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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7/75)

7화

그렇게 점심을 사 와서 그녀와 함께 식사할 적에.

참지 못한 이훤이 결국 들고 있던 젓가락을 탁- 하고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짜증을 냈다.

“왜, 뭐. 왜 그러는데.”

잠을 덜 자서 그런가 제가 생각해도 좀 까칠하다. 아니면 곁에 있는 것만으로 긴장하게 되는 이 여자 때문이거나.

뭔가가 아래를 바짝 조이는 느낌이었다. 이래서야 당최 살 수가 있나.

“아니, 저, 그게.”

“답답해. 그냥 말해.”

그녀가 그의 앞에 놓여 있는 팥칼국수를 슬그머니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올려 그를 쳐다보았다.

“괜찮다면 국물 한 입만 주시면 안 될까요?”

사박스럽던 이훤의 눈매가 급 씰그러졌다. 그게 그렇게 처연할 일이야?

‘성냥 하나만 사 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묻는 것 같았다. 눈빛에 애틋함까지 묻어 있다.

번득거리던 힘을 빼고 물었다.

“팥 좋아해?”

그의 질문에 그녀가 작은 얼굴을 위아래로 크게 끄덕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좀 보다가 제 앞의 국수 그릇을 그녀 쪽으로 밀어 주었다.

그러자 깜짝 놀란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치뜨며 사양했다.

“아니요. 국물만 좀 주세요. 아, 같이 먹는 거 싫어하시죠. 그릇이랑 국자 가져올게요. 조금만 덜어 주시면 돼요.”

의자를 밀고 일어선 여자는 마치 오랫동안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인 양 능숙하게 부엌으로 향하더니 원하는 것들을 잘도 찾아 왔다.

그가 물었다.

“뭐냐?”

“예?”

“뭔데 우리 집 물건에 대해 그렇게 잘 알아?”

“아…….”

그의 질문에 그녀는 잠시 말문을 잃었다. 그러더니 주섬주섬 이 말 저 말 늘어놓는다.

“그건…… 그러니까 제가 전에 살림을 좀 했어서…… 그런 것들은 대충 어디쯤 있을지 뻔하고…… 또…….”

“내가 다른 사람이랑 같은 그릇에서 먹는 거 싫어하는 건 어떻게 알았고.”

“예? 아, 그건…….”

그녀가 또 화들짝 놀랐다가 그의 눈을 요리조리 피했다.

이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뭔가 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그가 팔짱을 끼고 한동안 그녀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물었다.

“교육까지 받고 왔냐?”

누구한테 받았을까? 할머니한테라면 다행이지만 작은어머니라면 단점만 줄줄이 늘어놓았을 것이다.

할머니가 이런 일에 직접 나서지는 않았을 테니 여기까지 데려다줬다는 작은어머니일 확률이 높은데…….

이훤의 눈썹이 꿈틀했다. 조금 피곤해졌다. 사람은 첫인상이 아주 중요한데 말이다.

그녀가 처연을 넘어 습기가 몽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교육이요?”

겁먹은 토끼 같기도 하고, 어느 새벽길에 봤던 아기 사슴 같기도 했다.

“다 불어 봐. 나에 대해 뭘 어떻게 듣고 왔는지.”

그의 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 * *

당황한 사빛이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뭘 들었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고모에게 들은 ‘저주받은 부잣집 도련님이 외딴곳에 은둔해서 살고 있다.’ 정도 외에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의 집 사람들을 보긴 했으나 할머님은 네가 그 아이구나, 잘 부탁한다 등의 짧은 인사나 당부만 푸근하게 해 주셨고, 두 번째 뵈었을 때도 멀찌감치에서 웃어 주셨을 뿐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주로 그의 작은어머니의 주도하에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데, 그녀는 시조카인 이 남자에게 그다지 큰 관심이나 애정이 없어 보였다.

아, ‘스물아홉 살 권이훤이고 어려서 부모를 잃었으며 외국에서 학교 다니다가 얼마 전에 귀국해 군 복무를 마쳤다’라는 기초적인 건 알려 주었다.

또 무엇을 말해 주었더라…….

곰곰이 생각하면서 보니 남자가 마치 나쁜 놈 심문하는 경찰관처럼 저를 삐딱하게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뭔가 몹시 마음에 안 드는 듯한 언짢은 얼굴이었다.

하얀 면티 속 숨 막힐 듯한 존재감을 내뿜는 우람한 가슴팍 위로 강철 같은 팔뚝을 꼬고 앉아서는 저리 차갑게 쏘아보고 있으니 절로 긴장하게 되었다.

아픈 목구멍 뒤로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사빛은 우선 자신의 생각 없음을 반성했다.

아무리 가장 좋아하는 음식 앞이라지만 정신머리를 챙겼어야 했다. 그녀는 미래에서 온, 혹은 미래를 아는 사람이니까.

이와 비슷한 소재의 영상물이나 소설 같은데 보면 이런 작은 실수들이 자칫 큰 화가 되기도 했다. 정신 병원에 갇힌 영화도 봤다. 그건 정말 곤란하다.

그녀는 우선 이 난관을 어떻게 부드럽게 넘어가야 할지 빠르게 머리를 굴려 보았다.

살림살이야 다들 거기서 거기이니 그릇이랑 국자 찾아 온 것쯤 대충 넘어갈 수 있겠으나, 남자의 자질구레한 까탈스러움을 그녀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에 대하여 조리 있게 설명해야 했다.

작은어머님께 들었다고 했다가 나중에 아니란 게 밝혀지면 더욱 난감할 테고. 몸이 아파서 말이 헛나왔다고 할까? 같이 먹는 거 몹시 싫어하게 생기셨다고 말하려던 게 잘못 나왔다고?

그때 마침, 하늘이 도우셨는지 초인종이 울렸다.

보존 가치가 있는 문 때문에 담 뒤에 숨어 있는 대문 초인종은 관리인 부부가 기거하는 광채와 연결되어 있고, 지금 울리는 벨 소리는 안채 건물에 달린 초인종이었다.

남자는 또 문들을 활짝 열어 두고 왔나 보았다.

하긴 보통 도시 사람들도 이만큼만 방범을 하고, 예전에 살던 시골 마을 사람들도 낮에는 대문이든 현관문이든 활짝 활짝 열어 둔 채로 살았다.

방문자는 다름 아닌 보건 지소 의사 선생님, 남자가 재춘 아저씨라고 부르는 분이었다.

근무 시간일 텐데 그녀를 살펴보려고 일부러 오셨다.

요 부분은 또 꿈과 같다. 그러니까 그녀가 알고 있는 미래와 달라진 현실이 뒤죽박죽 섞이는 셈이었다.

“하루 새 많이 좋아졌네. 많이 먹고 많이 자면 낫는 병이니까 잘 먹고 잘 자요.”

그들은 모두 서재로 이동해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사빛을, 책상 의자를 끌어와 마주 앉은 재춘이 꼼꼼히 살펴본 후였다.

재춘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하는 말에 사빛도 눈을 둥글게 휘어 보였다.

“네, 그러겠습니다.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다고 들었어요. 죄송합니다.”

“나야 뭐, 늘 하는 일인데. 이참에 우리 이훤이 새 식구랑도 친해지고.”

새 식구라는 말이 마음에 드는 사빛이 또 한 번 눈을 반으로 접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부탁은 내가 해야지. 저놈이 좀 무뚝뚝한데 속은 안 그러니까 아가씨…… 아니지, 새댁…… 이상하네.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그냥 사빛아, 하고 부르세요. 저희 동네 분들도 다 그러셨어요.”

“그래도 되나?”

재춘이 대답하다 말고 말꼬리를 흐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책상에 기대서 있던 이훤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고는 덧붙인다.

“저희 그냥, 진짜 부부 하는 게 어떠냐고 물어봤어요.”

“으응?”

“쇼윈도도 아니고, 기간제도 아니고, 남들 하는 그런 부부요. 생각이 바뀌어 이혼하기 전까지요.”

무슨 소리인가 생각하던 재춘이 눈을 반짝 키우며 되물었다.

“정말?”

“네.”

매우 반가운 얼굴이 된 재춘은 신이 나서 이런저런 훈수까지 두었다.

“잘했다, 잘했어. 결혼이 뭐 별거냐. 잠깐이든 평생이든 사는 동안 서로 힘이 되어 주고 보듬고 의지하면 그걸로 족한 거지.”

이훤이 픽 하고 웃었다.

“동지 같은 거요?”

“그렇지. 부부는 동지지. 그것도 험난한 세상을 함께 헤쳐 나가는 전투 동지.”

확신에 찬 재춘의 어조에 이훤이 장난스럽게 반문했다.

“결혼도 안 하신 분이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다 알지, 다 알아. 간접 경험이지만 자연스럽게 터득했어, 하도 들어서.”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사빛은 또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남자의 주변에 의심할 만한 나쁜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이 의사 선생님은 꿈에서 여러 번 뵈었는데, 특히 그녀가 정신이 이상해졌을 때 주기적으로 상담과 처방을 해 주셨기에 좀 안다.

원래 성정도 유하고 푸근하신 데다 아무런 사심 없이 그저 아들처럼 조카처럼 남자를 아끼신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이 지역에 한 분 더 있다. 바로 남자의 외할아버지.

이 의사 선생님이 남자 아버지의 친우였다면, 남자의 외할아버지는 남자의 친할아버지와 막역지우였다고 할 수 있다.

두 분 다 대대로 이 지방 유지로서, 남자의 친할아버지가 이곳에서 사업을 시작한 후 크게 키울 적에 지분 투자를 했었다. 이후 서울로 본사를 이전하며 진출할 적에도.

그런 분들이 사돈까지 맺었으니 인연이 상당한 셈이다.

비록 비슷한 아픔 또한 겪게 되었지만.

이솔의 제철소와 공장들이 넓게 펼쳐진 해안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이는 땅을 전원주택 단지로 개발하시고 그 가장 윗집에서 정원수를 가꾸며 살고 계신다.

큰 개 네 마리도 키우시는데, 두 마리는 부부고 두 마리는 그들이 낳은 새끼였다.

사빛은 남자의 외할아버지를 딱 한 번 뵈었다. 그가 댁을 방문할 때 데려가 준 적이 있어서.

남자를 아주 많이 사랑하시는 것 같았다. 비록 그녀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지만.

의사 선생님의 푸근한 목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깨웠다.

“그래서 아가씨…… 아니지, 우리 사빛인 뭐라고 대답했는데?”

친근한 호칭에 사빛이 또다시 눈과 입에 큰 호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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