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75)

4화

시야가 흐려지며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꿈을 꾸었다. 지독히도 힘든 꿈이었다. 너무나 생생하여 꿈인지 현실인지도 모호한 꿈.

꿈은 몹시 길었다. 그녀가 이곳에 오게 되는 과정부터 하나하나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리고 결론은 어이없게도 그녀가 미치고…… 죽는 것이었다.

꿈의 내용이 맞는다면 그녀는 앞으로 이곳에 머물게 된다. 그가 주방 옆 작은 방을 내어 주며 쇼윈도 부부를 제안하는 것.

― 난 줄곧 외국에 살았고, 1년 뒤에 다시 한국을 떠날 예정이야. 내가 지금 밖으로 돌면 나쁜 일을 당한다고 할머니가 걱정하셔서 잠깐 있어 드리는 거거든. 어차피 그러는 김에 너도 옆에 둘게. 네가 하도 불쌍해 보여 굳이 안 해도 되는 짓거리 하는 거니까 없는 듯이 지내다가 우리 집 사람들 앞에서만 사이좋은 척하면 돼. 할 수 있겠어?

그런데 어쩌다 보니 그들은 몸까지 섞는 사이가 되었고 문제는 그 이후였다. 그녀가 시름시름 병든 닭처럼 굴더니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 천천히 강도를 더해 가며 심각해졌다. 마치 가뭄에 땅이 퍼석해지듯이 생기가 마르다가 종래에는 쩍쩍 갈라지는 그런 기분이었다.

동공이 풀린 듯한 눈으로 휘적휘적 거리를 걸을 때면 사람들이 흠칫 놀라며 주위를 피했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쏘아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을 때면 경악하며 도망갔다.

그렇게 사람들의 안 좋은 시선을 받으며 이유 없이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와선 멍하니 넋을 놓곤 했다.

공허한 얼굴로 먼 데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다가, 아무것도 아닌 한 지점을 귀신이라도 보는 양 뚫어지게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머리에는 늘 이런저런 꽃들이 꽂혀 있었다.

비록 잘 씻지도 않고 맨발로 돌아다녀 검댕과 상처투성이였지만 예쁜 꽃으로 머리와 가슴을 장식하는 걸 그렇게나 좋아했다.

먹을 것도 참 좋아했다.

닥치는 대로 눈에 띄는 것들을 먹어 치우는데, 그런데도 몸은 계속해서 야위어 갔다.

개구리처럼 배만 볼록해서는 이런 이상 행동들을 하는 자신을 보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기라도 한 것일까? 생각해 보려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알 수 없었다.

너무 당황스럽고 먹먹해서 애써 외면하려고도 했다. ‘꿈이야, 그냥 개꿈이야, 비를 너무 많이 맞아서 악몽을 꾸는 거야’라고.

그러나 그냥 꿈이라고 치부하기엔 보이는 사건 하나하나와 본인이 느끼는 감정들이 너무도 생생하였다. 저렇게 정신을 빼고 있는 자신의 속이 무척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것 또한 고대로 꿈을 꾸는 자신에게 전달되었다. 죄다 뜯어 놓아 속살까지 벌겋게 비치는 손톱들을 보면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자꾸만 이상해져 가던 그녀는 어느 날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물속에서 괴로워하며 죽어 가는 자신을 보며 눈물짓던 그녀는 이게 누군가의 농락에 의한 것임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곳에 지내면서 듣기로 그의 어머니가 그녀와 비슷한 상태가 되어 안채에 불을 내고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집이 안채만 다른 모양인 거라고.

사빛은 남자가 타고났다는 흉살이니 뭐니 그러한 말들을 믿지 않는다.

그 상태에서 이런 꿈을 꾸고 보니 누군가 남자의 사주팔자가 아주 불길하고 나쁜 것임을 사람들에게 믿게 하려고 계책을 꾸민 것이 아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누가?

사빛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에서 보면 남자의 집안사람들, 일부 지인과 회사 사람들, 관리인 부부와 일꾼들, 마을 사람 중 누군가일 터였다.

일단 어렸을 때부터 타지 생활을 했다는 남자였고, 그녀가 꿈에서 함께했던 그가 접촉한 인물이 그 정도였다.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꿈에서 깼다.

깨어 보니 자신은 링거를 꽂은 채 누워 있었고, 남자는 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꿈에서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이 다른 것이다.

예지몽을 꾼 건가? 아니면 책이나 영화에 나오는 회귀 같은 건가?

머리가 급격하게 복잡해졌으나 그것보다 중요한 건 아직은 나쁜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어난 일들이 너무 가슴 아팠고, 깨고서 저 남자를 보는데 무척 애틋한 심정이 들었다. 아직은 괜찮음에 깊고 깊은 안도감이 들 정도로.

그러던 사빛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아이, 내 아이. 내 배 속의 핏덩이!’

그녀의 개구리 배 속에 태아가 있었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심장이 격하게 쿵쾅거렸다. 너무도 빠르게 뛰어 명치까지 욱신욱신 아팠다.

‘아냐. 그러면 안 돼. 아기가 배 속에 있는데 그렇게 죽으면 안 되는 거잖아.’

사빛이 부들거리는 손으로 자신의 휴대폰을 찾았다.

방금 그녀가 본 것들이 그냥 개꿈인지 아닌지 확인해 볼 방법이 있었다.

자신의 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찾은 사빛은 서둘러 고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를 남자 집안과 연결해 준 사람이었다.

“고모, 이 남자 집안이 혹시 이솔 그룹이에요?”

이솔은 일반 소비재 사업을 하지 않는지라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꽤 건실한 기업이었다.

남자의 할아버지가 젊었을 적 고향인 이 지역에서 시작했던 회사가 승승장구해 지금은 재계 순위 30위에서 35위쯤 된다고 한다.

사빛 역시 모르는 기업이었으나 이런 세세한 내용 모두 꿈으로 알게 되었다.

[맞아. 그래서 비밀 유지 각서도 받은 거야. 세간에 그 집 사정 알려지면 위자료 못 받아. 조심해.]

사빛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혼례식 때 본 남자의 할머니란 분이 교동에 있는 IS 갤러리 윤여란 관장님이고요?”

[맞아. 왜? 그보다 잘하고 있는 거야? 잘해야 한다. 무려 4억이 걸려 있는데.]

사빛은 여기 오기 전에 남자의 집안 사업이나 IS 갤러리와 할머님의 관계, 할머님의 성함과 직책에 관해 들어 본 바가 없었다. 고모는 그저 큰 부잣집의 장손이라고만 했다.

모두 꿈이 알려 준 거였다. 그러니 이건 필시 예지몽 아니면 회귀이다.

하아- 대충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은 사빛이 긴 숨을 토해 냈다. 심장이 아프게 쿵쾅거리던 걸 넘어 둥둥둥 북소리를 냈다.

하나 더 확인해 보면 확실해진다.

손등에 꽂혀 있던 주삿바늘을 빼낸 사빛이 한쪽 벽면을 메우고 있는 책장 겸 장식장 앞으로 갔다. 그리고 자신이 꿈속에서 흥미 있게 보았던 책을 까치발을 이용해 꺼내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찾고자 하는 페이지를 펼쳐 보았다. 정확히 꿈에서 본 바대로 찢어져 있었다.

사빛은 몸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가슴이 터질 듯해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이 일을 어쩌나. 나는 그렇다 쳐도 내 아기는. 우리 할머니는.

눈물이 흐를 것만 같은 눈동자를 돌린 곳에 커다랗고 튼실한 마호가니 책상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남자와 나누었던 뜨거운 사랑도 홀로그램인 양 떠오른다.

책상뿐인가. 여기 침대는 물론 어제의 거실, 주방, 심지어 욕실에서까지. 그는 대단한 정욕의 소유자였고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녀를 범하곤 했다.

끝내 그녀의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제 빗속에서 흘렸던 한 줄 눈물과는 내용이 사뭇 달랐다.

그땐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오게 되어 경멸 어린 시선을 받다가 빗속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자신의 처지가 처량해서 울었다면, 지금은 무지한 저 때문에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에 자책이 되어서였다. 너무 부끄럽고 죄스러워 우는 거였다.

그녀는 욕심을 내었다. 남자가 저를 사랑하지 않음을 알고도 남자의 옆자리를 탐했다. 그래서 피임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아기가 갖고 싶다는 이유로 매일 먹어야 하는 피임약을 남자 몰래 안 먹기 시작했다.

그런 이유로 벌을 받았나 보다. 어딘가에 신이 있어 벌을 주셨나 보다.

* * *

창가 테이블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달칵 문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섰다.

손에는 한 그릇의 죽과 김치, 그리고 물 한 컵과 수저 세트가 든 쟁반이 들려 있었다.

남자가 쟁반을 그녀 앞에 놓아 준 후 마주하고 앉았다.

“먹어.”

사빛이 수저를 들고 천천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후 불어 입에 넣고, 또 한 수저 가득 떠서 후후 불어 입에 넣었다.

목이 부어 있어 불편하고 따끔거렸지만 꾹 참고 죽 한 그릇을 뚝딱 비워 냈다.

잘 먹기로 했다. 비실거리는 채로 있다가 허망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예지몽이면 진짜 일어날 것이요, 회귀라면 진짜 일어났다는 것이다. 뭐가 되었든 가만히 앉아 똑같이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빛은 꿈속에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게걸스럽게 먹어 대던 자신을 떠올렸다.

안채에 있는 냉장고든 광채에 있는 대형 냉장고든 가리지 않고 뒤졌고, 그릇이고 포크고 필요 없이 손으로 쥔 채 우걱우걱 배 속으로 욱여넣기도 했다.

‘그때처럼 잘 먹자. 힘을 내 이 사람을 돕고, 약속된 돈을 받고, 할머니를 만나 행복하게 잘 살자. 나는 반드시 그리할 것이다.’

목숨이 달린 일이니 돈이고 뭐고 지금이라도 당장 할머니를 찾아 도망갈 수도 있다.

하지만 꿈의 기억으로 고모는 자신을 이곳에 있도록 달래기 위해 할머니를 수술시켜 드리고 재활은 물론 매주 찾아가 보살펴 드린다.

사빛은 지금 단 한 푼이 없다. 그러니 지금은 할머니를 위해서 그런 상태로 두는 것이 좋았다.

죽 그릇을 말끔하게 비우고 수저를 내려놓은 뒤 물 잔을 들었다. 목이 아프니 한 입만 마시자 싶은데, 조그마한 김치 종지가 내리깐 시야 속으로 들어온다.

고춧가루가 거의 없는 부분들로만 작게 잘라져 가지런히 놓여 있다. 가만히 내려다보며 물을 목 뒤로 넘기는데 그가 말했다.

“너 때문에 새벽부터 몇 사람이 고생하는데 주삿바늘을 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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