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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27/75)

27화

사빛과 이훤이 신혼여행 떠나는 길, 진현당의 세 사용인이 노각나무 공터 한편에 있는 주차장까지 배웅 나왔다.

“제가 모셔다드려야죠. 제가 기산데.”

이훤의 거절로 함께 가지 못한 영기가 못내 아쉬워했다.

“됐어. 짐 풀고 있어. 집도 둘러보고, 강아지도 데려다 놓고.”

“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그런데 제가 이제 형님을 어떻게 불러야 하죠? 기사니까 사장님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문제인 듯 잠시 정적이 흘렀다.

침묵이 길어지자 사빛이 말했다.

“이사님이 어떨까요.”

사장님이 아닌데 그저 호칭이 없어서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나아 보였다. 그는 이솔 그룹과 관련된 여러 회사에 등기 이사직을 보유하고 있으니까.

해서 간혹 이사회 참석 등을 위해 서울에 올라갔다 오곤 했다. 그때는 그의 슈트 차림을 볼 수 있었는데, 마치 런웨이 위의 모델처럼 멋있다고 생각했었다.

입 밖으로 내어 얘기한 적은 없지만.

그녀의 말에 모든 고개가 그녀에게로 향했다.

생각해 보니 그가 이사님인 걸 꿈을 통해 알았다. 꿈과 현실의 기억을 완벽하게 구분하여 이야기한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진 않았다.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것, 어색해진 사빛이 겸연쩍게 웃어 보이며 변명했다.

“사장님 아니고 이사님이시잖아요.”

이번엔 어쩔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면 어디서 들었겠거니 할 터였다.

또 한 몇 초 아무도 말이 없다가 정적을 깨고 아주머니가 두 손바닥을 짝 쳤다.

“그거 좋네요. 저도 계속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게 맞나 싶었거든요. 박사님이라고 부를까 어쩔까 고민이었는데 참 잘되었어요.”

사빛이 속으로 안도했다.

별것 아닌 일로 이상한 오해를 받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노파심이었나 보다. 정적의 끄나풀로 들어왔다거나, 유지우 아나운서의 말처럼 특수한 기대를 하고 철저히 준비했다거나 하는.

그러나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묵묵히 서 있던 태 씨 아저씨가 “이사님.”이라고 말하며 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마무리되었다.

아저씨는 온종일 하는 말이 별로 없었다. 주로 ‘어’뿐이었고, 다른 말은 문장이 아닌 단어로만 말했다.

존댓말도 못 해서 대답이나 대꾸도 ‘어’였다.

아저씨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러려니 했고, 회장님과 권 사장님 내외분이나 모르는 사람, 마을 어르신들 앞에서는 말없이 고개만 숙여 대답하도록 아주머니에게 교육받아 큰 문제가 없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이 집안 사용인들이 그를 부르는 호칭은 이사님으로 통일되었다. 사빛은 이사님의 사모님인 거고.

그나저나 남들이 부를 호칭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사빛은 아직 한 번도 그를 이훤 씨라고 부르지 못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이러다가 꿈에서 남들 따라 도련님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사람들 따라 이사님이라고 부르게 되는 건 아닌지 우려되었다.

다소 쑥스럽더라도 오늘 중으로 꼭 그의 이름을 입에 올려 보리라 다짐했다. 늦어질수록 더 어려워질 테니까.

사빛이 영기의 도움을 받아 검은색 SUV의 조수석에 오르자 운전석에 있던 이훤이 기어를 바꾸었다.

두 사람은 아주 짧은 신혼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반나절 일정이라 숙박도 없는 당일치기였다.

이훤은 내년 여름 생일까지 집을 떠나서 잠을 자면 안 된다.

무속인이 정해 준 그 집의 범위에 본가와 진현당만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그는 본가에서 웬만해선 잠을 자지 않았다. 군에서 휴가 나왔을 때도 진현당에서 지냈다고 들었다.

사빛도 그걸 알기에 주말을 본가에서 지내자는 제안을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가기 싫으면 혼자 가겠다고 했다.

SUV가 논길과 읍내를 거쳐 큰 도로로 들어섰다.

진짜 결혼을 한 덕에 사빛은 꿈에서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던 그와의 여행을 하게 됐다.

가고 싶은 곳이 있느냐는 그의 물음에 목적지 정하지 말고 해안 도로를 따라 달리자고 했다. 그러다 저녁 시간이 되면 다시 돌아오자고.

바다를 좋아하던 그가 집에만 있기 답답할 때 간혹 했던 건데, 꿈에서는 함께 가고 싶단 말을 해 보지 못했다. 그래 놓고 그가 언제 돌아올까 하염없이 기다리고.

그 생각이 들자 사빛은 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첫사랑이었고, 진심이었다. 그가 원치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아이를 가지고 싶었을 만큼.

1년간의 계약 기간이 끝나고 헤어지게 되더라도 아이를 보면서 살면 되겠지 하는 무책임한 생각을 했을 정도로 그랬다.

지금은…….

사빛이 산 풍경이 흐르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리 월랑의 시가지도 희미하게 덩어리져 보였다.

생각해 보니 지금은 이 사람에 대한 욕심을 접은 것 같다. 자신의 욕심이 부른 결과가 얼마나 아프고 쓰라린지 절실하게 경험했기에.

지금 이 남자를 보면 연인이나 부부가 좋은 마음으로 헤어진 후 다시 마주한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 이전의 들끓고 애타는 마음보다 훨씬 나은 것 같다.

아기도 나중 일이었다.

다시 되돌릴 수 있으면 반드시 그리할 것이지만 꿈에서처럼 내 욕심에서가 아니고 진정 아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을 때, 아빠는 바다 너머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나 혼자서도 충분히 좋은 부모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때 가질 생각이다.

* * *

이훤은 기꺼이 그녀가 하자는 대로 해 주었다.

그들은 시원하게 뻗은 바닷길을 따라 남쪽으로 달렸고, 그러다 멈춘 곳은 꽤 잘 꾸며진 생태 및 문화 마을이었다.

해송 나무숲과 층층이 해식 절벽과 너른 갯벌과 배후 습지까지.

천혜의 자연이 책과 함께 어우러진 곳이었다.

인구가 사라진 한 바다 마을을 선한 영향력으로 유명한 모 대기업과 시에서 적극적으로 나서 개발하였고, 그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촬영해 TV 방송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 유명세 때문인지 평일인데도 방문객이 꽤 많았다.

오래된 성당과 큰 도서관, 벽화가 그려진 작은 북 카페와 서점들. 공방과 크고 작은 규모의 거리 행사들.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꼭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운치도 상당했다. 음료를 사 들고 그 안을 느릿느릿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결혼 이후 틈만 나면 그녀의 손을 붙잡고 다녔다.

어렸을 때 이후 누군가의 손을 잡고 다녀 본 경험이 별로 없는 사빛은 몹시 어색했으나 그는 사용인들 앞에서건 마을 사람들 앞에서건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엄마가 어딜 가든 아이를 꼭 붙들고 다니는 것처럼 그녀의 몸을 붙들고 다녔다.

너른 하늘이 인상적인 포토 존에서 셀카로 기념 촬영을 하고 나오는 길, 사빛의 걸음이 멈추었다.

“왜?”

“우리 저거 만들래요?”

길옆의 한 공간에 작은 공방이 있었다.

외부 매대에서는 포토 존에서 찍은 사진을 즉석에서 액자로 만들어 주었고, 공방 내부에서는 사진을 넣어 티셔츠나 열쇠고리 같은 걸 직접 만들 수 있었다.

잠시 후.

만들어진 작은 액자와 커플 열쇠고리가 든 봉투를 들고 한 식당에 들른 그들은 바지락 해물칼국수로 점심을 해결했다.

그리고 옆에 붙은 테이크아웃 카페에서 커피를 사서 또 느긋하게 공원을 걸었다.

그러다가 만나게 된 알록달록한 작은 도서관. 어린이 도서관으로 변신한 분교였다. 마을에 취학할 아동이 없어 폐교된 지 오래라고 한다.

들어가 보니 교실마다 다른 주제로 꾸며져 있었고, 책상 걸상 대신 소파와 마루에서 푹신한 쿠션들과 함께 뒹굴면서 책을 볼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로비에서 동화책 몇 권을 빌려 1학년 2반 교실로 들어온 그들은 오후 햇살이 따사로이 밀려드는 마룻바닥에 주저앉았다.

정확히는 사빛이 소파에 등을 기대앉고. 이훤은 그녀의 무릎을 베고 드러누웠다.

오래 운전했으니 피곤했으리라 생각하고, 또 그만큼 다시 운전해야 하니 쉬라고 그대로 두었다. 누워 가만히 그녀를 올려다보다가 볼을 손가락 등으로 훑는 그를 내려다보며 그녀가 말했다.

“저기…… 이훤 씨.”

불렀다! 이 짧은 말이 무어라고 얼굴에 열이 오르고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내가 책 읽어 줄까요?”

그래도 큰맘 먹고 ‘내가’라는 표현도 해 보았다. 나이 차이가 좀 있긴 해도 남편인데 너무 자신을 낮추는 말투는 별로인 듯해서였다.

어색했는데 다행히 그는 별말 하지 않고 미소만 지어 주었다.

기다란 눈이 초승달처럼 휘며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저 멀리까지 뻗어 있는 유려한 모양의 해안선과도 비슷했다.

“응.”

그가 손을 내리고 눈을 감았다.

어려운 숙제를 마치고 홀가분해진 사빛은 조용히 책을 펼쳐 ‘벼알 삼 형제’를 읽기 시작했다.

그녀가 어렸을 적 참 좋아했던 동화이다. 아버지가 그녀를 위해 사서 젖먹이 때 곧잘 읽어 주셨다는데, 그 기억은 없고 언젠가부터 스스로 읽게 되었다.

세어 보지 않았지만 수백 번을 읽었는지 페이지가 유실되고 실밥까지 너덜거렸다. 아마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내색한 적은 없지만.

추억이 새록새록 돋는 ‘벼알 삼 형제’의 흥미진진한 모험을 조곤조곤 읽는데, 언제부턴가 그가 너무 조용했다. 잠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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