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꿈에 의하면 집안 사용인들 관리를 남자의 작은어머니가 하고 있다.
본가는 물론, 회장님의 생가인 이곳과 전국에 있는 몇몇 별장들까지.
지금으로선 가장 의심할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작은아버님 쪽이니만큼 작은어머님에게 생계권이 달린 아주머니, 아저씨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었다.
비단 이들뿐 아니라 남자의 주변인들 모두 아직은 사빛의 의심 대상이었다.
아주머니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사빛의 얼굴을 살폈다.
“그런데 어디 아파요? 입술이…….”
이훤이 그녀의 뒷말을 싹둑 자르며 아까의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밥 먹었어요. 지금이 몇 신데. 그러니까 방 여사, 오늘은 가서 쉬고 내일 이야기를 더 나누든가 하는 게 어떨까?”
아주머니를 좋아하지만 그녀의 수다와 관심은 몹시 귀찮아하는 남자가 능숙하게 부부를 현관 밖으로 밀어냈다.
방으로 돌아온 사빛은 자기 전 책상에 앉아 컴퓨터 전원을 켰다.
그리고 휴대폰을 연결해 고모가 보내 준 할머니 사진을 화면에 띄웠다.
고모는 그녀가 안심하고 이곳에 머무르도록 매주 요양원에 찾아가 할머니가 잘 계시는 모습을 찍어 보내 주기로 했다.
한참 바라보다가 사람들 얼굴만 가려지게 모자이크 처리한 다음 그녀가 정보 때문에 가입했던 몇몇 대형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이 요양원 어디인지 아는 분 계신가요?>라는 제목과 함께.
고모와 고모부는 인터넷을 잘 하지 않는다. 지인들과의 메신저나 간단한 게임, 가끔 쇼핑과 검색을 위해 포털을 이용하는 정도였다.
재수 없게 들킨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할머니 거처를 찾고 있다는 걸 알게 되더라도 다른 곳에 모시는 방법 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테니까.
지금으로선 그녀가 1년 후에 줄 돈만이 목적일 테니 말이다.
할머니를 찾아 당장 뭘 어쩌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어디 계신지 아는 것만으로 마음이 안정되고 후일을 도모하기가 수월해질 것이다.
해서 미리 알아 두려는 것뿐이다. 여유가 되면 찾아가 멀리서라도 뵙고 오고.
할머니가 침대에 누워 계셔 단서는 많지 않았지만 아는 사람이 있길 희망해 본다.
인터넷을 끄기 전 사빛은 문득 남자가 갖고 싶다는 배가 어떤 건지 궁금해졌다. 그런 건 얼마나 하기에 저 부자 남자가 희망 사항이라고 말하는 걸까?
그가 바다에 놓아주고 온 잠수정은 무인 우주선 같은 거라 했고, 그걸 싣고 다녀온 배는 군함이었다고 했다.
해서 검색창에 ‘군함 가격’이라고 쳐 본 그녀는 뭘 잘못 본 줄 알고 눈을 크게 끔뻑인 후 다시 보았다.
1조 몇천억 원? 그가 말한 군함이 설마 저런 것들은 아닐 테고…… 좀 더 검색해 보았다.
군함 가격은 더 이상 알 수 없어 연이어 찾아본 다른 유의 큰 배들 가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내친김에 이솔 그룹의 가치에 대해서도 찾아보았다. 공시 대상 기업이라 자산 총액이 나와 있었다.
10조 원에 약간 못 미치는 금액이었다.
그럼 할아버님의 개인 재산은 얼마일까.
국내 부자 순위라고 쳐서 나온 한 게시물을 눌러 보니 재벌가 인물들이 주르륵 나열되었고 할아버님의 성함도 있었다.
그리고 이름 옆에 쓰여 있는 재산의 현재 가치를 살펴본 사빛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그의 꿈은 그리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돈이 없어서 희망 사항이라고 한 게 아니라 때가 아니라서 희망 사항이라고 말한 걸지도 모르겠다.
단돈 수천만 원이 없어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저와는 너무 비교되었다.
폭 한숨을 내쉰 사빛이 그만 컴퓨터를 종료하고 방 불을 끈 뒤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두 눈을 끔뻑거리다가 도통 정신이 말똥하기만 하여 몸을 거꾸로 눕히고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음 날, 진현당에서 마을 잔치와 함께 작은 결혼식이 진행될 거란 소리를 들은 아주머니가 화들짝 놀라 했다.
그녀는 아침 식사를 살펴 주러 안채에 와 있던 참이었다.
“예에?”
“날짜가 촉박해서 미안하긴 한데 방 여사는 할 수 있을 거야.”
이훤은 아주머니의 동그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격려하곤 2층으로 올라갔다.
식사가 끝난 식탁을 정리하며 아주머니는 자꾸만 눈동자를 굴려 사빛을 힐끗댔다.
1년간 부적 신부라고 알고 있다가 진짜 결혼식을 한다니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럼 제가 앞으로…… 작은 사모님이라고 불러야겠죠?”
처음 만났을 때 ‘어머나 작아라’, ‘반가워요’라며 격의 없이 대했던 말투와 사뭇 달랐다.
조심스러운 질문에 사빛이 생각해 보았다. 전처럼 편하게 대하라고 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부르겠다는 대로 두는 게 나을까.
중요한 문제라 잠시 신중히 생각한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네. 그렇게 하세요.”라고 말하며 일부러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친근하되 함부로 생각하지 않게’, 앞으로 이 집안 사용인들에게 유지할 그녀의 이미지였다. 방금 정한 거지만 퍽 흡족했다.
좀 전에 식사할 때만 하더라도 나이를 물어보더니 자기 딸보다 훨씬 어리다고 하대 비슷한 걸 하던 아주머니는 작은 고개인사까지 하고는 안채에서 물러났다.
‘아니, 꼭 그렇게까지 하라는 건 아닌데…….’
어른한테 고개인사를 받아 몹시 어색해진 사빛이 그러지 말라고 막으려다가 그것도 꾹 참았다.
이 집에서 그의 진짜 부인으로 살려면 익숙해져야 할 일이었다.
* * *
일주일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간 사빛은 웨딩 플래너의 도움을 받아 결혼식을 준비하며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잘 먹고 잘 쉬는 데에만 집중했다.
할머님과 작은어머님이야 이미 뵈었다지만 다른 식구들과 외할아버님, 그리고 마을 사람들한테는 첫선을 보이는 자리니까.
첫 모습이 바람 불면 넘어질 것 같은 연약한 모습이기 싫었다.
특히 작은어머님과 얼굴을 빼다 박은 그녀의 딸, 주원은 태어날 때부터 공주처럼 살아와서 그런지 콧대가 매우 높고 꿈에서의 사빛을 곧잘 무시하곤 했다.
사람 취급을 안 했던 남자 어른들이 더한 건지, 대놓고 앞에서 말과 표정으로 멸시한 그녀가 더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사용인들 앞에서 곧잘 면박을 주곤 했다.
지금으로부터 몇 개월 후 겨울.
할머님 생신에 맞춰 남자와 연희동 본가에 갔었다.
보통 한 달에 한두 번 일요일 가족 식사 때 참석했다가 바로 돌아오곤 했는데 특별한 날이라 하룻밤 묵었었다.
그리고 사빛은 언제나처럼 부엌에서 아주머니들과 함께 있었다.
수북했던 설거지를 마치고 고무장갑을 막 벗는데, 갑자기 뒷머리가 홱 잡아당겨졌다.
보니 그녀가 머리에 하고 있던 귤색 리본을 주원이 잡아채 간 거였다.
― 이거 뭐냐?
― 주세요. 제 겁니다.
― 웃기고 있네. 이 브랜드는 명품관에밖에 없는데 네깟 게 가당키나 하냐? 어디서 훔쳤어?
훔치다니. 수준 낮은 질문에 할 말을 잃었지만 돌려받아야 할 물건이기에 솔직하게 말했다.
― 할머님께서 선물로 주셨습니다.
사실이었다. 지나다 보고 어울릴 것 같아서 샀다며 건네주셨다.
― 뭐야?
주원의 매서운 두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사빛보다 나이는 몇 살 많으나 집안 사랑은 오로지 제 것인 줄 아는 철부지 여자였다. 사용인들을 하인 취급하였고, 사빛 또한 그만큼밖에 대접하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더 낮게 얕잡아 봤다. 남자와 할머님 할아버님 앞에서만 안 그런 척하고.
주원은 인덕션 위 끓는 물 안에 리본을 풍덩 넣어 버렸다. 아주머니 하나가 행주를 삶기 위해 큰 냄비에 물을 끓이고 있던 참이었다.
얇은 실크는 금세 제 형태를 잃고 쪼그라들었고, 사빛이 너무 놀라 건지려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한꺼번에 데고 말았다.
― 앗 뜨거워!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아팠으나 주원은 고소하다는 듯한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고, 그녀의 서슬에 뒤로 물러나 있던 아주머니들도 선뜻 나서 도와주는 이가 없었다.
사빛은 얼른 개수대 수도꼭지에서 찬물을 틀어 손가락을 식혔다.
그때, 작은어머님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 왜 이렇게 어수선해?
냉장고에서 수정과를 꺼낸 자기 엄마의 어깨를 끌어안고 밀 듯이 데려 나가며 주원이 말했다.
― 아무것도 아니야. 나가자.
그날 밤.
덧나면 곤란하니 아영에게 약을 부탁해 손가락 물집 위에 발랐다.
붕대까지 감고 방으로 돌아오니 그녀의 손을 본 이훤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 거긴 왜 그래?
― 아, 좀…… 다쳤어요.
― 어쩌다가?
― 그냥……. 괜찮아요.
그게 끝이었다. 그는 더 묻지 않았고, 그녀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영이가 보고 싶네. 비록 꿈에서 잠깐씩 만난 사이지만 정이 새록새록 하였다.
고등학생인 아영은 본가 사용인 중 한 명이었다.
어린 그녀는 학교도 다녀야 해서 특별히 저택 2층 관리만 전담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저택 대청소에 동원되는 것 같고.
본가에 오면 잠깐이든 하룻밤이든 2층에 머무는지라 알게 되었는데, 성격이 맞아 어느덧 마음마저 터놓는 사이가 되었다.
2층은 아버님이 어렸을 때부터 지냈던 곳으로 결혼 후 어머님도 합가해 살았고 이훤의 방도 있었지만, 현재는 그가 가끔 들를 때 외에는 비어 있다.
그러나 할머님, 할아버님은 아들을 그리워해서인지 아들이 떠날 때 모습 그대로 유지하며 먼지 한 톨도 앉지 않게 관리하신다.
아영은 어려서부터 자기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다고 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장장 수십 년간 이 집에서 외곽 청소와 자잘한 시설 관리를 하는 소사로 일하고 있는데, 숙소가 할아버님의 동양란 온실 제일 안쪽에 있다고 한다.
말도 놓고 한참 친해질 무렵 그런 사실을 말하면서 아영이 물었었다.
― 언니도 우리가 그런 데 살아 이상해?
― 아니.
예전에 시골 살 적에 반 친구 하나가 비닐하우스 안에서 살았다.
그 안에 방이며 화장실이며 부엌이 모두 갖춰져 있는 것을 보았기에 번듯한 유리 온실 안에 살림집이 있다는 사실이 사빛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둘은 잠시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다 키득하고 웃었다.
가면 있을까? 있겠지? 있었으면 좋겠다.
있냐고 그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참았다.
그래도 매주 본가에 가기로 했으니 다음 주면 볼 수 있겠네. 아영을 다시 만날 생각에 사빛은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