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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우아한 그녀 (12/23)

12. 우아한 그녀

앤서린은 아침부터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원인으로 꼽을 수 있는 것들은 다양했다. 아침으로 나온 빵에서 평소보다 버터 향이 덜했다든가, 아니면 옷을 입으려는데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셔츠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든가, 길을 걷다가 지난밤 축제에 흠뻑 취했던 누군가가 쏟아 낸 토사물을 밟았다든가.

“후작님, 대공비는 어땠습니까? 대공은 강건해 보이던가요? 후작님!”

그도 아니면 그녀의 수하가 지나치게 눈치 없다거나.

“그런데 대공비는…… 소문처럼 그렇게 예뻤습니까?”

처비가 손으로 제 입을 가리며 속살거렸다. 앤서린은 말없이 마차의 창문 쪽으로 그의 머리를 밀어냈다. 대놓고 불편한 티를 냈으니 알아들을 법도 한데 흥분한 처비는 종알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얻어듣기로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고 하던데요. 대공까지 더해지니 선남선녀가 따로 없었다며 벌써 도성 안에 소문이 다 번졌습니다.”

“나는 못 봤네.”

앤서린이 심드렁한 목소리를 가장하며 대답했다. 생각지 못한 대답에 처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어째서요?”

앤서린은 멍청한 질문을 상대하는 대신 짜증스레 뒷머리를 긁었다.

‘대체 대공비라는 여자가 어떻기에 저 난리들인지.’

앤서린은 지난밤 무도회에서 대공비를 만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등장이 누구보다 늦었던 탓이다. 얼마 전 부상을 입었던 말의 상태가 악화되어 그녀는 저녁 내내 마구간을 떠나지 못했다. 자정이 가까워져서야 말은 안정된 기색을 보였다.

뒤늦게 준비를 마쳐 황궁으로 향했지만 결과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완벽한 지각이었다. 늦었다며 방방곡곡 홍보하는 꼴이 될 것이 뻔해 시종장은 그녀의 이름을 불러 주지도 못했다.

당연히도 늦은 입장 탓에 앤서린은 대공비라는 여자를 볼 수 없었다. 멀리서 존재를 인지하긴 했으나 마침 대공 부부는 돌아갈 무렵이었고, 앤서린은 그 얼굴에 대놓고 호기심을 보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녀에겐 정적으로서 지켜야 할 체통이라는 것이 있었으니까.

따라서 앤서린은 회장을 나서는 대공비의 뒤통수만 겨우 살폈다. 날개 뼈 밑으로 굽이치듯 내려온 붉은 머리칼이 앤서린이 볼 수 있었던 것의 전부였다.

다소 아쉽기는 했으나 무도회는 일주일 내내 이어질 예정이었다. 앤서린은 다음을 기약하며 친분이 있는 자들에게로 걸음을 돌렸다. 그녀가 신경 쓸 것은 어떻게 씹어 먹을지 간을 봐 둬야 할 대공뿐, 대공비에게 할애할 관심은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앤서린은 그랬다는 말이다.

‘앤서린 후작! 왜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대공비 전하는 만나 보셨는지요?’

플랑벤 백작이 말했고,

‘앤서린 후작님, 늦으셨군요. 대공 부부께선 이미 돌아간 듯한데, 혹 얼굴은 뵈셨는지 모르겠군요.’

웰링턴 자작이 수선을 부렸으며,

‘앗! 대공비 전하는 만나 보셨습니까?’

베르디 자작은 흥분하여 포도주를 흘렸다.

그 모든 아우성 끝에 결국 앤서린은 참지 못하고 근엄하게 답했다.

‘아무래도 잊으신 듯하여 한 가지 조심스레 알려 드리자면, 제 성은 트리스탄입니다.’

그 말에 베르디 자작이 얼큰히 달아오른 얼굴로 큰 웃음을 터트렸다.

‘오, 물론이지요. 후작님! 제가 취하긴 했어도 후작님의 잘생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얼간이는 아닙니다!’

‘다행이군요. 모두가 벌써 저 아름다운 달빛에 취하신 건 아닌지 염려했습니다. 아무래도 제 도착이 워낙 늦었다 보니.’

‘확실히 후작께는 적절치 않은 화제였을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저희도 모두 놀라서 말입니다. 대공 전하의 존재만으로도 이미 신의 공평함을 의심할 지경인데, 그 옆에 비슷한 미인이 서니 눈이 다 멀 것 같더군요.’

베르디 자작이 손을 내저으며 능청을 떨었다. 이쯤 되니 앤서린도 궁금해졌다. 대체 대공이 어떤 여자를 데려왔기에 저리들 난리가 난 것인가.

앤서린도 대공의 부인이라는 여자에 대해 조사한 게 없는 건 아니었다. 아스티나 반 아탈렌타는 처녀 적 벨라체에서 두각을 드러내던 수재로, 학생들 사이에서도 대단한 미인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개중에는 검술반이 아닌데도 연무장에 꾸준히 출석하여 걸출한 무예를 다졌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낭설이겠지만.’

터무니없는 소리다. 앤서린은 딱 잘라 그것을 헛소문으로 치부했다. 벨라체의 편협한 사내들이 여자가 연무장을 사용하는 걸 허락했을 리 없다. 앤서린도 그래서 벨라체가 아닌 북부의 세브리노에서 학업을 이수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제가 후작님께 대공비 전하의 이야기를 꺼낸 건 다른 이유가 더 크답니다.’

베르디 자작이 그렇게 말하며 앤서린에게로 거리를 좁혔다. 그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제가 황궁에서 근무하며 이런저런 미술품을 많이 얻어 보지 않습니까. 대공비 전하께서 입장하시는 순간 저는 묘하게 옛 그림 중 하나가 떠오르더군요. 마티나 여제의 초상 말입니다. 색이 진한 적발이나, 당당한 표정 같은 게 꼭 닮았더란 말이죠. 아마 후작님께서도 그분을 보셨으면 마음에 들어 하셨을 겁니다.’

물론, 아탈렌타만 아니었다면요. 베르디 자작이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그 말은 저택으로 돌아와서까지 앤서린의 머릿속을 어질렀다. 그녀의 마음엔 대공비를 향한 순수한 궁금증이 반, 아탈렌타의 여자가 그 대단한 여제와 비교된 것에 대한 불쾌감이 딱 반 정도로 섞여 있었다. 안 그래도 생각이 복잡한데 처비까지 목소리를 보태니 자연스레 짜증이 일었다.

창밖을 내다보던 앤서린이 불쑥 마부를 향해 말했다.

“난 여기서 내려야겠군, 말을 멈춰라.”

“후작님?”

처비의 얼떨떨한 표정을 무시한 채 앤서린은 문을 열었다. 앤서린은 마차 밖으로 뛰어내리기 전, 손을 뻗어 처비의 어깨를 힘 있게 두드렸다.

“처비, 상사의 퇴근길엔 되도록 입을 다무는 습관을 들이도록. 알겠나?”

그러고는 멍청한 표정의 처비를 뒤로한 채 길로 내려섰다. 그녀는 손을 길게 뻗어 단번에 마차의 문을 닫았다. 문과 이음새가 부딪히며 쾅, 하고 시원한 소리를 냈다. 그것을 신호로 받아들인 듯 말이 곧장 다시 발을 굴렀다.

창 너머로 앤서린과 길거리를 번갈아 보던 처비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바깥에서 잠근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그가 애절하게 소리쳤다.

“후작님! 자택에서 보셔야 하는 서류가아!”

앤서린은 모자를 벗으며 마차의 뒤꽁무니를 향해 정중한 인사를 남겼다. 돌아서는 발걸음은 방금 선사한 골탕만큼이나 경쾌했다. 심술로 휘어졌던 입꼬리가 곧 제자리를 찾았다.

그녀는 바로 앞의 서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 그래도 찾던 물건이 있던 차에, 새로 나온 서적이라도 구경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시내에서 제법 큰 규모를 자랑하는 서점은 방문객의 수도 많았다. 앤서린은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매대를 구경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앤서린의 시선이 어느 한 지점에서 멈췄다. 앤서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여자는…….’

이상하게 낯이 익은 붉은 머리칼과 체구. 저번처럼 로브를 입고 있진 않았지만 익숙한 분위기였다. 역광으로 흐릿했던 얼굴을 빈 도화지에 표현하지는 못해도, 대조할 만한 얼굴을 옆에 두자 쉽게 기억과 겹쳐 그릴 수 있었다.

‘그녀다.’

예상보다 가깝게 이루어진 재회에 앤서린의 낯이 환히 밝아졌다.

* * *

아스티나는 아침부터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원인으로 꼽을 수 있는 것들은 다양했다. 어젯밤 취침이 늦어 늘 하던 새벽 수련을 빼먹었다든가, 아침부터 찾아온 칸나가 외출을 종용했다든가, 서점으로 향하던 길에 마차 바퀴가 고장 나 남은 거리를 직접 걸어야 했다든가.

‘그래도 그에게로 돌아가실 수는 없답니다, 부인.’

아니면 참으로 기껍지 않은 상대의 연심을 알아차렸다든가.

하루의 반 동안 이성을 잃는 대공의 병증이 이리도 반갑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짧은 유예였지만 그나마라도 얻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완전히 없었던 일인 척 잊을 수는 없어도, 마음의 정리를 마친다면 모르는 척 정도는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저택으로 돌아가는 건 여전히 달갑지 않게 여겨졌다. 아직 테리오드의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지난밤 무도회를 잘 마무리하고 저택으로 돌아온 게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테리오드는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다정히 그녀를 에스코트했고, 자신도 무심히 응대했으나 결코 이전 같지는 않았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가 금방이라도 사랑한다고 고백할 것만 같은 불안감에 시달렸다.

“아스티나.”

“…….”

“아스티나!”

아스티나의 눈이 굼뜨게 칸나에게로 굴렀다. 넋이 나간 동생을 보고 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아무래도 동생이 숙취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니 난 저쪽에서 혼자 구경하겠어.”

불만을 표하듯 어깨를 으쓱인 칸나가 결국 홀로 떠나갔다. 아스티나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역사학 서적을 분류해 둔 쪽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그리고 칸나가 오늘 구매해야 하는 참고 서적은 모두 그 외의 분야였다.

아스티나는 들고 있던 책을 성의 없이 내려놓았다. 두께만큼이나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아스티나는 매대 위로 손을 짚고는 고개를 숙였다.

‘착각일 수도, 속단일 수도 없지.’

구원자에게 가닿는 집착이 곧 성애를 뜻하는 건 아니다. 실제로 미숙한 테리오드가 스스로의 감정을 오해한 적도 있지 않았나. 아스티나는 줄곧 그리 생각하며 다가오는 테리오드를 회피해 왔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완전히 결이 달랐다. 당연히도, 은인이 다른 남자에게 고백을 받았다고 질투를 쏟아 낼 필요는 없다. 그녀는 그 선명한 감정을 두고 차마 억측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는 왜 하필 자신을 사랑하게 된 걸까. 혹 그가 정말 테오도르의 환생이라서? 그와 자신이 다음 생에도 이루어질 사이였기 때문에?

아스티나는 그 미련한 기대를 치워 내기 위해 애썼다. 바라서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녀는 의미 없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정말 테오도르의 환생이라 해도, 같은 기억을 갖고 있지 않은 남자에게서 옛 추억을 그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만일 그가 진짜 테오도르라면…….

‘테오도르와 같은 얼굴을 한 남자와 다시 사랑에 빠질 텐가? 어리석게도?’

아스티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기실 그건 그녀조차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테오도르를 증오하면서 사랑했듯, 그를 향한 그녀의 감정은 언제나 두서없었다. 아스티나는 자신이 품은 것이 기대인지 두려움인지 도통 분간해 낼 수 없었다.

답이 없는 일에 매달리는 건 오직 미련 때문이다. 그녀는 테리오드가 테오도르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이 부끄러웠다.

그런 헛된 희망과 기대 따위에.

구역질이 치솟았다. 아스티나는 참지 못하고 속을 게워 낼 뻔했다.

“괜찮으십니까?”

입을 틀어막은 그녀에게 누군가 염려의 말을 전해 왔다. 아스티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무심코 뒤로 물러서다 그만 매대를 발로 차, 주변에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아스티나의 격한 반응에 앤서린이 당황한 낯으로 말했다.

“제가 놀라게 해 드렸군요.”

“아니요, 그게…….”

더듬더듬 대답하던 아스티나가 겨우 침착을 되찾았다. 아스티나는 짧은 순간 자신에게 말을 건 상대의 직위를 인지했다. 아스티나가 가장 먼저 행한 건 낯에 서린 당황을 지워 내는 일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훈련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아스티나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하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이리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걸 보면 정신을 놓고 있긴 했던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정신이 팔려 있었나 봅니다.”

“몸이 안 좋으신 듯하여 여쭌 것인데…… 괜찮으십니까?”

“예, 염려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아스티나의 대답에 안심한 앤서린이 입가에 상냥한 미소를 떠올렸다.

“이렇게 또 뵙는군요.”

앤서린은 만면에 호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그런 그녀를 잠시 찬찬히 살폈다. 인사는 아무렇지 않은 척 받았으나 어떻게 자신을 알아봤는지 알 수 없었다. 아스티나가 의문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저인 줄 어떻게 알아보셨습니까? 분명 그때 얼굴을 보이진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에 올라타실 때 잠깐 모자가 벗겨지셨어서요. 사실 잘 보이진 않았지만―”

앤서린이 그렇게 말하며 아스티나의 손을 끌어갔다. 손등에 장난스럽게 입을 맞추고는 눈을 휘었다.

“이런 미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눈이라면 그 필요성이 대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스티나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앤서린을 응시했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참으로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는 인물이었다. 어느 귀공자마냥 달콤한 언행을 들으면 누구라도 얼굴을 붉힐 듯싶었다. 사교계에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소녀라면 더더욱 말이다.

아스티나는 내심 혀를 찼다.

‘아탈렌타는 버리게 될 성이거늘, 가문 간의 알력을 이유로 마음에 드는 상대를 박대해야 한다니.’

물론 그러한 사감과는 별개로 앤서린은 어디까지나 멀리해야 할 상대였다. 그러나 맺고 끊음에도 예의가 있어야 하는 법. 아스티나는 실성한 것처럼 낯을 굳히며 대뜸 절교를 선언할 생각은 없었다.

얼굴을 내보인 이상 아스티나가 택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지는 앤서린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얻어 두는 것이었다. 그리고 불편한 신분이 밝혀질 시기는 가급적 뒤로 미뤄지는 편이 좋았다. 뒤늦게 앤서린이 자신의 신분을 알아챈다고 해도, 아탈렌타령으로의 귀환이 머지않은 때라면 곤란함이 오래 지속되진 않을 것이다.

아스티나는 눈을 돌려 칸나의 위치를 살폈다. 계산을 할 요량인지 칸나는 카운터 앞에 서 있었다. 트리스탄 후작을 상대할 잠깐의 시간은 벌 수 있을 듯했다.

앤서린이 물었다.

“책을 보러 나오신 겁니까?”

“예, 후작님께서도요?”

“저는 충동적으로 들른 것인데…… 그것이 몹시 대단한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리 대답한 앤서린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녀의 시선이 아스티나의 뒤편으로 가닿았다. 앤서린은 손을 뻗어 그 서적들을 일렬로 길게 쓸었다.

“역사서에 관심이 있으신가 봅니다.”

“마땅히 교양으로 삼을 만한 분야니까요.”

아스티나의 겸양 섞인 대답에 앤서린은 지나치게 반색하는 기색을 보였다.

“역시, 허영이 아닌 마음의 양식을 채울 줄 아시는 분이군요.”

“……글쎄요, 그 말씀이 민망하게도 오늘은 언니의 교재를 구매하기 위해 나온 것뿐이라서요. 벨라체의 악명 높은 시험 기간이 머지않았거든요.”

“명문 벨라체라, 혹 언니분과 같이 그곳에 다니고 계십니까?”

“아니요, 재학 중인 건 언니뿐입니다.”

잠시 고민하던 아스티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만 말하자면 아스티나는 공식적으로 아직 벨라체 아카데미의 학생이 맞았다. 휴학 처리를 해 두었을 뿐, 완전히 학업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아스티나는 단 한 번도 아카데미에 돌아갈 미래를 그려 본 적이 없었다.

벨라체 생활이 나빴던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대단한 추억이 있지도 않았다.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것들이 배움이 되지 않음에야, 그녀에게 기숙사 생활은 십 대를 보내는 지루한 송사에 불과했다. 아스티나는 합법적으로 벨라체를 떠날 기회를 걷어찰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아스티나의 말에 앤서린은 몹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스티나가 벨라체에 다니지 못한 게 타의 때문이라 판단한 듯했다. 실제로 귀족이라 해서 모두가 아카데미에 진학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학비를 감당할 수 없는 가문들은 장손, 혹은 특출난 아이만을 골라 보내기도 했다.

앤서린이 진심 어린 어조로 말했다.

“저런, 만일 그대도 벨라체 재학생이셨다면 저희 가문에서 지원을 해 드릴 수도 있었을 텐데요.”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학업에 그리 대단한 뜻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곳에 다니셨다면 분명 수재로 유명세를 타셨을 겁니다.”

아스티나는 다소 곤혹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어떤 말을 하든 자신에 대한 찬양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아스티나는 아카데미 이야기를 잇는 대신 앤서린에게 질문을 돌려주기로 했다.

“후작님께서는 어떤 분야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저는 병법이 적힌 서적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 물론 그대처럼 역사에도 관심이 있지요. 대륙을 가로지르는 대단한 전쟁이 벌어졌던 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이니 말입니다.”

앤서린이 반갑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고는 눈을 찡긋이며 가볍게 덧붙였다.

“특히 마티나 여제는 저를 지루한 전술서의 세계로 이끈 장본인이지요.”

갑자기 튀어나온 제 이름에 아스티나는 그만 헛기침을 뱉어 낼 뻔했다. 아스티나가 겨우 목을 가다듬고는 대꾸했다.

“대륙 전쟁에 관심이 있으신가 보군요.”

“예, 그 시대를 공부하다 보면 참 재밌는 문화들을 많이 알게 되지요. 아시겠지만, 그땐 지금처럼 큰 제국이 아니라 작은 나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식이었으니 말입니다. 요즈음의 얼간이들은 리체 지방의 거대한 성이 본래 블란체의 도성이었던 것도 모르는 듯하지만요.”

농담치고는 다소 냉소적인 투였다. 아스티나가 판단하기로 앤서린은 스스로에게 자부심이 넘치는 인물인 듯했다. 그에 대한 반동으로 타인에게도 대단히 엄격해졌을까.

아스티나에게 돌아온 건 방금과 비교되는 상냥한 미소였다. 앤서린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참, 블란체 성에서 퀠른어로 쓰인 문서가 발견되었다는 소식 들으셨습니까?”

“블란체에서요?”

“예, 분명 모양은 퀠른의 것인데 도통 문맥이 이어지지 않아 해독이 어렵다고 하더군요.”

의외의 일이었다. 당연히도 블란체에서 사용하던 언어는 퀠른어가 아니었으니까. 외교 문서라기엔 두 나라 간의 눈에 띄는 접점이 없었다. 아스티나가 궁금증을 보이자 앤서린은 괴상한 조합을 읊어 냈다.

“독수리, 날개, 소젖, 울고 꽃 뽑기.”

내용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목소리였다. 앤서린이 재기 넘치는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런 식의 말도 안 되는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하더군요. 연구자 친구의 앓는 소리를 들어 주느라 저도 아주 정신이 없었습니다.”

앤서린의 말에 아스티나는 다른 가능성을 제기했다.

“퀠른어가 아닐 수도 있지요. 맥을 같이 하는 다른 글자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그 물건이 발견된 공간이 블란체 성의 비밀 집무실이라고 해서요. 다른 사람이 볼 수 없게 암호로 적었다는 설이 더 유력합니다.”

블란체 성내의 비밀 장소라니. 아스티나는 그 물건이 테오도르의 것일 수도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테오도르가 제게 보여 주지 않은 공간이 있다는 건 의아한 일이었으나, 마지막에 당했던 기만을 생각하면 수긍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마티나는 분명 테오도르를 전부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블란체의 왕좌를 거쳐 간 고귀한 엉덩이의 숫자가 결코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스티나가 기대 없이 물었다.

“혹 사용한 자의 이름이 적혀 있지는 않다던가요?”

“흠, 차르라고 적혀 있었다고 들은 것 같군요.”

아스티나의 표정이 굳어 들었다. 아스티나는 무심코 앤서린에게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나 아스티나가 다른 질문을 내뱉기도 전, 칸나가 지척에 다가왔다. 아스티나의 앞에 선 낯선 이를 발견한 칸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동생이 언제 또 저 모르게 이런 미남을 사귀었는지 궁금했던 탓이다.

앤서린과 아스티나를 번갈아 본 칸나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이분은 누구셔……?”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앤서린 트리스탄이라고 합니다. 동생분께 큰 도움을 받았었지요.”

앤서린이 격식을 갖춰 인사했다. 이번에도 앤서린은 자연스럽게 칸나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러나 칸나는 발그레한 뺨을 보이는 대신 빳빳이 몸을 굳혔다. 당연히도, 칸나는 트리스탄과 아탈렌타의 곤란한 관계를 알고 있었다.

도대체 동생이 무슨 짓을 벌였기에 트리스탄에게 감사 인사를 들은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칸나의 혼란스러운 눈이 아스티나를 향해 굴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일단 나가서 얘기해.’

아스티나는 설명을 유보했다. 다행히도 평균 이상으로 사이가 좋았던 자매는 눈치껏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고개를 든 앤서린을 향해 칸나가 어색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땅찮은 반응에 앤서린은 내심 당황했다. 언제나 영애들에게 인기 있던 자신인데 티나라는 여자와 그녀의 자매는 반응이 조금 남달랐다. 상대가 누구든 이 나라 사람이라면 자신의 외모나 재력, 혹은 신분 중 어느 한구석에라도 매료되기 마련이었다. 한데 정체를 밝혀도 이들은 그다지 반가운 기색이 없다.

“하하……. 만나 뵙게 되어서 기쁩니다, 후작님. 한데 저희가 일정이 조금 바빠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아서요, 무척 아쉽네요.”

만나자마자 가 봐야겠다니, 앤서린은 칸나의 말에 몹시 당황했다. 우연은 우연일 뿐 티나라는 여자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아직 보답도 하지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보낼 수는 없다. 앤서린이 그들을 붙잡으려 입을 열었을 때였다. 그보다 먼저 더 크게 소리친 사람이 있었다.

“칸나 레테 님! 배송지 확인 부탁드리겠습니다. 적어 주신 것처럼 레테 백작저가 아닌 수도의 아탈렌타 저택으로 보내 드리면 될까요?”

점원의 말에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스티나와 칸나의 눈이 마주쳤다가, 칸나와 앤서린의 눈이 마주쳤다가, 종래에는 아스티나와 앤서린의 눈이 마주쳤다.

칸나는 어색한 얼굴로 황급히 점원에게 돌아갔다. 앤서린은 문득 고개를 돌려 아스티나의 머리칼을 눈에 담았다. 그녀는 어렵지 않게 상기해 낼 수 있었다. 유독 눈에 띄던 대공비의 붉은 뒤통수를.

“티나……, 아스티나 레테?”

아스티나의 결혼 전 이름을 읊은 앤서린의 입술이 황당하게 벌어졌다.

그제야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의심도 하지 않았을 적에는 그냥 넘겼던 것들이 이제는 큰 의미로 다가왔다. 당연히 저 짙은 붉은 머리칼이 흔할 리는 없는데, 설마 아탈렌타의 대공비라고는 차마 상상도 못 하여…….

앤서린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아스티나를 응시했다. 아스티나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예, 처녀 적 성이 그러했습니다.”

“그럼 그대가…… 그……?”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테리오드 대공과 혼인한 아스티나 반 아탈렌타입니다.”

아스티나가 담담히 자신을 소개했다. 우아하게 풀네임을 읊은 아스티나가 이어 미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제 신분을 밝히지 못했던 부득이한 사정은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이 될 것 같습니다. 사실, 후작님의 자택에 초대받았을 때는 도무지 성을 밝힐 용기가 생기지 않더군요.”

앤서린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도 마음에 들어 했던 상대가 아탈렌타의 대공비였다니. 도무지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머리로는 인지했으나 아스티나의 이름 뒤에 붙은 성을 받아들이기가 너무도 힘겨웠다.

빠른 발각에 당황한 건 아스티나도 마찬가지였으나, 그녀로서는 이미 염두에 두고 있던 일이었다. 때문에 침착함을 되찾는 속도는 아스티나 쪽이 더 빨랐다.

“예의가 아닐지는 모르겠으나, 그때 말씀하셨던 보답을 이 자리에서 부탁드려도 될는지요?”

앤서린에게 보답을 요구하지 않은 건 필요한 게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만약 정체를 들키게 된다면 더 유용하게 쓸 수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얼떨떨한 낯의 앤서린을 향해 아스티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후작님을 속인 제 무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앤서린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상대의 품위 있는 대응이 둔해진 머리를 일깨웠던 탓이다.

저리도 교양 있게 사람을 대하는 여자는 분명 자신의 은인이었던 그녀가 맞다. 놀란 건 분명 사실이었지만, 아스티나의 신분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호감마저 앗아 간 건 아니었다. 앤서린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대공비 전하께서도 당황하셨겠지요. 도움을 준 입장임에도 마음이 불편하셨을 줄로 압니다.”

괜찮다고 답은 했으나 정말로 괜찮은 건 아니다. 아스티나를 응시하는 앤서린의 눈에 진득한 미련이 남았다.

‘아탈렌타의 대공비라…….’

아탈렌타라는 상종 못 할 가문 내에 썩히기엔 너무도 아까운 여자가 아닌가. 못내 희망을 버리지 못한 앤서린이 충동적으로 아스티나를 불렀다.

“대공비 전하.”

“네. 말씀하세요.”

“대공과 이혼하십시오.”

앤서린이 결연히 말했다.

“제가 행복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아스티나는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곧 입가에서 부스스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앤서린의 심각한 표정에 내심 불안했던 것도 사실인데, 그제야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아스티나가 눈 밑을 문지르며 말했다.

“재밌는 농이군요.”

제 실수를 알아챈 앤서린이 황급히 방금의 발언을 주워 담았다.

“실언하였습니다.”

“덕분에 즐거웠어요. 다음에 뵐 때는…… 지금처럼 유쾌하시진 않으시겠지만, 적어도 인사 정도는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스티나가 아쉽다는 듯 덧붙였다. 앤서린은 좀체 아스티나에게 알겠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아스티나와 ‘적어도 인사 정도는 나누는 사이’가 아닌, 인사는 당연하거니와 함께 이야기도 나누는 사이가 되고 싶었으니까.

앤서린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대공에 대한 맹렬한 적개심을 느꼈다. 분명 이성을 잃고 괴물이 되었다 하였는데 무슨 염치로 여자까지 들여 결혼을 하였는가. 앤서린이 답답하단 듯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긁었다.

‘남편만 아니면, 남편만 바꾸면…….’

문득 앤서린의 시선이 근처의 매대에 가 꽂혔다. 눈에 익은 제목을 발견한 앤서린이 불쑥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앤서린은 책을 하나 뽑아 들고는 다시 아스티나의 앞으로 다가왔다. 앤서린이 조급하게 느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대공비 전하, 이렇게 만난 것도 영광인데 선물을 하나 드리지요.”

“이게…….”

“요새 유행하는 도서입니다.”

앤서린은 아스티나에게 자신이 골라 온 책을 안겨 주었다. 엉겁결에 받아 든 아스티나가 제목을 흘긋 살펴보았다.

<남편 교체>

“……이게 무슨 내용입니까?”

“여주인공이 얼굴 외엔 잘난 게 없는 전남편을 갈아 치우고 새 남자를 찾는 내용입니다.”

아스티나는 애매한 표정으로 책을 끌어안았다. 부담스러운 시선에 자연히 두 손이 모아졌다. 그 위로 제 손을 겹치며, 앤서린이 결연히 당부했다.

“꼭 읽어 보십시오, 부디.”

* * *

“언니분과의 외출은 즐거우셨습니까?”

해가 뉘엿하게 저물어 가는 오후였다.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아스티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테리오드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내심 당황했으나, 들키지 않기 위해 곧 시선을 비스듬하게 내렸다. 그녀가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대공께선 편히 쉬셨습니까?”

“아니요, 깨어났더니 부인이 자리를 비우셨기에 몹시 슬피 울었습니다.”

테리오드가 그리 말하며 아름답게 웃었다.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미색이었다. 그의 마음을 알아채고 나자 더욱 의중이 선명히 읽혔다. 그야말로 속이 뻔히 보이는 수작이다. 못 알아채는 사람이 바보 같아 보일 지경이었다.

아스티나는 자신의 회피가 과연 효과나 있을는지 의문이었다. 이리 눈치 없는 척을 하다가 테리오드에게 얼간이 취급이라도 받는 건 아닌가.

그럼에도 아스티나는 무표정을 가장했다. 그녀는 테리오드의 마음을 모르는 척하기로 마음을 굳힌 참이었다. 테리오드를 받아들이는 건 안 될 말이었고, 그렇다고 거절을 돌려주어 껄끄러운 사이로 남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어찌 보면 비겁하게도 도망을 택한 셈이었다. 짝사랑 상대에게 매 순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저 남자와는 다르게.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스티나는 평소처럼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내렸다. 검토하던 서류를 내려놓고는 안경을 벗었다. 낯선 물건에 테리오드가 의아함을 표했다.

“웬 안경입니까? 이전엔 쓰시는 걸 못 봤던 것 같은데.”

“아카데미에서 쓰던 겁니다. 기숙사에 두고 간 걸 언니가 가져다주었네요.”

“눈이 안 좋으십니까?”

“아뇨, 그냥…… 습관입니다.”

아스티나가 안경다리를 접으며 대답했다. 눈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지금 쓰고 있는 것은 굴절률이 미미해 거의 장신구에 가까웠다. 시력 교정이 필요했던 건 이전 생의 일이다.

마티나의 나이로 서른 즈음 맞추었던 안경은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함께했다. 신식으로 변한 물건에서 앞선 골동품을 추억할 수는 없었지만, 그럭저럭 집중을 도울 정도는 되었다. 옛 기억들은 이렇게 사소하게 남아 그녀를 구속했다.

테리오드가 미소 지으며 칭찬을 남겼다.

“잘 어울리십니다.”

“미용을 목적으로 쓰는 것은 아닙니다만.”

“저도 예쁘다고 하진 않았는데요.”

테리오드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아스티나가 헛웃음을 지었다. 농인 걸 알아 기분이 나쁘진 않았지만, 아스티나는 불만을 내보이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굳이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분 상하셨습니까?”

그리 물으며 테리오드가 책상 위로 걸터앉았다. 창가의 커튼은 열어젖힌 상태였고, 햇빛으로 얼룩진 남자는 마치 소년 같아 보였다. 허벅지 사이에 손을 모은 그가 아스티나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아스티나는 의자에 완전히 등을 기대었다. 손깍지를 낀 채 나른히 그를 응시했다.

“그럴 이유가 있나요. 대공께서 몸소 칭찬해 주신 것을.”

“흠. 이왕 밉보인 것, 한마디만 더 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사실은 아주 아름다우십니다.”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말을 맺은 그가 아스티나에게서 안경을 앗아 갔다. 행동이 몹시 자연스럽게 이어져 아스티나는 그를 말리지 못했다. 테리오드는 안경다리를 펴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 렌즈를 들여다보았다. 아스티나는 어깨만 으쓱였다.

“아마 맨눈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럼 제가 한번 써 봐도 되겠습니까?”

의외의 질문이다. 그리 중요한 물건도 아니었으므로 아스티나는 선선히 허락했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그것을 써 보았다.

동그란 안경은 그에게 제법 잘 어울렸다. 원체 아름다운 남자지만 특정한 소품이 더해지니 더욱 고상한 인상을 주었다.

지켜보던 아스티나가 제 턱을 쓰다듬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대공께서 외모를 칭찬하실 때면…… 가끔 그 진의를 의심하게 됩니다.”

“그것참 억울한 일이군요, 언제나 진심인데 말입니다.”

아까에 이어 제법 간질거리는 칭찬이다. 아스티나가 대답하지 않자 테리오드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이윽고 그가 안경을 벗었다. 튀어나온 대를 만지작거리며,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손을 불안하게 떨었다.

테리오드가 움직임을 멈추고는 불쑥 말했다.

“지난밤엔 제가 괜한 화를 내었지요.”

그는 여전히 투명한 렌즈 위로 시선을 고정한 채였으므로, 아스티나는 의외라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사과할 일이 아닌데 왜 고해라도 하듯 굴고 있을까.

테리오드는 감정의 동요를 드러낸 일을 후회하고 있는 듯했다. 확실히 아스티나가 테리오드의 질투를 감당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들 사이에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닌 계약이었으니까. 합의되지 않은 연정은 테리오드를 죄인으로 만들었다.

아스티나는 그가 비 맞은 개처럼 굴고 있는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그녀가 무심히 말을 돌렸다.

“기분 상하실 만한 상황이었으니까요. 벤자민은 대공을 무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화는 부인이 아니라 그 황자에게만 향해야 했지요. 제가 부인께 무례했습니다.”

“대공께서 왜 그러셨는지 압니다.”

테리오드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어깨가 긴장으로 빳빳이 굳어졌다. 제 속내를 내보인 걸까 염려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저런 표정을 하면서 그는 정말 들키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스티나가 책상으로 눈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걱정 마세요, 그리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전하의 병색이 해결되기 전까진 아탈렌타를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이전이라면 감읍했을 법한 말이었으나 테리오드는 답이 없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그가 스스로에게 되새기듯 중얼거렸다.

“그래요. 저주, 저주라.”

테리오드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제 눈가를 문질렀다. 그러고는 기대고 있던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제자리를 돌았다가, 앞으로 두어 발자국 갔다가, 이윽고 멈춰서는 걸음에선 초조함이 묻어났다.

아스티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도 질투도 모두가 처음인 사내다. 그의 서투른 몸짓은 애처로움까지 선사했다.

아스티나는 그가 진정하길 기다리며 서류에 다시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저리 발소리가 요란함에야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한 문장을 정확히 다섯 번 다시 읽었을 때쯤 테리오드가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던 테리오드의 시선이, 문득 책상 위 어딘가에 꽂혔다. 테리오드의 몸이 그대로 굳어졌다. 뻐끔거리던 입술에서 아연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저게…… 무엇입니까?”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아스티나는 의아한 마음으로 테리오드가 보고 있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어 아스티나의 눈이 미미하게 커졌다.

“아.”

앤서린 후작이 주었던 책이었다. 선물 받은 것을 함부로 두기도 뭣해 집무실 책상에 올려놓았는데, 마침 그게 테리오드의 눈에 띈 모양이었다. 표지를 크게 장식한 제목은 멀리서도 아주 선명히 보였다.

<남편 교체>

기혼자가 소유하고 있기엔 그 저의가 다소 의심되는 도서였다. 아스티나가 곤란한 얼굴로 해명했다.

“제가 산 게 아니라 선물 받은 것입니다. 요즘 무척 인기 있다고 하더군요.”

“직접 구매하신 게 아니라요?”

“예, 이 책을 좋아하는 지인이 읽어 보라며 제게도 한 권 주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준 것이라는 말에 테리오드는 방금보다는 안심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저자를 향한 그의 맹렬한 적개심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책을 집어 든 테리오드가 거칠게 책장을 넘겼다. 글자 따윈 눈에 담기지도 않았을 게 뻔한데 그는 탐독이라도 마친 양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테리오드는 가차 없이 앤서린의 추천 도서를 평가 절하했다.

“부인께는 수준이 맞지 않는 책인 듯싶습니다. 저자의 사상이 의심될 지경이군요.”

“……한 문단도 제대로 읽지 않으신 것 같던데요.”

“읽지 않아도 뻔하지요.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통속 소설이 다 있단 말입니까?”

테리오드가 책을 바닥에 패대기치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온화한 귀공자였던 그는 곧 분노를 사그라트렸다. 책상 근처의 쓰레기통을 찾은 테리오드가 그 안에 싸늘히 책을 내버렸다. 빈 철제 통이 울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테리오드는 숨을 진정시키고는 아스티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스티나는 애매한 표정으로 관자놀이만 문지르고 있었다.

아무 말이 없는 그녀를 보고 테리오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신이 방금 아내가 받은 선물을 내버리는, 말도 안 되는 중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혹시 그녀는 이미 저 책을 읽고 난 후가 아니었을까. 만일 아스티나가 독서를 썩 만족스럽게 마친 참이라면, 방금의 자신은 그녀의 취향까지 비난한 셈이었다.

테리오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이런 걸 좋아하십니까?”

“말씀드렸듯 선물 받은 물건이라, 아직 읽어 보지 않아서 모릅니다.”

아스티나가 피곤한 목소리로 답했다. 테리오드가 몸을 움찔했다. 그가 아스티나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다시 주울까요?”

“물론, 선물 받은 물건은 소중히 보관해야겠지요?”

아스티나의 말에 테리오드가 조용히 책을 주워 들었다. 몹시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어쨌든 그는 아스티나에게 그것을 내주었다.

책을 받아 든 아스티나가 새삼스러운 감흥으로 표지를 살폈다. 그녀는 겉에 묻은 먼지를 가볍게 털어 내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테리오드는 잘못을 저지른 아이라도 되는 것마냥 머뭇거렸다. 그가 돌아선 아스티나를 향해 조금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 황자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 하셨으니, 저는 그리 믿겠습니다.”

“물론입니다. 벤자민은 그저 친구인 것을요.”

“하지만 수도에 두고 온 연인이 있다고 하셨었으니까요.”

집요한 의문에 아스티나는 입을 다물었다. 등 뒤로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테리오드가 망설임 끝에 물었다.

“황자가 아니라면 연인이라던 그 남자는 누구인지…… 혹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의미가 없습니다.”

아스티나가 딱 잘라 대답했다. 계약 결혼의 상대는 알 필요가 없는 이름이라는 뜻인가. 아스티나의 대답에 테리오드는 가슴 언저리가 따끔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테리오드를 당혹으로 밀어 넣었다.

“이미 죽은 사람이니까요.”

집무실 한쪽 책장에 책을 꽂으며, 아스티나는 잠시 열 지어 보관된 도서들을 눈에 담았다. 책장에는 지나간 것들의 이름이 빼곡히 늘어져 있었다. 아스티나는 개중에서 마티나 때에 즐겨 읽었던 몇 서적들도 발견해 냈다. 그때만 해도 신간이었던 것이 지금은 몹시 고리타분한 고전이 되어 있었지만.

이미 죽은 사람들의 언어는 아스티나에게 묘한 기분을 선사했다. 그녀는 조용히 되짚었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 마티나와 아스티나, 그리고 테오도르와……

“대공께선 어떤 책을 좋아하십니까?”

아스티나가 뒤에 선 대공을 향해 물었다. 아스티나의 목소리에 테리오드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더없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한 후였음에도 그의 부인은 그리 동요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테리오드는 가까스로 평소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

“책이요?”

“예, 소설류를 좋아하십니까 아니면 잡학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글쎄요…….”

테리오드가 애매하게 답하며 아스티나의 옆으로 와 섰다. 아스티나는 고개를 돌려 대공의 옆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녀가 홀린 것처럼 다시 입을 열었다.

“……음식은, 어떤 것을 좋아하십니까?”

“왜 갑자기 그런 게 궁금해지셨을까요.”

뜬금없는 질문에 테리오드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가 대답하기도 전, 아스티나는 곧바로 다음 질문을 읊었다.

“닭과 양, 소와 돼지 중 어느 것을 선호하시는지 말씀해 주세요. 디저트는 어떤 것이 좋으십니까? 달게 졸여 식힌 과일을 올린 푸딩은 입맛에 맞으신지요?”

“오늘따라 궁금증이 많으시군요.”

“꽃의 경우는 어떠십니까. 날씨와 계절은 어떤 것을 선호하시는지도 궁금하군요. 그도 아니면…….”

서둘러 질문을 쏟아 내는 아스티나를 보고 테리오드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아스티나를 진정시키듯 그가 손을 맞잡아 왔다. 손을 죄어 오는 다정한 악력에 아스티나가 흠칫했다. 테리오드가 아스티나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부인, 생각할 시간을 좀 주세요.”

그건 일부러였다. 대답할 여유도 주지 않고 선택지를 쏟아 낸 것은.

질문은 던졌어도 정작 테리오드가 하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정해진 답을 내놓지 않으면 실망할 것 같았으니까.

아스티나는 그만 숨을 들이켰다. 소름이 끼쳤다.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서 누군가의 흔적을 발견하려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른 척 덮기로 했으면서 또 무슨 기대를 하였던가.

테리오드를 받아 주지 않기로 한 건 아스티나가 이기적이라서가 아니었다. 기실 이 사안에 있어서 그녀는 그 누구보다 이타적으로 굴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테리오드를 볼 때마다 테오도르와의 기억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건 누구에게도 저질러서는 안 될 잔인한 짓이었다.

‘같은 사람이어도 안 되고,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더더욱 아니 되지.’

아스티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테리오드와의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곧 테오도르를 잊지 못했다는 반증이 되었다. 과거의 얼굴이 저리도 선명하게 자신을 보고 있음에야.

사랑하는 여자의 비열함을 모르는 남자는 그저 다정히 웃었다. 테리오드는 아내가 제게 관심을 보인 것이 몹시 달가운 눈치였다. 그가 상냥한 음성으로 말했다.

“전 부인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가 더 궁금한 것을요.”

아스티나는 입을 다물었다. 테리오드와 마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테리오드가 이어 사심 어린 질문을 던졌다.

“부인께서는 어떤 남자가 취향이십니까? 코가 높다거나, 어깨가 넓다든가요.”

자신의 취향을 그대로 옮긴 것이 바로 그라는 사실을, 아스티나는 당연히도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딱히 취향이랄 것은 없습니다.”

그쯤 되면 물러갈 법도 한데 테리오드는 만족하지 못한 눈치였다. 부부는 닮기 마련일까, 테리오드는 방금의 아스티나마냥 무던히도 끈질기게 캐물어 왔다.

“놀리지 않을 테니 솔직하게 잘생긴 남자가 좋다고 답하셔도 좋습니다.”

“정말 이상형이 없습니다. 그게 뭐라고 숨기겠습니까.”

“흠. 얼굴을 신경 쓰지 않으신다면, 혹 어떤 머리 색을 좋아하십니까?”

“저는 흑발을…….”

무심코 대답하던 아스티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실수였다.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스티나는 답지 않게 반복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잊으세요.”

아스티나는 아직까지 맞잡고 있던 테리오드의 손을 다소 거칠게 떨쳐 냈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몹시 성의 없는 변명을 던지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복도 너머로 빠르게 멀어지는 발소리가 울렸다. 문은 채 닫지도 않은 채였다. 무슨 일이기에 저리도 황급히 떠나는가.

홀로 남은 테리오드는 그녀가 닿았던 손을 잠시 멀뚱히 들여다보았다. 그가 아연히 중얼거렸다.

“진짜 궁금한 것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이를테면 그녀의 남편은 그럭저럭 취향에 맞는 얼굴이었는지 같은.

테리오드의 입술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집무실로 찾아오기 전만 해도 몹시 가슴을 졸이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마치고 나니 우습게도 기분이 나아졌다. 벤자민이라는 황자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확답을 듣고 마음이 놓인 탓이었다.

‘게다가 그 옛 연인은 이미 볼 수 없는 사람이라니.’

테리오드가 멈칫했다. 그는 스스로가 그녀의 연인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저열한 본심은 테리오드를 몹시 당혹스럽게 했다. 분명 연심이란 건 세상이 더없이 아름답게 보이도록 함이 옳은데, 이 사랑은 그를 자꾸만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초면인 사람에게 욕설을 내뱉은 것도 테리오드에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테리오드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죽음은 분명 애도를 표할 만한 일이었으나, 덕분에 그가 기회를 얻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분명, 자신이 그 남자였다면 그녀가 새 행복을 찾기를 바랐으리라. 문제는 테리오드가 아직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지만.

테리오드는 책상으로 돌아가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에 걸터앉았다. 상 위를 가볍게 쓸고는 그 위에 놓여 있던 금속판에 얼굴을 비춰 보았다. 잘생긴 낯이 제법 선명하게 들여다보였다. 테리오드는 제 얼굴 곳곳을 자세히 뜯어 살폈다.

‘이만하면 꽤 괜찮게 생기지 않았나.’

부인의 심미안에는 이 정도도 모자란 걸까. 테리오드가 진지한 고민을 하는데 문가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일었다.

“……대공 전하?”

올리버의 황당한 음성이 울렸다. 대공 부부가 둘 다 집무실에 있다 하여 차를 들고 온 참이었다. 문이 열려 있기에 그대로 트레이를 밀고 들어온 것인데, 자신이 대체 무엇을 본 것인가.

테리오드는 헛기침을 하며 금속판을 내려놓았다. 금속이 나무 상판 위로 떨어지며 둔탁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없던 일인 척 넘어가기엔 그 소음이 너무도 컸다.

주인과 사용인 사이의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테리오드는 모른 척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해괴망측한 걸 봤다는 듯한 올리버의 표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결국 먼저 적막을 깬 것은 테리오드였다.

이왕 들킨 것, 그는 참지 못하고 그만 이렇게 묻고 말았다.

“……내 머리카락 말일세, 검은색으로 물들여 보면 어떨 것 같나?”

* * *

연회의 마지막 날은 첫날만큼이나 화려했다. 일주일간 끊이지 않고 이어졌던 무도회에 대공 부부는 좀처럼 걸음하지 않았다. 개회식에서 선보였던 완벽한 모습에 대한 소문이 알음알음 번지던 차였다. 마지막 날이 돼서야 다시 비친 얼굴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쏠렸다.

이전과 달리 대공 부부 주변으로 모여든 인파는 대단했다. 쉽게 만날 수 없는 상대라는 희귀성을 강조한 덕분으로, 모여든 객은 자연히 애가 단 기색을 보였다.

계산된 바에 아스티나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장식품으로 한껏 무장하고 회장을 찾은 대공 부부는 그야말로 훌륭한 응대를 선보였다. 오늘 이후로 괴물 테리오드라는 굴욕적인 명칭은 표면상 흔적도 남지 않게 되리라.

아스티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교계 진입이라는 과제가 퍽 달가웠다. 오늘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통에 테리오드도 그녀에게 그럴듯한 작업을 걸지 못했다. 이렇다 할 진척이 없음에 아스티나는 안심했다. 그녀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테리오드가 제 본심을 꺼내 들지 못하도록 종용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떠나야겠지.’

저주를 풀게 되면 대공저를 떠나겠다는 건 대공과도 이미 약조가 된 바였다. 아스티나는 잊고 있던 계획에 살을 붙였다. 파혼은 귀족 사회에 있어 대단한 흠이었으므로 적당한 재산을 챙겨 먼 지방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테리오드는 실연의 상처를 얻겠지만, 애석하게도 아스티나가 그의 마음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그 정도의 사이였으니.’

테리오드가 차라리 자신을 싫어했다면 상황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아스티나에게 품은 건 연심이었다. 아스티나가 견딜 수 없는 단 한 가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테오도르의 얼굴을 한 남자가 그녀에게 사랑을 말하는 일.

아스티나는 자신과 테리오드가 이루어져서는 안 될 사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람을 망가뜨리는 건 상한 음식이나 물리적인 상처 같은 외부적인 것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때론 건강하지 않은 관계도 사람을 병들게 만들곤 한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대체품으로 여겨지는 일은 그 얼마나 비참한가. 아스티나는 테리오드를 볼 때 도무지 테오도르를 지워 낼 자신이 없었다. 지난번 집무실에서 있었던 일로 그 사실을 충분히 체감했다.

아스티나가 테리오드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배려가 바로 이별이었다. 그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녀는 아탈렌타를 떠나야 했다.

이성적인 결론을 내리고 나자 한결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스티나의 입가에 피어난 미소가 더욱 자연스러운 느낌을 띠었다. 인사를 나눌 인물들은 처음과 비교해 많이 줄어든 상태였으나, 그럼에도 참으로 적절한 시점이었다. 기나긴 행렬 끝에서 마주한 건 이 제국에서 황제 다음으로 고귀한 자였으니까.

“대공의 얼굴을 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낮은 음성이 진중하기보다는 비정하게 느껴지는 사내였다. 건네 온 말은 퍽 장난기 있었으나 그 속에 담긴 뼈는 알아차리지 못하기가 더 어려웠다. 대공이 어째서 그간 얼굴을 비치지 못했는지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를 띤 테리오드가 짧게 묵례했다.

“제국의 광영을 뵙습니다. 황자 전하, 황녀 전하.”

프리모의 옆에는 그의 누이인 이시스 황녀도 함께였다. 이시스는 짧은 인사를 마치고는 곧장 프리모의 뒤로 물러섰다. 그의 수족이라도 되는 듯한 행동이었다. 프리모는 당연하다는 듯 누이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아스티나는 별다른 내색 없이 그들에게 테리오드와 같은 인사를 건넸다. 프리모의 시선이 자연히 새로운 얼굴에게로 향했다.

“공의 그 유명한 아내를 이제야 만나 보는군. 결혼식에 초대받았으면 더욱 좋았을 텐데 말이야.”

아스티나가 프리모 황자에게 받은 첫인상은 당연하게도 오만함이었다. 아스티나는 그의 무례가 무지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는 이 자리에서 누가 우위에 있는지를 당당히 공표하려 들고 있었다. 테리오드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먼저 앞으로 나선 아스티나가 무심히 대답했다.

“단둘이 함께하는 신혼이 퍽 달콤했더랬지요. 당분간은 수도에 머물 테니 또 찾아뵐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래, 친애하는 대공의 아내라면 나와도 가족과 같은 사이가 아니겠는가.”

프리모가 테리오드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는 테리오드의 어깨를 묵직하게 두드리며 친근함을 표했다.

“이런 미인을 부인으로 맞다니 자네도 참 대단하군. 사실 그대는 언제나 운이 좋았지. 이전에도 나와 한 이런저런 내기에서 곧잘 이기지 않았는가.”

“다 전하께서 봐주셨던 덕분입니다.”

“아니야, 아니야……. 그대의 운은 출생부터가 증명하고 있지. 아탈렌타령에 포함된 그 많은 광산과 자원의 존재를 알았더라면 마티나 여제도 그걸 쉬이 내리진 않았을 거야. 그러니 초대 대공도 퍽 운이 좋았던 셈이지, 아니 그런가?”

프리모의 목소리에선 아쉬운 기색이 묻어났다. 프리모는 이전부터 아탈렌타령의 자원에 눈독을 들이곤 했다. 힘을 보태라며 테리오드를 이런저런 방식으로 회유했던 적도 있었다.

테리오드가 그의 마수를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제국법에 ‘공국은 황가의 후계 문제에 간섭할 수 없다.’는 짧은 문항이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공국이 지나치게 득세할 것을 염려했던 엘시어 황제는 아탈렌타가가 황위 다툼에 끼어드는 일을 금했다. 대공은 공식적으로 황태자가 되지 못한 황손에게 세를 보탤 수 없도록 제한되어 있었다.

당연히도 아탈렌타의 지난 가주들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이를 가볍게 무시하곤 했다. 문서는 문서일 뿐이라 공표 없이도 세력을 드러낼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테리오드는 그 조항을 방패막이로 삼은 유일한 자였다.

프리모는 권위적이었고 신하의 충성을 과하게 증명받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사교계에서 몇 번 어울리기는 했어도 테리오드는 그에게 호감이랄 것을 품어 본 적이 없었다. 딱히 프리모를 거스를 생각은 없었으나, 굳이 나서 그의 발을 핥고 싶지도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프리모가 테리오드를 눈엣가시로 판단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아탈렌타는 일개 가문치고 지나치게 비대한 편이었다. 프리모는 대공의 지지를 포기하는 일이 단순히 아쉬움만 남기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때문에 그는 아직까지 테리오드를 제 세력으로 품고자 하는 미련을 지우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이건 이쯤하고 슬슬 제 뒤에 서라는 신호였다.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대단히 유쾌하지 못한.

“전부 황가에서 내리신 은혜가 아닙니까.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익숙한 신경전에 테리오드는 말끔한 웃음을 내보였다. 이미 준 걸 아까워해 봤자 어쩌겠느냐는 뜻이다. 이에 프리모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확실히 우리의 초대 황제는 통이 큰 편이었지.”

“무려 대륙을 집어삼키셨으니 그 야망의 크기를 알 만도 합니다.”

“글쎄, 대공.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해.”

테리오드의 점잖은 응대에 프리모가 유들유들한 투로 답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아스티나가 눈을 돌려 프리모를 응시했다. 프리모가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마티나 여제가 정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을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보게, 알지 않나. 그 존엄한 여제는 사실 매달 피를 쏟아야만 했다네. 사람을 참으로 비이성적이게 만드는 현상이지.”

프리모가 재미있지 않느냐는 듯 킬킬거렸다. 황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했다. 그는 비옥한 땅을 아탈렌타에게 내린 여제의 결정을 조롱하고 있었다. 프리모가 비난키로 선택한 것은 역사상으로도 유구한 전통이 있는 약점이었다.

마티나에게 있어 유일한 오점이었던, 바로 그녀의 성별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황손인 그가 초대 황제를 모욕 주는 건 제 얼굴에 침을 뱉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티나는 피델리오 황가와 핏줄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수하였던 엘시어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떠났고, 이후 엘시어는 적법한 황후를 들여 대를 이었으니까. 피델리오 황가는 대대로 초대 황제의 위업보다는 자신들의 선조를 치켜세우는 데 긴 열정을 할애해 왔다.

바로 이런 식으로.

“여자의 몸으로 대륙 통일이라는 대업을 어찌 이루었겠나. 엘시어 황제가 그녀를 보필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

프리모가 거드름을 피우듯 말했다. 아스티나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엘시어 황제 폐하가 당시의 실세였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마티나 여제가 대륙을 통일하고 머지않아 제위를 넘긴 이유가 무엇이었겠나. 다 약속된 바가 있었기에 그리한 것이지. 그리 보면 우리의 선조는 참으로 사랑에 눈이 멀었던 셈이야.”

정조 모를 여자를 위해 나라까지 바치다니! 프리모가 개탄하듯 말을 맺었다. 아스티나는 프리모가 이 대화에 자신의 집시 시절까지 끌어왔음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마티나가 왈도에게 당했던 일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대부분은 그녀의 불행을 안타까워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이면지 같은 감정이었다. 손가락만 까딱하면 곧바로 뒤집힐 수 있는.

사람들은 마티나에게서 부정적인 면모를 발견할 때마다 그 비극을 끌어와 입에 담곤 했다. 그것이 그녀에게 있어 대단한 흠결이라도 되는 것처럼.

더 나아가서는 왈도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자도 있었다. 여색에 눈이 멀어 복수의 싹을 살려 놓았다가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인재라고도 했다. 그들은 살아남은 여자의 정의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진심으로 마티나를 동정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녀의 불행이 이야깃거리로 소비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다르지 않았다.

‘그게 후대에까지 이런 식으로 이어질 줄이야.’

낯선 모욕은 아니었다. 마티나는 짧은 생을 지나오는 내내 온갖 원색적인 비난을 감당해야 했다. 엘시어와의 우정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도 엘시어와 자신을 엮어 폄하하는 소리는 질릴 만치 들었다. 그것을 엘시어의 후손이 직접 행할 줄은 그녀도 예상치 못한 바였지만.

“오라버니, 슬슬 준비하러 올라가 보셔야 할 듯합니다.”

뒤에 잠자코 서 있던 이시스가 대화의 맥을 끊었다. 흘긋 동생을 넘겨본 프리모가 알았다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아. 내가 이야기가 즐거워 그만 잊었군. 대공, 다음에 다시 보도록 하지. 오늘 내 아주 진귀한 볼거리를 선물해 줄 테니 꼭 자리를 지켜 주게나.”

그가 테리오드를 보며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는 꼭 진짜인 것만 같았다.

먼저 돌아선 프리모의 뒤를 이시스가 조용히 따랐다. 인사만큼이나 간소한 작별을 마치고, 테리오드와 아스티나는 곧 둘만 남았다.

“피곤하셨지요.”

테리오드가 약간의 곤란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제국의 초대 황제를 모욕하는 소리가 듣기 좋았을 리 없었다. 프리모가 꺼낸 이야기는 청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종류의 것이었다. 테리오드는 프리모 황자의 무례에 아스티나가 기분 상했을까 걱정이었다.

“프리모 황자 전하는 참…… 재밌는 분이군요.”

아스티나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눈빛만은 사랑 이야기라도 속삭이는 듯 달콤했다. 그러나 저편에서 부러움에 한숨짓는 뭇 소녀들과는 달리, 테리오드는 그 뒤에 숨겨진 딱딱한 입매를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테리오드가 애매하게 미간을 좁혔다.

“그 말, 진심이십니까?”

“예, 아주 흥미로운 해석이었어요. 결국은 아탈렌타의 기를 죽이려는 말이라 대공께선 좀 불쾌하셨을 수도 있지만요.”

“그게 아니더라도 부인과는 초면이 아니었습니까. 황자께서 무례하셨던 게 사실이지요. 정말 불편하지 않으셨습니까?”

“예, 전 불편하지 않았답니다.”

아스티나가 상냥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불편이라는 귀여운 표현은 지금의 기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분노를 삭여 가슴 속 기저에 저며 내며, 아스티나는 프리모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호위 없이 전쟁 통에 몸을 맡겼다간 열 합도 버티지 못하고 죽어 나갈 애송이가 당최 무슨 소리를 지껄인 건가.

누구도 감히 마티나의 위업을 평가할 자격이 없었다. 이 대국의 평화로운 체제 속에 살아온 사람이라면, 그게 누구든.

“황위를 물려받을 가장 첫째가는 후보다 보니 갈수록 콧대가 높아지는 게 사실입니다. 사실, 만남이 썩 기분 좋은 사람은 아니죠. 원하신다면 자리가 겹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의 심기를 살피는 데 열성이었다. 안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던 황자다. 좋아하는 여인과 함께하는 자리인데 분위기까지 망치고 가니 테리오드로서도 썩 유쾌하진 않았다. 아스티나가 테리오드의 말을 받아 조용히 중얼거렸다.

“황위를 물려받을 가장 첫째가는 후보라…….”

누이를 수족 부리듯 하는 모습은 과연 교만했었다. 저 건방진 성골을 어떻게 벌주어야 할까. 아스티나가 가벼운 투로 되물었다.

“그게 아니게 된다면요?”

“예?”

아스티나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위층이 소란스러워졌다. 황제의 등장이었다. 첫날과 같이 단상 위에 황손들이 모여 서고, 그 사이로 황제가 걸어 나왔다. 아까 만났던 프리모의 뒤로 벤자민 역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벤자민의 존재를 알렸던 근엄한 투로, 황제는 이번에도 새 소식을 알렸다.

“드디어 수확절 연회의 마지막 날이로군. 아마 혈기 왕성한 영식들은 오늘을 무척이나 기다려 왔을 것이오. 아니, 기다린 건 오늘보다는 일주일 후 벌어질 사냥 대회 쪽이겠군.”

황제의 말에 젊은 패거리들이 환호했다. 언뜻 무례하게 비쳐 보일 수 있는 반응이었으나, 이를 유도하려 했던 황제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아스티나는 왼편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개중에 섞여 있던 앤서린과 눈이 마주쳤다.

놀란 듯 커지던 앤서린의 눈이 곧 가라앉았다. 앤서린은 무어라 말을 걸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옆자리에 선 테리오드를 발견하고는 이내 멈칫했다. 아스티나는 설핏 웃으며 짧게 고개만 까딱였다. 풀 죽은 기색의 앤서린을 뒤로하고 아스티나는 다시 단상 위를 올려다보았다.

“사냥 대회보다도 오래 미뤄 온 소식이 있었지. 아마 좀 더 나이 든 이들은 내가 이 결론을 꺼내기만을 기다려 왔을 것이오.”

장내는 다시 조용해졌다. 홀 안을 길게 둘러보던 황제가 엄숙히 입을 열었다.

“첫날 말했듯 나는 병들었소. 늙었고, 힘은 나날이 쇠해지지. 수많은 백성을 끌어안기에 이제는 기력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오.”

황제가 다음으로 꺼낼 말을 깨닫지 못한 자는 없었다. 그는 지금 후계를 지정하려 하고 있었다. 수확제에 발표한다던 중요한 소식이 새 황자를 소개하는 것뿐이 아니었다니. 잔혹한 프리모가 새로운 형제의 등장을 가만히 두고 본 이유가 있었다며 누군가가 남몰래 수군거렸다.

“프리모, 내 옆에 와서 서도록 해라.”

황제가 다정한 목소리로 프리모를 불렀다. 프리모는 호감형의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대공에게 내보였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표정이었다. 저 연기가 기능할 필요가 없는 장소에서, 그는 진실로 어떤 얼굴을 할까.

“이제는 이것이 황가의 창고를 벗어나 모습을 보일 때도 되었지. 여봐라, 후계자의 잔을 가져와라.”

황제가 경쾌한 어조로 시종을 향해 명령했다.

엘시어가 황위에 오른 이래, 피델리오가는 후계를 지정할 때마다 한 가지 유물을 사용해 왔다. 새로 건국된 나라는 애국심이 부족하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엘시어의 황위는 양도받은 것이었다. 정통성을 채우기 위해 피델리오 황가는 많은 것들의 이름을 빌려 와야 했다. 황제가 지금 가져오라고 명한 잔도 그중의 하나였다.

카라벨라의 황성은 리체드로 왕가와의 전쟁에서 얻은 것으로, 그들은 오백 년도 넘게 이어진 대단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리체드로 왕가가 점차 쇠락의 길을 걷고 있지 않았다면 마티나도 정복에 있어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도략한 왕성에는 당연히도 기나긴 영광만큼이나 많은 유물들이 있었다. ‘후계자의 잔’은 개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리체드로 왕가 역시 타국과의 전쟁에서 얻었던 잔은 한눈에 봐도 영롱한 모양이었다. 뼈대가 된 황금은 반짝였으며 그 위에 알알이 박힌 보석은 눈이 부셨다. 리체드로는 깊은 역사만큼이나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왕가였다. 그들이 정복한 소국을 따라 ‘후계자의 잔’으로 계승해 왔을 정도이니 그 대단한 외양을 알 만도 했다.

본래 소유주였던 왕가가 새로운 주인을 축복했을지 저주했을지는 알 수 없는 바나, 어쨌든 그것은 오늘의 프리모에게까지 가닿았다.

아니, 가닿을 예정이었다.

“아니, 이게 왜…….”

늘 말없이 주인을 보필할 뿐인 시종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의 낯빛은 백색에 가까웠다. 시종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황제와 프리모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고, 뒤편에 선 사람들은 그들의 눈치를 보듯 허둥거렸다.

마침내 시종이 들고 있던 함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함은 바닥과 부딪치며 묵직한 소음을 내었지만, 잔이 떨어지는 청량한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잔이 사라졌다!”

누군가 크게 소리쳤다. 무도회장에 걷잡을 수 없는 소란이 번졌다. 프리모의 가면 같던 웃음에 금이 갔다. 그는 얼굴을 구기며 시종의 멱살을 잡아챘다.

“잔을 어디다 빼돌렸지?”

“저저저전하, 저는 모릅니다. 정말로 모르는 일입니다……!”

“이 멍청한 게 물건 간수 하나 제대로 못해서는!”

그를 보필하던 이시스는 아까의 덤덤한 태도와는 반대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다가는 패악을 부리는 형제의 팔 대신 제 치맛자락만 붙잡았다.

이시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아스티나는 그녀가 벤자민과 짧게 눈을 마주치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벤자민은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아스티나는 그를 오래도록 봐 왔다. 이러한 순간에서 친구의 연기를 구별해 낼 수 있을 정도로는.

“당장 잔을 찾아내!”

프리모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소란을 지켜보는 아스티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걸 찾아야겠군.”

“예?”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의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스티나가 턱을 들며 우아하게 부채를 흔들었다. 테리오드는 그녀가 귀부인처럼 굴 때가 가장 무서운 순간이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테리오드의 등허리에 이유 모를 식은땀이 흘렀다.

아스티나가 꽤나 즐거운 투로 말했다.

“대공, 참으로 재밌는 우연이 아닙니까. 저희에게 모욕을 준 황자가 후계자의 잔을 물려받으려는 영광스러운 순간, 하필 그것이 분실되다니.”

테리오드는 주변에 가득한 소란 때문에 이 대화가 새어 나갈 염려가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의미심장한 말에 테리오드가 불안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설마…… 부인께서 저지르신 일은 아니시겠지요?”

그럴 리가 있나.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그 잠깐 사이 잔을 훔쳐 내는 기행을 선보이는 건 불가능했다. 연회가 시작된 내내 남편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면 더더욱.

“물론, 아니지요.”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에게 진실 된 대답을 돌려주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직까지는요.”

이제부터 할 예정이라서.

* * *

후계자의 잔을 잃어버린 여파로 황궁은 부산스러웠다. 시종들의 행적을 추궁하고 성을 드나드는 이들을 통제했으며, 잔이 있을 법한 모든 공간을 뒤집어엎다시피 했다. 덕분에 아스티나가 벤자민에게 보냈던 편지까지 늦게 주인을 찾아가, 연회 다음 날 요청했던 만남이 사흘 후로 미뤄졌을 정도였다.

아스티나는 적당히 격식을 갖춘 가벼운 옷을 차려입고는 저택을 나섰다. 옆구리엔 영문 모를 얼굴의 제시를 동반한 채였다.

신분이 확실하기 때문인지 입궁 자체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검문마저도 다분히 형식적으로 이루어졌다. 경비병들은 대공비가 탄 마차 내부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뒤져 봤자 특별한 걸 발견하지도 못했을 테지만.

“들어오시라 하셨습니다.”

시녀가 공손한 얼굴로 인사했다. 아스티나는 잠자코 열린 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미리 한 당부 때문인지 제시는 생각보다 얌전하게 굴었다. 다만 고개는 뻣뻣이 앞을 향하되 이곳저곳으로 향하는 눈만은 억누르지 못했다.

아스티나는 그런 제시를 귀여운 눈으로 보아 넘겼다. 어차피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이를 책할 만한 인물도 아니었다.

“아스티나.”

벤자민이 반가운 눈으로 일어섰다. 대화를 엿들을 것을 염려했는지 시녀들은 모두 내쫓은 상태였다. 아스티나도 안심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잘 지냈나, 벤자민?”

“그래, 먼 길 와 피곤하지. 어서 앉아.”

아스티나는 사양하지 않았다. 벤자민이 아스티나의 뒤에 선 제시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 네가 데려온…….”

“내가 가르치고 있는 아이야. 내보내지 않아도 괜찮아.”

“네가 그렇다면.”

벤자민은 선선히 제시에게서 시선을 떼어 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참으로 맹목적인 믿음이었다. 아카데미에서였다면 그랬을 법도 한 일이다. 당시의 벤자민이 가지고 있던 것 중 가장 볼 만한 건 미래에 대한 가능성뿐이었으니까.

그러나 황자라는 직위를 얻은 지금에 와선 그 의미가 조금 달랐다. 제국은 강대했다. 별 볼 일 없는 황자에게조차도 많은 것을 쥐여 줄 수 있을 만큼.

아스티나는 벤자민의 신의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만큼 철없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겐 그의 가장 깊은 곳까지 뒤흔들어 이용할 수 있는 연륜이 있었다. 그녀는 벤자민이 모든 것을 내주고도 아까움조차 느끼지 못하도록 눈을 가려 줄 수도 있었다. 그는 어렸고, 그녀를 사랑했고, 자신은 노련했다.

그러므로 아스티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미리 준비된 차에서는 그녀가 좋아하는 향이 났다. 아스티나가 찻잔을 내려놓자 벤자민이 물었다.

“대공에겐 뭐라고 설명하고 왔어?”

“그건 좀 비열하게 들리는군. 남편에겐 뭐라고 하고 왔냐니.”

아스티나가 전혀 장난처럼 들리지 않는 투로 농을 건넸다. 벤자민이 당황한 얼굴로 해명했다.

“이상한 의미가 아냐! 그냥…… 내가 그때 벌였던 일이 있으니 쉽게 만남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 같아서, 그래서 한 말이야.”

“벤자민, 나는 그에게 내 외출을 제한할 권한을 주지 않았어.”

그 대답에 벤자민은 더욱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심코 그녀가 대공 아래의 사람인 양 말했음을 깨달은 탓이다. 그가 더듬더듬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그런 일이 종종 벌어지는 것도 사실이니까.”

종종 벌어지는 일이지만 테리오드는 그녀를 막지 않았다. 황궁으로 벤자민을 보러 간다고 말하자 무던히도 이유를 캐묻기는 했으나, 배웅 이상의 것을 욕심내진 못했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초조한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일찍 돌아오기를 당부하던 표정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척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죄책감까지 느꼈을 정도로.

“그래, 그는 부인을 가두지 않는 보기 드문 신사야. 그러니 나는 슬슬 네가 대공을 존중해 줬으면 하는데.”

아스티나가 무심히 경고했다. 안 그래도 테리오드에겐 마음의 빚이 많은 상황이었다. 친구가 그의 명예를 폄훼하는 것까지 보아 넘길 수는 없었다. 벤자민은 말문이 막혀 잠시 아스티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사실, 짝사랑을 하는 당사자가 듣기에는 퍽 잔인한 말이었다. 벤자민은 방금의 매서운 선 긋기가 의도된 바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스티나가 상대방이 상처받을 것을 모르고 그 말을 했을 리는 없었다.

이건 공표에 가까웠다. 앞으로 그들 사이가 친구 이상의 것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는. 그 말끔한 정리는 아스티나에게 있어 퍽 간편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곁에 남기로 한 것은 결국 이 같은 일을 수용하겠다는 뜻이었다. 벤자민이 더 이상 못 견디겠다고 말한다면, 그녀는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볼 것이다. 그러고는 알겠다고 말하며 이 자리를 떠나 주겠지. 그것으로 모두 끝이 날 터다.

벤자민은 그 사실을 알아 차마 아스티나를 원망하지도 못했다. 말을 꺼냈다간 울컥 차오른 감정을 삼켜 낼 수 없을 것 같아, 벤자민은 고개만 끄덕였다. 다행히도 아스티나는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황궁에서 지내는 데 불편한 점은 없나?”

“그래, 꽤 지낼 만해.”

벤자민은 부러 쾌활함을 지어내 보았다. 생각보다 그 연기는 효과가 있었다. 벤자민은 요즈음의 생활을 떠올려 보았다. 아스티나와의 만남을 가장 우선으로 삼을 수 있을 정도로 그는 한가했다. 벤자민이 허탈한 어조로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게 마음 놓고 살았던 적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야.”

“황위 계승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그것도 그렇지만, 나는 인증을 받았거든.”

“무슨 인증 말이야?”

“이시스에게 친히 해가 되는 인물이 아니라는 공증을 받았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벤자민이 코를 찡긋였다. 아마 한 달 전에 이 대답이 돌아왔다면 아스티나는 그가 왜 프리모가 아닌 이시스의 이름을 말하는지 의아해했을 것이다. 그동안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문제였으니까. 그러나 아스티나는 벤자민과 만나지 못한 며칠간, 황위 다툼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왔는지 퍽 성실하게 알아본 참이었다.

어려울 것도 없는 이야기다. 황제가 형제간 다툼에 눈을 감아 준 이후, 후계가 될 수 있는 자라면 누구든 서로를 잡아먹으려 혈안이 되었다. 먼저 상대의 머리를 베지 않으면 심장을 내어 주는 것은 본인이 될 테니까.

그 지난한 싸움은 현실이 늘 그렇듯 그다지 공평하지 않았다. 프리모의 대단한 외척은 황제가 될 핏줄을 위해 무슨 일이든 벌일 결심이 되어 있었다. 친누이인 이시스조차 그의 수족을 자처하지 않았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외부의 시선으로는.

“이시스 황녀가 프리모의 머리였다는 뜻인가?”

“그래. 쉬쉬하고 있지만 정치판과 가까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

아스티나는 벤자민의 대답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프리모가 어떤 방식으로 마티나를 깎아내리는지 보았다. 효용이 증명되지 않았다면 누이를 뒤에 세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스티나는 이시스가 수재 이상의 인물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아스티나가 턱을 들며 말했다.

“네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그 대단한 책사에게 어떤 식으로 증명했을지 궁금해지는데.”

“네가 말했듯, 나는 공식적으로 황위 계승권을 포기했으니까.”

“글쎄. 아탈렌타 역시 황위 싸움에서 공식적으로 누군가를 지지했던 역사는 없지. 하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정적들의 기대를 배신해 왔을 거야.”

벤자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스티나가 이어 물었다.

“연회의 첫날, 이시스 황녀와 프리모를 조심하라고 했던 건 무슨 의미였지?”

“그건…….”

벤자민이 눈에 띄게 동요한 기색을 보였다. 그가 겨우 표정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위험하니까. 그들이 어떻게 정적들을 처리했는지 알면 너도 내 걱정을 이해할 만하지 않니.”

너무도 평범해서 지루하기까지 한 대답이었다. 창의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응대에 아스티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대꾸했다.

“알았다.”

아스티나가 몸을 일으켰다. 제시를 손짓해 부르고는 떠날 채비를 마쳤다. 벤자민이 황급히 아스티나를 따라 일어섰다.

“벌써 가 보려고?”

“그래, 난 네가 무사한지를 보려고 한 거야. 잔이 없어지고 가장 먼저 의심받을 게 너라고 생각했거든.”

벤자민은 준비해 둔 식사나 미리 알아 놓은 정원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떠올렸다. 그가 아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너무 이르잖아.”

아스티나는 흘긋 방 안에 있는 시계를 넘겨보았다.

“나는 외려 예상보다 시간을 지체한 쪽인데.”

벤자민의 어깨가 실망으로 늘어졌다. 그의 눈이 제시에게로 향했다. 주인을 좀 말려 달라는 듯이.

제시는 허둥거리며 아스티나와 벤자민을 번갈아 보았다. 숙련된 사용인이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아스티나 역시 제시에게 그런 부분을 기대하고 데려온 것은 아니었다. 벤자민은 곧바로 그 알 수 없는 의도를 지적해 왔다.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저 휘황찬란한 상자는 대체 뭐야? 날 주려고 가져온 줄 알았는데.”

벤자민이 제시가 들고 있는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시는 정교한 장식이 새겨진 함을 소중히 끌어안고 있었다. 긴 사각기둥의 형태만으로는 내용물을 짐작할 수 없었다.

아스티나가 담백하게 대답했다.

“빈 상자야.”

“뭐?”

황당한 얼굴의 벤자민을 보고 아스티나가 조용히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입궁할 땐 없었던 물건이 갑자기 생겨나면 의심스러우니까.”

“아니, 대체 그게 무슨…….”

아스티나는 대답하지 않고 문밖으로 나갔다.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아스티나를 발견하고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아스티나가 우아한 투로 물었다.

“황자님께서 후원이라도 구경하고 돌아가라며 친절을 베푸시더군. 어느 쪽으로 가면 되지?”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벤자민이 뒤따라온 듯 안쪽에서 작게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아스티나가 시녀와 나누고 있는 대화를 먼저 들은 듯, 벤자민이 문틈 사이로 반짝이는 금발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아스티나는 벤자민이 기대어 있을 문을 한 차례 흘기고는 걸음을 옮겼다.

애석하게도, 오늘 벤자민을 찾아온 것도 ‘공식적인’ 용건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 * *

시녀는 황제가 기거하는 본궁에서 가장 가까운 후원으로 아스티나를 안내했다. 아스티나가 벤자민이 추천한 곳이라며 넌지시 운을 뗀 덕분이었다. 조용히 풍류를 즐기고 싶다고 하자 시녀는 한 시간 후 돌아오겠다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아스티나는 인기척이 사라지자마자 건물 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후원을 둘러볼 줄로만 알았던 제시가 깜짝 놀라 아스티나의 뒤를 따랐다.

“대, 대공비 전하!”

“목소리를 낮추렴, 지나가는 경비들이 듣겠구나.”

“예……. 한데 어디로 가시는 것인지…….”

반사적으로 입을 가린 제시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아스티나는 희고 평평한 석판이 깔린 복도로 들어섰다. 따로 창을 막아 놓지 않아 지나가면서도 경치를 구경할 수 있는 곳이었다.

때마침 맞은편에서 근엄한 표정의 경비대원이 걸어왔다. 아스티나는 어깨를 펴고는 자세를 단정히 했다.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남자는 그대로 그들을 지나쳤다. 경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제시가 물었다.

“궁을 이렇게 막 돌아다녀도 되는 걸까요……?”

“물론 안 되지. 우리가 출입을 허락받은 건 황자가 기거하던 궁뿐이니까.”

아스티나는 담백하게 그들이 범법 행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일러 주었다. 소시민인 제시는 곧장 울상이 되었다.

“대공비 전하…… 왜 저를 데려오신 거예요? 저는 도무지 오늘 제가 전하를 잘 보필했던 것 같지도 않아요…….”

콩알만 한 담을 가진 제시로서는 황궁에 들어온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같이 입궁할 사용인으로 지목받았을 땐 또 얼마나 놀랐던가. 제시는 온몸을 바쳐 아스티나에게 충성할 자신이 있었지만, 몸에 익지 않은 예법을 구현해 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제시, 네가 날 잘 보필해야 하는 건 지금부터란다.”

“예?”

아스티나가 우뚝 걸음을 멈춰 세웠다. 제시가 그 등에 코를 박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전부 남다른 반사 신경 덕분이었다. 아스티나가 미소를 지으며 그런 제시를 한 번 돌아보았다. 아스티나의 시선이 이어 왼편의 벽면으로 향했다. 그녀가 금이 간 자리를 몇 차례 쓸며 중얼거렸다.

“여기쯤인가.”

제시는 의아한 눈으로 아스티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제시가 왜 그러시느냐고 묻기도 전, 아스티나는 길게 숨을 들이켜고는 그대로 벽을 걷어찼다. 제시는 가까스로 비명을 삼켜 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공비는 황가에 대한 반기로 건물을 파손하려 든 게 아니었다. 석판이 가볍게 뒤편으로 밀려 나가자 제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스티나가 허리를 숙여 안쪽을 살피며 말했다.

“다행히 뭐가 많이 달라지진 않았군.”

“대공비 전하……! 대체 이게 뭐예요?”

제시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아스티나가 입고 있던 옷을 벗으며 짧게 대꾸했다.

“비밀 통로지.”

제시는 대낮에 공공장소에서 탈의를 시도하는 주인에게 놀라야 할지, 아니면 처음으로 본 황궁의 비밀 통로에 놀라워해야 할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기겁한 제시를 내버려 둔 채 아스티나는 치렁치렁한 치맛자락을 분리해 냈다. 옷을 대충 접어 둔 아스티나가 머리칼을 끈으로 동여 묶었다.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계획했던 듯, 준비를 마친 아스티나는 활동에 최적화된 모습이었다.

아스티나가 제시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도 겉옷은 벗어 두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저, 전 안에 셰인즈(chainse)밖에 입지 않았는데요?”

“새 옷을 버리는 것보단 나을걸.”

아스티나가 그리 말하며 제시의 치맛자락을 가리켰다. 입궁을 위해 대공비가 친히 선물해 줬던 물건이었다. 제시가 가진 의복들 중 가장 비싼 것이기도 했다. 제시는 결국 아스티나의 충고를 따라 옷을 벗었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안에 기다리고 있는 건 좁고 오래된 통로였다. 오가다 보면 자연히 먼지가 묻을 수밖에 없다.

깔끔하게 개켜 둔 옷은 가까이 있는 수풀 뒤 적당한 공간에 숨겼다. 아스티나는 망설이지도 않고 벌어진 틈 안으로 들어갔다. 제시 역시 아스티나를 뒤따랐다.

밀려났던 벽을 제자리에 세우자 좁은 통로 안이 온통 어두워졌다. 제시는 굽혔던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빛이 차단된 암실이라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 도통 구분이 되질 않았다.

“제시, 함을 이리 줘.”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제시가 아스티나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아스티나는 그 안에서 작은 램프와 성냥을 꺼내 들었다. 황자가 물었을 때 빈 상자라고 답하여 정말 든 게 없는 줄 알았는데, 참으로 의외의 물건이 들어 있었다.

제시는 입을 떡하니 벌렸다. 벨루아에서도 느꼈지만 그녀의 주인은 거짓말에 대단한 재능이 있었다. 상대가 진실이라 느낄 만큼 태연한 연기력도 가졌음은 물론이다. 제시가 감탄하듯 소리쳤다.

“안이 비었다고 하셨잖아요!”

“원래 담으려고 했던 물건은 아니니까.”

아스티나가 그리 말하며 램프에 불을 붙였다. 밝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사위를 분간해 낼 수준은 되었다. 길을 다 외우기라도 한 양 아스티나는 망설이지도 않고 발을 움직였다. 자연히 제시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대공비 전하께서는 이런 곳을 어떻게 아신 거예요?”

목적한 곳까지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다. 말을 아껴야 할 때는 아니었기에 아스티나는 잠자코 대답을 돌려주었다.

“카라벨라는 온 대륙이 통일된 거대한 나라이니만큼 온갖 건축 양식이 섞여 있지. 근본은 블란체에 가까우나 강대했던 리체드로의 영향이 대부분이다. 특히 황제가 기거하는 본성은 리체드로의 유산을 유지 보수만 해 둔 것이지.”

“리체드로요?”

“그래, 수도 바실의 지난 주인은 원래 리체드로 왕가였어. 대단한 역사만큼이나 소유자의 성이 여러 번 바뀌었던 나라지. 위협을 느낀 권위자들은 안전하게 숨어들 비밀 공간을 가지고 싶어 했단다.”

“대피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통로라는 말씀이세요?”

“처음에는 그러했지. 하지만 태평성대를 살았던 왕은 이곳을 사적인 목적으로도 채우고 싶었을 거야.”

“사적인 목적이요?”

“그래. 궁의 주인들은 창피한 기억과 귀한 물건, 혹은 밀담까지도 이 안에 숨겨 왔지.”

아스티나가 그리 말하며 왼편으로 손을 뻗었다. 쭉 일직선으로 이동했으므로 아직은 후원과 이어진 긴 복도를 따라 걷고 있는 셈이었다. 벽면을 가볍게 두드리자 맑은 소리가 울렸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공간을 만들기 위해 필연적으로 얇아져야 했던 벽들이 있지. 아까 들어낸 것도 그런 부분이야.”

“그럼 황제…… 폐하나 황자 분들도 그런 구멍으로…… 오가시는 거예요?”

제시가 조심스럽게 소곤거렸다. 그들이 들어왔던 입구는 낮고 좁았다. 아무래도 체면을 버리지 않고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제시는 근엄한 얼굴의 황제가 그 구멍으로 기어들어 오는 것을 상상했다가, 그만 스스로의 무엄함에 깜짝 놀랐다.

제시의 어린 상상에 아스티나가 픽 웃음 지었다. 아스티나는 카라벨라 황가가 이 비밀 장소를 발견하지 못했으리라 짐작했다. 자신이 마티나였을 적 엘시어의 잔소리를 피하려다 찾아냈던 장소다. 당연히도 엘시어에겐 이곳의 존재를 알려 준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황가에서 이미 인지하고 있었던 공간이라면, 황제는 의미 없는 수색을 잇는 대신 곧바로 잃어버린 잔을 찾았다고 공표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비밀 장소를 아스티나 혼자만 알고 있는 건 몹시 수상한 일이었다. 아스티나는 뭉뚱그려 말을 흐렸다.

“내부로 가면 좀 더 제대로 된 입구들도 있지. 아까 그 벽면은…… 누군가가 발견하고 분리해 놨던 부분이야. 개구멍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

“그게 누군데요?”

“글쎄, 그건 잘 모르겠구나. 나도 황자께서 일러 주어 위치만 알고 있는 것이라.”

아스티나가 시치미를 떼며 앞으로 나아갔다. 가늘고 긴 길을 한참 걷고 나서야 시야가 트였다. 그러나 제시는 안도의 숨을 내쉬지도 못했다. 그들이 다다른 곳은 미로의 시작점에 가까운 외양을 하고 있었으니까.

갈림길은 여럿이었다. 그러나 보통의 탐사자들이 거치는 고민은 없었다. 아스티나는 망설임 없이 그중 두 번째로 발을 들였다. 비슷한 갈림길은 몇 번이고 이어졌다. 지리를 알지 못하는 자라면 능히 길을 잃을 법도 했다. 제시는 혹여 아스티나를 놓칠까 싶어 되도록 좁은 간격을 유지했다.

마침내 아스티나가 한 방 앞에서 멈춰 섰다.

아니, 방이라는 표현이 썩 어울리는 공간은 아니었다. 도배하지 않은 울퉁불퉁한 돌벽은 일종의 동굴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것이 방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유는 아치형의 입구로 복도와는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 하나 때문이었다.

아스티나는 불을 가볍게 비춰 보고는 안으로 발을 디뎠다. 광원이라고는 아스티나가 든 램프 하나뿐이었기에 제시도 재빠르게 그 뒤를 따랐다.

전체적으로 꽤나 음산해 보이는 실내였다. 아까까지는 올록볼록한 바닥 때문에 속도를 내는 것이 힘들었는데, 그나마 이곳엔 낡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고대하던 사람의 흔적이었으나 어딘지 으스스한 느낌은 가시지 않았다.

제시의 눈이 안쪽의 벽으로 조심스럽게 굴렀다. 그 끝엔 온갖 상자가 가득했다. 아무래도 제 주인은 저것을 열어 볼 생각인 듯했다. 안쪽으로 다가서는 발걸음은 사뭇 경쾌하기까지 했다. 제시는 그 안에서 해골을 발견하는 일이 없기만을 바랐다.

함이 쌓여 있는 곳으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낮은 턱을 지나야 했다. 아스티나는 몇 번 바닥 위로 발을 구르더니 제시를 불렀다.

“제시, 이리 와서 서도록 해.”

“예? 예!”

제시가 방 안을 둘러보다 말고 황급히 아스티나에게로 달려갔다. 제시가 지정한 곳에 서자마자 아스티나가 짧게 경고했다.

“내가 됐다고 말할 때까지 거기서 나오지 말렴, 알겠니?”

“네?”

“안 그러면 화살 비가 쏟아질 테니.”

“……네?”

제시가 당황한 얼굴로 아스티나를 응시했다. 아스티나는 방금 했던 말이 농담이라도 되는 것처럼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막상 그 입에서 장난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대, 대공비 전하……?”

제시가 목만 길게 빼 아스티나를 불렀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이미 쌓여 있는 짐들을 치워 내기 시작한 후였다. 상자 위에 가득한 먼지는 얼마나 오랫동안 묵은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마티나 이후로 여길 찾은 사람은 또 없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이곳을 알고 있을 만한 리체드로의 사람들은 모두 백 년도 더 전에 세상을 떠났다.

아스티나는 곧 기억 속 물건을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상자를 열 열쇠는 없었으나 상관없었다. 이미 잠금쇠는 부서진 상태였으니까.

아스티나는 그 안에서 아직도 빛을 잃지 않은 휘황찬란한 유물을 꺼내 들었다. 세월이 감상을 퇴색시킨 탓일까, 다시 마주한 물건은 기억보다도 더 반짝였다. 그 영롱한 빛에 뒤편에 서 있던 제시조차 잠시 넋을 잃었을 정도였다.

아스티나는 조심스럽게 먼지를 털어 내고는 가지고 왔던 함에 잔을 넣었다. 아스티나가 뚜껑을 닫자마자 제시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대공비 전하, 설마 그게…….”

수확절 연회의 마지막 날 밤 후계자의 잔이 없어졌다는 사실은 수도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제시가 물건의 정체를 눈치챈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했어도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그 잔의 아름다움을 알았다. 제시는 환상 속 보물이라도 되는 양 잔을 칭송하던 노래에 전혀 과장이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자신부터가 실물을 보자마자 그 찬사 가득한 가사 말들을 떠올렸을 지경이니.

아니나 다를까 아스티나가 노래하듯 대답했다.

“후계자의 잔이지.”

그 목소리에 냉소적인 기색이 여실해 제시는 잠시 당황했다. 의문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후계자의 잔이 왜 이런 숨겨진 장소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 도난당했다고 들었는데, 사실 사라진 물건은 진짜가 아니었던가. 제시가 이유를 짐작해 내기도 전 아스티나가 턱 아래로 내려섰다.

“이제 내려오렴.”

제시는 잠자코 아스티나의 말을 따랐다. 뒤편을 돌아보는 시선에 미묘한 아쉬움이 남았다. 상자 안에 분명 더 대단한 물건들이 쌓여 있었을 듯한데 아스티나가 꺼내 온 건 후계자의 잔뿐이었다. 물론 그것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물건이긴 했지만.

제시가 자신이 서 있던 바닥을 살피고는 물었다.

“무슨 장치가 되어 있던 건가요?”

“별건 아니란다. 바닥에 지렛대가 깔려 있어서 상자 가까이에서 무게가 느껴지면 장치가 발동되거든. 그래서 반대쪽에 서 있으라고 한 거지.”

“예?”

“그대로 들어가 저 상자를 열면 화살 비가 내린단다.”

아스티나가 별일 아니란 듯 손가락을 까딱여 천장을 가리켰다. 제시의 낯빛이 삽시간에 퍼렇게 물들었다. 사실 대단한 위력의 함정은 아니었지만 아스티나는 굳이 그것까지 알려 주지는 않기로 했다. 제시가 이 기억을 포도주마냥 오래도록 묵혔을 즈음, 오늘의 경험은 나이 든 그녀에게 그럭저럭 괜찮은 모험담이 되어 주리라.

백 년도 더 전에 설치된 화살이 본래의 위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우습다. 마티나였을 적 홀로 이곳을 찾았을 때도 적당히 쳐 내었던 수준의 허술한 장치였다. 하지만 귀찮게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는 누군가를 바깥에 세워 두는 쪽이 더 간편한 게 사실이다.

사람을 동반하기로 결정하고 나니 그다음엔 누구를 선택할지가 고민이었다. 뒤를 맡길 수 있는 건 칸나나 대공, 히센과 올리버 정도인데 셋 다 시녀로 위장할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스티나가 고를 수 있었던 가장 괜찮은 선택지는 제시였다. 제시에겐 혹시 모를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응할 반사 신경과 체력이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제시는 대공비가 아닌 아스티나 개인에게 충성하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저 경외 넘치는 시선은 쌓여 있는 보석이 아닌 아스티나 쪽을 향하고 있지 않은가.

“대공비 전하는 이걸 다 어떻게 알아내신 거예요?”

제시는 계속해서 질문만 쏟아 내는 자신이 퍽 멍청하게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또 이 말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제시가 흥분한 투로 오늘 아스티나가 해낸 일들을 두서없이 주워섬겼다.

“황궁의 비밀 장소나 함정을 피하는 법이나, 심지어는 저 안에 후계자의 잔이 들어 있다는 것까지 알고 계셨던 거잖아요.”

확실히 잔이 이곳에도 남아 있었다는 건 누구도 알지 못할 사실이었다. 아스티나는 말없이 바닥에 내려 두었던 램프를 집어 들었다. 잔이 든 함을 제시에게 넘기며, 아스티나는 그 정보의 출처를 가만히 되짚었다.

후계자의 잔은 후대에 와선 반쪽짜리 기원만 남은 오래된 역사 속의 물건이었다. 마티나일 적 읽었던 고서적이 아니었다면 그녀도 몰랐을 사실이다. 아스티나는 그것이 누구의 기록이며 어떤 방식으로 남았는지, 그리고 누가 불살라 이 세상에서 없앴는지조차 기억하고 있었다.

아스티나가 걸음을 내딛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제시. 지금도 종이는 귀한 물건이지만, 근래의 것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조악하고 귀했던 때가 있었단다.”

“네, 그래서 예전에는 오래 보관할 수도 없었다고 알고 있어요.”

제시가 순순히 대답했다. 아스티나가 갈수록 좁아지는 벽에 빛을 비추며 말했다.

“서원은 오래도록 지식의 보고였지. 그들은 언제나 그 방대한 서책들을 필사하며 후대로, 또 후대로 가르침을 이어 왔어. 그렇지 않으면 그 나약한 종잇장이 세월을 견뎌 내질 못할 테니까.”

아까 거쳤던 곳인데도 제시로서는 지금 도통 어디쯤에 서 있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제시는 아스티나를 따라붙는 일과 그녀의 이야기 모두에 집중하기 위해 애썼다. 아스티나가 이어 자조하듯 물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불온하다고 판단한 서적은 어떻게 되었겠니?”

“필사하지…… 않았겠지요.”

“그뿐이겠어. 금서의 낱장 낱장에 독을 발랐단다. 종이는 습기에 취약하지. 책장이 붙어 잘 넘어가지 않았고…….”

제시는 상상했다. 어두운 밤 서고로 숨어든 남자가 잘 넘어가지 않는 서적에, 손가락에 침을 묻혀 가며 짜증스럽게 다음 장을 넘기는 모습을.

소름이 끼쳐 제시는 그만 몸을 떨었다. 아스티나가 엷게 웃으며 말했다.

“그 기록을 보았던 자들은 다 죽었단다.”

그리고 마티나는 그 남은 글자들을 모두 태워 버렸다. 정복의 불은 많은 것들을 지워 내는 법이니까. 더 이상은 그 어떤 기록으로도 남지 않은 것들을, 오직 아스티나만이 알고 있었다.

딱히 안타까운 일은 아니었다. 그나마 근래에 속하는 마티나의 역사조차 얼마나 많이 찢겨지고 기워지고 또 지워졌던가. 잊혀야 했을 것들을 끌어안고 있는 아스티나야말로 이치를 거스르는 존재였다.

아스티나는 걸음을 멈추고 제시를 돌아보았다. 잠깐의 모험과 꿈결 같은 옛이야기에 제시의 눈은 몽롱하게 젖어 있었다.

아스티나는 바닥으로 손을 뻗어 현실의 입구를 끌어냈다. 아직 시간은 한낮에 가까웠으므로, 당연히도 어두운 미로와 반대되는 눈부신 빛이 새어 들어왔다.

“세상엔 그런 식으로 사라진 비밀들이 많지. 이 잔도 그중의 한 부분일 뿐이야. 나는 유능한 교수님의 밑에서 수학해 이런저런 고서적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단다.”

“역시 명문 벨라체는 대단하네요.”

“그래, 이제 이 물건을 주인에게 전해 주러 가자꾸나.”

아스티나는 역사를 말하기를 멈추었다. 램프의 불을 꺼 안쪽에 버려둔 뒤, 그대로 햇빛 밖으로 걸어 나왔다.

* * *

약속대로 한 시간 후 돌아온 시녀는 다시 정돈된 외양의 아스티나와 제시를 마주했다. 당연히도 대공비에게선 어떠한 이상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다. 옷을 잘 접어 보관해 두었던 덕분에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감쪽같았던 탓이다. 속치마에 묻은 검댕은 세탁방의 하녀들만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녀는 몹시 당황해야 했다. 그대로 출궁할 줄로만 알았던 대공비가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 왔기 때문이다.

“황제 폐하께 대공비가 비밀리에 급히 알현을 청한다고 아뢰어라.”

황제를 알현하려면 미리 연통을 넣어야 하는 게 당연한 예의다. 황궁의 관료도 아닌 대공비가 대뜸 황제에게 만남을 청하다니, 이는 분명 대단한 무례였다. 그녀가 대공비쯤 되는 인물이라 더더욱 그러했다.

한미한 가문이라면 황제는 그대로 알현을 거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공비의 청을 그런 식으로 매정히 내칠 수 있을 리 없다. 불쾌하다 해도 황제는 이 만남을 감정을 내세워 거절할 수 없었다.

아스티나도 자신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요구를 강행한 건, 황궁을 나올 즈음엔 앞선 무례가 기억조차 남지 않으리라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긍정의 답은 생각보다 이르게 돌아왔다. 아스티나는 지루한 기다림이 길게 이어지지 않았음에 내심 안도하며 시녀의 안내를 받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황제가 사용하는 방은 과거와 변함이 없었다. 아스티나는 거대한 문 앞에 서 잠시 과거의 소유물을 눈에 담았다. 아쉬움을 느낀 건 아니었다. 재물에 미련이 있었다면 엘시어에게 황위를 양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감회가 새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스티나는 안으로 들어가기 전 제시가 들고 있던 함을 황궁의 시녀에게 넘겼다. 벤자민처럼 무르게 대할 상대가 아니었으므로 제시는 안에 들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신호하면 물건을 내오라 지시한 뒤, 아스티나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아스티나의 예상과 달리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하나가 아닌 둘이었다.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듯 황제는 이시스 황녀와 함께였다.

만남을 청한 상대가 도착했는데 제삼자를 내치지 않는 것은 분명 실례다. 아스티나는 황제의 심기가 편치 않음을 짐작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인사했다.

“제국의 광영을 뵙습니다, 황제 폐하. 황녀 전하.”

“반갑소, 대공비. 수확절 연회에서 보고는 처음이군. 이리 와서 앉게나.”

꽤나 시큰둥한 말투였다. 아스티나는 잠자코 이시스와 황제가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시녀가 의자를 빼 주고는 어떤 차를 내올지 물어 왔다. 아스티나는 여유롭게 요즈음 즐겨 마시는 차종을 답했다. 그에 황제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그가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며 물었다.

“독대가 필요한 용건이요?”

이시스 황녀를 내보내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자신을 곤란하게 하려는 행동임을 알았지만, 아스티나는 그저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어차피 황제를 만난 후 따로 또 찾아야 했던 인물이었다. 같은 얘기를 두 번 할 필요가 없다니 외려 기꺼운 바다.

의외라는 듯 아스티나를 응시하던 이시스가 곧 온화한 투로 말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편히 이야기 나누도록 하게.”

프리모와 대화할 때도 느꼈지만 이시스는 언제나 한발 물러서는 데 익숙한 모습이었다. 아스티나는 이시스에게 감사하다는 의례적인 인사를 돌려주었다. 그러고는 황제를 향해 운을 떼었다.

“우선 이리 급히 찾아뵙기를 청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보편적인 절차를 받지 못했음을―”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입궁한 것인지 내 한번 들어나 보지.”

황제가 대놓고 흥미 없는 눈으로 아스티나의 말을 잘랐다. 귀족들의 대화는 이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황제는 반복해서 아스티나가 저지른 무엄한 알현 요청에 대한 불만을 표하고 있었다. 그가 대공비의 청을 거절하지 못했듯, 아스티나도 그 성의 없는 대응에 가타부타 말을 더할 수 없는 입장이었으니까.

그러나 용건으로의 빠른 진입은 그녀에게야말로 달가운 일이었다. 아스티나가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폐하께서 아실지 모르겠으나, 저는 대공 전하와 혼인하기 전 벨라체 아카데미에서 수학했었습니다. 당시 위의 학년이었던 벤자민 황자 전하와도 친분이 있었지요.”

“그래, 벤자민에게 그리 듣기는 했었지.”

그에 황제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아스티나를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벤자민이 괴물 대공의 아내가 된 친구를 돕겠다며 아탈렌타로 내려갔던 일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황제는 제물이 될 신부에겐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한데 그녀가 이렇게 유명 인사가 되어 수도에 등장하다니, 꽤 감회가 새로웠다.

“예, 오늘 공식적으로는 그분을 뵈러 찾아온 것입니다.”

아스티나가 말끔한 미소를 내보이며 말했다.

황제는 그 말에 담긴 함의를 곧바로 알아챘다. 그가 궁금증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남부에서 첫째가는 거대한 영지에 사는 그대가 바실이 넓다 하여 길을 잃은 것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나는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오?”

아스티나는 아까 함을 맡겨 두었던 시녀를 불러들였다. 귀한 것이라 짐작한 것인지 시녀는 몹시도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건을 내왔다. 황제가 미간을 좁혔다.

“이게 무엇이지?”

테이블 위로 내려놓은 상자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아스티나는 천천히 잠금쇠를 풀었다. 곧 드러난 내용물에 모두에게서 신음 섞인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이것은……!”

“이게 대체!”

어찌나 놀랐는지 이시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기까지 했다. 잔 가까이로 다가가려던 그녀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몸을 물렸다. 아스티나는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혼란과 경악을 잠시간 눈에 담았다.

황제 역시 정도만 덜할 뿐 이시스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는 아예 잔을 덥석 집어 세세히 들여다보기까지 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계속해서 잔의 외관을 살피는 황제를 향해, 아스티나가 조곤조곤한 투로 설명했다.

“얼마 전 대공가의 가보를 도둑맞는 사건이 있어 창고를 정리하다가 발견했던 물건입니다.”

그에 황제가 도끼눈을 떴다. 다음 대로 넘겨주기 전까지 후계자의 잔은 당연히도 황제의 소유였다. 누구보다 그 잔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가 바로 황제라는 뜻이었다. 그가 확인한 바로 이것은 틀림없는 진품이었다.

대공비가 남몰래 알현을 청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던가. 황제가 분노 어린 투로 물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대공이 빼돌린 잔이라는 말이오?”

“아닙니다, 이것은 도둑맞은 잔과는 다른 물건입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에 황제가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다른 물건이라니, 그럼 이것이 복제품이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의미가 없지 않은가.”

황제는 실망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잔에서 미련 어린 눈을 떼지 않았다. 그가 보기엔 진품과 다를 바가 없었던 탓이다. 시들해진 음성에도 아스티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 저는 벨라체에서 정치학을 이수했습니다. 지나간 역사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이지요. 아카데미에서 저는 교수님을 도와 고문서를 분석하거나 연구에 참여할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대가 수재라는 말은 익히 들었지, 한데 그게 이 일과 당최 무슨 상관인가?”

“언제였는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습니다만, 당시 저는 한 고서적에서 흥미로운 사설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안엔 후계자의 잔을 쌍둥이 잔으로 추측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지요.”

그것이 백 년도 더 전에 읽었던 문서였던 점만 빼면 그럭저럭 사실에 기반한 설명이었다. 덕분에 성의 비밀 통로에서 잔을 발견했을 때 마티나는 그것이 가품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황제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쌍둥이 잔이라?”

“예, 폐하께서 확인하셨던 대로 진품과 다를 게 없는 물건이 아니었습니까. 저도 이것을 발견하고서야 그때 읽었던 내용의 진위를 확인했지요.”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오.”

“세세히 생각나지는 않습니다만…… 최대한 기억을 떠올려 설명드리겠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본래 그 잔은 짝이 있는 물건이었습니다. 이는 겔라토 왕국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는데, 쌍둥이 아들을 얻은 한 왕이 기쁜 마음에 똑같은 황금 잔을 두 개를 만들어 하사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보석 광산이 위치한 테스 지방이 겔라토의 옛 국토에 해당되지요. 보석이 가득 박힌 잔을 제작하는 건 그들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럼 저 물건이…….”

“예, 저는 저것이 발견되지 않았던 두 번째 잔이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소실되지 않았던 쪽이 리체드로 왕국에 이어 카라벨라 제국에까지 따라 내려온 것이고요.”

황제는 신묘하다는 듯 잔을 세세히 살폈다. 아까는 흥분하여 알아차리지 못했었는데, 대공비가 내온 것은 분실한 쪽보다 확연히 더 보관 상태가 좋았다.

아탈렌타는 대륙 전쟁에 대단한 기여를 했던 가문이었다. 그들 가문의 곳간에도 약탈한 많은 보물이 흘러들었을 것이다. 존재도 인식하지 못하고 고이 보관되어 있었던 물건이라면 이리 반짝일 법도 했다. 아무래도 사람의 손길을 탄 건 황가에 내려오던 잔 쪽이었으니.

“사실 그 내용을 마저 연구하여 잔과 함께 발표할 생각도 했습니다만…… 황가의 불미스러운 일을 수습하는 것이 우선이라 여겼습니다.”

아스티나가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얼굴에 감탄이 어렸다.

“황가를 향한 충성이 갸륵한지고.”

“필요하시다면 이 잔을 폐하께 드리고 싶습니다. 더 이상 프리모 황자 전하께 불온한 소문이 따라붙어서는 안 되니까요.”

잔을 도둑맞은 후, 당연히도 수도에는 프리모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이 퍼졌다. 후계자의 잔은 카라벨라 황가와 명맥을 함께하던 보물이었다. 그것이 하필 프리모가 물려받을 때 분실되었음에 사람들은 불길한 징조라 수군거렸다. 프리모가 황제가 될 인물이 아니라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며 음모론을 펼치는 자들도 있었다.

후계자의 명성에 흠이 나며 황제의 심려 역시 나날이 깊어 가던 와중이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구세주가 나타났음에 황제는 만면에 기쁨을 떠올렸다. 불청객을 박하던 태도는 찾아볼 수도 없이, 황제의 눈빛엔 단번에 애정이 어렸다.

“과연 영특하도다.”

“폐하의 심려를 덜어 드릴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참으로 고맙소, 대공비. 내 진작 그대와 대공을 궁으로 초청해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던 것을. 아들의 신변을 살피느라 바빠 그러지 못했소.”

근시일 내엔 대공 부부를 만나 볼 생각도 없었지만, 황제는 최대한 아쉬운 목소리를 지어냈다. 그가 따사로운 눈빛으로 아스티나를 보며 말했다.

“그대가 따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내 무엇이든 들어주겠소.”

“그렇다면…….”

기대한 바에 아스티나가 은근한 목소리를 내었다.

황제는 긴장하여 대공비의 얼굴을 주시했다. 오늘 대공비는 황가에 그야말로 엄청난 은혜를 베풀었다. 보답으로 어떤 대단한 요구가 나올지 알 수 없어 황제는 내심 긴장했다.

아스티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책을 하나 받고 싶습니다.”

“책이라?”

황당하단 듯 황제의 목소리가 허물어졌다. 자신이 지금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청력을 의심하는 황제에게 아스티나는 그가 들은 것이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정확히 말하면 책은 아닙니다. 방금 말씀드렸듯 저는 역사학에 관심이 있는데, 얼마 전 리체 지방에 있는 블란체 성에서 해독할 수 없는 문서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혹시 제게 그것을 내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스티나가 요구한 건 앤서린에게 전해 들었던 예의 그 문서였다. 황제는 기억의 끄트머리에서 겨우 아스티나가 말한 물건의 존재를 끄집어냈다.

블란체는 초대 황제 마티나의 고국이었다. 황가는 여제를 기리는 의미로 블란체 왕궁을 따로 하사하지 않고 직접 관리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곳에서 발견된 문서도 엄연히 말하면 황가의 재산이긴 했다. 즉, 원칙상 대공비가 말한 물건을 얻길 위해선 황제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해독도 하지 못한 물건보다는 후계자의 잔이 압도적으로 중요했다. 그것이 고고학자들에게 있어 얼마나 귀한 자료인지는 모르겠으나 황제에겐 그저 쓸모도 없는 헌 종이일 뿐이었다. 이것은 도무지 수지가 맞지 않는 거래였다. 황제 쪽이 폭거에 가까운 이득을 본.

말도 안 되는 거래에 황제의 눈이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그러나 그는 대공비를 향한 고마운 마음에 곧 미안함까지 더하게 되었다. 대공비는 더없이 총명한 학자의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벨라체에서 학업을 잇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개인적인 연구라도 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황제가 흔쾌히 대답했다.

“좋네, 그대가 보여 준 신의에 대한 보답으로 짐도 최대한 빨리 그것을 구해다 주겠네. 사냥 대회 전까진 받아 볼 수 있을 게야.”

어떤 무리한 부탁이 나와도 받아 줘야 하는 입장이었는데, 상대가 참으로 보잘것없는 물건을 청했음에 황제는 몹시 기분이 좋아졌다. 아스티나 역시 들뜬 표정을 내보였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은 어디서 이런 복덩이를 얻은 것인지! 그대를 황가의 가계에 들이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지경이야.”

황제가 그리 말하며 파안했다. 이시스와 아스티나 역시 그를 따라 적당한 웃음을 흘렸다. 어느 정도 정리된 분위기에 아스티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체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이상할 터이니, 저는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그래, 대공과 언제 또 찾아오도록 하게. 필히 나눌 이야기가 많겠군.”

“예, 이제라도 자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아스티나가 사근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시스는 아스티나가 돌아갈 채비를 마치는 것을 잠시간 빤히 응시했다. 곧 이시스도 아스티나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대화가 즐거운 나머지 저도 모르게 폐하의 귀한 시간을 많이 앗아 버린 듯하군요. 저 역시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폐하.”

황제는 후계자의 잔을 매만지느라 객을 붙잡을 정신도 없어 보였다. 아스티나와 이시스는 나란히 밖으로 나왔다. 제시는 주인 옆에 선 이시스를 보고 다소 놀란 듯했지만, 다행히도 별다른 내색 없이 뒤로 따라붙었다.

황제가 기거하는 궁은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고, 당연히 밖으로 향하는 복도 역시 길기 그지없었다. 한참을 말없이 걷던 이시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단하오.”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황제와 함께 있을 땐 별다른 말이 없었던 그녀다. 갑작스러운 대화였지만 아스티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시스가 자신을 따라 나왔을 때부터 예상했던 바였다. 아니, 어쩌면 기다렸던 일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박학함이 학자에 못지않았소. 내 무척이나 감탄했다네.”

이시스가 호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야말로 모범적인 황녀의 얼굴이었다. 아스티나는 그 표정이 이시스와 무척이나 어울리면서도, 동시에 몹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궁중에선 누구나 가식을 진심처럼 속이고 사는 법이다. 그러나 유독 이시스의 맨얼굴은 호기심을 자아냈다. 아스티나는 아직 이시스의 기저에 깔린 속내를 알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그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으리란 기묘한 예감이 들었다.

아스티나가 말했다.

“황녀님, 아시겠지만 저것은 후계자의 잔이 아니랍니다.”

이시스는 벤자민을 끌어들였던 바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소리를 죽이면 그 누구도 이야기를 훔쳐 들을 수 없는 곳에.

본능적인 선택이었지만 이시스는 아직 자신을 드러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 약간의 당황과 심려가 떠올랐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아까는 분명 쌍둥이 잔이라 하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대가 감히 황제 폐하께 가짜를 내어 드렸단 말이오?”

이시스의 목소리엔 황가가 기만당한 것에 대한 분노마저 서려 있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그저 담담했다. 그것이 거짓된 분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분명 황제 폐하께 말씀드렸던 대로 그 잔이 같은 시대에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물건은 맞습니다. 겉에 난 흠을 제외하면 아무도 둘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에 있어서는 완전히 다르지요.”

과거에 두 번째 잔을 발견하고도 그대로 묻어 두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아스티나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황녀님은 저 잔이 왜 숨겨져 있었는지 아십니까?”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황녀님, 아시겠지만 왕좌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하나입니다. 저 잔이 공식적으로 하나만 남겨진 것도 그 이유 때문이지요. 안타깝게도 쌍둥이 잔의 소유주들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답니다. 기나긴 내전을 겪은 이후, 왕위에 오른 것은 형 쪽이었지요. 그는 자신이 지닌 저 아름다운 예술품을 왕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아스티나의 이어진 말에 이시스의 가면은 곧 산산이 부서졌다.

“동생은 왕위 싸움에서 패배하여 평생을 동쪽 탑에 갇혀 살았습니다. 잔혹한 왕은 동생에게 주어졌던 황금 잔마저 빼앗아 국고 깊숙한 곳에 처박았지요. 스스로의 것만이 승자의 잔으로 남도록.”

말을 마친 아스티나가 음미하듯 이시스의 굳은 모습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이시스가 겨우 마른 입술을 열었다.

“……폐하께 내어 드린 것은.”

“저는 저 물건이 온당한 자에게 갔다고 생각합니다.”

“…….”

“잃어버린 잔도, 제 주인을 찾아갔겠지요?”

이시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스티나는 그녀의 눈이 전에 없이 차갑게 식은 것을 알았다. 아스티나의 얼굴에 더없이 우아한 웃음이 떠올랐다.

아스티나가 예법의 교본이라고 볼 수 있는, 그림 같은 움직임으로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조만간 다시 뵙겠지요, 초대가 늦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스티나는 그대로 이시스를 지나쳤다. 이시스는 아스티나를 쫓아오지 않았다. 주춤거리던 제시가 황급히 아스티나의 뒤로 따라붙었다. 싸늘해진 분위기에 제시는 남겨진 황녀 쪽을 돌아보지도 못했다.

긴 복도를 지나 아스티나와 제시는 마침내 바깥으로 나왔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제시가 급히 물었다.

“대공비 전하, 방금 무슨 말씀을 하신 거예요? 그렇다면 황제 폐하께 내어 드린 게 패배자의 잔이라는 말씀이세요?”

“그래, 리체드로 왕가에서 약탈한 보물의 일부를 눈에 띄지 않는 비밀 장소로 옮겨 두었던 거지. 후대로 가선 옅어진 내력이지만, 전쟁이 벌어진 당시만 해도 그들은 패배자의 잔과 승리자의 잔을 구분할 줄 알았거든.”

“하지만, 하지만…… 그럼 왜 그 사실을 알려 드린 거예요? 불경한 짓이라며 고발당할 수도 있잖아요.”

“글쎄, 황가로선 분실 사건을 수습하는 게 더 먼저일 게다. 게다가 더 불경한 짓을 저지른 쪽은 따로 있지.”

“예?”

아스티나가 걸음을 멈춰 세웠다. 고개를 돌려 뒤편을 확인하자 어느새 입구 쪽으로 나온 이시스가 보였다. 이시스의 시선이 향한 곳은 먼 거리에서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명확했다.

아스티나가 이시스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잔을 숨긴 건 이시스 황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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