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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39/75)

39화

권 사장이 무사히 자기 뒤를 잇는 것. 그게 요새 건강 문제로 대부분 집에만 있는 남편이 보이는 가장 큰 바깥 행보였다.

그동안은 은근히 내비치던 속내를, 갈 때가 다가오니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 손주보단 아들이란 이야기였다.

“주원이 말이 맞아요. 걔는 안 될 거예요.”

윤 관장의 단호한 대꾸에 수영이 서운해했다.

“어머, 어머님. 왜요?”

“지우 어미한테 들은 말이 있어. 염두에 둔 혼처가 있다고. 그리고 은원이는 워낙 조용해서 좀 더 얌전한 아가씨가 어울리지. 나도 신경 써서 알아볼게.”

이런 모습들을 보는 사빛은 참 재미있었다.

사빛은 처음에 제 꿈이란 것이 두렵고 무섭고, 그렇지만 이겨 내야 할 힘겨운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좀 흐르면서 찬찬히 보니 재미있는 면도 많았다.

이들은 아직 모른다. 기계처럼 일밖에 모르는 은원이 그의 비서와 얼마나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는지.

어쩌면 벌써 진행 중일 수도 있다. 세상에 다시 없을 듯한 절절한 사랑으로 눈물겨운 여정을 펼친 끝에 어느 작은 성당에서 둘만의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유지우는…….

이야기는 곧 남자들의 사업 이야기로 흘렀다.

대주주인 윤 관장을 제외하고 다른 여자들은 그룹 일과 별 상관이 없기에 다들 조용해졌다.

윤 관장도 지분만 있을 뿐 그룹의 소소한 실무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사회나 주총에 참석해 상정된 안건에 대한 의사 결정만 했고, 이는 이훤도 비슷했기에 아무 말 없이 식사만 했다.

사빛은 가만히 권 회장과 권 사장, 그리고 권 상무의 대화를 경청했다.

“뭘 그렇게 엿들어요?”

주원이 그런 사빛을 보며 삐딱하게 물었다. 말은 안 했지만 ‘쥐처럼’이란 말이 덧붙어 있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새아기, 회사 일에 관심 있니?”

윤 관장의 말에 도끼눈을 치켜뜨는 수영을 포함,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예? 아, 예. 제가 이번에 작은 회사를 하나 설립하려고 하거든요.”

갑자기 온 식구의 주목을 받게 된 사빛이 어설프게 웃으며 수줍게 고백했다.

“뭐? 회사를 차리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윤 관장이 놀라며 묻는 말에 사빛이 옆자리의 이훤을 바라보았다. 말해도 되는지 살피는데 별다른 반응이 없기에 나머지 이야기도 했다.

“이훤 씨랑 같이요.”

수영의 표정이 못나게 일그러졌다. 손에 들려 있던 수저도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 * *

지금으로부터 6일 전, 사빛과 이훤이 신혼여행 다녀온 다음 날이었다.

사빛이 그에게 집중하지 않은 죄로 이훤은 그녀를 하루 일정 시간 2층 작업실에 올라와 있게 했다.

“장난이 아닌 거예요?”

“응. 벌이라니까.”

“여기서 뭘 해요.”

“책 봐. 휴대폰을 하든가. 노트북도 필요하면 줄게. 영화 볼래?”

“흠…… 어쩔 수 없네요.”

작은 한숨을 내쉰 그녀가 수긍하고는 물었다.

“그러면 여기서 강의 좀 들어도 되나요. 노트북 빌려주시면 헤드폰이나 이어폰 끼고요. 카드도 좀 쓸게요. 음, 이게 따지자면 이훤 씨 부인으로서의 품위 유지와도 조금은 관계가 있거든요.”

“무슨 강읜데? 에티켓이나 가정생활 같은 거?”

“아뇨.”

사빛이 웃었다.

“사실 제가 갑자기 학교에 못 가게 됐잖아요. 이참에 졸업 준비하게요.”

“학교 졸업하고 싶어?”

“네. 이제 한 학기만 마치면 되니까요. 할 수 있을 때 조금씩 학점이라도 모아 두려고요. 그럼 여력이 될 때 좀 더 수월하게 졸업할 수 있을 테니까요. 물론 이것도 이훤 씨가 카드 써도 된다고 허락해야 가능하지만…….”

사빛은 졸업반 때 취업할 것을 염두에 두고 1학년 때부터 정말 열심히 학점을 따 두었다.

막 학기에는 사이버 강의로 대체할 수 있는 교양 몇 개와 최소한의 출석만으로 졸업할 수 있게끔 조정해 두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정이 안 좋아지고 이곳까지 오게 되어 휴학을 결심했던 차였다.

그래도 언젠가 꼭 졸업장을 받고 싶다.

할머니가 평생 살아온 고향을 떠나면서까지 보내 준 학교였다. 서울에 오기 전날 둘이 붙잡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렇게 그만둔다면 아쉬움이 많았다.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졸업하여 할머니 머리 위에 학사모를 씌워 드리고 싶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남들 그러는 모습을 꽤 부러워하셨다. 아버지가 학교를 그만둔 일을 못내 안타까워하셨고.

자신까지 실망을 안겨 드리기 싫었다.

“그럼 휴학하지 말고 졸업하자.”

“예? 어떻게요?”

“네 말대로 지금 사이버로 할 수 있는 건 하고, 안 되는 건 가을 개강 후에 강의 있는 날만 나랑 같이 학교에 다녀오자.”

“같이요? 수업받는 동안 기다린다고요?”

“응.”

사빛이 난감해하는 눈으로 쳐다봤으나 그는 진심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년 여름이 지나자마자 그녀를 데리고 해외에 나갈 계획인 그이기에 그녀가 한국에 있는 학교 졸업장에 미련을 가지면 안 되었다.

하나하나, 그녀가 그의 제안을 거부할 만한 상황을 모두 제거해야 했다.

사실 그 정도가 아니라 재고 따질 게 조금도 없는 상태. 오로지 그의 제안만 보고 행복한 마음으로 예스를 말할 수 있는 완벽한 상태를 꿈꾸는 거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 주시면 제가 너무 미안해서 안 되는데요. 그리고 저희 학과는 특성상 졸업 작품을 해야 해요. 따라다니기 힘드실 거예요.”

“하면 되지.”

“그거 조별 팀 작업이라 준비 시작하면 딱 정해진 시간에 학교에 있고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선배들 보니까 팀원끼리 몇 주를 붙어 있더라고요. 밤샘 작업도 많고요.”

한국 대면 남녀 공학인데 밤샘이라…… 그건 좀 곤란한데. 이훤의 미간에 진한 주름이 잡혔다.

“꼭 팀으로 해야 해? 혼자 하면 안 되는 거야?”

“해도 되는데 그럼 규모나 질이 떨어지니까 드물어요. 학점에서도 불리하고요. 저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혼자보단 협업 위주라 교수님이 좋게 보지 않거든요. 작년에도 딱 한 사람 혼자 했어요.”

“흠…….”

맞는 말이었다. 그가 하는 프로젝트에도 늘 소프트웨어 담당자들과 더불어 산업 디자이너들이 함께했다.

“그럼 학점 일부 포기하고 저 혼자 해서 내 보죠, 뭐. 그래도 졸업은 할 수 있으니까.”

사빛이 쿨하게 결론 지었다. 그동안 관리해 온 학점이 아깝긴 하지만 적기에 졸업할 수 있는 것만도 다행한 일이었다.

“다른 방법은?”

이훤이 물었다.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그녀를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기지 않고도 원하는 학점을 얻게 해 줄 방법이.

자기 때문에 그녀가 뭔가를 포기하는 경험을 자꾸 쌓는 건 싫었다. 그건 지금만으로도 차고 넘쳤다. 자신과 있는 게 그녀에게 득이고 행복이어야 했다.

“음.”

사빛이 생각해 보았다.

“사실 취업계 내는 게 가장 수월해요. 저희 학과는 취업을 권장하는 학과라 교수님들이 마지막 학기는 과제물이나 시험만으로도 학점을 주시거든요. 들어 보니 주시는 학점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하고요. 이렇게 하면 학교에 거의 안 나가도 졸업할 수 있어요. 저하곤 상관없는 얘기지만.”

그녀가 마지막 학기쯤 취업할지도 몰라서 관심 있게 알아봐 두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네? 어떻게요?”

“꼭 취업해야 하나? 창업해서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어 보자. 필요하면 인력 고용해서 팀 꾸리든가 외부 인력을 이용하든가 하고. 그럼 학교도 졸업하고 괜찮은 과제물도 낼 수 있잖아.”

“그건 그렇지만.”

“뭐, 또 다른 문제 있어? 뭐든지 말해. 하자는 거 할게. 어차피 내가 노니까.”

별로 내세우고 싶은 처지는 아니지만 그녀가 그를 많이 이용했으면 좋겠다.

“그럼…….”

“……?”

“그럼 저랑 저 로봇 비슷한 거 하나 만들어 볼래요?”

사빛이 작업실 한쪽 벽에 붙은 모니터를 올려다보았다. 바닷속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저거? 탐색 로봇?”

“음, 제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요. 바다를 청소하는 로봇이요.”

사빛이 알기로 얼마 후 나라에 안 좋은 사건이 하나 터진다.

무단 방출되었던 것인지, 출처 불명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해류를 타고 국내 해안으로 대거 떠밀려 온 사건이었다.

이훤 덕분에 그녀도 오며 가며 반강제적으로 뉴스를 보고 듣곤 했는데, 한동안 뉴스에서 그 이야기만 연신 나왔기에 잘 안다.

바다에 버려진 플라스틱으로 인한 해양 오염 문제는 아주 심각하다고 한다.

이는 결국 인간에게 되돌아온다고도 한다.

많은 배가 청소 요원들을 태우고 현장으로 나갔고, 뜻있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바닷가로 달려가 자원봉사를 했다.

그렇게 긴 시간, 해당 바다는 치워도 치워도 밀려드는 쓰레기로 참 많은 고생을 했다.

그때 그가 뉴스를 보며 청소 로봇이 대량 있으면 좋을 텐데…… 라며 혼잣말로 아쉬워하는 소리를 들었다.

혼잣말을 잘 안 하는 사람이 그러니 속으로 매우 안타까운가 보다 생각했었다.

그녀도 너무 마음 아팠다. 바다 생물들이 무슨 죄인가. 빠르게 청소할 수 있다면 피해가 훨씬 줄어들 것이다.

후에 그의 말대로 수중 청소용 기계들이 투입되긴 했다. 외국에서 어렵게 공수해 온 것들이었다.

해서 우리나라에도 뛰어난 성능의 수중 청소 로봇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평상시에는 항구나 연안 같은 곳을 청소하고 이처럼 특별한 일이 발생하면 다 모여 얼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옛날에 한국사 배울 때 언제쯤 군사 조직을 이렇게 움직였다고 본 것 같다.

대규모의 로봇들이 군대처럼 움직이는 모습을 상상하니 흥미로웠다. 그 애들이 질서 있게 움직이며 절도 있게 해당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을 떠올리니 기분마저 흐뭇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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