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나머지는 백화점 쇼핑 도우미가 나와 모두 해결해 주었다.
사실 카드도 도우미에게 맡기면 되었지만 그리되면 그가 너무 할 일이 없었다. 따라 나온 보람이 없는 것이다.
그녀는 앞으로 살을 좀 찌울 작정이라며 집에서 입을 옷가지 몇 벌과 외출복 두어 벌만 사겠다고 했고, 성격이 원래 그런 건지 물건을 고르는 데 그리 오랜 공을 들이지 않았다.
신발 같은 잡화까지 사는데 한 시간 반 정도 걸렸고, 1층 보석상에 들러 단순한 모양의 커플링을 함께 골랐다.
그리고 식사하기 위해 꼭대기 층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올라가려 했는데, 그녀가 새까만 눈동자를 불안하게 굴리며 안절부절못했다.
“왜, 또. 뭐가 문젠데.”
“저…….”
그녀는 선뜻 말하지 못하고 시선을 멀리 다른 곳으로 돌리며 우물쭈물했다.
“그냥 말해. 괜찮아.”
“죄송하지만 카드 잠깐만 주시고 먼저 올라가 계시면 안 될까요? 금방 따라갈게요.”
“뭐 안 산 거 있어?”
“네.”
“뭔데. 같이 가.”
도우미도 쇼핑백들을 들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 터였다. 혼자 보낼 수 없었다.
“아뇨! 저 혼자 가고 싶어요.”
황급히 만류하는 모습으로 보아 여성용품이라도 사려는 건가 싶어 그러라고 카드를 내준 이훤은, 종종거리며 가는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그녀는 환자였다.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찌하는가? 보호해야 했다.
그녀가 간 곳은 다름 아닌 속옷 매장이었다. 귀여워서 픽- 하고 웃음이 나는데, 등 뒤에서 높은음의 코맹맹이 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혹시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보니 그가 선 곳 바로 앞 매장의 직원이었다. 두 손을 곱게 맞잡고 과하게 상냥한 얼굴로 방글거리고 있다.
주 간호사를 보는 듯했다. 그만 보면 언제나 좀 과하다 싶은 미소를 짓고는 하이 톤의 친절한 말을 건네곤 한다.
어제 아침 여자의 처방 약과 영양제를 준비해 와서도 역시나 그러더니, 잠들어 있는 여자를 보고 누구냐고 자꾸 묻기에 짧게 대답해 주었다.
― 내 아냅니다.
그 뒤로 주 간호사는 웃지 않았다.
“저 여자 사이즈와 내 사이즈로 이거 다섯 개 세트로 주시죠. 부부거든요.”
이훤이 그의 곁에 서 있는 마네킹이 입은 커플 잠옷 포함, 진열된 나이트 전용 이지웨어들을 가리키며 또 다른 카드를 내밀었다.
여직원이 그가 말한 방향을 보더니 황급히 과한 미소를 지우고 정제된 직원 태도로 돌아가 공손히 카드를 건네받았다.
“좀 있다 따로 가지러 올 겁니다.”
계산이 진행되는 동안 이훤은 쇼핑 도우미에게 연락을 취했다.
[네, 고객님.]
“어디 계십니까?”
마침 일을 마치고 올라오려 한다기에 사빛을 만나 도와주고, 자신이 산 물건도 찾아서 함께 차에 가져다 놓으라고 지시했다.
“욕실용품이나 화장품 같은 것도 사라 하시고요. 슬리퍼든 뭐든 필요한 건 다 사도록 도와주십시오.”
사빛이 도우미를 만나는 모습까지 지켜본 이훤은 백화점 내 커피숍으로 갔다.
그녀가 쇼핑을 마치고 올 동안 입이 심심할 것 같아서였다. 아이스커피를 한 잔 사서 식당으로 가려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는데 뭔가 개운치가 않고 은근하게 찝찝했다.
마침 휴대폰 문자로 전송되는 카드 사용 내용을 무심히 본 이훤은 막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버리고 그녀가 있다는 매장 쪽으로 향했다.
아이스커피를 쪽쪽 빨며 두 여인의 쇼핑을 묵묵히 지켜보던 이훤은, 도우미와 헤어진 사빛이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몸을 움직이자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 * *
“할머니는 많이 편찮으셔?”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대형 수족관이 인상적인, 퐁듀가 제법 맛있는 레스토랑에 마주 앉아 식사하는 중에 이훤이 물었다.
포크를 든 채 가오리와 귀상어를 보느라 넋이 빠졌던 사빛이 그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네.”
“그럼 주말에 못 오셔?”
“네. 거동이 불편하세요.”
“가까운 친척은? 할머니가 그러는데 고모네가 가깝다며.”
고모네란 말에 사빛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여기 내려오기 전날이었다.
도통 잠이 오지 않아 몸을 뒤척이다가 물을 마시기 위해 부엌으로 나섰다.
깊은 밤인데다 원래 이 집에선 있는 듯 없는 듯 지내야 해서 조용히 몸을 움직이는데, 안방 문 너머에서 두런거리는 대화 소리가 들렸다.
보니 방문이 반쯤 열려 있고, 이불에 엎드려 누운 고모부가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 잘 지키고 있어?
자다 깼는지 목소리가 잠겨 있는 고모가 물었다.
― 그럼 잘 지키지. 아무 소리 없는 거로 봐서 자나 봐. 와 씨.
― 왜.
― 그놈 집안, 알면 알수록 대박이야. 외가도 그렇더니만 그 할마씨 집안도 대단하네. 이거 생각이 좀 달라지는데.
― 뭘?
― 위자료 좀 받고 물러나는 것보다 오래오래 며느리 노릇 하면서 우려먹는 게 이득 아니야?
― 그게 뭐 그러고 싶다고 되는 문젠가. 걘 며느리가 아니고 그냥 부적이야.
― 그러니까. 그놈은 쟤가 있어야 신수에 좋다며.
― 어디 가서 입조심 해라. 함부로 떠벌리면 죽 된다. 잘 지켜. 3시에 교대하자.
― 지가 가면 어딜 간다고 이렇게까지 난린지 모르겠네. 장모님을 우리가 데리고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 그래도. 만사가 불여튼튼이란 말도 있잖아.
― 문자 쓰지 마라. 공부하기 싫어 고등도 중퇴한 생날라리 주제에.
― 맨날 지는 정상 졸업한 사람처럼 말하더라? 어쨌든 내일 그 집에 쟤를 넘겨줘야 이때껏 받은 거 토해 낼 일 없는 거야, 알았어? 네가 다 썼잖아.
― 알았다. 쳐 자라, 3시에 깨울 테니. 그리고 난 검정고시 땄거든?
― 그래, 네 팔뚝 굵다.
그런 고모와 고모부이기에 사빛은 정식으로 이 남자와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리기가 싫었다. 알게 되면 또 어떤 욕심을 부릴지 모른다. 우선 진짜 사돈 행세를 하려 들 것이 뻔했다.
언젠가는 밝혀야 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괜한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일이었다.
사빛이 제 앞의 음식을 입에 넣으며 조용히 뜻을 전했다.
“전에 산에서 했던 혼례식에 참석했으니까 이번엔 안 와도 돼요. 어차피 직계 가족도 아닌걸요.”
다행히 그는 더 묻지 않아 주었다.
사빛은 자신이 가족이 없는 게 마을 사람들 앞에서 그의 위신에 부끄러운 일일까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그런 걸 생각했다면 그가 굳이 결혼식을 한 번 더 하자고 말하지 않았을 테니까. 아무리 시골에서 조용히 치른다고 해도.
괜찮으니까 하는 거겠지.
그렇다면 그녀도 괜찮으면 될 일이었다. 괜히 스스로 기죽을 필요 없다.
신데렐라나 심청이가 왕자님의 배필이 되었다고 왕실 사람들이나 국민 앞에서 기죽어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정말 이상했다. 어깨 펼치고 당당하게 구는 게 맞았다.
그들이 뒤에서 뭐라고 수군대든 간에.
그날 밤.
샤워를 마친 사빛이 이훤이 산 이지웨어 중 무릎까지 내려오는 체크무늬 원피스를 입고 욕실에서 나왔다.
비슷비슷한 걸 참 많이도 산 걸 보고 웃음이 났더랬다. 쇼핑을 잘 못 하나? 옷을 못 입는 거 같진 않던데.
이훤은 거실 소파에 앉아 뉴스를 보고 있었다. 꿈에서의 그는 TV를 거의 보지 않고 이처럼 아침저녁으로 뉴스만 시청하곤 했다.
가끔 꽤 어려워 보이는 어둡고 진지한 영화를 보기도 했지만 달에 한두 번쯤이었다. 그는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을 2층에 있는 작업실이나 뒷산 너머에 있는 바다에서 보내곤 했다.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 섰던 사빛은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가 앉은 소파 밑에 자리하고 앉아 그녀도 가만히 TV를 봤다.
꿈 같았으면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제가 머무는 공간으로 들어갔을 터였다. 그러나 그녀는 바뀌기로 했고, 어젯밤의 경험도 있고 하여 용기를 내 보았다.
TV는 한참 이런저런 사회 뉴스들을 짤막짤막하게 방송하고 있었다.
빠져들어 보고 있는데, 정수리로 크고 단단한 손이 와 닿았다. 뒷머리를 쓱 쓸어내리더니 머리카락 끝을 가져가 손가락으로 가만히 만지작거리는 듯하다.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자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눈과 마주쳤다. 기다란 눈매, 내리깐 속눈썹이 예뻤다. 드센 듯 부드럽다.
“올라와 앉아.”
“여기가 편해요.”
그녀는 바닥 문화에 익숙하기도 하거니와 크림색 양탄자가 폭신하니 감촉이 참 좋았다.
신기하게도 그제의 꿈은 그토록 선명하고 강렬한데 이런 세세한 것들은 잘 기억나지가 않았다.
어젯밤 연못에 대한 감상, 여기 사는 오목눈이나 도롱뇽 같은 애들, 이곳저곳에 흐드러진 꽃들, 그리고 이 카펫의 감촉 같은 것들.
일일이 마음에 담을 만큼 여유가 없었던 걸까?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짧은 시간에 그 많은 이야기가 흘렀으니 어떻게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을까.
더구나 뒷부분이 너무 충격적이라 여기 와서의 초창기는 기억나는 게 많지 않았다. 문득문득 떠오르거나, 작정하고 생각하면 알 수 있는 정도였다.
잠시 그녀의 눈을 내려다보던 이훤도 곁에 와 긴 다리를 뻗고 앉았다.
가만 보고 있자니 그도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다가 뺨과 턱을 한 손에 쥐듯이 잡고는 엄지로 가만가만 쓴다.
사빛의 심장이 가늘게 요동쳤다.
“좋은 냄새가 나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방금 씻었으니 샤워 용품 냄새가 날 터였다.
“백화점에서 사 주신 것들 때문이에요. 고맙습니다.”
그녀의 말에 피식 웃은 그가 뒷덜미로 손을 돌렸다. 그러고는 살짝 잡아당기며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입술을 붙였다 뗐다.
가벼운 입맞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