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 * *
서울 교동에 있는 IS 갤러리.
중앙 정원에 선 커다란 금속 조형물을 사이에 두고 독특하고 세련된 건물 두 개가 기역 자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위치가 외진 데다 규모 또한 크지 않지만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주중에는 한가하고, 주말은 전시의 시작 등으로 갤러리가 가장 바쁠 때였다.
저녁이 다가오자 하나둘 켜지는 조명이 건물과 정원 곳곳을 밝히고, 본관 3층 가장 안쪽에 있는 관장실에도 불이 환했다.
이훤과의 전화를 끊은 윤 관장은 싱글벙글,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검은색 원피스에 연보랏빛 머플러와 은빛 브로치, 그리고 눈이 내린 것 같은 하얀 백발을 느슨하게 틀어 올린 모습이 고아했다.
고생이라고는 태어나 한 번도 안 해 봤을 듯한 우아한 자태. 실제 나이보다 열 살은 젊어 보였다.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고 양수영 기획실장이 안으로 들어섰다.
큰 깃의 갈색 정장에 금빛 장신구들로 세련되게 치장한 50대 여성으로, 윤 관장의 며느리였다. 정확히는 윤 관장의 남편인 권 회장의 며느리일 뿐이지만.
법적으론 그랬지만 함께한 세월이 장대하고 양 실장이 무척 살갑게 윤 관장을 섬기는지라 사이가 제법 좋았다.
해서 올해 연말 80세 생일을 계기로 물러난다고 공표한 윤 관장을 대신할 차기 관장으로 유력한 인물이었다.
나무로 된 차 쟁반을 들고 들어선 양수영이 짙은 향수 냄새를 풍기며 윤 관장 책상 앞으로 와 투명한 유리잔에 든 국화차를 내려놓았다.
이 시간이 되면 늘 자발적으로 하는 차 심부름이었다.
시어머니이자 직속상관인 윤 관장의 밝은 모습을 본 그녀가 함께 미소 지으며 물었다.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며느리의 물음에 윤 관장이 부드럽게 되물었다.
“그래 보여?”
“네, 표정이 너무 밝으세요. 뭔데요. 저도 알려 주세요.”
“새아기 말이야. 우리 손주며느리가 아주 보배였어, 보배.”
“손주며느리라면…… 이훤이 그 아가씨 말씀이세요? 뭔데요. 무슨 일 있어요?”
윤 관장이 수영에게 이훤과의 통화 내용을 전해 주었다.
“어머, 정말 잘됐네요. 어머님 좋으시겠어요. 이제 이훤이 자주 볼 수 있겠네요.”
“응, 너무 좋다. 제 입으로 직접 손주 얘기도 하고.”
윤 관장의 주름진 눈매에 짙은 감회가 젖어 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맑은 빛이 몰려들며 투명하게 반득거린다.
“이참에 저 하는 일로 작게라도 차려 줄까 봐. 공부도 끝났는데 왜 계속 밖에만 있으려는지……. 자식 생기고 하는 일에 흥미 붙이면 안 나가지 않을까?”
로봇이 차세대 융합 산업의 주역이 될 것으로 관심받은 지는 꽤 되었다.
이젠 고도화 혹은 특화되는 지경까지 이르렀지만, 아직 시장이 무궁무진하고 이훤의 연구 분야는 매우 전문적이고 특수해서 투자해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흥분으로 인해 시시각각 변하는 윤 관장의 얼굴에 은근한 기대가 차올랐다.
그러다 또 문득 근심 어린 표정이 되어 “새아기 보약도 좀 먹여야겠어. 병구완하느라 힘들었는지 볼 때마다 살이 쪽쪽 빠지는 것 같아. 안 그렇니?” 한다.
관장실을 나와 제 집무실로 돌아온 수영이 거칠게 책상 의자를 빼내 앉았다.
새빨갛게 칠한 입술을 말아 물고 잠시 생각하다가 휴대폰을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애들 어때?”
묻는 목소리에 아까와는 달리 온기가 한 톨도 없었다.
[무슨…….]
돌아오는 무딘 소리에 날 선 신경질까지 낸다.
“어제 애 갔잖아.”
자신이 직접 진현당 대문까지 데려다주고 왔다. 이야기를 척척, 빠르게 진행하지 않는 저 특유의 느림이 수영은 몹시 답답했다.
[아…… 말씀하신 그…… 죄송합니다. 저희 딸애가 갑자기 조산하는 바람에 며칠 서울에 와 있어요. 내일 밤에나 내려갈 듯합니다.]
“신경 써서 좀 봐야겠어. 그냥 시골뜨긴가 했더니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아.”
바로 내쳐지지나 않을까 했는데 진짜 결혼을 한단다. 거기까진 나쁜 소식이 아닌데, 어찌 보면 참 좋은 소식인데 이상하게 찜찜했다.
이훤이 잘 안 오던 가족 모임에 매주 온다질 않나, 어머님은 이참에 눌러 앉히고 신규 사업을 지원해 준다질 않나.
그녀의 생각과 조금 다른 결로 흘러가는 것이다.
권이훤 주변은 통제가 가능해야 했다. 그것은 수영의 사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뭐지? 비실거리고 조막만 한 게 어떻게 권이훤을 움직였지?’
그간 이훤이 사귀었던 여자들을 면밀히 꿰뚫고 있는 수영이기에 어머님으로부터 통화 내용을 듣는 순간 몹시 의아했다.
인물이 좀 반반한 거 같긴 해도 절대 권이훤이 좋아할 만한 스타일이 아니었다. 구질구질한 차림새며 우울한 낯빛까지.
거기다 며칠 전 봤을 때는 푸석하게 말라서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훤뿐만 아니라 어떤 남자라도 동하기 힘들어 보였다.
그런데 하룻밤 새 일이라도 치른 건가? 알고 보니 그 애는 천하의 요물이었던 게고?
어떤 남정네라도 치마폭 안에서 살살 녹일 수 있다는 뭐 그런.
‘허!’
여기까지 생각한 수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시조카인 이훤은 그렇게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냉한 녀석이 겉으로는 예의를 갖추는 듯하면서 제 남편과 저를 한없이 낮잡아 볼 때마다 피가 거꾸로 치솟는 느낌이었다.
머리가 좀 크면서, 그러니까 10대 후반 이후부터 그랬던 것 같은데 단 한 번도 왜 그러느냐고, 그러지 말라고 좋게라도 타이르지 못했다.
권이훤은 밤이 아무리 좋았다고 한들 베갯머리송사에 휘둘릴 애가 아니었다. 나조차도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그 기를 어떤 여자가 꺾을까.
하니 분명 다른 뭔가가 있다. 해서 자신이 놓친 게 무엇인지 머리를 바쁘게 회전시켜 보았으나 해답은 없었다.
어쨌든 그 애가 뒷배경 하나 없는 보통의 여자애고, 이훤이 그녀를 만난 건 어제가 처음이란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건 자기가 정말 철저하게 조사했으니.
“걔들 좀 유심히 봐야겠어. 특이 사항 보일 때마다 바로바로 연락해.”
우선은 침착하고 차분하게 살펴봐야겠다. 권이훤 녀석의 진짜 의도가 뭔지. 여자애는 어떤 앤지.
그러고 보니 어디서 본 얼굴 같은데 당최…… 수영이 골똘히 생각하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어제 숍에서 발라 붙인 인조 손톱 하나가 톡 하고 떨어져 나갔다.
수영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아, 나.”
* * *
“뭐 하냐?”
이훤의 목소리에 주방에 서 있던 사빛이 돌아보았다.
그가 들이치는 노을빛을 받으며 2층 계단에서 터덜터덜 내려오고 있었다.
“아, 저녁 식사 준비 좀 하려고요.”
냉동고에 있던 미역국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해동한 후 한 번 더 끓였고, 냉장고에 달걀과 채소가 있기에 오믈렛을 만들던 참이었다.
주방으로 들어선 이훤이 개수대에서 손을 씻으며 명령하듯 이야기했다.
“저리 가 있어. 넌 환자잖아. 준비되면 부를 테니까 TV를 보든지 들어가 책을 보든지 해. 서재 컴퓨터 써도 되고.”
“아니, 전 괜찮은데.”
“얼른 건강해져라. 주말에 결혼할 건데 그 몸으로 어떻게…… 행사를 치르고…….”
“……?”
이훤이 어울리지 않게 말끝을 흐리자 사빛이 쳐다봤으나 그는 그녀를 보지 않고 퉁명스러운 어조로 또다시 명령했다.
“들어가 있어.”
“같이 해요. 저 오믈렛 잘 만드는데, 금방 만들게요. 준비 다 됐어요.”
그렇게 ‘들어가라, 괜찮다’, ‘그럼 구경이나 해라, 싫다’ 옥신각신 티격태격하다 보니 어느덧 식탁 위에 그럴싸한 저녁상이 차려졌다.
갓 지은 밥에 따끈한 미역국. 아주머니가 만들어 놓은 다양한 밑반찬과 사빛이 만든 오믈렛. 그리고 이훤이 구운 소고기와 각종 채소까지.
한 끼 식사로 모자랄 데가 없었다.
“잘 먹네. 원래 그렇게 밥을 많이 먹어? 나보다 더 먹네.”
한창 식사가 끝나갈 때쯤 이훤이 물었다.
“잘 먹기로 했어요.”
“그래, 뭐…… 살은 좀 쪄야겠다. 부러지겠어.”
“부러져요?”
“응.”
사빛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어.”
“부러지는 상상 하니까 웃겨서요.”
그런 그녀를 빤히 보던 그도 픽 웃었고, 사빛도 또다시 따라 웃었다.
식사가 끝나자 이훤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빈 그릇들을 개수대로 옮기기 시작했다.
“씻고 쉬다가 자라.”
사빛도 그릇들을 들고 개수대 쪽으로 향하다 뒤돌아서는 그와 정통으로 부딪칠 뻔했다.
놀란 사빛이 황망한 눈을 들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고 지그시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어색한 상태로 침묵의 시간이 흐르자 사빛이 겸연쩍은 웃음을 헤벌쭉 웃어 보였다.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훤이 그녀 손에 있던 그릇들을 받아 개수대로 옮긴 후 수전을 열었다.
곧 수도꼭지에서 쏴아- 하고 투명한 물이 시원스레 떨어져 내렸다.
“원래 그렇게 매사에 저자세야?”
“예?”
“그러지 마. 사람들이 우습게 봐.”
사빛이 잠시 눈을 끔뻑거리며 그의 말을 생각했다. 사과한 걸 이야기하는 걸까?
“아, 네. 노력해 볼게요.”
그녀의 대답에 그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그놈의 노력은.”
비웃는 듯한 어조에 사빛은 좀 무안해졌다.
사람들이 우습게 보는 건 안 좋은 거고, 그래서 그렇게 보이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건데 그 말이 또 우스웠던 걸까?
죄송이든 노력이든 저자세로 보인다면 싫었다. 이제부터 되도록 입에 올리지 말아야겠고 생각했다.
아마 어린 나이부터 아르바이트를 이것저것 하다 인이 박인 모양이다. 서툰 솜씨로 어른들에게 혼나 가면서 일을 배우다 보니 사과가 습관화된 듯하다.
“이리 와. 이거 사용법 알려 줄게. 커피 마시면 커피 머신도. 설명서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그들은 함께 그릇들을 헹궈서 식기세척기 안에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이훤의 간단한 설명과 함께 세제를 투입하고 기계가 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자 함께 커피도 내려 보았다.
“넌 환자니까 다른 차 마셔.”
이훤이 그녀의 잔에 뜨거운 물을 붓고 오렌지 향이 나는 허브차를 만들어 주었다.
식탁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별것 없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고, 시간이 차오르자 사빛은 그만 씻기 위해 거실 욕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