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전략적 협약
다음 날 후계자의 잔을 되찾았다는 소문이 수도 전체에 파다하게 번졌다. 내용을 정리하자면 훔친 물건을 암암리에 되팔려던 도둑을 대공비가 영민하게 포착하였다는 것이 요지였다. 아스티나는 그에 황제의 입김이 닿아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프리모 황자로선 여러모로 면을 구긴 상황이었다. 그리고 아탈렌타가 얼마나 대단한 이름인지는 카라벨라의 국민 되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황제는 프리모 진영의 손해를 만회하고자 부러 대공비의 존재를 입에 담았으리라. 도둑을 잡은 주체가 대공비가 됨으로써 겉으로 보기엔 프리모가 아탈렌타의 지지를 받고 있는 듯한 그림이 연출되었으니까.
혹시 몰라 벤자민을 핑계 대어 황궁을 찾은 게 의미 없어지긴 했지만, 공적이 가려지지 않았음에 아스티나도 그럭저럭 만족했다.
“부인껜 이제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늦은 오후 눈을 뜬 테리오드는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귀족들의 모임이란 보통 저녁부터 시작되기 마련이라 그의 생활 주기도 늦은 시간에 맞춰진 참이었다. 테리오드가 깨어난 것은 아탈렌타가 황가의 더없는 충신으로 변모한 이후였다.
부지불식간에 얻은 영광에 테리오드가 황당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그가 책상 너머로 아스티나를 넘겨보며 물었다.
“벤자민 황자에게 다녀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 벤자민도 만났습니다.”
벤자민의 방을 벗어나는 데 얼마나 걸렸던가. 아스티나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어 내고는 곰곰이 그 시간을 추론해 보았다. 그녀가 짧게 덧붙였다.
“한 삼십 분 정도는요.”
테리오드의 얼굴에 미묘한 화색이 돌았다. 그는 아스티나가 상의 없이 벌인 행동보다는, 벤자민과 오래 어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기꺼워 보였다. 뒤늦게 표정 관리를 하긴 했으나 아스티나로서는 그 변화를 뻔히 다 지켜본 후였다.
테리오드가 뒤늦게 의문을 제시했다.
“지난번 프리모 황자의 행동을 불쾌해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어머, 카라벨라의 국민으로서 어찌 지엄하신 황자 전하께 반기를 품는단 말씀입니까.”
‘어머’라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추임새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아스티나는 말투에 섞인 조롱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어차피 집무실엔 그들 외의 다른 사람도 없었지만.
“저는 도무지 부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가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프리모를 골리기라도 할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연회에서 보인 냉랭한 기색엔 분명한 적의가 담겨 있었으니까. 한데 그를 견제하기는커녕 후계자의 잔을 찾아 주는 선의까지 베풀다니, 도통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기야, 밉보여서 득이 될 사람은 아니죠.”
테리오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는 그녀가 감정보다는 실리를 택했다고 판단했다. 과로가 싫다는 이유로 본인을 내쫓으려 한 가신들도 품었던 여자니까. 그러나 아스티나는 긍정하는 대신 피식 웃어 보였을 뿐이었다.
“이미 대공께서는 꽤나 밉보이신 모양이던데요.”
“전 비위 맞추기에 실패했지만, 부인께서 이번 일로 충분히 만회해 주셨지 않습니까.”
“그게 주목적은 아니었지만요.”
아스티나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공 부부가 둘 다 집무실로 향했음에 잠시 쉬시라며 하녀가 차를 내온 참이었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차는 딱 마시기 좋은 온도로 식어 있었다. 아스티나가 향을 음미하며 만족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도 대공께는 오후에 참석하실 자리에서 꽤나 괜찮은 무용담이 되어 주겠지요.”
“제가 따로 할 말이 있겠습니까. 자고 일어나니 부인께서 모든 걸 해치우고 오신 이후였던 것을.”
“하지만 모두가 대공을 치하하겠지요. 저는 전하의 부인이니까요.”
아스티나의 덤덤한 대답에는 뼈가 담겨 있었다. 그녀의 공적은 아스티나의 것이 아닌 대공비의 것으로 남았다. 잔을 내어 주었을 때에도 황제가 가장 성의를 들여 치하한 건 그녀와 결혼한 대공의 안목이었다.
아스티나는 그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이시스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 이치를 뼈저리게 느끼다 못해 이용하기로 결심했을 영리한 황녀를.
“그렇다면 제가 더 얼간이처럼 굴어야겠군요.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으니 말입니다.”
아스티나의 말을 이해한 테리오드가 쓴웃음을 흘렸다. 아스티나는 잠시간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만약 제가 프리모 황자에게 도움을 주는 대신 짓궂은 짓을 저질렀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이를테면 그에게 굴욕을 안겨 주거나, 대놓고 비웃었다면요.”
“그것참…….”
“그것참?”
“고소했겠군요.”
테리오드와 아스티나가 마주 보며 동시에 미소 지었다. 아스티나가 방금과 비교해 확연히 즐거운 기색으로 물었다.
“새로운 후계자를 원하시나요?”
“글쎄요, 바라 마지않는 일이지만 아무래도 힘들겠지요. 모두 프리모의 휘하로 들어간 데다 황제께서 새로 입적하신 황자마저 계승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까.”
테리오드가 입가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맞는 말이었다. 황궁에 더 이상 그와 대적할 수 있는 황자는 없었다.
그러니까, 황자에 한정한다면.
“프리모와 같은 조건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있긴 있지요.”
아스티나가 내색하지 않고 운을 떼었다. 테리오드는 그녀가 누구를 말하는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황제의 자식들은 태생 자체로 고귀한 핏줄로 불리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우열은 존재한다. 어미가 황제의 총애를 받거나, 혹은 대단한 가문의 출신인 경우 자식들도 완전히 다른 대접을 받았으니까. 그리고 프리모와 동복에서 난 이는 하나였다.
“이시스 황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녀도 황후의 자식이니까요.”
“이시스 황녀는 프리모의 훌륭한 수족인걸요.”
테리오드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것이 이시스가 듣는 정치판에서의 대체적인 평가였다. 아스티나 역시 벤자민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이시스의 속내를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황녀는 그만큼이나 스스로의 존재를 잘 지워 내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궁금해졌다. 이시스가 마침내 자신을 드러내기로 결심할 때, 그녀는 과연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물론 이시스 황녀가 대단한 인물인 건 사실이지요.”
테리오드가 그리 말하며 아스티나의 빈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옅은 노란색의 액체가 잔잔히 차올랐다. 찻잔 속 소용돌이에 시선을 주던 아스티나가 불쑥 물었다.
“대공, 제가 어디까지 대공의 권한을 빌려도 되겠습니까?”
두루뭉술한 질문에 테리오드는 고개를 들어 아스티나를 응시했다. 그는 그 뜻을 파악하려 잠시간 그녀의 얼굴을 살피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그런 탐색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테리오드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부인께서 임시직을 자처하셨을 뿐, 원래대로라면 그대는 엄연한 아탈렌타의 주인인 걸요.”
“원래대로라…….”
“예, 부인께서 저를 떠나시지 않는다면요.”
그가 말하는 ‘부인’이라는 단어에선 은근한 소유욕이 느껴졌다. 확답할 수 없는 문제에 아스티나는 입을 다물었다. 요즈음 그녀는 계속해서 그를 떠날 계산만 하고 있었으니까. 수도에 온 이후 그녀가 온갖 고서적을 헤집고 있는 이유를, 테리오드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상대의 침묵에 테리오드는 자연히 애가 탔다. 테리오드가 조급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스티나, 나의 부인.”
테리오드는 그 호칭에서 안정을 얻었다. 평생토록 그녀의 녹색 눈을 보며 하염없이 이름을 부르고픈 심정이다. 그녀는 요즈음의 자신이 차라리 저주받은 몸을 달가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까. 병증을 해결하기 전까지 대공가를 떠나지 않겠다던, 그녀의 말뿐인 약속 단 하나 때문에.
테리오드는 아스티나가 자신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도 스스로가 정상은 아니라고 여겼으니까. 그는 이 감정을 잘 다듬고 벼려 내, 가장 아름다운 부분만을 그녀에게 보여야 했다.
테리오드는 팔을 뻗어 찻잔을 쥔 그녀의 손을 겹쳐 쥐었다. 데워진 향기의 온기만큼이나 그녀의 손도 따듯했다. 테리오드의 눈에 한정 없는 애정이 담겼다. 테리오드가 진심을 담아 신실한 음성으로 고백했다.
“약속드립니다. 그대가 바라는 것, 원하는 것, 갖고 싶은 것. 그것이 무엇이 되든 그대에게 가져다 바치겠습니다.”
그녀만을 향한 신뢰 넘치는 눈빛, 다정한 미소, 그리고 겹쳐진 손의 미세한 떨림.
“그것이 내게도 기쁨이 될 것입니다.”
아스티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다음 순간 이어질 말을 결코 들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아스티나가 짧은 숨을 들이켜며 입을 열었을 때였다.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스티나의 어깨가 굳었다. 그녀는 테리오드에게 잡힌 손을 다소 매정하게 빼어 냈다. 다행히 들어오라 전하는 목소리는 그럭저럭 들어 줄 만했다.
테리오드가 머쓱한 기색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아스티나는 아쉬움이 담긴 그의 표정을 보지 않기 위해 애썼다.
“대공비 전하.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서적이 도착했습니다.”
집무실로 들어온 하녀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자리를 피할 확실한 변명이 생겼음에 아스티나는 내심 안도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군.”
“해석에 진전이 없어 벨라체 아카데미에 자문을 얻고자 마침 수도로 이송된 상태였다고 합니다.”
“잘됐군, 지금 가지. 대공, 그럼 저녁에 다시 뵙겠습니다.”
아스티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테리오드가 붙잡기도 전에 서둘러 집무실을 나왔다. 아스티나가 하녀에게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물건은 어디 있지?”
“전달하러 오신 분이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해 드릴까요?”
“아니, 됐어. 혼자 가지.”
평소 온화했던 주인이 내보이는 낯선 냉기에 하녀가 주춤했다. 아스티나는 하녀를 뒤로하고 빠르게 복도를 가로질렀다.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짓씹었다. 아우성치는 속내를 혀 아래에 가둬야 했으니까.
‘뭐라고 대답하려고 했지?’
말해 봐, 아스티나. 아니, 마티나인가?
‘대답을 돌려주려고 한 건 어느 쪽이야?’
그 순간 자신이 보고 있었던 건 정말 테리오드가 맞았나.
응접실 앞에 다다라 아스티나는 걸음을 멈춰 세웠다. 커다란 문을 밀고 들어가기 전 길게 숨을 들이켰다. 다행히도 두방망이질 치던 심장은 머지않아 가라앉았다.
아스티나는 차가워진 손끝으로 눈가를 눌렀다. 그녀가 스스로에게 되새기듯 중얼거렸다.
“다 끝난 일이야.”
반복된 다짐은 효과가 있었다.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평소와 같은 얼굴의 아스티나였다. 소파에 앉아 있던 상대가 그녀를 맞으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궁의 시종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물건이 벨라체로 옮겨졌었다고 하니 아카데미에서 나온 사람일까. 그가 정중히 모자를 벗으며 스스로를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공비 전하. 벨라체 아카데미에서 나왔습니다. 앨리쉬 발디입니다.”
“먼 길 찾아오시느라 고생하셨소. 내 바쁘신 학자님들을 귀찮게 한 건 아닌가 모르겠군.”
“아닙니다, 전해 드릴 물건과 함께 아주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이동한 참이랍니다.”
아스티나가 자리에 앉자 그가 호감 어린 미소를 지으며 들고 온 물건을 꺼내 들었다. 꽤나 조심히 보관한 듯 포장은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가 겉 매듭을 풀며 활달한 음성으로 말을 붙였다.
“사실 황궁 측에서는 물건을 직접 전달하기를 원하셨는데, 오래된 종이란 게 워낙 섬세한 보관을 요하는 물건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아스티나가 성의 없이 대꾸했다. 그가 문서를 옮기는 데 들인 노력이 애석하게도, 아스티나는 이것을 그리 소중히 대우해 주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그녀의 시큰둥한 기색에 남자는 다소 머쓱해졌다.
대공비가 무려 후계자의 잔을 찾은 포상으로 요구했다는 책이다. 그렇게까지 대단한 물건은 아니니 대단한 건 연구를 향한 대공비의 열의 쪽이리라. 그리 짐작하며 대공저를 찾았거늘 막상 마주한 대공비의 표정은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분위기를 띄우려 몇 마디를 주워섬기던 그가 싸늘한 반응에 결국 풀 죽은 얼굴로 일어섰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귀한 물건을 전하느라 고생이 많았소. 그럼 살펴 가시오.”
아스티나는 딱 지켜야 할 만큼의 예의만을 내보였다. 차를 한 잔 내어 줄 수도 있었겠지만, 아스티나로서는 내용물을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마침내 남자가 떠나고 아스티나 혼자 남았다. 그녀는 앞에 놓인 작은 함을 열고는 책을 꺼내 들었다. 기실 책이 아닌 기록이었고, 문서보다는 수기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앞면에는 앤서린이 말했던 대로 ‘차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스티나는 천천히 이름이 적힌 부근을 쓸었다.
“차르라.”
과연 물건의 주인은 예상대로였다.
왈도는 어렸을 적부터 왕이 될 인재라 추앙받으며 자랐다. 그의 어미가 아들에게 지어 부른 무엄한 애칭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왕을 뜻하는 이국의 단어는 곧 왈도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장난스럽게 그를 차르라고 칭하던 오랜 수하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짙은 붉은빛이었던 겉표지는 이제 갈색에 가깝게 변색되어 있었지만, 그녀가 기억하는 과거의 외관과 완벽히 일치했다. 앤서린에게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확신했다. 이것이 원수의 물건이라는 사실을.
왈도의 소지품을 기억하는 건 마티나가 머문 것이 다름 아닌 그의 침실이었기 때문이다. 끊이지 않는 불면에 졸린 눈을 들던 늦은 밤, 마티나는 종종 깃펜을 든 왈도를 발견하곤 했다. 알 수 없는 글자였지만 하루의 끝에 적어 나가는 것을 보아 일기가 아닌가 짐작했을 따름이었다.
그 선연한 과거의 흔적은 잠깐의 꿈결 같은 감상에서 그녀를 일깨웠다. 싸늘한 물속으로 뛰어들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이게 이제야 발견되다니.”
아스티나가 쓰게 웃으며 책장을 펴 들었다. 마티나는 여러 나라의 글자를 익혔지만 어디까지나 권력을 얻은 다음의 일이었다. 왈도의 침실에서 기회를 보던 때만 해도 그녀의 퀠른어 실력은 인사말을 건네는 수준에 그쳤다. 당시 알아보지 못했던 글자가 이제는 속속들이 읽혔다.
‘독수리, 날개, 소젖, 울고 꽃 뽑기. 이런 식의 말도 안 되는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하더군요. 연구자 친구의 앓는 소리를 들어 주느라 저도 아주 정신이 없었습니다.’
내용은 앤서린이 말했던 대로였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두서없는 단어들 사이의 행간을 읽을 줄 알았다. 맥락 모를 말들이 적혀 있는 건 그것이 본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스티나는 왈도의 일기가 군사 기밀을 남기는 방식의 일종으로 쓰여 있음을 금방 알아차렸다. 전쟁학과 사장된 언어를 익히는 이들이 분리된 시대다. 언어학만을 공부한 자라면 해석하지 못할 법도 했다.
양쪽 모두에 박학한 그녀는 어렵지 않게 내용을 해독해 냈다. 아스티나는 글자 위로 손을 짚으며 한 문단을 읽어 내렸다.
[야만족 계집이 곡기를 끊었다. 이대로 죽어 나갈 셈인가? 찢어 죽이겠다고 협박할 동포가 없는 게 안타까울 지경이다. 잠자리에 들었다가 내게 토악질을…….]
아스티나는 큰 소리가 나게 책을 덮어 버렸다. 팔이 벌벌 떨렸다. 하필 이런 문단을 고른 불운을 탓해야 할지, 아니면 차라리 빠른 파악을 달가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예상대로 이건 왈도의 일기였고, 아스티나가 염려한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건 치욕의 기록이다.
만약 그녀 아닌 누군가가 이 책을 해독했다면 이후 벌어질 일은 뻔했다. 종이 속의 여제는 오로지 자랑스러운 연구 결과로서 학회에 발표됐을 것이다. 마티나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당했고 왈도가 어떻게 그녀를 조롱해 왔는지를, 가해자 본인이 묘사하는 더없이 구체적인 방식으로.
아스티나는 이 일기를 아무도 해석해 내지 못했음에 깊은 안도를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굴욕을 그 누구도 보지 않았으면 했다. 왈도가 저질렀던 일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바나 그 불행의 방식까지 세세히 전시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스티나는 책을 도로 함에 넣고는 응접실 바깥으로 나왔다. 모두 태워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황제가 선물한 물건의 행방이 묘연해져서는 곤란했다. 그녀는 책을 개인 금고에 보관해 두고 다시는 펼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마침 복도를 지나던 하녀가 대공비를 발견하고는 놀란 걸음을 멈춰 세웠다.
“대공비 전하, 안색이…….”
하녀가 저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주제넘은 참견이었다는 데 생각이 미친 탓이다. 하지만 무심코 알은체를 해 버렸을 정도로 대공비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아스티나가 부스러질 듯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침실에 간단히 술상을 내어 주겠니? 폐하께서 포상을 내리신 기쁜 날이니 취하고 싶구나.”
* * *
테리오드는 어색하게 거울을 살폈다. 머리칼에 내려앉은 낯선 빛깔이 영 익숙해지지 않았던 탓이다. 평생 물들인 적 없는 머리라 도통 이질감이 가시질 않았다.
테리오드는 이마를 가린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는, 그대로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을 만큼 약속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테리오드가 불안한 기색으로 넌지시 물었다.
“정말 괜찮은가?”
“물론입니다, 미남은 어떻게 꾸며 놓든 미남인 법이라지요.”
올리버가 근엄하게 답했다. 주인을 향한 콩깍지 섞인 시각을 제하고서라도 흑발은 테리오드에게 썩 잘 어울렸다. 원래부터 그랬다고 해도 믿을 성싶은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테리오드의 때아닌 멋부림에는 집사의 부지런함이 팔 할 정도 기여했다.
‘……내 머리카락 말일세, 검은색으로 물들여 보면 어떨 것 같나?’
긴 탐문 끝에 테리오드가 부인의 흑발 취향을 알게 된 날, 올리버에게 남겼던 질문은 의외의 순간 더없이 성실한 답변으로 돌아왔다. 외출 준비를 시작하려는 테리오드에게 집사가 불쑥 이렇게 물어 왔던 것이다.
‘참, 전에 말씀하셨던 염색약을 구비해 두었는데요, 한번 해 보시렵니까?’
말만 해 보았을 뿐, 정말 머리를 물들일 생각은 아니었던 테리오드는 당황했다. 그러나 그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까 분위기를 타 시도했던 고백은 하녀의 방해 탓에 실패로 돌아간 상황이었다. 충동적인 결심이었던지라 뒤늦게 아차 싶었으나, 동시에 조금은 아쉽기도 했다. 그가 마음을 자각한 뒤로도 꽤나 많은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들 부부 사이의 진도는 0에 수렴했다.
본래 테리오드는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고 아스티나에게 접근할 생각이었다. 그 여유엔 그녀의 남편은 결국 자신이라는 약간의 자만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테리오드의 안이함은 수도에 온 이후 그야말로 산산이 부서졌다. 벤자민이라는 라이벌의 등장은 테리오드에게 있어 큰 자극이었다. 친구라던 놈조차 저돌적으로 고백하는 상황에 남편인 대공이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리 낙관적인 상황은 아니지만.’
테리오드는 자신의 고백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몹시 낮다고 판단했다. 그의 부인은 도통 사람 간의 정을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거절당할지라도, 그녀가 그의 마음을 인지하고 있는 것과 아닌 것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을 터다.
테리오드는 적어도 아스티나가 자신을 이성적으로 인식하게 되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선 그녀에게 선택받을 이유를 조금이라도 늘려야 했다. 그녀의 머리 색 취향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정성을 내보이면 그녀도 감동받지 않을까. 테리오드는 새로 단장한 머리보다는 아내의 반응 쪽을 더 기대했다.
다행히도 결과는 안정적인 성공이었다. 기실 올리버는 주인이 반짝이는 분홍색 머리칼을 가지고 있더라도 전혀 위화감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한데 참으로 감쪽같군. 어떤 재료가 쓰인 거지?”
테리오드의 치하에 올리버가 기다렸다는 듯 온갖 해괴한 재료들을 읊기 시작했다.
“기름에 데운 새끼 사슴의 뿔과 게의 담즙, 말린 올챙이나 고양이의 자궁 등등의…….”
“진심인가?”
“……재료가 사용되었던 것은 꽤 옛일이지요. 안심하시고 외출하십시오.”
이어진 해명에 테리오드의 굳은 얼굴이 안도로 풀어졌다. 피식 웃은 그가 성큼 걸음을 디뎌 마차에 올랐다.
“언제 귀가하실 예정이십니까?”
“자정을 넘기진 않을 거야, 부인께서 저녁에 다시 보자 하셨으니.”
테리오드가 꽤나 즐거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올리버 역시 흐뭇한 표정으로 마차 문을 닫아 주었다. 부디 대공의 정성을 대공비도 알아주길 바랄 뿐이었다.
염색 탓에 시간이 지체되긴 했지만 눈에 띄는 지각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실내로 들어선 테리오드에겐 다수의 시선이 쏠렸다. 유행의 선도주자를 자처하는 몇몇 귀족들은 잠깐의 여흥으로 머리를 물들이곤 했다. 대부분은 테리오드의 변화도 그러한 의도로 이해했다. 대공이 아내의 말 한마디에 머리 색을 바꾸었다는 사실을 짐작하는 이는,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가장 먼저 대공에게 다가온 남자가 재빠른 아부를 남겼다.
“아이고, 이제 이 말 빠른 수도에서 또 흑발이 유행하겠군요.”
말뿐인 아첨은 아니었다. 대공은 온갖 미사여구가 아깝지 않은 외모의 소유자였으니까.
그를 기점으로 테리오드에게 다가온 모두가 칭찬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번 모임의 화제는 단연코 테리오드의 흑발이었다. 개중 예술품 감정에 관심이 있는 귀족 하나는 이렇게 감탄했다.
“이렇게 보니 마치 테오도르 왕의 현신 같으십니다.”
그가 입에 담은 건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인물이었다. 테리오드는 곧바로 눈썹을 들어 올렸다.
“테오도르? 블란체의 마지막 왕 말인가?”
“예, 미술에 조예가 있어 일전에 한 번 그의 초상을 본 적이 있지요.”
“패국의 마지막 왕이라니, 저주 같은 말이 아닌가.”
테리오드가 꺼림칙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테리오드의 낯에 자연히 탐탁찮은 기색이 떠올랐다. 테오도르 왕이라면 충신 마티나를 오해하여 반역도로 몰았던 얼간이가 아니던가. 심지어 그의 말년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아등바등 지키려 했던 왕좌 위에서 결국 참혹한 죽음을 맞았으니까.
테리오드의 말에 상대가 당황한 듯 허둥거렸다.
“아이고, 무척 아름다운 초상이었습니다. 칭찬일 따름이지요.”
“되었네, 못 들은 것으로 하겠어.”
테리오드가 떨떠름한 기색으로 말을 돌렸다. 상대는 쓸데없는 알은체를 한 자신의 입을 저주했다. 앞선 이들이 별별 감언이설을 다 쏟아 놓고 갔던 통에 새로 꺼낼 주제가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한 죄로 남자는 모임 내내 테리오드의 기분을 살펴야 했다. 정작 테리오드는 앞선 일을 금방 잊어버린 후였지만.
간단한 사교 모임이었으므로 테리오드는 자정이 되기 전 밖으로 나왔다. 자택으로 돌아가는 밤길, 바닥의 요철에 따라 마차가 느리게 진동했다. 테리오드는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름다운 달빛이 묘하게 그의 가슴을 어질렀다. 아내의 얼굴을 볼 것을 생각하니 괜스레 설레 왔던 탓이다.
‘잘 어울린다 칭찬할까.’
모임에서 많은 칭찬을 얻어 들었던 관계로 그는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은 상태였다. 하지만 가장 궁금한 건 아무래도 아스티나의 반응이었다.
‘웬 멋부림이느냐 웃을 수도 있지.’
그럼 자신은 멋쩍게 웃으며 말하는 것이다. 부인 취향에 맞춰 보려 힘을 좀 썼지요.
밤의 저택은 조용했다. 테리오드는 침실을 향해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다만 안으로 들어가기 전, 그는 얼간이처럼 복도에 걸린 거울에 몇 번 얼굴을 비춰 보았다. 권유를 피하지 못해 마셨던 술 때문에 뺨이 불콰해져 있는 걸 빼면 그럭저럭 봐 줄만 했다. 가볍게 숨을 들이쉰 그가 문고리를 잡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알코올 냄새가 물씬 풍겼다. 빈 포도주 병이 바닥을 굴렀으며 탁상 위엔 손도 대지 않은 치즈가 늘어져 있었다. 테리오드는 의외의 광경에 멈칫했다가, 이내 그 모든 걸 뒤로하고 황급히 테라스로 다가섰다. 난간 위에 올라서 비틀거리고 있던 인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스티나는 얇은 슬립만 걸치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였다. 붉은 얼굴이나 젖은 눈가엔 취기가 여실했다. 흰 맨발이 디디고 있던 나무 판자 위를 느리게 쓸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얇은 치맛자락이 휘날렸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선 그녀는 신비스럽고, 동시에 몹시 위태롭게 보였다.
테리오드가 놀란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위험하게. 내려와요.”
테리오드의 말에 아스티나가 고개를 돌렸다. 테리오드를 발견한 그녀의 얼굴이 놀람으로 굳어졌다. 그녀가 두어번 입술을 벙긋였다. 이윽고 미세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오?”
그녀가 한 번도 사람인 자신에겐 불러 준 적이 없는 애칭이다. 테리오드는 잠시 당황했으나,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내려오게 하는 게 먼저였기 때문이다.
“그래요, 납니다.”
그녀가 꿈인가……. 하고 들릴 듯 말 듯 하게 중얼거렸다. 위태로운 모양새에 테리오드가 재차 내려오기를 재촉했다.
“얼른 내려와요.”
그에 아스티나가 부스스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러면 기분이 좋잖아.”
“……취했습니까?”
“바보.”
그녀는 혀로 사탕을 굴리듯 장난스러운 발음을 내었다. 결국 테리오드는 아스티나의 손목을 쥐고 확 잡아당겼다. 중심을 잃은 아스티나가 그에게로 쏟아졌다. 테리오드는 자신에게 안겨 든 그녀를 잠시간 놓지 않았다. 붉은 머리카락에선 그 짙은 색만큼이나 달콤한 포도주 냄새가 났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를 밀쳐 내는 대신 그를 마주 끌어안아 주었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테리오드의 등이 당황으로 굳어졌다.
아스티나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기다렸어, 나의 주군.”
처음 듣는 친절하고 상냥한 목소리였다. 테리오드는 그녀가 되도록 밖에선 만취하는 일이 없게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황실을 코앞에 두고 대공을 주군이라고 칭하다니, 타인이 들었다면 황실 모독죄로 취급했을 법한 일이다. 테리오드가 당황을 숨기며 지적했다.
“불충합니다.”
“싫지 않으면서.”
아스티나가 테리오드의 목덜미에 코를 묻으며 말했다. 살갗에 닿는 그녀의 숨결은 테리오드에게 너무도 자극적이었다.
테리오드는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느리게 움직이는 손끝이나 묘하게 휘청이는 움직임은 분명 취한 자의 것이었다. 술이 부린 마법을 기회로 여겨서야 되겠는가.
테리오드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를 제게서 떨어뜨렸다. 잠자코 멀어지는 듯하던 그녀가 짝 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테리오드의 뺨을 감쌌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테리오드는 굼뜨게 두 눈만 깜빡였다. 그에 허리를 숙이며 웃던 아스티나가 고개를 들고는 그의 입술을 삼켰다. 당연히도 테리오드는 피하지 못했다.
가볍게 맞닿고 떠날 줄 알았던 입술은 의외로 오래 그의 숨결 위에 머물렀다. 테리오드는 엉거주춤하게 몸을 숙인 자세를 유지했다. 그의 입술을 가볍게 빨아들인 아스티나가 이어 진득하게 혀를 얽었다. 음, 음, 음. 입 안 여린 살 어느 한 부분을 건드릴 때마다 각기 다른 음계가 울렸다.
마침내 서로의 숨이 떨어져 나갔을 때, 테리오드의 얼굴은 완전히 붉어져 있었다. 아스티나는 의심 어린 시선으로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어딘지 석연치 않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꿈이라기엔 감촉이 있는데…….”
“꿈 아닙니다.”
테리오드가 조금은 볼멘 음성으로 답했다. 아스티나가 눈을 크게 뜨더니 곧 미소 지었다.
“진짜 같네, 정말.”
테리오드는 그녀를 이해시키기를 포기했다. 그는 테라스 바닥에 나동그라졌던 신발을 줍고는 무릎을 굽혔다. 아스티나는 의외로 그에게 순순히 발을 내밀었다. 신발을 다 신겨 준 그가 몸을 일으켰다.
“이만 침대로 가서 누워요.”
“왜 존대를 하고 그러지? 안 어울리게.”
확실히 부부 관계에선 남편이 아내에게 하대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러나 테리오드는 아스티나를 낮춰 부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아스티나의 말을 무시하고 테라스의 문을 닫았다. 찬 밤바람을 맞았다가 감기에 들 것을 염려한 탓이었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를 침대로 이끌었다. 잠자코 시키는 대로 눕는가 싶더니, 아스티나는 침구를 정리하는 테리오드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테리오드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이불을 발끝까지 덮어 주었다. 사실, 아스티나만을 위한 일은 아니었다.
그대로 몸을 물리려는 테리오드에게 아스티나가 손을 뻗었다. 테리오드가 의아한 눈으로 붙잡힌 팔을 쳐다보았다. 아스티나가 약간 쉰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개 숙여요, 테오.”
테리오드는 엉겁결에 그녀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댔다. 무언가를 속삭이기라도 할 줄 알았던 탓이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그의 귓가에 밀어를 흘리는 대신 보다 직접적인 온기를 전했다. 귓불이 깨물린 테리오드가 놀라 몸을 굳혔다.
아스티나가 스치듯 웃으며 그를 잡아당겼다. 테리오드가 아까 난간 위에 있던 아스티나를 끌어안았던 것처럼, 이번엔 테리오드가 그녀에게로 쏟아졌다. 그를 침대로 끌어들인 아스티나가 자연스럽게 그의 위로 올라탔다. 영문 모를 상황에 테리오드가 눈을 크게 떴다. 그가 곤혹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이게 무슨…….”
“뭐긴 뭐겠어.”
아스티나가 그의 말을 자르며 슬립을 벗어 던졌다. 테리오드는 기겁하여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만, 잠깐만요.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왜?”
“이, 이 이러면 안 됩니다.”
“우리 사이에?”
아스티나가 별 재미있는 말을 다 들었다는 듯 코웃음 쳤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그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가슴팍을 가로지르는 부드러운 입술에 테리오드는 거의 죽을 맛이었다.
물론 그녀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그들은 부부 사이였고, 어찌 보면 잠자리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테리오드가 꿈꿔 왔던 그녀와의 초야는 이런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마음이 통한 적도 없지 않았나. 첫날밤을 이런 식으로 취중에 날림으로 보내게 될 줄, 그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테리오드는 그녀가 완전히 만취한 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남편을 몹시도 잘 알아보고 있었던 데다, 건장한 사내를 쓰러트렸을 정도로 몸도 제대로 가누고 있었다. 테리오드는 어쩌면 자신이 그녀보다 더 취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도통 머리가 평소처럼 굴러가질 않았으니까. 생각이 온통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초야를…….
“사랑해.”
때마침 아스티나가 속삭였다. 테리오드는 헐떡이던 숨을 들이켰다. 그 말이 마침내 테리오드를 함락시켰다. 항복이었다. 테리오드는 숨이 멎을 듯한 기분으로 고백했다.
“제가 더 사랑할 겁니다, 분명.”
테리오드가 계획했던 분위기 있는 고백도, 만개한 꽃다발과 귀를 간지럽게 하는 음악도 없었다. 그럼에도 아스티나는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환히 웃었다. 그녀를 올려다보던 테리오드가 곤혹스러움에 그대로 몸을 굳혔을 정도로. 아스티나는 허리를 숙여 남자에게 사랑의 키스를 남겼다.
그 밤……
아스티나는 그와 잤다.
* * *
“왕이여.”
마티나의 부름에 테오도르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깃펜을 끼적이는 손을 멈추지 않고 되물었다.
“왜 그러지?”
마티나는 그 무성의한 응대에 다소 실망했다. 하지만 기껏 했던 결심을 무르고 싶지는 않았다. 며칠 밤을 고민하고 그의 얼굴을 훔쳐보고, 말도 안 되는 서류의 결재를 부탁하며 집무실을 찾길 여러 번, 마침내 그녀가 고백했다.
“제가 주군을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테오도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멍하니 마티나를 쳐다보던 그가 “그렇군.” 하고 들릴 듯 말 듯 하게 중얼거렸다. 동시에 테오도르는 생각했다.
‘꿈인가?’
테오도르는 깃펜을 내려놓고는 책상 가장자리에 두었던 찻잔을 들었다. 그가 느리게 차를 삼켰다.
뜨거웠다.
“쿨럭, 쿨럭!”
테오도르의 목에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눈을 크게 뜬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무서운 기세에 마티나가 놀라 저도 모르게 걸음을 물렸을 정도였다. 테오도르가 마티나를 다그치듯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나?”
“제가 주군을…… 사랑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마티나는 당황했지만, 방금 했던 고백을 다시금 친절히 읊어 주었다. 테오도르가 흉흉하게 되물었다.
“신하로서?”
“연심으로.”
마티나가 짧게 대답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냐는 듯한 눈빛으로 테오도르를 응시한 채였다. 테오도르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오른손을 들어 느릿하게 제 뺨을 문질렀다.
“아니, 대체 언제부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다만?”
마티나는 입을 다물었다. 테오도르의 반응은 아무리 봐도 기쁨이나 설렘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연심을 해명하고 있는 스스로의 처지가 퍽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다 저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마티나는 결국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무리한 답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제 충정은 다른 문제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테오도르는 황급히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고 재차 기침을 터트렸다. 사레라도 들린 듯했다. 마티나의 표정은 점점 더 오묘해졌다.
“곤란한 말씀을 드렸나 봅니다.”
그녀가 자조하듯 말했다. 적어도 거절만이라도 상냥했다면 좋았을 것을, 그녀의 마음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는 듯한 태도에 마티나도 상처를 받았다. 마티나는 허리 굽혀 인사하고는 문가로 향했다. 오늘은 자택에 둔 가장 비싼 술이라도 개시해야 할 듯했다.
“잠깐, 잠깐!”
테오도르가 책상을 뛰어넘다시피 하여 마티나에게 다가왔다. 마티나는 문을 열려다 말고 당황하여 멈춰 섰다. 테오도르는 그녀가 나가지 못하게 아예 문 앞을 막아섰다. 그가 다급하게 물었다.
“왜 도망가지?”
“……모르겠습니다.”
테오도르는 아예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섰다. 어느새 평온을 되찾은 표정이었다. 그가 평소처럼 여유로운 투로 물었다.
“짐의 어디가 좋은지 말해 보시오, 명령이니.”
그 장난스러운 태도에 마티나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월권이십니다.”
“왕에게 속내를 숨기다니, 이도 넓게 보면 반역이 아닌가?”
테오도르가 짐짓 그녀를 꾸짖듯 대꾸했다. 어쩐지 장난 없이 넘어간다고 했다. 결국 마티나는 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녀가 가시 돋힌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솔직히 간언하자면 저도 잘 이해가 안 갑니다.”
“짐이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인가?”
테오도르가 은은히 웃으며 되물었다. 마티나의 뺨이 민망함으로 붉어졌다. 저치는 분명 지금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이리라. 마티나는 그에게 마음을 고백한 것을 후회했다. 그녀가 감정을 숨기려 고개를 돌렸다.
“됐습니다, 제 착각이니 잊어 주십시오.”
“무엄하오.”
테오도르가 팔을 뻗어 부드럽게 마티나에게로 손가락을 얽었다. 그가 지극히 유혹적인 어조로 속삭였다.
“되는대로 고백을 던져 놓고 수습한다고 하는 말이 부정이라니, 너무도 무엄하여 견딜 수가 없는 지경이야.”
마티나는 절망적인 기분이었다. 고작 손가락 마디 사이가 닿았을 뿐인데도 몸에 열이 올랐다. 고백을 놀림받고 있는 와중에도 그가 좋다니 기막힌 일이었다.
마티나는 이를 앙다물었다. 그녀가 불분명한 발음으로 되물었다.
“제게 왜 이러십니까.”
“짐이 왜 이럴까.”
짐짓 장난스럽게 되묻던 테오도르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재차 읊조렸다.
“이 남자가 왜 이럴까.”
마티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도 알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퇴로를 찾는 그녀를 보며 테오도르가 가는 눈을 떴다.
“날 사랑하는 게 확실한가?”
“……충정과 사랑을 헷갈릴 정도로 천치는 아닙니다.”
“나 역시 신의와 욕정을 헷갈릴 변태는 아니지.”
“그게 무슨…….”
그리고 테오도르가 마티나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입을 맞추는 행동은 사뭇 경건하기까지 했다. 점점 깊어지는 키스에 마티나는 크게 뜨였던 눈을 감았다. 허공을 배회하던 손이 테오도르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얽힌 혀에서 젖은 소리가 울렸다. 마티나는 신음하며 아예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어느새 벽면에 닿은 등이 서늘했다.
마침내 테오도르가 입술을 떼어 냈다. 그가 다정한 눈으로 마티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이런다고 난잡꾼으로 보지 말아 달란 말이야.”
“이해가…… 안 갑니다.”
마티나가 가쁜 숨을 내쉬며 겨우 말했다. 그의 타액으로 젖은 입술이 낯설었다. 주고받는 시선은 마냥 떨렸다.
“어려울 건 없지.”
테오도르가 조심스럽게 마티나의 뺨을 어루어 만졌다. 그가 만면에 행복을 가득 드러낸 채 속삭였다.
“짝사랑을 이룬 남자가 꿈인가 싶어 저지른 장난이라네.”
그리고 그녀는 꿈에서 깼다.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었지만 기억은 그저 선명했다. 제 옆에서 곤히 잠든 테리오드를 내려다본 아스티나의 낯이 희게 질렸다. 그녀가 다 죽어 가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꿈이라고 말해……. 제발…….”
* * *
발밑이 꺼지는 느낌에 테리오드는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꿈에서 보았던 높은 절벽은 온데간데없이, 그의 몸은 시트 위에 너무도 얌전하게 눕혀져 있었다.
시야로 스민 밝은 빛이 따가웠다. 테리오드는 눈부시게 들이닥친 빛의 근원을 찾아 눈을 돌렸다. 저택은 층고가 높은 편이었고, 창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지는 너비였다. 덕분에 해가 그리 힘 있지 않은데도 창틀 그림자가 침대 위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무심코 시린 눈을 가린 테리오드는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사람으로 눈을 뜬 것을 보아 이미 점심때를 한참 지난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해는 벌써 중천을 넘어가고 있었다.
가쁘게 뛰던 심장은 진정되었으나 대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주량을 넘어서게 마시진 않았으니 아무래도 숙취보다는 깊은 잠 쪽이 문제인 듯했다. 부인과 밤을 보내고 곯아떨어졌던 새벽녘을 기점으로 기억이 끊겨 있었다.
정신을 차리기 힘든 와중에도 테리오드는 옆자리부터 살폈다. 그의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일과 시간이니 그녀의 부재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테리오드는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괴물 되는 몸이라 하여 아내와 밤을 지낸 다음 날 같이 일어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니, 다소 억울하기도 한 일이었다.
테리오드는 대충 보기 싫은 몰골을 정리하고는 옷을 주워 입었다. 잔뜩 구겨진 이부자리엔 지난밤의 흔적이 여실했다. 무심코 떠오른 순간순간에 테리오드의 낯이 붉게 달아올랐다. 제 뺨을 감싸며 다정하게 웃던 그녀의 얼굴과 달뜬 목소리, 그리고 손에 감기었던 부드러운 감촉까지 차례로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감당할 수 없는 기억의 홍수에 현기증이 일었다. 테리오드는 침대에 도로 걸터앉았다. 그가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신음했다.
‘얼굴을 보면……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첫 경험이었다. 같이 밤을 보낸 남녀가 다음 날 어떤 식으로 대화하는지, 당연히 테리오드로서는 알 턱이 없었다. 어젯밤이 어땠느냐고 물으면 지나치게 호색한 같아 보일까, 날이 좋다며 말을 걸었다가 모자란 사람 취급을 당하지는 않겠나. 멋지게 보이는 것은 둘째 치고 과연 평균치나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테리오드는 한참 후에야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를 보고 싶으면서도 막상 얼굴을 마주하기가 두렵기도 했다. 테리오드는 미적미적 걸음을 옮겨 집무실로 향했다. 그의 아내라면 필히 그곳에서 업무를 보고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을 연 테리오드를 맞은 것은 책상을 정리 중인 하녀였다. 테리오드가 약간의 당황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대공비가 집무실에 나오지 않았나?”
“아니요, 업무를 보시다 식당으로 이동하셨습니다.”
하녀가 공손히 두 손을 모으며 이어 질문했다.
“시장하실 듯한데, 주방에 식사를 준비하라 이를까요?”
빈속이긴 했으나 긴장 탓에 배가 고프지 않았다. 테리오드는 고개만 내저었다.
“됐어. 마저 일 보도록.”
“예.”
“참, 혹시 대공비를 발견하면 내게 전하러 와 주면 좋겠군.”
“그리하겠습니다.”
테리오드는 별 소득 없이 집무실을 나섰다. 하녀가 흘린 단서대로 그는 식당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스티나는 없었다.
“후원으로 가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테이블을 정리하던 하인에게서 돌아온 답이었다. 테리오드는 잠자코 후원으로 향했다. 수도의 사저는 근방에서 손에 꼽는 거대한 규모였으나, 대공령에 있는 본가만큼은 아니었다. 테리오드는 인내심을 가지고 정원 안을 모두 꼼꼼히 살폈다. 그러나 수풀을 아무리 헤집어도 부인의 붉은 머리칼은 찾아볼 수 없었다.
테리오드는 후원의 초입에서 마주친 기사에게 다시 아내의 행방을 물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이던 기사가 손뼉을 치며 대답했다.
“아! 아까 연무장으로 들어가시는 걸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도 그녀는 없었다. 땀 냄새 나는 연무장엔 수련 중인 장정들만 가득했을 따름이었다. 테리오드는 결국 이마를 짚었다. 이쯤 되자 그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
“정말 안 나올 작정인가 본데.”
테리오드의 얼굴에 혼란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그녀가 왜 숨어든 건지 도통 이유를 알 수 없었던 탓이다.
‘설마…… 어젯밤이 그렇게나 끔찍했나?’
테리오드의 낯빛이 삽시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의 기억대로라면 그녀의 반응이 그리 나쁘진 않았다. 아니, 적어도 테리오드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혹 그것이 그의 착각이었다면?
테리오드로서는 여자 쪽에서 좋은 척 연기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좋아하는 것인지 분간이 불가능했다. 그에겐 마땅한 비교군조차 없었으니까.
테리오드는 믿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분명…….”
‘사랑해.’
그렇게 말했다. 사랑한다고, 사실은 너무도 외로웠다고 테리오드를 향해 몇 번이고 속삭였다. 다정하게 애칭을 부르며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던 손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했다.
애정에 목말랐던 남자는 마치 신을 숭배하듯 그녀의 팔꿈치부터 손끝까지 연이어 입 맞췄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그런 테리오드의 마른 혀끝을 핥아 주었다. 하룻밤의 장난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애틋하고도 열렬했던 행위였다.
테리오드는 불길한 생각을 애써 치워 버렸다. 우선은 그녀를 만나는 게 먼저였다. 무엇이 되든 직접 그녀의 입으로 듣지 않고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테리오드는 다시 바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라진 아내와 그녀를 찾는 남편이라.”
테리오드가 한숨이 섞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전에도 테리오드는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의 입에서 그만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처음 만났던 날이 다 생각나는군.”
* * *
끝내 아내의 도망까지 의심해야 했던 테리오드에겐 희소식으로, 아스티나는 여전히 대공저 내에 있었다.
그녀는 가능한 한 이 상황을 합리적으로 타개하고 싶었다. 가출이라는 유아적인 선택지를 택하지 않을 정도의 이성은 남아 있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녀의 은신처는 담벼락 안으로 한정되었다. 다행히도 저택은 끝없는 술래잡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테리오드의 인기척이 들릴 때마다 쏜살같이 자리를 피하며 버티기를 한나절, 마침내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들었다. 대공이 짐승으로 변할 때가 가까워지고서야 아스티나는 본관으로 돌아갔다.
사실 이런 도망 자체가 바보 같은 일이기는 했다. 그를 평생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아스티나는 도통 그의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어젯밤 자신이 그에게 무슨 말을 속삭였는지 낱낱이 기억했다. 그리고 테리오드는 그야말로 충만하게 행복해 보였다. 그런 남자의 면전에 대고 어찌 실수였다고, 착각이었다고 말하란 말인가. 차라리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 걸 몰랐다면 하룻밤 불장난으로 넘길 수라도 있었을 것을.
아스티나는 깊이 신음하며 복도로 들어섰다. 저주의 시간이 가까워지면 테리오드는 침실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아스티나는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변하고 나면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리하면 적어도 오늘은 무사히 지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아스티나는 곧 의외의 복병을 마주했다. 집사 올리버였다.
“대공 전하와는 같이 들어오지 않으십니까?”
아스티나를 발견한 올리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아스티나는 그를 지나치려다 말고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집사의 얼굴이 따라 사색이 되었다.
“아까 대공비 전하를 찾으러 후원으로 나가신 후로 아직 돌아오시지 않으셨는데요.”
아스티나는 몹시 당황했다. 이 미련한 남자가 아직도 자신을 찾고 있단 말인가. 그가 짐승으로 돌아간 모습을 누군가 보기라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큰일인 것을.
아스티나는 다급히 자리를 박찼다. 당황하여 자신을 부르는 올리버의 목소리가 뒤편으로 멀어졌다. 이리 빠르게 뛴 것이 얼마 만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스티나는 단숨에 후원까지 다다랐다.
해가 지고 한참 지난 시간이었지만, 달빛이 유독 밝아 사위를 분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스티나는 숨을 헐떡이며 후원의 외곽부터 더듬어 나아갔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시계를 확인할 정신도 없이 뛰쳐나왔다. 테리오드도 시간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해 여직 수풀을 헤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미 짐승으로 돌아간 상태일 수도.
아스티나는 이마에 땀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크게 소리쳤다.
“테리오드, 테리오드!”
어쩌면 당연히도,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정말로 늑대로 변한 상태인 걸까. 아스티나가 초조한 음성으로 재차 외쳤다.
“테오!”
“부인?”
휙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스티나는 굳은 듯이 멈춰 섰다. 그였다. 아침나절에는 정신없이 도망 나오느라 알아차리지 못했었는데 여전히 머리카락 색이 어두웠다. 덕분에 아스티나는 자신이 여전히 꿈속에 있다고 착각할 뻔했다.
그러나 그가 말한 호칭이 곧 그녀를 일깨웠다. 자신은 테오도르의 ‘부인’인 적이 없었으니까.
“머리가…….”
아스티나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벌써 물이 빠진 듯 지금 그의 머리칼은 짙은 회색빛에 가까웠다. 어쨌든 원래의 찬란한 은발과는 거리가 먼 색이었다.
기가 막혀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 그가 정말 머리칼을 물들인 것이 맞았다. 왜 갑자기 염색을 결심한 걸까. 그것도 하필이면 흑발로. 그를 원망할 일은 아니었지만 억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테오도르와 테리오드를 구별하던 가장 큰 특징이 하룻밤 사이 사라져 있었으니까.
“아, 기분 전환으로…….”
머쓱한 기색으로 답하던 테리오드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가는 이내 정정했다.
“아닙니다. 실은 부인의 반응을 보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제 반응이요?”
아스티나가 당황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가 어색하게 제 머리칼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예, 흑발을 좋아한다고 하셨었으니까요.”
“그건…….”
아스티나는 입만 벙긋였다. 그때 무심코 내뱉은 말이 이런 결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아스티나는 결국 어떤 말도 내뱉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피곤한 기색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밖에서 변하면 어쩌려고 이리 나와 계셨습니까.”
“그대가 나를 찾아왔지 않습니까.”
아스티나는 이번에야말로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까 그를 피해 도망간 그녀를 불러내고자 부러 밖에서 버티었다는 뜻이다. 그녀를 향한 미소에는 어떠한 악의도 없었지만, 아스티나는 그가 마치 자신을 비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뒤이어 나온 말들은 더더욱 그러했다.
“어젯밤 일은, 기억하십니까?”
아스티나는 주먹을 쥐었다. 시선을 피하는 것 외에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도무지 정황이 맞지 않았다. 오늘의 도피를 더 무어라 변명할 수 있겠는가. 아스티나가 애써 말을 돌렸다.
“일단 사용인들을 다 물려야겠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변하실지도 모르니까요.”
“티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티나, 날 봐요.”
그의 종용에도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스티나는 그의 얼굴을 보면 약해졌다. 어젯밤의 실수처럼. 그녀는 무서웠다. 잊고 싶은 기억을 자꾸 헤집게 만드는 저 얼굴이 두려웠다. 그가 혹 자신에게 사랑을 말하기라도 한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테리오드가 들고 있던 등을 그녀와 제 발 사이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그녀의 뺨으로 손을 뻗었다. 아스티나는 결국 다정한 힘에 끌려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솔직히 말해 주세요, 오늘은 일부러 피하신 겁니까?”
“…….”
“제가 너무 서툴러 싫어지셨을까요, 아니면 술에 취해 실수했다고 생각하셨을까요.”
아스티나는 자신의 모른 척이 마침내 효용을 다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제 사랑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의 마음에 답을 돌려줄 시간이 다가왔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테리오드는 솔직히 대답해 달라고 말했지만, 진실은 그를 상처 입힐 뿐이었다.
벌어진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가 말했다.
“실수…… 였습니다.”
귀밑을 간질여 주던 손의 움직임이 멎었다. 아스티나는 그저 견뎠다. 그 외에 이 침묵을 지날 방법이 또 없었으니까. 이윽고 그녀에게서 손을 떼어 낸 테리오드가 작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랬군요.”
예상하지 못한 상황은 아니었다. 홀로 그녀를 찾아 헤매는 동안 테리오드는 자연히 설렘보다는 불안을 키웠다. 낮이 저녁이 되고 다시 저녁이 밤이 되기까지, 저문 해는 하늘과 함께 그의 희망도 밤의 색으로 물들였다.
테리오드는 끝내 생각했다. 만일 그녀가 어젯밤을 없던 일로 하고 싶어 한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미리 상상해 둔 상황이었음에도 좀처럼 적합한 대답을 찾아 낼 수 없었다. 테리오드가 긴 망설임 끝에 다시금 물었다.
“그렇다면…… 사랑한다고 하셨던 것도, 실수입니까?”
아스티나가 멈칫했다. 적어도 하룻밤 상대를 꾀기 위한 가벼운 말은 아니었다. 상대는 바뀌었을지언정 그보다 더한 진심이 또 없었으니까.
“그건…….”
아스티나는 저도 모르게 내뱉으려던 반박을 겨우 힘겹게 주워 담았다.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테리오드를 응시했다. 그의 입꼬리에 스민 체념과 실망으로 얼룩진 눈동자를 보았다.
아스티나의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는 그녀를 향해 테리오드가 억지로 웃어 보였다.
“곤란하게 해 드렸다면 죄송했습니다. 둘 다 술에 취해…… 그래요, 그래서 벌어졌던 사건으로 하지요.”
“대공 전하.”
“제가 그만 착각을 했나 봅니다.”
조금만 덜 진심같이 말씀하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그가 이어 농처럼 덧붙였다.
찬바람이 둘 사이를 스쳐 지나며 램프 속 불빛이 일렁였다. 아스티나는 저것을 들고 자신이 찾아오기를 기다렸을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사랑하는 여자와 보낸 밤에 더없이 설렜을, 그 측은하고도 서투른 연심을. 그래서 어리석게도 상처 입기를 피하지 않는.
“부인께선 싫어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것 하나만 말씀드려도 될까요.”
“……제가 할 대답을 아시지 않습니까. 상처받으실 겁니다.”
“그래도 한 번 더 고백하지요. 저는 정말 행복했습니다. 적어도 제 마음은 진심이었어요.”
거절당할 것을 알면서도 감히 말한다. 사랑한다고.
“티나, 사랑합니다. 그대가 허락한다면 몇 번이고 그대에게 속삭이고 싶은 말입니다. 언제나요.”
그가 뱉는 말 마디마디엔 온통 애정이 서려 있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마음이 없어도 혹했을 농도의 진심이다. 그러나 사랑의 열병에 끙끙대는 남자를 앞에 두고 아스티나는 쭉 떠날 계산을 해 왔다.
이번에도 그녀의 속내는 다르지 않았다. 아스티나는 그를 버리고 먼 곳으로 향할 자신을 상상했다.
낯선 타지에서 모든 걸 기억하지 못하는 척 웃으면 전부가 속을 것이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정을 붙이지 않으면 잃는 슬픔도 없을 것이다. 고독을 친구로 삼았던 지난날들처럼, 그저 홀로 어떻게든 살아간다면…….
‘그래서, 그러고는?’
아스티나는 숨을 들이켰다. 자신은 옛 연인의 흔적조차 두려워 이렇게 도망치는 걸까. 언제고 나아가지 못하고 매번 그 자리에 멈춰서 괴로워하는가.
“제가…… 얼마나 소중하십니까?”
아스티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질문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테리오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스티나는 발치의 불빛에 시선을 고정한 채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대공께선 영지민들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셨었지요. 처음 깨어나셨을 적 그들부터 살피셨을 정도로요.”
“그랬지요.”
“그들을 버리라 하면, 저를 택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럴 정도의 감정이신가요?”
테리오드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가 아스티나의 얼굴을 한번 살피더니, 제 입가를 문지르며 싱겁게 웃었다.
“이건 시험이십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만 부인께서 기꺼워하시는 대답을 해야 제게 기회가 생기겠죠.”
테리오드가 그리 말하고는 애매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보통의 상대라면 다수보다는 그 본인을 택하길 원할 것이다. 그것을 곧 사랑의 증명으로 받아들일 테니까.
그러나 그의 앞에 선 것은 아스티나였다. 언제나 공정하고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여 왔던 그녀 말이다. 그녀가 영지민을 선택하는 쪽을 더 흡족하게 여기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테리오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쪽도 헷갈린다면 그가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은 하나였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인, 저는 그다지 의미 없는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부모조차도 소중하지 않았으니 괴물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지요.”
“그건 대공 때문이 아니지 않습니까.”
“부인, 부디 제가 그대를 더 사랑하게 만들진 마세요.”
굳은 분위기를 풀려는 듯 테리오드가 가볍게 지적했다. 그 농담은 아스티나를 못내 수그리게 만들고 말 뿐이었지만.
“제가 특히나 영지민들을 위했던 이유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받지 못한 애정을 다수의 존경으로 채우려 했던 걸 수도 있고…… 사실 아마, 저는 거기서 의미를 찾고 싶었을 겁니다.”
“의미요?”
“예, 영지민들을 향한 희생은 한껏 멋을 낸 송별사에 가까웠지요.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더 좋게 기억되고 싶었으니까.”
테리오드가 자조하듯 말을 맺었다. 그는 고개를 젖혀 잠시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눈에 별의 반짝임이 담겼다. 비극을 말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저는 언제나 살고 싶었지만, 기억도 나지 않는 옛날부터 모두가 제 죽음을 말해 왔습니다. 제가 계속해서 살 수 있다고 확언해 준 건 오직 부인뿐이었어요.”
테리오드는 살아 있는 게 특이한 사람이었다. 모두가 죽음 따윈 영원히 오지 않을 것처럼 삶을 악착같이 영위하는 것과 달리, 테리오드는 언제나 지척에서 망자의 냄새를 맡았다. 모두가 내일을 말하는데 오직 그만이 오늘을 기꺼워하며 살았다.
“그대는 저를 구했고, 그날로 저는 그대에게 삶을 내주었지요. 그토록 원했던 미래를 쥐고 있는 사람에게 제가 감히 저항할 수나 있었겠습니까.”
“의미가 없습니다. 저주를 푼다면 그 미래도 오롯이 대공의 것이 되실 테니까요.”
“부인, 저는 이제 차라리 바랍니다. 그대가 그 의식 같은 입맞춤을 위해서라도 제 곁에 머물기를요.”
“…….”
“부인께서 말씀하셨었지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이기적으로 부탁하라고. 그리하겠습니다. 이제는 목적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데다 제게 그들의 생사를 거머쥘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선택을 내릴 순간이 온다면…….”
테리오드가 확신 가득한 눈으로 아스티나를 응시했다.
“저는 그대를 택할 겁니다.”
아스티나는 그만 눈을 감았다.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녀가 웃는 것 같기도, 또 우는 것 같기도 한 기묘한 목소리를 내었다.
“대공을 사랑한다면 저는 행복하겠지요.”
언뜻 듣기엔 좋은 평가였지만, 테리오드는 자신이 정답을 말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다지 기뻐 보이지 않았으니까.
아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그가 진실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테리오드는 팔을 뻗어 아스티나의 손을 끌어갔다. 하얗게 질린 주먹을 펴자 과연 손톱 모양대로 난 자국이 보였다. 테리오드가 그 위에 조용히 제 손을 덮으며 말했다.
“그럼 노력해 보지 않겠습니까.”
“노력…… 이요?”
“예. 저는 그대의 남편이고, 시간은 넘칠 만큼 많이 가지고 있으니. 그대가 망설이는 것이 무엇이든 신경 쓰지 말아요. 제가 그대를 더 좋아하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책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이, 끝맺는 말은 그저 장난스러웠다. 그가 상냥한 목소리로 그녀를 얼렀다.
“그대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느리게. 그렇게 발맞춰 걸어요.”
감동스러울 정도로 친절한 기회였지만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아스티나는 사랑을 불신했다. 그녀가 겪었던 유일한 실패가 바로 그것이었다. 아픔밖에 얻을 게 없는 감정이라면 차라리 품지 않음이 옳았다. 잠깐의 달콤한 행복은 곧 들이닥칠 불행에 대한 전조였다.
사람을 겁쟁이로 만드는, 연륜이란 것은 삶에 있어 진정 득이 되는 걸까.
“예?”
테리오드의 채근에 아스티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알 수 없는 눈으로 테리오드를 응시하며 물었다.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대공과 같은 마음이 되기까지 평생이 걸린다고 해도?”
어울리지 않는 어리광이라 생각하며 테리오드가 미소 지었다. 겁쟁이처럼 내놓은 여지였지만 테리오드는 그마저도 흡족했다. 그가 확신하듯 말했다.
“십 년이 가도 백 년이 가도 천 년이 가도, 예. 그대를 아프게 했던 사람이 누구든 제가 잊게 해 드리겠습니다.”
“힘드실 겁니다. 후회하실지도 몰라요.”
“그대가 주는 아픔이라면 그조차 기쁨으로 맞아들이지요.”
그가 경건히 아스티나의 손등 위로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의 단언에 아스티나가 설핏 웃었다.
“다정하시군요.”
“부인께 잘 보이고 싶어 애가 달아 그렇습니다.”
“사실…… 저도 대공을 꽤 좋아합니다.”
실제로 테리오드는 싫어하기가 더 힘든 이였다. 아스티나가 테리오드를 거절하기로 했던 것도 오로지 그라는 사람 밖의 이유 때문이었다. 그에 테리오드가 의외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것참 다행이군요. 생각보다는 평가가 후해서요.”
“제가 그리 정 없어 보이셨습니까.”
“조금은요?”
“……방금 한 결정은 아무래도 무르는 게―”
이어지는 아스티나의 말에 테리오드가 무언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아스티나가 말을 끝맺지 못하도록 황급히 제지했다.
“잠깐, 잠깐만요.”
테리오드가 진정하란 듯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 가슴팍이 꽤나 따듯했던 탓에 아스티나는 무심코 그에게로 코를 묻었다. 테리오드의 옷깃에선 그와 어울리는 옅은 바람 냄새가 났다. 머리 위에서 온통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런 긍정적인 대답을 들을 줄은 몰랐어서요, 짝사랑을 이룬 걸 믿을 수 없어 저지른 장난입니다.”
그 다급한 정정에는 온갖 흥분과 설렘이 묻어났다. 아스티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마주 끌어안았다. 바깥바람에 싸늘히 식었던 팔이 온기로 덥혀졌다. 아스티나는 가만히 그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의외로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사랑합니다, 티나.”
사랑하고, 사랑해서, 사랑이 전부인 것처럼. 테리오드가 반복해서 진심을 속삭였다. 놓으면 어디 도망이라도 갈 것 같았는지 그녀를 안은 팔을 풀지 않은 채였다.
아스티나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생각했다. 이것은 어쩌면 새로운 기회가 아닐까. 네가 겪어야 했던 마지막 패배를 만회해 보라는.
테리오드의 말대로 그는 그녀의 남편이었고, 그들은 평생이라는 아주 긴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스티나는 감정에 다치고 싶지 않은 지친 사람이었다. 어차피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자신이 없는 삶이라면, 이 바람직한 구애자에게 충분히 바쳐 볼 만하지 않은가.
아스티나가 스스로를 기만하듯 말했다.
“사랑해.”
상대에게 제대로 가닿았을지도 알 수 없는 미세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마치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말을 막상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정말 그를 사랑하기라도 하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그를 마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혀끝이 둔하게 움직였다.
아스티나가 반복해 말했다.
“그대를 사랑할게, 테리오드.”
결국 마티나가 아스티나의 삶에 익숙해졌듯, 자신은 테오도르 아닌 테리오드를 사랑할 수 있을까.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 줘서.”
테리오드가 벅찬 음성으로 말했다. 분명 고백을 받아 준 것은 아스티나가 맞았지만, 고마워해야 할 쪽은 오히려 그가 아닌 아스티나인지도 몰랐다.
아스티나는 자신을 위해 살아 달라 말했던 테리오드의 고백을 기억했다. 그는 그 말을 지켰다. 새로운 희망을 가진 것은 아스티나에게 있어서도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 따뜻한 포옹을 아스티나는 오래도록 놓지 못했다.
“잠시만요.”
곧이어 그녀의 눈이 번쩍 뜨였다. 방금의 결정을 취소하는 것인가 싶어 테리오드는 긴장으로 몸을 굳혔다.
그러나 아스티나가 지적하려는 건 다른 사실이었다. 테리오드를 찾아 나온 후로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짐승으로 변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그가 여전히 사람의 몸을 하고 있는 게 이상했다. 상체를 물린 아스티나가 그의 몸 곳곳을 살피며 말했다.
“분명 제가 저택으로 돌아갔을 때도 아슬아슬한 시간이었습니다. 왜 아직까지 변하시지 않는 건지―”
아스티나가 말하다 말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침나절의 일이 떠올랐던 탓이었다. 수도에 온 이후 테리오드는 늦은 오후에 사람으로 변해 새벽 무렵 다시 짐승이 되는 일과를 유지하고 있었다.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아스티나가 오늘 아침 햇빛과 함께 마주한 건 분명 털이 덮이지 않은 맨 어깨였다.
아스티나가 급히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도 변하신 걸 보지 못했었어요. 대공께선 언제 깨어나셨습니까?”
“저야 기억나는 것이 그다지…… 일어나 보니 오후였던 것을요.”
지난밤 좀 술을 마셨던 데다, 술버릇이 잠이긴 하지만……. 그리 대답하던 테리오드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아스티나의 말대로라면 테리오드는 지난 새벽 이후 쭉 사람으로 있었던 셈이었다. 술과 잠 때문에 온전치 않은 아침의 기억을 제쳐 두고서라도, 마땅히 변해야 할 지금조차 테리오드는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저주가 제대로 기능치 못하도록 한 원인은 무엇인가. 키스 외에, 그들이 따로 한 일이라고 하면…….
테리오드와 아스티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부부는 닮는다고 했던가, 간밤에 진짜 부부가 됐다는 사실을 시사하듯 입 밖으로 내놓은 말도 똑같았다.
“설마, 정말 잠자리가……?”
* * *
이시스는 그녀의 어린 자매를 기억한다.
지금에 와선 전체적인 모습보다는 부분 부분이 더욱 선명했다. 이를테면 웃을 때마다 깊이 파였던 보조개와 밝고 투명한 금발, 장난기 어린 푸른 눈 같은 것들.
황손들은 대부분이 같은 머리 색을 하고 있었지만 베스에게 깃든 색은 유독 홀로 반짝였다. 이시스는 그것이 일종의 백일몽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생존을 위해 소름 끼치도록 날카롭게 벼려 낸 보호색 같은 외모, 잠시 화단을 장식했다 사라질 계절 꽃이 바로 그 애였다.
첫 기억의 시작부터 황궁은 비정한 공간이었다. 이시스는 제 나이에도 맞지 않는 예법과 교육에 매몰되어 자랐다. 그리고 힘없는 외가를 가진 황녀에겐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베스는 그중에서도 가장 별 볼 일 없는 아이였다.
돌봐 줄 사람이 마땅치 않은 황녀는 보호자도 없이 온갖 곳을 헤집곤 했다. 머무는 궁이 가깝다는 이유로 이시스는 종종 흙으로 엉망이 된 베스와 마주쳤다. 다른 이들은 무엇을 배우는지 궁금했던 베스가 곧잘 이시스의 교실에 숨어들었던 탓이다.
‘나와, 에일베스.’
손끝을 온통 더럽힌 베스를 보며 이시스가 눈을 흘겼다. 에일베스, 지저분한 뺨과는 어울리지 않게 인형 같은 이름이었다. 그 애가 통통한 양 검지를 모아 두드리며 조그맣게 말했다.
‘베스예요.’
‘에일베스, 네 애칭 따위엔 관심 없으니 당장 여기서 나가.’
‘언니랑 같이 있으면 안 돼요?’
‘날 언니라고 생각하는 멍청한 머리라면 당최 수업이 무슨 쓸모가 있을지 모르겠구나.’
이시스의 싸늘한 말에 베스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축 처진 어깨가 퍽 안쓰러워 보였지만 이시스는 눈썹만 들어 올렸다. 베스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이시스가 책상에 앉으며 투덜거렸다.
‘모두가 멍청이로군.’
벌써부터 세상에 실망한 소녀의 푸념에 교사가 미소 지었다. 그녀가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프리모 황자님은 오늘도 지각이시군요.’
‘베스 저 계집애는 프리모가 없을 때만 귀신같이 온단 말이야.’
이시스가 코웃음을 쳤다. 프리모는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시종들을 괴롭히느라 언제나 바빴다. 덕분에 안 그래도 느렸던 진도마저 두 살 차이의 여동생에게 완전히 따라잡힌 상태였다. 조금만 지나면 추월까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이시스는 단언했다.
‘프리모 같은 멍청이가 황제가 된다면 이 나라는 망할 거야.’
‘그래도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큰 분이시죠.’
교사는 곤란한 표정으로 프리모의 편을 들었다. 이시스가 곧바로 신랄하게 비꼬았다.
‘그러니까 이 무슨 멍청한 제도가 다 있어? 처를 여럿 들여 자식을 많이 봤으면 가장 우월한 놈을 뽑기라도 해야지.’
마티나가 대륙을 통일하기 전 대다수의 국가는 일처일부제였다. 그것은 왕족들에게도 통용되는 관념으로, 카라벨라가 건국된 당시만 해도 황제의 다혼은 파격적인 행보였다. 윗자리를 차지한 인물들 대부분이 블란체 소생으로 처첩 제도에 거부감이 없기도 했지만, 속을 파고들면 여러 지방의 입김이 섞여 벌어진 결과였다.
거대한 영토가 한 나라로 합쳐지며 카라벨라에는 자연히 이런저런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치고받던 옆 나라 사람들을 동포로 맞아들였음에 사람들은 꽤나 당황해야 했다. 기존의 지주들이 새 나라에서도 한자리를 차지하려 눈을 붉혔음은 물론이다.
세력 싸움에 혈안이 된 각 지역을 화합시키기 위해 엘시어는 정치적인 혼인을 결심했다. 문제는 대륙의 규모만큼이나 신부의 수가 조금 많았다. 열 몇이 넘는 여인들을 모두 국모로 받아들일 수는 없으니 자연히 나머지는 후비가 되었다.
피델리오 황가는 건국 세대를 끝으로 그 제도를 마무리 짓지 않았고, 이어진 결과는 참혹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유례 깊은 황궁의 후계 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이시스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하기야 황좌의 주인에겐 제도의 합리성보다는 합법적으로 배우자를 여럿 들일 수 있는 권한 자체가 더 중했겠지.’
‘악습이라도 전통을 바꾸는 데는 큰 힘이 든답니다. 많은 이해와 책임이 얽힌 자리이니까요.’
‘그런 중요한 자리에 프리모 같은 얼간이가 앉는다고?’
‘황녀님,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프리모 황자님께서 모자라신 게 아니라 황녀님께서 영민하신 겁니다.’
교사가 곤혹스럽게 웃었다. 그녀가 책을 펴고 읊기 시작하자 이시스는 투덜대면서도 수업을 따라왔다. 늘 딴지를 걸긴 해도 이시스는 스승을 꽤나 좋아했다.
그엔 벨라체 아카데미를 최연소로 졸업했다는 그녀의 파격적인 이력이 크게 한몫했다. 가문의 도움없이 스스로의 힘만으로 황궁 교사 자리를 꿰찬 여자였다. 윗선에게 예를 갖추면서도 고상한 스승의 태도를 이시스는 못내 흠모했다. 스승 역시 자신을 잘 따르는 이시스를 알뜰히 챙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문의 압력으로 그녀의 혼사가 결정되었다. 표면적으로는 혼기가 다 찼다는 이유였지만 황궁에서 해임된 탓이 컸다.
딱히 그녀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 단순히 운이 없었다. 프리모의 게으름을 알아챈 황제가 크게 노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 일로 프리모는 두 장 분량의 반성문을 썼고, 교사는 일자리를 잃었다.
황궁을 떠나기 전 마지막 날, 그녀는 못내 눈에 밟혔던 황녀에게 한 가지 당부를 남겼다. 그녀는 이시스의 영특함을 인정했지만, 동시에 자신이 가르친 게 아직 어린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황녀님을 위해 조언을 하나 해 드리지요. 황녀님, 당신은 참으로 대단한 재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무엇을 이해하며 배우고 깨닫는지를 결코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마세요. 어머니인 황후 폐하께도 알려선 안 됩니다. 당신의 형제와 자매 같은 시녀, 그리고 낮의 새와 밤의 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황녀님께선 숨어들어야 살아남으실 수 있을 겁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어린 이시스는 그 함의보다는 자신을 향한 지적에 날을 세웠다.
‘나는 나 잘났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사람은 아니야.’
‘예, 알아서 잘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그 애정 어린 미소를 끝으로 이시스의 스승은 궁을 떠났다. 서쪽 끝 지방으로 향한 그녀를 수도에서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다.
위험에 처한 개체는 생존을 위해 본능적인 감각을 일깨우게 되는 법이다. 스승의 가르침은 이시스의 무의식 깊은 곳에 남았고, 이시스는 프리모를 자극하는 일 없이 무사히 매 새해를 맞았다.
이시스가 스승의 마지막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했을 때쯤, 본격적인 세력 싸움이 벌어졌다. 황후는 이른 때부터 자신의 아들을 위협할 싹을 잘라 냈다. 그리고 머지않아 자식을 잃은 한 후궁이 황후궁으로 쳐들어오는 사건이 벌어졌다.
‘저주를, 사람 목숨을 벌레만도 못하게 여기는 악독한 너희에게 저주를 남길 것이다! 내 아들이 무얼 잘못했는데, 내 아들이 대체 무엇을 잘못했기에, 아아악!’
이시스는 그 핏발 선 눈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손끝만 움직여 여자를 치우던 어머니와 그 눈꼬리에 선연히 배어 있던 비웃음까지도.
이후 황좌를 향한 도전이 무엇인지 깨달은 겁쟁이들의 기세가 급격히 수그러들었다. 베스의 어미도 그중 하나였다. 누구에게 죽임 당했는지 모를 아들의 실종을 끝으로 그 어미가 궁에 처박혀 나오지 않는다는 소문이 번졌다.
이시스 또한 오래도록 베스를 만나지 못했다. 계절이 바뀔 즈음, 봄의 초입에 다다르고서야 이시스는 베스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별다른 대화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이시스는 정원을 거니는 베스를 여러 번 목격했다. 버려진 이복동생을 지나치며 이시스는 심드렁히 생각했다.
‘어쨌든 죽지는 않았군.’
그날도 그런 하루 중 하나였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이시스가 황제의 부름을 받아 예의 길목을 유난히 여러 번 지나쳤다는 점이다. 방으로 돌아가던 도중 이시스는 후원을 산책하는 베스를 발견했다.
‘이 시간까지 왜 궁에 돌아가지 않고?’
짧은 의문을 뒤로하고 이시스는 베스를 지나쳤다. 평소처럼 우아한 걸음걸이였다. 그러나 이내 이시스의 발이 조용히 멎었다.
이시스가 홱 돌아섰다. 성큼성큼 베스의 앞에 다다라 손을 잡아챘다. 그리 센 힘은 아니었음에도 베스의 몸은 크게 휘청였다.
‘너…… 뭐 하는 거니, 대체?’
이시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허공을 응시하던 베스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못 본 사이 이시스의 어린 자매는 많이 자라 있었다. 이전엔 마냥 아이 같았는데 이제 제법 어른스러운 얼굴을 할 줄 알았다. 더 이상 더럽지 않은 옷과 몸은 신분에 걸맞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전에 보였던 말간 미소는 자취를 감춘 채였다.
베스는 대답하지 않고 잠시간 우물쭈물거렸다. 이시스가 베스를 다그쳤다.
‘여기서 뭐 하는 거냐고 묻잖아!’
베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이시스의 눈치를 보며 베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산책이요.’
이시스가 이를 맞부딪쳤다. 아니, 이건 산책이 아니었다. 이른 오전과 점심 무렵, 그리고 해가 질 때까지 같은 자리를 배회하는 일을 그런 명칭으로 부를 수는 없었다.
이시스가 낮고 갈라진 음성으로 물었다.
‘언제 여기 나왔니.’
‘네?’
‘대체 언제 나와서 언제쯤 네 방으로 돌아가는 건지 말해.’
‘언니, 그게…….’
‘하루 이틀이야 일주일이야, 한 달이야 아니면 이번 겨울 내내였니. 여기서 대체 얼마나 미련하게 버티고 있었는지 말하라잖아!’
이시스의 외침에 베스가 눈을 크게 떴다. 숨을 진정시키는 이시스를 앞에 두고 베스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렇게 스무 바퀴를 돌면 해가 져요. 그럼 또 하루가 지나니까요, 언니.’
이시스는 말문이 막혔다. 베스는 원래도 변변찮은 가르침 하나 없이 방치되었던 아이였다. 어미도 형제도 사라진 지금 그녀가 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끈 떨어진 황녀이니 시녀들도 좋은 대접을 해 주진 않았을 것이다.
이시스는 한참 입을 벙긋이기만 했다.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결국 이시스가 이마를 짚으며 돌아섰다.
‘따라와.’
‘네?’
‘시간을 죽이고 싶거든 나한테 오렴, 차라면 넘치도록 따라 줄 테니.’
그렇게 베스의 정처 없는 산책은 이시스와 함께하는 티타임으로 이어졌다. 이시스는 대체로 바빴지만 그 외의 시간은 성실히 베스에게 할애했다.
이시스를 추종하는 시녀들은 그런 베스를 마땅치 않게 여겼다. 황제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황녀는 권세가의 여식들보다 못한 처지였다. 베스가 이시스의 친구 자리를 차지했음에 고귀한 레이디들은 잔뜩 약이 올랐다. 그들의 심술은 결코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실수처럼 이어지는 악의들에 베스는 곧 풀이 죽었다.
방해는 비단 시녀들 선에서 끝나지도 않았다. 이시스는 황녀들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였다. 황후 쪽 세력은 영민한 이시스가 오라비인 프리모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런저런 배움으로 바빠야 할 시기인데 쓸모없는 동생과 차만 마시고 있으니 그들로서도 답답한 노릇이었다.
한 날은 베스가 풀 죽은 기색으로 물었다.
‘제가 여기 있어도 되는 걸까요?’
이시스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어디서 뒷말이라도 들은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베스는 자신이 언니에 비해 얼마나 모자란지를 길게 열거하기 시작했다. 어찌나 열성적이었는지 말을 끝마쳤을 때쯤엔 목이 타 남은 차를 한꺼번에 들이켰을 정도였다.
이시스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코웃음을 쳤다.
‘베스, 너는 너와 내가 그리도 다른 것 같니?’
‘아니라고는 못하겠어요.’
‘아니야. 너와 내 처지는 본질적으로 같단다. 이 황궁은 황제가 될 수 있는 자들을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거든.’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언니는 저보다 다섯 배는 넓은 방에 사시는걸요.’
베스는 눈에 보이는 차별을 지적했다. 이시스는 침묵했다. 사실이었으므로 할 말이 없었다.
이시스는 자신이 어린 동생을 앞에 두고 너무 현학적으로 접근했다는 걸 깨달았다. 베스는 막 열일곱이 된 이시스보다 두 살이 어렸다. 십 대에겐 한두 살도 거대한 차이다.
이시스는 다른 방향으로 베스를 달래기로 했다. 그녀가 오만하게 턱을 까딱였다.
‘베스, 네가 나랑 차라도 마실 수 있는 이유가 뭔지 아니?’
‘뭔데요?’
‘네가 버려져서 그렇다, 이 모질아.’
이시스의 샐쭉한 대답에 베스가 배시시 웃었다.
‘알아요, 언니.’
모두의 바람과 다르게 베스와 이시스의 친분은 단발성에 그치지 않았다. 이복 자매와 나누는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이시스는 주류에서 멀어졌다.
이시스는 매사에 적당히 행동했고 프리모와 함께일 때는 늘 한발 뒤로 물러섰다. 프리모가 두어 문제를 틀릴 시험에 부러 다섯 문제를 틀리는 식이었다. 묘하게 건성인 태도는 프리모를 짜증스럽게 했으나 대놓고 책할 수준은 아니었다.
꾸준히 나빠지는 성적에 외척들은 아쉽다며 혀를 찼지만 의문을 갖는 이는 없었다. 영재가 나이가 들며 둔재가 되는 건 흔하디흔한 일이었으니까. 프리모의 뒤로 숨어든 이시스의 존재감은 나날이 옅어졌다.
자연히 늘어난 여유에 이시스와 베스는 종종 함께 낮잠을 잤다.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정원으로 나들이를 나갔고 호수에 조각배를 띄워 뱃놀이를 했다. 한가하고 부유한 이들의 사치는 퍽 즐거운 것이었다. 늘어난 허리 사이즈에 개탄하는 재봉사의 한숨만 제외하면, 참으로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그렇게 그 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황후와 담소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 이시스는 참으로 의외의 조합을 마주했다. 프리모와 베스였다. 아무래도 베스가 이시스의 방으로 향하던 중 프리모의 눈에 띈 듯했다. 베스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떨고만 있었다. 베스는 어렸을 적부터 프리모를 무서워해 그의 앞에서는 입도 제대로 떼지 못했다.
둘의 앞으로 다다른 이시스가 점잖게 말했다.
‘오라버니, 그만하시지요.’
프리모가 고개를 돌려 이시스를 보았다. 그가 과장스럽게 동복누이를 반겼다.
‘이게 누구야, 내 여여쁜 누이가 아닌가.’
이시스는 흘긋 베스를 붙잡고 있는 프리모의 손을 살폈다. 아무래도 그는 베스를 궁에 드나드는 귀족가의 여식으로 착각한 듯했다.
확실히 베스의 생김새는 어렸을 때와 비교해 많이 달라져 있었다. 못나다고만 생각했던 얼굴이 자랄수록 나날이 어여뻐졌던 탓이다. 그러고 보면 베스의 어미는 오직 미모만으로 후궁이 되었던 여자였다. 아버지를 닮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다행이라며 자매는 남몰래 키득였었다.
‘예, 그리고 지금 희롱하고 계신 그 아이도 오라버니의 배다른 동생이랍니다.’
이시스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 말에 프리모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얼떨떨한 기색으로 베스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내 동생이라고?’
프리모가 베스의 턱을 쥐고는 거친 태도로 얼굴 곳곳을 살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리 닮진 않았는데.’
‘7황녀 에일베스입니다. 기억하실 텐데요.’
‘아, 내 하나뿐인 동복누이와 놀아났다던.’
프리모가 그리 말하며 베스를 놓아주었다. 이시스와 베스의 친분은 궁에서 제법 유명한 이야깃거리였다. 도통 조건이 맞지 않는 사이인데 틀어지지도 않고 친하게 지내는 것이 남들 보기엔 영 이상했던 탓이다.
‘워낙 형 동생들이 많으니 일일이 기억할 수야 있나.’
프리모가 피식 웃으며 제 뒷머리를 긁었다. 그의 입꼬리에 노골적인 비웃음이 걸렸다.
‘하기야 혹시 모르지. 궁에 가득 찬 것이 온통 황제의 씨니 그중 하나는 가짜일지도.’
베스가 몸을 움찔하며 걸음을 뒤로 물리려 했다. 그러나 프리모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는 것이 더 빨랐다. 프리모가 속삭이듯, 그러나 모두에게 들릴 만한 크기로 말했다.
‘얘, 누이야. 네 어미의 방에 눈 가린 사내가 드나들지는 않던?’
그의 눈이 노골적으로 베스의 몸을 훑었다. 베스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베스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이시스를 향했다.
이시스가 입술을 깨물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밀쳐 내는 힘이 세지는 않았으나, 워낙 생각지도 못했던 일인지라 프리모는 얼결에 베스를 놓쳤다. 그가 눈을 크게 뜨며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한쪽 다리에 중심을 둔 불량한 자세에서 불만이 엿보였다.
‘이시스, 지금 뭐 하는 거지?’
‘그만하세요.’
이시스가 딱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프리모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숫기 없는 동생을 좀 놀렸기로서니 네가 내 앞을 막아서는 거냐?’
‘오라버니께서 방금 하신 말씀은 황실에 대한 모욕이기도 합니다.’
‘내 직접 천박한 핏줄을 가려내겠다는데 무어 불만이라도 있니?’
프리모의 기세가 점점 험악해졌다. 이시스의 무표정한 얼굴에 마침내 조롱이 떠올랐다.
‘글쎄요, 그게 오라버니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아서요.’
‘뭐라고?’
‘저도 의심스러울 지경입니다. 분명 누구보다 고귀한 혈통을 타고났을 오라버니께 왜 황족의 기품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지―’
짝―!
말을 끝맺기도 전에 이시스의 뺨이 돌아갔다. 언쟁만으로도 긴장해야 했던 이시스와 다르게 프리모는 망설임 없이 손을 들었다.
이시스의 분노에 불이 붙었다. 그녀가 씹어 먹을 듯한 눈으로 프리모를 노려보았다. 아릿한 통증은 이시스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그녀의 입에서 선연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제 감정조차 못 다스리는 모자란 종자가 어찌 제국을 통치한다는 것인지!’
프리모가 다시 손을 들었다. 이번엔 이시스도 버티지 못했다. 이시스가 휘청이며 바닥으로 넘어졌다. 핏줄이 터진 듯 투명하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눈앞에서 벌어진 폭력에 베스가 신음하며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베스를 뒤로한 채 프리모가 이시스에게로 다가섰다. 그가 천천히 몸을 낮춰 앉더니, 이시스의 머리칼을 틀어쥐고는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 이시스는 지지 않고 프리모를 쏘아보았다. 그에 프리모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네가 진정 미쳤구나.’
‘이것 놔.’
‘그 빳빳한 고개를 내가 어떻게 교육시켜야겠니. 아예 목뼈를 비틀어 줄까?’
프리모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그와 동시에 뒤편에서 울음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만하세요!’
이번엔 베스가 이시스의 앞을 막아섰다. 이시스를 끌어안은 베스의 몸이 무섭도록 떨렸다. 겁 많은 베스로서는 참으로 대단한 용기를 낸 것이었다. 프리모 앞에서 변변찮은 대꾸도 못 하던 그녀가 아예 그를 가로막고 섰으니.
베스는 자신을 밀어내려는 이시스를 꽉 붙들고 놓지 않았다. 뺨 위로 떨어지는 눈물의 양을 헤아릴 수 없었다. 누가 보든 더없이 안쓰럽게 여길 광경이었다.
때 아닌 소란은 지나가던 이들의 발길을 잡아챘다. 모여드는 시선에 프리모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것들이 작당해서 나를 악당으로 만드는구나.’
그가 싸늘한 눈으로 둘을 흘겼다. 뒤편에 서 있던 시종이 눈을 질끈 감고는 앞으로 나섰다. 분풀이가 자신에게도 돌아올 것을 알았지만, 이를 막지 않는다면 황후에게 더 모진 질책을 당할 것이었다.
‘황자 전하, 보는 눈이 많습니다.’
프리모가 힘주어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가 성난 걸음으로 돌아서며 명령했다.
‘오늘 밤은 이시스를 궁 안에 들이지 말아라. 모포든 먹을 것이든 필요한 물건을 내주는 자가 있다면 내 직접 매우 칠 것이다.’
‘저, 전하, 밖에 비가 오는데요.’
‘그래서?’
프리모가 싸늘히 되물었다. 시종은 이것이 프리모의 마지막 양보임을 깨달았다. 자비 없는 명령이었지만 적어도 동복누이를 대놓고 폭행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시종은 잠자코 포악한 황자에게 허리를 숙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가을로 접어드는 시점이었다. 떨어진 밤 기온과 마침 내리는 비는 독한 이시스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찼다. 그러나 이시스는 프리모를 찾아가 무릎 꿇고 사과하는 대신 야외에서 밤을 보냈다. 베스는 우산을 쓴 채 그런 이시스의 옆에 앉아 엉엉 울었다. 이시스는 부러 짜증을 내어 베스를 실내로 들였다.
빗속에서 밤을 지샌 후 이시스는 몹시 앓았다. 독한 감기였다. 베스는 이시스가 아픈 것이 자신 때문이라 여겼다. 이시스는 프리모의 비위를 맞추지 않은 제 쪽이 더 문제였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베스의 죄책감을 덜어 주지는 않았다. 베스가 안달복달하며 떠는 모습을 구경하는 게 꽤 즐거웠기 때문이다. 잠시 성질을 죽이고 살긴 했지만 본디 이시스는 성격이 나빴다.
떨어지지 않는 열에 이시스는 일주일 정도 침대 신세를 졌다. 마음이 여린 베스는 언니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척척한 물수건이 이마에 닿는 게 불쾌했지만, 이시스는 잠자코 동생의 병간호를 받았다.
베스가 이시스의 머리칼을 베개 위로 넘겨 주다 말고 불쑥 말했다.
‘저는 언니가 있어서 좋아요.’
‘왜, 네 형제 대신으로?’
‘대신은 아니잖아요. 저흰 자매니까.’
‘우리를 자매로 생각하니까 네가 이상한 애라는 거다.’
이시스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같은 어미와 아비를 둔 프리모도 형제 같지 않은데 하물며 베스라면야. 둘은 닮은 점이 없었고 이시스와 비교해 베스는 다분히 격이 떨어지기까지 했다.
베스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언니는 저만 애칭으로 부르잖아요.’
이시스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그것은 지독한 세뇌의 결과일 뿐이었다. 매번 만날 때마다 본명 대신 애칭을 부르라고 말하는데 귀찮게 그걸 계속 듣고 있으란 말인가. 베스는 아닌 듯하면서도 간이 컸다. 이시스에게 베스라고 불리기 시작한 이후 건방지게도 이시스의 애칭을 지어 부르는 일까지 욕심냈으니까.
‘네 죽은 동생이 궁금할 지경이구나. 그놈도 너처럼 막무가내였을지.’
이시스의 말에 베스가 고개를 갸웃였다.
‘제 동생은 안 죽었는데요?’
살아남았을 리가 있겠는가. 베스의 남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재능이 걸출했다. 어린 이시스가 들어 알고 있을 정도이니 이미 모두의 눈엣가시였으리라. 손톱을 숨길 줄도 모르는 어미가 제 아들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이시스는 반박하는 대신 잠자코 수긍했다.
‘그래, 그렇겠지.’
아들을 잃은 충격을 이기지 못한 여자는 딸까지 내팽개쳤다. 베스는 그런 어머니를 원망한 적조차 없었다.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한 남동생 역시 아끼고 사랑했다.
이시스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베스를 응시했다. 자신의 불행보다 남의 상처를 먼저 헤아리는, 이시스의 자매는 고작 열다섯이었다. 이제 곧 데뷔탕트를 치러야 할 텐데 누구도 그 중한 일을 신경 써 주지 않는다.
이시스는 도통 베스의 행복한 미래를 상상할 수 없었다. 얼굴은 모난 데 없이 예쁘니 어느 혼처에 팔려 가기야 할 텐데, 그것이 분명 제대로 된 가문은 아닐 터였다. 젊고 잘생기고 돈까지 많은 남자는 더 훌륭한 조건의 레이디를 결혼 상대로 점찍을 테니까.
이시스가 천장을 보며 한숨 쉬었다.
‘나는 네가 참 걱정이다.’
‘왜요?’
이시스는 굳이 자신의 염려를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베스도 이유를 모르진 않을 테니까. 베스는 고뇌에 잠긴 이시스를 내려다보며 말없이 웃어 보였다. 아무 걱정 말라는 듯이.
그리고 그런 이시스의 고민이 참으로 쓸모없게도, 베스는 그해 가을이 끝나기 전에 죽었다.
범인은 프리모였다. 사람을 살해한 동기라 말하기가 우스울 만큼, 그 이유는 어이없으리만치 간단했다.
이시스가 프리모에게 앞선 일을 사과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확제의 마무리인 사냥 대회가 열린 날, 베스는 생전 참석해 본 적도 없는 그곳에서 화살을 맞았다. 프리모는 참관석에 앉아 있던 이시스를 불러내 억지로 숲까지 데려갔다. 프리모의 강압적인 태도에 인상을 쓴 것도 잠시, 수풀 위에 쓰러진 인영을 발견한 이시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프리모가 말했다.
‘이것 기억하렴, 누이야, 난 네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 어떤 것이든 모두 망가뜨려 줄 수 있단다. 그러니 그 건방진 목을 굽히는 법을 좀 배우렴.’
살인마의 미소가 너무도 섬뜩했다.
이시스는 더듬더듬 바닥을 기어가 시체의 어깨를 당겼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 발의 화살로 사망한 듯 시신의 상태는 너무도 온전했다. 차게 식은 몸에서 베스의 얼굴을 발견한 이시스는 그대로 혼절했다.
이후 이시스는 한 달간 자신의 방에 틀어박혔다. 사흘 동안 아예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더니 유모가 울며 잠긴 문을 두드렸다. 주변의 타박이 귀찮아 띄엄띄엄 식사를 거르는 정도로 타협했다. 남는 시간은 죽은 듯이 잤다.
사실, 이시스가 아끼던 이를 잃은 게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이시스는 오랜만에 프리모의 게으름을 대신 책임져 궁을 떠났던 스승을 떠올렸다. 그녀는 이시스에게 꾸준히 편지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돌아온 답신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다. 연락이 끊긴 후 머지않아 이시스는 그녀가 의처증이 있는 남편에 의해 반쯤 갇혀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시스는 감았던 눈을 떴다. 생기 없던 눈동자에 형형한 빛이 감돌았다.
다음 날 이시스는 프리모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자신이 어리석어 오라비에게 무례를 저질렀다 고하며 몸을 떨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는 약속의 증표로 이마를 바닥에 붙인 후, 이시스는 프리모의 둘도 없는 수족이 되었다. 프리모는 드디어 이시스의 버릇을 들였다며 크게 기뻐했다.
베스는 그대로 잊혀졌다. 더 이상 궁에서 그녀의 이름을 입 밖에 내는 이는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베스와 대화를 나누던 사람은 오직 이시스 하나였다. 베스의 어미는 딸이 죽었다는데도 바깥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이시스는 같이 추억을 곱씹을 사람 대신 베스가 자주 머물렀던 장소를 찾았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후원을 걷고 또 걸었다. 어미와 동생을 잃은 아이가 시간을 버리던 그곳, 나는 듯이 걸음을 옮기던 이시스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곧 멈춰 섰다. 그러나 뒤돌아본 자리는 비어 있었다.
모두가 잊은, 그녀는 이시스의 유일한 자매였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그녀가 얼마나 즐겁고 낭랑한 목소리로 웃었으며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안정되게 만들었는지, 그녀가 무슨 색을 좋아하고 미래에는 무엇을 꿈꾸었는지, 그녀가 사랑하는 이들이 누구였고 또 그들에게 얼마나 제멋대로인 애칭을 지어 불렀는지. 그 이름들을 말할 때 입천장에 길게 닿았다 떨어지던 혀의 몽롱한 발음까지도.
모든 것들을 전부, 그 누구도.
‘무슨 일이에요, 언니?’
“무슨 일입니까, 누님?”
이시스는 충혈된 눈을 들었다. 베스와 닮은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어느 잠든 밤, 꿈에서 누이가 나타나 믿어도 될 사람을 일러 주기라도 했을까. 이시스는 인정했다. 제 앞에 선 남자는 참으로 안전한 줄을 잡았다. 그는 이시스가 절대로 해칠 수 없는 유일한 형제였다.
베스의 남동생, 그녀가 사랑했던 가족이자 그녀의 죽음을 기억해 줄 몇 안 되는 사람.
“너는 네 죽은 누이에게 감사해야 해.”
벤자민을 노려보며 이시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당장에 네놈을 잡아다가 매우 치지 않은 건 모두 그 알량한 남매애 덕분이니까.”
이시스가 몸을 일으켜 벤자민에게로 성큼 다가갔다. 벤자민의 목깃을 잡아채며 이시스가 섬뜩하게 속삭였다.
“네가 말했니?”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대체?”
벤자민이 몹시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갑작스러운 이시스의 등장과 그녀가 하는 말까지, 전부 이해할 수 없는 것들투성이였다. 불 꺼진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복 누이를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던가. 언질 없는 방문만도 예의가 아닐진대 이어진 추궁은 황당하기까지 했다.
“어디도 정보를 얻을 만한 곳이 없어. 이제 막 수도에서 안면을 트기 시작한 애송이인 데다 벨라체에선 정말 공부만 했더군.”
이시스가 벤자민을 노려보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냈다. 여전히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벤자민이 표정을 구기며 물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대공비 말이다.”
이시스의 짧은 대답에 벤자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힘을 주어 이시스의 손을 쳐 냈다. 구겨진 옷깃을 정리할 정신도 없었다. 벤자민이 한 자 한 자 끊어 물었다.
“아스티나가, 그녀가 대체 왜요.”
험악한 대답에 이시스가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이성을 잃은 벤자민을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이름을 부를 정도면 꽤 친밀했나 보지? 왜, 남편 있는 여자에게 눈독이라도 들였나?”
“뭐가 어쨌든 당신이 알 바는 아니잖습니까. 왜 아스티나를 입에 담는지부터 말해요!”
“정보를 팔아먹은 배신자 주제에 어디서 큰소리야!”
이시스의 일갈에 벤자민이 황당하단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배신자?”
이시스는 벤자민의 연기력에 감탄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벤자민이 궁에 돌아온 이유만 몰랐더라도 깜빡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이시스는 제 감정에 눈 멀어 큰일을 그르치게 만든 사내를 경멸의 눈으로 보았다.
대공비가 후계자의 잔의 행방을 알고 있다 말한 이후, 이시스는 대공비의 뒤를 캐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시스가 알아낸 것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대공비는 아직 사교계 내에 정보를 교류할 만한 마땅한 지인이 없었고, 그렇다고 특정한 모임에 꾸준히 참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만일 그렇다 할지라도 이시스의 속내를 읽어 내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이시스는 황제 다음의 세를 모은 프리모조차 속이고 있었으니까.
대공비가 이시스의 계획을 알게 될 유일한 경로는 딱 하나, 벤자민뿐이었다. 황제와 알현하기 전 먼저 찾아갔던 게 벤자민이라 하니 그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얻어들은 것이 틀림없었다.
“무슨 오해를 한 건지 모르겠지만 난 아스티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겨우 침착함을 되찾은 벤자민이 대답했다. 벤자민은 아스티나의 비범함을 익히 알았지만 이번 일은 그도 몹시 놀라웠다. 이시스가 찾아오고 난 오후, 후계자의 잔을 되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가 막혔던가.
황제는 벤자민을 불러 새로 얻은 잔을 자랑하며 아쉽게 입맛까지 다셨었다. 아스티나를 구하기 위해 아탈렌타에 간다고 했을 때는 시큰둥했던 아버지였다. 이번 일로 황제는 벤자민의 안목을 칭찬함과 동시, 대공비를 벤자민의 짝으로 들이지 못했음을 퍽 아쉬워했다.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더니 더한 소동이 남아 있었다니. 이시스는 벤자민이 쌍둥이 잔에 관한 정보를 줬다고 오인한 게 틀림없었다.
벤자민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쌍둥이 잔에 관한 건 저도 몰랐던 사실입니다.”
“발뺌하지 마라, 잔에 관해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텐데. 말해, 대공비에게 뭘 믿고 우리의 계획을 알렸지?”
“그날 아스티나와 이야기했던 건 채 30분도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제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던 벤자민의 낯이 희게 질렸다. 그가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스티나가…… 계획을 알고 있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생소한 벤자민의 반응에 이시스가 미간을 좁혔다.
“네가 말한 게 아니라고?”
“당연히 말하지 않았어요. 좋아하는 여자를 싸움판으로 이끄는 미친놈이 어디 있답니까? 아스티나가 뭐라고 했는데요, 대체 그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겁니까?”
벤자민이 이시스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그에 그치지 않고 그가 경고하듯 억눌린 음성을 내었다.
“그녀를 건드리지 마세요. 나라는 지원군까지 잃고 싶지 않다면.”
위협적인 말투였으나 이시스는 그보다 불안을 띤 눈동자에 더욱 주목했다. 주먹 쥔 손에선 강인한 척하려는 티가 났지만, 그럼에도 얕은 떨림은 잦아들지 않은 채였다. 좋아하는 여자가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모습이었다.
이시스는 벤자민이 사실을 말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무심코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벤자민이 말한 게 아니라면 대체 어디서 정보가 샌 것인가. 그녀는 손으로 입 주변을 감싼 채 생각에 잠겼다.
‘정말 대공비 혼자 알아낸 것이라고? 대체 어떻게?’
이시스의 얼굴에 혼란스러운 빛이 감돌았다. 알 수 없는 건 정보의 출처뿐만이 아니었다. 이시스는 도무지 대공비의 의도를 짐작해 낼 수 없었다.
대공비는 분명 이시스가 가진 것이 승리자의 잔이며, 프리모에게 내준 것이 패배자의 잔이라 알렸다. 대공비가 늘어놓은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녀는 이시스에 대한 지지를 우회적으로 드러낸 셈이었다. 무엇보다 정말 프리모에게 가 붙을 생각이었다면, 진작 잔을 훔친 범인이 이시스임을 밝혔을 것이다.
모든 정황이 한 가지 결론을 내리고 있음에도 이시스는 좀처럼 이 기막힌 행운을 신뢰할 수 없었다. 이시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거짓을 말한 거라면 용서치 않을 거다, 벤자민.”
“누님이야말로 아스티나를 함부로 이용할 생각은 말아요. 당신이 무엇을 원하든,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겁니다.”
벤자민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벤자민의 눈을 들여다보던 이시스는 이내 맥이 빠졌다.
하기야 진짜 거짓을 말한 것이라고 쳐도 무슨 벌을 또 내리겠는가. 동생의 건방진 대거리에도 질책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시스는 벤자민이 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드러낸 손톱을 뽑아낼 생각이 없었다. 그건 이시스가 베스에게 그토록 주고 싶었던 힘이었다.
이시스가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버려진 모질이 주제에 성질만 대단하구나.”
모두가 타인에게서 과거에 사랑했던 얼굴을 찾아내기 위해 애쓴다. 어리석다 비웃을 것인가 아니면 가엾다며 동정할 것인가.
* * *
아스티나가 이시스의 부름을 전해 들은 건 다음 날 오후였다. 아마 그간의 유예 동안 이시스 황녀는 대공비의 뒷조사에 임했으리라. 오라비를 속이고 야심을 품은 황녀는 과연 조심성 있는 인물이었다.
상대가 자신의 뒤를 캐리라는 것을 예상했음에도 아스티나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아카데미에서 부지런히 수학해 왔을 뿐인 아스티나의 과거에서 특이점을 발견하지는 못할 테니까.
“정말 혼자 가셔도 되겠습니까?”
테리오드가 염려가 섞인 음성으로 물었다. 정문 앞까지 나와 배웅하는 남편을 보고 아스티나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예, 염려 놓으세요.”
가문의 정치적 입장을 정할지도 모르는 중요한 자리다. 아스티나도 웬만해선 테리오드와 함께 입궁하고 싶었지만, 그의 특이 체질은 번번이 약점이 되었다. 아니, 어쩌면 더 이상 그 약점이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르지만 아직 확신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아스티나와 동침한 이후 테리오드는 다시 짐승으로 변하는 일이 없었다. 저주가 완전히 풀렸다고 기뻐하기엔 이어진 병력이 길었고, 확신은 이른 감이 있었다, 대공 부부는 신중하게 조금 더 추이를 두고 보기로 결정했다.
만일 동침이 입맞춤보다 사람으로 머물 시간을 더 길게 한 것이라면, 우선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건 그 주기였다. 하루의 반이라는 확실한 표본이 있는 후자와 다르게 전자는 마땅한 선례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테리오드는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언제 짐승으로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이라 테리오드는 가급적 오랜 외출을 삼가고 있었다. 이번 이시스와의 만남도 마찬가지였다. 얼결에 가문의 향방을 홀로 결정짓게 되었음에 아스티나는 다소 곤란해졌다.
가주 대리라니, 결혼한 지 일 년도 지나지 않은 배우자가 맡기에는 꽤나 부담스러운 자리였다. 정작 그녀의 남편은 아내에게 무엇이든 가져다 바칠 태세였지만.
“일찍 귀가하겠습니다.”
아스티나가 안심시키듯 덧붙였다.
지켜보던 올리버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루를 꼬박 이어진 술래잡기에 불화를 걱정했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들 부부는 급격히 사이가 좋아져 있었다. 올리버는 아내에게서 도통 떨어지지 않는 대공을 밀어내고는 마저 마차 문을 닫았다.
“그럼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그래, 이만 다녀오지.”
올리버는 허리를 숙이다 말고 멈칫했다. 그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전하……? 방금 제게 말씀을…….”
낮추셨는데.
올리버는 그 뒷말을 내뱉진 못했다. 자신이 그 일에 불만을 가진 것처럼 내비칠까 염려한 탓이었다.
대공비는 대공과 혼인한 이래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겐 말을 놓지 않는다’는 황당한 이유로 쭉 올리버에게 존칭을 사용해 왔다. 거의 쉰이 다 되어 가는 주방장에게 당당히 하대했던 걸 생각하면 다소 의문스러운 핑계다. 올리버는 아스티나의 기행을 가문에 평생을 바친 집사에 대한 존중으로 합리화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하루아침에 마음이 뒤바뀌신 것인가.
올리버의 심정을 어렵지 않게 이해한 듯 아스티나는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그녀가 짧게 덧붙였다.
“이제 진짜 대공비니까.”
“예?”
올리버를 더욱더 혼란스럽게 하는 답변이었다. 그렇다면 이전엔 가짜 대공비라도 됐다는 말인가. 올리버는 이것이 세대 차이로 이해할 수 없는 농담은 아닌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아스티나는 말없이 웃으며 마차를 출발시켰다. 거대한 저택이 빠르게 저 너머로 멀어졌다. 그녀는 이제야 온전히 제 공간이 된 건물을 잠시간 눈에 담았다.
대공과 한 혼인이 본연의 의미를 얻은 건 정확히 어젯밤 이후의 일이었다. 이혼을 생각하고 있던 때에 아스티나는 대공비라는 직위가 온전히 제 것이라 여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테리오드를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그 동화 같은 결말은 묘한 감상을 자아냈다.
아스티나는 눈을 감고 그녀의 남편이 전한 배려 넘치는 고백을 떠올려 보았다.
‘그대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느리게. 그렇게 발맞춰 걸어요.’
테리오드는 본인의 마음을 강요하는 대신 그녀에게 제안했다. 함께 노력해 보지 않겠느냐고. 그 상냥한 제안은 그들의 첫 만남을 상기시켰다. 그때도 테리오드는 팔려 온 신부를 겁박하는 대신, 제 곁에 남아 달라는 부탁을 전했었다. 스며드는 다정함은 아스티나에게 기대를 안겨 주었다. 언젠가는 그와 함께 행복해질 수 있으리란.
‘평화로운 신혼을 위해선 일단 벌여 놓은 일부터 해치워야겠지만.’
아스티나는 피식 웃으며 밖으로 내려섰다. 마차에서 머문 시간이 그리 길진 않았다. 황궁은 대공가의 사저에서 멀지 않은 거리였고, 이시스가 머무는 궁까지 가기 위해선 얼마간 걸어야 했으니까.
아스티나는 시녀의 안내를 받아 이시스의 방 앞까지 다다랐다. 여기까지 오며 눈에 담은 오후의 궁은 몹시도 한갓진 정경을 내보이고 있었다. 오늘의 목적이 될 위험한 대화와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평화로움이다.
“들어와.”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시녀가 문을 열었다. 아스티나는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황제의 것만큼 호화롭진 않았지만 이곳도 권세에 걸맞은 화려함이 있었다. 대화를 나누면 소리가 크게 울릴까 걱정될 정도로 층고가 높은 방이었다.
이시스는 먼저 앉아 아스티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황녀의 앞에 다다랐다. 이시스가 앉으란 듯 건너편 자리를 향해 손을 펴 보였다.
“반갑소, 대공비. 급히 불러들였는데도 이리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와 주어 고맙군.”
“저야말로 귀한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스티나가 자리에 앉으며 점잖게 대답했다. 이시스의 낯에 온화함이 담겼다.
“그대 덕분에 불명예스러운 잡음을 치워 낼 수 있게 되어 폐하께서 몹시 기꺼워하셨소. 오늘은 그대의 공로를 치하하고자 부른 것이오.”
“분에 맞지 않는 과찬을 하시니 부끄러울 뿐입니다.”
아스티나가 매끄러이 웃으며 답했다. 우스운 희극 같은 상황이었다. 이 자리에 앉은 두 사람 다 아스티나가 황제에게 내어 준 것이 패배자의 잔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시스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짙어졌다.
“그대는 황가의 은인이니, 마땅히 나를 친우처럼 생각하고 오늘은 편히 즐기다 가게나.”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 것을요. 잔은 본디 황실의 물건이 아닙니까.”
“겸손하군, 본래 자리에 돌려놓은 것뿐이라 이 뜻인가?”
“예,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요.”
이시스는 잠시 차의 향을 음미했다. 한 모금을 삼키고는, 소리가 나지 않게 잔을 내려놓았다. 먼저 항복하고 물러선 것은 이시스 쪽이었다.
“모르겠군.”
곧 죽어도 불리한 패는 내보이지 않는 것이 싸움의 원칙이나, 이시스는 이번만은 의미 없는 허세를 내버리기로 했다. 상대는 이시스의 속내를 모두 알고 있는데 반해 이시스는 지나치게 정보가 없었다. 이시스의 생각대로 상대가 제게 품고 있는 것이 호감이라면, 강압적인 추궁으로 굳이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솔직히 전혀 짐작하지 못하겠어. 그대가 내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시스가 한결 허심탄회한 어조로 말을 맺었다. 아스티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이시스와 눈을 마주하며 천천히 운을 떼었다.
“황녀님, 저는 황녀님 같은 눈을 아주 잘 압니다.”
아스티나의 말에 이시스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시스가 재미있다는 목소리를 내었다.
“눈이라?”
“욕망하는 사람의 눈 말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황녀님에게서 그것을 발견하고도 의미 없이 지나쳤을 테지요.”
“계속 말해 보시오.”
“황녀님께서 지금까지 들키지 않을 수 있으셨던 이유는 하나입니다. 아무도 황녀님이 그런 야망을 품으리라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아무 욕심이 없는 벤자민에게 더한 견제가 돌아가는 것이 작금의 실정이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닙니까.”
이시스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조용히 제 턱을 쓸었다. 이시스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하지만 그대는 다르게 생각했다 이 말인가?”
“실제로도 사실이 맞았고요.”
“내가 새어 나간 비밀을 막기 위해 그대를 해치리라는 생각은 안 했나 보지.”
“그 전에 먼저 벤자민에게 의견을 구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도통 저에 대해 나쁜 말을 할 줄 모르는 남자지요.”
이시스는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도 그것은 사실이 맞았다. 이시스는 대공비를 입에 담자마자 몹시 흥분했던 벤자민을 떠올렸다. 사랑하는 여자를 건드리지 말라며 성을 내는 모습은 언뜻 간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는 일이다, 벤자민이 대공비를 보호할 상대라고만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먼저 이시스에게 접근한 것은 오히려 대공비 쪽이었으니까.
이시스가 신중하게 말의 마디마디를 짚어 가며 질문했다.
“그대가 이런 대화를 청한 이유를, 나와 뜻이 맞아서라고 판단해도 되겠는가?”
“글쎄요.”
당연히 알겠다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던 이시스는 내심 당황했다. 대공비의 저의를 의심하긴 했으나, 내심 이 대단한 기회에 대한 욕심을 키워 왔던 것도 사실이었다.
실제로도 상황은 마냥 긍정적이었다. 지금껏 대공비가 이시스에게 내보인 것은 온통 같은 편에 서겠다는 여지였으니까. 그리고 대공가의 협조를 손에 넣으면 이시스는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게 되는 셈이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말끔하게 웃으며 제의했다.
“저는 황녀님께서 그 이유를 만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설득해 보라고.
이시스는 무심코 헛웃음을 흘릴 뻔했다. 그녀는 이 만남에서 상대의 쓸모를 판단하는 자는 자신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되레 시험을 걸어 온 건 상대 쪽이었다. 이시스는 제 앞에 앉은 여인이 건방지다고 여겼으나, 자신이 그 시험을 통과해야만 하는 입장인 것도 사실이었다.
아탈렌타는 프리모조차 얻지 못한 대단한 가문이었다. 애석하게도 대공비에게는 이시스의 자질을 평가할 자격이 있었다. 실제로 대공이 내건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던 프리모는 아탈렌타가와 데면데면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편한 심기를 전혀 내비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시스가 다리를 꼬며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무례하기 그지없군. 먼저 내게 접근한 것은 그대가 아니던가?”
“예, 덕분에 황녀님께서는 아주 대단한 기회를 손에 넣으셨지요.”
“간이 크다고 해야 할지 행동력이 뛰어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대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던 것은 내 계획을 안다는 사실을 입 밖으로 내기 전의 일이야.”
“하지만 겉으로만 봐서는 황녀님께서 황제의 재목이실지, 그저 그런 야망가이신지는 제가 아직 분별할 수 없는 바이니까요.”
아스티나의 대답은 짐짓 도발적이기까지 했다. 이시스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나는 존재만으로 내 능력을 증명할 수 있겠군. 이 황궁에서 그 많은 황손들을 치워 버린 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형제를 죽인 것은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그건 그들이 진짜 형제일 때 그렇겠지. 잠들기 전 오늘 밤은 어떤 암살자를 들일까 걱정하게 만드는 상대를 어찌 핏줄로 생각할 수 있겠나?”
이시스의 목소리가 결국 불쾌한 기색을 띠었다. 아스티나는 제도를 뒤엎으려는 황녀를 앞에 두고도 판에 박힌 말을 읊었다.
“그들을 형제라 생각지 않으셨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사람 목숨을 벌레처럼 취급하는 이가 어찌 백성을 다스리겠습니까.”
“그 말이 우습구나. 대륙을 통일한 존엄한 여제 마티나가 사람을 몇이나 죽인 줄 아는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베면 우리는 그를 위인이라고 부른다네.”
“황녀님, 그게 그녀가 엘시어에게 제위를 물려주어야 했던 이유입니다.”
아스티나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역사는 초대 황제를 위엄 있게 기록했지만 당시엔 반발이 거셌다. 부모 자식을 잃은 과거의 권위자들이 시시각각 황성을 향해 불충을 드러냈다. 무력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 자들일지라도, 증오로 얼룩진 권좌가 오래갈 리 없다.
마티나는 원망의 구심점이 된 제가 사라져야 할 때임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그녀가 엘시어에게 제위를 넘기고 평화 정치를 하도록 도운 데는 그러한 맥락이 있었다.
계속해서 돌아오는 반박에 이시스의 눈초리가 싸늘해졌다. 이시스가 이전보다 감정적인 어조로 되물었다.
“그대는 같은 조건을 나의 오라비인 프리모에게도 요구할 텐가?”
안하무인인 프리모의 성정을 지적하는 말이었다. 재미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다. 프리모의 살인엔 대의를 위한다는 미명조차 없었다. 대공비의 말대로 생명을 중히 여기지 않는 자는 제왕이 될 수 없다면, 프리모는 이시스보다 더 대단한 결격 사유를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이시스는 아스티나가 그대로 입을 다물거나, 혹은 프리모를 옹호하는 말을 전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시스가 멈칫했다. 그녀의 눈이 다소 얼떨떨한 빛을 띠었다. 이시스가 약간의 당황이 섞인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반응이 평생 황녀님을 괴롭힐 것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아스티나가 차게 식은 눈으로 이시스를 보며 말했다. 이시스의 눈가가 일순 움찔했다. 이시스는 아스티나가 자신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지를 완벽하게 알아차렸다.
도성의 귀족들은 프리모의 살인을 패악이 아닌 야망으로 이해한다. 그를 흡집 내지 못하는 잔인함은 두려움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렇다면 야망을 이해받지 못하는 자의 계책은 무엇으로 불리는가.
이시스의 입가에서 감탄과 같은 비틀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시스는 훌륭한 정치인답게 한순간에 흥분을 사그라트렸다. 그녀가 턱을 들며 말했다.
“대공비, 나는 그대의 소문을 익히 들었소.”
“영광입니다.”
“그대는 아주 매력적이고도 거추장스러운 인물이었지. 그대를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아주 많은 것들을 대가로 내밀 수 있었을 것이오. 대단한 재산, 명예, 황제 바로 밑의 권력……. 그렇지만 어느 하나 그대 눈에 찰 것 같지 않았지.”
이시스가 눈을 감고 자신이 내어 줄 수 있는 것을 하나씩 짚어 냈다. 아직은 불완전한 그녀조차 제국의 가장 높은 자들 중 하나였다. 이시스가 눈을 떴다. 그녀는 아스티나를 보며 자신감에 찬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마티나를 만드는 업적은 어떻소?”
아스티나가 이시스에게서 보고자 한 것은 의지였다. 그리고 이시스는 그 쓸모없는 염려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마냥 당당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이시스가 자신 있게 말을 맺었다.
“비웃음, 경시, 두려움, 혹은 공포, 또는 비난. 나는 기꺼이 그것을 감당하겠어.”
두 번째 마티나라. 본인에게 마티나의 재림을 만들어 내자고 청하다니.
절묘한 대답에 아스티나는 그만 헛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이시스를 도울 계산을 하고 이 자리를 찾은 것은 맞았으나, 황녀는 어디까지나 수단에 불과했다. 아스티나는 본래 프리모의 자리를 위협하는 약간의 장난을 쳐 볼 생각이었다. 마티나가 받은 모욕을 대갚음해야 한다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이젠 이시스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흥미가 생겼다.
이시스는 아스티나의 전생을 몰랐으므로 방금의 말은 우연의 일치에 불과했다. 아마 그는 역사적으로 성공한 여성 중 대표적인 인물인 마티나를 예로 들어 여자들 간의 동지애를 꾸리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할 포부였고,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의 자신감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스티나는 그 대답이 꽤 마음에 들었다.
“진짜 잔을 내어 드린 보람이 있는 야심이십니다.”
아스티나가 흡족한 음성으로 말했다. 입가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채였다. 이시스가 가는 눈으로 아스티나의 시선을 되받아쳤다.
“그 말은?”
“대공께는 이미 말씀을 드리고 온 참입니다. 지원에 있어서는 염려를 놓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기실 황녀님께선 음지에서의 도움을 더 기꺼워하실 듯하지만요. 저희의 사정과도 꽤나 잘 맞아 드는 동맹이 되겠군요.”
너무 쉽게 돌아오는 수긍에 이시스는 다소 당황했다. 이미 대공과는 이야기가 된 사안이라니, 대공비는 애초부터 답이 정해져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반쯤 입을 벌렸던 이시스는 그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대에게 놀림이라도 당한 기분이군.”
“익숙해져야 하실 겁니다. 새로 얻으신 수하는 농담을 좋아하니까요.”
아스티나는 그리 대답하고는 잠시간 저와 같으면서도 다른 고결한 황녀를 눈에 담았다.
마티나는 약점이 많았다. 성별과 신분, 그리고 왈도의 전적까지도 모두 그녀의 흠이 되었다. 그녀는 종종 상상했다. 날 때부터 고귀했던 자신이, 그야말로 적법한 수순을 거쳐 황위를 얻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출신을 부끄러워한 건 아니었지만 당연한 것을 얻는 기분은 어떨까 못내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그 질문에 답을 해 줄 사람이 나타났다. 100여 년이 지나고 나서야, 우습게도 다시 그녀의 앞에.
아스티나는 처음으로 신의를 담아 이시스를 응시했다.
“앞으로 황녀님께서 저희에게 보여 주실 일들에 아주 기대가 큽니다.”
“내 필히 그 믿음에 보답을 해 주어야겠군.”
“저는 그것이 아주 즐거운 협력이 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대가 부디 낡은 성을 가진 우아한 돼지들과의 대화도 즐거이 여기길 바라겠어. 사냥 대회가 끝나면 곧 그대를 위한 축하의 자리가 열릴 예정이거든.”
미처 전해 듣지 못한 일이었기에 아스티나는 의아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축하의 자리라면요?”
“황제 폐하께서 그대라는 패를 놓치지 않으려 벌이신 계획이지. 황궁에 충성을 바친 대공비를 위한 연회! 프리모는 거기서 잔을 전해 받게 될 예정이야.”
이시스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은 것도 잠시, 이시스는 곧 자신의 말이 대공비를 향한 비난처럼 들릴 수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시스가 고개를 들며 이어 부드러운 음성을 내었다.
“프리모가 잔을 돌려받게 된 걸 불쾌히 여기는 건 아니야. 사실 나는 이 잔을 완전히 소유할 생각은 없었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니까.”
“프리모 전하의 명성에 적당한 흠을 낸 뒤 돌려놓을 계산이셨겠지요.”
“그래, 원래 잔을 찾는 건 나의 몫이었지. 그리하면 프리모가 나를 더 신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거든.”
하지만 대공비의 도움으로 이시스는 진짜 잔을 돌려주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진정한 제왕의 잔을 가진 건 자신이고, 프리모는 한낱 가짜를 손에 쥐고 있다는 것은. 심지어 자신은 프리모가 내내 군침을 흘리고 있던 아탈렌타의 지원조차 얻어 내지 않았던가.
이시스는 잠시간 자신에게 벌어진 이 기막힌 행운의 맛을 음미했다. 약간의 뜸을 들인 후 이시스가 말했다.
“그대 덕분이야.”
그에 아스티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진정 전하께서 소유하실 만한 물건이었습니다.”
이시스가 프리모를 상대하기 위해 들인 노력을 몰랐다면 아스티나도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리진 않았다. 어찌 보면 아스티나는 합당한 상대에게 합당한 도움을 주고 있는 셈이었다.
이시스는 오래도록 프리모의 뒤에 숨어 때를 노렸다. 기회는 준비된 자의 것이었으므로, 아스티나는 지친 황녀에게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니 기꺼이 당신의 것을 가지십시오.”
아스티나가 이시스의 방을 나선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아스티나는 복도로 걸음을 내디디고 머지않아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던 벤자민을 발견했다. 벤자민은 이 상황이 몹시 불만스러운 듯 벽에 비뚜름한 자세로 기대서 있었다.
아스티나는 눈썹을 한 번 들었다 내리고는 벤자민을 그대로 지나쳤다. 벤자민이 당황한 얼굴로 황급히 아스티나를 쫓아왔다.
“아스티나!”
“목소리가 커.”
“내가 언성을 안 높이게 생겼어?”
벤자민이 그리 말하고는 아스티나의 앞을 막아섰다. 그가 불안한 음성으로 아스티나를 다그쳤다.
“누님과 무슨 이야기를 했지?”
아스티나는 잠시 주변을 살폈다. 아스티나의 걱정이 무엇인지 알아챈 듯 벤자민이 한숨과 함께 설명했다.
“이미 이 근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물렸어. 그러니 안심하고 대답해도 돼.”
과연 주변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인기척에 민감한 숙달된 검사가 무려 둘이나 있으니 굳이 밀실을 찾을 필요는 없으리라. 아스티나가 선선히 대답했다.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고 왔지.”
“원하는 대답? 잔에 관한 것 말이야, 아니면 누님의…… 제길. 아니, 이런 건 다 됐어. 아스티나, 이시스를 돕겠다는 건가?”
벤자민이 초조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의 걱정과는 맞지 않는 무게로, 아스티나는 짧은 긍정을 돌려주었다.
“그래.”
벤자민의 얼굴이 황당하다는 듯 일그러졌다. 그는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스티나는 그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탈렌타는 굳이 다음 대 황제의 신의를 얻을 필요가 없는 대단한 가문이었다. 성공이 확실하지도 않은 세력 싸움보다는, 당연히 중립 쪽이 더 좋은 선택지다. 제정신이라면 이시스를 돕겠다는 답을 내놓을 리 없었다.
아스티나는 그대로 이시스의 야망을 모른 척 지나칠 수도 있었다. 계획을 알아챘음을 드러낸 건 종잡을 수 없는 변덕이었다. 적어도 벤자민이 보기에는.
“그래서 네가 얻는 게 뭐가 있지?”
아니나 다를까 벤자민은 답답하다는 듯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스티나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 황자인 너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뭐?”
“벤자민, 나는 그녀가 얻을 황좌가 아주 고귀하고 깨끗하길 바라.”
벤자민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한 표정이었다. 마티나였던 아스티나의 과거를 듣는다면 조금쯤은 이해해 줄까. 아스티나는 뒷짐을 지며 느릿하게 흰 복도를 밟아 나갔다.
“예로부터 나는 황제의 절친한 친구로 남길 좋아했지.”
“뭐?”
“황제는 할 일이 너무도 많은 데 반해 친구는 의무 없이 그의 권속을 빌릴 수 있거든.”
“아스티나, 대체…… 네가 선택한 게 그 희망 사항을 이룰 가능성이 더 낮은 쪽이라는 것을 알긴 아는 거야?”
“글쎄, 이시스 황녀는 황제가 될 거다. 내가 그리 정했으니까.”
아스티나가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당연한 목소리를 내었다.
황위를 물려줄 자를 정하는 일은 엘시어 때도 그러했듯 이번에도 자신의 몫이 될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 손으로 직접 세운 제국이다. 그 위대한 공적을 후대의 얼간이가 망치게 둘 수는 없었다. 프리모의 다혈질적인 성격은 나라를 통치하는 대업에 맞지 않았다. 친우의 후손을 정리해야 한다는 사실이 다소 안타깝기는 했으나 딱 그뿐인 감상이었다.
누구 하나가 죽어야 하는 싸움이고 이를 말릴 수 없다면, 더 나은 쪽을 골라내는 게 현실적인 방책이었다. 이시스 역시 엘시어의 핏줄인 것은 마찬가지였으므로.
“아스티나, 다시 생각해 봐. 이건 그렇게 간단하게 결정 내릴 일이 아니야.”
벤자민이 다분히 인내심을 끌어 올린 투로 아스티나를 제지했다. 아스티나는 잠시 그런 친우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덤덤히 되물었다.
“그렇다면 넌 왜 이시스의 편에 가 섰지?”
“뭐? 그건…….”
“너는 너의 선택을 했지, 그리고 이건 내 선택이다. 너는 그걸 알아야 해.”
벤자민은 기사도를 아는 남자였기에 아스티나를 지키고 싶어 했다. 그게 아스티나가 그의 레이디가 되지 않기로 한 이유였다.
벤자민이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 아스티나는 그들 사이를 정리하는 결론을 내놓았다.
“벤자민, 넌 내 보호자가 아니야.”
아스티나는 딱히 벤자민이 나쁜 사람이라서 그녀를 구속하려 드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친구일 적의 벤자민은 신실하고 믿음직했다. 다만 우정을 말하는 남자와 사랑을 말하는 남자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너무도 다른 방식의 구애가 깊이 마음에 남았던가. 아스티나는 문득 테리오드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애초에 저택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인 데다, 마차에 타기만 한다면 금방 그에게로 달려갈 수 있을 텐데.
고개를 내젓고는 그대로 벤자민을 지나쳤다. 그녀의 단언이 선을 긋기 위해서라고 생각한 듯 벤자민은 머뭇거릴 뿐 더 이상 따라붙지 않았다. 곧 뒤편에서 벤자민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이번 일에 대한 설명은 이시스에게서 캐내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아스티나는 문득 제자리에 멈춰 섰다. 재고를 권하던 벤자민의 말이 기억 속 누군가와 겹쳐진 탓이었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복도 저편으로 사라진 벤자민은 더 이상 자리에 없었다.
아스티나는 고개를 돌려 오른편으로 이어진 장엄한 후원을 눈에 담았다. 황성은 그녀의 본질만큼이나 이전과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그 위로 펼쳐진 천공도 과거를 떠올리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몇백 년, 혹은 몇천 년간 내내 그 자리에 있었을 하늘이다. 덕분에 아스티나는 어렵지 않게 옛 목소리를 상기해 냈다.
‘제게 황위를 주어도 되겠습니까? 폐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롯이 당신의 힘으로 얻은 것입니다.’
마티나가 고향으로 내려갈 무렵, 엘시어가 전했던 만류의 말이었다. 엘시어의 걱정 어린 눈빛이 선연히 눈앞에 떠오르는 듯했다.
아스티나는 과거와 현재를 분리해 내듯이 눈을 감았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필요한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스티나가 머물던 자리를 지나치며 읊조렸다.
“나의 시대는 이미 끝났다, 엘시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