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그녀는 그저 그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는데 아름다운 클래식 멜로디가 너른 거실을 울렸다.
소리가 난 TV 화면으로 고개를 돌리니 몸에 착 달라붙는 블라우스와 치마를 세련되게 차려입은 아나운서가 문화계 동향을 알려 주기 시작했다.
저 여인을 안다. 굉장한 부잣집 딸이고, 남자와 어려서부터 친분이 있으며 그를 아주 많이 좋아하고 따른다.
문화 소식이 끝나자 이번엔 경쾌한 음악과 함께 또 다른 여인이 나와 날씨를 알려 주기 시작했다.
한참 날씨 이야기를 듣다가 그마저도 끝날 때쯤 그가 말했다.
“나는 무인 잠수정을 만들어. 바닷속을 자율 주행하는.”
사빛이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애들은 우주선이 우주를 탐사하듯이 깊은 바닷속을 탐사하지. 덩치가 아주 커. 게네들을 하나하나 만들 때마다 먼바다에 데리고 나가서 내려 주고 왔어.”
“…….”
“나는 말이야. 큰 배를 하나 사서 망망대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살고 싶어. 게네들 있는 곳에 하나하나 찾아가 보수나 보강해 다시 내려 주고…… 만능 수리공 알지?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돼.”
그는 로봇 공학자였다. 소수 정예 엘리트 양성으로 유명한 미국의 한 공과 대학에서 박사 과정까지 수료했다.
규모는 작지만 학생 수 대비 노벨상 수상자가 가장 많은, 공학으로는 세계 최고 중 하나라는 명성이 있는 학교였다.
그가 동료들과 함께 개발하고 특허받은 해양 탐사 로봇이 세계 바다 곳곳에 있다는 사실은 꿈을 통해 알았지만, 그의 장래 희망에 대해서는 처음 들었다.
옛날 아랫마을 기남 할아버지가 마도로스가 꿈이었다고 이야기하곤 했는데 비슷한 건가 보았다.
아주 큰 배를 가진 만능 수리공이라…… 왠지 멋있어 보였다.
“너 아까 보니까 물고기들 좋아하더라?”
“네.”
모든 동물을 좋아하긴 한데 상당히 큰 가오리와 상당히 작은 상어가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니 참으로 신기했다.
“잠수함 타 봤어? 여행지 같은 데 있잖아.”
“아뇨.”
잠수함은커녕 아쿠아리움도 못 가 봤다. 언젠가 둘 다 꼭 한번 체험해 보고 싶다.
“제주도 안 가 봤어?”
“네.”
고등학교 졸업 여행 때 갈 기회가 있었지만 그녀는 비용이 없어 빠졌더랬다.
그녀의 대답에 잠시 말이 없던 그가 어리둥절한 말을 했다.
“진짜 바닷속 보여 줄까?”
사빛이 두 눈을 슴벅였다.
“어떻게요?”
“이건 여행지 잠수함에서는 못 봐. 지금 이 시각 바다거든.”
밖을 보니 하늘이 깜깜했다. 그가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켜더니 어떤 애플리케이션을 조작했다.
“요새 시간이 많아서 녀석들 제어에 대해 좀 더 깊이 연구하고 있는데, 얼마 전에 한 놈 작게 만들어서 여기 산 너머에 있는 바다에 넣어 놓았거든.”
“얼마나 작은데요?”
사빛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저기 논에 물 주는 드론만 한 건가?
“너만 해. 계속 더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고 있어.”
“어디까지 가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곳까지.”
“벗어나면요?”
“가서 불러오면 되지. 어느 쪽으로 갔는지 아니까 고깃배 빌려 타고 쫓아가면 돼.”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며 그가 앱 속 영상을 TV 화면에 미러링했다.
그러자 사빛의 입이 아까 레스토랑 수족관을 볼 때처럼 스르륵 벌어졌다.
깜깜한 바닷속. 수중 로봇에 조명이 달렸는지 주변은 희끄무레 밝았다. 수초와 바위와 산호가 있었고, 물고기가 있었다.
마치 잠수부가 머리에 조명을 달고 느리게 앞으로 헤엄쳐 나가는 것처럼 화면이 검은 물을 가르며 천천히 움직였다. 스크린 위 계속 변하는 수치는 여기서부터의 거리인가 보았다. 점차 늘어나는 걸 보니.
작은 물고기들이 하얀빛으로 가득했다. 쉬이익- 쇠에에- 알 수 없는 기묘한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 정신을 차려 보니 등이 따뜻했다. 어느새 자신이 그의 큰 품 안에 안겨 있었다.
그녀가 멍하니 돌아보자 그가 혼잣말처럼 느릿하게 말했다.
“당황하거나 할 말이 없으면 빤히 쳐다보는 버릇이 있네.”
아까의 입맞춤도 그렇고, 자기가 하는 행동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자연스럽다.
그러는 그도 문득문득 그녀를 지금처럼 지그시 바라보곤 했다. 꿈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 손을 찔러 넣더니 가만히 입술을 맞부딪혔다.
그렇게 입과 입이 붙은 채로 그녀는 살짝 얼어붙었다. 당연한 말 같지만 이마에 닿았던 감촉과 또 달랐다.
촉촉한 감각에 손끝이 떨려 왔다. 내내 담담한 그의 눈을 마주하며 그의 가슴팍 셔츠를 움켜쥐는데, 그녀의 몸이 허공을 가르더니 순식간에 바닥에 눕혀졌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긴 머리카락이 카펫 위로 쏟아졌다.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 옆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은 그가 다시금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붙잡힌 턱 덕분에 벌어진 작은 틈으로 그의 입술이 비집고 들어왔다.
“으음.”
아릿한 감각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올라왔다.
현실로 치면 두 번째 키스였다. 처음보다는 약간 더 진해진.
미끄덩한 살이 천천히 그녀의 잇새를 벌리며 안으로 밀려들었다. 온몸에 싸한 전율이 일며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지만 입 안을 가득 메우는 뜨거운 살덩이에 사빛의 눈꺼풀이 파르르 진동했다.
‘간지러워.’
누군가 가슴 깊숙한 곳을 쥐고 간지럼을 태우는 것 같았다. 그에게 깔린 채 온몸이 뜨겁게 조이며 이내 눈도 감겼다.
그가 혀끝을 세워 그녀의 입 안 구석구석을 훑기 시작했다.
그를 붙든 손에 힘이 꾹 들어가는데, 그가 그녀의 등과 카펫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그녀를 제 쪽으로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얇은 옷 너머로 그의 근육들이 와 닿았다.
또다시 신음이 나왔지만 이번엔 밖으로 흐르지 못했다.
이 와중에도 그의 혀는 연신 그녀의 내밀한 점막을 헤집고 휘저었다. 그러다가 쭉 빨아들이기까지.
진득하고 질척한 소리가 귓바퀴를 어지러이 간지럽혔다. 달뜬 입과 입 사이로 호흡이 한데 섞여 뜨겁게 휘몰아쳤다.
사빛은 점점 숨이 벅차 왔다. 그가 주는 자극이 너무 홧홧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버거워하자 뒤얽힌 혀를 빼낸 그는, 입술의 물기를 닦아 주곤 아랫입술을 베어 물고 빨더니 다시 한번 혀를 깊숙한 곳으로 미끄러뜨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느낌으로는 아주 긴 시간이 흐른 듯한데 그가 갑자기 그녀에게서 입술을 떼어 냈다.
여전히 그녀의 목덜미를 쥔 채 윗몸을 비스듬히 세우고는 이상한 말을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그만 자라.”
기묘한 상실감이 밀려왔다.
나뭇잎들이 스산한 바람에 바스락바스락 흔들리는 소리만 있는 숲속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다.
깊은 바다의 소리가 여전히 쉬이익, 쇠에엑 공기를 울렸다. 거기에 그의 심장 소리가 둥둥거리며 섞여 들었다. 가까이 있었기에 꽤 생생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녀의 심장 또한 정상은 아니었다.
“아직…… 10시도 안 됐는데요.”
“이제 그만 혼자 놀아.”
“아.”
자신이 방해되나 보다 생각한 사빛이 허리를 세우려 했다. 그러나 그가 가로막고 있어 뜻대로 할 수가 없었다.
억지로 밀어내듯 일어서자 그도 마지못해 윗몸을 일으켜 앉으며 그녀의 몸을 바로 해 주었다.
‘가라면서…….’
제법 짙어진 그의 눈동자를 가만히 마주하고 있는데 바깥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적막에 싸인 외딴곳이라 협문 밖에서부터 가까워져 오는 발소리가 아주 잘 들렸다.
“도련님, 저희 왔어요.”
행랑채 아주머니의 목소리였다. 늦은 밤이나 내일 아침 일찍 온다던 관리인 부부가 예정보다 좀 이르게 돌아왔다.
* * *
“어머낫, 작기도 해라.”
눈도 동글, 코도 동글, 모든 것이 동그란 아주머니가 사빛을 보고 처음 한 말이었다.
본인의 키는 사빛보다 훨씬 작으면서 매우 어리다는 표현을 그리한 것이다.
“반가워요. 난 방영희, 여긴 내 남편 태철수 씨. 도련님, 식사는 했어요?”
여러 가지 말을 섞어서 하는 버릇도 꿈과 같이 여전하였다.
방실방실 웃음이 많은 아주머니와 달리 남편인 태 씨 아저씨는 과묵하다. 순하디순한 멀대 아저씨였다.
아저씨가 딱 필요한 말 외에는 말이 없고 딱 해야 할 일 외에는 별다른 움직임도 없는 건 어렸을 적 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져서 머리를 다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또한 꿈에서 아주머니의 수다를 통해 얻은 정보였다.
대신 게으름 안 피우고 술, 담배도 안 하고 마누라를 업신여기지도 않으니 좋다고 했던 것 같다.
사실 아주머니는 말이 너무 많은 사람인지라 그녀의 모든 말을 기억하는 건 상당히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말은 또렷하게 기억난다.
아주머니는 사빛을 작고 탐스러운 꽃봉오리라고 말하곤 했다. 작고 탐스러운 꽃봉오리, 그 말이 참 듣기 좋았다.
어쨌든 아주머니의 말은 대부분 살아가는 데 중요하지가 않은 것들이기에 나쁜 마음을 먹어서가 아니라 저절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게 된다.
그걸 아저씨는 늘 묵묵히 들으며 중간중간 어, 어, 하고 대답까지 착실히 해 주니 진정한 천생연분이 아닐까 사빛은 생각하곤 했다.
이리도 좋은 사람들조차 지금으로서는 완벽하게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 아플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