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75)

38화

“백아영…… 이름도 얼굴만큼 예쁘네.”

“예?”

“왜 놀라?”

“아니, 놀란 게 아니라 너무 예쁘신 분한테 그런 소리 들으니까 왠지 부끄러워서요.”

라고 말하곤 귀여운 웃음을 헤헤 웃는다.

“내가 예뻐?”

“네. 탤런트 닮았어요.”

“누구?”

라고 물었지만 돌아올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태연일 거다.

“이태연이요.”

하도 들으니까 이제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았다.

사빛도 자신이 좀 특이하게 생긴 걸 안다. 서울 와서 연예 기획사나 엔터테인먼트에서 명함도 몇 번 받아 봤다.

그러나 관련 학과 사람들의 화려한 피지컬에 기가 눌리기도 하고, 뜨기 전까지 돈이 엄청나게 든다고도 주워들었고, 무엇보다 그녀의 할머니가 연예인이란 직업을 무척 싫어했다.

그녀를 반듯하게 키워 건실한 회사에 취직시키고, 또 그만큼 반듯한 남자와 결혼시켜 행복하게 사는 모습 보는 거. 그게 할머니의 마지막 할 일이자 소원이라고 했다.

더군다나 사빛 자체가 남들 앞에 나서는 성격이 되지 못하다 보니 그런 직업은 고려의 대상도, 선망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저 먼 나라 사람들 이야기 같았다.

“제가 전에 노아 본 적 있거든요? 노아보다 훨씬 더 예쁘세요.”

“노아?”

“모르시는구나. 요즘 뜨는 아이돌이에요. 예쁘다고 난리들이죠. 제가 너무 말이 많나요?”

“아니, 재미있어. 주말엔 계속 집에 있어?”

“네.”

“자주 볼 수 있겠다. 친하게 지내자.”

사빛이 미소 짓자 원체 무던한 성격의 아영도 배시시 웃어 보이곤 이만 거실과 다른 방 청소를 하겠다며 가 버렸다.

다른 방이라면 아버님, 어머님이 쓰셨던 침실과 아버님의 서재, 그리고 어머님의 전용 공간이었다.

그중에서 어머님의 작은 공간은 다른 방과 다르게 붙박이 가구만 빼고 내용물이 싹 치워진 상태였다. 혹시 들어가 보아도 될까? 생각하며 사빛이 조심스럽게 그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꿈에서도 궁금했지만 소심해서 들어와 보지 못했다.

만들기가 취미였다는 어머님 전용 공간은 작은 공예방 같았다. 텅 비었는데 왜인지 어머님의 향이 나는 것 같았다.

특히 창가에 놓인 재봉틀이 사빛의 눈길을 끌었다. 칠이 잘된 책상에 붙박이 되어 있고, 핸들과 발판까지 있는 진짜 옛날식이었다.

* * *

이솔 그룹 권 회장의 일요일 오전 가족 식사가 시작되었다.

권 회장과 윤 관장은 아직 나오지 않았고 권연석 이솔 스틸 사장 네 가족과 이훤 부부가 미리 와 앉아 있었다.

큰 식탁의 말미에서 주원이 노골적으로 얼굴을 구기며 비난의 말을 쏟아 냈다.

여긴 제 영역이기에 진현당 때와는 표정이 사뭇 달랐다. 눈을 매섭게 치뜨며 미운 말을 늘어놓는다.

“무슨 며느리가 시어른들과 겸상을 해? 아무리 막된 집안에서 왔다지만 기본예절도 안 배웠어요?”

빗속을 뚫고 걸어와 축축해 죽겠는데 자기보다 상석에 자리 잡은 사빛을 보곤 기분이 더욱 나빠진 것이다.

자리를 누가 정해 준 건 아니었다.

원래부터 쭉 권 사장 네 가족은 그쪽에 줄지어 앉았고, 이훤은 이쪽에서 할머니와 함께 앉았다.

해서 사빛도 별 뜻 없이 이훤이 빼 주는 의자, 즉 그의 다음 자리에 앉다 보니 아주버님인 은원과 마주하고 앉게 된 것이다.

사빛이 할 말이 없어 두 눈을 끔뻑거리는데, 이훤이 인상을 쓰며 대신 응수했다.

“다 가족인데 누군 되고 누군 안 되고, 우습지 않아? 언제 적 사람이야? 그리고 말조심해. 무식하게…….”

이훤의 뒷말이 과격해지려 하자 수영이 서둘러 말을 가로막으며 자기 딸을 두둔했다.

“주원이 말이 맞는 거 같아. 할아버님 나와서 언짢아하시기 전에 얼른 일어나.”

수영이 사빛에게 말하며 시중들기 위해 한편에 주르륵 서 있는 사용인들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이훤이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느릿하게 말했다.

“그럼 작은어머님도 일어나시죠.”

“뭐? 난!”

얼굴이 붉어진 수영이 반박하려 했지만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기는 나이가 있다고 말하려니 그녀 역시 처음부터 시어른들과 겸상했었다.

결혼했을 당시 두 어머님을 모실 때라 큰 시어머님과의 사이가 지금처럼 편하지는 않았는데,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리니 시아버님이 와서 앉으라고 권해 주었다.

첫째 며느리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집 자식이라 겸상하는 차에 둘째 며느리라고 사용인들과 함께 세워 둘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그는 첫째 며느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수영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거친 숨만 내뱉고 있자니 어두운 얼굴로 듣고 있던 그녀의 남편, 권 사장이 무겁게 한마디 했다.

“이훤아. 작은어머니시다.”

“예, 압니다. 그리고 이 사람도 주원이보다 윗사람이죠.”

이훤이 흔들리지 않는 자세와 표정으로 권 사장의 역성을 맞받아쳤다. 먼저 건드린 건 그쪽이라는 듯.

자녀 교육을 비웃는 것이 분명한 얼굴이었다.

두 개의 보이지 않는 칼이 식탁 위에서 맞부딪쳤다. 푸른빛을 발하며 대치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는 듯했다.

권 사장의 표정이 좀 둔해지자 이훤의 눈빛이 얼음처럼 차갑게 그의 가슴께를 훑으며 거둬졌다. 식탁에 잠시 침묵이 흐르고, 권 사장이 내리깐 눈을 다시 든 건 시간이 좀 흐른 뒤였다.

권 회장과 윤 관장이 식당으로 들어섰다. 모두 일어나 어른들이 착석한 후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에 집이 북적북적하는구나.”

윤 관장이 즐거운 듯 말했고.

“식사하자.”

권 회장이 지시하듯 말했다.

권 회장이 수저를 들자 사용인들이 다가와 덮인 그릇들의 뚜껑을 열어 주는 것으로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말 없는 식사가 이어지기를 한참.

“은원이도 어서 짝을 찾아야 할 텐데. 누구 사귀는 사람은 없고?”

권 회장의 말에 은원이 묵묵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없습니다.”

수영이 이때다 싶어 얼른 끼어들었다.

“얘가 어려서부터 학교하고 집밖에 모르더니 커서도 그러네요. 그저 회사, 집, 회사, 집. 선이라도 준비해야 할까 봐요.”

은근히 정략혼 자리를 알아봐 달라는 압박의 눈빛을 쏘면서 살가운 말을 쏟아 냈다.

은원은 이훤보다 나이가 한 살 많았다.

“요새는 연애 결혼들도 잘하던데. 주변에 마음 줄 만한 아가씨가 없어?”

윤 관장이 은원에게 묻자 이번에도 수영이 대답을 가로챘다.

“있으면 제가 이러지도 않죠. 바빠서 당장 결혼은 힘들더라도 정혼자라도 있어야 할 텐데요. 아무래도 젊은 나이에 중책을 맡고 있다 보니 보는 눈들도 있고…… 호호호.”

은원이 자기에 관한 이야기가 길어지자 여전히 식사에만 열중한 채 무덤덤하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얘는, 매일 야근에 집에까지 일을 싸 들고 와서 하는 애가 알아서 할 시간이 어디 있다고.”

분위기를 띄우고자 연신 과장된 웃음과 말을 흘리던 수영이 눈치를 살피다가 은근슬쩍 덧붙였다.

“참, 어제 갤러리에 지우가 왔었잖아요. 참 싹싹하고 예쁜 거 같아요. 그렇죠, 어머니?”

유준의 표절 사건 이후 저를 보는 눈이 서늘해진 시어머님이지만 아들을 위해서도 그렇고, 저를 위해서도 그렇고, 모른 척하고 곰살맞게 굴어 본다.

“지우?”

윤 관장의 이마에 진한 주름이 맺혔다. 지우는 윤 관장이 딸처럼 아끼는 사람의 딸이었다.

윤 관장이 잠시 당황하는 때, 식탁 말미에서 픽- 하는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지우는 안 돼.”

주원이었다. 수영이 눈을 도르르 굴려 딸을 봤다.

“왜?”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주원이 작은 한숨은 내쉬곤 조곤조곤 설명해 주었다.

“우선 게네 집에서 인정해 줄 리도 없거니와, 이훤 오빠 와이프 되는 게 일생일대 꿈인 애를 어떻게 은원 오빠한테…….”

“너 말 좀 가려서 하지 못해?”

인상 쓴 이훤이 짜증을 내려 하자 이번에도 수영이 가운데서 차단했다.

“그래. 그게 언제 적 이야긴데.”

주원은 콧방귀가 나왔다. 지우가 권이훤을 차지하기 위해 어떤 빅 플랜을 짜고 있는지 듣는데도 다들 저럴 수 있을까?

“시끄럽다.”

듣다 못한 권 회장이 대화를 중단시켰다.

“당신이 나서서 좀 알아보지 그래.”

화살은 갑작스럽게 윤 관장에게로 향했다. 이번엔 윤 관장이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내가요? 뭘요?”

“할미잖아. 지우 어미 만나서 의사라도 넌지시 밝혀 봐. 나도 유 회장 만나면 한번 타진해 볼 테니까.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되기만 한다면야…….”

그가 유 회장과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흔치 않았다.

하나 이 혼사가 성사되기만 하면 이솔 그룹의 위상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됨은 물론이요, 그 집안 계열사들과 거래도 수월해지고 자기 아들인 권 사장의 그룹 내 기반도 튼튼해질 것이다.

수영의 표정이 단박에 밝아졌다. ‘역시 우리 아버님’이란 말이 절로 튀어나왔으나 경망스럽다 할까 봐 참았다.

그러나 반대로 윤 관장은 차게 식었다.

그녀는 몇 년 전, 이훤과 지우를 약혼시키는 게 어떤가 하고 남편인 권 회장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 내가 나서서 한번 추진해 볼까요?

지우가 이훤을 좋아하는 거야 워낙 오래된 일이고, 하도 유별나게 굴어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시도해 볼 만했다.

이훤이 서른만 넘기면 큰 고비는 없을 거라 했으니까 결혼은 그때쯤 시키더라도.

지금의 새아기가 상극 조합으로 이훤을 돕는다면, 지우는 상생 조합으로 이훤을 뒷받침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때는 그 집에서 마땅치 않아 할 거라며 한 귀로 흘렸던 양반이 어째서 은원이랑은 맺어 주자 하는 건지.

이제 윤 관장도 진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권 사장 때문인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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