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바람이 한 줌 불었다.
녹음이 짙은 계절, 초록의 싱그러움과 함께 군락을 이룬 산꽃 향이 가슴속까지 진하게 전해졌다.
그녀의 볼록한 이마 위 명주실 같은 잔머리카락도 은은하게 흩날렸다 내려앉았다.
뒤로 젖혀진 고개 덕에 등허리까지 출렁거리는 머릿결이 그의 팔을 간지럽혔다.
동그란 눈, 오뚝한 콧날, 도톰한 입술, 앙증맞은 귀. 어디 하나 곱지 않은 곳이 없다.
또다. 또다시 심장이 짜릿짜릿 저리고 안개처럼 뭔가가 퍼져서는 온몸을 옥죈다.
그저 입을 맞대었을 뿐인데. 숨결이 맞닿았을 뿐인데. 이게 뭐라고. 골백번도 더 해 본 키스, 그 많고 많았던 키스 중 하나일 뿐인데.
거기다 전혀 제 스타일이 아닌 여자였다. 그는 세련되고 화려하고 관능적인 여자가 취향이었다. 툭 치면 푹 꺾일 것처럼 약하고, 올망졸망 하얀 인형같이 생긴 이런 스타일 말고.
일순 이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아랫입술을 한 움큼 베어 물었다.
촉촉한 입술이 부드럽고 찰지게 감겨들었다. 몰캉한 살이 그의 뜨거운 열기에 금세 뜨끈히 달아올랐다.
윗입술로 옮겨 갔다. 당기듯이 지분거리며 그곳 역시 뜨겁게 덥혀 놓았다.
내리깐 눈 아래로 보이는 토끼 같은 눈망울은 여전히 벌벌 떨고 있었다. 곧 울 것만 같은 빛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뭐가 그리 무서운데. 이제 혀를 넣을 차례인데 이를 어쩌나. 토끼가 받아 줄까? 그러다 부서져 버리면.
꿈에서 과격한 밀어붙임으로 그녀를 잃었던 순간이 뇌리에 떠오른다.
상상만으로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 세상이 텅 빈 듯한 그 공허한 기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
거기다 그녀는 아직 환자였다. 그러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마지막으로 촉- 짧은 입맞춤을 남긴 그가 느릿하게 떨어져 그녀를 내려다봤다.
불그레한 입술이 조금 더 발갛게 물들어 있다. 진홍색 철쭉 같다.
흠씬 빨아 자두처럼 만들고 싶지만 참아야 했다.
그렇게 이성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놓고도 살짝 벌어진 틈으로 흐르는 숨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한참을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온몸 근육에 힘이 들어가려 하자 그녀에게서 손을 떼고 바로 앉았다.
* * *
사빛은 제게서 떨어져 바로 앉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다 곧 고개를 떨구었다.
두 뺨이 화끈거렸다.
이건 그야말로 사춘기 학창 시절 이불 속에서 꿈꾸어 보았던 잘생긴 남자와의 낭만적인 첫 키스.
어젯밤 꿈속에서의 그는 이렇지 않았다. 뭐랄까, 스킨십이나 애정 행위를 할 때 맹수나 야수 같은 걸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와의 첫 키스 때, 그녀는 거칠게 팔이 붙들려 돌려 세워진 후 끌려가듯 그의 품에 안겼다.
코가 그의 가슴팍에 쿵 하고 부딪혔고, 망연한 눈으로 올려다보니 잠시 내려다보다가 예고도 없이 고개를 내려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아까 신사답게 고개를 기울여 다가온 모습과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아까의 그는 서로의 호흡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잠시 그녀의 눈을 마주하다 천천히 입술을 맞붙였다.
마치 ‘진짜 한다’라고 마지막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꿈에서의 그는 이런 배려가 없었다. 지독하게 갈구하고 격렬하게 탐닉하는 느낌.
혀도 바로 들어왔었다. 강하게 밀고 들어온 축축한 살덩이가 입 안 곳곳을 미끄러지듯 훑으며 그녀를 사정없이 헤집었다.
타액을 섞고 혀를 빨다가 치열과 입천장까지 빈틈없이 쓸고는 혀 밑에 고인 작은 물기까지 취했다.
큰 몸에 그녀를 가두고 옴짝달싹 못 하게 붙들고는 마치 먹이라도 탐하듯 진하고 강하게 파고들었다.
내리꽂히는 무게감에 그녀는 그를 붙들 수밖에 없었다.
중간중간 알아서 들이켜야 하는 호흡이 널을 뛰고, 발가락 끝까지 곱아드는 지나치게 자극적인 감각. 심장이 뜨거운 불에 덴 듯 홧홧거리기 일쑤였다.
아무리 남녀 간의 은밀한 정을 모르는 그녀라지만 그게 그리 로맨틱한 것이 아님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저를 아낀다면 이렇게 거칠게 대하지 않으리란 것도.
처음 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단단한 몸이 거침없이 진입했다. 거대한 힘에 뼈가 타고 살이 녹는 느낌이었지만 몇 번의 달램 뿐 몸짓을 멈추진 않았다.
그녀는 남녀 간의 행위가 그토록 아픈 것인 줄 몰랐다. 그토록 처참한 심경을 자아내는 것인 줄도 몰랐다.
눈물이 나고, 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큰 물건이 못을 박는 것처럼 연신 짓쳐 들 때는 입구가 미어질 듯 아리고 화끈거렸고, 묵직한 이물감이 깊숙한 곳에 닿아 느릿느릿 비벼질 때는 아랫배가 더부룩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또다시 쿵쿵 달아오르고.
나중에는 속절없이 천장을 보았다 바닥에 뒤집혀졌다 모로 눕혀지며 어서 빨리 끝나기만을 간절히 바랐는데, 마침내 배 속에 뜨뜻한 것이 느껴졌을 땐 이제 다 끝이구나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하루 이틀, 그런 날들이 이어지다 보니 익숙해지게 되었다.
그 거침 안에서 기묘한 쾌락도 느끼게 되었다.
아마도 생물학적인 원리 같은 건가 보았다. 저절로 깨우치고 알아서 반응하게 되는.
어쨌든 그렇게 살을 섞고 살다 보니 그녀는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마음으로부터 의지하게 되었다.
그는 까칠하고 무뚝뚝하지만 대신 듬직한 구석이 있었다.
어른 남자의 부재 속에서 성장해서인지 은연중에 이상형이 아버지같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된 듯도 하다.
그녀가 먼저 말을 걸거나 긴 대화를 나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정신적으로 기댔다.
바다 바위에서 낚시하는 그 옆에 가만 앉아 있으면 큰 곰 옆에 앉아 있는 듯 든든했고, 계곡 바위 위에 누워 있는 그 곁에 앉아 있으면 커다란 표범 곁에 앉아 있는 양 마음이 평온해졌다.
결국, 그렇게 나약하게 누군가에게 매달려 살아서는 안 된다는 걸 꿈을 통해 절실하게 배우긴 했지만.
바람이 불었다.
멈춘 듯했던 세상이 다시 움직이며 여름 내음 사이로 그만의 독특한 향이 날아와 코끝에 닿았다.
그에게서는 특유의 냄새가 난다.
유럽 어딘가에 달과 야생 동물과 수렵의 여신인 디아나를 섬기는 신전이 있다.
주위는 온통 울창한 숲이고 신전 앞에는 황금 가지가 달린 큰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검을 지닌 한 남자가 두 눈을 부릅뜨고 밤낮없이 지킨다.
그는 일개 파수꾼이 아니고 이 신전의 사제이자 이 숲의 왕이다.
누구든 그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으면 그를 죽이고 황금 가지를 꺾으면 된다.
그것이 이곳의 규칙이다.
그 남자가 거대한 숲 한가운데에서 느꼈을 짙고 진한 냄새. 강인하지만 쓸쓸한, 우아하지만 알싸했을 그 냄새. 그에게선 그런 냄새가 난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싱긋- 하고 웃었다.
긴 눈매가 휘고, 서쪽으로 넘어가는 햇빛이 그 위에 아름답게 흐드러져 환상적인 물결을 만들어 냈다.
그 모습에 살짝 홍조가 올랐다. 어쨌거나 무지하게 잘생긴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어쩌면 이번에도 그녀는 그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꿈에서처럼 전적으로 의지하고 기대지는 않으리라.
그렇게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며 그녀도 마주 웃어 주었다.
남자가 그런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시선을 앞으로 돌리며 물었다.
“할머니께는 내일 연락드릴게. 결혼식은 어떻게 할래?”
“아…… 결혼식…….”
그는 모르고 있지만 그들은 몇 달 전 이미 혼례를 치렀다.
어떤 혼례였는지 들으면 엄청 화낼 텐데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걱정이 되었다.
하자니 지금 화낼 것 같고, 안 하자니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되어 왜 이야기 안 했느냐고 불같이 화를 낼 테고.
이래도 화내고 저래도 화낸다면 지금 이야기하고 속 편한 게 좋겠다. 사빛은 몇 달 전 치른 그들의 혼례에 관해 그에게 소상히 말해 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남자의 표정은 생각보다 훨씬 더 험악해졌다. 어둡게 굳은 얼굴 근육이 꿈틀거리는 듯도 했다.
그러나 한참 말없이 혼자만의 생각이 깊던 남자는 화내지 않았다. 그녀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다음 말을 꺼낸다.
“그럼 여기서 작게 한 번 더하자. 웨딩드레스랑 턱시도 입고, 커플링 맞춰서. 마을 사람들이랑 외할아버지 모시고.”
“한 번 더요?”
“응. 미국에 있을 때 동기 하나가 결혼을 했는데 신붓집이 멀어서 두 번 했어. 부모님이 이런 한적한 곳에 사시는데, 마을 교회에서 식 올리고 가까운 친척들이랑 이웃 사람들이랑 집에 초대해서 애프터 파티했지. 그것처럼 말이야. 어때?”
남자가 자꾸 그녀의 의견을 묻는다. 그게 좋으면서도 얼떨떨하다. 꿈에서의 그는 그녀와 많은 말을 나누지도 않았지만 이렇게 일일이 의견을 묻지도 않았다.
사빛이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전…… 좋아요.”
싫을 이유가 없었다. 저도 하얀 웨딩드레스 입은 사진 한 장 꼭 갖고 싶으니.
이렇게 멋진 신랑이랑 팔짱 끼고 찍은 사진 할머니에게도 보여 주고, 나중에 아이가 커서 보여 달라면 또 꺼내서 보여 주고.
거기에다 그의 말대로 하면 자연스럽게 그의 외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게 된다. 꿈에서와 상황이 조금 다르니 그때만큼 저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땐 사람 취급을 하지 않으셨다.
댁을 방문했을 때도 집에 들이지 않으셔서 마당에서 개들이랑 시간을 보내다 주방 아주머니가 식사하자고 해 둘이 함께 부엌에서 먹었다.
“집안일은 저기 행랑에 사는 아저씨랑 아주머니가 다 해 주니까 크게 신경 쓸 것 없어. 둘이 부부야. 서울 갔는데, 내일 밤이나 모레 아침에 올 거야.”
그녀도 그 부부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꿈에서 하루 중 거의 대부분을 그들과 함께 이런저런 집안일을 하며 보냈더랬다.
누가 시킨 건 아닌데,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릴 수 없어 조금씩 돕다 보니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카드도 하나 줄게. 살 거 사고, 쓸 데 있으면 써. 품위 유지비라고 생각하고.”
품위 유지비란 말에 사빛의 눈이 반짝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