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주원과 중고등학교 동창인 유지우는 유치원 때부터 권이훤밖에 모르는 일편단심 민들레였다.
학교 때도 아마 내가 권이훤 사촌이라서 친하게 지냈을 거다. 권이훤 때문에 대학도 그가 있는 도시의 학교를 택했던 애니.
자기 집안의 반대와 더불어 권이훤이 비혼을 선언하는 바람에 잠시 잠잠했지만, 언젠가 권이훤 마누라 되는 게 일생일대 꿈인 애였다. 꿈도 참 별.
유지우는 재벌가 중에서도 열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집안의 자식이었다. 게다가 아들은 많은데 딸이 귀한 집이라 몹시 사랑받았다.
내가 그쯤 위치에 있으면 권이훤 따위 눈꼬리에도 안 찰 텐데. 자기네 집보다 좀 더 위를 올려다보지.
어렸을 때야 얼빠라서 그렇다고 쳐도 지금은 방송국 직원이었다. 그만한 인물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당장 주원이 꽂힌 그 선배 아나운서만 봐도 그렇다. 무슨 조각상인가 싶은 외모를 가진 그는 요새 지우가 맡고 있는 뉴스 프로그램의 메인 앵커였다.
그냥 집착일 거다. 한 번도 제가 원하는 걸 갖지 못한 적이 없어서. 인물이 반반하니 더욱 그랬다.
그런데 권이훤이 그런 저를 특별한 이유도 없이 싫다고만 하니 얼마나 부아가 나겠는가. 결혼 아니고 연애만 하자고 졸라도 절대로 안 통했다.
가끔 잘난 척 굴 때나 진짜 잘나 보일 때는 배알이 꼬여서 쌤통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권이훤을 몹시 싫어하지만 유지우한테 쌩하게 굴 때만은 참 마음에 들었단 말이지.
어쨌든 얘를 어쩐다.
권이훤은 언젠가부터 유지우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그러니 전부 털어놓을 때까지 저를 괴롭힐 것이 뻔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권이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다니는 거 엄청나게 싫어하시는데.
옛날부터 그랬다. 권이훤뿐 아니라 그 집 자체에 대해 왈가왈부 말하고 다니는 걸 아주 예민하게 싫어하셨다.
다른 친척 결혼식이었다고 거짓말을 해 볼까 싶다가도, 권이훤이 할머니에게조차 안 알려 준 군대 휴가까지 알아내는 앤데 알고자 하면 그걸 못 알아낼까 싶기도 하고…….
[야, 권주원. 대답해.]
연신 들어오는 톡을 미간을 찌푸린 채 내려다보며 주원은 생각이 깊다.
저러거나 말거나 저도 권이훤처럼 도도하게 모른 체하고 싶은데 엄마가 친하게 지내라고 늘 신신당부라서 말이다. 해서 요번에 사이가 좀 멀어진 것도 아직 말하지 못했다.
사실 말이 친하게 지내라지, 잘 보이라는 뜻인 걸 한참 후에 알았다. 어려서부터 그녀와 그녀의 오빠를 늘 저들 세상에 끼워 놓고는 잘 지내라고 강요한다.
마치 얼자 집안이 아닌 척 굴라는, 네 속으로도 그런 생각 품지 말라는 강요 같아서 어느 순간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누리는 것만큼 묵묵히 따라야 할 것들도 있는 법이니.
어제의 집안 행사 참여처럼. 그리고 매주 일요일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처럼.
오늘도 역시 그 행사의 날인데 어제 권이훤 결혼식 함께했다고 특별히 패스해 주셨다. 해서 풀로 계획을 잡아 놓고 꿀 같은 시간을 만끽하던 중이었다.
그래도 뭐. 할아버지가 아니었으면, 그리고 엄마 아빠의 노력이 아니었으면 제 가족은 그저 그런 천덕꾸러기밖에 되지 못했을 거란 걸 이제 주원도 안다. 지금의 위치가 아니었다면 사람들이 대놓고 손가락질하며 비웃었을 거란 사실도.
해서 주원은 할아버지와 엄마 아빠를 존경한다. 말 잘 듣는 예쁜 손녀, 예쁜 딸이고 싶다.
아무튼 엄마는 어제도 물었었다. ‘요새 지우랑 연락 자주 해?’라고. 그 뉘앙스가 예전과 달리 묘했다. 요즘 은원 오빠 정혼 문제가 곧잘 거론되던데 아마도 둘이 엮어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건 정말 오버다. 엄마는 오빠가 무슨 대단한 사람인 줄 크게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유지우가 미쳤나? 거기다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권이훤을 두고?
내 친오빠는 권은원이지만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권이훤이 좀 더 나은 건 사실이었다.
외모도 핏줄도 그렇지만 회사 지분도 훨씬 많다.
아무리 용을 빼서 오빠가 훗날 회사 수장 자리를 물려받는다고 해도 노친네들 다 돌아가신 뒤 최대 주주는 권이훤일 거다. 할머니가 그렇게 만들고 있고, 권이훤의 외할아버지 때문도 그렇다.
오빠는 권이훤에게 알아서 기거나, 대적하려면 골 터지게 우호 지분 확보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이다.
놀고먹으면서 그러한 권이훤이 낫나, 기를 쓰고 아등바등 살아야 하는 권은원이 낫나. 나라도 둘 중 하나를 꼭 골라야 한다면 권이훤이겠네. 성격이 재수 없긴 해도 권은원 답답한 거나 뭐 매일반이고.
어쨌든 권이훤이 돌았는지 웬 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이란 걸 했다. 제 저주 탓에 평생 결혼 따위 안 한다더니.
분명 부적이라고 들었는데, 엄마 말로는 혼인 신고까지 미리 마쳤다고 한다.
할머니가 어렵게 찾아낸 매우 훌륭한 부적이라더니, 그렇게까지 하면 제 저주가 풀릴 거라고 희망이라도 품은 건가?
그러거나 말거나 별 관심 없었다. 거기까지 따라갔다 온 게 귀찮을 따름이었다.
[야, 권주원. 대답해.]
주원이 읽고도 계속 답을 안 하자 지우가 조바심을 냈다.
[씹냐?]
씹고 싶어서 씹는 게 아니고 뭘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이대로 그냥 넘어갈 애가 아닌데 어떻게 해야 가장 덜 피곤할까 싶은 것이다.
[어쩌라고.]
[우선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말해 봐. 정말 오빠 결혼이야? 왜 시골에서 몰래 하는데?]
[말 못 해. 우리 집안사야.]
[너 지금 어디야.]
[그건 왜.]
[가자, 너희 시골집.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장난하냐?]
어제도 억지로 끌려갔다 왔구먼.
[가자, 내 차 타고. 넌 그냥 옆에만 앉아 있어. 나 혼자 가긴 좀 그렇잖아.]
좀 그런 게 아니라 대문 안으로 들어가기도 힘들겠지.
지금까지야 모르겠지만 다른 여자가 있는데 저 좋아하는 여자를 집안에 들일 권이훤이 아니었다.
간혹 여자를 사귈 때 유지우가 몹시 힘들어하며 울고불고했기에 잘 안다. 얼마나 차갑게 구는지.
그럴 때 유지우도 반발인지 뭔지 남자를 만들곤 했었다. 권이훤이 깨지면 저도 헤어지고.
그러고 보니 자신이 어쩌다 이들의 시답잖은 연애사를 줄줄이 꿰고 있는지 주원은 짜증이 났다.
[됐다. 우리 왜 싸웠는지 잊었냐? 염치라는 걸 좀 챙기고 살아라.]
학교 다닐 때야 그들의 세상에서 왕따 당하는 게 무서워서 절절맸지, 이젠 이 안하무인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 그녀도 컸다.
권이훤이 결혼했으면 한 거지 제가 뭔데 확인을 하고 말고. 그것도 내 꿀 같은 시간까지 방해해 가면서.
[장 선배랑 소개팅해 줄게.]
주원이 멈칫했다.
[애인 있다며.]
장현우 아나운서가 애인이 있다는 건 지우가 거짓으로 둘러댄 말이었다. 주원에게 소개해 주기 싫어서.
탐하우징 장녀랑 선본 것까지 알고 들이댔던 건데 뻔한 거짓말로 둘러댔었다. 그래서 심하게 삐졌던 거고.
[깨졌대.]
[진짜?]
거짓말인 거 둘 다 알면서 주고받는 대화였다. 나름 각자의 잇속을 위한 치밀한 협상 중이었다.
권이훤을 놓고 곧잘 해 오던 일이라 죽이 척척 맞았다.
[그럼 가짜겠냐? 오빠가 걸렸는데.]
[근데 나 권이훤이랑 안 친한 거 알잖아. 어제도 억지로 끌려갔다가 왔구먼 뭐라 그러면서 또 가냐?]
잠시 조용하던 지우가 곧 다시 톡을 날려 왔다.
[좋은 생각이 있어.]
[뭔데.]
* * *
얼마나 졸았던 걸까. 나른한 선잠에 취해 있는 사빛을 나직한 목소리가 깨웠다.
“그만 일어나. 벌써 11시야.”
적당한 속도와 딱 듣기 좋을 만큼의 음역. 툭툭 내뱉는 듯한 정 없는 말투만 빼면 편안한 질감의 소리였다.
그였다. 그녀의 남편. 그나저나 11시라니, 많이도 잤네.
사빛이 한쪽 눈꺼풀만 살짝 들어 올리는데 가로누워 있던 그녀의 등 뒤에 그가 와 닿았다.
큰 몸으로 위에서 덮듯이 안고서 평상시와 달리 잔뜩 예민해져 있는 그녀의 가슴 한쪽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뺨으로 입술을 내린다.
잠이 확 깬 사빛은 맥박이 급격히 뛰어올랐다. 온 신경이 그의 입술이 맞붙은 뺨과 잡힌 안쪽 가슴으로 쏠리는데, 그가 귓가에 나긋하게 속삭였다.
“뭐라도 먹고 또 자든가.”
그는 그녀의 뜨거워진 귓불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 이내 축축한 열기로 귓바퀴를 간지럽히듯 훑었다.
심장이 둥둥거리는 사빛은 호흡이 가빠져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아, 네.”
그녀가 잠에서 깬 듯 보이자 몸을 돌려 눕힌 그가 그녀의 두 팔을 위로 들어올렸다.
흐트러진 모습으로 멀뚱히 바라보자니 씩 웃은 그가 “모닝 키스.”라고 말하곤 입술을 내려왔다.
결박된 채 그의 입술을 받으며 그녀가 잘게 떨었다.
촉촉한 감각이 입술을 떠나 가운을 헤집고 가슴 끝을 깨물자 짙은 탄식도 터졌다.
하아- 아침부터.
“씻었네?”
딱딱해진 몽우리 위에서 속삭인 그는 대답에 관심 없는 듯 하는 일에 몰두하더니 결국 그녀가 허리를 비틀며 격한 숨을 내뱉게끔 했다. 가슴 끝은 그녀가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이었다.
“아흑.”
대답해야 하는데 신음만 흘렀다.
단정함을 유지한 매트한 움직임으로 보아 섹스하고 싶어서가 아니고 그냥 그러는 거 같은데 자기 혼자 괴로워지니 사빛은 좀 억울해졌다.
해서 과감하게 결박을 풀고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어제 한번 해 봤다고 제법 자연스럽다.
머리카락을 쓸면서 다리도 끌어 올리고 그가 주는 감각을 느껴 보았다. 이렇게 하면 기분이 좀 더 야릇해진다. 그러자 그에게서도 반응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