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그가 조용히 말끝을 흐리자 사빛이 고개를 돌려 그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달빛이 내린 얼굴은 여전히 잠잠하고 고요했다.
“다음 주말에 오시겠대, 친할아버지가. 할머니도.”
“아…….”
“조금 전에 연락 왔는데, 작은아버지 가족들과 함께 식에 참석하신다고 해. 그래서 미리 말해 두는 거야. 이상해할지도 몰라서. 민감한 사안이니까 어른들 앞에서는 내색하지 말고.”
“네, 그럴게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너도 부르고 싶은 사람 있으면 불러. 그냥 외할아버지하고 마을 사람들한테 인사나 하고 밥이나 먹으려던 건데 일이 좀 커졌다. 아무래도 결혼인데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나 봐. 웨딩 플래너 고용할 거고, 잔치는 행랑채 아주머니 전문이니까 신경 쓸 거 없어.”
“네. 근데…… 그래서 말인데…… 저 내일 시내 좀 나갔다 와도 될까요? 주신다는 카드도 이참에 주시면 참 좋겠는데.”
“왜, 뭐 살 거 있어?”
“실은 사람들 만나기 전에 옷이든 뭐든 좀 갖추고 싶어서요.”
사실 내일 아주머니 오기 전부터 미리 갖추고 싶었지만 제 입으로 먼저 카드 달라기 뭐해서 참았다.
그런데 웨딩 플래너도 만나야 하고 주말에 가족들도 온다고 하니 어차피 이리된 김에 용기를 내 보았다.
“몸도 안 좋은데 천천히 하지 그래.”
“분명 뒷말이 나올 거예요.”
그녀가 자신의 차림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무슨 말?”
“남편 덕에 호강한다고요. 물론 맞는 말이지만 그게 저한테도, ……한테도 그리 좋은 건 아닌 듯해서요.”
“나 말이야?”
“…….”
“뭐라고 부른 거야?”
그가 기울인 고개로 이마에 주름까지 만들며 물었지만 사빛은 대답할 수 없었다.
안 불렀다. 마땅히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꿈에서도 적당한 호칭이 없어 안 부르다가 사용인들 따라 도련님이라고 불렀었다.
처음 그렇게 불렀을 때 재밌다는 듯 쳐다보며 픽 웃은 남자는 그 뒤로 쭉 별말이 없었고, 그렇게 그냥 굳어져 버렸다.
이 집 사람들도 그녀가 어떤 처지로 그의 곁에 있는 건지 다 아니 그러려니들 했고.
지금 생각해 보면 1년 후 떠날 부적 신부인 그녀가 서방님이라며 살갑게 부르는 것도 이상해 보이긴 매한가지였으리라.
이러나저러나 이상한 존재. 꿈속의 그녀는 그러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달라졌고, 그녀 또한 그때와 똑같이 살기 싫으므로 다른 호칭을 찾아야 했다.
서방님은 너무 옛날 사람 같아서 이상하고, 여보 당신은 너무 나이 든 사람 같아서 싫고, 오빠는 민망해서 할 수가 없고.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사빛이 나름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데 이훤이 아무렇지 않게 결론을 내렸다.
“이름 불러.”
“네?”
“나 부를 때 내 이름 부르라고.”
“…….”
사빛이 그의 눈을 마주한 채로 스르륵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멍한 눈을 실룩거렸다.
그가 이상하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
까칠한 말투나 시크한 표정, 무심한 행동거지들을 보면 꿈에서 본 그가 확실한데. 청혼도 그렇거니와 아까의 느닷없는 키스도 그렇고 왜 자꾸 저러는지 알 수가 없다.
꿈에서의 권이훤이란 사람과 또 다른 권이훤이란 사람이 뒤섞여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것도 내가 뭔가를 바꾸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나의 무슨 행동이 그를 변화시켰나?
겉으로 표현하진 못하지만 영 꺼림칙하고 기분이 묘했다. 그녀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그가 또 물었다.
“내 이름 알지?”
“…….”
“몰라? 내 이름은 권이훤이야. 네 나이가 많이 어리니까 막 부르진 말고 뒤에 ‘씨’ 자 붙여. 사실 진짜 이름은 ‘훤’ 한 글자인데, 외가 사람들 말고는 전부 이훤이라고 부르니까 훤이라고 하든 이훤이라고 하든 네 마음대로 해. 난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이렇게 길게 뭔가를 설명해 주는 건 꿈과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고.
“대답해.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빨리빨리 대답 안 하면 답답하단 말이야.”
이렇게 까칠하게 구는 건 꿈과 똑같았다.
“네, 말씀대로 할게요.”
“그래. 그럼 이만 들어가자.”
“네.”
“손잡을까?”
헉-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지는 말에 사빛은 이제 조금 울고 싶어졌다.
그녀와 달리 그는 여전히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커다란 한 손을 내밀었다.
바라보자니 긴 손가락들이 시리도록 단정하고 정갈했다.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남자의 손을 한참 바라보다가 살며시 그 위에 손을 올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손을 잡고는 함께 정자에서 벗어났다.
“카드는 새로 만들어서 줄게. 내일은 나랑 같이 가. 반지도 살 겸 백화점 가자.”
이훤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앞서 걷기에 사빛이 끌려가듯이 뒤따르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그런데 왜.”
“……?”
“왜 저한테 이렇게 잘해 주세요?”
그녀의 물음에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빤히 쳐다본다. 단단하고 짙은 눈동자가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게 싫어?”
“싫다기보다 이해가 가지 않아서요.”
“어째서?”
“음…… 우린 어제 처음 만났고……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라고도 하셨고…… 또…….”
정확히 뭐라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왜 자꾸만 꿈과 다르게 행동하느냐고 물어볼 수는 없으니까.
웅얼거리듯 늘어놓자 그가 쯧- 혀를 차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나무랐다.
“우린 부부 하기로 했고 넌 내 신부잖아. 신랑이 신부한테 잘해 주는데 왜가 어딨냐?”
어떻게 그런 것도 모르느냐는 말투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엉뚱한 걸 묻는다.
“앵두 좋아해?”
좋아한다. 앵두, 버찌, 보리수. 그렇게 생긴 것들 다 좋아한다.
“네.”
“이리 와 봐.”
이훤은 그녀를 광채 쪽으로 이끌었다. 여전히 손이 붙들린 채 끌려오는 그녀를 흘끗 뒤돌아본 그는 걷는 속도를 한껏 늦춰 주었다.
그가 그녀를 데려간 곳은 몇 그루의 과수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곳이었다.
앵두나무의 앵두가 아주 잘 익은 채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끝물이라 그런지 색이 굉장히 빨갰다.
그가 툭툭, 툭툭 한 움큼 따서 내밀자 뒤에 서 있던 그녀가 두 손을 내밀어 받았다.
“몸에 좋은 건데 열이 났었으니까 조금만 먹어.”
그렇게 말하면서 또 한 움큼 따서 그녀의 손 위에 수북이 얹는다.
이렇게 많이 주면서 조금만 먹으라니. 사빛이 두 손 가득해진 앵두들을 당장 어찌해야 좋을지 곤혹스러워하는데 그가 해결책을 주었다.
“주머니에 넣어 봐.”
그녀가 그의 말대로 앵두를 치마에 달린 커다란 주머니에 넣자 그가 또다시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
“가자.”
그러고는 안채를 향해 걷는다.
현관 앞에 도착한 그가 잠금장치의 커버를 올린 후 비밀번호를 눌렀다.
“잠이 안 와?”
묻는 그의 말에 사빛이 조용히 대답했다.
“네. 아까 낮잠을 많이 잤더니.”
이훤은 문을 활짝 열고는 그녀가 들어가도록 한 발자국 비켜났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서자 그도 뒤따라 들어섰고, 곧 삐리릭 하고 현관문이 잠겼다.
“이제 약 먹을 건데 그럼 또 잘지 몰라요. 수면제가 든 것 같아요.”
“몸은 좀 괜찮고?”
“네. 비를 맞아서 잠깐 열이 오른 것뿐인데요.”
그녀가 임시로 머무는 장소인 서재가 현관에서 가까운 곳이라 많이 들어갈 수 없었다.
대화가 이어지자 복도에 멈춰 선 사빛 앞에 이훤도 멈춰 서 있었다.
“한 며칠 쉬면 완전히 괜찮아질 거예요. 사실 제가 한동안 잠을 좀 못 잤어요. 밥도 잘 못 먹고.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잘 먹고 잘 자면 금방 좋아질 거예요. 제가 보기보다 튼튼해요.”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차원에서 사빛이 활짝 웃어 보였다.
“다행이네.”
“네.”
그러고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빛은 왠지, 그가 뭉그적거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에서 알게 된 그는 이런 데 이유 없이 오래 서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물었다.
“잠 안 오면 영화 한 편 보고 잘래? 짧은 거로.”
이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와 영화라니.
“……네.”
“그래. 무슨 영화 좋아해?”
“음.”
그녀는 주로 밝은 휴먼 드라마나 로맨틱 코미디를 즐겨 보았다. 꿈에서 본 그의 영화 감상 취향과는 전혀 달랐다.
그녀는 잠시 고민했다.
꿈의 그녀라면 그에게 맞춰 보겠다고 할 것이고, 바뀌기로 한 자신은 진짜 보고 싶은 걸 말해야 할 터였다.
머리가 복잡해지려 하자 사빛은 또다시 배시시 웃어 버렸다.
“아무거나 볼게요.”
앞으로 얼마나 치열한 시간이 그녀 앞에 펼쳐질지 모른다. 이런 일 하나하나에 골치 아프기 싫었다.
“다큐멘터리도 좋고요. 애니메이션도 좋고요. 무서운 것만 빼고 다 좋아요.”
“공포 영화 못 봐?”
“네. 보면 그날 밤 꿈에 꼭 나오더라고요.”
잘게 어깨를 떠는 그녀를 보고 그가 픽- 웃었다.
“그래 그럼. 약 먹고 나와. 볼 만한 거 몇 개 찾아 놓을 테니까 네가 골라.”
“네.”
미소와 함께 대답한 사빛은 우선 서재로 들어가 책상 위에 있는 약을 먹었다.
그러고는 곧 주방으로 가 주머니에 있던 앵두들을 체에 씻어 예쁜 접시에 담아 거실 소파로 향했다.
하늘의 달이 선명했다.
보름달 주위로는 소금 같은 별들도 초롱초롱했다.
비 온 뒤라 그런지 세상 모든 것이 맑게 반짝거리는 그런 날이었다.
* * *
다음 날, 그들은 함께 인근 시에 있는 백화점에 갔다.
이곳은 도에서 가장 큰 시이고 백화점이 KTX 역사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어 규모가 작지는 않았다.
이훤이 사고자 한 반지에서부터 그녀가 필요하다는 것들, 그가 그녀에게 먹이고 싶은 고기 구매까지 모두 한곳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직 환자이므로 두어 시간 안에 얼른 일 보고 점심을 외식으로 해결한 후 집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그렇게 이훤은 난생처음 엄마나 할머니가 아닌 여자와 백화점 쇼핑을 했다.
그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라고 주워들었는데 막상 해 보니 별것 아니었다. 그냥 졸졸 따라다니다가 계산하는 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