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75)

46화

열불이 난 수영이 방영희에게 통화를 연결했다.

[여보세요.]

느릿한 말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짜증 섞인 말을 쏘아붙였다.

“칫솔 제대로 보낸 거 맞아? 걔가 쓰던 거 확실하냐고.”

[예. 전에는 없었던 거고, 이사님은 쓰는 전동 칫솔이 따로 계셔요. 그리고 그건 누가 봐도 여성용이고요. 지금도 같은 종류로 쓰고 있습니다.]

크기가 확연히 작긴 했다. 권이훤이 이걸 쓰는 상상을 하니 웃기기도 하고.

그나저나.

“갑자기 웬 이사님?”

[아, 저희 모두 이제부터 그렇게 부르기로 했거든요.]

하! 코웃음이 크게 나올 뻔했다. 이것도 그 여자애 놀음인가? 아주 놀고들 있다.

“손님이 왔던 적은 없고?”

[글쎄요. 제가 알기로는 없는 것 같은데요.]

없으면 없는 거지 없는 것 같은데요는 뭘까.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결국 그 여자애 칫솔이 맞는다는 소리. 이태연의 칫솔이 바뀐 게 아니라면 결과지를 믿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아무 사이도 아닌데 왜 그렇게 닮아서는. 괜한 설레발에 헛돈만 날린 수영이 서류를 발기발기 찢어 칫솔들과 함께 휴지통에 처박아 버렸다.

씻고 나와 마사지 크림을 치덕치덕 얼굴에 문지르는데 주원이 들어왔다.

“엄마, 전에 그 해초 팩 어디 있어? 나 팩 다 떨어졌어. 하나만 줘. 이대로는 화장이 안 먹을 것 같아.”

이 시간에 화장이라니.

“또 클럽 가게?”

“시샤 바 가. 냉장고에 있지?”

시샤 바는 또 뭔가.

엄마의 한숨 소리가 깊든지 말든지 아무 상관 없는 주원이 화장품 냉장고에서 팩 하나를 꺼냈다.

껍질을 까서 얼굴에 붙이고 봉지를 휴지통에 넣으려는데 갈가리 찢긴 종잇조각과 칫솔 두 개가 버려져 있다.

우리 집 칫솔은 아닌데 뭐지? 싶은데 둘 중 하나가 꽤 낯이 익다.

‘저건 분명 권이훤 집 화장실에 있던 건데.’

밥 먹고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화장실 수납장에 있던 새것을 하나 까 썼다.

특이한 무늬의 보라색이라 기억이 난다. 같은 무늬 여러 색 중 제가 특별히 골라잡은 색이었다.

‘똑같은 게 다 있네.’

엄마한테 이것들 다 뭐냐고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자기가 지우 데리고 거기 갔다 왔단 사실을 엄마가 알면 큰일 난다. 지우를 며느릿감으로 콕 찍은 듯한 눈친데 내가 그랬음을 알면 잔소리가 몇 시간은, 아니, 몇 날은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행랑 아줌마 입단속도 철저히 해 둔 터였다.

‘아, 머리야.’

쓸데없는 잡생각이 많아지자 머리를 털어 낸 주원이 팩 붙인 얼굴로 제 방으로 돌아와 입고 나갈 옷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약속 시간이 다가오는데 그딴 시답잖은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 * *

사빛은 안채 마당에서 강아지와 공놀이 중이었다.

이훤은 2층 테라스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뒤에 선 영기로부터 사빛의 고향 집에 관한 보고를 받는 중이었다.

“무허가 집이었고요. 그 집을 매매해 준 중개사 말로는 원래 팔릴 만한 집이 아니었답니다.”

그럴 법도 했다. 산 밑 외진 곳에 있는 아주 오래된, 그러니까 다 쓰러져 가는 허름한 집이었다.

이훤이 살짝 불편해진 낯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들어와 살지도 않을 집을 그저 사 놓았다기에 땅값이 오를 만한 호재가 있었을까 싶었는데 그런 것도 아닌 듯하다.

“혹시 왜 사느냐고 물어봤대?”

“예. 산 생활을 해 보고 싶어서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 말로는 온 적이 없다고 하고요.”

“신상은?”

“젊은 남자랍니다. 말쑥한 차림에 서울말을 썼다고 하고요. 더 자세한 건 개인 정보라 못 알려 준다고 하네요. 다른 경로로 알아볼까요?”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난다.

“음. 그리고.”

“예.”

“그 집 사겠다고 해. 충분히 쳐줄 테니 팔라고.”

* * *

그날 오후, 양평 한 저수지 인근에 마련된 드라마 촬영 장소.

이태연이 다음 신 촬영 전에 차로 돌아와 잠시 쉬고 있었다.

몹시 더운 날씨에 찌든 몸을 에어컨과 손 선풍기를 이용해 식히면서 대본을 살폈다.

중반으로 치닫고 있는 드라마가 인기가 좋아 총 회차 수가 늘어나면서 작가와 감독이 어이없는 전개의 에피소드들을 마구잡이로 끼워 넣는 중이었다.

생각 없는 남주가 주요 출연진들과 함께 주르륵 앉아 생방송 인터뷰하면서 ‘저도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몰라요. 아마 여기 계신 분들 다 모를걸요? 이 선생님은 아세요?’라며 순박한 농담을 던져 비웃음을 샀을 정도였다.

한숨이 나왔지만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 될 터였다. 유종의 미를 위해 여기서 하차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태연이 오늘 받은 쪽대본으로 상황과 대사 익히기에 집중했다.

잠시 후, 태연이 좋아하는 브랜드의 아이스커피를 사러 갔던 코디가 돌아왔다.

“중희는?”

커피를 받아 마시며 여전히 대본에 눈을 둔 채로 물었다. 그녀가 차로 온 지 한참인데 계속 보이지 않았다.

“오면서 보니까 통화 중이시던데요.”

강중희는 소속사 직원이 아니고 이태연이 데리고 다니는 전담 매니저였다. 하는 일은 그녀의 연예계 생활에만 국한되지 않고 거의 모든 수발을 드는 수행 비서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성인이 되기 훨씬 전부터 그녀 곁에 함께했다.

얇은 금테 안경과 딱 들어맞는 핏의 세련된 옷차림.

생긴 건 멀끔한데 혹 스치듯 건드리면 밀도 높은 근육들이 상대를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

온몸이 문신이라는 소문도 있다. 그럴 것도 같은 게, 간혹 드러나는 팔과 목의 문신이 큰 덩어리 그림의 일부분이었다.

이태연의 남자인 황성재 사장 태생이 그쪽인지라 다들 그러려니 하며 몸을 사렸다. 태도는 신사적인데 나쁜 남자 이미지가 강해서 취향이 그쪽인 뭇 여성들이 홀로 가슴 떨려 하기도 했다.

태연이 잠시 눈을 붙이고 있자니 차량 조수석 문이 열리며 중희가 돌아왔다.

눈을 조금만 들어 올리며 태연이 물었다.

“통화가 왜 이리 길어? 누구랑 통화했어?”

“말씀하신 일로 IS 갤러리와 통화했습니다.”

“뭐래?”

IS 갤러리에 전시되었던 고 송보 화가의 그림에 관한 이야기였다. 구매 의사를 전달하라 했었다.

“소유권자가 당분간 판매는 하지 않겠다고 했답니다.”

태연이 고운 눈썹을 찡그렸다.

“대신 다음 달쯤 따로 전시회를 한 번 더 하고 나머지 유작들도 공개할 예정이라네요. 관심 있으면 그때 다시 한번 문의 달라고요. 소유권자가 생각이 바뀔 수도 있으니.”

태연은 대답 없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긴 늙은 할망구가 그런 방면으로 전문가지. 한참 이슈화되기 시작한 고인의 작품 값어치 올리는 거야 뭐.

새로운 전시회라는 것도 그렇고, 윤여란 관장이 코치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도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는 건 아니니 다행이었다. 말대로 다음 전시에 나오는 것까지 보고 다시 딜을 걸어야겠다.

그때, 차 밖에서 스텝이 돌아다니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5분 후에 13-1 촬영 들어갑니다! 배우님들, 준비해 주세요. 이 선생님! 최 배우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태연이 의자에서 등을 일으키자, 옆자리의 코디가 재빠르게 다가와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 * *

그날 저녁, 영기가 보내온 보고 문자에 이훤은 아쉬웠다.

[안 판다고 합니다.]

사빛의 고향 집을 사고 싶다는 뜻을 현 소유주에게 전해 달라고 성산리 유일한 공인 중개사에게 부탁했던 영기.

그러나 매매 의사가 없다는 답변을 전달받았다.

[당분간 팔 생각 없으니 연락 주지 말라고 했다네요.]

책상에 엉덩이를 걸친 채 문자를 확인한 이훤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생각에 잠겼다.

이훤은 사빛의 고향 집이 필요했다.

진접에 있는 요양원에서 그녀의 할머니를 뵙고 연희동 본가로 향할 적에, 이훤은 그녀에게서 관련된 이야기를 좀 더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할머니가 고향을 몹시 그리워한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사빛의 대학만 아니었다면 절대로 그 집을 팔거나 고향을 떠나지 않았을 거란 사실도.

해서 그 집을 되사서 생활하기 편리하게끔 재건축하려 했다.

그런 후 그녀의 할머니를 모시고 상주하는 간병인까지 구하면 딱 좋을 것 같았다.

어차피 그는 집안의 장손이기도 하거니와 이솔의 대주주여서 성인이 된 이후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에 자주 들어왔다.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

그러니 매일 화상 통화하고 그들 부부가 한국에 올 때마다 찾아뵈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안 판단다. 당최 그 작자의 의도를 모르겠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영기였다.

“여보세요.”

[문자 보셨죠?]

“응.”

[그 사람 신상이 나왔습니다.]

“그래?”

[예. 강중희라고, 30대 후반이고 직업은 이태연 매니저라고 합니다. 이태연은 중년 여배우인데요. 전문 매니저는 아니고 이태연이 20년 넘게 데리고 다니는 치라네요.]

이훤의 미간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또다. 강중희와 이태연.

뭔가. 도대체 무슨 의도인가. 이훤은 답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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