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똑같은 사람 (17/23)

17. 똑같은 사람

“마님!”

심약한 집사가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아스티나는 마차 밖으로 나오다 말고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감금되었다가 빠져나온 것은 분명 자신인데, 이상하게도 저택에서 기다리던 이들의 상태가 더욱 나빠 보였다.

아스티나가 짧게 혀를 찼다.

“걱정했나 보군.”

“그럼 어찌 걱정을 않겠습니까? 아이고, 혹시 잘못될까 싶어 대공 전하나 저나 제대로 잠도 들지 못했습니다.”

그 말이 거짓은 아닌 듯 올리버의 눈엔 붉은 실핏줄이 올라와 있었다. 계획의 전체를 알고 있었던 것은 대공가 내에서도 극소수의 인물이었다. 특히 황녀에 관한 것은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으니 노년의 집사로서는 당연히 불안했을 터다. 올리버의 원망 어린 음성까지는 이해가 가능한 영역이었다.

“한데…… 제 낭군께서는 낯빛이 왜 그러신지요?”

그런데 모든 걸 다 알고 함께 합을 맞췄던 대공의 안색은 대체 왜 저런 것인가.

아스티나가 어이없다는 듯 테리오드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얼굴은 전보다 확연히 초췌해 보였다. 재판에서 보았을 때만 해도 분장쯤이라 생각했었는데, 어째 저택으로 돌아오고 난 후에도 그는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역시 걱정이 되어…….”

대답하는 테리오드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무래도 더 오래 잠을 설친 건 대공 쪽이었던 모양이다.

아스티나가 짐짓 의심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혹시 경비대원의 팔을 꺾은 것, 연기가 아니셨나요?”

“그놈이 부인을 너무 험악하게 붙잡지 않았습니까?”

테리오드가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 되물었다. 실제로 아스티나가 연회에서 결박당했던 당시, 마녀를 붙잡으려는 경비대원들의 손길은 몹시도 우악스러웠다. 반항했다간 계획이 틀어질 터였으므로 아스티나는 가만히 통증을 견뎠다. 사실 못 참을 만큼 아픈 것도 아니었다.

한데 테리오드는 그 와중 미세하게 찌푸려진 그녀의 표정을 포착했던 모양이었다. 아스티나는 본디 그게 애정을 드러내기 위한 대공의 전략이라 받아들였었다. 이시스 역시 같은 생각을 한 듯, 덕분에 나디아 영애를 겁주기가 쉬웠다며 그 일을 언급하기도 했다.

한데 그게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었다니.

어이없기는 했으나 어찌 됐든 일이 다 잘 풀렸으니 뒤늦게 뭐라 할 수도 없었다. 대신 아스티나는 멀쩡한 몸 상태를 내보이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 테리오드도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지만, 그늘진 눈 밑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결국 그가 피로한 기색으로 손을 들어 제 눈가를 문질렀다. 테리오드는 긴 한숨을 내뱉고 나서야 지친 음성을 낼 수 있었다.

“재판이 끝난 당일에 보내 주는 줄 알았는데, 도통 오시지 않기에 혹여 무언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사안이 사안이니까요. 절차가 좀 복잡했어요.”

그냥 일반 범죄도 아니고, 무려 황족을 해치려 시도했다고 의심받은 용의자다. 당연히도 출소 절차는 보통의 경우보다 훨씬 까다로웠다. 아스티나는 재판일로부터 사흘이 지나고 나서야 구금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기실 그것은 황제의 결정까지 다다르는 유예 기간에 가까웠다. 결과에 순응하고 장자를 버릴까, 아니면 진실을 유폐하고 아탈렌타와 척지기를 택할 것인가. 후자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 이시스는 그 말도 안 되는 고민을 일찍 종식시켜 주었다.

그녀들이 세울 수 있는 계획들은 하나같이 희생을 요구했다. 스스로의 살을 베지 않고서는 상대의 뼈를 칠 수 없었다. 이시스가 온몸에 멍이 들고 나서야 이를 빌미로 프리모의 추방을 요구할 수 있었던 게 단적인 예였다. 신체적인 고통을 겪지는 않았으나 아스티나 역시 위험을 감수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번 일로 대공가는 가파른 추락을 경험해야만 했으니까.

아스티나는 모든 일이 잘 풀리리란 확신이 있었으나, 동시에 그 무모한 패를 타인에게 이해시키기 어렵다는 것도 알았다. 그녀는 자신을 믿고 많은 일을 대신해 준 테리오드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다. 부인이 부린 고집의 대가로 테리오드는 내내 흠집 난 명성과 쏟아지는 멸시를 감수해야 했었다.

그러나 테리오드가 당초 걱정한 건 전혀 다른 부분이었다.

“무사…… 하십니까? 험한 일은 당하지 않으셨고요? 잠자리는 편했는지, 식사는 잘 챙기었는지 제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어…….”

말끝을 흐린 테리오드가 천천히 팔을 뻗어 아스티나의 뺨을 감쌌다. 미지근한 손이었지만 아스티나가 체감한 온도는 더 높았다.

아스티나의 눈이 일순 크게 뜨였다. 눈앞에 닥친 손해보다 사람을 걱정하는 마음이란 것이 그녀에겐 낯설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언가를 결정하는 데 있어 손익을 따지는 법이다. 아스티나도 자신의 위세보다 황녀의 득세가 중했기에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했다. 그런 아스티나에게 잠깐의 감금쯤은 정말이지 아무렇지 않은 일이었다. 한데 테리오드가 이리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해졌다.

대공의 지친 얼굴은 곧, 그가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있는 대상이 곧 아스티나라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아내의 결정을 존중하긴 했으나 속으로는 내내 염려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에게 큰 의미를 가지지 않았던 아스티나로서는 생소한 사실이었다.

아스티나가 설핏 웃으며 중얼거렸다.

“제가 항상 약속을 어기는군요.”

테리오드를 위해 살겠다고 말했으면서 아스티나는 항상 그를 걱정하게만 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약속한 사람과 그 대상이 완전히 뒤바뀌었다고 말해도 어폐가 없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에게 약간의 미안함과, 이어 가슴을 간질이는 묘한 술렁임을 느꼈다.

테리오드는 그녀의 사랑을 기다리겠다고 막연히 말했었다. 아스티나는 자신이 그와 같은 열렬한 감정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의 호언이 영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처음 델 듯이 뜨거웠던 남자의 애정은 어느덧 편안한 온도가 되어 있었다.

당장 테리오드를 떠나야 한다고 하면 그녀는 처음처럼 단호히 돌아설 수 있을까. 아쉬울까, 혹은 슬플까. 분명 처음 아탈렌타에 왔던 때와는 다른 느낌일 것이다.

아스티나는 그대로 손을 뻗어 그의 뺨으로 가져갔다. 서로의 얼굴을 감싼 채 이마를 맞댔다. 코끝이 스치고, 아스티나가 먼저 그에게 입술을 부딪쳤다. 테리오드 역시 그녀를 따라 슬며시 눈을 감았다. 아스티나는 그에게 입을 맞추며 익숙함이란 것에 대해, 그리고 무뎌지는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옛 연인과의 입맞춤은 기억 속에서 부스러진 지 오래였다. 아스티나는 이제 그게 어떤 느낌이었는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도 오랜 세월이 지난 탓이다. 선명한 것은 순간순간뿐, 이제 그녀의 가슴속에 남은 추억은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부피였다.

세세하게 알고 있던 그의 습관이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다. 그가 좋아하던 음식의 이름을 이제 반절 남짓도 대지 못한다. 그가 자주 읽었던 책은? 그가 고백하던 순간 코끝을 스쳤던 향은 또 어떤가.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마지막 순간의 강렬한 원망뿐이었다. 짧았던 행복은 그녀를 더 사무치게 하는 반동에 지나지 않았다.

오래 아팠던 마음이 타인의 애정을 맛보고는 간사하게 속삭였다. 너를 아프게 하는 것들은 그만 버리라고.

아스티나가 충동적으로 말했다.

“나도 보고 싶었어.”

아스티나의 속삭임에 테리오드가 놀란 듯 눈을 감았다 떴다. 반쪽짜리 고백만으로도 족했을까. 그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테리오드가 그녀를 완전히 품에 안으며 말했다.

“잘 돌아왔어요, 내 사랑.”

뒤에서 큼큼 헛기침을 하던 올리버가 말없이 손을 휘저어 사용인들을 물렸다. 그러고는 저 역시 재빨리 뒤돌아 사라졌다. 등진 방향이었기에 테리오드는 알지 못했지만, 그와 마주 서 있던 아스티나는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볼 수 있었다.

절도 있는 퇴장에 아스티나의 입가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덕분에 분위기 잡을 의지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왜 웃으십니까?”

뜬금없는 반응에 테리오드가 어리둥절한 낯으로 물었다. 아스티나가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신기한 일이에요, 주인이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분위기가 달라지다니.”

“다들 부인을 걱정했으니까요.”

테리오드는 아스티나가 본인의 귀환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스티나가 떠올린 건 신혼 초, 그야말로 저주받은 성 같은 모습을 하고 있던 대공저 쪽이었다.

“제 말은, 대공 전하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온전하실 때의 사용인들은 생각보다 재밌는 사람들이에요.”

당시 사용인들은 늘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행동했다. 웃을 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표정은 굳어 있었고, 저택을 감싸고 있는 건 침울한 기운뿐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들에게서도 사람의 온기랄 것이 느껴졌다. 아스티나가 아탈렌타 영지로 처음 내려갔을 때와 비교하면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아, 가보를 팔아 치운 가신들은 제외하고요.”

아스티나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그에 테리오드도 옅은 웃음을 쏟아 냈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아랫입술을 손끝으로 눌렀다. 붉은 살갗을 어루만지며 그녀가 장난치듯 물었다.

“이제 뭘 할까요.”

비어 있는 후계자 자리를 꿰차는 건 온전히 이시스의 몫이었다. 아탈렌타가 공개적으로 이시스를 지지한다면 프리모를 축출한 건에 대해 자칫 황제의 의심을 살 여지가 있었다. 아스티나의 역할은 뒤편에 가린 조력자쯤에 그쳐야 했다. 그 말은 곧, 아스티나가 지금까지보다 훨씬 한가해진다는 소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 빈 시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는 아스티나도 아직 결정하지 못한 바였다.

이번 생은 조용히 살기로 당초 마음 먹었던 것과 다르게, 그녀가 벌인 일은 많고도 많았다. 아탈렌타로 향하며 휴가를 얻었나 하였더니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벨라체 아카데미에서의 학업은 결혼 후 이어질 고행에 대한 짧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아스티나는 근 몇 세대 간, 자신처럼 바쁘게 산 대공비는 없었을 것이라 자신했다. 가문 내의 업무는 물론이거니와 바깥일도 잔뜩 벌여 두었었으니까.

예의 바깥일에 충분히 지쳐 버린 테리오드가 부드럽게 그녀를 저지했다.

“뭐가 될진 모르겠지만, 되도록 위험 부담이 없는 쪽으로 하지요.”

그는 아스티나가 또 다른 대업을 욕심낼까 걱정하기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의미 없는 걱정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도 이제는 쉬고 싶었다.

아스티나가 짧게 어깨를 으쓱이며 되물었다.

“글쎄요. 제가 하고 싶었던 건 다 해치웠으니, 이제 대공께서 하고 싶으신 걸 할까요?”

“제가 하고 싶은 것이요?”

“예, 공평하게요.”

그러나 테리오드는 딱히 욕심이랄 것이 없는 남자였다. 가세를 일으키고 싶은 야망도 없었고, 기실 아탈렌타는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유지하기만도 벅찬 가문이었다.

그가 하나 욕심내고 있는 것이라고 하면…….

“그건―”

아스티나의 눈을 들여다보던 테리오드가 멈칫했다.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제 입을 가렸다. 이윽고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맹세컨대 이는 아스티나가 의도하지 않은 반응이었다. 성적인 뉘앙스를 내보여 그를 유혹했던 적도 분명 있지만, 이번만은 그런 경우가 아니었다.

과한 금욕이 온갖 상상을 불러왔을까.

아스티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공께서는…… 아닌 척하면서도 참 밝히십니다.”

“이상한 걸 상상한 게 아닙니다.”

테리오드가 다급히 정정했다. 아스티나는 여유롭게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방금 하신 생각을 당당히 읊으실 수 있다면 참작해 보지요.”

“전 데이트를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아스티나의 놀림에 테리오드가 억울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에 아스티나가 눈이 조금 커졌다.

“데이트요?”

생각지도 못했던 간지러운 단어다. 그러고 보면 테리오드와 변변찮은 외출을 함께한 적이 거의 없었다. 용건이 있을 때 밖에 나가 일을 처리했을 뿐, 같이 시간을 보내기 위한 목적만으로 움직였던 적은 없다.

테리오드와의 설익은 연애는 종종 아스티나에게 잊고 있었던 것을 상기시켰다. 가령 보통의 연인은 친밀감을 쌓아 갈 때 어떤 단계들을 밟아 가는지 말이다.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시간을 어떻게 채워 가는가였다. 성적인 접촉으로만 연인 노릇을 대충 때워 왔던 아스티나로선 다소 찔리기도 하였다.

“……뭐, 그간은 워낙 바빴으니까요. 이제부턴 말씀하신 대로 그 데이트란 걸 해 보죠.”

아스티나는 대충 말을 얼버무리고는 그가 지적할세라 재빠르게 이어 물었다.

“그래서, 처음 행선지는 어디로 생각하시나요?”

“부인께서는 따로 하고 싶은 게 없으십니까?”

테리오드가 사람 좋게 웃으며 되물었다. 아스티나는 턱 끝을 문지르며 몇 가지 판에 박힌 답을 뱉어 냈다.

“거리를 걸어도 좋겠고, 도시락을 준비해 피크닉을 가도 좋겠지요. 변장을 하고 야시장에 가고 싶은 철없는 욕망이 있다면 그것도 맞춰 줄 수 있어요.”

아스티나가 농담조로 던진 응대에 테리오드의 입이 다물렸다. 잠시 침묵하던 테리오드가 이어 반문했다.

“……철없다니요, 다 로맨틱하지 않습니까?”

아스티나는 그만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녀로서도 간만에 쏟아 낸 시원한 웃음이었다. 머쓱했는지 아스티나를 지켜보는 테리오드의 뺨엔 옅은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여러모로 놀리는 맛이 있는 남자다. 테리오드는 고전적으로 잘생긴 미남이었지만, 얼굴을 붉힐 때면 또 제법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아스티나가 웃음을 지우고는 정색하듯 말했다. 장난기 어린 어조였지만, 장난만은 아닌 무게로.

“대공, 좋아합니다. 진심이에요.”

분명 사랑은 아니다. 뜨겁고 열렬했던 그 느낌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아스티나는 단언할 수 있었다. 하지만 테리오드를 향한 감정을 규정할 말이 꼭 사랑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과거에 품었던 불같은 사랑은 그녀에게 상처만 주었다. 애틋했던 만큼 선명히 남은 상흔에 아직까지도 신음하고 있었으니까. 반대로 테리오드의 애정은 아스티나를 마냥 달래 주었다. 어느 쪽이 더 좋은 영향을 미치었느냐 묻는다면 아스티나는 망설임 없이 후자라 대답할 수 있었다. 이렇게 그녀를 편하게 하는 감정이라면, 그녀를 쉬게 해 주는 사람이라면 그것만으로 족하지 않을까.

의리나 정으로 살아가는 부부는 이 세상에 충분히 많다. 아스티나는 자신이 적어도 그들보다는 테리오드에게 더 깊은 감정을 품었다고 생각했다. 전보다 마른 얼굴을 보자 뭐라도 먹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그녀도 알지 못하는 사이 애정이란 게 쌓였기 때문이겠지.

아스티나는 그들의 결혼 생활에 언제나 서로를 향한 존중과 배려가 가득할 것임을 예감했다. 그 속에서 아스티나는 그를 사랑하리라 단언할 수는 없되, 행복해질 자신은 있었다. 이렇듯 천천히 과거의 잔재를 잊어 가며.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요?”

테리오드가 얼빠진 음성으로 되물었다. 아스티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런 그를 지나쳤다.

“잘못 들은 걸로 하고 싶으시면 그러셔도 되고요.”

“아니요, 제대로 들었습니다. 귀에 아주 쏙쏙 박히던걸요.”

황급히 저를 따라붙는 인기척에 아스티나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휘었다.

* * *

“……무슨 좋은 일 있으십니까?”

올리버가 결국 못 이긴 척 질문했다. 아까부터 그를 흘긋 응시하거나, 부산스럽게 책장을 넘기거나, 아니면 창문을 닫았다 열었다 하는 둥의 행동이 관심을 요구하는 유아기 아이의 그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올리버의 물음에 테리오드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테리오드는 의자에 몸을 앉히고는, 깍지 낀 두 손을 느른히 아랫배 위에 두었다. 이어 테리오드가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기분 좋은 일이라니, 그럴 일이 별달리 뭐가 있겠나.”

‘마님이 돌아오신 것이요.’

올리버는 혀 바로 밑까지 차오른 대답을 겨우 삼켜 냈다. 대신 그는 공손히 고개를 조아려 테리오드에게 인사를 남겼다.

“제가 잘못 짚었나 보군요. 저는 그럼 이만…….”

“잠깐.”

테리오드가 황급히 몸을 일으켜 책상을 짚었다. 다급했던 행동과 다르게 목소리는 편안했다. 아니, 정말 그랬다기보다는 편안함을 잘 흉내 냈다고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실제로 집사를 붙잡는 대공의 눈빛엔 초조함이 스며 있었다.

테리오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자네가 그렇게 궁금하다면 어쩔 수 없지.”

그렇게 궁금하진 않았지만 올리버는 잠자코 제자리에 멈춰 섰다. 대공비가 부재했을 당시 올리버는 비슷한 일을 몇 번 경험한 적이 있었다.

사실 올리버의 불면은 반쯤 주인의 변덕에 기인했다고 볼 수 있었는데, 불안을 이기지 못한 테리오드가 새벽에도 종종 집사를 호출했던 탓이었다. 테리오드는 올리버를 앞에 세워 두고는 황궁의 지하 감옥이 어떤 곳인지, 습도와 온도는 적절한지, 식사의 간은 잘 맞는지 등을 하나하나 캐물었다. 그러고는 마음에 차지 않는 대답이 돌아오면 그대로 머리를 감싸 쥐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의 일인극을 졸음기 어린 눈으로 지켜보며 연로한 집사는 대공의 사촌을 떠올렸다. 그간 한 번도 아서와 대공의 공통점을 찾지 못했던 올리버지만, 집사의 잠을 깨우는 무자비한 행태만은 닮은 것도 같았다.

시큰둥한 반응에 대공은 바람 잡기는 이만 그만두기로 했다. 테리오드가 턱을 들며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여자가 남자에게 좋아한다고 말한 게, 무슨 뜻인지 아나?”

“……그냥 좋다는 뜻 아닙니까?”

올리버의 대답이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듯 테리오드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테리오드가 큰 소리가 나게 책상을 두드리며 반박했다.

“아니지! 이는 아주 특별한 일일세. 결코 아무한테나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이 말이야.”

딱 봐도 사용인들이 자리를 비켜 준 사이 부인에게 좋아한다는 말이라도 들은 모양이었다. 나이 든 올리버로서는 대공의 연애 행각이 그저 귀여웠다.

부모의 부재에 어릴 적부터 어른스러움을 연기해야 했던 주인이다. 이제라도 지나쳤던 단계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가고 있는 것 같아 감회가 새로웠다. 그에 첫사랑과 사춘기라는 큰 문제가 섞여 있다는 게 난관이었지만.

“예, 특별한 분께 들었으면 특별한 말이 맞겠지요.”

올리버가 허허 웃으며 테리오드의 말을 받아 주었다. 사실 그가 생각해도 대공비는 그런 말을 허투루 할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녀는 남의 눈치를 봐 가며 싫은 걸 좋다고 말할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 대공에게 전한 말도 진심에서 우러난 것일 터다. 그러니 대공도 저리 웃음을 참지 못하는 것이고.

올리버는 미소 띤 얼굴을 유지한 채 품속에서 시계를 꺼내 흘긋 살폈다. 흥미 없는 대화를 마쳤을 때 으레 그러하듯, 체감보다 더 적은 시간이 흘러 있었다. 그러나 올리버는 능청스럽게 대공을 집무실 밖으로 밀어내었다.

“이쯤이면 마차가 다 준비되었을 것 같군요. 지겨운 일은 뒤로 치워 두시고 이만 나가 보세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올리버의 재촉에 테리오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스티나가 귀가하고 주변이 어느 정도 정리된 후, 테리오드는 곧장 부부끼리의 시간을 계획했다. 이시스 황녀의 기반이 안정되기 전까진 가까이에서 두고 봐야 했으므로 대공 부부의 수도 체류 기간은 좀 더 길어져 있었다. 테리오드는 그 시간이 아깝지 않도록 아내와 온갖 명소에 다 가 볼 생각이었다. 다만 둘만의 시간을 만끽하기 위해 첫 외출만은 교외로 눈을 돌렸다.

아탈렌타 대공가는 성과 같은 지명의 영지 외에도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은 곳곳에 매입해 둔 별장 중,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바실에서 두 시간 정도 달려야 있는 별장은 소박한 건물 크기와 비교해 유달리 넓은 지대를 소유하고 있었다. 중심에 있는 호수를 포함해 근방을 전부 사들였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호수의 전경에 전대 대공 부부는 대부분의 여름휴가를 그곳에서 보내기도 했었다. 대공 부부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난 후로는 관리인 외에 아무도 방문하지 않은 죽은 공간이 되고 말았지만.

성인이 되기까지 아탈렌타 영지를 떠나지 못했던 테리오드로서도 이번이 첫 방문이었다. 관리인이 부지런히 관리했을 테니 상태는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지만, 이 제안을 아스티나가 좋아할지는 미지수였다. 대개 젊은이들은 한적한 별장 생활보다는 연극이나 쇼핑 같은 일에 더 흥미를 두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테리오드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들떠 했다. 그녀는 관광보다는 휴양을 더 선호하는 사람이었고 나이 든 사람이 으레 그러하듯 자연 경관을 좋아했다. 그녀의 정신 나이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나 테리오드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둘은 느긋이 수영을 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모처럼 한가로움을 만끽해 볼 생각이었다. 물론 성인의 여행이니만큼 별장에서 취하는 건 휴식만이 아닐 것이다.

첫 데이트에 외박을 제안하다니, 아스티나가 응큼하다는 눈빛을 보냈을 때 펄쩍 뛰었던 일이 참으로 면구하게 되었다.

“짐은 아까 미리 실어 두었습니다. 대공비 전하도 준비를 다 끝마치셨을 듯싶으니 드레스 룸으로 먼저 가 보세요.”

“그래, 서둘러 이것저것 처리하느라 자네도 고생이 많았어. 미안하지만 모레까지만 조금 더 신세 지지. 급한 일은 대충 처리했으니 내가 없어도 문제 되진 않을 거야.”

이틀을 통째로 휴가 내기 위해 테리오드는 떠나기 직전까지도 일에 파묻혀 있었다.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에 놓인 서류들을 살폈다. 부산스레 행동하기에 집중을 못 했으리라 예상했는데 목표한 일은 다 끝마쳐져 있었다.

테리오드의 서명을 짚어 내리던 올리버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참, 그림을 취급하는 업자가 연통을 넣었더군요. 보관하고 있던 아탈렌타 가계의 초상을 처분하고 싶다고요. 재판에서 증언을 했던 지배인에게 소개받았다고 하던데, 약속을 잡아 둘까요?”

테리오드는 머릿속에서 오래 지나지 않은 기억을 끄집어냈다. 암시장을 찾았던 가장 큰 이유는 프리모 측에서 대공비의 흠을 찾았다 착각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공가의 보고를 되찾는 일을 수단으로만 이용했던 건 아니었다. 아스티나가 재판정에서 호소했던 것마냥, 가문의 물건들이 바깥을 나돌게 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테리오드가 오랜 고민을 거치지 않고 선선히 허락했다.

“시일을 잡아 한번 방문해야겠군. 아내와 함께 가겠다고 전하게.”

이 와중에도 아내를 챙기는 대공을 보며 올리버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테리오드와 아스티나가 식을 치른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신년이 다가와 있었다. 부부 사이도 좋으니 이번 여행에서 좋은 소식을 기대해 봐도 좋지 않을까. 주인에겐 말할 수 없는 기대를 품으며 올리버가 흐뭇한 얼굴로 배웅했다.

“그럼 잘 다녀오십시오.”

* * *

수도에서 멀지 않은 별장은 도착도 금방이었다. 물론 비교적 가까웠다 뿐이지 두 시간이나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건 분명 지루한 일이었다. 아스티나와 테리오드는 경험에 의거해, 체감 이동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을 몇 가지 알고 있었다. 약간의 손장난을 거친 부부는 출발할 때와는 사뭇 다른 흐트러진 모습으로 밖에 내려섰다. 부부가 별장에 둘만 머물기를 원했기에 마부는 수도 쪽으로 다시 말 머리를 돌렸다.

테리오드와 아스티나는 먼저 별장에 짐을 올려 둔 뒤, 옷을 갈아입고 곧장 호수로 나왔다. 일몰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대 대공 부부와 함께 몇 번 별장을 찾았던 경험이 있는 올리버는 테리오드에게 몇 가지 쓸 만한 조언을 남겼다. 해가 지며 호수도 함께 붉게 물드는 황혼 때가 가장 아름다우니, 분위기를 잡고 싶다면 꼭 놓치지 말라 전한 것이다.

다행히도 아스티나와 테리오드가 호수에 다다랐을 즈음엔 해가 아직 높은 곳에 있었다. 전대 대공비가 사랑에 빠졌던 공간답게 호수는 몹시 아름다웠다. 올리버가 극찬했던 해 질 녘이 아니었음에도 충분히 대단한 경관이었다.

마냥 푸르른 물빛은 마음을 안정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아스티나는 물끄러미 수면 위를 내려다보았다. 조용히 일렁이는 물결에 햇빛이 조각조각 부서졌다. 옅게 바람이 불며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아스티나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아름답네요.”

“그러게요, 오길 잘한 것 같습니다.”

테리오드 역시 감탄하듯 말했다. 처음으로 단둘이 온 여행인데, 다행히도 장소 선정이 아주 탁월했다.

둘은 한참 말없이 호수를 둘러보았다. 화가를 불러 그리게 하고 싶을 정도로 기억에 남을 만한 공간이었다. 이런 곳을 사유지로 쓰고 있다는 사실에 죄책감까지 들 정도로 말이었다.

이 넓은 곳에 오직 단둘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졌다. 꼭 누구도 알지 못하는 요정들의 숨겨진 공간에라도 발을 들인 느낌이었다. 가만히 물소리를 듣고 있자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던 현실의 아우성들이 점차 아득해졌다.

“가끔 사람이 없는 곳에 오면……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스티나가 고개를 기울이며 읊조렸다.

문득 손끝에 온기가 맞물리는 게 느껴졌다. 아스티나는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의 손에 깍지를 끼고 있었다. 단단한 손마디가 그녀를 기분 좋게 감싸 왔다. 아스티나는 팔에 힘을 빼어 그런 그를 잠자코 내버려 두었다.

테리오드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저랑 비슷한 듯 다른 생각을 하시는군요. 전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테리오드가 한숨 쉬듯 이어 말했다.

“그러나 해가 지네요.”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일 오후면 다시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쉽게 느껴졌다. 그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아스티나는 그를 설레게 하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다음에 다시 오면 되지요.”

테리오드에겐 의미가 깊은 말이었다. 그녀가 계획하는 미래에 그도 포함되어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테리오드가 언뜻 장난스러운 기색으로 되물었다.

“매해 여름에요?”

전대 대공 부부를 잘 알지 못하는 아스티나가 의아한 기색으로 테리오드를 응시했다. 테리오드는 이곳이 그의 부모가 매년 같이 찾았던 공간이라고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어리광 같은 가벼운 온도로 받아들였는지 아스티나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놀이를 하려면 그 편이 좋긴 하겠네요.”

“하기야, 지금은 물에 몸을 담그긴 좀 추운 날씨이긴 하죠.”

테리오드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 아스티나가 어깨에 둘렀던 겉옷을 풀어 내렸다. 신발까지 마저 벗고는 테리오드가 말릴 새도 없이 물가로 성큼 걸어갔다. 당황한 테리오드가 황급히 그녀를 뒤따랐다.

첨벙 물가에 발을 담근 아스티나가 몸을 돌려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손에 물을 담아 그를 향해 튀겼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에 테리오드는 고스란히 그녀의 장난을 받아 내는 수밖에 없었다. 테리오드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젖은 웃옷을 내려다보았다. 테리오드가 고개를 들자 아스티나는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그녀의 얼굴엔 드물게도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테리오드가 배신감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야시장에 가자는 건 철없다고 했으면서…….”

그의 로망을 어리게만 취급했던 아스티나다. 하여 물가에 와서도 얌전히 주변을 걷기만 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저 재빠른 변절은 또 뭐란 말인가.

그러나 아스티나는 아랑곳 않고 재차 테리오드의 머리칼까지 적셨다. 이제 그는 완전히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정정할게요. 그것도 생각보다 재미있을지 모르겠어요. 사실 내가 물놀이가 백 년 만이라서, 좀 설레네요.”

아스티나의 과장 어린 말에 테리오드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는 눈썹을 한번 들었다 내리고는, 아스티나처럼 겉옷을 벗어 내려 두었다. 테리오드가 지체 없이 아스티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넓은 보폭에 아스티나는 꼼짝없이 그에게 붙잡혔다. 차마 그녀에게 같은 보복을 할 수는 없었던 듯 테리오드는 아스티나를 뒤에서 끌어안아 움직임을 저지했다.

아스티나가 다리를 버둥거리며 반항했다.

“이건 반칙이에요.”

“지금 진짜 치사한 게 누굽니까?”

“내가 진심으로 빠져나가면 당신 다쳐요.”

아스티나의 웃음기 어린 경고에 테리오드는 그녀의 검 솜씨를 떠올렸다. 농담은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연인의 팔을 부러뜨릴 만큼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테리오드는 그녀를 놔주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그녀를 달래기로 했다. 그가 호언하듯 속삭였다.

“그럼 이것도 막아 봐요, 못할걸?”

찬물을 뒤집어쓰리라 예상하고 눈을 감았던 아스티나는, 뺨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곧 다시 눈을 떴다. 테리오드가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뒤에서 그녀를 붙잡고 있는 자세라 입술을 삼킬 수는 없어서였다.

아스티나가 소리 죽여 키득이자 테리오드는 그녀를 붙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아스티나는 그의 품을 벗어나 도망치는 대신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테리오드의 목을 끌어안았다.

“음…….”

부드럽게 두 입술이 맞물렸다.

때마침 수면이 발목 위로 찰랑였다. 얼음장 같은 물과 반대로 테리오드의 입술은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 온도 차에 몸을 떤 것도 잠시, 입 안을 파고드는 혀에 그 외의 것은 모두 잊어버렸다. 테리오드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아스티나는 짓궂게 테리오드의 혀끝을 깨물었다. 숨결 사이로 피식 웃음을 흘린 테리오드가 더욱 깊숙이 입술을 겹쳤다.

“하아…….”

테리오드에게서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맞닿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갈증이 일었다. 한참 후에야 아스티나는 조용히 눈을 떴다. 그렇게까지 오래 입을 맞췄다 생각하진 않았는데 벌써 호수엔 석양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테리오드가 손을 들어 아스티나의 입술을 닦아 주었다. 싸늘한 감촉에 아스티나가 순간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가 테리오드의 젖은 옷에 시선을 주며 말했다.

“……손이 식으셨네요. 방금은 괜한 장난을 쳤나.”

“차가우셨습니까?”

“저보단 대공께서 추우실 것 같아서요.”

“덕분에 입술을 훔칠 기회를 얻었으니 괜찮습니다.”

테리오드가 그리 말하며 애정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졸지에 얼토당토않은 거래를 하게 된 아스티나가 어이없다는 듯 마주 웃음을 흘렸다. 테리오드는 그런 아스티나에게 손을 뻗어 깍지를 꼈다.

계속해서 물에 발을 담그고 있기엔 날이 찼다. 둘은 호수 밖으로 걸어 나와 벗어 두었던 옷가지 쪽으로 향했다.

“잠깐만요.”

테리오드의 부름에 아스티나는 신발에 발을 끼워 넣으려다 말고 멈칫했다. 그녀를 붙잡아 세운 테리오드가 걸치고 있던 옷 하나를 벗었다. 그것을 대충 뭉쳐 구기더니, 그대로 아스티나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아스티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런 테리오드를 지켜보았다. 테리오드가 그의 어깨 위로 손을 올리게 종용하고 나서야 아스티나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챘다.

“신발까지 젖으면 걷기가 불편하니까요.”

그리 말하며 테리오드가 발에 묻은 물기를 닦아 주었다. 한 발로 균형을 잡는 것쯤이야 간단한 일이었지만, 아스티나는 잠자코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아스티나의 눈높이에선 그의 결 좋은 은빛 머리칼이 그대로 내려다보였다.

테리오드는 단 한 번도 아스티나가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한 결심을 후회하게 만든 적이 없었다. 그녀는 확실히 주는 것에 비해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

아스티나가 툭 내뱉듯이 말했다.

“신기하네요.”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분명 연애는 처음이라고 하셨는데, 하시는 행동은 꼭 바람둥이 같으셔서요.”

사레가 걸린 듯 테리오드가 기침을 쏟아 냈다. 곧 숨을 진정시킨 테리오드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아스티나를 올려다보았다. 아스티나가 머쓱한 음성으로 변명했다.

“어디까지나 비유입니다.”

“부인께서는 분위기 깨는 데 참으로 재주가 있으십니다. 처음도 아니신데.”

뼈 있는 핀잔에 아스티나의 눈썹이 들렸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에게 신발까지 대신 신겨 주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내친김에 몇 가지를 더 캐묻기로 마음먹었다.

“어떤 분이었습니까?”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군요.”

“뒤끝 있게 굴지 않을 테니 솔직히 말해 보세요.”

아스티나의 시치미에 테리오드가 팔짱을 꼈다. 자신에겐 알 권리가 있다는 듯 당당한 태도였다. 그에 아스티나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아주 미남이었죠.”

“저보다 더요?”

테리오드의 눈빛에 경쟁심이 어렸다. 아스티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어차피 같은 얼굴인데 어떻게 누가 더 낫고 나쁘고를 따지겠는가. 테리오드와 테오도르의 다른 점은 머리 색 하나뿐이었다. 얼굴에만 집중하면 미친 척 과거에 파묻힐 수도 있을 정도다. 실제로 그가 염색을 했을 때 옛 연인과 헷갈려 관계까지 갖지 않았었나.

아스티나가 애매하게 대답했다.

“우위를 가릴 수가 없군요.”

“그런 인물이 수도에 없을 텐데…….”

“예?”

“아닙니다.”

들리지 않게 중얼거리던 테리오드가 모른 척 말을 돌렸다. 테리오드의 반응은 타인이 들으면 다소 재수는 없되, 반박을 돌려줄 수는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테리오드만 한 인물은 흔치 않았다.

스스로를 꾸미는 일에 누구보다 긴 시간을 소요할 수 있는 자들이 모이는 게 사교계다. 테리오드는 그중에서 가장 잘났다고 말해도 손색이 없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대단히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분야에서 동점을 얻자 테리오드는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는 아스티나가 아직 옛 연인에 대한 마음을 버리지 못해 더 좋은 평가를 내렸으리라 지레짐작했다.

“성격은 어땠는지요. 저보다 좋았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테리오드는 이내 자신의 다른 장점을 짚어 냈다. 아스티나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제가 그렇다고 답하면 어쩌려고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전 아주 영리한 질문을 한 겁니다. 저보다 더 충실한 남자였다면 제게 오지 않으셨을 테니.”

아스티나는 말문이 막혔다. 영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마티나가 여한 없이 죽었다면 과연 다음 생이 존재했을까. 아스티나는 종종 자신이 과거에 갖지 못한 것을 마저 이루고자 다시 태어난 게 아닐까 생각했다. 평생을 그리워했던 테오도르와 같은 낯의 남자를 만난 건 신의 질 나쁜 장난이라고 여기면 속 편했다. 운명이란 말에 휘둘리게 된 건 조금 자존심 상했지만.

“예, 아주 나쁜 남자였습니다.”

새 연인을 앞에 두고 아스티나는 시원하게 과거의 배신자를 욕했다. 실제로 테오도르는 아주 이기적인 남자였다. 그에겐 마티나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많았다. 테리오드가 아스티나를 가장 우선으로 두는 것과 다르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런 남자는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질색하는 그녀의 반응에도 테리오드는 그다지 기뻐 보이지 않았다. 테리오드가 설핏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직 그대의 마음속에 있네요.”

테리오드의 손이 눈가에 닿았다. 속눈썹을 타고 흐른 눈물이 테리오드의 손가락을 적셨다. 아스티나는 그제야 어느새 제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스티나는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과거의 깊은 슬픔은 다행히도 고작 한 방울에 그쳤다.

이것 봐, 이제 눈가가 짓무를 정도는 아니잖아.

아스티나가 오기처럼 말했다.

“다 잊었습니다.”

“거짓말.”

아스티나는 결국 테리오드를 피해 눈을 감았다. 이럴 때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진 않았다. 그녀가 울컥한 투로 중얼거렸다.

“……괜한 얘기를 해서.”

“울려서 미안합니다. 앞으로 질투는 속으로만 할게요.”

테리오드가 아스티나를 달래듯 말했다.

아스티나는 주먹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톱 끝이 손바닥에 박혀 들며 아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테리오드는 언제나 그렇듯 그런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펴 주었다.

“그와 언제 이별하셨습니까?”

“……백 년쯤 전에요.”

“재미없는 농담은 그만하고요.”

테리오드가 어이없다는 듯 되받아쳤다. 아스티나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농을 건넸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그렇게 받아들일 것을 알고 한 말이긴 했지만, 문득 아스티나는 그런 게 아니라고 화를 내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가 알지 못하는 일을 두고 언성을 높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스티나는 눈을 뜨며 테오도르의 얼굴을 시야에 담았다. 그를 원망하듯 말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결코 완전히 지워지진 않을 겁니다.”

당신의 존재 자체가 항상 그를 되새기게 만드니까.

“그건 제게 좀 슬픈 말이로군요.”

테리오드가 흐려진 눈빛으로 대답했다.

아스티나는 알았다. 테오도르는 저런 표정을 짓지 않는다. 그러니 눈앞에 선 것은 그녀가 기억하는 것과는 다른 사람이다.

처음엔 테리오드에게 테오도르와 같은 점을 발견하면 기뻤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점을 발견하고, 그를 기꺼이 여기는 자신을 발견할 때 되려 기분이 좋아졌다. 테리오드를 오롯이 보게 되어 가고 있는 것만 같아서.

“대공,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픔을 딛고 삽니다.”

테오도르는 이미 가슴 깊숙한 곳에 박혀 버린 흉터다. 아문다고 한대도 상처 자국까지 지워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아프지 않을 수는 있겠지. 그렇게 흐려지면, 희미할 만치 희석되고 나면 아스티나도 테리오드만을 온전히 옆에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부족하다 여기실진 모르겠지만, 저는 언제나 어제보다 오늘의 그대를 더 아낍니다. 언젠간 제게도 대공을 가장 우선으로 두는 때가 오겠지요.”

“…….”

“저는 열심히 발을 내딛고 있으니, 대공께서도 그런 저를 느긋이 지켜봐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결국 테리오드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가 과분한 연인이라고 생각했지만, 테리오드 역시 지나칠 만치 다정한 여자를 짝사랑 상대로 두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아스티나가 자신을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테리오드는 희망을 얻었다. 아무도 의미 없는 상대에게 노력을 쏟아붓진 않으니까.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의 뺨을 매만지며 말했다.

“기다림이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나에겐 항상 그대가 필요하니까요.”

“좋은 제어제라서요?”

“글쎄요, 가끔 나를 난폭하게 만들기도 하지요”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의 허리를 감싸며 그녀를 끌어당겼다. 아스티나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걸음을 내디디며 둘 사이가 다시 좁혀졌다. 그대로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에게로 입술을 겹쳤다. 아랫입술을 가볍게 한 번 빨아들이고는, 아스티나와 눈을 맞추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가 낮게 갈라진 음성으로 물었다.

“사랑한다고 한 번만…… 말해 줄 수 있습니까?”

둘은 입술 사이에 겨우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그가 이런 것으로라도 만족한다면 그 말을 들려주고 싶었다.

결국 아스티나가 말했다.

“사랑…… 해요.”

“그것보단 단호하게.”

“사랑해요.”

“……한 번만 더 해 봐요.”

테리오드만큼이나 아스티나도 이 말이 예언이 되기를 바랐다. 텅 빈 고백에 진심이 채워지기를 기도하며, 아스티나의 목소리에서 망설임이 지워졌다. 그녀가 보다 분명히 말했다.

“사랑해, 테리오드.”

테리오드가 벅찬 기색으로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그대로 아스티나에게 입술을 묻었다. 아스티나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그를 품에 안았다. 얽혀 드는 혀는 기대만큼이나 다정했다.

아스티나는 그녀를 위로하는 이 사랑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만 별장으로 가요.”

긴 입맞춤 끝에 테리오드가 속삭였다. 아스티나는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른 아침부터 잠이 깼다. 테리오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테라스로 향했다.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자 서늘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채 다 여미지 않은 옷가지로 찬 바람이 새어 들었지만, 새벽 공기는 불쾌함보다는 상쾌함을 자아냈다.

테리오드는 난간에 팔을 기댄 채 잠시 창밖을 응시했다. 별장의 2층 침실 발코니에선 호수를 그대로 내려다볼 수 있었다. 잔잔히 일렁이는 물결 위로 호수를 둘러싼 수목들이 비쳤다. 안개가 낀 숲은 더없이 몽환적인 모습이었다. 작달막한 물소리와 새의 지저귐이 자장가처럼 이어졌다. 능선 위로 차츰 어스름한 빛이 번졌다.

“음…….”

뒤편에서 들려온 뒤척임에 테리오드가 고개를 돌렸다. 지난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탓인지, 평소 기상하던 시간이 가까워졌음에도 그의 아내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테리오드는 그대로 창문을 닫고 아스티나에게로 돌아갔다. 침대 위엔 지난밤의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테리오드는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집어 들다 말고 멈칫했다. 자던 중 벗어 던진 것인지 아스티나의 속옷이 떨어져 있었다.

테리오드는 곤히 잠든 아내에게로 빳빳이 굳은 목을 돌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는 이불을 그럭저럭 잘 간수하고 있었다. 벗은 몸쯤이야 이미 수없이 보았는데도 왜 민망한 기분이 드는 걸까.

테리오드는 대체로 요즘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지만,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다면 바로 아내보다 유난스러운 자신의 태도였다. 동요한 감정은 종종 서툰 결정을 불러왔다. 테리오드는 배우자에게 신뢰감을 줘야 하는 유부남으로서 그것이 과연 아내에게 매력적으로 비칠지 의문이었다.

테리오드는 고민 끝에 아스티나를 깨워 옷을 입혀 주는 대신, 이불을 마저 꼼꼼히 여며 주었다. 창문을 빠르게 닫아서 다행이었다. 방 안의 훈기가 다 빠져 나갔다면 걸친 게 없는 아스티나는 필히 감기에 걸렸을 터다.

테리오드는 무릎을 굽혀 아스티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부산스럽게 굴었는데도 그녀는 아직 수마를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테리오드는 손을 뻗어 천천히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손가락 사이로 부드러운 머리칼이 흐르듯 쏟아졌다.

테리오드가 문득 입을 열어 아스티나를 불렀다.

“부인.”

상대에겐 가닿지 않을 작은 목소리였다. 응답하는 사람이 없었음에도 테리오드는 다시 한번 그 말을 곱씹었다.

“……부인.”

그녀와 부부 관계에 있다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굉장한 충족감이 차올랐다. 그들이 점점 이상적인 배우자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일까.

아스티나의 입맞춤은 더 이상 저주를 풀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테리오드 역시 그녀가 떠날까 불안해하지 않았다. 감히 바라지도 않았던 것들이 어느덧 일상이 되어 있었다.

혹여 이 모든 게 꿈이고 깨어났을 때 그녀가 옆에 없으면 어떡할까.

과한 행운에 순간순간 겁에 질릴 정도로, 테리오드는 그야말로 숨 막히도록 행복했다. 더 무언가를 바라선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잡아 봐도 잠시뿐이었다. 테리오드는 그녀가 다정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게 되었다. 그녀가 진심으로 제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할 날이 머지않았다고.

테리오드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보채지 않고 기다릴게요.”

“보채지 않고 기다렸다기엔, 제 머리카락을 너무 열심히 빗어 주시던데요.”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의 머리칼을 쓸다 말고 멈칫했다. 아스티나가 눈을 뜨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잠에서 깬 것치고는 눈빛이 맑았다.

자는 척을 하고 있었던 건가.

테리오드가 당황 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언제 깨셨습니까?”

“아까 대공께서 일어나셨을 때요.”

기상 시간이 거의 같았다 이 말이었다. 그녀가 제 혼잣말을 다 듣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낯부끄러워졌다. 딱히 잘못한 일이 없었음에도 테리오드는 순간 제 행적을 점검했다. 골똘히 되새겨 봐도 입 밖으로 낸 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잘된 일이었다. 제가 품은 과분한 욕심을 소리 내어 말했다간 그녀에게 부담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런 면에선 아스티나가 그의 중얼거림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게 다행 같기도 했다.

“왜 자는 척을 하셨습니까.”

테리오드의 추궁에 아스티나는 잠시 눈을 굴려 왼편을 응시했다. 이내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냥요.”

“그냥?”

“한참 들여다보시기에, 입술이라도 훔치실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낮게 잠긴 음성이 묘하게 유혹적이었다. 당황한 테리오드가 제자리에 굳었다. 아스티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에게 거는 장난은 항상 효과가 좋았다.

미동 없는 테리오드와 달리, 아스티나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리오드는 그제야 반대편으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누가 봐도 시선을 피한 것이 명백한 움직임이었다. 아스티나가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결혼한 사이인 데다, 부부 관계도 소홀했던 적이 없었다. 알몸 따위에 유난스럽게 구는 게 더 이상한 반응이란 소리였다. 밤엔 같은 모습으로 이보다 더한 것도 했는데 날이 밝았다고 새삼 달라질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아스티나는 팔짱을 끼고는 잠시 제 순진한 남편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노련한 여자답게 그의 부끄러움에 적절한 처방전을 내렸다.

“같이 씻을까요?”

미리 불을 때어 두었던 별장 관리인은 대공 부부의 부름에 금방 따듯한 물을 내왔다. 욕조가 채워지는 사이 테리오드와 아스티나는 나란히 서서 세안과 양치질을 해치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테리오드는 아스티나에게 농을 맞받아칠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가운을 벗고 입욕해야 할 때가 오자 긴장을 숨길 수 없었다. 이렇게 환한 곳에서 그녀의 몸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관계는 대개 밤에 행했었고, 덕분에 항상 어둠에 반쯤 가려져 있었던 탓이다. 테리오드는 욕조 타일 어딘가쯤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에 몸을 담갔다.

욕조는 넓은 편이었지만 성인 남녀 둘이 개인 공간을 주장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부부 침실에 딸린 욕조란 꽤나 용도가 명확하니까.

자연히 맞붙은 다리의 감촉이 선연했다. 아스티나는 건너편에 앉은 채 그런 테리오드를 넘겨보았다.

“불편하십니까?”

“……그럴 리가요.”

“이쪽으로 시선을 안 주시는 것 같은데…….”

테리오드는 아내의 알몸을 보고 반응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씻으러 들어왔다가 그곳을 세우는 꼴불견이 되고 싶진 않았기에 그는 흐린 눈을 유지했다. 갑자기 성불구자 흉내를 내는 남편 때문에 아스티나는 조금 짜증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아스티나가 거품이 묻은 타월을 들어 가만히 제 팔을 쓸다 말고 말했다.

“닦아 주시겠어요?”

“예?”

“제 몸이요.”

테리오드의 얼굴이 삽시간에 뻘겋게 달아올랐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타월을 받아 들었다. 아스티나는 다소 어이없는 눈으로 그런 그를 지켜보다가, 아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아예 테리오드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목 뒤에서 남자의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행동이 노골적으로 변하자 테리오드도 그 뜻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테리오드가 한숨처럼 말했다.

“……절 놀리시는 거죠.”

“대공께서 이상하신 겁니다. 저희가 같이 지낸 밤이 얼마인데 새삼 뭐가 부끄러우신 건지…….”

“어릴 적 읽은 서적에서 말하길, 침실 외의 공간에서 관계하는 이들은 변태 성욕자라고 하더군요.”

몇 방탕한 귀족들이 들었다간 까무러칠 소리였다. 게다가 테리오드와 아스티나는 이미 침실 외의 공간에서 관계한 경험이 있으니, 그 기준에 의하면 둘은 진작부터 변태 성욕자였던 셈이다.

아스티나는 피식 웃음 짓고는 아예 테리오드의 가슴팍에 등을 기댔다.

“변태라……. 재밌네요, 그거.”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내가 변태라 싫으신가요?”

아스티나가 테리오드를 놀리듯 되물었다. 테리오드는 시뻘게진 목으로 말없이 아스티나에게 거품 칠을 해 주었다. 아스티나가 테리오드 쪽을 흘긋 돌아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가 유혹하듯 속삭였다.

“변태가 변태 짓을 하고 싶으면…… 어쩌죠?”

아스티나는 내친김에 테리오드의 팔뚝을 깨물었다. 당황한 테리오드는 들고 있던 타월을 아예 놓쳐 버렸다. 그가 눈을 감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정말…… 부인께는 못 당하겠습니다.”

“전 남편이 너무 조신해서 힘드네요.”

아스티나의 심드렁한 대꾸에 테리오드가 그만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시야에선 아스티나의 몸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었다. 테리오드는 팔을 뻗어 아스티나의 가슴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아스티나의 입가에서 옅은 한숨이 쏟아졌다. 테리오드는 그녀의 배 언저리를 쓸다가는 손을 더 아래로 내렸다. 다리 사이로 파고든 손가락이 음순을 벌리고는 음핵 부근을 눌러 왔다. 아스티나는 반사적으로 다리를 모아 붙였다. 그러나 이미 단단히 자리 잡은 손은 좀처럼 비켜 주질 않았다.

“으, 흐으……, 아……. 앗.”

음핵을 마찰시키다가 짧게 꼬집고는, 또 은근히 쓸어 올리는 행위가 반복됐다. 아스티나의 숨은 어느새 거칠어져 있었다. 젖어 있는 아래가 욕조에 담긴 물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의 귓등을 애교 있게 깨물었다. 그가 기분 좋은 목소리로 물었다.

“기분 좋으십니까?”

“점점 능청맞아지시긴.”

아스티나가 한숨처럼 대꾸했다. 그녀는 손을 뒤로 뻗어 테리오드의 목을 쓸며 몸을 들썩였다. 그에 화답하듯 자극이 더욱 거세어졌다. 그가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음핵을 손끝으로 둥글려 문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매우 빠르게.

아스티나에게서 결국 항복 선언이 터져 나왔다.

“하아, 으, 못 참겠으니, 그만…….”

아스티나가 그리 말하며 테리오드의 손을 밀어냈다. 그에게서 벗어나려던 것이었는데, 욕조를 짚고 고개를 숙이자 영락없는 유혹의 모양새가 되었다. 테리오드에게서 탄식과 같은 숨이 배어 나왔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의 둔부를 손끝으로 가볍게 쓸어 올렸다. 이어 그녀의 뒤에 단단히 자리잡은 남성이 느껴졌다.

테리오드가 억눌린 음성으로 말했다.

“넣을게요.”

“그런 건 굳이 말씀하시지, 윽……. 마세요.”

아스티나가 뒤를 돌아보며 짧게 눈을 흘겼다. 테리오드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짧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굵직한 욕망을 그녀에게로 밀어 넣었다. 아스티나의 손끝이 천천히 곱아 들었다. 거대한 방망이가 제 하반신부터 저를 반쪽으로 쪼개는 듯한 기분이었다. 처음만은 언제나 압박감에 하복부가 저려 왔다. 모든 걸 받아들이고 나면 그만한 쾌감도 또 없었지만.

테리오드가 염려스러운 음성을 내었다.

“아무래도 빠듯한데요. 좀 더 있다가 움직이는 게…….”

“난 됐으니까 이만 해요.”

득달같이 배려를 거절당했다. 그럼에도 테리오드의 염려를 완전히 지울 수 없었다. 아스티나가 다칠까 걱정되었던 테리오드가 약간의 자조를 입에 담았다.

“좀 작았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농담해요?”

아스티나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냔 듯 테리오드를 응시했다. 처음 보는 아내의 태도에 테리오드가 멈칫했다. 아스티나가 가는 신음을 쏟아 내며 테리오드의 팔을 잡아끌었다.

“좋아 미칠 것 같으니까 제발…… 움직여요.”

뒤편에서 그대로 들여다보이는 곡선, 저를 집어삼키고 있는 쾌감의 깊이와 낮게 갈라진 목소리까지. 모든 게 테리오드의 욕망을 자극했다. 결국 테리오드는 완전히 그녀 안에 저를 파묻었다. 아스티나는 입술을 깨문 채 몸을 떨었다. 그 반응을 좀 더 솔직하게 풀이하자면 환희와 같았으리라.

“하아, 아……!”

그 부피에 채 적응하기도 전, 커다란 기둥은 자비 없이 안을 짓눌렀다가 단번에 빠져나갔다. 테리오드는 마치 원래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그녀의 안에 쉽게, 깊숙이 침투했다. 거친 움직임과 별개로 지난 밤 관계의 여파인지 삽입은 부드러웠다. 아래가 지나치게 젖어 있는 탓도 있지 않을까, 아스티나는 어지러운 머리로 생각했다.

“응, 아, 하으, 으! 응!”

물이 담겨 있는 욕조에서 움직이는 건 공기 중에서보다 더 큰 힘을 필요로 했다. 아스티나는 미끄러지지 않도록 겨우 버티며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저를 힘 있게 물어 오는 질구의 조임에 테리오드의 미간 사이가 좁혀 들었다. 가슴팍엔 어느새 땀방울이 고여 있었다. 뜨거운 물에서 나온 증기로 이미 주변은 후끈해진 상태였다. 숨을 들이켤수록 더욱 목이 타고 열이 올랐다.

머리가 어지러워 순간 중심을 잃고 만 것일까, 아스티나의 무릎이 미끄러졌다. 손으로 욕조를 쥐고 있었던 탓에 물에 얼굴을 처박진 않았으나 자세는 위태로웠다. 그러나 테리오드는 그녀를 일으켜 주는 대신 그녀의 허벅지를 잡아 하체를 제게로 끌어당겼다. 안을 파고드는 속도는 이전과 같았다. 그야말로 배려 없이.

“그만, 아, 응, 너무……, 아!”

“늘 절 시험하는 건 부인 쪽이시면서―”

“하응, 아, 아……!”

“제가 좀 장난을 친다고, 흣……. 노여워하시면 안 됩니다.”

테리오드가 그리 말하며 아스티나의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살갗을 빨아들이고 난 자리엔 짙은 붉은빛 자국이 남았다. 가능하다면 그녀의 온몸을 이렇게 물들이고픈 심정이었다. 그녀의 위신을 생각한다면 안 될 말이었지만,

적어도 어떻게 하면 그녀가 제 밑에서 새빨갛게 달아오르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아, 하으으, 으! 잠까, 안 자극이……!”

안 그래도 민감해져 있던 아래에 재차 남자의 손이 닿았다. 절정 전까지 달궈졌던 음핵에 다시금 자극이 닿자 질구가 경련하듯 옴죽였다. 눈앞이 번쩍거리는 기분에 아스티나는 잠시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 와중에도 아래로 박혀 드는 성기는 정확히 성감대만을 찍어 눌렀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신음조차 할 수 없었다. 아스티나는 몸을 뒤틀려 했지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그의 중지가 클리토리스를 유린하듯 문지름과 동시에 아스티나는 몸을 굳혔다.

“하으으, 나, 나아…… 먼저, 아! 하악!”

말조차 제대로 맺지 못하고 절정을 맞았다. 하반신부터 등허리를 가로지르는 강렬한 쾌감에 무의식적으로 입이 벌어졌다. 가장 끔찍한 점은 그녀가 끝을 보았음에도 테리오드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밀지를 매만지는 행위와 안으로 박혀 드는 성기는 그대로였다. 수축하고 있는 내부로 파고들어서일까 성기의 감촉이 유독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만, 아, 테리…… 오드, 멈, 춰……! 아, 아!”

“후……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습니까, 부인.”

아스티나가 젖은 눈으로 테리오드를 돌아보았다.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스티나의 표정에서 뜻을 읽어 냈는지 테리오드가 손을 떼어 냈다. 아스티나는 숨만 새근거리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가 아스티나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까이 가져가며 말했다.

“키스해 주세요.”

아스티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의 입술을 물었다. 그의 입 안에 혀를 밀어넣자마자 그 역시 깊숙이 저를 얽어 왔다. 질척이는 소리가 유독 음란하게 울렸다.

“응, 으, 응, 아……!”

테리오드는 얕은 움직임으로 그녀를 재차 달구었다. 밀착된 두 하반신은 끈질긴 두 입술 마냥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고개를 뒤로 젖힌 상태라 목이 뻐근했지만, 그와 타액을 나누는 기분이 외설적이었기에 아스티나는 그의 키스를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목을 손끝으로 쓸어 지분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녀가 즐겁게 가지고 논 후의 살갗은 보기 좋은 분홍빛으로 익어 있었다. 아스티나가 마침내 입술을 떼어 내며 만족감 어린 눈으로 말했다.

“하으, 흐……. 예쁘네요.”

“그러면 예뻐해, 하아……. 주셔야지요.”

그리 말하며 테리오드가 다시 힘 있게 아래를 쳐올렸다. 아스티나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아래를 벌리고 들어오는 흉기를 무리 없이 받아 삼키려면 그 정도의 준비는 필요했다. 그것이 저를 곧 죽을 것처럼 몰아붙일 예정이라면 더더욱.

아니나 다를까 테리오드의 움직임은 점차 빠르게 변했다. 하복부가 아린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아스티나는 숨을 토해 내며 겨우 욕조 바깥으로 목을 뺐다.

“아, 하아, 아응, 아아!”

제대로 절정을 마치고 내려간 적이 없었기 때문일까, 다시 정점을 찍는 속도는 이전보다 더욱 빨랐다. 강하게 밀려드는 압박감에 아스티나는 욕조 바깥의 손잡이를 겨우 쥐고 버텼다. 종내에는 벌어진 다리를 추스를 정신도 들지 않았다. 욕조의 물이 출렁이며 바깥으로 쏟아졌다. 아스티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무너졌다.

“아, 아, 아아!”

“하…… 흐으…….”

수축하는 질이 그의 것을 미친 듯이 조여 물었다. 뒤편에서 테리오드의 짧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느린 움직임으로 그녀의 안을 탐하던 성기가, 곧 밖으로 빠져나갔다. 엉덩이 골 사이로 살덩이가 문질러지며 질척이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가 뱉어 낸 정액이 오목한 골짜기를 타고 흘렀다. 아스티나는 아득한 정신으로 뒤처리라도 간단해져서 다행이라 생가했다. 안에 남은 사출액은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벌어진 입구가 쉬이 다물리지 않을 것 같다면 괜한 기우일까. 여운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아 아스티나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 숨을 죽였다. 몸 곳곳에 아직 짜릿한 감각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테리오드가 그런 아스티나를 끌어안아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욕실이 온통 훈기로 가득 차 있었기에 욕조 바깥에 걸터앉아 있는데도 그리 춥진 않았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가 제 몸을 닦아 주는 걸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아까 그녀의 나신에 눈길도 못 줬던 걸 생각하면 혁혁한 성과였다.

아스티나가 늘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오쯤엔 나가야 되는데, 힘이 하나도 없네요.”

“저도 돌아가기 싫습니다. 일은 이제 지긋지긋해요.”

테리오드가 피식 웃으며 동조했다. 그러고는 책망하듯 가볍게 그녀의 젖꼭지를 깨물었다. 저를 독수공방시킨 아내를 향한 약간의 원망을 담아서였다. 그에 아스티나의 몸이 미세하게 움찔했다. 그녀는 테리오드의 과로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원인이 바로 그녀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아스티나가 지레 찔려 사과했다.

“……저 없는 사이 대신 할 일이 많으셨겠죠. 이젠 저도 돕겠습니다.”

본래 일의 양을 탓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으나, 테리오드는 정정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못내 잘못을 인정하는 그녀의 얼굴이 퍽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테리오드가 참지 못하고 아스티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벅차오른 감정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랑의 열병에 빠진 남자가 어리광처럼 말했다.

“그냥 같이 여기서 살까요?”

아스티나가 테리오드의 코를 꾹 누르며 대꾸했다.

“자꾸 귀엽게 구시긴.”

* * *

휴가에서 복귀한 아스티나는 다음 날 정오 무렵, 이시스를 만나기 위해 곧장 황궁으로 향했다. 황녀와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두 사람의 향방에 모두의 이목이 쏠린 상태였기에 소강상태로 접어드는 데엔 약간의 시일이 필요했던 탓이다.

무엇보다 독을 먹은 게 자의였다고 해도 내상은 온전히 황녀 홀로 감당해야 했다. 성치 않은 몸으로 프리모를 축출하려 무던히 힘을 썼으니 회복이 느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황녀의 안색은 전보다 확연히 나빠 보였다. 아스티나는 잠시 그녀의 얼굴에 난 멍을 골똘히 들여다보았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걱정해 준 덕분에 좀 나아. 아, 이건 내가 의도한 상처이니 염려치 말게.”

프리모 황자가 이시스 황녀를 폭행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세간에 유명했다. 격노한 황제는 재판에 어떠한 힘도 쓰지 않았고, 프리모는 폐위와 함께 먼 지방으로 떠나라는 추방령을 받았다. 프리모는 더 이상 황궁에서 볼 수 없게 된 인물이었다. 아스티나는 그것을 계획하고, 소문을 퍼트린 자의 정체를 익히 알고 있었다.

“직접 독이 든 잔을 기울이셨던 것처럼요?”

아스티나의 물음에 이시스가 짧게 웃었다.

대공비와의 대화는 보통 타인이 들어선 안 되는 화제로 이루어졌기에 시녀들은 진즉 내친 상태였다. 이시스는 아스티나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직접 근처의 장식장에서 포도주 한 병을 들고 왔다.

“괜찮다면 차 대신 술을 좀 같이 마셔 주겠어? 마침 어제 금주령이 해지됐거든. 기념할 일도 있고.”

그리 말하며 이시스는 황송하게도 직접 아스티나의 잔을 채워 주었다. 취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아스티나는 잠자코 술을 받았다. 이시스가 적색으로 차오른 잔을 흔들며 말했다.

“어머니에게서 답이 돌아왔어. 나를 지지하시겠다더군. 대충 준비를 마쳤으니 다가오는 신년제 행사에서 연극을 한판 벌여 볼 생각이야. 광대놀음은 질색이지만 대중에게 잘 먹힌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

이시스가 아스티나를 향해 잔을 내밀었다. 곧 건배하듯 두 와인 잔이 가볍게 부딪쳤다.

아스티나는 가볍게 술을 한 모금 넘겼다. 향이 진하다 싶었는데, 그게 예고장이라도 되었던 것처럼 도수가 꽤 높았다. 아스티나는 포도주를 입 안에서 천천히 굴리고는 삼켰다. 고개를 들어 확인한 이시스의 잔은 벌써 반 정도 비워진 상태였다. 축하가 아닌 취하는 게 목적이었을까. 황녀는 생각보다 애주가인지도 모르겠다.

이시스는 잠시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시스는 미간을 좁힌 채 의외의 화제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재밌는 소식이 하나 있는데.”

“재밌는 소식이요?”

“사실 재밌지는 않고, 조금 이상한 건이지. 데니스 사제에 관한 취조를 마쳤는데 잡아들인 범죄자 다섯 중 둘은 사전에 아무런 합의가 없었음이 확인됐거든.”

현재 데니스를 구금하고 있는 것은 이시스였다. 대공이 신전에서 빼낸 데니스를 황녀에게 넘긴 덕분이었다. 곧바로 죽이기엔 데니스는 프리모의 측근으로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이시스가 누이라서 알고 있는 것도 있었지만, 누이기에 모르는 일들도 있었다. 특히 지저분한 여성 편력이 그러했다. 이시스는 프리모가 진창을 빠져나오려 고개를 빼 들 때마다 데니스라는 패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가 무고한 사람을 범죄자로 만들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스티나의 되물음에 이시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들이 범죄를 저지른 것은 맞아. 데니스 사제는 그게 자신이 가진 신력의 증거라고 말하더군.”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없어 아스티나는 입을 다물었다. 사기꾼인 줄로만 알았던 데니스에게서 보통의 상식으론 설명할 수 없는 능력이 발견된 것이다. 이시스는 이 형이상학적 현상이 불쾌하다는 듯 입술을 비틀었다. 이시스가 술을 마저 들이켜며 중얼거렸다.

“……우연이겠지.”

아스티나는 데니스와 신전에서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그는 아레타인들에겐 신묘한 힘이 있었으며, 마티나는 바로 그 악마의 딸이라 말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지금 세대의 인물답지 않게 소실된 역사를 꽤 자세히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 자신이야말로 신력이 아닌 수상한 힘을 남몰래 이용해 왔던 건지도 모른다. 결박된 상태로 무슨 수를 꾸밀 수 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후에 한 번은 그를 찾아가 취조해 보아야 할 듯했다.

“어쨌든, 이처럼 프리모를 치워 냈다고 모든 게 다 끝난 건 아니지. 그래서 말인데 대공가에서 황궁에 후계자를 신중히 결정하란 압력을 넣어 줬으면 해. 가능하겠나?”

“그야 어렵지 않지요.”

뒤바뀐 화제에 아스티나는 상념에서 벗어나 황녀와의 대화로 돌아왔다. 아탈렌타는 황실에 의해 피해를 본 입장이었다. 명목뿐인 조항으로 지금까지는 황태자를 정하는 데 있어 별다른 힘을 행사하지 못했으나, 이젠 압력을 넣을 명백한 명분이 있었다.

이시스와 아스티나는 피해자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했다. 이시스는 그것을 강조하여 서서히 제 뒤에 아탈렌타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생각이었다. 같은 계략에 휘말린 불쌍한 처지의 여자 둘이 친해지는 건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대공비가 비운의 황녀를 연민하며 그녀의 힘이 되기로 결심하는 것도,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황제가 어떤 후계자를 세운다 한들 아탈렌타가 그를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프리모에게 완전히 배반당한 이시스라면 손을 잡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자를 보듬을 이는 없었으므로.

“흔쾌히 답해 줘서 고맙군. 사실 요즘처럼 일이 잘 풀린 적이 없어 신기하기도 해. 대소 신료들의 반발과 아버지의 고민…… 온갖 잡소리가 이어질 게 뻔하지만, 어쨌든 첫 단계를 그럭저럭 성공적으로 뛰어넘은 건 사실이지.”

이시스는 피곤하다는 듯 말했지만 그 이면엔 만족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시스가 미소 띤 얼굴로 아스티나를 향해 치하하듯 잔을 들었다.

“그대의 공이 커.”

“과찬이십니다.”

“난 과찬 따위는 하지 않아. 그건 사람을 방자하게 만들거든.”

황녀는 자칫 불쾌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을 진솔함으로 꾸며 내는 재주가 있었다. 아스티나는 황녀의 농에 허심탄회하게 웃어 보였다. 이시스가 유쾌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사실, 모든 게 끝나고 황위에 오르게 되면 그대에게 따로 작위를 내릴 생각을 하고 있어. 그대의 남편이 좋은 남자인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 지참금 없이 시집온 여자는 뭐라도 손에 쥐고 있어야 하는 법이거든.”

카라벨라의 혼인 양식에선 대체로 아내에게 따로 부여된 재산이 없었다. 만일 부부가 갈라서기로 결정한다면, 재산 분할은 대개 아내가 혼인 전 가지고 왔던 지참금을 돌려받는 데 그쳤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아탈렌타에 팔려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가져온 재산도 없었다. 만일 테리오드와 이혼하게 된다면 빈털터리와 마찬가지의 행색으로 바깥에 나앉게 될 것이다.

“물론 내가 내릴 상이 아탈렌타가 소유한 재산에 비할 바는 아닐 거야. 하지만 부부 싸움 시 그대가 소유한 저택으로 도망칠 수 있다는 건 꽤 매력적인 일 아닌가?”

“세심한 배려이십니다.”

아스티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감사를 표한 것과 별개로 내려질 재물에 대한 설렘은 그 안에 비치지 않았다. 대공비는 단순히 황녀가 건넨 농에 재밌어하는 기색이었다. 이시스가 기민하게 그 사실을 알아채고는 지적했다.

“별로 기뻐 보이지 않는군.”

아스티나가 조금 눈을 크게 떴다. 곧 아스티나의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실제로 받기 전까지 그것은 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허언을 하고 있다 말하는 건가?”

“사실 황녀님께서 저를 내치실 가능성도 생각해 두고 있답니다, 항상.”

황녀를 위해 가문의 명예까지 내던졌던 충신이 할 말은 아니다. 이시스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농담이겠지?”

“역사에서도 익히 나오지 않습니까? 충신 마티나와 우군 테오도르의 비극적인 서사시가.”

아스티나가 툭 내던지듯 말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짐작할 수 없는 태도였다. 방자한 모습에 이시스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나를 그따위 옹졸한 사내와 비교하는가?”

술기운 탓인지 이시스의 뺨은 이미 불콰해져 있었다. 아스티나는 황녀가 술꾼이라는 가정을 조용히 정정했다. 아무리 좋게 봐도 애주가가 될 수 있는 주량은 아니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이시스는 딱히 고민을 거치지 않고 속마음을 털어 냈다. 그녀가 평소보다 커진 목소리로 호탕하게 말했다.

“사내들은 심신이 졸렬하여 보은 따윈 금세 잊고 말지. 내 그 어리석음은 답습하지 않을 생각일세.”

“황녀님을 불신하여 드린 말씀은 아니었습니다만―”

“아니, 됐네. 그대가 현실적인 사람인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철두철미할 줄은 몰랐어. 원한다면 공증이라도 해 주지.”

그런 걸 바란 건 아니었지만 아스티나는 결국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이시스의 말마따나 영지가 하나 더 생겨서 나쁠 점은 없었다. 이시스는 종이를 꺼내 꼬부라진 글씨를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자 이어지기도 전에 그대로 늘어지고 말았다.

“글자가 머리에 안 들어오는군.”

“술이 약하신가 봅니다.”

“전혀?”

이시스가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되물었다. 아스티나는 조용히 술병을 뒤로 치워 두었다.

“술을 이리 가져오게, 대공비. 오늘은 내가 취하고 싶어서 취한 거야. 평소엔 잘 조절할 줄 안다네.”

“예, 그래도 몸이 좋지 않으시니까요.”

“내 말을 안 믿는군.”

이시스가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턱을 손에 괴었다. 잠시 먼 곳을 응시하던 그녀가 툭 내뱉듯이 아스티나를 불렀다.

“대공비.”

“예.”

“오늘 벨리타가 죽었어.”

아스티나는 잠시 뜸을 들인 끝에 대꾸했다.

“……몰랐습니다.”

“몰랐겠지. 황궁의 깊은 지하에서 조용히 처리됐거든.”

아스티나는 이시스를 죽이려 했던 자매의 부고에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외려 이시스의 입장에선 앓던 이가 빠진 상황이 아닌가. 그러나 이시스가 들고 온 술은 축포를 위한 샴페인이 아니었다. 이시스의 낯을 살피던 아스티나가 이내 담담히 대답했다.

“황녀님께서 하신 일은 아닌가 보군요.”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 이시스는 아스티나의 눈치가 썩 마음에 든다는 듯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시스가 자조적인 투로 말을 이었다.

“그래, 벨리타는 프리모를 버리고 살아남고 싶어 했고, 그건 아버지가 원한 결과가 아니었거든.”

벨리타는 오라비에게 모든 업을 돌리고 이 사건에서 발을 빼려고 했다. 친동생을 암살하려는 패륜범이라면, 이복 누이를 협박하여 독을 수급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벨리타의 결정은 이성적이었고 심지어 실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녀가 한 가지 놓친 게 있다면, 애석하게도 그녀는 황제의 아픈 손가락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아버지는 프리모를 살려 두고 싶어 했지만 벨리타에겐 그럴 가치조차 없었지. 프리모가 지방으로 내려가는 데 그친 건 아버지가 벨리타를 제물 삼았기 때문이야.”

둘 중 하나가 살아남기 위해선 한쪽이 그의 악행을 뒤집어쓰는 수밖에 없다. 이시스는 버려진 벨리타를 보고도 속 시원히 웃을 수 없었다. 권력의 정점에 서려는 계획과 별개로, 이시스도 황제에 의해 언제든 벨리타와 같은 입장이 될 수 있었다.

이시스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어지간히 웃기는 집안 아닌가?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또 형제가 형제를……, 이런 가문이 통치하는 나라에 도덕이란 게 존재할 수 있을지 난 잘 모르겠군.”

“권좌는 비정한 것이니까요. 현 황제 폐하의 대에서도 같은 일이 있었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그걸 몰라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냐. 다만…… 이런 날도 있는 게지. 그 비정함에 지치는 날이.”

아스티나는 입을 다물었다. 황녀는 해답을 바라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저 들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그러지 못할 것도 없다. 아스티나는 결국 뒤편으로 치워 두었던 술을 다시 꺼내 들었다. 이시스의 말마따나 이런 날이라면 취해도 좋으리라.

이시스가 제 잔 위로 쏟아지는 보랏빛 액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렸다.

“나는 남동생을 죽이고 프리모는 여동생을 죽이고……. 다 똑같군.”

아스티나는 말없이 이시스에게 잔을 밀어 주었다. 이시스가 인상을 쓰며 술을 홀짝였다.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던데, 난 그 애의 결혼을 중매 선 것도 모자라 진짜 관까지 만들어 준 셈이지.”

“그건 그분의 선택이었습니다. 전하께서 죄책감을 가지실 일은 아니지요.”

“죄책감 같은 건 느껴 본 적이 없어. 그 선택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거지.”

“…….”

“내가 벨리타의 중매를 섰었다고 말했던가?”

“방금요.”

술에 취한 자의 이야기엔 두서가 없었다. 이시스가 아,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러고는 두통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벨리타는 본디 벵텐 후작의 처로 갈 예정이었어. 하나뿐인 동복 남동생이 죽고 난 뒤라, 그때 그 애에게 그리 좋은 혼처들이 들어오진 않았거든.”

“벨리타 황녀와 벵텐 후작의 나이 차가 좀 나긴 하지만, 그의 세력은 무시할 바가 못 되지 않습니까?”

“조건만 보면 그랬겠지. 속내는 그보다 더 금수 같은 자가 없어. 창녀를 손찌검해 죽였던 인물로 술을 마시면 몹시 포악해진다더군. 그래서 벨리타를 술이라곤 입에도 안 대는 순박한 셀렌 자작에게로 보냈지. 다이아몬드 광산 사업이면 그 애의 사치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벨리타 황녀님도 그 사실을 아셨습니까?”

아스티나의 물음에 이시스는 고개를 저었다. 벵텐 후작쯤 되는 대귀족이 제 흠을 드러내 놓고 다닐 리 없다. 이시스로서도 우연찮게 알게 된 정보였기에 벨리타에게까지 소식이 닿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그를 선택했을까?

지금에 와선 알 수 없게 된 일이었다.

“글쎄, 그때 난 굳이 그 애가 세상의 더러운 꼴을 더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 순박한 남편을 볼 때마다 울화가 터지는 데다 이복 언니는 밉고 증오스럽겠지만, 그 원망을 양분 삼아 살 테니 그걸로 되었다고.”

이시스가 피식 웃으며 아스티나에게 되물었다.

“그렇잖나. 일단 살아 있어야 뭐라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 그게 나를 만날 때마다 노려보며 악을 쓰는 일이라도 말이야.”

이시스가 붉게 달아오른 뺨을 찬 손으로 덮었다. 눈을 반쯤 감은 채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런데 그 애에겐 그 이상이 필요했던 거야.”

“…….”

“우리는 단순히 살아남는 데 만족할 수가 없는 종류의 사람들이었지. 한데 우리만 특별했던 건 아니야. 벨리타도 그랬어. 값비싼 옷을 두르고 그럴듯한 식사 앞에서 수저를 들면서도, 그 애는 무언가가 목에 걸려서 채 넘어가질 않았던 거야.”

이시스는 벨리타가 권력과는 먼 곳에서 유유자적한 여생을 보내길 바랐다. 그러나 그 완벽한 계획에 벨리타의 동의는 없었다. 그저 그런 아낙으로 살 수 없었던 벨리타는 부나방처럼 황궁이란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벨리타는 결국 최악의 형태로 황궁에 돌아왔고, 다시는 살아서 이곳을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어쩌면 이것이 처음부터 벨리타에게 정해진 결말이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이시스가 이렇게밖에 살 수 없었던 것처럼.

“……미리 알았더라도 달라지진 않았을 겁니다.”

아스티나의 지적에 이시스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실제로 이시스는 벨리타를 구제해 주지 않았다. 벨리타의 계략을 기회라 생각하고 덫을 놓고 기다렸을 뿐이다. 이시스에겐 이복동생의 생존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었다. 그러니 그 죽음에 애도를 표현하는 것은 분명 기만이다.

이시스가 짙은 숨결을 흘리며 읊조렸다.

“그래……, 참으로 피로하군.”

* * *

“티나.”

“…….”

“티나.”

여러 차례의 부름이 잇따르고서야 아스티나는 고개를 들었다. 테리오드가 문고리를 잡은 채 제 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아스티나가 이토록 넋을 빼고 있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테리오드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스티나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 잠깐 생각을 좀 하느라고요.”

지난밤 황녀는 아스티나에게 그녀의 유일한 자매에 관해 털어놓았다. 벤자민에게조차 들은 적 없는 이야기였기에 아스티나는 그에게 누이가 있었단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이시스 황녀에게 정을 둔 친지가 있었다는 건 영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부모와 친형제까지도 이용하는 여자가 아닌가. 벤자민을 끌어들인 건 이용하기 위해서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에 사감이 얽혀 있었을 줄이야. 아스티나가 보아 온 황녀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 의외성은 베스라는 자매가 이시스에게 그만큼 소중한 존재였음을 의미했다. 아스티나는 베스를 만나 본 적이 없었지만, 그녀에 빗대어 벨리타를 연민하는 게 어리석은 일이란 것쯤은 알았다. 애초에 여동생이라는 사실 외에 둘에겐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시스는 흔들렸다. 베스가 진정 그녀의 변모를 반겼을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왜 황위에 오를 여자들은 모두 타의에 의해 변해야만 했을까. 감히 욕심내지도 않았다가, 눈앞에서 흔들리는 욕망을 움켜쥐고 나서야 저도 가질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마티나도 테오도르가 죽고 나서야 자신이 꽤나 소질 있는 군주라는 사실을 알았다.

“별것 아닙니다. 이만 들어가요.”

아스티나는 모른 척 화제를 돌렸다. 테리오드에게 황녀의 기밀한 가정사를 멋대로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테리오드의 이어진 부름이 아스티나의 귀를 잡아챘다.

“티나, 피곤하면 오늘은 저 혼자만 가도 괜찮습니다.”

말을 꺼낼 때마다 한 번씩 뒤따라오는 호칭은 고집스럽게까지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그가 은근슬쩍 애칭을 입에 담는 일이 잦아지고 있었다. 아스티나가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이젠 티나라고 아주 자연스럽게 부르시는군요.”

“그러게요, 이쯤 되면 허락이 돌아올 법도 한데 말입니다. 훔쳐 부르는 애칭은 말하는 입장에서도 별로 기분이 좋지 않거든요.”

“가족한테도 허락하지 않았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억울해하실 것 없습니다.”

아스티나가 매정하게 일축했다.

‘티나’라는 애칭은 아스티나에게 친밀함과는 전혀 다른 경계에 있었다. 과거를 잊고자 하는 그녀에게 그보다 족쇄 같은 부름이 또 없다. 하물며 테리오드가 부르는 ‘티나’라는 말이 아스티나에게 기꺼울 리 없었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와 테오도르가 되도록 겹치지 않았으면 했다. 보이는 얼굴이 같으니 저를 부르는 이름이라도 차별성을 두어야 한다.

“주의하지요, 티나.”

테리오드가 웃으며 대꾸했다. 테리오드는 부인이라는 호칭도 좋아했지만 더 선호하는 건 이름을 줄여 부르는 쪽이었다. 아스티나의 말대로 ‘티나’라는 부름은 가족들도 허락받지 못한 것이었다. 아스티나가 못 이긴 척 그의 어리광을 넘겨 줄 때마다 테리오드는 그녀에게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번에도 아스티나는 입만 벙긋거렸을 뿐 크게 화를 내지 못했다.

아스티나는 요즘 종종 그에게 말려들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엔 싫다고 하면 그런 줄 알았던 것 같은데, 요즘은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상대가 고집을 부려도 도통 밉지 않으니 큰일이었다. 이 기분을 그에게 설명할 수 없으니 뭐라고 책할 수도 없었다.

아스티나는 결국 꾸지람을 유보했다. 어쨌든 안쪽에선 약속 상대가 기다리고 있었고, 그녀의 남편은 너무 예쁘게 웃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군요. 들어오시죠.”

노크를 남기고 기다리자 곧 문이 열렸다. 오늘 찾아온 건 아탈렌타 가계의 초상을 취급하고 있다는 업자였다. 전달받은 주소는 의외로 광장 근처의 한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확실히 이런 곳에서 장사를 한다면 단속에 걸릴 염려는 적을 것도 같았다.

아스티나는 문으로 들어서며 천천히 안을 둘러보았다. 실내는 건물 밖의 외관과 그리 동떨어져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를 전시하고 판매하는 용도라기보단, 생활의 흔적이 배어 있는 곳이었다. 아무래도 실제로 남자가 생활하는 공간인 것 같았다. 어쩌면 업자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곳으로 부른 이유라도 있나? 그림을 보기에 썩 좋은 공간 같아 보이지는 않은데.”

아스티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실내를 둘러보던 테리오드가 지적했다. 직접적인 핀잔에도 남자는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테이블 앞에 서서 의자를 꺼내 주던 남자가 별것 아니란 듯 대답했다.

“아, 여긴 제가 실제로 살고 있는 집입니다.”

아스티나는 잠자코 남자가 내어 준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잘 관리된 반질반질한 가구들은 확실히 생활의 손때가 묻어나 보였다. 주인에 의해 아기자기하게 잘 관리된 집이었다.

“차는 홍차가 좋을까요, 아니면 허브티? 말린 꽃도 몇 종류 가지고 있습니다.”

“허브티로 하지.”

아스티나의 대답에 남자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찻잎을 정리했다. 집을 둘러보던 테리오드가 뒤늦게 아스티나의 옆으로 와 앉았다. 남자가 뜨거운 물에 차를 우리며 입을 열었다.

“사실, 그 그림들을 가게 이름으로 사들인 건 아니었어서요. 개인 소장품을 처분하는 것이라 부득이하게 자택으로 안내드렸습니다.”

“아탈렌타 가계의 초상을 굳이 개인 소장품으로 사들일 이유가 있나?”

테리오드는 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의외로 남자는 그 질문이 반갑다는 듯 미소 지었다.

“제 증조부와 조부께선 아탈렌타 지방 출신이셨습니다. 특히 증조부께선 대공저에서 직접 대공님을 모셨었죠. 친인척의 사업이 잘되어 수도로 가족 전체가 이사를 해서, 실제로 조부께서 아탈렌타령에 머무신 건 십 대까지셨지만 말입니다.”

테리오드는 잠시 멈칫하여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대공가에서 일했던 자의 후손이라면 아탈렌타에 대대로 내려오는 저주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법했다. 입을 열지 않은 건 무지일까 배려일까.

그러나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기에 남자는 지나치게 명랑해 보였다. 긁어 부스럼을 낼 필요는 없었으므로 아스티나는 그저 우스갯소리로 되받아쳤다.

“그게 장물을 취급하는 사업이었나?”

그에 남자가 과장스럽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가 꼭 연극 같은 어조로 하소연하듯 말했다.

“오, 그렇게 오해하시면 곤란합니다. 그냥 골동품을 취급하는 업종입니다. 장물이 섞여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요. 그래도 이렇게 자진 신고를 하지 않았습니까?”

남자가 눈을 찡긋이며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할아버지께선 돌아가실 때까지 대공저에서의 경험을 무용담처럼 떠벌리시곤 했답니다. 굳이 그림들을 사들여 보관한 건, 증조부가 충성했던 아탈렌타가에 대한 존경의 의미라고 해 두지요.”

“흠, 대대로 내려온 신의가 무척 감동스럽군. 내 그 공적을 훼손해선 안 될 테니 금전적 편의를 봐줄 수는 없겠어.”

아스티나가 부러 안타깝다는 듯 대답했다. 그에 남자가 천연덕스럽게 말을 바꿨다.

“물론, 아탈렌타가에서 이 물건들이 나도는 걸 두고 보지 않으리란 계산도 있었죠.”

사람 된 도리와 물질적 이득에서 균형을 잡을 줄 아는 보기 드문 남자였다. 아스티나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테리오드도 어이가 없었는지 입꼬리를 끌어 올린 채였다.

그 와중 차가 다 우러났는지 허브티의 향이 거실 전체로 번졌다. 남자가 깔끔한 동작으로 차를 따라 주며 말했다.

“대부분은 습도와 햇빛 때문에 가게 창고에 두었지만, 보여 드릴 두어 개 정도는 집으로 옮겨 두었습니다. 그림을 가지고 올 테니 차를 좀 들고 계세요.”

그리 말하고는 그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향했다. 사업이 잘되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지 사용한 찻잎은 꽤 고가품으로 보였다. 가구 역시 품질 좋은 목재로 만들어진 듯 오랜 세월이 묻어나 있는 데 반해 벌어짐이 없었다.

남자가 물려받은 가업을 망치지 않고 잘 이어 온 건 때를 알아보는 사업 수완 덕분일 것이다. 그는 유서 깊은 아탈렌타가가 전통을 포기할 리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증조부와 조부의 이야기가 그의 향수를 자극하긴 했겠지만, 현실적인 이득이 전무했다면 아탈렌타와의 연 역시 과거의 것으로만 남겼을 터였다.

아래층에서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스티나가 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말했다.

“재밌는 인연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인망이 있었던 당대 대공께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군요.”

의외의 뒷이야기에 테리오드는 다소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림값과 보유하고 있는 품목을 가늠하며 눈치 싸움을 벌이리라고 여겼는데 생각보다 일이 순탄하게 잘 풀려 가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이 누군가의 질 나쁜 장난으로, 남자가 이대로 사라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남자는 곧 커다란 그림 두 점을 들고 등장했다. 얇고 큼직한 헝겊에 뒤덮여 있어 캔버스의 크기 정도만 가늠할 수 있었다.

남자가 함께 들고 온 이젤 위로 그림을 세웠다. 천을 벗겨 내자 연식이 오래된 초상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스티나로서는 처음 보는 물건인지라 감별해 낼 방법이 없었다. 아스티나가 테리오드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 물건이 맞습니까?”

“누군가 그사이에 정교한 가짜를 유통시킨 게 아니라면, 맞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품임을 확신하는 어조였다. 테리오드는 손을 뻗어 가만히 그림 위를 쓸어 보았다. 손에 묻어나는 것은 없었다. 대공가가 가문의 분실품을 찾아 나섰다는 소문이 돈 것은 근래의 일이었다. 그동안 이만한 크기의 그림을 그려 내고, 또 완전히 말릴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남자는 친절한 미소를 띤 채 다음 그림도 보여 주었다. 이 역시 테리오드의 기억에 있는 물건이 맞았다. 남자가 안심하란 듯 덧붙였다.

“원하시면 따로 감정사에게 의뢰해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내일 저택에 그림들을 모두 가져다 드릴 테니 그때 확인하시고, 이상이 없으면 인수하시는 걸로요.”

깔끔한 정리였다. 일 처리에 있어 흠잡을 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테리오드가 그림에서 시선을 떼어 남자를 응시하며 물었다.

“보유하고 있는 그림은 총 몇 점이나 있지?”

“제가 가지고 있는 건 총 열두 점입니다. 아마 시중에 돌아다니는 건 이게 전부일 겁니다. 발견하는 족족 제가 사들였으니까요.”

“역대 대공들의 초상 외에 다른 물건들도 있나 보군.”

“예, 대공가의 소장품으로 알려진 것들이 나오면 그것도 구매해 두었습니다.”

남자의 말에 아스티나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건들을 이렇게 쉽게 되찾을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았던 탓이었다. 덕분에 귀찮은 일을 덜었다. 이대로라면 아탈렌타령으로 복귀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보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는 생각보다도 유능한 인물이었다. 이런 세심한 배려를 내어 준다면 앞으로도 기꺼이 좋은 고객이 되어 줄 의향이 있었다. 아스티나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아스티나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덕분에 수고를 덜었군. 필히 괜찮은 값을 쳐주어야겠어.”

“노고를 알아봐 주시니 다행입니다.”

“앞으로도 대공가의 물건이 시장에 나오면 보고해 줄 수 있겠나?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하지.”

“물론입니다, 장사치는 제공하는 재화의 가치를 알아보는 고객에게 충성하는 법이죠.”

남자가 자신만 믿으라는 듯 호탕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가지고 온 그림을 다시 헝겊으로 덮었다. 이송에 있어서도 큰 걱정은 필요 없을 듯했다.

“그럼 내일 정오쯤 저택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보지.”

남자의 싹싹한 대답에 테리오드와 아스티나는 가타부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자의 배웅을 받으며 건물을 나서자 아직 쨍쨍하게 떠 있는 해가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빠르게 일을 처리한 덕에 시간이 남았다. 단둘이 오붓하게 시내를 둘러보고 돌아가도 좋을 듯했다.

테리오드가 은근슬쩍 아스티나의 손을 쥐며 말했다.

“이대로 돌아가긴 좀 아쉬운데요.”

품고 있는 생각이 겹칠 때마다 아스티나는 그와 자신이 부부는 부부구나 싶었다. 아스티나는 자연스럽게 테리오드의 손을 단단히 마주 깍지 껴 잡았다.

“저도 그렇습니다. 어디로 시간을 때우러 갈까요?”

마침 타인의 눈에 띄지 않으려 일반적인 평상복을 차려입고 온 참이었다. 이대로라면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아스티나와 테리오드는 타고 온 마차를 물리고는 광장 쪽을 향해 걸었다. 이왕 밖으로 나온 김에 광장 중앙의 분수라도 보고 갈 생각이었다.

즉흥적인 데이트라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배가 고파지면 식사를 하고, 석양이 내릴 때쯤 달콤한 디저트를 먹으면 충분하지 않을까. 아스티나가 손을 들어 내리쬐는 해를 가리며 중얼거렸다.

“우리의 집사가 알면 기겁을 하겠군요.”

“호위가 없어서요?”

“올리버에게 혼나고 싶진 않으니, 불량배가 등장하면 대공 전하는 제가 지켜 드리지요.”

아스티나의 말에 테리오드가 파안했다.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아님을 알아 더욱 유쾌했다. 테리오드가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대답했다.

“예, 참으로 든든합니다.”

아스티나는 문득 저렇게 웃는 것은 반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보고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춰 세웠을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 얼굴이었다. 정작 테리오드 본인은 그런 반응에 익숙해진 듯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인파 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테리오드가 멈칫했다. 주말이라 돌아다니는 객이 많은 줄로만 알았는데, 정체해 있는 사람들이 상당수였다. 인파가 모인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간 누군가 목청 크게 소리쳤다.

“오, 마티나. 내 핏줄이 바로 그대가 증오하는 블란체인 것이 원망스럽소!”

아무래도 모여든 인파를 대상으로 연극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구경객들 앞에선 조그만 소년이 돌아다니며 관람료를 걷고 있었다. 신분 탓에 아스티나와 테리오드는 홀로 길거리를 돌아다닐 일이 많지 않았다. 고가에 표를 매매하는 오페라나 연극은 보았어도 이러한 길거리 극은 처음이었다. 좋은 구경거리를 만났다는 생각에 테리오드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장소에 차이는 있었지만 테리오드도 마티나 여제의 이야기를 담은 공연은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대체로 극은 마티나의 업적보다는 테오도르와의 비극을 담은 신파의 형식을 띠고 있었다. 극 속에서 항상 마티나와 테오도르는 세기의 연인으로 등장했다.

마티나는 테오도르를 사랑하지만, 그가 블란체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생각에 그의 고백을 거절한다. 꼬이고 꼬인 오해 끝에 테오도르는 신하들의 계략에 의해 연인을 축출하려 하다가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연극의 결말은 항상 마티나가 테오도르의 시신을 안고 오열하는 것으로 끝났다.

테리오드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잠시 구경할까요?”

“저는…….”

아스티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다지 보고 싶지는 않았으나 거절하면 그가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무엇보다 테오도르가 언급되는 상황마다 굳이 유난을 떨고 싶지 않았다. 진정 과거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면 자리를 피할 이유도 없었으므로.

결국 아스티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벨라체 아카데미에서 배웠던 역사책들이라고 사실을 담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이까짓 거짓된 이야기쯤이야 그저 웃어넘기면 되는 문제였다.

마침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앞에 있던 사람이 자리를 비켰다. 아스티나와 테리오드는 무대에 더욱 가까이 섰다. 그러나 좁아진 간격은 열악한 환경을 좀 더 면밀히 볼 수 있게 만들 뿐이었다.

배우들의 연기는 썩 좋은 수준이 아니었다. 귀족들을 흉내 냈으되 입고 있는 옷들은 엉성한 티가 났고, 무대 장치 역시 한정된 배경의 판화를 서너 번 갈아 끼우는 데 그쳤다. 극을 구성하는 방식도 진부한 건 마찬가지였다. 내용은 테리오드의 예상과 별다를 것 없이 흘러갔다.

신하들은 미천한 출신의 여자를 국비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마티나 역시 테오도르가 블란체의 성을 가지고 있는 한 그와 혼인할 생각이 없다. 마티나는 사랑하는 연인을 상처 주어야만 하는 상황에 고통스러워하다가 엘시어에게 위로를 받는다. 그 다정한 모습을 목격한 테오도르는 마티나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의심한다. 간신들은 그 틈을 타 마티나에 관한 온갖 험담을 고해바친다. 마티나가 엘시어와 손을 잡고 왕국을 삼키려 한다는 것이 주 요지다. 모함에 넘어간 테오도르는 결국 연인을 죽이기로 마음먹는다.

[그녀와 나는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였구나.]

테오도르는 통탄하며 칼을 쥔다. 영문 모른 채 습격을 당한 마티나는 암살자에게서 왕가의 문양을 발견하고는 배신감에 치를 떤다.

[원수를 믿고 충성한 대가가 이런 식으로 돌아오는가!]

결국 마티나는 반군을 일으켜 단숨에 왕궁까지 다다른다. 그리고 같은 기세로 망설임 없이 배신자가 된 연인을 찌른다.

그러나 마티나는 곧 의아한 시선을 든다. 죽어 가는 테오도르의 입가에 떠오른 것은 분명 미소다.

[이제야 평안하오.]

[어리석은 왕이여, 그게 무슨 뜻인가?]

[마티나, 나는 차라리 당신이 나를 죽여 주길 바랐소. 평생 그대를 갖지 못하느니 그대의 기억 속에라도 남으려 한 거요. 이 비겁한 남자를 부디 용서하시오.]

테오도르가 결국 눈을 감는다. 마티나는 검을 뽑아내고는 떨리는 손으로 테오도르의 뺨을 감싼다.

[테오도르.]

망자에게선 대답이 없다. 마티나는 다시 연인의 이름을 외친다.

[테오도르!]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마티나가 결국 오열한다.

관중의 눈가에도 물기가 어렸다. 오독당한 당사자로서, 오직 아스티나만이 불만을 견지한 채 극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따분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유치하군요.”

테리오드가 옆에 선 사람은 듣지 못할 크기로 작게 웃었다. 심심찮은 동의를 표하는 얼굴이었다.

“길거리 공연이니 조악한 건 어쩔 수 없지요.”

“심장에 칼을 찔린 사람은 저렇게 긴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스티나가 분석적인 태도로 남배우의 가슴을 손가락질했다. 마티나 역은 연인을 부둥켜안은 채 계속 오열하는 중이었다. 정말이지 현실과 같은 장면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목을 베는 것보다는 심장을 찌르는 편이 로맨틱하지 않습니까? 유언쯤은 들어 줘야 관객들도 만족스러울 테고요.”

“연인의 기억에 남으려 그 손에 죽는 남자는 남주인공으로서 결격입니다. 실제라면 소름이 끼쳐 천년의 애정도 식을걸요.”

테리오드는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는, 결국 아스티나와 같은 의견으로 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다. 죽어서라도 기억에 남겠다니. 그런 미친 작자는 결코 실제로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만일 마티나가 왕을 정말 사랑했다면 후대 사람들은 테오도르를 정신병자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테리오드가 빨간 색소로 물든 남배우 가슴팍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뭐, 어차피 다 가짜니까요.”

사람들이 재미로만 떠드는 야사이자 삼류 각본이다. 실존 인물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치고 오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특히나 배우 구성이 그러했다.

“왕 테오도르는 분명 미남이라고 하였는데, 배우의 인물은 그 발끝조차 못 미치는군요.”

아스티나의 냉철한 지적에 테리오드는 의외로 즐거운 기색을 내보였다.

“그거 기분 좋은 말이네요.”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외간 남자는 부인의 눈에 차지 않는 것이요.”

결론은 배우가 자신보다 못생겨서 좋다는 소리였다. 아스티나의 얼굴에 애매한 표정이 떠올랐다.

“대공께서는…… 성격이 좋으신 듯하면서 참으로 나쁘십니다.”

“그래서 싫으십니까?”

곰곰이 생각하던 아스티나가 불쑥 태도를 바꾸며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대공께서 성격이 나쁜 게 더 좋습니다.”

아스티나는 고개를 돌려 테리오드를 응시했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검지로 테리오드의 턱을 쓸었다.

“저 하나를 위해 영지민을 모두 버리실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그런 파렴치한 남자가 취향이랍니다.”

“……칭찬이십니까?”

“물론, 칭찬이지요.”

아스티나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테리오드의 뺨을 감쌌다. 테리오드는 간지러움을 참으며 가만히 그녀를 내버려 두었다. 아스티나는 그의 그런 사소한 행동에서도 애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문득 자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그 맹목적인 사랑 속에서 유영하고 싶어졌다.

아스티나가 불쑥 물었다.

“사랑한다고 말해 주시겠어요?”

그 사랑이 나를 제자리에 서게 하니까.

“갑자기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던 테리오드가 곧 싱겁다는 듯 웃었다. 왜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는 아스티나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도 그 말을 할 수 있었다. 그가 아스티나와 이마를 맞대며 말했다.

“사랑합니다.”

낯간지러운 고백이었다. 아스티나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테리오드의 얼굴을 매만졌다. 사랑으로 충만한 남자의 눈동자는 아무리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았다. 테리오드가 푸른 눈동자로 다정히 그녀를 응시할 때면 아스티나는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스티나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눈이 예쁘세요.”

때마침 극이 끝나고 죽었던 남배우가 퍼뜩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든 등장인물이 손을 잡고 관객에게 인사를 하는 것으로 반짝 공연은 끝났다.

그래서 아스티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 * *

다음 날은 유독 해가 밝았다.

준비할 물건이 많아 방문이 늦을 줄 알았는데, 업자는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 테리오드에겐 마침 처리해야 할 서류가 있었기에 방문객을 맞이하러 나선 건 아스티나 혼자였다. 대공저에 있던 물건이 맞는지 확인해야 했기에 아스티나는 올리버를 대동하고 1층으로 향했다. 열 점이 넘는 그림을 응접실에서 펼쳐 볼 수는 없었으므로 업자는 미술품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안내되었다.

아스티나가 도착했을 즈음엔 살펴보기 쉽도록 그림을 모두 벽에 걸어 둔 후였다. 올리버가 꼼꼼히 감정사와 의견을 나누는 사이 아스티나는 미술품 전체를 둘러보았다. 업자가 소유한 아탈렌타 가계의 초상은 여덟 점으로 초대 대공과 그 인척의 것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초대 대공의 바로 옆엔 그의 부친까지 나란히 걸려 있었다. 분명 부자지간이었지만 둘에게선 닮은 점이 보이지 않았다. 아탈렌타 공작이라 불린 마지막 사내는 테리오드의 선조라고 믿을 수 없을 만치 우락부락한 생김새의 소유자였다.

그와 혼인한 셀린느 왕녀의 핏줄이 후손을 살렸다. 유전학적 측면으로만 분석해도 블란체 왕가와의 결혼은 아탈렌타에게 있어 큰 축복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심복의 얼굴은 반가움을 자아냈다. 아스티나는 천천히 초대 대공의 낯 앞으로 다가갔다.

“초대 대공이신 알로이드 반 아탈렌타 경이십니다. 마티나 여제에게 직접 첫째 기사의 칭호를 받아 공이라는 호칭보다는, 경이라고 불리기를 반기셨다고 하더군요.”

어느새 아스티나의 옆에 붙은 업자가 설명을 시작했다. 불필요한 친절이었다. 그녀가 손수 대공위를 내렸던 남자를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뛰어난 무예로 전장에서 큰 공을 세워 첫째 기사의 칭호까지 내리지 않았었나.

그러나 아스티나는 업자의 말을 막는 대신 가만히 뒷짐을 졌다. 그녀가 담담히 호응했다.

“꽤 잘 아는군. 하기야 증조부께서 아탈렌타 출신이라고 했었나?”

“예, 증조부께선 알로이드 경의 꽤 가까운 심복이셨다고 합니다. 워낙 오래된 과거인 데다 남아 있는 증거도 없으니 영 믿을 만한 건 못 되지만요. 그래도 조부께선 그걸 유일한 가문의 자랑으로 삼으셨죠.”

“조부와는 사이가 꽤 좋았나 보군.”

“좋다마다요. 돌아가시기 전까지 저를 난로 앞에 앉혀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셨지요. 사실 재미는 있되 그리 믿을 만한 건 아니었어요. 알로이드 경의 아드님과 긴밀한 사이셨다는 둥, 함께 공놀이를 하며 놀았다는 둥 허풍을 떠셨거든요.”

아스티나는 어렵지 않게 어린 손자와 다정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눈빛에 그리움이 담긴 것을 보아 꽤 사이좋은 가족이었음에 틀림없었다. 아스티나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사실이었을 수도 있지 않나. 영애들도 종종 유모의 딸을 놀이 상대로 두곤 하니까.”

“글쎄요, 말년엔 워낙 정신이 온전치 못하셨어서요. 종종 이상한 말씀을 하시곤 하셨죠. 이를테면…….”

남자가 말을 잇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실수했다는 듯 그는 몹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띠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눈을 돌려 그런 남자를 쳐다보았다. 영문 모를 반응에 호기심이 일었다.

“왜 그러나?”

“너무 무엄한 말씀이라 드리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알로이드의 창피한 일화라도 알고 있는 걸까. 아스티나가 기억하는 초대 대공은 늘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의외의 이야기를 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스티나는 업자를 얼렀다. 오랜만에 그녀가 살았던 과거를 이야기하자 추억에 젖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니 더욱 궁금하군. 책하지 않을 테니 말해 보게.”

남자는 잠시 머뭇거렸다. 고객의 기분을 상하게 할지 모르는 이야기를 굳이 꺼내야 하나 싶었던 탓이다. 그러나 아스티나의 재촉에 업자는 결국 입을 열었다.

“초대 대공께서 젊은 나이에 요절하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에 아스티나의 표정이 흐려졌다. 엘시어에게 제위를 넘기고 귀향한 후, 머지않아 마티나는 충실한 심복이었던 알로이드의 비보를 들었다.

“독감과 폐렴이 겹쳤다고 들었는데.”

“의사는 그렇게 진단했지만 할아버지께서 목격하신 죽음은 그런 게 아니었죠.”

“그게 무슨 말이지?”

“할아버지께선 아이처럼 우셨습니다. ‘얘야, 내가 직접 그 친절한 대공의 사체를 치웠던 걸 아니? 어쩜 온몸이 터져 멀쩡한 부분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단다. 들러붙은 살점을 치워 내는 데 일주일이 꼬박 걸렸지. 얼마나 아프셨을까, 가엾은 알로이드 전하!’”

남자가 조부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그의 흐느낌을 옮겼다. 아스티나의 입가가 천천히 굳었다. 남자의 설명에서 기시감을 느낀 탓이다.

미묘한 표정 변화에 업자는 차라리 다른 이야기를 지어낼 걸 그랬다며 내심 후회했다. 남자가 황급히 고개 숙여 사죄했다.

“정신을 놓으신 후의 일입니다. 무엄함을 용서하세요.”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게.”

대공비의 목소리엔 노기가 비치지 않았다. 업자는 계속해서 조부의 헛소리를 늘어놓아도 될지 감이 잡히지 않았으나, 그를 응시하는 눈은 재촉의 빛을 띠고 있었다. 남자가 머뭇거리며 설명을 이었다.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초대 대공께선 온몸이 터져 죽으셨다고, 마치 악마의 저주라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고 하셨지요. 처음엔 주변에 빠진 털이 무성하여 산짐승의 습격인 줄로만 알았는데, 살점에 들러붙어 도통 떨어지지 않는 것이 해체된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지 뭡니까.”

“그 이야기를 자네 외에 아는 사람이 있나?”

남자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아닙니다. 그런 무엄한 소리를 지껄였다가 무슨 변을 당하려고요. 노망난 노인네 입단속을 하느라 아버지께서 생전에 꽤나 고생하셨습니다.”

“그렇군. 잘 알았네.”

아스티나는 이내 말끔하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업자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곧 얌전히 뒤로 물러섰다. 아스티나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집사를 불렀다.

“올리버!”

“예? 예.”

“감정을 마치고 진품임이 확인되면 저치에게 적당한 값을 들려 보내게. 이 일은 시종에게 따로 맡기고 자네는 나를 따라와.”

올리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면서도 명대로 시종에게 지시를 남겼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따라 나오자 팔짱을 낀 대공비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스티나가 창을 향해 서 있었기에 올리버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녀가 물었다.

“대공가의 저주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지?”

“초대 대공인 알로이드 전하 때부터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세대가 지나가며 변화는 없었나?”

영문을 알 수 없는 화제였다. 역대 대공들의 얼굴을 보자 새삼 가문의 내력에 대한 탐구심이라도 생긴 걸까. 올리버는 희끄무레해진 기억 속에서 몇 가지 단서를 꺼내 들었다.

“그, 처음엔 더욱 심각했다고 듣긴 했습니다. 짐승으로 변하는 일을 견디지 못했는지 초반엔 광증에 시달리다 그대로 죽음을 맞이한 이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후대로 올수록 내성이 생겨 나아진 게지요. 피가 희석되었거나요.”

아스티나가 날카롭게 질문했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지 못하나?”

“모두가 말하길 꺼리어…… 매우 끔찍했다고만 들었습니다.”

“대공 전하께서는 전혀 모르는 눈치시던데.”

“괜한 걱정을 끼쳐 드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굳이 말씀드리지 않았었습니다. 어차피 더 이상 그런 증상을 보이는 후손은 없으니까요.”

아스티나는 그만 헛웃음을 터트렸다. 커다란 조소는 날카로운 파열음처럼도 들렸다. 업자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으며, 그 조부의 눈물 역시 노망이 아니었다.

아스티나가 뒤를 돌았다. 그녀가 형형하게 눈을 밝히며 물었다.

“하나만 더 묻지. 가문의 여식들에겐 이 유전병이 이어진 적이 없는 게 확실한가?”

처음 보는 대공비의 무서운 기세에 올리버는 몹시 당황했다. 그가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더듬더듬 답했다.

“예? 예, 오직 사내아이들에게만 발병하는 병입니다.”

아스티나는 그대로 올리버를 지나쳐 위층으로 향했다. 올리버는 놀란 얼굴을 할 뿐, 무서운 기세에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아스티나는 자신이 말도 안 되는 가설을 세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기묘한 확신이 가슴을 어질렀다. 그녀는 무서운 기세로 서재까지 다다랐다. 그러고는 책상 속에 숨겨진 금고를 뒤집어엎다시피 하여 숨겼던 물건을 꺼냈다. 서류들이 바닥으로 쏟아짐과 동시에 낡은 갈색 표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왈도의 일기다.

지난번 숨겨 둔 뒤로 한 번도 찾지 않았던 물건이었다. 그녀로서도 제 손으로 이것을 다시 꺼내게 될 줄은 정녕 몰랐다. 견딜 수 없는 내용이라 하여 읽지 않고 덮어 둔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 아니면 차라리 앞으로도 쭉 무지한 편이 나았을까.

의자에 주저앉다시피 하고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펜을 낚아채듯 집어 들어, 마침내 책장을 펴 들었다. 그러고는 주의 깊게 한 자 한 자 짚어 내리기 시작했다.

암호 형식으로 얽혀 있는 글인지라 많은 내용을 단번에 파악할 수는 없었다. 아스티나는 눈에 띄는 단락을 발견할 때마다 빈 종이 위에 해독한 문장을 써 내렸다. 지난번 보았던 것과 다를 바 없는 농도의 역겨운 문장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과연 몸 상태가 더 나아지는 것도 같다. 그년의 피를 좀 내어 마신 탓일 수도 있고. 이깟 계집애가 내 목숨줄이라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버릴 수도 없는 처치 곤란한 쓰레기……. 분이 풀리지 않는다.]

아스티나는 이를 악물었다. 책장을 넘기는 손이 더욱 빨라졌다. 머지않아 앞쪽에서 목적한 단락을 찾을 수 있었다. 분석을 위해서인지 빗금과 동그라미 표시가 여럿 되어 있어, 언뜻 살피기에도 중요한 단락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야만족을 사냥하고 남은 극소수의 군락을 덮쳤을 때의 일이다. 헝겊 같은 옷을 뒤집어쓴 여자가 칼을 들고 나타났다. 위협인 줄 알았으나 그 여자는 칼날의 방향을 제 쪽으로 돌렸다. 본인이 인질 삼을 만큼 대단한 목숨이라 여겼나 싶어 신하들과 비웃는데, 여자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닌가.

금수보다 못한 블란체의 왕이여, 그대는 그대 성미에 맞는 껍질을 얻게 될지어다. 대대로 그 피가 자손을 괴롭게 하리라.

레타의 용서가 없는 이상 저주는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흉악한 모습도 사랑으로 안는 레타의 딸이 있다면 또 모르겠구나.

일족의 원수에, 끔찍한 거죽이라! 가능은 하겠는가?

답은 있되 의미가 없구나.]

분을 이기지 못한 듯 유독 글씨가 거칠었다. 가장 눈에 띈 부분은 우습게도 사랑이라는 단어였다. 자신에게 쏟아진 저주를 옮겨 적은 후 왈도는 그 아래에 비아냥을 보탰다.

[곱씹어도 뜻을 알 수 없다. 레타의 딸과 사랑이라니. 천한 야만족 여자와 교접이라도 하란 말인가?]

아스티나는 그만 책을 내동댕이쳤다. 아스티나의 목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 없는 신음을 쏟아 냈다.

왜 이따위 치부가 될 거리를 기밀을 대하듯 보관하였나 궁금했었다. 구제 못 할 변태 성욕자의 성벽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이건 그런 사사로운 목적의 기록이 아니었다.

이건 실험 일지였다.

“티나, 이게 무슨…….”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온 테리오드가 엉망이 된 실내를 발견하고는 멈춰 섰다. 테오도르의 얼굴을 본 아스티나가 섬뜩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날 그렇게 부르지 마!”

아스티나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평소처럼 아내를 찾아왔다가 예기치 못한 상황과 마주치자 테리오드도 당황을 숨길 수 없었다. 테리오드가 일을 끝마치고 업자를 만나러 내려갔을 때 아스티나는 이미 자리를 비운 후였다. 집사는 아스티나가 그림을 보던 도중 위층으로 향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왜 갑자기 서재로 들이닥친 것일까.

테리오드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아스티나에게로 다가섰다. 아스티나는 형용할 수 없는 심정으로 천천히 제게로 다가오는 과거의 낯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대체…….”

테오도르의 후손, 그의 피를 이은 사람.

“그게 답이었어.”

아스티나가 테리오드의 말을 끊고는 툭 내뱉었다. 뜻을 알 수 없는 말에 테리오드의 눈빛엔 더욱 의문이 짙어졌다. 그러나 아스티나만은 지금 이 순간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아스티나는 마티나일 적 사람이 터져 죽는 공포를 안 적이 있었다. 일가가 몰살당함으로써 마무리 지어졌던.

“그게 답이었다고. 왈도에게도, 테오도르에게도, 이번에도…….”

“무슨 말을…….”

“끝이 아니라 약해진 거야.”

아스티나가 넋을 놓은 채 불분명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와 대화하기를 포기하고는 그녀의 앞으로 와 섰다. 테리오드는 우선 침착하게 바닥으로 떨어진 서류나 책 따위를 잠시간 살폈다. 단서 없이는 갑작스럽게 아내가 변모한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던 탓이다.

이내 테리오드는 책상 위에 놓인 종이 위에서 그녀의 필체를 발견했다. 황급히 써 내린 듯 알아보기 힘든 글씨였으나 중간중간 선명한 문장들이 있었다. 그녀가 하는 말처럼 영문을 알 수 없는 건 다르지 않았지만.

“이게 대체 무슨 내용입니까?”

이것이 답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인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와중에도 저주와 끔찍한 거죽이란 말이 유독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테리오드가 미간을 좁히며 재차 물었다.

“이 일기의 주인이 대체 누구길래…….”

“왕 테오도르의 형제인 왈도입니다. 레타 일족을 몰살한 대가로 그 딸 중 하나에게 끔찍한 저주를 얻었죠.”

아스티나가 테오도르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하며 대답했다. 온기 없는 음성이 사람의 것 같지 않아 소름 끼치게 느껴질 정도였다.

테리오드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듯 재차 물었다.

“여기 적힌 저주가 대공가에 내려온 저주란 말입니까? 아탈렌타는 블란체와는 다른 가문이지 않습니까?”

“다 죽었으니까. 블란체라는 성이 더 이상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악착같이 그 피 냄새를 맡고서…….”

아스티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만 참담히 눈을 감았다.

아아, 왈도여.

내 인생을 망쳐 놓은 원수. 모든 불행의 시작과 끝. 검질기게도 이번 생까지 따라붙어 나를 좀먹는가.

“말이 안 됩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레타의 딸과 이어짐으로써 풀릴 저주라면 나는 왜…….”

테리오드의 말대로 왈도가 받은 저주와 아탈렌타의 저주는 접점이 희미했다. 사랑으로 풀릴 저주와 끔찍한 거죽이라는 말이 흡사하긴 했으나, 정작 당사자가 된 사람들이 다르다. 테리오드가 블란체의 피를 이었다고는 하나 이는 반쪽짜리 충족에 불과하다. 아스티나와의 관계로 대공이 온전한 정신을 찾았던 일을 무어라 설명하겠는가.

레타 집시들은 백 년 전 왈도의 폭정으로 모두 살해당했다. 아스티나는 레타 집시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그 불완전한 명제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파리한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니까.”

마티나 오웬 드 레타 카라벨라는 레타의 마지막 딸이었다.

“내가 마티나였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지금 여기 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