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둘의 관계가 심히 의심스럽다. 양 실장의 몸가짐이 그리 도덕적이지 않음은 윤 관장도 들어 알고 있었다.
“우선은 전시회가 가장 중요하니까 차질 없도록 박 실장이 전적으로 맡아서 진행해 주길 바라.”
“제가 전적으로요?”
“어제 들어와 정신없는 거 알아. 그래도 비상사태니까 정신을 차려 보자고. 이유준 빼고, 빈자리를 어떻게 채울지부터 생각해 봐.”
박 실장은 갤러리 소속 작가의 전시 건으로 해외 장기 출장을 다녀왔다.
“이유준은 어떻게 할까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예. 그럼 오늘 중으로 몇 가지 대안을 준비해서 보고 올리겠습니다. 안 그래도 아끼던 후배의 유작들이 갤러리에 들어와 있어 마음이 쓰였는데 어쩌면 좋은 작품을 세상에 알릴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끼는 후배? 누구?”
“섬주호라고, 저랑 함께 학교 다닌 동문입니다. 이 친구가 그림을 완전히 접은 줄 알았는데 죽기 전에 다시 붓을 들었나 봅니다. 며칠 전 권이훤 이사님이 개인 소장품이라고 수장고에 임시 보관을 부탁하셨다는데요. 어찌나 반갑던지.”
“이훤이?”
생각지 못한 이름에 윤 관장의 어둡던 눈이 반짝 커졌다.
“예. 모르시는 일입니까? 송보라는 작가명이긴 한데 특유의 화풍과 소재로 보아 그의 그림이 확실합니다. 그 가명도 언젠가 진짜 그림을 그리게 되면 사용할 거라고 말하곤 했었죠.”
“그래? 잠깐, 섬 씨라면…….”
이훤의 계약 신부로 들인 애가 섬가였다. 갑자기 그림을 맡겼다는 것도 그렇고, 혹시 그 아이하고 관련이 있나?
박 실장이 나가자 윤 관장은 이번엔 양 실장을 호출했다.
“신진 작가전에서 손 떼. 나머진 박 실장이 맡아서 할 거야.”
“예? 아니 왜…… 한창 손이 많이 갈 때인데.”
“박 실장에게 일임하고 양 실장은 이유준 작가 표절 건을 해결해.”
“제가요?”
“이유준이를 양 실장이 추천하고 적극적으로 밀어줬지 않아? 책임을 져야지. IS가 그동안 표절 작가 후원했다는 오명을 쓰게 되면 어째? 헤스티아 쪽도 연락해 보고 이유준도 만나 봐.”
표정이 확고했다. 저럴 때의 시어머니는 고집스러운 면이 있어서 설득이 쉽지 않다.
“예.”
수영은 어쩔 수 없이 눈을 내리깔고 고분고분 대답했다.
한숨이 나왔지만 어쩌면 다른 사람이 아닌 제가 해결할 수 있어서 다행인지도 몰랐다. 일이 커지지 않게 조용히 마무리 지어야겠다.
집무실로 돌아와 부산하게 채비한 수영이 차 키를 들고 유준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 * *
한바탕 진한 말싸움을 하고 낡은 침대 양 끝에 걸터앉은 수영과 유준.
유준이 헤스티아의 그림을 표절한 것이 맞았다.
씩씩거리던 호흡이 잦아들자 수영이 말했다. 언제까지 탓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사실을 알았으니 빠르게 뒤처리해야 했다.
“어쨌든 이번 전시는 포기해. 당분간 조용히 지내고.”
“실장님. 제가 이번 전시회 얼마나 기대했는지 아시잖아요. 욕심이 생겨서 그랬어요. 제가 그린 건 아니라고만 하시니까. 잘못했어요. 그러니 다른 그림, 그때 아니라고 하셨던 그거라도 걸 수 있게 해 주세요, 네?”
“내 눈에 마땅찮은 게 그들 눈에 찰까.”
“그럼 남은 두 작품이라도…….”
질척하게 매달리는 유준의 말을 수영이 단호하게 끊어 냈다.
“관장뿐 아니라 고문 위원들까지 다 있는 자리에서 드러났어. 조용히 넘어갈 수 있을 때 말 들어. 문제 커지면 네가 좋을 게 뭐야? 표절 작가로 이 바닥에 소문나면 화가 생명 끝이야. 학교 일도 못 할 테고.”
“하지만…….”
“헤스티아에게 연락해서 ‘본 적 없는데 비슷하다, 그쪽에서 먼저 세상에 보였으니 내 건 파기하겠다’라고 말해. 관장이랑 위원들에게도 그렇게 이야기할게. 이렇게 무마시키자고.”
“……그럼 저 유학 보내 줘요.”
“뭐?”
“조용히 있으라는 거잖아요. 집 옮겨 주겠다던 돈으로 유학 보내 주세요. 여긴 풀이 너무 작아. 좀 더 배우면서 큰물에서 놀래.”
고개를 숙이고 읊조리듯 말하는 유준의 축 처진 어깨를 보며 수영의 눈에 측은지심이 차올랐다.
“불쌍해라. 얼마나 간절했으면.”
“실장님…….”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유준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이리 와.”
수영이 그를 향해 두 팔을 벌리자 유준이 다가와 품에 안겼다.
유준은 한동안 향이 짙은 가슴에 서러움의 눈물 콧물을 쏟아 냈고, 수영이 아이 달래듯 그의 머리를 가만가만 쓸다가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유학 가.”
“죄송해요.”
“괜찮아. 학비도 주고 매달 생활비도 줄게. 넌 그림만 열심히 해. 내가 가끔 가서 볼게. 우리 그러자.”
* * *
사빛의 아버지 유작 세 점이 IS 갤러리 신진 작가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것도 행사장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여.
그림 아래에는 ‘송보’라는 작가명이 작가 친필로 쓰여 있었다. 밑에 붙은 아크릴 패널 역시 작품 제목과 함께 송보 작가의 작품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전시회가 열리는 날, 등기 이사이긴 해도 갤러리 일에 일절 관심이 없었던 이훤이 아버님 그림도 있고 하여 개회식 참석차 사빛과 함께 교동으로 향했다.
“무슨 생각해?”
그들은 영기가 운전하는 세단의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고귀함과 비열함에 대해 생각해요.”
“셰익스피어 말이야?”
“네. 고귀함에 비열함이 더해지면 고귀함이 얼마나 훼손될까 하는 그런…….”
창밖으로 흐르는 논과 밭에 시선을 둔 채 웅얼거리는 그녀의 작은 뒤통수를 보며 이훤이 웃었다.
“나쁜 짓을 했군.”
“네. 어쩌다 보니.”
그녀는 여전히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괜찮아, 남에게 피해만 끼치지 않았으면. 비열이 아니라 슬기로운 꾀였다고 생각해.”
그의 말에 드디어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제가 한 일을 다 아시나 봐요.”
그는 할머니에게서 아버님 작품이 어느 표절 작가의 자리를 대신한 거란 말을 들었다. 그것이 어느 한국 대학교 학생의 제보 덕이었다는 말 역시.
이훤이 그의 할머니에게 물었다.
― 그 표절 작가 이름이 이유준인가요?
할머니가 깜짝 놀라며 되물으셨다.
― 네가 그걸 어찌 알아?
아마 우연히 두 작품을 다 보게 된 사빛이 제보한 듯하다. 영기가 전해 주었던 새벽의 통화 내용과 일맥상통했다.
어디서부터 계획했고 얼마큼의 기대가 있었는지 모르나 괜찮다. 세상에 나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 정도쯤이야.
사실 살아가는 데 멍청한 것보다 똘똘한 게 낫다. 선악과는 다른 개념이다.
그보다 그는 다른 것이 궁금했다.
“하나만 물을게.”
“네.”
“혹시 현재 사귀는 남자가 있나?”
“네?”
“진현당에 오기 전의 너를 나는 모르니까.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말해.”
그녀가 웃었다.
“아뇨. 사느라 바빠서 만들어 보질 못했네요.”
“그래서, 없어?”
“사귀는 사람은 없고 남편은 있네요, 여기.”
그녀가 농담 같은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없나 보았다.
* * *
유준을 대신한 작가의 작품 앞에 선 수영.
저만치에선 이번 전시의 책임자로서 박상진 실장이 VIP들 접대하느라 바쁘다.
평상시 수더분하던 머리에 포마드 기름을 바르고 양복 가슴에 생화로 만든 코르사주까지 달았다.
조금 있으면 테이프 커팅 등 오픈 행사가 있는데 수영은 끼지 못했다. 유준의 일로 자숙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바로 며칠 전까지 자신이 모두 만들어 온 일인데 정작 빛은 박 실장이 보고 있음에 수영은 분이 나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도 유준의 일은 약간의 내부 잡음 외에 별일 없이 지나갔다. 헤스티아도 파기된 유준의 그림을 동영상으로 받은 이후 조용했고.
나대면 돈이라도 줘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멍청한 건지 순진한 건지 그대로 끝이었다.
괜한 구설에 휘말리는 것보다 이렇게 조용히 지나가는 게 나았다. 수영 본인은 몰랐던 일이라 하나 자칫 자질 문제가 거론될 수 있음이었다.
그러다 후원 작가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까지 나면? 어휴, 그건 정말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상한 자존심보다는 현 위치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관장이 되기 위해 그간 들인 정성과 노력을 헛되이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머리로는 받아들이는데 가슴이 받아들이질 못했다.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건 이 그림들이다. 박 실장의 후배였다는 고 송보 작가의 그림이 너무나도 훌륭했다.
깊이 있는 재능에 더해진 인간적인 고뇌. 죽기 직전에 그린 거라더니 삶에 대한 초탈 비슷한 것도 느껴졌다.
저 바람과 놋쇠 느낌 좀 보라지. 아무나 따라 할 수 없는 힘이 느껴진다.
비슷한 나이에 그린 것인데 유준의 그림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걸 소개한 박 실장이나 바로 채택하는 어머님이나 보는 눈이 높은 건 인정해야겠다.
박 실장이야 원래 예술인이라 그렇다 쳐도, 어머님은 순전히 노력과 애정으로 지금의 명성을 얻으셨다.
1970년대 후반.
남편의 외도에 마음 둘 곳이 없어 교동 뒷골목에 낡은 집을 한 채 사서 한 점, 두 점 수집한 작품을 전시하는 것으로 시작한 갤러리.
첫 간판은 <이솔 화랑>이었다.
따뜻한 차와 난로가 있는 이곳에 예술가들이 하나둘 모였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정을 나누며 예술이란 것을 배우는 것으로 남편의 두 집 살림을 견딘 것 같다.
그 인연으로 이제는 거장이나 스타가 된 작가 다수와 협력 관계에 있고, 한국의 손꼽히는 컬렉터라는 칭송에 걸맞은 가치 있는 200여 점의 컬렉션까지.
거기에 무명의 실력 있는 작가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일을 사명처럼 여기고 꾸준히 후원함으로써 규모는 작지만 다른 갤러리들의 모범이 되고 있던 차였다.
그 오랜 세월 노력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추락할 뻔했으니 지금 저리 상심하여 자신을 박대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씁쓸한 얼굴로 송보의 그림을 보고 있는데, 날카로운 힐이 바닥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진한 플로랄 부케 향이 코끝에 풍겨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