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그가 그녀를 처음 만날 날 밤 꾼 꿈에 대해 알려 주었다.
둘이 사랑을 나눴고, 그 와중에 그녀가 물거품처럼 부서져 버렸다는 짧은 내용이었다.
“완전히 부서져서 흔적도 남지 않아.”
사빛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별다른 이유 없이요? 앞에 이야기가 있다거나.”
자신의 꿈처럼 말이다.
“응, 다른 이유 없이.”
“…….”
“그래서 사실 너랑 첫날밤이 좀 두려웠는데 아무 일 없더라고. 내가 걱정이 많아서 그런가 보다 하긴 했는데, 이상하게 계속 찜찜해. 그래서 지키는 거야. 나 나름대로. 이런 내가…… 이상하지?”
묻는 목소리가 쓸쓸해 보였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라 무표정에 가려져 있지만 왠지 서글퍼 보였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짙은 눈이 더욱 진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침의 햇살을 받은 머리카락은 은은하게 반짝이는데 눈만은 깊게 침잠해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마주하다가 담백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이렇게 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가 불안해 보여서.
사실 이상하다기보다 신기했다. 같은 날 같은 결말의 꿈을 꾸었는데 알맹이가 달랐다.
그녀의 꿈은 기승전결의 세부적인 내용 하나하나까지 꼼꼼했는데 그의 꿈은 단순하고 상징적이었다.
어찌 됐든 그녀가 잘못된다는 건 같았다. 사빛의 눈빛이 고요하게 일렁였다.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요.”
그러면서 웃었다. 눈동자는 약간 흔들렸을지 몰라도 목소리만큼은 단호했다.
“정말?”
“네. 잘 지켜 주세요.”
“그래도 돼?”
그녀가 대답 대신 또다시 길게 미소 지었다.
싫을 게 무언가. 이렇게 듬직한 사람이 그저 선의로 지켜 주겠다는데.
적도 모르고 길도 모르는 외로운 싸움이었다. 누군가 뒤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 큰 힘이 되었다.
이건 꿈에서 낚시하는 그의 뒤에서, 그리고 바위에 누워 있는 그의 아래에서 느꼈던 든든함과 사뭇 달랐다.
중세 시대 유럽 배경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았던 기사가 떠올랐다. 국내 사극에서 보았던 호위 무사도 떠올랐다. 그런 비슷한 느낌이었다.
“영기가 의처증 아니냐고 하던데.”
그가 잘생긴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하는 말에 그녀가 픽 하고 웃었다. 웃으라고 한 말일 터였다.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건데요. 그리고 그 이유, 전 충분히 이해가 가요. 나쁜 꿈을 꾸면 불안하죠.”
정말 이해 간다. 자신도 그날의 꿈 이후 많이 힘들었었다.
사빛이 그만 신경 쓰라고 그의 팔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러나 자신의 꿈에 대해서 말하는 건 삼가기로 했다.
그녀가 잘못된다는 그 단순한 내용만으로 저만큼 불안해하는 사람에게 걱정을 얹어 주기 싫었다.
사실, 들어 봐야 그녀가 미치고 바다에 빠진다는 이야기뿐 딱히 해 줄 말도 없었다. 그건 자칫 그의 어머니에 대한 아픈 기억과 맞물릴 수 있다.
언젠가 일의 윤곽이 드러나면, 그러니까 실체를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그때 조심스럽게 말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마음속 오랜 상처 때문에 그러한 꿈을 꾼 것 같다. 꿈은 보통 허상이고 자신의 잠재의식을 투영한 거라니까.
꿈에 대한 그 기본적인 생각에 사빛도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원형이 경계를 넘나들 때 그것이 꼭 정신 영역뿐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한 주변과도 통한다는 어느 유명한 설에도 충분히 공감한다.
그녀의 꿈이 바로 그러하니까.
사빛이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너른 가슴에 뺨을 묻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내가 잘못되는 건 당신 때문이 아니야. 내가 그걸 밝혀 줄게.’
* * *
IS 갤러리 본관 3층 회의실.
윤여란 관장을 비롯하여 일곱 명의 고문 위원, 그리고 박상진 예술 실장과 양수영 기획실장이 회의를 위해 하나둘 모였다.
이번 주말에 전시가 시작될 신진 작가전 작품을 최종 점검하는 자리였다.
모든 작품은 이미 갤러리로 이동해 있고, 현재 진행 중인 전시가 끝나는 대로 배치 작업이 이루어질 것이다.
어느 작품이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어느 작품이 가장 안 좋은 자리에 위치하게 될지도 정해지는 자리였다.
사회를 맡은 직원이 참여 작가를 한 명씩 호명하면 대기하고 있던 다른 직원들이 그 작가의 작품들을 가지고 들어오는 식이었는데 별문제는 없었다.
다만 회화에 참여한 화가 중 한 명인 이유준 작가의 유화 작품 <물거품> 앞에 선 박상진 실장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멈춰 선 채 내내 뚫어지게 바라만 보는 것이다.
이를 본 윤 관장이 물었다.
“왜 그래?”
해당 작품은 바닷물이 넘실대며 일으키는 흰 포말을 그린 것인데, 그 모양이 커다란 소용돌이와도 같았다.
“이건 전시가 어렵겠는데요.”
심각하고 나직한 박 실장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왜? 무슨 일인데.”
윤 관장이 재차 묻자 박 실장이 그제야 그림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잠시 중단하고 이걸 좀 보셔야겠습니다. 조금 전에 제보가 들어와서요.”
박 실장은 단상으로 가 직원에게 자신의 휴대전화를 건넸다.
박 실장이 보여 주는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란 직원이 얼른 그것을 노트북에 연결해 대형 화면에 띄웠다.
그러자 회의실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놀랐다.
“저건!”
바로 방금 그들이 살피고 있던 이유준 작가의 그림과 너무나도 흡사한 그림의 사진이었다.
분명 파도가 칠 때 이는 흰 포말을 형상화하고 있는데 터치는 다르나 색감은 물론 큰 유선으로 돌면서 휘몰아치는 긴장감까지 비슷했다.
누가 봐도 같은 내용을 그렸으나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이었다.
회의실에 싸한 적막이 찾아왔다.
건물 비상계단으로 나와 유준에게 전화를 거는 수영의 손이 달달 떨렸다. 두꺼운 화장 너머의 안색도 파리했다.
[여보세요.]
몇 번의 신호 후 유준이 전화를 받았다.
“너, 표절했어?”
다짜고짜 묻는 말에 수화기 너머 유준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런 후 느릿하게 되묻는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헤스티아라는 인도 여자가 갤러리로 연락했어. 자기 그림을 네가 표절해서 전시하려고 하니 막아 달라고. 그 여자가 보낸 그림 사진 보니까 너 이번에 그린 ‘물거품’하고 거의 똑같아.”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유준이 잠시 말이 없는 동안 차분히 숨을 골랐던 수영은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도 설마설마했다. 그런데 또 아무 대꾸가 없는 것을 보니 맞나 보았다.
눈앞이 아득해진 수영이 소리는 낮췄지만 팩하니 쏘아붙였다.
“너 미쳤어?”
관장 자리가 넘어오기 직전인 중차대한 시기였다. 그런데 유준은 수영의 전폭적인 지지로 이곳까지 온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 작가가 표절이라니. 그걸 버젓이 갤러리 이름을 내건 전시회에 출품하려 했다니.
[한번 보내 봐요. 내가 보게.]
여전히 느린 말투였다. 놀라지도 않는다.
“하!”
수영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그래도 맞는다고 완전하게 인정한 건 아니니 혹시나 하여 조금 전 박 실장이 알려 준 헤스티아의 SNS 계정 주소를 전달했다.
반대로 헤스티아란 여자가 유준의 작품을 따라 한 걸 수도 있으니까. 그래 놓고 장난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 그런 걸 거야. 이런 억지 상상까지 해 가며 수영은 어떻게든 유준을 믿고 싶었다.
그래야 자신에게 아무 일이 없을 테니까.
“거기 ‘물꽃’이라는 작품 봐 봐. 정말 비슷해. 네가 따라 한 거 아니지? 그 여자가 네 걸 본 거지? 잘 생각해 봐, 어디 외부로 유출한 적이 있는지.”
유준은 우선 보고 연락한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하여 자기 방으로 돌아온 수영은 엄지손톱을 입에 물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며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했다.
한편, 자신의 집무실 책상에 홀로 무겁게 앉아 있는 윤 관장.
입을 굳게 다물고 심각하게 있던 그녀가 인터폰으로 박상진 예술 실장을 호출했다.
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함께 박 실장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윤 관장이 소파 테이블로 향하며 와서 앉으라 손짓했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어지럼증에 휘청거리니, 박 실장이 얼른 다가와 부축해 주었다.
“괜찮으세요?”
“응.”
윤 관장이 괜찮다는 듯 다시 앉으라 손짓하고 자신도 상석에 몸을 앉혔다.
“자세히 좀 이야기해 봐.”
아까 다 함께 있는 곳에서 짧은 설명을 듣긴 했으나 모두 해산시키고 잠시 생각하던 중이었다. 이제 결론을 내려야 했다. 전시회가 코앞이니.
“위원 회의가 열리기 바로 직전에 갤러리로 전화가 왔었습니다.”
처음엔 관장을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마땅한 용건을 밝히지 못하자 전화는 박 실장에게 연결되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윤 관장이 이마에 주름을 만들었다.
“양 실장이 관련이 있다?”
이 이야기는 아까 회의에서 듣지 못했다. 아마 양 실장도 참석하고 있어 박 실장이 제외하고 이야기한 듯하다.
“그게 무슨 뜻이지?”
“정확히는 ‘믿음직스럽지 못해 관장님이나 저에게 말해야 한다’라고 했답니다. 한국 대학교 학생이라고 밝힌 제보자가.”
“그러니까 이유준이 강의 나가고 있는 학교 학생이 우연히 이유준 그림을 봤는데 인터넷으로 보았던 헤스티아의 작품과 유사하여 헤스티아에게 제보했다? 여기 출품될 거니까 알아보라고. 이 말이지?”
“예, 그렇게 말했습니다.”
“흠…….”
윤 관장은 얼마 전 이번 전시회 홍보물을 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팸플릿 사진에 유독 훤칠한 작가가 많은 남녀 작가 한가운데에 위치하거나, 대형 배너 광고에도 마치 대표 모델인 양 큼지막하게 앞으로 나와 있었다.
윤 관장이 왜 이렇게 한 것이냐 묻자 ‘미남이어서’라며 양 실장이 지시했다는데 거기까지 관여하진 않아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었다.
그 작가가 바로 이유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