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75)

35화

돌아보니 실내임에도 얼굴의 반을 가린 선글라스를 쓴 여인이 수영이 보고 있던 그림 앞에 와 선다.

간혹 백화점 같은 데서 스치듯이 지나치며 관리 차원의 인사나 했던 여자. 신양 운송 황성재 사장의 공식 내연녀인 배우 이태연이었다.

한참 조용히 선 채 그림을 보던 그녀가 천천히 선글라스를 내리고는 여전히 그림만 본다. 제 눈에도 쓸 만해 보인다는 건가?

“오셨어요. 오랜만에 뵙네요.”

어쨌든 이젠 재벌가 사모가 될지도 모르니 좀 더 친하게 지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수영이 먼저 알은척했다. 얼마 전에 황 사장의 본처가 사망했기에 그 집 안방이 비었다.

아직 일반인 오픈 전인 전시회인데 지금 여기 있다는 건 어머님의 VIP 초대장을 받았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한데 이태연이 얼굴도 돌리지 않고 무성의하게 대답한다.

“네.”

수영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정말 개나 소나 다 무시네. 제깟 게 뭐라고 내가 먼저 인사하는데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인가?

수영은 정말 기분이 나빴다.

시아버님이 어서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남편이 회장이 되어야 할 텐데, 은원은 부회장이 되고. 그럼 아무도 나를 이리 대우하지 못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속이 뒤틀린 채로 이태연의 옆얼굴을 가만 노려보자 권이훤의 부적 신부가 떠오른다.

‘정말 닮았네. 왜 못 알아봤지.’

흐르는 분위기만 빼고 딸이라고 해도 이상해 보이지 않을 만큼 판박이였다. 이태연이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차고 단단한 느낌이라면, 그 애는 좀 부들부들 유약한 느낌.

우선 둘이 무슨 관계인지부터 알아봐야겠다.

남편과 아들 행보에 가장 큰 걸림돌은 뭐니 뭐니 해도 권이훤이었다. 그러니 그 주변을 샅샅이 조사하고 파악하는 건 수영의 임무와도 같은 거였다.

만약 이태연하고 그 애가 관계가 있고 어떤 나쁜 의도를 가지고 우리 집안에 접근한 거라면?

저 여자는 그러고도 남을 여자였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절대로 신양 운송 본처처럼 호락호락하게 놀아나지 않을 것이다.

해서 철저하게 알아보리라 결심하는데 입구에 번잡스러움이 일었다. 돌아보니 방송국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저것도 내가 다 공들여 준비한 일인데.’

죽 쒀서 개 줬지만 어차피 내 것이 될 갤러리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다독이며 부드러운 미소로 유지우를 필두로 한 방송국 사람들을 맞이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지우 아니니.”

“안녕하셨어요.”

“직접 나왔네?”

“네, 어제 보내 주신 자료에서 흥미로운 작가님을 발견해서요.”

“흥미?”

“고 송보 작가요. 이 작품이네요. 실제로 보니 더 좋네요. 이분 작품 위주로 찍으면 되겠어요.”

지우가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어느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을 묘사한 작품 <바람과 놋쇠>를 잠시 감상했다.

‘유작이라 이야기가 될 것 같은가 보네.’

혹여 인터뷰라도 할 수 있으니 수영은 얼른 머리와 옷매무새를 고쳐 잡았다.

‘그런데 이태연은 어디 갔지?’

문득 생각나 고개를 두리번거리니 이태연은 어느새 저만치 가고 있었다.

등을 보인 채 내빼는 모습으로 보아 방송국 사람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은가 보았다. 선글라스까지 다시 뒤집어쓰고 빠른 걸음으로 행사장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속으로 입을 삐죽거리고는 다시 지우를 살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언제 집에 한번 놀러 와. 우리 권 사장님이랑 권 상무랑 다 같이 식사 한번 하자.”

“예에…….”

그런데 말꼬리를 늘이며 대답하는 지우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흘렀다.

뭘 보나 눈길을 따라가 보니 시어머님인 윤여란 관장이 직원들과 함께 전시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입구 앞에는 권이훤이 서 있고.

수영의 표정이 썩은 밤을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이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볼까지 발갛게 물들이는 지우. 그 모습을 바라보는 수영의 심사가 한껏 뒤틀렸다.

집안으로 보나 인물로 보나 자기 아들과 맺어 주면 딱 좋겠는데 이 애는 어렸을 때부터 오로지 권이훤 해바라기였다. 은원이는 당최 여자에게 관심이 없고.

어찌 보면 사랑이니 뭐니 엉뚱한 짓거리 안 해서 좋긴 한데, 지우는 동생 친구니까 함께 어울리며 알아서 좀 친해지면 얼마나 좋아.

이런 것까지 수저 들고 따라다녀야 하니 수영은 자신의 인생이 참으로 바쁘고 고달픈 것 같았다.

속으로 한숨을 폭 내쉬는 때, 유지우가 쪼르르 권이훤 쪽으로 향했다.

“어머, 얘!”

자기와 이야기하는 도중 인사도 없이 가 버리는 지우를 붙잡아 보려 했지만 어찌나 발을 빠르게 놀리는지 그럴 수 없었다.

* * *

이훤과 함께 갤러리에 도착했던 사빛은 먼저 관장실에 올라가 할머님을 뵈었고, 함께 차를 마신 후 영기와 함께 사무실 직원을 따라갔다.

아버지의 그림을 이번 전시회에 참여시키는 건 화상 통화와 메일을 통해 관련 이야기와 서류를 주고받았다.

지금 가는 건 아버지가 IS 갤러리 소속 작가가 되는 절차를 밟기 위함이었다. 그럼 작품들이 임시 수장고가 아닌 정식 수장고로 옮겨져 관리된다고 한다.

이번 전시회에서도 그렇고, 당분간 판매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건 나중에 할머니와 함께 결정할 문제였다.

사빛이 좀 늦어진 일을 마치고 나오니 이훤은 전시회 오픈 시간이 되어 할머님과 함께 먼저 행사장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해서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그곳으로 가니 로비에서 그가 기다리고 있다가 맞아 주었다.

근사한 정장에 꽃까지 달고 서서 자신을 기다리는 남자를 보니 결혼식 때의 그가 떠오르며 새삼스럽게 또 가슴이 뛰었다.

결혼식 이후 진짜 부부처럼 친해지다 보니 더욱 그러한 것 같다. 잘나도 너무 잘난 남자. 오늘도 유지우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할머님과 그를 포함한 관계자들이 테이프 절단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할머님의 인사말과 몇몇 식순이 끝나자 그와 함께 전시 작품들을 관람하고 길을 나섰다.

이번엔 그녀의 할머니를 뵈러 가기 위해서였다.

진현당에서 이곳에 오는 길, 남양주로 향하는 표지판을 본 사빛이 눈을 떼지 못하고 뒤돌아보기까지 하자 이훤이 물었다.

― 왜.

― 진접이 여기서 먼가요?

― 진접?

그들의 대화에 운전석의 영기가 끼어들었다.

― 한 40분 걸립니다.

― 진접은 왜.

처음 사진을 올린 이후 좀 더 많은 커뮤니티에 할머니 계신 곳 사진을 올려 본 결과 경기도 진접에 있는 한 요양원일 거라는 정보를 얻었다.

하여 해당 요양원 홈페이지를 찾아보았고, 사진과 똑같은 부분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아니…….

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다시 멀어져 가는 표지판을 돌아보았다.

― 그냥 말해. 답답해.

― 할머니가 진접에 있는 요양원에 계시거든요.

― 그래? 지금은 시간이 안 되고 개회식만 참석했다가 같이 가 보자.

이훤의 말에 사빛이 환한 미소로 그를 돌아보았다.

― 정말요?

― 응.

그리하여 갤러리에서의 일을 마친 후 찾아와 보니 할머니가 정말 계셨다. 여럿이 함께 쓰는 방 중 한 침대에 누워 잠들어 계셨다.

다행히 창가 자리였다. 창으로 세상 풍경을 볼 수 있으니 어떤 면에서는 고모네 골방보다 나았다.

평생 시골에 살았던 할머니는 서울의 단칸방이든 고모네 골방이든 몹시 답답해했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작은 창을 통해 회색빛 바깥을 가만히 보실 때마다 사시사철 자연을 한눈에 볼 수 있었던 시골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긴 주위에 산도 있고 하늘도 크게 보였다.

사빛은 코끝이 찡해 왔지만 울지 않았다. 울면 할머니를 그만큼 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왜 들어가서 뵙지 않아?”

사빛이 병실 문 앞에 서서 조그마한 유리를 통해서만 할머니를 보고 있자 이훤이 물었다.

“그러지 않기로 고모와 약속했어요.”

고모네에게 할머니는 부모가 아니라 돈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다. 참담함을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세상 사람들이 전부 내 맘 같지 않음을 그녀도 알고 있다.

그리고 고모의 말처럼 할머니의 1차 보호자는 고모였다.

불합리해 보여도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것 중 하나가 ‘법’이었다. 거스르려면 범법자가 되거나 투사가 되어야 했다.

“왜 그런 약속을 했냐고 물어도 말 안 해 줄 얼굴이네?”

그의 말에 사빛이 돌아보며 웃었다.

“맞아요. 저에 대해 잘 아시네요.”

“뭐든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보면 보이지. 조금씩.”

“관심 가져 주셔서 고맙네요.”

그녀의 말에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그런 말을 해. 우린 부부야.”

부부니까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듯한 말투. 저번에도 그러더니 또 그런다. 떠난다면서.

사빛이 그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가 생각하는 부부란 뭘까.

본인이 꾸었다는 꿈 탓인지 그가 좀 잘해 준다고 해서 사빛이 제 위치를 망각한 건 아니었다.

사빛은 결혼 전 그와 나눈 이야기와 계약서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1년간에서 무기한으로 바뀐 것뿐이지 그녀가 계약 신부인 것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고용 관계에도 정년이 보장된 정직원이 있고, 단기 계약직이 있고, 무기 계약직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 바로 그 무기 계약직 사원과 자신의 처지가 비슷했다.

어느 일방이라도 마음이 돌아서면 미련 없이 안녕을 고하는 거. 그래도 법적으로 별문제가 없는 거.

그걸 알지만 괜찮아서, 상관없어서 사인한 것뿐이었다.

지금은 단지 1년 후에 받기로 한 위자료를 못 받게 되었으니 어떻게 고모에게 줄 돈을 마련할 것인가만 고민이었다. 사빛이 옅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네, 잊지 않을게요.”

사빛은 자신이 처음 진현당에 왔을 때 역시 머릿속에 떠올렸다.

자신이 어떤 처지로 결혼했든 아내의 책임을 다할 생각이었듯이, 이 남자 또한 꿈 때문이든 뭐든 남편의 책임을 다하고 싶은가 보다 생각하면 별스러울 것도 없었다.

1년 후 떨어져 살다가 가끔 보게 되더라도 사이가 나쁜 것보다는 좋은 게 좋고.

“다른 좋은 곳으로 모실까? 안 된다면 여기 1인실이 있는지 알아보든가.”

“둘 다 안 돼요.”

“그것도 고모와의 약속이야?”

“비슷해요.”

“그렇군. 뭔가 해 드리고 싶은데.”

이훤이 아쉬운 듯 읊조리며 할머니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 모습을 가만 보다가 사빛이 말했다.

“마음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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