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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지켜진 약속 (21/23)

21. 지켜진 약속

성내에서 처리해도 되었을 이를, 굳이 바깥으로 끌어낸 건 어디까지나 소소한 변덕이었다. 굳이 본심을 풀이하자면 ‘나를 이렇게까지 만든 자의 끝쯤은 직접 지켜보고 싶다.’쯤이 될 터다.

‘내가 네게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나를 이 지경까지 몰아!’

같은 의문은 의외로 상대에게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프리모는 억울하다는 듯 소리치며 눈물까지 지어 보였다. 이전까지 본 적 없던 엉망인 몰골이었다. 귀양을 가는 것이 결정됐을 때도 마냥 오만하던 눈빛에 마침내 절망이 어렸다. 프리모가 남의 목숨도 제 명줄만큼 중하게 여길 줄 알았더라면 그들은 아마 다른 결과를 맞이했을 것이다.

‘날 죽이려 했던 과거는 진정 까맣게 잊었나 보군.’

이시스가 어이없다는 듯 대꾸하자 프리모는 입만 벙긋였다. 마치 잊고 있기라도 했던 기색이었다. 이시스가 형제에게 마지막으로 품었던 궁금증마저도 그렇게 의미를 잃었다.

이시스는 내내 생각했었다. 자신은 몰라도, 대체 무엇이 프리모를 이런 사람으로 만든 것일까.

어긋나는 이들이라면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결핍이 프리모에겐 없었다. 양친은 버젓이 잘 살아 있었으며 재물은 부족하긴커녕 넘치는 수준이다. 심지어 그는 이시스처럼 마음을 준 사람을 잃지도 않았다. 짜여진 판으로 그를 휘두르긴 했으나 이시스는 그의 극단성에 대해 알았을 뿐, 마음으로 이해한 건 아니었다.

이로써 분명해졌다. 프리모가 행동하는 동기는 피해자가 힘들여 이해해 줄 만큼 대단하지 않았다.

‘벤자민, 이제 그만 베어도 좋아.’

이시스가 산뜻하게 명령했다. 저 비위 상하는 얼굴을 더 보고 싶진 않았다. 벤자민이 기다렸다는 듯 프리모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프리모가 다급히 이시스를 향해 소리쳤다.

‘이시스! 날 죽이면 아버지께서 가만히 계실 줄 알아? 어머니께선 또 어떻고!’

혹여나 잊을세라 이렇게 뒤따라 처벌해야 할 자까지 상기시켜 준다. 이시스는 가볍게 어깨만 으쓱였다.

‘마침 잘 말했군. 황후 폐하께선 아마 못난 아들 때문에 머리가 달아나실 게다. 아, 외조부께서도 마찬가지야.’

‘네년이 진정 미쳐서 친모의 피까지 보려는 게냐?’

이시스의 산뜻한 대답에 프리모가 이를 갈았다. 끝까지 저를 보듬어 주었던 어머니는 그에게도 소중했을까. 그 모습에 이시스도 잊고 있었던 말이 생각났다. 이시스는 천천히 프리모에게로 다가가 가볍게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녀가 패자의 충혈된 눈을 보며 말했다.

‘프리모, 그러고 보니 늘 네게 해 주고 싶었던 말이 있었어.’

‘같잖은 충고라면 집어치워. 네가―’

‘너는 베스 때문에 죽는 거야.’

이어진 이시스의 말이 예상과는 확연히 달랐던 모양이었다. 프리모가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뭐? 그게 누군데?’

그 무지를 참지 못하고 나선 건 벤자민이었다. 벤자민이 당장이라도 프리모에게 달려들 듯 주먹을 틀어쥐었다.

‘저 새끼가……!’

‘벤자민, 진정해.’

이시스의 나직한 부름에 벤자민이 겨우 화를 삭였다. 벤자민의 과한 반응에 인상을 찌푸리던 프리모가, 이내 ‘아.’ 하고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아아, 그래. 에일베스. 네 연놈들이 그래서 손을 잡고……!’

프리모가 연이어 헛웃음을 터트렸다. 황후에게 대단한 원한을 품고 있어야 할 벤자민이 이시스의 손을 잡고, 또 그녀에게 힘을 실어 준 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그제야 놓쳤던 퍼즐이 맞춰진 기분이었다. 프리모가 턱을 뒤로 젖히고는 광소했다.

‘고작, 고작 그 계집 하나 때문에? 세상에, 이시스! 너도 만만찮게 미쳤구나!’

그러나 프리모의 웃음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장검이 그의 심장을 길게 꿰뚫은 탓이었다. 놀란 눈으로 제 가슴을 내려다보던 프리모가, 이내 푹 고개를 숙였다. 그대로 검을 뽑아내자 선혈이 벤자민의 얼굴 위로 튀었다. 벤자민이 콧등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너무 쉽게 죽여 줬군요.’

‘하지만 참을 수 없었지?’

이시스가 별다른 동요 없이 되물었다. 벤자민이 작은 음성으로 겨우 대꾸했다.

‘……예.’

‘나도 그랬으니 괜찮아. 가자, 해치워야 할 잔당은 수도에도 있거든.’

이시스는 그리 말하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복수의 끝은 생각보다 시시했다. 원수의 명줄을 끊은 것도 직접 행한 일이 아니니 그다지 현실감이 없었다. 그런 시시한 인간 때문에 잃어버렸다고 믿고 싶지 않을 만큼, 지나간 이의 웃음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베스, 드디어 내가 네 복수를 했어.”

이시스는 그리 말하며 손을 뻗어 차가운 돌 끝을 매만졌다. 수도로 돌아와 공적인 일이 대강 정리되자마자 그녀는 곧장 이곳부터 찾았다. 그 착한 아이를 묻어 둔 자리, 시신의 위치를 표시해 둔 커다란 돌 하단부엔 축축한 이끼가 껴 있었다.

이시스는 새삼 이곳이 베스를 놓아두기에 지나치게 구성없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 궁내에 더 이상 그녀의 결정을 막을 사람은 남지 않았다. 내친김에 미뤘던 이장 작업을 해치워야 할 듯했다. 하기야 값비싼 고목으로 관을 짜고 대리석으로 비석을 세우며, 무덤을 보석으로 장식한다 한들 망자의 기쁨은 되지 못할 테지만.

“넌 돌아오지 않지만 말이다.”

이시스가 그리 말하며 돌 위에 머리를 기댔다. 시체가 묻힌 공간이었지만 음습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귀신이 되어 돌아온다면 무서워하긴커녕 기쁨에 눈물을 흘릴 상대라서인 듯하다.

이시스는 희미한 지난 기억을 들여다보다가는,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곧 손님을 맞이할 시간이었다.

* * *

가장 많은 적을 해치우고 불사신처럼 살아남은 사람치고, 대공비는 꽤나 안색이 좋았다.

“내가 사냥 대회에서 화를 냈을 때, 자네 속으로 좀 웃었겠구만.”

이시스가 졸린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시스가 보낸 지원군이 일찍이 도착한 덕분에 아군의 피해가 처참한 수준까지 다다르진 않았다. 제 목숨만은 살뜰히 챙긴 영식들이 이곳저곳에 잘 숨어 버티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개중 상태가 비교적 멀쩡한, 하여 고성에서의 일을 설명해 줄 경황이 남은 영식들은 하나같이 눈을 빛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대공비 전하께선 정말…… 대단하셨습니다!’

그 말인즉 위급한 순간마다 대공비가 뛰쳐나가 태풍처럼 적을 쓸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시스는 흥분을 누르고 최대한 과장 없이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그들은 더더욱 흥분하며 대공비의 무예에 대해 칭송하기 바빴다. 대공비가 회오리 검술로 17명을 단숨에 날려 보냈다는 소리까지 듣고 난 후, 이시스는 객관적인 진술을 들을 수 있으리란 기대를 포기했다. 어차피 상황을 가장 담담하게 전해 줄 자는 전설이 된 대공비 본인이었다.

이시스는 제가 들었던 칭송들을 하나하나 대공비에게 전해 주었다. 병사들의 증언에 따라 장황해진 공적에 아스티나가 짧게 응수했다.

“과찬이십니다.”

이들의 말이 영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시스는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앤서린 후작을 향한 습격에 대공비가 휘말렸을 때, 이시스는 위험한 일에 나서지 말라며 대공비를 꾸짖었었다. 감히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검사에게 몸조심을 운운했던 셈이다. 속았다는 생각에 이시스는 조금 부아가 치밀기도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투정에 그칠 수준이었다. 수하가 남다른 두뇌에 이어 뛰어난 무예까지 보유하고 있다는 점은 이시스에게도 득이 되면 됐지 실이 될 수는 없었다. 이시스가 여유롭게 등받이에 손을 올린 채 말했다.

“그대의 무용담이 온 수도에 퍼지고 있어. 나이 어린 영애들이 또래 영식들이 아닌 대공비가 보고 싶어 데뷔탕트를 앞당기고 싶어 한다지 않나.”

이시스의 놀림에 아스티나는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아스티나는 이시스의 장난을 가볍게 넘긴 후, 곧장 본론을 꺼냈다.

“황후 전하의 처형일은 언제입니까?”

“……이틀 후야. 제스퍼레오 공작도 함께일 예정이니 오붓한 부녀 상봉이 되겠지.”

잠깐 뜸을 들인 후, 이시스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이시스가 가장 먼저 해치운 일은 습격자들의 증언을 들어 황후를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제스퍼레오 공작이 습격에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 잇따라 드러났다.

황제는 노한 와중에도 제 세력이었던 황후와 그 친정을 살리려 애썼으나, 이시스는 완강히 처벌을 요구하며 버텼다. 황제의 일을 도맡아 처리해 온 만큼 그녀에게도 거래할 수 있는 패가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드러난 증거가 확실한 상황이다. 제스퍼레오가를 황가에 종속시킬 수 있다는 유혹에 결국은 황제도 넘어오지 않을 수 없었다.

불같은 복수심에 어렵게 얻어 낸 처형이었지만, 생각 외로 속 시원하진 않았다.

“딸을 죽이려는 아들을 도우면서,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이시스가 가만히 되물었다. 아직까지 가슴 언저리에 무언가가 얹혀 있는 까닭을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이시스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난 그래도 그녀가 내 어머니이기에 자리를 지켜 주려 애썼거든.”

이시스는 한때 어머니의 손발을 완전히 묶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황후에겐 이시스를 돕는 것만큼 효율적인 선택지가 없었다. 어차피 프리모는 돌아올 수 없게 되었으며, 황후에게 남은 자식은 이시스 하나였으니까. 제스퍼레오 공작이 항복하며 굽히고 들어왔을 때도 이시스는 당연한 결정이라고만 여겼다. 애정을 기준으로 한 선택지에 놓인다면 당연히 이길 가능성이 없겠으나, 확연한 실리를 보여 준다면 결과는 조금 다르리라고.

이시스는 제스퍼레오령으로 내려갔을 적, 황후를 버리지 말라며 약한 표정을 지어 보였던 공작을 떠올렸다. 처음 보는 외조부의 인간적인 모습마저도 결국은 거짓이었던 셈이다. 딸과, 딸의 아들을 저버리지 못한 그가 손녀를 저버리기는 쉬웠을까. 그 기울어진 저울에서 승리하기에 그녀는 너무도 가벼웠을까.

아스티나는 말없이 이시스의 굳은 표정을 잠시간 들여다보았다. 아스티나도 제스퍼레오 공작의 협조를 알고서는 크게 분노했었다. 배신당한 당사자인 이시스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스티나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주변을 환기했다. 아스티나가 따뜻한 꽃 향을 들이마시며 입을 열었다.

“나디아 영애에게 입관을 제의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제야 이시스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이시스가 쓰게 미소 지으며 힘없이 대꾸했다.

“망할 혼담을 두 번이나 주선했으니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나.”

나디아는 벤자민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시스는 그런 나디아에게 새로운 혼담을 주선하는 대신, 조금 다른 선택지를 내주기로 했다.

“대단한 자리는 아니야. 능력 없는 자에게 나랏일을 맡길 순 없으니 시험에 합격하는 건 나디아의 몫으로 두었어. 하지만 문을 열어 두었지. 그뿐이야.”

“아벨라르의 침묵에 대해 책임을 묻진 않으십니까?”

아스티나는 곧바로 묵혀 둔 앙금을 지적했다. 그러나 이시스는 아스티나의 예상과 달리 회의적인 반응을 내보였다. 이시스의 지지를 선언하며 다른 노선을 선언한 아벨라르에게 제스퍼레오가 치명적인 빈틈을 내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칼로스가 짐작한 건 프리모가 황후의 도움으로 도망쳤다는 사실뿐이었다. 그가 이 정보를 고했다고 해도 습격의 날짜까지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적이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가능성쯤은 벤자민의 도움으로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문제는 괘씸함이다. 이시스는 분명 아벨라르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워 화풀이를 할 수도 있었다.

“글쎄, 처음엔 괘씸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 하지만 나중에 가선 말이야, 결국 이런 의문이 생기더군.”

“어떤 의문 말씀이십니까?”

“그들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왜,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극단적으로 만들었을까. 어째서 칼로스는 벤자민에게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이시스는 우습게도 그 이유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프리모와의 파혼 뒤, 나디아의 처지가 나아질 방법은 그럴듯한 혼처를 다시 얻는 것 외엔 존재하지 않는 듯 보였지. 그리고 실제로 그게 사실이 맞았어. 그렇다면 그들은 응당 마지막 남은 가능성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되지 않겠나?”

그래서 이시스는 그들에게 주어진 한계 외의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디아가 벤자민과 결혼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낯선 방향이었을 뿐, 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대공비, 나는 내가 예외로 남지 않길 바라.”

아스티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윽고 아스티나의 낯에 진심 어린 웃음이 담겼다.

“전하께서 진정 저보다 나으십니다.”

사실상 카라벨라 제국의 여성들에겐 결혼 외의 다른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았다. 앤서린 후작처럼 부군 없이 가문을 잇는 경우도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특이한 경우였다. 평범한 영애들이 스스로의 처지와 비교하기에 앤서린은 지나치게 비범했다. 그들과 같이 좋은 혼처를 인생 최고의 출세로 여겼던 나디아라면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터였다. 결혼하지 않은 나디아의 인생이 그럭저럭 굴러간다는 건, 분명 좋은 영향이 될 것이다.

“내가 그래도 신하보다는 나은 점이 몇 있어야 윗선에서 버틸 수 있지 않겠나?”

이시스가 그리 말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뒷말을 덧붙였다.

“난 고리타분한 걸 싫어하니 바꾸고 싶은 것들도 많아. 벤자민도 곧 떠날 텐데 일이 더 바빠지겠군.”

“예?”

아스티나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물었다. 당연히 아스티나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듯 이시스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시스가 다소 곤란한 음성으로 물어 왔다.

“못 들었나?”

“……처음 알게 된 사실이군요.”

아스티나가 얼떨떨한 낯으로 대답했다. 하기야 소원해진 그들의 사이를 생각하면 벤자민이 비밀을 만든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와 한때 절친한 친구였던 건 사실이나 둘 사이에 다른 기류가 생겨난 이후로는 그 우정도 더는 여의치 않게 되었다.

실제로 아스티나는 벤자민에게 고백을 들은 이후로 되도록 그와 함께 있는 자리는 피해 왔었다. 그녀는 제게 마음을 품은 사내와 어울리는 것이 배우자에게 불안을 준다는 사실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내내 옛사랑과 배우자를 두고 저울질했었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겠지만.

“그럼 전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기분 상한 건 아니겠지?”

“제가 왜 기분이 상하겠습니까.”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니 하는 말일세.”

이시스의 장난 섞인 염려에 아스티나가 피식 웃음 지었다.

애초에 오늘은 이시스를 보기 위해 황궁을 찾은 게 아니었다. 굳이 인과를 풀이하자면 입궁한 김에 이시스를 만난 것에 가깝다. 아스티나의 당초 목적은 황제와의 만남이었다. 이시스를 구한 공로가 인정되어 치하를 받게 된 것이다. 황제가 그녀에게 포상을 내리며 무슨 생각을 품었을지는 알 수 없는 바나, 적어도 주머니는 두둑해졌으니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아스티나는 가족이 이시스에게 썩 유쾌한 대화 주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굳이 이시스도 인지하고 있을 행선을 입에 담느니 가볍게 넘기는 편이 나았다. 아스티나는 유부녀만의 회피 기술을 꺼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편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부부 싸움은 끝났나 보지?”

아스티나가 그만 멈칫했다. 이시스는 우아하게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아스티나에게서 바람 빠지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 하더니, 삐걱대던 관계가 밖으로 영 티가 안 났던 건 아닌 듯하다.

이시스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아. 그때 내가 줬던 반지 말인데, 돌려줄 필요는 없겠어. 주인 되는 가문이 망했으니 말이야.”

그 말에 기억에 묻어 두었던 물건이 생각났다. 그것을 어디에 보관을 해 두었더라. 올리버가 웨딩링을 꺼내 온 사건으로 연상해 낸 덕에 패물을 보관하는 곳에 옮겨 두긴 했었는데, 정확히 어떤 위치에 있는지까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시스가 더는 찾지 않을 물건이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일까.

아스티나의 곤란한 표정을 다른 방향으로 해석한 이시스가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오라버니를 제거해 낸 내가 같은 핏줄이라고 어머니를 믿으려 했다니, 어리석은 일이지.”

아스티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시스에게 필요한 것이 어설픈 위로나 격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차라리 이시스의 주변에서 나쁜 기억을 되새기게 할 매개를 치워 버리는 편이 현실적인 도움이 될 터다.

아스티나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문밖으로 나섰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옅은 한숨이 새었다. 이시스의 앞에선 내색하지 않았으나 기분이 묘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겨 낼 수 없는 한계라는 것이 있다. 그것과 마주쳤을 때 부딪치고 깨져 의지를 잃어버리는 이들을 아스티나는 오래도록 보아 왔다. 이시스는 결국 형제를 제쳤고 앤서린도 가주 자리에 앉았지만, 그 쟁취의 과정이란 것은 또 얼마나 지난한가. 노력의 결과를 태초부터 당연하게 취하고 있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부아가 치미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아스티나는 앞으로 넘어온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모퉁이를 돌아섰다. 그러고는 잠시간 제자리에 발을 멈춰 세웠다. 낯익은 누군가와 마주친 탓이었다. 언뜻 과거의 한 장면과 겹쳐 보이는 듯도 했다. 이시스를 돕기로 결정하고 이 문을 나왔을 때에도 같은 자리에 같은 사람이 있었다.

아스티나를 발견한 벤자민은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아스티나에게 인사를 전하는 대신 반사적으로 자리를 떠나려 했다. 아스티나가 황급히 그런 벤자민을 붙잡았다.

“벤자민.”

“……누님과 생각보다 얘기가 일찍 끝났나 보네.”

벤자민이 뒤돌아서며 머쓱하게 뒷머리를 쓸었다. 아스티나가 그런 그에게 곧장 물었다.

“이시스 전하께 들었어. 너, 어딜…… 떠나?”

벤자민은 긍정하듯 미소 지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실 방금까지 그냥 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어. 말을 안 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졌었는데 결국 네가 나를 붙잡네. 인사쯤은 하고 가란 뜻인가 봐.”

아스티나로서는 벤자민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프리모가 죽었고 황후는 축출당했다. 이시스에게 도움을 주었던 벤자민에겐 영예로운 보답만이 남아 있을진대 왜 황궁을 떠나겠다는 것일까.

아스티나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사실 난 잘 이해가 안 가네. 황궁에 남아 있다면 네가 앞으로 얻을 게 아주 많을 테니까.”

“하지만 난 그런 것들에 도통 취미가 없는 사람이잖아.”

아스티나는 벨라체 아카데미에서의 그를 떠올렸다. 미래 계획을 물으면 벤자민은 항상 애매한 표정을 지었었다. 그때는 시시한 친구라고 생각했었고, 벤자민이 궁으로 들어오고 난 후에는 제 신분을 밝힐 수 없어 그러했나 싶었다. 한데 지금이나 옛날이나 그는 세속적인 것들엔 관심이 없을 뿐이었나. 그의 성정을 생각하면 용케 궁으로 돌아올 생각을 했다 싶기도 하다.

벤자민이 아스티나의 의문에 답하듯 말했다.

“황궁은 무서운 곳이야. 줏대가 없으면 결국 이리저리 휘둘리고 말지.”

“난 네가 궁 생활을 그리 형편없이 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데.”

“아벨라르의 결정을 보고도?”

“……그건 그들의 실수였지.”

아스티나의 말에 벤자민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가 뒤허리에 손을 올리며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쳤다. 잠시 후에야 벤자민이 운을 떼었다.

“……내 어머니는 말이야. 늘 내 성공을 바라셨지. 나를 궁 밖으로 떠나보내며 다신 황궁엔 얼씬도 말라고 하셨지만, 난 이상하게도 다른 의중을 읽었어. 당신께선 어쩌면 내가 이곳으로 돌아와 당신을 구원해 주길 바라셨지.”

아스티나는 잠자코 벤자민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가족 이야기를 꺼내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도 어쩌면, 이번이 새로운 기회가 되리라 여겼던지도 모르지. 내 어머니와 너를 멋지게 구해 내리란……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한테 괴물 신랑을 직접 보여 준 건 너였잖아?”

벤자민의 해명에 아스티나는 한심한 눈빛을 지워 냈다. 하기야 짐승 테오는 자신 외의 사람들에겐 영 귀여움을 사지 못했다.

“어쨌든 그런 희망으로 궁에 돌아오긴 했어도, 결국 나는 보기 좋게 세상에 얻어맞고 나가떨어지게 됐다는 이야기야. 철없는 애송이가 겪는 흔한 결말이지.”

그리 말하며 벤자민이 항복이라는 듯 두 손을 펴 보였다. 스스로를 비하하듯 말했지만 자책보다는 후련함이 더 컸다. 어찌 되었든 그가 입궁으로 인해 얻은 것이 없진 않았다. 베스의 원수인 프리모를 끝내고, 어미를 칩거하게 만든 황후까지 끌어내게 되었으니까. 그러므로 그에겐 더 해야 할 것이 없다.

“황후가 참수됐으니 내 어머니도 두려움에서 자유롭겠지. 우린 레안드로스 영지로 내려가기로 했어. 알잖아, 나는 벤자민 피델리오가 아닌 벤자민 레안드로스였단 걸. 음, 그러니까 네가 아스티나 레테였을 때 말이야.”

벤자민이 추억을 되짚듯 말했다. 과거의 좋았던 때를 그리듯 목소리가 감회에 젖었다. 그가 떠올린 것은 분명 즐거웠던 한때였을 것이다. 그렇게 반짝이게 포장한 과거가 후에 어떤 식으로 떠오르는지 아스티나는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기억 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벤자민, 미안해.”

충동적인 사과가 아스티나의 입을 열고 나왔다. 벤자민이 무슨 소리냐는 듯 아스티나를 보았다.

아스티나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긁어 부스럼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어차피 벤자민은 곧 떠날 것이었고, 그녀에게 더는 마음을 전할 생각도 없어 보이지 않은가. 하지만 아스티나는 지금까지의 거절이 불완전하게 비쳤던 이유를 더는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나도 속이지 못한 말들로 남을 속일 수 있을 리 없지. 네가 내 흔들림을 느끼고 그간 기회를 봐 온 걸 알아. 그런 걸 내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 분명 틈은 있었어. 인정해. 하지만―”

아스티나는 잠시 망설였으나,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끝맺었다.

“난 그를 사랑해. 진심이야.”

벤자민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곧 그의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

“난 네가 행복하길 바랐지. 그 행복에 내가 함께한다면 더 좋았을 테고, 하지만 사람이 원하는 걸 다 이룰 수는 없는 법이니까.”

벤자민은 잠시간 아스티나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리체 성에서도 그는 아스티나의 곁에 남지 못했다. 벤자민은 아스티나와 함께 싸워 주는 대신 이시스를 데리고 떠났다. 그에겐 아스티나 외에도 다른 중요한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타당한 이유가 있었지만, 한번 여지를 내준 우선순위는 무수히 다른 변명들로도 대체될 수 있었다. 벤자민은 제 사랑이 대체할 수 없는 무언가라고 더는 스스로를 속이지 않기로 했다.

“내가 왜 이시스 누님의 편에 섰는지 말했었던가?”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니었으므로, 벤자민은 짧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을 이었다.

“프리모의 손에 죽은 누이의 복수를 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했거든. 프리모는 결국 내 손에 죽었으니 나는 소원을 이룬 셈이지. 이건 너와는 완전히 상관없는 일이야.”

“…….”

“그러니 아스티나. 내 선택에 책임을 지려고 하지 마. 언젠가 네가 말했던가? 내가 멋대로 내린 결정을 네가 책임져 줄 수는 없다고. 그 말이 맞아. 너는 내 선택을 배려할 필요가 없고, 그럼에도 나는 잘 살아갈 거야.”

아스티나의 입술이 반쯤 벌어졌다. 아스티나에게서 안도와 같은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벤자민이 그런 그녀를 놀리듯 말했다.

“나 없는 사이 네 남편이 힘들게 하면…… 내가 나서는 건 모양새가 좀 이상할 테지? 대신 누님께 일러. 누님께선 요즘 영애들의 사회 진출을 위해 힘쓰고 있거든. 네가 이혼을 택하면 좋은 롤 모델이 생겼다며 기뻐할지도 몰라.”

아스티나는 나디아의 비혼 선언에 은연중 즐거운 기색을 내비쳤던 이시스를 떠올렸다. 가능성 있는 가정에 등허리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저주인지 응원인지 모르겠군.”

벤자민이 고개를 숙이며 작은 웃음을 흘렸다. 이윽고 그가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전했다.

“그럼 잘 지내, 아스티나.”

* * *

“대공께선 어디 계시지?”

아스티나가 돌아오자마자 건넨 물음에 올리버는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아스티나의 외투를 넘겨받으며 곤란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대공께선 황궁으로 마중을 가겠다고 하셨었는데, 아무래도 길이 엇갈리신 모양이지요?”

“날 마중 갔다고?”

“사랑에 눈먼 청춘의 충동이란 알다가도 모를 것이지요.”

그리 답하며 올리버가 콧노래를 불렀다. 언뜻 보기에도 그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실제로 올리버는 근래 들어 이렇게 마음이 편한 적이 없었다. 대공이 대뜸 이혼을 말하며 클로에를 저택으로 들인 이후 좀처럼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었는데, 박힌 돌은 알아서 떠나고 부부 사이가 돈독해지기까지 하니 앓던 이라도 빠진 듯했다. 아무래도 이들 부부는 주기적으로 늙은 집사를 불안하게 하는 데 재미를 붙인 모양이었다.

‘가만, 주기…… 적으로?’

아스티나의 외투를 척척 접어 정리하던 그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럽게 불안증이라도 도진 듯 올리버가 확인차 물어 왔다.

“……이젠 완전히 화해하신 것 맞지요?”

“……완전히?”

“아이고, 아닙니다. 제가 그만 주책을.”

올리버가 재빠르게 손을 내저었다. 그가 아스티나를 안으로 안내하며 물었다.

“피곤하실 텐데 차라도 내어 드릴까요?”

“아니, 찾아볼 물건이 있으니 하녀 아이들에게 패물함을 좀 꺼내 와 달라고만 이르게.”

이시스가 더는 찾지 않을 물건이 되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어엿한 하사품이다. 지금처럼 다른 귀금속들과 같이 취급하는 대신 찾기 쉽게 따로 보관해 두어야 할 듯했다.

아스티나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는 집사를 뒤로하고 계단을 올랐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곧 제자리에 멈춰 섰다. 난간에 손을 댄 채 뒤를 돌아보며, 아스티나가 나직이 집사를 불렀다.

“올리버.”

“예?”

“대공 전하와 내가 언제 다투었던 적이 있던가?”

아스티나의 뜻을 이해한 올리버가 반쯤 입을 벌렸다. 곧 그가 말끔한 미소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글쎄요, 제 기억엔 없군요.”

그간의 일을 단번에 없었던 일로 축소시킨 아스티나가 산뜻한 걸음으로 마저 계단을 올랐다. 방으로 향하는 동안 마주친 하녀들이 그녀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아스티나는 조용히 침실의 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방은 적막했다. 아무래도 외출을 다녀온 배우자를 마중하는 역할은 제가 맡게 될 모양이었다.

반쯤 커튼을 쳐 둔 탓에 실내는 조금 어두웠다. 무명천과 겹쳐지지 않은 레이스에 햇빛이 투과되어, 방바닥엔 옅은 꽃 모양의 그물 자국이 나 있었다. 주인이 없는 사이 환기를 시켜 두려 한 듯 반쯤 열린 창문에서 찬바람이 들어왔다. 아직 외출복을 갈아입지 않은 탓에 그리 춥지는 않았다.

아스티나는 잠시 제자리에 서 시원한 바람 냄새를 맡았다. 그야말로 여느 평화로운 오후였다. 아스티나는 창가 가까이에 둔 의자로 가 앉았다. 머지않아 올리버가 불러 준 하녀들이 적막을 깨고 등장했다.

“어머, 대공비 전하. 춥지 않으세요?”

“괜찮네. 묵은 물건을 꺼냈으니 창은 열어 두는 편이 좋겠지.”

“저희가 얼마나 패물함을 자주 쓸고 닦는지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바깥바람보다 이것들이 배는 깨끗할걸요.”

하녀가 그리 말하며 자부심으로 가슴을 폈다. 아스티나는 결국 선선히 창문을 닫아도 좋다고 일렀다.

패물함을 바닥에 놓고 덮개를 열도록 시키자 물건들이 순식간에 보기 좋게 정렬되었다. 하녀가 장담한 대로 장신구들의 보관 상태는 새것과 같았다. 찾지 않고 방치한 기간이 민망하게도 상자 위엔 먼지 하나 없었다. 적어도 부주의로 인한 분실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듯했다.

문제가 있다면 어마어마한 숫자다. 아스티나가 보유한 금붙이의 대부분은 대공령에 있었지만, 여러 번 황가의 은인이 된 덕분으로 물건은 당초 가져왔던 수보다 배나 불어나 있었다. 수색 작업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진이 빠졌다. 아스티나는 뻐근한 목을 젖혔다가 내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추세웠던 허리를 굽히자 곧장 온갖 휘황찬란한 빛이 눈에 들어왔다.

아스티나는 그 안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폈다. 워낙 쌓아 둔 게 많았던 통에 맞는 물건을 찾아내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스티나가 상자의 외곽에 제스퍼레오가의 인장이 작게 박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다행히 없어지진 않았군.”

아스티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하녀들에게 이만 물러가라 일렀다. 널브러진 물건들을 수습한 하녀들이 공손히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방을 떠났다.

상자의 외곽은 말끔했지만, 아스티나는 반사적으로 그 위를 두어 번 손끝으로 털었다. 잘 보관해 두었어야 하는 물건인데 지금까지 취급이 너무했다. 가짜 영물이라던 이시스의 혹평이 무색하게도 진짜 변별력이 있었던 물건 아닌가. 테리오드의 앞에서 반지가 검게 색을 물들여 놀랐던 기억이 아직 선명했다.

“……지금은 별다른 반응이 없으려나.”

아스티나가 이내 머쓱한 투로 중얼거렸다.

테리오드는 리체 성에서의 그날 이후로 다시 짐승의 태를 쓰는 일이 없었다. 본래 알고 있던 저주의 명제를 생각하면 다소 얼떨떨한 일이었다. 어리숙한 주술은 그들의 재결합을 진정한 사랑으로라도 인식한 것일까. 사랑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테오도르 대신 끝까지 의심했던 테리오드 쪽이 굴레에서 벗어나다니. 몹시 공교로운 일이었다. 하기야 끝까지 어긋났던 테오도르와 달리, 테리오드와는 미래를 함께하기로 결심했다는 점이 다르기는 하다.

이 저주를 내렸던 레타 집시가 생각했던 사랑이란 그런 것이었을까. 모든 곤경을 감수하고 그 사람의 옆에 남는 것, 그건 확실히 절대로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당사자들의 가슴에 남은 의심은 둘째 치고서라도.

아스티나는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상자를 열었다. 반지의 모양새는 그녀의 기억 속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다. 모서리 부분의 탁한 얼룩까지도.

검은 자국을 들여다보던 아스티나의 얼굴이 잠시 후 딱딱하게 굳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건…….”

그녀는 한때 의심했었다. 다음 생에선 부디 제게 속죄를 하라는, 마티나의 그 마지막 저주로 인해 테오도르가 다시 태어난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었다.

마티나 역시 레타의 딸이었으므로 가설의 근거는 충분했다. 같은 피의 후손이었던 데니스가 이를 이용해 그녀를 속이려 했을 정도로 말이었다. 그의 대응은 임기응변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가 내뱉었던 말들이 몹시 그럴듯했던 건 사실이었다. 그녀도 순간 속고 싶은 충동을 느꼈었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진실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그녀의 눈앞에 있다.

테리오드는 이미 짐승이 되는 저주를 벗었으니 반지도 그에게 반응하지 않음이 옳다. 그러나 이미 한 겹의 저주가 벗겨진 지금, 그럼에도 이 물건이 검게 몸을 물들인다면.

아스티나는 제 손이 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테리오드는 이 반지의 존재를 모른다. 그는 알 수 없게, 그저 살짝 비춰 보기만 하면 되었다. 이건 아주 간단한 확인이었다…….

“대공비 전하, 대공 전하께서 귀가하셨습니다.”

아스티나의 정신을 일깨운 것은 작은 노크 소리였다. 아스티나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문가와 반지를 번갈아 보고는, 이내 작게 침을 삼켰다. 아스티나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누르며 답했다.

“……곧 나갈 테니 잠시 기다려라.”

아스티나는 그러면서도 좀처럼 그 반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진실의 반지라, 우습게 여겼던 명칭이나 지금만큼은 그 힘에 매달리고 싶은 충동이 든다.

아스티나는 그만 헛웃음을 지을 뻔했다. 지금도 그녀는 테리오드를 테오도르로 보고 싶은 욕심을 완전히 저버리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이 반쪽짜리인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테리오드를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였으니 그 저주도 반쪽짜리라 말함이 옳다.

오래도록 나를 괴롭혔던 멀디먼 자매야, 그대는 대체 무엇을 보고 우리를 구원했나.

잠겼던 문이 열렸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녀는 갑작스레 등장한 대공비를 보고 놀라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녀에게로 아스티나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하녀는 제 눈 바로 아래에 있는 작은 상자를 보고는 의아한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녀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아스티나는 잠시간 망설였다. 그러나 이어 입을 벌리고 나온 목소리는 단호하리만치 평이했다.

“불길한 물건이니 처리를 부탁하마. 절대 함을 열지 말고 그대로 물가에 내다 버려라.”

“예? 예.”

하녀가 엉겁결에 물건을 받아 들며 인사했다. 아스티나는 아주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지나쳐 복도를 가로질렀다. 무슨 정신으로 방을 나오고, 또 저 물건을 타인에게 넘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스티나는 당장이라도 뒤로 돌아서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모퉁이를 돌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곧장 로비로 향하는 계단이 나왔다. 아스티나는 황급히 그 위로 발을 내디뎠다. 그러고는 홀린 듯이 걸음을 멈춰 세웠다.

“마중 나온 겁니까?”

테리오드가 반가운 낯으로 그녀를 보며 계단을 올라섰다. 그가 한 발짝, 그리고 또 한 발짝 다가오는 것을 보며 아스티나는 가슴이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목 아래가 잠긴 탓에 그에게 인사를 전하지도 못했다.

아스티나의 일그러진 표정을 발견한 듯 테리오드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가 성큼 아스티나에게로 거리를 좁히며 물었다.

“황궁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표정이―”

아스티나는 고개만 내저었다. 아스티나를 향해 다가오던 그의 손이 멈칫했다. 그녀의 안위를 살피는 눈빛은 그저 걱정스럽다.

그녀는 한때 사랑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테오도르와의 실패를 겪은 후, 제 인생까지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고 여겼다.

그리고 다시 태어난 그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작된 사랑의 앞에 선다.

아스티나는 손을 뻗어 이마를 덮은 그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녀가 천천히 속으로 되뇌었다.

내가 선택한 사람.

“테리오드.”

그를 부르는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의아한 표정을 하던 테리오드가 선선히 대답했다.

“예, 말씀하세요.”

“이젠 그대를 속박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

테리오드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스티나는 그의 푸른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음에도 그대는 사람으로 존재해. 서로여야만 했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던 저주는 의미를 잃었고, 그대는 진정한 자유의 앞에 서 있어.”

“……그래서요?”

“사술의 힘에 홀려 붙잡혔던 여인에게서 벗어날 마지막 기회야. 우리를 감당할 수 있겠어?”

테리오드는 어느새 얼굴을 굳힌 채였다. 아스티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의 답을 기다렸다. 이제 와 또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 것이냐며 그가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변덕이 너무도 익숙했던 나머지, 그는 짧은 한숨 후로 곧장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내가 삶을 돌려받은 이유가 있다면, 아마 그대에게 바치기 위함일 겁니다.”

담담한 목소리였으나 그의 눈엔 자신감이 비쳤다. 아스티나는 잠시간 그 눈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그녀의 침묵에 테리오드의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제 결정엔 당당했던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에겐 반대로 불안한 얼굴을 한 채 물어 왔다.

“……자신 없어요?”

아스티나는 잠시간 그의 눈 속에 있는 불신을 본다. 그는 그녀가 방금 무엇을 포기했는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확신을 가지지 못했을 테지. 그녀의 포부를 말한다고 해도 결코 가시지 않을 불안임을, 그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래, 몇 번의 약속과 배신을 거쳐 우리는 또다시 이 자리에 있다.

때때로 우리는 의심할 것이다. 그는 그녀의 사랑을 믿지 못할 것이고 그녀는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겠지. 불신의 뿌리가 된 지난 행적을 후회하며.

이젠 우리가 운명이 맞든, 아니면 이성을 흐리는 열병에 잠시 속은 것이든 상관이 없다. 나 역시 옛사랑을 잊게 해 주리란 그대에게 속아 이 관계를 시작했으니 어쩌면 우리는 모두 똑같은 기만자다. 깨어날 진실이 무섭다면 반복해 거짓을 속삭이겠다. 그렇게라도 기꺼이 우리를 지킬 준비가 되어 있다.

함께 있어도 괴롭고 혼자서도 버틸 수 없다면,

같이 멍에를 지고 가자, 고통스러우나 외롭지는 않게.

“아니. 자신 있어.”

테리오드의 입술 끝에 엷은 미소가 매달렸다. 그녀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테리오드는 삶을 바칠 맹세를 속삭였다.

“우연이군요, 나 역시 그대와 평생을 함께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그에게 그녀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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