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75)

6화

* * *

담장 위 기와로 싱싱한 나뭇잎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눈을 들어 보니 조그마한 오목눈이가 왔다 갔다 하며 비 때문에 허물어진 집을 보수하고 있다.

알이 있나 보았다. 짝꿍인 듯한 또 다른 오목눈이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둥지 주위를 지키고 있다.

사빛이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며 남자의 제안을 생각했다.

좋은 생각인 거 같았다. 의지가지없는 할머니와 저였다. 그런데 그의 아내로 살면 든든한 배경에 기댈 수 있다.

그건 할머니와 둘이 이 집에서 준 돈으로 자리 잡고 사는 것과 다른 질감이었다. 앞으로 그녀가 무슨 일을 하든 탄탄한 버팀목이 되어 줄 거였다.

동네 뒷골목에 작은 공방 하나를 차려도 ‘저기가 대기업 며느리가 하는 곳이래’ 수군거리며 관심을 줄 테니.

그러나 거기까진 괜찮다. 늘 그러고 살아왔고 쭉 그러고 살면 될 거였다. 하지만 그가 말한 다른 존재 때문에 그녀의 마음이 심하게 흔들린다. 모든 사고의 회로가 그 문제에 집중되었다.

허망하게 사라진 아이를 되돌릴 수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할 수 있다.

자기 탓에 잘못된 것 같아 차마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가 그렇게 하자고 한다. 아니 해도 된다고 했던가.

그의 입에서 아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순간 심장이 아르르 저미며 머릿속이 멍해졌다. 가슴이 칼로 에이는 듯한 아픔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원한다면 언제까지고 아이 곁에 있어도 된다고 말했던 거 같다.

비록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지극한 애정을 줄 생각은 없지만 그의 자식과 아내로서의 지위는 인정한다, 뭐 그런 말이었던 거 같은데.

맞게 이해한 걸까. 욕심내어도 될까.

아이도 할머니도 모두 건사할 수 있다면 그가 경고한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쯤 상관없었다. 평생 독수공방해도 괜찮았다.

그러다가 또 무섭고 두렵다.

욕심냈다가 또다시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러니 욕심내지 말아야 하는데…….

한참 갈팡질팡하고 앉아 있는데 띠리릭- 하고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가 나왔다. 다가와 그녀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은은한 체 향이 코끝에 앉았다가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쉬라니까 왜 나와 있어. 안 아파?”

그녀는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랐고 부모도 없이 자랐다.

할머니가 무척 아껴 주었으나 생계 꾸리며 빚까지 갚아야 해서 늘 바빴다.

사빛의 대학 진학 때문에 시골집을 팔고 함께 서울 월세방으로 옮기고부터는 할머니뿐 아니라 그녀 또한 바빴고.

할머니가 갑자기 편찮으셔서 어쩔 수 없이 고모 집 골방에 얹혀살게 된 이후로는 더더욱 그랬다.

이 정도 목 좀 붓고 열 좀 나는 건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어야 했다.

그것보다 남자의 얼굴을 보자 그녀의 불안이 더욱 심각해졌다. 이 사람은 어째서 꿈과 달리 그런 제안을 한 거지? 무엇이 그를 변화시킨 걸까?

불길함이 밀려왔다. 미래를 알고 있으니 두 번 당하지 않게 잘 대처하자고만 다짐했는데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빛은 아침에 막 깨어났을 때처럼 또다시 미궁 속에 빠진 것만 같아 머리가 아팠다.

그녀가 대답 없이 빤히 보기만 하자 그가 내리깐 눈으로 쳐다보다가 물었다.

“점심 뭐 먹을래?”

“점심이요?”

“12시야. 배 안 고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정신없이 흐른 아침이었다. 그러고 보니 배가 좀 허하네, 생각하는데 그가 또 물었다.

“콩죽 좋아해? 잘하는 데가 있는데 먹을래?”

사빛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 동네에서 콩죽 잘하는 데라면 읍내 뒷골목에 있는 할매 식당 <콩죽팥죽>을 말하는 것일 테다.

거기 콩죽은 진짜배기다.

직접 농사지은 콩을 갈아 만든 뽀얗고 걸쭉한 죽에 아삭하고 감칠맛 나는 배추겉절이가 곁들여 나온다. 갓 담은 열무김치와 함께 주시는 팥죽도 정말 맛있는데.

가끔은 직접 주운 도토리로 만든 미나리 묵무침이나 직접 키운 부추 넣고 구운 바싹한 해물전을 공짜로 주시기도 한다.

그 건강하고 정감 어린 상차림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 안에 군침이 가득 고였다.

“네.”

사빛이 눈을 맑게 빛내며 대답했다. 이 와중에도 식탐은 있구나 생각하면서.

할매 식당 음식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녀의 할머니가 정성 들여 만들어 주시던 토속 음식들, 바로 그 맛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동지 팥죽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기도 하고.

해서 팥죽도 한 그릇 포장해 오라 부탁하려다 그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꾹 참았다.

* * *

이훤이 차 키를 들고 진현당 대문을 나섰다.

여자가 단백질 부족이라 하여 문득 떠오른 콩죽을 사러 나가는 제 모습이 좀 우습긴 하다.

그래도 뭐, 환자잖아? 도와줘야지.

사실 진짜 부부가 되어도 좋다는 제안은 저 자신조차 갑작스러웠다.

제 입으로 말하고도 속으로 뜨끔했다. 할머니의 막무가내 처사보다 더 황당해 보였다.

이 일의 발단은 사실, 머릿속에서 다시 끄집어내기도 민망한 어떤 일 때문이다.

이훤이 새벽 4시에 잠에서 깬 건 어떤 꿈 때문이었다.

어제 처음 본 자그마한 여자와 사랑을 나누는 꿈이었다. 너무 리얼한 감각이었다.

미친놈이 아닌가.

충격이 자괴감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심장이 왜 계속 둥둥둥 널뛰는지 알 수가 없다.

터질 듯이 빳빳하게 솟구쳐 있는 녀석을 한심스럽게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너무 야해서 그래. 꿈이 너무 야해서.’

처음엔 입술을 쓸었다. 가만히 바라보며 느릿하게.

앵두처럼 볼록한 입술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또 저쪽에서 이쪽으로 쓸었다.

그게 다였다. 하얗게 내려갔다 빨갛게 올라오는 탄성이 예뻤다. 찰랑거리며 진동하는 게 너무 생생하여 신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작은 입술에 그의 입술을 가져갔다. 손으로 느껴지는 부드러움을 입으로도 느끼고 싶었다.

촉촉함에 숨이 막혔다. 심장이 저릿한 것 같기도 했다. 또 그게 다였다. 진한 키스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새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사이를 파고들고 있었다.

내리깐 눈꺼풀 아래로 보이는 얼굴이 흐릿했다. 작게 헐떡이는 소리가 귓등에 맺혔다가 고막을 심각하게 간지럽혔다.

잠시 후 입술이 떨어지자 그녀가 감았던 눈을 떴다. 발그레한 뺨으로 벌리고 있는 입에서 하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젖어 있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인지, 모든 것이 습했다.

순간 머리가 고장이라도 난 듯, 뇌가 마비라도 된 듯, 그녀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그가 먼저 그녀의 입술을 와락 덮쳐 버렸다.

혀가 깊숙하게 미끄러져 들어갔다.

과격하고 거친 행동에 약간 놀라기는 했으나 그녀도 조금씩 받아 주었다.

그 움직임이 미치게 좋았다. 꿈인데, 분명 꿈일 뿐인데 그는 이 달콤한 키스가 오래도록 이어지길 바랐다.

쭉 빨면 금세 녹아 버릴 것 같은 아이스크림 같기도 하고, 입 안에서 달짝지근하게 뭉개지는 망고 같기도 하고, 말랑말랑 탱글탱글 순두부 같기도 하고. 아무튼.

적당하게 전해 오는 온기도 좋았다. 품고 있으니 세상 모든 고민이 사라지고 따뜻한 물속에 풍덩 잠겨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 오로지 그녀와 저, 둘만 존재하는 듯한 그런 기분.

하여 커다랗게 부푼 욕망이 좁은 공간으로 파고들었다.

그녀가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 천천히 숨을 깊이 쉬어 봐.

그러나 흐트러진 밭은 호흡만 간신히 뱉어 낼 뿐, 그의 두툼한 어깨를 붙들고 있는 가느다란 손가락들조차 연신 부르르 진동했다.

눈물지며 말한다.

― ……아파요.

―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 걸까. 스스로도 황당한 말을 지껄이며 몸을 좀 더 깊이 움직였다.

그러자 그녀가 괴로워하며 허리를 뒤틀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목덜미를 손으로 단단히 받쳐 잡고 단번에 밀어 올렸다.

그녀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하아- 반도 진입하지 못한 채 뒷골에서 척추를 타고 진한 전율이 흘렀다.

보이지도 않는 온몸의 솜털이 모두 쭈뼛 일어선 느낌이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어찌어찌해서 결합을 이뤘고, 심각하게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힘들고 어려운 여정이었지만 그만한 기쁨이 있었고, 이제껏 알지 못한 희열이 있었다.

그렇게 절정으로 치닫는데, 그녀가 부서져 버렸다.

마치 인어 공주인 양 하얀 물거품으로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그게 너무 심하게 마음 아팠다. 커다란 쇠망치로 뒷머리를 가격당한 듯한 충격이었다.

그 대단한 상실감이라니.

영원한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다.

미친 꿈이었다. 그렇기에 저 깊은 곳으로 밀어내고 모른 척했다.

그런데 여자를 마주하고 앉아 있는 순간 미칠 듯이 끓어오르는 내면의 무언가…… 솟구치는 갈증.

안고 싶다. 물고 싶고, 흡입하고 싶다.

그래서였나 보다. 분명 저는 재춘 아저씨 말대로 쇼윈도 부부 하자고 말하려 했는데 심하게 훌쩍 앞으로 나가 버렸다.

할머니 할아버지 때문에 진짜 부부를 하더라도 1년 후 상황을 지켜보고 나서의 이야기였다. 어차피 함께 있기로 한다면 서두를 필요 없는 일이니. 신중해야 할 일이니.

그런데 대뜸 진짜 부부 하자느니. 아이도 낳아 주면 좋다느니.

그 말인즉, 지금 당장 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사념이 가득한 채로 그의 검은색 SUV가 콩죽팥죽 앞에 다다랐다.

마음을 다독인 그가 매우 허름한 가게 앞, 나름 정성 들여 가꾸어 놓은 스티로폼 화분들 앞에 우람한 차를 세우고는 문을 밀며 외쳤다.

“할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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