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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22/23)

에필로그

“아, 방해니까 좀, 제발요!”

제시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검을 휘두르는 제시 앞에서 정신 사납게 쏘다니던 아서가 그제야 발을 멈췄다. 아서로서도 할 말이 없진 않았다. 수련에 언제나 열심인 제시 덕분에 족히 세 시간은 연무장에 죽치고 있던 참이었다. 좀이 쑤셔 좀 부산스럽게 굴었기로서니 방해꾼 취급을 하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아서가 배신감 어린 눈으로 말했다.

“시험 보는 동안 온갖 수발을 다 들어 줬는데 은인을 이렇게 취급하기 있어?”

실제로 아서는 제시가 기사 시험을 치르는 동안 막사에 함께 머물며 많은 편의를 봐주었었다. 귀족 신분으로 태어나 더 편한 길이 있었던 그가 굳이 평민들끼리 치르는 토너먼트에 참가한 것은 전적으로 제시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시는 아서의 조력에 그다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제시가 팔짱을 끼며 코웃음을 쳤다.

“흑심 있으셨잖아요.”

근래의 아서는 제시의 마음을 돌리려 혈안이었고, 따라서 모든 일들에 잘해 주려 노력했다. 감사해야 할 일도 베푼 이의 사심이 담기면 의미가 퇴색되는 법이다.

제시는 아서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으므로 그의 연심을 입에 담는 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반면 아서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넌 무슨 기지배가 부끄러움도 없이…….”

제시는 그만 혀를 찼다. 저 도련님이 조금만 입 간수를 할 줄 알았다면 그들 사이도 달라졌을까. 제법 귀여워진 표정치고 뱉는 말은 조목조목 감점이다. 제시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말했다.

“도련님이 그런 말 할 때마다 받아 줄까 하는 마음이 백 걸음쯤 뒤로 물러서요.”

“아, 왜, 또 뭐가 문젠데!”

로맨티스트 역할을 견디다 못한 아서가 마침내 자폭 선언을 했다. 길었던 인내의 보람은 온데간데없이, 제시에게서 받은 눈빛은 ‘그러면 그렇지’였다. 제시는 아서에게 딱히 실망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기대한 게 없었으니까.

누군가는 제시에게 이렇게 조언할 것이다. 귀족 도련님이 뭣 모르고 사랑에 불탈 때 코를 꿰어 결혼하라고. 막무가내인 아서의 성격만 본다면 귀족과의 결혼이라는 말도 안 되는 꿈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았다. 문제는 그에 아서의 마음이 변치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는 점이다.

아서와 결혼하여 얻는 모든 건 아서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재산과 지위 모두 아서가 변심한다면 잃어버리게 될 물거품 같은 영광이었다. 제시는 아서와 제가 환영받지 못할 조합이라는 사실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위기에 부딪치면 사람의 마음에도 풍파가 생긴다. 제시는 변할지도 모르는 한낱 감정에 인생을 맡길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안 될 사이라는 태생적인 한계에 더해 스스로가 그러고자 하는 의지조차 없다. 그녀의 꿈에 다가서는 데 있어 귀족 애인의 존재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제시의 일관적인 매정함은 오히려 상냥하다는 평가를 얻음이 옳다. 이쯤에서 포기하는 편이 서로에게 나은 관계다. 제시는 아서의 마음이 깊어지는 일이 없도록 더 매몰차게 굴고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상대가 지나치게 오뚝이 같은 존재라는 점일까.

아서가 반색하며 물었다.

“원랜 몇 걸음쯤 와 있었는데?”

“뒤로 만 걸음 정도 가 있으니 꾸준히 전진해 보세요.”

아서의 반짝이는 눈을 피하며 제시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아서는 결국 풀 죽은 얼굴로 주저앉았다. 제시의 눈치를 보느라 이전처럼 말썽을 부리지도 못하고 있는데 연애 전선엔 비까지 내린다. 아서가 양 손등에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스승님도 레테 백작저로 돌아가시고, 집안 분위기 참…….”

“경사가 났는데 왜 분위기가 별로예요?”

제시가 의아한 눈으로 되물었다. 아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대공 부부가 황손을 지켜 내고 포상을 받은 와중이다. 그 황손이 황가의 대를 이을 후계자이기까지 하니 아탈렌타의 영광은 보장받은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제시가 관심을 보이자 아서가 퍼뜩 고개를 들며 답했다.

“내가 하녀들이 하는 말을 좀 들었는데 말이야. 형네 부부 분위기가 묘하게 이상하다더라니까.”

“그런 뜬소문을 믿으세요?”

“영 신빙성은 없진 않아. 우리가 시험 볼 때 몇 번 편지를 부쳤었는데 아무런 답장이 없더라고.”

“뭐라고 써서 보내셨길래요.”

“빨리 집에 가고 싶다고.”

제시는 대꾸하지 않고 다시 검을 들었다. 제가 대공이라도 그런 쓸데없는 연락에는 답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기사 시험에 성공적으로 통과하고 대공저로 돌아왔을 때, 제시가 봤던 대공비는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아서는 싸늘해진 반응에도 굴하지 않고 몸을 일으켜 제시에게로 다가왔다.

“네가 몰라서 그래. 난 저번에 올리버가 지나가듯 둘이 이혼할 걱정은 접어 다행이라느니 말하는 것도 들었거든.”

그에 의외란 듯 제시의 눈이 크게 뜨였다. 뜬소문과 아서의 입은 못 믿어도 중후한 노집사의 발언은 무게가 달랐다. 아서는 제시의 눈에 ‘혹시나’ 하는 의문이 스친 걸 발견했다. 그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같이 확인하러 갈래? 아까 보니까 직속 하녀가 바닥에 깔 천 같은 걸 들고 저리로 가던데.”

“그런 예의 없는 짓을…….”

“모르고 있다가 괜히 말실수하는 것보단 낫잖아?”

결국 제시는 조용히 아서의 뒤로 따라붙었다. 결코 쓸데없는 궁금증이 도진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기사로서 섬겨야 할 주군의 상태를 미리 파악해 두기 위함이었다.

아서와 제시는 연무장을 가로질러 후원으로 발을 들였다. 대공저의 후원은 넓지만, 피크닉을 벌일 만한 장소라는 전제가 붙으면 후보지가 다섯 손가락 안으로 줄어든다. 잠깐의 투닥거림을 거친 후, 아서와 제시는 어렵지 않게 대공 부부를 발견했다.

대공 부부는 푸른 잔디 위에 천을 깔아 두고는 그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뒷모습이어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까진 알 수 없었지만 붙어 있는 자세는 그럭저럭 오붓했다. 제시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서 그들에게 인사를 전하려 했다. 아서가 그런 그녀를 붙잡아 재빨리 풀숲 뒤로 숨겼다.

제시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아! 왜 그러세요?”

“쉿, 보는 눈이 있으면 둘만 있을 때처럼 행동하겠어? 당연히 사이좋은 척을 하지.”

아서가 제시의 입을 막으며 속삭였다.

가지고 있는 교양 수준과 썩 어울리진 않으나 아서도 귀족 태생이었다. 아서는 새벽 동안 저택이 떠나가라 고성을 질러 대던 부모님이 다음 날 서로의 팔짱을 낀 채 등장해 말끔히 웃는 모습을 몇 번이고 보아 왔다.

아서는 아스티나를 향한 테리오드의 감정을 알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반쪽짜리 작대기였다. 제 사촌 형의 투명한 속내와 달리 아스티나의 감정은 오리무중이었다. 오늘의 염탐은 둘 사이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둘은 조심스럽게 시야를 가린 잎사귀를 헤쳐 대공 부부를 살폈다. 말소리가 썩 선명하게 들리는 거리는 아니었지만 둘의 분위기 정도는 읽어 낼 수 있으리라.

“왜 안 된다는 말만 하십니까.”

처음으로 들려온 건 어딘지 지루한 듯한 테리오드의 목소리였다. 그는 나무 막대기를 주워 바닥을 긁고 있었다. 아스티나가 책장을 넘기며 조용히 대꾸했다.

“몇 번을 물으셔도 대답은 같습니다. 안 돼요.”

과연 대답이 매정하다. 아서는 풀 죽은 테리오드의 등을 지켜보며 동질감에 젖었다. 그러나 나이도 더 많으니만큼 사촌 형 쪽이 형편이 좀 더 나았을까, 테리오드는 남편으로서 동등하게 의견을 개진했다.

“저는 심심한데요.”

“이참에 식물을 구경하는 데 취미를 들여 보세요.”

“……책을 읽으며 꽃구경이라니, 이거 노부부나 할 법한 여가 생활 아닙니까?”

“교양 있어 좋지요?”

테리오드의 불평에 아스티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테리오드가 아스티나를 달래듯 말했다.

“물 좋고 볕 좋은 곳에 가서 요양이나 하자는 게 왜 무리한 부탁입니까. 지금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도 않을 텐데요.”

“날붙이에 어깨가 꿰이는 상처를 입으셨는데 어찌 먼 곳으로 떠나자고 하시는지요. 억울한 마음이 드시거든 나약한 자신을 탓하세요.”

“그러니까 요양을…….”

“그게 진짜 목적도 아니면서.”

아스티나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지적했다. 테리오드는 결국 바닥을 긁적이던 나뭇가지를 먼발치에 던져 버렸다. 그가 아스티나 쪽으로 돌아앉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좋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요즘 트리스탄 후작이 이 집 대문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게 매우 마음에 안 듭니다.”

리체 성에서 아스티나가 지쳐 있을 때 도와준 사람이 앤서린이라는 걸 알게 된 후, 테리오드는 고마움을 느낌과 동시에 더욱 경계의 눈길을 불태웠다. 앤서린의 방문이 잦아질수록 그의 적의는 커져만 갔다. 아스티나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얼마 되지도 않은 때였다. 불청객이 하루가 멀다 하고 제2의 신혼을 방해하니 테리오드로서는 분통할 노릇이었다. 앤서린 후작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아스티나가 웃어넘기기만 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아스티나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한결 본격적으로 변한 질투에 그녀도 성의 있는 대응을 돌려주기로 했다. 아스티나는 책장을 덮고는 검지로 테리오드의 턱을 들어 올렸다.

“어리광이 많아서 사람 애간장 녹이는 건 좋아. 어디 가서 멋대로 다쳐 오지만 않았다면 계속 귀엽게 봤겠지.”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나라고 지금 여기서 한가롭게 꽃이나 보고 싶은 건 아니야. 무리해서 상처가 벌어지면 안 된다고 하니 참고 있지만, 가끔 묶어 두면 상관없지 않을까 싶어지거든.”

“그게 무슨…….”

“나야 내 밑에서 끙끙거리며 우는 얼굴 보는 게 취향인데, 혹시 무섭다고 도망이라도 가면 곤란하니까. 그렇지?”

아스티나가 그리 말하며 손끝으로 테리오드의 아랫입술을 문질렀다. 그제야 말뜻을 이해한 테리오드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테리오드가 입만 벌린 채 굳어 있는 사이, 아스티나는 피식 웃으며 그에게서 손을 떼어 냈다. 끈적한 무언가가 담겼던 눈빛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테리오드는 뒤늦게 제가 놀림받았다는 걸 깨달았다. 테리오드가 앓는 소리를 내며 제 눈가를 문질렀다. 그에게서 볼멘 음성이 새어 나왔다.

“부인은…… 정말 절 놀리는 재미로 사시나 봅니다.”

“한참 연상을 이겨 먹으려고 하는 게 문제지.”

승리를 거둔 아스티나가 산뜻하게 대꾸했다. 어린아이 취급에 자존심이 상한 테리오드가 지지 않고 받아쳤다.

“노인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앞으론 주의하도록 하지요.”

옆에 놓아두었던 책을 집어 들던 아스티나의 손이 멈칫했다. 둘 사이를 가로지르는 공기가 갑작스럽게 싸늘해졌다. 원래 연상이 연하를 놀리는 건 장난으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반대의 경우는 실례로 비쳐지는 법이다. 아스티나가 입꼬리를 당기며 재밌다는 듯 되물었다.

“……노인?”

그녀는 웃는 표정으로 테리오드를 보고 있었지만, 눈가에 즐거운 기색은 전혀 비치지 않았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아스티나가 이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그렇군, 사실 나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와 결혼 생활을 유지하긴 양심에 걸리던 차였어. 어디 곱게 늙은 영감이나 찾으러―”

“아스티나, 잠깐만요.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스티나를 테리오드가 황급히 붙잡았다. 밀쳐 낼 수 있었지만, 아스티나는 가만히 그가 원하는 대로 쓰러졌다. 덕분에 바람에 날린 머리칼이 얼굴의 반절을 덮었다.

테리오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아스티나의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걷어 내고는 표정을 살피는 것이었다. 상대의 안절부절못하는 낯을 본 아스티나가 참지 못하고 그만 큰 웃음을 터트렸다. 그 반응에 테리오드도 허탈한 한숨을 흘렸다.

“……이런 장난, 두 번 겪었다간 심장이 떨어지겠습니다.”

“더 재밌는 장난도 있는데.”

아스티나가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의아한 표정을 한 테리오드의 어깨를 밀어내고는, 그 위로 올라탔다. 테리오드는 엉겁결에 바닥에 누워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스티나가 고개를 기울이며 이어 물었다.

“궁금해?”

그녀의 손이 천천히 목선을 타고 내려가 쇄골 부근을 쓸었다. 민감한 곳에 스치는 감각은 사뭇 유혹적이다. 그녀의 움직임을 눈에 담던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와 눈을 맞췄다. 그가 숨을 들이켜고는 짧게 대답했다.

“……예.”

아스티나는 간식이 든 바구니에서 넓은 보를 꺼내 들어 그의 눈을 가렸다. 테리오드의 목젖이 크게 진동했다. 긴장한 건 무르익은 성인 부부뿐만이 아니었다. 대화 소리를 엿듣던 아서와 제시도 입을 틀어막았다. 아서가 완전히 굳어 버린 제시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우린 이만 가…… 갈까.”

“네, 가, 가요.”

제시와 아서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인기척을 숨길 수는 없었을까, 아스티나의 시선이 순간 그들에게로 향했다. 이미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 애정 행각을 들켰음에도 아스티나는 그다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아스티나는 둘을 부르거나 뭐 하는 거냐며 소리치는 대신, 가만히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제시와 아서는 겨우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는 황급히 도망쳤다. 뒤를 돌아볼 정신도 없었다. 원래 있던 연무장으로 돌아왔을 때쯤, 둘의 얼굴은 완연한 토마토 빛을 띠고 있었다. 젖 먹던 힘까지 내어 달린 둘은 한참 동안 숨을 진정시켰다.

마침내 고개를 든 제시가 아서를 째려보며 물었다.

“……싸우셨다고요?”

“……아닌가?”

제시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리 때문에 말소리가 낮아진 중간부터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지만, 대공 부부의 시도 때도 없는 ‘열정’만 보아도 판단 근거는 충분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이고 아서 에스테반의 말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제시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역시 도련님 말씀은 믿을 게 못 돼요.”

―그녀와 야수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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