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사빛이 저를 타박하는 남자의 눈을 바라봤다.
기다란 눈매 속, 검고 짙은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다.
그는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뭔가 남다르다.
조각 같은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는데 표정은 빙하처럼 서늘하고, 시선은 몹시 딱딱한데 눈동자는 매우 깊은 우수에 푹 젖어 있는 듯하다.
쉽게 다가서기 어려운 높고 까칠한 철벽이 있는데 어째서인지 속 알맹이는 뜨거운 불덩이일 것만 같은 남자.
사실, 굉장한 용광로 같은 사람이긴 했다. 담금질해 시뻘게진 쇳덩이 같기도 했고, 활활 타오르며 하늘을 나는 커다란 불새 같기도 했다.
“죄송합니다. 급히 전화할 곳이 있어서 그만…….”
잠기고 갈라진 소리가 그녀의 목에서 흘렀다.
“거의 다 맞은 거여서 봐준다.”
“고맙습니다.”
사빛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자의 잠잠한 시선이 그런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다가 그녀가 싹싹 비워 놓은 죽 그릇으로 내려갔다.
“잘 먹네. 이제 좀 괜찮아?”
“네. 덕분에요. 이것도 고맙습니다. 맛있었어요.”
사빛도 빈 죽 그릇을 내려다보며 진심 어린 인사를 했다.
모두 꿈에 없던 대화 내용이다. 그녀가 주삿바늘을 빼고 고모에게 전화한 것 등 꿈과 다른 행동을 했기에 변화된 모양이었다.
다행한 일이었다. 그녀는 미래를 변화시켜야만 하니까.
잠시 눈을 내리깐 채 말이 없던 남자가 조용히 입술을 떼고 나직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사빛이 마른침을 목구멍 뒤로 꿀꺽 삼켰다. 이 모습과 대사는 꿈에 있었다.
맞는다면 이제 그는 그녀에게 쇼윈도 부부를 제안할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그러겠다고 대답할 것이고.
“난 줄곧 외국에 살았고 1년 뒤에 다시 한국을 떠날 예정이야. 내가 지금 밖으로 돌면 나쁜 일을 당한다고 할머니가 걱정하시니까 잠깐 있어 드리는 거거든.”
여기까지 똑같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남자의 말에 사빛은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다.
“그래도 괜찮다면, 하자 부부. 네 말대로 1년 있다 헤어져도 되고, 그 후에도 원하면 그냥 내 아내로 있어도 돼. 결혼식도 원하면 하고, 혼인 신고도 원하면 해.”
뒤의 말이 바뀌었다!
“예?”
깜짝 놀란 사빛은 자기도 모르게 그가 하지 말라는 되묻기를 하고 말았다.
잘 고쳐지지 않는, 작다면 작고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는 그녀의 버릇이었다.
“네가 그만하고 싶다고 할 때까지 부부 하자고. 아이도 낳아 주면 좋고. 대신 아이는 우리 집 자손으로 남아야 할 거야. 사내면 장손으로 대도 이어야 하고. 어때?”
‘어때?’라고 그가 물었지만 그녀는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얼떨떨해 멍하니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그가 미간을 찌푸리고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설명했다.
“무슨 그런 혼인이 있냐 싶겠지만 이쪽에선 간혹 있는 계약 조건이기도 해. 헤어질 때 합당한 보상을 충분히 할 거고. 돈이 필요해서 벌러 왔다며.”
후사를 잇기 위한 혼사야 오랜 옛날부터 있던 일인 건 안다. 씨받이란 말도 들어 봤다. 요즘에도 있다고 한다.
간혹 가십 뉴스에서 이혼한 재벌가 며느리들이 아이들은 두고 나오는 경우도 종종 보긴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런 것들이 처음부터 계약으로 이뤄지기도 하는가 보았다.
“네가 내 부인하겠다고 왔길래 물어보는 거야. 생각해 보니 아내가 있으면 내가 많이 편할 것 같아서. 좀 더 자유로울 것 같아서. 그게…… 나는 너 아니면 안 되잖아.”
이게 진짜 청혼이라면 ‘너 아니면 안 돼’는 아주아주 달콤하고 로맨틱한 말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와 저 사이에 ‘너 아니면 안 돼’는 그저 사주 궁합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거절해도 되니까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진짜 부부가 아니더라도 네 말대로 1년간은 곁에 두기로 했으니까. 각자 지내다가 우리 집 식구들 앞에서만 그럭저럭 친한 사이인 척하자고. 천천히 생각해 보고, 우선은 쉬어라.”
몸을 일으킨 그가 죽 그릇이 든 쟁반을 들고 서재에서 나갔다.
* * *
이훤이 여자를 위해 야채죽 비스름한 걸 끓일 때였다.
그의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훤아, 할미다. 할미가 좀 막무가내로 일을 벌였지? 하지만 그 아가씨는 정말 달라. 아마 다시 그런 아가씨 만나기 힘들 거라더라. 쭉 함께했으면 할미는 소원이 없겠지만 1년 만이라도, 제발 이번 1년 만이라도 곁에 둬. 응?]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은 핏줄인 자신에게 항상 절절매는 할머니시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가 막는다고 막아지는 일이 아니었다.
― 몇 살이에요.
싫다고 배척만 하다가 이제야 여자에 관해 묻는 이훤이었다.
[올해 스물세 살이야. 한국대 졸업반인데 잠시 휴학한다고 했고.]
생각보다 많네.
― 집안 사정이 많이 안 좋은가 봐요. 밥도 못 먹을 정도예요?
[사연이 참 많은 아가씨지. 어렸을 때 헤어져서 아가씨는 모르지만 신양 운송 황 사장 둘째 마누라가 친모야. 이태연이라고, 배우지. 그 덕에 연이 닿았어. 그런데 이건 당분간 너만 알고 있어라. 이태연이가 비밀로 해 주길 원해서 나랑 세간현 도사밖에 몰라.]
신양 운송은 오래전부터 이솔과 함께해 온 거래처 중 하나이다. 이 지역에서 해운업으로 시작했지만, 현재는 수천 대의 대중 버스를 가진 알 만한 중견 기업이었다.
[아비도 일찍 여위고 시골 할미 품에서 자랐는데 지금은 몸이 안 좋아 요양원에 있고, 가까운 친척이 고모 내외인데 사람들이 경박하고 돈을 좀 밝혀. 아가씨가 초년 운이 아주 안 좋대. 그런데 초년 운만 그렇대. 앞으로는 아주 좋대, 도사가.]
할머니가 오랜 세월 인연을 맺고 있는 세간현이란 도사는 강남에서 가장 비싼 주상 복합 아파트 고층에 거주하며 아무나 상대 안 한다는 무속인이다.
― 제 곁에 있다가 잘못되면 어쩌라고요.
이훤이 무감정하게 읊조렸다.
[그래서 그 애여야 한다는 거야. 그 애는 절대로 잘못되지 않아.]
곧 여든인 할머니의 너무나도 확고한 말투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핏줄에 대한 집착과 더불어 이 또한 그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아니란 걸 알기에 묵묵히 듣기만 할 뿐이었다. 가끔 너무 심하다 싶을 때 한 번씩 화를 폭발시켜 가며.
그때, 미닫이 방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누구랑 통화해?]
그의 할아버지였다.
[이훤이요.]
[왜, 또 싫대?]
[아니…….]
[이리 줘 봐.]
부산스러운 소리와 함께 그의 할아버지가 통화를 넘겨받았다.
곧,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거친 소리가 이훤의 귀로 쏟아졌다.
[하라면 할 것이지 뭔 잔소리가 이리 많아. 다 네놈 좋아지라고 비싼 돈 들여서 이리도 해 보고 저리도 해 보고 생난리인 건데. 그렇게 싫으면 어디 맘대로 해 봐. 죽든지 살든지. 한국에도 있을 필요 없어. 객사를 하든지 말든지. 난 연석이네만 있으면 되니까.]
이솔 그룹 지주 회사인 이솔 스틸 권연석 사장은 이훤의 작은아버지이다. 연로하신 할아버지를 대신해 그룹의 실무를 관장하고 있다.
할아버지의 친자로 법적 인지되어 있으나 모친은 이훤의 할머니가 아니다.
이훤이 작은할머니라고 불렀던 분이 친모인데, 본가 뒷집에서 살다가 돌아가셨고 현재 그 집엔 작은아버지 가족이 그대로 남아 살고 있다.
이훤이 그저 묵묵히 듣고 있는 가운데 할아버지의 말씀이 이어졌다. 실무만 작은아버지께 넘겨줬을 뿐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1만 이솔 인의 우두머리.
곧 여든다섯이지만 성정과 목소리만큼은 옹골찬 노송처럼 괄괄하시다.
[당신도 태도 좀 똑바로 해. 그래 오냐오냐만 하니까 저 녀석이 저래 정신 못 차리는 거 아냐. 제 목숨 줄이 달려 있다는 데도. 네 이놈! 이 할아버지가 명예를 걸고 맹세한다. 그 여자랑 손주 만들어서 내 품에 안기지 않으면 내 회사 지분이나 재산은 단 한 푼도 없을 줄 알아라. 전부 은원이 주원이 줘 버릴 테니까.]
은원과 주원은 작은아버지의 자식들로 이훤과 나이 차가 별로 없는 사촌들이다. 할머니야 오로지 이훤뿐이지만, 할아버지는 저 말고도 대안이 튼실한 것이다.
이훤의 명분은 족보에 떳떳이 올라간 적통이라는 것뿐이었다. 요즘 세상엔 그리 쓸모가 없는.
분위기가 거칠어지자 할머니가 얼른 수습하고 나섰다.
[이훤아, 들어가. 다음에 통화하자. 아가씨 잘 데리고 있고.]
이훤이 통화가 종료된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이훤은 원래 결혼할 마음이 없었다.
안 믿는다고 하나 그런 저주받은 꼬리표를 달고 어떻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겠는가. 찜찜해서.
그런데 할머니 할아버지와 통화하다 보니 생각이 좀 바뀌었다.
어차피 내 부인하겠다고 온 애. 저 애만 괜찮다면 그냥 진짜 부부 하는 게 어떨까. 안전하다잖은가. 저 애는. 저 애만. 그러니 내 곁에 있겠다고 하는 때까지만.
그러다가 결국 뜻이 안 맞아 헤어지는 때가 그의 조부모들이 모두 돌아가신 뒤였으면 좋겠다.
그분들이 아니라면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관여하거나 왈가왈부할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아주 멀리 떠나 아무 소식 없을수록 좋다 하겠지.
여자에게 생각해 보라며 뜻을 전한 이훤은 들고나온 쟁반을 싱크대에 가져다 놓고 커피를 한 잔 내려 2층 작업실로 올라왔다.
그리고 책상에 기대선 채 무심히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원래 진한 모닝커피로 하루를 여는 그였는데 오늘은 어쩌다 보니 이제야 마시게 되었다.
커피를 다 마셨을 때쯤, 여자가 현관문을 나섰다. 조용한 움직임으로 주위를 훑은 그녀는 타박타박 가까운 벤치로 걸어가더니 차분하게 엉덩이를 걸터앉았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 멍하니 앞을 본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