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촌뜨기 사냥(II)
아스티나의 예언대로 사태는 어느 날 급변했다. 광장과 근방의 도로변을 돌던 성직자 무리들이 난데없이 범죄자를 검거해 낸 것이다.
카라벨라의 사제가 ‘사악한 기운’ 따위를 근거로 대며 행인 하나를 잡아들였을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그를 운 나쁜 사내라며 동정했다. 한데 놀랍게도 심문 중 그 사내가 수배범이었음이 드러나며 상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범죄자를 잡아들인 데니스라는 젊은 수석 사제는 이 일로 인해 일약 유명인이 되었다.
비슷한 일이 두어 번 정도 반복되자 우연이라 코웃음 치던 이들도 기세를 수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예의 ‘사악한 기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직군은 지레 겁을 집어먹었다. 수도의 범죄율은 파격적인 하락세를 보였고, 자연한 결과로 신전의 인기는 치솟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번져 가던 불만은 그 시점부로 한순간에 정리되었다. 불순종자로 몰릴까 모두가 쓴소리를 혀 밑으로 삼킨 탓이었다.
황제는 이 모든 변화를 알뜰히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프리모에게 다시 후계자의 잔을 하사할 때를 보던 그는 냉큼 교황을 황궁으로 초청했다. 분실 건으로 부정을 탔다는 여론이 아직 팽배한 시점이었다. 황제는 영민하게 잔을 내리는 의식을 세례식과 접목하기로 결정했다. 교황과 성수라는 존재는 불길한 기운을 말끔히 지워 줄 터였다.
후계자의 잔을 찾아 준 당사자인 아스티나 역시 자리의 주역으로 초대받았다. 잔을 수여하는 의식은 의례적으로 궁 내의 예배당에서 열렸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었으므로 초대받은 인물도 비교적 소수였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와 함께 검소한 흰 의복을 차려입고 예배당에 들어섰다. 주요 인사끼리 대충 인사를 나누고 나자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식이 시작됐다. 아스티나는 가장 우선해서 단상 위로 나선 인물이었다.
명목상 이 자리는 잔을 찾아 준 대공비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아스티나는 모두의 앞에서 황제의 공치사를 받는 절차를 걸쳤다. 아스티나가 무릎을 굽히자 황제는 준비해 온 장황한 인사를 읊었다. 보답으로 이미 왈도의 일기를 받은 상태였으나, 황제는 추가적으로 포상금 역시 수여했다.
황제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맺었다.
“그대에게 황궁을 대표하여 무한한 감사를 전하노라.”
“더없는 영광입니다, 폐하.”
재차 격식을 갖춰 인사를 마친 아스티나가 뒤로 물러났다. 이제는 교황이 나서 프리모 황자에게 잔을 수여할 차례였다.
아스티나는 단상 밑으로 내려와 예배석에 앉았다. 반대편 끝, 앞쪽 자리에서 교황이 일어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움직임에 집중하는데 누군가 아스티나의 옆으로 와 자리 잡았다.
“신성해 보이는군.”
바로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아스티나는 왼편을 돌아보았다. 이시스였다. 테리오드 역시 그 음성을 들었는지 이시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시스가 눈인사를 건네자 테리오드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여 응답했다. 아스티나가 단상 위를 내다보며 되물었다.
“수여식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대의 옷차림이. 흰색이 아주 잘 어울려. 교황이 방문한다 하여 급히 공수한 물건인가?”
“이 색상 선정엔 그보다 실용적인 이유가…….”
“―오, 카라벨라여. 우리의 죄를 사하소서!”
아스티나가 설명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대뜸 교황이 크게 신을 부르짖은 탓이었다. 예배당을 감돌던 소란이 멎고 깊은 정적이 찾아들었다. 아스티나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테리오드가 짐승으로 변할 적 털 때문에 맞춘 물건이라는 사실까지 구구절절 읊을 수는 없었으니까.
모두의 이목이 몰리자 교황은 격양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단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신을 믿는 자들은 사라지고 수도엔 온통 어두운 기운이 흐릅니다. 저희 신전이 행동에 나선 것은 그 탓입니다. 축일을 앞두고 매해 정화 의식을 벌이는 것으로 버티고 있었으나, 금년에는 상황이 더욱 심각했습니다. 사제들이 악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힘을 쓰고 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한 것이 현실입니다.”
침중한 음성이 예배당을 온통 울렸다. 교황은 진심으로 가슴 아프다는 듯이 불신자들의 죄를 말했다.
“우리 모두의 믿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더 이상 수도를 감싼 불신을 좌시할 수 없습니다. 저희 신전에서는 믿음을 흐리는 악인을 색출하기 위해 앞으로도 기도하고 또 기도할 것입니다.”
교황이 긴말을 끝맺고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때맞춰 뒤편에서 귀부인들의 소리 죽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전에서 건수를 제대로 잡았군요. 저게 밉보이기 싫으면 성금을 바치란 소리 외에 무엇이겠어요?”
“기부금을 내지 않았다고 이단으로 모는 건 조금 웃기지 않겠나요?”
“두고 보세요.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두가 나서 성금을 내기 시작하면 부인께서도 안면 몰수할 순 없으실걸요.”
신을 형상화한 조각상을 앞에 두고 나누는 대화라기엔 다분히 세속적인 내용이었다. 예배당에 낀 먼지를 털어 내느라 성의 일꾼들이 한바탕 전쟁을 치렀던 것을 생각하면, 이 자리를 연 황궁으로서도 딱히 할 말은 없을 것이다. 신앙생활에 열심인 황족은 경쟁에 밀려 수도원으로 향한 이들뿐이었으니까.
“이 나라의 다음 후계자에게 신의 축복을 내리고자 저는 이 자리에 섰습니다. 신과 함께하는 제국의 매일은 분명 광영될 것입니다.”
그리 말을 마친 교황이 몸을 돌려 프리모의 앞에 가 섰다.
세례식은 생각보다 그리 장엄하지 않았다. 교황은 성수를 후계자의 잔에 따르고는 프리모의 머리 위로 흘렸다. 빈 잔을 프리모에게 건네고 그의 젖은 머리를 짚은 채 짧은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모든 절차가 끝이 났다. 몸에 맞지도 않는 검소함을 흉내 내던 이들의 낯에 반가운 기색이 감돌았다. 귀부인들은 뻐근한 어깨를 늘이며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젠 황궁에서 준비한 호화로운 만찬을 함께할 시간이었다.
이시스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와 가까운 곳에 섰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것이 이시스였기에 그녀는 예배당에 다소 늦게 입장했다. 그 탓에 식이 시작하기 전엔 미처 귀빈들과 담소를 나눌 짬이 없었다.
방문객에게 인사말을 건네던 이시스는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곧 반가운 낯을 떠올렸다.
“나디아 아벨라르 영애.”
이름을 불린 여인이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다가왔다.
“이시스 황녀님, 그간 잘 지내셨나요?”
“아직 학기 중인 것으로 아는데, 어인 일로 이곳까지 걸음을 다 하였는가. 설마 아카데미를 그만둔 것은 아니겠지?”
이시스의 농담에 나디아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프리모 전하께서 후계자의 잔을 받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제가 불참해서야 되나요. 어머니께서 따로 결석계를 내주셨어요.”
“벨라체는 그런 일에 도무지 융통성이 없으니 말이야. 그래도 때맞춰 방문해 주어 다행이야.”
그리 말한 이시스가 예배당 안쪽을 살폈다. 프리모가 잔을 시종에게 맡기고는 걸어 나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침 오라버니께서 나오시는군. 명색이 정혼자인데, 식사 자리까지 오라버니와 함께 이동하는 게 어떻겠는가?”
이시스의 제안에 나디아의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누가 봐도 긍정을 표하는 모양새였다. 이시스는 상냥한 목소리로 프리모를 불러들였다.
“오라버니, 나디아 영애의 에스코트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시스 옆에 선 나디아를 발견한 프리모의 눈에 언뜻 귀찮은 기색이 비쳤다. 하지만 프리모는 싫은 소리를 내는 대신 잠자코 나디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군, 나디아 영애.”
“예,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나디아가 조심스럽게 프리모의 팔 안쪽에 제 손을 얹었다. 둘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멀어졌다. 거의 나디아 혼자 질문하고 프리모는 대충 대꾸하는 식이었지만, 어쨌든 황제와 황후가 보기엔 매우 기꺼운 광경이었다.
나디아는 벨라체 아카데미 졸업과 함께 곧바로 프리모와 혼인하기로 예정된 인물이었다. 아벨라르 백작가의 장녀인 나디아는 겉으로 보기엔 신분이 다소 미비한 듯하나, 황후의 사촌 딸로 정치상에서 확고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황후는 본디 제스퍼레오 공작가의 여식으로 황제가 지금의 자리에 오르도록 도운 공신 출신이었다. 여색을 밝히는 황제가 여러 처를 들이면서도 황후의 자리를 굳게 지켜 주고, 그녀가 낳은 장자인 프리모를 후계로 밀어 온 것엔 그러한 이유가 있었다.
황후와 사촌 관계에 있는 아벨라르 백작 역시 황제가 지금의 자리에 오르는 데 물심양면으로 힘쓴 가문이었다. 때문에 이시스가 프리모의 짝으로 나디아를 거론했을 때 황제와 황후 둘 다 그 결정을 몹시 흡족하게 여겼다. 황후로서는 친정과 연이 있어 자신을 뒷받쳐 줄 수 있는 나디아를 반길 수밖에 없었고, 황제 역시 충신의 여식을 아들과 맺어 주는 일을 기꺼워했다. 나디아는 황실 전체의 환대를 받으며 프리모의 비로 낙점되었다. 누구의 반대도 없는 그림 같은 정략결혼이었다.
원체 제멋대로인 프리모 역시 나디아와의 혼담만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후계에 가장 가까운 황자로 자리를 공고히 했다고는 하나 프리모가 쥔 실권은 황후와 황제에 비해 몹시도 미미했다. 프리모는 그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본처는 어디까지나 부모의 입맛대로 정해질 자리였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주색잡기에 전보다 덜한 열의를 보였느냐 묻는다면 그것은 아니다. 프리모에게 나디아가 아닌 다른 여자를 침소에 들여 재미를 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황후라도 아들의 침소 사정까지 일일이 간섭할 수는 없었으니까. 나디아를 밀어내고 다른 여인을 본처로 삼겠다며 고집 피우지만 않는다면, 프리모는 무리 없이 방탕한 생활을 이어 갈 수 있었다.
프리모는 나디아를 부모의 잔소리를 막아 줄 적당한 방패막쯤으로 취급했다. 속내를 들여다본다면 그보다 질퍽하게 곪은 자가 또 없었으나, 외관만은 퍽 볼 만한 사내였으므로 순진한 나디아는 그새 정혼자에게 연심을 품은 눈치였다.
이시스는 무감한 눈으로 멀어지는 남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때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여전히 창창한 여인네들의 인생을 망쳐 놓는 데 대단한 재주가 있으십니다.”
자연히 옆을 돌아본 이시스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예상치 못한 상대가 그 자리게 서 있었기 때문이다.
“벨리타?”
“오랜만이에요, 언니.”
벨리타라 불린 여인이 고혹적으로 눈을 접어 웃으며 대답했다.
벨리타는 재작년 출가한 이시스의 이복동생이었다. 벨리타의 동복 남동생은 본디 황좌를 노리던 야심가 중 하나였지만, 그가 변고로 죽어 나간 이후 벨리타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남았다. 별 볼 일 없는 사내와 결혼해 제 세를 깎아 먹거나, 혹은 자처하여 수도원에 감금되거나.
끔찍하기는 매한가지였으나 벨리타는 전자를 택했다. 마침 그녀에게 벵텐 후작이 청혼해 왔기 때문이다. 서른 살도 더 차이 나는 사내의, 그것도 재취 자리였다. 전이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조건이었으나 벨리타는 벵텐 후작이 수도의 주요 인사라는 점을 주목했다. 바실에 머물 수만 있다면 다른 기회를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시스는 그 혼담을 멋대로 거절하고는 벨리타를 셀렌 자작가로 쫓아내듯 시집보냈다. 황녀를 일개 자작가에 내준 것은 보복 외의 의미로 해석될 수 없는 결정이었다. 바깥 생활을 할 수 있으니 어쨌든 수녀원행보다는 나았으나, 어지간히 성의 없는 처분이라는 점에선 별반 차이가 없었다.
특히나 셀렌 영지는 수도에서 2주는 말을 타고 달려야 닿을 수 있는 광산 지대에 있었다. 벨리타에게 있어 혼인은 유배와 진배없었다. 그러니 분명 프리모와 이시스에게 이를 악물고 있어야 할 벨리타다. 그런 그녀가 수도까지의 긴 여정을 거쳐 굳이 후계자의 잔을 수여하는 의식에 참여하다니.
이시스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당연히도 조롱의 의도였다.
“이런 자리까지 올 줄은 몰랐는데.”
“어머, 섭섭해라. 절 초대해 주신 건 언니잖아요?”
“그래, 다른 형제 자매들은 눈치껏 다들 부재해 주었는데 말이다.”
이시스가 애정 어린 손길로 벨리타의 어깨를 털어 주며 말했다. 타인에겐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였다. 벨리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시스가 만면에 웃음을 띠우며 공치사를 남겼다.
“먼 곳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 한번 내 거처로 초대하도록 하마. 돌아가기 전에 차 한 잔 나눌 시간은 있겠지?”
여전히 황궁에 머물고 있는 이시스와 먼 곳으로 쫓겨난 벨리타의 처지를 상기시키는 말이었다. 벨리타는 홱 턱을 치켜들고는 냉랭한 투로 대답했다.
“초대해 주신다면 저야 영광이지요, 그럼 저는 이만.”
그녀가 구두 굽 소리를 내며 이시스를 지나쳤다. 이시스에게서 뒤돌아선 벨리타는 분통 어린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미간 사이의 파임이 점점 더 깊어졌다.
‘내 동생을 죽인 게 누군지 모를 줄 알고? 저 건방진 년이, 저년만 없었어도 프리모 같은 게…….’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벨리타는 앞서가던 프리모를 발견하고는 멈춰 섰다. 좋은 먹잇감을 발견했다는 생각에 그녀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벨리타는 흘긋 뒤를 살펴 이시스가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떠나간 이복동생에게 신경 쓸 만한 정신은 없어 보였다.
벨리타는 재빨리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아름다운 미소를 입가에 담은 그녀가 망설임 없이 프리모에게로 다가갔다.
“오라버니, 오랜만에 뵙습니다. 드디어 후계자의 잔을 물려받으시다니 이보다 기쁜 일이 또 없군요. 축하드립니다.”
벨리타가 건넨 인사에 프리모는 대놓고 인상을 구겼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눈에 불을 켜고 죽여 치울 방법을 모색하던 상대였다. 당연히 반가울 리가 없다. 그러나 오랜만에 방문한 이복 누이를 대놓고 내치기엔 보는 눈이 많았다. 프리모가 팔짱을 끼고 있던 나디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갈 테니 먼저 들어가시오.”
나디아는 눈치를 보며 먼저 자리를 떴다. 나디아가 연회장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프리모가 다시 벨리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은요. 축하의 말씀을 전하러 온 것뿐인데요.”
“나는 이시스처럼 부드러운 말 밑에 숨긴 이빨로 상대의 목줄을 물어뜯는 데는 분명 재능이 없지. 하지만 내 누이는 언제나 내 앞에서 언사를 조심해, 왜인지 아나?”
그리 말하며 프리모는 제 허리춤에 걸린 검 위로 천천히 손을 얹었다. 그가 검집을 매끄럽게 한번 쓸어 올리고는 말을 이었다.
“나는 직접 피를 보는 데 더 능숙하거든.”
벨리타가 느리게 숨을 들이켰다. 저 포악한 사내와 말을 섞기로 결정하다니, 그녀의 패착이었다. 벨리타는 이시스와 나누는 우아한 설전 쪽이 좀 더 적성에 맞았으니까.
하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벨리타는 프리모의 수준에 맞춰 조금 더 저열해지기로 마음먹었다. 그녀가 여유로운 태도를 잃지 않은 채 도발적으로 되물었다.
“글쎄요. 이시스가 정말 오라버니 앞에서 언사를 조심하는지, 아니면 그런 체하며 조롱을 일삼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바 아닌가요?”
“그 입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너를 궁 밖으로 내친 게 이시스가 바친 충의의 증명이니.”
“물론 이시스는 저를 축출해야 했겠지요. 그래야 오라버니에게 황좌를 바칠 수 있을 테니. 아니, 스스로에게 바치는 셈이 될까요?”
“가만히 두었더니 건방진 소리가 한정 없구나. 맞지 않는 시골 생활에 네가 드디어 미친 것이냐?”
“오, 세상에. 오라버니는 정녕 이시스가 조언자 역할에만 머무르리라 생각하십니까?”
벨리타가 말이 되냐는 듯이 큰 웃음을 쏟아 냈다. 자연히 지나가던 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벨리타는 프리모의 앞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녀가 다른 이에겐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두고 보십시오. 이시스는 오라버니를 휘둘러 제 뜻을 모두 이루고 말걸요.”
그녀가 시선을 내려 프리모의 허리춤을 살폈다. 그의 검이 매달린 자리였다.
“내내 이시스의 뜻대로 움직여 온 오라버니께서, 이시스가 문제를 일으킨다 해도 과연 제때 검을 뽑을 수 있을까요?”
프리모는 선명한 적의로 벨리타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벨리타는 수그러드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가 내리깔았던 속눈썹을 들며 짙은 웃음을 떠올렸다.
“제가 예언을 하나 할까요. 오라버니께서 제국을 얻으실 때, 제국은 오라버니의 것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새어 나가서는 안 되는 이야기였기에 둘 사이의 간격은 좁았고, 목소리는 한없이 은밀했다. 벨리타의 눈빛은 진실을 비추는 거울마냥 반짝였다.
프리모는 잠시간 그런 벨리타의 눈을 빤히 마주 보았다. 그는 어렵지 않게 그녀의 의중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유혹이다. 벨리타는 그가 들고 있는 진귀한 보석을 가품이라 깎아내리는 농간을 부리고 있었다.
프리모는 그만 헛웃음을 터트렸다. 프리모와 벨리타는 본디 남매 사이였으나 핏줄의 정은 단 한 번도 나눠 보지 못했다. 동복 출신인 이시스조차도 오직 이용하기 위해 품은 프리모였다. 황좌를 두고 암투를 벌이기까지 한 벨리타를 향한 취급은 남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정적이었던 자의 말에 휘말려 충실한 책사를 버리는 것보다 천치 같은 짓이 또 있을까?
싸움에 패배하여 고개 숙인 자의 악바리 같은 저주다. 재고할 가치도 없었다. 프리모의 입가에 선연한 비웃음이 어렸다.
“모자란 것……. 그따위 이간질이 통하리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벨리타의 손끝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그녀는 태연한 척 눈을 가늘게 떴다.
“제 말을 믿지 않으시나 봅니다.”
“너 따위가 하는 말에 휘둘린다면 내 실성을 의심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기야 만일 그런 날이 오면 네게도 기회가 생기긴 하겠구나.”
“저야 이제 끈 떨어진 신세가 아닙니까. 오라버니께서 후계자의 잔을 받으신 상황에 제가 더 힘을 쓸 구석이나 있나요? 다만 저는 제왕을 휘두르는 다른 세력이 존재할 때, 필히 나라가 어지러워진다는 사실만은 압니다.”
벨리타가 도도하게 턱을 들어 올렸다. 프리모에 비해 확연히 작은 신장이었지만 자존심의 크기는 어느 누구와 견주어도 모자라지 않았다. 벨리타가 여유로운 웃음을 흘리며 말을 맺었다.
“이는 오라버니께서 진정 나라를 위한 정치를 펼치시길 바라 드린 말씀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벨리타는 치고 빠져야 할 때를 잘 알았다. 프리모를 뒤흔들 실마리는 충분히 던져 둔 상태였다. 더 말을 보태 봤자 역효과밖에 나지 않을 것이다. 벨리타는 아쉬울 것이 없다는 태도로 프리모보다 먼저 자리를 비켰다. 그녀는 프리모가 제 뜻대로 움직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벨리타가 만든 얕은 균열은 작은 의혹이 생겨날 때마다 둘의 사이를 벌려 놓을 것이다.
벨리타가 간과한 점이 있다면, 그녀는 더 이상 황궁에 살고 있지 않으며 전에 비해 극히 미미한 세력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프리모의 흉흉한 시선이 그녀의 목덜미에 가닿았다. 프리모가 음산한 투로 읊조렸다.
“저 건방진 것이…… 자작의 처로 갔는데도 아직 제가 콧대 높은 황녀인 줄로만 아는구나.”
벨리타의 동생을 죽일 때 그녀를 함께 처리하지 않고 살려 뒀던 건 프리모가 특별히 자비로워서가 아니었다. 단지 그녀를 죽일 가치도, 그럴 의욕도 없었기 때문이다.
벨리타 뒤에 버티고 있는 외척은 제스퍼레오가의 견제로 이젠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벌레를 밟아 죽이기 위해 굳이 한 걸음 내딛기가 귀찮아 지금까지 이어졌던 방관이다. 한데 주제도 모르는 것이 제 존재를 상기시키려는 듯 그의 발등을 물고 말았다.
“펠릭스.”
프리모가 섬뜩한 투로 제 수족을 불렀다. 타인이 듣지 못하도록 낮게 깐 음성엔 짙은 살기가 배어 있었다. 뒤편에 서 있던 남자가 하명하라는 듯 고개를 숙였다.
“예, 전하.”
“벨리타가 수도를 떠날 때 사람을 붙여라. 저년이 탄 마차가 셀렌 영지에 다다라서는 안 될 것이다.”
* * *
황제가 황궁 행사에 교황을 초청한 일은 사교계에도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세속의 권력에 밀려 언제나 관심 뒤편으로 물러섰던 신전이었다. 황궁은 신의 권한이 황실을 넘어설 것을 염려하여 내내 성직자들을 배제해 왔었다. 그런데 이번만은 교황이 황자에게 후계자의 잔을 넘겨주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일반인들이 보기에 이는 성스러운 미담일 뿐이었지만, 귀족들에겐 세력 변동의 지표가 되었다.
마티나가 대륙을 통일하기 전만 해도 전역에 퍼져 있던 신전들은 각각의 고장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었다. 귀족들은 노동하지 않기에 지나간 것들에 대해 배울 시간이 충분했다. 그들은 종교를 빌미로 사람을 불태우던 미욱한 역사를 기억했다. 잊고 있던 신의 등장으로 정치판의 판도가 뒤바뀔지도 모른다는 예견에 모두의 신경이 곤두섰다.
황궁과 신전이 결속하기로 모의한 것이라면 앞으로 그들이 행해야 할 바는 명료했다. 바로 더없이 신실한 신자를 흉내 내는 일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비단 지배층 사이에서만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교황이 말한 ‘이단’은 정의가 명료하지 않았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골면 코걸이가 되는 식의 발언이었으므로 사람마다 해석을 다르게 할 여지가 있었다.
교회에서 의심스럽다며 사람들을 잡아들일 때마다, 그리고 황궁에서 그 사실을 묵인할 때마다 예배에 출석하는 인원은 나날이 늘어 갔다. 쏟아지는 기부금은 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때아닌 호황에 신관들은 기쁨의 비명을 내질렀을 테지만, 그 크기는 반강제로 지루한 예배에 얼굴을 내밀게 된 귀족들의 내적인 아우성과 감히 상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엔 사람이 없어야 할 텐데…….”
아스티나가 마차의 창밖을 내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테리오드는 창을 가린 검은 커튼을 완전히 걷어 냈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너비의 틈으로는 그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던 탓이다.
바깥에선 어느새 귀빈 취급을 받게 된 사제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광경에 테리오드가 의아한 눈으로 되물었다.
“뭐가 말씀이십니까?”
“어딜 가나 사제들이 깔려 있는 듯해서요.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참으로 바보 같은 선택을 했다고요?”
테리오드가 불쑥 건넨 농에 아스티나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입가에 장난기를 머금은 채 눈썹을 들어 올렸다.
“방금 발언, 신성 모독 아닌가요?”
“부인과 함께라면 길거리에 나앉는 정도야 대수라고요.”
“그런 차림으로 이상한 말씀 마세요. 묘하게 현실감이 있으니까.”
아스티나가 손가락을 들어 그의 차림새를 지적했다.
테리오드는 평소와 꽤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결 좋은 은색 머리칼은 두건으로 완전히 덮어 보이지 않았고, 부러 품이 큰 것을 고른 코타르디는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모양새였다. 낡은 신발은 금방이라도 밑창이 떨어져 나갈 듯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질이 좋지 않은 의복들이었다.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귀족 행세를 하긴 어려운 모양새였다.
제 옷을 내려다본 테리오드가 머쓱한 얼굴로 되물었다.
“역시 안 어울립니까?”
아스티나가 오른손으로 턱을 감싸며 진지하게 응답했다.
“대공의 미색을 가리는 느낌이라 조금 아쉽긴 하군요.”
“부인께선 차림새에 상관없이 아름다우신데요.”
아스티나의 박한 평가에도 테리오드는 사람 좋게 웃었다. 그의 눈에선 애정이 샘솟다 못해 흘러넘치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슬그머니 테리오드의 차림새에서 시선을 비켜 냈다. 그의 칭찬이 싫은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자화자찬으로 맞받아칠 만큼 변죽이 좋진 않았다.
때마침 마차의 속도가 줄었다. 말의 다각거리는 발소리가 천천히 멎고, 이어 마부가 도착을 알려 왔다. 테리오드와 아스티나는 잠자 코 밖으로 내려섰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2층 규모의 평범한 건물이었다. 상점가와 거리가 있는 데 비해 가게의 크기는 큰 편이었다. 창가에 비치는 매대엔 접시나 오래된 펜던트 따위의 잡동사니가 널려 있었다.
아스티나와 테리오드는 건물로 이어진 턱을 밟고 올라섰다. 손잡이를 밀고 들어서자 청량한 문 종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안쪽에서 마른 수건으로 찻잔을 닦고 있던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상냥한 태도로 접객했다.
“안녕하세요, 부인.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신가요?”
내부엔 의외로 사람이 없지 않았다. 구석에선 엄마 손을 잡은 아이 하나가 목재로 만든 말 장난감을 사 달라며 떼를 쓰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물 흐르듯이 그들을 지나쳐 카운터 앞까지 나아갔다. 아스티나가 매끄럽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코웰 부인이 유행시켰던 윔플을 보여 주시겠어요?”
“어머나. 중고품 말씀이시죠?”
“예, 아무래도 빈티지 제품은 다른 멋이 있으니까요.”
“잘 찾아오셨어요. 의류는 위층에 보관하고 있어서, 절 따라오시겠어요? 2층으로 모실게요.”
가게 내엔 따로 계단이 없어 의아해하던 찰나, 점원은 구석에 있는 문으로 둘을 안내했다. 그 안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위층과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보였다. 점원은 다른 손님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문을 닫고는, 손바닥을 내밀어 아래층을 가리켰다. 그녀가 매장 안에서와는 다르게 몹시 은밀한 목소리를 내었다.
“이쪽으로 내려가시면 됩니다.”
아스티나는 그녀를 따라 지하로 가는 계단을 디뎠다. 아스티나의 등 뒤를 쫓으며 테리오드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이런 곳은 또 어떻게 아신 겁니까?”
“올리버가 귀띔해 주더군요.”
“그가 이런 곳을 다 드나들었단 말씀입니까?”
테리오드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 지었다. 조금의 부정도 허용치 않는 단단한 얼굴의 집사가 소개한 암시장이라. 테리오드는 올리버가 점원에게 비밀 암호를 읊는 모습을 도통 상상할 수 없었다.
아스티나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는 대답했다.
“우리의 유능한 집사가 말하길, 어둠의 시장을 알지 못하면 절대 귀족가의 살림을 꾸려 갈 수 없다고 하더군요.”
“일종의 필요악이라는 건가요?”
“어디든 팔려 나갔을 물건이니, 이미 일이 벌어진 상황에선 모아서 볼 수 있는 쪽이 편하긴 하지요.”
시공자는 건물의 용도를 유념하여 지하를 제법 깊게 파 둔 모양이었다. 드디어 긴 계단이 끝이 나고 단단한 철문이 보였다. 점원은 허리춤에 걸린 열쇠로 문을 열어 주고는 뒤로 물러났다. 안으로 들어서자 분위기는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수수하게 꾸며졌던 지상층과는 다르게 지하엔 화려한 벽지가 발려 있었으며, 크기도 훨씬 넓었다.
아스티나는 느른한 눈으로 실내에 쌓인 값진 물건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런 그녀의 앞으로 멋들어진 정장을 차려입은 한 남자가 나섰다. 그가 허리를 숙이며 과장스러운 예를 표했다.
“잘 찾아오셨습니다. 무엇을 구하기 위해 오셨습니까? 진귀한 보물? 고대 왕의 초상? 아니면 과거의 왕실에서 사용하던 그릇? 무엇을 찾으시든 이곳에―”
“있어야겠지. 헛걸음을 하게 했다면 고이 되돌아가진 않을 테니까.”
아스티나의 싸늘한 말에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남자의 입가가 천천히 굳었다. 아스티나가 통고하듯 말했다.
“아탈렌타의 창고에서 나온 물건들을 전부 내오게.”
테리오드가 부재할 당시 가신들이 되팔았던 아탈렌타의 보화들을 회수할 시간이었다.
아탈렌타의 곳간에서 나온 물건들은 그간 업자들 사이에서 돌고 돌아 수도의 암시장까지 다다라 있었다. 오늘 찾아온 건 그런 장물을 취급하는 가게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도중에 팔려 나갔거나 다른 업장에서 인수한 물건을 제하더라도, 어쨌든 대부분은 여기로 몰려들었을 것이다.
“예……?”
아스티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남자가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아스티나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중앙으로 걸어갔다. 실내 한가운데엔 손님을 응대하기 위한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아스티나와 테리오드는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앉았다.
아스티나가 턱을 까딱이자 테리오드는 무심히 머리를 덮고 있던 두건을 벗어 내렸다. 정확히 의도했던 대로, 테리오드의 은빛 머리칼이 물결처럼 쏟아졌다. 남자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은발은 결코 흔하지 않다. 그리고 귀족들과 오래도록 거래해 왔던 만큼 남자는 이런저런 소문을 어렵지 않게 얻어들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대공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그의 은빛 머리칼은 또 얼마나 반짝이는지 따위의 찬사들까지도.
은발의 남자와 적발의 여자, 그리고 그들이 찾는 대공가의 보물이라. 그 사실이 말하는 바는 분명했다. 걸친 차림새가 보잘것없긴 했으나 그건 단순한 위장일 터다.
남자는 달리듯이 걸어와 대공 부부 앞에 섰다. 그가 진땀을 빼며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저희는, 그, 그러니까…….”
“대공가의 곳간에서 나온 장물을 취급하다니. 어지간히 간이 크군, 자네.”
아스티나의 코웃음에 남자의 얼굴이 더욱 희게 질렸다. 부패를 저질렀던 아탈렌타의 가신들이 풍비박산 났다는 소리는 이미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그 매서운 손속이 이곳까지 날아들까 싶어 남자는 설마 하면서도 내내 마음을 졸여 왔었다.
한데 그게 정말 현실이 되다니. 귀족인 가신들을 그리 가혹하게 다루었다면, 평민인 자신은 얼마나 더 험악한 방식으로 처리될 것인가?
물론 남자는 암시장을 운영하며 여러 귀족들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당연히도, 아탈렌타에는 감히 상대가 되지 않는 가문들이었다. 대공가에서 문제를 걸고 넘어진다면 그들은 재빠르게 꼬리를 잘라 낼 것이다. 그리고 그 꼬리가 업장을 직접 운영하고 있는 자신이 될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대공이 짐승이 되었다는 말에 후환이 없으리라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보통의 경우처럼 한두 점 정도를 알아채지 못하게 빼낸 것도 아니고, 그가 넘겨받은 건 창고를 거의 들어낸 수준의 양이었다. 이건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무게의 일이 아니다. 값비싸게 되팔 수 있다는 생각에 희희낙락하며 물건을 넘겨받았던 자신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남자는 그때로 돌아가 스스로의 얼굴에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당장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가 거의 울먹이며 소리쳤다.
“아닙니다! 저흰 정말 그것이 훔친 물건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뻔한 거짓말이었다. 장물을 취급하는 가게에서 그 물건이 장물임을 몰랐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남자는 제 입에서 나온 변명이 얼마나 멍청했는지를 깨닫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의외로 대공비는 자애로운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고개를 들어도 좋네, 그대는 하던 일을 하였을 뿐이지 않나.”
남자는 번뜩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아스티나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그대가 사들이지 않았다 해도, 물건들은 어차피 다른 업자를 찾아가지 않았겠나? 그러니 이 일로 그대를 책할 마음은 없어.”
“그, 그럼…….”
상황 파악이 되질 않는다는 듯, 남자는 좀처럼 그럴듯한 응대를 꺼내지 못했다. 아스티나는 남자를 대신해 그들의 목적을 명확히 정리해 주었다.
“대공 전하와 내가 원하는 바는 명료하네. 우리네 가신들이 빼돌린 물건을 전부 돌려받는 것. 대신 그들에게 내주었을 대금은 전부 돌려주도록 하지.”
상식적인 요구에 남자는 내심 한숨을 돌렸다. 대공비는 아무래도 성미가 유약한 모양인 듯, 피를 볼 생각까진 없어 보였다. 안전을 보장받자마자 남자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대공비가 무력을 쓸 생각이 없다면 판을 조금 제 쪽에 유리하게 이끌어도 될 터다.
당연히도 남자는 물건들을 인수하는 데 있어 가신들에게 지불했던 금액 이상의 돈을 써야 했다. 수도까지 이송하기 위해 용병들에게 많은 비용을 지출한 건 당연지사고, 상품 가치를 살리도록 깨끗이 복원하는 데도 품이 들었다. 판매를 준비하며 들인 시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 모든 걸 감안한 금액을 받아 내야 손해를 보지 않았다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저어 대공비 전하…….”
그런 계산으로 남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을 때였다. 대공이 곧장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부인께서는 너무 자비로우십니다. 저는 당장 저 좀도둑들을 도륙 내고 싶은 심정인데요. 아니, 그래도 성에 차지 않을 듯합니다.”
남자는 재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의 등이 다시 식은땀으로 젖어 들기 시작했다. 그는 완전히 고개를 숙인 채 마룻바닥만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아스티나는 그의 정수리를 한 차례 흘기고는, 테리오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스티나가 테리오드를 칭찬하듯 눈을 찡긋이며 말했다.
“전하, 부디 저를 보아 마음을 너그러이 가져 주세요. 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저지른 죄의 수야 하고많았다. 하지만 아스티나의 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매끄러이 굴러갔다. 아스티나가 온화한 목소리를 자아내며 말했다.
“저는 가문의 소중한 보물들만 되찾으면 그것으로 되었습니다. 대공께서 건강을 되찾은 상황에, 제가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테리오드가 감동받은 얼굴로 아스티나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경탄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부인께서는 마음씨가 고우십니다.”
그리 말한 테리오드가 곧장 남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에겐 부인을 향했던 것과는 다른 싸늘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들었느냐. 내 당장 너를 베어 저잣거리에 매달고 싶은 심정이지만 이번만은 아내의 얼굴을 보아 온건하게 넘어가는 것이다.”
“예, 아, 압니다! 자비로운 처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나는 인내심이 많지 않다. 물건을 빼돌리거나 하는 허튼짓을 했다간 더는 참지 않을 것이야. 물론, 그대가 만일 삼대의 피를 보고 싶다면 그리해도 좋겠지만 말이야.”
테리오드가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남자는 흘긋 대공 쪽을 올려다보았다가, 곧바로 시선을 바닥에 처박았다. 남자의 손은 어느새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탈렌타의 대공이 온화한 성품으로 유명하다고는 하나 그도 어디까지나 귀족이다. 그리고 귀족이란 인종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는 남자 역시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완전히 수그러든 기색에 테리오드는 귀찮다는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좋아, 그럼 물건을 내오게.”
훌륭한 마무리였다. 이미 한 번 합을 맞춘 전적이 있어서인지 이번 연기는 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웠다. 남자는 지체 없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창고 안으로 달려갔다. 아스티나는 흡족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원래 소유하고 있던 것들을 되사가야 한다는 게 조금 아깝긴 했지만, 그렇다고 텅텅 빈 창고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물건을 빠짐없이 되찾기 위해서는 되도록 자비롭게 구는 것이 좋았다.
창고에서 남몰래 들려 나간 보화의 수는 한정 없었다. 만일 이곳을 심하게 질책한다면 당장은 지출 없이 물건을 돌려받을지 몰라도, 그 외의 몫을 찾는 건 요원한 일이 될 터다. 잡히면 파산이라는 생각에 소유주들이 더 깊숙이 숨어들 테니 말이었다.
“이게 전부입니다.”
남자는 가게 안에 있던 모든 인력을 동원해 아탈렌타의 물건들을 전부 끌어냈다. 정확히 무엇을, 얼마나 빼돌렸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던 대공 부부는 그 부피에 기가 질렸다. 게다가 이게 전부도 아니지 않은가.
테리오드는 단전 밑에서부터 깊은 분노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병질이 발현되기 전만 해도 가문의 곳간을 털어먹을 배신자들과 동고동락했었다니. 테리오드가 답지 않게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그놈들을 다 찢어 죽였어야…….”
“……수가 좀 많긴 하군요.”
과로하기 싫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되도록 가벼운 벌을 내리려 했던 아스티나가 찔린 얼굴로 대꾸했다.
아스티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꼼꼼히 장물의 탑을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개중에서 보관 상태가 좋지 않은 것들을 꼽아 냈다.
“이것들은 우리가 타고 온 마차에 실어 주게. 상태가 좋지 않아 아무래도 직접 이송하고 싶군.”
혹 가게 쪽에서 보관 중 생긴 손상이라며 책잡힐까 염려하던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몹시 당황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열의에 찬 얼굴로 소리쳤다.
“예? 아닙니다, 저희가 배달해 드릴 수 있습니다. 결코 어떤 흠도 나지 않도록 저희가 최선을 다해 주의하겠습니다!”
대귀족에게 도륙당하고 싶지 않은 소시민의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흘겼다.
“분명, 방금 직접 옮겨 간다고 말했네.”
“아……! 예예! 너희들 멍청하게 서서 뭐 해! 얼른 타고 오신 마차에 실어 드려라!”
눈치 없이 굴었다는 생각에 남자는 재빨리 수긍했다. 그의 손짓에 인부들이 황급히 물건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아스티나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외의 물건은 아탈렌타에 있는 대공저까지 이송해 주게.”
“아, 그럼 배송비는…….”
“배송비는?”
아직 뒤편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테리오드가 여상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남자는 곧장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만치 크게 미소 지었다.
“물론 저희 쪽에서 부담해야지요.”
“그래, 그럼 믿고 맡기겠네.”
남자는 울음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공 부부를 배웅했다. 계단으로 통한 문을 열어 주다 말고 그는 번뜩 눈을 크게 떴다. 이대로 혼자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그가 의리 있는 사내였다면 애초에 이러한 직종에 종사하지도 않았을 터다. 남자는 망설임 없이 동료를 파는 고자질을 행했다.
“참, 더 찾으시는 게 있다면 다른 업자에게도 연통을 넣겠습니다. 그림을 취급하는 가게를 하나 아는데, 아탈렌타 가계의 초상을 몇 점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좋아, 그리해 주게.”
아스티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덧붙였다.
“다만 관련이 없는 사람들에겐 비밀로 해야 할 것이야. 알다시피 가문의 보고가 바깥을 나돌아다니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닐세. 아니, 오히려 대단한 모욕이지.”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남자는 입이 찢어져도 결코 소문을 퍼트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테리오드와 아스티나는 유유히 가게를 나와 건물 옆에 세워 두었던 마차에 올라탔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와 달리 떠나는 말들의 걸음은 묵직했다. 자해 공갈단에 이은 부부 사기단의 재림이었다.
아스티나는 감탄 어린 눈으로 테리오드 쪽을 넘겨보았다. 벨루아에서도 느꼈지만 그녀의 남편은 연기에 꽤 재능이 있었다. 히센의 어기적거리는 걸음이 아직 눈에 선한데 반해 대공은 그때도 그럴듯한 시선 처리를 보여 주지 않았던가. 한결 더 발전한 지금은 상대가 이상한 점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갈수록 연기가 느십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훌륭한 스승을 만난 덕이 아닐까…….”
테리오드가 약간의 자괴감이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매우 효율적인 방식이긴 했으나 돌아오는 길에 기분이 묘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짜여진 각본 덕택에 큰 분란 없이 물건들을 되찾아 왔으니 다행이라고 보아야 할까.
테리오드는 창 쪽에 팔을 올리고는 턱을 괴었다. 물끄러미 넘겨다본 그의 아내는 새삼스럽게도 앳된 낯을 하고 있었다. 종종 그녀의 연배를 잊게 되는 이유는 바로 저 눈빛 때문이 아닐까. 세월이 켜켜이 쌓인 듯한 짙은 녹빛의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하염없이 그 안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테리오드는 새삼 아스티나의 나이를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부인께서는 배우를 하셔도 좋았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살면서 다 연기란 걸 하지 않습니까.”
아스티나가 무심히 대꾸했다. 사람들은 종종 품고 있는 감정과 다른 반응을 흉내 낸다. 그것이 그리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예, 바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점이요.”
테리오드의 지적에 아스티나는 눈을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 마차가 멈춰 섰다. 사람이 지나는 길이라 애초에 속도를 낮추고 있어 크게 들썩이진 않았지만, 다소 갑작스런 정거였다. 주변이 소란스럽지 않은 걸 보아 대로변은 아닌 듯한데 왜 멈춰 선 것일까.
그 답은 곧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잠시 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겠습니까.”
“가던 길이 바빠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어허, 신의 전언보다 더 중요한 일이 또 어디에 있단 말씀이십니까?”
“아니, 이 사람들이…… 되었대도요!”
사제들이 마부와 실랑이하는 소리가 차체 너머로 선명히 들려왔다. 아스티나는 커튼을 조금 걷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마부의 잇따른 거부에도 사제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차를 둘러쌌다. 그중 가장 신분이 높아 보이는 남자가 문으로 다가섰다. 아스티나는 창가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붙였다.
작은 틈 사이로 기묘한 초록빛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나 남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시선을 돌리고는 노크를 남겼다. 아스티나는 커튼을 놓고 테리오드를 돌아보았다. 그에게 작게 턱짓을 해 보이자 테리오드가 두건을 길게 둘러 머리와 얼굴을 감쌌다. 아스티나 역시 그처럼 얼굴을 가리고는 문손잡이를 당겼다.
아스티나가 태연하게 문을 열어 주며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안녕하세요, 수석 사제 데니스 조르단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소개한 남자가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신에게 종속된 신분답게 그의 외관은 몹시 신실해 보였다.
“데니스 사제님이시군요.”
아스티나가 언뜻 놀란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데니스 조르단은 신성력으로 범죄자를 잡아내어 세간에서 몹시 유명해진 이름이었다. 알은체에 남자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저를 아십니까?”
“알다마다요. 사제님께서 어쩐 일로 저흴 불러 세우셨는지요?”
“이 마차에 불길한 기운이 느껴져 걱정되는 마음에 그만 가시던 길을 방해하였습니다. 잠시 이 마차를 살펴보아도 되겠습니까?”
아스티나는 물끄러미 데니스 신관을 응시했다. 그녀가 방금과는 다른 쌀쌀맞은 투로 답했다.
“괜찮습니다. 다만 저희가 가던 길이 바빠서요. 후에 신전을 따로 찾아뵙도록 하지요.”
“하나 워낙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져…… 혹 살펴보아선 안 되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데니스 신관이 안타깝다는 듯한 목소리를 자아내며 되물었다. 그의 시선이 기민하게 마차 안쪽의 테리오드에게까지 닿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아스티나는 눈을 돌려 마차의 앞과 뒤편을 살폈다. 주변을 온통 에워싼 사제들은 전혀 비켜 줄 기색이 아니었다. 완전히 길이 가로막힌 상태에서 수색을 피할 수는 없었다. 어투는 상냥해도 이것이 제안이 아닌 강압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아스티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짧은 허락을 남겼다.
“서둘러 주세요.”
데니스 신관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사제들에게 마차에 실은 짐을 살펴보라는 지시를 남겼다. 기다렸다는 듯 구매한 물건들이 파헤쳐졌다. 암시장에서 들고 나온 낡은 물건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보다 못해 마차에서 내려섰다. 그녀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직 무엇이 문제인진 잘 모르겠으나…… 기운이 심상치 않아 보이긴 하군요.”
데니스 사제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는 아스티나의 눈썹이 미세하게 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데니스 사제가 입꼬리를 비틀며 물었다.
“이 물건들을 어디서 사셨습니까?”
대공저에 있어야 할 가문의 보고가 바깥을 나돌아다니는 건 분명 치욕이다.
“……워낙 낡아 처분을 부탁받은 물건입니다.”
아스티나가 시선을 피하자 데니스 신관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그는 펼쳐진 물건들 사이로 가까이 다가가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는 개중에서 가장 낡고 지저분한 자기를 하나 가리켰다.
“어두운 기운의 근원은 아무래도 이것 같습니다.”
“전 평범한 도자기로만 보이는데요.”
아스티나가 퉁명스런 음성으로 대답했다. 데니스 신관은 큼큼 목을 한번 가다듬고는 태연한 척 말했다.
“신성력이 없으신 분들은 모르실 수 있지요. 하지만 매우 위험한 물건임은 사실입니다. 어차피 처분하실 물건이라면 제가 이것을 인도받아도 될까요? 사특한 기운이 어려 아무래도 저희 쪽에서 파기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스티나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별것 아니란 듯 선선히 허락했다.
“악인도 구분할 수 있는 대단한 분이시니 사제님의 말씀이 맞겠지요. 그리하세요.”
“예, 그럼 이만 가 보셔도 됩니다.”
데니스 신관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이어 물었다.
“아, 혹시 성함과 거주지가 어떻게 되시지요?”
“……로제 앤더슨입니다. 광장 근처에서 거주하고 있어요.”
“예, 앤더슨 부인. 후에 문제가 생기면 다시 찾아뵙도록 하지요. 그럼 신의 은총을!”
데니스 사제가 성호를 그으며 유쾌한 투로 작별 인사를 남겼다. 아스티나는 대꾸하지 않고 마차에 올라탔다. 데니스가 스치듯 살핀 바로 그녀는 몹시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차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사제들에게서 유유히 멀어졌다. 그러나 정말 아무 일이 없었던 건 아니다.
데니스는 넘겨받은 자기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어 그가 다분히 비웃음 어린 투로 중얼거렸다.
“앤더슨 부인은 무슨…….”
그때 옆에서 눈치를 보던 견습 사제가 끼어들었다.
“사제님, 여기서 정말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십니까?”
“네가 감히 내 신성력을 의심하는 게냐?”
데니스는 곧장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격한 반응에 놀란 견습 사제가 허둥지둥 몸을 물렸다. 신께 종사한다는 사실은 같아도 데니스와 그의 신분은 천지 차이였다. 데니스처럼 젊은 나이에 수석 사제 신분을 꿰차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데니스의 빠른 승급은 몹시 이례적인 일이었다. 데니스는 신전 내에서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고 소문이 자자한 대단한 인물이었다. 고대에는 신의 힘이 실제로 세상에 존재했을지 몰라도, 현재에 와선 찾아볼 수 없는 과거의 유산이 된 지 오래다. 우두머리 되는 교황조차도 기적을 일으킬 힘이 없는 세대에 데니스는 의례적으로 신의 유지를 받든 인물이었다.
그것이 마냥 허튼 소문만은 아닌지 데니스는 사람들의 성향이나 미래 같은 것을 곧잘 맞춰 내곤 했다. 그가 보인 능력을 생각하면 오히려 수석 사제라는 신분도 부족한 감이 있었다.
데니스는 정치 감각도 갖추고 있었기에 능력만으로 빛을 발하긴 힘든 세태에 보기 드문 이른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대부분의 윗선은 싹싹하게 비위를 잘 맞추는 데니스를 좋아했다. 자연히 데니스는 교단 내에서 대단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젊기 때문에 아직 대신관 자리까진 오르지 못했으나, 교인들 대부분은 내심 데니스를 차기 교황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실한 교인이라는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데니스를 움직이는 건 신의 뜻이 아닌 야망이었다. 그가 진정 신을 믿었다면 대공 부부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이런 무대를 깔아 두진 않았을 테니까.
‘이깟 도자기에 무슨 힘이 있는지 알게 뭐람.’
데니스는 피식 조소를 흘리며 옆에 선 자에게 물건을 떠넘겼다.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 든 견습 사제가 주춤 뒤로 물러섰다.
데니스가 오늘 이 길목에 서 있었던 건 다분히 의도된 일이었다. 의심의 시작은 이시스 황녀가 굳이 이 부근을 콕 집어 말하며 ‘여긴 살피지 않아도 된다’는 뜻을 전한 것이었다. 이를 미심쩍게 여긴 데니스는 곧장 예정을 바꾸어 정화 의식을 벌일 장소를 변경했다.
본디 그는 대공비를 마녀로 몰 혐의를 만들어 내기 위해 내내 대공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오늘 저택에서 비밀스럽게 빠져나온 검은 마차 하나가 이곳에 다다른 것이다. 남몰래 감시를 붙였던 데니스는 대공 부부가 들른 목적지를 보고받고 쾌재를 불렀다.
데니스는 윗사람을 접대하는 데도 소질이 있었으므로 당연히 여러 암시장의 위치를 꿰고 있었다. 대공 부부가 무슨 목적으로 암시장까지 걸음해 값비싼 장물을 사들였든, 그 행동이 세간에서 그리 좋게 해석되지는 못할 것이었다.
처음 데니스가 범죄자를 잡아들인 것도 조작된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이 골동품에 흉악한 저주의 힘이 들어 있다고 날조한대도 그 누가 아니라 반박할 것인가?
데니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문득 고민에 잠겼다.
‘한데 왜 이시스 황녀가 대공 부부의 치부를 가려 주려 하였을까.’
데니스는 프리모의 세력이라는 점에서 이시스와 같은 편에 서 있었으나, 속에 품은 개개인의 뜻은 분명 달랐다. 얼간이 황자를 휘둘러 이루고 싶은 것이 많은 데니스에게 이시스는 마냥 귀찮은 상대였다.
그녀가 내리는 명은 데니스가 하려는 일을 종종 방해하곤 했다. 데니스가 대변하는 것은 신전의 이익이고 이시스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권력의 근원인 프리모는 제 여동생을 가장 신임하고 있으니 데니스로서는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오래전부터 데니스는 이시스의 흠을 잡으려 매섭게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자신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데, 이시스 황녀라고 그러지 않으란 법이 없지 않은가?
실제로 이번 이시스의 명은 분명 수상했다. 프리모는 분명 대공비를 음해하라는 의사를 전했다. 그런데 이시스 황녀는 데니스가 증거를 잡아낼 수 있는 기회를 놓치도록 부러 눈을 가린 것이다. 황녀가 가지 말라고 말한 곳에서 아탈렌타의 치부를 잡아낸 것이 그녀의 변심을 증명했다.
어쩌면 대단한 단서를 발견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데니스는 삐뚜름히 미소 지었다.
* * *
다음 날 데니스는 이른 아침부터 황궁을 찾았다. 건수를 잡은 마당에 더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약점을 찾아낸 공로를 인정받으리란 생각에 데니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황자의 방으로 들어섰다. 아니나 다를까 구실을 잡았다는 이야기에 프리모는 몹시 기꺼워했다.
정쟁은 ‘정정당당’ 따위의 말이 통용되는 분야가 아니다. 상대편을 깎아내릴 수 있는 단서가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물고 늘어져야 했다. 설령 그게 사실이 아니라도 말이다. 여론을 휘둘러 평판을 만신창이로 만들고 나면 아무리 그럴듯한 해명도 빛을 잃고 말았다. 하물며 암시장에서 사들인 수상한 골동품이라니. 지금 같은 시국에 이보다 구실 좋은 사건이 또 없었다.
게다가 데니스가 본 건 대공비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대공비의 뒤에 숨어 내내 나오지 않았던 사내는 분명 테리오드 반 아탈렌타였다. 특징이 되는 은빛 머리칼과 하관은 가린 상태였지만, 그 아름다운 푸른빛 눈동자는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었다.
애처가라고 소문난 이라고는 하나 아무리 그래도 아내보단 그 본인이 더 소중할 터였다. 대공을 이 사건에서 빼내 주는 일로 그의 지원 역시 노려볼 만했다. 대공비를 내치고 황가와 혈연으로 결속을 다진다면 양쪽에게 만족스러운 결말이 되리라.
이야기를 마친 데니스는 프리모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한데 전하, 이시스 전하께선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프리모가 술잔을 들고 흔들며 고개를 들었다.
아침부터 독한 위스키라니. 독한 알코올 향이 근처까지 풍겨 왔지만 데니스는 내색하지 않았다.
이야기 중 꾸준히 잔을 기울인 결과로, 데니스를 향한 프리모의 눈빛은 취기로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프리모가 귀찮다는 듯 되물었다.
“그걸 왜 묻는 게냐?”
“……전하께선 돌려 말하는 걸 싫어하시니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소 조심스러운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만…… 이시스 전하의 동태가 수상합니다.”
“뭐?”
프리모는 그제야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벨리타가 이시스를 깎아내리며 프리모에게 주의를 남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벨리타의 말은 들을 가치가 없다 여겨 그냥 넘기었지만, 수족으로 부리는 자의 간언은 조금 느낌이 달랐다.
프리모는 턱을 까딱여 설명을 요구했다.
“마저 말해 봐.”
“제가 대공 부부를 잡아낸 건 광장 근처의 주택가입니다. 그리고 이시스 전하께서는 전날 굳이 그 부근을 짚어 가며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이시스가 나 몰래 다른 뜻을 꾸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게냐?”
“예. 이시스 전하께선 대공비를 마녀로 몰라는 계략을 내어놓고는, 막상 증거가 될 만한 치부는 뒤로 빼돌리고 계셨다는 겁니다.”
데니스는 그것이 이시스가 공적을 독차지하기 위해 경쟁자인 저를 속인 것이라 판단했지만, 굳이 프리모에게 그 사실을 밝히진 않았다.
앞서 말했듯 흑색선전에 있어 사실 여부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설령 이시스가 그 지역으로 가지 말라고 말한 것이 단순한 우연이었다고 해도, 그건 데니스에겐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전하께서는 이시스 전하께서 왜 그런 명을 내리셨는지 짐작이 가십니까?”
“그 계집의 머릿속에 든 게 뭔지 내가 어찌 알겠느냐? 그 애를 열 달 품어 낳은 어머니조차 잘 모르겠다 하시는데.”
프리모가 불쾌하다는 듯 대꾸했다. 데니스는 당황하지 않고 핵심을 짚어 냈다.
“예, 바로 그 점이 가장 걱정되는 겁니다. 이시스 전하께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든, 저희로서는 그 뜻을 다 알 수 없다는 점이요. 이시스 전하는 정적들을 부지불식간에 옭아매어 제거하곤 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일 그녀가 겨냥하는 방향을 달리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전 그리 그럴듯한 방어가 가능하리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
“전하. 이시스 전하는 프리모 전하와 한 몸이 아니십니다. 다른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뜻을 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데니스의 진지한 음성 밑으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옅게 깔렸다. 데니스는 이야기를 늘어놓다 말고 기민하게 고개를 들었다.
“……여기 다른 사람이 있습니까?”
프리모는 무심코 눈을 돌려 침대 위를 살폈다. 어젯밤 같이 침소에 들었던 아가타가 마침 잠에서 깬 듯했다.
프리모가 별것 아니란 듯 어깨를 으쓱였다.
“들어 봤자 아무것도 모르는 계집이다.”
데니스의 얼굴에 찜찜한 표정이 떠올랐다.
확실히 황자의 눈에 들고 싶어 안달 난 계집이 문제를 일으킬 여지는 없어 보였으나, 기밀은 되도록 아는 사람이 적은 편이 좋았다. 중요한 이야기가 새어 나간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데니스가 프리모를 질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데니스는 한숨을 삼키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제 얘기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전하. 이시스 전하는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요.”
“알았네.”
프리모가 못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태도로 대꾸했다. 오래도록 보필해 온 이시스 황녀에 대한 의심을 지피기엔 이마저도 부족했을까. 더 물고 늘어져 봐야 달라질 건 없었으므로 데니스는 가타부타 말을 보태지 않았다. 그는 황자에게 정중히 인사를 남기고는 방을 나섰다.
데니스가 떠나고 실내엔 적막함이 찾아들었다. 프리모는 걸치고 있던 가운을 벗으며 침대로 돌아갔다. 휘장을 걸치자 곧장 매력적인 나신이 눈에 들어왔다. 프리모는 자연스럽게 아가타의 둔부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그의 움직임은 곧 저지당하고 말았다. 아가타가 손을 뒤로 뻗어 새침하게 프리모의 손등을 때린 탓이었다. 그에 프리모가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다 들었느냐?”
아가타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불퉁한 얼굴로 프리모를 쏘아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뾰족한 음성이 툭 튀어나왔다.
“제가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자는 게 아니었구나.”
“예, 덕분에 들었다마다요.”
‘아무것도 모르는 계집’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가타는 도통 퉁명스러운 태도를 벗지 않았다. 그녀가 기분 상한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
“제가 아무것도 모른다면 두 분께서 하시는 얘기도 이해하지 못했겠지요. 하지만 이를 어쩌죠? 저는 다 알아들었는데요.”
건방진 태도였지만 프리모는 그리 불쾌해하진 않았다. 아가타는 어디까지나 그의 밑에 깔리는 정부였고 가벼운 앙탈 정도야 귀엽게 들어 넘겨 줄 수 있었다. 아무리 화를 내어 봤자 아가타는 결국 그의 말 한마디, 움직임 하나에 벌벌 떨어야 하는 신분이었으니까. 따라서 프리모는 볼멘소리에도 가만히 입꼬리만 끌어 올렸다.
“그래, 그럼 너는 데니스 신관의 말을 어찌 생각했느냐? 이시스를 내가 어찌해야 할지 말이다.”
아가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골똘히 머리를 굴리는 모습은 보기에 퍽 귀여웠다. 프리모는 아예 침대에 드러누워 그런 아가타를 응시했다. 관자놀이를 매만지던 그녀가 진지한 목소리를 내었다.
“전하, 정말 이시스 님을 처리하시는 게 어떨는지요?”
“뭐? 너까지 그런 소릴 하느냐?”
프리모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만나는 모두가 이시스에 대한 악담을 쏟아 내니 그 역시 마음이 흔들리는 건 사실이었다. 프리모는 동요를 드러내지 않은 채 이어지는 아가타의 말을 들었다.
“예, 저는 사제님 말대로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이유를 말해 봐라. 왜지?”
“이시스 전하께서는 분명 대단한 분이지만…… 양날의 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하를 따르는 세력도 황녀님과 독대하는 경우가 더 잦지 않습니까? 전하께 바로 보고를 드려도 결국은 이시스 전하의 결정을 거치게 되니까요.”
그 말이 프리모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프리모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가타는 손을 뻗어 그의 주름진 이맛살을 풀어 주며 살살거렸다.
“이건 매우 모욕적인 일이에요. 만약 전하께서 즉위하시면 이시스 전하가 섭정하는 것과 같은 모양새가 될걸요?”
“섭정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전하, 화내지 마시고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지금은 이 궁의 살림조차 황녀님의 뜻대로 움직이고 계시지 않습니까?”
벌컥 높아진 황자의 언성을 아가타가 재빨리 막아섰다. 프리모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이내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가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현재 황궁 내의 중요한 행사를 주관하는 것도 이시스, 정적을 제거하는 것도 이시스였다. 프리모가 황제 부부의 신임을 얻도록 나디아라는 혼처를 찾아낸 것도 이시스의 결정이었으며, 하물며 프리모가 입는 옷들조차 동생의 손을 거쳤다. 프리모는 어디까지나 우두머리의 신분으로 최종적인 결정만 내렸을 뿐이다.
프리모는 문득 이 상황이 무척이나 기형적임을 깨달았다.
“전하, 이대로 가다간 제가 비가 되었을 때도 이시스 전하가 내궁 살림을 도맡으시겠어요.”
흔들리는 마음을 알아챈 아가타가 앙탈을 부리듯 우는소리를 내었다. 프리모는 그런 아가타의 머리칼을 가만히 쓸어 주었다. 다정한 행동과는 별개로 그가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은 마냥 계산적이었다.
‘가소로운 것, 제가 뭐라고 내 비 자리에 앉는단 소리를 하는 건지.’
프리모는 아가타를 정비로 들일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만일 자신이 황제가 되었을 때 후비로야 들일 수 있겠으나, 그때까지 그녀가 질리지 않을지는 프리모 본인도 확답할 수 없었다.
프리모에게 아가타는 그저 즐기기 위한 상대였다. 얼굴과 몸이 전부인 멍청한 여자를 두고 부모님이 흡족해하는 정략결혼 상대를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나디아가 그리 프리모에 취향에 맞는 여자는 아니었으나, 황족의 결혼은 개인적인 호오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가타는 지금 받는 총애를 이유로 자신이 미래의 황후가 될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고, 그래서 프리모는 그녀가 귀여웠다.
프리모가 으스대듯 중얼거렸다.
“흠, 이시스 그 계집이 자꾸 제 오라비를 아래로 보는 것 같긴 하지. 건방지게 말이야.”
지난번 대공비를 마녀로 몰자는 계략을 이야기하며 저를 한심하다는 듯 보던 이시스의 눈이 잊히지 않았다. 이미 이시스는 프리모를 견제할 만한 세력을 전부 처리해 준 상태였다. 이번 일로 아탈렌타의 기를 죽이고 나면 이시스는 귀찮은 잔소리꾼으로 전락할 게 분명했다.
지난번 벨리타가 했던 말은 이간질이라 생각해 그냥 넘겼었지만, 객관적으로 이시스가 현재 프리모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인 건 사실이었다. 모두의 말마따나 그 작은 머릿속에 무슨 계략을 짜고 있든, 프리모로서는 도무지 알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프리모는 곰곰이 고민에 잠겼다.
“아탈렌타와 이시스라……. 둘을 엮어 재밌는 판을 하나 만들어 볼 수도 있을 듯한데…….”
때맞춰 아가타가 눈을 반짝이며 끼어들었다.
“전하, 어차피 대공비를 처리하실 예정이시라면, 말씀하신 대로 이시스 전하를 이용하시는 건 어떨까요?”
“어떻게 말이냐?”
“이시스 전하께 독을 먹이는 거지요.”
“독을?”
본격적인 제안에 프리모가 다소 꺼림칙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시스의 기를 죽이려고만 했지 그녀를 죽일 생각까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동복에서 난 누이였고, 자비 없이 짓밟기엔 도움받은 일이 지나치게 많았다.
그러나 아가타는 코웃음을 쳤다.
“이시스 전하를 처리할 방법이 그 외에 또 뭐가 있겠어요? 괜히 얕은수를 내었다가 전복당하지 않으려면 확실히 해야지요. 이시스 님께서 본인을 실각시키려는 전하를 가만히 내버려 두실 것 같으세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이시스는 본인을 해하려는 움직임을 기민하게 감지해 낼 터였다. 실컷 책사로 이용해 놓고서는 막상 필요 없게 되니 권력을 앗아 간다고 한다. 누구라도 배신감을 느낄 상황이었다.
프리모는 이시스가 그의 정적을 제거할 때 어떤 방식을 쓰는지 익히 보아 왔다. 모르긴 몰라도 그의 누이가 배신자를 썩 유쾌한 방식으로 상대할 것 같진 않았다.
“그건 그렇긴 하지. 내 진영에 이시스와 상대될 만한 머리가 없기도 하고.”
“괜한 분란의 싹을 남겨 두려 하지 마세요. 그리고 대공비를 마녀로 모는 계략은 사실 확실한 한 방이 아니지 않나요? 불길하게 들리기는 해도 누군가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끼친 정황은 없으니까요. 아탈렌타를 구설수에 오르게 하여 휘청이게 만들 수는 있겠지만, 아마 그뿐일 거예요.”
“그거야 이시스가 할 일이지. 이시스가 한다고 해서 못한 일은 없어. 아마 그 애가 다 생각해 둔 게 있을 게다.”
여론을 나쁘게 할 수는 있으나, 그것만으로 대귀족을 몰아붙이기는 어려웠다. 상대의 세력이 대단한 상황에서 모든 변수를 계산해 섬세하게 상황을 조작하는 건 무척 머리 아픈 일이었다. 필히 많은 공을 들여야만 확실한 처리가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프리모는 이시스가 정확히 어떤 계산을 하고 일을 꾸민 것인지까지는 잘 알지 못했다. 동생이 알아서 하리라 여겨 설명을 요구하지도 않았던 탓이다. 내내 그런 식으로 승인만 내려왔던 프리모로서는 스스로 계책을 짜내야 하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귀찮았다.
이시스는 능력이 있었고, 프리모는 그녀에게 머리 아픈 일들을 하나씩 떠넘겨 왔다. 그는 지난 몇 년간 이시스가 제공하는 편리함에 천천히 잠식되었다. 앞으로 모든 걸 홀로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막막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프리모가 쉽사리 넘어오는 기색이 아니자 아가타는 아예 그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차암, 전하. 이시스 전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을 왜 전하께서는 못한다고 생각하세요? 그게 이시스 님께서 전하께 미친 진짜 악영향이에요. 전하가 결정 내리실 영역을 축소시키는 거요. 왜 이렇게 자신감이 없으세요?”
“자신감이 없다고? 이 내가 말이냐?”
프리모가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되물었다. 아가타 역시 뾰로통하게 입술을 삐죽였다. 이어 아가타의 입가에 고혹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면 전하의 대범함을 보여 주세요. 게다가 언제 제가 여론을 직접 뒤흔들라고 하였나요? 훨씬 더 쉬운 방법이 있는데 말이에요.”
“하면 대체 뭘 어찌하란 말이냐?”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시스 전하께 독이 든 잔을 먹이세요. 그리고 그걸 대공비의 행각이라 음해하시면 처리가 간단하겠지요.”
아가타가 은밀하게 계략을 속삭였다. 그 선뜩한 눈빛에 프리모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끼쳐 왔으나, 단순한 기분 탓으로 치부했다. 고작 여자의 말에 기가 질렸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론이 나빠진 상태라면 회생할 바가 없지 않겠어요? 아무도 진범이 대공비임을 믿어 의심치 않을 거예요.”
프리모는 곧 기억에서 제가 죽여 없애기로 한 황녀 하나를 끄집어냈다. 벨리타라면 이시스를 제거하라는 지시를 무척이나 기꺼워하며 따를 것이다. 마차 전복 사고 따위로 위장하여 없애는 것보단, 이번 사건에 버리는 패로 이용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했다.
약간의 침묵 끝에 프리모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전하께선 멋있으세요.”
아가타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매력적으로 드러난 흰 치아 사이, 드러난 송곳니의 모양이 유독 날카로웠다.
* * *
“―그러니까 근본적인 의심을 해야지. 누가 왜, 무슨 이유로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지.”
결국은 아돌프가 벌컥 언성을 높였다. 내내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던 아스티나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멀뚱히 눈만 깜빡이자 아돌프가 어이없다는 듯 허, 하는 소리를 냈다.
“설마 지금까지 내 말 하나도 안 듣고 있었냐?”
“아, 창밖을 좀 보느라.”
아스티나의 무심한 대꾸에 아돌프는 이마를 감싸며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내가 지금 내 얘기 하는 건 줄 아냐? 네 얘기 하고 있는 거야!”
아돌프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까지 쳤다. 그가 보기엔 상황이 영 심각한데 아스티나는 내내 태평한 반응만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래 들어 아탈렌타 가문을 둘러싼 기류가 심상치 않았다. 누군가가 일부러 퍼트린 듯한 음해의 노래는 이제 완전히 유행이 되었고, 알음알음 아스티나에 대한 근거 없는 뒷이야기도 나돌았다.
대공의 병환은 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이 짐승이 되는 일이 말이나 되는 일이던가?
대공비가 등장함으로써 벌어진 많은 변화들은 의심받을 여지가 충분했다. 아무리 보아도 범인이 할 수 있는 일들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상하다’로 시작되었던 의문점은 날이 갈수록 실체를 더했다. 뭣 모르는 아이들도 아탈렌타의 대공비는 마녀라며 왕왕 떠들곤 할 정도였다. 고위 귀족을 향한 모욕에 자연히 기겁한 부모가 아이의 입을 틀어막는 일이 많아졌다. 대공비의 선행은 결코 퍼지는 법 없이, 소문은 점점 더 안 좋아지기만 할 뿐이었다. 누가 부러 나쁜 이야기를 퍼트리나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당사자가 저렇게 태연할 수가 있나.
아카데미에 있을 적에도 아스티나는 남에게 속뜻을 잘 내비치지 않았었으나, 지금은 더더욱 의중을 알 수 없었다. 기껏 저잣거리에 떠도는 말들을 캐물어 알아왔더니 들어 보지도 않는다. 아돌프의 걱정스러운 기색에도 아스티나는 별다른 동요를 내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주의를 환기하듯 창을 두드렸다.
“그보다 다른 얘기를 하지. 아서는 요즘 좀 어떻게 지내?”
“……대공의 사촌 말이야? 그 망나니 놈은…… 여전하지 뭐. 게으름 피우다가 헨리 경에게 엉덩이를 얻어맞거나 연무장에서 뺑뺑이를 돌거나.”
아돌프가 힘 빠진 어깨로 대답했다.
테리오드가 처음 아서에게 내린 벌은 반성문을 써 오는 일이었다. 아서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도는 인식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서는 그런 사촌 형을 골리듯 ‘헨리 경의 거시기가 소중한 이유’를 빽빽이 채워 가져왔다. 헨리는 아서의 찬사에 몹시나 감동했고, 당연히 그 표현 방식은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일이었다. 결국 테리오드는 아서의 처분을 헨리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었다.
덕택에 다른 이들이 검을 휘두르고 있을 시간에 아서는 열심히 물통을 나르며 종자 역할을 해야 했다. 아서는 누구도 함부로 일을 시킬 수 없는 신분이었기에 새로 얻은 직위는 본인에게나 다른 기사들에게나 어색하게 다가왔다. 피해 입은 당사자인 헨리만이 아서가 지나갈 때마다 눈에 불을 켜고 그를 부리려고 들었다. 한 사람이라고는 하나 그 직책이 무려 기사단장이었으므로, 아서는 트리스탄과 아탈렌타의 기사들이 섞여 훈련하는 와중에도 마른걸레로 무구나 닦고 있어야 했다.
“기사단 분위기는 어때? 좀 화합이 되기는 하나?”
“아무래도 섞여서 연습한 지 좀 되었으니까? 확실히 아탈렌타 쪽에서 여기사들을 대할 때 어찌할 바를 모르긴 하더라. 그래도 섞여서 훈련을 하니 좀 나아지기는 해.”
“많이 달라지진 않았다는 소리군?”
“뭐,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 아니겠어?”
아스티나의 지적에 아돌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였다. 쾅,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들이닥쳤다. 고개를 돌린 아스티나가 다소 얼떨떨한 음성을 내었다.
“대공 전하……?”
테리오드는 숨이 찼는지 크게 헉헉거리고 있었다. 그는 아돌프와 아스티나 사이를 살피더니, 곧 견제하듯 테이블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가 호흡을 진정시키고는 입가에 아름다운 미소를 떠올렸다.
“부인, 이만 나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좀처럼 떨어지는 법이 없는 부부를 보며 아돌프는 고개만 갸웃였다. 이상하게도 그가 아스티나와 대화하고 있으면 꼭 어디선가 대공이 나타나곤 했다. 덕분에 아돌프는 대공저에 와서 30분 이상 그녀를 독대한 적이 없었다.
의아해하던 아돌프는 순간, 테리오드의 눈에 비친 탐색의 빛을 발견하고는 소름이 돋았다.
‘설마……?’
아돌프는 자신이 지금 이성으로서 견제받은 것을 깨닫고는 그만 입을 떡 벌렸다. 그는 아스티나를 단 한 번도 연애 상대로 본 적이 없었기에 테리오드의 반응이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아스티나와 아돌프 사이에 있는 것은 이성적인 기류가 아닌, 이를테면 끈끈한 전우애 같은 것이었다.
아스티나를 사이에 둔 경쟁이라니!
그녀와의 대련을 피하기 위한 경쟁이면 몰라, 아카데미에서였다면 생각지도 못했을 반응이었다.
자연히 아돌프는 옛일을 떠올렸다. 아스티나와의 대련에서 참패하며 연무장에 발도 들이지 못하던 때, 그는 어떻게 좀 해 보라 벤자민을 구슬렸었다. 당시 벤자민은 아스티나의 친구가 되어 종종 그녀와 대련을 하곤 했기 때문이다.
결국 벤자민은 친구의 부탁을 들어 그만 아돌프를 용서해 달라는 뜻을 전했다. 아스티나는 의외로 선선히 직접 와서 사과하면 받아 주겠다고 답했다.
아돌프는 아스티나를 찾아갔을 때 들었던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통나무에게 사죄할 준비는 됐나?’
‘…….’
그때는 단순한 농담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 말에 담긴 건 표면적인 뜻만이 아니었다. 아스티나는 애초에 아돌프가 자신을 무시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었다. 아돌프가 깎아내린 것은 통나무의 명예이지 결코 그녀 본인의 명예가 아니라는 듯이.
고작 열두 살짜리 아이가 행하기엔 지나치게 귀족적인 화법이다. 이렇듯 아돌프는 아스티나를 대할 때 그녀와 자신이 수직적인 관계에 있다는 느낌을 항상 받아 왔다. 아스티나가 무언가를 일러 주면 아돌프는 그것을 배우는 식이었다.
아돌프로서는 그녀를 떠올릴 때 아름다운 추억 같은 건 전혀 생각해 낼 수 없었다. 실제로 그에겐 아스티나에게 얻어맞은 기억밖에 없었으니까. 아스티나가 미소를 지으면 그 날이 덜 맞는 날이었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면 곡소리가 나는 날이었다.
어쨌든 괜한 오해를 만들 이유는 없었으므로 아돌프는 선선히 뒤로 물러섰다. 아돌프가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어딜 가기로 했나 보지?”
“글쎄. 네 말마따나 이상한 소문이 자자하니 신전으로 가 성금이라도 바칠까 해서.”
“그것참 어마어마하게 신앙심이 결여된 이유네…….”
아돌프가 감이 안 잡힌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스티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난 원래 신을 안 믿거든.”
신을 믿었다면 나라를 세우는 데 있어 종교를 이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스티나는 카라벨라 교리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이용을 위한 배움이었다. 신의 뜻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해석하는 건 교인이 아닌 장사치다.
“부인, 저도 그렇습니다.”
옆에 있던 테리오드가 이때란 듯 끼어들었다.
저주받은 아탈렌타가의 핏줄이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도 어려웠다. 테리오드는 오래간만에 발견한 부인과의 공통점이 반가운지 들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딱히 종교를 가져 본 적은 없지만 카라벨라인으로서 국교에 일말의 존중은 있었던 아돌프는 몹시 착잡한 기분이 되었다. 아돌프가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영혼의 단짝이네, 영혼의 단짝이야…….”
“칭찬으로 듣지.”
산뜻하게 대답한 아스티나가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모자를 집어 들었다. 그것을 가볍게 머리 위에 눌러쓰고는 테리오드의 팔 위에 손을 올렸다.
둘은 아돌프를 뒤로하고 문밖을 나섰다. 아돌프는 가만히 제자리에 서서 그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여러모로 적응이 안 되는 부부였다. 아내나 남편이나 범상치 않은데 그 조합은 의외로 합이 맞으니 지켜보는 사람 입장에선 퍽 신기했다. ‘그 아스티나’가 어떻게 결혼 생활을 하려나 했는데, 막상 실제로는 꽤 잘살고 있는 것 같아 조금 안심은 되었다.
아돌프가 결혼한 여동생을 보는 듯한 아련한 기분에 젖으려는 찰나, 테리오드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아돌프를 돌아보는 테리오드의 입가엔 승자의 미소 비슷한 것이 떠올라 있었다. 매우 찰나의 일로, 곧바로 문이 닫히긴 했지만 동체 시력이 좋은 아돌프는 똑똑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돌프는 허, 하고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날이 갈수록 무게를 더하는 오해에 화가 난다기보단 그저 황당했다.
“저 양반 생각보다 유치한 사람일세…….”
* * *
“저 친구와는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테리오드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물었다. 길이 험하지 않아 마차 안은 꽤 조용한 편이었다. 그러나 평화로운 분위기와 다르게 그는 아스티나의 반응에 온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별다른 생각을 거치지 않고 선선히 사실 그대로를 읊었다.
“제가 입학했을 당시 검술반의 연무장을 이용하는 데 약간의 잡음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 친구와 결투를 했었지요.”
그 말에 테리오드가 반쯤 입을 벌렸다. 사이가 좋기에 처음부터 친했던 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살벌한 추억이 숨겨져 있었다. 그런 박해를 겪고도 후에 친구로 받아들이다니 그의 부인은 과연 배포가 컸다.
테리오드가 감탄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아돌프 경이 자신과 싸워 이기면 연무장 사용을 허락해 주겠다던가요?”
“딱히 그런 공언이 있었던 건 아니고…… 마침 절 내보내려 했던 게 아돌프라서요. 제가 거기 있는 걸 두고 보지 않을 모양새라 그냥 결투를 신청했죠.”
“이기셨습니까?”
아스티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왜 아니겠냐는 듯이.
동시에 테리오드와 아스티나 사이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테리오드가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했다.
“지금과는 느낌이 좀 다르군요.”
“지금이야 좋은 친구죠.”
테리오드는 참으로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스티나는 억지를 부리는 대공에게도 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테리오드조차 그녀의 동정으로부터 기회를 얻은 것이었지만, 똑같은 자비로움이 타인을 향하고 있는 걸 확인하자 그리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테리오드는 언제나 확인받고 싶었다. 그녀가 앞으로 사랑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확답을.
테리오드는 문득 손을 뻗어 아스티나의 손등 위로 겹쳤다. 살갗에 닿은 온기에 아스티나의 시선이 돌아왔다. 테리오드는 천천히 아스티나의 손을 들어 짧게 입을 맞췄다.
“한데 친구가 너무 많으셔서요.”
말의 마디마디 사이엔 얇게 저민 성애와 소유욕, 집착 따위의 것이 숨겨져 있었다.
가까워진 간격에 아스티나는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햇빛을 가린 탓에 그의 눈가는 그림자 져 있었다. 아스티나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테리오드의 머리칼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꼭 별 무리 같았다.
아스티나가 문득 말했다.
“덥습니다.”
마차 안은 적당히 선선했다. 마주 잡은 테리오드의 손은 딱 기분 좋을 만큼의 훈기를 머금고 있었고, 그것은 아스티나의 찬 손과 꽤나 잘 어우러졌다.
거짓인 걸 알았는지 테리오드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말했다.
“손이 차신데요.”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테리오드는 더욱 단단히 깍지를 껴 왔다. 불만스레 팔을 흔들어도 도통 놓아주질 않는다. 테리오드는 아예 아스티나의 손을 제 쪽으로 끌어와 손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아스티나가 픽 웃으며 물었다.
“또 질투하시나요?”
“한다고 하면, 더 사랑해 주시렵니까?”
테리오드의 애교 있는 응대에 아스티나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흠, 그래도 남편은 하나인데요?”
“……그건 둘이면 큰일 나는 것 아닙니까?”
“애인도 하나고.”
“그것도 비슷한 듯한데…….”
“이렇게 귀여운 남자도 하나인데.”
“…….”
그녀가 테리오드와 꽉 마주 잡은 손에 시선을 주었다. 아스티나의 입가에 언뜻 도발적인 미소가 걸렸다.
“고작 손으로 되시겠어요?”
아스티나가 자리에서 일어서 테리오드의 위로 올라탔다. 성큼 높아진 눈높이에 테리오드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아스티나를 올려다보았다. 아스티나는 양손으로 테리오드의 뺨을 감싸고는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맞닿자 테리오드도 곧 자연스럽게 혀를 얽어 왔다.
테리오드는 천천히 아스티나의 등을 쓸어내렸다. 허리를 문지르던 손길이 이어 더 아래까지 내려갔다. 하반신까지 가 닿은 손길에 아스티나가 퍼뜩 입술을 떼어 냈다. 아스티나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옷이 구겨질 텐데요.”
“……여기까지만 할까요?”
테리오드가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질척한 접촉이 끝나고 난 후엔 더한 갈증이 남았다.
아스티나는 잠시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축였다. 고민은 짧았고 허락은 빨랐다.
아스티나가 홱 창에 달린 커튼을 치며 답했다.
“아니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입술을 부딪혔다. 테리오드는 제 목덜미를 매만지는 아스티나를 완전히 끌어안았다. 올라간 치맛자락 사이로 커다란 손이 파고들었다. 삽시간에 속바지와 속옷이 벗겨졌다. 테리오드는 그것을 건너편 의자로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아스티나 역시 테리오드의 하의를 끌어 내렸다. 이미 그는 한계까지 흥분해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동 중의 관계라, 늘 ‘밤일’은 침대에서만 해치워 왔던 테리오드에게 이런 이색적인 상황은 큰 자극으로 다가왔다.
아스티나가 입은 드레스는 속에 슬립을 걸치고, 겉에 장식이 달린 화려한 본옷을 겹쳐 입는 식이었다. 가슴팍은 슬립 부분이 보이도록 끈으로 조여 묶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테리오드는 끈을 지탱하고 있던 리본을 아예 당겨 풀어 버렸다. 헐거워진 끈 사이로 안쪽의 홑겹 옷이 드러났다. 그것을 한꺼번에 아래로 끌어 내리자 곧바로 맨살이 드러났다.
테리오드는 그대로 아스티나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유두를 입 안으로 빨아들이자 아스티나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목을 끌어안으며 신음을 흘렸다.
“흐으…….”
갑작스러운 교접은 아스티나 역시 흥분하게 했다. 그녀의 하반신은 이미 애액을 흘려보내며 테리오드를 받아들일 준비를 마친 채였다.
아스티나는 그의 성기를 입구 위로 맞추고는 천천히 내려앉았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남성기가 좁은 입구를 벌리고 파고드는 감각이 선연했다. 아스티나는 제 안을 차지해 가는 기둥을 느끼며 몸을 잘게 떨었다. 테리오드를 받아들이는 게 아무래도 다소 부담되는 일이었던지라, 둘은 관계의 시작 즈음 항상 약간의 시간을 소요해야 했다.
그 순간 도로의 요철로 마차가 크게 덜컹였다.
“아흑……!”
삽입에 유예를 두었던 일이 무색하게도 테리오드의 것이 단숨에 안으로 박혀 들었다. 아스티나는 그만 숨을 꺽꺽거렸다. 이물감이 원인이었지만, 그의 물건이 성감대를 정확히 문지른 탓도 있었다.
아스티나는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섰다가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뭉근한 쾌감이 점차 허리를 타고 올랐다. 아래에서 인상을 찡그린 채 거친 숨을 쉬던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의 입술을 짧게 빨아들였다. 그가 아스티나의 얼굴을 살피며 물어 왔다.
“힘들, 진 않습니까?”
아스티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더욱 움직임을 빠르게 했다. 홍조가 잔뜩 어린 두 뺨은 그녀가 느끼고 있는 쾌감을 짐작하게 했다.
테리오드 역시 더 이상 그녀를 살필 정신이 없었다. 그의 입술이 아스티나의 귓불을 덮고, 이내 농밀하게 여린 살을 훑었다. 등허리는 어느새 흐르는 땀으로 끈적해져 있었다. 테리오드는 그녀의 엉덩이를 쥔 채 아래에서 거칠게 쳐올렸다. 마차의 덜컹임, 주변을 지나가는 행인들의 소리가 아득했다. 아스티나가 그의 옷자락을 쥐어뜯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흣, 아아……!”
쏟아지는 신음을 참을 수도 없었다. 입술을 깨물어도 임시방편일 뿐, 틈 사이로 조금씩 새어 나왔던 소리가 이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쾌감으로 머리가 흐물해질수록 다리에도 힘이 풀렸다. 아스티나가 신음을 참기 위해 이를 앙다물자 테리오드는 아예 그녀에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아랫입술을 혀끝으로 핥고는 완전히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적어도 그녀의 입 안을 차지하고 있는 동안에는 다른 소리가 비집고 나올 틈이 없었으니까.
“흐, 으, 으응……,”
아스티나 역시 그의 혀를 다정히 빨아들여 주었다. 테리오드는 어쩌면 그녀가 관계 중 입을 맞추는 것을 대단히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건 저 역시도 마찬가지인 일이었지만.
테리오드는 자신의 어깨 아래로 미끄러지던 그녀의 손을 붙잡고는 제 뺨을 감싸게 했다. 맞닿는 시선이 유독 그를 흥분케 했다. 그는 제 움직임에 따라 일그러지는 그녀의 표정을 진득하게 눈에 담았다.
“아, 으응, 아아!”
도로의 요철로 다시 바퀴가 튀어 올랐다. 아스티나는 그만 비명과 같은 신음을 내질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얕게 들썩이던 움직임이 날카롭게 제 성감을 찍어 눌렀다. 아스티나는 그만 완전히 테리오드의 위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가 테리오드를 재촉하듯, 혹은 말리듯 천천히 손을 뻗었다. 테리오드는 그것이 저를 저지하게 두는 대신 그녀의 검지를 물었다. 손가락 마디를 빨아들이는 혀가 사뭇 음란했다. 아스티나는 무심코 그의 아랫입술을 엄지로 문질렀다. 테리오드가 그녀의 허벅지를 힘 있게 쥐어 온 것과 동시였다.
그의 움직임이 이보다 빠를 수는 없다 싶을 만큼 거칠게, 그리고 속도 있게 변했다. 아스티나는 거의 울음소리를 내며 정신없이 테리오드에게 매달렸다. 테리오드는 쾌감으로 무너지는 아스티나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욕설을 짓씹었다. 저로 인해 절정을 맞는 그녀를 볼 때면 극심한 흥분감이 그를 어지럽게 했다.
“아아!”
절정은 평소보다 이르게 찾아왔다. 아스티나는 그의 위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채 한참 숨을 몰아쉬었다. 뻐근한 허벅지도 아팠고 땀으로 젖은 몸은 찝찝했으나 도저히 차림새를 정돈할 정신이 없었다.
“도착까지 얼마…… 안 남았을 텐데.”
아스티나가 앓는 소리를 내며 지워진 입술을 문질렀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를 일으켜 준 다음 벗어 놓았던 속바지로 대충 뒷정리를 했다. 다시 입을 수 없는 물건이 되었으므로 속바지는 구겨 바닥으로 던졌다. 그나마 속옷까진 버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치마의 폭이 넓고 커 들킬 걱정은 없을 듯했다.
아스티나는 드레스의 윗부분을 추슬러 여몄다. 땀으로 젖은 앞머리와 번진 화장만 빼면 전과 그리 다를 건 없어 보였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가 옷을 정돈한 것을 확인하고는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더운 공기가 훅 빠져나가며 그제야 좀 시원해졌다. 그리고 이성도 함께 돌아왔다.
잠시 침묵하던 테리오드가 약간의 자괴감이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마치…… 짐승 같군요.”
욕정을 참지 못하고 마차 안에서 일을 벌이고 말다니. 심지어 그들은 신전에 기도를 드리러 가는 중이었다. 그토록 질색했던 짐승 취급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그를 들쑤셔 불씨를 지폈던 아스티나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정말 둘 다 종교가 없길 망정이네요.”
* * *
신전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머지않은 때였다. 당연히도 정사의 흔적은 모두 말끔히 지워 낸 후였다. 테리오드와 아스티나는 성역에 걸맞은 금욕적인 얼굴을 하고 마차에서 내려섰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오는 동안 있었던 일을 감히 짐작도 하지 못할 모습이었다.
미리 언질을 받은 신전 측에선 안내를 도울 사제를 미리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호감형인 외모의 사제가 기다렸다는 듯 대공 부부에게로 다가섰다. 그가 친절함을 한껏 내비치며 인사했다.
“그대의 모든 선택에 언제나 카라벨라의 비호가 깃들기를. 카라벨라 신전에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리 나와 반겨 주시니 영광이군요.”
“영광이라뇨, 당연한 일을요. 안으로 들어가시죠. 대신관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가 통로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기도가 표면적인 방문 목적이긴 했으나 신전이 정말 기대하는 건 다른 것이었다. 자연한 결과로 아스티나와 테리오드는 기도실이 아닌 접견실로 먼저 안내받았다.
안쪽에선 지긋한 나이의 대신관이 대공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를 건넨 그가 대공 부부를 편한 자리로 안내했다. 대신관이 털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는 길이 불편하진 않으셨나 모르겠습니다.”
“입구가 혼잡했는데 안내를 보내 주신 덕에 편하게 들어왔습니다. 예전에 방문했을 때보다 신전이 많이 북적이더군요.”
테리오드가 그리 대답하며 대신관의 손을 맞잡았다. 테리오드 역시 신전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귀족 중 하나였으나, 그는 자연스럽게 이전의 방문을 언급했다. 친밀한 태도에 대신관의 얼굴에 어렸던 긴장이 풀어졌다. 관심에 익숙하지 않았던 교단은 근래 다수의 귀족들을 상대하며 곤욕을 겪곤 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편하게 말문을 트여 주자 분위기가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안심한 대신관이 머쓱하단 듯 뒷목을 쓸었다.
“하하, 요즘 신도가 많이 늘어서 말입니다. 유례없는 호황이죠.”
“이제 와서라도 국교가 주목받게 되어 다행입니다.”
테리오드의 눈빛에선 신실함이 흘러넘쳤다. 아돌프의 앞에서 무교를 선언했던 것과 달리 부부는 자연스럽게 열렬한 신도를 연기했다. 지적할 것을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응대에 아스티나는 내심 앞으로는 테리오드에게 아무런 지도가 필요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곳에서 그리 오랜 시간을 버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므로 아스티나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앞으로도 신의 가르침을 위해 힘쓰실 수 있으시도록, 저희 가문에서 약소하지만 약간의 금전을 후원 드리고 싶습니다만.”
돈 이야기에 대번에 사제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스쳤다. 대공비가 마녀라는 의혹이 드높아진 와중에도 신전에선 성금을 거절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도 몇몇 순박한 눈빛의 사제들이 지나가며 흘끔이긴 했으나, 그 역시 찰나의 일이었다. 적지 않은 금액으로 성의를 표시하자 안 그래도 친절한 응대를 보이던 대신관은 완전히 굽실거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리 봐도 이상적인 성직자와는 영 거리가 있는 집단이었다.
대신관이 잠시 종이를 가지러 사라진 사이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의 귓가에 대고 속닥거렸다.
“신을 모시는 자들치고 속세의 물건에 지대한 관심이 있군요.”
“워낙 가난했던 교단이라 그렇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줄곧 예산 문제로 골을 썩여 왔을걸요. 아마 교황은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일 겁니다. 졸부라는 게 문제지만.”
아스티나의 혹독한 평가에 테리오드가 입을 꾹 다물고 웃음을 참았다. 눈앞의 부부가 자신의 상관을 욕보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대신관은 만면에 친절함을 머금은 채 돌아왔다. 그가 종이 위에 이것저것을 적어 내리다 말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대공비가 입을 가리고 옅은 하품을 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신전을 방문하는 건 가주들에게 있어 업무의 일환이었다. 새로이 등장한 강자를 견제하기 위해, 혹은 잘 보이기 위해. 저마다의 이유는 달랐지만 어찌 되었든 그들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부지런하게 신전의 문턱을 드나들었다.
아버지를 뒤따라온 영애들은 길어지는 이야기를 지루해하기 십상이었다. 대신관은 대공비의 나이가 고작 열아홉이라는 것을 상기하고는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손녀를 보는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아이고, 재미없는 숫자 얘기에 심심하진 않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원하신다면 다른 사제를 불러 구경을 도와드리도록 하지요.”
아스티나의 입가에 반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선선히 대답했다.
“그럼 그렇게 할까요?”
“예, 그럼 안내를 부탁할 만한 아이가…….”
“아니요. 다들 바쁘실 텐데 귀찮게 해 드릴 수는 없죠.”
부드럽게 거절한 아스티나가 이어 테리오드의 어깨를 쓸었다.
“대공, 이야기를 마치고 기도실 쪽으로 오세요. 저는 저희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 기도드리고 있겠어요.”
아스티나가 그리 말하며 테리오드에게 뺨을 내밀었다. 테리오드는 그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아쉬운 기색으로 아스티나의 손을 놓아주었다. 부부의 애정 행각에 대신관은 큼큼 헛기침을 내뱉었다.
아스티나는 들뜬 신부의 얼굴을 벗으며 방을 나왔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움직임엔 망설이는 기색이 없었다. 누군가의 안내 따윈 필요치 않았다. 이 신전의 설계를 지시한 게 바로 그녀였으니까.
아스티나는 기도실을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혼잡한 입구와 달리 평민들의 출입이 제한된 안쪽은 조용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도중에 발을 멈춰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기억하고 있던 지리와 달라져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거의 잊고 있었던 과거의 모습을 발견한 탓이다.
아스티나는 벽면에 세워진 조각상을 올려다보다가는, 문득 입을 열었다.
“잘 만들었군.”
색채와 온기가 없는 백색의 낯은 마치 거울을 보는 듯했다. 그대로 지나치려 했으나 뒤편에서 예상치 못한 설명이 끼어들었다.
“초대 황제인 마티나 여제입니다. 이 신전을 짓도록 지원한 게 황실이었기에, 교단 측에서 그녀의 헌정을 기념하고자 조각상을 세워 둔 것이지요.”
아스티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편엔 금발과 녹안을 가진 미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가 싱긋 미소 지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수석 사제 데니스 조르단입니다.”
지난번 테리오드와 외출했을 때 아탈렌타의 보고를 앗아 갔던 남자였다. 아스티나는 당연히도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뒷짐을 쥔 채 천천히 다가와 아스티나의 옆에 섰다. 그는 아스티나의 시선이 향한 방향으로 천천히 눈을 돌렸다. 그 끝엔 마티나 여제의 얼굴이 있었다. 그가 감탄하듯 말했다.
“대단한 미인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글쎄요, 얼굴 말고도 할 이야기가 많으신 분이었던 것 같은데요.”
아스티나가 따분한 기색으로 응대하자 데니스가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입가엔 곧 다시 친절한 미소가 걸렸다.
“물론 그렇지요. 말씀드렸듯 이 신전만 해도 그녀의 유산이니.”
아스티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던 데니스가 이내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물었다.
“오늘 대신관님을 찾아오신 분이라면…… 혹시 대공비 전하이십니까?”
아스티나는 헛웃음을 입 안으로 삼켰다. 세상 굴러가는 일에 대단히 관심이 많은 듯한 저 남자가 대공비의 얼굴을 모를 리가 없었다. 굳이 우연한 만남을 가장하는 이유는 뭘까.
“알고 말을 거신 줄 알았는데요.”
“몰랐습니다. 길을 잃으신 듯해 도와드리려 했던 것이라.”
“안내는 되었습니다. 벨라체 생도들은 신전을 오갈 일이 많답니다. 기도실 위치 정도는 이미 외우고 있어요.”
“그렇군요. 그럼 지루하시지 않게 재밌는 이야기라도 들려 드릴까요?”
데니스는 계속해서 살갑게 말을 붙여 왔다. 그가 아스티나가 구경하고 있던 조각상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혹 마티나 여제가 레타 집시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제 마티나의 드높은 무위조차 그저 역사로 남아 따분한 책 속으로 파고든 시대였다. 책 속의 줄글을 몇 읽어 본 자라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겠으나 무지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명문 벨라체 출신에게 던지기엔 무시에 가까운 질문이 아닌가. 아스티나가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모를 리가 없지요.”
“그렇다면 레타 집시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도 아십니까?”
데니스가 연이어 질문했다. 공통적인 관심사로 공감이라도 이끌어 보려는 걸까. 아스티나는 무심한 음성으로 오래된 핍박의 단어를 말했다.
“아레타인들은 악마의 자식이라는 오래된 설화를 말씀하시는 건지요.”
“아시는군요.”
“아쉽게도 카라벨라에 대적할 타국은 이 대륙 내에 없어서요. 벨라체의 정치학과는 대개 과거의 것들을 가르친답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 옛날, 아레타인들에겐 신비한 힘이 있었습니다. 대개 여인들에게만 이어지던 것이었으나, 드물게도 남성에게 발현된 때도 있었답니다. 뭐, 어쨌든 매우 드문 일이었으므로 아레타인들을 이끄는 지도자는 대개 여성들이었죠.”
아는 이야기는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아스티나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출신이 같은 마티나도 그러한 힘으로 권좌를 얻었으리란 말씀이신가요?”
“그럴 수도 있지요.”
“대단한 일이로군요.”
“흠, 아레타인들이 남성을 어떻게 배척해 왔는지 아신다면 아마 평가가 조금 달라지실 겁니다.”
“그건 지금의 카라벨라와 정확히 반대가 아니었을까요?”
다수의 부계 사회를 흡수하며 마티나가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던 것들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기엔 그녀는 오랜 전쟁으로 몹시 지쳐 있었고, 더 이상 무언가를 이루고 싶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녀의 근간이었던 레타 집시들은 소수였으며 그마저도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카라벨라는 대륙의 이름을 합쳤을 뿐, 어쩔 수 없이 대부분 이전과 비슷한 모습을 띠어야 했다.
아스티나의 지적에 데니스가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이점을 보는 성별인 만큼 데니스는 카라벨라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큰 문제의식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뭐, 그렇게 말씀하시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데니스가 선선히 인정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아스티나를 응시했다.
“어쨌든 악마의 딸이라는 여자만이 유일하게 오를 수 있었던 자리였다는 말씀입니다, 제위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군요.”
“악마의 손은 생각보다 살결이 부드러운지도 모른다는 소리지요.”
아스티나는 그제야 눈을 돌려 데니스를 응시했다. 데니스가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귓가를 감싸는 소리가 달콤하다고, 그게 악마의 속삭임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랍니다.”
아스티나는 그가 마티나를 통해 대유하고자 하는 존재가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바로 이시스를 말하는 것이다. 데니스는 지금 황녀와 대공비에게 남모를 연결이 있는지 살피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천천히 그의 얼굴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데니스는 자만 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으나, 내내 제자리에 있는 입꼬리에선 긴장이 읽혔다. 그는 정말 무언가를 알고 있어서 이런 질문을 꺼낸 게 아니었다. 이건 혹시 모를 위험을 미연에 감지하기 위한 탐지였다. 그렇다면 가지고 있는 패를 전부 드러내 보일 필요는 없다.
아스티나는 그저 고개를 갸웃여 보였다.
“사제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지 요지를 잘 모르겠군요. 마티나 여제가 악마의 딸이라면, 그녀와 손을 잡아 이득을 본 자는 또 누구라는 말씀이십니까?”
데니스의 눈빛에 약간의 경멸이 스쳤다. 이런 대유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여자에게 너무 고난도의 화법을 썼나 싶었던 탓이다.
“제가 말씀드린 건 여제가 아닌…….”
그가 좀 더 직접적인 방향으로 말을 정정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였다. 아스티나가 선명한 음성으로 먼저 그를 가로막았다.
“그녀에게 제위를 물려받은 엘시어 폐하일까요? 혹은…… 그녀의 지원을 받아 이 신전을 세운 카라벨라 교단?”
자신의 소속이 언급되자 데니스의 얼굴에 당황이 떠올랐다. 아스티나는 불쾌한 낯을 숨기지 않으며 픽 웃음을 터트렸다.
“어느 쪽이든 상당히 위험한 발언임은 다르지 않군요.”
데니스는 황급히 제가 꺼낸 말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대공비 전하, 제가 말씀드린 건 마티나 여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굴 이야기하신 것인지요?”
“…….”
낭패였다. 데니스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서 이시스와 연줄이 있느냐 대놓고 대공비를 다그칠 수는 없었다. 얼간이가 아니고서야 곧이 사실을 고해바칠 자는 없을 테니까.
적당히 이 정도 비유를 하면 상대 쪽에서 먼저 당황한 티를 낼 줄 알았는데, 곤경에 처한 건 오히려 자신이 되었다. 반면 아스티나는 여유로웠다. 그녀는 감탄하듯 턱을 쓸며 눈앞의 조각상을 올려다보았다.
“악마의 딸을 조각한 상을 놓아 기념한 신전이라, 재밌군요.”
그녀는 그대로 눈을 굴려 데니스를 빤히 응시했다.
“신성모독을 행한 사제를 목도한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대로 대신관님께 돌아가 말씀드릴 수도 있고, 혹은 황제 폐하께 아뢰어 그분의 선조를 욕보인 그대를 질책하게 할 수도 있겠어요.”
아스티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이어 물었다.
“재밌나요?”
“예?”
“아까 제게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이런 처분을 받아도 좋을 만큼 방금의 말이 재밌었냐고 물었어요.”
데니스는 결국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그는 정말 그럴 의도가 없었다는 것마냥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런, 어디까지나 비유였답니다. 혹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지요. 맹세코 누군가를 욕보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저 마티나 여제의 출신에 관한 비화를 들려 드린 것뿐이랍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날카로운 눈빛을 풀지 않았다. 그녀가 매우 유감이라는 듯 검지로 턱밑을 가볍게 쓸고는 말했다.
“데니스 사제님, 말을 하실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기관이 어딘지 아십니까?”
데니스가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하겠다는 듯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무의식적으로 아스티나의 입술을 향해 있었다. 혀를 잘 놀리라 경고라도 하는 것인가?
그러나 아스티나는 손가락을 들어 제 관자놀이를 건드렸다.
“머리입니다. 사제님, 말씀을 하실 땐 부디 생각이란 걸 하세요. 신학 공부를 오래 했으니 당연히 유식하실 텐데, 제가 그만 이곳의 교육 수준을 오해하게 되지 않습니까?”
데니스는 자존심이 상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수그렸다. 책을 잡힌 입장에서 사죄 외에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유의…… 하도록 하지요.”
“소란을 벌일 생각은 없으니 오늘은 이것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실례를 저지르게 되어 면목이 없습니다.”
“말뿐인 사과는 이만 되었습니다. 이만 가 보셔도 좋아요. 기도실까지 따라오실 필요는 없으니.”
아스티나는 한심하단 듯 그를 흘기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 위해 연기한 조롱이었고, 데니스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어졌다. 데니스는 불만을 드러내어 일을 그르치는 대신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더 책을 잡고 싶었던 아스티나로서는 몹시 아쉬운 일이었다.
데니스 역시도 그녀를 그냥 보내 줄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는 좀 더 안전한 방법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한데 대공비 전하…… 목소리가 왠지 귀에 익은데, 혹시 저와 전에도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데니스는 회심의 일격을 꺼내 들었다. 대공비를 짓누를 증거는 다름 아닌 그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당황하지 않고 매끄럽게 응대했다.
“글쎄요, 잘 기억나진 않지만 오가며 한번 마주쳤을 수도 있겠지요.”
그에 데니스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혹 신전에 뭔가를 찾으시러 오신 것은 아니고요?”
그가 앗아 간 도자기를 말하는 것이었다. 아스티나는 웬 생뚱맞은 소리를 하느냐는 듯 불쾌히 인상을 썼다.
“아닙니다만.”
아스티나는 그대로 먼저 발길을 돌렸다. 빠르게 멀어지는 걸음에선 냉랭함이 묻어났다. 데니스는 그녀의 구두 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데니스가 입술을 짓씹으며 중얼거렸다.
“저 개 같은 년이…….”
아니다. 보기에 고깝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데니스가 의도한 대로였다. 데니스는 애써 숨을 진정시키며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이 의혹을 부정함으로써 그녀는 사들인 물건의 용도를 의심받아도 이상하지 않게 되었다.
제 목을 죈 줄도 모르고 떠나가는 대공비를 보며 데니스는 주먹을 틀어쥐었다. 기류는 자신의 편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오늘의 모욕을 그냥 넘길 생각이 없었다. 이전에 프리모의 명으로만 대공비를 음해하려고 했었다면, 이제는 그의 진심도 함께 담겼다.
그가 저주처럼 읊조렸다.
“황녀를 암살한 죄로 유폐되고도 그리 자신만만할 수 있을지 어디 한번 두고 보지.”
* * *
“나디아 님, 오늘 정말 아름다우세요.”
“어머, 오늘만 그걸 몇 번째 말하는 거니? 듣고 있는 내가 다 부끄럽구나.”
시녀의 칭찬에 나디아는 부끄럽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러나 시녀의 말은 전혀 거짓이 아니었다. 본래 예쁜 생김새이긴 했으나, 오늘의 그녀는 평소보다 더 아름다운 외양이었다. 오늘 참석하는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공을 들여 꾸민 덕분이었다.
오늘은 프리모가 후계자로 공표될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본래 프리모가 후계자로 지목받기로 한 게 수확제 무도회의 첫날이었던 걸 생각하면 상당히 늦은 시점이었다.
본래 후계자의 잔을 넘겨주며 모두에게 발표하는 것이 전통이었으나, 황제는 이번만은 수여식과 공표하는 날을 분리했다. 교황이 후계자의 잔을 전달한 바로 다음에 황제가 프리모를 황태자로 인정하는 것은 모양새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교황의 축사 바로 뒤에 황제가 오른다는 것은, 마치 카라벨라 교단이 우위에 있다는 듯 비칠 여지가 있었다.
덕분에 시일이 늦어지긴 했지만, 후계자가 바뀔 일은 없었으므로 나디아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돌고 돌긴 했어도 모든 것이 다 잘 풀려 가고 있지 않은가?
“황녀님께서도 좋아하실까?”
“물론요, 그분은 항상 나디아 님을 예뻐하시잖아요.”
그 대답이 못 미더웠는지 나디아는 시녀에게 손거울을 빌려 제 얼굴을 한번 점검했다. 본식이 시작될 시간은 한참 후였지만 나디아는 이시스 황녀의 부름으로 이르게 입궁한 참이었다. 이시스 황녀와의 대면은 언제나 그녀를 긴장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나디아는 앞으로도 계속 만날 이시스와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시스 황녀는 프리모의 하나뿐인 동복 누이인 데다, 프리모의 좋은 정치적 동반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시스 황녀님 앞에선 항상 행동을 조심하렴. 네가 프리모 전하의 결혼 상대로 점찍어진 것도 다 황녀님께서 너를 눈여겨봐 주셔서야.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공손히, 알겠니?’
나디아의 어머니가 누누이 당부하는 말이었다. 실제로 나디아의 어머니는 사위가 될 프리모보다는 이시스에게 더 공을 들이곤 했다. 아벨라르 백작가의 세가 모자란 것은 아니었으나, 황제의 정비 자리를 꿰차기엔 다소 아쉬운 신분인 것도 사실이었다. 지도자가 외척의 세력을 축소시키기기 위해 부러 한미한 가문의 영애와 혼인하기도 하나, 이번은 그런 경우도 아니었다. 나디아의 행운은 지금의 정치적 상황과 기묘하게 맞물려 이루어진 것이었다.
현황제인 에셀레드 폰 피델리오의 위로는 총 두 명의 황제가 있었다.
남부 출신이었던 엘시어 폰 피델리오는 여러 여자와 혼인했으나, 세력을 고루 등용하기 위해 정비로는 북부 출신을 들였다. 하지만 에델린 황후에게서 얻은 아들은 모두 어릴 때 사망했다. 그로 득을 본 건 후비인 카테리나 황비였다. 서부 출신이었던 카테리나 황비는 아들을 출산하며 단번에 후궁전의 실세로 떠올랐다. 에델린 황후는 더 아들을 낳지 못했고, 결국 장자였던 카테리나 황비의 아들이 후계자 자리에 올랐다. 그것이 두 번째 황제인 루제오 폰 피델리오다.
피델리오 2세는 서부 출신인 어머니의 청을 들어 그녀의 고향 세력을 등용했다. 그는 후계자 시절 일찍이 어머니가 점찍어 준 여인을 정비로 삼기까지 했다. 하지만 피델리오 2세가 즉위하기 직전, 카테리나 황비는 태황후 자리를 노리고 에델린 황후를 암살하려 하다가 실패하며 축출되었다.
당연히도 루제오는 어미의 죄를 모르쇠로 일관했다. 행적이 영 미심쩍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심증에 불과했다. 다른 마땅한 후계가 없었으므로 다행히 루제오는 권좌를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세력은 에델린 태황후의 눈치를 봐야 할 만큼 축소되었다.
이후 에델린 태황후는 루제오의 혼약까지 참견하며 북부 출신의 클로에를 후궁전으로 밀어 넣었다. 피델리오 2세는 태황후의 압력으로 합방을 피할 수 없었고, 이후 클로에 황비가 아들을 낳음으로써 이번엔 전대와 반대의 상황에 놓였다.
그 클로에 황비의 아들이 바로 에셀레드 폰 피델리오, 즉 현황제였다.
에셀레드는 적자가 아니었으므로 정비 소생의 황자와 대단한 접전을 거쳐야 했다. 그는 북부 세력의 도움으로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힘겹게 황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이사벨 황후는 그 도움의 일등 공신인 제스퍼레오가 출신으로, 그녀와의 혼약은 정치적 조약의 결과였다.
나디아가 속한 아벨라르 백작가는 바로 그 제스퍼레오가의 친척 가문이었다. 혈연으로 이어진 긴밀한 유대는 지난 몇십여 년간 삐걱이지 않고 지속돼 왔다. 황후의 친척에 황제의 군마라는 깊은 인연이 겹쳐져 아벨라르 백작가는 차기 황후를 배출하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프리모의 책사 격인 황녀가 강력히 밀어붙여 이루어진 혼사이니, 나디아에게 있어 이시스는 평생의 은사라고 봐도 좋았다.
나디아는 자신에게 닥친 이 기막힌 신분 상승의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그다지 야망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물욕과 명예욕은 다른 궤에 있었다.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여자가 될 수 있다는데 그 누가 혹하지 않으랴?
나디아도 프리모의 방탕한 사생활을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나디아의 어머니는 철 모를 시절 잠깐 스쳤다 지나가는 바람기 정도는 감수해야 하며, 혼인과 동시에 자연히 사라질 것이라 말했다. 그러고는 여자가 잘하면 남자가 밖으로 나돌지 않는다는 당부를 덧붙였다.
나디아는 자신이 이성에게 나쁜 대접을 받을 만큼 모자란 여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아카데미에서 학업을 이수하느라 프리모와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진 못하지만, 정식으로 식을 올리기만 하면 충분히 사랑받을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에 타인이 반드시 같은 보답을 돌려줄 것이라 생각할 정도로는 아직 순진했다.
나디아는 긴장한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황녀는 언제나처럼 친절한 미소를 띤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디아의 얼굴에 자연스럽게 화답의 미소가 떠올랐다.
이시스는 나디아에게 있어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차기 황후로 예정되며 나디아 역시 혹독한 교육을 거쳤지만, 이시스 황녀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름다운 외양에 교양 있는 말씨, 명석한 두뇌까지. 타고난 기품이란 것은 바로 황녀를 두고 말하는 게 아닐까.
찻잔을 든 이시스의 손끝을 멍하니 응시하던 나디아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이시스가 그녀에게 무어라 말을 건네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
무의식적인 반문 후, 곧장 나디아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대화에 집중하지 않고 있었다는 티를 내다니. 그야말로 실례 중의 실례였다. 나디아가 송구스럽단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황녀님, 제가 그만 말씀을 놓쳤어요.”
보통의 영애라면 드러내지 않을 실수였다. 기실 나디아는 중책을 맡기엔 지나치게 마음이 여린 편이었다. 그러나 이시스는 나디아를 질책하는 대신 다정하게 얼렀다.
“아니야. 내 이른 부름 탓에 잠을 방해받아 그런 것 아니겠나? 오히려 내가 미안하군.”
가식만으로 지어낸 배려는 아니었다. 이시스가 나디아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놀랍게도 호감에 가까웠다. 이시스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이시스만큼 본심을 잘 숨기고 있는 자도 또 없으니 이는 어쩌면 동족 혐오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디아의 의중은 그야말로 투명했다.
나디아가 만일 황실의 일원으로 들어온다고 해도 과연 제대로 버틸 수나 있을까. 지난번 벨리타가 했던 예언처럼, 이시스가 주선한 혼담은 나디아의 인생을 끔찍하게 만들 뿐일 것이다. 새 신부는 신혼 첫날부터 신랑의 애정을 포기해야 할 테니 말이었다.
“내 오라비이지만 그분은 그다지 안살림엔 관심이 없는 분일세. 지금은 내가 내궁 살림을 도맡고 있지만 황태자비가 된 후엔 그대가 넘겨받아야 할 거야. 그 외에도 여러 일들을 그대가 보필해 주어야 하지. 오라버니가 놓치는 게 있다면, 그대가 챙겨야 한다는 말일세. 아마 무척이나 고될 거야.”
그리 말하며 이시스는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관자놀이를 짚은 자세에선 옅은 피로감이 묻어났다. 나디아는 이시스의 그러한 태도가 오라비의 혼사에 묘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나디아는 용기를 내어 건너편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이시스의 옆으로 가 앉았다. 이시스는 얼떨떨한 눈으로 제 양손을 부둥켜 잡는 나디아를 응시했다.
“괜찮습니다, 황녀님. 전 누구보다 열심히 할 자신이 있어요. 그리고…… 너무 외로워 마세요.”
“외롭다니?”
이시스의 의아한 물음에 나디아가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하나뿐인 오라버니의 혼사가 머지않았으니 감회가 남다르시리라 생각해요. 부디 황녀님의 형제가 어디 멀리 떠나는 게 아니라, 그냥 여동생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라 여겨 주세요. 제가 앞으로 자매처럼 더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나디아가 살갑게 말을 붙였다. 이시스는 그제야 나디아의 뜻을 이해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매라?”
“물론, 저를 정말 가족같이 대하긴 힘드시리라 생각해요. 하지만 황녀님께서 프리모 전하의 힘이 되어 주셨듯이, 저도 황녀님께 보탬이 되어 드리고 싶어요. 지금 제게 별다른 힘이 있는 건 아니지만…….”
말끝을 흐리며 나디아가 얼굴을 붉혔다.
참으로 동화 속 착한 공주님 같은 마음씨다. 그러고 보니 아벨라르 백작가는 가족들 사이가 몹시 화목한 편이었다. 특히 나디아의 오라비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여동생을 끔찍이 아껴 거의 업어 기른 수준이라고 했다. 여러모로 프리모와는 전혀 접점이 없었다. 이시스는 그만 고개를 뒤로 젖히며 파안하고 말았다.
세상에, 프리모와의 형제애라니! 고작 그런 것을 걱정해 주고 있었단 말인가?
그러나 이시스는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의 동심을 비웃는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흠, 자매라……. 그건 내가 아주 오래 잊고 있었던 말이군.”
이시스의 말에 나디아는 자연히 황좌를 노리다가 축출된 다른 황녀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이시스에게 있어 같은 피가 흐른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모두 어미가 다르니 그마저도 반쪽에 그쳤을 테고 말이었다.
나디아가 머쓱하게 손을 거둘 때였다. 이시스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황녀의 손아귀 힘은 생각보다 거셌다. 자국이 남을 듯했지만, 나디아는 그것을 쳐 내는 대신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이시스는 나디아와 한 뼘 정도의 간격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나디아는 이시스의 눈빛이 평소보다 차게 식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시스가 은밀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나디아 영애, 그거 아나? 사실 나에겐 어릴 적에 죽은 여동생이 하나 있네.”
“예? 정말이요?”
이사벨 황후에게 다른 손이 더 있었단 말인가. 미처 들어 본 적 없는 이야기에 나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시스는 더 간격을 좁혀 나디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진득히 자신을 훑는 날 선 눈빛에 나디아는 산 채로 해체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그러고 보면 꼭 그대와 닮았어. 어리고 순수하고, 약한 데다…… 무엇보다도 정이 많았지.”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그래, 오래전에 죽은 동생이거든. 그때만 해도 이 황궁에 아이가 어찌나 많았는지! 그 애는 누군가에게 언급될 만한 존재감도 없었지.”
나디아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츠려 주먹을 쥐었다. 나디아가 홀린 듯이 물었다.
“그분은 어쩌다 어린 나이에…….”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그 애가 왜 죽었을까? 그건 정말이지 의미 없는 죽음이었어서, 지금 와 생각해 보면 허탈하기까지 하군.”
이시스의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시스가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모른다는 것은, 힘이 없다는 것은 그런 걸세. 내 목숨이 오직 타인에게만 쥐여져 있다는 것! 어느 순간 도살당해도 본인은 그 의미도, 이유도 알 수가 없는 게지.”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가 안 가요.”
이시스는 나디아를 놓아주었다. 나디아는 그제야 멈췄던 숨을 들이켰다. 이시스는 방금 전과 상반되는 말끔한 태도로 말을 맺었다.
“지금 그대는 아마 그것이 대체 어떤 기분인지 체감할 수 없을 거라네. 그러니 그대는 무슨 일이든 아랫사람보다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해. 지배자의 작은 결정도 피지배자에게는 큰 영향을 끼치는 법이지. 그래서 권좌란 충분히 자격을 갖춘 자만이 가지는 것이 맞아.”
이시스의 눈에 처음의 다정함이 담겼다. 이시스가 상냥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대가 현명한 선택을 내린다면, 나 역시 그대와 아주 좋은 사이로 남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마치 자매처럼 말일세.”
“제가…… 도움이 될 일이 있을까요?”
현명한 선택이란 말에 나디아가 기민하게 되물었다. 이시스는 매력적인 눈웃음을 띠우며 화답했다.
“혹 그대는 대공비가 마녀라는 소식을 들었나?”
“그건 질 나쁜 헛소문이 아니었나요? 사교계에 매력적인 새 인사가 등장하면 언제나 구설수에 휘말리곤 했으니까요.”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네. 한데 대공비와 대화할수록 기분이 묘해. 무언가 자꾸 잊게 되는 듯도…… 만남을 가진 날엔 더 피곤해지는 듯도 하고 말이야.”
이시스의 말에 나디아의 표정도 따라 심각해졌다. 이시스가 곤란하다는 듯 제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나도 이것이 단순한 기분 탓에 불과했으면 좋겠군. 하지만 뭐든지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안 그런가?”
“물론이지요.”
“아직 심증에 불과한지라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기가 쉽지 않네. 하여 꺼내는 말인데, 혹시 그대가 대공비의 동태를 대신 살펴 줄 수 있겠나?”
“대공비의 동태요?”
“그래. 오늘은 오라버니가 황태자위에 오르는 영광스러운 날이 아니던가? 드디어 고지에 다다랐는데, 혹여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까 심히 마음이 불안하군. 그대가 내 심려를 조금 덜어 줬으면 좋겠어.”
그대의 부군이 될 오라버니를 위해서 말이야. 이시스가 은근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나디아의 얼굴에 결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가 거세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황녀님께 이렇게라도 도움을 드릴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에요.”
“저런, 굳은 어깨 좀 풀게. 그대는 내 오라비와 결혼할 예정이니, 곧 내 가족이기도 하지 않은가?”
나디아의 낯에 안심이 더해졌다. 대공비가 괴이한 존재라 하니 괜한 긴장이 되었던 것도 사실인데, 저리 다정한 황녀가 제게 위험한 일을 시켰을 것 같지도 않았다. 실제로 이시스가 부탁한 건 대공비를 지켜보는 일밖에 없었다. 그쯤이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 그럼 이만 황후 폐하께 인사드리러 가도록 하게. 혹 나를 만나러 왔다는 말은 하지 말고. 어머니께선 그대가 본인보다 나를 더 찾는 것 같으시다며 곧잘 삐지시거든. 내가 점수를 딸 기회를 주는 게야.”
“예, 황녀님.”
이시스의 농담에 나디아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나디아는 자리에서 일어서 문가로 나아갔다. 그러다가는 문득 걸음을 멈춰 세웠다. 뒤늦은 궁금증이 고개를 든 탓이다. 나디아가 고개를 돌리며 이시스에게 물었다.
“저, 황녀님. 혹시 그 여동생분의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아, 그것?”
이시스가 대수롭지 않게 되묻더니, 이어 매끄러운 웃음과 함께 짧게 대꾸했다.
“거짓말이었네.”
“예? 거짓말이요?”
“나디아 영애, 분위기에 휩쓸려 속아 넘어가지 않게 앞으로 더 훈련해 두게. 그리고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황실의 가계도 정도는 전부 외워 두는 편이 좋겠지?”
이시스가 그리 말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디아는 한참 입을 벙긋이다가는 울상을 지으며 밖으로 나왔다. 밖엔 여러 시녀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디아는 체통을 지킬 정신도 없었다. 그녀는 문을 나서자마자 벽에 등을 기댔다. 졸아붙은 간은 좀처럼 원래의 크기로 돌아오지 않았다.
나디아가 가슴 위로 두 손을 올린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긴장된다니까…….”
* * *
시간은 순리대로 흘러 프리모가 기대했던 일들을 그의 앞으로 성큼 가져다 놓았다. 진척되는 계획마냥, 초대한 인물들 역시 차근차근 회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대륙의 차기 패자를 선포하는 자리였으므로 연회의 규모는 대단히 성대했다. 고르고 고른 중요한 이들만 초대했음에도 그 수가 적지 않았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기에 몰려드는 인파에도 프리모는 진심 어린 미소를 지어 보일 수 있었다. 그 옆엔 이시스도 함께였다. 혼자 힘으로 오른 자리가 아니니만큼 그동안의 지지자들에게 충분한 성의 표시를 해야 했다.
방문객 중엔 아직 셀렌 영지로 돌아가지 않은 벨리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의 등장은 몹시 이례적이었다. 프리모의 세력으로 규합되지 않은 황손 중에서는 참석한 이가 없었기에 순간 시선이 모여들었다.
하기야 황실 가족들의 불참이 자의에 의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불구가 되거나 감금되었거나, 수도원에 갇혔거나, 혹은 이미 죽었거나. 가장 온건한 게 벨리타처럼 팔려 가듯 먼 지방의 귀족과 혼인을 한 경우였다. 모두는 벨리타가 프리모의 앞길을 어떻게 저주할지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벨리타는 그들의 기대를 배신하고 이시스를 본체만체 지나쳤다. 재밌는 싸움 구경을 놓쳤다며 귀족들은 평온한 낯 밑으로 아쉬움을 삼켰다.
정작 분란이 벌어진 건 다른 곳에서였다. 아탈렌타 대공 부부가 등장한 것이다. 대공비가 마녀라는 소문이 돌며 사교계에서도 ‘설마’ 하는 의혹이 불거진 시점이었다. 대공비는 그 의심이 사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몸을 사리듯 외출 횟수를 현저히 줄였다. 뒤늦게 대공 부부가 신전을 찾아 치성을 드렸다는 이야기도 들려왔지만, 그것만으로 소문을 불식시키기는 역부족이었다. 순간 장내가 술렁였다.
팽팽히 당겨졌던 신경줄을 누군가 끊었다. 장내에 벨리타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다.
“어머……. 불길해라.”
“벨리타 황녀님!”
뒤에 선 시녀가 깜짝 놀라 벨리타를 채근했다. 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전부 사색이 되어 있었지만 벨리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벨리타가 부채로 바람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 기쁜 자리에 굳이 참석하는 건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군. 본인도 세간에 도는 소문을 모르지 않을 텐데 말이야.”
우스운 지적이었다. 설령 대공비가 정말 마녀라고 해도 벨리타는 그녀를 비난할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벨리타는 프리모에게 불확실한 저주가 아닌 확실한 살수를 보냈던 여자였으니까.
대놓고 준 면박에 체면을 구기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아스티나의 옆에 서 있던 테리오드가 눈빛을 달리하며 벨리타를 응시했다.
“무례하시군요, 셀렌 자작 부인.”
테리오드의 응대에 벨리타가 얼굴을 붉혔다. 비록 남편이 자작위에 있다고는 하나 그녀는 황녀였다. 한데 대공은 부러 존대를 생략하고 현재의 신분만을 입에 담은 것이다. 아무리 대공이라고 해도, 벨리타가 아직 황실에 머물렀던 때라면 그녀를 이런 식으로 취급하진 못했으리라.
벨리타는 더 이상 그녀를 비호해 줄 황가의 연줄이 존재하지 않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벨리타의 어머니는 아들을 잃은 후 황후에 의해 별궁에 처박힌 지 오래였다. 황제도 황자를 잃은 후비에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물며 이미 지참금을 내준 딸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벨리타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이시스를 향했다. 벨리타의 눈빛엔 온갖 질시와 증오, 그리고 승자를 향한 미세한 패배감이 어려 있었다.
그러나 벨리타는 곧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가다듬었다. 셀렌 자작은 황녀 출신의 부인을 맞이하기에 신분만 미비할 뿐, 금전적인 부분에선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그의 영지엔 커다란 광산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중 과반수는 다이아몬드가 채굴되는 곳이었다. 벨리타는 그게 이시스의 마지막 체면치레였을 것이라 짐작했다. 벨리타를 어느 곳 하나 잘난 부분이 없는 남자에게 시집보냈다면 피도 눈물도 없다며 여론의 질타를 받았을 테니까.
벨리타는 사근한 목소리로 단어 마디마디에 칼날을 세웠다.
“어머, 대공 전하. 무례라니요. 본인의 축하를 정말 축하로 받아들일 수 없을 주최자를 이해하신다면 알아서 참석을 피해 주는 것이 예의일 터……. 그간 두문불출하시던 대공비께서 굳이 이 자리를 찾으신 의도를, 전 도무지 좋게 받아들일 수가 없네요.”
금방이라도 싸움이 벌어질 태세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러나 생각 외의 거물이 등장인물로 나선 것과는 달리, 마무리는 의외로 싱거웠다. 이 연회의 주인 격인 프리모가 나서서 분위기를 정돈한 것이다.
“벨리타,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기쁜 자리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소란을 벌이고 싶지 않으니 그만 자리에 앉아라.”
프리모가 점잖게 이복 누이를 타일렀다. 벨리타는 마지못해 프리모의 명을 따랐다. 프리모는 성큼 테리오드의 앞으로 다가가 친근히 악수를 청했다.
“내 대신 누이의 무례를 사과하오. 셀렌 자작이 바빠 함께 참석하지 못했다 하니 아무래도 그것 때문에 심술이 난 모양이야.”
“……전하께서 황태자위에 오르시는 기쁜 날이니, 전하를 보아 이번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요. 제국의 새로운 태양이 되신 걸 미리 축하드립니다.”
테리오드가 마지못한 얼굴로 프리모의 손을 맞잡았다. 불쾌함을 그대로 전시한 태도였지만 프리모는 사람 좋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대공이 팔불출이라는 소문은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바였으나, 그녀를 비호하기 위해 프리모 앞에서까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줄은 몰랐다. 쉽게 물어뜯을 수 없는 상대임이 밝혀지자 대공비를 향한 호기심 어린 시선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췄다.
모두가 자리에 착석하고 본격적으로 연회가 시작되었다. 후계자의 잔은 이미 물려주었기에 이 자리는 형식적인 의미밖에 없었다. 따라서 본식의 길이는 비교적 짧았다. 우선 황제가 프리모를 단상 앞에 세운 뒤 짧은 의식을 치렀다. 그간 프리모의 수족이 되었던 이들은 새 후계자의 이름을 연호하며 흥분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다음부터는 성대한 술판이 벌어졌다. 준비한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시며 자연히 분위기가 점점 들떴다. 맛있는 음식은 혀를 즐겁게 했고 달콤한 포도주에 물든 뺨은 혈색 좋게 반짝였다.
“전하, 멋들어진 건배사를 한번 해 주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프리모의 옆에 있던 귀족 하나가 건배를 권했다. 프리모는 아첨을 경멸하는 듯하면서도 정작 티 나지 않게 칭찬하면 무척이나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외로 프리모는 냉큼 그 기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대신 이시스에게 자리에서 일어설 것을 종용했다.
“이시스, 오늘의 이 기쁜 자리는 네 덕에 열릴 수 있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다. 네가 물심양면으로 도운 덕분이니 내 너를 치하하지 않을 수 없구나. 축사를 네게 양보할 테니 나를 위해 행운의 말을 기도해 주렴.”
중책에 앉고 나니 철모르던 아들도 드디어 정신을 차린 걸까. 황제의 얼굴에 자연히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같이 나서 이시스를 채근했다.
“그래, 이시스. 네 오라비가 저리 바라는데 이 기특한 청을 무시할 셈이냐? 얼른 일어나 보려무나.”
아버지까지 나서자 황녀도 겸양의 말만 꺼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이시스는 수줍은 표정으로 일어나 축배를 들었다.
“그럼 부끄럽지만 제가 먼저 잔을 들지요. 제국의 역사에 길이 남을 새로운 황제를 위해 이 술을 바치겠습니다.”
사건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모두가 새로운 후계자의 이름을 연호했고, 흥분의 정점에서 이시스가 단번에 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황녀의 몸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좌중의 눈이 커졌다. 너무도 비현실적인 상황이었기에 그 누구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믿을 수 없는 사건에 이것이 질 나쁜 상황극이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 달리 이시스의 몸이 경련하며 입가에선 붉은 선혈이 흘러나왔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프리모였다. 프리모는 그대로 상 위를 뛰어올라 여동생에게 건너갔다. 접시 깨지는 소리와 함께 귀부인들의 비명이 천장을 두들겼다. 프리모가 이시스의 몸을 끌어안으며 그녀의 뺨을 두드렸다.
“이시스! 이시스!”
황녀의 낯빛은 창백했다. 한참 이시스의 어깨를 흔들던 프리모가 핏줄이 터진 눈을 들었다.
“독이다! 누가 내 누이의 잔에 독을 탔어!”
주변은 온통 소란스러웠다. 나디아는 벌벌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며 황급히 프리모의 옆으로 다가갔다. 황녀의 얼굴을 자세히 본 순간 나디아는 제 입가를 감싸지 않을 수 없었다. 이시스의 뺨엔 핏기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나디아는 반사적으로 이시스의 옆에 앉아 있던 대공비를 돌아보았다. 바로 옆에서 사람이 쓰러졌는데도 대공비가 내비친 건 약간의 놀람뿐이었다.
잘 맞춰진 각본이라도 되는 것처럼, 때맞춰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내내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던 시종 하나가 털썩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가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대공비 전하의 짓입니다!”
싸늘한 정적이 온 회장을 휘감았다. 조심스럽게 이시스를 내려놓은 프리모가 흉흉한 얼굴로 시종에게 다가갔다. 프리모는 덥석 시종의 멱살을 잡아 올리며 으르렁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대, 대…… 대공비 전하가 이시스 황녀님의 잔에 혼란을 틈타 무언가를 집어넣는 것을 보았습니다.”
프리모의 무서운 기세에 시종은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했다. 프리모가 재차 그를 겁박했다.
“그런 수상한 짓을 보았는데 왜 미리 말하지 않았지? 무슨 의도로 함부로 거짓을 나불거리는 게냐!”
“저, 정말입니다. 워낙 찰나의 일이었던지라, 억측일지도 몰라 차마 미처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리 답한 시종이 결국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프리모는 사납게 그의 멱살을 놓았다. 이번에 그가 다가선 것은 대공비 쪽이었다. 프리모가 흉흉한 눈으로 물었다.
“정말이오?”
아스티나는 당황하지도 않고 대꾸했다.
“날조입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이시스의 잔에 수상한 것을 넣었다는 저 증언은 또 무엇이오?”
프리모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누구든 당황하기 마련이거늘, 대공비의 태연한 태도는 범인의 것이라 보기 어려웠다. 아스티나는 논리적으로 의심을 격파했다.
“제가 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전하를 독살하려 하겠습니까? 그럴 계획이 있었다면 제 손을 더럽히는 대신 아랫것들을 시켰겠지요.”
“설마 누가 황제와 함께하는 만찬에서 황녀를 시해하려 하겠느냐? 틈새를 잘 노렸지만 애석하게도 그만 들키고 말았구나.”
프리모가 코웃음을 치며 아스티나를 쏘아보았다. 그는 이미 대공비가 범인임을 확신한다는 듯한 태도였다.
“이시스의 궁은 내가 비호하고 있어 경비가 삼엄하지. 식사 전에 은 식기로 독이 들어 있는지 확인하니 약을 쓴 것은 필히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자일 것이다.”
프리모의 추측은 그럴듯했으나 경비대원들은 좀체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발 빠르게 뒤로 저만치 물러선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대공비가 어디 보통 신분이던가? 대공의 병력으로 과거의 명성에 이런저런 흡집이 난 상태라고는 하나 그래도 아탈렌타였다. 아직 대공비가 진범이라고 판명 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녀를 함부로 매도할 수는 없었다. 시종 하나의 말만 믿고 아탈렌타와 척을 지기엔 그들은 잃을 것이 많았다.
미적지근한 반응에 프리모는 내심 짜증을 누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미비한 신분을 가진 자의 증언으로 대귀족을 억류하기는 역부족이었나. 나중에 데니스가 신의 뜻을 들어 여론을 조작하기로 예정되어 있긴 했으나, 프리모는 좀 더 확실한 한 방을 원했다.
이럴 때 이시스가 있었더라면 좀 더 쉽게 좌중을 휘어잡을 수 있었을 것을. 프리모의 눈가에 약간의 아쉬움이 스쳤다. 그러나 도움이 되어 줄 이시스는 이미 독을 먹고 쓰러진 상태이니 이제 와 후회해도 의미는 없었다.
다행히도 프리모는 이내 좋은 먹잇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연신 이시스의 등을 두드려 주고 있던 나디아를 발견한 것이다. 프리모는 반색하며 나디아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나디아는 분위기에 휩쓸리기 쉬운 여자였다. 그녀를 건드리면 원하는 답이 나올 듯도 했다.
프리모는 나디아에게로 성큼 다가가 그녀의 팔을 쥐고 흔들었다. 넋을 빼고 있던 나디아의 눈동자에 그제야 초점이 돌아왔다.
“나디아 영애는 보지 못했소?”
“예? 전…….”
“똑똑히 말하시오! 그대가 이시스의 옆에 앉아 있지 않았소! 내 누이를 죽이려 한 대공비의 행각을 보았느냐 이 말이오!”
나디아는 혼란에 빠졌다. 빨리 이시스를 추슬러야 할 것 같은데 궁의는 아직도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이 역시 프리모가 궁의의 거처와 먼 연회장을 선택하는 수를 쓴 덕분이었다.
뼈가 비치도록 마른 이시스의 등은, 정말이지 해골마냥 차가웠다. 그 서늘한 감각에 나디아는 손을 잘게 떨었다. 물이라도 억지로 넘기게 하여 마신 술을 토해 내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 그 전에 시해범을 붙잡는 것이 먼저인가? 만일 저 시종이 대공비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이라면? 아니면 정말 대공비의 행각이 맞을까?
온갖 생각의 소용돌이가 나디아를 좀먹었다. 나디아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건 피살된 당사자, 즉 이시스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그래. 오늘은 오라버니가 황태자위에 오르는 영광스러운 날이 아니던가? 드디어 고지에 다다랐는데, 혹여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까 심히 마음이 불안하군. 그대가 내 심려를 조금 덜어 줬으면 좋겠어.’
하필 이시스 황녀에게 대공비가 수상하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런 사건이 벌어지다니, 어떻게 봐도 이상하지 않은가?
대공비가 정말 마녀라면, 이시스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인지했을는지도 모른다. 나디아는 허리께부터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이미 다른 증인은 확보된 상태다. 시종이 목숨을 걸고 밝힌 진실이었다. 황녀의 죽음과 더불어 그의 용기까지 헛되게 할 수는 없었다.
나디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결연한 외침이 회장 안에 울려 퍼졌다.
“예, 저도 보, 보았습니다!”
증인이 둘로 늘어나자 좌중이 술렁였다. 누가 사주했을지도 모를 시종이 아닌, 엄연한 백작가의 영애가 한 발언이었다.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디아와 프리모 황자의 혼담을 주선한 게 바로 이시스가 아니던가?
프리모와 나디아는 이시스와 한 몸에 가까운 인물들이라 말해도 큰 어폐가 없었다. 그런 그들이 황녀의 죽음에 있어 거짓을 날조할 리는 없다. 날카로운 시선들이 동시에 아스티나의 등을, 뺨을, 눈을 찔렀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태연히 이렇게 반문했다.
“그렇다면 확인해 보지요. 분명, 나디아 영애께서는 제가 황녀님의 잔에 무엇을 넣었는지 보았다고 말씀하셨지요?”
나디아는 입술을 깨문 채 고개만 끄덕였다. 아스티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영애, 그렇다면 제가 어떤 색의 약물을 집어넣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순간 나디아는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몸을 벌벌 떨며 구원자를 찾는 것처럼 황급히 프리모를 돌아보았다.
“그건…….”
“고체였습니까, 액체였습니까? 아니면 가루로 되어 있었는지요.”
나디아의 뺨이 이시스의 것마냥 창백해졌다. 아스티나가 고요히 재차 물었다.
“어떤 색이었습니까?”
나디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스티나는 눈만 굴려 무릎을 꿇은 시종을 돌아보았다.
“그래, 그대는 어떠한가, 그대도 나디아 영애와 같은 것을 보았을 테니, 필히 나에게 같은 답을 들려줄 테지?”
“저, 전 멀리 있어 그, 그런 것까진 보지 못했…….”
그때 대공이 앞으로 나섰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를 비호하듯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테리오드의 호통이 온 연회장을 울렸다.
“무언가를 넣는 것은 보았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테리오드의 씹어 먹을 듯한 시선에 시종이 고개를 조아렸다. 테리오드는 고개를 돌려 이번엔 나디아를 쏘아보았다.
“나디아 영애, 그대의 발언에 책임질 수 있소?”
“예?”
“황녀를 시해하려 한 것은 분명 중죄요. 영애의 오판으로 누군가가 끔찍한 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다는 뜻이오. 다시 한번 묻지. 영애는 지금 그대가 휘두른 혀의 무게를 책임질 수 있소?”
나디아는 치맛자락을 말아 쥐었다. 온실 속에서 평탄하게만 자라 온 그녀에게 이 사건은 감당하기 힘든 크기였다. 황녀는 피를 토하며 쓰러진 데다, 그 범인으로 의심되는 자의 응대도 만만치 않았다. 나디아는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연회 직전으로 되돌리고 싶었다. 그렇다면 이시스의 잔을 미리 빼돌려 그녀를 구할 수 있을 텐데.
나디아의 눈가에서 커다란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직전, 프리모가 앞을 막아섰다.
“모든 것이 다 들통난 후인데도 세치 혀가 길구나! 코앞도 아니고,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 어찌 형태까지 살필 수 있었겠나? 이상한 걸 물고 늘어지는군!”
프리모는 누이를 잃은 오라비의 비통함을 썩 그럴듯하게 연기해 냈다. 그가 일그러뜨린 얼굴을 감싸며 소리쳤다.
“마녀라는 소문에도 그대들을 믿어 이 기쁜 자리까지 초대했거늘, 그 신의에 대한 보답이 바로 내 누이의 죽음인가?!”
프리모는 누이에 이어 제 약혼자까지 겁박한 파렴치한들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나디아를 품에 가두어 그녀의 불안한 얼굴을 감췄다. 프리모가 나디아의 뺨을 감싸며 다정히 물었다.
“괜찮소, 나디아? 두려워할 것 없소. 내가 악독한 여자에게서 그대를 지킬 테니.”
그의 흉흉한 시선이 경비대원을 스쳤다. 프리모가 팔을 휘두르며 악을 쓰듯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대공비를 연행하라!”
주춤대던 경비대원들이 결국 아스티나에게로 다가섰다. 증인이 둘이나 나온 마당이니 조사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그들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아스티나를 우악스럽게 잡아끌었다. 대공이 대공비의 팔을 비튼 경비대원을 폭행한 것을 끝으로, 연회는 처참하게 마무리되었다.
* * *
대공비가 잡혀 들어간 후, 기다린 것마냥 무서운 사실들이 잇따라 밝혀졌다. 범죄자를 잡아낸 일로 일약 유명세를 탔던 데니스 사제는 대공비가 황가를 저주하는 물건들을 사들였다는 정황을 밝혔다. 그러고는 어두운 기운이 아탈렌타 저택을 감싸고 있다는 둥의 열변을 토해 냈다. 썩 그럴듯한 날조는 아니었으나 그건 대중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대공비가 황녀의 암살을 시도했다니!
사람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사건에 주목했다. 프리모는 암살 시도에 대한 소문을 부러 자극적으로 부풀려 퍼트렸고, 대공비가 마녀라는 사실은 거의 기정사실화되었다. 대공비가 아카데미에서 보였던 우수한 성적마저도 헐뜯는 자들에겐 흠으로 비쳤다.
검을 잘 쓴다는 사실도, 타인을 휘어잡는 유창한 말솜씨도, 심지어는 어릴 때 내보인 천재적인 기질까지 모두 아스티나가 마녀라는 증거가 되었다. 수도의 선술집만 지나쳐도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대공비에 대한 온갖 유언비어들을 얻어들을 수 있었다. 개중 과격한 자들은 대공비를 끌어내어 참수시키라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대공은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탄원서를 모았지만 딱히 효과는 없어 보였다. 아탈렌타의 인장이 박힌 편지가 여러 차례 황실로 날아든 끝에, 결국 대공비는 차디찬 돌벽으로 된 감옥이 아닌 일반적인 손님방에 억류될 수 있었다. 완전한 해결은 아니었지만 황실 일원을 해치려 한 자에 대한 취급치고는 몹시 자비로웠다. 물론 대중들은 돈과 권력이 좋긴 좋다며 냉소적인 반응만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시스가 끝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면 아무리 대공이라도 아내의 편안한 잠자리나 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사건으로부터 닷새가 지난 후, 이시스 황녀는 제정신을 찾았다. 그야말로 하늘이 도운 천운이었다. 나디아가 계속해서 등을 두드려 주어 술 대부분을 토해 낸 덕분에 치사량을 넘기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오래 섭식을 하지 못한 탓에 몸이 약해져 병상을 떠나진 못했지만 목숨을 보전한 것만도 기적이었다. 이시스 황녀가 마신 것은 맹독 중의 맹독으로, 그것을 마시고 살아난 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했기 때문이다.
이시스 황녀는 범인을 알지 못했기에 그녀가 깨어났음에도 수사에 별다른 진척은 없었다. 나디아는 충격을 핑계로 몸이 약해졌다며 저택에 처박혀 외출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을 대신해 대공비가 마녀라는 주장을 내내 설파하던 데니스가 참고인 신분으로 황궁에 발을 들였다. 대공비가 마녀라는, 다소 형이상적인 주장이 얽혀 있었으므로 신전의 입김도 무시할 수 없었던 탓이다.
데니스는 콧대 높은 대공비를 짓밟아 줄 생각에 몹시 설레 있었다. 이시스의 생존이라는 변수가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데니스는 그럭저럭 흡족한 기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시스야 후에 독을 먹은 후유증으로 외병을 하다 죽었다는 식으로 처리하면 되는 문제였다.
과연 삼엄한 경비를 여러 번 지나쳐 마주한 대공비는 전보다 초췌한 외양을 하고 있었다. 잠을 재우지 않았다거나 식사를 내주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자유를 빼앗겼다는 사실만으로도 귀부인에겐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으리라.
데니스는 의자에 앉으며 친절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안녕하십니까, 대공비 전하. 오랜만에 다시 뵙는군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아스티나가 다리를 꼬며 무심히 응대했다.
“그럭저럭은요. 사제님께서는 묻지 않아도 꽤 잘 지내신 것 같군요. 뺨에 살이 좀 오르신 것도 같고…….”
난데없이 체중 증가를 지적당한 데니스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마터면 취조를 당할 것은 자신 쪽이라 그만 착각할 뻔했다.
그러나 지금 약자의 입장에 있는 건 어디까지나 대공비였다. 데니스는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허, 참으로 마음 씀씀이가 깊으시군요. 그보다는 다른 걸 걱정해야 할 상황이신 듯한데 말입니다.”
그가 불쾌한 낯으로 종이와 잉크, 그리고 펜을 꺼내 들었다. 데니스는 상단에 날짜를 적어 내린 후 가볍게 펜대를 돌렸다. 그가 마찬가지로 여상한 음성을 내어 물었다.
“대공과 혼인을 한 기일이 정확히 어떻게 되십니까?”
아스티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데니스는 눈을 들어 그런 아스티나를 한참 지그시 응시했다. 침묵이 지속되자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이더니, 이어 다음 문항을 질문했다.
“대공 전하께서 병환을 딛고 일어서신 시기는 어떻습니까? 대공비께서 아탈렌타 영지로 내려가시기 전에 차도의 조짐은 있었는지요.”
이번에도 아스티나에게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데니스는 자백하지 않으면 가중 처벌이 될 것이라 으름장을 놓았지만, 기실 침묵이야말로 가장 똑똑한 대응이 맞았다. 어차피 어떻게 대답하든 듣는 이의 입맛에 맞춰 제멋대로 해석될 문답이었다. 지금껏 아무 문제도 없었던 아스티나의 일생이 한순간에 악인의 태를 뒤집어쓴 것처럼 말이었다.
데니스가 겁을 주듯 늘어놓은 불이익과 몇 가지 처벌에 아스티나의 미간 사이가 좁혀졌다. 마침내 아스티나가 실소를 터트렸다. 아스티나는 양팔을 팔짱 끼고는, 그대로 데니스에게 경멸의 눈빛을 쏘아 보냈다.
“미련한 것…….”
대공비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선연한 멸시의 어조에 데니스는 입만 벙긋였다. 어이가 없어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데니스가 황당하다는 양 되물었다.
“지금 저한테 하신 말입니까?”
겁에 질린 꼴을 좀 구경하러 왔더니, 대공비의 행동은 되레 그의 기분만 상하게 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당당한 태도에 혹 무언가 숨겨 둔 패라도 있나 의심이 샘솟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추측이었다. 대공비가 손을 쓸 것이 있었다면 이곳에 갇히기 이전에 행했어야 했다. 그녀의 앞날에 기다리고 있는 건 마녀재판과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오명뿐이었다. 남편인 대공조차도 아내를 빼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고이 자라 온 레이디가 마찬가지로 고결한 집안에 시집을 가더니, 이젠 천지 분간도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게 틀림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조차 제가 우위에 있는 줄 알고 건방진 태도를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데니스는 그만 광소를 터트렸다.
“세상에, 당신의 꼴을 좀 보세요! 진짜 미련한 사람이 누구랍니까?”
이어 그가 아스티나의 눈앞에 대고 삿대질을 했다. 대공비가 누명을 쓰기 전에는 감히 취하지도 못했을 무엄한 행동이었다.
“분명 당신이 바깥에 있을 땐 그런 태도를 보여도 되었겠지만, 대공비 전하. 간언컨대 제가 그대의 인생을 쥐고 흔들 질문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그것은 신전의 의지인가?”
아스티나는 그나마 두르고 있던 존중의 태마저도 벗어던졌다. 날카로운 질문에 데니스가 느긋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불신자들을 교화시키는 것은 분명 신의 종이 할 일이지요.”
“불신자들을 교화시키기보다는 불태우는 쪽이 교회의 주특기가 아니었나?”
“교화할 수 없을 만큼 악에 물든 이들도 있으니, 그도 어쩔 수 없는 처벌이랍니다.”
“그대는 신을 믿지 않는군. 머리가 나빠 신학을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라, 그저 이해할 생각도 없었던 거야.”
아스티나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데니스의 앞에 놓인 종이를 집어 들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데니스도 그녀를 막지 못했다. 종이 위엔 그가 대공비와의 면담을 위해 적어 온 질문들이 쓰여 있었다. 그야말로 하나같이 의도가 분명히 읽히는 항목들이었다. 지금껏 존재했던 기현상들에, 아스티나와 조금이라도 접점이 있다면 곧바로 엮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스티나는 그것을 세로로 길게 찢어 내렸다. 반쪽으로 갈라진 종이를 미련 없이 놓으며, 그녀가 사근한 음성을 자아내어 말했다.
“신의 뜻을 거짓으로 지어내는 이를 어디 신자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대의 신은 카라벨라가 아닌 그대 자신이겠구나, 제 뜻을 신의 뜻이라 속여 내어 모두를 기만하고 있으니.”
정곡을 찔린 데니스가 얼굴을 붉혔다. 그가 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이 일을 신전이 가만히 좌시하고만 있을 줄 안다면―”
“그대에게 신전을 입에 담을 자격이 있나? 그대는 사제가 아니야. 그렇다고 정치인도 아니지.”
아스티나는 상체를 숙여 데니스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고는 그의 탁한 녹빛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아스티나가 속삭이듯 물었다.
“제 그릇의 크기도 모르는 남자야, 그대는 지금 본인이 어떻게 보이는지 아는가? 그야말로 추악한 악마의 모습이라네.”
아스티나는 다시 몸을 뒤로 물려 태연히 제자리에 앉았다. 데니스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았다. 이어 느리게 숨을 한번 들이켜는 것으로 그는 평온을 가장할 준비를 마쳤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멀끔한 미소가 떠올랐다. 상대가 궁지에 몰리고도 제 처지를 아직 자각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번에도 다음을 기약해야 할 모양이었다.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올 것 같지 않으니, 저는 이만 일어서겠습니다.”
데니스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러나 몸을 돌리기 전, 그는 대공비에게 섬뜩한 음성으로 경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틀 후 있을 재판에서도 어디 계속 그 건방진 입을 놀릴 수 있을지,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는 바입니다.”
“내 반드시 아쉽지 않게 보답하지.”
아스티나가 낭랑하게 대꾸했다. 결국 성을 이기지 못한 데니스가 거칠게 문을 닫으며 밖으로 나갔다. 아스티나는 데니스가 손도 대지 않은 찻물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적당히 식은 잔은 한 번에 들이켜기 딱 좋은 온도였다.
잠시 후, 방문객이 떠난 것을 확인한 시녀가 슬며시 방으로 돌아왔다. 시녀의 손엔 쪽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시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것을 아스티나에게 건네었다.
“대공비 전하. 이것을…….”
“대공께서 보낸 것인가?”
시녀가 고개를 저으며 엷게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아스티나는 무심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 종이를 펴 내용을 확인한 아스티나의 눈에 곧 이채가 감돌았다.
* * *
나디아는 아침이 밝자마자 이시스 황녀를 알현하기 위해 급히 황궁으로 마차를 달렸다.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내내 면회 신청을 거절하던 궁의가 마침내 방문을 허락한 덕분이었다. 주인의 체통을 걱정한 시녀의 비명에도 아랑곳 않고 복도를 달린 나디아가, 마찬가지로 쏟아지듯 이시스의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안쪽에선 이시스가 침대 위에 앉은 채 나디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소 파리한 안색이기는 했지만 환자치고 상태가 양호했다. 나디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디아가 반색하며 소리쳤다.
“황녀님!”
“많이 걱정했나?”
이시스의 다정한 물음에 나디아가 울컥한 듯 호흡을 눌렀다. 나디아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이시스의 침대맡에 앉았다. 평생에 걸쳐 몸에 익힌 예의범절은 생각나지도 않았다. 나디아는 덥석 이시스의 두 손을 잡고는 그 위로 눈물을 떨구었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세상에……. 이렇게 무사히 눈을 뜨셔서, 얼마나, 얼마나 다행인지…….”
나디아는 말을 채 다 잇지도 못한 채 흐느꼈다. 핏기 하나 없던 이시스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선연했다. 천천히 식어 가던 온기와 주변에 흥건했던 피까지도. 황녀가 살아나 이리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게 마치 꿈만 같았다.
“여린 그대가 적잖이 마음고생을 했겠다 싶어.”
“흑…… 흐흑, 아닙니다. 다시 황녀님을 뵐 수 있다니 어찌나 꿈같은지…….”
이시스는 손을 뻗어 나디아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손끝에 묻은 나디아의 눈물을 들여다보던 이시스가, 무언가 석연치 않다는 듯 말을 꺼냈다.
“한데 영애, 대체 회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난 잘 기억이 나질 않아. 그저 잔을 들이켰을 뿐인데 속이 쓰려 와……. 정신을 차려 보니 다들 대공비가 내 잔에 독을 탔다고 말하더군.”
“예……?”
나디아가 떨리는 음성으로 되물었다. 계속 보지 않은 것을 보았다고 말할 용기도, 그렇다고 사실을 고백할 용기도 없어 나디아는 내내 저택에 틀어박혀 지냈다. 한데 피해를 입은 이시스가 직접 범인에 대해 물어 온 것이다.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츠렸다.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래, 나디아 영애가 증인이라고 하였지. 대공비가 범인이라는 말이 진실인가? 정말 대공비가 내 잔에 독을…….”
이시스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나디아를 보며 말했다. 그러나 이시스가 질문을 채 끝맺기도 전, 내내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던 나디아는 그대로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나디아는 이시스의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알아듣기도 힘든 불분명한 음성을 쏟아 냈다.
“흐흑……. 황녀님. 제가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니, 영애. 왜 그러나?”
이시스에게서 의아한 물음이 돌아왔다. 나디아는 이야기를 꺼내기 전 잠시 숨을 골랐다. 황녀가 자신을 거짓말쟁이라고 매도할까 걱정스럽긴 했으나, 나디아로서도 할 말이 없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전부 황녀를 위해 행했던 일이 아닌가? 대공비를 감시해 달라 부탁했던 것은 이시스이니, 그녀에게만은 사실을 말할 수 있었다. 영리한 황녀라면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해결책도 내어 줄 것이다.
나디아가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사실 전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프리모 전하께서 호통치며 윽박지르시니 경황이 없었던 데다, 황녀님께서 대공비를 의심하셨던 게 생각나서 그만…….”
이시스가 나디아의 말을 듣다 말고 그만하란 듯 손을 내밀었다. 온화했던 황녀의 표정은 어느새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생각지 못한 반응에 나디아가 당황하여 입을 다물었다. 이시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디아에게 되물었다.
“설마 모두에게 거짓을 고하였다 이 말인가?”
나디아의 목에서 딸꾹질이 터져 나왔다. 나디아가 불규칙적으로 달싹이는 입을 틀어막으며 대꾸했다.
“예? 예…….”
“그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황녀의 태도는 분명 방금과는 확연히 달랐다. 처음 보는 날카로운 눈빛은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언제나 이시스의 친절한 모습만을 보아 왔던 나디아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혹시 자신이 거짓을 고하였다는 말에 실망한 것인가.
나디아는 황급히 제 잘못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시종이, 시종의 증언이 이미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가 보았다고 하니 아마 사실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시스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만 문질렀다. 나디아가 이시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제게……. 실망하셨습니까?”
그 와중에도 황녀의 환심이 달아날 것만 염려하는 가련한 여인을 보며, 이시스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나디아는 이시스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모습을 불안한 눈으로 좇았다. 이시스는 깊이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나디아를 타이르듯 말했다.
“허……. 나디아 영애.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닐세.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지. 왜 내가 대공비의 동태를 살피는 데만 그치고 별다른 수를 쓰지 못했겠는가? 다 아탈렌타의 이름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섣불리 들쑤실 수 없는 상대란 말일세.”
이시스에 말에 나디아는 겁에 질렸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자각한 것이다. 만일 대공비가 범인이 아니라면 어떤 보복이 돌아올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대공이 얼마나 대공비를 아끼는지는 나디아도 직접 확인한 바가 아니던가?
나디아는 대공비의 팔을 함부로 잡았다는 이유로 대공의 분노를 맞닥뜨렸던 경비대원을 기억했다. 그녀 자신을 노려보던 형형한 눈빛 역시 선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대공은 나디아를 똑바로 응시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디아 영애, 그대의 발언에 책임질 수 있소?’
만일 나디아가 그녀의 주장을 책임질 수 없다면, 대공은 과연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나디아가 다급히 이시스의 옷깃을 붙들었다.
“하, 하면 전 이제 어떡하지요? 이제 와 모르는 일이라고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이시스는 그런 나디아를 진정시키듯 등을 쓸어 주었다.
“분명 그대에게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하라는 요청이 왔을 테지?”
“예? 예, 연락이 오기는 하였는데…….”
“오라버니 때문에 영애가 아탈렌타와 맞설 필요는 없네. 정말 대공비의 행각이 맞다면 재판에서 밝혀질 것이니, 영애는 아프다는 핑계를 들어 재판에 불참하도록 해.”
“그, 그래도 될까요?”
나디아로서는 반가운 제안이었지만 여전히 약간의 불안감이 마음속에 있었다. 나디아도 재판에 불참하는 게 흠 잡힐 일이라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그에 뒤따를 프리모의 분노 역시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더 두려운 것은 거짓말이 밝혀졌을 때의 후환이었다. 아탈렌타의 원한은 단순히 몇 마디 비난을 듣는 것만으로 끝날 무게가 아니었으니까. 이시스 역시 그 점을 지적했다.
“만에 하나라도 대공비가 범인이 아니라면, 그대는 오라버니와의 결혼은커녕 변방으로 내쫓겨 평생을 괴롭게 보내게 될 거야. 영애도 그걸 원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하지만 황녀님께서는 대공비 전하를 의심하고 계셨던 것 아니세요? 시종의 말에 의하면 정말 대공비가 범인일 수도…….”
“나디아 영애, 대공비가 설령 진짜 범인이라고 해도 그대가 거짓을 말했다는 사실이 달라지진 않지 않는가?”
나디아는 무어라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이시스가 그녀를 다그치는 게 먼저였다.
“생각해 보게. 그대는 그 시종과 만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입을 맞출 수나 있겠어? 대공비가 언제쯤 독을 넣었는지 설명할 수는 있겠나?”
나디아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두 증인의 진술이 엇갈린다면 불참보다 더 끔찍할 결과를 낳을 것이다. 시종이 한 발언의 진위마저도 의심받을 테니 말이었다.
이시스가 나디아를 타이르듯 말을 맺었다.
“지금은 확실하지도 않은 범인을 잡는 것보다 그대의 안위를 보전하는 게 더 중요해. 부디 내 말을 듣게나.”
자비로운 이시스의 배려에 나디아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그 의견을 거스르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어디로라도 도망치고 싶은 상황에, 이시스는 친절하게도 나디아에게 활로를 찾아 준 것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만일 자신이 말을 바꾼 일로 프리모가 실망한다고 해도 이시스의 설득이 있다면 금방 마음을 풀게 될 것이다.
결심이 선 나디아가 재차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황녀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재판에 불참할게요.”
이시스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디아가 그동안 계속해서 보아 왔던, 자비로운 황녀의 모습이었다.
* * *
재판 일자는 빠르게 다가왔다. 고대하던 기일에 원고 측은 큰 당황과 마주쳐야 했는데, 바로 결정적인 증인으로 등장했던 나디아 아벨라르 영애가 불참을 선언한 탓이었다. 그녀는 사건에 의한 충격으로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다는 핑계를 들어 저택에서 나오지 않았다. 정작 독을 마신 이시스 황녀는 재판정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퍽 우스운 변명이었다.
그렇다고 이시스 황녀가 건강한 외양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녀의 안색은 전과 비교해 확연히 초췌해져 있었다. 가련한 모습에 자연히 모두의 동정이 모였다. 이시스가 걸음을 제대로 딛지 못하고 비틀거리자, 옆에 서 있던 프리모가 그녀를 부축하며 물었다.
“이시스, 몸은 좀 괜찮느냐?”
퍽 다정하게 들리는 음성이었다. 놀랍게도 그의 걱정은 가식만은 아니었다. 프리모는 이시스가 살아남은 게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전처럼 그녀를 열렬히 처리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시스가 없는 삶이 얼마나 귀찮은지를 간접적으로 체험한 덕분이었다.
이번 재판을 준비하며 프리모는 생에서 가장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대공비가 골동품을 사들였다는 암시장의 주인을 잡아 오는 것은 특히나 번거로웠다. 그들이 오래 장사를 이어 올 수 있었던 것은 공권력과도 연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 치부가 드러날까 관처에서는 수사를 꾸물거렸고, 결국 프리모가 직접 근위대원을 대동한 끝에야 현장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럼으로 인해서 프리모는 제 밑을 따르는 귀족들의 앙탈을 함께 감내해야 했는데, 그들이 바로 그 암시장의 오랜 단골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프리모는 재판만 끝나면 지배인을 얌전히 돌려보내 주리라 약조하는 것으로 불만을 일단락시켰다. 따라서 암시장의 지배인은 재판 전까지 프리모의 취향과 맞지 않게 꽤나 안락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안심한 남자는 대공비가 사들인 골동품의 규모를 낱낱이 고해바쳐 가며 부지런히 수사에 협조했다.
모두가 자리에 착석하고 잠시 후, 곧이어 사건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대공비는 의연한 표정으로 기사들의 인도를 받아 재판정 앞에 섰다.
대공비가 입고 있는 것은 장식이 많지 않은 흰색의 드레스였다. 해가 아직 정수리에 있을 무렵 시작된 재판이었으므로 동그랗게 뚫린 천장에선 한 줄기 빛이 흘러들고 있었다. 대공비는 정확히 그 가운데에 섰다. 마녀라는 명성이 어울리지 않게도, 빛을 받은 그녀의 모습은 퍽 성스럽게 비쳤다.
몇 가지 간단한 절차를 마친 끝에 본격적인 재판이 시작되었다. 데니스는 참고인과 증인 격으로 재판정 단상 위에 올랐다.
“안녕하십니까. 카라벨라 교단의 수석 사제인 데니스 조르단입니다.”
꾸벅 인사를 마친 데니스가 천천히 법정 증인 선서를 마쳤다. 그의 눈은 신앙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좋습니다. 데니스 사제, 그대가 본 것을 말하세요.”
재판장이 안경을 쓰며 데니스에게 발언을 허락했다. 데니스는 몹시 떨린다는 듯 길게 숨을 들이켰다. 그가 이어 결연한 어조로 증언을 시작했다.
“예, 이는 거리에서 정화 의식을 벌이던 때의 일입니다. 2주 전, 저희는 수상한 것을 목격했습니다. 평민들의 옷으로 변복한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께서 부정한 물건을 사들이고 돌아오는 현장에서 마주친 것이지요.”
“그 부정한 물건이 무엇입니까?”
“어두운 기운을 한껏 머금은 도자기였습니다. 그것 외에도 많은 물건들이 있었습니다만, 앞선 말씀드린 자기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특히나 흉흉하여 멀리서부터 눈에 띄더군요. 저희 신전은 그 물건에 황가를 향한 저주를 담을 예정이었으리라 짐작하고 있습니다.”
황가를 향한 저주라니, 그렇다면 대공비가 죽이려고 한 게 이시스 황녀뿐만이 아니었단 말인가?
데니스는 모두의 궁금증에 보답하듯 침통히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저주를 위해 사들였던 준비품을 교단에 빼앗기자, 보다 직접적인 수를 써 이시스 황녀님을 암살하려 한 듯싶습니다.”
데니스가 천천히 눈을 돌려 아스티나 쪽을 응시했다. 그가 사뭇 당당한 태도로 물었다.
“안 그렇습니까, 로제 앤더슨 부인?”
생소한 부름에 재판을 참관하던 사람들의 눈이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만족스런 반응이 돌아오자 데니스의 입가에 비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로제 앤더슨이라는 가명은 제가 대공비 전하와 마주쳤을 적, 그녀의 입에서 나왔던 소개입니다. 당당히 신분을 밝히고 정식으로 조사를 요청하셔도 되었을 것을, 왜 대공비 전하께서는 정체를 숨기려 했을까요?”
물론 암시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 신문을 당했을 때 본명을 대는 얼간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골동품 수집에 조예가 있는 귀족들은 내심 찔려 헛기침을 내뱉었으나, 대공비의 편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사건의 단면만 본다면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선 몹시 의뭉스러운 일이었다.
목적을 이룬 데니스는 짧게 묵례를 하며 발언을 마쳤다.
“이상입니다.”
다음으로 등장한 것은 암시장의 지배인이었다. 그는 안쓰럽게도 대단히 몸을 떨고 있었으며, 좀처럼 대공 부부 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재판장은 데니스가 증거로 제출한 도자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불길한 기운이 붙어 있다고 하니 아무래도 직접 만지기가 꺼림칙했던 탓이다.
“이것이 그대가 운영하는 상점에서 판 물건이 맞는가?”
“예.”
지배인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재판장이 다시금 물었다.
“누구에게 팔았지?”
“대공 부부 전하께서 구매해 가셨습니다.”
관중이 재차 술렁였다. 이것으로 대공비는 더 이상 빠져나갈 구석이 없게 되었다. 어쩌면 대공까지도 함께 역모죄를 뒤집어쓸 수 있는 발언이었다. 재판장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대공비가 그 외에 또 무엇을 사 갔지?”
“도자기와 그림, 그리고 고서적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것들의 용도는 무엇이라고 하던가?”
질답이 진행될수록 프리모의 입가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프리모는 아스티나가 고서적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다. 대공비는 후계자의 잔을 찾아 준 공적에 대한 대가로 고작 서적을 요구한, 예사롭지 않은 전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당시 프리모는 그녀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그 사실을 몹시 반갑게 여기고 있었다. 그 물건을 수집한 데 있어 썩 그럴듯한 대의가 존재하지는 않을 터였다. 당연히 취미로 사들인 물건이 아니겠는가? 골동품을 좋아한다고 변명해도 그건 마녀라는 자백과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질 뿐일 것이다. 데니스 역시 프리모와 생각이 같았고, 따라서 이어진 질문에 지배인이 대답을 우물거리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지배인은 대공비 쪽을 흘긋 쳐다보더니, 겁에 질린 표정으로 눈알을 아래로 굴렸다. 이윽고 그가 약간의 흐느낌과 함께 말했다.
“그것들은…… 아탈렌타의 보물들이었습니다.”
너무도 의외의 발언이었던지라 대개는 그 말을 곧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모두가 침묵하는 와중, 재판장만이 재차 반문했다.
“아탈렌타가의 보물들이라 하였나?”
“예, 대공비 전하께선 암시장으로 흘러들었던 아탈렌타의 보화들을 되찾으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배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한 데니스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 들었다.
저 버러지가 대체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 건가. 그런 사실이 있다면 진작 고해바쳤어야 했다. 그랬다면 데니스가 도자기에 관한 건을 포기하고 다른 수를 포진해 둘 수 있었을 테니 말이었다. 그러나 지배인은 한사코 자신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고만 말했다. 대공비가 구매해 간 물건의 이력까지 서슴없이 내주기에 그게 정말인 줄로만 알았는데, 정작 중요한 정보는 내어 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데니스는 혼란스러운 기색을 숨기려 애썼다. 그는 이 계획의 첫마디부터 다시 되짚어야만 했다. 이시스가 암시장 근처는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던 건 공을 독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이시스는 대공비가 사들인 물건에 관해 단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대공비의 치부라 생각한 현장을 하필 그곳에서 포착했던건, 그야말로 단순한 우연일 뿐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이 모든 게 전부 황녀의 계획이었나?
무언가를 섣불리 결론 내리기엔 주어진 단서가 너무도 적었다. 데니스는 아스티나가 선 재판정의 중심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스티나는 가문의 치부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타인의 눈엔 더없이 안쓰럽게만 비치는 모습이었지만, 기실 그것은 눈가에 밴 만족스러운 기색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아스티나는 증인에 관한 건을 잘 처리했다던 쪽지의 내용이 그대로 실현됐음에 흡족함을 느꼈다. 그 은밀한 접촉을 시도한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시스였다. 이미 판은 벌어졌고, 아스티나는 범인으로 몰려 억류된 상태였으니 남은 일을 처리하는 건 바깥에 남은 자의 몫이였다.
프리모는 아탈렌타를 견제하고 있었으므로 대공에게 증인을 건드릴 틈을 주지 않았다. 암살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지배인은 황궁의 삼엄한 경비 속에 억류되었다. 그러나 이시스에게 황궁은 제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공간이었다. 먹잇감이 코앞에 목덜미를 들이민 것과 진배없었다. 무엇보다 이번 암살 사건으로 완전한 피해자의 입장이 된 이시스는 행동반경이 몹시 자유로웠다. 이시스가 실제로 깨어난 것은 공식적인 발표보다 이른 시기였고, 그녀는 병상에서 일어난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이시스가 지배인에게 요구한 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당연히 거짓을 고하는 것보다는 사실을 나열하는 게 더 간단할 일일 테니까. 물론, 이시스는 그 물건들이 대공가의 보물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려서는 안 된다는 단서를 붙였다.
고귀한 태생들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남은 지배인은 기민하게 어느 쪽에 붙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알아챘다. 실제로 이시스는 프리모 수하의 귀족들을 뒤흔들어 지배인의 안위를 보장해 주었다. 그 일로 남자도 약속이 지켜지리란 나름의 신뢰를 가졌으리라. 지배인은 후에 내려질 처벌을 걱정하는 것처럼 겁에 질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썩 그럴듯한 연기에 모두의 웅성임이 커졌다. 지금 지배인은 스스로 아탈렌타의 장물을 취급했다는 사실을 밝힌 셈이었다.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을 거짓으로 증언할 리도 없으니 발언에 대한 신뢰성이 커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아스티나가 흐느끼며 입을 열었다.
“제가 보다 상세히 설명드려도 되겠습니까?”
대공비의 음성은 몹시 처량한 구석이 있었다. 상황을 뒤엎을 수 있는 증언이 나왔으니 당사자의 입장도 들어 보아야 했다. 재판장이 선선히 허락했다.
“피고는 발언하시오.”
“증인이 말한 대로 대공 전하와 제가 사들인 물건들은 전부 아탈렌타들의 보고입니다. 부끄러우나, 대공 전하께서 몸이 안 좋으실 때 가신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여 불미스러운 일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주인이 없는 틈을 타 아탈렌타의 재산을 빼돌려 장물로 팔아 치웠고, 그중 대부분이 증인의 사업장에 있었습니다. 저희는 수도로 올라온 김에 그것들을 되찾고자 한 것입니다.”
“하, 그렇게 당당하시다면 왜 사실을 밝히지 않고 가명을 사용했습니까? 본래 대공가의 보물이라면 돌려받으려 할 만도 하거늘, 신전에 반환을 요청하지도 않지 않았습니까!”
데니스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덕분에 좌중은 대공비가 가명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데니스의 지적이야말로 아스티나가 기다렸던 바였다. 아스티나가 더욱 서럽게 어깨를 떨며 말했다.
“가문의 보고가 밖을 나돌아다니는 이 불명예스러운 일을 어찌 함부로 떠벌릴 수 있단 말입니까? 당연히 비밀리에 처리해야 할 일이었어요. 게다가 사제님께서 그 도자기에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하시니, 저희로선 돌려 달라 고집하기도 불안하지 않았겠습니까?”
재판정에 모인 대부분의 귀족이 공감하는 표정을 지었다. 가문의 보고가 밖을 나돌아다니는 건 곧 물건을 팔아 치워야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사정이 좋지 않거나, 아니면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느 경우든 그리 밖에 내보여 좋은 일은 아니었다. 병력으로 사교계에서 오래 자리를 비웠던 대공이라면 그러한 소문에 더욱더 민감했을 것이다.
대공비가 호소하듯 말을 이었다.
“대공가의 명예를 위해 입을 다물어 왔으나, 침묵이 길어질수록 제겐 마녀라는 오명이 덧씌워질 뿐이더군요. 그러나 제게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왜 그 저주받은 물건을 다시 아탈렌타로 가져가려 했겠습니까? 대공 전하께서 병환을 앓으셨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을지도 모르는데요.”
실제로 아탈렌타의 보고가 도난당한 시기와 대공이 건강을 되찾은 시기는 어느 정도 공교롭게 맞아 들었다. 아스티나는 신전이 발견한 불길한 기운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대신, 그것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회유했다. 그럴듯한 가설은 진실보다 더욱 현실감 있게 받아들여졌다.
곰곰이 생각하던 재판장이 지배인에게 물었다.
“본래 그것이 아탈렌타의 물건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소?”
“예, 정리해 놓은 관련 장부를 제출하겠습니다.”
지배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뒤편에서 대기하던 직원에게 종이 뭉치를 전달받았다. 그가 제출한 장부엔 아탈렌타의 가신들에게서 물건을 사들인 흔적이 꼼꼼히 적혀 있었다. 당연히도 조작의 흔적은 없었다. 재판장이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자 자연히 여론은 대공비의 결백 쪽으로 쏠렸다. 데니스는 대공비를 마녀로 모는 수작이 더는 통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지난번 면회했을 적 자신감에 차 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나. 데니스는 입술을 깨물었으나, 곧 평상심을 되찾았다. 감금된 상태에서 지배인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몰라도 데니스에겐 확실한 패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어차피 대공비가 마녀라는 소문은 황녀 암살 사건에 대한 그럴듯한 뒷이야기를 덧붙이기 위한 수작에 불과했다. 데니스가 유감스럽다는 듯 점잖게 끼어들었다.
“저희 신전에서는 그 물건에서 불길한 기운을 읽었을 뿐, 그에 담긴 의도까지 알고 있는 건 아닙니다. 만일 마녀라는 추측이 오해였다면 이에 대해 대공비 전하께 심심찮은 위로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신전 측에서 빠르게 대공비의 주장을 받아들이자 웅성거림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데니스의 연이은 발언은 과열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이 이시스 황녀 전하를 암살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지요. 이미 그 건에 관한 확실한 증인이 존재하니까요.”
데니스가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을 마쳤다. 나디아가 재판에 불참했기는 하나 프리모 측에서 만들어 낸 증인은 하나 더 있었다.
재판장은 데니스의 요구대로 대공비의 범죄를 주장했던 시종을 불러들였다. 기다렸다는 듯 등장한 시종은 연회장에서 했던 주장을 반복했다. 대공비가 혼란을 틈타 이시스의 잔에 약을 타 넣는 것을 보았으나, 혹 오해일 수도 있어 미처 사전에 알리지 못했다는 것이 요지였다.
시종이 발언을 끝마친 후, 데니스가 통탄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시종의 증언을 듣고 저희는 약의 특성에 주목했습니다. 독의 출처로 범인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가정 때문이었지요.”
그러고는 탁상에 놓여져 있던, 손가락 세 마디 정도 크기의 돌을 집어 들었다. 데니스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이것은 계관석입니다. 금과 은, 구리를 생산하는 광산에서 채굴되는 광석으로 대개 발연제로 쓰입니다.”
데니스는 모두가 그것을 볼 수 있도록 들어 올렸다. 피에 젖기라도 한 양 붉은빛을 띤 광석이었다. 저 돌이 무엇이기에 생뚱맞게 이 자리에 등장했을까.
데니스는 금방 좌중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이것을 분리하여 정제하면…… 저희가 익히 아는 비소가 되지요.”
그의 싸늘한 음성이 재판정을 울렸다. 데니스가 내비친 매서운 눈빛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이시스가 마신 독극물이 비소라는 사실은 그녀를 진찰했던 궁의에 의해 이미 밝혀진 상태였으니까.
데니스가 낮게 깔았던 목소리의 크기를 키우며 계관석을 흔들어 보였다.
“계관석은 빛에 약하기 때문에 어두운 곳에서 보관하다가 사용할 때만 꺼내야 하는, 몹시 까다로운 광물입니다. 정제된 형태의 비소는 황궁에서 민간인 사이의 유통을 금지해 쉽사리 구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지요. 일전에 황가에 이 독극물을 이용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음은 모두가 익히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 말에 황제가 불쾌한 듯 코를 찡긋였다. 데니스가 언급한 것이 다름 아닌 황실의 치부였기 때문이다. 피델리오 2세의 친모였던 카테리나 황비가 태황후 자리를 노리고 에델린 황후를 암살하려 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때 사용된 독극물 역시 비소였다.
이후 황궁에서는 국가에 인가를 받은 자만이 관련 약품을 유통할 수 있도록 법을 제정했다. 그것은 곧 용의자 선상이 상당히 좁혀진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아시겠지만 아탈렌타령이 있는 남부엔 수많은 광산이 존재하며, 제국에 유통되는 대부분의 광물은 그곳에서 채굴됩니다. 그들만큼 이 독극물을 구하기 용이한 이가 또 있을까요? 저는 아탈렌타가에서 보유하고 있는 이 계관석에 관해 면밀한 조사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프리모가 탐냈던 아탈렌타의 자원이 이번만은 대공의 목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었다. 사람이 하는 일엔 빈틈이 생기기 마련, 기록된 채굴량과 실제로 적재된 광석의 양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었다. 만일 아탈렌타령에서 철두철미한 관리를 해 왔다고 해도 말단 하나를 매수하는 건 눈 감고도 해치울 수 있는 일이었다.
데니스는 흡족한 기색으로 발언을 마무리했다.
“이상입니다.”
데니스는 재판장의 판결을 기다리는 눈빛으로 섰다. 그러나 재판장은 데니스의 기대를 배반하는 말을 했다.
“데니스 사제의 주장은 잘 들었소. 판결에 앞서 마지막 증인은 앞으로 나오시오.”
데니스는 의외의 상황에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다른 증인이 존재한다니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 데니스가 준비한 건 그를 배신한, 빌어먹을 암시장의 지배인과 방금 나섰던 시종뿐이었다.
혹 나디아 영애가 이제라도 참석을 결심한 것인가?
그러나 앞으로 나선 이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고, 그자의 정체는 그 의외성만큼이나 데니스를 오싹하게 했다. 아니, 어쩌면 더 충격을 받은 건 프리모 쪽이었을지도 모른다. 프리모는 아예 의자에서 일어나 난간 밖을 내다보기까지 했다. 프리모의 눈이 더없는 충격으로 물들었다.
“엘로이즈 자작가의 차녀인 아가타 엘로이즈입니다.”
아가타가 침실에서 프리모에게 늘 내보였던 것과는 다른, 총명한 눈빛을 밝히며 등장했다.
아가타 엘로이즈, 공식적으로는 엘로이즈 자작가의 영애이자 비공식적으로는 프리모 황자의 정부인 여자였다. 그녀는 모두가 알고 있지만, 동시에 누구도 공석에서는 좀처럼 입에 담지 않는 존재였다. 음지에서만 떠받들어졌기에 프리모가 후계자로 자리매김했던 황실 연회에도 초대받지 못한 여자다. 한데 당최 그녀가 무슨 사연으로 증인을 자처한 것인가? 자연히 모두의 호기심이 모여들었다.
소란이 어느 정도 잦아들었을 즈음, 아가타가 낭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이번 사건의 진범을 알고 있습니다.”
“진범이라니? 그게 누구인가?”
재판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재판이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에 등장한 충격 발언에 사건의 향방은 다시 걷잡을 수 없어졌다.
아가타가 그녀를 찌르는 시선 속에서 또박또박 대답했다.
“프리모 황자 전하이십니다.”
싸늘한 정적이 재판정에 내려앉았다. 몇몇 심약한 이들은 그만 제 입을 틀어막기까지 했다. 혼란스러운 일이었다. 좌중은 감히 아가타의 의중을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아가타는 분명 프리모의 여인이었다. 만일 프리모가 이시스를 살해하려 한 게 사실이라고 해도, 아가타는 그것을 숨겨야만 하는 입장이라는 소리였다. 황자의 비호 아래에서 대단한 위세를 펼쳐 왔던 그녀가 직접 그를 고발한 것이다.
재판장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프리모 황자 전하께서 이시스 황녀 전하를 암살하실 이유가 있나?”
“분명 육안상으로 두 분의 사이는 좋아 보였고, 황녀님께서도 황자님을 위해 무던히 힘쓰셨으나…… 황자님께서는 언제나 황녀님께 열등감이 있으셨습니다.”
연인을 고발하게 된 여자의 마지막 고뇌였을까? 아가타의 음성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황제가 불편하다는 듯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프리모가 이시스에게 묘한 경쟁심을 품고 있다는 것은 이미 궁내에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이시스는 프리모에게 늘 조언을 하는 입장이었고, 그것이 언제나 프리모의 구미에 맞아떨어진 건 아니었다. 그러나 프리모는 이시스의 말에 따라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그녀의 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 프리모는 스스로의 무능을 실감할 때마다 궁인들에게 패악을 부리는 것으로 상한 기분을 풀곤 했다.
아가타는 몹시 긴장된다는 듯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아가타가 고해하듯 마른 입술을 열었다.
“여기 계신 모두가 아시다시피 저는 이 증언으로 얻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프리모 전하와 연인 관계에 있었으며, 그분께 아주 많은 걸 받은 입장이에요. 하지만, 하지만…….”
아가타는 말을 잇다 말고 굵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그녀의 얼굴은 사랑하는 연인과 사별한 이마냥 처량했다. 실제로도 아가타는 지금 그녀의 연인과 영원한 이별을 고하고 있는 셈이었으니 그리 틀린 비유도 아니었다.
아가타가 손수건 속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꼈다.
“흐윽……, 흑. 너무도 두려웠습니다. 사람에겐 인륜이란 게 있는 법인 것을, 흑. 어찌 누이를 살해하란 명을 내리신단 말씀이십니까? 패륜을 저지른 살인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기로 한 것이 제 마지막 양심이었습니다.”
프리모로서는 어이가 없어 뒷목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시스를 죽이라고 속살거렸던 건 바로 아가타 본인이 아니었던가? 그녀의 의도가 무엇이든 지금 이 상황이 말하는 바는 분명했다.
아가타는 프리모를 배신했다.
아가타가 욕심 가득한 표정으로 무엇을 속살거렸었는지 안다면, 지금 그녀를 향해 쏟아진 동정의 시선도 금방 돌아설 것이었다. 그러나 아가타의 꼬드김을 밝힌다면 그와 함께 프리모의 범죄를 자백하게 되는 셈이었다.
프리모의 눈에 형형한 안광이 비쳤다. 당장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내어 흠씬 두들기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젯밤만 해도 제 품에서 아양을 떨었던 여자의 변심이 더없이 소름 끼쳤다. 이러한 매도를 가만히 듣고만 있다간 여론을 완전히 등지게 될 것이었다.
아가타의 오른편에 선 데니스가 재빨리 프리모를 대신해 나섰다. 그가 싸늘한 목소리로 아가타를 면박했다.
“심증일 뿐입니다. 곧 제국을 물려받으실 황자님께서 대체 왜 누이에게 열등감을 가지겠습니까? 모든 건 저 여인의 한낱 뇌내망상일 뿐입니다. 공상에 빠져 황실의 일원을 모함하다니, 본보기를 보여 저 여인을 크게 벌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 심증만으로는 아무것도 단언할 수 없네. 데니스 사제는 독의 출처 역시 파헤쳐 주지 않았나? 대공가에 대한 조사가 우선이네.”
재판장이 분위기를 수습하고자 데니스의 말을 거들었다. 그러나 데니스의 협박에 가까운 발언에도 아가타는 의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담담히 대답했다.
“예, 하지만 데니스 사제님이 제시하신 건 단순한 심증뿐이었지요. 저는 독의 출처에 관한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증거라니?”
재판장이 당황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대공비를 판결 내리는 것만도 부담스러운 상황에 계속해서 더한 거물이 등장하고 있었다. 차라리 이쯤에서 그만 덮고 넘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아가타는 분명한 열쇠를 쥐고 있는 듯 보였다. 재판장은 차마 황실 사람들이 앉은 자리에는 눈길도 주지 못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황자의 무시무시한 표정을 마주했다면 판결에 온전히 집중하긴 힘들었을 테니까.
프리모의 손은 어느새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손톱이 박혀 든 살갗이 하얗게 질려 들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이시스를 암살하며 남겼던 몇 가지 흔적들을 떠올렸다. 적들이 파헤치기엔 까다로우나 온전히 그의 편에 있었던 자라면 알 수밖에 없는.
아가타는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는 프리모의 모든 걸 알고 있는 존재였다. 한낱 여인은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리라 여겨 모든 계획을 떠벌려 왔기에!
“셀렌 영지는 지리상 아탈렌타와 같은 남부에 위치해 있지요. 셀렌 영지는 품질 좋은 다이아몬드가 채굴되는 것으로 유명하나, 그 유명세에 가렸을 뿐 다른 광석들 역시 함께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셀렌 자작 부인인 벨리타 황녀 전하께서는 이시스 황녀 전하와 오랜 악연이 있는 분이시지요.”
“그대의 주장대로라면, 암살 사건을 주동한 황실의 인원이 하나가 아니란 말인가?”
재판장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아가타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프리모 황자 전하께서는 벨리타 황녀 전하와 결탁하여 그의 형제를 살해하려 하셨습니다.”
재판장은 그만 눈을 감았다. 개인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 이미 그를 덮쳤다. 그가 침통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에 대한 증거가 있다고 말했었지. 그것이 무엇이오?”
“프리모 황자 전하와 벨리타 황녀 전하 사이에서 오간 서신입니다. 제가 직접 읽어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오.”
재판장의 허락에 아가타가 나서 서신을 꺼내었다. 지금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평가였으나, 아가타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귀족적인 우아함을 담고 있었다. 그녀가 귀에 꽂히듯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편지를 읽어 내렸다.
[사람을 보내 전하신 말씀은 확인하였습니다. 혼인 전엔 마냥 어려운 사이였는데, 이제라도 오라버니께서 손을 내밀어 주시니 기쁜 마음이 한정 없습니다. 셀렌 영지에서 피는 벨다 꽃이 잘 영글었으니 곧 담금주를 만들 때입니다. 모든 준비가 순조로우니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맛이 잘 우러나면 황궁에도 선물로 한 병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벨다 꽃은 광산 지대에서 피어나는 붉은 꽃이었다. 벨다 꽃의 외양을 아는 모두는 방금 전 데니스 사제가 들어 올렸던 계관석의 생김을 떠올렸다. 그 선명한 붉은빛을.
의심스럽게 비쳐지는 문장이긴 했으나 대개는 사건을 견지하는 태도를 놓지 못했다. 이것만으로 벨리타 황녀를 추궁할 수는 없었다. 범행에 대한 직접적인 단서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가타가 프리모의 답신을 읊기 시작했을 때, 모두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웬 담금주 타령을 하는 것이냐? 술 따위에는 관심 없으니 내가 전한 제안을 잘 생각해 봤는지나 답하라. 네년도 이시스를 처리하고 싶어 내게 말을 붙인 것 아니었느냐?]
답답했는지 프리모의 편지는 짜증스럽게 휘갈겨져 있었다. 벨리타가 은어를 섞어 가며 나름대로 행적을 숨기려 한 것과 달리, 프리모는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눈치였다.
수준 낮은 화법에 귀족들 사이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엔 일을 주먹구구식으로 처리한 동업자 때문에 막다른 길에 몰린 벨리타에 대한 약간의 연민도 섞여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데니스마저도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그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프리모가 같은 자리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었기에 그들은 곧 입을 다물었다.
프리모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가 소리쳤다.
“이는 전부 마녀의 공작이오!”
그의 항변에도 주변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재판장은 아가타에게서 편지를 받아 내용을 확인하고는, 대기하고 있던 필적 감정사에게 넘겼다. 황족의 필체는 대조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공들여 익힌 바였다. 감정사는 곧 그 글씨가 프리모의 것이 맞음을 알아차렸다. 감정사가 벌벌 떨며 말했다.
“벨리타 황녀님과 프리모…… 황자님의…… 필적이, 맞습니다.”
중압감을 견딜 수 없었던 듯, 남자는 프리모의 이름을 말할 때만은 눈을 질끈 감았다. 프리모는 그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프리모가 광인처럼 소리쳤다.
“이 모든 건 모함이야! 이시스, 네가 말해 보아라. 내가 네게 어찌 그런 짓을 하겠…….”
순간 이시스는 소름이 끼친다는 듯 프리모가 뻗은 손을 쳐 냈다. 그녀가 몸을 휘청이며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오라버니께서…… 저를……?”
그와 동시에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엔 노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프리모, 이게 정말이냐. 정말 네가 이시스를……!”
황제는 왈칵 화를 쏟아 내다가, 그만 입을 다물었다. 프리모는 그의 후계자였다. 황제까지 나서 그를 질책했다간 프리모의 세력은 회복조차 여의치 않게 될 것이다. 황제는 깊이 탄식하며 그만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황녀가 쓰러졌던 연회장마냥, 재판정의 분위기도 난장판이었다. 재판장은 혼란의 아귀 속에서 고요히 판결을 내렸다.
“판결을 내리겠소. 본 법정에서는 피고인 아스티나 반 아탈렌타의 무죄를 선고하오. 이시스 폰 피델리오 황녀 살인 미수 사건의 피고인이 달라졌으니, 조사를 거친 뒤 사흘 후 다시 재판을 개최하도록 하겠소.”
* * *
“어흐흑, 흑, 내 아들이, 내 아들이……, 흑……. 이 일을 어찌하면 좋아.”
이사벨 황후가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초상이라도 난 듯한 분위기에 시녀들은 어찌할 줄 모르고 눈치만 보았다. 이시스 황녀가 독을 먹고 쓰러졌을 때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식사도 넘기지 못한 황후는 몸도 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기실, 황후가 서 있는 현 지점을 생각하면 그리 과민한 반응은 아니었다. 프리모를 황제로 세우기 위해 그동안 들인 공이 얼마이며, 그 시간은 또 얼마인가? 손에 피를 묻히는 것도 주저 않고 모든 일을 해치워 왔거늘, 황궁에서 보냈던 30년에 가까운 세월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 것이다. 프리모가 그의 방에 구류되었다는 소식에 지난밤 황후는 까무룩 정신을 놓기까지 했다.
“황후님, 이시스 황녀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시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 기다렸던 소식에 황후가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 어서 들라 하여라.”
그녀가 이토록 반갑게 딸을 맞아들인 적이 또 없었다. 황후는 체통 없이 문가로 뛰쳐나가기까지 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이시스는 달려 나온 어미를 보고는 짐짓 당황하여 제자리에 멈춰 섰다. 황후는 감정이 북받친 듯 그대로 딸을 끌어안았다.
“이시스, 내 딸. 어쩜 얼굴이 반쪽이 되었구나.”
황후가 안쓰럽다는 듯 이시스의 뺨을 쓰다듬었다.
“자, 어서 와 앉으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구나.”
황후와 이시스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상 위엔 황후가 신경 써서 준비한 다과가 늘어져 있었다. 모두 이시스가 좋아했던 것들이었다. 황후의 딸에 대한 기억이 열세 살 무렵의 취향에만 머물러 있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이시스는 호두가 잔뜩 들어간 사과 크럼블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열병을 심하게 앓았던 열일곱 이후 견과류에 알러지가 생겨 되도록 입에 대지 않았던 탓이다. 이시스는 차만 홀짝이며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언제나 어머니에게 살갑게 말을 붙여 왔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황후는 몸이 달은 듯 이따금 손을 떨거나, 눈을 불안하게 굴리거나 했다. 이내 결심을 마친 황후가 방 안에 있던 시녀를 모두 내보냈다. 그러고는 이시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아버지는 만나 보았니? 황제 폐하께선…… 네 오라비를 어떻게 하신다니?”
“글쎄요, 저도 아직 폐하를 알현하진 못해서요.”
이시스가 여상한 태도로 대답했다. 실제로 이시스는 재판이 끝난 후 황제를 사석에서 만난 적이 없었다. 이시스가 먼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은 필히 어머니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시스, 얘야. 이 어미를 좀 보렴. 심장이 떨려 도저히 잠을 잘 수도, 식사를 넘길 수도 없구나. 분명 너도 힘들 테지만…… 이 어미를 생각해서라도 프리모를 도울 수 없겠니? 네 오라비를 용서해 달라고 폐하께 빌란 말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황후가 곧장 본론을 꺼냈다. 자연히 이시스의 입꼬리가 굳었다. 황후가 불러들였을 때부터 이미 예상한 바였지만, 막상 친모의 편애를 실제로 마주한 기분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황후가 이시스의 목숨보다 프리모의 세력을 더욱 신경 쓰고 있다는 걸 확인받은 셈이었으니까.
그녀는 딸을 죽이려 한 아들이 그리도 귀했을까. 그래서 아들의 패륜은 입에 담지도 않은 채 딸의 이해를 기대하는가.
그녀의 딸은, 그녀의 자식이 될 수 없었나?
그러나 그 미련한 기대는 새삼 이시스를 괴롭히지 못했다. 황후가 그러한 것처럼, 애석하게도 이시스 역시 그녀의 어미가 그다지 소중하지 않았다.
이시스가 자애로운 미소를 입가에 띤 채 입을 열었다.
“제가 왜요?”
“뭐?”
표정과 상반된 싸늘한 음성에 이사벨 황후는 잠시 이시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시스가 분명한 음성으로 재차 되물었다.
“제가 대체 왜 그래야 하지요?”
이시스의 반항적인 태도에 황후는 아연한 기색이 되었다. 그러나 황후는 곧 정신을 다잡았다. 프리모 때문에 죽을 뻔한 이시스로서는 저렇게 반응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시스, 그게 무슨 말이냐? 네 오라비가 없으면 네가 어찌하려고? 네 오라비가 황제가 되면 너 역시 덕을 보는 게다! 네 오라비가 실각되면 우리 모두 기회를 잃는 것이고! 어째서 이 간단한 이치를 알지 못해? 네 오라비가 실수를 한 번 했다고는 해도, 그래도 너희는 오누이다. 네가 한번 참고 넘어가 준다면 프리모가 너를 더욱 아끼지 않겠니?”
황후가 다그치듯 말했다. 이사벨 황후는 자신의 딸이 영민하다는 사실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프리모가 미워도, 그를 버렸다간 결국 이시스 역시 무너질 것이었다.
그러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시스는 황후가 처음 보는 경박한 웃음을 흘렸다. 천장에 가 닿을 만치 커다란 소리였다. 황후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딸의 낯선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시스가 한순간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기뻐하세요, 이 모든 게 어머니의 은덕이십니다. 어머니께서 프리모를 이렇듯 더없는 망나니로 길러 내신 덕에 제가 기회를 얻지 않았습니까.”
황후는 이시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꿈에라도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시스, 그게 대체……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니……?”
황후가 떨리는 음성으로 되물었다. 이시스는 입가에 걸린 조소를 지우지도 않은 채 그런 어미를 조롱했다.
“세상에, 가여운 황후 폐하. 당신의 아들에게 그 모든 계획을 생각해 낼 머리나 있었겠습니까?”
황후의 등허리부터 소름이 타고 올랐다. 이렇게까지 말하자 그녀도 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아채지 않을 수 없었다. 이시스는 지금 스스로 오라비를 궁지로 몰아넣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황후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간 이시스는 프리모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무던히도 애써 왔고, 이젠 그 결실이 눈앞에 있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 이시스가 프리모에게서 돌아선단 말인가?
계략의 시초도 짐작할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이 재판엔 너무도 많은 것들이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마녀로 몰린 대공비가 그러했고 그녀를 공격한 카라벨라 교단이 그러했으며, 그 틈새에 끼어든 나디아가 그러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썼는지 갈피조차 잡히지 않았다.
황후는 경련하는 손을 진정시키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황후가 오른손으로 왼손을 그러쥐며 말을 더듬거렸다.
“이시스, 네가, 네가 왜……?”
“프리모는 황제의 그릇이 아니었어요. 그걸 몰라보신 게 어머니가 실패하신 이유지요.”
“그래서, 네가 다른 누굴 택하려고! 네가 네 친오라비를 두고 누구와 손을 잡겠다는 말이야?!”
발악하듯 소리치던 황후는 문득, 얼마 전 궁으로 돌아온 벤자민을 상기해 냈다. 황후는 먼 과거에 치워 버렸던 황자들에겐 별다른 관심이 없었지만, 그중 벤자민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벤자민이 어릴 적부터 영민함을 드러냈기 때문이기도 하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의 누이 때문이었다. 황후는 이시스가 한때 끈 떨어진 황녀와 어울리며 별종처럼 굴었던 것을 기억했다.
에일베스, 그래. 벤자민의 누이는 바로 그런 이름이었다. 프리모가 죽인 황녀의 뒤처리를 대신 해 주었던 게 바로 이사벨 황후였기에 그 이름 정도는 외고 있었다. 에일베스가 살해당한 후 프리모에게 굽히고 들어오는 이시스를 보며, 황후는 이제야 딸이 오라비 무서운 줄 알았다고만 여겼다. 처음에 약간의 의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나 이시스가 프리모에게 충성한 게 자그마치 햇수로 8년이었다. 속내를 숨기고 도사리기엔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한데 그동안 이시스는 그저 복수의 칼날을 닦고 있었을 뿐이란 말인가?
“너, 설마 벤자민을 프리모 대신 황제로 세우겠다는 게냐?”
황후가 두 눈을 부릅뜬 채 갈라진 음성으로 물었다. 그럴듯한 추측이었으나 이시스는 그 대답에 대단한 염증을 느꼈다. 이시스가 따분히 대답했다.
“아니요.”
“그럼 누구야, 그놈이 아니면 누구냔 말이냐!”
이시스는 그만 실소를 터트렸다. 이시스가 경멸을 숨기지 않으며 황후를 흘겼다.
“어머니는 언제나 그러셨지요. 제가 앞에 앉아 있어도 보이지 않는 듯, 말해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황후는 순간 딸의 뜻을 완벽히 이해했다. 황후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도 없을 만치 커졌다. 황후가 비명 치듯 소리쳤다.
“말도 안 돼! 네가 어찌 그런 무엄한 꿈을 꾼단 말이야? 그따위 망상 때문에 지금 네 오라비의 미래를 진창으로 처박았다고 말하는 게야?”
“제가 품은 대의가 망상인지 아닌지는, 이미 증명해 드린 것 같은데요.”
이시스의 대답에 황후는 입술을 깨물었다. 실제로 이시스는 프리모를 치워 내는 데 성공했고, 황후는 궁지에 몰렸다. 그것이 너무도 분하여 황후는 제 앞에 앉은 것이 그녀의 딸이란 사실도 잊고 발악했다.
“다른 황자들은 어쩔 셈이냐? 프리모가 없어지면 그들이 가만있을 것 같니?”
“그들은 제스퍼레오가가 짓밟아 이미 위세가 땅에 떨어진 세력들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중 몇은 이미 저와 뜻을 같이하기로 했답니다.”
프리모가 벌레를 처리하듯 의미 없이 죽여 치운 황손들은 에일베스 외에도 수없이 많았다. 인간의 관계란 다면적이어서 적의 적을 같은 편으로 여기기도 한다.
미처 생각지 못한 조력자들에 황후는 숨을 들이켰다. 황후는 이시스의 빈틈을 지적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래, 그동안 숨어 있다가 나온 벤자민은 어떡하려고? 그 애가 요즘 폐하의 방에 자주 드나들고 있다는 소식은 모르나 보구나. 네가 아무리 똑똑하대도 폐하께서 황녀를 후계자로 삼으실 것 같니?”
“어머나, 이를 어쩌나. 저는 프리모처럼 멍청하지 않은데요.”
이시스가 진심으로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벤자민을 황제가 총애하는 아들로 만들기 위해 꾸준히 만남을 주선한 게 바로 이시스였다. 벤자민은 황제에게 기꺼이 이시스가 후계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속삭여 줄 터였다. 숨을 죽이고 기다린 세월 동안, 이시스는 그에 대해 퍽 그럴듯한 근거를 만들어 왔다.
“어머니, 프리모를 버리세요.”
이시스의 속삭임은 낮고 유혹적이었다. 그것은 마치 악마의 회유처럼도 들렸다.
“대공비가 누명을 벗으며 아벨라르 백작가가 큰 곤란에 처한 건 잘 알고 계시겠지요? 그와 대단한 연을 가지고 있는 제스퍼레오가 역시 아탈렌타의 불똥을 피할 수는 없을 겁니다.”
“네가, 네가 나디아에게, 그 순한 것의 귀에 계략을 속살거렸을 게 아니냐! 이런 무도한!”
“글쎄요, 이 건에 대해서만은 어머니께서도 제게 감사하셔야 할 겁니다. 나디아가 제 말을 들어 재판에 출석하지 않은 덕에, 참으로 다행히도 아벨라르 백작가는 빠져나갈 구멍이 생겼거든요.”
“뭐……?”
“아마 아벨라르 백작가는 큰 손해를 입지 않고 발을 뺄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나디아는 오라버니의 강압에 어쩔 수 없었을 거라며 대공비에게 선처를 요구해 보도록 하지요. 사람들도 못난 지아비를 품으려고 한 나디아를 동정할 겁니다.”
이시스가 그 말에 담긴 무게와는 어울리지 않게 가벼운 투로 덧붙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어머니께서 제게 협조해 주신다면요.”
황후가 배신감에 치를 떨며 표독스레 쏘아붙였다.
“미련한 것! 네가 나디아를 살리지 않으면 어쩌려고? 프리모는 네 오라비다. 아벨라르가 제스퍼레오가와의 연으로 배경이 되어 주었듯이 네게도 그러하다는 사실을 왜 몰라! 뒷받침이 될 명분을 네 발로 걷어차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과연, 북부는 오래도록 대단한 권세를 이어 왔지요.”
황후의 분노에도 이시스의 응대는 마냥 여유로웠다. 이시스는 황후의 화려한 방을 음미하듯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제 턱을 쓸며 포만감 어린 음성을 흘렸다.
“하지만 제스퍼레오가가 너무도 굳건히 제 오라비를 지지하고 있었기에, 저는 다른 세력을 찾아야 했어요.”
더 이상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거늘, 연이어 터지는 비밀에 정신을 차릴 수도 없었다. 황후는 평소의 위엄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황후가 갈라진 목으로 겨우 신음했다.
“설마, 너…… 아탈렌타를……?”
이시스는 그러한 어미를 퍽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응시했다. 대공가의 지원을 손에 넣은 덕에 어머니를 설득하는 일이 배로 순조로워졌다. 이사벨 황후는 이제 따지고 들 의욕조차 잃은 듯했다. 황후는 충격을 숨기지 못하고 그만 몸을 휘청였다. 황후가 넋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네가 우리 외가를 전부 등지고도 무사하리라 생각하니?”
“어머니, 다른 생각은 마세요. 저는 많은 걸 알고 있어요. 혼자 죽지 않을 준비도 충분히 되어 있고요. 사실, 제 관을 치우기도 전에 벌어질 그 모든 일들에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못내 궁금하기까지 하답니다.”
이시스의 경고에 황후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이시스를 건드렸다간 배로 보복이 돌아오리란 선포였다. 끔찍한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간 것도 사실이었지만, 황후는 그 계략을 제대로 검토하기도 전에 폐기해야 했다.
이시스는 프리모 세력의 주축으로 온갖 일을 처리해 왔다. 만일 이시스가 처음부터 배신할 생각이었다면 그들의 치부를 가만히 두고만 봤을 리 없었다. 황후가 무사히 이시스를 축출해 낸다고 해도, 동반 자살 외의 결말을 기대하긴 힘들 것이다.
끝내 황후의 눈에서 눈물이 배어 나왔다. 황후가 마지막 힘을 내어 끓는 원망을 소리쳤다.
“네가 네 오라비한테 어떻게! 네 오라비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어찌 사람을 이리 농락해!”
이시스는 헛웃음이라도 짓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변 상황을 조작한 건 이시스의 안배였으나 결국 이 모든 상황을 일으킨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프리모의 결정이었다. 프리모가 이시스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면 이시스도 다른 방식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이시스가 마침내 분노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말씀은 바로 하셔야지요. 프리모가 제게 해 준 것보다 제가 프리모에게 해 준 것이 월등히 더 많다는 걸, 어머니도 아시잖아요. 그 얼간이가 지금껏 사건 사고 없이 자리를 지켜 온 게 다 제 덕이란 사실을요. 기회를 얻고도 살리지 못하다니, 그야말로 모자란 작자가 아닙니까.”
“네가 오라비를 저버리고도―”
“부디 지금 당신이 마주한 현실을 보세요, 어머니! 당신의 자랑이었던 친정은 숨을 죽이고 있으며 당신이 사랑한 아들은 단두대 한 발짝 뒤에 섰으니!”
그 섬뜩한 음성에 황후는 겁에 질렸다. 황후의 입술은 이제 굳게 다물려 벌어지지 않았다. 마침내 원하는 것 앞에 다가선 이시스의 눈빛이 희열로 물들었다.
이시스는 어머니를 겁박하면서도 한 치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이것이 그녀를 지켜 온 방패막이자, 앞으로 평생을 살아갈 방식이었다.
“당신께 남은 패는 이제 하나입니다.”
“…….”
“모른 척 황제의 어미가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두 자식을 모두 잃고 황실을 어지럽게 한 죄인으로 몰려 유폐되시겠습니까?”
황후는 말없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희게 질린 살갗 위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이시스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싸늘한 눈으로 황후를 내려다보며 통고했다.
“어머니, 저를 비정한 딸로 만들지 마세요. 당신을 지킬 것이 바로 그 알량한 모녀의 정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세요.”
* * *
“이런 젠장할!”
프리모는 솟아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벽을 걷어찼다. 방에 감금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있었지만, 때때로 북받치는 울화는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 프리모가 괴성을 지르다가는 제풀에 주저앉았다. 그가 제 머리카락을 사납게 헤집으며 중얼거렸다.
“씨팔, 대체 이게 무슨…… 개 같은……!”
처음 겪어 보는 무력한 상황에 결국 그의 말끝에 흐느낌이 섞였다. 프리모는 오른손으로 아무렇게나 얼굴을 문질렀다. 몰골이 엉망이었지만 그따위 것에 신경 쓸 힘조차 없었다.
가장 그를 억울하게 하는 건, 이 상황이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이해도 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대공비가 이시스를 암살한 범인이라며 밀어붙였을 때만 해도 그는 모든 일이 잘 풀려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오판이었다. 이시스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며, 재판 후 경비대에 의해 질질 끌려 나가는 건 대공비가 아닌 바로 프리모 자신이 되었다.
본래 공개 재판을 계획한 것은 프리모였다. 프리모는 대공비가 세를 회복할 수 없도록 재판에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초대했다. 집으로 돌아간 관중들이 친지에게, 친우에게, 혹은 아랫것들에게 알아서 소문을 퍼트려 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퍼트릴 소문은 황태자가 되고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몰락한 황자에 관한 것이 될 터였다.
프리모는 재판정이라는 공간만 떠올려도 절로 이가 갈렸다. 그 위에 모습을 드러냈던 배신자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했다. 아가타 그 건방진 계집이 감히 황자를 고발할 줄, 어느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프리모는 벨리타와 주고받았던 편지가 아가타의 손에 들어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심지어 아가타가 제출한 프리모의 편지는 벨리타에게 부치지도 않았던 것이었다. 명을 마치고 봉투를 봉하려는 순간, 그도 뒤늦게 벨리타가 말한 벨다 꽃의 정체를 알아챘던 탓이다.
그는 종이를 그대로 책상 한편에 던져두고 새로운 편지를 써 내렸다. 술의 맛이 진하기를 기대하고 있겠다는 간략한 내용을 담고는, 스스로의 명석함이 마음에 들어 콧노래까지 불렀었다.
그때 보내지 않은 첫 편지를 어떻게 처리하였더라.
과거를 되짚던 프리모는 이내 눈을 번쩍 떴다. 책상 위 양초에 종이를 그대로 그을려 버리려던 와중, 아가타가 제 앞으로 다가왔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분명 대뜸 눈앞에서 옷을 벗어 내리기에 잔뜩 흥분하여 함께 침대로 돌진했었다.
다음 날 책상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고, 프리모는 아랫것들이 정리했으리라 여기고는 그대로 깔끔히 잊어버렸다. 편지는 그때 빼돌린 게 틀림없었다.
프리모는 주먹을 틀어쥐며 음산하게 말했다.
“그 찢어 죽일 년이…….”
“설마 그것, 제게 하신 말씀이신가요?”
프리모는 번뜩 고개를 들었다.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자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여자의 낯을 확인한 프리모가 황당하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아가타였다.
아가타는 평소에 비해 몹시 단출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시녀의 것과 같았다. 경비를 속이고 이곳에 숨어든 걸까. 프리모가 캐묻기도 전에 아가타가 먼저 나서 설명했다.
“경비들에게 잠시 자리를 비워 달라고 하였어요. 전하께 꼭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요.”
그러고는 열려 있던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불빛 아래에서 마주한 아가타는 몹시 수척한 모습이었다. 입술은 말랐고 뺨엔 눈물 자국이 선연했으며, 늘 당당히 펴고 다니던 어깨는 죄책감에 매몰돼 축 처져 있었다.
그러나 그 가련한 모습은 프리모에게 한 치의 동정심도 유발하지 못했다. 프리모는 몸을 일으켜 당장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네년이 여기가 어디라고 뻔뻔하게 나타나!”
아가타가 손수건을 말아 쥔 손을 들어 제 눈가를 찍었다. 그녀가 호소하듯 말했다.
“전하, 잠깐만 제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다 설명해 드릴 수 있어요.”
“뭐? 설명? 뚫린 입이라고 내 앞에서 감히……!”
“흐흑, 저도 자의로 증언을 한 게 아니었단 말이에요!”
프리모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 들었다. 그는 아가타에게 휘두르려던 손을 멈추고는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흑, 흐윽……. 이시스 전하께서 계획을 알아채시고 저를 협박하셨어요. 증언을 하지 않으면 저와 제 가족들을 모두 죽여 버리겠다고요. 전 정말 어쩔 수 없었어요. 전하……!”
“뭐? ……이시스가?”
“황녀님께선 독을 쓴 게 대공비가 아니라 황자님이라는 사실을 아시는 눈치셨어요……. 저는 너무, 너무 두려워서, 흑…….”
아가타가 결국 두 손 위로 제 얼굴을 묻었다. 프리모는 몇 차례 헛웃음을 터트리더니, 고개를 뒤로 젖히곤 크게 악을 썼다. 이제야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대충 감이 왔다. 이 모든 게 이시스의 공작이었던 것이다. 그 영악한 년이 자신을 죽이려 한 진범을 알아채고는 복수를 하려 한 게 틀림없었다. 제거하려 했던 대공비와 손까지 잡아 가며!
어차피 대공비를 마녀로 모는 판은 이시스가 짠 것이었으니, 빼내는 것도 손쉬웠을 터다. 그렇다면 모든 게 밝혀졌을 때 재판정에서 내보였던 충격받은 모습은 모두 가증스러운 연기였단 말인가. 프리모는 먼저 동생을 죽이려 했던 게 자신이라는 사실도 잊고 더없는 분노에 찼다.
그는 험악한 말을 몇 차례 씹어 넘긴 후, 곧장 제 앞에 선 좋은 먹잇감을 응시했다. 프리모는 망설임 없이 잔악한 성정을 쏟아 냈다. 아가타에게 손을 휘두른 것이다. 프리모의 손은 아가타의 얼굴 전체를 덮을 정도로 컸다. 그의 패악질에 아가타는 그대로 쓰러졌다. 신음하는 아가타를 보고도 프리모는 한 치의 안쓰러움도 느끼지 않았다.
“네 가족과 네가 죽건 말건 무슨 상관이라고 그따위 증언을 해! 버러지 같은 목숨들이나 살리자고 감히 제국을 물려받을 날 물고 늘어진단 말이냐!”
프리모는 아가타에게 다시 주먹을 휘두르려다 말고 멈춰 섰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오른 탓이다.
‘경비대원이 자리를 비웠다고 했지?’
그가 진짜로 매질해야 할 상대가 있는데 쓸데없이 힘을 뺄 필요는 없었다. 프리모는 그대로 문을 열고 나섰다. 과연 문 앞을 지키던 경비대원은 모두 자리를 비운 채였다. 프리모는 흉흉한 걸음을 떼어 곧장 이시스가 머무는 궁으로 향했다. 그를 본 궁인들은 놀라 기둥 뒤에 숨거나, 들고 있던 물건을 떨어뜨리거나 했다.
웬일인지 이시스의 궁은 경비가 삼엄하지 않았다. 프리모는 무장한 경비대원들이 아닌, 오로지 겁에 질린 시녀들만 마주쳤을 뿐이다. 몸싸움을 벌일 각오도 했는데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고 있었다.
연약한 여인들이 프리모의 앞길을 막아설 수는 없었다. 프리모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이시스의 방문을 걷어찼다. 그 흉흉한 등장에 실내에 있던 이들이 깜짝 놀라 비명 질렀다. 한눈에 보기에도 프리모는 그리 좋은 목적으로 이시스를 찾아온 것 같지 않았다. 그의 험악한 표정을 본 모두는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황녀를 보호해야 한다.
이시스를 보필하는 시녀들이 재빨리 황녀의 앞을 막아섰다. 그들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 소리쳤다.
“황자 전하! 이 무슨 법도에 맞지 않는 방문입니까!”
“황녀 전하께서는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으셨어요! 안정을 취하셔야 하니 이만 돌아가세요!”
“모두 비키지 못하겠느냐?”
싸늘히 대꾸한 프리모가 성큼성큼 이시스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저를 막아서는 시녀들을 망설임 없이 밀쳐 냈다. 폭력과 마주한 역사가 없는 귀족 여인들은 겁에 질려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마침내 프리모는 이시스의 바로 앞에 섰다. 이시스가 그런 프리모를 고요히 올려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직 감금형이 풀리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만.”
“이 가증스러운……!”
프리모가 이를 한번 맞부딪치고는 그대로 이시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그 힘이 어찌나 셌는지 이시스는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프리모의 만행을 지켜보던 시녀들이 입을 틀어막았다.
“꺄악! 황녀 전하!”
“나가서 경비를 불러! 전하, 괜찮으십니까?”
이시스를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던 보니타 영애가 보호하듯 황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프리모는 망설임 없이 보니타 영애의 머리채를 잡아 끌어냈다.
“아아아악!”
모두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상상도 하지 못한 끔찍한 폭행의 현장에 시녀들은 겁에 질렸다. 손쉽게 방해꾼들을 치워 낸 프리모가 이시스에게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이 모든 게 네가 꾸민 일이지! 이걸 다 어찌할 셈이냐!”
이시스는 그에게 쓰고 버릴 부품 같은 존재였다. 프리모가 아니었으면 그녀가 제대로 두각을 드러낼 수나 있었겠는가? 오라비가 없었다면 이시스도 벨리타마냥 그저 그런 황녀 중 하나로 머물렀을 것이었다. 프리모가 다음 대의 황제로 떠오르며 이시스 역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게 아닌가? 감히 은혜도 모르고 오라비의 목을 물어뜯다니, 프리모는 노여움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이성을 잃고 이시스의 마른 몸 위로 분노를 쏟아 냈다. 두어 차례 크게 신음하던 이시스는, 곧 완전히 축 늘어진 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방 안에는 이시스에게 쏟아지는 참담한 보복과 시녀들의 흐느끼는 소리만이 울려 펴졌다.
그러나 프리모가 이시스를 상대로 한껏 기분을 풀기도 전, 멀리서 경비대원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리모는 그제야 이시스에게서 손을 떼어 냈다. 프리모는 이시스를 발로 한 번 더 걷어차고는 그녀 위로 침을 내뱉었다.
“꺼흑!”
널브러진 이시스의 몸이 처량하게 꿈틀거렸다. 시녀들은 금수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프리모를 노려보았다.
“황녀 전하!”
“이런 끔찍한……!”
“황궁 경비대원들의 빠른 발을 감사히 생각해라. 하지만 안심은 금물이지. 내 이번 감금이 끝나고 풀려난다면 고작 이것만으로 멈추진 않을 테니.”
이시스에게 경고하듯 삿대질을 한 프리모가 이내 몸을 돌렸다. 프리모는 이시스의 방에 들이닥쳤을 때처럼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나섰다. 아무리 막무가내인 그라고 한들 지금 경비대원과 마주쳐서 좋을 게 없다는 사실 정도는 알았다. 그는 이대로 제 방으로 돌아가 모르쇠를 할 작정이었다. 궁인들의 입단속이야 이사벨 황후가 어련히 알아서 해 주지 않겠는가?
시녀들은 프리모가 사라진 걸 확인하고는 황급히 이시스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황녀님, 괜찮으십니까?”
“어찌 이런 무도한……! 천지를 가진 황제라도 지켜야 할 법도가 있거늘, 어찌 누이를 이렇게까지 욕보인단 말입니까!”
기절한 줄 알았던 이시스가 천천히 땅을 짚어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삐걱대고 있어 그 간단한 동작을 행한 것만으로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러나 머리칼에 가려진 이시스의 표정은 한없이 이성적이었다.
이시스는 싸늘한 눈빛을 지워 내며 고개를 들었다. 시녀들의 걱정을 마주한 이시스의 낯엔 어느새 더없이 가련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보니타, 아버지를 뵈어야겠다. 베일을 내주련?”
* * *
황제는 늦은 밤 뜻밖의 방문객을 맞이했다. 시종이 곤란한 얼굴로 이시스가 찾아왔다고 알린 것이다.
이시스는 여러 자식들 중에서도 황제가 가장 아끼는 딸이었는데, 사실 애정으로만 치면 프리모보다 그녀가 더 우선에 있다고 봐도 좋았다. 이시스는 일이 없어도 종종 황제를 찾아와 말동무가 되어 주는 둥 퍽 아비를 살갑게 챙겼기 때문이다. 그녀는 황제 앞에서 자신의 뜻을 내세워 알은체하지 않으면서도, 이런저런 쓸모 있는 조언을 남겨 주기도 했다.
그런 딸이 병석에서 일어나 처음으로 만남을 청한 것이다. 재판 이후 황제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어떤 손님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지만, 이시스의 방문까지 거절하지는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와 술이라도 몇 잔 나누고 싶은 심정이기도 했다. 황제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허락의 말을 전했다.
머지않아 이시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딸은 참으로 의외의 행색을 하고 있었다. 발치까지 늘어지는 긴 베일에 가려져 얼굴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황제는 조금 당황했으나, 아직 중태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딸이 초췌한 낯을 숨긴 것이라 짐작했다. 그녀가 미세하게 비틀거리는 것까지 보자 안쓰러운 마음은 더욱 커졌다.
“제국의 광영을 뵙습니다, 황제 폐하.”
황제에게 예를 갖출 때만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황제는 기특한 기색을 숨기며 인자하게 답했다.
“그래, 단둘이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구나. 와서 앉거라.”
황제는 시종을 시켜 값비싼 술을 대령하라 일렀다. 시종이 곧 발 빠르게 얼음과 술, 잔을 가져왔다.
“같이 한잔할 테냐?”
황제가 직접 병을 따기까지 하며 술을 권했으나, 이시스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아서요. 아직은 무리입니다.”
“그래…….”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황제가 머쓱하게 제 잔만 채웠다. 그러고는 안쓰럽다는 듯 이시스를 응시했다.
“……아무래도 네 오라비가 많이 미울 테지?”
“아버지, 저는 오라버니를 용서했습니다.”
그 어떤 대인배도 본인을 죽이려 한 자를 용서하기는 힘들 것을, 의외로 대답은 담백했다. 황제는 죄책감 어린 눈빛으로 이시스를 응시했다. 그도 어디까지나 프리모의 못난 성정을 방관하기만 해 온 입장이었으니까. 그것이 쌓이고 쌓여 누이에게 독을 쓰는 참담한 행각까지 다다르게 했을 것이다.
이시스가 이어 초연한 태도로 베일을 걷어 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두려움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드러난 이시스의 모습에 왕이 깊이 탄식했다. 얼굴의 흉은 심하지 않았으나 드러난 팔과 목은 온통 멍들어 있었다. 치료를 하지 않고 왔기에 상처는 멎지 않은 피로 번들거렸다. 족히 한 달은 궁내에서 칩거해야 할 정도의 상처였다.
“어서 궁의를 불러라!”
황제가 다급히 멀찍이 선 시종을 향해 소리쳤다. 깜짝 놀란 시종이 빠른 걸음으로 밖을 나섰다.
황제는 직접 일어나 이시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딸의 뺨을 어루만지려다가, 도저히 온전한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손에서 힘을 뺐다. 황제가 경악한 표정으로 신음하듯 말했다.
“누가 이런 무참한 짓을…….”
그러나 그는 어렵지 않게 범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궁의 어느 누가 감히 무참히 황녀를 폭행한단 말인가?
이시스가 왈칵 눈물을 쏟아 내며 고개를 숙였다.
“폐하, 너무도 무섭습니다. 오리버니께선 어찌 당신만을 위해 힘써 온 저를 이리 취급하신단 말입니까.”
“그놈이 결국…….”
아니나 다를까 이시스는 그의 예상과 다르지 않은 답을 내어 놓았다. 황제가 끔찍하다는 듯 눈을 감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의자 위에 주저앉으며 푹 고개를 숙였다. 차마 딸을 볼 낯이 없었다.
이시스는 호흡을 가다듬고는, 이내 차분하게 말했다.
“폐하, 그동안 제가 물심양면으로 오라버니의 흠을 숨겨 왔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계실 겁니다. 하지만 오라버니께서는 이제…… 정도를 넘어서셨어요.”
“…….”
“권좌를 얻는 데는 분명 잔혹함도 필요하나, 제왕이라면 권세를 유지해 줄 인자함 역시 갖춰야 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오라버니께선 감정이 때를 가리지 못하시니 힘을 모았던 충신들마저 후에 등을 돌릴까 두렵습니다.”
마치 저처럼요.
이시스는 뒷말을 굳이 덧붙이진 않았다. 황제야말로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테니까.
황제도 더는 프리모를 회생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황제라고 나름대로 프리모의 조사를 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는 재판정에서 밝혀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 벨리타를 시켜 이시스를 죽이려 한 건 프리모의 짓이 맞았다.
얌전히 갇혀 있기만 했어도 어떻게 이시스를 얼러 수습이라도 하겠거늘, 온통 멍 진 이시스의 몸을 보자 차마 오라비를 용서하라 말할 수도 없었다. 누이를 죽이려 한 패륜범이 적으로 돌린 건 민심만이 아니었다. 프리모는 늘 조용히 몸을 낮추고 있던 아탈렌타까지 건드렸다.
황제는 재판 직후, 아탈렌타 대공이 찾아와 남겼던 경고를 똑똑히 기억했다.
‘폐하, 저희 아탈렌타는 보은과 복수라는 양가의 감정을 결코 잊지 않습니다. 부디 현명한 결정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테리오드의 눈 밑엔 깊은 분노가 도사리고 있었다. 대공은 대공비에게 범행을 덮어씌우려 한 프리모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태세였다. 그 말은 만일 프리모의 행각을 묻으려고 한다면, 황가는 아탈렌타의 분노를 정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안 그래도 머리가 아픈 와중 교황은 교활하게도 빠르게 발을 빼냈다. 금일 예배에서 교황은 참으로 영리한 선택을 했다. 일찍이 프리모의 부정을 알고 세례 의식으로 마음의 악을 씻어 내고자 했으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며 모두의 앞에서 통탄한 것이다. 그러고는 수도에 깔린 부정한 기운이 바로 프리모 황자에게서 기인한 것이라 주장했다.
대공비를 마녀로 몰았던 데니스는 신의 뜻을 조작했다는 이유로 교단에서 내쫓겼다. 그리고 이후의 행방은 찾아볼 수 없었다. 깊이 조사하지 않아도 아탈렌타의 입김이 서린 결과라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덕분에 카라벨라의 교세는 그다지 수그러들지 않았으니 교황으로서는 나름대로 수지맞은 장사를 한 셈이었다. 수석 사제 하나를 바쳐 아탈렌타의 분노를 피했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결정이 어찌 그들처럼 쉽겠는가. 황제는 일개 수석 사제가 아닌 일국의 황자이자,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친아들을 버려야 하는 입장이었다. 황제의 미간이 깊은 고민으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는 결정을 내리는 데 긴 시간을 소요하진 않았다. 황제란 아들을 구하는 데도 수지를 따져야만 하는 자리였다. 마음의 정이 문제였을 뿐, 기실 프리모의 폐위는 고민할 만한 거리조차 되지 않았다. 모든 상황이 프리모는 버려야 하는 패라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네 말이 맞다, 이시스. 폐위는 당연한 수순이지. 하지만 그건 그 아이에게 내릴 벌과는 별개의 일이야. 가장 큰 해를 입은 것은 이시스 네 쪽이니, 되도록 네가 바라는 처분을 내리도록 하마. 내가 어찌해야 하겠느냐?”
황제가 누그러진 음성으로 물었다. 그의 딸은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권이 부담스러운 듯 잠시 머뭇거렸으나, 대답을 길게 지체하진 않았다. 이내 이시스가 입을 열어 말했다.
“오라버니는 분명 고귀한 피델리오 황가의 일원이십니다. 큰 소란을 벌여 또다시 명예를 실추시키고 싶진 않습니다. 다만 하루아침에 본인의 것이라 생각했던 자리에서 밀려나셨으니, 충격을 회복하는 데 분명 짧지 않은 기간이 필요하실 겁니다.”
이시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황제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딸의 깊은 마음 씀씀이에 몹시 감동받은 기색이었다. 이시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황제의 기대대로 현명한 답을 돌려주었다.
“황태자가 폐위되었으니 폐하께선 곧 새로운 후계자를 양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 오라버니께서 그 흐름을 가만히 두고 보시리라 생각되진 않는군요. 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오라버니께서 마음을 다스릴 수 있도록 몇 년간 지방으로 내려 보내시는 건 어떠실지요?”
황제는 직감했다. 이시스가 말한 ‘몇 년’이 정말 한두 해에서 그치진 않으리란 것을.
그러나 황제가 느낀 것은 안타까움보다는, 앓던 이가 빠진 듯한 시원함 쪽이었다. 아들을 먼 곳으로 내쫓는 것이 마음에 걸려 내내 미뤄 두었던 사안이다. 피해자인 이시스가 직접 요청한 일이라 생각하니 한결 결정 내리기가 편해졌다.
독살당할 뻔한 피해자와 가해자를 한 궁에 둘 수는 없는 법 아니겠는가?
프리모를 황궁 밖으로 내쫓지 않는다면 이시스는 내내 폭행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며 살아야 할 것이다. 프리모가 근신 명령 따위를 곧이 듣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의 몸에 새겨진 멍들이 증명하고 있었다.
이시스의 조언은 언제나 황제를 배신하지 않았다. 황제는 한결 속 시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대로 하도록 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