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75)

17화

“어머 세상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따로 없네요.”

웨딩 플래너가 사빛의 긴 상념을 깨웠다.

사빛은 그녀의 손에 몸을 맡긴 채 아주 길게 이런저런 딴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친밀한 성격의 웨딩 플래너는 일이 다 끝났는지 기다란 이동식 거울의 각도를 기울여 사빛에게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안채 거실에서 전문가 몇으로부터 신부 치장을 받은 사빛이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우선, 노력한 덕인지 일주일 만에 살이 많이 차오르고 푸석했던 얼굴에 생기가 감돌았다.

좋은 공기 마시며 푹 쉰 것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고, 전에 쓰던 것과 달라도 너무 다른 욕실용품과 스킨로션들, 그리고 웨딩 플래너가 어젯밤과 오늘 아침에 하라고 준 고급 팩 두 종류도 한몫을 한 것 같다.

거기에 긴 시간을 들여 고운 신부 화장과 치장까지 마치니 천사는 모르겠지만 다른 때보다 예뻐 보이긴 했다.

사빛이 직접 고른 단순한 원피스 형태의 공단 드레스.

흰색과 핑크와 초록색이 잘 어우러진 화관. 피치 색채 화장으로 볼과 입술을 강조하고 화관과 어울리는 부케까지 들었다.

반소매 원피스 덕에 드러난 손과 발에 레이스로 된 장갑과 양말을 착용했고, 좀 있다 반짝거리는 하얀색 메리 제인 슈즈를 신을 예정이었다.

거울 속 그녀는 언젠가 잡지 화보 속에서 보았던 숲속의 어린 신부 같았다. 볼에 주근깨만 잔뜩 있었다면 딱 똑같았다.

‘그려 달라고 할까?’

장난스러운 생각에 갑자기 또 키득- 웃음이 났지만 웨딩 플래너가 이상하게 볼 것 같아 속으로 삼켰다.

이렇듯 예쁘게 꾸몄지만 신부 대기실인 이곳으로 찾아오는 이는 없었다.

웨딩 플래너가 사빛의 휴대폰으로 사진을 몇 장 찍어 줄 적에 둘이서도 함께 기념 촬영을 했을 뿐이다.

가족은 그렇다 치고 사빛에게 친구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고향 친구인 영선이도 있고, 대학 친구인 봄이도 부르면 당장 달려올 친구였다.

그러나 이것이 일반적인 결혼도 아닌 데다 고모네 등 신경 쓰이는 부분이 많아 일부러 부르지 않았다. 나중에 천천히 기회가 되면 알리고자 생각했다.

곧 웨딩 플래너에게 톡이 들어왔다.

“이제 나가셔야 해요.”

톡은 사랑채에 있던 진행 요원이 보낸 것인가 보다.

사랑채는 그의 가족 열 명만이 참석한 야외 식장으로 꾸며졌다. 대문 밖 노각나무 공터에서는 마을 사람들을 위한 잔치가 벌어질 예정이었고.

사빛이 깊은숨으로 호흡을 정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을 나서자 사랑채로 나가는 협문이 활짝 열려 있고, 진행 요원 한 명이 그들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이 잔디밭을 건너고 협문을 나서면 바로 신부 입장로라 했다. 꽃으로 장식한 하얀 천이 깔린 끝에 신랑이 서 있다고.

사실 어찌 생각해 보면 이거야말로 정말 꿈같은 일이었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전혀 꿈꿔 보지 못했던 일.

그 사실은 협문을 나서고 길 저 너머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기다란 사람을 보니 더욱 확실해졌다.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그 주인공이 저 자신이란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약간 흥분되었지만, 시댁 어른들이 양쪽에 주르륵 앉아 계셨기에 꾹 참고 한 발 한 발 차분히 내디뎠다. 옆에서 웨딩 플래너가 부축하듯 함께해 주었다. 그녀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의지가 되었다.

저 멀리, 대문 밖에서 안을 기웃거리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대부분 어르신인데,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열린 대문과 낮은 담장을 통해 구경하고 있었다.

저들은 유지 집 장손인 남자가 왜 이런 작은 결혼식을, 그것도 식구가 한 명도 참석하지 않은 신부와 하는지 잘 모른다.

꿈에서도 왜 저런 허름한 여자가 그들의 아기 도련님 곁에 붙어 있는지에 대해 자세히 몰랐다. 그저 하녀네, 정받이네,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수군거렸을 뿐.

이 집의 사용인들은 고용될 때나 고용이 연장될 때 보안 계약서를 철저하게 작성하기 때문에 집안 사정이 집 밖으로 잘 새어 나가지 않는다.

사빛도 그것을 보았고 사인을 했지만, 고모 내외가 일을 굉장히 빠르게 처리하는 통에 정확한 내용은 보지 못했다.

꿈에서 사용인들에게 주워들은 바로는 회사 기밀 유출했을 때와 비슷한 법적 구속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서류로 남기는 것일 테지만.

어쨌든 이번에는 마을 사람들이 이런저런 억측하지 말고 식구가 모두 해외에 있는 신부쯤으로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가 전에 말해 준 동기의 결혼처럼 두 차례에 걸쳐서 하는 결혼으로 여겨 주면 딱 좋았다.

* * *

주례사나 양가 어른 인사 같은 여러 절차가 없어서인지 결혼식은 길지 않았다.

이훤의 말대로 그의 친가와 외가가 데면데면한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억지로 따라왔음이 역력한 얼굴의 주원과 무덤덤한 얼굴의 은원이 그들 부모인 작은아버님 내외와 함께했다.

외삼촌 내외분도 함께했고.

그의 외삼촌은 이곳 월랑에 본사가 있는 이솔 제강의 사장님이시다.

이솔은 선철을 만드는 제철소가 있고, 강철이나 특수강을 만드는 각 공장이 있는데, 이 제철소 소장님과 공장장님들이 이분 라인이다.

즉, 직접 경영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현장 실세라 할 수 있는 외할아버님 라인.

외삼촌은 꿈에서도 뵌 적이 없고 소문만 들었다. 어려서부터 수재였고 세계 최고의 경영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쭉 이솔에 몸담고 있다고 한다.

아주머니들이 수다로 알려 준 정보로, 그의 누나였던 어머님도 공부를 꽤 잘했기에 이훤의 머리가 이 외가를 닮은 것이 아니겠냐고도 했다.

어쨌든 이 부유한 사람들은 오랜만에 문이 열린 사랑채 안에서 다 함께 식사한 후 하나둘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마을 사람들은 늦게까지 있을 예정인지 공터에서 신나게 떠들면서 먹고 마셨다.

“고생했어.”

집안 어른들을 모두 보내고 그녀와 함께 안채로 돌아온 이훤이 말했다.

“씻을게. 너도 씻어.”

라고 말한 그가 안방으로 들어가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열린 문 앞에 선 사빛은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잠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리자 곧 웃통을 벗은 바지 차림의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는 드레스 룸에서 챙겨 온 간단한 옷가지가 들려 있었다.

그가 열려 있던 문을 더욱 활짝 열어 주며 그녀를 안으로 안내했다.

“들어가 편하게 씻어. 난 거실에서 씻을게.”

넓은 어깨, 크고 작은 음영을 만드는 가슴과 배 근육들이 그녀의 시야에 담겼다.

불그스름한 놀빛 탓인지, 남빛 땅거미 탓인지, 금물로 그린 것처럼 아름다운 형상이었다. 신기하게도 그 모습이 시린 주물과도 같았다. 만지면 함께 단단하게 굳어 버릴 듯한 느낌.

시선을 들어 그의 눈을 마주했다. 아마도 표정이 없고 눈빛이 딱딱하고 매사에 거침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 괜히 상대를 위축시키는 타입이었다.

꿈에서는 그런 그에게 처음부터 쭉 압도당했지만 이젠 아니었다. 이건 그냥 이 사람의 스타일인 거다.

음양오행이란 걸 잘 모르지만 그는 우주 만물을 이루는 다섯 가지 원소 중에 불이 많은 사람이라 했다. 쇠가 아니라.

그것도 평상시엔 세상만사 시큰둥 잠잠하다가 터지면 한꺼번에 타오르는 큰불.

그러니 괜찮았다. 그녀는 큰물이라 그 불을 껴안는다고 했으니.

수극화(水克火)라 하였다. 상생이 아닌 상극 조합인데 나쁜 게 아니라고.

모두 다 이해한 건 아니지만 그것을 마음에 새기듯 상기하며 그녀가 그를 향해 걸었다.

마음을 굳게 먹었음에도 그의 앞을 스치자니 숨이 멈춰지고 한껏 긴장하게 되었다.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함께했음에도 새삼스럽게 이렇게 손가락에까지 힘이 꽉 들어가는 건, 그와의 처음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상상을 뛰어넘는 격통이.

어쩌면 오늘 밤 그 일을 다시 해야 할지도 모르니, 그렇다면 장소가 이 방 안이 될 테니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몸은 그녀에 비해 너무 컸다.

익숙해지는데, 그러니까 아파서 울지 않게 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방에 들어서자 그레이와 블랙 톤의 고급스럽고 모던한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그의 향이 은근하게 배어 있음도 느껴졌다.

그에게서 늘 느껴지는 디아나 숲의 냄새. 직접 맡아 본 적은 없지만 꼭 이럴 것만 같은 냄새.

그러고 보니 꿈속의 그들 관계에서 이 방은 없었다. 그가 없는 시간에 간혹 아주머니를 돕기 위해 빨랫감을 챙겼던 정도였다.

뿐인가. 이곳에서 지냈던 세 계절 동안 2층은 아예 올라가 본 적도 없었다.

꿈에서의 자신은 집안사람들 말대로 액받이였고, 마을 사람들 말대로 정받이였던 셈이다. 그 이상, 그 이하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입 안으로 쓴 기운이 몰려들었다.

그가 살짝 미워지기까지 하다가 픽- 하고 바람 새는 웃음이 났다.

참 우습지. 전에는 팔려 온 처지라는 생각에 묵묵히 순응만 하다가 상황이 좀 유리하게 바뀌었다고 이런 감정도 들고.

너른 방 한가운데 멈춰 선 사빛이 다시 한번 깊은 심호흡을 했다.

아픈 일이었지만 일부러 매달려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순응만 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았으니 앞으로 그에 맞춰 잘 처신하면 된다.

그렇게 만들 것이고, 시작이지만 지금까지는 잘하고 있다.

액받이가 아니고 사주 궁합이 잘 맞는 거고, 정받이가 아니고 진짜 부부의 건강한 성생활을 하는 것으로 첫걸음을 떼는 것이다.

여긴 이제 우리의 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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