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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18/75)

18화

방에 들어와 보니 창가 테이블 위에 얼음에 담긴 샴페인 한 병과 두 개의 잔, 그리고 과일과 치즈 같은 것들이 세팅되어 있었다.

아주머니가 준비해 둔 모양이다.

조용히 드레스 룸으로 걸어간 사빛은 겉옷을 벗은 후 욕실로 향했다.

아직 그만의 느낌이 물씬 나는 방이지만 이곳에는 군데군데 그녀의 것들도 보였다.

그녀가 서울에서부터 가져온 짐은 대부분 캐리어에 넣어서 주방 옆 창고 방에 숨겨 두었지만, 그가 새로 사 준 물건들은 아주머니가 낮에 이 방으로 옮겨 두었다. 거실 욕실에서 쓰던 그녀의 용품들 또한 같았다.

속옷까지 벗고 샤워를 시작하며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며칠 전 그와 작성한 혼인 계약서를 떠올렸다.

거기엔 일전에 그와 했던 간단한 약속들 외에 추가로 세부적인 사항들이 포함되었다. 헤어질 때 결혼 기간에 따른 위자료 액수, 아이가 있으면 그녀가 한 아이당 받게 되는 금액 같은 것들.

그리고 그 돈을 받음으로써 그녀가 포기해야 하는 것들과 침묵해야 할 것들, 그것을 지키지 않을 시 불이익 등이 디테일하게 적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아주 특별한 사유가 생기지 않는 한 그와 이혼할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할머님이 보내신 변호사가 내미는 서류에 이름을 쓰고 사인하는 일에 일말의 망설임이 없었다. 그와 혼인 신고하러 갔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혼인 신고도 마쳤고 결혼식도 마쳤으니 법적으로나 의례적으로 그녀는 그의 정식 부인이었고, 이제 오늘 밤만 무사히 치르면 실질적인 관계도 되는 것이다.

또다시 생각이 그 부분에 미치자 그녀의 볼이 불그레 달아올랐다. 수증기가 뿌옇게 차오른 면도용 작은 거울로도 적나라하게 보일 정도였다.

사빛은 귓불까지 뜨거워지는 느낌을 상쇄하려 샴푸를 쭉 짜서 머리에 묻히고 거품을 내기 시작했다.

한참 몸에까지 거품을 만들고 샤워기의 물로 헹구어 내기 위해 서 있는데 또 다른 상념이 밀려들었다.

그를 남몰래 좋아했던 꿈속의 자신이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저만치 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아까처럼 곁을 스치면 혼자 가슴 떨려 하고, 홀로 집에 남겨지면 이제나 올까 저제나 올까 하염없이 기다리고.

그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다.

어째서 좋고 행복한 기억은 별로 없고 이처럼 외롭고 슬프고 아픈 기억만 잔뜩인 건지.

씁쓸한 미소를 지은 그녀는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잡생각들을 멀리 던져 버리고 샤워기의 물을 잠근 뒤 몸의 물기를 닦고 로션을 온몸에 펴 발랐다.

잘 개어져 있는 샤워 가운을 걸치고 드레스 룸으로 나와 많은 새 옷 중 싱그러운 잎사귀 문양이 프린트된 셔츠 식 치마를 꺼내 입었다.

끝단은 진한 초록색인데 위로 갈수록 색이 옅어지고 넓적한 끈으로 허리를 묶게끔 되어 있었다.

거울 앞에 서서 나비 모양으로 단정하게 매듭짓고는 다짐해 본다.

‘나는 잘할 수 있다.’

* * *

거실 욕실에서 대충 샤워를 마친 이훤이 안방으로 향했다가 다시 거실로 나왔다.

그녀가 샤워하는 소리가 너무 적나라하게 들려 혼자 방에 앉아 있기 그래서였다.

마침 7시 뉴스 하는 시간이어서 아주머니가 가져다 놓은 것으로 보이는 스파클링 와인만 한 잔 따라 나왔다. 제법 도수가 있는 것이었다.

지는 해도 가릴 겸 커튼을 닫은 후 TV를 틀었다. 아직 마을 사람들이 있어 호기심 어린 눈들이 담장 너머에서 기웃거릴지 모르니까.

여긴 도시와 문화가 사뭇 달랐고, 어려서부터 서울 본가와 이곳, 그리고 외갓집을 왔다 갔다 하며 살았던 그는 그런 것에 맞춰 행동하는 것이 익숙했다.

어려울 것도, 별다를 것도 없는 일.

할머니 할아버지가 믿는 전통 신앙이 퍽 마음에 안 들지만 그냥 두는 것처럼.

그는 처음 두 번의 키스 후 그녀의 입에 입술을 대지 않았다. 꿈 때문인지 이상하게 그녀만 만지면 몸에 힘이 들어가서였다.

앳돼 보이는 겉모습도 그렇고, 왠지 남자 경험이 없어 보여 잠자리를 결혼 뒤로 미룬 상태였다. 천천히 다가가고 싶었다.

그녀는 너무 작고 연약해서 함부로 다루면 부서질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그를 괴롭혔다. 꿈이 트라우마가 된 듯했다.

그럼 갖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면 그게 또 그렇지가 않다. 너무 가지고 싶다.

그 살결의 감촉. 그 음밀한 느낌. 끊어질 듯한 강렬함.

그 대단한 압박감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 피가 끓어오르며 미칠 것만 같다.

온몸의 혈관이 가파르게 맥동하며 말초 신경까지 뜨겁게 달아올랐다.

생각만으로 아랫배에 끈적한 뭔가가 고여서는 어디론가 쏟아 내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치솟았다.

상태가 이 모양이니 생각을 안 해 볼 수가 없다. 나는 그녀를 좋아하는가?

모르겠다. 만난 지 불과 일주일 정도인 사람이니.

그런데 그녀만 보면 심장이 저절로 반응한다. 떨리고 아련하고 애틋하고 서글프기까지. 이게 뭔지 모르겠다. 무엇이 나를 저 작은 여인에게 얽매이게 하는가.

설마 사람들이 말하는 전생인 건가? 내가 전생에 저 여인에게 아주 큰 죄를 지었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꿈이었나?

섹스까지 한 거 보니 몹시 나쁜 남편이었다가 이생에서 다시 만났다는 뭐 그런 이야기.

그럼 가슴은 왜 아파. 나쁜 남자라면서.

인도 토속 신앙이 널리 퍼져 있는 곳에서야 윤회니 삼생 같은 걸 믿는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서 오래 살아온 그로서는 그것도 영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전생이란 게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럼 뭐지? 답을 모르니 생각은 계속 도돌이표를 그리고 있었다.

달칵, 문을 열고 나오는 초록빛의 그녀를 보며 입 안에 있던 술을 목구멍 뒤로 넘겼다.

차가운 와인이 식도를 타고 들어가 배 속을 뜨끈하게 달궜다. 술에 있던 탄산이 아랫배에서 툭툭 터지는 느낌. 마치 밤하늘에 폭죽 터지듯이.

그 가려운 감각에 그의 아랫도리로 묵직한 힘이 들어갔다. 반쯤 일어선 몸을 느끼는데, 문 앞에 서서 잠시 머뭇대던 그녀가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자제력을 발휘해 단전을 진정시키며 지그시 바라보는 그의 머리는 또다시 망상으로 빠져들었다.

과거가 아니고 미래가 아닐까 생각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혹시 나 때문에 잘못되는 건가. 내 빌어먹을 팔자 때문에.

그걸 보여 주기 위한 예지몽이었던 걸까 하고.

예지몽 역시 비현실적인 이야기라 잘 믿기지 않으나 굳이 가져다 대자면 나폴레옹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경험했다 하고 태몽 같은 것도 있으니까 말이다.

여기 사람들 이치대로라면 대충 아귀가 맞는 가정이긴 한데, 하지만 그러자면 강력한 의문 하나가 제기된다.

그들은 분명 저 여자는 괜찮다고 했다. 저 여자만 괜찮다고.

그런 여자가 자기 때문에 잘못된다면 그들이 하는 말에 앞뒤 이치가 전혀 맞지 않게 된다.

맞으면 좋고, 틀리면 어쩔 수 없지 않겠냐고?

그렇게 막무가내, 주먹구구식이면 그 오랜 세월 그 많은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맹신할 수 있었겠는가.

아, 모르겠다. 머리가 뒤죽박죽되니 골치만 지끈거린다.

이 문제로 들어가면 늘 그랬다. 답이 없었다. 나쁘다니 나쁜 줄 알았던 것처럼 괜찮다니 괜찮은 줄 알면 될 터였다.

이훤이 굵게 찡그렸던 눈썹을 바르게 폈다.

여자는 그의 곁에 다가오더니 멀쩡한 소파를 놔두고 또 바닥 카펫 위에 주저앉았다.

지그시 정수리를 내려 보다가 그도 함께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등 뒤 소파에 한쪽 팔을 뻗은 채 다른 손에 든 포도주를 홀짝였다.

그녀는 금세 뉴스에 심취했다. 사회 뉴스를 좋아하네.

함께 TV에 무심한 시선을 두고 있던 그가 여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술 마실 줄 알아?”

그의 질문에 그녀가 돌아보았다.

“아뇨. 소주 다섯 잔 마시면 뻗어요. 막걸리는 두 사발.”

“그래?”

주량을 아주 정확히 아는군.

“네. 그만큼 마시면 다음 날 기억도 잘 안 나고요. 숙취도 심해서 특별한 일 없으면 잘 안 마셔요.”

“와인 한잔할래?”

그 정도 주량이면 이건 한 잔만 마셔도 알딸딸할 것 같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한 잔 정도는 마셔도 될 듯했다.

그의 권유에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뇨. 한 입만 할게요.”

그녀의 시선이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기다란 술잔으로 향했다.

“이거 마신다고?”

새 잔에 새로 따라 마시면 될 걸, 생각했지만 벌써 손에 있던 잔을 그녀에게 건네준 후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새로 따라 주려면 몸을 일으켜야 하니까. 그러면 떨어져야 하니까.

어렸을 때 곁에 없으면 몹시 불안했던 애착 인형이 하나 있었다.

가지고 있으면 묘한 안정감을 주었기에 한 번 손에 쥐면 떼어 내기가 싫었다.

어머니가 건강하셨을 때 테디 베어 만드는 취미가 있으셨는데 그를 위해, 그를 본떠 만들어 준 곰 인형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어린 시절 만들어 주셨던 건데, 내내 책장에 장식만 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 어머니가 이상해지시며 마음 둘 곳이 없어 붙들고 다녔다.

학교 갈 때도 가방에 넣어 다녔다. 잠잘 때도 옆에 두고 잤다.

그런 그의 모습에 놀림과 걱정이 뒤따랐다.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사내 녀석이 무슨 인형’이었던 것 같고, 다음으로 많이 들은 말이 ‘다 큰 녀석이 무슨 인형’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괜찮았다. 상관없었다.

그는 태생부터 남의 시선 따위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런 것보다 그 인형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얻는 만족과 위안이 훨씬 컸다.

결국은 아홉 살 어린 나이로 이기기 어려웠던 어른, 할아버지에게 빼앗겼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가 억지로 빼앗아 불태웠다.

어머니가 생각나는 물건은 모두 태워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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