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75)

31화

이훤에게는 남다른 성향이 하나 있다.

두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보이는 집요함.

그분들이 어려서부터 그랬는지 어떤 목적을 향해 달려오며 형성된 건지 모르나 이훤은 날 때부터 그랬다.

걷지도 못하던 시절 ‘어느 한 쪽쪽이’에서 시작한 집착이 ‘바로 그 이불’, ‘바로 그 인형’으로 이어졌고, 유치원부터 초등 저학년 땐 종이접기와 조립식 블록 쌓기, 초등 고학년 땐 수학 문제 풀이와 과학 키트 조립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일반인의 관심 정도를 훌쩍 뛰어넘는 것으로,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누가 말린다고 멈춰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제가 문득 꽂히는 것이고, 꽂힌 순간부터는 저 하고 싶은 대로 두어야 했다.

쪽쪽이를 뺏으면 두 배로 부어올라 째는 시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엄지를 빨아 댔고, 레고를 갖다 버리면 종이로 일일이 블록을 만들어 풀이나 테이프로 붙여서라도 머릿속 작품을 만들어 냈다.

집요한 만큼 성과는 남달랐다. 물고 늘어진 만큼 감탄스러울 정도의 결과물들이 켜켜이 생겨났다.

경탄을 자아내던 작품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지만, 각종 경시대회 상장과 메달은 어딘가에 수두룩하게 남아 있다.

하도 그러니 사람들은 남들보다 뛰어난 두뇌 때문에 나타나는 괴이성이라고 치부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으로 말았다.

그리고 지금 그의 관심은 이 여인이다. 부서질 것 같아 주머니 속에라도 넣고 다니고 싶은 그의 작은 신부였다.

한없이 사랑해 주고 예뻐해 주며 아무도 빼앗거나 해치지 못하게 눈에 불을 켜고 지키다가 1년 후 함께 떠나고 싶다.

미국이든 뉴질랜드든 호주든.

한국과 멀리 떨어진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연구 좀 하며 유유자적 살다가 배가 마련되면 같이 전 세계 바다를 누비며 살고 싶다.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떠돌며 해와 달을 음미해야지.

한 번씩 항구에 들러 배 정비하면서 관광도 하고 쇼핑도 하고 맛있는 것도 사 먹으면 참 재미있을 거야.

이 세상 모든 꽃과 나무와 동물을 보여 줄게. 넌 그런 걸 좋아하니까.

이렇게 된 게 연민 때문인지, 위안 때문인지, 꿈 때문인지, 난생처음 맛보는 섹스의 쾌감 때문인지 혹은 그 다인지 이제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꽂혔고, 스스로 식지 않는 한 어지간해선 막을 수 없다.

* * *

아직 해가 뜨기 전이었다. 사빛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자신의 등 뒤에 붙은 기다란 사내의 팔이 그녀를 품듯이 감싸 안고 있었다. 벽의 LED 시계가 새벽 5시 반임을 알려 주었다.

오늘은 남자보다 그녀가 먼저 눈을 떴다. 결혼한 이후 처음이었다. 그녀도 원래 늦잠 자는 유형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첫날밤 이후 계속 그랬다.

그녀가 감당하기 버거운 남자 탓인데, 첫날은 꿈보다 낫다고 여겼으나 그것도 아니었다. 첫날만 좀 배려한 것뿐이었다.

그는 점점 더 나빠졌다. 어찌 보면 상태 이상에 걸린 로봇 같기도 했다.

그와의 행위가 어떠한지는 이미 알고 결혼을 결심했던 터라 큰 불만은 없었다. 그때보다 조금은 신사적이니 그나마 좋게 생각하고 얼른 익숙해지고 싶을 뿐.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다시 잠들 수는 없었다. 이왕 이 시간에 깬 김에 벼르고 있던 일을 해야겠다. 사빛은 이훤이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살금살금 이불 밖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윽- 강렬한 통증 하나가 아랫배를 훑고 지나갔다. 잠시 멈춰 호흡을 고르다가 다시 살살 몸을 움직였다.

고요한 시간이라 그런지 조그마한 움직임도 소리가 몹시 큰 것처럼 느껴졌다.

숨소리마저 조심하며 무거운 팔에서 빠져나와 침대 아래로 두 다리를 내리는데, 뒤에서 손목이 붙잡혔다.

“어디가?”

“아, 깼어요? 미안해요. 목이 좀 말라서 물 마시려고요. 주무세요.”

사빛이 이불을 커다란 가슴께로 끌어 올려 준 후 토닥토닥 두드렸다.

다시 재우려는 시도였으나 그는 눈을 감지 않고 가느다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다가 고개만 한 번 끄덕여 주었다.

사빛이 미소 지어 보이곤 얼른 바닥의 가운을 챙겨 입고 방을 나섰다. 몸이 좀 휘청거렸으나 주저하지 않았다. 자기가 떠다 줄 테니 그냥 있으라는 말이 나오면 안 되므로.

거실로 나온 사빛은 우선 어둠에 잠긴 공간에 불을 밝히고 그에게 말한 대로 물을 한 잔 만들어 마셨다. 그리고 조용히 그 옆 작은방의 문을 열었다.

사빛은 방의 안쪽 깊숙한 곳에 놓아둔 자신의 캐리어로 향했다. 지퍼를 열고 청바지와 티셔츠 등 옛 옷을 꺼내 입고는 다시 지퍼를 여며 안쪽에 밀어 넣었다.

거실 탁자에 놓아두었던 휴대폰까지 챙긴 그녀는 또 도둑놈처럼 살금살금 몸을 움직여 현관문을 나섰다.

그리고 우선 강아지에게로 갔다. 현관문 소리에 깼던 건지 겨울이 일어서 있다가 꼬리를 흔들며 반겨 주었다.

사빛의 입가에 절로 옅은 미소가 걸렸다. 짖지도 않네. 어제 내내 곁에서 쓰다듬고 먹을 것도 챙겨 준 보람이 있었다.

“잘 잤어? 갑자기 잠자리가 바뀌어서 무섭진 않았어?”

속삭이듯 인사한 사빛이 한참 겨울의 복슬복슬한 털을 쓰다듬다가 몸을 일으켰다.

뒤를 돌아보니 커튼이 닫힌 안방은 조용했다. 그녀가 불을 밝혀 놓은 거실에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깨어 있다면 현관문 소리를 들었을 텐데, 다시 잠든 걸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혹시 모르니 얼른 통화를 마치고 들어가야겠다.

그녀는 눈치를 살피며 돌담 구석으로 몸을 옮겼다. 안채 건물의 측면 부분으로, 현관에서 더 멀어지는 곳이었다.

완전한 적막을 확인한 사빛은 침착하게 휴대폰을 켜고 미리 입력해 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국제 전화였다. 헤스티아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는 거리의 화가에게 거는 것이다.

사빛은 이 여인을 꿈을 통해 알았다. 인도 여인인데, 미국에서 자랐고 유럽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집시 같은 생활을 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현재 자신이 있는 곳의 전경 사진과 그것들을 보며 그린 그림 등을 올리는 SNS 활동을 하고 있다.

다음 주 주말 시작되는 할머님 갤러리의 전시회에 참여한 한 작가가 그녀의 작품을 표절함으로써 한국의 많은 대중이 이 여인을 알게 된다.

사실 그렇게까지 커질 일이 아닌데, 유지우가 그 전시회를 뉴스에 소개한 후 한 시청자가 마침 헤스티아의 그림을 알고 있어서 방송사 게시판에 제보함으로써 불거진 일이라 일파만파로 퍼졌다.

그 표절한 작가가 사빛이 다니는 대학의 시간 강사였기에 사빛도 좀 더 관심을 가졌었다.

이유준 강사. 한국 대학교 산업 디자인 학과에 입학한 사빛이 1학년 전공 기초 과목으로 회화를 수강할 때 알게 됐다.

입학 당시부터도 사빛은 장학금 때문에 모든 과목을 정말 열심히 하였고 성과도 좋았는데, 이 과목만은 B 마이너스 학점을 받았다.

출결에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과제 제출에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동기들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자, “내가 너희들처럼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아서 그래.”라고 통 크게 말했던 기억이 있다.

사빛은 학생부 교과 성적과 면접만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실은 아쉬웠다.

그 강사의 부교재 강매를 그녀만 거부했기에 그런가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때는 지금보다 순진할 때라 자신이 입시 미술을 배우지 않은 탓에 다른 학생들과 기본적인 실력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자신을 다독였었다. 그런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그 강사가 헤스티아라는 무명 화가의 그림을 표절한 건이다.

크게 시끄러울 뻔하다가 강사님과 작은어머님의 관계가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자 이솔 그룹의 홍보부에서 나서며 급 조용해졌다.

해서 사빛도 다음 일은 알지 못한다.

어쨌든 이 사건은 가만히 두어도 곧 불거질 일이지만 미리 막을 수 있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특히 할머님은 이 일로 큰 충격을 받고 한동안 시름시름 앓으신다.

이 일은 솔직히 사빛과 큰 관련이 없다. 다만 한 가지 실험해 보고 싶다.

그녀의 꿈과 관련해서.

남자의 예측 불허 행동들은 예외로 제쳐 두고, 지금껏 보니 사빛의 의지로 작은 일상들의 변화가 가능했다.

행랑 아주머니가 저를 대하는 태도를 변화시킨 것, 주원과의 사건을 저에게 유리하게 바꾼 것, 이훤과 해안도로를 달리고 아버지의 그림을 찾은 것 등.

어떤 사람과의 개별적 사건이 사빛의 의도대로 변하면서 세상과 조화롭게 엮이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소소한 개인 일상들 말고 세상과 연결된 굵직한 사안들도 그녀의 개입으로 바꿀 수 있을까? 이걸 실험해 보고 싶었다.

로또 번호라도 외우고 있다면 그걸로 실험하면 딱 좋겠는데 아쉽게도 모르겠고.

곧 터질 이 표절 사건을 막을 수 있다면 꿈에서 저에게 잘해 주었던 할머님에게 보답도 하면서 이 또한 실험해 볼 수 있어 적극적으로 나서 보았다.

해서 미리 헤스티아의 SNS 계정에 나와 있는 메일 주소로 작품 표절에 대한 제보가 있다는 글을 써서 연락처를 받아 놓았다.

이 시간쯤 연락하면 한가하다고 했다.

‘Hello’로 시작되는 영어 대화였다.

사빛도 어설픈 발음이겠지만 영어로 의사소통할 수 있었다.

남들처럼 영어 학원이나 화상 영어, 어학연수를 꿈꿀 수는 없어서 어려서부터 원서 듣고 읽기와 영상물 보기 같은 독학으로 영어를 습득했고, 열심히 한 탓인지 나름 실력이 괜찮았다.

내용은 이랬다.

안녕하세요. 저는 대한민국에 있는 한국 대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입니다.

저희 학교 강사님이 아무래도 작가님의 작품 <물꽃>을 표절하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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