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과거와 현재(Ⅰ) (19/23)

19. 과거와 현재(Ⅰ)

랜스 남작은 아침 일찍부터 의외의 손님을 맞이했다.

새벽 내내 음주 가무를 즐기다 잠들었던 그로서는 참으로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그러나 그 예의 없는 방문을 행한 인물이 엄청난 거물이었던 탓에, 랜스 남작은 다시 못 들은 척 잠들 수도 없었다. 그는 자꾸 감기는 눈에서 더듬더듬 눈곱을 떼어 내고는 옷을 주워 입었다. 응접실로 다다른 랜스 남작은 잠시 아연한 얼굴로 멈춰 섰다. 반신반의하며 도착한 응접실엔 시종의 말대로 아탈렌타 대공이 기다리고 있었다.

랜스 남작은 목을 가다듬은 뒤 대공의 앞에 나섰다. 허리를 깊이 숙인 저자세였다.

“안녕하십니까, 대공 전하. 아침부터 여기까진 어인 일로…….”

인사를 건네면서도 랜스 남작의 머리는 팽팽히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대공이 자신을 찾아올 만한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사저까지 방문한 것일까. 랜스 남작은 대공과의 마지막 만남을 떠올렸다가, 이내 등허리에 식은땀이 차는 것을 느꼈다. 지난번 사교 모임에서 대공에게 말을 붙이려다가 실수를 저질렀던 게 떠오른 것이다. 대공에게 옛 악왕과 똑 닮았다며 나불거렸던 일을 그는 며칠이고 후회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공은 긴 인사치레를 거치지 않고 곧장 이렇게 물어 왔다.

“지난번, 내게 누굴 닮았다고 말했었지.”

언제나 유한 표정을 짓고 있던 대공의 얼굴이 이번만은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랜스 남작은 어깨를 움츠러뜨렸다.

“제가…… 그랬던가요?”

“테오도르 왕의 현신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고, 그리 말하지 않았나?”

랜스 남작의 모르쇠에 대공이 쐐기를 박았다. 랜스 남작은 눈을 감으며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그는 침착함을 되찾으려 애썼다. 랜스 남작이 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도 같군요. 하하, 워낙 시일이 좀 지난 일이라서요.”

이미 한참 지난 일을 트집 잡아 무엇하겠냐는 뜻이다. 그러나 대공은 처음부터 랜스 남작을 질책할 의도가 없었다. 테리오드의 입가에 언뜻 쓴웃음이 걸렸다.

“그래, 나도 이제 와 그게 새삼 궁금해질 줄은 몰랐지.”

테리오드가 그리 말하며 피곤하다는 듯 제 이마를 쓸었다. 그러고 보니 대공의 눈언저리가 붉었다. 잠이라도 설친 것일까? 대공에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지 랜스 남작으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다.

랜스 남작이 괜찮으시냐고 안위를 물으려 할 때였다. 테리오드가 날카로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 초상은 어디서 보았지?”

“예?”

“살아 있는 자를 만난 것은 아닐 테니 남은 그림이 있을 것 아닌가.”

랜스 남작은 잠시 후에야 테리오드의 말을 이해했다. 그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제 친구가 가지고 있는 소장품입니다.”

“내가 한번 확인할 수 있겠나?”

“부탁하면 보여 주기야 하겠지만…… 혹 급하십니까?”

“지금 보았으면 하는데.”

청유형의 말이었지만 그 안엔 상대가 당연히 그렇게 해 주리란 확신이 담겨 있었다.

랜스 남작은 잠시 속으로 이 상황을 재어 보았다. 어쨌든 자신은 대공에게 실수를 한 입장이었고, 상대할 수 없는 규모의 가문과는 되도록 친목을 다지는 편이 나았다. 친구에게 강제로 이른 기상을 전도하고 들을 아우성쯤은, 얼마든지 대공과의 친분과 맞바꿀 수 있었다.

“원래라면 들어 드리기 힘든 부탁이지만……, 대공 전하께서 손수 부탁하시니 제가 거절하기도 민망하군요. 같이 이동하시죠.”

그림은 소유한 이는 로겐 자작으로, 그의 저택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눈치 없는 이른 방문에 한껏 불만을 쏟아 냈던 랜스 남작은 어느새 가해자의 입장이 되어 친구의 저택을 침략했다.

랜스 남작과 어젯밤 내내 술을 마셨던 당사자인 로겐 자작 역시 비슷하게 처참한 몰골로 응접실에 도착했다. 랜스 남작을 보자마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던 로겐 자작은, 곧 그 옆에 앉은 대공을 발견하고는 재빠르게 표정을 고쳤다. 그 투명한 태도 덕분에 테리오드는 심각했던 기분이 우스움으로 조금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재빠르게 납작 엎드린 로겐 자작이 이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한데 두 분이 함께…… 여기까진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로겐 자작이 그리 말하며 눈으로 랜스 남작을 협박했다. 랜스 남작은 친우의 시선을 피해 테리오드에게로 발언을 떠넘겼다. 테리오드는 잠시간 대답하지 않고 소파 위를 불규칙적으로 두드렸다.

어젯밤 테리오드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고, 끝내는 아내가 과거에 사랑했던 그 잘난 면상을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자신과 정말 닮았는지, 닮았다면 얼마나 비슷한지.

“테오도르 왕의 초상이 보고 싶어서 왔네.”

“테오도르 왕의…… 초상이요?”

로겐 자작의 낯에 얼떨떨함이 비쳤다. 테오도르는 그다지 인기가 없는 왕이었다. 말년에 선보였던 폭정 탓에 제위 기간 동안의 업적이 가려진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의 초상이 누구나 감탄할 만한 수준인 것과 별개로, 애초에 자주 거론되지 않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상대였던지라 로겐 자작은 테리오드의 방문 목적을 어렵지 않게 곧 이해했다. 로겐 자작도 테리오드를 처음 보았을 때 얼마나 신기해했던가. 테오도르 왕의 초상은 로겐 자작의 어머니가 애지중지하여 저택 한편에 숨겨 두고 감상했던 물건이었다. 로겐 자작 역시 어렸을 적부터 그 아름답고도 비열한 남자를 줄곧 지켜보며 자랐다.

덕분에 테리오드가 처음 사교계에 데뷔했을 적, 로겐 자작은 테오도르 왕이 살아 돌아온 건 아닌가 진지하게 의심했었다. 저렇게 잘난 얼굴이 흔할 리도 없는데 아예 똑 닮아 있기까지 하지 않은가. 로겐 자작은 이를 기이하게 여겨 친구인 랜스 남작에게도 테오도르 왕의 초상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아마 대공에게도 그렇게 이야기가 전해진 것이리라. 자신과 꼭 닮은 과거의 사람이라니 궁금증이 도질 만도 했다. 새벽에 든 충동은 오후로 넘겨 주는 편이 서로에게 이로웠을 듯싶긴 했지만.

로겐 자작은 곧 테리오드를 미술품을 보관해 둔 2층으로 안내했다. 습기와 햇빛이 닿아선 안 되는 오래된 그림들은 한 공간에 따로 소중히 보관해 두고 있었다. 해를 피하기 위해 방 안엔 커튼을 모두 쳐 둔 상태였다. 초에 불을 붙이지 않은 실내는 당연히도 몹시 어두웠다. 검디검은 방 안에서 테리오드는 약간의 초조함을 느꼈다.

로겐 자작은 하인에게 초를 가져오라 일러 하나씩 조명을 밝혔다. 테리오드가 보고 싶어 했던 물건은 방의 중앙에 걸려 있었다. 테리오드는 이동하는 내내, 아스티나가 사랑했던 과거의 남자를 보며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예상했었다. 생각과는 달리 그렇게 닮지 않은 외양에 안심할 것도 같았다. 아니면 화가 날 듯도 했다. 쓸데없는 걱정에 시간을 낭비했다며 호언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러나 처음 액자를 눈에 담았을 때, 테리오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그림 속 푸른 눈동자와 눈을 맞춘 채 제자리에 섰다.

그였다. 닮았다고 말할 수준이 아니라 바로 그 본인이었다.

“신기한 우연이지요?”

랜스 남작이 재밌다는 듯 물어 왔지만 대답할 수가 없었다. 테리오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정말 우연일까?

신의 장난이나 질 나쁜 골림, 혹은 세상이 그에게 퍼부은 저주의 연속은 아닌가?

“잠깐 자리를 비워 줄 수 있겠나?”

테리오드가 잠긴 음성으로 물었다. 대공의 표정이 완전히 굳은 것을 발견하고 눈치를 보던 두 친구는 재빨리 방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테리오드는 혼자가 되었다.

테리오드는 조용히 걸음을 디뎌 그림 앞으로 다가가 섰다. 명치 언저리까지 담은 초상은 실제 사람과 비슷한 크기였다. 묘사 역시도 사실적이기 그지없었다. 테리오드는 마치 거울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테리오드는 멍하니 손을 뻗어 그림 위에 얹었다. 유독 시린 빛의 푸른 눈동자를 엄지 두덩으로 쓸었다.

“테오도르…….”

얼굴뿐만이 아니라 이름까지도 그와 비슷했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그녀는 잠이 덜 깼거나 술기운에 실수를 저지른 게 아니었다. 정말로 테리오드가 테오도르라고 생각했던 거다.

그러나 자신에게서 타인을 보았다는 이유로 그녀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조차도 착각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슴 한구석이 뭉친 듯이 깊이 저려 왔다. 이 답답한 심정을 어디로 돌려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탓하려면 누구를 탓해야 한단 말인가? 더없이 왕다웠기에 연인을 버리고 나라의 안정을 찾은 테오도르? 아니면 배신당한 기억에 다시 태어난 지금까지도 괴로워하고 있는 아스티나? 혹은 멍청하게도 그런 여자를 사랑해 버린 본인?

테리오드는 곧 가장 쉽게 원망할 상대를 찾아냈다.

“내가 당신이라면 그런 짓은 하지 않았어.”

그녀에게 잔인한 명령을 내리고 도망치듯 죽어 버린 비열한 남자다. 테리오드는 이를 악물었다. 그가 되새기듯이 재차 중얼거렸다.

“그게 나와 당신의 다른 점이야.”

백 년도 더 전의 일이다.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아스티나는 마티나와는 다른 생을 얻었으며, 지금 테리오드의 곁에 있었다. 테리오드는 가슴속의 울렁임을 애써 지워 냈다. 아스티나는 그에게 기다릴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 있게 이렇게 대답했다.

‘십 년이 가도 백 년이 가도 천 년이 가도, 예. 그대를 아프게 했던 사람이 누구든 제가 잊게 해 드리지요.’

그래서 그녀는 그를 믿어 보기로 했으리라. 그녀조차 이겨 내지 못한, 도려내고 싶은 과거를 잊게 해 주겠다는 그의 오만한 호언을 믿고서. 테리오드는 새 삶을 살기로 결심한 아스티나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스티나가 그를 위해 충분히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저는 그저 버팀목처럼 계속 그녀의 옆에 있으면 되는 것이다.

테리오드는 몸을 돌려 문밖으로 나왔다. 대공을 발견하고 반색하던 로겐 자작이 그의 표정을 보고는 멈칫했다. 테리오드가 말했다.

“저 그림을 내게 팔아. 값은 잘 쳐주지.”

자신과 소름 끼치도록 똑 닮은 저 얼굴을 이곳에 두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곳에 처박아, 어쩌면 테리오드 자신도 방금 보았던 광경을 잊고 싶었다.

갑작스러운 요구에 로겐 자작이 식은땀을 흘리며 만류했다.

“저, 대공 전하. 이건 팔 물건이 아니…….”

“당초 구했던 가격의 10배를 주겠어.”

로겐 자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입이 다물렸다. 대답을 기다리던 테리오드가 재차 질문했다.

“싫은가? 그럼 스무 배는?”

로겐 자작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조아렸다.

“파, 팔겠습니다.”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대공저로 보내 주게. 그리고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하는 게 좋겠어. 내 말 이해했나?”

“물론입니다.”

두 번째 대답은 보다 선선했다. 테리오드는 속으로 재차 스스로에게 되새기듯 말했다. 그들에겐 아무 일도 없었다.

* * *

해는 어김없이 밝았고 하늘은 언제나처럼 맑았다. 아스티나는 창가맡의 의자에 앉아 가만히 몸을 늘어뜨렸다. 새벽 내내 같은 자세로 있었던 탓에 허리가 뻐근했지만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차라리 이대로 영원히 눈을 뜨지 않는 편이 더 나을 듯싶기도 하다. 혼절할 때까지 한바탕 쏟아 내고 나서는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이제야 테오도르를 잊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테리오드와 함께라면 과거의 괴로움에서 마침내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그러나 이젠 아무것도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차라리 무지한 편이 나았을 것을, 신은 왜 이런 잔인한 사실을 알게 하여 그녀를 다시 괴롭게 하는 걸까. 깊이 뿌리내린 절망감이 도통 달아나지 않았다. 아스티나가 헛웃음 치듯 중얼거렸다.

“레타의 저주라.”

그것이 진실로 저주라면, 원수의 핏줄을 사랑한 배신자에게도 작용할 법했다. 어쩌면 그건 블란체를 사랑하여 얼마나 행복하겠냐는 시험이었을까. 그들은 코앞에 해답을 두고도 찾지 못한 눈먼 장님이었다. 그 무지의 대가로 테오도르는 목숨을 내놓았다. 도무지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이다.

테오도르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다수를 위해 희생하겠다는 대의를 품었어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나와 같았다. 칼을 마주한 그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마티나는 보았다. 그를 죽인 당사자인 그녀만은 보았다.

[사실, 나는 죽는 게 너무 두려워.]

죽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가 살아 제 곁에 남을 수 있었다. 그 열쇠를 쥐고 있었던 건 그녀인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이 하나둘 머릿속을 잠식했다. 테오도르와 자신에게도 보통의 연인 같은 시간들이 있었다.

한 날은 꽃다발을 안겨 주기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었다. 지금이라면 무엇을 선물하든 무엇이든 고맙게 받아들일 텐데, 그때는 그런 사치를 부릴 줄도 알았다.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는 손에 든 다발보다 흐드러지게 웃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아름다운 걸 주고 싶거든.]

우스운 욕심이었다. 그는 정작 마티나에게 가장 갖고 싶었던 건 주지 않았다. 오직 그와 함께하기만을 바랐는데 그는 제멋대로 죽음을 택했다. 그의 미소 띤 얼굴이 흐려지며 이어 손에 끈적임이 감돈다. 살갗을 적신 핏방울이나, 그의 심장을 갈랐던 감각 같은 것.

아스티나는 몸을 웅크리고 양팔을 감싸 안았다. 무의식적으로 침대맡에 두었던 검에 시선이 갔다. 문득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심장을 찌르면, 이보다 고통스러울까?

때마침 뒤편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침실에 허락 없이 드나들 수 있는 인물은 대공 부부뿐이었다. 아스티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불청객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의 옆으로 다가와 나란히 앉았다. 그는 어젯밤과 오늘 아침 내내 어디 있었던 걸까. 이제야 당연한 의문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그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았으니까.

“식사를 들이지 않으셨다고 하던데요.”

“…….”

“잠은 좀 주무셨습니까?”

아스티나와 다르게 테리오드는 그녀에게 이런저런 물음을 던져 왔다. 언제나처럼 다정함이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아스티나는 침묵을 고수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 테오도르에겐 그와 같은 행운이 없었냐는, 말도 안 되는 원망을 테리오드에게 전가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스티나도 알았다. 테리오드의 앞에서 테오도르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그러나 지금은 그런 당연한 예의를 지킬 힘조차 없었다. 아스티나가 눈가를 감싼 채 힘없이 말했다.

“혼자 있고 싶습니다.”

“얼마나요?”

“…….”

“일주일이면 될까요, 아니면 한 달이면 되겠습니까. 일 년, 혹은 십 년이 지나면 그를 잊으실 수 있겠습니까?”

테리오드의 목소리엔 자조가 섞여 있었다. 아스티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테리오드의 말대로 하루 이틀 자리를 비워 준다고 정리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니다. 그녀는 지난 생 동안 평생토록 그 사실을 절감했다.

아스티나는 그를 내보내기를 포기했다. 그녀가 뇌까리듯 말했다.

“받아들이는 게 빠르시군요. 전 제가 그냥 미친 사람 같은데요.”

“이상한 건 오히려 부인의 나이 쪽이었습니다. 부인 같은 열아홉은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에게 마냥 손윗사람 같은 이였다. 그냥 전생도 아니고 제국의 시조였다니 제 감이 틀리진 않았다 싶다. 테리오드가 힘없이 웃으며 덧붙였다.

“말을 높이시니 오히려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는군요.”

“……지난밤엔 제가 경황이 없었습니다.”

“편하신 대로 말씀하셔도 됩니다.”

“대공, 마티나는 백 년 전에 죽었고 저는 레테 백작가의 일개 손입니다. 다 지나간 일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스티나가 스스로에게 주지하듯 말했다. 옛일에 아직까지 고통스러워하는 그녀가 꺼내기엔 우스운 말이다. 테리오드 역시 같은 생각을 했을까. 그가 갈라진 음성으로 대꾸했다.

“오히려 과거라 더 잔인하지 않습니까. 죽은 사람의 멱살을 붙들 수도 없고, 이미 지난 일을 원망할 수도 없으니.”

무려 그녀에게 왕위를 주고, 업적을 닦을 기반이 되어 준 사내다. 그 대단한 사연을 알고 나자 감히 우위를 겨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벗어날 수 없는 짙은 패배감이 가슴 깊숙한 곳에 어렸다.

기실 이 상황이 믿겨지지 않는 건 테리오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확인한 과거의 얼굴엔 현실감이 없었다. 누군가 저를 질 나쁜 장난으로 골리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다. 테리오드는 자신이 본 것을 잊을 수조차 없었다. 굳이 다시 그림을 찾을 필요도 없이, 그 생김새는 거울만 마주해도 바로 되새길 수 있었으니까.

테리오드는 아스티나와 시선의 방향을 나란히 했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고 보니 별장에서도 이렇게 같이 창밖을 내다봤었지요.”

대공 부부의 침실은 가장 조경이 좋은 방향을 향해 창을 내어 놓은 공간이었고, 정돈된 꽃 무리와 수풀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하늘은 언제나의 그 자리에 있고 그들 역시 같은 것을 보고 있을진대 상황은 이전과 너무도 달랐다. 감정은 거세된, 다짐뿐인 고백이었으되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땐 세상 모든 걸 다 가진 것처럼 충족된 마음이었다. 그녀가 메마른 이유를 알게 되기 전까진 분명 그러했다.

그녀가 비어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이미 누군가에게 어리석도록 맹목적인 사랑을 내어 준 적이 있었다.

“테오도르 왕과는 연인 사이였다고요.”

“……그랬지요.”

테리오드에게 테오도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으나, 아스티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자라난 의문이다. 테리오드가 모르길 바랐다면 애초에 아무 말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저와 그에게 내려진 저주가 같다면, 어째서 그의 대에선 해결하지 못한 겁니까?”

“제가 일을 처리하러 영지로 내려갔을 당시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수도에 다다랐을 땐 이미 그의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테오도르는 자신을 죽여 달라고 말했고 마티나는 그런 그를 용서하지 못했다. 마지막 그가 입을 맞추려 했을 때 받아들였다면, 지금과는 조금 다른 결과를 얻었을까. 그 수많은 만약이라는 가정이 아스티나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우리는 저주의 내용조차 몰랐습니다. 그가 나아질 방법이 있다는 사실마저도.”

아스티나의 말엔 힘이 없었다. 그저 담담한 듯도 하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테리오드는 그녀가 지금 어떤 심정일지 상상해 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겪은 일은 평범한 사람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만도 고통스러울진대 그 목숨을 앗은 것이 바로 그녀 본인이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테오도르는 그렇게 그녀에게 흉터처럼 새겨졌다.

테리오드는 어쩌면 그들이 차라리 저주의 근원을 평생 모르는 편이 나았으리라고 생각했다. 한 치 앞만 더듬으며 겨우 나아갔으되 그들은 이 길이 행복까지 이어져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안개가 걷히고 나서야 잔인하게 깨달았다. 그들이 얼마나 모래성 같은 안정에 머무르고 있었는지를.

테리오드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답을 알지 못했을 적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많고 많은 것 중, 왜 하필 입맞춤이 저주를 풀었을까.”

아스티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도 알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녀는 키스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레타의 사랑’이라니. 그런 주관적인 명제가 또 어디 있답니까.”

테리오드가 피식 웃더니 이어 자문했다.

“옛 동화에서처럼, 정말 진정한 사랑이라도 요구하는 걸까요?”

아스티나는 그것이 맞는 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처음 저주가 풀렸을 적 아스티나가 입을 맞췄던 상대는 동물이었다. 이후로도 저주를 풀기 위해 하는 키스에 크게 의미를 담아 본 적은 없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행위만으로도 테리오드는 사람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 해결법에 형식 외의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테오도르의 죽음이 이를 증명한다. 그 어리숙한 저주는 왈도의 목숨을 보전해 주고 대신 테오도르를 앗아 갔으니까.

아스티나가 단호하게 부정했다.

“하지만 이건 동화가 아니니까요.”

아스티나를 빤히 응시하던 테리오드가 곧 왼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입술에 의미 없는 미소가 걸렸다.

“그러게요, 그것참…… 미련한 일입니다.”

* * *

“대공비, 대공과 함께 별장으로 휴가를 떠났었다면서. 오랜만의 휴식은 즐거웠나?”

오랜만에 청한 만남에 이시스는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밝은 표정의 황녀를 마주했을 때 아스티나는 다소 생경한 느낌을 받았다. 내내 꿈속에 잠겨 있다가 현실로 끌어 올려지기라도 한 것처럼. 황녀에게 황위를 주기 위해 힘을 빌려주었던 일이 어쩐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요 근래 지나치게 과거의 일들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공저에서 머무는 내내 아스티나는 필연적으로 테리오드를 계속해서 만나야 했고, 그는 결코 아스티나가 과거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줄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새로운 황제가 될 사람’이라는 직책은 아스티나에게 자신이 다른 시대에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상기시켰다. 생경한 기분에 아스티나는 황녀에게 적절한 예를 취하는 것까지 잊고 말았다.

정작 이시스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부산스럽게 아스티나를 안으로 맞아들였다. 아스티나는 그제야 이시스에게 적당한 인사말을 건넨 후 그녀의 건너편으로 가 앉았다.

“전하께서도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언제나와 똑같지. 마침 신년제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눌 일이 있었는데 잘 찾아왔군.”

용건이 있었던 것은 아스티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중요한 일을 논의할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아스티나가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다.

“전하, 황공하지만 저는 오늘 다른 청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말씀하신 이야기는 후에 나누어도 될까요?”

거절당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이시스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기분이 상했다기보다는, 대공비에게 생겼다는 다른 용건이 몹시 궁금했던 탓이다.

“무슨 일인데 그러나?”

“……데니스 사제를 만나 보고 싶습니다.”

대공비가 언급한 의외의 이름에 이시스의 눈이 잠시 커졌다. 데니스는 공식적으로 실종 처리된 상태였지만, 그의 행방은 여전히 이시스의 수중에 있었다. 이시스는 아스티나의 의도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그치는 갑자기 왜?”

“이전에 그자의 행적에서 수상한 점을 발견하지 않았었습니까. 의문이 있어 직접 경위를 묻고자 합니다.”

“갑작스러운 요청이군.”

“제겐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혹 저주에 관한 다른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왈도의 일기를 다시 읽어 보았지만, 예언의 내용을 제외하고 더 알아낸 것은 없었다. 굴레 같은 저주였다. 아스티나는 같은 그림자가 제 두 번째 삶까지 뒤덮을 줄은 정녕 몰랐다. 아스티나는 그녀를 진창에 처박은 이 저주로부터 그만 벗어나고 싶었고, 어쩌면 필사적으로 몰두할 것이 필요했다.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를 붙들기 위해서라도.

아스티나는 닥치는 대로 레타에 관해 수소문을 시작했다. 그러나 백 년 전 왕가에서 벌였을 때도 진척이 없었던 수사다. 새삼 무언가가 발견되리란 기대는 없었고, 결과 역시 예상과 같았다.

오리무중으로 빠져든 와중 아스티나는 문득 데니스라는 인물을 떠올렸다. 데니스는 옛 설화를 말하고, 마티나를 악마의 딸이라고 표현하는 둥 어느 정도 아레타인들에 대해 지식이 있어 보였다. 다소 의문스럽긴 하나 데니스에겐 조작 없이 범죄자들을 구별해 냈던 수상한 경력도 있었다. 그가 정말 신묘한 힘을 가진 이라면 해답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확인을 시도할 만한 가치는 있었다.

“내가 막을 이유는 없지. 사람을 붙여 줄 테니 가 보게.”

이시스의 허락은 선선했다. 가타부타 돌아오는 질문이 없다는 점은 조금 의외였다.

“지금 바로 말씀이십니까?”

“그래. 말했다시피 신년제가 가깝지 않나. 그리고 난 소란은 딱 질색이거든.”

이시스가 눈을 접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대가 사제에게 얻을 게 있다면, 서두르는 편이 좋을 거야.”

이시스는 이미 데니스를 처분하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프리모에 관한 정보는 다 빼내고도 남았을 시점이다. 이시스가 이미 데니스에게 살수를 보내 둔 거라면, 그리고 그의 출발이 아스티나보다 빨랐다면 간발의 차로 놓치게 될지도 모른다. 아스티나의 미간이 좁혀졌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혹 먼 지방이라면…….”

아스티나의 물음에 이시스가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원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지.”

이시스가 그리 말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뒤편에 서 있던 시녀 하나가 조용히 걸어 나왔다.

“벨라, 대공비를 안내해 주어.”

“예, 대공비 전하. 이쪽으로 오시지요.”

시녀는 아스티나보다 앞서 이시스의 방을 나섰다. 아스티나는 시녀를 잠자코 뒤따랐다. 다른 인물이 아닌 황궁 시녀를 붙여 주었다면 목적지는 뻔하다. 황궁 내인 것이다. 이시스의 궁을 나와, 시녀가 향하는 방향이 명확해질 때 즈음 아스티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던 이시스의 말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시녀가 안내한 곳은 다름 아닌 프리모의 거처였다.

황자가 머물렀던 궁은 수사를 이유로 폐쇄된 상태였다. 누이를 암살하려 패악을 부린 일에 동조자가 없었을 리 없다. 수족들도 함께 쓸려 나가 텅 비어 버린 궁은 대낮인데도 마냥 을씨년스러웠다.

“이쪽입니다.”

시녀가 안내한 곳은 지하조차 아니었다. 안쪽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사용인들이 머물렀을 게 분명한 협소한 공간에 도착하자 걸음이 멈췄다.

시녀는 품 안에서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열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악취가 코를 찔렀다. 창이 없는 방 안엔 웬 부랑자가 하나가 쓰러져 누워 있었다. 손목과 발목, 목까지 모두 매어져 있어 도망은 불가능해 보였다. 건장한 장정이라도 벗어 내지 못할 구속구다. 왜 경비가 없나 하였더니. 데니스에겐 애초에 탈옥을 시도할 만한 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아스티나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꼴이 말이 아니군.”

“아마 식사를 내어 준 횟수가 한 손에 꼽힐 겁니다.”

이시스가 굳이 살수를 보내지 않아도 데니스는 머지않아 알아서 절명할 것 같았다. 시녀는 들고 왔던 물통의 뚜껑을 열고는 데니스의 얼굴에 뿌렸다. 물을 맞고서야 정신을 차렸는지 흐린 눈이 희미하게 뜨였다. 정신이 깨자마자 그는 허겁지겁 입가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핥았다. 보기에 썩 유쾌한 광경은 아니었다.

시녀는 바깥에서 의자를 끌어와 아스티나에게 내주었다. 구속구의 길이상 데니스가 닿지는 못할 거리였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말씀 나누십시오.”

문이 닫혔다. 아스티나는 시녀가 놓아 준 의자를 데니스 바로 앞으로 끌어왔다. 시녀로선 데니스의 위협이 있을까 걱정했던 듯했지만, 아스티나는 멀쩡한 상태의 그라도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아스티나는 자리에 앉으며 오른발을 뻗어 그의 손등을 눌렀다. 정신을 차린 데니스의 눈에 괴로움과, 이어 증오가 담겼다.

“이런 무참한 짓을 저지르고도 신께서…….”

“이런 곳에서도 신을 말하다니, 그대의 신앙이 생각했던 것보단 대단한 듯싶군.”

“하늘이 용서치 않을 거다.”

“신께서 주신 벌이 괴롭나?”

아스티나가 그의 손등을 짓이기며 물었다. 데니스는 얼굴을 구기며 아스티나의 발을 밀어내려 했다. 그가 갈라진 음성으로 말했다.

“죽일 거면 빨리 죽여라.”

“죽음이 기꺼운가 보지? 하기야 살아 쓸 만한 인생은 아니었던 듯싶긴 하다만.”

“이 비겁한 마녀가…….”

“어디 한번 그 마녀에게 삶을 구걸해 볼 텐가?”

아스티나가 덤덤한 눈으로 데니스를 내려다보았다. 데니스의 눈에 당황이 담겼다. 그녀의 말이 조롱이 아닌 다른 의도로 읽혔기 때문이다. 정말 기회를 줄 생각이 있다는 것마냥.

아스티나가 손등에 턱을 괴며 말했다.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더군.”

“…….”

“그대가 만들어 낸 업적의 대부분은 조작이었지. 하지만 개중 신묘하게도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못한 것도 있더군.”

데니스가 휘청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아스티나에게 달려들거나, 그녀를 위협하려 하는 일은 없었다. 데니스가 주먹을 쥐며 물었다.

“무슨 목적이지?”

“레타 집시들의 힘에 대해 좀 아는 게 있나?”

데니스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아스티나로서도 의외의 반응이었다. 그녀가 조금은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있어 보이는군.”

“모를 리가 있나.”

데니스가 킬킬거리며 자조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대공이 저주를 받아 짐승이 되었다는 소문이 있었지. 왜 찾아왔나 했더니 그게 문제였군.”

수도의 인물 중 짐승의 탈을 쓴 대공을 본 자들은 없었다. 대공이 다시 사교계에 등장하며 이전의 소문은 말도 안 되는 비방으로 여겨졌다. 대공이 크게 앓았던 탓에 흉측한 모습을 썼던 일이 크게 와전되었다고 말이다.

아스티나가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사람이 짐승이 되었다는 말을 믿나?”

“사람들은 보지 못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우를 범하곤 하지. 하지만 난 아니야.”

“그렇다면 내게 해답을 제시해 보아.”

이윽고 그가 웃음을 뚝 그쳤다. 풀려날 가능성을 본 데니스의 태도가 눈에 띄게 공손해졌다. 그의 눈동자가 희망으로 번들거렸다.

“내가 아탈렌타가에 내린 저주를 해결해 주면, 풀어 주실 겁니까?”

“약조하지.”

아스티나가 그리 말하며 시녀가 두고 나간 물통을 그의 앞에 놓았다. 데니스는 필사적으로 목을 적셨다. 순간 사레가 들렸을 정도로 급한 몸짓이었다. 갈라졌던 그의 목소리가 언뜻 예전의 매끄러운 색을 띠었다. 그가 심호흡을 하며 입을 열었다.

“왈도의 명으로 레타 집시들은 분명 전부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과거에 뿌린 씨까지 모두 축출할 수는 없었죠.”

“계속 말해 봐.”

“모르시겠습니까? 내가 바로 그 후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아스티나의 눈이 일순 커졌다. 더 이상 레타의 이름을 하고 있진 않으나, 그녀들이 낳았던 핏줄은 여전히 이 대륙에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 남자가 자신과 동족이라는 사실은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아스티나가 반신반의하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대에게 있는 것이 레타의 힘이라고?”

“반쪽짜리입니다. 원할 때 구실하지 않으니 결정적인 때에 사용할 수도 없고, 하지만 공교히 시기가 맞아떨어졌을 때 재밌는 이야기 정도는 꾸밀 수 있는…….”

“말이 되질 않아. 후대에 와선 그 딸들에게조차 이어지지 않은 힘이니까.”

“마치 잘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아스티나는 입을 다물었다. 데니스가 픽 웃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죠. 오직 딸에게서 딸에게만 내려오는 힘이며, 그래서 그들만이 특별하다고. 하지만 최후에는 어떻습니까? 살아남은 건 결국 버려진 사내아이들이었습니다.”

아스티나는 신전에서 데니스와 마주쳤던 때를 떠올렸다. 그는 아레타인들이 남성을 어떻게 배척해 왔는지 아느냐며 과한 불쾌함을 드러냈었다. 당시엔 이민족의 남다른 성 관념에 대한 경멸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는 제 어버이들을 안타까워한 쪽이었나.

아스티나는 물끄러미 데니스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말이 거짓 같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그다지 실감이 나지도 않았다. 아스티나는 품속에서 단도를 꺼냈다. 데니스는 검집을 벗어난 날붙이를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응시했다. 아스티나는 칼끝을 데니스의 목 근처에 대었다.

“그 핏줄의 진위를, 이 목을 걸고 보증할 수 있나?”

그의 목젖이 움찔했다. 데니스는 칼날에 닿지 않으려 애쓰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남자에게 모든 걸 털어놓아도 괜찮을까.

그러나 아스티나는 곧 망설임을 지워 냈다. 아무래도 상관이 없겠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아스티나가 단검을 도로 무릎 위에 두자 데니스의 입가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아스티나가 온기 없는 음성으로 설명을 이었다.

“그대의 말대로 왈도는 레타를 몰살하려 했지. 하지만 밟히는 쪽에서도 의미 없이 죽고 싶진 않았을 거야.”

“……그게 아탈렌타가에 내려온 저주와 무슨 상관입니까?”

“왈도가 받은 저주는 짐승의 태를 쓰는 것이었다.”

데니스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는 그제야 아스티나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한 듯했다.

“블란체의 마지막 왕 테오도르가 죽으며 모두 끝난 일이라 여겼지만, 이 굴레는 생각지 못한 곳에서 다시 이어지고 있었지.”

“……저주는 관념입니다. 주술을 행한 자는 상대가 가문의 이름을 잇는 쪽만 신경 쓰리라는 걸 알았을 거예요. 저주는 정확히 블란체의 왕관을 계승할 수 있는 순서대로 전해 내려왔겠지요.”

“혼자 힘으로 그런 강력한 저주를 내리는 것이 가능은 한가?”

“신의 저울은 공평해서 내어 준 것 이상의 대가를 주진 않습니다. 왈도와 그 핏줄에게 내려진 저주는 그 군락에 살았던 모든 여인의 목숨값이었을 겁니다.”

“똑같은 수의 목숨을 바쳐야 저주가 끝날 거라 이 말인가?”

“따로 내건 조건이 없다면, 그렇겠죠.”

데니스가 초조한 얼굴로 아스티나를 채근했다.

“정확히 어떻게 내린 저주였습니까? 더 정보를 주십시오. 너무 아는 것이 적습니다.”

데니스에게선 기회를 놓치기 싫은 간절함이 비쳤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블란체의 저주에 있어 의문을 모두 푼 후였다. 똑같은 목숨의 수를 바쳐야 풀릴 저주라면 적어도 테리오드의 대에서는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긴 시간을 거쳐 얻은 것이 저주를 해결할 다른 열쇠는 없다는 것이라니. 테리오드와 자신은 필연적으로 평생을 같이할 운명이라는 걸까.

아스티나는 대신 질문을 달리했다.

“그보다는 다른 걸 묻고 싶군.”

데니스의 눈에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마티나 역시 테오도르 왕에게 저주한다고 말했어. 그것이 문제를 일으켰을 가능성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마티나가 다시 이 땅에 태어나 테오도르와 같은 얼굴의 남자를 만났다. 그가 테오도르일 가능성이 있나?”

아스티나가 깊이 가라앉은 눈으로 물었다.

왜 ‘대가’라는 말에 그녀는 그와의 마지막 대화가 떠올랐을까. 아스티나는 자신이 최후의 날, 테오도르에게 내뱉었던 말을 기억했다.

[다음이 있다면 부디 내게 속죄를 해.]

마티나도 그때 누군가를 죽였다. 그녀에게도 레타의 딸로서 물려받은 것이 있다면, 힘이 발현될 충분한 대가를 치른 셈이다. 속죄하라는 바람으로 인해 테오도르가 테리오드가 되어 나타난 것이라면? 자신도 다시 태어났는데 그라고 환생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중첩된 우연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스티나는 테오도르와 같은 테리오드의 생김새를 어떻게든 설명받고 싶었다. 그가 테오도르이길 바라는 본심은 저열했다. 그래야 죄책감 없이 추억에 잠겨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테리오드가 테오도르임을 증명받고 싶었고,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차라리 착각 속에서 깨지 않길 바랐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데니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아스티나가 스스로를 비웃듯이 되물었다.

“마티나가 백 년의 시간을 넘어 다시 이 땅에 태어났다고 하면, 믿겠는가?”

데니스는 구겨지려는 표정을 겨우 억눌렀다. 비범한 자라고 생각했는데 단순히 정신 이상자일 뿐이었나. 그녀의 자신감은 단순히 광증으로 인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과거의 여제로 착각한 나머지 그자처럼 행동하는 데 다다른 것이다.

데니스가 미간 사이를 좁히며 되물었다.

“당신이 마티나의 환생이라고 말하는 겁니까?”

“마티나는 테오도르를 사랑했지만 그는 저주 때문에 자살을 택했어. 그리고 다시 태어난 마티나는 그와 같은 얼굴의 배우자를 만났다. 그러자 의문이 들더군. 이자가 과거에 사랑했던 그 남자는 아닌가.”

데니스는 터져 나오려는 헛웃음을 겨우 억눌렀다. 테오도르 왕과 마티나 여제의 사랑 이야기를 사실처럼 지껄이는 것만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데니스는 대공비를 조롱하거나 비웃는 대신 약간의 연기를 택했다. 조금 비위를 맞춰 주면 풀려날 방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건 황녀가 허락할 리 없겠군.’

데니스는 내심 스스로에게 조소를 흘렸다. 대공비가 자신을 빼 주는 게 다른 큰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미쳤기 때문이라면, 이를 이시스가 가만히 두고 보겠는가. 철두철미한 황녀는 데니스에게 추적을 붙일 것이다. 모든 기반을 잃은 자신이 도망쳐 봤자 오래갈 리 없었다.

데니스는 기껏 차올랐던 희망의 불씨가 다시 꺼져 드는 걸 느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을 이렇게 만든 상대에 대한 증오는 곧 다른 계산으로 이어졌다. 어쩌면 이건 굴욕을 갚을 기회인지도 모른다.

데니스가 핏빛 욕망을 숨기며 뇌까렸다.

“글쎄요, 가능성은 있는 이야기입니다.”

“내겐 힘이 없었다.”

“당신이 레타의 딸이기에 대공가의 저주를 풀었는데도?”

데니스는 대공비가 대공의 저주를 풀었다며 행운의 여신으로 불렸던 일을 잊지 않았다. 그럴듯한 끼워 맞추기에 대공비의 눈이 가늘어졌다.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저주는 굴레입니다. 블란체 핏줄에 전해져 내려온 그것처럼, 약해질지언정 대가를 다 바치기 전엔 끝없이 반복되지요.”

대공비가 정신이 나가 헛소리를 지껄인 것이든, 아니면 정말 마티나의 환생이든 데니스로서는 상관이 없었다. 저 말도 안 되는 공상에 취해 있는 여자를 휘둘러 제 뜻대로 휘두를 수만 있다면.

데니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아스티나의 손에 쥐인 단검을 턱짓하며 말했다.

“당신의 심장을 찌르세요.”

“뭐?”

“당신이 죽고 태어났을 때 여전히 마티나임을 기억하며, 다시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그는 테오도르가 맞습니다.”

아스티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미동 없이 제 손에 쥐여진 단검을 내려다보았다. 테오도르가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안 직후엔 똑같이 이 칼날을 심장에 박아 넣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었다. 그녀가 조용히 검을 고쳐 쥐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데니스의 눈에 희열이 담겼다.

아스티나가 칼을 휘둘렀다.

“꺼흑……!”

그러나 그녀의 칼날이 향한 곳은 데니스의 날갯죽지 위였다. 데니스의 눈에 핏발이 섰다. 아스티나가 데니스와 시선을 맞추며 속삭였다.

“내가 마지막 순간, 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아는가?”

살갗에 박혀 든 칼날에 정신을 차릴 수도 없었다. 어깨 부근이 타오르는 것처럼 아파 데니스는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난 그에게 속죄를 하라고 했어. 그리고 보통 그것은 같은 정도의 보답이 돌아와야 맞지.”

“이…… 이 미친년이…….”

“그가 내게 저지른 죄는 나를 두고 죽은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를 두고 먼저 죽으면 대갚음도 마무리되겠지.”

아스티나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내가 마티나로 다시 태어난다면, 그는 테오도르가 아니야.”

“살려 준다고, 약속을…….”

아스티나는 칼을 뽑아내어 다시 그의 심장을 찔렀다. 그가 눈을 부릅뜬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스티나는 피가 발끝을 적시지 않도록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데니스가 제 말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그럴듯한 말로 꼬여 내 그녀를 흔들 계산이었던 것뿐이다.

하기야 아스티나야말로 그를 비난할 입장은 아니었다. 전생을 밝힌 기점부터 이미 그를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죽어야만 확인받을 수 있는 재회라니.”

계략적인 혀 놀림이었지만 나름대로 그럴듯한 부분은 있었다. 실제로 잠시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의문과 가책 없이 테오도르를, 혹은 테리오드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 테니까. 결코 행할 수는 없는 방법이었지만.

“출구가 없다는 것만 확인받는 기분이군.”

아스티나가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 * *

“대공비가 데니스 사제를 죽였다고?”

시녀가 전한 소식에 이시스는 의외라는 표정을 떠올렸다. 시녀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전하께서 더 손을 쓰실 필요는 없을 거라 말씀하시곤 돌아가셨습니다.”

그 대범한 전언에 이시스는 그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고 말았다. 근심거리를 대신 치워 주었다 이건가. 어차피 죽일 생각이긴 했다만 대공비가 직접 손에 피를 묻힐 줄은 몰랐다. 귀부인이 칼을 휘둘러 사람을 죽이는 건 아무래도 흔치 않은 일이니까.

존중하는 마음으로 연유를 묻지 않고 안내해 주었었는데, 의외의 결과를 듣게 되니 대공비가 그를 찾은 이유가 조금은 궁금해졌다. 물어볼 것이 있다더니 의문은 다 푼 것일까. 이시스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를 내었다.

“어떻게 죽였던가?”

“등 부근에 찔린 상처가 두 군데 있었습니다. 날갯죽지와 심장 부근입니다.”

“한 번은 위협이고 한 번은 확인 사살이군. 칼을 쓴 줄 안다더니 손속이 꽤 자비 없어.”

이시스가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이시스가 이 일을 유쾌하게 받아들인 것과는 달리 시녀는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시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큰일은 아닐지 모르겠으나 어찌 됐든 황녀님 수중에 있던 자를 멋대로 처리한 것이라…… 제가 대공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볼까요?”

이시스는 잠시 고민하다가는, 고개를 내저었다. 대공비에게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었던 게 아니겠는가. 버러지 하나쯤 멋대로 처리했다고 해서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었다.

“뭐, 됐어.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으니 상관은 없지. 그 남자가 주제도 모르고 멍청히 입을 놀려 기분이 상한 게 아니겠나.”

이시스가 물러가란 듯 손을 흔들었다. 이젠 두 번째 방문객을 맞이할 시간이었다. 시녀는 곧바로 멈춰서 허리를 숙였다. 이시스는 시녀를 두고 티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황궁 정원 한복판의 티타임은 이시스가 아주 공들여 준비한 것이었다. 참석할 객 역시 특별하긴 마찬가지다.

이시스는 만면에 환한 웃음을 떠올리며 인사했다.

“나디아 영애. 그간 잘 지냈나?”

“황녀님.”

이시스를 발견한 나디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막 근신 기간이 끝났음에도 나디아의 낯빛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대공비를 모함한 죄가 있음에도 지나치게 약소한 벌을 받은 덕분이었다.

이시스는 자신의 암살 사건에 연루된 이들에게 자비로운 처분을 내렸다. 황녀는 암살을 당할 뻔한 피해자였음에도 오라비의 부덕함을 대신 책임지겠다며 나디아를 위해 대공비에게 사죄를 구하기까지 했다. 프리모의 측근 중 하나였던 아가타 역시 마지막 양심 고백을 했다는 이유로 용서받았다. 진상을 알고도 황녀의 암살을 방관한 여자에게 내리기엔 몹시 관대한 처분이었다. 아가타는 프리모에게 받았던 재산으로 남부의 값비싼 별장을 사들이더니 수도를 떠났고, 호화로운 저택에서 유유자적하게 시간을 보낸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상황이 절묘했기에 이시스를 향해 의심의 눈을 돌리는 자도 있었으나, 프리모의 행각이 너무도 분명하여 수면 위로 나오진 못했다. 다만 몇몇 눈치 빠른 이들은 황녀의 눈 밖에 날까 행동을 더 조심하게 됐을 뿐이다.

그리고 나머지 대다수에게 황녀는 자비로운 성정으로 칭송받았다. 특히 나디아에게 있어 이시스는 그녀의 삶을 구제해 준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이시스는 나디아의 기대에 부합하듯 상냥한 음성을 들려주었다.

“그렇게 외출을 제한받은 건 처음이었을 텐데, 혹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었나?”

“신경 써 주신 덕분에요. 오히려 근신 기간 동안 마음을 정리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나디아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어찌 됐든 나디아에게 있어 프리모는 결혼을 약속한 남자였다. 나디아는 프리모에게 이성으로서 나름의 연정을 품고 있었고, 그 대상이 친누이를 죽이려 한 패륜범이란 사실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간 이시스가 자신에게 베푼 친절이 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약혼자를 잃어야 했던 아픔을 내가 무엇으로 보상해야 할지 모르겠군.”

“세상에, 보상이라뇨. 제가 목숨을 부지한 건 다 황녀님 덕분인걸요.”

나디아가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이시스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띤 채 그런 나디아를 응시했다.

“그래도 애초에 이 혼담은 내가 주관했던 게 아닌가. 그대의 혼삿길을 막은 것은 아닌가 몹시 마음에 걸려.”

나디아는 무려 황자와 국혼을 약조했던 여자다. 좋게 파혼을 한 것도 아니고, 여러 일들에 불미스럽게 얽힌 지금 눈에 차는 결혼 상대를 찾기는 여의치 않을 것이다.

나디아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한때 이시스와 한 가족이 되는 영광을 맞이할 뻔도 하였는데, 어느덧 자신은 집안의 골칫덩이가 되어 버렸다. 이시스는 나디아의 주눅 든 얼굴을 만족스럽게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말인데 영애, 마음에 담아 둔 다른 상대가 있는 게 아니라면 내가 소개의 자리를 만들어 주어도 되겠나?”

“소개라니요?”

“마침 오는군.”

이시스의 말에 나디아가 고개를 들었다. 이시스의 시선이 향한 방향으로 눈을 돌리자 낯설면서도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부르셨습니까.”

“앉으렴, 벤자민.”

나디아를 발견한 벤자민이 무심히 인사를 건네고는 자리에 앉았다.

벤자민 황자라니. 이전에 황제가 공식 석상에서 직접 소개했었기에 알고는 있었지만, 사석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벤자민은 객관적으로 대단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기에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황자님. 아벨라르 백작가의 나디아입니다.”

벤자민 역시 나디아를 모르지 않았다. 이시스의 계획하에 벌어진 일이라고는 하나 아스티나를 마녀로 몰았던 인물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벤자민은 의외의 동석에 약간의 당황을 내보였다. 그가 곧장 이시스 쪽을 보며 물었다.

“저는 어쩐 일로 부르신 겁니까?”

“마침 나디아 영애의 연금이 풀려 궁으로 불렀네. 하루아침에 약혼자를 잃었으니 분명 상심이 클 테지.”

“……배려심이 넘치시군요.”

벤자민의 눈이 언뜻 가늘어졌다. 나디아는 이시스에게 철저히 이용당한 대상이었다. 이시스가 나디아를 구했다고는 해도, 멋대로 함정에 빠트려 놓고는 또 멋대로 구제하는 우스운 꼴이다. 벤자민은 거미줄에 붙잡힌 먹이를 사랑스럽다는 듯 어르는 이시스를 아무렇지 않게 지켜볼 만큼 비위가 좋진 않았다.

벤자민이 입을 열지 않자 이시스가 채근하듯 물었다.

“상심한 내 친우에게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보는 것은 어떤가?”

이시스의 눈엔 은근한 종용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의도를 깨달은 벤자민이 천천히 얼굴을 굳혔다. 벤자민은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었는데 제가 깜빡 잊고 있었던 듯하네요.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나누도록 하지요.”

누가 보아도 거짓말이다. 벤자민의 성격상 이렇게 대놓고 자리를 비울 줄은 몰랐기에 이시스의 서글한 웃음에도 금이 갔다.

“나디아 영애, 만나 뵈어 반가웠습니다.”

벤자민은 그대로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나디아는 당황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시스가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멋대로 자리를 만들어 기분이 상했나 보군. 잠깐 여기서 기다리게, 영애.”

이시스는 벤자민이 사라진 쪽으로 황급히 뒤따랐다. 그는 후원을 나와 건물 복도로 들어서고 있었다. 언제나 예법을 잘 지켜온 이시스가 발을 달린 적은 손에 꼽았으나, 이번만은 그녀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확연히 차이나는 신장만큼 보폭 역시 비할 바가 못 되었으니까.

이시스는 짜증스럽게 벤자민을 붙잡아 세웠다.

“벤자민, 멋대로 자리를 비우다니 이게 무슨 예의지?”

벤자민이 이시스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가 다분히 화를 억누르는 투로 말했다.

“진정 예의 없는 행동을 하신 건 누님 쪽이죠. 무려 선 자리를 만들어 놓곤 제겐 언질 하나 없다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네가 이렇게 거절할 걸 알았으니까!”

“제가 거절할 걸 알고서 그러셨다니 더더욱 돌아가고 싶지 않군요.”

이시스는 화가 나기보다는, 차라리 어이가 없어졌다. 나디아는 황후와 황제 모두가 아끼는 아이인 데다 정치적으로도 확고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벤자민에게 이는 대단한 기회였다. 나디아와 결혼한다면 그에게도 든든한 기반이 생긴다. 이시스는 그런 벤자민을 측근으로 삼아 한자리를 내줄 요량이었다. 기껏 진수성찬을 차려 가져다 바쳤더니 당사자가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이시스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왜 그녀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거지? 내가 네게 어떤 세력을 심어 주는 것인지 몰라서 그러는 게야?”

좁혀지지 않는 의견에 마침내 벤자민도 언성을 높였다.

“전 이미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요!”

벤자민이 이시스의 계산을 이해하지 못하듯 이시스는 벤자민의 낭만을 모른다. 이시스가 싸늘하게 지적했다.

“그래, 이미 결혼한 여자가 말이지.”

벤자민의 입이 다물렸다. 울컥한 듯 몸을 움찔했으나, 별다른 반박을 뱉어 내진 못했다. 그라고 새삼 아스티나가 대공과 헤어지고 제게 오길 바라고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녀를 가슴에 묻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싶지도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벤자민이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누님이라고 해서 제가 어떤 여자와 살지까지 강요할 수는 없어요. 프리모에게 복수를 해 주셨으니 시키는 일엔 따르겠지만, 그게 결혼처럼 사적인 영역은 아닐 겁니다.”

“잘 생각해, 벤자민. 내 말만 잘 따른다면 난 네게 대단한 부귀영화를 내어 줄 수 있어. 난 네가 네 누이의 몫만큼 넘치도록 잘 살았으면 하거든.”

이시스가 벤자민을 노려보며 말했다.

결국 이시스가 벤자민에게 내어 주고 싶은 건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그 애가 입지 못했던 좋은 옷, 이제는 맛보지 못할 귀한 산해진미. 겪지 못했던 안정…….

이시스의 눈빛이 일렁였다. 눈 앞의 사내에게서 다른 기억을 찾는 것처럼. 벤자민은 동요 없이 그런 이시스를 응시했다. 벤자민이 말했다.

“제 누이를 무척 아끼셨었다고요.”

“……그래.”

“하지만 베스 누님은 이미 죽었습니다. 전 그 대신이 될 수 없고요. 아시지 않습니까?”

이시스가 주먹을 틀어쥐었다. 벤자민은 그런 이시스를 잠시간 응시하다가는, 그대로 걸음을 돌렸다.

* * *

빛이 들어오지 않는 마차 안은 한밤처럼 깜깜했다. 아스티나는 커튼이 걸린 고리를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어둠에 젖은 천은 언뜻 축축하게도 느껴진다. 손끝의 감각이 둔했다. 조금만 걷어 내면 어느 길목에 와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테지만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아스티나는 맥없이 두 손을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목적지는 정해져 있다. 오늘 데니스를 찾아갔던 건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던지도 모른다. 저주를 푸는 방법은 레타의 딸이 블란체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그 ‘사랑’이란 말의 의미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몸을 섞으면 호전되는 병증이라니 참으로 짐승 같은 셈법이 아닌가.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아스티나는 마차의 내벽에 머리를 가져다 찧었다. 얼얼한 관자놀이에서 새삼 해답이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아스티나는 환생했다는 사실을 막 깨달았던 당시를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그저 혼란스러웠다. 다시 주어진 삶을 행운과 불행 중 어떤 쪽으로 해석해야 할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던 탓이다. 그녀에겐 차라리 잊고 싶은 기억이 많았고, 동시에 한낱 사람이었기에 생의 끝이 아쉬웠다. 그러나 이젠 분명해졌다. 이건 벗어날 수 없는 굴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저택에 도착한 듯 마차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철창으로 된 문이 미끄러지며 쇳소리를 냈다. 아스티나가 속으로 열을 세었을 때쯤 마차가 완전히 멈춰 섰다. 아스티나는 심호흡을 하며 아래로 내려섰다. 그러고는 이어 주춤 걸음을 멈춰 세우고 말았다. 놀란 얼굴의 테리오드가 그대로 그녀를 붙잡아 온 탓이다.

“부인!”

평소와 달리 옷도 단정치 못했다. 아스티나는 얼이 빠져 변변한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가 왜 이리 자신을 다급하게 찾는지 알 수 없었다.

아스티나의 당황한 낯을 본 테리오드가 언뜻 코끝을 붉혔다. 그가 부끄럽다는 듯 제 행색을 추스르며 말했다.

“어딜…… 어딜 말없이 다녀오신 겁니까. 걱정했어요.”

아스티나는 잠시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제야 그의 눈에 어린 불안감을 알아챘다. 테리오드는 그녀가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스티나는 염려치 말라며 그를 안심시키고 싶었으나, 그조차도 우스운 일이었다.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은 자신이다. 그리고 그들에겐 이 상황을 개선할 방법조차 없었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의 과거를 알게 되었고, 아스티나는 테오도르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만을 절감했을 뿐이다.

목이 잠긴 탓에 잠시간 대답을 지체했다. 아스티나는 겨우 손을 뻗어 그의 팔을 밀어냈다.

“황궁에 다녀왔습니다.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아서요.”

사실은 그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걸 자신이 없어서였다. 도무지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스티나는 차라리 귀가 멀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 같은 얼굴을 보라.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그대로 착각하며 살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를 볼 때마다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삭이느라 그녀는 무던히도 많은 열기를 소모해야 했다.

“데니스 사제에게, 수상한 힘이 있다는 말을 전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혹 저희에게 다른 방안이 없을까 알아보고 싶었어요.”

“다른 방안이라면…….”

“대공께서는 저와 계속 몸을 섞으실 자신이 있으십니까?”

아스티나가 조소하듯 물었다. 그들 사이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테리오드가 사람으로 있기 위해 그들이 필히 치러야 했던 일들이 있었다.

“전 잘 모르겠습니다.”

아스티나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홀로 있는 시간 동안 아스티나는 무수히 많은 만약을 상정했다. 그들을 변화시킨 가장 큰 기점은 자신이 대공령으로 내려온 일이었다. 애초에 테리오드와 자신이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하고 상상해 보았으나 아스티나의 부재로 테리오드가 얻을 것은 죽음뿐이었다. 실제로 그간의 일을 차근차근 되짚어 봐도 그들은 언제나 옳은 선택지를 짚어 왔다. 최선이라 생각해 이곳까지 다다랐는데 그들 앞에 남은 건 어째서 막다른 길인가.

“떠나겠다는…… 말씀입니까?”

아스티나를 멍하니 응시하던 테리오드가 더듬더듬 되물었다. 아스티나는 짧게 이를 맞부딪쳤다. 그대로 오른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어떻게 하면 평소처럼 그를 대할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일그러진 낯이 마냥 이상했다.

“……당장 뭘 어쩌겠다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습니까. 대공, 전 정말……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할지 당신은 아십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가 나아질 수 있을지?”

그를 떠날 수도 없고 곁에 남을 수도 없다면 그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들에겐 그저 서로를 견디며 사는 것 외엔 다른 출구가 없었다.

아스티나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녀는 결국 충동적으로 이렇게 묻고 말았다.

“대공, 정말 기억나는 게 아무것도 없으십니까?”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표현하면 꼭 맞을 것이다. 테리오드가 저 푸른빛 눈동자로 저를 응시할 때면 아스티나는 꼭 과거로 돌아온 듯한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오래 기다렸느냐며 눈꼬리를 접어 웃으면 그대로 끌어안아 품에 가둘 것이다. 그리워하고 또 사랑했노라며 이번엔 진심을 다해 말할 것이다.

테리오드가 정녕 테오도르라면.

“이를테면…….”

황급히 덧붙이던 아스티나가 이내 말끝을 흐렸다. 테리오드의 미소에 금이 간 탓이다. 테리오드가 그녀의 본심을 알지 못하길 바랐지만,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이해한 표정이었다.

아스티나는 그만 숨을 크게 들이켰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알 수 없었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잊으세요.”

아스티나는 그대로 그를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제자리에 멈춰 서 있던 테리오드가 정신을 차리고는 이내 그녀를 따라잡았다.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의 앞을 막아서며 다급히 말했다.

“아무것도요.”

“…….”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부인께서 바라는 대답은 이런 게 아니겠지만.”

테리오드가 이를 악물었다. 그의 표정이 이지러졌다. 그가 고통스럽게 내뱉었다.

“티나, 난 그가 아닙니다.”

테리오드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기적인 생각이었지만, 그가 자신은 테오도르가 아니라 말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다.

아스티나는 그를 피하려 고개를 돌렸다. 질끈 눈이 감겼다.

“대공, 저는…….”

“당신 눈 앞에 있는 사람은 그 남자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알잖아요, 당신도 알잖아.”

테리오드가 애원하듯 아스티나의 팔을 붙잡았다. 테리오드는 무언가를 확인받고 싶은 사람처럼 필사적이었다. 그가 끈질기게 아스티나와 시선을 맞췄다. 그럼에도 아스티나는 그를 안심시켜 주는 일은 없었다.

테리오드는 짧게 심호흡을 했다. 떨리는 음성은 가라앉았지만 젖어 드는 눈가까지 숨기진 못했다. 그는 반쪽짜리 웃음이나마 지어 보이려 애썼다. 눈가를 적신 채 한껏 입꼬리를 끌어 올린 모습은 광대보다 더욱 우스운 몰골이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그를 비웃지 못했다.

테리오드가 다짐하듯 말했다.

“됐습니다. 앞으로 이런 이야기는 말아요.”

“…….”

“모른 척할 수 있어요. 아무 일도 없었던 거니까. 우리 사이엔 아무 일도…….”

테리오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 말을 쏟아 내려 했지만, 도무지 굳은 입가를 움직이지 못했다. 한순간 테리오드의 표정이 이지러졌다.

그는 자신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자만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테리오드가 그녀를 기다리기로 결심한 기저에는 결국은 그녀가 자신을 사랑해 주리란 바람이 있었다. 그녀가 옛 연인이 아닌 자신만을 보고 있다고, 적어도 그렇게 노력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그와 같은 얼굴의 남자를, 그를 처음 만났을 적부터 알고 있었다.

떠오르지 않았을 수 없을 것이다.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자신이 기억을 되찾아, 과거의 연인으로 돌아가길 희망하고 있는 저 눈빛처럼.

아스티나가 굳어 버린 테리오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테리오드는 그녀가 정말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저를 통해 다른 남자를 보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확신할 수 없었다. 테리오드는 제 가슴에 움튼 이 의심이 오늘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예감했다.

그녀가 그와 나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있나?

이름과 생김새까지 모두 닮은 남자를, 옛 연인을 지워 내고서 사랑하는 일이 가능은 한 것인가?

“티나,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봅니까.”

테리오드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렸다. 헛웃음이라도 짓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나마도 흐느낌에 그쳤다.

“나한테서 대체 뭘 기대하는 건데요. 어느 날 아침 기억을 되찾았다며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굴기라도 바라?”

테리오드가 사랑하는 여자는 그가 그로서 존재하지 않기를 바란다. 테리오드는 마침내 그 고통스러운 사실을 절감했다.

“내게 처음 입 맞추었을 때 부르짖었던 그 남자가 그였겠군요.”

“…….”

“처음 동침했던 밤 불렀던 이름도 그 사람의 것이었을 테고요.”

아스티나에겐 분명 변명할 거리가 많았다. 그녀는 테리오드에게서 테오도르를 보지 않기 위해 실로 무던히도 애써 왔다. 그러나 지금 테리오드의 앞에서 꺼낼 수 있는 말은 단 하나도 없었다. 지금까지의 노력은 이미 의미를 잃었다. 테리오드의 말이 사실이었다. 그와 처음 입을 맞추고 잠자리를 함께했을 때 그녀가 본 건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심지어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에게 흔들렸던 순간순간에, 과거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확답할 수조차 없었다.

“티나, 나를 본 적은 있습니까?”

“…….”

“말해 봐요. 나만을 사랑한 적이, 단 한 순간이라도 있습니까?”

끝내 테리오드의 음성에 물기가 배어 나왔다. 아스티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조차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뭐라고 말 좀 해 봐!”

테리오드는 참을 수 없었다. 그가 그만 언성을 높이며 왈칵 소리쳤다.

“그 똑똑하던 사람이 왜 이것만은 대답을 못 해, 나한테 미안해서? 그렇다면 차라리 평생 모르게 하지 그랬어!”

어째서 그녀는 이기적이게도 그에게 평생 이룰 수 없는 일을 바라는가.

테리오드는 테리오드였다. 그의 기억이 시작된 지점은 대공령의 저택이었고, 그보다 먼 과거의 일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아스티나는 그가 그녀의 옛사랑처럼 행동하길 바랐다. 아스티나가 테리오드에게 이런 잔인한 짓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증오한다던 그 남자를 그보다 아끼기 때문이다. 이젠 돌아오지도 않을 옛사람을 눈앞의 자신보다 소중히 그리기 때문이다.

어리석게도 테리오드는 그런 그녀에게 자신을 사랑해 보라고 제안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애정 없는 친절로 그러겠노라 답했다. 잠깐의 착각 속에서 테리오드는 행복했었다. 그게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몰랐을 때엔 분명 그러했다.

그러나 테리오드는 이제 그 노력이란 것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했다. 아스티나가 테리오드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말은 언뜻 다정하게도 들렸지만, 달리 말하면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노력은 노력일 뿐이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테리오드는 그 사실이 너무도 고통스러워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희망에 부푼 나머지 그는 뻔히 보이는 사실을 무시하려 애쓰고 있었던 거다.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여자를 껍데기라도 안아 보겠다고.

“테오, 그만…….”

아스티나는 무심코 과거의 연인과 통하는 애칭을 불렀다. 정말 눈앞에 있는 남자가 테리오드인지, 테오도르인지를 헷갈려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눈앞의 남자와 옛 연인은 비슷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둘 모두를 알고 있는 자라면 종종 혼동할 법도 했다.

테리오드 역시 단순한 말실수란 걸 알았지만, 그조차 참을 수 없었다. 테리오드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가 절규하듯 소리쳤다.

“난 테오도르가 아니야!”

“아니, 난…….”

“난 그 빌어먹을, 젠장. 그 개 같은 테오가 아니라고! 난 테리오드야, 당신의 그 빌어먹을 죽은 연인이 아니라!”

아스티나는 창백한 낯으로 그를 빤히 응시하기만 했다.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그들이 의미 없는 세월을 보내지는 않았다. 울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자 그녀 역시도 숨이 막혀 왔다.

테리오드가 끔찍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

“나한테 왜 희망을 줬어?”

“…….”

“어딘가 부족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끝끝내 당신을 붙잡고 있는 날 보는 건, 대체 어떤 기분이었지?”

테리오드는 눈을 질끈 감은 채 큰 숨을 들이켰다. 호흡이 가빴다. 그는 결국 말을 모르는 사람처럼 더듬거리고야 말았다.

“당신의 눈길, 입맞춤 그 관심 하나에 내가, 내가 얼마나…….”

아스티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그녀에게도 할 말은 남아 있었다.

“내가 그대를 귀애해.”

“부족해.”

테리오드가 다급히 대꾸했다. 그는 그런 스스로를 경멸스러워하면서도 구걸하듯 말을 이었다.

“너무도 부족해. 나를 파괴하는 짓인 것을 알면서도 이 질투를 멈출 수 없어.”

“……그대를 사랑해.”

“그대의 왕 테오도르보다 더?”

아스티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짓을 말하는 게 더 잔인한 일이라 여겼으니까. 그러나 테리오드는 그녀가 한 치 앞을 조그마한 손바닥으로라도 가려 주길 바랐다. 속여 준다면 차라리 속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롯이 그녀를 보는 눈에 물기가 어렸다.

반년간 살을 맞댄 여자가 속으로는 제 거죽과 똑같은 다른 남자를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나와 나눈 것은 대체 뭐였지?

기억의 연장선일 뿐인가?

“아스티나, 내게 거짓말을 해요.”

테리오드가 눈을 감았다. 바깥으로 밀려 나온 눈물이 길게 볼을 가로질렀다.

“제발 내게 거짓말이라도 해.”

-5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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