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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10/75)

10화

꿈으로 겪은 바에 의하면.

사빛이 가진 것은 이 집안 사용인들이 쓰는 물건에도 못 미치는 것들이 수두룩했다. 해서 사용인들까지 그녀를 멸시의 눈으로 보곤 했다.

그의 세상은 그런 곳이었다. 외면이 얼마나 화려하고 값비싼가가 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내면이 아름다운 듯한 그의 할머니조차도 외면을 가꾸셨다.

사빛도 꿈을 통해 보는 눈이 좀 높아졌다.

기본적인 무시야 어떤 명품으로 치장한들 계속되겠지만 최소한 조롱거리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되었다.

언젠가 본가에서 잠시 혼자 있어야 해서 한적한 테이블을 찾아 앉아 있을 때.

청소 중인 중년 사용인이 대걸레질과 함께 다가왔다.

사빛을 보자 주위를 신경질적으로 탕탕 소리까지 내 가며 정리하던 그녀는, 거뭇하고 축축한 대걸레로 테이블 주위를 닦는 척하면서 사빛의 발등까지 쓱 훑고 지나갔다.

간혹 부딪칠 뻔하거나 화장실 사용하고 나오면 어휴, 에휴 들으라는 듯 내뱉곤 했기에 일부러 그랬다는 걸 뻔히 알 수 있었다.

그때는 사용인들의 그러한 행동이 자신의 처지 때문이라고만 생각하고 묵묵히 견뎠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내가 좀 더 가꾸고 처신을 당당하게 했으면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다.

꿈에서도 그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긴 했었다. 서울 갈 때 몇 번 무안을 당하고 한두 번 청하여 옷과 가방을 산 적이 있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 읍내 작은 상점에서, 그것도 비용을 아껴 가며 구매한 것들이라 재질이나 디자인이 별로였다. 아니 많이 안 좋았다. 비웃음은 매한가지였고.

이는 그의 체면과도 관계있는 일인데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이젠 그러지 않으리라. 더구나 그의 진짜 부인이 되는 마당이니 더욱 그러했다.

“네. 주시면 감사히 쓰겠습니다.”

“그리고 경호원을 한 명 고용할까 해.”

“경호원이요?”

“응, 너 따라다닐.”

표면상으로는 그들의 운전기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훤은 그녀가 아니라면 기사가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장거리 운전은 한 달에 몇 번이고, 대부분 이 동네를 왔다 갔다 하는 것뿐이니.

그리고 그는 기본적으로 운전을 좋아했다.

경호원은 주목적을 숨긴 채 행랑에 숙식하며 이훤이 없을 때 그의 아내를 지키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혹시 개 싫어해? 털 알레르기가 있다거나.”

“개요? 아니요.”

“개도 한 마리 데려오려고 해. 오면 안채 마당에서 살게 될 거야. 보고 왔는데, 아직 다 큰 게 아니라 지금은 작지만 몇 달 안에 많이 클 거야. 골든 리트리버거든. 큰 개 무서워하면 미리 말해.”

“아뇨. 전 크든 작든 동물을 좋아해요. 외로울 것 같았는데 잘됐네요.”

“왜 외로워?”

“예?”

“1년 동안 나랑 거의 같이 있을 텐데.”

“아…….”

껌딱지처럼 딱 붙어 있으라고 말하려다가 온종일 집에만 있는 남편을 아내들이 몹시 싫어한다고 들은 게 생각나 참았다.

한국에 오기 전 팀원들과 함께 모교에서 연구실을 제공받아 있다가 강제 백수가 된 마당이었다. 남들 갖는 안식년 같은 것으로 생각하자고 자신을 다독였으나 이 여인의 처지에서는 그냥 백수이리라.

그거 좀, 안 멋있는데.

“그래 그럼 잘 키워 봐. 외롭지 않게.”

“네.”

“이름은 겨울이야.”

외할아버지가 키우는 개들인 장옹이와 장꽁이가 여섯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두 마리는 태어나자마자 죽어 땅에 묻었고, 남은 네 마리는 외할아버지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이름 지어 주었다.

그중 두 마리만 키우고 두 마리는 입양 보내기로 하셨는데, 한 마리는 갈 곳이 정해졌고 한 마리는 미정인 상태였다.

그녀가 개의 이름을 되뇌었다.

“겨울이…….”

“성은 장 씨고 네 마리 중 막내야. 수컷이고.”

“성이 있어요?”

“응. 외할아버지 댁 개들인데, 처음에 얘네 아빠 입양했을 때 된장 같은 녀석이 자꾸만 구석에 꽁하게 박혀 있는다고 장꽁이라고 이름 지어 주셨대.”

“그렇군요.”

그녀가 웃고는 물었다.

“언제 오나요?”

“너한테 묻고 데려오려고 했지. 언제 데려올까?”

그의 말에 그녀가 스르륵 입을 닫더니 그의 눈을 빤히 보았다.

“왜?”

왜 자꾸 그렇게 보는데.

가만 보면 문득문득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버릇이 있다.

“아니에요.”

웅얼거린 그녀는 곧 눈길을 내렸다.

그 모습에 이훤의 반듯하던 이마에 실주름이 몇 줄 갔다. 찌푸려진 인상으로 자신이 무어 실수한 거라도 있는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개를 언제 데려올까 물은 데서 시작된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문제라고? 개 안 싫어한다면서.

안채로 돌아온 이훤은 그의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래 내일 낮에 전화하고 결정한 바를 전하고자 했는데 아무래도 지금 담판을 지어야겠다.

[여보세요.]

“저예요.”

[응 그래, 이훤아.]

“석 달 전에 산에서 했다는 혼례식 들었어요.”

[아, 저, 그게…….]

할머니가 당황해하며 설명하려 했으나 그가 단호한 어투로 가로채며 하고자 한 말을 했다. 웬만해서는 어른들에게 별 말대꾸가 없는 그였으나 이 문제만큼은 아니었다.

“저 이제 도저히 못 견디겠어요. 그냥 어디로 숨어 버리고 싶다고요.”

[이훤아, 할미 얘기 좀 들어 봐.]

“아뇨. 할머니 하라는 대로 할게요. 저 여자랑 살고, 애도 생기면 낳고, 주말마다 올라가서 할아버지랑 식사도 할게요. 그러니 더는 제 귀에 그…… 굿이니 뭐니, 도사니 뭐니, 그런 얘기 안 들어오게 해 주세요. 한 번만 더 그런 얘기 들리면 저 그냥 어디 멀리 가서 안 들어올 겁니다. 연락도 안 드릴 거예요.”

협박하는 모양새가 은근 자기 할아버지를 닮은 것 같지만 상관없었다. 최후통첩이었다.

이훤이 그의 할아버지가 한 푼도 안 준다 해도 눈도 깜짝하지 않는 건 가진 게 많아서였다.

할아버지가 주시면 더 큰 부자가 될 뿐, 그는 이미 차고 넘치게 부자였다.

우선 그는 자기가 하는 일만으로도 기본적인 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었다.

대기업 간부 연봉이 부럽지 않은 효과가 있는 특허권이 있는 데다 그 기계를 고치거나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술자였다.

거기에 아기 때부터 이래저래 받은 부동산과 이솔 각 회사의 지분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상당한 값어치를 지니고 있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상속분.

아버지가 사망 처리되면 물려받게 될 재산.

외할아버지도 속된 말로 땅 부자, 주식 부자라 불리는 상당한 재력가시다.

특히 그의 할머니는 작은아버지에게 본인의 재산이 직접 상속되는 걸 원치 않아 호적에 올리지 않으셨는데, 본래 친정 재산과 더불어 이솔에도 꽤 많은 지분을 가지고 계신다.

이는 그 옛날 할아버지가 첩을 뒷집에 들이는 걸 묵인하면서 크게 불어난 것인데, 외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지분을 합하면 그룹 회장인 할아버지의 지분보다 훨씬 클 지경이었다.

해서 할아버지의 한 푼도 물려주지 않을 거라는 협박은 이훤에게 그리 효과적인 협박이 아니었다.

그는 돈에 큰 욕심이 없기에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를 잠시라도 한국에 머물게 한 건 오로지 할머니였다.

하나뿐인 아들 잃고 저만 바라보는 연로하신 할머니가 혹시 제 걱정에 건강이라도 축날까 봐 이러고 있는 거였다.

한데 자꾸 그를 너무 힘들게 하신다. 대체 그게 뭔가. 그게 저 어린 여자한테 시킬 일인가. 그럼 저는 뭐가 되는가.

그를 짓누르는 커다란 굴레를 다름 아닌 사랑하는 할머니가 앞장서서 씌우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아프고 힘들다.

그가 하겠다는 일들에 예상대로 할머니는 크게 기뻐하셨다. 역시 그 아이가 복덩이라고 말하다가 그의 눈치를 살피더니 말꼬리를 흐리셨다.

“그쪽에선 했다니까 여기서 외할아버지 모시고 다시 조촐하게 할게요. 다음 주 주말쯤 하려고 해요.”

[할미랑 할아버지도 참석하면 좋은데.]

이훤의 부모님이 모두 잘못되면서 서서히 데면데면해진 친가와 외가. 회사 경영적 측면에서 마찰을 일으키며 더욱 멀어졌다.

창립 기념회나 주주 총회 같은 중요 행사 때 어쩔 수 없이 마주치면 형식적인 인사나 나눌 뿐, 연락 안 하고 산 지 오래였다.

이훤도 대주주인지라 주요한 행사 때는 참석차 한국에 들어오곤 했는데, 보면 마치 선두 자리를 놓고 각축전을 벌이는 대선 주자들이 공식 석상에서 만나는 느낌이었다. 예의를 갖추지만 어색하고 싸한 느낌.

그런데도 참석한다면야 막을 자는 없겠지만, 좋은 날 분위기가 가라앉을 게 뻔했다.

“그냥 집에서 마을 사람들이랑 작게 할 거예요. 오고 싶으면 오시고요, 못 오시면 사진 보내 드릴게요.”

[아가씨, 아니지 새아기라고 불러야지. 새아기가 부모가 없어서 결혼 준비를 누가 도와주려나. 그 고모란 여자는 영 미덥지 못하던데 말이야. 사람 보내 도와줄까?]

그러고 보니 그 역시 결정만 했지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옷 갖춰 입고 반지나 나눠 끼면 되겠지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아무리 조촐해도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아 보였다.

“그러실래요?”

[응. 은원이 엄마 내려보낼까?]

“그냥 웨딩 플래너 고용해서 할게요. 진짜 간단하게 할 거예요. 사진이나 찍고, 마을 사람들 불러 밥이나 먹고. 신경 쓰지 마세요.”

이 동네 대지주인 그의 집안은 때 되면, 혹은 축하할 일이 있으면 곧잘 마을 잔치를 벌이곤 했다.

봄 농사 전이나 가을걷이 후는 물론, 할아버지 칠순, 팔순 잔치에 할아버지는 안 오셔도 관리인 부부의 주도하에 집 앞 노각나무 공터에서 돼지고기 막걸리 잔치가 벌어지는 식이었다.

할머니와 통화를 끝내고 1층으로 내려오려니 계단에서부터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긴다.

보니 사빛이 주방에서 요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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