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택시야 지금이라도 불러 태워 보내면 되겠지만, 갈 데도 없다는 여자애를 이 밤에 홀로 돌려보내기는 좀 그랬다.
낮이라면 성인일 테니 알아서 살길 찾아가겠지.
“…….”
“얼른.”
이훤이 먼저 터벅터벅 안채를 향해 걷자, 머뭇거리던 아이도 주섬주섬 짐을 챙겨 일어나더니 그가 준 우산을 펼쳐 들고 뒤따랐다.
“들어와.”
협문을 나서고 잔디 위에 듬성듬성 놓인 디딤돌을 따라 안채 건물 데크에 올라선 이훤이 열린 현관문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다 큰 남녀가 단둘이 한 공간에서 밤을 보내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지만 쟤는 조그마한 아이. 저만 다른 생각 없으면 아무 문제 없었다.
두 우산의 물기를 대충 털어놓고 집 안으로 들어선 이훤이 쿨하게 거실 욕실을 가리켰다.
“우선 씻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어. 다 젖었네.”
그는 그녀의 옷을 말하는 거였지만 아이는 저 때문에 더럽혀진 발판을 내려다보며 황급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러더니 캐리어를 열고 주섬주섬 옷가지들을 챙겨 그가 알려 준 욕실로 향했다.
지퍼가 열린 채 아귀가 흐트러진 캐리어.
잠시 열렸을 때 언뜻 보기로 깔끔하게 차곡차곡 챙겨 왔으나 허름한 것투성이였다. 캐리어 자체부터가 누가 내다 버린 걸 주워 오기라도 한 모양새였다.
찌뿌둥하게 쳐다보다가 돌아선 이훤이 다시 주방으로 가 새로운 스파게티를 만들기 시작했다. 뭐라도 좀 먹여서 재워야 했다.
창밖으론 여름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물을 끓이고 면을 빙 둘렀다.
면이 익기를 기다리며 다른 재료들을 하나하나 꺼내는데, 대충 씻고 나온 아이가 세면도구가 든 듯한 파우치를 캐리어에 넣고 지퍼를 닫은 후 쭈뼛쭈뼛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식탁에 앉으라 손짓하곤 빠르게 스파게티를 완성했다. 아주머니가 씻어 밀폐 용기에 넣어 둔 아스파라거스와 브로콜리도 냉장고에서 꺼내 데치고, 아까 잡아다 손질해 둔 소라도 데쳐 살만 꺼내 얹었다.
제법 그럴싸한 모양의 음식이 담긴 접시를 가지고 돌아서니, 아이가 식탁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다.
“야, 저녁 먹고 자야지.”
다가가 그릇을 내려놓고 식탁을 톡톡 두드려 보았으나 일어나지 않는다.
‘피곤했나.’
어찌할까 눈썹을 찡그린 채 내려다보며 생각하는데, 쌀떡 같은 흰 뺨에 홍조가 올라 있다. 약간 벌어져 있는 입술 앞에 손가락을 대 보니 날숨 온도가 좀 높았다.
이마에 손등을 대 보았다. 걱정할 수준은 아니나 미열이 있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이훤은 아이를 안아 들고 서재로 향했다.
‘몹시 가볍군.’
안채에는 방이 세 개가 있다.
하나는 그가 사용하는 안방이고, 하나는 간이침대가 있는 서재, 나머지 하나는 이런저런 짐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제일 작은 방이었다.
하니 그녀가 하룻밤 머물 곳은 서재가 마땅했다.
구석에 있는 침대에 아이를 눕히고 붙박이장에서 새 이불을 꺼내 덮어 준 후 잠시 내려다보았다.
별일이 없자 안방으로 돌아온 그는 손에 들고 온 서재용 담요를 휙 침대 위로 던져두곤 드레스 룸을 지나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마치고 허리에 수건을 두른 채 세면대로 와 보니 거울 속 자신의 수염이 좀 많아진 것 같다.
‘깎을 때가 되었네.’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무심히 생각한 그는 면도용 크림을 짜서 턱 근처에 문지르고 잘 벼려진 면도날을 꺼내 들었다.
손잡이가 묵직한 아날로그식 면도기에 찰싹 끼우고 쓱쓱 털을 없앤 후 깨끗이 닦고 침대로 와 몸을 벌렁 눕혔다.
긴 다리를 아무렇게나 구부린 그가 읽다 만 책을 한참 보다가 잠든 것이 밤 11시에서 12시쯤.
문득 눈을 떠 보니 벽에 붙은 LED 시계가 새벽 4시임을 알려 주었다.
평상시보다 두 시간 정도 이른 기상이었지만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집중적으로 쏟아졌던 비는 그친 듯했다. 그래도 습기는 남아서 둥근 보름달 주위에 희뿌연 달무리가 생겨 있다.
한참 그 자세로 달을 올려다보며 눈을 끔뻑이던 이훤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거실로 나와 등을 밝혔다.
냉장고 정수기에서 얼음물을 한 잔 받아 마시며 눈길이 서재 쪽으로 향한다. 잠시 가만히 닫힌 문을 바라보던 그가 물 잔을 내려놓고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분명 뭔가 이상했다. 작지만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노크해 보았으나 반응이 없기에 물었다.
“꼬맹이, 괜찮아?”
역시 반응이 없었다. 아픈 건가?
“들어간다.”
말하고 들어서 다가가 보니 아픈 것이 확실해 보였다. 손등을 이마에 대 보니 열이 펄펄 난다.
* * *
인적 없는 푸르스름한 새벽길을 투박한 자전거 한 대가 큼지막한 왕진 가방과 함께 달렸다.
올해로 쉰아홉 살이 된 의사 이재춘의 것이다. 서울에 있는 대학 부설 병원 교수님이었지만 어느 날 뜬금없이 귀향해 보건 지소 지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거동하기 어려운 환자가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는 것은 기본이요, 야밤에도 비상 콜이 울리면 언제든 일어나 뛰어오는 열혈 의사였다.
사빛의 상태를 살핀 재춘이 뒤에 서 있던 이훤에게 말했다.
“단백 열량 부족증이야. 다른 영양 상태도 별로인 것 같고. 면역력이 많이 떨어져 있는데 비까지 맞아서 앓는 거야. 영양제랑 처방 약이랑 준비해서 주 간호사 출근하면 보낼게.”
열량 부족? 저 몸에 다이어트를 하는 건 아닐 테고. 요즘 세상에 사지 멀쩡한 젊은이가 밥을 굶는다는 게 다소 이해되지 않는 이훤이었다.
돈에 팔려 오질 않나, 집도 없다더니 영양 결핍이라지 않나, 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아이인가 싶다.
“목이 부었으니 일어나면 우선 죽부터 줘. 열은 그거 때문에 나는 거야.”
“괜찮은 건가요?”
“며칠 잘 먹고 푹 쉬면. 열 내리게 물수건 잘 갈아 주고.”
“예. 수고하셨습니다.”
“그런데 누굴까?”
의사로서의 임무를 마친 재춘이 사빛을 유심히 보며 물었다. 이훤의 부친과 한마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중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였기에, 그에게 이훤은 조카와도 같았다.
“글쎄요.”
“글쎄요 라니?”
“제 신부라네요.”
“뭐? 결혼했어?”
“아뇨. 기간제 신부래요. 예식도, 혼인 신고도 안 해도 되니 그냥 잠시 곁에만 두래요.”
“할머니가?”
“네.”
그의 속사정을 잘 아는 재춘의 표정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훤의 할머니를 비롯하여 이 집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들, 독실한 크리스천인 재춘에게는 그리 와 닿지 않았다.
그저 헛된 생각이 젊은 애 인생 하나 망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에게 그의 믿음이 있듯이 그들에게도 그들의 믿음이 있는 거니까.
이 집 어른 말로는 지금부터 이훤이 만 서른이 되기까지의 한 해가 몹시 나쁘다고 한다. 그래서 찾은 방법인가 보았다. 인간 부적?
“흠…… 어쩌려고?”
“글쎄요.”
“왜?”
“돌려보내야지 싶은데 갈 곳이 없대요. 돈도 없고.”
“어쩌면…… 이렇게 된 김에 잠깐 데리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어른 마음도 놓이고 아가씨한테 좋은 일도 하고. 여기 빈방이 하나 있잖아? 어차피 1년 뒤에 다시 떠날 생각이라며. 그때까지만.”
잠들어 있는 여인을 잠잠히 바라보며 중얼거린 재춘이 이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짐을 챙겼다.
“간다. 나오지 말아라.”
“죄송합니다. 이른 아침에.”
“너 때문에 온 게 아니고 환자 때문에 온 거다. 내 할 일을 하는 거니까 미안해할 거 하나도 없다.”
“네.”
이훤이 미소 짓고는 따라나섰다.
“면도했네?”
재춘이 자기 턱을 쓰는 시늉을 해 보이며 빙긋 웃었다. 귀찮다고 그냥 두었다가 간혹 생각날 때, 혹은 서울 갈 일이 있을 때나 하는 면도였다.
“그런데 저 아가씨 여기 살면 다른 아가씨들은 어쩌누. 미스 박은 어쩔 것이고, 주 간호사는 어째. 만리장성 딸내미는. 그냥 이참에 다들 마음 접게 완벽한 쇼윈도를 해 보는 건 어때. 우리 주 간호사 시집 좀 보내게.”
실없는 농담을 하며 허허거리는 재춘이 왕진 가방을 자전거 뒷자리에 단단히 묶고 안장 위에 올랐다.
“가세요.”
“그래.”
낡은 자전거를 타고 구부정하게 뻗은 논길을 가는 의사의 뒤꽁무니가 한참 멀어질 때까지 보고 서 있던 이훤이 다시 서재로 돌아왔다.
그리고 물수건을 머리에 얹은 채 색색거리며 잠들어 있는 여자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쇼윈도라…… 쇼윈도…… 아저씨 말대로 해 볼까.
생각해 보면 누구에게도 해 될 것이 없는 일이었다. 저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할머니, 불쌍한 처지에 있음이 분명해 보이는 이 애, 그리고 저 자신까지.
서류가 남는 것도 아니니 아이의 미래에도 흠이 안 될 것이다.
진짜 부부가 아니면 될 일이었다. 그러니까 저만 별생각 품지 않으면 될 일인 것이다.
그거야 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미친놈도 아니고 이 어린 애와 무슨 일을 벌이겠는가.
* * *
미간을 움찔거리던 사빛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지끈거렸다.
‘여긴…… 그리고 저 사람은…….’
한쪽 벽면 가득 들어찬 고풍스러운 책장과 그 앞에 놓인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
그리고 창가 테이블 의자에 앉아 두툼한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은 분명 어제 만난 그녀의 신랑이었다. 수염이 사라져서 더욱 잘나 보이는.
비가 그쳤나 보았다. 창밖에서 들이쳐 그의 몸 위를 부유하는 새하얀 빛이 고왔다. 사빛은 한참, 멍한 눈을 끔뻑거렸다.
“깼군.”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어지러운 상념을 깨웠다. 사빛이 눈을 들어 그의 눈을 마주했다.
“의사 선생님 다녀가셨어.”
보니 그녀의 손등에 바늘이 꽂혀 있고 스탠드 옷걸이에 수액이 든 팩이 걸려 있다.
“몸이 좀 안 좋대. 알고 있었어?”
사빛은 대답 없이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우선 죽을 좀 줄게. 진짜 죽은 어떻게 하는 줄 모르겠고, 볶음밥용으로 얼려 놓은 채소랑 밥이 있어서 물 넣고 끓여 보려고. 괜찮지?”
“…….”
“목이 아파서 그런 거면 대답 안 해도 돼. 싫으면 고개만 살짝 저어 봐.”
그녀가 말없이 그저 보기만 하자 그가 “기다려.” 말하곤 서재에서 나갔다.
그 뒷모습을 좇던 사빛의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툭 치면 곧 눈물이라도 쏟아 낼 것처럼 처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