 뭐.”
약간 당황했지만 두 젊은이가 내뿜는 이상한 기운에 기가 눌린 중개사는 엉거주춤하던 엉덩이를 들고 주섬주섬 밖으로 나갔다.
잠시의 침묵 후, 이훤이 무표정한 얼굴과 고저 없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
“이태연 씨의 지시였나요?”
중희는 짐짓 모른 척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 집을 샀던 것 말입니다.”
이훤이 눈짓으로 탁자 위 서류들을 가리켰다. 중희가 별다른 대꾸 없이 쳐다만 보자 옆자리에 있던 서류 봉투를 탁자 서류들 위로 던진다.
중희가 그것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죠?”
“보시죠.”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는 이훤을 지그시 바라보던 중희가 서류를 열어 안의 내용물을 꺼내 보았다.
사진들이었다. 그것을 본 중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몇 달 전 아침, 자신의 모습들이었다.
노파를 뒤따르다 후미진 건물 계단에서 밀쳐 고꾸라지게 하고는 돌아가는 참이었는데, 동선을 따라 차량에 올라타는 모습까지 담겨 있었다.
범행 장소와 꽤 떨어진 곳이었으나 노파가 넘어지며 언뜻 그와 눈이 마주쳤었다. 이 사진과 함께 조사받게 되면 불리할 터였다.
이훤이 또 물었다.
“이것도 이태연 씨 지시입니까?”
“……”
“왜죠?”
“무엇이 말씀입니까?”
“이태연 씨가 딸을 우리 집안에 들여보낸 이유가. 이런 해서는 안 되는 짓까지 해 가면서.”
이훤이 눈썹을 들며 시선으로 사진들을 가리켰다.
사실 그는 이미 좀 알아보았다.
정리하면, 이태연이 세간현을 만나러 갔다가 제 사연을 듣고 사빛의 고모를 그의 할머니에게 연결해 주었다. 이후 신양 운송은 가온 방직과의 거래 연장을 약속받았다.
여기까지만 보면 자기 남자 영달을 위해 오래전 버린 딸을 이용한 인면수심이었다. 다른 게 더 있는지 알고 싶다. 정확히 알아야 헛짓하지 않고 일을 빠르게 처리할 테니까.
“저는 이유 같은 건 모릅니다.”
“심부름꾼이다…… 그럼 직접 만나 볼까요? 주선 좀 해 주시죠.”
이훤의 말에 그제야 중희가 모른 척으로 일관하던 자세를 버리고 상대의 눈을 진솔하게 바라봤다.
“그분은 모르는 일입니다.”
“이 집도요?”
이훤이 중개사가 펼쳐 놓은 등기부 등본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네.”
“그럼 황성재 사장이겠군요.”
“…….”
“내가 한번 만나자 한다고 전해 주십시오.”
“예. 전하겠습니다.”
중희가 고분고분 대답했다.
이훤이 밖에 들릴 만큼의 소리로 외쳤다.
“이제 들어오셔도 됩니다.”
그렇게 마련된 자리. 서울의 모 호텔 커피숍이었다.
“이렇게 만나 뵙는군요.”
나이 차이가 크게 났지만 황 사장은 깍듯했다.
배후가 막강한 이솔의 주요 인물이었다. 창업자인 권택민 회장도, 실권을 쥔 권연석 사장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움직이지 않아서 그런데, 움직이면 이솔 그룹의 판세 자체를 뒤흔들 수 있는 놈이었다.
어쨌든 언젠가 최대 주주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니 잘 보여야 했다.
이훤이 말했다.
“이미 이야기를 전해 들으셨을 테니 본론만 묻죠.”
“그러시죠.”
“이태연 씨 딸을 우리 집에 들여보낸 이유가 만료 예정이었던 가온과의 계약 연장이 답니까?”
뭐든 단도직입적인 걸 좋아하는 이훤이었다. 혼자 생각하는 것보다 직접 묻기로 했다.
황 사장이 사람 좋은 척하는 호탕한 웃음을 껄껄거렸다.
“그럼 다른 뭐가 있겠습니까. 허허.”
바보처럼 구는 이유는 주 거래처인 이솔과의 돈독한 관계 때문도 있지만 이 젊은 놈이 쥐고 있는 사진들 때문이기도 하다.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한 중희는 다리가 부러져 병원에 입원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