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75)

32화

우연히 보게 되어 제보하지만, 제가 직접 나설 입장은 못 되니 직접 확인해 보셨으면 합니다.

해당 그림은 이번 주말 대한민국 서울 교동에 있는 IS 갤러리에 이유준 화가의 작품으로 전시될 예정입니다.

말씀드린 한국 대학교 강사이죠.

IS 갤러리 양수영 기획실장이 담당자이긴 하지만 이 일에서 믿음직하지 못한 면이 있으니 꼭 윤여란 관장님과 이야기하십시오. 도와주실 겁니다.

만약 연락이 닿지 않으면 기획실장님 말고 예술 실장님이 따로 계신 거로 아는데 차라리 그분을 찾으십시오.

사정상 길게 통화하기가 어렵습니다. 잘 해결되길 빌겠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작은어머님과 이유준 강사의 부적절한 관계는 강사님이 작은어머님께 도와 달라 청하고 외면받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어차피 화가 생명 끝나는 마당이라 이판사판 공사판이라고 생각한 강사님이 둘의 관계를 퍼트리겠다며 물고 늘어진 것이다.

그룹 차원에서 나서 무마시키긴 했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헤스티아가 작은어머님과 먼저 이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일이 어떻게 흐를지 사빛은 예측되지 않았다.

해서 꼭 할머님에게 연락을 취하라 권한 것이다.

이제 사빛은 이 일에 대해 할 만치 했다. 공을 던졌으니 어떻게 되어 가는지 지켜보면 될 터였다. 파동이 이는지 아닌지.

* * *

이훤은 다시 잠들지 않았다.

사빛이 현관문을 나서는 소리가 들리자 휴대폰을 들어 영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이사님.]

어제 술도 좀 했겠다, 자다 깬 영기는 목이 심하게 잠겨 있었다.

“일어나. 집사람 안채 마당에 있으니까 텃밭 과실수 쪽에서 조용히 지켜. 무슨 일 없는지.”

영기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정신 차리고 튀어 나가.”

이훤의 빠르고 딱딱한 명령에 영기가 “예, 알겠습니다.”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커튼 사이 창 너머로 보이는 사빛은 잠시 강아지 앞에 앉아 있다가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핀 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쪽은 안채의 구석 중의 구석. 막히고 좁은 곳이라 나무 몇 그루만 있을 뿐 어지간해선 들어갈 일이 없는 곳이었다. 자신을 피해 들어간 것이 확실해 보였다. 왜지?

손에 든 휴대폰으로 보아 누군가와 통화하려는 목적인 것 같은데, 이런 시간에 누구와 비밀리에 통화하려는 건지 궁금했다. 혹시 여기 오기 전 남자라도 있었던 걸까.

남자가 있었다 한들 그녀 잘못은 아니었다. 그녀는 계약 신부로 이곳에 왔다. 그러니 그녀가 그들의 혼인 관계를 계속 유지할 생각이 있을 때나 정리하면 되는 것이다. 아니면 나와 정리하고 그에게 가거나.

이야기하지 않은 건 좀 서운하나 처지가 곤란한 지경인 것 같아 아주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그가 물은 적도 없었고.

이성적으론 알겠는데, 기분은 가라앉았다. 만약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생각으로.

영기를 깨운 건 사빛을 감시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런 거라면 제가 따라 나가면 될 일이었다.

단지 이참에 앞으로 그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려 주고 싶었다.

영기의 할 일은 사빛이 이훤의 시야에 없을 때 그 대신 그녀를 지키는 것. 이런 게 싫다면 굳이 함께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믿음직하긴 하나 전문가를 고용하는 편이 일은 더 확실할 테니까.

잠이 다 깨 버린 이훤은 그만 일어나기로 하고 대충 씻은 후 주방으로 나섰다. 물을 마시고 커피를 내리는데 영기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모님, 휴대폰 통화 마치고 지금 겨울이 집 앞에 계십니다.]

“무슨 통화였는데?”

[그게…….]

“왜.”

[영어로 통화하셔서 무슨 내용인지는 잘…… 그런데 교동 서울 대한민국이란 말은 확실히 들었습니다.]

“교동? 갤러리?”

[아, 예. 그 말도 들은 것 같습니다. 한국인 이름 몇도 있었던 거 같은데 윤…… 양…… 유준 리? 정확히는 모르겠고요.]

이훤의 눈썹이 굵게 우그러들었다. 저 여자가 IS 갤러리에 대해서 영어권 사람과 통화할 일이 뭐가 있는가? 그것도 이토록 비밀리에?

윤, 양이면 혹시 이유준이란 사람에게 할머니나 작은어머니를 소개해 주려는 건가?

생각이 깊어지려는데 영기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런데 이사님.]

“어.”

[정확히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시면 일하기가 수월할 텐데요. 그냥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내가 원하는 건 그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야. 미연에 방지하려면 일반적인 신변 보호를 뛰어넘어야겠지. 못 하겠으면 지금이라도 그만둬. 괜찮아.”

[아이고, 아닙니다. 그래서 여쭤본 게 아니라 업무를 명확히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전 형님, 아니 이사님을 믿습니다. 뭔가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그래, 고맙다. 이왕 일어난 거 마당에 숯불 좀 피워 봐.”

[예? 또요?]

“응. 고구마도 좀 씻어서 가져다 놓고.”

[어제 못 드셨어요?]

“어. 그리고 강아지 집 말이야.”

[겨울이요? 예.]

“위치 좀 옮기지.”

[위치가 마음에 안 드세요?]

“음.”

[어디로 옮길까요?]

그들이 대화하는 사이 현관 도어 록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대화가 마쳐질 즈음 신선한 외부 공기를 몰고서 그녀가 그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사당 방향으로. 가장 안쪽에.”

안방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이다.

[예. 알겠습니다. 아저씨에게 말하고 오전 중으로 옮겨 두겠습니다.]

“음.”

전화를 끊은 이훤이 미소 지으며 그녀를 맞았다.

“어디 다녀와?”

“겨울이한테요.”

“너무 일찍 일어난 거 아니야? 더 자고 싶으면 들어가 자. 군고구마 새로 만들어 놓을 테니까 좀 있다 일어나서 먹고.”

“고구마 다시 구워요? 먹고 싶었는데 잘됐네요. 같이 해요. 그리고 저 얼마 전까지 새벽 5시에 일어났었어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커피 줄까?”

“네.”

그가 거치대에서 찻잔을 하나 빼내 커피를 따른 뒤 그녀에게 내밀었다.

“왜 새벽 5시 일어났는데?”

“24시간 문 여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잠깐 했는데 6시가 교대 시간이었어요.”

“그렇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커피를 마시다 보니 영기가 장작을 가지고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였다.

사빛도 그의 시선을 따르더니 반가운 듯 말했다.

“어! 영기 씨 일어났네. 씻고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그녀는 말끝에 자신의 낡은 청바지를 내려다보며 겸연쩍게 웃었다.

저런 걸 왜 저리 신경 쓰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자기가 가져온 물건을 창고 방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다. 누가 보면 안 된다는 듯이.

* * *

부지런한 새들의 지저귐과 함께 이른 아침이 시작되었다.

사빛이 두 남자와 함께 고구마를 구워 먹고 있자니 행랑 아주머니가 올라와 아침을 차려 주었다.

식사 후 아주머니가 청소하는 시간엔 2층에 올라가 그들 부부끼리 향이 좋은 작설차를 나누어 마셨다.

그리고 그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자기 일을 시작하는 사이, 그녀는 벽에 붙은 모니터로 바닷속을 좀 구경하다가 창밖을 내다보기 위해 창가에 섰다.

그러다가 내친김에 유리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왔다.

1층의 반만 한 규모인 2층은 전부 남자의 작업실이었고, 나머지는 옥외 공간이었다. 바닥 포함 전체가 데크였고, 갈색의 나무 난간에는 예쁜 식물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편하게 쉴 수 있는 긴 의자와 탁자, 해를 가려 줄 파라솔이 있었다. 아래에서는 요 파라솔 머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책과 음료수 한 잔 가지고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난간으로 향했다. 안채 지대가 약간 높은 데다 앞에 논밭뿐 별다른 건물이 없어서 시원하게 뚫린 경관이 그녀를 맞았다.

신선한 공기를 듬뿍 들이켜고 내쉬는데 아래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어?”

안채 마당을 내려다본 사빛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행랑채 두 남자가 강아지 집을 양쪽에서 들고 옮기고 있는 게 아닌가.

그녀가 당황스러워하는데 이훤이 나와서 그녀 옆에 섰다.

사빛이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겨울이 집 옮겨요?”

“응. 여기가 좋을 거 같아서.”

“왜요?”

내가 어젯밤에 잠깐 살펴본 게 그렇게 잘못한 걸까? 사빛이 낭패감에 일그러지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침착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금방 눈싸움에서 진 사빛이 아랫입술을 짓쳐 물며 다시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한참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자니 뭐…… 괜찮을 것도 같았다.

그녀가 종일 안방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강아지도 온종일 집에 있는 것이 아니니 겨울의 집이 이쪽에 있든 저쪽에 있든 큰 상관이 없었다.

아니, 이곳이라면 거실 창에서도 보일 테니 오히려 더 좋았다. 그가 담담한 어조로 조금 더 설명해 주었다.

“안방보다 이쪽 경비가 더 소홀한 것 같아서 그래.”

듣고 보니 그랬다. 그쪽은 이제 사용인 부부뿐 아니라 경호원까지 있으니.

“왜 그렇게…… 경비에 신경 쓰세요?”

그는 정말로 뭔가를 알고 있는 걸까. 진정 그래서 이러는 걸까? 그렇다면 무엇을 얼마나 아는 걸까? 어쩌면 이제쯤 사빛은 들어야 했다.

만약 그들이 같은 것을 알고 있다면 앞으로의 일을 함께 상의하고 헤쳐 나가는 것이 좋으므로. 물론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말이다.

“나도 몰라. 그냥…… 나쁜 꿈을 꾸었어.”

“나쁜…… 꿈이요?”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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