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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2/75)

2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입 안에서 끈적해지려는 침을 목 뒤로 넘긴 사빛이 다부지게 덧붙였다.

“그 집이란 걸 마련하기 위해 이 일을 합니다. 약속하고 온 것이니 임무를 마치고 보수를 받을 때까지 갈 수 없습니다.”

남자가 가만히 쳐다보다 피곤한 듯 물었다.

“그럼 방 한 칸 마련할 돈이라도 주면 돼? 얼마면 되는데.”

“아니요. 저는 거지가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하고 약속된 돈을 받아 제힘으로 마련할 겁니다. 그러니 가라 하지만 말아 주십시오.”

“우리가 잠깐이라도 부부가 된다는 거잖아. 그게 너 혼자 하고 싶다고 되는 문제야? 내가 싫다잖아.”

“그냥…… 그냥 곁에 있게만 해 주십시오. 아까 그 몸 아이, 그거라고 생각하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필요 없어.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해.”

남자가 또다시 가려 한다.

“저희 할머니가 아주 많이 편찮으십니다!”

“……?”

“제가 여기 1년만 머무르면 요양원에 외롭게 계신 할머니를 모셔 와 병원비 걱정 없이 따뜻한 집에서 오래오래 함께 살 수 있습니다.”

“내 옆에 있으면 네가 잘못될 수도 있어. 들었을 텐데?”

“…….”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남자가 터덕터덕 다가오더니 얼굴을 불쑥 들이밀고 그녀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가벼운 행동인데 어쩐지 묵직하게 느껴졌다. 센 기운을 가진 남자였다.

가까이서 보니 굉장한 미남이기도 했다.

미끄러질 듯 반질거리는 피부와 그림 같은 눈썹. 오만한 빛이 서린 눈매와 그 위를 덮은 길고 촘촘한 속눈썹. 조각인 듯 완벽하게 솟은 코와 칼로 벼린 듯한 턱선까지.

덥수룩한 수염만 빼면 완전 도시 왕자의 얼굴이었고 어디 하나 못난 구석이 없었다.

키 크고 잘생긴 배우를 보는 듯했다. 평상시에는 산이든 섬이든 외딴곳에 들어가 자연인처럼 사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남자 배우들을 잡지나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다.

“거기다 너무…… 내 스타일이 아닌데.”

말하는 싹퉁바가지는 좀 없는.

예의가 제법 없는 듯한 그는 시큰둥하게 몸을 일으키고는 홱 돌아서 협문을 나가 버렸다.

“가라. 저 살자고 어린 여자 살받이로 들이는 개새끼 만들지 말고. 다른 곳에 가서 정상적인 일을 해서 벌어.”

이 말을 등 뒤로 남기며.

그의 말대로 할 수 있었으면 그녀도 참 좋겠다.

“못 갑니다.”

“가라.”

“못 갑니다.”

“비 온다고 하던데, 맘대로 하든가.”

내내 쳐다도 보지 않고 말하며 안채 건물로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이 참으로 야속하였다.

무정한 사람이로구나.

하늘을 보니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 * *

이훤도 안채 현관으로 걸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구름이 저리도 빠르게 움직이는가?

바로 옆 지역에 폭우가 쏟아졌다고 한다. 아무리 여름이라고는 하나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내리더니 순식간에 도로와 건물이 물에 잠겼다고 한다. 그 구름이 이리로 몰려오는 것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는 그녀를 집에 들일 생각이 없었다. 뿔소라를 대충 손질해 냉장고에 툭 던지듯 넣은 이훤이 우럭을 기절시켜 능숙하게 회 떴다.

잠시 후, 후드득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훤이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날이 그래서인지 어스름 또한 빨리 내렸다. 맑은 날 같으면 석양이 질 시간이었다.

잠시 바라보고 있자 곧 굵은 빗물이 투두둑거리더니 점차 빗줄기가 거세졌다. 바람도 좀 부는지, 주방 창밖으로 보이는 텃밭의 살구, 앵두, 석류 같은 과수들이 나뭇잎을 이리저리 흩날렸다.

아이는 갔을까?

고집 피우며 안 가고 있다 해도 상관없었다. 사당만 빼고 모든 전각은 사용치 않아 잠겨 있고, 아주머니 아저씨가 살림집으로 쓰고 있는 줄행랑도 출타 중이라 잠겨 있다.

현대식 조명이 없는 사당은 좀 무서울 테고, 부엌에서 비 좀 피하다가 뭐라도 주워 먹고 내일 아침이면 돌아가겠지.

이제 막 성인이 되었을까 싶어서는 뭘 해. 내 부인을 해? 참 나, 어이가 없어서.

콧방귀를 뀐 이훤이 냉장고에서 초고추장을 꺼내 작은 종지에 푹 짜냈다. 여기 있는 대부분 소스가 그러하듯 아주머니가 손수 만들어 놓은 것이다.

싱싱한 회 서너 점을 새빨간 소스에 쿡 찍어 입에 넣고는 올리브유 스파게티를 만들기 위해 냄비를 꺼냈다. 물을 담아 인덕션 위에 올리고 소금과 면을 꺼내 놓는다.

마늘과 블랙 올리브도 미리 꺼내 놓고, 또 회를 서너 점 한꺼번에 집어 입에 쓱 넣었다.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딸이 갑자기 조기 출산했다고 하여 다녀오라 했다. 주말 보내고 오라 했으니 일요일 저녁까지 끼니를 스스로 챙겨야 했다.

소분해서 얼릴 수 있는 국이며 찌개며 이런저런 밑반찬들까지 꼼꼼하게 준비해 놓고 갔지만 왠지 밥이 당기지 않았다.

큰 식탁에 홀로 덩그러니 앉아 스파게티 한 접시를 뚝딱 해치운 이훤이 빈 접시를 싱크대에 가져다 놓고 2층 작업실로 향했다. 손에는 식사에 곁들이던 무알코올 와인이 들려 있었다.

작업실의 전면은 1층 거실과 마찬가지로 통유리로 되어 있다. 날이 좋으면 저 멀리 논이 끝나는 곳까지도 훤히 내다보인다.

한데 지금 보이는 건 그저 뿌연 수증기에 희끄무레해진 진현당뿐.

계절마다 시간마다 조금씩 바뀐다지만 늘 보이는 것들이 그의 눈에 담겼다. 늦어진 입대 때문에 귀국했다가 이 집을 짓고 내내 지내고 있어 사랑채 소나무 구멍에 사는 다람쥐들 속사정까지 빤했다.

그런 그의 눈길이 머무는 곳은 한군데. 너무나도 익숙지 않은 것. 조그마한 여자애였다.

165㎝는 될까? 비쩍 마른 몸에 허름한 옷을 걸치고 정자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손에 든 술잔을 기울이며 가만히 바라보는 이훤의 눈썹이 모나게 일그러졌다.

바본가? 정자 안으로 좀 더 들어가 있으면 될 것을 우산도 없이 왜 저 비를 다 맞고 있지?

아니면 영악해서 나 보라고 시위 중인 건가?

지그시 내려다보며 홀짝이던 술잔이 어느새 바닥을 보였다.

* * *

“돈이 많이 좋은가 보구나.”

커다란 우산을 들고 앞에 와 선 이훤을 그녀가 올려다보았다.

동그랗게 치뜨는 눈. 그 안에 든 큼지막한 눈동자가 매우 선명하고 새까맸다. 비를 맞아 창백해져서 그런가, 유난히 흰 피부 덕에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눈동자였다.

이훤이 무표정한 눈으로 내려다보는데 그녀가 웃으며 힘없이 말했다.

“좋아하진 않는데, 필요는 합니다.”

이훤이 하나 더 챙겨 온 우산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내 곁에 있으면 네가 잘못될 수도 있다고 하잖아. 몰라?”

그녀가 우산을 받아 들고는 고대로 제 무릎 위에 놓으며 답했다.

“정말 진심을 말하자면, 사주니 팔자니 하는 것들 전부 미신이란 생각에 믿지 않습니다.”

“그럼 왜 왔어?”

“믿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집안사람들처럼. 네가 틀렸다면? 진짜라면 어쩔 테냐.

그가 태어나고 집안의 업이 크게 흔들렸다고 한다.

아홉 살이 되던 때에는 멀쩡하던 어머니가 정신을 놓았고, 얼마 안 가 새 생명을 잉태한 상태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

어머니를 많이 사랑했던 아버지는 허허로운 마음 둘 곳을 깊고 높은 산에서 찾기 시작했고, 어느 새벽 홀로 나선 겨울 산행에서 돌아오지 않으셨다.

이러한 모든 것이 이훤이 타고난 ‘살’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가진 이룡살이 너무 강해 매사가 흉하고 불운하며 본인이나 가족에게 재난이나 병난, 횡사나 사고사가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이건 그의 꼬리표 같은 거였고, 굉장한 핸디캡이었다.

― 그래야 평화로우니까요.

부친이 실종되고 3년 후, 이훤은 초등 어린 나이에 홀로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로도 집안이나 회사의 주요 행사 때만 간혹 들어왔을 뿐 한국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공부도 할 만큼 했고, 이제쯤 돌아와 곁에 있어 주지 않겠느냐는 그의 할머니 말에 이훤은 항상 저렇게 말했다.

― 그래야 평화로우니까요.

하지만 그의 집안은 손이 상당히 귀했다. 그의 할머니는 대를 이을 장손인 그가 이 험난한 굴레를 잘 이겨 내고 굳건해지길 바랐다.

그를 짓누르고 있는 이룡은 매우 크고 강하지만, 이를 다룰 줄 알게 되면 오히려 강력한 무기로 작용한다고. 해서 예로부터 특출나게 용맹하거나 유능한 인물 중에 이 이룡살을 가진 이가 종종 있었다고.

어느 날 만난 유명 무속인에게 그렇게 듣고는 이를 철석같이 믿으시며 얼마 전부터는 그에 맞는 사주를 가진 여자를 손주며느리로 들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셨다.

할머니 말로는 저 아이가 그렇다고 한다.

몇 달 전 드디어 찾았다고 크게 기뻐하시며 연락했는데 이훤이 불같이 화내며 보내지 말라고 했던 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이렇게 왔고.

빗속의 아이가 앵두 같은 입술을 열었다. 창백한 얼굴은 몹시 푸석한데, 저 큼지막한 까만 눈과 도톰한 빨간 입술만은 묘하게 생생하고 자극적이었다.

“어른들이 하는 말씀이 진짜라면 제가 아저…… 이무기가 나쁜 짓을 하지 못하게 막는다는 것 아닙니까. 그럼 더더욱 무엇이 걱정입니까? 제가 아저…… 옆에 서서 지키면 되잖습니까.”

“자신만만하구나. 정말 안 무섭단 말이야?”

“이룡 말씀입니까? 하나도 안 무섭습니다.”

사실 그 또한 믿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할 뿐이었다. 그런데도 죽는다면, 죽으면 되지. 그런 생각이었다.

그게 정말 맞는다면 무고한 다른 생명 해 입히지 말고 그 얼어 죽을 살 제가 맞으면 그뿐이었다.

그때였다. 빗속에 흐르는 아이의 눈물을 본 것은. 울지 않는 척, 빗물인 척하고 있으나 다 보였다. 한 줄 눈물이.

실은 무서운 게로구나. 쓴웃음이 비어져 나온 이훤이 못 본 척 돌아서며 차갑게 말했다.

“따라와. 궁상맞게 이러고 있지 말고. 들어와 자고 내일 아침에 가. 택시비 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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