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75)

8화

* * *

‘여시 같은 계집애.’

거실에 앉아 술고래 남편을 위해 북어를 찢던 지선이 머릿속에 사빛을 떠올렸다.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했길래 혹시 일이 틀어졌나 식겁했더니 별일 아니었다.

대단한 집 자손이라니까 혹하기라도 했나 보지?

다급하게 묻는 꼴이 그러했다. 순진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오빠 딸인 사빛은 오빠를 하나도 닮지 않았다. 중병 걸린 남편이랑 어린 자식 버리고 달아난 저 TV 속 여자를 쏙 빼닮았다.

지선은 마침 어제저녁 놓친 드라마 다시 보기를 하고 있었다.

귀싸대기가 날아오는 순간이었고, 철썩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던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슬 퍼런 시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오늘도 여지없이 착한 며느리 드잡이하고 있는 저 표독스러운 얼굴의 여배우, 이태연.

저 여자가 바로 사빛의 친모이다.

고양이 같은 눈에 속눈썹이 길게 빠져 있다.

조막만 한 얼굴에 짙은 쌍꺼풀이 진 큼지막한 눈. 수술인가 의심될 정도로 우뚝 솟은 코와 그 아래로 천연의 붉은 기가 도는 도톰한 입술. 거기에 심하게 굴곡진 몸매.

누가 핏줄 아니랄까 봐 아주 똑같다.

사빛도 오래전 것이라 몸에 안 맞는 꽉 끼는 러닝식 속옷에 가려져 있지만, 풍만한 가슴이 끊어질 듯 잘록한 허리를 거처 불룩한 골반과 미끈한 다리로 이어지고 있다.

손목, 발목 같은 뼈대는 아주 얇은데 가슴과 골반만 큰 스타일이다.

밀가루 떡칠한 듯한 피부에 저런 모양새를 하고 있으니 목욕이라도 하고 나올라치면 저게 사람이 맞긴 한 건가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비쩍 곯을 만큼 못 먹게 한 건 그런 심보에서였다. 어디 가서 제 어미처럼 색기 줄줄 흘리며 사내나 홀리는 몹쓸 여자 되지 말라고.

TV 안의 저 여자가 모 운송 회사 사장의 스폰녀였다가 첩으로 들어앉은 건 모르는 사람 빼고 다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놈도 지금이야 이름 높은 회사의 번듯한 사장이지, 어느 지방을 주름잡던 조폭 출신이었다.

20년쯤 전인가.

이태연이 갑자기 TV에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하더니 제3금융권 어느 회사 모델이 된 이후부터 좀 잘나가는 것 같기에 남편 강구에게 얘기했다. 사빛을 낳은 여자라고.

눈을 빛낸 강구가 찾아가 사빛 얘기를 꺼내며 목돈 좀 받으려 했다가 그 남자 똘마니들에게 죽도록 얻어터지고 돌아왔다.

함부로 입을 놀리다간 맨홀이나 시멘트 통에 묻힐 줄 알라는 협박까지 받았다고 한다.

피도 눈물도 없지. 뭐 그러니까 남편도 자식도 다 버렸겠지만.

엄마도 그걸 아니 아무리 돈이 궁해도 한 번을 안 찾아가는 거였다.

사빛의 대학 등록금이 필요했을 때도 잠시 연 끊고 살던 저를 찾아왔을지언정 그 여자는 찾아가지 않았다.

어쨌든 그 피가 어디 가겠는가. 저 사빛이 년도 생긴 걸 보면 팔자가 제 어미만 못하지 않을 것이다. 해서 밥을 적게 주었고, 뭐라도 주워 먹고 있으면 크게 타박을 주어 결국 손에서 놓게 만들었다.

그랬더니 얼굴도 푸석하고 비쩍 마른 것이 요망기가 좀 빠져 볼만했다.

* * *

사빛이 가물거리는 눈을 들어 올렸다.

처방받은 약에 수면제가 들어 있는지 대낮인데도 몹시 노곤했다. 잠깐 누웠는데 언제 잠든 건지 벽시계가 벌써 오후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사방은 조용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 그것도 오래된 건물과 집들로 빼곡한 동네에서 몇 년을 복작거리고 살았다 보니 이 고요가 너무나도 아늑하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문득 할머니가 생각났다. 잘 지내고 계실까?

몇 개월 전, 할머니가 디스크 판정을 받았다.

해서 당장 천만 원이 필요했고, 사빛은 어쩔 수 없이 고모에게 연락했다.

그러나 고모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야멸차게 모른 척했다.

그런 고모가 고모부와 함께 갑자기 찾아와선 자기네 집에서 같이 살자고 했다. 매번 빈손으로 오더니 음료수 한 상자까지 사 들고 와선 ‘엄마 허리도 고쳐 줄게’ 했다.

다급한 처지에 사빛이 받아들였던 일은 다름 아닌 지푸라기로 만든 신랑과의 결혼식이었다.

남자 집에서 정한 길일이었고, 깊은 산속에 있는 굿당에서 도사라 불리는 남자 무속인의 굿과 함께 진행되었다.

정성 들인 음식과 예단, 소나무 가지와 대나무 가지가 꽂힌 두 화병, 붉고 푸른 비단에 싸인 기러기 한 쌍이 함께하는 전통 혼례였다.

굿당 내 마련된 신방의 금침 위에서 지푸라기 신랑과 나란히 누워 하룻밤을 보내기까지 했다.

영혼결혼식이란 건 들어 봤어도 이건 뭔가 싶었다.

무섭다기보다 굉장히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왜들 이러는 건지. 정말 이런 걸 다 믿는 건지.

더구나 신랑이란 사람은 이 혼인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고 한다. 굿이니 뭐니 듣기만 해도 미친 듯이 화낸다고 한다. 그래서 지푸라기로 대신하는 거라고.

이렇듯 사빛은 얼굴도 모르는 신랑의 신부가 되었지만 이를 원망하진 않았다. 고모가 제시했지만 분명 사빛 자신이 결정하고 따른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했다.

단칸방 보증금 뺀 돈과 사빛의 혼례 사례비로 수술과 재활 치료를 받은 할머니는, 고모 가족의 구박과 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는 사빛에게 미안해하며 사빛 몰래 공병과 파지를 주우러 다녔다.

그런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어느 건물 계단에서 넘어지며 크게 다치고 말았다.

누군가 뒤에서 밀치고 그냥 가 버렸다는데, 후미진 곳에 있는 오래된 4층짜리 건물이라서 CCTV 같은 게 없었다.

할머니는 또다시 디스크가 거하게 탈출했고 이번에는 앉아 있지도 못하게 되었다.

배변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온종일 누워 있어야 하니 반신불수나 다름없었다.

의사가 어서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그럼 가벼운 운신 정도는 가능하실 거라고.

그러나 이번 수술비는 실로 엄청났다. 건강 보험이 적용 안 되는 재활 치료비의 어마어마함도 잘 알고 있는 사빛이었다.

우선은 그만한 돈을 구할 수 없으니 퇴원해야 했다. 그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어렵게 모아 오던 걸 병원비로 지급하고 다시 고모 집 골방으로 할머니를 모셔 왔다.

그게 바로 며칠 전이었다. 사빛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고모가 비릿하게 웃으며 숨겨 왔던 말을 꺼냈다.

할머니는 요양원에 모시고 사빛은 남자의 생일에 맞춰 그 집에 들어가 부적 신부로 살라는 것이다. 그 대가로 받게 되는 돈으로 할머니 병 고쳐 드리자고. 그러고 나머지는 나눠 갖자고.

― 딱 1년이야. 그 사람 서른만 넘기면 한시름 놓는대. 네가 아직 어려서 길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1년 진짜 금방 가.

그 말을 들은 사빛의 눈동자는 심하게 진동했다.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두려운 일이었다.

저를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는 남자의 흉살이 두려운 게 아니라 생판 모르는 남자와 한집에 살아야 한다는 자체가 두려웠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그러나 사실, 이 같은 조건이 처음부터 있었단다.

고모는 이를 감쪽같이 속였다가 약속된 시기가 다가오자 이제야 말하면서 사빛이 머뭇대니 할머니를 알 수 없는 요양원에 감춰 버리는 무자비한 초강수를 두었다.

그렇게 하면 사빛이 당연히 말을 들을 줄 알고. 왜냐하면 사빛에게는 할머니가 전부니까.

서재 간이침대에 앉은 사빛이 조용히 창밖을 바라봤다.

맑고 푸른 여름 하늘 아래, 무성한 나무와 풀들이 파도처럼 너울대며 춤을 추었다.

* * *

외부 일을 마친 이훤이 집 앞 공터에 차를 주차하고 들어와 보니 사빛이 사랑채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뽀얀 얼굴을 들어 그를 보더니 반갑게 미소 짓는다. 아니, 수줍게 짓는 건가.

걸음을 멈춘 이훤이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터덕터덕 걸어 그 옆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쉬지 않고 왜 자꾸 나와 있어.”

“계속 쉬고 있는걸요. 오랜만에 이렇게 많이 쉬어 봐요. 그리고…… 아까 하신 말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어요.”

“천천히 해. 중요한 문제일 거 아냐. 만약 혼인 신고 하면 나중에 이혼녀 딱지가 붙을 거고, 아이 낳고 헤어진다면 재혼할 때…….”

중얼중얼하는 이훤의 말허리를 그녀가 싹둑 잘랐다.

“많이 생각했는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좋은 생각 같아요.”

말하는 목소리가 꽤 단호하고 비장해 보여 그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쳐다보았다.

“……?”

“나중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지요.”

하더니 배시시 웃는다.

단순한 성격인 건가?

“그래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데 저도 제안할 것이 있어요.”

“말해.”

그녀가 침착하게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말을 이었다.

“주말 이틀은 본댁에서 지냈으면 좋겠어요. 싫으시면 저 혼자만이라도요.”

“본댁? 연희동 말하는 거야?”

맞는다면 할머니 할아버지의 댁이고, 그의 방 또한 2층에 있다.

“네.”

“왜?”

할아버지는 일요일 오전에 아들, 손주, 며느리를 한자리에 불러 모아 식사하는 걸 좋아하신다. 식사 후에도 별일 없으면 함께 있기를 바라시고.

그의 부모님이 잘못되고 그는 주로 해외에 있었으니 그 행사는 작은아버지 식구들과 줄곧 해 왔다.

그의 할머니는 그도 한국에 있으니 매주 참석해 주길 바랐지만, 그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얼굴을 들이밀며 도리를 다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예 주말을 통째로 거기서 보내자고? 싫으면 혼자라도 간다고? 왜?

의문에 대한 답을 그녀가 해 주었다.

“진짜 부인하라고 하셨잖아요.”

“어.”

“1년 후 떠나시면 저 혼자될 텐데 계실 때 손주며느리로서 자리매김을 확실히 해 놓고 싶어요. 그래야 안 계실 때도 지내기가 수월할 것 같아요. 혹시 말씀하신 아이라도 생긴다면 더더욱요.”

조용하지만 다부진 말투였다.

단순한 성격이 아니고 대차고 화끈한 성격인 건가? 제 밥그릇 알차게 챙기는?

이훤은 또다시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물었다.

“키스해도 돼?”

“예?”

“키스하자고. 부부니까.”

“아…….”

확실한 자리매김에 대해 종알거리던 여자는 그의 말에 할 말을 잃었는지 멍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불쑥 몸을 기울여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그러자 그녀가 넘어갈 듯 몸을 뒤로 물렸다.

어림없었다. 이훤이 큰 손으로 그녀의 얇은 허리를 붙들고 다른 손으론 두 몸을 지탱한 채 지그시 보다가 얼굴을 좀 더 가까이 가져갔다.

붉고 작은 입술이 종이 한 장 너머에 있다. 지척에서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심각하게 진동했다.

그러나 짱짱한 성격의 두 할아버지를 닮은 그는 뭐든지 웬만해선 쉽게 물러나는 법이 없다.

그의 입술이 꽃 같고 단풍 같은 그녀의 입술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