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남자의 여자
“부군과 함께 오실 줄 알았는데요.”
머리 위에서 들려온 말에 아스티나는 고개를 들어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자연히 활을 정리하던 손끝이 멎었다. 말을 걸어온 이가 낯선 사람이라서는 아니었다. 아스티나는 상대의 이름을 알았다. 지금의 대화가 의외라고 느낀 것은 바로 그 탓이었다.
“앤서린 후작님.”
아스티나가 놀란 음성을 숨기지 않으며 대답했다. 앤서린이 옆의 빈자리를 가리키며 앉아도 되겠느냐고 물어왔다. 아스티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의자에 앉은 앤서린은 자연스럽게 아스티나가 쥐고 있던 활을 가져갔다. 앤서린이 마저 시위를 걸어 주며 말했다.
“사냥 대회 참가는 처음이신 것 같네요.”
“예, 혼인 전엔 벨라체에 재학 중이었으니까요, 이번이 처음입니다.”
“하기야 지금이 딱 시험 기간과 맞아떨어지죠.”
앤서린이 휘파람을 불며 아스티나에게 활을 돌려주었다. 과연 깔끔한 솜씨였다.
아스티나는 내심 이번 사냥 대회의 우승은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스티나의 주 분야는 궁술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냥은 아무래도 근접전으로는 한계가 있는 분야다.
앤서린이 만면에 친절한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다행히 대공께서 부재하신 통에 이리 대화할 기회를 얻게 되었군요.”
“예,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이번 사냥 대회엔 불참하기로 하셨거든요.”
“저런, 어디가 아프시다던가요.”
걱정하는 말과는 다르게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 목소리였다. 아스티나에게 퍽 살갑게 말을 붙이고 있긴 하나 그녀도 어디까지나 트리스탄이다. 아스티나의 입가에 애매한 웃음이 스쳤다.
앤서린의 말대로 사냥 대회에 참석한 건 대공 부부 모두가 아닌 아스티나 혼자였다. 아스티나가 이시스를 혼자 만나러 갔던 것과 정확히 동일한 이유로, 이번에도 테리오드는 쓸쓸히 집을 지키게 되었다. 사람으로 머문 지 나흘이 지났음에도 아직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던 탓이다. 그것은 곧 외출 금지의 기간이 더 늘어났다는 사실을 뜻했다.
아닌 게 아니라 다른 자리면 몰라, 사냥터 한가운데에서 짐승이 되었다간 그대로 사냥당할 수도 있었다. 제국의 온갖 대단한 무예가들이 모두 참석한 대회였다. 애석하게도 늑대가 된 대공은 그들에게 우승을 안겨 줄 훈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몸에…… 열이 많으셔서요.”
아침나절의 일을 떠올린 아스티나가 애매하게 미간을 좁혔다. 외출 준비를 하는 자신을 지켜보던 집요한 눈길이 떠올랐던 탓이다. 테리오드는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자꾸 부인을 혼자 보내게 되어 걱정입니다.’
밖으로 나갈 일이 없는 테리오드는 품이 넉넉한 실내복을 입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팔짱을 끼고 선 그는 어딘지 나른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한시적 감금으로 인해 요 며칠 대공은 번잡한 사교 생활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본디 입맞춤이 테리오드에게 선물했던 건 고작 하루의 반이었다. 온전한 인간으로 산 것이 오래된 일이라 갑작스레 두 배가 된 여유는 어색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애석하게도 그 휴가를 같이 보내고 싶은 부인과는 아예 성적인 접촉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들은 잠자리의 효과가 언제까지 이어지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것도 최대한 변수를 제한해서.
마음도 통했고 몸도 혈기왕성한데 눈만 말똥말똥 뜨고 수절하는 밤이 이어졌다. 아예 경험하지 못했으면 몰라, 이젠 슬슬 한계에 가까웠다. 베개에 뒤통수를 댈 때마다 테리오드의 머릿속에선 ‘그날’의 일이 반복해서 떠올랐다.
마침내 어젯밤, 테리오드는 참지 못하고 이불 속에서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아스티나는 그가 한 뼘도 채 이동하기 전에 그의 접근을 알아챘다. 제게로 꾸물꾸물 기어 오는 음험한 손길을 아스티나는 매정한 태도로 쳐 내었다. 반사적인 저지였다.
아스티나가 뒤늦게 고개를 돌려 확인하자 테리오드는 충격받은 눈으로 제 빨개진 손등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땐 아스티나도 조금 죄책감을 느꼈다. 둘은 잘 자라는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는 그대로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아스티나가 애써 테리오드의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걱정하실 만한 일은 없으실 겁니다. 사냥이 오랜만이긴 하지만, 남들 눈도 있으니 그리 무리하진 않을 예정이라서요.’
‘그런 걱정을 하는 것은 아닌데요.’
아스티나가 소맷단을 정리하다 말고 눈을 들었다. 테리오드가 천천히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손을 뻗어 단추를 대신 여며 주었다. 테리오드가 흥얼거리듯이 말을 이었다.
‘워낙 무예가 대단하시니까요. 우승하겠다고 무리만 마세요.’
‘하면 무엇이 걱정이십니까?’
‘부인께서 혼자 가시면, 이때다 싶어 접근하는 사내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
‘방금 질투란 걸 한 참입니다.’
테리오드가 그렇게 말하고는 슬며시 눈을 내리깔아 아스티나를 내려다보았다.
아스티나는 그제야 그들 사이가 지나치게 가깝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테리오드의 손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에 감겼다. 두 입술 사이엔 꼭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 숨이 닿는 거리에서 테리오드가 속삭였다.
‘입 맞춰 주세요.’
여기서 대뜸 입술을 부딪치지 않은 건 아스티나로서도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한 것이었다. 아스티나가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안 됩니다. 잘못하면 효과가 섞일 수가 있으니까요.’
‘지난번 제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저희에겐 아주 시간이 많다고.’
표본을 모을 시간은 넉넉하니 이번엔 이쯤하고 넘어가자는 소리였다. 모닝 키스 한 번에 테리오드는 지난번의 고백까지 끌어왔다.
테리오드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아스티나는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속눈썹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만을 담고 있는 애타는 시선까지도.
농밀한 분위기의 공격에도 다행히 아스티나는 이성을 잃지 않았다. 아스티나가 손을 들어 제 입가를 덮었다. 테리오드는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그들 사이를 가로막은 손등 위에 그대로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가 아스티나의 손에 입을 맞춘 채 당부했다.
‘일찍 돌아오세요.’
그때의 숨결이 아직까지도 손등을 덥히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스티나는 잠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어 그녀가 반복해 말했다.
“예, 열이 좀 있으십니다.”
“쾌차하셨으면 좋겠군요.”
“그 인사를 대공께 전해 드리는 편이 좋을지, 아니면 저희끼리의 일로 묻어 두는 게 좋을지 사실 좀 헷갈리는군요.”
“당연히 후자가 아니겠습니까.”
앤서린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멀리서 관리인 하나가 목소리를 높여 무어라 외쳤다. 곧 대회가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아스티나와 같은 생각을 한 듯 앤서린이 반가운 목소리를 내었다.
“시작되나 봅니다.”
지루한 대기의 끝이다. 인사를 남기고 말에게로 향하려는 아스티나를, 앤서린이 붙잡아 세웠다.
“다른 일행이 없으시다면 저와 함께 다니시지 않겠습니까? 큰 짐승들은 아무래도 혼자 잡긴 버거우니까요, 많이들 일행을 꾸려 다닙니다.”
지난해 대단한 활 솜씨로 혼자 사냥감의 씨를 말렸던 앤서린이 할 말은 아니었다. 앤서린의 동행 제안은 어디까지나 사심에서 기인했다. 앤서린은 기대감을 담은 눈으로 아스티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스티나는 무심히 테리오드의 걱정은 영 쓸모가 없었다고 생각했다. 달려든다는 사내는 어디 가고 지금까지 접근한 건 여자인 앤서린 하나다.
아스티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선한 수락의 말과 함께.
“저야 좋지요.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 * *
대회가 시작하고 두어 시간 만에 아스티나와 앤서린은 사슴 두 마리 토끼 세 마리, 그리고 멧돼지를 한 마리 잡았다. 다른 누군가가 보았다면 혀를 내두를 만한 속도였다.
앤서린은 멀리 있는 사냥감을 향해서도 정확하게 활을 쏘았고, 부상 때문에 이동이 느려진 짐승의 숨통은 아스티나가 끊어 놓았다. 빠르고 철두철미한 손속에 근방에서는 더 이상 쥐새끼의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앤서린이 안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더 깊이 들어가 볼까요?”
얕은 숲에서는 작은 짐승들밖에 잡을 수 없었다. 난이도를 고려해 숲의 위치에 따라 동물의 종류를 다르게 풀어 둔 탓이었다. 초보자는 외곽 쪽에서, 그리고 덩치 큰 사냥감을 욕심내는 이들은 깊은 곳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가는 길에 뭐가 더 나올 수도 있으니 걸어서 이동하죠.”
아스티나가 그리 대답하고는 뺨에 튄 피를 닦아 냈다. 앤서린은 잠자코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잡은 사냥감을 확인하려 다가온 앤서린을 위해 아스티나는 자세를 조금 틀어 주었다.
절명한 멧돼지의 눈꺼풀을 들자 확장된 동공이 보였다. 아스티나는 눈꺼풀을 뒤집어 잡은 사람을 특정하는 도장을 찍었다. 짐 가방에서 뿔피리를 꺼내 부는 것으로 간단한 후속 절차가 모두 끝났다. 무거운 시신은 소리를 듣고 찾아온 관리인들이 수거해 갈 것이다. 일련의 자연스러운 동작을 눈에 담은 앤서린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사냥 대회는 처음이라고 하셨는데, 웬만한 경험자보다 솜씨가 나으십니다.”
“이런 본격적인 대회는 아니었지만 아카데미에서 친우들과 사냥 내기를 한 적은 있습니다. 벨라체는 신학 학교라 예배가 있는 주일엔 육식을 금했거든요.”
앤서린이 재미있다는 듯 눈을 휘었다.
“성장기 아이들에게 풀만 먹이다니 야박하군요.”
“글쎄요, 급식이 별로인 대신 학생들이 온갖 사식을 사 먹어서 그다지 효과는 없었습니다. 덕분에 이사장이 교내에 입점한 식당 점주들에게 뒷돈을 받은 게 아니냐는 소문도 들었죠. 그러니까 정확히…… 부임 후 10년 동안 내내요.”
나날이 기름지는 얼굴과 해마다 급이 올라가는 정장은 의심에 불을 붙이기 적격이었다. 아스티나는 군말 없이 급식을 먹어 치우는 편이었지만 벤자민과 아돌프가 이끌 때면 바비큐감을 약탈하는 데 참가하기도 했다.
학교 건물과 이어진 작은 숲은 이사장의 사유지였는데, 자연과 가까워지라는 명목으로 여러 초식 동물을 풀어 길렀다. 애석하게도 이사장이 아끼는 어린 사슴은 굶주린 십 대들에게 야들야들한 고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날이 줄어드는 개체에 그는 혹여 동물들이 육식에 맛을 들인 것은 아닌가 진지하게 의심해야 했다.
“학창 시절은 즐거우셨습니까?”
“시험과 기숙 생활이 재밌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아스티나가 눈썹을 들었다 내리며 답했다. 학교 생활의 재미는 젊은 시절을 추억하는 중장년들만이 아는 것이다. 그마저도 다시 돌아가라고 하면 필히 고개를 내저을 테고. 아스티나는 전생을 기억하는 죄로 만학도가 되는 형벌을 맛봐야 했다.
아스티나의 대답을 들은 앤서린이 시원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청량한 소리가 듣기 좋게 귀를 울렸다.
“하기야, 저도 세브리노에서의 일을 생각하면 좀 기가 질리는군요.”
“왜 그리 먼 곳까지 가셨나요? 트리스탄 영지에서 더 가까운 건 벨라체인 것으로 아는데요.”
“저는 무술을 전공하고 싶어 했거든요. 아시다시피 무과는 여자 입학생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고.”
앤서린이 말을 맺자마자 빠르게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말 그대로 쏜살같이 달려 나간 화살이 지나가던 짐승의 목을 꿰었다.
아스티나가 보기에 앤서린의 활 솜씨는 그야말로 발군이었다. 그런 그녀가 입학을 거절당했으니 평범한 재능의 소녀들은 꿈도 못 꿀 일이다. 하기야 귀족 영애들 중 무예를 배우려는 이도 거의 없을 테지만.
“세브리노는 어떤 분위기입니까?”
아스티나의 물음에 앤서린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앤서린이 이어 별것 아니란 듯 말했다.
“조금 트인 분위기인 것 빼면 크게 다른 점은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검이나 활 쓰는 법을 배우려는 여인들의 수가 조금 많지요.”
대륙의 대부분을 집어삼킨 나라인 만큼 카라벨라의 풍습은 지방마다 가지각색이었다. 특히 날이 춥고 식량이 부족한 북부에선 여인들도 사냥에 도가 터 있었다. 강인함이 곧 좋은 배우자의 지표인 곳이었다. 때문에 아스티나가 이번 사냥 대회에 참석을 밝혔을 때도 이상하게 여기는 이는 없었다. 북쪽의 귀부인들 여럿이 이미 출사표를 던진 상태였으니까.
앤서린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참, 벨라체에서 검술반 생도들과도 어울리셨었다고 들었는데요.”
가볍게 던진 말이었지만 그 안엔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묻어나 있었다. 앤서린이 이어 물었다.
“어떻게 연무장 사용을 허락받으셨습니까?”
“벨라체의 학생이라면 누구든 사용할 수 있는 곳인걸요.”
“그건 저희에겐 그다지 와닿지 않는 원칙이지요. 교수나 학생이나, 벨라체는 전통을 중시하는 편협한 사내들이 가득한 곳이니까요.”
앤서린이 불쾌한 듯 코웃음을 쳤다. 아스티나는 그녀의 찡긋이는 코가 몹시 유려하게 뻗어 있다고 생각했다. 아스티나가 덤덤한 어조로 대답했다.
“불만을 가진 이들에게 대련을 신청해서 모두 이겼습니다.”
앤서린의 낯에 놀라운 기색이 스쳤다. 그녀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가늠하려는 듯 아스티나의 얼굴을 살피더니, 곧 맥이 풀린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대공비의 솜씨는 방금 바로 눈앞에서 확인한 참이었다.
“결국 그거군요, 말이 나오지 않도록 밟아 누르는 것.”
앤서린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투로 말했다. 아스티나에게 향한 불쾌함은 아니었다. 아스티나는 앤서린에게로 고개를 돌리다가 문득, 그동안 생각 없이 지나쳤던 그녀의 짦은 머리칼을 눈에 담았다. 반짝이는 금발이 바람이 불 때마다 귓불을 간질이고 있었다.
아스티나가 불쑥 말했다.
“엎드려요.”
“예?”
앤서린이 그 짧은 반문을 돌려주기도 전 아스티나는 그녀의 뒤통수를 세게 내리눌렀다. 불시의 공격에 앤서린은 그만 바닥 위로 엎어졌다. 흙으로 엉망이 된 무릎에서 아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앤서린이 고개를 치켜든 것과 동시에 금속이 날아드는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화살이 그대로 바로 앞에 있는 나무에 가 꽂혔다. 대가 짧고 속력이 빠른 것을 보아 정체 모를 상대가 든 무기는 석궁인 듯했다. 화를 내려던 앤서린은 곧장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재차 화살이 날아왔다. 이번엔 다른 곳에 가 박히는 대신 앤서린의 허벅지를 스쳤다. 앤서린이 일어서려다 말고 신음하며 주저앉았다. 찢긴 바지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아스티나는 앤서린의 팔을 끌어 가까운 나무의 뒤로 숨었다.
날아드는 화살에 놀란 말들이 기겁하며 달려나갔다. 제대로 길들이지 않은 말을 타고 온 것이 패착이었다. 이런 공격에까지 당황하지 않도록 훈련하기엔 앤서린이나 아스티나나 대회까지 시일이 촉박했다.
처음엔 다른 참가자의 눈먼 화살이라고 생각했는데, 상대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보아 그들을 향한 공격이 맞는 듯했다. 아스티나와 같은 사실을 깨달은 듯 앤서린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스티나는 화살이 날아온 쪽을 확인했다.
사거리가 넓은 무기는 아니니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숨어 있을 것이다. 아스티나가 허리춤에 꽂혀 있던 장검을 꺼내 들며 속삭였다.
“후작, 2시 방향의 나무 위로 활을 쏘세요.”
아스티나가 말한 방향에서 나뭇잎이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스티나의 명령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던 통에 앤서린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다리의 통증이 심한 상태였지만, 다리 한 짝보다는 당연히 목숨 쪽이 더 중요했다. 앤서린은 나무에 가까이 붙은 상태 그대로 활을 비껴 쏘았다.
그러나 앤서린이 활을 든 것을 보자마자 상대는 나무 밑으로 뛰어내렸다. 빠르게 거리를 좁히는 모습을 보아 앤서린의 궁술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마구잡이로 날아드는 날붙이 탓에 섣불리 나무 앞으로 나설 수 없었다. 기회를 노리는 사이 삽시간에 가까워진 정체불명의 괴한이 코앞으로 달려들었다. 다만, 그의 유일한 실수를 꼽자면 앤서린의 바로 옆에 근접전의 달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는 점이다.
아스티나는 앤서린에게로 휘둘러진 검을 그대로 쳐 냈다. 남자가 당황한 기색으로 멀어졌다. 단순히 대련으로 검을 익힌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상대의 모습을 먼저 살폈을 것이다. 그러나 아스티나의 검술은 사람을 죽이는 데 최적화되어 있었고, 상대에게 여유를 주는 것은 허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스티나는 복면을 쓴 상대에게로 무섭게 달려들었다. 그가 당황한 기색으로 아스티나의 검을 받아쳐 냈다. 그러나 비껴간 검은 다시 빠르게 적에게로 쇄도했다.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공격에 남자는 점점 궁지에 몰렸다. 복부에 얕은 검상을 입은 사내가 신음했다.
“윽!”
아스티나는 공격을 피해 허리를 숙인 남자를 그대로 걷어찼다. 그가 비틀거리며 넘어졌다. 아스티나의 눈빛이 일순 싸늘하게 빛났다. 그녀는 그대로 검을 추켜세워 남자의 복부를 노렸다. 완급을 조절하면 내장을 쏟아 내는 상태에서도 잠시간은 살려 둘 수 있다. 사주한 자의 이름을 불게 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때 앤서린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
“뒤, 뒤를 보세요!”
애석하게도 아스티나의 일격은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뒤편에서 화살이 날아든 탓이었다. 아스티나는 빠르게 몸을 돌려 화살을 쳐 냈다. 날아드는 공격은 막았지만 등 뒤에는 여전히 적이 있었다. 동료의 협공을 틈타 사내가 이어 달려들리라.
공격을 예감한 아스티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그러나 날붙이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아스티나가 눈을 돌리자 벌써 저만치 달아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공격 대신 도망을 택한 모양이었다. 아스티나는 다소 얼떨떨한 기색으로 몸을 일으켰다.
현명한 선택이긴 했다. 상대가 등을 찌르려고 시도했다면 그대로 몸을 돌려 다리를 벨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나 상대가 이리 쉽게 포기하고 도망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대공비 전하, 옆으로 물러서십시오!”
뒤편에서 앤서린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스티나와 달리 앤서린의 무기는 멀리 있는 적도 상대할 수 있었다. 난전을 벌일 때는 아스티나가 다칠까 손을 쓸 수 없었지만 상대가 도망친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아스티나가 시야를 확보해 주자 앤서린은 망설임 없이 활시위를 놓았다. 연속으로 쏜 살은 도망가던 사내의 허벅지와 등에 가 박혔다. 그러나 아무래도 거리가 멀어 힘이 많이 약해진 듯, 남자는 절룩이면서도 끝까지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아스티나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부상을 입은 상대이니 추적이 불가능할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혼자라면 몰라 지금은 앤서린도 함께였다. 자리를 비웠다가 누군가 접근하면 그것이 더 큰 일이다.
아스티나는 가빠진 숨을 가다듬으며 콧잔등에 밴 땀을 닦아 냈다. 멀어지는 괴한을 바라보는 눈에 의심이 담겼다.
‘왜 둘이 있는데 혼자만 달려들었지?’
완벽한 암살을 위해서였다면 애초에 같이 행동에 나섰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상대하기 시작하자 뒤돌아 도망간 것이 마음에 걸렸다. 두 번째 습격자도 동료의 도망을 돕고는 바로 모습을 감추지 않았던가.
‘하기야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함께 해치우기엔 지나치게 거물이지, 아탈렌타는.’
아무래도 그들이 공격하려 했던 건 앤서린 하나인 듯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녀를 혼자 두고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아스티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앤서린에게로 돌아왔다. 아스티나가 앤서린의 부상을 살피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한눈에 보기에도 제법 상처가 깊었다. 출혈 때문인지 앤서린의 얼굴은 희게 질려 있었다. 그러나 앤서린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의연히 대공비를 먼저 챙겼다.
“덕분에요. 대공비 전하께선 다치지 않으셨습니까?”
“예, 전 무사합니다.”
아스티나가 그리 말하며 앤서린의 앞에 앉았다. 다리를 꿰뚫린 건 아니었지만 살이 깊게 찢겨 있었다. 근육이 상했다면 거동은 힘드리라.
혼자 환자를 업고 숲을 벗어날 자신은 없었다. 아스티나는 짧게 혀를 차고는 뿔피리를 꺼내 들었다. 반복해서 신호를 보내고는, 대충 그것을 옆으로 던져 두었다. 곧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도우러 올 것이다. 소란을 피웠으니 괴한들이 다시 접근할 염려는 덜었다.
흙 위를 굴러 옷도 더럽혀진 상태인 데다 소지하고 있는 의약품 역시 찰과상에 쓰는 연고뿐이었다. 별달리 할 수 있는 응급 조치가 없었다. 아스티나는 비교적 깨끗해 보이는 천으로 앤서린의 상처를 동여 묶었다. 앤서린이 힘없이 웃었다.
“제 목숨을 두 번 구해 주시는군요.”
아스티나가 마저 매듭을 지으며 물었다.
“짐작 가는 사주자는 없으십니까?”
화살은 오로지 앤서린에게만 날아왔던 데다 괴한이 먼저 덮치려고 했던 것도 그녀였다. 앤서린도 상대가 노린 게 대공비가 아닌 자신임을 알고 있었다. 앤서린이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
“없습니다. 이렇게 과격한 환대를 받을 만한 원한은 진 적이 없어요.”
“원한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로 벌인 일일 수도 있지요.”
“그렇다면 가장 유력한 것은…….”
앤서린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끝을 늘였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농담을 꺼낼 기력은 남은 모양이었다. 아스티나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대공비의 직위를 걸고 단언하지요, 아탈렌타는 아닙니다.”
따라 웃던 앤서린의 얼굴이 이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녀가 툭 누군가의 이름을 내뱉었다.
“에드윈…….”
아스티나는 묵묵히 앤서린의 다리를 지혈해 주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앤서린은 어딘지 멍한 표정이었다. 앤서린이 입에 담은 것은 아스티나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아스티나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후작님의 형제 말씀이십니까?”
“예, 제 죽음으로 이득을 볼 사람이, 현재로서는 그밖에 생각나지 않는군요.”
형제가 제 살해를 사주했다고 말하는 것치고 앤서린의 어조는 몹시 평이했다.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아스티나는 앤서린의 다리에서 손을 떼어 냈다. 응급 처치는 대충 마무리된 듯했다. 천이 완전히 붉게 물든 상태이긴 했지만 전처럼 피가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시진 않았다. 아스티나가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런 분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만.”
“저도 이전엔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바뀌는 법이 아닙니까.”
앤서린이 희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스티나는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앤서린이 재차 자문했다.
“모르겠군요, 정말 생각이 바뀌었다면요?”
“지금 가주직 위에 있는 건 형제분이 아니라 본인이 아니십니까.”
“대공비 전하, 제가 어떻게 가주가 될 수 있었는지 아십니까.”
앤서린의 말투는 마치 스스로를 비웃는 듯했다. 알지 못하는 일이었으므로 아스티나는 고개를 저었다. 트리스탄가의 측근들은 야망을 모르는 장남의 이야기를 애써 쉬쉬해 왔다.
앤서린이 불규칙적으로 호흡하며 말을 이었다.
“제가 태어났을 때부터, 너무 당연히도 트리스탄의 후계는 에드윈이었습니다. 하지만 에드윈은 어깨에 지워진 짐을 부담스러워했어요. 부모님과의 갈등이 대단했고, 결국 스무 살이 지나고서는 아예 집을 떠났습니다. 에드윈은 완전히 버린 자식이 되지 않는 이상 아버지가 아들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았거든요.”
“…….”
“다행히도 아버지는 남보다는 핏줄이 낫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었기 때문에 가문을 물려받는 건 제가 되었죠. 아버지가 딸보다 사위를 믿는 사내였다면 전 진작 유부녀가 됐을 겁니다.”
앤서린의 아버지는 데릴사위를 들여 빨리 손주를 얻기를 원했다. 하지만 가주직이 앤서린의 남편에게 넘어가서는 안 되었으므로 혼담이 오가기 전 먼저 딸에게 작위를 승계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머지않아 그가 불의의 사고로 숨진 탓에 그 계획은 반쪽짜리 성공으로 남았다.
앤서린은 가만히 기억 속 에드윈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7여 년이 되도록 한 번도 보지 못한 형제의 얼굴은 이제 흐릿하기만 했다.
“대공비 전하, 이건 양보받은 자리입니다. 그 말은 그가 원한다면 돌려주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앤서린의 얼굴엔 파리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앤서린의 말에 무어라 대답을 돌려주기 전, 저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드디어 사람이 오나 봅니다.”
앤서린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안도의 기색이 역력했다. 아스티나는 가타부타 말을 더하는 대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다가오는 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유력한 우승 후보가 피투성이로 돌아왔음에 당연히도 사람들은 경악에 잠겼다. 아스티나가 보기에 그리 문제 될 부상은 아니었으나 궁인들의 반응은 조금 남달랐다. 아스티나가 회복이 불가능한 상처만을 중상으로 치는 것과 별개로, 아랫사람들에겐 대귀족의 피를 보았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국가 행사 중에 벌어진 살인 미수 사건이다. 관리 부족으로 질책을 면치 못할 것은 당연한 일인 데다, 잘못하면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그들의 안색이 자연히 파리한 빛을 띠었다. 관리인은 범인의 신체적 특징과 부상 부위를 일러 주는 아스티나의 말을 제대로 받아 적지도 못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앤서린의 부상을 주최 측에 알리고 머지않아 이시스가 달려왔다. 그녀의 얼굴 역시 앤서린 못지않게 창백해진 상태였다. 이시스는 황후의 적자로서 대부분의 궁내 행사를 주관하고 있었다. 관리하의 대회에서 벌어진 사건에 이시스는 몹시 당황한 눈치였다.
이시스는 앤서린의 부상을 살피더니 황급히 궁내로 인도시켰다. 흙바닥에서 상처를 꿰맬 수는 없으니 궁의가 있는 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이시스가 나서자 상황은 삽시간에 정리되었다. 대회의 중단을 알리고 경비 대대에게 수색을 명하는 것으로 후조치가 대강 마무리되었다. 이시스는 일련의 일들을 마치자마자 곧장 아스티나를 뒤편으로 잡아끌었다.
방금의 깔끔한 일 처리와 다르게 이시스는 몹시 당황한 음성을 내었다.
“대공비, 괜찮은가? 습격에 휘말렸다면서.”
이시스는 아스티나의 팔을 잡고 몸 이곳저곳을 확인하기까지 했다. 아스티나는 다소 얼떨떨한 얼굴로 이시스의 검진을 받아들였다. 대공비에게서 이렇다 할 상처를 발견하지 못한 이시스가 다분히 안심한 얼굴로 물러났다.
“어디 다친 데는 없는 모양이군.”
“저보다는 앤서린 후작 쪽이 심하게 다쳤습니다만.”
물론 제 세력으로 삼은 대공비가 얼마나 어여쁘겠느냐만은. 아스티나가 옅은 웃음을 삼키며 이시스에게 마저 상황을 설명했다.
“앤서린 후작님만을 노린 급습이었습니다. 제가 상대하려고 나서자 줄행랑을 치더군요.”
아스티나의 말에 이시스가 당황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대가 직접 나섰다고? 위험하게 왜 그런 짓을 했는가?”
“제 몸을 지킬 정도로는 무예를 압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상대는 살수야!”
이시스가 비명 치듯 소리쳤다. 이시스의 심각한 반응에도 아스티나는 애매한 미소만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벤자민에게 아직 자신의 검 실력까지는 얻어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스티나는 자신이 정치 싸움보다는 피가 낭자한 전투판에 더욱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스티나는 진정하란 듯 이시스를 향해 양손을 펴 보였다.
“보시다시피 다치지 않았습니다.”
“하아……. 그대는 목숨이 여럿이라도 되는가?”
이시스에게 접근했던 일만 해도 까딱 잘못했다간 목숨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시스의 새로운 수하는 너무도 간이 컸다. 충격을 추스르지 못한 이시스가 제 이마에 손을 대었다. 긴 한숨을 토해 내다가는 그대로 입가를 문질렀다.
“그래도 몸 상하지 않았으니 다행이야. 그만 자택으로 돌아가 보게.”
“수사를 돕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범인의 인상착의는 이미 모두 알리지 않았나. 그대는 충격을 먼저 추스르도록 해.”
추스를 만한 충격은 없었지만, 아스티나는 잠자코 이시스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아스티나는 앤서린을 향한 공격에 휘말린 것뿐이었다. 따라서 수사에 관한 사항도 전적으로 앤서린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고 하면…….
‘대공비 전하, 이건 양보받은 자리입니다. 그 말은 그가 원한다면 돌려주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앤서린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이 묘하게 속을 어질렀지만, 지금 와 대화를 잇기엔 이미 맥이 끊겨 있었다. 아스티나는 어쩔 수 없이 다음을 기약했다.
“그럼 범인이 잡히면 기별을 부탁드립니다.”
* * *
습격 사건으로 아스티나를 번거롭게 한 건 황궁이 아닌 대공 쪽이었다. 사냥 대회에서 있었던 일을 밝히자 대공은 이시스를 넘어서는 유난을 보였다. 몸의 상처를 살피고 정황을 캐묻는, 기나긴 취조의 시간이 끝나고서야 아스티나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말하지 말 걸 그랬다는 후회가 뒤늦게 스쳤지만, 그다지 의미 있는 가정은 아니었다. 대공이 외출을 시작한다면 모두가 대공비의 안부부터 물어 올 것이다. 남들이 다 아는 사건을 혼자만 모르게 하여 대공을 바보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저녁 무렵, 아스티나는 자진 신고를 한 자신의 선견지명을 치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할하의 행사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에 황궁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사과의 편지와 함께 위로품을 보내온 것이다.
“귀한 물건들이군.”
상자 안엔 귀한 약재와 효능 좋은 연고들이 종류별로 들어 있었다. 이런 세심한 일을 황제가 행했을 리는 없으니 행사를 주관한 이시스의 지시임이 틀림없었다.
만일 습격을 숨긴 상태에서 위로품을 전달받았다면…….
‘분명 한참 서운해했겠지.’
풀이 죽어 한참 속앓이를 했을 테리오드를 상상하자 아스티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테리오드의 마음을 받아 주기로 한 이후, 아스티나는 되도록 전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무관심한 태도로 그를 상처 입혔던 일들이 그 예였다.
다행히도 이미 소란을 지난 상태였기에 하사품을 보는 테리오드의 시선은 무던했다. 그는 약간의 볼멘소리만을 내었다.
“관리에 잘못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긴 아는군요.”
사과가 없었다면 상소라도 보냈을 태세였다. 앤서린 후작을 향한 사적인 습격이었으므로 황궁만을 탓할 수는 없었으나, 어찌 됐든 경비가 삼엄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테리오드는 그 부주의함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아스티나는 하녀를 내보내고는 침대 위에 앉았다. 편지엔 관리의 미비함을 사과하는 말뿐, 앤서린의 상태는 적혀 있지 않았다.
“후작님은 잘 회복을 했을지 모르겠군요.”
“암살자에게서 구해 주신 것으로 된 일이 아닙니까. 정적 되는 가문의 가주까지 보살피시다니 과연 다정하십니다.”
아스티나는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앤서린과 이미 이전에도 여러 번 마주쳤었다는 사실은 테리오드에게 밝히지 않았다. 곤란한 일이었다. 수도에 돌아와 처음으로 마음에 든 이가 공적으로는 완전히 적대적인 입장에 있다는 건.
처음엔 아탈렌타를 떠날 계획이기라도 있었지, 아스티나는 이제 대공과 평생을 약조한 참이었다. 트리스탄의 가주와 당당하게 만날 입장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스티나는 세간의 시선을 피해 앤서린과 교류할 방도를 찾아내야 했다.
“모쪼록 범인이 빨리 잡혔으면 좋겠군요.”
“정적을 해치워 줄 살수인데도요?”
아스티나가 짐짓 꿍꿍이가 담긴 음성을 내었다. 테리오드는 피식 웃으며 상자 안에서 연고 하나를 집어 들었다.
“생명을 위협하는 자가 나돌아 다니는데 이게 어디 가문을 내세울 문제던가요.”
그가 약의 쓴 냄새를 맡으며 천천히 아스티나에게로 걸어왔다. 자연스럽게 옆에 앉고는 그녀의 머리칼을 걷었다.
아스티나는 잠자코 반대쪽으로 머리를 기울여 주었다. 침대를 짚은 손을 내려다보다가는, 불쑥 입을 열었다.
“앤서린 후작님은 형제를 의심하시더군요.”
“형제라면…… 수도로 향하던 길에 만났던 그 사내 말씀이십니까? 그, 에드윈이라 하였던가…….”
“예, 그 이름이 맞습니다.”
“글쎄요, 그런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는데요.”
역시나 테리오드의 판단도 아스티나와 같았다. 아스티나가 피식 웃었다.
“저도 그리 생각하긴 합니다. 하지만 그들 남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희로서는 알 수 없으니까요.”
테리오드와 아스티나는 앤서린이 작위를 승계받을 당시의 일을 몰랐다. 그리고 상속에서 밀려난 형제가 뒤에서 계책을 꾸미는 것은 흔한 일이다. 추측에 한계가 있었으므로 둘은 더 말을 보태지 않았다.
아스티나는 그가 제 목에 치덕치덕 연고를 칠하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암살자들을 상대하다가 난 상처도 아니고, 단순히 숲을 오가던 중 나뭇가지에 긁힌 자국이었다. 이런 조치가 필요 없을 만치 미미한 상흔이었으나 걱정받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스티나가 불쑥 말했다.
“간지럽습니다.”
약을 발라 준다기엔 그의 손이 살갗 위에 머무르는 시간이 지나치게 길었다. 그녀의 남편은 요즈음 이런 식으로 노골적인 수작을 벌이곤 했다. 테리오드가 그녀의 턱선을 가볍게 훑으며 대꾸했다.
“쉽게 보면 덧납니다, 이런 상처는.”
“역시 친절하시군요.”
아스티나가 그리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자연히 테리오드의 검지가 그녀의 아랫입술까지 미끄러졌다. 아스티나는 그대로 혀를 내밀어 그의 손끝을 핥았다. 약초의 맛이 잠시 입 안에 배어 들었다가 사라졌다.
아스티나가 짧게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쓰네요.”
테리오드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잠시간 입을 벌렸다. 이윽고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테리오드가 억울하단 듯 얼굴을 감싸며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그럼에도 손 틈 사이로 드러난 붉은빛은 숨겨지지 않았다. 그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
“……잔인하십니다, 정말.”
아스티나의 입가에 머쓱한 미소가 떠올랐다. 딱히 그를 이기려 드는 것은 아닌데, 반응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여 자꾸 더한 장난을 치게 되었다. 그더러는 참으라 하면서 자신은 종종 그를 도발하고 있으니 이도 민망한 일이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를 따라 침대 위로 엎드렸다. 그는 아직 얼굴을 가린 손을 치워 내지 않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그의 흰 손등과 빨간 이마를 번갈아 살폈다. 테리오드는 그녀가 제 허벅다리가 아닌 얼굴 쪽을 보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보니 꼭 다른 사람 손 같네요.”
아스티나가 흥미로운 목소리를 내었다. 듣고 있는 테리오드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죽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아스티나는 가만히 손을 뻗어 그의 결 좋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테리오드의 은발은 이제 완전히 예전의 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애초에 오래가는 염색은 아니었던 듯하다. 검은 물이 빠질수록 테오도르로 가리었던 테리오드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아스티나가 문득 중얼거렸다.
“색이 벌써…… 다 빠졌군요.”
그 말에 테리오드가 눈가를 가리었던 손을 치워 냈다. 테리오드에게 염색은 나름대로 행운의 상징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검은빛으로 물들였던 날 얻었던 걸 생각하면 그럴 법도 한 일이다.
테리오드는 그녀의 눈빛에 담긴 것이 아쉬움인지 반가움인지 잘 분간해 낼 수 없었다. 그가 물었다.
“마음에 드셨으면 다시 할까요.”
아스티나가 멈칫했다. 그녀는 손가락 마디에 감긴 투명한 머리칼을 잠시 빤히 응시하기만 했다. 이윽고 그녀의 고개가 천천히 좌우로 흔들렸다.
“아니요, 다신 그러지 마세요.”
‘다시는’이라니, 이상한 말이다.
과한 거부에 테리오드가 의문을 드러내기도 전 아스티나가 이어 말했다.
“이제부터 제가 은색을 더 좋아하도록 하겠습니다.”
테리오드의 목울대가 움찔했다. 그 별것 아닌 말에 심장이 발밑까지 내려앉았다. 테리오드는 빠져나갈 수 없는 구렁텅이로 흘러든 기분이었다. 그녀를 사랑하면 상처받을 것이라 마음을 다잡았음에도 결국 온 진심을 내주게 되었다. 그의 의지로 멈출 수 없는 일들이 앞으로 더욱 많이 벌어질 것 같아 두려웠다. 그녀가 내미는 것이라면 독이 든 잔이라도 선뜻 삼키고 말리라.
그녀의 손가락이 천천히 두피를 헤집었다. 테리오드는 천천히 턱을 들어 아스티나의 입술을 삼켰다. 마른 살덩이를 가볍게 축이고는 물러섰다. 그때까지 아스티나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피하지…… 않으십니까?”
테리오드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그의 아내는 그간 정확한 통계를 내고 싶다며 그를 밀어내 오지 않았던가. 아스티나가 맥 빠진 얼굴로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잠자리로 연장된 시간엔 유예가 없었어요.”
아스티나가 그리 말하며 테리오드의 위로 올라탔다.
테리오드는 잠시 후에야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입맞춤이 기능할 때는 반드시 12시간의 여유를 두어야 했다. 반드시 하루의 반을 짐승으로 지내야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입맞춤으로 저주가 풀린 상태에서 잠자리를 가졌을 때, 테리오드는 쭉 사람으로만 존재했었다.
“부인, 이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입맞춤의 경우처럼 짐승으로 머무르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 거라면…….”
아스티나가 고개를 숙여 테리오드에게 짧게 입을 맞췄다.
“효력이 다할 짬이 없게, 꾸준히 교합하면 되는 것 아닐까요?”
무엇보다 수절이 길어지면 대공이 말라 죽을 것 같았다. 지난번의 관계로 잊고 있었던 아스티나의 욕망에도 이미 불이 지펴진 상태였다.
간단히 말해, 둘 다 욕구 불만이었다는 뜻이다.
아스티나는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쓸고는, 그대로 내려와 배 위를 간질였다. 그녀의 움직임이 멈춘 종착점은 그의 복근보다 훨씬 더 단단했다.
아스티나는 빳빳하다 못해 무섭게 일어서 있는 그것을 발견하고는 눈썹을 들었다 내렸다. 아스티나는 망설임 없이 그의 바짓단을 끌어 내렸다. 튕기듯이 빠져나온 성기의 외양은 과연 흉흉했다. 몇 번의 접촉으로 이미 알고 있기는 했으나, 새삼 몹시도 거대한 물건이었다. 첫 경험이었다면 지레 겁을 먹고 줄행랑을 쳤을지도 모르겠다.
아스티나는 천천히 그 위로 내려앉았다. 속옷을 걸치고 있는 것은 아스티나뿐이었다. 고작 한 장의 천을 사이에 두고 음부가 맞닿았다. 테리오드의 흥분은 그녀의 허벅지 사이 좁은 골에 정확히 맞물려 있었다. 그녀가 의도한 바가 분명했다. 테리오드는 숨을 헐떡였다. 당장이라도 저 틈 사이로 스스로를 쏟아 내고 싶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장난치듯 손끝으로 그의 귀두를 튕겼다. 찌릿한 감각에 테리오드의 골반 근육이 조여들었다. 그녀가 엉덩이를 들어 느릿하게 하반신을 문질렀다. 그의 기둥이 클리토리스를 자극할 때마다 그녀가 미간을 좁히며 달뜬 숨을 흘렸다.
속옷은 어느새 축축해져 살갗에 완전히 달라붙어 있었다. 테리오드도 그녀의 안이 젖어 들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스티나가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속삭였다.
“젖은 것…… 느껴지시나요?”
악마의 속삭임도 이보다 사람을 뒤흔들지는 못하리라.
테리오드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뒷덜미를 감쌌다. 그대로 입을 맞추며 그녀의 위로 쏟아졌다. 한순간에 시야가 뒤바뀌었다. 거친 움직임과는 다른 조심스러운 태도로 그가 아스티나를 침대에 눕혔다.
입술에서 목덜미를 타고 내려간 혀가, 이어 봉긋한 두 살덩이에 정착했다. 테리오드는 오른손을 들어 그녀의 가슴을 쥐었다. 엄지로 유륜을 쓸자 긴장한 유두가 딱딱하게 일어섰다. 소름 끼치는 감각에 아스티나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흣…….”
동그란 살덩이를 테리오드가 그대로 한 움큼 베어 물었다. 질척이는 혀가 민감한 부위를 문지르고, 핥을 때마다 아스티나의 숨이 거칠어졌다. 가슴을 매만지던 손은 어느새 그녀의 하반신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허벅지를 벌려 그의 허리를 쓸었다. 다리 사이의 매끄러운 살이 제 살갗 위로 비벼지자 테리오드는 무심코 욕설을 지껄일 뻔했다. 그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렇게 안 하셔도 이미 한계입니다.”
“그럼 좀 더 노력해 보세요.”
아직까지 그녀는 스스로를 놓을 정도로 흥분하진 않았다. 테리오드는 조금 더 대담해지기로 했다. 그의 손끝이 완전히 젖은 음부 위로 내려앉았다. 테리오드가 엄지에 힘을 주어 음핵을 문지르자 아스티나는 그만 몸을 펄떡였다. 짜릿한 감각이 회음부 언저리에서부터 튀어 올랐다.
“하아, 앗……!”
테리오드는 거추장스럽게 가로막고 있던 천 조각을 아예 끌어 내렸다. 젖은 입구가 뻐끔이며 끈적한 액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테리오드가 갈라진 음성으로 속삭였다.
“많이 젖으셨습니다, 부인.”
아스티나는 무심코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쥐었다. 딱히 밀어내려던 건 아니었는데, 테리오드는 그런 의도로 이해한 듯 오기처럼 그녀의 하반신에 얼굴을 묻었다. 부드러운 혀가 음핵을 짓누르다가는 그대로 빨아들였다.
미끈한 뱀 같은 것이 음순을 가르고 들어왔다. 젖은 소리와 함께 여린 살들이 희롱당하고 뭉개졌다. 아스티나의 몸은 어느새 온통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더 흥분하라고 다그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테리오드가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아흑, 흐윽……! 아!”
혀가 질구까지 미끄러졌다. 테리오드는 망설임 없이 아스티나가 흘리는 흥분을 모두 받아 마셨다. 뾰족한 혀끝이 질구를 찌를 때마다 아스티나는 허리를 비틀었다. 경련하는 하복부가 불규칙하게 튀었다.
절정이 가까워졌을 즈음 아스티나는 그의 머리를 거의 쥐어뜯고 있었다. 그가 재차 음핵 위로 혀를 굴림과 동시에 시야에 불이 번쩍했다.
“아아, 아아!”
힘이 빠졌다. 아스티나는 그대로 몸을 늘어뜨렸다. 엉망으로 벌어진 다리가 뻐근했다. 잦아든 숨소리에 테리오드가 빼꼼 위로 올라왔다. 그가 확연히 즐거운 기색을 띤 음성으로 물었다.
“괜찮으셨습니까?”
칭찬을 바라는 듯한 물음이었다. 아스티나는 대답하는 대신 팔을 들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가슴과 그녀의 가슴이 맞닿았다. 살갗이 끈적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긴밀한 접촉에 테리오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음부와 그의 물건 사이엔 이제 그 어떤 방해물도 없었다.
“예, 좋았습니다.”
아스티나가 그의 귓가에 대고 들릴 듯 말 듯 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고는 밀착한 하반신을 노골적으로 쓸었다. 성난 성기가 자연히 질구와 음핵 위를 천천히 가로질렀다.
“너무 젖어서 이렇게…… 조금만 문질러도 그대로…….”
“…….”
“박힐 것처럼요.”
귀두가 뻐끔이는 입구에 완전히 맞닿아 있었다. 테리오드의 심장이 무섭도록 뛰기 시작했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받쳐 들었다. 아스티나는 팔을 뻗어 그의 성기가 정확한 위치에 오도록 했다. 그 행동은 무섭도록 노골적이어서, 테리오드는 더 이상 그 무엇도 참을 수가 없었다. 농염하게 익은 입구 속으로 테리오드는 그대로 빠져들었다.
“흐으…….”
“아흑…….”
두 남녀가 동시에 신음을 터트렸다.
천천히 밀려드는 성기에 아스티나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성의 있는 애무 탓에 통증은 없었지만 이물감이 느껴졌다. 그의 성기가 지나치게 거대한 덕분이었다.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의 표정을 살피며 뺨을 감싸 왔다.
“아프…… 십니까?”
“아니요.”
아스티나가 불규칙한 호흡을 삼키며 대답했다. 그가 온통 받아 마셨음이 분명한데도 어느새 입구는 애액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내벽이 상하는 일은 없을 테지만 대단한 압박감이 밀려왔다. 아스티나는 흘긋 시선을 내려 아랫도리를 살폈다. 아랫도리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으나 그녀는 곧 제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심지어는 아직 다 들어가지도 않은 상태였다.
“이거, 너무 커서…….”
아스티나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숨을 들이켰다. 골반이 뻐근할 지경이었다. 취했을 땐 어떻게 하였던가. 그때 자신은 아픈 것도 모르고 허리를 흔들었던 듯하다. 뒤늦게 첫 경험을 술김에 지나서 다행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티나는 두 다리를 테리오드의 허리에 감았다. 허리를 들썩여 그의 물건을 더욱 깊게 받아들였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테리오드가 낮게 신음했다. 벌어진 입구가 성기를 무섭도록 조여 오고 있었다.
“혼자 힘으로는 안 되네요.”
아스티나가 낮게 젠장, 하고 중얼거렸다. 갑자기 등장한 험한 말에 테리오드의 어깨가 빳빳이 굳어졌다. 무엇이 부인의 마음에 들지 않았나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던 탓이다. 그러나 아스티나가 생각하는 문제는 바로 그 배려심이었다.
아스티나가 이를 악물며 쏘아붙였다.
“죽을 것 같으니까 그만 쑤셔요.”
그러고는 테리오드의 어깨를 깨물었다. 뒤이어 밀려올 압박감을 미리 인내하기라도 하듯이.
잠시 망설이던 테리오드가 곧 힘주어 허리를 쳐올렸다.
“아흑……!”
아스티나의 허벅지가 빳빳하게 굳어졌다. 그녀의 다리를 쥐고 있던 테리오드는 경직된 근육을 충분히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의 입구는 지나치게 좁았으며 그의 성기에 놀랍도록 잘 들어맞았다. 옴죽이는 여성기가 그의 혼을 쏙 빼놓았다. 테리오드는 치미는 사정감을 참아 내기 위해 애썼다.
아스티나 역시 벌벌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 숨을 몰아쉬었다. 워낙 큰 물건인 탓에 어떻게 움직여도 느끼는 모든 곳이 짓눌렸다. 아스티나는 구명줄이라도 찾는 것처럼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더, 더…….”
테리오드는 제 물건을 반절 정도 빼내었다가, 그대로 느리게 쑤셔 박았다. 어느새 그의 크기에 적응한 구멍이 부지런히 그를 받아 삼켰다. 철퍽이는 소리가 침대 위를 온통 울렸다. 단단한 성기가 안으로 밀려 들어갈 때마다 아스티나는 몸을 비틀며 신음했다.
이쯤 되자 테리오드도 알 수 있었다. 아스티나는 그와의 관계에 미치도록 만족하고 있었다. 메마른 여자에게 이만큼의 열정이 숨어 있었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성기를 쑤셔 박을 때마다 그녀의 샘에선 쉼 없이 애액이 새어 나왔다.
“아흑, 응, 으! 아!”
테리오드의 움직임이 좀 더 빨라졌다. 치미는 성감에 아스티나는 무심코 다리를 오므렸다. 테리오드는 그녀의 무릎을 쥐고 벌려 더욱 제 하반신에 밀착시켰다. 끝까지 처박힌 성기에 아스티나가 비명 쳤다.
“하윽!”
좁은 구멍은 무섭도록 테리오드를 조여 왔다, 그대로 성기가 끊어져 나갈까 걱정될 정도였다. 테리오드는 숨을 헐떡이며 아스티나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만, 힘을 좀 빼고…….”
“아윽…… 힘을, 빼도, 하윽……!”
두 눈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라 말할 것도 없이 키스했다. 혀가 뭉치고 입천장을 누볐다가 타액과 숨결까지 모두 삼키는, 정열적인 입맞춤이었다. 하반신은 짐승이 움직이는 것마냥 격정적이었다. 서로의 얼굴을 감싼 채 둘밖에 없는 것처럼 접붙였다. 키스가 멎을 때마다 참았던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으, 아, 아응…….”
“흐읏.”
절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것이 분명 제정신으로 하는 첫 관계일 텐데 이토록 잘 맞다니 무섭기까지 했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둔부를 쥔 손을 놓지 못했다. 상대가 한계까지 제 안에 치닫기를 원했다. 틀어박힌 성기가 미치도록 좋았다.
테리오드가 헐떡이며 속삭였다.
“갈 것 같아요.”
“나도, 아, 으, 잠깐…….”
아스티나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테리오드가 그녀의 하반신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그의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입구를 가볍게 문질렀다. 아스티나의 허리가 경직되었다. 차고 굵은 손가락이 음순을 가르자 저도 모르게 그 부근에 힘이 들어갔다.
테리오드는 자신이 품은 욕망을 숨기지도 않은 채 말했다.
“같이…… 같이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 말하고는 그녀의 음핵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클리토리스는 이미 잔뜩 커진 상태였다. 퉁퉁 부푼 음부를 문지르자 몸이 뒤틀렸다. 그것만이라면 이렇게까지 괴롭지도 않을 텐데, 퍽퍽 처박히는 성기까지 자비 없이 움직였다. 그가 성기를 찍어 올릴 때마다 그의 엄지로 덮힌 성감대가 함께 진동했다. 아스티나는 결국 그의 팔을 내리치며 버둥거렸다. 멈추라는 표시였으나 테리오드는 그녀를 한계로 밀어부치는 것처럼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아, 그만, 흑, 이거, 이건, 하윽, 아!”
아스티나는 거의 정신을 놓고 소리 질렀다. 철벅거리는 젖은 소음이 짙어졌다. 테리오드가 그녀의 음부에서 손을 떼어 냈을 때 아스티나의 입구는 거의 경련하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시트를 쥐어뜯으며 엉덩이를 들었다. 거의 귀두 끝까지 빠져나왔던 성기가 단번에 안으로 처박혔다.
아스티나는 그대로 까무룩 눈을 감았다. 테리오드가 그녀의 위로 무너졌다. 아스티나는 겨우 팔을 들어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아직 그의 물건이 안을 채우고 있었던 탓에 여운이 쉬이 가시질 않았다. 맞붙어 짓눌린 가슴에서 심장이 뛰는 소리가 울렸다. 둘은 절정 이후 그렇게 한참을 끌어안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아스티나였다.
“부끄럽네요.”
쉰 목소리였다. 아랫도리는 온통 축축했다. 테리오드는 못내 그것이 만족스럽다는 듯 그녀의 목덜미를 깨무는 장난을 쳤다. 그러고는 그곳에 한숨을 묻었다. 그가 갈라진 음성으로 속삭였다.
“꿈 같습니다.”
“자주 하셔야 할 텐데요.”
“자주…….”
테리오드가 퍼뜩 몸을 일으켰다. 아스티나가 관계를 시작했던 본래의 목적을 상기한 모양이었다. 조금 전까지의 자신이 온통 욕망뿐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아직 빠지지 않은 성기가 순간 힘을 얻었다. 아스티나는 신음하며 그만 몸을 떨었다.
“아흑…….”
의도한 바는 아니었던 듯 그가 몹시 당황한 얼굴을 했다. 테리오드는 성기를 빼내지도 못한 채 어쩔 줄 모르며 진심을 호소했다.
“전, 그러니까 이건 저주 때문이 아니라…….”
“알아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나 역시 안다.
아스티나가 손을 들어 테리오드의 뺨을 감쌌다. 그러고는 턱을 조금 들어 그의 입술을 핥았다. 그에게 진심을 돌려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러한 분위기를 잡기에 공기는 비릿했고, 여전히 몸은 뜨거웠다. 아스티나는 제 안에서 다시 단단히 자리를 잡아 가는 그의 성기를 느꼈다. 언뜻 드러난 밑동은 온통 충혈되어 있었다. 아스티나가 피곤한 음성으로 말했다.
“처음이라 하신 것…… 거짓말은 아니셨겠지요?”
“아닙니다!”
테리오드가 큰 모욕이라도 당했다는 것처럼 튀어 올랐다. 그는 자신이 성욕 따위에 휘둘릴 저급한 인간이 아님을 열성적으로 설명했다. 그러고는 집에 머무는 동안 그녀를 만족시키기 위해 온갖 도색 서적을 섭렵했다는 사실까지 실토했다.
“그래도 실전이랑은 좀 다를 텐데요.”
그 질문에만은 테리오드가 다소 머뭇거렸다. 그가 완전히 잦아든 목소리로 겨우 대꾸했다.
“그건, 그때 많이 해서…….”
“……그때요?”
“처음…… 했을 때 말입니다.”
골이 아팠다. 아스티나는 그들의 첫 경험에 있어 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대로 그의 입술을 삼켰다. 호흡을 위해 벌어진 틈 사이로, 아스티나가 한숨처럼 말했다.
“그럼 오늘도 그만큼 해 봐요.”
* * *
“아…….”
아스티나는 몸을 일으키다가, 그대로 앓는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평소에 안 쓰던 근육을 썼더니 사지가 온통 뻐근했다. 몸은 익숙지 않은데 숙련자처럼 움직였으니 무리가 올 만도 하다.
아스티나는 겨우 고개만 돌려 창문을 살폈다. 해의 위치로 보아 거의 정오에 가까운 듯했다. 새벽 수련은 물론 오전 일과까지 물 건너간 셈이었다. 긴 잠에 정신이 몽롱했다. 아스티나는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반쯤 일어나 앉았다.
침대에서 이리 느긋이 게으름을 부린 것은 몹시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동안은 늦잠을 유발하는 집요한 애인이 없었으니까.
‘이런 여유도 나쁘지는 않나.’
아스티나는 그대로 시선을 오른편으로 돌려 ‘집요한 애인’을 내려다보았다. 바로 옆자리엔 곤히 잠든 테리오드가 누워 있었다. 아스티나는 그의 이마와 콧날, 턱끝까지 이어지는 선을 잠시간 눈에 담았다. 객관적으로 어린 인상은 아니었으나 구김살 없는 얼굴은 마치 소년처럼도 보였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코끝을 가볍게 튕겨 보았다.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아스티나는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였지만, 애석하게도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단단한 팔이 곧장 그녀의 허리를 낚아챈 것이다.
아스티나는 일어나려던 자세 그대로 시트 위에 주저앉았다.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의 허리에 이마를 기댔다. 아스티나는 그의 흐트러진 은빛 머리칼을 가만히 쓸어 넘겼다.
“깨어 계셨습니까?”
“아니요. 방금…….”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던 테리오드가 그제야 눈꺼풀을 들었다. 몇 번 눈을 느리게 깜빡이더니, 아스티나처럼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몇 시입니까?”
“글쎄요, 일단 점심때는 가까운 것 같네요.”
“그거 좋네요.”
테리오드가 불쑥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아스티나가 의아한 눈으로 내려다보자 그가 이마를 비비며 잠꼬대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
“같이 잠들고, 일어나 보니 그대가 옆에 있는 게…… 참 좋아요.”
그는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인지는 하고 있는 걸까.
그가 감싸고 있는 아랫배의 감각이 민감해졌다. 아스티나는 그의 손이 제 허벅지 사이로 파고드는 상상을 멈추기 위해 노력했다. 또 일을 벌였다간 하루를 완전히 버리고 말리라.
아스티나가 담담한 척 대꾸했다.
“그만 일어나셔야지요.”
“날이 추운데요.”
“그야 벗고 계시니까요.”
“같이 이불 속을 덥혀 주실 생각은?”
“……무척 끌리지만, 안 됩니다.”
테리오드가 웃으며 허리를 놓아주었다. 아스티나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옷을 주워 대충 걸쳤다. 침대 근처의 줄을 당겨 하녀를 부르고 테라스 창을 열었다. 기분 좋은 찬 바람이 곧장 볼을 간질였다.
뒤편에서 느린 하품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따듯한 온기가 아스티나의 몸을 감쌌다. 테리오드가 이불을 두른 채 뒤에서 끌어안아 온 것이다.
“곧 하녀 아이가 올 텐데요.”
“부부 사이가 돈독한 것이 무어 부끄러운 일이라고요.”
그리 말하며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아직 잠이 덜 깬 듯, 느릿한 움직임이었다.
불현듯 테리오드와 오후 내내 침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아스티나는 건조한 눈을 깜빡이며 창밖으로 늘어진 푸르른 수목을 눈에 담았다. 오랜 수면을 막 끝냈기 때문일까, 아니면 바뀐 잠자리에 적응이 덜 된 탓일까. 아직도 꿈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쇄골 위로 쏟아진 테리오드의 머리칼이 부스러질 듯 반짝였다. 하녀들이 잘 빨아 말려 둔 이불에선 고소한 햇빛 냄새가 났고, 어깨와 허리를 안은 따듯한 팔은 기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평화로운 오후였다. 여유롭고 따듯했으며, 노곤하고 또 편안했다.
아스티나는 무심코 뒤에 선 사내에게 등을 기댔다. 그와 시선을 나란히 하고 있어 보이진 않았으나, 단단하게 그녀를 받쳐 주는 가슴팍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이 있었다.
아스티나가 평소보다 늘어진 음성으로 말했다.
“같이 씻을까요.”
테리오드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뒤를 돌자 테리오드가 눈을 크게 뜨고 굳어 있는 게 보였다. 잠이 번쩍 깬 듯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엉망으로 뻗친 머리에 아스티나는 그만 파안했다. 당황한 모습이 덩치에 맞지 않게 귀여웠던 탓이다.
“내키지 않으시면 말고요.”
“내키지 않을 리가……. 아니, 하녀는 부른 지가 언젠데 왜 이리 늦는답니까.”
테리오드가 공연히 조급증을 냈다. 당장이라도 목욕물을 받으라 시키겠다는 태도였다. 다행히도 곧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안으로 들어온 하녀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몸을 감싸고 있는 이불을 여며 주며 목욕 준비를 부탁했다. 그런데 그대로 밖으로 나설 줄 알았던 하녀가 다른 용건을 전해 왔다.
“트리스탄 후작가에서 오후 중 방문하겠다는 기별을 전하셨는데요. 응접실을 준비해 둘까요. 아니면…….”
하녀는 묘하게 말끝을 흐렸다. 아마 잘린 말은 ‘얼씬도 말라는 말을 적당히 둘러대어 전할까요?’쯤이 될 터다. 카라벨라가 건국된 이래, 트리스탄이 아탈렌타의 저택에 개인적으로 방문하거나 초대받은 일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냥 대회 건 때문에 방문하시겠다는 건가?”
“예,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후작님께서 직접 연통을 넣으신 것으로 압니다.”
아스티나는 대답을 하기 전 무심코 테리오드를 돌아보았다. 그 역시 그녀를 보고 있었던 탓에 자연히 시선이 마주쳤다.
“……괜찮으시겠지요?”
“그야 부인께서 결정하실 일이지요.”
테리오드가 의아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의 반응처럼, 대놓고 감사 인사를 거절하는 게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상대 쪽에서 찾아오겠다며 먼저 굽히고 나왔다면 더더욱 그렇다.
“손님이 올 시간에 맞춰 저택 단장을 좀 해야겠구나. 나가는 길에 집사를 좀 불러 주련?”
“예, 목욕물도 함께 준비하겠습니다.”
“가문 간의 일이니 대공께서도 참석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되는데, 다른 급한 일은 없으십니까?”
아스티나가 어딘지 내키지 않는 음성으로 물었다. 늦장을 부리며 이불 속을 뒹굴려 했던 남편에게 구하기엔 다소 민망한 양해다. 아니나 다를까 테리오드는 선선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부인의 부탁 앞에서라면 저는 언제나 한가하지요.”
대공과 앤서린 후작이라.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아스티나는 무의식적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타인의 생명을 구했음은 분명 자랑스러운 일인데 왜 떳떳지 못한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 * *
기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회신을 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트리스탄가의 마차가 대공저에 다다랐다. 아스티나와 테리오드는 건물 밖으로 나가 직접 앤서린을 맞아들였다. 후작은 실내로 안내되는 대신, 곧장 정원으로 이어진 오솔길을 밟았다. 집사가 야외에서 손님을 대접하기를 고집한 탓이었다.
볕이 좋은 때인 데다 대공저의 정원엔 온갖 귀한 종자가 만개해 있었다. 트리스탄에게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던 집사의 과감한 결정은 대단한 만족스러운 티타임으로 이어졌다. 몸단장을 하느라 대공 부부 내외가 세세하게 지시한 사항이 없었음에도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격식 있는 인사를 나눈 후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 착석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잠시 뜸을 들이던 아스티나가 먼저 몸 상태를 물었다.
“진통 효과가 있는 약초를 몇 시간마다 씹어 주어야 하는 것만 빼면, 대충은요. 애초에 그리 깊게 난 상처는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출혈이 크지 않으셨습니까.”
“덕분에 주방장이 돼지 피로 만든 푸딩을 내오려고 하는 걸 막느라 꽤나 진을 뺐지요.”
작은 웃음이 테이블을 스쳐 지났다. 앤서린은 찻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을 들이켰다. 코끝을 스치는 옅은 흙냄새에 그녀의 미간이 일순 좁혀졌다.
아스티나는 앤서린이 도착하기 3분 전, 집사가 읊어 주었던 차의 효능을 곧장 설명했다.
“말린 비트로 우린 차입니다. 빈혈에 효능이 있다고 하더군요.”
앤서린의 표정이 곧 감탄으로 바뀌었다. 미식의 일환으로 여길 맛은 아니었으나 약의 범주로는 몹시 먹을 만한 편에 속했다.
“이리 세세하게 신경 써 주시니 감사합니다.”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돼지 피보다야 훨씬 먹기 좋군요. 저희 가문의 주방장도 식단을 짤 때 가장 유의해야 할 게 주인의 입맛이라는 사실을 좀 알아야 할 텐데요.”
“농에 여유가 넘치시니, 정말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트리스탄과 아탈렌타의 오랜 악연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았다간 제 눈을 의심했을 것이다. 아탈렌타의 일원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대공비뿐이라면 몰라, 앤서린과 테리오드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도 몹시 유순했다.
가문 간의 골은 깊었지만 막상 앤서린과 테리오드가 면 대 면으로 마주친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마저도 가주가 되고 나서부터는 한 손에 꼽힐 적은 횟수였다. 두 가주는 앙숙을 대하는 태도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잠시 결정을 보류했다.
애초에 다툼이란 대화가 성립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테리오드와 앤서린은 직접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신, 아스티나라는 완충 단계를 거치는 편을 택했다. 한시적인 평화 협정은 제법 쓸 만한 기능을 보였다.
“아직 범인은 잡히지 않았습니까?”
“황궁에서 힘을 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요.”
테리오드의 질문에 앤서린이 고개를 내저었다. 만일 다른 자리에서 아탈렌타가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면 모두가 이를 조롱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스티나의 존재로 앤서린은 이미 범인이 아탈렌타가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는 상태였다.
테리오드 역시 부인이 함께 휘말린 사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가 불쾌한 투를 숨기지도 않고 말했다.
“황궁에서 일을 벌이다니, 간이 큰 자들이로군요.”
“황궁에서 벌어진 일이라 더욱 복잡하게 되었지요. 제 사병을 들여 수색할 수가 없는 곳이니까요. 사실, 수사를 직접 주관할 수 없다 보니 불편한 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저희도 손을 더하기 불편한 위치라 심려가 큽니다. 언제든지 이런 일이 다시 벌어질 수도 있는 법 아닙니까.”
“저 때문에 안 겪어도 될 고초를 경험하셨으니, 대공비 전하께 면목이 없습니다.”
앤서린이 그리 말하며 아스티나를 응시했다. 아스티나는 언제나 그렇듯 겸양의 말을 건넸다. 앤서린에게서 돌아온 열렬한 눈빛으로 보아 공을 축소시키는 데는 그다지 효과가 없어 보였지만.
“대공 전하, 제가 대공비 전하께 대단한 신세를 져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보상 이야기에 테리오드가 교양 있게 거절을 돌려주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이어진 앤서린의 말은 단순히 그 뜻만은 아닌 듯 보였다.
“여인의 취향이란 가끔 사내에게 들려주기 민망한 구석이 있는 법이지요. 대공비 전하와 보상과 관련하여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어 보고 싶은데, 혹시 허락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테리오드는 앤서린이 하는 요구가 무엇인지 곧장 이해했다. 그가 얼떨떨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되물었다.
“두 분께서만…… 말씀입니까?”
“예.”
앤서린이 테리오드에게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꾸했다. 앤서린이 그리 말한다면 테리오드에겐 더 이상 이 자리에 남을 명분이 없었다. 인사치레와 약간의 담소로 필요한 격식은 이미 차린 상태였고, 기실 테리오드가 앤서린과 그 이상으로 할 수 있는 교류는 없었다.
그러나 자리를 비켜 달라는 말은 어딘지 모르게 테리오드를 찜찜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테리오드는 무의식적으로 아스티나를 돌아보았다. 아스티나가 잠깐의 망설임 끝에 대답했다.
“바쁘신 분을 오래 붙잡고 있었던 듯싶긴 하군요. 대공 전하, 후작님은 제가 안내해 드릴 테니 이만 들어가 보셔도 좋습니다.”
안 그래도 앤서린과 에드윈에 관해 한 번 더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던 차였다. 앤서린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진 알 수 없으나, 아스티나가 꺼낼 화제도 타인이 듣기에 적합한 주제는 아니었다. 테리오드의 앞에서 앤서린의 가정사까지 터놓을 수는 없었으므로 가능한 단둘이 있을 때 대화해야 했다.
아스티나가 그만 가 보라는 듯이 말하자 테리오드는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말을 정정하는 대신 고개만 한 번 끄덕여 보였을 뿐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 보는 것이…….”
부러 천천히 한 자 한 자 끊어 말하였으나, 아스티나는 그런 테리오드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어쩐지 버림받은 기분을 숨길 수 없었다. 테리오드는 마지막 기대로 앤서린을 응시했지만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입꼬리만 비틀었다. 테리오드는 자신이 저 우아한 낯에 왜인지 모를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자신의 피에 새겨진 트리스탄에 대한 유서 깊은 적개심은 아닌가 잠시 진지하게 고민했다.
결국 테리오드는 탁자 밑으로 주먹을 한번 쥐었다 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서는 처진 어깨가 어딘지 안쓰러웠다. 아스티나는 멀어지는 테리오드를 잠시 지켜보다가 앤서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차를 다 드셨으면 정원을 구경시켜 드릴까요.”
“그거 좋지요, 사실 다과를 다 해치우고 나면 이런 테이블엔 좀이 쑤셔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답니다. 수도의 레이디들은 이 좁은 탁자에서 뭐 그리 나누실 이야기들이 많으신지, 참 대단한 일이에요.”
취향에 맞는 제안에 앤서린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일어섰다. 아스티나는 하녀들을 물리고는 앤서린을 정원으로 안내했다. 트리스탄의 가주와 단둘이 동행함에 몇몇 이들이 꺼림칙한 기색을 보였으나, 당사자 앞에서 티를 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앤서린과 아스티나는 결국 모든 방해자를 물리치고 단둘이 남았다.
“아름다운 조경입니다.”
“예, 저 역시 바실로 올라와서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답니다. 계절 꽃의 내음이 참으로 향긋하지요.”
“과연 시간을 바칠 가치가 있는 정원이네요.”
앤서린이 그리 말하며 가까이 있는 꽃송이를 눈에 담았다. 아스티나가 선선히 대답했다.
“마음에 드시면 돌아가실 때 한 아름 엮어 선물로 드리지요.”
“아니요, 이런 꽃은 저보다는…….”
말끝을 흐린 앤서린이 꽃을 꺾고는 그것을 아스티나에게 내밀었다. 기사가 레이디를 대하듯, 경건한 움직임이었다. 앤서린이 미소 지으며 말을 맺었다.
“대공비 전하께 어울리지요.”
아스티나는 앤서린이 내민 꽃송이를 잠시간 내려다보았다. 앤서린의 눈에 약간의 의아함이 떠오를 즈음 아스티나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꽃송이를 코에 가져다 대며 아스티나가 불쑥 질문했다.
“후작님의 형제분과는 연락을 해 보셨는지요?”
앤서린의 어깨가 굳었다. 그녀가 애써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에드윈 말씀이십니까?”
“예, 지난번 가장 강력한 용의자라고 말씀하신 게 그분이 아니십니까.”
“확실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조사를 해 보셨겠지요?”
약간의 침묵 후, 앤서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공비 전하는 도무지 못 속이겠군요. 예, 황궁에 저희 가문의 불명예를 알릴 수는 없으니 개인적으로 알아보고 있는 참입니다.”
“발견하신 게 있나요?”
“아직 이렇다 할 진척은 없습니다.”
“형제분과 연락은 닿으셨습니까?”
“범인일지 모르는 사람을 직접 추궁해 보라는 말씀이십니까. 상대에게 빠져나갈 틈을 주는 꼴만 될 텐데요.”
앤서린이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맞는 말이었다. 이런 일에서 사람을 믿고 상황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어쩐지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아스티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분이 정말 범인이 맞을까요.”
“말씀드렸듯 아탈렌타가 아니라면야, 가장 큰 동기가 있는 것은 그쪽이지요.”
이상한 사건이었다.
보통 트리스탄을 습격한 자라고 하면 가장 큰 용의자는 분명 아탈렌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그들이 벌이지 않은 일에 증거가 있을 리 없고, 앤서린 역시 아탈렌타의 결백을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탈렌타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앤서린의 말처럼, 에드윈이 범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대공비께서 수련하시는 공간을 좀 구경해도 되겠습니까?”
앤서린의 말에 아스티나가 고개를 들었다. 앤서린은 이러한 화제가 그리 달갑지 않은 듯 보였다. 하기야 몇 번 만나 친분을 나누었다고는 해도 그들은 어디까지나 타인이었다.
“본래 이용하던 본가의 연무장이 아니라 내보이기 민망하지만, 원하신다면요.”
아스티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 주제로 이야기를 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연무장은 건물의 뒤편에 있었으므로 아스티나는 걷던 방향을 바꾸었다. 다소 딱딱해진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듯 앤서린이 농담 몇 마디를 주워섬겼다. 그에 아스티나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적당하기만 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호오를 판단할 수 없는 대응에 앤서린은 혼란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제 기분을 짐작하려 무던히 애쓰는 앤서린을 뒤로하고 아스티나는 목적지로 부지런히 발을 옮겼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엔 분명 변함이 없었음에도 앤서린에게서 왜인지 모를 거리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연무장에 다다르자 훈련 중인 기사들과, 외따로 떨어진 작은 무리가 보였다. 아스티나는 일사불란하게 훈련받고 있는 아탈렌타 기사들에게로 앤서린을 안내하려 했다. 그러나 앤서린이 관심을 보인 건 뜻밖에도 오합지졸 쪽이었다.
“저기 계신 분들은 아탈렌타가의 손님이십니까? 아니면 훈련생들인지요.”
히센과 아서, 제시에게로 향한 흥미 어린 눈길에 아스티나는 들릴 듯 말 듯 한 신음을 흘렸다. 히센과 제시야 얼마든지 인사시킬 수 있었지만 아서는 아니었다. 기껏 휴전 상태를 맞은 양 가문 사이에 불을 붙일 폭탄이다.
아스티나는 앤서린의 관심을 돌리려 애써 둘러대었다.
“제 본가에서 함께 온 기사와 그 제자들입니다. 아직 부족한 수준의 아이들이라 내보이기가 다소 부끄럽군요. 다른 훌륭한 기사들을 소개해 드리는 편이…….”
“아탈렌타 기사단의 용맹함이야 익히 알고 있는 바지요. 저는 완성된 보석보다는 재능 있는 원석에게 더 눈이 가는군요.”
이미 마음을 정한 듯 앤서린이 아스티나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아스티나는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하며 결국 히센에게로 앤서린을 안내했다. 부디 히센이 그간 아서의 예절 교육에 공을 들였길 바랄 뿐이었다.
아스티나는 멀찍이서 히센을 먼저 불렀다. 히센은 아서와 제시에게 대련을 시키고는 곧장 아스티나에게로 다가왔다. 낯선 얼굴과 함께 등장한 주인을 보는 눈빛엔 약간의 의아함이 떠올라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아스티나는 차분히 둘의 성명을 차례로 읊어 주었다.
“후작님, 이쪽은 제 호위이자 믿음직한 수하인 히센 오스카 경입니다. 히센 경, 이분은 트리스탄가의 가주이신 앤서린 후작님일세. 인사드리도록.”
“안녕하십니까, 후작님. 처음 인사드립니다.”
다행히도 히센은 앤서린의 성을 듣고 나서도 놀란 기색을 그럭저럭 잘 삼켜 냈다. 아스티나가 사냥 대회에서 후작의 목숨을 구했다는 소식을 이미 전해 들은 덕도 있었다.
“후작님께선 재능 있는 검사들에게 관심이 있으시다더군. 그간 훈련엔 진척이 있었나?”
아스티나의 질문에 히센은 어딘지 우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에게 제자들을 안겨 주시고 들여다보지 않으신 지 꽤 오래되었지요. 아마 놀라실 겁니다, 특히 제시의 성취가 대단하거든요.”
그리 말하며 히센이 앤서린과 아스티나를 앞으로 안내했다. 대련을 하고 있는 둘을 잘 볼 수 있는 위치였다. 히센이 경탄하듯 중얼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검 드는 법도 몰랐던 급사 아이가, 이젠 그럭저럭 쓸 만한 검사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아스티나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과연 아서와 제시의 대련은 꽤나 볼 만한 수준에 다다라 있었다. 아서가 어느 정도 제시를 봐주고 있긴 했으나, 그녀가 검을 든 기간을 생각하면 참으로 무서운 성장세였다.
앤서린이 진지한 표정으로 제 턱을 쓸었다.
“반사 신경이 꽤나 좋군요.”
“타고난 부분이죠. 누군가는 3년간 꼬박 익혀도 안 되는 것을 누군가는 단 한 번에 해내는 것을 보면 종종 재능이라는 것의 잔인함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히센이 자랑 같기도, 혹은 안타까움 같기도 한 미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아스티나가 팔짱을 끼며 말을 보탰다.
“자네는 명백히 후자 쪽이지 않나.”
“레테 백작저에 있을 적 보아 온 이들이 눈에 밟혀서요.”
“어찌 됐든 제시는 뛰어나단 소리군.”
“대공비 전하의 안목이 소름 돋을 정도로요.”
가만히 있던 앤서린이 불쑥 제안했다.
“그렇다면 수도에 온 김에 기사 시험을 치르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예?”
히센이 다소 당황하여 되물었다. 아스티나 역시 예상치 못한 표정으로 이어지는 앤서린의 설명을 들었다.
“곧 기사 시험이 예정되어 있지 않습니까. 우선 면접을 통과할 기본기는 괜찮아 보이고, 토너먼트야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영역이니까요. 이번은 고배를 마시더라도 실전 감각을 키운다 생각하고 참여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제시의 경력 때문에 생각지도 못했던 사안이었다. 그러나 당연히도 기사 시험은 반복해서 도전이 가능했다. 앤서린의 말처럼 당장 통과하지는 못해도, 그간의 배움을 시험해 볼 장이라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았다.
앤서린의 적극적인 제안에 히센은 다소 당황한 눈치였다. 히센이 횡설수설 만류의 말을 꺼냈다.
“하지만 아직 모든 걸 배운 것은 아니어서요. 부상 등의 위험도 있고…….”
“다치지 않고 익힐 수 있는 병기는 없습니다. 보아하니 대련 상대도 한정되어 있는 듯한데, 이는 좋지 않은 검 버릇을 익히기 쉬운 환경이지요.”
맞는 말이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히센 대신 가만히 있던 아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제시, 잠시 이리 와 보겠니?”
제시와 아서가 동시에 아스티나 쪽을 돌아보았다. 제시가 의아한 표정으로 아서와 맞대었던 검을 추슬렀다. 그러고는 머뭇거리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대공비가 스승과 대화를 나누러 오신 줄로만 알아 자신을 부를 줄은 예상 못한 탓이다.
쭈뼛쭈뼛 선 제시에게 아스티나가 대뜸 물었다.
“오늘 보아하니 그간 아주 열심히 훈련한 모양이더구나. 곧 열리는 기사 시험에 경험 삼아 나가 보아도 좋을 듯한데, 네 생각은 어떠니.”
너무 놀라 대답도 하지 못하는 제시 대신 아서가 대뜸 소리쳤다.
“기사 시험이라니! 기사를 대체 뭐로 아는 거야!”
히센은 희게 질린 얼굴로 냉큼 아서 가까이로 뛰어갔다. 아서의 입을 틀어막은 히센이 그를 연무장 밖으로 잡아끌었다.
“……발육은 괜찮아 종종 오해받지만 아직 열다섯도 안 된 나이입니다. 아직 예의를 잘 모르는 아이이니 무례를 용서하세요.”
아스티나는 순식간에 아서의 나이를 넷이나 깎아내렸다. 멀어지는 아서에게서 황당하다는 시선이 돌아왔지만 아스티나는 매서운 눈빛으로 반박을 내쳤다. 더 입을 열었다간 후환이 돌아올 것을 예감한 아서가 결국 얌전히 끌려 나갔다.
앤서린이 눈썹을 들었다 내리며 말했다.
“썩 좋은 동료 같아 보이지는 않는군요.”
아스티나는 담담히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히센을 먼저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아서를 먼저 저택 안으로 치워 두었어야 했다. 아스티나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대답했다.
“……저래 보여도 그럭저럭 돈독한 선후배 간입니다.”
“기사 시험을 치른다는 소리에 눈을 까뒤집는 상대가 과연 발전에 도움을 줄지는……, 글쎄요.”
앤서린이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는 가늘게 뜬 눈으로 매섭게 연무장을 둘러보았다. 앤서린은 삽시간에 제시와 아서가 외따로 훈련받고 있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망나니와 여기사 후보생이라, 그야말로 비주류들의 조합이었다.
앤서린의 표정은 그 생각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변명할 말이 없었으므로 아스티나는 침묵을 지켰다. 제시가 아탈렌타 기사단 내에서 정규 훈련을 받지 못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압도적인 성비도 그렇거니와 진심으로 여인에게 검을 가르쳐 줄 기사는 극소수였다. 그에 제시를 가르칠 만큼 뛰어난 실력자라는 조건을 더하면 적합한 스승은 히센 단 한 사람뿐이었다.
아스티나라고 해서 아탈렌타 기사단에 속한 이들의 사상을 모두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그것은 아스티나 개인의 뛰어남과는 완전히 별개의 일이었다.
“이름이 제시라고 했던가? 내 몇 가지만 묻지.”
“예? 예, 예.”
앤서린의 말에 제시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앤서린은 제시에게 검을 언제 잡았는지, 익히며 어려움을 느낀 부분은 무엇인지 등을 진지하게 질문했다. 잠깐의 질답 끝에 앤서린의 눈에 반짝임이 어렸다.
“어떻게 데려오신 겁니까?”
“근처 영지에서 급사 일을 하던 아이입니다. 우연히 마주쳤다가, 재능이 뛰어나기에 검술을 훈련시키고자 데려왔지요.”
아스티나는 제시를 패거리들에게서 구해 낸 일까지 보태어 말하지는 않았다. 타인에게 줄줄이 늘어놓기엔 지나치게 길고 또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잠시간 고민하듯 제 턱을 쓰다듬던 앤서린이, 곧 이렇게 물었다.
“대공비 전하, 제시 양을 저희 가문에서 훈련받게 하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아스티나의 눈이 커졌다. 제시는 더더욱 놀란 기색이었다. 아스티나가 표정을 가다듬으며 먼저 대답했다.
“갑작스런 제안이라…… 당장 무어라 답변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참으로 생각지 못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다분히 충동적이었던 것과 별개로 앤서린의 결정엔 그럴듯한 근거가 있었다.
“기사의 소양이란 단순히 검술에 국한되지 않지요. 군 집단도 무리의 일종이고 배척은 그다지 좋은 조건이 아닙니다. 게다가 아탈렌타 기사단에서 여기사라는 별종을 품은 역사는…… 애석하게도 단 한 번도 없으니까요.”
앤서린이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저희 가문에선 여기사와, 훈련 중인 지망생들이 이미 여럿 있습니다. 대공비께서 훌륭한 일을 하신 걸 부정하려는 건 아니지만, 환경 자체만 따져 놓고 보자면 어느 쪽이 더 그녀에게 이로울지는 분명해 보이는군요.”
아스티나는 무의식적으로 제시 쪽을 돌아보았다. 아스티나는 분명 제시의 은인이 맞았으나, 객관적으로 그녀가 제시에게 그리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앤서린의 말마따나 아탈렌타 기사단은 여기사를 받아들인 역사가 없었다. 대공비의 권위는 일시적으로 분란을 사그라트릴 수는 있으되 진정한 교류를 선물해 줄 수는 없으리라.
“어디까지나 제 도움이 필요해질 경우의 이야기지만요.”
앤서린이 부담 갖지 말라는 듯 가벼운 어조로 덧붙였다. 그럼에도 경험에서 나온 충고의 무게는 여전했다.
아스티나는 결국 한 수 뒤로 물러섰다.
“……제시와 나중에 따로 의논해 보도록 하지요.”
* * *
과연 아탈렌타 저택은 제시에게 좋은 환경이 될 수 있을까.
아스티나는 왼손에 턱을 괸 채 관자놀이를 가만히 두드렸다. 물론 자신이 제시를 가문에 들이고, 히센으로 하여금 검을 배우도록 한 것은 맞았다.
그러나 이제 제시는 벨루아의 보잘것없는 급사가 아닌 제법 괜찮은 인재가 되어 있었다. 아탈렌타가에 머무는 것 말고도 좋은 선택지들이 여럿 생겨났다는 뜻이었다. 그중에서 앤서린의 제안은 가장 우위에 있었다. 트리스탄은 여기사를 육성할 좋은 뒷받침이 있는 가문이었다. 여성 가주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타 기사단에서 받을 견제의 반은 사라질 것이다.
앤서린이 돌아간 후 나눈 대화에서 제시는 아직 잘 모르겠다는 답변을 돌려주었다. 아마 그것은 정에서 기인한 판단이었으리라. 아스티나 역시 제시를 아탈렌타 가문 밖으로 보내고 싶진 않았지만,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는 충고를 건네지 않을 수 없었다.
때로 의리는 사람의 가능성을 주저앉히기도 한다.
“대공비 전하, 도착했습니다.”
바깥에서 들려온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스티나는 마차 밖으로 조용히 내려섰다.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는 아스티나를 안내했다.
이제 이시스의 방으로 향하는 길은 마냥 익숙했다. 대공비와 황녀의 교류에 황제는 은근히 반가운 기색을 비쳤다. 아스티나가 후계자의 잔을 찾아 준 일로 세력을 합칠 가능성을 본 탓이었다. 황제는 이시스와 대공비의 부지런한 만남이 프리모를 위한 관계 구축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왔는가.”
아스티나가 인사를 꺼내기도 전에 돌아온 환대였다. 이시스는 자리에 앉아 이미 아스티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그 건너편으로 가 앉았다.
“그대가 먼저 만나자고 청하다니, 별일이로군. 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건 마냥 내 쪽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사냥 대회에서의 사건으로 여러 신세를 지지 않았습니까. 마땅히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지요.”
“관리의 부족함을 책하지 않는 것만도 황궁에선 고마운 상황 아닌가? 내가 저택으로 보낸 뇌물은 잘 받아 보았는지 모르겠어.”
이시스가 그리 말하며 뒤편에 선 시녀를 향해 손짓했다. 조용히 다가온 시녀가 아스티나의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코끝을 간질이는 향은 정확히, 황제에게 후계자의 잔을 돌려줄 때 요구했던 차종과 같았다. 아스티나가 손끝으로 잔의 윗면을 문지르며 말했다.
“역시 기억력이 좋으시군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챈 이시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손님을 초대했으면 마땅히 취향에 맞는 것을 대접함이 맞지.”
“‘취향에 맞는’이라…….”
아스티나는 이시스의 대답을 입 안에 가볍게 한번 굴려 보았다. 그러고는 여상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그러셨습니까?”
“그래서라니, 무슨 말이지?”
이시스가 시녀를 방 밖으로 물리며 질문했다. 그에 아스티나가 짧게 답했다.
“앤서린 후작 말씀입니다.”
닫힌 문으로 향했던 이시스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왔다. 다시 아스티나를 향한 이시스의 눈이 차게 빛났다. 아스티나는 그런 이시스를 무심히 마주 보았다.
잠깐의 침묵 끝에 이시스가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짐작이었습니다. 역시 황녀 전하께서 명하신 일이 맞았군요.”
“내가 지금 유도 신문에 걸려들었다는 건가?”
이시스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흘렸다. 아스티나 역시 의심만 했을 뿐 확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레 찔려 진실을 실토하게 된 이시스가 불편한 기색으로 턱을 문질렀다.
“그대는 모든 걸 다 꿰뚫어 본 것처럼 말하는 대단한 재주가 있군, 내가 졌어.”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아스티나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고는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앤서린과 사냥 대회에서 있었던 사건에 관해 대화하며, 아스티나는 계속해서 범인을 짐작했었다.
가장 우선으로 둬야 하는 건 앤서린 후작이 다침으로써 누가 득을 보느냐였다. 유력한 후보인 에드윈과 아탈렌타가 범인이 아니라면, 다음으로는 그 둘을 통해 이득을 얻을 자를 생각해야 했다.
“나는 아탈렌타의 원조를 약속받았고 트리스탄은 그의 정적이지. 프리모의 옆에 설 확률이 높은 가문의 세를 깎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이시스가 덤덤히 설명했다. 앤서린과 아스티나의 친분은 타인은 모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점을 생각하더라도 이시스의 행동 쪽이 더 합리적이라는 사실은 다르지 않았다.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인연보다는 유서 깊게 내려온 가문의 원한이 더 깊을 테니까.
“그래서 그녀에게 암살자를 보내셨습니까?”
“암살이 목적이었다면 더 많은 수를 보냈겠지.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네. 아는지 모르겠지만 앤서린 후작에겐 작위를 물려받지 못한 오라비가 하나 있어. 의심의 화살은 그쪽으로 돌아가겠지. 아마 후작은 지금 가문 내의 불순종자를 걸러 내느라 정신이 없을 거야.”
이시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시스의 목표는 단순한 위협이었다. 앤서린 후작이 이 공격을 형제의 것으로 착각하여 가문 내의 분쟁으로 주의를 돌리게 만드는 것.
대공비가 습격에 말려든 건 이시스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앤서린을 대공비가 숲 밖으로 인도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얼마나 놀랐던가. 소중한 수하가 다치지 않았다는 소식에 이시스는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었다.
비밀이 완전히 밝혀진 상황이었으므로 이시스는 그간 눌러 왔던 의문을 꺼냈다.
“한데 대체 어쩌다 트리스탄의 가주와 함께 다니게 된 건가? 그대가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내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다행히 일을 시킨 자들이 멍청하지는 않아 그대를 건드리진 않았지만…….”
그러나 궁금증 어린 시선에도 아스티나는 그저 침묵했다. 자신을 위해 멋대로 다른 사람을 해치려 했다는 황녀에게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고마움을 먼저 느껴야 할지 잘 분간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스티나는 알았다. 이시스가 당연한 행동을 했다는 것을. 이시스의 자비 없음은 그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패였다. 먼저 상대를 찌르지 않으면 뼈를 내어 줘야 하는 게 그녀의 삶이었으리라.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음이 표정 밖으로 드러났을까. 아스티나를 빤히 지켜보던 이시스가 툭 내뱉듯이 말했다.
“표정이 별로 좋지 않군.”
“…….”
“이런 내가 이해가 가지 않는가?”
이시스가 늘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 움직임엔 흐릿한 피로감이 묻어났다.
“그대는 아탈렌타의 사람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앤서린 후작을 적으로 여기기가 힘들겠지. 하지만 가문 간의 알력이란 비정해. 내가 이 황궁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문제가 될 싹은 미리 잘라 내야 한다는 거야. 상대가 머리를 키워서 나를 공격하기 전에.”
아스티나는 이시스의 말에 별다른 반박을 돌려줄 수 없었다. 자신이 황녀였다고 해도 그런 선택을 내렸을 가능성이 높다. 아스티나가 앤서린의 상처에 분노한 것은 그녀와 사적인 친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황녀에게 알리지 않은 게 잘못이었을까?
아스티나는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가 놓았다. 이시스를 움직이는 건 정이 아닌 합리성이었다. 후작이 대공비에게 품은 호감을 말해 봤자 이시스는 코웃음만 칠 것이다. 아스티나가 잠깐의 망설임 끝에 말했다.
“……앤서린 후작은 프리모 전하의 편에 서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확신하지?”
“사석에서 대화를 한 번이라도 나눈다면 앤서린 후작은 그에 대한 지지를 곧장 철회할 겁니다. 그녀는 마티나의 열렬한 추종자이니까요.”
아스티나는 잔뜩 신이 나서 마티나 여제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던 앤서린을 기억했다.
사람을 움직이는 가장 큰 동기는 보통 실리이나, 그렇다고 모든 관계가 이성적으로만 작용하지는 않는다. 품고 있는 사상이 완전히 반대편에 있는 자를 주군으로 삼기는 쉽지 않으리라.
아스티나의 말에 이시스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프리모가 상대를 파악도 하지 않고 앞에서 심기를 거스를 말을 꺼낼 얼간이는…….”
그러나 이시스는 좀처럼 말을 끝맺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결국 그녀가 이마를 짚으며 탄식했다.
“맞군.”
프리모는 이미 초면에 대공비의 앞에서 마티나를 모욕한 전적이 있었다. 그것을 제지했던 게 이시스 본인이었으니 따로 변명할 말이 없다.
프리모가 해야 할 말과 하면 안 될 말을 거르지 못하는 건 그가 멍청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타인을 배려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아왔다. 프리모의 잘못으로 피해를 입는 것은 결코 그 본인이 아니었다. 수업을 듣지 않고 밖을 쏘다니던 어린 황자의 책임을 황궁 교사가 대신 져야 했던 것처럼.
“앤서린 후작은 건드리지 마세요.”
아스티나의 경고에 이시스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대는 내 대단한 원군이야. 그대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지. 하지만 앤서린 후작이 우리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이라 단언할 수 있는가?”
“제가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자신감 있는 대답에 이시스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번 사건으로 대공비는 앤서린 후작의 생명을 구한 은인이 되었다. 후작이 가문 간의 관계 개선에 뜻을 둔다면 잠깐의 유예는 주어도 좋으리라.
“말도 안 되는 얘기를 꽤 믿음직스럽게 하는군. 좋아, 그대에게 기회를 주지. 아무래도 그대는 앤서린 후작이 몹시 마음에 든 것 같으니까.”
“예, 제가 황녀님을 돕기로 한 것과 정확히 같은 이유로요.”
아스티나가 미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시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는 아스티나를 응시했다. 아스티나가 마지막으로 주지하듯 말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황녀님은 앤서린 후작에게 사과하셔야 하실 겁니다.”
이시스는 자신이 재밌는 내기에 걸려들었음을 알아챘다. 이시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대꾸했다.
“후작이 프리모의 번견이 되지 않는다면, 기꺼이.”
들어왔을 때와 반대로 분위기는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아스티나는 이만 가 보겠다는 인사를 남기고는 문가로 향했다. 밖으로 나가려는 아스티나를 이시스의 목소리가 불러 세웠다.
“대공비, 그대는 나를 비난하고 싶겠지.”
“…….”
“하지만 이 말을 기억하는 게 좋을 거야. 정의로운 여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해.”
아스티나는 고개를 돌렸다. 이시스는 손에 뒷머리를 괸 채 테이블 위에 놓인 티팟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이시스의 눈을 잠시간 들여다보았다. 그녀 안의 정의로운 여자를 찾아서.
아스티나가 잠시 뒤 대답했다.
“명심하지요.”
* * *
그러나 상황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았다. 앤서린은 오라비에게 줄을 대었을지 모를 가신들을 솎아 내려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정신없는 와중 황위 싸움에 대한 의중이나 떠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후작과 황녀의 뜻을 한데 모으기 위한 계획을 짜내느라 아스티나는 몸이 둘이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이시스 황녀에게 일을 해결하겠다고 단언한 만큼 아스티나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야 했다. 후작이 황녀의 앞길에 해가 되지 않으리라는 증명을.
그 외에도 문제는 한 가지 더 있었다. 제시가 기사 시험을 본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기사단 내에 번져 나간 것이다. 분명 따로 이야기를 나눈 사항인데 어디서 말이 새어 나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심지어 기사단장은 직접 아스티나를 찾아와 이렇게 간청하기까지 했다.
“대공비 전하, 이번 시험에 참가할 아이들은 저희 기사단 내에서도 추리고 추린 인재들입니다. 대공비 전하께서 들이신 급사가 검을 배운 지 대체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응시 자격을 얻는단 말씀이십니까. 자격이 있음에도 경쟁에 밀려 참가하지 못한 아이들이 상대적인 박탈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부디 뜻을 물러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수도에 와서 처음으로 밀려든 과로에 아스티나는 그만 신음했다. 그녀가 피곤한 얼굴로 미간 사이를 문질렀다. 대놓고 내보인 불편한 기색에 자연히 기사단장의 어깨가 빳빳이 굳어졌다. 그러나 그는 곧 의연하게 자세를 바로 했다. 기사단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여기서 굽히고 들 수는 없었다.
당연히도 아탈렌타 기사단엔 많은 수련생들이 있었고, 모두를 수도로 데려갈 수는 없었으므로 자체적인 검증을 거쳐 응시자를 선발했다. 수도의 연무장엔 고르고 고른 정예들만이 시험 날짜를 기다리며 실력을 갈고닦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대공비가 데려온 평민 여자가 기사 시험에 응시한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그간은 대공비의 호위로 기르는 여자라 생각하여 말을 아꼈었지만, 이번만은 기사단장도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대공비가 제시를 멋대로 응시시킨 건 기사단장을 존중하지 않은 결정이었다. 형평성에 어긋난 선발은 불만을 부르고, 그것을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하는 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대공비의 독단적인 결정에 최근 아탈렌타 기사단 내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아무에게나 멋대로 응시 자격을 주었다며 안팎으로 은근한 불만이 쌓인 탓이다.
“못난 것들의 질투를 피하기 위해 왜 제시가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해야 하지? 수지가 맞지 않아.”
언제나 온화한 음성을 내었던 아스티나지만 이번만은 그녀도 짜증스러운 대답을 돌려주었다. 기사단장이 간곡한 음성으로 재차 말했다.
“대공비 전하, 하나 이는 매우 형평성에 어긋나는 결정이십니다. 부디 기사단 내에서 부지런히 실력을 쌓아 온 어린 수련생들을 두루 돌보아 주십시오. 그들도 대공가의 사람이 아닙니까.”
아스티나는 관자놀이에 손끝을 댄 채 날카롭게 그를 응시했다. 그녀가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헨리, 내가 제시를 아탈렌타 기사단의 종자로 들이고자 할 때 그대가 뭐라고 했었지?”
“예?”
“유서 깊은 아탈렌타 기사단은 종자 하나를 들이는 데도 숙고의 기간을 거친다. 대공비의 청이라 해도 그 규율은 깨트리기 어렵다. 이방인이 윗사람의 입김으로 자격을 얻었다간 기존에 속해 있던 수련생들의 반발이 거셀 것이다…… 였나?”
제시의 검을 잡는 폼이 그럭저럭 볼 만해졌을 즈음, 아스티나는 그녀를 아탈렌타 기사단의 종자로 편입시키고자 했었다. 그러나 기사단장은 제시가 대공가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명을 거절했다. 합리적인 대답이었고, 아스티나도 그에 수긍했다.
갑자기 끌려 나온 지난 이야기에 기사단장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금 정확히 그런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아탈렌타 기사단엔 오랜 역사만큼이나 많은 규율과 나름대로의 법도가 있습니다.”
“그래, 내 그래서 그때는 그대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뜻을 물렀었네.”
선선히 돌아온 인정에 기사단장의 얼굴이 화색을 띠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그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헨리, 그대는 분명 그대의 입으로 제시가 아탈렌타 기사단의 일원이 아니라 말했어. 그런데 대체 무슨 권리로 그녀가 기사 시험을 치르고 말고를 간섭하는 거지?”
기사단장의 입술이 천천히 다물렸다. 그의 얼굴에 더없이 당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실제로 대공저 내에서 제시의 위치는 참으로 애매했다. 아탈렌타 기사단은 제시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아스티나는 제시를 단순한 호위로만 기용할 생각이 없었다. 아스티나가 앤서린의 의견에 따라 제시를 기사 시험에 참가하게 한 건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아스티나는 제시가 시험에 통과하면 그녀를 아탈렌타 기사단의 일원으로 편입시킬 생각이었다. 국가가 공인한 실력이라면 기사단장도 가타부타 더 말을 더하지 못할 테니까. 제시가 가문 내에서 더 붕 뜨지 않으려면 소속이 필요했다. 당장 올해엔 떨어지더라도, 가능한 빨리 자격을 얻어 월등한 실력 차를 보여 주어야 했다.
아스티나는 불만을 불식시킬 가장 좋은 방법이 힘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뒤에서는 온갖 말들을 떠들더라도 본인 앞에서는 감히 입을 놀리지 못하게 하는 힘. 그게 과거에 마티나를 지켰고 벨라체 아카데미의 고지식한 귀공자들 앞에서 아스티나를 당당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기사들의 반발이 거세어…….”
“헨리, 조금 더 솔직히 말해 보게. 그대는 정말 제시의 출신만을 문제 삼는 건가?”
“대공비 전하, ‘출신만’이라고 표현하기엔 제시 양의 조건이 너무도 부족합니다. 심지어 그녀는 아탈렌타 출신도 아니지 않습니까.”
“재밌는 말이군. 아탈렌타 기사단 내의 반절은 타지방 출신인 것으로 아는데 그들이 입단할 때도 그대는 이리 격렬히 거부했나?”
“출신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말씀드렸듯 제시 양이 검을 수련한 기간이…….”
“기간이라, 그렇다면 다음 해는?”
“예?”
“다음 해가 되면 괜찮다고 할 텐가? 한 해가 너무 짧다면 그 다다음 해는? 3년 후, 5년 후, 혹은 10년 후가 되면 제시를 받아들여 줄 것이냐고 묻는 거야.”
기사단장은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여기서 대답했다간 정말 고한 기간에 맞춰 제시를 입단시켜야 할 수도 있었다. 그가 원하는 바는 분명했다.
평민 여자는 아탈렌타 기사단에 들어올 수 없다. 연무장의 한구석을 내어 준 것만 해도 그에게 있어서는 대단한 양보였다. 그 선명한 배척에 아스티나는 대놓고 비웃음을 흘렸다.
“그것참 비열한 기사도로군.”
“대공비 전하.”
“시끄럽네. 오늘 이야기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어.”
아스티나가 일축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사단장이 문밖으로 나가려는 아스티나를 다급히 불러 세웠다.
“대공비 전하, 그러나 그녀가 아탈렌타 가문의 후원으로 참가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기사단 전체의 위세가 사그라들 것입니다.”
아스티나는 고개 숙인 남자를 빤히 응시했다. 그의 얼굴엔 결연한 의지가 비쳐 있었다. 망나니인 아서조차 무던히도 보듬었던 남자가 제시에게만은 참으로 매서웠다. 아스티나는 아서가 아탈렌타 기사단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본인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아서는 진즉 입단하고도 남았을 자리였다.
아스티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대는 진정 부끄러워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군.”
기사단장이 그 말을 이해하기도 전 아스티나는 문을 열고 나갔다. 집무실로 향할 생각이었으나,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누군가가 아스티나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새어 나온 대화를 들은 듯 히센은 다소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스티나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평소보다 차가운 목소리에 히센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연습할 시간이 되었는데 제시가 보이질 않아서요. 혹여 대공비 전하께서 부르신 게 아닌가 했습니다만…….”
“난 오늘 제시를 본 적이 없어, 방에도 없었나?”
“예, 거기는 진작 찾아보고 온 참입니다.”
“아서는?”
아스티나의 되물음에 히센이 뒤늦게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연무장에 도착하지 않은 건 제시뿐만이 아니었다. 히센이 제시를 부르던 것과는 다른, 다분히 격의 없는 호칭을 입에 담았다.
“그러고 보니 그놈도……?”
“무슨 사고만 안 쳤으면 다행이겠군.”
아스티나가 앓듯이 중얼거렸다.
* * *
“비켜 주세요.”
제시가 다분히 인내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어깨는 사라지지 않았다. 제시는 결국 들고 있던 물통을 내려놓고는 허리에 손을 올렸다. 당당해 보이려 취한 자세였지만 애석하게도 비웃음만 돌아왔다.
“어머어머, 비켜 주세요―”
“미친놈아, 징그러워.”
무리 중 하나가 제시의 목소리를 따라 하자 옆에 있던 친구가 낄낄거리며 그의 등을 때렸다. 조금도 우아한 면이 없는 조롱이었지만 덕분에 기분은 더욱 바닥을 쳤다.
기사 시험을 치르기로 했다는 소문이 돈 후부터 제시는 악질적인 괴롭힘에 시달렸다. 본래 그녀를 향한 시선이 호기심에 그쳤다면 이제는 완연한 적의가 담겼다.
집단적인 따돌림은 더없이 잔인한 면이 있었다. 무리 속에서 개인의 책임은 소실되고 괴롭힘의 강도는 거세어졌다. 경멸의 눈빛을 보내는 데 그친 귀족들과 달리, 제시를 더 집요하게 핍박한 건 오히려 같은 평민 쪽이었다.
“너, 우리가 기사 시험을 보려고 어떤 시험을 거쳤는지 알긴 알아? 그 응시 자격 하나에 친구들 몇이 다쳤는지 아냐고.”
“빽으로 들어왔으면 조용히 있어야지 왜 설치고 난리야?”
남자 셋이 둘러싸고 몰아붙이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비난에 제시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분란을 일으켜 봐야 피해를 보는 것은 자신이 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 자리를 최대한 온건하게 피해 수련을 하러 가는 게 제시가 택해야 하는 최선이었다.
“할 말 다 끝나셨으면 가 볼게요.”
“이게 지금까지 한 말을 귓등으로 들었나. 야, 쪽팔리게 우리가 너랑 시험장에 어떻게 같이 나가. 알아서 안 빠져?”
제시에게서 별다른 대꾸가 돌아오지 않자 일행의 얼굴이 더더욱 험악해졌다.
“너, 아서 님이 오냐오냐해 주니까 대공가가 아주 그냥 우습지?”
망나니 아서에게 ‘오냐오냐’라니, 제시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벨루아에 다녀온 이후 제시와 아서는 그럭저럭 평화로운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때때로 아서가 귀찮게 굴긴 했으나 이전보다는 확실히 빈도가 덜했다. 적어도 지금 제시 앞에 있는 놈들처럼 몰려와 욕설을 쏟아 내진 않았으니까.
암담한 현실에 제시는 그만 한숨을 내쉬었다. 아서 같은 망나니를 그나마 더 낫게 평가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기구하기 그지없었다. 제시의 한숨에 잔뜩 열 받은 듯, 상대가 격양된 어조로 말했다.
“너 그건 아냐? 아서 님이 실컷 비웃으시더라. 건방진 년이 제 주제도 모르고 설친다고.”
“네가 기사 시험 치른다는 걸 우리가 어떻게 알게 됐는지 아냐? 아서 님이 알려 주신 거야 그거.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고.”
옆에 있던 친구가 마저 말을 받았다. 자연히 제시의 낯에 당황이 떠올랐다. 제시가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서 님이…… 소문을 내셨다고요?”
“그래, 그러니까 알아서 좀 수그리고 지내란 말이야.”
길을 가로막은 상대가 떽떽거리며 답했다. 제시는 상대에게 화를 내는 것도 잊고 생각에 잠겼다. 어디다 떠벌리고 다닌 적이 없는데 소문이 번진 것이 이상하다고 여기긴 했었다. 그런데 범인이 이리 가까이 있었다니. 증거 없이 누군가를 의심하고 싶진 않았지만, 문제는 아서가 딱히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제시는 스스로가 지금, 아서에게 깊이 실망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소스라치듯 놀랐다. 그 고약한 도련님에게 실망할 거리가 남아 있으리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같이 수련을 하며 정이 붙기라도 했을까. 민망한 감상이었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같이 부대끼다 보니 서로가 익숙해진 건 사실이었다. 친밀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어도 말다툼은 없었고, 검을 배우는 데 있어 도움도 몇 번 받았었으니까. 그래서 제시는 조금이나마 아서가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다고도 생각했었다, 감히. 한데 그게 앞에서 뿐인 이야기였다는 말인가. 히센 경이나 대공비 전하의 눈치를 보느라 성질을 좀 죽인 것뿐이었나.
“이게 이젠 아예 말을 씹네. 야, 너……!”
“거기서들 뭐 해?”
상대가 왈칵 성을 내려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뒤편으로 돌아갔다. 그곳엔 아서가 검집을 어깨에 지고는 껄렁한 자세로 서 있었다.
순간적으로 침묵이 찾아들었다. 그들 사이를 스친 이상한 기류에 아서의 미간이 좁혀졌다.
“뭐야, 몰려서서는…….”
제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대로 뒤돌아서서는 반대편으로 달음박질쳤다. 제시를 놓친 일행들이 쫓아가려 몸을 움찔했으나, 뒤편에 선 아서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멈춰 섰다.
아서가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너네 뭐 했냐, 쟤 왜 저래?”
“아, 아무것도요.”
그들이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대공의 사촌에게 잘못 보였다간 그대로 내쫓길 수도 있다. 귀족 출신 종자들과는 달리 평민인 자신들에겐 뒷배가 없었다. 비굴하게 고개 숙인 그들을 향해 아서가 으름장을 놓았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저렇게 도망칠 리가 있나. 갔다 와서 보자.”
아서는 그대로 제시가 달려 나간 방향을 향해 따라 뛰기 시작했다. 설렁설렁 움직이던 다리에 갈수록 힘이 붙었다. 대충 뛰어서 따라잡기에 아서의 후배는 너무도 발이 빨랐다.
제시는 뒤편에서 누군가 쫓아오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가, 아서를 발견하고는 얼굴을 구겼다. 제시가 이를 악물었다. 더 빨라진 속력에 아서가 헉헉거리며 소리쳤다.
“뭐야? 대체 왜 뛰는데?! 훈련 안 갈 거야?”
때아닌 전력 질주에 등이 삽시간에 땀으로 젖었다. 아서는 죽을힘을 다해 제시를 뒤쫓았다. 다리가 움직이는 속도는 비슷했지만, 아서 쪽이 더 신장이 커 보폭에도 차이가 있었다. 머지않아 아서는 겨우 제시를 붙잡았다. 한참 달리던 와중 걸린 제동에 제시의 몸이 휘청였다.
마침 그들이 멈춰 선 곳은 정원을 장식한 분수 옆이었다. 아서가 그대로 물에 처박힐 뻔한 제시를 붙잡아 세우며 숨을 헐떡였다.
“허억, 허어……. 놓칠 뻔했네. 뭔 여자가 왜 이렇게 발이 빨라?”
“……만하세요.”
제시가 고개를 숙인 채 웅얼거렸다. 아서가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뭐?”
“그놈의 ‘여자가’ ‘여자인데’ 같은 말 좀 그만하시라고요!”
제시가 고개를 쳐들며 소리쳤다. 갑자기 터져 나온 고성에 아서는 무심코 뒤로 물러섰다. 아서가 당황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뭐야 갑자기…… 뭐 잘못 먹었어? 쟤네가 뭐라고 해서 그래?”
아서는 반사적으로 제시를 가로막고 있던 놈들을 떠올렸다. 그녀가 갑자기 화를 낼 리는 없으니 원인은 그쪽에서 제공했으리라. 아서는 짜증스럽게 뒷머리를 긁었다. 여린 외모와 다르게 제시는 강단이 있었다. 아서도 망쳤던 첫인상을 회복하느라 아직까지 무던히도 애쓰고 있지 않던가.
제시가 깨물었던 입술을 놓으며 물었다.
“도련님은 제가 여기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시죠?”
아서가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갑자기.”
“그렇잖아요. 굴러온 돌이 같이 훈련을 받으니까 싫으신 거 아니에요.”
확신 어린 어조였다. 아서는 알 만하다는 생각에 눈썹을 들었다 내렸다. 검술을 배우는 제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들이 그녀에게 시비를 걸었으리라.
아서는 제시를 처음 만났을 때 저지른 잘못이 많다는 걸 알았지만, 지금에 와 새삼 사과하기엔 다소 면이 상했다. 아서가 변명하듯 말했다.
“내가 전에 했던 말들은…… 그냥, 현실적인 조언이야. 여기사가 되는 건 고되어. 아까 그놈들 봤잖아. 다 이상하게만 생각한단 말이야.”
참으로 그럴듯한 포장이었다. 그러나 근거 있는 말이라고 모든 게 쓸모 있는 조언이 되지는 않는다. 제시는 진심으로 자신을 위한 말과 생각 없이 던지는 잔소리쯤은 구별할 줄 알았다. 그리고 당시 아서가 제시를 말리려 했던 동기는, 정확히 방금 몰려든 무리가 제시를 괴롭혔던 이유와 똑같았다.
위선자 같은 태도에 제시의 눈이 세모꼴이 되었다. 애초에 아서가 그녀의 응시 소식을 떠벌리지만 않았더라도 벌어지지 않았을 시비였다.
“도련님,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절 가장 거슬려 하고 있는 건 본인이시라고.”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고! 왜 사람 말을 안 듣는데?”
“그게 아니면 왜 제가 기사가 되는 걸 그렇게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데요?”
“말하잖아!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고! 너도 지금 그래서 고생하고 있는 거잖아!”
아서가 왈칵 소리쳤다. 손을 뻗어 제시의 팔을 붙잡으려 했지만, 제시는 그대로 몸을 비틀어 피해 냈다.
“잡지 마세요! 그렇게 윽박지르지도 말고, 절 위하는 척하면서 뭐든 맘대로 하려고도 하지 마세요. 절 좀 가만히 내버려 두시라구요!”
“야, 너 그러다 넘어……!”
풍덩―!
제시는 중심을 놓치고 그대로 분수 안으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온갖 데로 튀어 나간 물은 아서의 머리칼까지 적셨다. 아서는 난데없이 쏟아진 찬물을 털어 내는 대신 황급히 분수 안으로 발을 담갔다. 첨벙첨벙 물길을 헤쳐 나간 아서가 제시에게로 팔을 뻗었다.
그러나 제시는 자신을 끌어내려는 아서의 손을 거부했다. 넘어진 제시에게서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정말 제가 몰라서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정말? 나보다 어린 도련님도 아는 걸, 그 모든 걸 직접 겪어 본 내가?”
물기로 젖은 제시의 얼굴은 마치 우는 것처럼 보였다. 아서는 잔뜩 당황해서는 그녀를 일으키지도, 혹은 분수 밖으로 홀로 발을 빼지도 못했다.
“그래요, 제가 나갈게요. 그럼 되잖아.”
그것은 몹시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제시 스스로도 제 입 밖으로 나온 말에 놀랐을 정도로.
제시는 몸을 굳혔다가, 이내 어깨를 늘어뜨렸다. 앤서린 후작의 제안이 무척 끌렸던 건 사실이었지만,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제시는 대공비 곁에 머물겠다며 그럭저럭 마음을 잘 추스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기사 시험을 치르는 것만 해도 이리 모진 취급을 받는데, 아탈렌타 기사단에 입단할 수나 있는 것인가?
무사히 입단한다고 해도 과연 동료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그 모든 고초를 이겨 내고 나면, 같은 경력의 기사들마냥 진급은 가능한가?
적어도 트리스탄가에서는 단순히 여자라는 이유로 붙잡혀 시비가 붙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앤서린 후작님이 원한다면 저를 트리스탄가의 수련생으로 들여 주시겠다고 하셨어요.”
제시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아서가 경악 어린 눈으로 그런 제시를 내려다보았다.
“너! 트리스탄이 어떤 가문인지는 알아? 아탈렌타와 앙숙이야. 대공비의 인정으로 여기 들어와 놓고 원수의 집안으로 이적하겠다고?”
“대공비 전하께서는 제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고 하셨어요. 도련님이랑은 달리, 진짜로 절 생각해 줄 줄 아는 분이시거든요.”
아서가 더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제시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아서를 정면으로 마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이제 만족해요, 마음 편한 도련님?”
제시는 울지 않았다. 그녀가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아서를 노려보며 지나갔다. 아서는 그녀를 붙잡지 못하고 황망히 제자리에 섰다.
“아니, 나는…….”
아서가 말을 멈추고는 뒷머리를 헤집었다. 생각이 어지러웠다. 아서의 입가에서 앓는 소리가 쏟아졌다. 아서는 두 손으로 열이 오른 얼굴을 감싸고는 중얼거렸다.
“잘됐어.”
아서가 손을 떼어 내고는 스스로에게 주지하듯 허공을 향해 재차 소리쳤다.
“그래, 잘됐다고!”
* * *
똑똑.
“나가 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똑똑.
“무슨 소리라도 들으셨습니까?”
똑똑.
“그러지 말고 그만 옷 입으세요. 안 나가면 멈추지 않을 태세인데요.”
“……신경 끄고 계속하면…….”
똑똑.
“저것부터 치우세요.”
아스티나의 통첩에 테리오드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떨어진 바지를 대충 주워 입고는 문가로 향했다. 대체 어떤 몰상식한 놈이 한밤중에 부부 침실을 찾아온단 말인가. 아내와 돈독함을 좀 다져 보려는 참이었는데 기껏 잡은 분위기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를 악문 테리오드의 목에 핏대가 올랐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가 옷을 걸쳤는지 확인하고는 문을 열었다.
“뭐야.”
“형.”
그대로 문틈을 파고들려는 아서를 테리오드가 가로막았다. 테리오드는 팔짱을 낀, 확연한 불만이 묻어나는 자세로 비뚤게 섰다.
“아서 에스테반, 지금이 몇 시지?”
“새벽 한 시……. 근데 내가 진짜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래.”
“이 시간에 부부 침실의 문을 두드리는 건 대체 무슨 막돼먹은 예의야? 이만 왔던 길 그대로 되돌아 가.”
“사촌 동생이 이렇게 찾아왔는데 고민 좀 들어 줄 수 있는 거 아냐? 정말 매정하네!”
아서가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코끝이 잔뜩 빨개져 있었다. 테리오드는 빤히 아서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그대로 이마를 짚었다. 테리오드가 다분히 인내심을 끌어 올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체 뭐가 고민이기에 그러니.”
“그게, 그러니까…….”
아서가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고 쭈뼛거렸다.
“할 말 없으면 방해하지 말고 나가렴, 아서.”
“그게……. 아까 제시 고 계집애가 나한테 화를 내고 갔는데…….”
“뭔진 모르겠지만 네가 잘못했겠구나. 나가라, 아서.”
“아, 난 잘못한 거 없어! 다른 놈들이 걜 괴롭힌 것 같더라고. 근데 어쩌다가 나랑도 좀 말다툼을 했거든.”
“그래 다 네 잘못이니 알았으면 이만 나가 보려무나.”
“아니, 걔가 나한테 화풀이를 한 거라니까? 그래서 내가 걔한테 실수를 바로잡을 기회를 좀 주고 싶은데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
아서가 말을 멈췄다. 예상치 못하게 사촌 형이 자신의 어깨를 쥐어 온 탓이었다.
테리오드가 진지한 얼굴로 충고했다.
“아서,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제시 양이 화를 냈다면 그게 뭐가 됐든 네 잘못이야.”
아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테리오드가 그대로 문을 닫았다. 침대로 돌아오는 테리오드를 보며 아스티나가 물었다.
“둘이 싸웠다던가요?”
아스티나는 오늘 낮, 제시가 보이지 않는다며 히센이 찾아왔던 일을 떠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아서와 제시 사이에 분란이 벌어졌던 모양이었다.
“그게 어디 싸움이겠습니까?”
테리오드가 비식 웃으며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제시는 별 볼 일 없는 평민이고 아서는 대공의 사촌이었다. 그 둘 사이에 싸움이 성립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제시가 아서에게 성을 내었다면, 그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 분명했다.
테리오드가 피곤한 얼굴로 두 손을 모아 깍지 꼈다.
“날이 밝으면 제시 양을 불러 이야기를 좀 들어 봐야겠군요.”
사촌 동생의 잘못을 수습하는 건 이번에도 대공의 몫이 되었다. 성질이 못나 아탈렌타 영지 안에서도 수습하기 벅찼던 아이였다. 인력이 부족하다고 아서를 수도로 데려올 생각을 했다니, 뒤늦게 성급했던 결정에 대한 후회가 스쳤다. 앤서린 후작 앞에서도 제멋대로 성질을 부렸다 하니 이참에 본격적으로 훈육을 해 두어야 할 듯했다. 아니면 이쯤 해서 두 손 두 발 들고 저 탕아를 에스테반가로 돌려보내든지.
테리오드는 자신만 포기하면 아서의 미래가 곧장 수도원으로 직행할 것을 알았다. 부모는 13년을 견뎠고 사촌인 테리오드는 4년을 참았다. 나이가 들면 철들리라 여겼는데 성년이 몇 달 남지 않은 지금에 와선 그런 희망마저 흐려졌다.
테리오드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대체 왜 저렇게 자랐는지…….”
아서는 에스테반가의 삼남이었다. 가문을 이끄는 것은 일찌감치 형들의 몫이 되었고, 에스테반 자작 부부는 어중간한 막내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린 아서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선택한 것은 말썽이었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갑자기 쏟아진 주의와 관심에 어린 소악마는 잔뜩 신이 났다. 여덟 살 되던 해, 아서는 영지 전체에 소문이 자자한 악동이 되었다. 아서의 성장은 그를 성숙하게 하는 대신 말썽의 크기를 키웠을 뿐이다.
환경을 생각하면 수긍이 가긴 하나, 문제는 비슷하게 자라난 아이들이 모두 아서처럼 굴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최선을 다한 훈육에도 아서는 ‘에스테반가의 미친개’라는 호칭을 버리는 일이 없었다. 이쯤이면 그 비대한 자아를 인정해야 할 때가 아닌가. 주변에서 수습해 주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이대로 두었다간 언젠가 크게 사고를 칠 태세였다.
“그래도 대공께는 그럭저럭 잘하지 않습니까.”
“부인, 전 저 녀석 때문에 이젠 성악설을 믿습니다.”
테리오드의 말에 아스티나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농으로 한 말은 아니었지만 부인이 웃는 걸 보니 테리오드도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몸을 일으킨 아스티나가 그대로 테리오드의 등을 안았다. 어깨에 둘린 그녀의 팔 위로 테리오드가 머리를 기댔다. 아스티나는 그런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제가 나중에 둘을 따로 불러 이야기해 보지요. 제시와 싸웠다고 하니 제 선에서 해결하는 게 나을 듯합니다.”
분명 아서의 보호자는 테리오드였지만, 이 일이 비단 아서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아서 외에도 제시에게 불만을 가진 이들은 아탈렌타에 얼마든지 있다.
아스티나는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좀처럼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제시를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가 열리지 않을 아탈렌타 기사단의 문을 하염없이 쳐다보고만 있길 바라지도 않았다. 언제나 좋은 수를 내왔던 아스티나임에도 이번만은 도무지 제시를 아탈렌타 기사단에 정석적으로 들일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못난 사촌 때문에 자꾸 부인께 폐를 끼치는군요.”
“그게 어디 대공의 잘못이던가요.”
테리오드가 문득 첨언했다.
“말을 안 들으면 때리셔도 됩니다.”
“안 때릴 겁니다.”
아스티나가 눈을 흘기며 대꾸했다. 잠시 눈썹을 들어 올렸던 아스티나가 이내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마도요.”
테리오드가 웃음이 매달린 입술로 아스티나의 삐죽임을 삼켰다. 가볍게 바깥의 살갗을 어르던 혀가 느릿하게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의 위로 올라탔다. 잠시 떨어져 나간 입술에 테리오드가 갈증 어린 눈을 했다.
그가 재촉했다.
“키스해 주세요.”
테리오드는 아스티나와 보낸 첫날밤 이래 짐승으로 변하는 일이 없었다. 손끝만 스쳐도 마음이 동할 만큼 테리오드는 젊었고, 그녀를 사랑했다.
눈을 마주하면 입을 맞추고 싶다. 입을 맞추면 그녀를 끌어안고 싶고, 그녀를 품에 안고 있으면 이내 완전히 가지고 싶어진다. 욕심은 그를 늘 한계까지 몰아갔다. 저주가 기능할 짬이 없도록 쉼 없이 교합하자던 아스티나의 말은, 그다지 어려움 없이 현실이 되었다. 덕분에 잠자리가 기능하는 정확한 시간을 알아보는 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스티나도 싫은 눈치는 아닌 듯 번번이 테리오드의 욕심을 받아 주었다.
아니, 어쩌면 유도했거나.
아스티나는 말없이 손을 뻗어 타액으로 젖은 테리오드의 입가를 문질렀다. 엄지손가락이 붉은 살갗 위로 천천히 미끄러졌다. 테리오드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가 툭 내뱉듯이 진심을 말했다.
“중독된 것 같습니다.”
아스티나가 테리오드의 하반신을 흘긋 내려다보더니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빛에 장난기가 담겼다. 아스티나가 잠옷을 끌어 올려 던져 버리고는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벗은 몸 위로 열렬한 시선이 쏟아졌다. 그녀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달콤하게 속삭였다.
“더 줄까?”
테리오드가 시선을 맞춘 채 아직 입가를 짓누르고 있던 아스티나의 엄지손가락을 삼켰다. 손끝 위를 구르는 혀의 감촉에 아스티나의 표정이 묘해졌다. 은근한 유혹에 마음이 동했다. 아스티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혀를 툭툭 건드렸다.
“입술 벌려요.”
아스티나는 고개를 든 테리오드의 입술 위로 쪼듯이 내려앉았다.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의 허리에 손을 감고는 천천히 쓸었다. 느리게 빨아들이던 서로의 숨결에 어느덧 급박함이 묻어 나왔다. 테리오드가 헐떡였다. 그는 견딜 수 없이 사랑을 말했다.
“사랑합니다.”
참지 못하고 밀려나온 고백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벅찬 이 감정을 좀처럼 추스를 수 없었다. 그녀에게 강요하기 싫어 늘 답답하게 눌러 왔던 마음이었다. 이제 그는 원할 때마다 아스티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것만도 대단한 성취일 텐데 정도를 모르는 욕심이 자꾸만 부피를 키웠다. 너무도 당연히 자신을 끌어안고, 사랑한다는 말에 다정히 웃어 주는 그녀를 볼 때마다 테리오드는 기대를 하게 되었다. 그녀도 언젠가는 ‘나도’라는 말을 돌려주지 않을까.
“사랑합니다, 티나.”
그가 다시금 말했다. 아스티나는 이번에도 그런 그를 보며 상냥히 웃었다. 테리오드는 떨리는 손으로 아스티나의 가슴께로 늘어진 붉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꺼풀 위로 입 맞추며 테리오드는 듣지 못한 말을 상상했다.
나도 사랑해요, 테오.
* * *
창이 흔들리는 소리에 제시는 눈을 떴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을 둘러보아도 좀처럼 소음의 근원은 찾을 수 없었다. 제시가 다시 베개로 머리를 묻으려는 찰나 다시 노크 소리 비슷한 것이 들려왔다. 제시는 기민하게 창가로 시선을 고정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에 난 작은 틈을 내다보았다.
“헉.”
제시는 무심코 뒷걸음질 쳤다. 아서가 건물 밖에서 창문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고 있었다. 제시가 머물고 있는 건 2층의 방이었다. 아무래도 벽을 타고 올라올 수는 없으니 도구를 쓴 듯했다.
아니, 저 도련님이 이젠 하다 하다 사람을 이런 방식으로 괴롭힌단 말인가. 이제는 잠도 못 자게 하여 자신을 말려 죽이려는 듯했다. 제시의 얼굴이 절로 험악해졌다. 벌컥 창문을 연 제시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어차피 아탈렌타가를 나가기로 한 상태였으므로 제시의 말투는 전보다 건방져져 있었다. 그러나 불퉁한 태도에도 아서는 반갑다는 듯 화색을 띠었다.
“나왔구나.”
“도련님, 지금 새벽이에요.”
제시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대체 어릴 적 익힌 예의범절은 어디다 팔아먹은 것인가. 귀족이니 분명 자신보다는 많이 배웠을 텐데 아서의 행동은 전혀 지성인 같지 않았다.
아서가 언뜻 초조한 태도로 물었다.
“내가 자고 있는 걸 깨웠어?”
“당연하죠.”
“그건…… 미안, 안 자고 있을 줄 알았어. 난 잠이 하나도 안 오더라고.”
다분히 이기적인 판단이었지만 그것을 말하는 태도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제시는 허공을 노려보던 눈을 아서에게로 돌렸다. 이상하게도 발개진 눈가가 눈에 띄었다. 설마 저 고약한 도련님이 운 것은 아닐 테고, 아무래도 밖이 많이 쌀쌀한 듯했다. 제시는 숄을 꺼내 오려다가 바깥 온도가 그리 낮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좀 더 집중해 아서의 얼굴을 관찰했다. 투명하게 붉어진 뺨과 코가 반질반질했다.
제시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대공 전하나 대공비 전하한테 혼났나?’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오셨어요?”
제시의 물음에 아서가 숨을 들이켰다. 그가 우물쭈물 말했다.
“아까 우리 싸웠잖아.”
“……그랬나요?”
제시가 딴청을 피웠다. 감히 귀족 앞에서 언성을 높인 것은 그녀도 잊고 싶은 일이었다. 높은 신분치고 아서는 심히 만만해 보이는 경향이 있었다.
“아까는 솔직히 화가 났거든. 그 새끼들이랑 싸운 건데 나한테 화를 내니까.”
“제가 왜 그랬는지 아직 모르시는군요.”
제시가 새삼 감탄했다.
하기야 그가 제시의 어려움을 굽어살필 필요는 없었다. 아서는 귀족이었고 남자였고, 그에 더해 권력자인 친척까지 있었다. 아서에겐 제시의 고통이 마냥 남 일이었으리라.
문제가 뭐냐며 되레 성을 내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아서는 선선한 인정을 돌려주었다.
“그래, 그래서 테오 형을 찾아가서 물어봤어. 너랑 어떻게 화해하면 될지.”
“화해요?”
제시가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화해라니, 자신이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가. 아서의 깜짝 발언은 그것만으로 멈추지 않았다.
“나는 내가 잘못한 건지 몰랐는데 형이 그러더라. 너랑 싸웠으면 뭐가 됐든 내 잘못이라고.”
“……그래서 사과하러 오신 거예요?”
“사실 솔직히 난 아직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잘 모르겠어. 근데 형 말은 대체로 맞거든.”
그러니까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대공 전하가 결론을 내려 주니 쪼르르 사과하러 달려왔다 이 말이었다. 제시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시큰둥한 반응에 아서가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그가 손등으로 제 눈가를 한번 쓸었다. 잠시 망설이다가는, 툭 내뱉듯이 말했다.
“가지 마.”
“…….”
“내가…… 잘못했어.”
아서를 빤히 내려다보던 제시가 툭 말했다.
“도련님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신다면서요. 그런데 왜 잘못했다고 하세요?”
아서가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로서는 무척이나 어렵게 꺼낸 사과였기에, 이리 달갑지 않은 반응이 돌아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이다음으로 할 말은 생각해 두지도 않은 상태였다.
제시가 다시금 물었다.
“왜요?”
“어?”
“도련님이 왜 굳이 저한테 맞춰서 고치려고 하시냐구요.”
스스로 개선의 필요성을 느꼈다면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아서는 방금 본인의 입으로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제시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저 도련님은 왜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일을 잘못했다고 말하며 화해를 청하는가.
제시는 스무 해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았고, 평민들에게 있어 자유연애는 흔한 일이었다. 당연히도 그녀는 벨루아에 있을 적 많은 구애를 받아 왔다. 일찍이 방앗간을 물려받은 대넌과 포목점집 아들인 브루노, 오랫동안 여관에 묵었던 장기 투숙객 체이스까지. 그들은 모두 제시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이 옳다며 얼간이처럼 떠받들면서까지.
“저 좋아하세요?”
“뭐, 뭐뭐뭐뭐?”
제시의 물음에 아서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뒤로 물러섰다. 얼굴은 완전히 시뻘게져 있었다. 제시는 그런 아서를 무감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반응이 분명하다. 제시가 조소하듯 말했다.
“도련님은 좋아하는 여자한테만 다정하시네요.”
아서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단순했다. 그녀와 관계가 틀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멀어질지 모른다는 사실에 눈이 멀어 정작 제시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는 보지도 못했다.
제 마음을 깨달은 이상 아서는 최선을 다해 제시에게 잘해 주려 할 것이다. 건방진 평민 아이에게 무조건적으로 굽히며 사과하러 온 지금처럼. 짜증을 내도 예쁘다며 웃을 테고 화를 내면 비위를 맞출 테지. 절규를 해도 그 속에 담긴 말을 듣는 대신 그저 달랠 것이다.
그는 그녀의 꿈까지 사랑하진 않으니까.
제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말이 좋아하는 여자의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아닌, 한 사람의 말로 들리기는 했을까?
“네가 알려 줘. 내가 고칠게.”
아서가 황급히 대답했지만 제시의 반응은 여전히 싸늘했다.
“그럴 필요 없으세요. 왜 그러는지 이해도 못하고 하는 행동에 어떤 의미가 있겠어요?”
“알잖아. 내가 못 배워 먹은 거. 가르쳐 주면 노력할게. 다 고치면 되잖아.”
잠시 침묵하던 제시가 결국 입을 열었다.
“도련님, 평민 남자들은 이미 아탈렌타 기사단에 입단해 있어요. 저랑 신분이 같은데도요. 하지만 여기사들은 영애들의 호위용으로만 쓰일 뿐이죠. 여기사를 제대로 된 인력으로 취급해 주는 건 앤서린 후작님뿐일걸요.”
트리스탄은 무기를 다루는 가문이었으므로 척박한 북부와 긴밀한 연이 있었다. 추운 지방에선 식량을 얻기 위해 농사보다는 사냥이 발달했고, 개발로 식량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지금에 와선 모피 사업의 주요지가 되었다. 그러한 환경의 영향으로 북부인들은 무기를 다루는 데 있어 여자 남자를 가리지 않았다.
북부와의 긴밀한 거래로 인해 트리스탄은 사냥에 천재적인 여자들을 오래도록 보아 왔다. 자연히 여성에 대한 편견이 타 가문보다 덜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본격적으로 여기사를 육성하는 것엔 대단한 잡음이 있었지만, 여자를 마냥 약골로만 보지는 않았으므로 여타의 편협한 가문들보다는 조건이 나았다. 앤서린은 기사단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세브리노 아카데미에서 후배들을 데려왔고 재능이 있어 보이는 아이들을 들였다. 앤서린이 가주직을 물려받았을 때부터 오랫동안 애써 온 결과가 트리스탄에 있었다. 가문에 속한 남기사들이 속으론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가주의 엄격한 규제로 대놓고 벌이는 차별은 없었다.
제시는 대공 부부가 고작 그녀 하나를 위해 그런 노력을 해 주리라곤 감히 바라지도 않았다. 트리스탄조차도 수년을 매달려 이뤄 낸 결과였다. 보수적인 아탈렌타는 더욱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아서가 변명하듯 말했다.
“대체로 무술에 있어 여자가 남자보다 조건이 더 안 좋은 건 사실이잖아. 그래서 기사단에 여자를 잘 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거지.”
“하지만 도련님께서도 전 재능이 있다고 인정하셨잖아요. 능력이 문제라면, 헨리 경은 왜 저를 거부하는 건데요?”
“…….”
“실력이 없어서 떨어지는 건 인정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저한텐 왜 기회조차 오지 않는 건가요?”
아서는 대답하지 못하고 주먹만 쥐었다가 폈다.
그는 한때 아탈렌타 기사단에 여기사를 들이는 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입단을 막은 건, 부족한 인물을 기용하면 기사단의 격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여기사가 무시받는 건 대체로 남기사들보다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니 이는 근거가 있었다.
‘하지만 제시는 재능이 있는데?’
아서는 자신의 반대가 모순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자는 실력이 없다고 인정하지 않으면서, 실력이 있는 여자에겐 ‘여자는 실력이 없다’는 편견 때문에 받아 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제시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건…….”
아서는 어쩔 줄 모르고 제시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제시는 적어도 막무가내식의 반박이 돌아오지 않았음에 만족했다.
그녀는 창틀을 짚고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잠시간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서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그리 유쾌하진 않았지만, 저 얼빠진 반응을 보아 일부러 그녀에 대한 악의적인 이야기를 퍼트렸을 것 같지도 않았다. 제시는 종자 무리가 앞서 말했던 일을 그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제가 기사 시험 본다고 소문 퍼트린 게 도련님이세요?”
“뭐?”
“그놈들이 그렇게 말하던데요.”
아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아서는 언성을 높이지 않기 위해 숨을 들이켰다. 몰려들어서 제시에게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이간질을 위해 날조나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제시와의 일에 정신이 팔려 그놈들을 손봐 주는 걸 잊었다.
아서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안 믿을 것 같지만, 그거 내가 한 짓 아니야.”
“안 믿겨요. 직접 말은 안 하셨더라도 분명 어디선가 흘리셨을걸요.”
아서는 반박하려 했지만 그의 머릿속을 언뜻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앤서린 후작 앞에서 벌컥 언성을 높였다가 끌려 나갔던 그때, 아서는 기사단 건물 뒤편에서 히센에게 오래도록 잔소리를 들었다. 새어 나갈 구석이 있다면 그때였으리라.
아서는 억울했지만 히센을 팔아넘기지는 않았다. 제시는 자신의 말보다 스승을 더 믿을 테니까.
아서가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믿을 거면 왜 물어봐?”
“그러게요. 전 왜 안 될 걸 알면서 자꾸 이상한 기대를 할까요.”
제시가 쓰게 웃었다. 점점 친절해지는 아서를 보고 그녀는 그와 친구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기사가 되려는 여자마냥 말도 안 되는 희망이다.
“도련님이랑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했었어요. 아니었지만.”
아서는 황급히 무어라 대꾸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나도 너와 친해졌다고 생각했어.’ 따위의 말을 꺼내기가 민망했기 때문이다.
“내가 원래 성격이 별로야. 예쁜 말 같은 거 못하니까 그건 네가 그러려니 해.”
아서는 어쨌든 아서였고 그래서 좋아하는 여자에게 이런 말이나 했다. 그리고 제시는 가차 없었다.
“제가 왜 그걸 그러려니 해야 돼요? 도련님이 뭐라고.”
“그냥 그러려니 하라고 하면 그러려니 해.”
제시는 별로 그러려니 하지 않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덕분에 애가 탄 건 아서 쪽이었다. 그가 주먹을 쥐었다 펴며 힘겹게 말했다.
“미안해.”
“이번에도 이유 모를 사과나 하시는 거예요?”
“아니, 네 말이 맞아. 이상한 고집이었어.”
제시가 놀란 눈을 떴다. 아서는 무슨 고문이라도 당한 것처럼 기묘하게 얼굴을 구겼다.
“그동안 나는 자존심이 상해서…….”
스스로의 아집을 인정하는 건 분명 고통스러운 일이다.
“화풀이 같은 걸 했던 거야. 내가 잘못한 거지.”
아서가 숨을 헐떡이며 말을 맺었다. 제시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아서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한 번 인정한 일을 다시 입에 담는 건 쉬웠다. 아서가 곧장 말을 이었다.
“내가 편협했어. 널 위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냥 내가 보기 싫었던 것뿐이야.”
“생각보다…… 솔직한 고해시네요.”
제시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아서가 민망하다는 듯 손을 들어 콧대 옆을 쓸었다.
“너는 웬만한 놈들보다 더 재능 있어. 아마 훌륭한 검사가 될 거야. 벨루아에 다녀오고부터는 내내 그렇게 생각했어. 대련이나 자세 봐 준 거,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
“그러니까 나 때문에 안 나가도 돼. 그렇게 속 좁게 굴 생각은 없어.”
아서에게 이리 진솔한 대답이 돌아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에, 제시는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그녀가 이전보다 한결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도련님 때문에 나간다는 거 아니에요. 도련님이 저한테 사과하신다고 달라지는 건 없거든요.”
개인의 개심으로는 결코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다. 제시는 자신이 기사단의 모든 인물을 설득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서가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인 건 그의 생각이 아직 덜 여문 탓도 있었다. 이미 굳혀진 관념은 타인의 말 몇 마디로 쉽게 깨지는 것이 아니다.
제시의 말에 아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서는 제시가 아탈렌타를 떠나기로 결심한 원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화해하면 생각을 바꿀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그가 황급히 말했다.
“내가 그 새끼들이 더 그런 소리 못 하도록 하면 되잖아. 내가……. 도와줄게.”
“어떻게요?”
아서는 좀처럼 대답하지 못했다. 당연한 결과다. 제시도 아스티나도 해결하지 못한 일이었다. 제시는 기대 없는 눈으로 아서를 응시했다. 그러나 아서는 곧 결연한 음성을 내었다.
“내가 해결해 줄게.”
아서가 제시의 의아한 눈빛을 피하며 손짓했다. 무심코 시키는 대로 손을 내민 제시에게 작은 병이 날아왔다. 제시는 얼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해열제니까 이거 먹고 푹 자. 괜히 감기 걸리지 말고.”
아서가 씩씩하게 말하고는 뒤돌아섰다. 대체 뭘 해결하겠다는 건지, 감기도 안 걸렸는데 약은 또 왜 가져다준 것인지. 알 수 없는 일투성이였지만 아서는 그대로 가 버렸다. 제시는 잠시 밖을 내다보고 서 있다가 문을 닫았다. 약병을 창문맡에 두고는 침대로 가 드러누웠다.
제시는 양손을 깍지 껴 배 위에 올린 채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나무의 결을 응시하던 제시가 문득 헛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사과를…… 받았네?”
말도 안 돼, 제시는 그리 중얼거리며 또 허허 웃었다. 꿈인가 싶었지만 말똥말똥한 눈은 다시 감기지 않았다.
* * *
다음 날 아침 공기는 유달리 상쾌했다. 생각이 정리되었기 때문인지 다소 느린 기상이었음에도 제시는 개운한 기분이었다. 그엔 기대치 못하게 아서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받은 덕도 있었다.
새벽의 방문은 몹시도 얼떨떨한 기억이었다. 주정을 부리러 왔다면 차라리 그러려니 했을 텐데 답지 않게도 진지한 고해를 했었다. 잠시 꿈은 아니었나 진위를 의심하기도 했지만, 아서가 주었던 약은 여전히 창틀 위에 그대로 있었다. 제시는 그 언저리를 한참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방을 나왔다.
식당에 도착한 것은 점심이라 말해도 크게 어폐가 없는 시간이었다. 제시는 식사를 받고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실내엔 이른 점심 식사를 하러 온 이들이 듬성듬성 차 있었다. 제시는 빵을 씹으며 대공비를 언제쯤 찾아뵈어야 적당할까 시간을 재어 보았다. 오전은 바쁘실 듯하니 저녁 즈음이 나을까. 고민에 빠져 있는 와중 어딘지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잡아챘다.
“―슬쩍 보니 종일 저기압이시더라, 그 계집애가 미쳐 가지고 아서 님한테 따지고 들었나 보던데?”
제시는 고개를 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제 시비를 걸었던 종자들이 모여 킬킬거리고 있었다. ‘그 계집애’와 ‘아서’라니. 호칭만 들어도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 알 만했다. 제시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는지 그들은 저들끼리 이야기를 이어 갔다.
“쫓겨나고 싶어서 환장했네.”
“것 봐, 에스테반가의 미친개 이름을 대길 잘했지? 아주 껌뻑 속더라니까. 아서 님 신경을 긁었으면 게임 끝났지. 난 못 견디고 한 달 안에 도망친다에 건다.”
“난 일주일.”
“야, 안 나간다에 거는 사람은 없냐?”
“기간의 문제지, 이건.”
동시에 무리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제 딴엔 다른 테이블까지 이야기가 닿지 않도록 목소리를 죽이고 있었지만, 비교적 가까이 앉은 제시는 고스란히 들을 수 있었다.
제시는 자리를 피하는 대신 그들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시선이 느껴졌는지 머지않아 누군가가 고개를 들었다. 가장 신나게 떠들어 대던 놈이었다. 제시를 발견한 그가 퍼뜩 놀라 ‘으!’ 하고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친구의 이상 반응에 옆에 있던 이들도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똑같이 놀란 얼굴을 했다. 당황한 기색도 잠시, 개중 하나가 제시를 향해 우악스럽게 소리쳤다.
“뭘 재수 없게 쳐다보고 있어?”
제시는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멋대로 남의 뒷이야기를 해 놓고 저리 당당할 수가.
기죽지 않은 제시의 반응에 그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무리는 성을 내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에 맞춰 제시가 접시가 담긴 쟁반으로 식탁을 한 번 내리쳤다. 탕, 하고 크게 울려 퍼진 소리에 그들이 동시에 주춤했다. 제시가 배짱 좋게 말했다.
“야, 다 덤벼.”
싸늘한 침묵이 오갔다. 다들 제가 들은 것이 맞나 귀를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제시는 껄렁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뭐, 뭐……?”
“아, 진짜 같은 평민 처지에 뭐? 주제를 몰라? 나 참, 같잖아서…….”
제시가 재차 헛웃음을 지으며 그들이 앉은 식탁을 걷어찼다. 두꺼운 목재가 그대로 밀리며 접시가 흔들렸다. 때아닌 소란에 차츰 주변의 시선이 몰렸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무리 중 가장 체격이 좋은 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다란 손이 대뜸 제시의 멱살을 잡아채려 했다. 제시가 가볍게 몸을 비틀어 피하자 이번엔 주먹이 날아왔다. 그러나 제시는 그것마저도 손쉽게 피해 냈다. 제시는 곧바로 휘청거리는 상대의 무릎을 걷어찼다. 무게 중심이 비틀린 소년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넘어졌다.
제시가 비웃듯이 말했다.
“연습도 제대로 안 하고 몰려다니면서 누구보고 자격이 없다고?”
손쉬운 제압에 무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들이 제시를 괴롭힌 건 어차피 누구도 그들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을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도, 제시가 직접 따지고 드는 건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다. 이 일로 추문해 봤자 피해를 볼 것은 제시밖에 없었으니까. 제시의 입단을 좌지우지할 기사단장이 그들의 편이었으니 그간 말을 조심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단체로 제시의 실성을 의심했다.
“이게 미쳤나……?”
“너네야말로 정신 나갔어? 왜 말버릇이 그따위냐?”
“뭐?”
“함부로 너, 너거리질 않나. 뭐, 재수가 없어? 아오, 나보다 나이도 어린 것들이…….”
제시가 위협적으로 주먹을 치켜들었다. 넘어졌던 소년이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몸은 본능적으로 반걸음 정도 물러선 상태였다. 그가 애써 무게를 잡으며 변명했다.
“이거 뭐 쪽팔리게 여자랑 싸울 수도 없고…….”
“그럼 쪽팔리게 여자 욕은 왜 하니?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야지.”
“그건 네가 건방지게 기사가 된다 어쩐다 소리를 하니까 그러는 거잖아!”
“너희야말로 기사가 되고 싶다는 것들이 창피하게 뒤에서 쫑알거리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붙자.”
제시로서는 이제 더 잃을 게 없었다. 대공가에 붙어 있고자 무슨 소리를 들어도 참아 왔는데 어차피 이젠 나갈 예정이다. 그간 쌓인 한이라도 쏟아 내지 않으면 분이 안 풀릴 것 같았다.
제시가 고개를 까딱이며 먼저 식당 밖으로 나갔다. 무리는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하고는 제시를 따라갔다. 방금은 방심해서 당한 것일 뿐, 그들이 본격적인 대련에서 여자에게 질 리는 없었다. 이대로 꼬리를 말고 피했다간 두고두고 얕보일 것이다. 그리 의견을 모은 이들이 어깨를 펴고는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제시와 무리가 연무장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이상하게 근처가 소란스러웠다. 벌써 대련을 하기로 한 게 소문이 났나. 소란의 근원을 찾아 귀를 기울이는데 저편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에스테반가의 미친개가 단장을 고자로 만들려고 한다아―!”
“대공 전하를 불러!”
“저 새끼 미친 거 아냐?”
곧이어 사내 여럿이 순식간에 옆을 스쳐 지나갔다. 제시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돌려 지나간 이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이 향한 방향은 대공저의 본관이었다.
제시가 곰곰이 중얼거렸다.
“에스테반의 미친개?”
대공저의 모두가 알고 있는 아서의 별명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내가 해결해 볼게.’
아서의 말을 떠올린 제시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제시는 그대로 연무장을 향해 뛰었다. 당황한 표정을 짓던 종자 무리도 재빨리 제시의 뒤를 따랐다. 곧 벌어질 싸움에 몸이 달아서가 아니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궁금증이 앞섰기 때문이다.
연무장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들은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
“헉…….”
제시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입구 근처엔 다소 더러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어딘지 신난 기색의 아서였다. 그리고 바로 옆엔 기사단장이 있었다. 기다란 나무판에 묶여 바지가 끌어 내려진, 신기한 외양을 한 채로. 아서의 손은 매우 흉물스럽게도…….
기사단장 헨리의 ‘그것’을 쥐고 있었다.
“이거 놔! 풀라고!”
헨리가 처절하게 비명 쳤다. 너무도 대단한 급소가 붙잡혀 있었기에 그 누구도 섣불리 접근하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어린 아서가 기사단장을 제압한 것인가. 추측은 어렵지 않았다.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는데, 헨리가 묶여 있는 건 다름 아닌 벤치의 상판이었다. 아무래도 낮잠을 자다 봉변을 당한 듯했다.
아서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평온한 목소리로 물었다.
“헨리, 내가 어디서 들었는데 말이야. 알고 보면 아탈렌타 기사단이 고추가 없으면 입단이 안 되는 곳이었다며?”
“미친놈아,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여기서 문제!”
아서가 상큼하게 소리쳤다.
“내가 헨리의 아들을 떼어 내면 헨리는 계속 기사단장을 해 먹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그리 말하며 아서가 단검을 헨리의 ‘아들’ 가까이로 가져갔다. 빨갛게 달아올랐던 헨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푸르죽죽해졌다.
“사사사사람 사사사살려.”
헨리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제시의 뒤에 선 종자 무리는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저도 모르게 자신의 사타구니 위로 손을 올렸다. 그 부위의 안전을 확인받고 싶었던 탓이다. 제시를 제외하고는 주변을 둘러싼 모두가 헨리와 같은 막대를 가지고 있었다. 상상 가능한 고통에 일대에 소란이 번졌다.
“누가 저 미친놈 좀 떼어 내!”
“저 새끼 지금 뭐 하는 거야?”
“대공 전하 부르러 갔다던 새끼는 왜 안 와!”
“아아악! 단장이 고자가 된다아!”
입술이 잔뜩 떨리고 있어 그다지 위엄 있어 보이진 않았지만, 헨리는 애써 침착하게 상황을 중재하려 했다.
“아, 아서. 내내내가 어얼마나 널 동생처럼 도도돌봤는데.”
“그래서 내가 헨리한테 속죄할 기회를 주는 거야.”
“뭐뭐뭐뭘 원하는데 이 개개개자식아!”
“아탈렌타 기사단에 들어오려면 고추가 없어도 된다고 해.”
“뭐?”
“얼른 복창해! 고추 없는 사람의 입단을 허락한다고! 안 그러면 가장 먼저 아탈렌타 기사단에서 쫓겨나는 건 헨리가 될걸?”
“이 미친 새끼가!”
헨리는 아서가 뭘 말하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지금 제시의 입단을 허락하게 하려고 수를 쓰고 있는 거였다. 헨리의 눈에 핏줄이 섰다.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그 말은 못 해!”
“다른 가문에서는 잘만 허락하는데 왜 아탈렌타 기사단만 안 된다는 거야?”
“네가 뭘 안다고! 기사의 원칙은 레이디를 지키는 거야! 어떻게 연약한 여자들에게 검을 들게 할 수가 있어! 그거야말로 진짜 야만적인 짓이다!”
헨리의 말에 대부분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아서의 언성도 함께 높아졌다.
“그렇게 레이디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제시한테는 왜 그러는데? 종자들이 걜 괴롭히는 걸 알면서도 내버려 뒀잖아!”
“이놈아! 현숙한 여성들은 마땅히 존경받아야지! 하지만 검을 든 여자는 레이디가 아니지 않아!”
“말하면서도 좀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어? 제시를 레이디 취급도 안 해 주면서 레이디라 기사단에 못 들인다는 게?”
논리에서 밀리자 헨리는 팔다리를 힘껏 버둥거렸다. 그러나 어찌나 세게 묶었는지 매듭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헨리가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너 이 새끼, 너 대체 누구 편이야?! 왜 갑자기 걔 편을 들고 지랄이냐고!”
“말 못 하겠다 이거지?”
아서가 그리 한 번 되묻고는 이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헨리, 난 금방 내 어리석음을 알았지만…… 애석하게도 헨리에겐 깨달음의 고통이 필요할 것 같아.”
헨리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의연히 본래의 의견을 관철하고 싶었지만, 문제는 아서가 정말 자신을 고자로 만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망나니라는 데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서는 곧장 헨리에게 흉기를 들이밀었다.
헨리는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전장에서의 명예로운 죽음은 감수할 수 있다. 그러나 수도의 저택에서 낮잠을 자다가 포박당해 거기가 잘리다니, 죽음보다도 비참했다.
칼날이 해면체를 스치며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옅은 피가 배어 나왔다. 종족 번식의 가능성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결국 헨리의 입이 열렸다.
“아아알았어, 마마말할게!”
“진짜?”
“그래, 그러니까 일단 이것 좀 치워!”
아서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벌컥 언성을 높여 소리쳤다.
“먼저 따라 해! 오늘부로 고추 없는 사람의 입단을 허락한다!”
“이 새끼가……! 야, 아니, 앗 따가, 아, 말할게, 말한다고! 오늘부로 고추 없는 사람의 입단을 허락한다!”
“한 번 더 소리쳐!”
헨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세 번째 다리를 긍지로 삼았던 남자가 결국 무너졌다.
헨리가 악을 쓰듯 소리쳤다.
“씨팔. 아서, 이 은혜도 모르는 개새끼야! 제시더러 기사 시험 봐도 된다고 전해! 대신 아탈렌타의 입단 시험은 아주 고달플 거다!”
아서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헨리를 놓아주었다. 원하던 말을 들었으니 이젠 스스로의 안전을 확보할 때였다. 헨리를 풀어 주었을 때 벌어질 후폭풍을 모르지 않았으므로 아서는 곧바로 도주했다. 아서가 멀어지자마자 헨리는 곧바로 참았던 숨을 들이켰다. 마침내 거세의 공포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니 온몸의 긴장이 풀어졌다.
헨리는 눈물을 글썽이며 제 아랫도리를 내려다보았다.
“내……. 내 거시기…….”
다행히도 모두의 바람대로 헨리의 그곳은 무사했다. 피를 좀 보긴 했지만 칼날이 스친 정도라 기능에는 이상이 없을 듯했다.
지켜보던 기사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헨리에게 다가와 팔과 다리를 풀어 주려 했다. 헨리는 부하들의 뒤통수를 때리고 싶다는 표정으로 몸을 뒤틀었다.
“이 새끼들아, 바지부터 올려, 바지부터!”
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이미 그 생김새를 속속들이 본 상태였으므로 그다지 의미가 없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헨리는 반복해서 바지를 여며 달라 강조했다. 다리에 묶인 끈을 풀어 주던 기사 하나가 허겁지겁 헨리의 허리춤을 끌어 올렸다. 그사이 아서는 벌써 저만치 도망가고 있었다.
“저 새끼 잡아! 내가 죽여 버리겠어!”
마침내 구속에서 벗어난 헨리가 핏발이 선 목으로 소리쳤다. 독기 오른 기사단장의 명령에 몇몇이 엉거주춤 아서를 뒤쫓았다. 그러나 발이 움직이는 속도가 그다지 빠르진 않았다. 아서의 손에 들린 단검의 핏기를 보자 급격히 추적할 의지가 사그라들었던 탓이다.
보다 못한 헨리가 직접 아서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발도 곧 멈춰 섰다. 근처에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제시와 종자 무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헨리는 제시를 발견하자마자 눈에 불을 켰다.
“야, 너, 이……!”
그러나 헨리는 곧 입을 다물었다. 아서를 이용해 기사단에 들어오려 했냐며 성을 내려 했는데, 하지도 않은 일로 추궁하기엔 그에게도 양심이란 게 남아 있었다. 아서가 남의 말을 듣는 놈이 아니라는 걸 가장 잘 알고 있는 게 바로 헨리였다. 당황한 제시의 표정을 보아 그녀도 모르고 있었던 일임이 분명했다.
헨리가 머리를 헤집으며 미친 사람처럼 발을 굴렀다.
“아오, 진짜 이걸, 내가, 내가……! 으으!”
그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가슴이 가쁘게 솟아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잠시 후 헨리가 다분히 진정된 기색으로 물었다.
“다 들었나?”
“네? 네…….”
급작스런 변화에 제시가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헨리는 몹시 괴로운 표정으로 크게 신음했다. 당사자도 보고 들었다니 더 어찌할 바가 없다. 그가 죽기보다 인정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한 입으로 두 말 할 순 없지. 기사 시험을 봐도 좋다. 통과하면 입단 시험을 치르도록 하마.”
“저, 정말요……?”
“단장님!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세요!”
그때였다. 제시의 뒤편에 있던 종자 무리 중 하나가 끼어들었다. 헨리가 진절머리를 내듯 고개를 흔들었다.
“어쩔 수가 없는…… 가만, 너희끼리 왜 몰려 있는 거지?”
귀찮다는 표정으로 대꾸하던 헨리가 눈을 번뜩 떴다. 제시가 지나가기만 해도 야유했던 놈들이 굳이 그녀의 뒤에 서 있는 모습이 몹시도 수상했다.
당연히도 종자 무리는 우물쭈물하며 대답하지 못했다. 여자아이 하나와 싸움을 벌이기 위해 떼거지로 몰려왔다는 사실을 밝히기엔 면이 상했던 탓이다.
헨리의 시선이 자연히 제시에게로 돌아갔다. 제시가 곧바로 대답했다.
“저와 대련을 하기로 했어요.”
“누구랑?”
“저랑요.”
“아니, 저놈들 중 누구와?”
“……전부요.”
제시의 대답에 헨리의 낯에 다시 열이 올랐다. 이래서야 아서의 말에 당당히 반박할 수도 없었다. 확실히 헨리는 지금껏 종자들이 제시를 괴롭히는 것을 방관해 왔다. 그게 단순한 조롱이 아닌 직접적인 몸싸움으로 이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외면했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저놈들의 기사도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것인가. 그동안 좋은 기사가 되라며 무던히도 아껴 주었던 것을, 여자 하나를 밟아 주겠다며 여럿이 달려든 꼴을 보자 헨리는 부끄러워 혀라도 깨물고 싶었다.
“미안하다. 내가 지금껏 모른 척했던 게 잘못이야. 저놈들은 내가 혼내 줄 테니 이만 돌아가도 돼.”
헨리가 이마를 감싸며 사과했다. 그러고는 뒤에 선 종자들을 향해 벌컥 성을 냈다.
“이 새끼들아, 어디 할 짓이 없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여자랑 힘으로 겨루겠다고 달려들어! 내가 너흴 그렇게 가르쳤더냐?”
그리 말하며 헨리가 제시를 흘긋 바라보았다. 이 정도 했으면 좀 봐 달라는 듯이. 그러나 제시는 화를 푸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그녀는 저를 상대하려 몰려든 소년들을 보고서도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제시는 잠시간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이윽고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요, 단장님. 먼저 대련하자고 한 건 저예요.”
“뭐? 아니……, 그래도 저놈들이 받아 줘선 안 됐지.”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헨리가 당황하여 대꾸했다. 제시의 목소리가 한층 더 가라앉았다.
“왜 받아 줘선 안 되는데요?”
헨리는 그 질문에 아주 많은 이유를 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제시를 납득시킬 수 없는 말이다. 헨리가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기도 전, 제시는 허리춤에 걸려 있던 검을 들어 올렸다.
“아서 님 때문에 제 입단을 허락한다고 말씀하지 마세요. 제가 직접, 지금 증명해 드릴게요. 제가 기사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요.”
* * *
“수도는 모든 게 화려하지요.”
운치 있는 대화의 시작에 아스티나가 고개를 돌렸다. 꼿꼿이 허리를 편 아스티나에게 앤서린이 손을 뻗었다. 앤서린은 아스티나의 손등에 자연스럽게 입을 맞추고는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대공비 전하의 붉은 머리칼만큼 아름다운 건 또 없을 듯합니다.”
남성의 인사였지만 그것은 제복을 차려입은 앤서린에게 퍽 잘 어울렸다. 아스티나는 앤서린에게 매끄러운 미소를 보였다.
“트리스탄 후작님.”
“도착하시자마자 무척 눈에 띄시더군요. 덕분에 늦지 않게 달려왔답니다.”
“안 그래도 어디 계신지 찾고 있었던 참입니다. 무척 잘 꾸며진 저택이네요, 이리 초대해 주셔서 영광이에요.”
“칭찬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초대에 응해 주셔서 영광이지요.”
앤서린이 눈을 접어 웃었다. 그 표정엔 장난기가 역력했다.
아스티나가 참석한 건 트리스탄 후작에서 주최한 사교 파티였다. 앤서린 후작과 친분이 있는 이들만이 모이는 자리였지만, 이번만은 특이하게도 아스티나 역시 초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당연히도 그에 정치적인 의미가 아예 없을 수는 없었다. 트리스탄이 주최한 자리에서 대공비를 보았다는 화두 하나만으로도 사교계를 뜨겁게 달굴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다. 그래서인지 대공의 존재를 다분히 의식한 듯, 앤서린이 보내 온 초대장엔 어딘지 은밀한 구석이 있었다.
‘부군 몰래 오십시오.’
당연히 장난이었지만 이 초대가 말하는 의미를 다분히 드러내고 있었다. 앤서린 후작은 대공비와의 친분을 공식적으로 드러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시스를 위해 정보를 모아야 한다는 명분이 있었으므로, 아스티나는 그다지 죄책감 없이 초대에 응했다.
“제가 좀 늦은 게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후원하던 아이 하나가 또래들과 싸움을 벌여서요. 출발 전까지 정신이 없었습니다.”
“저런, 설마 그게 제가 아는 사람입니까?”
아스티나는 애매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앤서린이 넌지시 던진 질문의 답은 ‘그렇다’였다. 소란의 주인은 다름 아닌 제시였으니까.
제시가 자신을 괴롭히던 종자 무리 모두를 때려눕힌 사건은 아탈렌타 기사단 전체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그에 더해 헨리는 자신을 고자로 만들려 한 아서를 벌해 달라며 무릎까지 꿇었었다.
아스티나의 고민 어린 표정을 본 앤서린이 크게 파안했다.
“젊은이들이 치고받고 싸우는 것이야 흔한 일이 아닙니까. 인간이란 서열을 매기지 않고서는 배겨 내지 못하는 생물이랍니다.”
“한참 아래라 생각했던 아이한테 흠씬 두들겨 맞았으니 더욱 불만이 거셌지요.”
“오늘 저녁은 심려를 잊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지인들을 좀 소개해 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이에요.”
앤서린과 아스티나가 나란히 걷는 뒷모습에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아탈렌타의 대공비가 트리스탄 후작의 목숨을 구한 일은 이미 사교계 내의 뜨거운 감자였다. 앤서린 후작이 대공비에게 내보이는 호의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다.
귀부인들의 부채 밑으로 속삭임이 떠돌았다.
“척진 가문의 사람인데도 저리 거리낌 없이 대하시니 대단하시네요. 대공비께서 앤서린 후작을 구하기 위해 살수들과 맞서셨다죠?”
“그래도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저분이 이런 자리까지 참석하실 줄은 몰랐어요.”
“두 가문의 악연이 드디어 끝나는 걸까요?”
웅성거림을 뒤로하고 앤서린은 조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친우들에게 다다랐다. 앤서린이 아스티나를 소개하려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다들 인사하십시오. 수도에 오자마자 유명 인사가 되신 대공비 전하이십니다.”
앤서린이 아스티나를 안내한 자리엔 젊은 남성 다섯이 서 있었다. 모두 아스티나도 안면이 있는 상대였다. 이전에 몇 번 마주쳤던 유명 가문의 영식이나, 혹은 젊은 가주들이었다.
“아스티나 반 아탈렌타입니다.”
아스티나가 우아하게 인사했다. 트리스탄의 가주가 대단한 호의를 보이니 그 친우들도 망설임 없이 호감을 표시했다.
“후작님의 목숨을 구해 주셨다지요. 암살자들을 앞에 두고서도 떨지 않으셨다니, 대단히 용맹하십니다.”
“후작님도 고전하신 살수라니 보통 상대가 아니었을 텐데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처음엔 앤서린 후작이 너무 피를 많이 흘려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닌가 의심했어요!”
나이대가 젊은 탓일까 농담에 격의가 없는 편이었다. 이 정도 수위의 농은 익숙한 모양인지 앤서린이 웃는 얼굴로 남자의 팔을 두드렸다.
건너편에 선 사내가 술을 한 모금 들이켜고는 건배하듯 잔을 들었다.
“정말, 근래에 보기 힘든 존경받을 만한 여성이세요.”
그에 아스티나가 입꼬리만 끌어 올리며 응대했다.
“말씀하신 것처럼 대단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이까지 건드릴 생각은 없었는지 제가 앞으로 나서자마자 줄행랑을 치더군요.”
“아닙니다. 보통의 레이디라면 도망가기 마련일 텐데요. 왁! 하고 말이죠.”
앤서린 바로 옆의 선 자가 얇고 가는 비명을 흉내 냈다. 무리들 사이에서 한차례 웃음이 터졌다. 그에 앤서린이 익살스럽게 대꾸했다.
“대공비 전하는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십니다. 제 몸 하나 지킬 줄도 모르면서 분칠에만 집중하는 한심함과는 거리가 먼 분이죠.”
아스티나의 미소가 흐려졌다. 그러나 너무도 미세한 변화였던지라 모두들 그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리 중 하나가 앤서린의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했다.
“남다른 여자 하면 트리스탄 후작님만 한 분이 또 있겠습니까. 저는 전술에 이리 해박한 여성분은 또 처음 봤습니다.”
“영광입니다, 더 배움에 힘써야겠군요.”
앤서린이 우스꽝스럽게 치맛단을 들어 올리는 레이디의 인사를 흉내 냈다. 그 움직임엔 명백한 조롱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아스티나의 시선이 천천히 앤서린의 웃는 얼굴에게로 옮겨 갔다.
아스티나는 지금 이 순간,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앤서린과의 만남들을 떠올렸다.
‘어떤 무기를 다룰 줄 아십니까?’
‘역시, 허영이 아닌 마음의 양식을 채울 줄 아시는 분이군요.’
‘아니요, 이런 꽃은 저보다는 대공비 전하께 어울리지요.’
앤서린이 무예를 안다는 이유로 아스티나에게 호감을 가졌을 때, 서점에서 마주치고는 과도한 반가움을 드러냈을 때, 정원에서 꽃을 건네었을 때.
여성 가주로서 주류 사회에 섞여 들기 위해 앤서린은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 설마 그동안 인식이 나아졌으리란 순진한 희망을 품기라도 했었나.
아스티나는 그제야 앤서린에게서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스티나가 멍하니 앤서린을 응시하며 말했다.
“귀공께선…… 아주 훌륭한 후작님이 되셨군요.”
머리를 짧게 자르고 거침없이 걷는다. 귀공자의 말씨를 쓰며 호쾌히 검을 휘두른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술을 들이붓고 동료들과 어울려 지저분한 술판 속에 잠든다. 어떤 거친 행군에도 뒤처지지 않도록 이를 악물며.
바지를 입은 여자여, 당당히 남자들이 말하는 여성성을 버리고 비난하라. 그래야 살아남을 테니.
“예?”
앤서린의 목소리가 언뜻 날 선 기색을 띠었다. 기민하게 눈빛을 달리한 것은 앤서린 하나였다. 표면적인 뜻으로 이해한 무리는 저마다 앤서린을 치켜세우듯 한마디씩 보탰다.
“그럼요. 후작님만큼 멋들어진 젊은 가주가 또 있을까요.”
“대단한 분이시죠. 활 쏘는 솜씨는 말할 것도 없이 발군이시고.”
그러나 앤서린만은 아스티나의 말에 담긴 함의를 알아챌 수 있었다. 이어진 칭찬 세례에도 앤서린의 표정은 풀어질 줄 몰랐다. 앤서린이 미묘한 불쾌감을 따지고 들기도 전, 아스티나는 우아하게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남겼다.
“마차를 오래 탔더니 멀미 기운이 좀 있군요. 잠시 바람이라도 쐬어야 할 것 같아, 아쉽지만 다음에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런, 발코니까지 모셔다드릴까요?”
웃음 짓던 무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염려를 전해 왔다. 아스티나는 되었다며 홀로 걸음을 돌렸다. 앤서린은 우두커니 서서 멀어지는 아스티나를 응시했다.
이야기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가 되었을 즈음, 무리가 작은 목소리로 숙덕였다.
“다시 봐도 대단한 미인이군요.”
“대공과 함께 참석한 자리에서 보니 선남선녀가 따로 없더이다.”
“후작님, 혹 앞으로 아탈렌타와는…….”
제게로 돌아온 질문에 앤서린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앤서린이 여전히 대공비가 멀어진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더듬더듬 말했다.
“잠시…… 저는 모자란 술을 좀 가져오겠습니다.”
양해를 구한 앤서린이 성난 기색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성큼성큼 홀을 가로질러 곧장 발코니로 향했다. 걸음이 빨랐던 통에 앤서린은 아스티나가 들어선 시점과 별반 차이 없이 같은 자리에 다다랐다.
앤서린이 발코니 안으로 들어서며 사납게 커튼을 쳤다.
“절 비난하신 겁니까?”
앤서린의 숨은 거칠었다. 오직 호의로만 대했던 상대가 돌려준 조롱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던 탓이다. 아스티나는 그런 앤서린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대로 난간에 걸터앉았다.
아스티나가 무감한 얼굴로 되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스티나의 여유로운 응대에 앤서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앤서린이 확신하듯 말했다.
“역시 제 생각이 맞았군요.”
“착각이십니다.”
“아니, 대공비께서는 나를 경멸했습니다.”
“오해입니다. 저는 후작께 더 큰 짐을 지울 생각이 없으니까요.”
“무슨 말씀입니까, 그게?”
아스티나는 대답하지 않고 왼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깥으로 돌출된 테라스에선 저택의 전경을 모두 내다볼 수 있었다.
과연 화려한 사저였다. 길을 안내하려 촘촘히 매단 등불이 보석처럼 정원을 밝히고 있었고, 언뜻 비치는 꽃잎은 값나가는 종자가 분명해 보였다. 홀에 달린 유리창엔 불순물이 비치는 법이 없었다. 대리석으로 된 바닥 또한 잘 관리되어 반짝였다. 앤서린이 끌어모은 인맥에는 아스티나조차 놀랐을 정도였다. 아스티나는 신음하듯 눈을 감았다.
어리석게도 이 모든 게 어떤 것도 잃지 않고 얻은 영광이라 믿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앤서린이 흥분하여 한 발짝 다가서며 물었다. 그 질문은 차라리 발악에 가까웠다. 이보다 나은 방법이 있다면 앤서린도 그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앤서린은 알았다. 자신이 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지가 무엇이었는지를.
앤서린이 가주직을 승계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남자보다 더 남자다워지는 것이었다. ‘이래서 계집은 안 돼’ 따위의 말이 듣기 싫어 무던히도 많은 걸 버렸다. 자세를 교정하고 머리를 자르며, 마치 하늘이 그녀를 여자로 잘못 태어나게 한 것처럼 굴었다. 그러자 모두가 앤서린을 칭찬했다. 남자보다 더한 대장부라며.
다름을 증명하기 위해 방탕한 영애들을 비난하는 일은 오히려 쉬웠다. 비싼 장신구를 사들이는 귀부인들을 보며 혀를 차고 영애들에게서 상식의 부족함을 발견할 때마다 내심 멸시했다. 제 안에 있을지 모를 헤픈 행동거지와 낭비스러운 구석을 검열했다.
사치와 티 파티를 멀리하는 듯 굴자 또래의 영식들은 앤서린에게 동질감을 가졌다. 그들에게서 여자가 아니게 된 순간 앤서린은 비로소 그들의 옆에 설 수 있게 되었다. 그건 몹시도 달콤한 보상이라, 그 유대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타고난 성을 부정하는 일이 스스로를 갉아먹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글쎄요. 모두에게 미움받는 것과 스스로를 증오하게 되는 것, 어떤 게 더 불행할까요.”
그리 중얼거린 아스티나가 설핏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불쌍한 사람, 당신의 죄는 당신의 재능입니다.”
재능이 있기에 성취를 원했고 알기에 지혜를 탐했다. 차라리 몰랐다면 욕심내지도 않았을 것들이었다. 어차피 무엇도 이룰 수 없는 삶이라면 처음부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편이 나았다.
“아니요, 저는 압니다. 제게 없는 것은 볼품없는 세 번째 다리뿐입니다.”
앤서린이 지지 않고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실로 그녀에게 부족한 건 그것 하나뿐이었다. 앤서린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릴 적부터 소망해 왔다. 차라리 에드윈과 자신이 바뀌어 태어났다면 좋았으리라고. 그랬다면 에드윈은 관심 없는 가주직에서 멀어질 수 있었을 테고 앤서린은 당연하게 가문을 아울렀을 것이다.
아비의 편애에 울다 잠든 밤, 하루의 끝에서야 겨우 꾸었던 단꿈이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동쪽에서 떠오른 해에 절망했다.
앤서린이 절규하듯 물었다.
아버지, 에드윈은 이미 떠나고 없는데 왜 그를 기다리시나요. 당신의 딸은 당신의 것을 물려받을 자격이 없나요.
아버지는 그제야 앤서린을 돌아보며 답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네 남편감을 찾으면 되겠구나.
“제가 이 모든 걸 얻기 전 어떤 취급을 받아 왔는지 안다면, 대공비께서도 그런 말씀은 결코 꺼내지 못하셨을 겁니다.”
앤서린이 분개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스티나는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런 앤서린을 응시했다. 앤서린이 그녀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다른 영애들을 비난하는 건 분명 잘못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앤서린을 형식적인 말로 타이르고 싶지도 않았다. 앤서린을 다치게 한 이시스를 차마 책하지 못했던 것처럼.
아스티나가 힘없이 대답했다.
“예, 그렇게 자리를 공고히 하십시오. 그리고 절대 후회는 하지 마세요. 스스로를 비난하는 순간 모든 걸 잃을 겁니다.”
“불필요한 염려는 사양하도록 하지요, 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앤서린이 으르렁거리듯 대꾸했다. 아스티나가 투명한 눈으로 앤서린의 적의 어린 시선을 맞받아쳤다.
“그렇다면 왜 저를 따라 나오셨지요?”
“…….”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해야 인정받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니 후작님께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요.”
크게 숨을 들이켠 앤서린이 왈칵 언성을 높였다.
“왜 제가 부끄러워해야 합니까? 부끄러워해야 할 자가 있다면 저를 이렇게 만든 세상 쪽이 아닙니까?!”
앤서린의 입술이 파르라니 떨렸다. 그녀가 제 눈가를 쓸어내리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슬퍼했느냐고요? 아니요, 차라리 기뻤습니다. 아, 이제야 모든 게 끝이 났구나. 그 지긋지긋한 장자 타령에서 드디어 해방이구나! 젠장, 이번엔 가신들이 에드윈의 이름을 지겹게도 부르짖을 것을 모르고!”
앤서린의 가슴이 가쁘게 부풀었다가 내려앉았다. 떨리는 어깨는 불안정했다. 앤서린이 거친 숨을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예, 그래서 머리를 잘랐습니다. 에드윈의 이야기를 꺼내는 자가 있으면 내치고 벌을 주었어요. 사내보다 더 사내같이 굴자 적어도 앞에서는 무시하지 않더군요. 이런 제가 잘못되었습니까?”
어째서 앤서린은 그녀의 형제를 의심해야 했나. 본인이 가주가 될 수 있도록 무던히도 도움 주었던 핏줄을 어찌하여 가장 공을 들여 지워 내야 했을까.
아스티나는 괴로이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쏟아 내듯이 말했다.
“후작님, 습격을 사주한 건 그대의 형제가 아닙니다.”
앤서린의 움직임이 일순 멈추었다. 을씨년스러운 침묵이 찾아들었다. 이전에도 대공비는 에드윈이 진범이 아닐 것이라 말했었지만, 이번은 더욱 확신 어린 어조였다. 앤서린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후작님은 타인의 싸움에 휘말린 것뿐입니다. 큰일을 벌이고자 했던 누군가가, 후작님의 눈을 가문 내로 돌리게 하기 위해 부러 수를 쓴 것이지요. 그는 후작님께서 가장 먼저 의심할 사람이 형제라는 걸 알았을 겁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추측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서 에드윈이 가장 큰 용의자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아요.”
앤서린이 조소를 터트리며 애써 반박했다. 그럼에도 당황한 음성은 잘 숨겨 낼 수 없었다. 갑자기 쏟아진 이야기를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었던 탓이다.
아스티나가 고요히 물었다.
“후작님, 정말 그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에 앤서린은 좀처럼 대답하지 못했다. 앤서린 역시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는 에드윈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앤서린은 존재하지조차 않는 오라비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무던히 힘쓰던 가신들과 긴 싸움을 거쳐 왔다.
에드윈은 더 이상 저택을 나가고 없었지만, 동시에 모두의 마음속에 분명하게 존재했다. 모두가 에드윈이 철들면 당연히 가문으로 돌아올 것이라 믿었으니까. 앤서린은 내내 에드윈의 빈자리를 견제하며 살아야 했다. 심지어는 가주로서 공고히 자리매김한 지금에 와서도.
그래서 에드윈의 희미해진 웃는 낯에 부러 비열한 표정을 덧대어 추억했다. 배척할 공공의 적을 세우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경계는 곧 그녀를 강하게 하는 힘이었다.
타고난 성별조차 버렸는데 오라비를 버리는 일이 무어 어려웠을까. 그렇게 교류하던 친구들을 버리고, 인정을 버리고…….
앤서린은 주먹을 틀어쥐었다. 그녀가 마른 입술로 더듬더듬 되물었다.
“대공비 전하야말로, 어찌 에드윈이 범인이 아니라 단언하십니까? 제 오라비와는 단 한 번밖에 만난 적이 없지 않으십니까?”
“제가 당신의 형제와 안면을 튼 이유를 아시지 않습니까. 그는 대단치 않은 무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아마도, 후작님이 기억하시는 과거의 모습과 그리 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러나…….”
앤서린은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조차 지금 자신이 에드윈을 믿고 싶은 건지, 아니면 품고 있는 아집을 필사적으로 지키고 싶은 건지 분간할 수 없었던 탓이다.
아스티나도 고작 이런 몇 마디로 앤서린을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적어도 앤서린이 더 이상 무언가를 잃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것이 그녀를 오롯이 지지해 주었던 형제라면 더더욱.
아스티나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후작님. 부디 그대를 위해 아직까지 먼 곳에서 방황하는, 그대의 형제를 믿으세요.”
* * *
“……작님, 후작님!”
방 밖에서 들려오는 부름에 번뜩 눈을 떴다.
앤서린은 상체를 빠르게 일으켰다가, 밀려드는 두통에 그만 깊이 신음했다. 지난밤의 과음 때문인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메슥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있으니 이번엔 귀가 울려왔다. 치솟는 짜증에 앤서린이 걸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누가 깨우라고 했지? 푹 자게 내버려 두라고 말했을 텐데!”
오늘은 몸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챙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어찌 남을 다 살필까. 생각까지 어지러운 와중이라 도통 아랫것들의 실수를 봐줄 상태가 아니었다.
어젯밤 앤서린은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지우려 끈질기게 술을 들이부었다. 대공비에게 들은 말이 내내 가슴께에 불쾌하게 얹혀 있었던 탓이다. 대답하지 않고 도피하듯 그 자리에서 도망쳤지만, 그렇다고 대공비가 한 말이 잊힌 건 아니었다.
집요히 앤서린을 뒤쫓은 죄책감은 잠에서 깬 지금까지도 여전히 제 자리에 있었다.
“후작님, 그, 그것이…….”
하인은 좀처럼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종내 앤서린이 노한 기색을 드러냈다.
“할 말이 없으면 이만 조용히 돌아가도록, 이 일은 나중에 질책할 테니.”
“그게…… 에드윈 도련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우는 목소리를 내던 하인이 그만 빽 하고 소리쳤다. 앤서린은 잠시간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에드윈이 찾아왔다고? 하필 지금?
“뭐?”
“방금 저택에 도착하셨습니다. 어디로 모셔야 할지 몰라 우선 응접실로 안내했습니다만…….”
직속 하인들은 가주가 형제를 견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에드윈에게 어떤 방을 내어 줄지 그들 선에서 결정하지 못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잠깐, 잠깐…….”
앤서린이 생각을 정리하려 제 머리를 감쌌다. 이윽고 그녀가 신음처럼 말했다.
“내가 지금 나가 보지.”
에드윈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지금 태평히 잠이나 이어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다지 남에게 내보일 몸 상태는 아니었지만 앤서린은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대충 술 냄새를 지우고 옷을 갈아입자 그럭저럭 봐줄 만한 몰골이 되었다. 목이 졸리면 토할 것 같은 기분이라 타이는 걸치지 않았다.
앤서린은 평소보다 비교적 간편한 차림으로 에드윈이 기다리고 있다는 응접실에 다다랐다. 문이 열리자마자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던 에드윈이 앤서린을 돌아보았다.
“앤서린, 다쳤다면…… 왁! 누구야!”
에드윈이 앤서린의 이름을 부르다 말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덕분에 앤서린도 지레 놀라 주변을 경계했다. 그러나 당연히도 응접실 안으로 들어선 건 앤서린 혼자였다.
앤서린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거야?”
낯선 사내에게서 들려온 여동생의 목소리에 에드윈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가 긴가민가한 목소리를 내었다.
“앤서린……?”
앤서린은 마침내 에드윈의 반응을 이해했다. 지금 자신은 영락없이 남성 귀족의 외관을 흉내 내고 있었다. 누이를 만나러 왔는데 웬 사내놈이 뛰쳐나왔으니 놀랄 법도 하다.
“어, 그…… 많이 달라졌구나.”
에드윈이 뭐라 말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는 듯 더듬거렸다. 앤서린도 황당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차림새가 좀 달라졌기로서니, 날 못 알아봤어?”
“워낙 얼굴을 본 게 오래됐잖니. 휴, 난 또 네가 애인이라도 소개해 주려는 줄 알고…….”
짧은 머리의 동생을 동생의 정부로 착각했다 이 말이었다. 앤서린은 그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에드윈과 다시 만났을 때 이런 바보 같은 화두로 대화를 시작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앤서린은 에드윈을 지나쳐 소파에 앉았다. 에드윈도 엉거주춤 앤서린의 건너편에 자리 잡았다. 에드윈이 티팟으로 손을 뻗으며 물었다.
“아, 그래. 차라도 한잔할래?”
“어제 과음했어, 차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아.”
그리 답하며 앤서린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는 뒤따라 들어온 하녀가 건넨 찬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배 속이 차가워지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앤서린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수도까지 무슨 일이야?”
다소 쌀쌀맞은 태도였다. 앤서린은 도통 순수하게 에드윈을 반가워할 수 없었다. 습격을 받은 일로 에드윈을 의심하여 뒷조사까지 하지 않았던가. 에드윈과 함께면 어떤 의심도 없이 편안할 수 있었던 어릴 때와는 상황이 사뭇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사교계를 오래 떠나 있었던 에드윈은 그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그제야 본 목적을 떠올렸는지 에드윈이 몸을 일으켜 앤서린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네가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어. 중태라던데 몸은 괜찮은 거야?”
에드윈이 앤서린의 어깨를 쥐고 몸을 꼼꼼히 살펴 왔다. 앤서린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런 에드윈을 올려다보았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눈을 보고 있자니 그의 뒤를 캤던 일이 바보같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앤서린이 떨떠름히 말했다.
“그건 과장된 소문이야. 실제로는 다리에 화살을 맞았을 뿐인 걸, 그마저도 비껴간 참이고.”
“그래? 그것까진 듣지 못해서……. 아무튼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다.”
동생이 습격을 입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에드윈은 방향을 틀어 수도로 달려왔다. 그런데 거친 행군이 보람 없게도 앤서린은 무척이나 멀쩡해 보였다.
에드윈이 머쓱하게 웃음 지었다. 7년이나 얼굴을 보지 못해서인지 분위기가 어색했다. 에드윈은 화제를 찾아 머리를 굴리다가, 곧 얼마 전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참, 내 소식을 전해 준 사람이 있었니? 너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 부탁했었는데.”
그 말에 앤서린은 결국 잊고 싶었던 대공비의 얼굴을 다시 떠올리고 말았다. 앤서린이 전혀 유쾌하지 못한 어조로 되물었다.
“대공비 말이야?”
“뭐? 아탈렌타의 대공비?”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편지를 줬어?”
“나한테 성을 밝히지 않았거든. 아……, 허허……. 그래서 가문 이름을 안 밝혔었구나.”
에드윈이 헛웃음을 지으며 제 입가를 쓸었다. 앤서린은 그런 에드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소식을 전한 것도 분명 그게 처음이었지? 왜 7년씩이나 영지에 들르지 않은 거야? 한 번쯤 찾아올 법도 한데.”
에드윈의 귀환을 바란 적이 없으니 이는 빈말이다. 앤서린이 기반을 충실히 다질 수 있었던 건 에드윈이 부재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에드윈이 영지를 찾아왔다면 앤서린은 그가 머무는 내내 감시를 붙였을 것이다.
에드윈이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그거야 돌아다니는 게 재밌기도 하고…….”
“고작 재미 때문에?”
앤서린의 삐딱한 대꾸에 에드윈이 입꼬리를 당겼다. 에드윈은 늘 짓던 사람 좋은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이번만은 그 눈에 진지함이 담겼다.
에드윈이 다정하게 말했다.
“그래야 네가 안심할 것 아니니.”
앤서린의 계산을 몹시 부끄럽게 만드는 대답을.
“뭐?”
앤서린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곧이어 말도 안 된다는 양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무슨…… 허울 좋은 소리야? 난 네가 책임감 없이, 가문을 버리고 간…….”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넌 내가 가진 걸 갖고 싶어 했고 난 너만큼 잘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
“앤서린, 이 저택을 봐, 아버지가 있을 때도 이 정도로 잘 관리되진 않았어. 그 외에도 모든 게 대단했지. 비옥해진 트리스탄의 영지와 강화된 경비, 더 반짝이는 가문의 영광 같은 것들 말이야.”
에드윈이 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맺었다.
“넌 이 모든 걸 가질 자격이 충분했어.”
앤서린은 멍하니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녀의 입술이 겨우 벌어졌다.
“……그렇다면, 에드윈 너는?”
“글쎄다. 나는 가문에 빌붙는 한량이 제격인가 보구나.”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역시 알 수 없다.
앤서린의 표정이 굳어 들었다. 가면이 갈라졌다. 더는 에드윈의 앞에서 마주 웃어 보일 수 없었다. 앤서린은 몸을 숙이며 천천히 제 얼굴을 감쌌다. 에드윈이 왜 그러냐는 듯 앤서린을 불렀다.
“앤서린?”
“속이 좋지 않아서…….”
토기가 치밀었다. 앤서린은 입을 가리고는 헛구역질을 했다. 에드윈이 당황한 얼굴로 다가와 등을 두드려 주려고 했다. 앤서린은 급히 손을 뻗어 그런 에드윈을 밀어냈다.
“수도까지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오늘은…… 들어가서 좀 쉬어. 지금…… 내가 손님을 맞이할 상태가 아니라.”
“그…… 래. 너 생각보다 술꾼이 되었구나.”
에드윈이 그 와중 친근한 낯으로 허허, 하고 웃었다. 에드윈은 자리에서 일어서는 앤서린을 향해 어정쩡하게 손을 흔들었다. 앤서린은 그의 눈을 피해 응접실을 나왔다. 저 바보 같은 애정으로부터 황급히 멀어졌다. 방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불안정했다.
황급히 침실로 들어서자 하녀 여럿이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앤서린은 아무렇게나 손을 휘적였다.
“나가, 전부 나가.”
“예, 후작님.”
하녀들이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짧은 갈색 머리를 한 여자가 마지막으로 문턱을 밟기 전, 앤서린이 갈라진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잠깐.”
“예?”
“술…… 술을 좀 가져와.”
하녀는 어딘지 겁먹은 표정으로 재빠르게 술을 내어 왔다. 모두가 나가고 혼자 남자마자 앤서린은 황급히 술병을 열었다.
지금 손에 든 것은 지난밤에 들이켰던 것과 같은 잔이다. 앤서린은 어제처럼 잊기 위해 술을 삼켰다. 아직 피에 남아 있던 알코올 때문인지 금방 취기가 돌았다. 그리고 곧 세상 역시 빙빙 돌았다. 앤서린의 상체가 이상한 방향으로 허물어졌다.
뭐지?
왜 이렇게 되었지?
결국은 참지 못했다. 앤서린은 그대로 속을 게워 냈다.
“우웨에엑.”
트리스탄가의 마부는 늦은 밤 곤욕을 겪었다. 술에 온통 취한 가주가 갑자기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본래 주인이 요구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마부의 직업 윤리라지만, 후작이 밝힌 목적지에 마부는 겁먹은 음성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후…… 후작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는 편이……!”
“네가 감히 주인의 명령을 무시하는 것이냐?”
앤서린이 무서운 눈으로 마부를 노려보았다. 숨을 쉴 때마다 독한 위스키 냄새가 쏟아지는 걸 보아 분명 제정신은 아니었다. 그리고 인사불성인 상태에서는 어떤 결정을 내려도 이상하지 않다. 그게 부지불식간에 아랫사람의 생계를 끊는 일일지라도. 마부는 딸꾹질을 참으며 마차를 출발시켰다.
말의 걸음이 멎은 곳은 다름 아닌 아탈렌타가의 저택이었다. 앤서린은 휘청이며 마차에서 내려서 고래고래 대공비를 불렀다.
때아닌 불청객에 저택이 소란스러워졌다. 문지기와 하인, 하녀들, 심지어는 집사까지 이 고귀한 취객을 어찌 취급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앤서린은 뜨거운 냄비 손잡이 취급을 받으며 이곳저곳 옮겨진 끝에야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있던 아스티나는 소식을 듣고는 도로 벗어 둔 옷을 걸쳐야 했다. 아스티나가 응접실에 다다랐을 때, 앤서린은 취기가 어느 정도 가신 상태였다. 온통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여전하고 감정에 휩쓸리는 상태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럭저럭 대화가 통할 정도로는.
“이런 밤중에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사리 분간이 가능해진 앤서린이 꼬부라진 혀로 웅얼거렸다. 아스티나는 내심 앤서린이 과연 이 일을 기억할 수 있을지 의심했다. 모르긴 몰라도 후에 목숨을 구했을 때와 비슷한 값의 보답이 돌아오지 않을까. 이 부끄러운 일을 잊어 달라는 입막음의 의미로.
마침 테리오드가 저택에 부재한 상태라 다행이었다. 사교 모임에 참석하겠다며 늦은 밤 나설 때만 해도 가자미눈을 떴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천운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였다면 아스티나만큼 열린 마음으로 앤서린을 받아 주지 않았을 테니까.
아스티나는 옆에 선 하녀에게 꿀물을 좀 가져다 달라 일렀다. 그러고는 턱을 들며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지난번 모임에선 그리도 못 본 체를 하시더니, 어인 일로 사저까지 찾아오셨는지요.”
아스티나는 생각보다 뒤끝이 있는 인물이다.
처음 보는 쌀쌀맞은 태도에 앤서린이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그녀가 불분명한 발음으로 사과의 말을 꺼냈다.
“그땐, 그땐…… 제가 무례했습니다.”
“네, 지금도 그러하시고요.”
“죄송합니다. 대공비 전하밖에 찾아뵐 분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앤서린은 완전히 꼬리를 내린 기색이었다. 그제야 아스티나의 표정이 풀어졌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취해서는 정적의 집까지 찾아왔나.
“사과를 받았으니 되었습니다. 무슨 용건이신가요?”
“……윈이…….”
“예?”
알아듣기 힘든 발음에 아스티나가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앤서린이 괴로운 기색으로 대답했다.
“에드윈이 찾아왔습니다.”
“……그분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왜 그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느냐 물으니 저 때문이었다고 하더군요. 방문이 잦으면 다른 마음을 가지는 이들이 생겨날 테니까요. 바보같이, 그동안 저는 아는 걸 에드윈은 전혀 모르리라 생각해서…….”
앤서린은 에드윈이 중압감에 짓눌려 가문을 떠난 보잘것없는 사내라고 생각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은 건 아버지의 쓴소리가 듣기 싫어서이며, 그래서 마음 편한 방랑을 택한 거라 여겼다.
앤서린이 빈 양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는 제 형제를 믿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저는 왜 이런 사람밖에 되지 못했을까요. 바깥을 나돌며 온갖 고초를 겪었을 에드윈이 더 속세에 찌들었어야 맞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정작 그쪽은 아직도 천진하게 정의나 가족의 사랑 따위를 믿고 있다니.”
형제를 비난하는 말에 허물이 없었다. 아스티나는 설핏 웃었다.
앤서린이 어지러운 머리를 문질렀다. 잠깐의 침묵 끝에 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제가 추해 보이십니까?”
“저는 그대를 동정합니다.”
술기운 때문일까, 앤서린은 동정이라는 말이 그리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솔직한 아스티나의 말에 안심이 되었다.
앤서린이 한숨을 내뱉었다. 숨결과 함께 밀려 나온 알코올 냄새가 지독했다. 그간의 노고를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보다 힘든 것 같습니다. 이 지긋지긋한 가주직을 위해 제 안의 계집을 버리는 일은요.”
“후작님, 그대는 아무것도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후작님의 안에 있는 것은 여인이나 사내가 아닌, 그저 앤서린이라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제게서 그것을 발견하려 애쓰는걸요.”
“…….”
“연극을 보고 눈물지으면 역시 여자라 마음이 여리시군요. 조금이라도 치렁치렁한 장식품에 눈길을 주면 역시 후작께서도 여자시군요. 레이디의 물건을 일절 삼가면 그래도 여잔데 좀 꾸미고 다니시지 그러십니까.”
앤서린이 거친 목소리를 흉내 내며 그동안 들어 왔던 말들을 읊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앤서린은 마음에 증오를 더했다. 감동에 흐르는 눈물과 치장에 들이는 사치, 그리고 여인들의 기싸움마저도 혐오했다. 그 모든 것들에게서 거리를 두면 그녀만은 안전했으니까.
앤서린이 헛웃음을 지으며 소리쳤다.
“세상에, 다들 내가 왜 이 지긋지긋한 짧은 머리를 버리지 못하는지도 모르고!”
그녀가 손바닥에 눈가를 묻었다. 이윽고 그녀에게서 지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아니, 사실 짧은 머리가 싫은 건 아닙니다.”
고개를 든 앤서린의 눈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가 멍한 눈으로 말했다.
“사실은 싫어합니다.”
입술을 깨문 앤서린이 이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잘 모르겠습니다.”
종래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완전히 잦아들었다. 앤서린은 얼굴을 마른 두 손에 완전히 파묻은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어쩔 줄 모르는 아이처럼.
“후작님, 그것에 의미를 두지 마세요.”
아스티나가 앤서린을 응시하며 잔잔한 음성으로 말했다.
“영식들은 영애들의 드레스와 장신구들을 사치라 비난하곤 하지만, 막상 드레스를 기피하는 영애들은 괴이하게 보지 않습니까. 그들이 생각하는 외관과 맞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으면 그는 여자가 아니게 되지요. 짧게 쳐 낸 머리가 그대를 가주로 만든 것처럼요.”
“…….”
“그대는 태초부터 용감하고 대단했으며 아주 재능이 넘쳤어요. 그 사실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으니, 그들의 말이란 것도 고작 그 정도의 무게입니다.”
아스티나는 제시를 본체만체하며 배척하던 기사들을 기억했다. 그들과 제시는 결코 동일한 선상에 있지 않았다. 배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그녀들의 무지함을 누가 감히 비웃을 수 있나. 그리고 비난받을 여성상이라는 것엔 또 얼마나 근거가 없는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싸운다. 값진 것을 탐내고 슬프면 운다. 때론 남의 뒷이야기에 희열을 느끼며 질투에 매몰되기도 한다. 몸을 쓰는 일에 재능이 있는 자도 있을 것이며, 성취엔 전혀 관심이 없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다르면서도 같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후작님, 형체 없는 말들이 그대를 휘두르게 두지 마세요.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을 오직 타인 때문에 행하지도 마시고요.”
탁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앤서린이 그 말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실없는 반응은 한 번으로 멈추지 않았다. 결국 앤서린은 턱까지 뒤로 젖히고 커다랗게 파안했다.
숨을 진정시킨 앤서린이 아스티나를 마주 보며 정색했다.
“대공비 전하는 정말 이상한 사람입니다.”
“다들 그렇게 말하긴 하더군요.”
“정말 이상한 말씀을 당연하게 하시니, 제가 더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에 아스티나가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레타 집시들 사이에서 자라 온 그녀는 앤서린이 고민하는 모든 것들이 만들어진 관습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다.
아스티나가 정중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칭찬으로 듣도록 하지요.”
앤서린은 후련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하기도 했지만, 휘청이는 순간마저도 그녀의 표정엔 위엄이 넘쳤다. 취기로 흐리멍덩했던 눈빛은 어느덧 분명해져 있었다.
앤서린이 옷깃을 여미며 당부했다.
“다음엔 온전한 정신으로 찾아뵙지요.”
* * *
그리고 다음 날 저택엔 트리스탄의 인장이 찍힌 서신이 도착했다. 앤서린이 정식으로 성명을 보내온 것이다.
오찬 중 정적의 전언을 받아 든 테리오드가 실없는 농담을 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요. 역사에 근거하면 보통 이건 결투 신청장일 텐데.”
“글쎄요, 대공께서 결투하셔야 할 상대라면 제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아스티나의 의미심장한 말에 테리오드가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게 누굽니까?”
“어젯밤 대공께서 귀가하시기 전 한 불청객이 찾아왔었답니다. 분명 아주 잘생긴 분이셨지요. 부군께서 귀가가 늦으시니 저도 외로운 마음에 그만 안에 들여―”
“……부인, 제가 늦은 건 잘못했으나……. 아니, 한데 정말입니까? 그게 대체 누굽니까?”
아스티나는 턱짓으로 테리오드가 든 서신을 가리켰다.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방금 결투장을 보내오신 그분입니다.”
확실히 앤서린 후작은 아주 잘생긴 분이 맞다.
허를 찔린 기분에 테리오드는 피식 웃으며 접힌 종이를 펴 들었다. 그다지 중대한 내용을 예상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문단을 읽어 내릴수록 그의 이마 사이는 서서히 좁혀 들었다.
테리오드가 번뜩 고개를 들며 아스티나를 응시했다.
“이게……?”
단순히 지난밤 일에 대한 사과라고 생각했는데 테리오드의 반응을 보니 그뿐만은 아닌 듯 보였다. 궁금증이 동한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에게서 편지를 받아 들었다. 첫 문단을 읊는 그녀의 입가에 곧 웃음이 담겼다.
“지난밤의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고초를 겪으셨을 대공비 전하에게 사죄의 마음을 담아.”
안부를 묻는 가벼운 인사말로 시작한 편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저희에겐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정적이 구한 목숨으로 밤에 과도한 음주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지난밤 취한 상태로 귀하의 사저에 들이닥치는 대단한 무례를 저지르기도 했지요.
사죄의 선물을 고르기 위해 창고로 들어섰을 때 저는 아주 많은 옛것들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내기를 통해 얻었던 땅문서나 경매에서 승부욕이 동해 낙찰받은 명화, 그리고 결투에 승리했을 당시 사용한 검이라며 삼엄히 보관해 둔 쇳덩이 같은 것들을 말입니다.
그간 트리스탄과 아탈렌타 사이에서 생겨난 유물은 귀하의 곳간에도 많이 쌓여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대체로, 제가 본 물건들처럼 무척이나 별것 아닌 것들일 테지요.
유서 깊은 증오는 많은 부산물을 낳았습니다. 말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성으로 상대를 재단하고 판단하며 좋은 기회, 만남, 혹은 사람을 놓쳐 왔지요. 출처를 알 수 없는 악의로 눈을 가린 채 우리는 싸움을 배웠습니다.
상대를 짓밟는 법, 비방하는 법, 찌르고 공격하며 눌러 밟는 일.
이 모든 것은 대대로 트리스탄과 아텔렌타를 강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었습니다. 분노란 사람을 태우는 법이므로 우리의 선조는 분명 현명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헐뜯고, 서로의 피를 보며 언뜻 즐거운 듯도 하였으나,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이 끝나지 않는 경쟁에 지겨움을 품어 왔을 것입니다.
예, 실로 긴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모두가 충분히 배불렀지요. 후대의 자손을 증오로 기르는 오랜 과업은 이미 낡은 지 오래입니다. 본 목적조차 기억나지 않는 싸움엔 근거가 없으며, 지속할 이유는 더욱이 희미하기만 합니다.
저 앤서린 트리스탄은 트리스탄가의 가주로서, 아탈렌타와의 오랜 악연에 종지부를 찍고 진정한 친교를 청하는 바입니다.]
하룻밤 사이에 가문 사이의 모든 알력에 깔끔한 중단 선언이 돌아왔다. 테리오드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제 뺨을 몇 번 쓸다가, 뒷머리를 헤집다가, 아스티나에게서 다시 편지를 받아 들고는 줄글 가까이로 눈을 가져갔다.
이윽고 그가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대체 지난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스티나가 조용히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붙이며 대꾸했다.
“여자들 사이의 비밀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