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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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테오와 티나
“또 싸우셨습니까?”
마티나는 서류를 살피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엘시어가 왠지 모르게 재수 없는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티나가 아무렇지 않은 척 마저 펜을 놀리며 대꾸했다.
“그분께서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시는 거지.”
“좀 봐주십시오. 궁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한지 아십니까? 참 두 분 다 어지간하십니다.”
“왕께서 왕답지 않으신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엘시어가 피식 웃다 말고 헛기침을 했다. 마티나는 왕의 연인이니 이런 수위 높은 농이 아무렇지 않을지 몰라도, 엘시어에게 테오도르는 까마득한 높이에 선 주군이었다. 당사자가 부재한 자리라고는 하나 무엄한 행동이었음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흥미와 존경은 별개의 문제다.
엘시어가 책상 앞으로 다가가며 허리를 숙였다. 그가 가까이에서만 들릴 크기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왜 싸우셨는데요?”
마티나에게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심려가 뒤섞인 표정으로 대답했다.
“결혼을 안 하시겠다더군.”
엘시어의 눈이 커졌다. 단단하게 끼고 있던 팔짱에서도 힘이 빠졌다. 엘시어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런…… 같은 남자 입장에서 보기에도 파렴치한 말씀을……?”
테오도르가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꾼이라는 사실은 측근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정통을 중시하는 대소 신료들이 소문을 막으려 무던히 힘을 쓴 탓에 둘의 연애는 그다지 공신력 있게 다뤄지지 않았으나, 테오도르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에게 이런 수식을 붙였다.
‘남자 망신은 다 시키는 간도 쓸개도 없는 인간.’
그에 마티나를 보태면 한 쌍의 바퀴벌레쯤 될까.
어쨌든 그런 테오도르가 마티나와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이유는…… 아니, 됐습니다.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엘시어가 겨우 혼란스러운 낯을 추슬렀다. 마티나의 상처를 후벼 파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뒤늦게 든 탓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테오도르가 마티나와 결혼하지 않는 게 현명한 선택인 건 맞았다. 마티나의 출신을 문제 삼는 귀족들은 얼마든지 있었고, 세력을 아우르기 위해서라도 국혼은 몹시 까다로운 조건을 거쳐 성사되어야 했다.
정통성 있는 핏줄과 부유함, 온화한 성격과 고이 지켜 온 정절까지. 마티나는 그중 어떤 거름망도 통과하지 못할 여자였다. 하지만 테오도르가 어떤 사람인가. 늘 제멋대로의 행선으로 모두를 놀라게 하는 남자가 아닌가.
언뜻 보기에 그는 왕좌라는 자리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이였다. 위엄은 공적인 자리에서만 겨우 내보이는 것이었고 대체로 불성실했다. 타고난 머리로 업무 처리엔 빈틈이 없었으나, 기실 그것이야말로 신하들의 가장 큰 불만이었다. 야근에 파묻혀 사는 신하들을 놀리듯 이곳저곳 잘도 쏘아 다니면서, 업무 시간만 되면 준비가 미비한 안건을 잘도 집어내기 때문이다.
테오도르는 하고 싶은 건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고 그 행동엔 대체로 운이 따랐다. 탑에 유폐돼 손발이 묶인 상태에서도 마티나라는 충신이 제 발로 굴러들어 왔던 일이 그를 증명한다. 젊은 왕은 속에 백 마리 뱀이 똬리를 튼 귀족들에게도 호락호락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런 테오도르가 유일하게 제 뜻을 굽힌 게 바로 사랑 앞에서였다. 그라면 온 세상 사람들이 반대해도 아랑곳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세기의 사랑도 결국은 현실 앞에서 무너지고 마는가.
엘시어가 안쓰러운 눈으로 마티나를 응시했다. 마티나가 동조하듯 혀를 찼다.
“그래, 이유는 안 듣는 게 나을 거야. 내가 직접 말하기도 낯부끄럽군. 의무보다는 제 기분이 우선이신 모양이신지 들어오는 혼담을 다 거절하고 있지 않은가.”
“예? 들어오는 혼담이라니 그게 무슨…….”
“도대체 후계는 어찌하실 예정인지 심려가 커.”
“아니, 잠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엘시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마티나가 엘시어와 눈을 맞추며 똑똑히 대답했다.
“아이 말일세. 명문가 소생의 정비를 들여 후계를 낳으셔야 할 것 아닌가.”
“……지금 제 귀엔 그 여자가 후작님 본인은 아니신 걸로 들리는데요,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습니까?”
“당연하지. 내가 어찌 왕과 혼인하겠나?”
마티나가 담백하게 대답했다. 엘시어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녀가 대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깐의 고민을 거친 엘시어가 다른 가설을 제시했다.
“혹시 저 모르는 사이 왕과 결별하셨습니까?”
“아니.”
“……그럼 지금 교제하는 남성에게 왜 다른 여자와 결혼하지 않느냐고…… 물으셨다는 겁니까?”
“아까부터 대체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마침내 엘시어가 마티나를 질린 눈으로 응시했다. 저 피도 눈물도 없는 여자가 결국은 이렇게 일을 쳤다. 그녀가 원체 무뚝뚝하고 정이 없는 성격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왕께서 화나신 건 두 분의 애정 전선에 돌을 던지는 신하들 때문이 아니셨군요.”
엘시어가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비꼼의 의미였다. 마티나가 딱 잘라 대꾸했다.
“어리광일 뿐이야.”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어리광입니까?”
“그가 왕의 자리에 앉아 있다면, 물론.”
그 답에 연인 간에 쌓아 온 정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누가 이 광경을 본다면 테오도르의 연인이 마티나가 아닌 엘시어라고 착각할지도 모른다. 엘시어는 답답한 마음에 그만 제 머리를 헤집었다. 그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후작님은 대체, 그런 말을 하시면서 정말 아무렇지 않으십니까? 출신이 문제라고는 해도 당신은 이 왕권의 공신이십니다. 밀어붙이면 불가능할 것도 없는 혼인이란 말입니다. 한데 왜…….”
“엘시어 경, 난 불임이야.”
엘시어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마티나는 잠시간 그런 엘시어를 빤히 응시했다. 엘시어는 도무지 이 상황에 내어야 할, 예의에 걸맞은 답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를 대신해 마티나가 깔끔하게 결론을 내 주었다.
“석녀는 왕가의 일원이 될 수 없지.”
그 말이 담고 있는 무게와는 어울리지 않게 대수롭지 않은 투였다. 그녀가 내놓은 정답엔 감정이 거세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 속엔 지난 세월 동안 부식되어 무뎌진 상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왈도에게 잡혀 있을 적 마티나의 상태가 온전치 않았다는 건 모두가 알았다. 아이를 품지 못하는 게 선천적인 원인 때문은 아닐 것이다.
엘시어는 마티나에게 무어라 더 말을 보탤 수도 없었다. 그는 사랑하는 남자의 품에 다른 여자를 들이밀어야 하는 기분을 몰랐다. 엘시어가 겨우 입을 열어 물었다.
“왕께서도 아십니까?”
“상관없다고 하시더군. 그러니 말이 통할 리 없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
“엘시어, 멍청하게 굴지 마. 후계자는 정비의 태를 빌려 나오는 게 맞아.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해 봤자 반쪽짜리에 그칠 것이고, 신하들은 후비를 들여서라도 후계자를 생산하라 노래를 부르겠지. 블란체는 후궁 제도란 게 있으니까. 어디 내 말이 틀린가?”
마티나가 말을 하다 말고 눈을 돌렸다. 뒤편에서 문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마티나의 눈이 미미하게 커졌다.
새로운 방문객이 삐딱한 투로 반박했다.
“멍청하고 사랑 많은 남자라 아주 미안하게 됐군.”
왕의 목소리에 엘시어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과연 불만 가득한 표정의 테오도르가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엘시어가 빠르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테오도르는 고개 숙인 신하에게 인사를 위해서인지 작별을 위해서인지 모를 손짓을 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군, 엘시어 경, 이제부터 사랑싸움을 할 예정이니 자리를 좀 비켜 주겠나?”
“예? 예, 물론입니다.”
엘시어가 재차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재빨리 문밖으로 나갔다. 나무 판이 문턱과 부딪는 소리가 소란스럽게 울렸다.
곧 방 안엔 둘만이 남았다. 테오도르가 고압적으로 턱을 들며 마티나의 앞에 와 섰다. 마티나는 꿈쩍도 않고 그런 테오도르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테오도르가 먼저 말했다.
“이제라도 취소하면 그간의 무례는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생각을 바꿔야 하는 건 왕이십니다.”
“계급장 떼고 붙어. 연인 간에 그런 말을 하는 게 진짜 맞는 일이라고 생각해?”
“왕이 되려고 그 고난을 거쳐 놓고 모든 걸 내팽개치겠다고?”
“안타깝게도 난 어렸을 때부터 욕심이 없었거든. 날 찢어 죽이려는 형제가 없었다면 그럭저럭 놀고먹으며 살았을 거야.”
“그거 자랑이군.”
마티나의 비꼼에 테오도르가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답답하다는 듯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난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따위 소릴 지껄이는 거야?”
“나야말로 당신이 왜 그렇게 아이처럼 구는지 모르겠어. 내 말이 그리 어렵나? 당신한텐 후계를 낳아 줄 하자 없는 여자가 필요해. 나 같은 석녀가 아니라.”
마침내 테오도르의 눈이 노기로 물들었다. 그가 가시 돋친 투로 되물었다.
“그대 말대로 내가 결혼을 한다고 쳐. 그럼 그 불쌍한 여자는 어떡하지? 당신은 또 어떻게 하고?”
“내 말은―”
“그래, 어디 그대가 하는 주장의 의미를 파헤쳐 볼까? 우선 나는 애정 하나 주지 않을 여자를 간판처럼 세워 놓고, 가끔 내킬 때 가서 씨를 뿌리는 거야. 아이를 낳고 나서는 전혀 들여다볼 일이 없겠지. 왜냐,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따로 있으니까. 출산으로 뼈가 삭은 정비를 버려두고 난 애인과 희희낙락 놀러 다니기만 하는 거야.”
“…….”
“이게 재밌나?”
마티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곧 그녀가 지지 않고 되받아쳤다.
“그걸 원하는 여자를 찾으면 돼. 왕의 아내가 아닌 왕의 모친이 되고 싶은 여자를.”
“자식을 권력의 매개로 생각하는 여자가 잘도 좋은 양육자가 되겠군. 정상적인 여자라도 남편의 냉대 속에 궁에만 갇혀 살면 머지않아 미칠 것 같은데.”
“냉대하지 않으면 되잖아.”
“아, 그러니까 나더러 처첩을 끼고 여색을 즐기라?”
마티나의 표정이 답답함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마티나가 반박하기도 전에 테오도르가 먼저 싸늘하게 말을 잘랐다.
“미안하지만 난 그렇게 못해. 만일 내가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면 그녀만 볼 거야. 난 분산된 총애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빌어먹게도 잘 알고 있거든.”
정실과 사랑하는 여자를 따로 두었던 선친의 행동은 결국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마티나에게서 뒤늦게 아이를 볼 일이 없다고 해도, 테오도르가 그녀만을 아낀다면 자연히 정실과 그녀의 아이는 홀대당할 것이다. 비인간적인 행동일뿐더러 비의 친정 가문이 그 경우 없는 상황을 가만두고 볼 리 없었다.
“그럼 그렇게 해.”
홧김이었지만, 그 말을 내뱉자마자 마티나도 실수였다는 걸 깨달았다.
테오도르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 들었다. 테오도르가 마티나를 노려보며 되물었다.
“내가 그대와 헤어지고 다른 여자를 품어도 괜찮다고?”
“…….”
“말해, 티나. 그 잘난 입으로 다시 지껄여.”
마티나는 다른 여자를 품으란 말을 다시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제 실수를 정정하지도 않았다. 감정이 격해져 뱉은 말이라고는 하나 그것이 나라에 있어 가장 이상적인 결말임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붉게 달아올랐던 그의 분노가 곧 푸른빛을 띠었다. 테오도르가 싸늘하게 경고했다.
“당신 지금 크게 실수한 거야.”
그가 돌아섰다. 마티나는 그를 붙잡지 못했다.
* * *
엘시어의 희망과 다르게 궁의 분위기는 더욱 냉랭해졌다. 공석에서 만나도 테오도르는 마티나와 말 한번 섞는 일이 없었다. 냉전이 길어지며 점차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번져 갔다. 둘의 불화설은 테오도르가 뻔질나게 드나들던 마티나의 업무실에 완전히 발길을 끊음으로써 정점을 찍었다.
마티나와 테오도르의 결별은 대체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되었는데, 특히나 딸 가진 부모들에게 그러했다. 이들은 환희에 젖어 국혼을 주선하기 위해 문턱이 닳도록 알현실에 드나들곤 했다.
“……안녕하시오, 후작.”
마티나는 길을 걷다 말고 멈춰 섰다. 그녀를 붙잡은 것은 희끗한 머리칼의 노인이었다. 마티나는 상대에게 고고하게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스카이라 공작님.”
스카이라 공작은 마티나도 익히 알고 있는 인물로, 테오도르와 마티나의 만남을 깎아내리는 데 대단한 열정을 할애해 온 이였다. 그 이유는 공작의 가족 내력을 들여다보면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
공작에겐 말년에 얻어 금지옥엽으로 기른 딸이 하나 존재했다. 아비의 권세에 힘입어 사교계의 꽃으로 성장한 아리따운 공녀는 그 나이 대의 영애들답지 않게 차일피일 혼인을 미루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찬 남자는 이미 임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테오도르는 굉장한 미인이었고 무려 한 나라의 왕이었다. 여인들이 마음속에 연심을 품게 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이상형을 발견한 공녀의 눈에 고만고만한 혼담이 마음에 찰 리 없었다. 딸의 혼기가 아슬아슬한데 왕의 곁엔 천한 집시가 질기게 달라붙어 있으니 공작으로선 뒷목을 잡을 일이었다. 마티나를 향한 스카이라 공작의 감정을 명명한다면 아마도 증오에 가까우리라.
마티나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좋은 의도로 말을 건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나 스카이라 공작은 불쾌한 음성을 내었다.
“알현실까진 어쩐 일이오?”
“그저 지나치던 길입니다.”
스카이라 공작이 다 들리도록 콧방귀를 뀌었다.
“누군가와 마주치길 의도한 게 아니고?”
체통에 맞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마티나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노인들은 때때로 아이처럼 유치해지기도 하는 법이다. 그 파급력은 결코 미성년의 그것이 아니라는 게 조금 문제였지만.
“전하께서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 모두가 안도하고 있는 참이오. 한데 그대가 이리 왕의 눈에 띄어 마음을 어지럽혀서야 되겠소?”
이어 스카이라 공작이 검지를 들어 경고하듯 흔들었다.
“후작, 잘 들으시오. 그대가 왕께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아서는 안 될 것이야. 다 죽어 가는 천출을 살려 작위를 준 것만으로도 감읍해야 마땅하지.”
물론 마티나는 늙은이의 노망을 그냥 인내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픽 웃음 지었다.
“글쎄요, 제가 기억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말씀을 하시는군요. 다 죽어 가는 남자를 왕좌로 이끈 인물은 바로 공작님의 눈 앞에 있지 않습니까?”
“이…… 천한 계집이 주제도 모르고……! 어느 안전이라고 그따위 말을 지껄이는 게야!”
“어느 안전이라…… 기둥 뒤에서 떨며 소변을 지리던 추한 늙은이가 하나 보이긴 합니다만.”
마티나의 비웃음에 스카이라 공작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고위 귀족인 그가 왈도가 죽었던 무도회에 불참했을 리 없다. 마티나가 왕의 목을 자르고 근위대를 베기 시작하자 객들은 썰물처럼 밀려 나갔다. 발 빠른 이들은 도망에 성공했지만 테오도르가 회장의 문을 잠그자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젊은이들의 걸음을 따라잡지 못했던 스카이라 공작 역시 낙오자 무리에 포함되었다.
마티나는 스카이라 공작이 기둥 뒤에 숨어 기도문을 외우던 모습을 기억했다. 그의 바짓단을 적셨던 노란 물줄기까지도. 아마 그게 스카이라 공작이 마티나를 싫어하는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그녀는 공작의 치부를 알고 있었으니까.
마침내 그가 짚고 있던 지팡이를 흔들며 노성을 질렀다.
“이런 무엄한……!”
“공작 각하, 그쯤 하십시오. 왕이 가까이 계신 자리에서 소란을 벌이실 작정이십니까?”
스카이라 공작은 반사적으로 성을 내려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마티나의 뒤편에서 엘시어가 걸어오고 있었다. 분하긴 했으나 명문가 태생의 관료가 등장하자 스카이라 공작도 더 언성을 높일 수 없었다.
공작이 짓씹듯이 중얼거렸다.
“어디 천출의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스카이라 공작은 마티나를 노려보며 지나쳤다. 마티나는 여유롭게 입꼬리로 호선을 그림으로써 그의 기분을 완전히 망쳐 주는 걸 잊지 않았다.
곧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완전히 멀어졌다. 공작의 부재를 확인한 엘시어가 검지를 관자놀이 주변에 돌리며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 늙은이는 언제 관에 들어간답니까?”
“저렇게 정정하니 10년은 더 살겠지.”
“빨리 화해 안 하시면 승냥이들이 더 기세등등해질 겁니다.”
“잘된 일인데 왜 그러나? 스카이라 공작이 좀 인물이 별로이긴 해도 공녀는 꽤 교양이 있다네.”
눈이 벌게진 중매쟁이들을 보고도 마티나는 미미한 반응을 보였다. 그녀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엘시어를 앞서갔다. 엘시어가 지지 않고 마티나를 따라붙으며 약 올리듯 물었다.
“이대로 전하께서 혼인하셔도 상관없다 이겁니까? 염원이 이루어지셨으니 아주 기쁘시겠습니다.”
“목적한 일을 반만 이뤘을 뿐이지.”
“이걸 어쩌죠. 곧 나머지도 다 성취하실 것 같은데요.”
엘시어의 빈정거림은 스카이라 공작에 이어 마티나에게까지 향했다. 연인 관계로 판단하면 제 쪽이 죄인인 걸 알았기에 마티나는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그녀가 엘시어를 흘끗 돌아보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멜라니 후작 아시잖습니까. 최근 왕께서 그 딸과 혼담을 주고받으신 모양입니다. 오늘 후작께서 딸을 데려와 선보이기로 했다던데요.”
마티나의 걸음이 멎었다. 밀폐된 복도를 벗어나 후원 쪽으로 트인 길목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당당히 받아치긴 했어도 스카이라 공작의 모욕 주는 말이 기분 좋게 들렸을 리 없었다. 풀 내음이 섞인 바람을 맞자 그제야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마티나가 수풀을 넘겨보며 덤덤히 물었다.
“언제 도착한다고?”
“오늘 오후쯤이라고 들었습니다.”
멜라니 후작은 먼 지방에 거주하는 인물로 수도에 올라오는 일이 잦지 않았다. 당연히도 그의 여식들 역시 사교계에 얼굴을 비친 역사가 없었다. 잠시 골똘하게 고민하던 마티나가 말했다.
“계속 영지에서 지냈다면 수도 물정을 모를 테니, 모범이 될 만한 영애들을 불러 소개의 자리를 만들어야겠군.”
마침내 엘시어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마티나를 응시했다. 저것이 아마 마티나의 결정을 향한 사람들의 대체적인 반응이리라. 애인을 종마 취급하는 여자라니, 아무리 테오도르라도 정이 떨어졌을 게 분명했다.
마티나는 그의 마지막 말을 회고했다.
‘당신 지금 크게 실수한 거야.’
마티나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테오도르와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면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됐다. 하지만 마티나는 이렇게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나 사이에 미래가 있는가?’
마티나는 자신이 욕심낼 수 있는 선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마티나가 테오도르와 어울리고도 아직까지 권력의 풍파 속에 휘말리지 않았던 건 그와의 혼인을 바라지 않아서였다. 후계를 출산하지 못하는 정비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마티나는 모르지 않았다. 아이 소식을 들려주지 못하는 정비에게 어떤 종류의 모욕이 돌아오는지 역시도.
장성한 딸을 가진 귀족들은 호시탐탐 후궁전으로 여자를 밀어 넣으려 안간힘을 쓸 것이다. 그리고 왕 앞에서 그의 연인을 깎아내리는 일을 서슴지 않을 테지. 테오도르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 모든 흠집을 감당하기에, 마티나는 스스로가 소중했다.
마티나는 테오도르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고 비혼주의라는 말은 왕이라는 직책과 결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테오드르가 계속 왕답길 바란다면 마티나는 이쯤 해서 그의 인생에서 빠져 주어야 했다. 테오도르도 그 사실을 깨달아 다시 그녀를 찾지 않는 것이리라.
이별은 갑작스러웠지만 곧 담담해졌다. 아니, 현실감이 없다는 말이 맞을까. 그의 품이 그리운 건 사실이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왕은 언제나 그녀가 보고 싶으면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니까. 그와의 행복했던 추억을 가슴에 간직한 채 긴 짝사랑을 이어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위한 결정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차분해지기도 했다.
마티나가 이상적인 말들로 재차 엘시어를 타이르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 둘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안녕하세요, 마티나 후작님.”
처음 듣는 가냘픈 목소리였다.
마티나는 또 누가 저를 붙잡나 하여 후원 쪽으로 몸을 돌렸다. 꽃 무리 앞에 선 여인이 발간 뺨을 한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사랑스러움이 온 구석에 묻어난 여자였다. 친근한 인사치고 마티나의 기억에 없는 인물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나를 아는가?”
“알다마다요. 어떻게 후작님을 모르겠어요?”
마티나의 물음에 여자가 반색하며 다가왔다. 그녀는 창틀에 손을 올리며 마티나를 향해 까치발을 들기까지 했다. 부담스러운 간격에 마티나는 저도 모르게 상체를 뒤로 물렸다. 그에 여자도 당황하여 제자리에 멈춰 섰다. 무례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는지 그녀가 허둥지둥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너무 급하게 인사를 드렸네요. 다음에 차라도 함께했으면 좋겠어요. 후작님의 영웅담을 들을 기회를 주시면 무척 기쁠 것 같아요.”
그녀가 뺨을 감싸며 황급히 도망쳤다. 순식간에 멀어진 여자를 보며 마티나가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기소개도 않고서.”
지켜보고 있던 엘시어가 슬쩍 마티나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
“그래서 만족하십니까?”
“뭐가 말인가?”
“저분이 바로 그 소문의 왕비감이십니다.”
마티나는 다시 눈을 돌려 여자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어쩐지 궁에서 간만에 드레스 차림을 보았다고 했다.
마티나는 한동안 멀어지는 레이스 자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가슴이 이상하게 술렁였다. 마티나는 테오도르의 옆에 선 여자의 모습을 상상해 보려고 했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시도만으로도 몹시 기분이 상했기 때문이다.
“그랬군.”
짧게 중얼거린 마티나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엘시어 앞에서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간 아마 평생의 놀림감이 될 것이다.
마티나가 반응하지 않자 엘시어는 그녀와 걷는 내내 간헐적으로 혀를 찼다. 그 모습이 몹시도 얄미워 결국 마티나는 그의 엉덩이를 걷어차 주었다.
* * *
‘여기, 이리 와 봐.’
뒤편에서 웬 소곤거림이 들려왔다. 마티나는 무의식적으로 검을 뽑아 들다가, 문득 그 음성이 몹시도 낯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티나는 조용히 수풀을 헤쳐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넘어갔다.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숨은 건 침입자가 아닌 그녀의 왕이었다. 태평하게 누워 있는 자세로 미루어 보아 늘어지게 낮잠이라도 즐긴 모양이었다.
마티나가 어이없다는 듯 그를 불렀다.
‘전하?’
회의 전 갑자기 사라진 왕 때문에 모두가 궁을 뒤지고 있던 참이다. 그 소란스러운 와중에 이곳에 홀로 쥐 죽은 듯 숨어 있었단 말인가.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마티나의 물음에 테오도르가 미간을 좁혔다. 그 모습이 짜증스럽게 느껴지기보다는 감탄을 자아내는 점이 참으로 기이했다. 몇 번을 봐도 참으로 그림 같은 생김새였다. 마티나는 내심 감탄을 숨기며 왕의 대답을 기다렸다.
곧 테오도르가 옅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스카이라 공작이 또 내게 딸을 소개하려 하지 뭔가.’
‘공녀님이 그렇게 아름다우신데 뭐가 불만이십니까?’
‘성이 마음에 안 들어.’
‘풉.’
마티나는 무의식적으로 웃음을 토해 냈다가, 그대로 표정을 굳혔다. 의외의 반응에 테오도르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같은 사람을 싫어하는 이들의 동질감은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이들의 것보다 특히 굳건한 법이다. 테오도르가 동지의 냄새를 놓치지 않고 되물었다.
‘웃었지, 방금?’
‘아닙니다.’
마티나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테오도르는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선선히 물러섰다. 대신 그는 훨씬 인자해진 태도로 마티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불편하게 서 있지 말고 이리 가까이 오지 그러나.’
마티나는 왕을 찾는 이들에게 고자질을 하러 가는 대신 잠자코 그의 옆에 앉았다. 왕보다 높은 눈높이로 있는 것은 다소 무엄한 느낌이라, 망설임 끝에 그녀는 잔디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판단이 틀리지 않았는지 테오도르에게선 질책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는 무슨 자신감으로 자신의 위치를 알린 걸까. 마티나가 좀 더 원칙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테오도르는 지금쯤 그를 찾는 신하들에게 끌려가야 했을 것이다.
‘왜 절 부르셨습니까? 제가 전하의 비밀 장소를 소문내고 다니면 어쩌시려고요.’
‘혼자 있으니 심심해서 말이지.’
‘전 그리 재미있는 사람이 아닙니다만.’
‘일종의 동지애라고 해 두지. 그대도 이 궁에서 피하고 싶은 사람이 많을 텐데, 앞으로 사양 말고 이 자리를 빌려도 되네.’
마티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테오도르가 그런 그녀를 잠시간 빤히 응시했다.
‘웃을 줄도 아는군.’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다.’
‘생과 사를 함께한 것치고 그대와 난 서로를 잘 모르지. 그래서 그대와 이렇게 듣는 귀 없는 자리에서 대화해 보고 싶었어.’
‘전하께서 부르셨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했을 텐데요.’
‘그런 제안을 하는 걸 주변에서 듣는다면, 이상한 오해를 할 수도 있지 않겠나.’
마티나는 그의 판단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의 측근들이 왜 그따위 무엄한 오해를 하겠는가.
마티나는 자신에게 따라붙는 소문들을 모르지 않았다. 무려 테오도르의 정적인 왈도에게 더럽혀진 천한 집시다. 왕에게 직접 작위를 받아 측근이 되었다고는 해도 마티나의 입지는 아직 위태로웠다. 그녀의 무력을 눈앞에서 본 이들도 대단하다며 칭송하기보다는 마녀의 핏줄이라 수군거리기 바빴다. 마티나에게 거리낌 없이 접근한 건 엘시어라는 피델리오가의 애송이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마티나는 굳이 자신을 낮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녀의 잘못이 아닌 일에 일일이 민감히 반응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마티나는 복수를 위해 인내했고 결국 걸맞은 결과를 얻었다. 그녀의 인생을 살아 보지 않은 자들의 수군거림은 재고할 가치도 없었다.
따라서 마티나는 그저 왕의 의도를 물었다.
‘제게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궁금증이었지. 왜 나를 선택했나?’
그의 질문은 몹시 포괄적이었다. 마티나에겐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테오도르가 탑에 갇혀 있을 때와 그가 승리하여 세를 얻었을 때. 마티나는 전자를 답했다.
‘복수를 위해서였습니다.’
왕이 궁금해했던 건 후자 쪽인 모양이었지만.
‘복수는 이미 끝났잖나.’
마티나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왕을 만족시킬 만한 답변이 그녀에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은 그녀를 축출하려 한다면 목을 베겠다는 무엄한 말을 들었음에도 온화하게 넘겼던 남자다. 그랬던 그가 이제 와 마티나의 낭만 없음을 크게 질책할 것 같진 않았다.
‘……솔직히 말해도 됩니까?’
‘말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왈도를 죽인 마티나에겐 아주 많은 선택지들이 생겼고, 동시에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그녀가 바랐던 미래는 화마에 불태워진 지 오래였다. 사랑하던 이들을 모두 잃은 자리에서 마티나는 새로운 목표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텅 빈 고향으로 내려가 죽은 이들의 그림자를 밟는 대신 모험을 택했다.
‘원하는 것은 없으나, 왕처럼 큰 뜻을 가지고 있는 이와 함께한다면…… 저도 언젠가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했습니다.’
침묵하던 테오도르가 오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건 꼭 신자의 말처럼 들리는군.’
‘제겐 그들과 같은 대의가 없습니다.’
‘성인들의 특징이 뭔지 아나? 바로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야.’
일면만으로 판단하기에 테오도르가 택한 비교군은 몹시 동떨어진 것이었다. 권력자란 남들과는 다른 혀를 타고나는 법일까, 왕에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참으로 그럴듯하게 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대는 그대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사람이 될 거야. 그럴듯한 이유만 찾는다면 말이야.’
테오도르는 비어 있는 그녀에게서 무엇을 발견한 것일까. 홀로 남은 그녀에게 당최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단 말인가. 왕의 밑에서 받은 것을 간수하는 것만도 벅찬 상황이거늘.
마티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른편 끝에 있던 커다란 구름이 어느새 머리 위에 와 있었다. 본래 마티나는 처리할 일이 있어 이동하던 참이었다. 유예는 잠깐으로, 이제 그녀를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마티나는 자리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왕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테오도르에게 반신반의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께서는 저를 믿으십니까?’
‘본인은 모르는 모양이지만, 그대는 지나치게 빛나는 사람이거든.’
굳이 비유하자면 자신은 어둠에 대유 되는 사람이라고, 마티나는 생각했다. 스스로 찾아야 할 대답을 타인이 내어 주길 바라는 미련한 짓을 할 뻔했다. 마티나는 비식 웃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뒤편으로 비친 햇볕에 그녀의 정수리가 하얗게 물들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테오도르의 입가에 천진한 미소가 감겼다. 그를 피해 물러설 짬도 없었다. 테오도르가 손을 뻗어 마티나의 머리카락 끝을 부드럽게 당겼다.
‘이것 봐, 이렇게 반짝이는데.’
마티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가, 화들짝 놀라 그만 그의 손을 쳐 냈다. 그러고는 그 무엄한 행태에 스스로 놀랐다. 그녀는 왕에게 제대로 된 인사조차 남기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다.
제 뺨이 머리칼과 같은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서야 알았다.
“후작님은 머리 색이 정말 특이하신 것 같아요.”
마티나는 붉게 핀 꽃송이를 들여다보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그림 같은 정원엔 양산을 쓴 인형 같은 영애가 마주 앉아 있었다. 이전처럼 숨겨진 장소가 아니라 사용인들 여럿을 대동하고 있는 자리였지만 주변을 둘러싼 녹빛만은 같았다.
상념에서 벗어난 마티나가 가만히 대답했다.
“그런가요.”
“네. 선명한 적발인데 햇빛을 받으니 분홍색으로 반짝여서, 꼭 후작님처럼 강인해 보여요.”
그리 말하며 그녀는 아이처럼 맑게 웃었다. 마티나는 조용히 상대를 향해 방향을 고쳐 앉았다. 그녀와의 티타임은 테오도르와의 추억을 떠올리기에 적합하지 않은 때였다.
테오도르와 결별하며 비어 버린 마티나의 주말엔 의외의 객이 들어찼다. 아니, 의외라기보다는 파격적이라고 표현해야 맞을까. 마티나의 앞에 앉은 여자, 멜라니 후작의 여식인 샬럿 영애는 무려 테오도르의 새 연인 후보였으니 말이었다.
지난번 그녀와 마주친 이후, 머지않아 마티나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현실에 당면해야 했다. 테오도르가 샬럿 영애를 마음에 들어 해 궁에 머물 곳을 내어 주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샬럿 영애는 당초 예정되었던 기일보다 몇 배는 늘어난 수도 나들이에도 빠르게 적응했다. 그녀는 원래 수도에서 지내 왔던 것마냥 자연스럽게 여러 유명 장소를 돌아다녔다. 다만 아비의 염려 때문인지 사교계에만은 출입하지 않았다. 아마 그의 아비는 노련한 감각으로 자신의 딸이 낱낱이 분석되리란 사실을 예감했으리라.
아버지의 염려를 이해한 것인지 샬럿 영애는 나이보다 어른스럽게 굴었다. 그녀는 또래 영애들과 교류하는 데는 큰 관심이 없어 보였고, 따라서 아비의 과한 간섭에도 크게 답답해하지 않았다. 대신 샬럿 영애는 다소 특이한 상대에게 호감을 드러냈는데, 그게 바로 마티나였다.
마티나로서는 이것이 시골 방식의 신종 괴롭힘은 아닌지 몹시 의심스러웠다. 결혼 상대로 점찍어진 남자의 전 애인을 찾아와 피를 말리는 행태를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는 없었다. 샬럿 영애가 계속해서 청해 오는 만남은 마티나를 다소 신경질적으로 만들었다.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기에 마티나는 꾸준히 샬럿 영애에게 여가 시간을 내어 주고 있었다.
마티나는 샬럿 영애의 순수한 얼굴을 보며 고민에 잠겼다. 혹시 그녀는 테오도르와 자신이 연인 관계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일까?
가능성은 있었다. 테오도르의 세력은 대개 격에 맞지 않는 주군의 연애 상대를 숨기고 싶어 했다. 아버지가 따로 언질해 준 것이 없고, 수도에 와서 어울린 이도 없다면 그 무지함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막 촌에서 상경한 영애였으니까.
덕분에 마티나는 그녀를 속이고 있는 듯한 복잡한 감정을 느껴야 했다. 테오도르와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도, 이대로 모른 척 그녀와 어울리는 것도 이상했다.
마티나의 고뇌를 아는지 모르는지 샬럿 영애가 뺨을 붉히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제가 고향에 있을 적, 모두가 레타 후작님의 머리카락은 꼭 핏빛을 닮았다고들 이야기했어요.”
“제 소문이 거기까지 닿았습니까?”
“워낙 유명하시잖아요. 단칼에 상대의 목을 벨 수 있는 분이라고 말이에요. 저희 영지는 순박한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라 후작님을 두려워했지만 전 조금 다르게 생각했어요. 피가 쏟아지는 광경에 적발이 함께 휘날리면 얼마나 황홀하게 보일지 궁금했거든요.”
마티나는 그녀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했다. 마냥 순수하게 보았는데 핏빛 궁정에 적응할 담은 있는 인물이었다.
샬럿 영애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정말 단번에 장정의 목을 베실 수 있나요?”
“……이런 자리에서 드릴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지 말고 말씀해 주세요. 단신으로 무도회장에 대기하고 있던 근위대를 모두 물리치셨다는 게 사실인가요?”
연애담이 아니라 반역 쪽에 더 흥미를 보이다니, 여러모로 특이한 성격이었다. 마티나는 문득 대답을 꺼리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내심 레이디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 고민이 되었던 탓이다.
마티나가 어렸을 적, 얼큰하게 취한 어른들은 좀도둑의 손을 베었던 이야기를 영웅담처럼 들려주곤 했다. 레타 무리 사이에선 여자들끼리 칼과 싸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벌써 자신도 블란체의 분위기에 익숙해진 것일까. 그도 그럴 것이 마티나가 알아 왔던 집시들과 블란체의 귀부인들은 완전히 종이 다른 듯 보였다. 우선 검을 다루는 여자가 없었을뿐더러, 그에 관심을 가지는 이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네들의 마른 몸과 창백한 얼굴을 보면 아예 무술을 연마할 만한 신체적 여건이 되지 않는 듯도 보였다.
무슨 차이인가 기이하게 여긴 것도 잠시, 마티나는 왕궁 연회에 참가하며 처음 드레스 차림을 해 보고서야 그 이유를 절절히 깨달았다. 레이디들은 모두 허리에 올가미를 매고 있었던 것이다.
코르셋을 걸친 순간 마티나는 귀족 여자란 원죄를 품고 사는 존재가 아닌가 진지하게 의심해야 했다. 교수대에나 걸려 있어야 할 물건이 왜 죄 없는 사람들에게 쓰이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가쁘니 몸을 단련하는 일에 관심을 두지 못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결국 마티나가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왈도는 적이 많았기 때문에 내궁보다는 외궁을 방위하는 데 더 힘을 썼습니다. 안에 남은 건 많지 않은 숫자였죠. 현왕께서 문을 잠그고 바깥을 맡아 주시기도 했고요.”
“어머, 환상의 호흡이셨군요. 그때 상대했던 근위병들이 총 몇 명이었나요?”
“스물 정도였습니다. 왈도는 포악한 성격이었기에 진짜 충정을 다하는 병사도 많지 않았습니다. 열을 베었을 즈음, 대부분은 회장 밖으로 도망쳤죠.”
“소문으론 백 명이나 되는 병사를 처리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원래 소문이란 과장되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마티나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차를 홀짝였다.
그때 멀리서 시녀 하나가 걸어왔다. 언뜻 보기에도 걸음이 다급해 보였다. 마티나의 뒤로 온 시녀가 귓가에 당황스러운 소식을 고했다.
“후작님, 전하께서 방문하셨다고 합니다.”
마티나의 움직임이 조용히 멎었다. 몸을 굳힌 것도 잠시, 마티나는 천천히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자신을 만나러 왔을 리는 없으니 아마 샬럿 영애를 찾아온 것이리라. 당황하지 않고 샬럿 영애에게 왕의 방문을 전함으로써, 마티나는 의도치 않게 자신이 연기에 소질이 있다는 걸 깨우쳤다.
“샬럿 영애, 전하께서 찾아오신 모양입니다.”
“어머, 제가 늦으니 마중 나오셨나 봐요. 다정하셔라.”
샬럿 영애가 발개진 뺨을 감싸며 말했다. 주변을 살피던 그녀가 마티나에게로 몸을 숙였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 오늘 전하께서 수도 구경을 시켜 주신다고 했는데…… 전하는 항상 아버지랑 함께 뵀었거든요. 남자랑 단둘이 있는 건 처음이라 너무 떨려요.”
마티나는 샬럿 영애의 말에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그만 얼굴을 일그러뜨릴 뻔했다. 단둘이 시간을 보낸 적이 없다는 말에 기뻐해서 무엇하랴. 직접 등을 떠밀어 떠나보낸 남자이거늘.
마티나는 잠자코 샬럿 영애와 마주 앉아 테오도르를 기다렸다. 왕이 이곳으로 오고 있는 상황에서 먼저 자리를 뜰 수는 없었다.
곧 검은 머리칼이 멀리서부터 눈에 띄었다. 그 칠흑 같은 색은 낮의 자연 속에서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테이블로 다다른 테오도르는 마티나에게 턱을 까딱여 짧게 인사하고는, 곧장 샬럿 영애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만 갈까.”
“어머, 후작님과도 이야기를 좀 나누셔야죠. 갑자기 회의가 생겼다고 하셔서 제가 얼마나 심심했는데요. 후작님께선 외로운 절 구해 주신 고마운 분이시랍니다.”
사용인들도 주인인 마티나만큼이나 테오도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파악하지 못한 기색이었다. 눈치를 보던 하녀들이 결국 의자를 하나 더 공수해 왔다. 테오도르는 마지못한 표정으로 자리에 착석했다. 테오도르가 도착하자마자 그들을 내보낼 생각이었던 마티나는 묘한 기분이 되었다.
이상한 조합이었다. 연인이었던 남녀와 남자의 새로운 여자. 비극도 희극도 아닌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다.
불편한 건 피차 마찬가지였는지 테오도르가 샬럿 영애를 재촉했다.
“어서 가 보는 게 좋겠군. 후작도 모처럼의 주말을 방해받고 싶진 않을 것 아닌가.”
“어머, 그런가요? 후작님, 혹시 바쁜 일이 있으세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저도 두 분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군요.”
마티나의 대답에 샬럿 영애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달아오른 뺨에 손등을 대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나가기 전에 잠시 화장 좀 고치고 올게요.”
애교 있는 인사와 함께 샬럿 영애가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마티나는 그녀가 떠나자마자 고개를 돌려 테오도르의 얼굴을 응시했다. 미세하게 휘어진 그의 입꼬리는 여전히 고혹적이었다. 별생각 없이 하는 행동으로도 타인의 넋을 빼놓는 작자다. 저 잘난 면상에 누가 거부감을 느끼랴. 샬럿 영애가 그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대도 이상하지 않았다.
마티나가 불만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인편을 통하셨다면 어련히 파장했을 텐데요. 여기까진 어인 일로 찾아오셨는지요.”
테오도르에게서 무감한 눈빛이 돌아왔다. 그가 손을 휘저어 사용인들을 물렸다. 왜 그러나 했더니, 둘만 남은 자리에서 테오도르가 꺼낸 말은 아플 만치 직설적이었다.
“그대가 내 피앙세에게 이상한 말이라도 할까 겁이 나서 말이지.”
마티나는 테오도르의 말에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앙세라니. 서로 간을 보고 있는 상황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벌써 혼약이라도 맺었단 말인가. 마티나가 통보한 이별에 대한 반발심 때문일까, 결혼 결정이 지나치게 빨랐다. 지금은 마티나와 헤어지고 얼마 되지도 않은 시기였다. 국혼이 이루어지는 건 나중이 되리라 여겼는데 안이한 판단이었던가.
입가가 굳는 게 느껴졌지만, 마티나는 곧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녀가 담담히 대답했다.
“그럴 일 없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잘 어울리십니다.”
“축하 고마워, 아주 좋은 여자더군.”
“그녀가 마음에 드십니까?”
테오도르는 말끔히 웃어 보였다. 왜 아니겠냐는 듯이.
마티나는 스스로가 구차해 보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질문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결혼하실 겁니까?”
테오도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오른손에 턱을 괴며 대답했다.
“그래, 조건이나 뭘 따져 보나 아주 괜찮은 여자야. 좋은 왕비가 될 것 같아.”
마티나는 그만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은 ‘좋은 왕비’라는 역할에 도무지 들어맞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럴 의도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음에도, 테오도르가 입에 담은 그 단어는 마치 그녀를 비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테오도르가 마티나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런 건 왜 묻는지 모르겠군. 이제 와 질투라도 하나?”
“……이리 쉽게 마음이 바뀌실 줄은 몰라, 조금 당황해서 그렇습니다.”
“그대가 주선한 결혼이나 마찬가지니, 축하 선물은 좋은 것으로 준비하도록 해.”
테오도르의 말에 마티나는 무의식적으로 입을 벌렸다.
결혼 선물? 지금 저한테 결혼 선물을 달라는 건가?
“왕께선 마음이 참으로 가벼우신가 봅니다.”
생각도 거치지 않고 내뱉은 말이었다. 마티나가 제 충동을 주워 담기도 전에 테오도르가 어이없다는 듯 반문했다.
“뭐?”
이어 그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되물었다.
“그거, 내가 해야 할 말 아닌가?”
“전 옳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국혼에 당사자의 의지가 개입한 역사가 어디 흔하던가요.”
“그래, 그래서 그대가 원하는 대로 했잖아. 대체 뭐가 문제야.”
“이른 기간은……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말마따나 제가 떠민 혼처니까요. 하지만 굳이 이곳까지 찾아오신 의도는 좀 불순하게 느껴지는군요. 새로운 약혼자와 저, 전하 셋이 마주 앉아 있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랍니까? 이건 예의의 문제예요. 저뿐만 아니라 샬럿 영애에게도요.”
“그것참 당황스럽군. 난 그대와의 이별에서 그 예의란 것, 구경도 못 해 본 걸로 기억하는데.”
“…….”
“티나, 그대야말로 날 정말 사랑하기는 했어? 그래서 그런 결정을 내렸나?”
마티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테오도르가 온기 없는 눈으로 마티나를 쏘아보았다.
“그대가 포기한 사랑이라고 해서 내 몫까지 별것 아닌 것처럼 취급하진 마, 자격 없는 사람한테 듣기엔 꽤 불쾌한 말이거든, 그거.”
“내가 어떤 마음으로 당신을 보냈는데.”
마티나가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테오도르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잠시간 마티나를 응시했다.
분위기가 바뀌는 건 갑작스러웠다. 테오도르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상 위를 짚었다. 거친 움직임에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파열음을 냈다. 테오도르가 마티나에게로 몸을 숙이며 그녀의 턱을 당겼다. 그대로 입술을 삼켜 오려는 듯이.
이성으로 판단하기도 전에 몸부터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짧은 순간, 마티나는 그를 밀어내는 대신 이끌리듯 턱을 들었다.
그러나 입술이 부딪치기 직전 테오도르는 멈춰 섰다. 가쁜 숨소리가 온통 주변을 울렸다. 서로에게 닿아도 이상하지 않은 거리에서, 테오도르가 눈을 맞추며 속삭였다.
“얼마나 대단한 결심이었기에.”
“…….”
“왜 날 안 밀어내?”
마티나는 테오도르의 입술을 내려다보았다가, 그대로 떨리는 눈을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푸른빛 눈동자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를 살피기 위하여.
애석하게도 탐색을 시도한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먼저 간파당한 것도, 그녀 쪽이었다.
테오도르가 빳빳하게 힘이 들어간 마티나의 어깨에 흘긋 시선을 주었다. 그의 입꼬리가 느슨하게 휘어졌다.
“사실 흔들렸지?”
마티나는 입술을 깨물며 그의 손을 쳐 냈다. 테오도르는 의외로 선선히 숙였던 몸을 세웠다. 마티나가 입술을 짓씹으며 그를 쏘아보았다.
“나한테 왜 이래.”
“날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쳐 놓고, 얼마나 잘살지 궁금해서.”
테오도르가 스치듯 웃으며 대꾸했다. 비틀린 자세로 선 그는 어쩐지 위태로워 보였다. 평정을 되찾으려는 마티나를 자극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방금, 안 흔들렸어?”
테오도르가 조용히 마티나를 내려다보며 되물었다. 낮은 음성이 유혹처럼 귓가에 감겼다. 마티나는 이를 악물었다.
“전혀.”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흔들려 줄래. 다 버리면 되나?”
“뭐?”
“왕위고, 블란체라는 성이고 다 버린다고 해도 우린 안 된다는 이야기나 하고 있을 거냐고.”
현기증이 이는 기분에 마티나는 머리를 짚었다. 지금 이 상황 중 하나도 제대로 된 게 없었다. 장소와 함께 모인 사람들, 그리고 그가 꺼낸 물음까지도.
마티나는 이 자리에 놓인 의자의 수를 상기했다. 샬럿 영애가 곧 돌아올 것이다. 그녀가 보기 전에 이 난장판을 정리해야 했다.
마티나는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마티나가 애써 냉소적으로 내뱉었다.
“제정신이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말이 안 될 건 또 뭐야, 내가 농담으로 이러는 것 같아?”
“왜 나한테 그렇게까지 하겠다는 건데?”
“난 그대처럼 별것 아닌 사랑이 아니었으니까.”
말문이 막혔다. 삐뚤게 선 자세와 달리 그의 시선은 마냥 곧았다.
마티나는 맹목적인 애정 앞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테오도르와 함께 있으면 정말 그녀가 고민하는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결코 좋지 않은 징조였다. 다칠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마티나가 제 왼편에 있는 빈 의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우린…… 처음부터 끝이 보이는 관계였어. 이렇게 헤어질 거 알고 시작한 거 아냐?”
“그건 그대 생각이지, 난 한 번도 이별 따위 고려해 본 적 없어.”
거칠게 내뱉으며 테오도르가 마티나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티나, 한 번만이라도 이기적으로 굴어 봐. 우리 둘의 감정만 생각하고 결정해. 그래도 결과가 같아? 날 더 이상 안 사랑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
“나와 정말 남처럼 살 자신이…… 있어?”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를 향한 푸른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애원이라도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마티나가 떨리는 음성으로 답했다.
“아니.”
“그럼―”
“그런데 당신과 평생을 함께할 자신도 없어. 난 당신…… 감당 못 해.”
테오도르가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 마티나가 잔인하게 덧붙였다. 테오도르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는 마티나의 말을 속에서 삭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에게서 한숨도 흐느낌도 아닌 옅은 숨이 터져 나왔다.
마티나는 그의 이지러진 표정을 잠시간 입에 담았다. 그가 자신을 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그녀는 마음껏 그를 볼 수 있었다. 이전이었다면 그의 뺨을 손으로 감싸고 다정하게 입 맞춰 주었을 것이다. 아니면 가만히 끌어안아 주었겠지. 이제는 모두 할 수 없는 일들이다.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이 미련임을 알아본다면 테오도르는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심호흡을 마친 마티나가 공적인 목소리를 자아냈다.
“전하, 이쯤 하시지요. 새 신부께서 무엄한 오해를 하실까 두렵습니다. 제 결정은…… 바뀌지 않아요.”
“티나, 샬럿은―”
테오도르가 답답한 목소리로 말문을 떼었을 때였다. 뒤편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티나와 테오도르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놀란 표정의 샬럿 영애가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마티나의 귓가에 테오도르가 나직하게 욕설을 지껄이는 소리가 스쳤다.
“제가…… 잘못된 때에 왔나 보네요.”
샬럿 영애가 머쓱한 투로 말했다. 남편 될 자의 외도를 발견한 것치곤 위기감이 없었다.
혹 눈치채지 못한 것일까?
마티나는 조용히 엉망이 된 테이블을 돌아보았다. 주먹다짐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주변 경관만 보면 충분히 분위기가 험악했다. 사랑싸움으로 비치진 않았을 듯도 싶었다. 그렇다면 영애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이 맞으리라.
표정을 가다듬은 마티나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 미안합니다, 샬럿 영애. 국정을 논의하다 전하께서 그만 감정이 격해지셨네요. 건방진 태도를 보인 제 잘못입니다. 너그러이 용서하세요.”
“국정?”
테오도르가 비꼬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마티나를 쏘아보았다. 마티나가 반응하지 않자 테오도르는 그대로 옆을 지나쳤다. 샬럿 영애가 테오도르의 눈치를 보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테오도르는 아랑곳 않고 샬럿 영애에게 팔을 내밀었다. 그가 가시 돋친 투로 말했다.
“샬럿 영애, 볼일이 끝났으니 우린 이만 가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서 있던 샬럿 영애가 결국 테오도르의 팔에 손을 올렸다. 테오도르는 마티나에게 인사도 남기지 않았다. 샬럿만이 겨우 고개를 꾸벅여 보였을 뿐이었다.
마티나는 둘이 멀어지는 모습을 잠시간 지켜보았다.
“그냥 둬.”
마티나의 말에 깨진 찻잔을 치우려던 하녀가 멈칫했다. 마티나는 천천히 테오도르가 깨부순 물건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화풀이처럼 그것을 걷어차 보았다. 마티나가 숨을 고르며 물었다.
“내가 맞는 일을 한 거겠지?”
하녀는 고개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테오도르와 말싸움을 할 때 모두가 자리를 비웠었으니, 당연히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질문이었다.
마티나는 뜨거워진 눈을 감쌌다. 싸늘하게 식은 마음과 별개로 얼굴엔 잔뜩 열이 올라 있었다. 방금 샬럿 영애를 발견했을 때, 마티나는 당신과 결혼할 남자는 아주 나쁜 놈이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지 못한 건 그 오지랖이 결코 선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좀 더 솔직해지면, 마티나는 그대로 테오도르에게 넘어가고 싶었다. 뒷일 따윈 생각하지 않고.
“사기꾼.”
마티나가 중얼거리듯 테오도르를 욕했다. 테오도르에게 말려든 샬럿 영애가 불쌍했다.
가장 비참한 건 결국, 그럴 자격조차 갖추지 못한 그녀 본인이었지만.
* * *
그 소란을 겪었으니 다시 찾아오진 않으리라는 생각이 안이했을까. 샬럿 영애는 며칠 뒤 마티나의 저택이 아닌, 일터에 다시 방문했다. 여전히 아름다운 미소를 띤 채, 반짝이는 것을 가는 손가락에 고이 끼고서.
“반지예요, 예쁘죠?”
마티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 반짝이는 물건을 들여다보았다. 고운 손에 끼워진 반지는 하나의 예술품처럼도 보였다. 보고할 서류를 들고 왔던 엘시어가 경악한 표정으로 그대로 뒷걸음질 쳐 사라졌다. 마티나와 마주 앉은 상태라 샬럿 영애가 그 모습을 보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샬럿 영애가 제 손가락에 눈을 고정한 채 명랑하게 말했다.
“전하께 받은 거예요. 전하께서 식을 앞당기자고 하셨거든요.”
“약혼…… 반지인가요?”
“그런 셈이죠. 진짜 결혼식 땐 훨씬 더 대단한 걸 선물하겠다고 약조하셨어요.”
“그렇군요.”
그 말을 내놓는 게 고작이었다. 마티나는 자신이 화가 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멍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받아 주지 않았기에 남은 패라도 알뜰하게 챙기기로 한 것일까?
거절당하자마자 착실하게 결혼 준비를 시작하다니, 그것참 눈물 나도록 계산적인 결정이었다. 마티나의 앞에선 다 포기하겠다는 듯 세기의 사랑인 양 굴었던 것치곤 지나치게 변심이 빨랐다. 마티나는 테오도르에게 화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자신에겐 더 이상 그럴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마티나의 평온한 표정을 살피던 샬럿 영애가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간 골똘히 고민하던 그녀가 이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후작님,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예, 말씀하세요.”
“앞으로 전하와 만남을 삼가 주실 수 있나요?”
마티나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지난번 별다른 물음 없이 넘어가기에 잘 속였다고 생각했었다. 한데 모른 척 넘겼을 뿐 모든 걸 눈치채고 있었던 것인가. 하기야 모르는 게 더 바보였다. 궁내의 아무나 붙잡고 물어도 왕과 후작의 관계를 얻어들을 수 있을 테니 말이었다.
마티나의 얼어붙은 표정을 본 샬럿 영애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미끼에 걸려든 사냥감을 보는 표정이었다.
“전하와 각별한 사이셨던 것 알아요. 하지만 두 분께서 끝내기로 결정하셨다고 하니, 이제 와 혼사를 무를 생각은 없어요. 다만 후작님께서 조금 더 행동을 조심해 주실 필요는 있겠죠?”
“……이미 전하와는 사적인 만남을 삼가고 있습니다.”
마티나는 기꺼이 샬럿 영애의 눈앞에서 사라져 줄 수 있었다. 누구보다도 마티나 본인이 그러길 원했다. 마티나는 샬럿 영애가 등장할 때마다 테오도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눈앞에서 얼쩡거리지만 않는다면 좀 더 독한 마음을 먹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머, 물론 그건 당연한 일이죠. 제 말은, 이만 영지로 내려가 보시는 건 어떻냐는 거예요.”
샬럿 영애가 입가를 가리며 작은 웃음을 흘렸다. 마티나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예?”
“후작님께서 영지에 방문하지 않으신 지 꽤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나요?”
마티나는 잠시 후에야 그녀의 뜻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샬럿 영애는 마티나에게 테오도르를 피하다 못해, 완전히 지방으로 떠나라고 말하고 있었다.
마티나는 테오도르의 고집 때문에 왕궁에 관직을 얻어 지금까지 줄곧 수도에서 지내고 있었다. 왕에게 하사받았던 영지는 한두 달 겨우 들여다본 게 고작이었다.
“아시다시피 수도는 사람을 흔드는 유혹이 많은 곳이잖아요?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시간을 보낸다면 후작님께서도 안정되실 거예요.”
“샬럿 영애, 그건―”
“제 마음 이해해 주시리라 믿어요. 웬만하면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아 주셨으면 해요. 옛 여자가 식에 참가하는 건, 아무래도 조금 모양이 이상하잖아요?”
샬럿 영애가 쐐기를 박듯 말을 맺었다.
처음 후원에서 마주쳤던 순진한 모습은 뭐였을까. 본심인지 허세인지 알 수 없는 표독스러움이 느껴졌다.
웃기는 건, 샬럿 영애의 말에 하나 틀린 부분이 없다는 점이었다. 샬럿 영애의 결정은 현명했다. 어쩌면 불참 요구는 마티나를 위한 배려로 기능할 수도 있었다. 마티나는 점차 그것이 나쁘지 않은 의견이라는 데 생각이 옮겨 갔다. 마티나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 겠습니다.”
“예?”
“왜 그러십니까?”
“결정이…… 빠르시네요.”
샬럿 영애가 떨떠름히 말했다. 이내 그녀가 헛기침으로 당황한 기색을 지우며 덧붙였다.
“제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아서요.”
“그렇지 않습니다. 맞는 말씀을 하셨어요. 불쾌하신 마음 이해합니다.”
“와, 진짜 독하네…….”
샬럿 영애가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부지불식간에 속내를 내뱉고 만 기색이었다. 곧 샬럿 영애가 아차 한 얼굴로 표정을 가다듬었다.
마티나는 그저 쓰게 웃었다. 연적이 보기에도 제가 지나치게 정이 없긴 한 모양이라며. 부디 테오도르도 제게서 빨리 마음을 떼길 바랄 뿐이었다. 이것이 그가 오기로 결정한 결혼이라면, 마티나는 그에 기꺼이 부채질을 해 줄 의향이 있었다.
탐색하듯 마티나의 낯을 살피던 샬럿 영애가, 이내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요. 말이 통하는 분이신 것 같아 기쁘네요. 빠른 시일 내에 떠나 주시리라 믿고 있겠어요.”
죄인이 된 마티나는 깍지 낀 두 손만 내려다보았다. 샬럿 영애의 말에 토를 달 구석이 있을 리 없다. 신사적으로 대화를 먼저 시도한 것만 해도 샬럿 영애는 충분히 교양 있는 응대를 보여 준 셈이었다.
샬럿 영애는 할 말이 남은 듯 잠시 머뭇거렸지만, 곧 고고히 몸을 돌려 문을 나섰다. 샬럿 영애가 떠나고 마티나는 그대로 등받이 위에 늘어졌다. 올려다본 천장은 그녀의 기분마냥 탁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대로 홀로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엘시어는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샬럿 영애가 집무실을 완전히 떠나자마자 엘시어가 뛰쳐 들어왔다. 엘시어가 사납게 문짝을 열어젖히며 숨을 헐떡였다.
“두 분 다 미치셨습니까? 자존심 싸움은 그만하세요.”
마티나는 제 표정을 가리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공기가 후덥지근한 편이었음에도 손끝은 차게 식어 있었다. 마티나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건 그런 게 아니야.”
“그게 아니면 뭡니까? 여자는 남자보고 결혼하라고 등 떠밀고, 남자는 후회할 거라며 두고 보라는 식으로 식장에 걸어 들어가고. 신부 생각은 안 해요? 이 미친 사람들 같으니…….”
그나마 이성을 유지해 왔던 엘시어가 이번만은 특히나 유난하게 반응했다. 엘시어가 보기에도 테오도르가 정말 웨딩 카펫 가까이 서긴 한 모양이었다.
혀를 내두르는 엘시어의 모습에 마티나는 짧게 웃었다.
“자넨 역시 아직 젊군.”
“……누가 보면 후작님은 할머니인 줄 알겠습니다? 저랑 몇 살 차이도 안 나시면서…….”
“나와 테오도르는 혼인 적령기의 마지막 끝에 섰지, 자넨 아니고. 그런 차이야.”
“이성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치고 얼굴이 창백하신데요.”
마티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만도 이미 처참한 기분인데 타인에게까지 비난받고 싶진 않았다. 엘시어와 얼굴을 마주해 봤자 속만 긁어 올 게 뻔했다. 그녀는 등받이에 목을 기댄 채 늘어져 잠시간 미동하지 않았다.
곧 마티나에게서 맥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테오도르도 안정을 얻을 거야.”
아니나 다를까 엘시어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혀를 찼다. 그제야 마티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입가엔 약간의 조소가 어려 있었다.
“자네는 내가 꼴사납다고 생각하겠지.”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다.”
테오도르를 포기할 거였으면 괴로워하지도 말았어야 했다. 샬럿 영애가 면전에 대고 직접 축객령을 내렸을 때, 마티나는 자신이 얼마나 추한 짓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정말 테오도르를 떠나기로 결심했다면 마티나는 진작 수도를 떠났어야 했다. 테오도르의 애인 자리를 상실한 그녀에겐 수도의 귀족으로 남을 명분이 없었다. 애초에 지금 가지고 있는 직무도 테오도르가 영지로 내려가지 말라며 만들어 준 자리였다. 이런 어정쩡한 마음가짐과 행동으론 무엇도 정리될 수 없었다.
계속 모른 척 테오도르와 사랑했으면 차라리 행복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의 입술에 입 맞추던 일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뒤척이다 깬 새벽녘, 가끔은 테오도르와 자신 외에 더 중요한 게 있나 싶을 때도 있었다. 스카이라 공작 따위의 노망에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국정에 점잖은 체 모여 앉은 늙은이들이 미칠 듯이 증오스러워졌다. 그러나 가장 원망스러운 건,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라는 걸 알면서도 테오도르를 사랑하고 만 자신이었다.
이리 헤어질 줄 알았다면 애초에 왕에게 마음을 털어놓지도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속내야 답답했을망정 그를 잃는 슬픔은 겪지 않아도 됐을 테니까.
“더 추해지기 전에 끝낸 거지.”
마티나가 이 사태의 한 가지 장점을 끄집어냈다. 그녀가 부러 쾌활한 투를 자아내며 덧붙였다.
“잘된 일이야. 이젠 돌이킬 수도 없게 됐잖아.”
“그래서 후작님껜 대체 뭐가 남습니까?”
“……자넨 정말 할 말 못할 말을 못 가리는군. 분위기 파악 좀 하라고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었나?”
“후작님이야말로 회피하지 말고 말씀해 보세요. 왕께 건강한 씨줄과 가정적인 여자를 선물해 주고 독신이 된 후작님께는 뭐가 남느냐고요. 외로움?”
마티나와 테오도르를 연결하는 고리는 사랑이라는 감정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이어져선 안 되는 이유는 수백 수천 가지도 넘게 꼽을 수 있었다.
마티나가 변명하듯 말했다.
“미련해 보여도 그게 내 사랑이야. 나 때문에 그가 잃지 않아도 될 것을 놓치는 건 싫어.”
“왕께서는 아이보다는 후작님을 더 원하셨을 겁니다.”
엘시어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테오도르는 마티나를 찾아와 왕위를 포기하겠다고까지 말했었으니까. 마티나도 그에 감동하고, 또 조금은 흔들렸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감정보다는 이성으로 판단할 줄 아는 여자였다. 마티나가 전자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면 왈도는 아직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변할지도 모르는 마음 따위에 인생을 위탁할 수는 없다. 끝끝내 이성을 부여잡고 있는 것이 그녀가 가장 덜 비참해질 수 있는 방법이었다.
마티나는 결국 왈칵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지금은 그렇겠지. 아직 젊으니까. 하지만 나이가 들고 외로워지는 순간이 올 거야. 귀족들이 목덜미에 이빨을 드러내고 후계가 걱정될 때, 그가 후회하면 어떡하지? 날 거추장스럽게 여기게 되면?”
“…….”
“난…… 버려지고 싶지 않아.”
마티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엘시어는 그런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잠시간 빤히 응시했다.
“그래서 먼저 버리셨군요.”
엘시어가 잔인하게 지적했다. 마티나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마티나는 입술을 깨물며 왼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침내 엘시어의 눈빛에도 체념이 어렸다. 사랑하는 여자를 놓치고 싶지 않은 테오도르나, 불확실한 미래를 고민하는 마티나의 입장이나 이해되긴 매한가지였다.
엘시어는 마티나 같은 대단한 이도 하자 있는 여자로 취급되는 결혼 시장이 몹시도 유감스러웠다. 단순히 부모를 잘 만났다는 이유로 작위를 물려받은 멍청이들이, 본인의 능력으로 성을 얻은 마티나보다 어찌 더 고귀할 수 있단 말인가.
엘시어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작님 말마따나 어차피 다 벌어진 일을 뭐 어쩌겠습니까. 부디 그 생각이 바뀌지 않길 바라겠습니다. 후작님마저 후회하게 되면, 이 결정은 두 분 모두에게 다 비극으로 남지 않겠습니까.”
* * *
마티나는 결국 영지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엘시어가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며 만류했지만 샬럿 영애의 불안감을 해소해 주기 위해선 꼭 필요한 일이었다. 다만 마티나는 후임자에게 업무를 인계하기 위해 한 달이라는 유예를 두었다. 그 이상으로 영지로 향하는 일정을 앞당길 순 없었다. 테오도르와 결별하여 수도를 떠나는 건 맞았지만, 타인의 눈에 도망치듯 떠나는 것처럼 급박하게 비치고 싶진 않았다. 그게 마티나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다행히 샬럿 영애도 마티나의 결정에 더 가타부타 말을 더하진 않았다. 그렇게 마티나는 이별을 받아들일 여유를 얻었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그건 떠나기 전까지는 테오도르와 계속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왕궁은 테오도르의 거처였으므로 그를 완전히 피해 가기는 불가능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테오도르가 마음을 독하게 먹은 듯 더 이상 마티나를 찾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샬럿 영애가 상냥한 미소로 그를 잘 보듬어 주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그는 순조로이 마티나를 잊어 가고 있는가.
추측만은 아니었다. 마티나는 종종 길을 지나치다가 샬럿 영애와 테오도르의 애정 행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샬럿 영애는 장미꽃을 특히나 좋아했고, 그 군락은 하필이면 마티나가 근무하는 외궁 근처에 있었다. 오늘도 마티나는 어렵지 않게 그들의 애정 행각을 훔쳐 볼 수 있었다.
출근하는 길, 보란 듯이 하하 호호 웃으며 산책을 즐기는 연인을 발견하자 마티나의 끔찍한 기분은 더욱 정점을 찍었다. 마티나는 둘에게서 거리를 두며 멀리 돌아갔다. 더 이상의 불쾌한 삼자대면은 사양이었다. 드문드문 대화 소리가 들려왔지만, 마티나는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전하, 아무래도 이건 좀…… 슬슬 방법을 바꾸…….”
“그렇다고 딱히 다른…….”
마티나가 적당히 거리를 벌렸을 즈음이었다. 샬럿 영애가 마티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곧 샬럿 영애의 얼굴에 부자연스러울 만치 사랑스러운 미소가 가득 찼다.
샬럿 영애가 과장스레 테오도르의 뺨을 감싸며 말했다.
“어머, 전하, 여기 뭐가 묻으셨어요.”
“이 무슨 징그…… 지저귐인가. 나의 피앙세, 얼른 직접 닦아 주게.”
“참, 여기 제 사랑이 묻었네요. 호호.”
샬럿 영애가 테오도르의 눈가를 쓸어 주며 마티나를 응시했다. 샬럿 영애는 마티나와 시선을 맞춘 채 그대로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그 행복한 모습이 화살처럼 마티나의 가슴에 박혔다. 마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만 제자리에 멈춰 섰다.
샬럿 영애는 마치 행동으로 마티나에게 이렇게 경고하는 듯했다.
‘이것 봐, 이 사람은 내 남자야. 방해꾼은 이만 자리를 비켜 주지 그래?’
더 이상 샬럿 영애의 얼굴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다른 여자를 향한 테오도르의 다정한 눈빛 따위 알고 싶지 않았다. 마티나는 그 순간 절실하게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테오도르의 연인에서, 불청객 정도의 존재로 격하되어 있다는 걸.
마티나는 황급히 걸음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 안 그래도 다급했던 움직임은 갈수록 뜀박질에 가까워졌다. 건물 앞까지 다다르고서야 발을 멈춰 세웠다. 마티나가 벽을 한 손으로 짚은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결혼…… 결혼이라.”
그래, 테오도르는 결혼을 할 것이다. 마티나가 원했던 대로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와.
겨우 한 달이었다. 고작 그 정도 시간을 그 없이 보냈을 뿐인데도 아득한 낭떠러지 앞으로 발을 디딘 기분이었다. 그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거나, 찡그린 미간을 손끝으로 펴 주거나, 혹은 그를 끌어안지 못하는 시간들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인내 끝에 반드시 나아지리란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견디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을 뿐이다.
구체적인 상상은 더한 상실감을 몰고 왔다. 얼마 전까진 당연했던 일들이 이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 모든 게 그녀가 자초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티나는 감정을 추스르듯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입술을 비집고 나온 침음은 차마 삼켜 낼 수 없었다. 지나온 모든 일들이 후회투성이였다.
새삼 왈도를 향한 증오가 차올랐다. 아이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에 불임을 선고받았을 당시에도 마티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왈도가 증오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아이를 낳아 테오도르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그러고만 싶었다.
“더 끔찍하게 죽였어야 했는데.”
얼굴은 볼 수 없는 각도였지만 테오도르의 목소리는 분명 생기 있게 들렸다. 그는 분명 나아지고 있었다. 정체되어 있는 것은, 오히려 이별 앞에서 단호했던 그녀 쪽이다.
마티나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밀려들었다. 누군가가 말을 건다면 그대로 왈칵 울어 버릴 것만 같았다.
“후작님? 왜 여기…….”
그녀의 바람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곧 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시어였다. 마침 마주친 것이 그라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마티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를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도통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엘시어가 눈치껏 사라져 주길 바랐다. 그러나 엘시어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아무, 일도…….”
말의 마디가 잘렸다. 마티나는 심호흡을 거친 후에야 상대가 알아들을 만한 말을 뱉어 낼 수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러나 엘시어는 속아 주지 않았다. 아무리 눈치 없는 사람이라도 그녀의 상태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 같다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후작님, 힘드시면…… 그만하셔도 됩니다.”
그리 말하며 엘시어가 조심스럽게 마티나의 어깨를 감쌌다. 마티나는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눈 감고 있을 테니 눈물이 나시면 우세요. 소리 지르고 싶으시면 사람이 없는 곳으로 데려가 드릴게요. 괜찮은 척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라앉은 줄 알았던 감정에 다시 파랑이 일었다. 엘시어의 말대로 속에 담긴 악을 쏟아 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한참을 소리 죽인 채 버티던 마티나가 겨우 입술을 달싹였다.
“많이 버텼어.”
“예?”
마티나가 그만 휘청이듯 무너졌다. 주저앉은 채 중심을 잡지 못하는 마티나를 엘시어가 겨우 일으켜 세웠다. 마티나는 힘겹게 엘시어의 옷깃을 붙들었다.
“더는, 더는 못 해. 더 이상은 못 하겠어. 그런 거 알고 싶지 않아. 그 남자가 나 없이도 행복하게 사는 꼴 따윈 보고 싶지 않았어.”
엘시어는 그제야 마티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한 듯했다. 마티나의 어깨를 감싼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티나가 슬픔으로 얼룩진 얼굴을 들며 다급히 물었다.
“내가 바보 같았다고 생각해? 엘시어? 직접 이별을 고해 놓고 아파하는 내가 얼간이 같나?”
우악스럽게 옷깃을 잡힌 상태인데도 엘시어는 불쾌한 기색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연민의 눈으로 마티나를 내려다보았다.
“후작님, 이젠 다 됐습니다. 아무것도 고려하지 말고 그냥 후작님만 생각하세요.”
“아니야, 엘시어. 난 언제나 나만 생각했어. 내가 더 아프기 싫어서 이쯤에서 그만둔 거야.”
그것이 진심이었다. 마티나는 더 깊어지기 전에 그만두려고 했다. 테오도르가 삶의 전부가 되었을 때 그에게 버려진다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지금이라면 조금만 아프고 발을 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떡하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죽을 것 같은데.”
결국 참지 못한 눈물이 비집고 흘러나왔다. 억지로 웃어 보려고 했지만 입꼬리만 겨우 들어 올린 흉한 모양에 그쳤다. 덜 아픈 이별이 되리라 여겼던 건 그녀의 오만이었다. 이미 벗어날 수 없는 지점에 다다라 있었다는 걸, 이 지경이 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누군가 들을까 싶어 마티나는 차마 크게 흐느끼지도 못했다. 힘껏 깨물린 입술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엘시어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저 마티나를 응시했다. 이별의 아픔은 어디까지나 당사자의 몫이었으므로 그가 대신 아파해 줄 순 없었다. 대신 엘시어는 어떻게 하면 마티나가 더 편해질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그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을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후작님, 뒷정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후임 같은 건 생각하지 말고 먼저 영지로 내려가 보세요. 버틸 수 없으면…… 그만 견디셔도 돼요.”
마티나는 우습게도 괜찮다고 말할 수 없었다. 괜찮지 않았으니까. 도무지 이대로 일터로 돌아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일상을 살아 낼 자신이 없었다. 자존심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곧이라도 죽을 것 같은데. 숨 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리로 도망치고만 싶었다.
마티나는 힘겹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고마워, 엘시어.”
“제가 뭘 했다고요.”
“내가 수도로 돌아오지 못해도, 날 보러 와 줄 수 있겠나?”
“불러만 주신다면, 얼마든지 그러겠습니다.”
엘시어는 대답과 함께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 어린 어조였다.
마티나의 입가에 힘없는 미소가 어렸다. 마티나는 왕궁에 들어와 그녀에게 남은 게 있다면, 그건 엘시어라는 좋은 친구 하나가 아닐까 생각했다.
* * *
갑작스러운 이동에 저택의 사용인들은 당황했지만 준비는 빠르게 끝났다. 수도의 일을 잊으려 떠나는 길에 가지고 가는 짐이 많을 리 없다. 마티나는 간단한 옷가지만 챙겨 도망치듯 이별에서 멀어졌다. 마부와 하녀 하나만 겨우 대동한 채였다.
엘시어에게 귀찮은 일을 떠민 셈이라 미안했지만, 지금 그녀에게 남까지 챙길 정신은 남아 있지 않았다. 수도에서 교류했던 지인들에게 떠난다는 인사를 전할 짬도 없었다. 엘시어와 그녀 단둘만이 알고 있는 급박한 이동이었다. 아니, 마티나의 빈자리를 해명해야 했을 테니 이젠 궁에도 그녀의 부재가 알려졌을까. 아무렇지 않은 척 버텨 보려 했는데 결국 가장 최악의 형태로 도망치고 말았다.
테오도르는 그런 그녀를 비웃었을까?
마티나는 옛 연인의 이름을 떠올리자마자 그대로 창에 머리를 부딪쳤다. 그러고는 스스로에게 되새기듯 중얼거렸다.
“잊어, 미련하게 굴지 마. 생각할수록 더 아플 뿐이니까.”
그러나 그 주문이 효과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테오도르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애쓸수록 오히려 더 떠올랐으니까.
영지까지는 마차로 이틀을 꼬박 달려야 다다를 수 있었다.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자 자연히 몸엔 피로가 쌓였다. 마티나는 이 이틀이 몹시 지긋한 시간이 되리라 예감했다. 영지에 도착해 한숨 자고 일어나면, 피로와 함께 아팠던 사랑도 함께 털어 버릴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도주는 생각만큼 순조롭지 않았다. 늦여름이라 크게 비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그런 안이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저녁 무렵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 대단한 비는 아니었지만 점점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마티나는 결국 근처 여관에서 하룻밤을 쉬어 가기로 결정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숙박업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빗소리가 더 커졌으니까. 잠깐 지나가는 소나기인 줄 알았던 것이, 방을 배정받고 나자 완연한 폭우의 모습을 띠었다.
방 안엔 조악하게나마 유리창이 하나 있었다. 투시도가 좋지 않은 불투명한 물건이었지만 험악한 날씨를 확인하기엔 충분했다. 하녀가 창밖을 확인하며 어머,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멈추길 잘한 것 같네요. 쉽게 그칠 비가 아닌 것 같아요.”
“시간도 늦었으니, 그대로 출발했다간 마부가 고생했겠지.”
비탈길을 장시간 달렸더니 몸이 곤했다. 마티나는 웃돈을 얹어 여관 주인에게 목욕물을 부탁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 그나마 좀 살 것 같았다. 혹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했는지 하녀는 마티나의 몸에 남은 물기를 꼼꼼히 닦아 주었다.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자마자 타이밍 좋게 노크 소리가 울렸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여관 주인이었다. 욕조를 치워 가려고 온 줄 알았는데 그는 의외의 부탁을 전했다.
“저어……, 젖은 손님이 도착했는데 남은 수건이 없어서요. 날이 궂어 마른빨래가 더 없는데, 혹 안 쓰신 게 있다면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저런, 막 씻어서 다 쓴 참인데. 미안하게 됐군.”
“아이고, 아닙니다.”
여관 주인이 고개까지 내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도 크게 기대하진 않았던 표정이었다. 애초에 마티나 일행도 빗줄기를 제치고 도착한 이들이었으니까.
여관 주인은 허리를 한번 크게 굽혀 인사한 후 문을 나섰다. 마티나는 불운한 손님을 동정하듯 혀를 찼다.
“우리처럼 빗길을 달린 손님이 또 있었군.”
“지금 도착했으면 꽤 고생했겠는데요.”
그리 말하며 하녀가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걱정스러운 표정도 잠시, 무언가를 발견한 것인지 하녀의 눈이 커졌다. 탁상 쪽으로 다가간 하녀가 벗어 둔 옷에 가려져 있던 여분의 수건을 꺼내 들었다.
“후작님, 안 쓴 게 한 장 남아 있었어요. 가져다주고 올까요?”
그 손님이 생각만큼 불운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마티나가 고개를 내저으며 하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날이 늦었잖나. 험악한 사람들이랑 마주칠 수도 있으니 내가 갖다주지, 이리 줘.”
사용인의 일을 대신해 주는 주인이 어디 있나. 하녀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거부했으나 마티나는 고집을 부렸다. 그녀에겐 밖으로 나가야 할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까.
마티나는 주인에게 수건을 건네주는 김에 술을 주문할 요량이었다. 싸구려 맥주라도 한잔 마시면 깊이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녀에게 술을 내오라 말했다간 잔소리가 돌아올 게 분명했다. 근래의 마티나는 음주 없이 잠드는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티나로서도 좋지 않은 습관인 걸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침대 위를 뒤척이다 보면 마냥 버티고 있기가 힘들었다. 깨어 있으면 자꾸 나쁜 생각만 떠오르는 와중에야 더더욱 그러하다.
마티나는 조용히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어두운 복도에서 나무판자가 삐걱이는 소리가 을씨년스럽게 울렸다. 아래층에선 인기척이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주인은 포기하지 않고 다른 객실에도 양해를 구하러 간 모양이었다. 술을 주문할 만한 직원이 남아 있을지나 의문이다.
‘아니, 사람이 아예 없진 않았나.’
불이 꺼진 홀엔 남자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리 늦은 밤도 아닌데 다들 일찍 잠자리에 든 듯 그 외의 테이블은 전부 빈 상태였다. 중앙의 테이블엔 숯으로 공기를 덥히는 난로가 놓여, 주변을 구분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광원이 되어 주었다. 덕분에 사위가 어두웠음에도 그럭저럭 사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남자는 언뜻 보기에도 골격이 넓었다. 후드를 뒤집어쓴 상태라 체격을 확인하기 힘든 여건인데도 장신임이 티가 났다. 위험하다는 말은 변명으로 꺼낸 것이긴 했지만, 마티나는 뒤늦게 하녀가 아니라 자신이 나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홀로 있는 여자를 추행하려는 우악스러운 사내는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마티나는 잠시 예의 남자를 유심히 살폈다. 축축이 젖은 옷에서 흘러나온 물이 마룻바닥 위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저 사람이 비를 뚫고 들이닥친 예의 방문객인 걸까. 마티나는 천천히 남자 앞에 다가가 수건을 내려놓았다.
“이걸로 닦아요.”
그러나 남자는 수건을 집어 들지 않았다. 고맙다는 인사라도 할 법하거늘 대답 역시 돌아오질 않는다. 그제야 마티나는 눈을 들어 남자를 응시했다. 곧 마티나의 입가가 그대로 굳어 들었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티나는 그대로 뒤돌아 계단으로 올라서려 했다. 남자가 그녀를 붙잡는 것이 더 빨랐지만.
“가지 마!”
마티나는 그대로 못 박힌 듯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가 왜 여기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게 가능은 한 일인가. 너무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 현실감이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약혼자와 다정한 시간을 보내던 남자다. 그런 그가 왜 마티나를 쫓아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도망칠까 싶었지만, 마티나는 곧 1층에 남기로 결정했다. 위층으로 올라가 봤자 다른 투숙객들에게 소란을 들려주는 결과밖에 낳지 못할 것이다. 마티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테오도르를 돌아보았다. 잠깐의 침묵을 견딘 후에야 해야 할 말의 가닥을 잡을 수 있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
테오도르가 다급히 마티나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찾았어. 영지로 내려갔다기에, 다시 안 돌아올 것만 같아서.”
“내가 수도에 있든 없든,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야. 샬럿 영애는 어쩌고. 지금 제정신이야?”
“아니,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러니까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 못 하고 여기까지 쫓아왔겠지.”
마티나는 테오도르의 말을 차마 비웃을 수 없었다. 샬럿 영애를 걱정하는 게 비열한 짓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테오도르가 자신을 쫓아온 걸 알고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다른 무엇도 아닌 기쁨이었다.
눈을 마주쳤던 아주 잠시의 찰나, 테오도르는 희열에 젖었던 자신의 표정을 보았을까?
스스로가 너무도 추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마티나는 테오도르의 눈길을 피하며 고개만 내저었다.
“돌아가. 당신은 여기 있으면 안 돼.”
“당신 곁이 아니면, 나보고 대체 어디로 가란 거야.”
“언제까지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할 셈이야? 우린 안 된다고 했잖아, 몇 번이고!”
“그래서 날 버리겠다고?”
화를 내는 거라고 생각했다. 따져 묻는 듯한 다급한 기색은 충분히 그런 모습으로 읽혔다.
그러나 그것은 분노보다 갈증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테오도르의 표정이 이지러졌다. 그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독해. 어쩌면 이렇게 나만 아픈 것 같아.”
마티나는 그의 얼굴을 적신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충분히 우는 것처럼 보였다.
테오도르가 감정을 억누르듯 숨을 가다듬었다. 파리하게 떨리는 입술엔 핏기가 없었다.
“처음엔 화가 났어. 난 당신이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미칠 것 같은데, 당신은 아무 일도 아니란 듯 말하니까. 나만 당신을 사랑한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했던 거야.”
정확히 샬럿 영애와 함께 있는 테오도르를 보며 마티나가 품었던 생각이었다. 때때로 마티나는 손쉽게 돌아선 테오도르를 보고 위안한 적도 있었다. 이렇게 쉽게 사라질 감정이었다면, 그에게 평생을 내주지 않은 건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내가 모든 사람을 다 아우를 수는 없어. 맞아. 난 그대에게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는, 그런 무책임한 단언을 할 수는 없었지. 난 왕이니까.”
세상만사에 제멋대로 구는 왕을 폭군 외의 다른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마티나는 테오도르에게 눈에 거슬리는 작자들을 치워 달라 베갯머리송사를 속삭일 애첩이 아니었고, 테오도르도 그가 부재한 자리에서조차 모두의 입을 다물게 만들 방도를 생각해 내진 못했다.
테오도르는 왈도가 짓밟은 민심을 딛고 선 왕이었다. 왈도가 악이면 테오도르는 선이었고, 왈도가 밤이라면 테오도르는 낮이었다. 그것이 그의 세력을 유지시키는 근거였다. 그 말은 테오도르가 비위를 맞춰야 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당신이야말로 잔인하다고 생각했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로 날 몰아세우는 게 원망스러워서, 당신이 후회하고 날 돌아봤으면 했어.”
“당신을 이해해서, 그래서 떠나 주려고 한 거야. 나는…… 당신한테 절대 도움 같은 건 될 수 없는 여자잖아.”
테오도르가 눈가를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목에서 갈라진 음성이 비집고 나왔다.
“아니야.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어. 그대를 만나기 전엔 도대체 어떻게 살았나 싶어. 하루가 다르고 또 이틀이 달라. 이대로 영원히 그대가 내 옆에 없다고 생각하니까 미칠 것 같아.”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될 문제야.”
마티나는 자신조차 확답할 수 없는 말을 테오도르에게 들려주었다. 마치 스스로에게 되새기기라도 하는 모양새로. 테오도르는 그 막연한 장담에 그저 헛웃음을 짓고 말 뿐이었지만.
“얼마나 지나야 하는데?”
얼마나 더 아파야 우리는 괜찮아질 수 있는가. 아무도 그 답을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대가 어떻게 하면 내 옆에 남을지, 도무지 이젠 다른 방도가 없어. 정말…… 죽을 것 같아.”
테오도르가 한 걸음 더 마티나에게로 가까워졌다. 그는 어쩔 줄 모르는 아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금은 슬프고, 조금은 초조하고, 또 조금은 애달픈.
“뭘 해도 그대가 내 곁을 떠날 거라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아니다. 마티나는 그가 품고 있는 감정을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있었다. 그건 그녀 역시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대가 나를 택한다면, 뭐든지 할게. 한낱 필부로 남아 그대에게 남은 삶을 다 바치라고 하면 그리할게.”
고귀한 왕이 한낱 사랑을 구걸했다.
“이런 나는…… 그대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나?”
테오도르가 오른손을 들어 일그러진 얼굴을 감쌌다. 그의 손바닥을 적신 눈물이 가련히 흘렀다. 그가 숨죽여 애원했다.
“날 버리지 마, 제발.”
아, 내가 어리석었듯, 나를 사랑하고 만 가련한 남자야.
마티나는 목 아래에서부터 흘러넘친 뜨거운 감정을 겨우 눌러 삼켰다.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감은 눈을 뜨지 못했다. 겨우 가두고 있던 눈물이 그대로 비집고 나올 것만 같았으니까. 그런 마티나를 보고 테오도르가 스스로에게 조소를 보내듯 중얼거렸다.
“이조차 내 이기심이겠지.”
“맞아.”
마티나가 떨리는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눈을 들어 테오도르와 시선을 마주했다. 언제나 그녀를 약하게 만드는 저 얼굴이 지금처럼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내 생각은 안 해? 내가 어떤 마음으로 당신을 보냈는지 몰라? 내가 스카이라 공작 따위에게 어떤 소리를 듣는지, 당신이 아느냐고.”
한 번 말문을 트자 원망이 숨 쉴 틈 없이 쏟아졌다. 마티나가 밀어내듯 그의 가슴팍을 쳤지만, 테오도르는 제자리에서 그저 버텼다.
“어쩜…… 당신이야말로 내 생각은 하나도 할 줄을 몰라. 날 아프게만 해.”
“이젠 안 그럴게. 다 내 잘못이야. 앞으로 그런 일 없을 거야.”
“그럴 거면 여기 오면 안 됐지. 모른 척 떠나서 잘 살았어야지! 왜 여기까지 찾아와서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 애초에 내가 고백했을 때 받아 주지 말지 그랬어. 그렇게 웃어 주지 말지 그랬어!”
“…….”
“왜…… 왜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만들었어?”
“미안해, 그런 남자라서.”
슬픔 때문인지 원망 때문인지 모를 눈물이 마티나의 뺨을 뜨겁게 달구었다. 테오도르가 손을 뻗어 그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그의 눈가 역시 잔뜩 젖어 있었으므로 다소 우스운 배려였다. 그토록 서투르고 어리숙하다.
마티나는 테오도르의 일그러진 얼굴을 천천히 제 기억에 담았다. 그녀는 평생 그녀가 사랑한 이 얼굴을 잊지 못할 것이다. 먼 곳으로 떠난다고 한들 다시금 그리울 것이다.
마티나는 그럼에도, 그의 옆에 남은 자신 역시 고통스러우리라 예감했다. 분명 아프고 괴로운 시간들이 그녀를 조롱하고 짓밟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발을 빼기엔 너무도 깊이 빠져들었다. 도무지 이 수렁 같은 사랑을 벗어날 방도가 없다.
마티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품었던 것 중 가장 큰 결심을 버렸다. 그녀를 흔든 테오도르에게도 마땅한 책임이 있었다. 그 역시 그만한 각오로 마티나에게 응해 주어야 한다.
마티나는 테오도르의 목깃을 붙들었다. 젖은 목소리로 그에게 으름장을 놓듯 경고했다.
“난 당신한테 분명 떠날 기회를 줬어. 뿌리친 건 당신이야. 나중에 후회 같은 거 해도 소용없어.”
“후회할 일 따윈 없어. 당신이 내 옆에 남는다면.”
“이 순간을 평생 기억해, 이젠 어떻게 해도 못 놔줘. 날 버리려거든 죽을 각오를 해.”
마티나가 가쁜 숨으로 말을 이었다.
“감당할 수 있으면 키스해.”
테오도르가 그대로 마티나의 입술을 삼켰다. 짠맛이 나는 키스였다.
* * *
테오도르는 순간 눈을 떴다. 사방이 온통 조용했는데도 이상하게 갑자기 잠이 달아났다. 뺨에 푹신한 감각이 느껴지고서야 테오도르는 자신이 침대 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깜빡 잠이 들었던가.
뻑뻑한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시야가 트였다. 옆에선 마티나가 침대맡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어스름한 새벽의 색으로 물든 그녀의 머리칼은 다소 탁한 빛을 띠었다. 왜 깨었나 했더니, 이 얼굴을 보려고 그랬나 싶었다.
테오도르가 스치듯이 웃었다. 그 소리를 들은 것인지 마티나가 테오도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깼어?”
잠긴 목소리가 몹시 유혹적이었다. 테오도르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답했다.
“응.”
“더 자도 괜찮아. 아직 비가 안 그쳤거든.”
귀를 기울이자 과연 벽 너머로 쏟아지는 빗소리가 들려왔다. 소음이 거세어 창밖으로 보이는 빗줄기보다 날이 더 험악하게 느껴지는 듯도 했다. 아무래도 이 건물은 방음이 형편없는 모양이었다. 하녀에게 근처가 아닌 반대쪽 끝 방을 잡아 주길 잘했다. 바로 옆 객실 사람들은 새벽 중 잠을 설쳤을지도 모르겠다.
테오도르가 베개에 이마를 비비며 물었다.
“당신이야말로 너무 조금 잔 거 아니야?”
“일을 벌여 놓고 나니 역시 고민이 돼서.”
“그래 봤자 이젠 못 무르는 거 알지?”
마티나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 테오도르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가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 내고는, 깊이 파인 등줄기를 검지로 쓸어내렸다. 예기치 못한 간지럼에 테오도르의 등에 힘이 들어갔다. 날갯죽지 근처에 붙은 근육이 다소 위협적으로 꿈틀거렸다.
마티나가 손장난을 멈추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샬럿 영애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샬럿 영애의 앞에서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테오도르의 앞에 다신 나타나지 않겠다고 단언하더니 이 꼴을 좀 보라.
마티나는 스스로가 비겁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결국 그녀는 신의보다는 본인의 아픔을 우선으로 두는 사람이었던 거다. 마티나는 샬럿 영애를 다시 만났을 때 뺨을 얻어맞을 결심을 했다. 설령 머리채를 잡힌다고 해도 기꺼이 두피를 내어 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그가 콧잔등을 긁더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이어 그가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어제 내가 말 안 했던가?”
“뭘 말이야?”
“샬럿과 결혼한다고 한 거, 거짓말이라고.”
“……뭐?”
“그러니까…… 왕비님은 내가 한참 어렸을 때부터 날 잡아 죽일 듯이 굴었거든. 왕비님과 열 살배기 아이 중 누가 더 머리가 굵었겠어, 내가 알아서 피해 다녀야 할 시절이었지.”
“그거랑 이 일이랑 대체 무슨 상관인데?”
“덕분에 멜라니 영지에서 신세졌을 때가 있었어. 샬럿은 그때 3년 정도 같이 살면서 친동생같이 지냈던 애야.”
마티나는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이 번쩍 깼다.
“날 속였다고?”
마티나가 싸늘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되물었다. 테오도르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티나는 무엄하게도 왕의 머리 위로 베개를 휘두르고 말았다.
“잠깐, 잠깐!”
테오도르가 제 위로 떨어지는 무서운 공세를 막아 내며 항복을 외쳤다. 때리는 사람의 무력이 워낙 대단한지라 베개로 맞은 것치곤 엄청나게 아팠다.
테오도르는 황급히 팔을 뻗어 마티나를 완전히 끌어안았다. 마티나가 그대로 그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숨이 찼다. 두 가슴이 호흡할 때마다 올랐다가 내려앉으며 규칙적으로 맞물렸다.
그간의 마음고생이 전부 쓸모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화가 치솟았다. 분이 풀리지 않았던 마티나는 주먹 쥔 손으로 테오도르의 단단한 팔을 내리쳤다. 멍이 들 것 같았지만 테오도르는 신음도 내지 않고 참았다. 그녀를 화나게 만든 자신이 죄인이었다.
마티나가 심각한 낯으로 되물었다.
“화가 안 풀리는데 어떡하지?”
“내가 비겁해서 미안해. 중간에 알리려고 했는데, 당신이 아무렇지 않아 보이니까 오기가 생겼어.”
“내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고?”
마티나에게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어 그녀가 입꼬리를 굳히며 음산히 말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기분대로 행동했으면, 당신 살아서 여기 못 있어.”
역시 왕의 목을 베었던 검사의 기세는 남다르다. 테오도르는 손바닥에 배어난 식은땀을 잊어버리려 애쓰며 마티나의 등을 토닥였다. 한참 테오도르를 노려보던 마티나가 한숨을 쉬며 다시 그를 베고 누웠다. 마티나가 테오도르의 가슴팍에 뺨을 댄 채 웅얼거렸다.
“그래도 당신이랑 결혼 같은 건 안 해.”
“……그거, 나한테 주는 벌인가?”
“아니, 당신이랑 가계도 같은 걸 합쳤다간 모두가 내 문제를 물어뜯을 테니까.”
마티나는 자신이 불임인 걸 그다지 부끄러워해 본 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그게 남의 험담까지 아무렇지 않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테오도르의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일로 더 이상 스스로를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 원하면 그렇게 해.”
잠자코 수긍하던 테오도르가 이내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내가 왕이라 안 되는 거라면, 나라가 안정된 후에 다 버리고 같이 떠날까. 그럼 그때는 결혼해 줄래?”
“지금 청혼을 한 거야?”
마티나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자신이 들은 저 볼품없는 제안이 정말 청혼이 맞나 싶어서였다.
다행히도 테오도르는 멋에 살고 멋에 죽는 남자였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평생을 바치겠다는 선언을 이런 싸구려 여관에서 때울 생각은 없었다.
“내 희망 사항이야. 진짜 청혼은 반지도 가지고 와서 좀 더 멋있게 할게.”
그러나 마티나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피식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가 띤 미소는 스스로에게 보내는 조소처럼도 보였다.
“다 버릴 수 있겠어? 당신 같은 사람이.”
테오도르가 한량이라는 오해를 유발하는 성격의 소유자이긴 하나, 막상 국정을 다루는 이들 중 그의 자질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백성들의 하소연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았고 그 태도에는 애정마저 엿보였다.
어떻게 얼굴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책임감이란 걸 가질 수 있는 걸까. 마티나는 그 사고 회로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게 그녀가 사랑한 남자였다. 왕좌에 앉은 그녀의 주군에게 성을 하사받았을 적, 그 모습이 가슴에 깊게 박혔던가. 테오도르가 왕으로 살아온 세월보다 그렇지 않은 세월이 더 길었음에도, 마티나는 왕관을 쓰지 않은 테오도르를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뭐가 문제냐는 듯 가벼운 투로 되물었다.
“나보다 더 국정을 잘 돌볼 사람을 찾으면 되잖아.”
“아이도 없으면서.”
“어차피 아이를 낳아도 걔가 다 자랄 때까지는 못 기다려. 부하 중에서 찾으면 되지. 엘시어한테 왕 자리를 줘도 괜찮을 것 같지 않아?”
마티나가 대놓고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가 말도 안 된다는 듯 툴툴거렸다.
“그 애송이한테 무슨……. 걘 너무 어리고 세상 물정 몰라서 안 돼. 차라리 나한테 넘겨.”
“왕이 돼서 뭘 하려고?”
“스카이라 공작의 입을 꿰매 버려야지.”
테오도르가 배를 잡고 크게 파안했다. 그가 도통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던 통에 마티나는 그의 위에서 내려섰다. 잘못하다간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테오도르의 웃음은 한참 후에야 잦아들었다. 테오도르가 마티나의 발치로 내려가더니, 그녀의 발목을 감쌌다. 그가 마티나의 종아리를 들어 올리며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마티나는 가만히 자신의 발등 위에 입 맞추는 남자를 지켜보았다. 장난이 분명한 행위였으나 우아한 움직임에선 경건함까지 느껴졌다.
“원하는 대로 하소서, 나의 왕이여.”
마티나의 입가에도 결국 미소가 떠올랐다. 마티나는 그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쪽 발로 테오도르의 어깨를 밀어냈다.
“감히 왕의 위에 올라탄 무엄한 자가 누구지?”
“흠, 어젠 당신이 위에서 했잖아?”
“그럼 나네.”
마티나가 테오도르의 어깨를 그대로 짓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무릎을 세워 일어서자 테오도르보다 시야가 높아졌다. 마티나는 그의 뺨을 감싸고는 둥근 이마에 짧게 입 맞췄다. 단단한 팔이 어느새 그녀의 허리를 마주 끌어안고 있었다. 조금의 틈도 없이 밀착된 살갗에선 안정감이 느껴졌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보다 더 비참한 사람이 또 없었는데, 어느새 그녀의 앞날엔 희망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테오도르가 말하는 미래가 그렇게 까마득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가 왕 자리를 차지하고 벌써 수년이 지났다. 왈도의 횡포는 금방 지워 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지만, 긴 노력 끝에 흉흉해졌던 민심도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왈도의 수탈로 파인 상처가 모두 아물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고 나면 미련 없이 떠나도 되지 않을까.
마티나는 이미 이기적인 선택을 했다. 거기에 더해 이미 살 만해진 사람들에게서 테오도르를 뺏어 온다고 해서 무엇이 대수겠나 싶었다. 세상에 그를 대신할 사람이 하나쯤은 있겠지.
마티나가 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해하고 내려갈 수 있어 다행이야.”
“내려가? 어디를?”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테오도르가 득달같이 고개를 들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에 마티나는 아이를 꾸짖듯 그의 코를 짓눌렀다.
“영지에 처리할 일이 있어. 그동안 통 못 내려가 봤던 거 알잖아.”
“나랑 화해했잖아.”
“그거랑은 별개의 문제지.”
지금 수도로 돌아가 봤자 반응이 좋을 것 같지도 않았다. 기껏 퇴직을 선언하고 영지행을 결정한 것인데 왕의 손을 다시 잡고 귀환하면 얼마나 꼴이 우스워지겠는가.
그리고 겨울은 영지에서 지내겠다고 이미 언질을 남겨 둔 상태였다. 이제 와 말을 바꿀 순 없었다. 영지에서 머문 기간이 한 달을 넘긴 적이 없으니 그간 주인의 손길이 간절했을 터였다. 마티나가 일을 끝마치고 돌아갈 곳을 정한 게 테오도르의 수확이라면 수확일까.
한참 멍하니 마티나를 응시하던 테오도르가 곧 “샬럿…….” 하고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그가 썼던 샬럿이라는 극약책이 이런 식의 부작용으로 돌아왔다. 테오도르가 체념 어린 투로 되물었다.
“얼마나 있을 건데?”
“최소 반년.”
“뭐? 말이 돼?”
결국 테오도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 달만 자리를 비운다고 해도 미칠 것 같은데 반년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에 마티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너무 그렇게 놀라진 마. 나도 아쉽긴 해, 영지로 내려가면 아주 외롭겠지.”
지난밤 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잔 탓에 테오도르는 알몸이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을 그대로 감상할 수 있었다. 마티나가 빤히 테오도르의 흉악한 하반신을 내려다보자 그가 황급히 이불을 끌어왔다. 테오도르는 파렴치한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마티나를 응시했다.
“짐승 같으니…… 이 와중에도 그런 생각밖에 없지?”
마티나는 어깨만 으쓱였다. 보여 주길래 본 것뿐인데 무엇이 문제인가.
마티나에게 휘말렸다는 걸 알아챈 테오도르가 황급히 화제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어쨌든 허락 못 해.”
“당신 허락 같은 건 필요 없어.”
“그대가 낸 사직서는 내 손안에 있지.”
“일을 안 해도 돈을 계속 주겠다면 거절할 건 없지. 어차피 그러기도 전에 내 직속 상관이 먼저 날 무단결근으로 파면 처리시키겠지만.”
테오도르는 받아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입을 벙긋였다. 마티나가 그런 그를 달래듯 웃어 보였다. 그녀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
“내 영지민들이 영주의 부재 때문에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 알아?”
“거기 원래 알아서 잘 굴러가던 땅이야. 대리인을 보내면 되잖아?”
“당신이 뭐라고 했지? 주인이 자리를 비우면 금고에선 꼭 탈이 난다.”
그건 노망난 정치판의 늙은이들을 욕하려고 만든 말일 뿐이었는데.
왕의 비애 따위를 실컷 일장 연설해 놓고 더 억지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녀를 말릴 근거가 없었다. 억울하다. 원통하고 분하기 그지없었다. 테오도르가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 위로 무너졌다. 그가 베개에 얼굴을 처박은 채 참담히 중얼거렸다.
“땅은 괜히 내렸나 봐.”
“당신이 줘 놓고는.”
“이리 와, 다시 뺏어 버리게.”
테오도르가 볼멘소리를 중얼거렸다. 당연히도 마티나는 들은 체 만 체하며 이불 속으로 도망쳤다. 손이 닿는 거리였기에 그녀의 연인은 기꺼이 그녀를 붙잡아 주었다.
* * *
[―그러니 절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전 전하께서 도와 달라고 하셔서 시키는 대로 한 죄밖에 없어요. 정말입니다. 저는 전하께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도 말했었어요. 딱히 통한 것 같진 않았지만요.
안 그래도 걱정하던 와중, 두 분께서 화해하셨다고 해서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릅니다. 마음 놓고 멜라니 영지로 돌아갈 수 있게 되어 정말 다행이었어요.
혹 저를 용서하신다면, 두 영지 간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 종종 왕래하며 지내고 싶습니다. 다시 편지해도 될까요?]
영지에 다다른 마티나에겐 얼마 뒤 편지가 하나 도착했다. 발신인은 샬럿이었다. 주소가 멜라니 영지로 찍혀 있는 것을 보아 그녀는 이미 리체를 떠난 모양이었다. 편지보다 해명문에 가까운 그것은 그간의 경위를 구구절절하게 고해바치고 있었다.
테오도르에겐 화가 났어도 샬럿 영애에게까지 원망을 돌리진 않았다. 왕의 부탁을 그 누가 거절할 수 있겠는가. 다만 샬럿 영애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릴 때마다 감회가 새로운 건 사실이었다.
‘와, 진짜 독하네…….’
어쩐지 그렇게 중얼거릴 때 그녀의 눈에 당혹감 비슷한 것이 어려 있었다 했다. 당시 마티나는 샬럿 영애가 저를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으로 보고 감탄한 줄로만 알았다. 욕인 줄 알았던 그 말이 낭패를 드러낸 반응이었다니. 아무래도 샬럿 영애는 그 정도로 흔들면 마티나 쪽에서도 반발하리라 여겼던 듯했다.
테오도르의 잘못된 선택이 여러 사람을 고생시켰다. 마티나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한 다정한 말을 몇 자 적어 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했다. 이후로 샬럿에게선 종종 편지가 날아들었다.
겨울 동안은 꾸준히 바빴다. 수도에서도 영지의 업무를 완전히 놓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거리가 거리다 보니 쌓인 서류가 많았다. 주인의 부재가 길었던 탓에 쌓인 체계가 없어 업무 방식을 그녀에 맞게 조정하는 데만도 긴 시간을 소요했다.
주인이라는 감투만 차지해 놓고 막상 의무는 방치한 기분이라 마티나는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다. 기반을 일구다 보니 미래 계획도 차츰 떠올랐다. 테오도르의 말대로 그가 정말 왕위를 버릴 생각이 있다면, 나중에 함께 이곳으로 내려오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테오도르는 그녀를 도와 영지를 경영하기에 좋은 경력을 보유한 남자였다. 같은 집무실에서 노닥거리는 일도 꽤 즐거울 것이다.
마티나에게 꾸준히 편지를 보내는 건 샬럿 영애뿐만이 아니었다. 엘시어도 종종 궁에서 있었던 재밌는 일들을 알려 왔다. 하지만 마티나는 엘시어의 편지가 도착하기도 전에 대충 그 안에 뭐가 적혔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테오도르가 언제나 그보다 한발 빨랐기 때문이다.
[오늘 밤 공녀가 하룻밤 상대라도 되겠다며 나를 찾아왔어. 사실, 처음엔 귀신이라도 되는 줄 알았지. 침실에서 웬 긴 머리 여자가 툭 튀어나왔으니까.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나중에 스카이라 공작이 이 일에 관해 당신한테 이상한 소릴 지껄일까 봐 미리 알리는 거야. 당연히 나는 공녀에게 내 아랫도리는 이미 당신이 전세 냈다고 알려 줬지. 다행인 소식은 내 말을 잘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그냥 오래 버틴 덕분인진 모르겠지만― 스카이라 공작이 뒤늦게 공녀의 혼처를 찾아보고 있다는 거야.
하기야 딸이 왕의 침실에 숨어들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조금 곤란하겠지. 스카이라 공작이 순순히 내 인생에서 꺼져 준다면 나도 함부로 입을 놀릴 생각은 없어.
이제 그대만 돌아오면 돼.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는 건지 모르겠어.]
스카이라 공작이 자충수를 뒀다니 의외였다. 아니면 공녀의 독단이었을까. 과거의 연만으로도 샬럿 영애에게 죄스러워했던 자신과, 임자 있는 남자의 침실에 숨어들면서도 죄책감이 없는 공녀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런 염치를 모르는 고귀함이라면 애초에 욕심낼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테오도르는 그녀에게 반드시 알려야 하는 것에서부터 지나치게 세세하다 싶은 것까지 적어 긴 편지를 부치곤 했다. 귀찮진 않았다. 그의 글자를 가만히 손으로 짚고 있노라면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오는 듯해 기분이 좋았다.
[궁엔 왜 이렇게 재밌는 일이 없는 거지?
하루하루가 무료해. 날이 추워서 오늘은 모닥불을 피워 과일을 구워 봤어. 멜라니 영지에서 머물렀을 때 자주 해 먹었던 건데 호위들은 기겁을 하더라고. 과일을 구워 먹는 걸 처음 봐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내가 황궁 정원에 땜빵을 내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대도 이런 걸 먹어 본 적이 있나?
그대에 대해 아는 게 많다 싶었다가도 자꾸만 궁금한 게 많아져. 사소한 궁금증들이 도통 가시질 않아. 나 역시 그대에게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그대도 그곳에서 나를 생각하나?]
당연한 일이라며 마티나는 종이 위에 짧게 입을 맞췄다.
봄이 되자 그제야 숨을 돌릴 여력이 났다. 산을 얼렸던 길이 녹고 이동이 수월해지자 엘시어도 미뤄 두었던 방문을 실행에 옮겼다. 테오도르가 오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엘시어만도 충분히 반가운 방문자였다. 마티나는 성 밖까지 나와 엘시어를 마중했다. 그녀를 발견한 엘시어가 환히 웃으며 마차에서 거의 구르듯이 달려 나왔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은 여전했다. 마티나가 유쾌하게 인사했다.
“신수가 훤해졌군. 상사가 없으니 살 맛이 나나 보지?”
그 말에 엘시어가 재빠르게 얼굴을 구겼다. 그가 제자리에서 멈춰 서며 말했다.
“후작님 뒤로 온 후임이 일을 더럽게 못 하니까 조용히 하세요…….”
표정이 좋기에 요새 편히 지내나 했더니 단순히 일에서 도망친 기쁨에서 나온 미소였던가. 마티나는 그에게로 다가가 위로하듯 등을 두드렸다. 그러고는 안쪽으로 이끌었다. 한 번 물꼬를 튼 엘시어의 하소연은 도통 끝나지 않을 듯 보였다.
“영지로 가셔도 별일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이제야 내 소중함을 알았나 보지?”
“밀튼 경은 후작님께 더 잘할 걸 그랬다며 아주 웁니다.”
그녀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꽤 괜찮은 기분이었다. 마티나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혈색 좋은 얼굴에선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을 취한 자의 여유 같은 게 느껴졌다.
“후작님이 없으니 왕께서도 요즘 성질이 아주 더러워지셨습니다. 빨리 좀 돌아오세요.”
약이 오르는 기분에 엘시어가 핀잔했다. 엘시어가 마티나가 겨울 내내 보낸 일정을 알았더라면 그런 부러움도 쏙 들어갔겠지만.
“역시 사람은 빈자리를 느껴 봐야 소중한 줄도 안다니까.”
거드름을 피우듯 중얼거리던 마티나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 옛 격언은 안 좋은 기억을 함께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테오도르가 제 빈자리를 느끼게 해 주었다며 샬럿 영애를 동원했던 일은 마티나에게도 두고두고 악몽으로 남았다.
“두 분 사이는 여전하십니까?”
“편지는 꾸준하지. 그나 나나 바빠서 얼굴까진 못 봤지만.”
“하기야 궁 한쪽이 폭삭 주저앉는 일이 생겨서요. 지금 공사 인력을 불러 징계하느라 아주 정신이 없습니다.”
“누구 다친 사람은 없나?”
“다행히도요. 귀한 분의 몸에 상처가 났다면 진즉 공사 책임자의 목이 날아갔겠죠. 좌천당한 사람이 많아서 지금 인사이동에 정신이 없습니다.”
엘시어가 머리 아프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마티나는 자신이 없을 때 그런 일이 생겨서 다행이라고 팔자 좋게 생각했다.
“한데 그 바쁜 와중에 용케 여기까지 왔군.”
“아닌 게 아니라 한 달 전에 신청한 휴가를 코앞에서 뺏길 뻔했어요. 승인 안 해 주면 사직서 쓴다고 했더니 울면서 보내 주던데요.”
엘시어는 생계를 두고 협박하는 게 불가능한 거부의 자식이다. 미리 신청해 둔 휴가를 막을 방도는 없었을 것이다.
엘시어가 잘됐다는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어쨌든 잘 지내신다니 다행이네요. 아까 말했듯 왕께서 요즘 짜증이 많아지셔서, 두 분께서 또 싸웠나 했습니다. 이게 후작님이 화내실 만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 제 입장도 난처해지니까요.”
“이게 뭐지?”
엘시어는 품 안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마티나의 영지로 간다고 말하자 테오도르가 맡긴 물건이었다.
마티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분명 며칠 전에도 그에게서 편지를 받은 참인데 또 무슨 일인가. 최근 테오도르의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하니 겁이 좀 났다. 마티나는 염려 섞인 표정으로 접힌 종이를 폈다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나만 편지를 자주 하는 것 같아. 그대도 혹시 내가 귀찮나? 빨리 답장을 받고 싶어서 이틀에 한 번 파발을 보냈더니 탄원이 올라오긴 하더군.]
짜증은 무슨, 평소처럼 애정이 담긴 편지였다. 드문 연락에 대한 불만은 느껴졌지만 말이다.
이런 애정의 말들이 귀찮을 리가 있나. 바빠서 답장하는 간격을 조금 넓혔더니 금세 핀잔이 돌아왔다. 그래도 테오도르가 물어본 질문들에는 꼬박꼬박 답을 돌려주었는데 말이다.
[요즘은 잠이 잘 안 와, 그대가 보고 싶어서 그런가 봐.]
마지막 문장을 보는 마티나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엘시어가 무슨 내용이냐며 캐물었지만, 마티나는 남의 연애사에 참견 말라며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녀 혼자 간직하고 싶은 말들이었었으니까. 마티나는 엘시어가 떠나자마자 테오도르에게 앞으로는 연락을 자주 하겠다는 다짐을 담은 답신을 부쳤다.
그리고 회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편지는 그것으로 끊겼다.
* * *
그렇게 한 달간 연락이 두절되자 마티나도 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엔 상대적으로 드문 마티나의 회신에 투정을 부리는 건가 싶었지만, 그런 것치고는 소통의 부재가 지나치게 길었다.
‘무슨 문제가 생겼나?’
문득 가슴을 스친 불안함에 마티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테오도르는 짐작할 수 없는 남자였다. 샬럿 영애까지 끌어들여 이상한 연극을 했었던 걸 생각하면 어디로 생각이 튀어도 이상하지 않다.
마침 바쁜 일은 다 정리한 참이었으므로 마티나는 어렵지 않게 수도행을 결정했다. 완전히 복귀하기는 힘들겠지만, 며칠 수도에서 머물며 그와 시간을 보내기엔 충분할 것이다. 테오도르가 바빠서 얼굴을 비치지 않는 거라면 자신이 올라가면 되는 문제였다.
영지로 향했을 때와는 다른 여유 있는 이동 끝에, 마티나는 수도에 도착했다. 이전처럼 궁내에서 근무하는 인력이 아니었으므로 절차 없이 테오도르를 만나러 갈 수는 없었다. 마티나는 첫날은 저택에서 머물며 궁에 방문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던 편지처럼, 방문을 허락하는 인가도 좀처럼 내려지지 않았다. 엘시어는 휴가를 보내겠다며 피델리오령으로 내려간 참이었기에 그에게 도움을 구할 순 없었다.
조금 예의 없게 비칠 수는 있었지만, 마티나는 결국 곧장 테오도르를 만나러 가기로 결정했다. 마티나 역시 수도의 귀족으로 지낸 시절이 길었으므로 궁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테오도르의 방문을 여는 데는 약간의 불협음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지만.
마티나는 이전에 일했던 곳에 두고 온 물건이 있다는 핑계를 들어 성문을 통과했다. 괜히 미뤄 왔다 싶을 정도로 입장은 손쉬웠다. 오랜만에 궁에 왔더니 감회가 새로웠다. 마티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래 있었던 문제 때문인지 왕궁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어딘지 축 가라앉은 사람들의 표정에선 음산함마저 느껴졌다. 마티나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그녀를 막아서는 이는 없었다. 그녀는 별다른 방해 없이 테오도르가 머무는 궁까지 다다랐다. 테오도르의 방을 지키던 호위들이 마티나를 발견하고는 놀란 눈을 떴다.
“후작님? 여긴 어떻게…….”
“전하를 뵈러 왔네. 안에 계신가?”
마티나의 말에 호위들이 일순 시선을 주고받으며 눈치를 보았다. 가장 선두에 있던 헤이즐 경이 심호흡을 하며 걸어 나왔다.
“그, 후작님…….”
“왜 그러지? 설마 전하께서 여자와 같이 계시기라도 한가?”
우스갯소리로 꺼낸 말이었으나 아무도 아니라 대답하지 않았다. 헤이즐 경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좀처럼 이유를 답하지 못했다. 심상치 않은 반응에 마티나는 기민하게 이상한 점을 알아챘다.
마티나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정말?”
“아니요! 그럴 리가요. 다만, 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비켜.”
“후작님, 그런 게 아닙니다!”
마티나는 억지로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간 연락이 닿지 않은 게 변심 때문이었다고? 나 없인 못 살겠다고 말한 때로부터 채 반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마티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낮답지 않게 방 안은 몹시 어두웠다. 궁에 들어와서 내내 느꼈던 음울한 기운이 이곳에서부터 퍼지기라도 한 양.
마티나는 침대 근처에서 인기척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곧 주춤거리며 멈춰 섰다.
침대 위엔 테오도르가 누워 있었다. 잠에 들었는지, 아니면 그저 눈을 감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뺨이 야위었고 입술은 말라 있었다. 그 생기 없는 모습은 그녀가 아는 테오도르 같지 않았다. 하마터면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할 뻔했다.
마티나는 가까이 다가가 테오도르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몸이 불덩이 같았다. 테오도르가 가까스로 옅은 숨을 뱉어 냈다. 이어 그의 눈이 뜨였지만, 그녀를 알아보진 못했다. 눈동자가 탁했다. 마티나가 테오도르의 얼굴을 보며 두서없이 그를 불렀다.
“테오, 나야. 내가 왔는데…….”
테오도르의 입술이 벌어졌다.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려온 듯도 했지만, 워낙 작았던 탓에 무어라 말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마티나는 테오도르의 입에 귀를 가져갔다. 그가 마디마디를 끊어 가며 겨우 말했다.
“심장이…… 너무 뛰어, 괴로워.”
테오도르가 숨을 헐떡였다. 딱히 마티나가 앞에 있는 것을 알아 하는 말 같진 않았다. 그보다는 아이의 칭얼거림과 닮아 있었다.
뒤따라 들어온 헤이즐 경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럽게 마티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후작님, 잠깐 뒤로……. 나가서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마티나는 제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마티나는 겨우 고개를 돌려 헤이즐 경을 바라봤다. 헤이즐 경은 올 게 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가 멍하니 물었다.
“……전하께서 왜 저러시지?”
대답이 듣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듣고 싶지 않기도 했다. 헤이즐 경은 테오도르의 앞에선 이야기를 늘어놓을 생각이 없는지 재차 마티나를 불렀다.
“일단 나오세요, 간만에 편히 잠드신 겁니다.”
저게 편히 잠든 거라고?
도무지 상황과 맞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번엔 헤이즐 경의 태도도 완강했다. 마티나는 테오도르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면서도 순순히 헤이즐 경에게 이끌려 나왔다. 그 외에 더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헤이즐 경은 마티나를 먼 복도로 데려갔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그는 먼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전하께선 저렇게 된 걸 후작님께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고, 금방 나을 거라며……. 저희가 보기엔 절대 그럴 것 같지 않았지만요.”
헤이즐 경이 피곤하다는 듯 눈가를 문질렀다. 마티나는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도 건강했던 왕이 왜 갑자기 앓아누웠단 말인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마티나가 다급한 투로 되물었다.
“그게,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전하께서 대체 왜 저러시는 건가? 어디가 아프신가? 사람이 근처에 있는 걸 보니 전염병은 아닌 듯한데, 금방 나을 수 있는 거겠지?”
“이건 병이 아닙니다. 방에 들어가는 걸 말리지 못한 건, 아무래도 후작님께서는 아레타 출신이시니 방도를 알 듯도 하여…….”
“아레타 출신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린가?”
“왈도, 그 찢어 죽일 놈이 산 원한이 저희 왕에게까지 닿았습니다.”
헤이즐 경이 분하다는 듯 이를 악물며 말했다. 헤이즐 경은 간간이 얼굴을 일그러뜨려 가며 그가 아는 이야기를 전부 늘어놓았다. 왈도가 레타 집시들을 토벌할 적 피로 이어지는 저주를 받은 적이 있으며, 왕께 증상이 나타난 후에야 뒤늦게 그 존재를 알았다는 게 논지였다.
“후작님께선 아는 게 없으십니까? 후작님도 레타 집시 출신이 아니십니까?”
마티나는 황급히 기억을 되짚었다. 무리마다 주술사라는 존재가 하나씩은 있긴 했지만 그건 최연장자에게 주는 명예직에 가까웠다. 마티나 무리의 주술사는 살아온 지혜로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들려주곤 했다. 당연히도 지원 자격에 사람을 저주하는 능력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런 힘이 존재한다고 풍문으로는 들었지만, 평화로운 삶 속에선 괴담 정도의 온도로 와닿을 뿐이었다.
마티나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말이……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그딴 힘이 진짜로 존재할 리 없잖아? 우리 무리의 주술사는 신년에 점치는 운수조차 한 번도 정답을 맞힌 적이 없었어.”
마티나의 반응에 헤이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희망이 사그라든 눈빛이었다. 그가 체념한 어조로 말했다.
“……후작님, 이건 실존하는 힘입니다.”
“병일 거야. 궁의가 제대로 진단하지 못해서 주술 타령이나 하는 게―”
“후작님, 왈도의 죽음 후 별궁에 유폐되었던 태왕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 나갔던 것…… 기억나십니까?”
마티나는 입을 다물었다. 왜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인가.
왈도가 죽은 후, 자연히 그의 편을 들었던 태왕의 처분도 도마 위에 놓였다. 테오도르와 뜻을 함께했던 공신들 대부분은 태왕도 함께 척살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그를 별궁에 유폐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몇은 테오도르에게 아직 부자의 정이 남아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의견은 공신력을 잃었다. 태왕의 비보가 알려진 것이다.
시체의 상태가 워낙 험악했던 탓에 자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덕분에 누군가 사나운 짐승을 들여놓은 건 아니냐는 설이 돌았다. 그런 힘을 가진 크기의 짐승을 왕궁에 들이는 건 불가능했으므로, 대부분은 그것이 왕의 인가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워낙 수법이 잔인하여 저희끼리는 왕의 복수였다고 쉬쉬했지만…… 사실은 그런 게 아니었던 겁니다. 전하께서는 결백했어요.”
“태왕이 죽은 게 저주 때문이었다 이 말인가?”
“그런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럼 지금까진? 지금까진 왜 멀쩡했지?”
“알 수 없습니다.”
마티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헤이즐 경은 농담 따위를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마티나는 부정하고 싶은 현실을 겨우 받아들였다. 그 시점부터 몸이 무섭게 떨리기 시작했다.
마티나가 다급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그 빌어먹을 저주가 대체 뭔데?”
“모릅니다.”
“……뭐?”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반응하는 주술인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또 무엇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왈도의 측근은 다 죽었으니까.”
사람이 저렇게 앓는데 방법을 모른다니. 태왕은 사지가 찢겨 죽었다. 아니, 떨어진 살점이 팔과 다리 중 어디에 붙어 있었는지도 분간할 수 없었으니 그보다 더 상태가 심각했다.
테오도르가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가 저렇게 아픈데 자신은 영지에서 왜 편지가 안 오나 원망이나 하고 있었단 말인가?
현실감이 없었다. 마티나는 떨리는 손을 겨우 감쌌다. 경련하는 오른손을 짓눌렀지만, 반대쪽 팔도 같은 꼴을 하고 있었던 탓에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마티나는 헤이즐 경이 테오도르의 명을 어기고 그녀에게 이 일을 알린 의도를 알아챘다. 그녀가 레타 집시 출신이라는 점 외에도 한 가지 다른 이유가 더 있었다. 마티나가 파리한 입술을 열어 물었다.
“……왈도를 가까이서 지켜봤던 이들 중, 남은 건 나 하나라 이건가?”
헤이즐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레타 집시의 힘만큼이나 왈도의 수상점 역시 짐작할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흉악한 성격을 제하면 왈도의 일상생활은 다른 사람과 별로 다른 점이 없었다. 마티나는 왈도와 밤을 지내는 일이 많았지만, 그의 몸에서 열이 난다고 느껴 본 적도 없었다. 그에게선 어떤 기미도 느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가 레타의 저주로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다면 왜 마티나가 왈도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굴욕을 자처했겠는가?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하지만 테오도르를 살릴 열쇠는 그녀에게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타인에게 묻고자 해도 그럴 사람이 없었다. 왈도의 측근을 전부 참수했던 건 다름 아닌 마티나의 칼이었다.
“난……. 나는…….”
마티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이대로 두었다간 환자가 둘이 될지도 모르겠다. 결국 헤이즐 경이 옅게 한숨 쉬었다.
“여독이 풀리지 않으셨을 텐데 일단 들어가서 쉬십시오. 만일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다면 언제든 저를 찾아 주시고요.”
* * *
이후 마티나는 테오도르를 오래도록 만나지 못했다.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주치의의 강권 때문이었다. 왕의 방문 앞까지 갔다가 돌아서는 일이 잦았다. 혼자인 것이 사무칠 때면 테오도르와 자주 갔던 후원의 비밀 장소로 향했다. 멍하니 잔디를 베고 누웠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꿈에선 건강한 연인이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등장해 그녀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그리고 깨어나면 어김없이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가끔 테오도르가 편히 잠든 날엔 짧은 만남이나마 허락받는 행운도 있었다. 테오도르는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지만, 홀로 불안함에 잠겨 있는 것보단 그의 손을 잡고 있는 편이 나았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눈에 열이 몰렸다.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아 보려 해도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이어지면 버텨 낼 수가 없었다. 짓무른 눈가가 마를 새가 없었다. 지옥 같은 시간들이었다.
주변인들의 간절한 마음을 알아차린 것인지 다행히도 테오도르는 머지않아 정신을 차렸다. 마티나는 수도에 다다른 지 2주가 넘어서야 겨우 대화가 가능한 상태의 테오도르와 만날 수 있었다. 다만 운신이 힘든 상황이었기에 그는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는 게 고작이었다.
그의 낯빛은 흐렸지만 자세만은 언제나처럼 꼿꼿했다. 왕이란 것은 이런 걸까. 아플 게 분명한 상태인데도 남에게 보여지는 자세 따위에 힘을 들여야 하는, 몸에 완전히 배어 버렸을 고귀함.
마티나는 멍하니 그녀의 왕을 응시했다. 테오도르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웃었다.
“왔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
“얼굴 보니까 좋아. 영지에선 어떻게 지냈어? 분명 아주 바빴겠지?”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데도 테오도르는 홀로 곧잘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엔 어긋난 시계처럼 맞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달라진 계절이나 자리를 비운, 혹은 채워진 사람들의 존재가 그러하다.
지금이 그가 말하는 일들로부터 족히 두어 달은 지난 시점이라는 것을, 그는 알까?
마티나가 파리한 입술을 열었다.
“왜…… 말 안 했어?”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멎었다. 그는 잠시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마티나를 응시했다. 마티나가 일그러진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것에 반해 테오도르는 외려 평온한 낯을 하고 있었다. 꼭 환자가 뒤바뀐 듯한 광경이었다.
이윽고 테오도르가 힘없이 웃었다.
“그대에게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당신이 아픈 걸 알았으면 내가…….”
황급히 반박을 늘어놓던 마티나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적어도 그의 앞에서만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싶었다. 테오도르처럼 활달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그가 조금이라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바랐다.
그러나 참을 수 없었다. 숨죽인 흐느낌 끝에 눈가가 젖어 들었다. 그녀는 숙인 고개를 잠시간 들지 못했다. 테오도르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었다.
그때 마디가 긴 손이 흐린 시야에 들어왔다. 테오도르가 손끝으로 그녀의 눈 밑을 쓸며 중얼거렸다.
“봐, 울잖아.”
마티나는 고개만 내저었다.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다간 그대로 오열해 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테오도르가 그를 적신 마티나의 눈물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운명이 참…… 웃기지.”
허탈한 목소리였다. 그만큼 이 일은 신의 질 나쁜 장난 같았다. 왈도는 마티나와 테오도르의 원수였다. 그 금수 같은 인간을 그들만큼 증오한 자가 또 없었다. 그런데 하늘은 그들을 왈도의 폭정에 고통받게 한 것도 모자라, 그의 죗값까지 대신 치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테오도르는 자신이 잊어버렸던 형제 관계를 이런 식으로 되새기게 될 줄은 몰랐다. 단 한 번도 형제라 생각해 본 적 없던 인간과 가계를 같이했다는 이유로 죽는다니, 참으로 우스운 연좌제가 아닌가.
“평생의 숙적을 치워 놓고, 그대를 얼러 미래까지 약속해 놓고.”
“…….”
“이젠 정말…… 다 가진 것 같았는데.”
남아 있는 건 행복한 날들뿐인 줄 알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안정된 기반, 그리고 주변의 인망까지 그에게 있었다.
그런데 잔혹한 신은 이제 와 그것을 모두 다 앗아 가겠다 말하는가?
테오도르가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마티나는 그가 자신처럼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윽고 드러난 그의 표정은 일그러졌되, 물기가 묻어난 흔적은 없었다. 마티나가 그런 그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를 악문 채 겨우 말했다.
“왈도를 죽이지 않았다면…… 달랐을까?”
마티나는 평생을 자랑스러워했던 그녀의 복수를 처음으로 후회했다. 왈도가 살아 있었다면 어떤 잔인한 고문을 해서든 이 저주가 무엇인지 밝혀낼 수 있었으리라. 왈도가 저주를 받고도 살아남았다는 건, 그는 해답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니까. 아니, 애초에 왈도가 존재했다면 이따위 불운이 테오도르에게로 흘러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테오도르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별로 하고 싶진 않은 가정이야. 의미도 없고. 왈도가 내게 병증이 나타난 걸 알았다면 일찍 죽으라는 저주나 쏟아 냈겠지.”
“……그래, 설령 왈도가 죽었다고 해도 우리끼리 해결할 수 있어.”
마티나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재차 말했다.
“방법이 있을 거야.”
마티나는 이를 악물었다. 답을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믿음직한 신하들이 모두 왕을 살리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테오도르가 인망 있는 사람이라서도 그렇지만, 더 이상 이 나라에 왕이 될 수 있는 자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왈도는 자신에게 반하는 세력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대개는 잔인하게 정리했다. 후계를 이을 수 있는 그럴듯한 족보를 가진 자들은 하나같이 죽어 나간 지 오래였다. 테오도르의 취급이 유폐에 그쳤던 건 그나마 태왕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에게 받은 마지막 연민이 생존이었기에, 아마 테오도르도 왈도의 손을 들었던 아비에게 칼을 휘두르진 않은 것이리라.
기실 얼마 전까지 다른 왕위 계승권자가 없다는 사실은 테오도르의 세력에게도 기막힌 행운으로 여겨졌다. 왈도가 이미 주변을 깨끗이 정리했던 덕분에 다 된 상에 머리를 들이미는 승냥이들이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지금이다. 왈도의 뒤엔 테오도르가 있었지만, 테오도르의 뒤엔 아무도 없었다. 아마 스카이라 공작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마티나를 헐뜯고 있지 않을까. 마녀가 왕의 눈을 현혹해 붙잡았기에 유사시를 대비할 후손을 낳지 못한 것이라고.
문득 테오도르가 입을 열어 말했다.
“그대가 불임인 걸 원망한 적도, 반겼던 적도 없는데 이번만은 그런 생각이 들었어. 다행이었다고.”
마티나가 의아한 눈을 들었다. 테오도르가 마티나의 생각과 주제는 같되, 조금 다른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테오도르는 마티나가 스스로를 탓하기를 바라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꽤나 그럴듯한 근거를 들어 둘 사이에 자식이 없었던 걸 행운으로 포장했다.
“왈도에서 태왕, 태왕에서 나. 만일 내가 아이를 가졌다면 뻔하지. 아마 그 애가 다음 순서가 됐을 거야.”
그러나 마티나는 표정을 굳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추측에는 단 한 가지, 이 저주가 해결되리라는 희망이 배제되어 있었다. 그는 꼭 자신이 반드시 죽어 나갈 것처럼 말했다. 그 초연함이 못내 불안하여 마티나는 황급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
마티나가 아니라며 퍼뜩 언성을 높이려 할 때였다. 테오도르의 미간이 언뜻 좁혀졌다. 테오도르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와 손을 마주 잡고 있었던 마티나는 그의 몸에 힘이 들어간 걸 알 수 있었다. 마티나는 황급히 일어서 그를 살폈다.
“괜찮아? 의사를 부를까?”
“아니…….”
테오도르가 힘겹게 고개를 내저었다. 마티나는 고통에서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황급히 이런저런 말을 쏟아 냈다.
“헤이즐 경이 조사단을 꾸려 지금 지방으로 내려가 있는 거 알아?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온 나라를 뒤지고 있어. 당신은 몸 생각만 하면 돼.”
마티나를 보는 테오도르의 얼굴엔 알 수 없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이어 그가 작게 미소 지었다. 테오도르가 한참 뜸을 들인 후에야 말했다.
“그러길 바라고 있지.”
“그렇게 될 거야.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은 않는 거야. 내 말, 알아들었지?”
마티나가 그리 속삭이며 그의 이마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식은땀이 흥건히 배어 나와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테오도르가 눈을 감은 채 작달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가 쓰다듬어 주면 조금 나아지는 것도 같아.”
철 지난 작업 멘트다. 마티나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리며, 동시에 눈물을 함께 떨구었다. 그녀가 흐려진 목소리로 겨우 대꾸했다.
“……이런 순간까지, 당신은…….”
“저런, 진심인데.”
테오도르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마티나는 그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마티나가 주문을 외듯 말했다.
“괜찮아질 거야.”
테오도르는 미미한 웃음을 띨 뿐 대답하지 않았다.
* * *
마티나의 바람을 비웃듯 상황은 더더욱 안 좋은 방향으로 치달았다. 헤이즐 경이 이 저주에 대해 알아낸 점은 마티나가 테오도르를 찾아왔을 당시에서 하등 발전된 점이 없었다. 몇 날 며칠을 기다려도 그럴듯한 해결법은 나타나지 않았다. 마티나 역시 나름대로 왈도와 함께 있었을 당시의 흔적을 무던히도 뒤졌으나, 그녀의 간절함을 골리기라도 하듯 발견된 건 없었다.
기다림이 반복될수록 절망의 기운은 짙어졌다. 테오도르가 테오도르 같지 않은 날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드물게 정신이 들 때면 폭력적이었고, 고통을 못 이겨 집기를 부수거나, 열에 앓다가 혼절하는 일이 잦았다. 이성을 놓았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는 시간들이 무수히 반복되었다. 테오도르의 상태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나빠지고 있었다.
마티나는 조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왈도가 죽었을 당시 마티나는 고통스러운 날들은 모두 끝났으며, 이젠 진정한 해방을 맞이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왈도는 죽어서까지 그녀에게 고통을 주고 있었다. 저를 벤 천한 집시를 용서하지 못해 곁에 머물며 악담이라도 퍼붓고 있는 걸까. 그보다 더 우스운 점은 그녀를 괴롭게 하는 게 다름 아닌 레타의 저주라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밤 친구가 된 악몽 속에선 종종 어릴 적의 모습이 비쳤다.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모여앉은 밤, 문득 집시들과 어머니의 모습에 이질감이 어린다. 그들은 삽시간에 살아 있는 자가 아닌 망령의 모습을 뒤집어쓴다. 어떻게 원수의 핏줄을 제 목숨보다 아끼었느냐 죽은 친지들이 묻는다. 테오도르와 동침할 때 이 같은 악몽을 꾸진 않았느냐 조소한다.
마티나는 일족의 원수를 갚았지만 동시에 그 핏줄과 사랑에 빠졌다. 이것은 배반자에게 내려진 속죄일지도 모른다.
어느 모로 보나 완벽한 저주다. 그녀에게 찾아온 비극을 그 밖의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어쩌면 왈도의 침소에 갇혀 있던 때보다 더 절망적인 시간을 마주했다고 보아도 좋았다.
눈물은 마르는 대신 흐르고 흘러 가슴 깊은 곳에 얹혔다. 적어도 밖에 내보이지 않을 수는 있게. 마티나는 테오도르와 함께 있을 땐 부러 활달하게 행동하려 애썼다. 본래 자신이 그런 성격이 아닌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상대였지만, 진실 된 눈물보다는 거짓된 웃음을 내보이는 편이 나았다. 가짜로 웃고 있노라면 정말 희망적인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녀는 더더욱 이를 악물었다.
마티나는 방법이 있다고 믿고 싶었고, 따라서 결코 슬퍼해서는 안 되었다. 건강을 회복할 사람을 두고 어째서 상갓집에라도 온 것마냥 눈을 적셔야 한단 말인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테오도르는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겪어 보지 못한 자의 오만한 판단일 뿐이었을까.
하늘의 색이 유독 짙은 날, 테오도르가 마티나를 불러들였다. 테오도르가 제정신으로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았던 탓에 그들의 만남은 대개 마티나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 테오도르는 아픈 모습을 연인에게 내보이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드물게 청해진 만남에 마티나는 급히 테오도르의 방으로 향했다. 언제 그가 정신을 차릴지 몰라 마티나는 요즘 거의 궁 안에서 기거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마티나는 뛰듯이 달려 테오도르가 머무는 궁에 도착했다. 물을 부탁한 시녀보다 마티나가 다다르는 게 더 빨랐다. 테오도르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결심이 흐려질 시간을 두지 않고 그녀에게 말을 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불렀어?”
“…….”
“오늘은 날이 좋지. 창문을 좀 열까?”
마티나가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인사를 전했다. 처음, 테오도르가 막 정신을 차리고 마티나를 만났을 때와는 다른 상황이었다. 그때 부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던 건 테오도르 쪽이었다.
테오도르는 정치가였고 언제나 남을 속이는 데 익숙했다. 다정히 웃어 보이던 테오도르가 사실은 무참하도록 끔찍한 심정이었다는 사실을, 마티나는 평생 알지 못할 것이다.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문을 열고 들어오는 마티나를 보며 테오도르는 드디어 이 알량한 거짓말이 끝났다고 생각했었다. 마티나에게 알리지 말라 신하들에게 신신당부를 해 두었건만 오래 그녀를 속일 수는 없었던 거다. 이미 충분히 상처만 주어 왔는데, 심지어 그녀에겐 더한 아픔이 남아 있었다. 테오도르는 처음으로 그녀를 붙잡았던 일을 후회했다.
그는 자신이 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병증이 심해지기 전엔 테오도르에게도 마티나와 같은 바람이 있었다. 나아지리라는 기대, 곧 해결되리라는 희망. 그러나 그것은 천천히 부식되어 이젠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테오도르는 왕이었다. 일국의 왕이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도 이를 해결할 방법이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수확 없이 돌아올 때마다 헤이즐 경은 고개를 떨구었다. 테오도르는 더 이상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온 나라를 뒤진다면 해결책이 나오긴 할까. 아니, 애초에 그때까지 버틸 수 있기는 한가.
최선이 없다면 테오도르는 차악을 선택해야 했다. 적어도 그는 최악의 형태로 죽고 싶진 않았다.
“티나, 난 곧 죽을 거야.”
그것은 어떠한 깨달음과도 같았다. 테오도르의 말에 둘 사이에 을씨년스러운 정적이 찾아들었다. 당사자인 테오도르는 오히려 담담한 기분이었다. 반복해 곱씹어 가슴 깊이 새겨 두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티나가 애써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 발악했던 사실이기도 했다.
테오도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티나가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딴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아니, 난 이제 알겠어.”
테오도르가 핏줄이 솟은 팔목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본래 그의 살갗은 이런 형태를 하고 있지 않았다. 건강한 근육으로 탄탄했던 몸은 어느새 흉측하게 말라 있었다. 핏줄이 불거진 사지는 마치 괴물의 것처럼도 보였다.
이런 몸을 어찌 산 자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테오도르는 고통에 정신을 놓을 때마다 죽음에 한 발짝씩 가까워지고 있는 걸 느꼈다. 식사가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고 거동조차 힘겨웠다. 태왕처럼 잔인한 죽음을 맞이하기도 전에 자진해서 끝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참기 힘든 고통이 밀려들 때마다 포악해지는 성격과 주변인에게 쏟아 내는 폭언,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국정과 그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우는 연인까지.
이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없었다. 테오도르가 고통 속에서 말했다.
“티나, 네가 날 죽여 줘.”
“뭐……?”
마티나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잔인하게 말을 이었다.
“왕이 될 인재가 없어. 왕권이 제대로 안정되지도 않은 때야. 그리고 이 왕궁에 남아 있어야 할 씨앗은 왈도가 전부 베었지.”
예정된 죽음을 받아들인 후, 테오도르는 스스로의 사후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모두의 걱정처럼 그에겐 뒤를 이을 자식이 없었다. 테오도르는 단일된 후계가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 어떤 결과가 찾아오는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왕좌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싸움으로 기근이 들었던 과거가 멀지 않았다.
“그게……, 그게 무슨 말이야.”
마티나가 더듬더듬 되물었다. 대뜸 던져진 그의 말은 꼭 낯선 타국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았다. 분명 뜻을 갖고 말하는데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지 않나. 이 나라에 후계자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죽여 달라는 그의 말에 대체 어떤 연결 고리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테오도르는 곧 스러질 제 목숨이 어떻게 하면 가장 유용히 쓰일 수 있을지 기민하게 알아챘다. 너무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 그의 연인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방식으로.
“내가 이대로 죽으면 뒤에 이어질 꼴은 뻔해.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인 귀족이라면 모두가 이 왕좌를 물어뜯으려 난리를 칠 거야.”
“장난은 이쯤에서 멈춰, 정말 화내기 전에.”
“알지? 왕궁법은 부인에게 권력을 주지 않아. 섭정이 없는 이상 네가 이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어.”
그가 놀라운 발견이라도 했다는 듯한 어조로 과장스레 되물었다.
“하지만 나를 베고 새 나라를 세운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침내 마티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녀의 얼굴은 무섭도록 하얗게 질려 있었다. 테오도르는 그런 마티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분명한 눈빛은 이 이야기가 한낱 장난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믿을 만한 수하들과는 모두 이야기를 마쳤어. 반란은 아주 부드럽게 성공으로 이어질 거야.”
마티나는 미친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테오도르의 세력은 젊은 축이었다. 왈도를 벤 공적을 세웠단 이유로 마티나를 받아들여 준, 시야가 트인 인물들이기도 했다. 그들이 테오도르를 죽이고 새 왕을 만들자는 정신 나간 제안에 동의했단 말인가? 그들이 그러고도 왕의 기사라고 불릴 수 있나?
“내가 그 짓을 할 것 같아?”
마티나가 표독하게 되물었다. 그녀의 손이 배신감에 떨리고 있었다. 그의 제안에는 마티나를 향한 배려가 배제되어 있었다. 그녀를 한낱 장기 말로 생각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이야기다. 머리에 쓸 관보다 더 중요한 걸 알았기에 그와의 결혼도 거절했던 마티나였다. 그깟 왕좌를 위해 사랑하는 연인을 베라니, 그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마티나는 테오도르가 너무 아픈 나머지 이성을 놓았다고 여기기로 했다. 그가 제정신이라면 이럴 리 없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설득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당신은 구국의 영웅이야. 당신만 한 적임자는 없어.”
“왕가를 유지하는 건 정통성이야. 사람들이 천한 집시 출신의 왕을 받아들일 것 같아?”
“세상이 변하면 인식도 바뀌는 법이지. 원래대로라면 당신이 귀족이 되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이었어. 모든 게 그렇지. 한번 뒤바뀌고 나면, 그 후엔 바뀐 사실이 진리가 되는 거야. 가장 밑바닥에 있었던 자가 왕이 된 과거가 이미 이 대륙에 있어. 사람들은 그를 기꺼이 신의 아들로 모셨지.”
“이 나라는 블란체야! 당신의 성과 같은 이름을 한!”
“이 핏줄은 저주받았어. 새 왕조가 시작되기 적합한 때야.”
낯빛은 파리했지만, 그의 눈만은 어느 때보다 분명한 빛을 띠고 있었다.
마티나는 그만 의자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어떤 기분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런 말을 해야 하는 테오도르가 불쌍한 듯도 하다. 혹은 듣고 있는 제게 더 연민이 생기기도 한다. 비참한 듯도, 화가 난 듯도, 혹은 그저 그에게 열렬히 입을 맞추고 싶은 듯도…….
마티나가 일그러진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눈물과 함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겨우 고개를 들어 테오도르를 응시했다. 떨리는 목소리 탓에 말의 마디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게…… 정말 나를 위한 거라고 생각해?”
“아니, 이건 그대를 위한 게 아니야. 나를 위한 거지.”
“테오, 지금―”
테오도르가 마티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난 지금 내 나라를 위해서 그대에게 희생하라 말하고 있는 거야.”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테오도르가 마티나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은 딱 한 가지였다.
마티나의 눈에서 빛이 꺼져 들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무릎 위에 얼굴을 묻었다. 무엇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고 아무것도 믿고 싶지 않았다. 그저 어둠 속에 파묻혀 이 시간이 멈추기만을 바랐다.
왜 이런 순간에는 꼭 가장 행복했던 때가 떠오르는 걸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쫓아와 밤을 보냈던 남자다. 같은 눈을 한 사람일진대 저 푸른 눈동자가 지금은 시리도록 차게 느껴졌다.
테오도르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감쌌다. 그녀에게서 흐른 눈물이 테오도르의 손바닥을 적셨다. 마티나가 겨우 눈을 들어 테오도르와 시선을 마주했다. 서로를 보고 있지만 동시에 그렇지 않은 눈과.
테오도르는 입술을 다문 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마티나는 문득 그 표정이 몹시 낯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수도로 올라와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때 보았던 눈이다.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한 게 아니다. 처음부터 테오도르는 그녀를 보며 속으로 이런 계산을 하고 있었던 거다.
테오도르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의 마른 입술이 스치기 전, 마티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손을 뻗어 테오도르를 밀어냈다.
“나한테 이럴 자격 없어, 당신은.”
마티나는 테오도르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의 손이 천천히 미끄러지듯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그를 떠났다.
* * *
다음 날 마티나는 짐을 간단히 추려 수도를 떠났다. 그것은 테오도르가 한 제안에 대한 완곡한 거절이기도 했다. 그의 말도 안 되는 요구는 재고할 가치도 없었다. 마티나는 그와 의미 없는 입씨름을 하기보단 실질적인 대안을 찾길 바랐다.
마티나는 왈도의 곁에 오래 머물렀으므로, 대략적이나마 그가 습격했던 군락들의 위치들을 알고 있었다. 왈도가 받은 것은 레타의 저주였다. 레타의 흔적을 되짚다 보면 무언가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헤이즐 경이 이미 살폈던 부근을 제하자 추려 낸 목적지는 한 손에 꼽혔다. 마티나는 가장 가까운 곳부터 차근차근 살펴 나갔다.
그러나 이미 모두가 죽은 지금 무언가를 알아낼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들이 살아간 터전을 되짚고자 했으나 그마저도 마땅치 않았다. 레타 무리는 진득이 한곳에 머물러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목책을 세우고 천막을 두르는 간단한 주거 형태로 짧게 기거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몇 달, 혹은 반년, 지형이 좋다면 일 년여 정도까지 머물렀다가 다음 해가 되면 미련 없이 떠났다.
그럴듯한 건축물이 아니었기에 찾아낸 단서들은 극히 미미했다. 기껏 방문해 봐도 폐허는커녕 나뭇조각 하나 보이지 않기 일쑤였다. 그나마 흔적이 남아 있는 곳에서도 마티나는 어릴 적 자신이 알았던 것과 비슷한 생활 양식을 마주쳤을 뿐이다.
보통 이런 것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일진대 사람이 모두 죽고 없다. 지금까지 헤이즐 경이 방도를 찾아내지 못했던 건 결코 그가 무능해서가 아니었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마티나는 결국 레타 집시들의 근원을 찾아 아레타 고원까지 다다랐다. 마티나도 한 번도 와 본 적 없던 먼 조상의 터전이었다. 레타 무리의 선조였다는 아레타인들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근방에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는 산 아래의 작은 마을 하나가 끝으로, 주민의 수도 적었다.
외지인의 방문이 신기한 듯 마을 사람들은 잠시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평생 같은 곳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들의 입을 여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마티나는 신분을 숨기고 호기심 많은 여행자인 척 가장했다. 아래 지방에서 가져온 이런저런 물건을 내어 주고 인심을 샀다. 도시에서 온 힘 좋은 아가씨로 사람들의 눈에 익은 후로는 다행히도 몇 이야기를 얻어들을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아레타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아레타인들은 블란체에 의해 정복되었고 문명의 불씨는 야만이라 불렸던 특색을 지웠다. 후미진 지방에 살고 있다고는 하나 마을 사람들도 결국 블란체인이었다.
그럼에도 지역에 설킨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곳의 원주인들과 기묘하게 얽힌 것들이 있었다. 마티나는 아레타인들이 화산을 힘의 근원이라고 믿었던 데 주목했다. 레타에게 특별한 힘이 있다면 조상과 같은 샘을 공유하지 않겠는가.
마티나는 결국 산을 오르기로 결심했다. 다만 산세가 험하고 중반부부터 만년설이 있었기에 지역 주민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녀가 계획을 알리자 다급한 만류가 돌아왔다.
“아이고, 저길 오르려고? 아서요, 아가씨. 토박이들도 이 계절엔 못 가는 곳이야.”
“봄이 왔는데 그래도 좀 상황이 낫지 않습니까?”
“워낙 고도가 높아서 여름이 되어야 좀 녹아. 그때도 길이 미끄러워서 다칠 위험이 크고……. 거길 꼭 가야겠어? 왜 그러는데?”
얼마간의 돈을 주고 잠자리를 빌린 집의 아주머니였다. 며칠 지내는 동안 정이라도 들었는지 걱정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마티나에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마티나 역시 알았다. 산에 오른다고 해도 답을 찾을 가능성은 극히 미미하다는 사실을. 어느 하나 실마리조차 잡지 못해 버둥거리고 있는 상황이다. 실체 없는 샘을 찾아 사막을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혹시 모를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무엇이든 해 봐야 했다.
다만 하나 걱정되는 건 여기까지 다다르는 동안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점이었다. 외지에 있는 그녀가 궁의 소식을 전해 들을 방도는 없었다. 테오도르의 상태가 염려스러웠다.
어차피 산을 오르기 위해선 인력과 도움이 필요했다. 마티나는 우선 수도로 돌아가기로 했다. 경장을 차리는 내내 그녀는 왕만을 생각했다. 오래도록 보지 못했는데도 기억 속에선 마냥 선명한 얼굴이었다.
아무리 먼 지방이라도 왕의 죽음쯤 되는 큰일은 금방 소문이 퍼지기 마련이었다. 아직까지 국서 소식이 들려오진 않았으니 그는 잘 버티고 있는 것이리라. 어쩌면 상태가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그가 생각을 바꿨기만을 바랐다.
마티나는 밤낮으로 말을 달려 리체로 돌아왔다. 그녀조차도 방안을 찾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아레타 고원을 들어 그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문제는 성문을 통과할 때 벌어졌다. 마티나의 얼굴을 본 경비병들이 대뜸 그녀를 포박한 것이다. 너무도 의외의 일이라 마티나는 반항할 생각도 못 했다. 다른 인물로 오해받았나 싶어 신분을 대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화가 나기보단 어이가 없었다.
마티나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잠시 지방에 다녀온 것뿐이며, 왕께 보고할 게 있으니 안내를 부탁한다고 반복해 말했다. 그런데 마티나가 왕을 입에 담자 병사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닥쳐라, 이 반역자야! 왕께 은혜를 원수로 되갚아?”
마티나는 당혹감에 젖어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반역자가 있다면 외려 자신을 죽여 달라 제안한 테오도르 쪽이 되리라. 마티나는 그의 제안을 거절한 입장이 아닌가.
마티나의 얼떨떨한 표정에 병사가 욕설을 지껄이며 침을 뱉었다. 그와 동시에 멀리서 아는 얼굴이 다가왔다.
“멀리서부터 목소리가 시끄럽더군. 이 일은 극비이니 소란을 벌이지 마라. 전하껜 내가 인도해 가겠다.”
왕의 호위 중 하나인 토리드 경이었다. 테오도르와 마티나와 함께 있으면 대신 흐뭇한 표정을 지어 주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마티나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토리드 경, 이게 무슨 일이지? 이들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게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토리드 경은 굳은 얼굴로 마티나를 어딘가로 인도할 뿐이었다. 보통 잘 다니지 않는 길을 통했기에 처음에는 헷갈렸으나, 그는 분명 마티나를 테오도르의 처소로 데려가고 있었다.
마티나는 이 상황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마티나가 문 앞에 서서 주춤거리기만 하자 토리드 경이 그녀를 재촉했다.
“들어가십시오.”
그의 존대엔 배신자를 대하기엔 애매한 친절이 섞여 있었다. 토리드 경은 마티나의 결박된 손을 풀어 주기까지 했다. 그녀가 정말 반역자로 오해받았다면 결코 하지 못했을 행동이다.
마티나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떼어 문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그녀가 기억하는 모양과 똑같았다. 다만 해가 비추는 시간인데도 몹시 어두웠다. 테오도르는 창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마티나는 천천히 걸음을 디뎌 그의 뒤에 가 섰다.
그녀는 어쩌면 당연한 추론을 내렸다.
“이게…… 무슨 짓이야?”
테오도르가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야 말았다고.
“미안해 티나, 처음부터 네 동의는 구하지 않을 작정이었어.”
그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갈라진 음성은 아예 다른 사람의 것 같기도 했다. 마티나가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가 없는 동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대가 내 말을 따르질 않을 걸 알았어. 그렇다면 나를 벨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겠지.”
“그래서 날 반역자라고 명명했어? 그따위 날조가 먹힐 것 같아?!”
“티나, 나는 우군이야. 권좌에 눈이 멀어 충신도 버리고 만 피도 눈물도 없는 사내지. 그리고 그대는 새로운 정의가 될 거야.”
테오도르가 마티나를 반역자로 매도한 데 별다른 근거는 필요 없었다. 테오도르가 명분을 주고 싶어 했던 건 자신이 아니라 마티나 쪽이었으니까.
폭군에게 배신당한 억울한 영웅, 그것이 마티나의 역할이었다. 마티나가 그들의 미래를 찾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는 동안, 테오도르는 너무도 쉬운 결정을 내렸다. 그는 자기 자신과 연인을 동시에 버렸다.
마티나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나한테…… 대체 왜 이래?”
“내가 이기적이라서 그래.”
테오도르가 이대로 죽는다면 나라는 더욱 혼란해질 뿐이다. 아무리 마티나의 무력이 강하다고는 하나 이권 싸움에 몰린다면 위험해지리라. 테오도르가 죽은 곳엔 더 이상 그녀의 편이 되어 줄 사람도 없었다.
“난 망해 가는 왕조의 마지막 끝에 서 있지. 더 그럴듯한 불씨가 되는 것 외에 내게 무슨 효용이 더 남아 있겠어?”
그의 목소리에 결국 조소가 담겼다. 흉측한 얼굴을 마티나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기에 테오도르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는 유리창에 비친 마티나의 얼굴만을 응시했다. 그가 침통하게 말했다.
“마지막 부탁이다, 마티나.”
“테오도르, 이 역시 내 유일한 바람이다. 그것만은 들어줄 수 없어.”
“그대는 이 일을 해야 해. 그대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마티나가 한 걸음 더 테오도르에게 다가섰다. 어느새 눈가는 젖어 있었다. 그녀가 애원하듯 소리쳤다.
“내가 찾을 거야. 내가 당신을 살릴 방법을 찾을 거라고!”
“시간이 없어, 티나.”
잔인한 거절에 마티나는 숨을 들이켰다. 둘의 마음이 왜 이런 파국으로 치달았는지 채 따라잡을 수도 없었다. 억울하고 또 원망스러웠다. 마티나가 갈라진 음성으로 말했다.
“나한테 이기적으로 굴라고 말했잖아.”
“…….”
“평생 내 옆에 있겠다고 했잖아!”
테오도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왕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테오도르는 마티나와 눈을 맞추는 대신, 그 너머의 것을 보고 있었다. 마티나는 전에 흘린 적 없던 눈물을 보였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을 무엇하러 했지?
마티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원망과 슬픔, 비탄이 흘러넘쳐 바닥을 적셨다. 끔찍한 배신감이 차올랐다. 그가 정말 자신을 사랑했다면 이럴 수는 없었다.
“어찌 나에게 이러지? 어찌 내게 이리 잔인해?”
“……그대를 귀애했다.”
“그랬다면 내가 이런 끔찍한 기분을 느끼지 않았겠지.”
“…….”
“당신은 나를 사랑한 적이 없어. 그걸 이제 알았다.”
마티나는 도망치듯 뒤돌았다. 문을 닫고 나서기 전, 마티나가 말했다.
“테오도르, 차라리 나에게 같이 죽자고 말하지 그랬어.”
거칠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토리드 경이 눈물 흘리는 마티나를 참담한 얼굴로 응시했다. 그 동정의 눈빛조차 참을 수 없었다. 마티나는 알은체도 않고 그를 지나쳤다. 토리드 경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뒤따랐다. 불필요한 친절이었다. 거칠게 딛던 그녀의 걸음이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마티나는 구역질을 참으며 벽에 머리를 처박았다.
모든 것이 왈도 때문이었다. 그녀가 가족을 잃은 것도, 불임이 되어 테오도르와 결혼하지 못한 것도, 아이가 없다는 이유로 연인을 베어 넘겨야 되는 비극에 처한 것도.
어리석다. 너무도 어리석어 감히 그 금수의 형제를 믿고 사랑했다.
“블란체는 어디까지 나를 비참하게 만들 것인가!”
마티나가 오열하며 흐느꼈다. 마티나에게 테오도르는 기회였다. 새로운 삶을 살, 누군가를 사랑할, 혹은 그녀 자신을 구원할.
마티나는 그날 꿈꿔 왔던 미래를 죽였다.
* * *
“도성이 목전인데 후작님 표정이 별로 안 좋으시네요.”
수뇌부 쪽을 멀거니 응시하던 병사가 말했다. 옆에 서 있던 중년의 남자 역시 같은 쪽을 살폈지만 유의미한 탐색은 아니었다. 눈이 침침한 탓인지 겨우 형태만 분간할 수 있었던 탓이다. 언뜻 보기에도 멀리 떨어진 거리인데 표정까지 알아챘다니 눈이 좋다. 대단하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던 중년의 병사가 이내 푸념하듯 대꾸했다.
“믿었던 주군께 배신당한 기분이 어떠시겠나. 가슴이 찢어지시겠지.”
악왕 테오도르는 결국 스스로 왈도와 같은 핏줄이었음을 증명했다. 총명했던 젊은 왕은 나이가 들며 탐욕을 얻고 맑은 눈빛을 잃었다. 그의 잔인한 손속에 백성들이 시름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국을 울렸다. 왕에게 반역자로 지목된 마티나 후작이 민심을 대신해 군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상황이 어떻게 치달았을지 알 수 없었다.
“폭군을 처치한다는 결의를 다지고 출발했는데 맥이 좀 빠지긴 하네요. 진군이 너무 빨라요.”
젊은 병사가 갑옷을 추어올리며 푸념하듯 말했다. 그의 말대로 왕국군은 마치 명령할 머리를 잃어버린 것처럼 우왕좌왕이었다. 몇 번 맥없이 칼을 부딪치다가도 항복의 깃발을 휘날리기 일쑤였다. 정규군의 조력 아닌 조력으로, 반군은 군대가 움직인다고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도성까지 다다랐다.
전투 경험이 부족한 애송이의 발언에 중년의 남자가 혀를 끌끌 찼다.
“이놈이 무서운 소릴 하네. 전쟁이 장난인 줄 아냐? 다행이라고 축포를 터트려도 모자랄 판에…….”
“이게 보통의 전쟁과는 좀 거리가 먼 건 사실이잖아요?”
“모두가 후작님의 억울함을 아는 거지. 왕을 위해 그리도 헌신하셨건만, 쯧……. 악왕도 그런 악왕이 또 없어.”
가만히 듣고 있던 젊은 남자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누가 들을세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실 저는 그것도 잘 이해가 안 갑니다. 현왕께서는 자비로운 치세로 이름이 높으셨는데 갑자기 수탈이 있었다는 게 좀…….”
“숨겨 왔을 뿐, 결국 그분께서도 왈도와 같은 본성을 숨기고 있었던 거지.”
중년의 병사가 딱 잘라 말했다. 그 단호한 반응에 의문을 제기하던 이도 결국 입을 다물었다.
대화가 끝남과 동시에 기세 좋게 진군이 시작되었다. 반란의 성공을 코앞에 두었는데도 이번 전투 역시 지금까지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왕궁은 비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패배를 직감한 왕국군은 어딜 갔는지 숨어 보이지 않았고, 성내엔 일꾼들만이 남아 두려움에 떨었다. 민간인을 건드리면 엄벌하겠다는 명이 있었기에 반란군은 어떤 피도 보지 않고 왕궁을 점령했다. 병사들의 역할은 칼을 휘두르는 것보다 값이 될 물건들을 쓸어 모으는 데 특화된 지 오래였다.
군이 전리품을 모으는 사이 마티나는 엘시어만을 대동하고 알현실로 향했다. 물끄러미 문가를 응시하던 마티나가 엘시어에게 말했다.
“혼자서 가겠어.”
마티나는 홀로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문이 여닫히는 소리와 함께 멀리서 울리던 승리의 환호성이 아득해졌다.
마티나는 잠시 말을 잃고 그녀의 왕이었던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테오도르는 패국의 주인과 어울리는, 시름에 겨운 모습으로 왕좌에 앉아 있었다. 다만 아래를 내려다보는 눈에서만은 여전히 위엄이 넘쳤다.
마티나가 조소했다.
“왜 그런 표정이야? 그대가 원했던 거잖아.”
그 말에 테오도르가 옅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마티나는 테오도르의 눈동자에서 두려움을 발견했다. 마지막에 다다른 자의 서글픈 아름다움 같은 것이 그 안에 있었다.
좀 더 그럴듯하게 의연한 척을 해 주었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까?
“맞아. 내가 바랐지.”
테오도르의 담담한 대답에 마티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흥분하지 않으려 노력했건만 깊은 원망은 자꾸만 목청을 비집고 나오려 했다. 그녀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만족해, 이 비극에?”
“미안해, 마티나.”
“할 말은 그것뿐이야?”
마티나는 젖은 눈으로 테오도르를 노려보았다. 그를 사랑한 모든 순간이 후회스러웠다. 다른 방식이나마 끝을 예감했던 관계였기에 더욱 억울하였다. 마티나는 이미 잃는 아픔을 겪지 않고자 그를 보내 주려고 한 적이 있었다. 테오도르는 골리듯 그런 그녀를 붙잡아 놓고는, 이내 형편없이 내팽개쳤다. 버려진 사랑이 무참했다. 마티나가 짓씹듯이 말했다.
“나의 왕이 이렇게 비열할 줄 알았더라면, 사랑하지 않았어.”
“게다가 겁쟁이기까지 하지.”
“그런 사람이 이런 부탁을 해?”
“사실, 나는 죽는 게 너무 두려워.”
“그럼 죽지 마! 제발!”
마티나가 처절하게 외쳤다. 연인의 눈물에 테오도르가 힘없이 웃었다. 그 무력한 모습에선 죽음 한 발짝 뒤에 선 자 특유의 짙은 패배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겁에 질린 남자는 삶을 구걸하지 않았다.
“아프지 않게 부디 단칼에 베어 줘, 티나.”
마티나는 칼끝을 바닥에 댄 채 무릎을 꿇었다. 차마 두 다리로 올곧게 서서 버틸 수 없었던 탓이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흐느꼈다.
마티나가 테오도르에게 자신을 버리고 결혼하라 했을 적, 그는 어떻게 연인 사이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 그를 버린 그녀가 잔인하다고도 했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에서 가장 이기적으로 행동한 건 마티나가 아닌 그였다.
마티나가 원망이 뚝뚝 떨어지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하는 사랑은 이기적이야. 다음이 있다면 부디 내게 속죄를 해.”
이윽고 마티나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눈은 더 이상 젖어 있지 않았다. 마티나는 충혈된 눈으로 테오도르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갈라진, 그러나 일국의 패자를 대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근엄한 음성으로 외쳤다.
“블란체의 마지막 핏줄이여!”
“…….”
“그대를 저주한다. 그대가 내게 준 희망을 그대가 앗았다. 내가 겪었던 모든 배신 중 가장 잔악하다!”
마티나의 원망이 알현실 전체를 크게 울렸다. 테오도르는 그녀를 승자로서 예우해 주어야 할 때가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마지막 순간, 그는 이것만은 약조할 수 있었다.
마티나, 만약 내게 다음 생이 있다면 그대만을 사랑할게. 내 모든 것들 중 그대가 가장 중요한, 그래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그런 사랑을 할게.
하지만 그것이 지금은 아니었다.
“그대에게 할 말이 없다. 마지막까지 이용했음을 사죄한다.”
“하지만 내게 내린 명을 거두지는 않을 테지?”
마티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파하는 연인을 보고 싶지 않아, 테오도르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그대 할 일을 하라.”
선혈이 옥좌에 흩뿌려진 후, 마티나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알현실을 빠져나왔다. 마티나의 얼굴을 본 엘시어가 놀라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엘시어가 살아온 평생과, 앞으로를 통틀어 다시는 보지 못할 표정을 하고 있었다.
“승전보를 울려라.”
일국을 손에 넣은 새로운 왕이 패배한 개처럼 비참히 말했다.
* * *
한참 숨죽인 채 바닥을 보던 아스티나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테오도르는 죽지 않을 수 있었어.”
아스티나가 무감각하게 중얼거렸다. 온기 없는 음성에선 감정이 비치지 않았으나, 그래서 더욱 처절하게 읽혔다. 그 기점으로 그녀의 몸이 크게 경련했다. 아스티나가 벼락같이 소리쳤다.
“테오도르가 죽지 않을 수 있었어!”
그녀가 무너졌다. 세상이 멸망하기라도 한 것처럼 오열했다.
“내가, 내가아―! 그 사람을 죽이지 않을 수 있었어!”
아스티나가 비명 질렀다. 숨이 막혀 꺽꺽대었다. 치솟는 구역질을 참을 수 없었다. 아스티나는 찢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헐떡였다. 핏발이 선 눈에서 절망이 차고 넘쳐흘렀다. 갑작스러운 반응에 테리오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황급히 아스티나에게로 다가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러나 제 팔을 잡은 남자를 본 아스티나는 더욱 표정을 일그러뜨릴 뿐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테오도르의 얼굴에 아스티나는 이성을 잃었다. 형형한 안광이 흡사 광인의 것과 같았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옷깃을 생명줄처럼 쥐고 늘어졌다. 눈물을 닦아 내도 도통 시야가 트이지 않았다. 그녀가 온통 젖은 눈으로 테오도르를 보며 소리쳤다.
“미안해, 미안해, 테오도르……!”
테리오드는 제게 낯선 이름을 부르짖는 아스티나를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녀는 그의 말을 채 알아들을 정신도 없어 보였다. 아스티나는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불분명한 발음으로 쉼 없이 뱉어 냈다.
“당신이 나를 믿지 못했듯, 나도 당신을 믿지 못했어……! 나를 두고 가려는 게 너무 미워서, 그만 그대를 포기해 버렸어.”
아스티나가 곧 죽을 것 같은 모습으로 휘청였다. 갈라진 목소리로 이어 절규했다.
“그러면 안 됐는데, 나만은 그러면 안 됐는데! 내가아―! 꺼흑, 꺼흐윽…….”
아스티나의 헐떡임은 숨이 넘어가는 소리처럼도 들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녀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번뜩 정신을 차린 테리오드가 아스티나를 붙잡고 소리쳤다.
“부인, 부인!”
테리오드는 아스티나의 고개를 들어 억지로 눈을 맞췄다.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함이었지만, 아스티나는 그에게서 다른 것을 보았다. 아스티나의 뿌연 눈이 테리오드의 머리칼에 가 닿았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분명 선명한 은빛이었다.
“아……!”
벼락처럼 꿈에서 깨어났다. 아스티나의 입가에 헛된 웃음이 스쳤다.
“부인……?”
“그렇지……, 이젠 없지.”
아스티나는 울면서 웃었다. 광소하던 그녀가 이내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녀의 몸에서 완전히 힘이 빠졌다. 아스티나는 상체를 굽혀 그대로 치맛자락에 얼굴을 묻었다. 이윽고 그녀에게서 숨죽인 음성이 새어 나왔다.
“나가 주십시오, 전하.”
그 생기 없음이 마치 죽은 사람의 것과 같았다.
테리오드는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사랑하는 여자의 낯선 모습을 바라보았다. 테리오드는 자신도 모르게 그만 아스티나의 팔을 놓았다. 테리오드의 얼굴 역시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주춤거리듯 뒤로 물러섰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그녀를 어떻게 진정시켜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테리오드로서는 겨우 이런 말이나 뱉을 수 있을 따름이었다.
“조금…… 안정이 되면 다시 부르세요.”
* * *
“이대로 침실로 내어 가면 될까요?”
옆에서 들려온 물음에 테리오드는 까무룩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잠시 후에야 자신이 주방에 와 있었음을 깨달았다. 시종에게 부탁할 생각도 못 하고 직접 이곳까지 내려온 걸 보면 정신이 없긴 했던 모양이었다. 주변에선 하녀 아이 몇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테리오드는 눈앞에 내밀어진 쟁반을 빤히 응시했다. 아스티나를 위해 부탁한 따뜻한 물이었다. 그는 그대로 내어 가라며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곧 그의 부인이 남에게 내보일 만한 상태가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테리오드는 쟁반을 받아 들었다.
“내가 직접 들고 가지.”
하녀는 황송한 표정을 지었지만 만류하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허드렛일까지 자청하는 모습이 대공비를 향한 애정 때문이라고 해석한 모양이었다. 실제로 그는 부인을 대할 때 항상 사랑에 빠진 얼간이처럼 굴어 왔다.
테리오드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 침실로 향했다. 문을 두드렸지만 들어오라는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걸까.
아스티나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며 오열을 쏟아 냈을 때, 테리오드는 그녀의 청대로 잠시 자리를 비워 주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서재에선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염러스러운 마음에 돌아가 확인해 보자 그녀는 죽은 듯이 혼절해 있었다. 축 늘어진 그녀의 몸은 꼭 시체 같았다. 간헐적인 숨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살아 있음을 알았다. 테리오드는 직접 아스티나를 들어 침실까지 옮겼다. 사용인들에게 알릴 정신도 들지 않았다. 그조차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 상황을 타인에게 무어라 설명할 수 있겠는가.
테리오드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스티나는 의외로 침대 머리에 허리를 대고 앉아 있었다. 다만 낯빛은 확연히 초췌했다. 테리오드는 그녀가 그렇게 나약해진 모습을 처음 보았다.
문가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아스티나가 테리오드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스치듯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스스로를 잘 갈무리해 냈다. 아스티나가 사과했다.
“제가 추한 꼴을 보였습니다.”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이성적인 반응에 이질감이 들었다. 테리오드는 침대 옆 협탁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아스티나는 이 와중에도 따듯한 물 따위나 챙기는 것이 참으로 테리오드답다고 생각했다.
“아까 있었던 일에 대한 설명이…… 듣고 싶습니다.”
아스티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도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애초에 그가 믿어 주길 바라지 않았으므로 차라리 이대로 묻고 넘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광인의 발광으로 치부하고 잊으십시오. 저는 미친 지 오래랍니다.”
아스티나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이어 자조적인 목소리를 자아냈다.
“초대 황제의 환생이라는 그 어이없는 말을 믿으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다면 대공가에 내려오는 저주야말로 못 믿을 종류의 것이 아닙니까.”
현실감이 없다며 외면하기엔 그들은 참으로 비현실적인 상황에 당면해 있었다. 다시 태어난 그녀가 그러하고, 테오도르와 닮은 테리오드가 그러하고, 그에게 새겨진 같은 저주가 그러하다.
아스티나가 결국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아탈렌타 대공.”
“…….”
“내가 내린 작위지, 내가 하사한 재물이고, 그대는 나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자의 후손이야.”
지금 이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참으로 동떨어진 말과 음성이었다. 백 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이곳에 다다른 시황제의 전언이다. 테리오드는 그것이 몹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꽤나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그녀에겐 일반적인 열아홉 살의 순박함보다는 한 번의 삶을 거친 연로함이 더 어울렸다. 아스티나가 해낸 일들은 차마 그 나이에 이뤘다고는 믿기 힘든 것들이었다. 테리오드는 언제나 그녀의 눈빛과 말, 행동에서 겹겹이 쌓인 세월을 읽어 왔다. 차라리 내내 이해하지 못했던 그녀의 노련함에 대한 해답을 얻은 기분이었다.
아까 그녀가 불렀던 이름은 분명 테오도르였다. 그리고 테리오드는 그녀에게 오래도록 잊지 못했던 연인이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야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테리오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본래는, 테오도르 왕을 단순한 배신자로 알고 있었습니다.”
저주를 푸는 해답은 레타의 사랑이었고, 아스티나는 테오도르가 죽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녀가 왕의 죽음을 이리도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아 둘이 역사서에 내려오는 것처럼 배신으로 점철된 관계였을 것 같진 않았다. 둘만이 아는 사연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는…….”
아스티나는 잠시 고통스러워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이내 힘겹게 말을 맺었다.
“훌륭한 왕이었다.”
아스티나 역시 테오도르에게 최선이 달리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테오도르의 바람대로 나라를 안정시켰고, 심지어는 전쟁을 벌이며 국세를 일으키기까지 했다. 후대의 사람들이 테오도르의 본 의도를 알았다면 그의 희생을 길이 칭송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단 하나, 마티나의 삶만은 구원하지 못했다.
“왈도의 저주가 자신에게도 전해진 것을 알자마자 그가 가장 먼저 염려한 것이 바로 백성이었다. 그는 믿음직한 신하였던 나에게 무사히 왕관을 넘겨주고 싶어 했어.”
아스티나가 말을 맺고는 피식 웃었다. 우스움보다는 그녀를 몰아간 것들에 대한 증오를 드러내듯이.
“하지만 왕국법으로는 여자가 섭정 이상의 지위를 갖는 것이 불가능했지. 무엇보다 나는 불임이었고. 그렇게 계획된 반란이었다.”
“그는 역사서에 남은 것처럼 비열한 배신자는 아니었군요.”
“나에겐 그러했지.”
테리오드는 그녀가 왜 그를 배신자라고 칭하는지 이해했다. 사랑하는 연인을, 다름 아닌 그의 요청에 의해 직접 베게 된 것이다. 그녀가 가진 배신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테리오드에게 아스티나는 언제나 알 수 없는 신비감을 주는 사람이었지만, 이번만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선명히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가슴속에 깊숙이 박혀 지워지지 않을 사람을 보았다.
테리오드는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렇지만 가장 먼저 나온 말은 이것이었다.
“그대를 사사롭게 만들었던 사람이 그입니까?”
아스티나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처음 대공령에 왔을 적 그녀는 테리오드에게 무참하도록 무심했다. 테리오드는 오래도록 그녀의 곁을 맴돈 후에야 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진실로 그러했을까?
아스티나가 자신을 받아 주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여전히 턱없이 먼 자리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닌가?
테리오드는 언제 그녀가 마음을 열었었는지를 곰곰이 되짚었다. 그리고 잔인하게도 깨달았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에게서 그와 같은 열정을 발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테리오드가 다시금 물었다.
“그를 사랑했습니까?”
“그래.”
아스티나가 목이 졸린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더는 숨길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직접 찌른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아는가?”
테리오드는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를 기억했다. 사람이 되고 난 직후 그는 아스티나에게 목이 졸렸었다. 그녀는 배신감에 젖은 채 테리오드를 향해 온갖 증오를 쏟아 냈다. 분명 그때 테리오드는 그녀가 부르는 ‘테오’라는 이름을 들었다. 당시엔 착각이라 여겼지만 맥락을 알고 나자 부정할 수 없었다. 그 눈빛은 조금 전 테리오드를 테오도르라 부르며 사죄했을 때와 같았다.
‘테오도르, 테오, 나의 테오.’
‘이미 죽은 사람이니까요.’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런 사람은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테리오드는 이를 악물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이것 하나만 묻겠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묻고 싶었지만, 그는 끝내 얼간이처럼 목소리를 더듬거리고야 말았다.
“내가, 내가……. 그와 닮았습니까?”
아스티나는 이 말이 테리오드에게 상처가 되리란 것을 알았다. 하지만 숨길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 역시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충분한 의심의 여지를 주었다. 테오도르의 초상은 대공인 그가 보고자 하면 충분히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뻔히 들킬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아니, 어쩌면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타인에게도 불행을 전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테리오드는 순간 저를 둘러싼 공기가 사라졌다고 느꼈다. 더는 호흡할 수 없다고, 제 폐부가 부풀어 오를 일은 다시 없으리라고 말이다. 그러나 절망스럽게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윽고 그가 겨우 대꾸했다.
“그렇…… 군요.”
아스티나가 눈을 들어 테리오드의 창백한 얼굴을 응시했다. 테리오드는 그 시선에서 도망쳐 방을 나서고 싶었으나, 몸이 제 생각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처음 사람의 태를 쓰기라도 한 것처럼 몸짓이 엉성했다. 테리오드는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제야 조금 정신이 깨었다.
“일단…… 쉬세요.”
배려하듯 말했으나 사실은 이 자리를 떠나고 싶어서였다. 테리오드는 도망치듯 방을 나왔다. 아스티나에게서 멀어지는 테리오드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데도 그러했다.
그는 복도의 끝에 다다라 겨우 걸음을 세웠다. 파리한 얼굴을 들어 유리창을 내다보았다. 해가 진 하늘은 어느새 짙은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밖과 안의 조도가 달랐던 탓에 유리는 바깥이 아닌, 테리오드의 얼굴을 비쳤다. 길고 짙게 새겨진 눈썹과 선명한 푸른빛 눈, 다소 위로 휘어진 입꼬리까지. 언제나 거울 속에서 보던 것과 같았다. 다만 그의 머리칼엔 어두운 밤의 색이 입혀져 있었다. 테리오드는 지금 이 순간만은 제 모습이 더없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렇게 보니 마치 테오도르 왕의 현신 같으십니다.’
“아…….”
머리를 물들인 그에게 이상하게 다정했던 취한 밤, 그를 주군이라 부르던 그녀와 사랑한다는 고백.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이 퍼즐 조각처럼 맞물렸다. 왜 자신을 보던 그녀의 눈에 종종 기묘한 그리움이 서렸는지, 테리오드는 마침내 깨달았다.
소름이 끼쳤다. 테리오드는 그대로 마주 보고 있던 유리창을 깨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