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은빛 늘씬한 세단이 구부정한 흙길을 달린다. 서울에서 고속도로만 한 시간 반을 탔다. 그러니 도합 두 시간쯤.
수십만 평은 족히 될 듯한 논을 지난 막다른 산 아래가 이 고급 외제 차의 목적지였다.
잔치를 벌여도 될 듯한 너른 공터에 아주 커다란 노각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그 뒤에 고즈넉이 선 한옥 한 채.
세월을 품은 집이었고, 제법 규모 있는 외딴집이었다. 지나쳐 왔던 옹기종기한 민가 몇 채가 저 멀리 아주 작게 보일 뿐이었다.
달칵, 세단의 뒷문을 열고 사빛이 차에서 내렸다. 운전기사가 트렁크에서 그녀의 짐을 내려 주었다. 그래 봐야 낡은 캐리어 하나뿐이었다.
그녀와 함께 뒷좌석에 타고 온 중년 여인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차창을 쑥 내리고는 찌푸린 눈살로 주위를 훑더니만 이내 흥미를 잃고 말한다.
“태 씨랑 방 씨라고, 사용인 부부가 항시 상주하고 있어. 불러서 안내받으면 돼. 온단 말은 해 두었고, 오늘 온다는 연락은 안 했어. 이훤이가 막을까 봐. 싫다 해도 무조건 곁에 붙어 있는 거야, 알지?”
“네.”
중년 여자는 이훤이란 이름을 가진 남자의 작은어머니라고 했다.
“김 기사, 가지.”
왜 여기까지 와서 시조카의 얼굴도 보지 않고 저리 돌아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남자의 집안 사정이야 계약직 신부인 그녀가 알 필요 없는 일이었다.
낯선 길 위에 홀로 서 있게 된 사빛이 주위를 한 번 휘둘러본 후 문 앞으로 걸었다. 잔바람이 불어와 노각나무의 비단 가지를 흔들었다.
그녀의 할머니가 참 좋아하는 나무이다. 고와서 좋다 하였다. 순백의 꽃을 만개하였다가 때가 되면 덩어리째 툭- 떨어져 내리는 게 구차스럽지 않아 좋다 하셨다.
그런데 코로 밀려드는 은은한 향에 습한 기운이 묻어 있다. 하늘은 맑은데, 저 산 너머에 있을 바다의 냄새인가. 먼 데서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대문 앞에 다다른 사빛이 고개를 꺾고 솟을대문 위 현판을 바라보았다. <진현당>이라고 쓰여 있었다.
‘진짜로 현명하게 살라는 뜻인가?’
이런저런 나무가 무성한 오래된 기와집은 낮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묵직한 갈색의 대문이 아주 조금 열려 있다.
사빛이 목을 빼 기웃기웃 담장 안을 살피고, 대문 안도 눈을 빼꼼 들이밀어 살펴보았다.
그러나 정자가 있는 커다란 연못과 크고 작은 소나무들 덕에 멀리 내부 사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초인종이 어디에 있을까 둘러보다가 찾을 수 없자 대문에 붙은 손잡이를 두드리며 외쳤다.
“계십니까?”
두어 번 외쳐 보아도 푸드덕 날아가는 작은 새들의 소리뿐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멈춰 생각한 사빛이 끼익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정돈이 잘된 흙길을 따라 안으로 걸었다.
큰 못에 연잎이 가득하였다. 어디선가 나타난 개구리 한 마리가 폴짝폴짝 그녀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곧 정갈하고 우직한 모습의 전각 한 채를 만날 수 있었다. 지나온 정원과 더불어 이 너른 곳 전체가 사랑채였던 모양이다.
사랑채 양옆과 뒤로는 낮은 돌담과 함께 협문이 하나씩 달려 있었다.
왼쪽에는 자물통으로 잠긴 한 칸짜리 전각 두 개와 그 위로 사당으로 보이는 전각.
오른쪽에는 제법 큰 텃밭과 함께 부엌과 광으로 보이는 전각과 살림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행랑이 있었다.
그리고 산 바로 아래. 안채가 있어야 할 자리에 신기하게도 네모반듯한 현대식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잘 관리된 잔디밭 위에 우두커니 서 있는 건물은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였다.
우선은 오른쪽 광채에 대고 크게 외쳤다.
“아무도 안 계신가요!”
문을 열어 두고 다들 어디 나간 건가?
부엌 처마 밑에 대롱대롱 매달린 푸성귀나 열무 시래기 같은 것들로 보아 사람이 사는 건 분명한 듯한데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안채 쪽에도 다가가 외쳐 보았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집 전체가 너무나 조용했다. 도둑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흠…….”
낮은 숨을 내쉰 사빛이 사랑채 전각 툇마루에 엉덩이를 걸터앉았다.
우선은 조금 기다려 보기로 한다. 영 아무도 안 오면 남자의 작은어머니에게 전화를 넣어 봐야 할 듯하다.
사빛이 주머니 속 휴대폰을 꼼지락꼼지락 만지며 무료한 눈을 끔뻑거리는데 저만치에서 뭔가가 쓩- 하고 날았다.
소리 없이 바닥에 안착한 조그마한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화다닥 뛰어 연못가 바위틈에 몸을 숨겼다.
아주 빠른 몸놀림이었다. 남보라색 달개비꽃이 흐드러진 바위틈에 들어앉아 둥글고 커다란 눈망울로 사빛을 본다.
‘다람쥐네? 완전 귀여워!’
배가 하얗고 등은 밝은 회색이다. 날개 같은 막으로 제법 긴 거리를 활공했으니 하늘다람쥐일 것이다.
반갑다고 생각한 사빛이 몸을 일으켜 살금살금 다람쥐 앞으로 다가가려는데 등 뒤에서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냐?”
돌아보니 거구의 사내가 짙은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 서 있었다.
낡고 큼지막한 방수 잠바, 툽툽한 낚싯대와 숭숭한 그물, 양동이 같은 것들과 함께였다.
저분이 관리인이라는 분인가? 수염이 덥수룩하긴 하나 생각보다 꽤 젊었다.
“누군데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 있는 거냐?”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양동이를 내려놓으며 무뚝뚝하게 물었다.
투명한 물 안에 물고기 한 마리와 왕 소라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혹시 말씀을 못 들으셨는지요?”
“뭘?”
“서울에서 제가 올 거란 소리를요. 언질을 미리 해 두었다고 들었거든요.”
“네가 누군데.”
이 사람은 누굴까.
그녀가 누구고 무슨 사정으로 이곳에 오게 된 건지 함부로 떠벌리면 안 된다고 했다. 하니 확실히 한 연후에 대답해야 했다.
“혹시 태 씨 아저씨라는 분입니까?”
아저씨란 말에 잠깐 발끈하는 것 같던 그는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더니 이내 수긍이 된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 되어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장화를 툭툭 벗어젖히며 또 묻는다.
“난 이 집 주인이다. 다시 한번 묻는다. 넌 누구냐.”
아, 그렇다면 저 사람이 내 신랑이구나. 산적 같은 모습이었지만 신랑의 외모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앞으로 1년간 여기서 함께 지내게 될 섬사빛이라고 합니다.”
“섬사빛이라.”
“예.”
그녀를 지그시 보던 남자가 자기 짐에 아무렇게나 꽂혀 있던 명품 슬리퍼를 바닥에 던지듯 놓아 신으며 중얼거렸다.
“하지 마시라고 그렇게 얘기했거늘…… 쯥.”
투덜거리며 얇은 잠바까지 단숨에 벗어젖힌 남자는 몹시 긴 다리를 앞으로 뻗치고는 두 팔을 등 뒤로 짚으며 또다시 그녀를 지그시 쳐다봤다.
“그래. 그래서 내 신부라는 사람은 어디 있어?”
“예?”
“신부 말이야. 모셔 온 아가씨가 있을 것 아냐.”
모셔 온 아가씨?
“예?”
사빛이 계속 어리둥절해하자 남자가 한쪽 눈썹을 비틀어 올렸다.
“그 다 들었으면서 예? 예? 하고 되묻는 거, 되게 멍청해 보인다. 하지 말아라.”
“예,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아가씨는 없습니다.”
“1년간 함께 살 거라면서. 신부랑 같이 온 그 뭐냐…… 몸 아이 아니야?”
몸 아이? 혹시 몸종 같은 거 말하는 걸까.
그렇다면 몹시 무례한 말이었지만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지내는 동안 사이가 좋았으면 하는 사람이니 얼굴 붉히며 시작하기 싫었다. 해서 단정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고했다.
“제가 말씀하시는 그 신부입니다.”
“뭐?”
그렇게 되묻는 거 되게 멍청해 보인다고 방금 전 자기가 말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따지지 않았다. 나는 깐족거리기나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남자의 얼굴이 일순 험악해졌다. 차고 시린 눈빛으로 그녀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는다. 사빛도 그의 눈길을 따라 제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허름하였다. 반소매 니트는 약간의 보풀과 함께 늘어져 있고, 청바지도 무릎이 닳은 채 도드라져 있었다.
플랫 운동화 역시, 솔로 깨끗이 빨아 말렸다고는 하나 오랫동안 거의 매일 신던 것이었다. 그래서 몸 아이니 뭐니 그런 말도 하나 보았다.
그녀도 잘 알고 있었고, 남자 집안 어른들 뵐 때도 이미 진하게 겪은 눈빛이었다.
저 사람 집안이 유난스럽게 잘난 것 같긴 하다. 어느 부잣집의 귀한 손인데, 저주받은 운명 탓에 이곳에서 지낸다고 들었다.
남자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짜증 난 목소리로 물었다.
“몇 살이야?”
“…….”
내가 너무 어려 보여서 저러나?
사빛은 화장도 잘 안 하고 생김 자체가 동안이었다. 처음 본 사람 중에 고등학생으로 보는 이들도 간혹 있었다.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어리진 않다고 말하려는 순간, 그녀의 대답 따위 필요 없다는 듯 남자가 또 물었다.
“내가 몇 살인 줄 알아?”
명백한 시비조였다. 반말에 쌀쌀맞은 말투까지.
그녀가 오는 것을 반대한다기에 조금 예상은 했으나 너무 적나라하게 비호의적이니 기분이 좀 다운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스물아홉이시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내 신부가 되겠다고?”
“네.”
“돈이 그렇게 좋아?”
할 말을 잃게 하는 질문이었다. 난 돈을 좋아할까?
뭐라 답해야 좋을지 몰라 머뭇거리는 사이, 남자가 몸을 일으키더니 낚싯대와 그물을 들고 광채 쪽으로 향했다.
“가라. 신부 같은 거 필요 없으니.”
“어딜 말씀입니까?”
“왔던 곳.”
광채에 물품들을 대충 내려놓고 나온 남자는 양동이만 챙겨 안채로 향했다. 사빛이 그 길쭉한 뒤통수에 대고 외쳤다.
“갈 곳이 없습니다!”
걸음을 멈춘 남자가 돌아보았다.
“왜 갈 곳이 없어. 원래 살던 집이 있을 것 아냐. 차비가 필요하면 줄게.”
“차비를 주셔도 저는 갈 곳이 없습니다.”
“네 집에 가라고. 너랑 그 웃기지도 않은 쇼할 생각 없으니까.”
콧방귀 뀌듯이 말한 남자가 협문을 나서려 하자 사빛이 또다시 다급히 외쳤다.
“집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