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이훤이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좀 괜찮아지는 것 같더니 할머니를 보고는 또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한껏 위축된 듯한 저자세였다.
그때는 단지 불우한 환경 때문에 자신감이 없어서인가 싶었는데 지금은 왠지 선처럼 느껴진다. 그녀가 외부로부터 스스로 치는 금. 넘어갈 생각이 없으니 너도 넘어오지 말라고.
상처 잘 받는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그 외부에 자신도 끼어 있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떻게 허물지?
“할머니는 지병이 있으신 건가?”
“디스크가 있었는데 수술받고 괜찮아지셨어요. 그런데…….”
“……?”
“얼마 전 어느 건물 계단에서 크게 넘어지셨어요. 그 일로 저렇게 몸도 못 가누게 되신 거예요. 누군가 뒤에서 밀치고 갔다는데 CCTV도 없고 목격자도 없어서…… 경찰도 범인 찾는 걸 금세 포기하더라고요.”
설명을 듣곤 이훤이 미간을 좁히자 그녀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어 보였다.
“곧 다시 수술받으실 거예요. 그럼 지금보다는 훨씬 괜찮아지실 거예요.”
마치 당연히 그렇게 될 거라는 듯 씩씩하고 거침없는 말투였다. 수술과 치료 계획이 있는가 보았다.
“의사가 수술만 받으면 괜찮아지신다고 했어?”
그때, 간병인으로 보이는 한 중년 여인이 “잠시만요.” 하더니 그들 사이를 가르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보니 6인실 전체를 혼자 돌보는 듯하다.
이훤이 물었다.
“저분한테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해도 안 되는 거지?”
“네. 제가 여기 왔었다는 것 자체가 알려지면 안 돼요.”
“고모에게 원하는 액수를 주고 할머니의 수발을 맡는 건 어때. 내가 도와줄게.”
그녀가 웃었다.
“왜 웃어.”
“고모가 원하는 게 돈이란 걸 너무 쉽게 파악하셔서요.”
“뻔하지.”
할머니와 그녀로부터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와 오늘 상황을 지켜보니 그랬다.
“음,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가 이훤 씨와 정식으로 결혼했다는 걸 아는 순간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계략을 꾸밀 분들이에요, 고모와 고모부는. 아픈 할머니를 이용해 저를 진현당에 보낸 것처럼요.”
“적정선에서 만족하게 해 주면 되지.”
“원하는 적정선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클 수 있어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고요. 하니 지금은 잠시 그대로 두는 게 좋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시간을 가지고 생각하다 보면 방법이 있을 거예요.”
“그래. 그럼 언제든 필요하면 말해. 뭐든 해 줄 수 있는 건 다 도와줄 테니까.”
이훤이 그녀의 가녀린 어깨에 팔을 두르며 몸을 쓱쓱 쓸어 주었다.
상처를 잘 받는다는 건 다른 의미로 자존심이 센 것이라고도 했다.
보니 자신의 친척들로 인해 피해 주는 것이 싫은 듯한 얼굴인데 내 생각만 우기다간 자칫 더 굵은 선을 그을 수도 있다.
하니 실타래를 당기듯 천천히 해결하기로 한다.
* * *
진현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지도 벌써 1주일이 지났다.
교동 갤러리에서 진접 요양원에 들렀던 두 사람은 연희동 본가로 향했다. 주말을 본가에서 보내기로 한 첫 주였다.
사빛은 할머니도 보고 온 데다, 꿈에서 처음 왔을 때와 달리 위축과 긴장이 없어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날이 좀 좋지 못했다. 저녁이 되자 어둡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급격히 발생한 태풍이 먼바다에서 지나가는 중이라고 한다. 내륙이 사정권은 아니라 밤사이 비바람만 좀 있을 뿐 큰 피해는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도 이 정도이니, 태풍의 한가운데에 있는 바다는 지금 어떤 상태일까 걱정되었다.
본가는 규모가 상당하다.
우선 동네 자체가 무척 조용한 언덕이었는데, 주변의 대부분 집이 비슷했다. 길고 높은 벽과 크고 육중한 대문들. 섣부른 침입을 허용치 않는 견고한 요새 같았다.
영기가 운전석에서 내려 인터폰을 누르고 대화하는 사이, 뒷좌석에서 내린 사빛 부부가 앞에 와 서자 갈색의 대문이 철컥하고 열렸다.
곧 보안 요원이 다가와 고개를 숙여 보인 후 길을 안내하면서 휴대용 무선기로 “이훤 도련님 내외분 오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사빛이 꿈에서 왔을 때와 달라진 점은 내외분이 붙었다는 거다.
돌계단을 오르자 잘 다듬어진 소나무 정원이 넓게 펼쳐졌다.
바람이 휘잉- 하고 불었다. 어디선가 웅웅 음산한 소리도 들린다. 마치 마당의 소나무들이 우는 소리와도 같았다.
길을 따라 걷자니 본채 안에서 검은 투피스를 반듯하게 차려입은 30대 중반 여성이 잰걸음으로 나와 그들을 맞았다. 최 비서님이다.
그녀의 안내로 현관문으로 들어서니 마당과는 또 다른 위압감이 전신에 훅하고 끼쳤다.
보이는 모든 것에 당당한 위엄이 배어 있다. 곳곳에 자리한 고급 나무와 가죽과 패브릭, 도자들이 그러했다.
거기에 할아버님의 취미이신 분재와 동양란들, 할머님이 좋아하시는 꽃들이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할머님은 그들 부부보다 먼저 갤러리에서 돌아와 계셨다. 갤러리는 월요일만 휴관하지만, 할머님과 작은어머님은 토요일까지만 근무하고 일요일과 월요일을 쉬신다.
“꽃 사 왔니?”
현관 쪽으로 마중 나온 할머님이 최 비서가 안듯이 들고 있는 커다란 꽃다발을 보곤 반가워했다.
“뭘 번거롭게. 다음부턴 그냥 와도 돼.”
말은 그렇게 하지만 꽃을 바라보는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완연했다.
할머님이 꽃을 좋아하고, 그중에서 칼라와 리시안셔스를 특히 좋아한다는 것 또한 사빛은 꿈의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너무 예쁘구나. 최 비서, 화병에 꽂아서 저기 가져다 놔.”
할머님이 기뻐하시며 현관 앞 웰컴 가구인 코발트블루 색의 콘솔을 가리켰다.
얼마나 비싼 가구인지 사빛도 꿈에서 들어 알고 있다. 서민들 차 한 대 가격이었다. 그 위에 걸린 거울 역시 고급스러웠다.
“네, 관장님.”
최 비서가 가고, 할머님과 함께 거실 중앙의 소파로 향했다.
온화한 얼굴로 맞아 주신 할머님과 달리 할아버님은 소파 상석에 앉은 채 쏘아보듯 쳐다볼 뿐이었다.
그녀 남편의 차고 시린 눈빛은 친할아버지를 쏙 빼닮은 듯하다. 그러고 보니 그의 외할아버지도 눈빛이 만만치가 않다.
저분이 노련하고 날카롭다면 그분은 강렬하고 무직하다. 생각해 보니 그녀의 남편은 그 두 눈빛을 잘 버무려 놓은 듯하다. 딱 그랬다.
“저희 왔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인사드리자 할아버님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셨다.
“오냐.”
할아버지와 손자의 대화가 참 짧고 삭막했다.
할아버님이 앉으라는 듯 앞의 자리를 눈으로 가리켰고, 두 사람이 나란히 앉자 사용인이 따뜻한 차를 내왔다.
차를 마시는 동안도 할아버님은 별말씀이 없으셨다. 딱딱하기는 그녀의 남편 또한 마찬가지였다.
왠지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꿈에서 이 둘이 대치할 때는 정말 살벌했다.
그녀의 남편이 지금 좀 얌전하다고 해서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걸 사빛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번 꼭지가 돌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의 할아버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그의 할머니가 절절매는 데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그럴 때의 그를 보고 ‘미친 새끼’라고 했다. ‘미친 괴물 딱지가 들어앉은 놈’이라고도 했다.
언젠가 싸움이 격했던 날 밤.
― 뭘 듣고 있어, 가.
걱정되어 할아버님 서재 밖에 서 있던 그녀의 팔을 그가 거칠게 잡아끌었다.
그들은 그길로 진현당으로 향했고, 운전하는 내내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대로 명망 있는 집안의 자손인데다 그녀 같은 사람은 엄두도 안 나는 재산을 가진 그였다. 그러나 부모 빼고 뭐 하나 모자랄 것이 없어 보이는 이 사람의 결핍은 실로 상당했다.
산에 눈이 많이 쌓이면 결국 무너진다. 폭설에 휩싸인 위태로운 커다란 산. 그는 그래 보였다.
그의 복부에는 짙은 상흔이 하나 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열아홉 살의 그가 스스로 만든 상처라고 한다. 죽을 뻔했다고.
간혹 가만히 서서 먼 데 저무는 해를 바라보곤 하는 그의 큰 어깨를 보며 사빛은 생각했었다. 무언가 그를 짓누르는구나.
― 추워?
묵묵히 서 있던 그가 문득 그녀를 돌아보곤 물었다.
― 조금요. 괜찮아요.
그는 비록 옷을 벗어 주진 않았지만 몸을 돌려 집을 향해 걸었다.
생각해 보니 살갑게 대해 주진 않았지만 아주 배려심 없이 막 대하기만 한 건 아니었나 보다. 이런 기억도 한 줌 떠오르는 걸 보면.
지금은 또 달라서, 이젠 춥다고 하면 그가 옷을 벗어 줄 것만 같다. 사빛이 흐뭇해져서 웃었다.
그녀가 갑작스럽게 웃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해서 좀 더 큰 미소를 헤벌쭉 웃어 보이며 물었다.
“전 이만 주방에 가서 아주머니들과 식사 준비를 해도 될까요?”
그녀의 남편이 반대했다.
“사람 많은데 뭐 하러. 피곤할 텐데 잠깐 쉬든가.”
“전 괜찮아요. 일하는 분들과 인사도 좀 하고요.”
할머님이 기꺼워하시며 물었다.
“그럴래?”
“네.”
그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할머님이 온화하게 말씀하셨다.
“가자. 내가 소개해 줄게.”
“그럼.”
사빛도 일어나 할아버님께 고개를 숙여 보이곤 할머님을 따라 주방으로 향했다. 이미 방향을 알고 있었지만 처음 온 것처럼 몇 발자국 뒤에서 조용히 따랐다.
“이쪽으로.”
할머님을 따라 걷다가 2층 계단에서 내려오는 아영과 마주쳤다. 사빛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있었구나!’
아영과 관련된 일을 바꾼 적이 없으니 아영이 이곳에 있는 건 당연했다. 이젠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지 완전히 감이 잡혔다.
반가운 마음에 계속 바라봤지만 아영은 눈치를 살피며 머리를 조아리곤 종종거리며 가던 길을 갔다.
주방에 들어서니 두 명의 아주머니가 쉴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빛이 알기로 아영이 담당하는 2층만 빼고 모든 집안일이 교대 근무하는 세 명의 아주머니들 손에서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