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짝사랑이다(II)
“아스티나!”
휘날리던 갈색 머리칼이 그대로 나풀거리며 뺨 위로 내려앉았다. 아스티나는 제 볼을 간질이는 칸나의 머리칼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몇 번이고 반복해 불리는 이름에 물기가 담기고 어깨 역시 점점 축축해진다.
아스티나는 칸나의 등을 가볍게 쓸다가, 그대로 그녀를 밀어냈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힘에 칸나는 얼떨결에 물러섰다. 주춤거린 것도 잠시, 칸나는 아스티나의 두 팔을 쥐고는 얼굴 곳곳을 살폈다.
“어디 다치진 않았지? 몸은 괜찮아? 잠은 잘 잤니? 식사는…….”
더없이 멀쩡한, 아니 아카데미에 있을 때와 비교해 광까지 나는 아스티나를 보고 칸나는 애매하게 말을 끝맺었다.
“식사는…… 잘했나 보구나.”
칸나의 심경은 대공령까지 찾아간 벤자민이 아스티나와 대면하고 느꼈던 감정과 정확히 일치했다. 밤을 지새우게 만든 온갖 걱정을 비웃듯, 아스티나는 그야말로 좋아 보였다. 괴물 대공에게 팔려 간 비탄의 신부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대공의 저주가 풀렸다는 소문이 수도까지 퍼지긴 했지만, 레테 백작가는 얼마 전까지 그저 긴가민가해하고 있었다. 혹여 괜한 기대를 했다가 나중에 실망이 더욱 짙어질까 봐서였다.
레테 백작 부인은 사실 확인을 위해 신중하게 한 자 한 자 눌러쓴 편지를 대공령으로 보냈다. 서두는 길고 후미는 요란했지만, 요약하자면 ‘대공께서 정말 사람이 되었느냐’는 내용이었다.
백작 부인이 쓴 편지는 대공 부부가 아탈렌타를 떠나기 전날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제대로 된 답장을 쓸 여유가 없어 아스티나는 짧은 답장만을 먼저 들려 보냈었다. 온갖 의문을 드러낸 구구절절한 편지에 아스티나가 돌려준 답은 성의 없으리만치 명료했다.
[대공께서 사람이 되셨어요, 수도에서 뵙겠습니다.]
당연히 백작 부부는 혼란에 젖었다. 더 자세히 경황을 캐물으려 했으나, 이동 중에는 소식을 주고받을 수 없었다. 대신 가족들은 대공 부부가 수도에 도착했다는 말을 들음과 동시에 사람을 보냈다.
마침 백작 부부도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한 참이었기에 조우는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 눈시울을 붉힌 부모님을 상대하고 나자 콧물로 범벅이 된 칸나가 남았다.
풀 회포가 길어 보였는지 테리오드는 백작 부부를 인솔해 자리를 비켜 주었다. 금방이라도 다시 괴물 대공으로 변하는 건 아닌가 의심하던 눈도 잠시, 백작 부부는 홀린 듯 테리오드를 따라 나갔다. 확실히 대공은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 남자였다. 정확히 외적인 부분에서.
신명 나게 코를 푼 칸나가 원망하듯 말했다.
“왜 편지 안 했어?”
“바빴어.”
농담이 아니고 정말 바빴다. 아탈렌타령에서 가신들을 휩쓸기 전 몇 번 근황을 주고받았으나, 연락은 곧 자연스럽게 끊겼다. 밀린 대공령의 업무가 티타임의 여유도 앗아 갈 정도의 강도를 자랑했기 때문이다.
급한 불을 끄고 난 후에도 아스티나는 이런저런 일들로 정신이 없었다. 물리적인 바쁨보다는, 친정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는 말이 더 정확할 테지만.
대공 부부는 가문 간의 정략으로 맺어진 사이였지만 일련의 일들로 전제 조건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가장 큰 변수는 테리오드가 더 이상 기피 대상이 아니게 됐다는 점이었다. 아직은 하루의 반을 짐승으로 살아야 하는 불완전한 해결이었으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테리오드는 이전의 완벽한 대공과 다를 바 없었다.
아스티나가 가장 염려한 것은 우습게도 대공의 변화를 기꺼워할 부모님이었다. 그녀는 이 일에 레테 백작 부부의 사견이 끼어들지 않게, 앞으로의 계획이 확실해질 때까지 확언을 숨기고자 했다. 벨루아에서 소란을 벌이며 그도 다 쓸모없는 일이 되고 말았지만.
아스티나는 곤란한 화제를 잇는 대신 화살을 자매에게로 돌렸다.
“언니야말로 초콜릿은 결국 안 보냈던데. 부탁도 안 한 히센이 대신 오고.”
“히센 경은 부모님이 보내신 거지. 난 학기 중이라 외출할 시간이 별로 없었어. 장마 때문에 인편을 보내기가 힘들기도 했고, 또―”
“또?”
“……그렇게 채근하지 마. 내 잘못 아니란 말이야. 가게 주인이 장기 휴가를 갔더라구.”
“아직도 자리를 비웠어?”
“얻어듣기로는 축제가 끝나기 전까진 가게 문을 안 열겠다나 보더라.”
“아쉽게 됐네, 수도에 온 이유의 반이 사라졌어.”
아스티나가 혀를 찼다. 칸나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나머지 이유의 반은 뭔데?”
“……물론, 보고 싶었던 가족을 만나는 거지.”
아스티나는 수확절 연회 참석이라는 1순위 목표를 어렵지 않게 지워 냈다. 칸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아스티나의 옆으로 와 앉았다. 아스티나는 제 오른손을 그러쥐는 칸나의 왼손을 마주 잡았다. 칸나가 아스티나의 손등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보고 싶었어.”
“그랬겠지.”
아카데미를 떠나고 처음으로 얼굴을 보는 것이었다. 당연하다는 듯한 아스티나의 대답에 칸나가 픽 웃었다.
“내 동생은 도무지 애틋해질 틈을 안 주는구나. 그간 어떻게 지냈어?”
“잘 지냈어.”
“대공께선 어떻게 사람이 되신 거야? 정말 소문처럼 운명의 사랑, 뭐 그런 거니?”
운명의 상대라.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스치듯 웃었다. 한때 같은 낯을 운명이라 착각했던 적은 있었다.
“운명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덜어 내면 사실과 그리 다르진 않아. 대공이 사람으로 돌아온 건 입맞춤 덕분이 맞으니까.”
“아직도 안 믿겨. 그러니까, 대공께서 평생 그 상태이길 바랐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일이지.”
아스티나가 덤덤하게 덧붙였다. 칸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확해. 네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고, 대공께서도 돌아오시고. 모든 게 잘 풀리니까 그냥 다 꿈 같더라.”
칸나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아스티나의 손등을 꼬집었다. 아스티나가 눈썹만 들어 올리자 “아파?” 하고 묻기까지 한다. 아스티나는 칸나에게 같은 강도의 통증을 돌려주었다. 칸나는 꺅, 하고 비명 지르며 화들짝 물러났다. 아스티나는 그것이 어딘지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가장하는 것처럼.
“칸나.”
아스티나는 웃음기 어린 얼굴로 그런 칸나를 불렀다. 의아한 낯을 한 칸나에게 곧장 이렇게 말했다.
“난 무사할 거라고 했잖아.”
칸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다. 무어라 대답하려 했으나, 그 시도는 뻐끔거림에 그쳤다. 칸나는 이내 아랫입술을 지르물었다. 울컥하여 목소리가 잠긴 탓이었다.
아스티나는 심약한 칸나가 감당하지 못할 수위의 말을 꺼냈음을 알았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그 말을 취소하는 대신 칸나의 손을 힘 있게 그러쥐었다.
칸나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믿고 싶었지만, 믿진 않았어. 그게 제일 견딜 수 없는 점이야.”
칸나는 아스티나에게 내준 손 대신 어깨로 제 뺨을 쓸었다. 아스티나는 이것이 칸나가 처음 흘린 눈물이 아님을 알았다. 칸나의 양심은 종종 그녀의 눈가를 짓무르게 했으리라. 아스티나는 선선히 인정했다.
“내가 나빴어, 칸나.”
“맞아, 네가 나빠. 넌 자꾸 나를 못난 언니로 만드는 이기적인 애거든.”
아스티나는 벨루아에서 모두를 걱정시켰던 일을 떠올렸다. 과정의 중요함을 무시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언제나 결과에 더 많은 비중을 둬 왔던 건 사실이었다. 물론 이제 와 자신이 살아온, 혹은 살아가는 방식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때로 사람은 차악이란 걸 선택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이제 알았다. 팔에 남은 흉터에 불같이 화를 내던 아서와 겁먹은 얼굴을 한 제시, 그리고 불안해하던 테리오드까지. 결국은 모든 것이 계획대로 잘 흘러갔을지라도, 그렇다고 그들의 걱정과 염려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아스티나는 칸나의 상처를 인정했다.
“알아, 난 그렇게 가면 안 됐어.”
기분을 풀어 주려는 아스티나의 노력과는 반대로, 칸나의 눈가는 점점 더 젖어 들기만 했다. 칸나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제 손가락 사이의 좁은 틈새만 내려다보았다. 이런 때마저도 자신을 먼저 보듬는 동생이 외려 더 언니답게 굴고 있지 않은가.
칸나는 그만 코를 들이켰다. 그녀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
“도망쳐서 미안해. 아스티나. 이 말을 네 얼굴 보고 꼭 하고 싶었어. 사실 나쁜 건 나고, 잘못한 것도 다 나야. 너무 무서워서 널 저버렸어.”
칸나는 억눌러 왔던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 냈다. 그에 아스티나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칸나가 더 빨랐다. 칸나는 웃음 같지 않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거 아니, 아스티나? 난 죽지 않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비겁하게 말이야. 그런데 그렇게 널 대신 보내고 나니 스스로가 딱 죽고 싶을 만큼 혐오스럽더라.”
아탈렌타에 도착하고, 아스티나는 칸나에게 보낸 편지를 의미 없는 일상으로만 채웠었다. 칸나가 죄책감에 매몰될 것을 염려한 탓이었다. 처음 연락했을 때 이 일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 전한 것만으론 부족했을까. 칸나는 어렸을 적부터 마음이 여렸다.
아스티나는 칸나의 양심선언을 들으며 그녀의 뺨을 쓸어 주었다. 손바닥으로 흘러든 눈물은 과연 축축했다. 칸나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것과 별개로 아스티나는 그녀의 이런 모습을 좋아했다. 아스티나의 닳고 닳은 노련함은 칸나의 순수함과 꽤 합이 좋았다. 칸나가 용기 내지 못하는 일에 아스티나는 기꺼이 대신 나서 줄 수 있었다. 아스티나의 새로운 자매는 무언가를 해 주는 게 아깝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것이 동복의 정이라면, 그다지 나쁜 유대감은 아니리라.
아스티나가 칸나의 눈가로 내려앉은 제 엄지를 응시하며 말했다.
“언니는 명예를 버리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했지.”
“그건 바보 같은 말이었어. 스스로 지키지 않은 명예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야?”
칸나가 물기 어린 음성으로 반박했다. 그녀는 스스로가 위선자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신념은 타인의 희생으로 인해 지켜졌으니까.
반항 어린 칸나의 대꾸에 아스티나가 피식 웃었다.
“맞아. 그런 건 의미가 없지. 나는 평판보다는 생명 쪽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그럼…… 왜 나 대신 대공에게 갔어?”
칸나가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스티나는 칸나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을 맺었다.
“언니의 명예가 아니라, 명예를 아는 언니를 지키고 싶었으니까.”
아스티나는 귀족으로 살아남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러기를 원한 건 칸나 쪽이었다. 칸나는 계속해서 아탈렌타에 가겠다고 말하던 그날의 자신을 기억했다.
그래서 갔다. 언니를 대신해 아스티나가, 명예만 끌어안은 겁쟁이를 위해서.
칸나는 그만 숨을 들이켰다. 곧 폭우 같은 울음보가 터져 나왔다. 아스티나는 아이처럼 우는 자매를 말없이 제 쪽으로 당겨 안았다.
기숙사 방에서도 칸나는 동생의 어깨에 이슬 같은 눈물을 쉼 없이 떨궜었다. 두려움으로 손을 떨면서도 칸나는 다가오는 끝을 애써 당당히 맞이하려 했다. 작고 마른 뼈대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 없이 연약했지만, 사람의 힘이란 건 물리적인 부분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아스티나는 마냥 말랑하던 어린 볼이 제법 어른스럽게 여문 것에 약간의 생경함을 느꼈다. 분명 자신이 칸나를 보통의 자매처럼 사랑할 수는 없을 테지만, 그녀가 좀 더 제멋대로 굴 수 있도록 그 어린 치기쯤은 기꺼이 지켜 줄 수 있지 않은가.
“울지 마, 대공과 인사도 나누지 않을 생각이야?”
아스티나가 분위기를 환기하듯 핀잔했다. 대공이 자리를 비켜 주고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즈음이었다. 슬슬 부모님과의 대화도 끝났을 듯해 아스티나는 고개를 들어 시계를 살폈다. 테리오드에게 이 모습을 내보이면 곤란하겠다는 데 생각이 미친 탓이다. 때마침 닫힌 문 너머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접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테리오드의 목소리였다. 칸나의 우는 모습을 그에게 내보일 수는 없었으므로 아스티나는 거절의 말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아스티나가 입을 열자마자 칸나가 팔을 붙잡아 왔다. 칸나가 더듬더듬 말했다.
“드, 들어오시라고 해.”
“……들어오세요, 대공.”
아스티나의 허락에 곧 문이 열렸다. 테리오드는 완전히 엉망이 된 칸나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가 들어오다 말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런, 제가 말씀 나누시는 걸 방해했군요. 잠시 나가 있을까요?”
아스티나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칸나가 고개를 저었다. 칸나가 단호한 기색으로 말했다.
“하, 할, 할 말이 있어요. 대공 전하.”
“예, 말씀하십시오.”
테리오드가 칸나에게로 다가왔다. 테리오드는 칸나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고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잠시 망설이던 칸나가 제게 내밀어진 배려를 받아들였다. 눈물을 닦아 내지 않으면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할 것 같았다.
언제나 타인 앞에서 교양을 지키려 애썼던 칸나는 눈을 질끈 감고 코까지 풀었다. 위엄 있는 표정으로 콧물을 흘리는 것보다는 잠깐 창피하고 마는 게 나을 테니까.
칸나가 숨을 헐떡이며 테리오드를 불렀다.
“대, 대공 전하.”
도통 끊이지 않는 울음 탓에 잘리고 늘어진 칸나의 발음은 몹시 알아듣기 힘들었다. 스스로도 답답했는지 칸나가 주먹 쥔 손으로 제 가슴을 내리쳤다. 당황한 테리오드가 그를 만류하며 대답했다.
“천천히 말씀하세요, 듣고 있습니다.”
“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가정에 충실하, 하실 예정이신가요? 그, 그러니까, 부인을 소중하게 대해 주실 거냐고, 흐, 묻는 거예요.”
테리오드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아스티나 쪽을 돌아보았다. 한숨을 내쉰 아스티나가 먼저 나서 칸나를 제지했다.
“대답해 주실 필요 없으세요. 칸나, 대공 전하를 더 곤란하게 하지 마.”
“난 대공께 물, 물었어. 말씀해 주세요, 끅. 대공 전하.”
자매의 만류에도 칸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몹시 긴장된 기색으로 대공의 답을 기다렸다. 테리오드의 입이 문득 열렸다.
“그건…….”
테리오드는 아스티나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지 않았다. 아스티나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눈동자가 기이하게도 아주 따듯한 빛을 띠고 있다고 생각했다. 푸른빛만큼 차디차게 느껴지는 색이 또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스티나는 재차 칸나의 말을 막으려 했지만, 테리오드의 대답이 더 빨랐다.
“예, 제겐 아주 소중한 사람입니다.”
예상치 못한 답에 아스티나는 무심코 입을 벌렸다. 대공에게 과한 일을 시킨 것은 아닌가. 그가 부인의 언니를 위해 이리 말을 꾸며 낼 필요까지는 없었다. 짐을 지운 기분에 대공의 얼굴을 살폈지만, 그는 그저 담담한 표정이었다. 거짓말을 한 자가 으레 내보이는 어색함 같은 건 없었다.
대공 부부의 과장된 사랑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칸나는 테리오드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칸나가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 아스티나는 이, 이상한 애예요. 하지만 정도 많, 많아서 자기 사람한테는, 끅. 정말 잘해요.”
“알고 있습니다. 제게도 분에 넘칠 만큼 다정한 사람입니다.”
테리오드는 진지한 얼굴로 칸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경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칸나의 모든 말에 몹시 성의 있게 응대했다. 둘의 대화를 들으며 아스티나는 홀로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저리 표현될 만큼 테리오드에게 다정하게 군 기억이 도통 없었기 때문이다.
“책을 아, 아주 조, 좋아하고. 공부도 잘하고, 사, 실은 요리도 잘해요. 아니, 거의, 끅, 못하는 게 없어요. 그래서 혼자서, 흡, 다 잘할 것 같거든요?”
칸나가 목이 막혔는지 제 목젖을 짚고는 작게 기침했다. 더욱 울음기가 짙어진 눈으로 테리오드를 내려다보며, 칸나는 고개만 좌우로 내저었다.
“근데, 그래도 혼자 두지 마세요. 저희 자매는, 항상 함께였는데. 끅, 저는 아스티나가 가, 가고서 너무, 너무 외로웠거든요. 대, 대공 전하는 아스티나가 안 그러게, 잘, 잘살게 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꼭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윽, 끅, 흑……, 제 동생을 슬프게 하면, 가만, 가만 안 둘 거예요.”
이 말을 할 때만은 칸나가 무섭게 눈을 부릅떴다. 진심이 담긴 협박에 테리오드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경건히 왼 가슴에 오른손을 얹었다. 약속의 표시였다.
“아탈렌타의 성을 걸고 약조 드리지요. 부인께서 절대 눈물짓는 일이 없도록, 제가 잘하겠습니다.”
“……감사해요.”
테리오드의 확언에 칸나는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인 듯했다. 지켜보던 아스티나의 얼굴에도 어느새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칸나는 뒤늦게 엉망이 된 낯이 부끄러워졌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아스티나는 칸나의 등을 가볍게 쓸어 주고는 테리오드에게 물었다.
“부모님은요?”
“이야기를 마치고 방으로 모셨습니다. 며칠 여기서 묵으실 수 있도록 하려고요. 숙박업소에 머무는 것보다야 당연히 딸 부부와 함께 지내는 게 모양새가 좋지 않겠습니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 대답한 아스티나가 곧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아스티나는 창가로 향하는 것인 양 자리에서 일어나 칸나와 거리를 벌렸다. 테리오드는 굽혔던 무릎을 펴고 일어서 아스티나를 뒤따랐다. 칸나가 훔쳐 들을 수 없을 만큼 멀어졌을 때, 아스티나가 물었다.
“별말씀은 없으시던가요?”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희 부모님이 부담을 주시진 않았는지 묻는 거예요. 딸을 잘 부탁한다든가, 자네만 믿는다든가 하는 말이요.”
“그야…….”
“그야?”
“물론 맡겨만 달라 대답했지요.”
테리오드가 그리 답하며 눈을 휘었다. 조심성 없다 질책하려던 아스티나는 이내 제풀에 지쳐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잘못 판단했다. 대공은 처음부터 이혼 계획을 반기지 않았다. 아스티나 역시도 저주를 완전히 푸는 방법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그를 떠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많은 일을 벌인 만큼 미래의 짐은 더 무거워질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언니분이 아무래도 외출을 반기시지 않을 듯한데…….”
“밖에 나갈 일이 있나요?”
아스티나의 의아한 물음에 테리오드는 제법 자신감에 찬 표정을 지었다.
“두 레이디들을 위해 제가 특별한 걸 준비했는데, 관심을 좀 가져 주시렵니까?”
테리오드는 그대로 커튼을 열었다. 밝은 햇빛이 들이닥치며 바깥의 정경이 눈에 담겼다. 저택 입구엔 커다랗고 화려한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잘 관리된 백마는 멀리서 보아도 털이 윤기 있게 반짝였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가왔던 칸나가 어머, 하고는 바로 옆에 있는 아스티나의 팔을 쳤다. 어느새 휘둥그레 떠진 눈은 몹시 구미가 당긴 듯 보였다.
“오랜만에 만난 자매이니 더 즐겁게 시간을 보내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지루한 이들이 많은 수도엔 흥미를 자극하는 장소가 아주 많지요. 맛있는 것을 먹고 값비싼 것을 사거나, 혹은 연극을 보아도 좋고요.”
“공주님이라도 행차하는 것 같네요.”
아스티나가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의 손목을 잡아 제 눈높이로 끌어 올렸다. 부드럽게 손등으로 내려앉는 입술에 아스티나의 눈꼬리가 움찔했다.
“……이제 아주 익숙하시군요.”
그리 말하며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테리오드의 귓가를 향해 속삭였다.
“가족에게 보일 연기치고는 과하십니다, 대공.”
“그리 힘든 연기는 아니랍니다, 부인.”
매끄럽게 답한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의 뺨에 인사처럼 입을 맞췄다. 아스티나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물러섰다.
아까는 테리오드가 칸나에게 잘 맞춰 주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칸나를 안심시킨 것이 잘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바로 옆에서 쏟아지는 눈빛이 몹시 부담스러웠다. 아마 단둘이 남자마자 온갖 질문이 쏟아질 것이다.
칸나가 아스티나에게만 들릴 크기로 속삭였다.
“나가면 대공령에서 결혼 생활이 어땠는지 다 말해 줘야 해.”
아스티나는 급격히 외출이 달갑지 않아졌다.
* * *
단순히 수도에 있는 아카데미에서 학업을 이수하는 것과 오직 즐기기 위한 외출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었다. 금전에서의 제지가 없다면 더더욱 그렇다. 향락을 목적으로 본다면 바실만 한 별천지가 또 없었다.
자매는 이전에는 출입하지 못했던 온갖 값비싼 명소에 들렀다. 용돈을 받아 생활하는 학생의 신분으로는 어떠한 비용을 지출할 때 반드시 고민이 필요했다. 테리오드의 존재는 두 여인에게 그 번거롭고도 불편한 과정을 완전히 앗아 갔다.
동생의 남편이라고는 하나 아직 낯선 이라 머뭇거리던 칸나는, 약 두어 시간 후 처음 맛보는 과소비의 즐거움에 눈을 떴다. 둘은 옷을 사고 보석을 구경했으며, 마지막으론 수도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테라스에 앉았다. 테이블에 놓인 달콤한 디저트까지도 모두 완벽했다.
과일과 버터, 설탕이 듬뿍 들어간 타르트를 맛보며 칸나는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벌겋게 부어올랐던 눈은 말끔해진 지 오래였다. 칸나가 꿈결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매일이 오늘 같았으면 좋겠어.”
“수확절 연회 때문에 당분간은 수도에서 머물 예정이니까 다음 주말에도 나와.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겠지.”
“어머, 부부의 알콩달콩한 신혼을 방해하란 말이니?”
칸나가 짐짓 말도 안 된다는 기색으로 눈을 과장스럽게 떴다. 아스티나는 성의 없이 입꼬리를 늘였다. 떨떠름한 기색에 칸나가 포크를 들어 동생을 겨냥했다.
“넌 정말 정이 없어. 결혼을 했는데도 그 기질은 바뀌질 않는구나.”
“연애결혼 같은 게 아니니까.”
“우리들은 절대 꿈꿀 수 없는 그거 말이야? 아스티나, 귀족들은 모두가 결혼을 한 이후에야 배우자와 교제를 시작하는 법이야. 그렇다고 그들 모두가 사랑 없이 사는 건 아니지.”
“글쎄, 언니라고 밤 무도회의 테라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모르진 않을 텐데?”
“그건 불장난이지. 그래서 수확절 연회에서 다른 연애 상대라도 찾아보겠다는 말이니?”
“설마. 어차피 대공령으로 돌아갈 텐데.”
아스티나가 피식 웃었다. 기간의 문제를 지적하는 아스티나를 보고 칸나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너 정말 그럴 건 아니지……?”
동생의 도덕성을 걱정하는 칸나의 모습에 아스티나가 딱 잘라 답했다.
“당연하지. 불장난엔 흥미 없어.”
사실은 연애 자체에 흥미가 없지. 아스티나는 뒷말을 잇는 대신 턱을 괸 채 창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에서부터 여명이 어슴푸레하게 꺼져 들고 있었다. 온통 주홍빛으로 타오른 하늘은 정열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칸나는 언제나 아스티나의 무심한 태도에 깊은 불만을 가져 왔지만, 이번만은 그녀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점을 구경하는 동안 칸나는 대공령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무던히도 캐물었었다. 아스티나는 잔뜩 기대한 칸나에게 대공과의 소문은 모두 평판을 위해 꾸며 낸 것이라 설명했다.
모두가 말하는 것처럼 그들이 세기의 연인이 아니라면, 기혼자들이 으레 벌이곤 하는 부정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공적인 배우자와 마음을 준 정인을 따로 두는 귀족들은 수도에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아스티나는 테리오드 대공을 오로지 전자로만 대하는 듯 보였다.
로맨스를 기대했던 칸나는 다소 실망했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항상 무던한 제 동생은 그렇다 쳐도 대공의 입장은 다르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분명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태도는 아니었어.’
대공이 자신에게 잘 대해 주는 이유는 부인의 자매이기 때문이다. 대공의 눈에 담겼던 다정한 빛은 분명 가식이 아니었다. 그리 생각을 정리한 칸나가 따듯한 초콜릿을 홀짝이며 물었다.
“수도엔 얼마나 있을 건데? 정말 이번 연회만 참석하고 대공령으로 돌아갈 생각은 아니겠지?”
“그건 아직 정하지 않았어. 아마 수도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정해지겠지.”
“공적인 업무가 없으면 곧바로 대공령으로 갈 거란 뜻이야? 아스티나, 학기 중도 아닌데 수도에 있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모르는 거니?”
게다가 네 남편이 대단한 거부라면 말이야, 칸나가 그리 말을 맺으며 키득였다. 아스티나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집무실에 쌓일 보고서를 대신 처리해 줄 사람이 있다면 생각해 보지.”
“머리 아픈 건 잊고 잠시 즐겨. 무려 황궁 무도회잖아.”
“언니는 거기 참가하지도 않으면서.”
“그래, 난 시험이 있으니까.”
침울한 표정을 짓던 칸나가 이내 새침하게 덧붙였다.
“그러니 먼저 결혼해서 아카데미를 탈출한 네가 마땅히 경험담을 들려줘야겠지?”
언니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아스티나도 웃었다. 아스티나는 테이블 위를 손끝으로 두드리며 한결 가벼워진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 자리에 한 번도 안 가 본 건 아니잖아.”
“황궁 무도회는 안 가 봤지. 그게 얼마나 대단한 차이인지 몰라서 그래? 그것도 네가 대공비의 신분으로 참석한다면 말이야.”
칸나는 입장하자마자 모두의 이목을 끌 것이라며 꿈결같이 말했다.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보다야 형편이 낫겠으나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쪽이라고 편한 건 아니다. 아스티나는 그 관심이 그리 낭만적이지만은 않으리라 생각했다.
공국은 분명 독립된 영역이기에 황궁의 일에 쉬이 휩쓸리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그게 아예 정세에 관심을 끄고 살아도 된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욕망하는 자들에게 무도회는 곧 칼 없는 전장이었다. 아마 홀에 입장하자마자 제법 머리 아픈 싸움이 시작되리라.
아스티나가 짧게 혀를 차며 말했다.
“대공께선 워낙 유명세를 타는 인물이시지. 겁 없는 호사가들이 괴물이라며 과거의 흠을 잡을까 걱정되긴 하는데.”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거 아니니?”
“현실을 말하는 거야.”
“아스티나, 그렇지만 대공같이 친절한 분을 배우자로 맞이한 건 분명 행운이야.”
칸나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부인을 존중하지 않는 남자들이란 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외가의 힘이 미약한 부인의 경우 손찌검을 당하거나 폭언을 듣는 경우도 있었다. 레테 백작가는 분명 명문이었지만 부채에 딸을 팔았을 정도로 재무 상태가 좋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식을 비난하곤 하나 그조차도 상대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을 때 사용하는 것이다. 거짓된 성의마저 비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인데 하물며 부인을 진심으로 아끼는 권력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칸나는 분명 좋은 사람이었지만, 그게 그녀가 반드시 좋은 배우자를 맞이하리라는 증명은 아니었다. 혼인은 영애들의 필수적인 의무이나 그 결과에 있어서는 언제나 행운을 기대해야 한다.
아스티나는 칸나의 눈에서 미약한 부러움을 발견했다. 칸나에겐 대공이 제법 성공적인 결혼 상대로 비쳤으리라. 아스티나는 다른 결과를 한번 상상해 보았다. 대공의 옆에 자신이 아닌 칸나가 서 있는 모습을 말이었다.
저주의 문제만 아니라면, 분명 대공은 자신보다는 칸나와 결혼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테리오드는 정이 필요한 사람이고 칸나는 그것을 넘치도록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까.
아스티나가 잠시 뜸 들이고는 답했다.
“……대공은 좋은 분이시지.”
칸나는 당연히도 아스티나의 상상까지는 읽어 내지 못했다. 칸나가 타르트지를 잘게 부수며 능청을 떨었다.
“그래, 어떤 남편이 이렇게 자매끼리 시간을 보내라고 배려해 주겠니? 대공께선 확실히 센스가 있으신 것 같아.”
동생을 울리지 말라 눈알을 굴리며 협박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열렬한 추종자만 남았다. 아스티나는 새삼 뇌물의 위력을 느꼈다. 그러나 칸나가 내보인 진심 어린 미소는 물질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분이 널 많이 아끼시나 봐.”
“그럴 리가.”
“넌 이런 데에 둔하구나.”
아스티나의 부정에 칸나는 어깨만 으쓱였다. 칸나는 자신이 제법 사람의 속내를 잘 읽어 내는 편이라 생각했다. 청춘 남녀가 가득한 아카데미를 다니다 보면 더더욱 발달하는 덕목이다. 겉으로는 드러내지 못할 연정을 남몰래 키워 가는 이들이 넘쳐나는 곳이니까.
대공이 동생과 단둘이 있을 때를 보지 못했으니 그 깊이는 알 수 없는 바이나, 칸나는 그가 품고 있는 것이 분명 호감이라 생각했다. 물론 아스티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부정했다.
“대공은 내가 저주를 풀어 준 사람이라 잘해 주는 것뿐이야.”
“이미 풀린 저주잖아. 금전적으로 감사 표시를 하면 했지 이렇게 섬세히 신경 써 주실 필요까진 없는 분이시라고.”
아스티나는 테리오드가 본 성정부터 퍽 다정한 인물이며, 그 저주 역시 지속적인 보살핌이 필요한 것이라고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반만 풀린 저주는 대공에게 있어 큰 약점이었기 때문이다. 칸나가 비밀을 떠벌리리라 생각지는 않았으나 혹시 모를 실수를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방금 대공께서 상냥하시다 말한 건 언니 쪽 아닌가? 대공은 됨됨이가 좋으신 분이야, 그것뿐인 일이지.”
“아스티나. 남자가 상냥하게 구는 데는 다 마음이나 이유가 있는 법이야.”
“그가 언니에게 친절했던 것도 연정 때문이라 말할 셈이야?”
“나는 마음이 아니라 이유에 해당되는 경우지. 방금 네가 날 부른 호칭대로 난 네 언니거든, 대공의 부인인 바로 너 말이야.”
날카로운 지적에 아스티나는 얼이 빠졌다. 아스티나는 미간을 좁혔으나, 칸나의 의견을 명쾌하게 반박할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아스티나는 문득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을 감싼 흰 레이스 장갑이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섬세하게 편직된 모양새에선 장인의 노고가 느껴졌다. 이 역시 테리오드가 준 것이었다. 수도로 떠나기 전, 대공은 왜 갑자기 제게 선물 공세를 해 왔을까.
“원래 이건 제삼자가 제일 잘 보는 법이야.”
“하지만…….”
“하지만 뭐, 할 말 없지?”
아스티나는 생각에 잠겼다. 왜 자신은 테리오드의 연정을 존재할 리 없는 것으로 여겼나. 확실히 절대 벌어지지 않을 법한 일은 아니었다. 테리오드와 자신 사이를 정정하는 명칭이 바로 부부였으니까.
아스티나는 제게 입을 맞추던 남자의 열기를 떠올렸다. 다정한 말과 눈빛, 무언가를 해 주고 싶어 안달 내던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곧바로 수긍하지 못했다.
“너무…….”
아스티나의 입술이 조용히 벌어졌다. 그녀가 알 수 없이 말했다.
“운명 같잖아.”
“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칸나가 되물었으나, 아스티나는 굳이 덧붙여 설명하진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전생에서의 연인과 똑 닮은 사람을 만나고, 그에게 다시 사랑받게 된다는 건. 그야말로 이야기책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아닌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우연들이 겹쳐지면 그것은 마치 운명처럼 보인다. 테리오드가 테오도르의 얼굴로 태어나고, 마침 마티나의 기억을 가진 여자와 결혼하며, 그녀를 마음에 담게 되는, 그 일련의 연결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아스티나는 제가 못났다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모두의 사랑을 받을 만큼 대단한 매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테오도르가 다시 태어나기라도 하지 않은 이상, 당최 테리오드가 목석같은 제게 연정을 품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아스티나는 이 의심이 단순한 억측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만일 사실이라면, 그와 자신을 이 상황에 밀어 넣은 신은 과연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아스티나의 침묵이 길어지자 칸나는 더더욱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녀로서는 아스티나가 왜 운명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표현하는지 알 수 없었다.
“운명 같은 게 왜 불만이야? 모두가 그런 사랑을 꿈꾸잖아. 서로일 수밖에 없는 사랑이라니, 로맨틱하지 않니?”
“사람은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행복한 거야.”
여전히 제 손등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아스티나가 생기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실과 실을 잇는 규칙적인 이음새를 들여다보았다. 같은 색과 도식적인 모양, 그리고 그것을 위해 반복됐을 과정들을.
“어머, 제일 평범하지 않게 살고 있는 애가 뭐라는 거니?”
아스티나가 두 번의 생으로 체감한 교훈에 칸나는 코웃음만 쳤다.
* * *
수확절은 빠르게 다가왔다. 축제의 즐거움은 태생의 고귀함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왔다.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부산스러워지는 거리에 아이들은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곳곳에 휘장이 드리워지고 공연하는 유랑 악단 노랫소리가 높게 치솟은 밤, 마차는 소란을 지나 황궁에 다다랐다. 눈이 멀 정도로 휘황찬란한 궁에서도 웃음과 잔이 부딪치는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덕분에 아스티나는 저를 향한 부름을 알아채는 데 약간의 시간을 지체했다.
“준비되셨습니까?”
머리 위에서 들려온 말에 아스티나는 시선을 들었다. 테리오드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입을 열어 대답하는 대신 잠시 넓은 실내를 눈에 담았다.
황궁은 과연 화려했다. 하늘 다음의 권위자가 기거하는 공간이란 온갖 값진 것들을 응축하고 있는 법이다. 황가에 대한 충성은 전통에 기대어 기능하므로 궁은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다. 황성을 채운 장엄한 건축물은 대부분이 한 세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이었다. 아스티나는 홀을 장식한 그 모든 예술품 하나하나를 기억했다.
블란체는 북부에 위치한 나라였기에 마티나가 도성으로 삼은 것은 타국의 궁이었다. 아스티나는 자신이 들어서고 있는 홀이 왈도의 목을 베었던 장소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광경을 옆에 선 테오도르의 낯과 함께 마주한다면 실성을 의심하게 될 것 같았으므로.
“테리오드 반 아탈렌타와 아스티나 반 아탈렌타 대공 부부가 입장하십니다.”
시종이 둘의 등장을 알렸다. 문이 열리고,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팔에 손을 얹은 채 천천히 걸음을 디뎠다. 세기의 연인으로 유명한 대공 부부를 향해 무수한 시선이 꽂혔다.
‘이런 주목은 오랜만인가.’
아스티나는 내심 그리 생각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괴물 대공과 혼인하기 전까지의 그녀는 그리 이목을 끄는 인물이 아니었다. 백작가의 차녀란 무시할 수는 없되 황제처럼 마냥 대단하진 않은 신분이었으니까.
연회를 위해 주문했던 드레스는 총 열 벌로, 첫 등장이니만큼 오늘은 가장 값진 것을 입었다. 맑고 투명한 흰색의 비단은 돈을 주어도 구하기 힘든 상등품이었다. 몇 번이고 천을 덧대어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치맛자락은 곧 주인의 부를 말한다. 우아한 드레스는 아스티나의 붉은 머리칼과 몹시도 잘 어울렸다.
쇄골 위로 우아하게 얹어진 물빛 다이아몬드 목걸이도 감탄을 자아냈다. 세트로 맞춘 물방울 모양의 귀걸이까지 주인의 얼굴을 환히 밝혔다. 그 값을 따지면 어느 누구의 착장과도 비교할 수 없을 바나, 이를 사치라 표현할 수는 없었다. 그 모든 장식품들은 그녀에게 제 것처럼 꼭 들어맞았으니까.
계단을 내려서는 내내 회장의 모든 시선이 대공 부부에게로 꽂혔다. 홀로 있을 때도 빛을 발하던 대공인데 그 옆에 대단한 미인이 더해졌다. 높은 구두를 신은 대공비가 혹 걸음을 잘못 디딜까 대공은 연신 아내를 살피고 있었다. 대공 부부의 사이가 과연 소문이 아니었다며 귀부인들이 부채 뒤로 수군거렸다.
“괜찮으십니까?”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에게만 들릴 크기로 속삭였다. 아스티나는 회장에서 시선을 돌려 테리오드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입가에 띠고 있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물었다.
“무엇이요?”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있으니까요.”
“그러려고 이리 꾸민 것인데 부담스러워해서야 되겠습니까.”
아스티나는 덤덤한 목소리를 가장했다. 기실 속이 뻔히 보이는 승냥이들보다는 옆에 선 대공 쪽이 더 상대하기 곤란했다. 테리오드와 얼굴을 마주하면 종종 판단이 흐려지곤 했으니까.
아스티나는 아직 그의 속마음을 결론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되도록 칸나의 말을 머릿속에서 지워 내려 애썼지만, 그건 대공을 좀 더 주의 깊게 살피게 되는 결과만 낳았을 뿐이다.
차라리 칸나의 의심을 무시하는 쪽이 편했을까. 그러나 아스티나는 그간 자신이 보였던 무지가 단순한 모른 척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다. 테리오드의 지나친 배려는 분명 의심의 여지가 있었다.
‘착각일 수도 있지.’
대공은 외로운 사람이다. 사랑과 애착을 착각하는 이들은 얼마든지 있다.
‘단순한 속단일수도.’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징조들이 있었다. 애써 결론짓기를 피하고 있었으나 근래의 테리오드는 이상했다. 아스티나는 이성에게 보이는 다정한 눈빛과 부드러운 손길, 배려 담긴 말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이것이 속단이라면 창피를 겪게 될 것이고, 만약 사실이라면…….
‘사실이라면?’
아스티나는 좀처럼 그 뒤에 이어질 결론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오직 평소처럼 구는 데 집중했다. 다행히도 테리오드는 부인의 이상한 점을 알아채지 못한 눈치였다.
“긴장하신 듯 보였어서요.”
“글쎄요, 궁정 무도회는 처음이라서 그런 걸까요.”
“그런 것에 부담을 느끼시진 않을 것 같았는데요, 황궁까지 오는 마차 안에서도 한 점 흐트러짐이 없으셨던 걸로 기억하고.”
그의 웃음이 귓가를 스침과 함께 마지막 계단으로 내려섰다. 본래 제집이었던 공간으로 향하는 데 긴장하는 것은 조금 우습다. 아스티나는 별일 아니란 듯 가볍게 고개를 내저으며 위층을 살폈다.
가장 고귀한 자는 본디 가장 늦게 등장하는 법이다. 아직 황제는 도착하지 않은 듯 단상 위는 비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황녀와 황자들도 아직 회장 내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황실은 수확절이 시작되기 전, 이번 행사에서 발표할 중대 사항이 있다고 밝혔다. 사람들은 내심 드디어 황제가 황위를 물려줄 후계자를 정한 게 아니겠느냐며 수군거렸다. 그리고 암암리에 그 대상은 프리모 황자로 굳혀진 상태였다. 그의 상대가 될 만한 세력은 정리된 지 오래였으니까.
성정이 사납다는 평이 있긴 하나 군주 될 자라면 어느 정도의 호전적인 성향은 있음 직하지 않은가. 오히려 그가 구축한 세력에 비해 확언이 다소 늦어지는 감이 있었다.
‘당장 행차하진 않을 듯하군.’
아스티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회장을 쭉 둘러보았다. 온통 저들끼리 속닥거리기만 할 뿐, 쉽사리 앞으로 다가오는 이들은 없었다. 이미지를 탈바꿈했다고는 하나 더 전염성이 짙은 건 나쁜 소문 쪽이었다. 편지로는 잘만 안부를 묻던 사람들도 테리오드가 당장 괴물이 되기라도 할 것 같다는 양 다가오지 않고 있었다.
사교계는 그 말뜻 그대로 교류를 위한 자리이다. 공포 때문이든, 단순히 매력 없는 상대라서든 무도회에서의 침묵은 좋지 않았다.
“대공.”
아스티나가 대공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제 귓불에 닿는 숨결에 테리오드는 내심 당황했으나, 동요를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가 대답했다.
“예, 말씀하세요.”
“제 허리를 안으세요.”
“예?”
“다정한 남편 행세를 하시라는 말입니다.”
이어진 부인의 말은 테리오드를 더욱 곤혹스럽게 했다.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기 위해서라고는 하나 그녀가 먼저 이런 종류의 접촉을 권한 것은 처음이었다.
테리오드는 되도록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애쓰며 아스티나에게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그녀의 허리에 자연스럽게 감겨들었다. 테리오드는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모습에 가까이 있던 어린 영애 둘이 볼을 붉혔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대공 전하.”
때마침 누군가 말을 걸었다. 콧수염이 제법 매력적으로 관리된 중년의 사내였다. 그가 이어 아스티나에게도 격식 있는 인사를 남겼다.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대공비 전하. 저는 리올 아비드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아비드 백작님.”
아스티나는 그의 이름을 기억했다. 대공과 집무실을 공유하는 관계로 종종 그의 편지를 대신 분류하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온갖 가식적인 문장들 사이에 질려 갈 즈음, 유독 대공의 건강을 걱정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 편지를 보내와 기억에 남았던 남자였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야 비로소 주변인들의 본성을 알 수 있다고들 한다. 아스티나는 챙겨야 할 이와 그렇지 않은 이들을 확실히 기억하고 온 참이었다. 그리고 아비드 백작은 개중 전자에 해당했다.
아비드 백작이 테리오드를 향해 다분히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건강은 괜찮으십니까?”
“걱정해 주신 덕분에요.”
“사실 대공령으로 찾아가 보려고도 하였으나 도통 서신에 대한 답변이…… 아니, 죄송합니다, 괜한 화제를 꺼냈군요.”
“심려치 마세요. 이미 지난 일이 아닙니까. 백작님이 염려해 주신 덕분에 지금은 그저 건강합니다.”
“예, 못 본 사이 외려 안색이 좋아지셨습니다. 아름다운 부인께서도 함께이시고요.”
아비드 백작이 샴페인 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꽤나 기분이 좋은 듯 그는 술을 한 모금 입에 담았다. 혈색이 오른 볼을 보아 이것이 첫 잔은 아닌 듯 보였다. 아직 궁의 주인인 황제가 등장하지도 않은 걸 생각하면 상당히 빠른 진도였다. 테리오드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아비드 백작, 술이 과하십니다. 오늘은 저택에 걸어서 들어가셔야지요.”
“아니, 제가 하인들의 등을 신세 지는 게 그새 소문이 다 났다는 말씀이십니까?”
유쾌한 대응에 아스티나도 작게 웃었다. 아비드 백작이 빙그레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아스티나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대공비 전하께서 제 농담 취향이 꽤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아스티나가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음은 좋지 않습니다만 적당한 음주는 사람을 들뜨게 하지요. 취해도 좋은 날이 있다면 오늘 같은 때가 아니겠습니까.”
“대공비께서는 저 꽉 막힌 부군과는 다르게 뭘 좀 아시는군요. 황궁에서 드물게 저희를 위해 국고를 개방하는 날인데, 기대에 부응하도록 실컷 마셔 줘야지요.”
그리 말하며 아비드 백작이 기세 좋게 단번에 술을 들이켰다. 근처를 지나가던 시종이 그에게서 빈 잔을 거두어 갔다. 술이 담긴 새 잔을 받아 들며 아비드 백작이 말했다.
“대공비 전하께서도 한잔하시지요.”
“대공께서는…….”
“아, 저는 술이 영 약해서요. 잘 즐기지 않습니다.”
아스티나의 양보에 테리오드가 짐짓 아쉬운 척 술잔을 밀어냈다. 아스티나는 두 번 권하는 대신 본인이 순순히 한 모금을 삼켰다. 쌉싸름한 맛이 꽤나 입맛을 당겼다. 오랜만의 음주라서인지 술이 달게 느껴졌다.
“……좋은데요.”
아스티나의 감탄에 아비드 백작이 크게 파안했다.
“대공 전하와 다르게 대공비 전하는 풍류를 아시나 봅니다. 제가 한 잔 더 가져다 드릴까요?”
“감사한 말씀이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오늘은 천천히 즐길 예정이라서요.”
예의 있게 거절한 아스티나가 테리오드의 팔을 쓸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아비드 백작은 흐뭇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드물게 정말 보기 좋은 부부야.’
테리오드가 수도에서 머물던 시절 영애와 깊게 교류하는 것을 보지 못해 여자에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가정을 꾸리고 나서는 좀 다른 모양이었다. 자연스러운 접촉으로 미루어 보아 대공 부부는 과연 소문처럼 사이가 좋은 듯했다. 테리오드가 힘든 시절을 이겨 내고 좋은 가정을 꾸렸다는 사실에 그는 약간의 감동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당연히도, 아비드 백작은 아내의 갑작스러운 접촉에 테리오드가 몹시 당황했다는 사실은 알아채지 못했다.
테리오드가 제 팔에 감긴 아스티나의 손 위로 은근히 손을 겹치려 할 때였다. 위층에서부터 소란이 번졌다.
“황제 폐하께서 도착하셨나 봅니다.”
테리오드는 아쉽게 손을 거두며 아스티나에게 작게 속삭였다. 커다란 나팔 소리에 회장 내의 소란이 잦아들었다. 단상과 꽤 먼 자리에 서 있었기에 앞에 선 사람들이 시야를 가린 상태였다. 여럿이 등장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얼굴까지 잘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앞으로 걸어 나가는 대신 제자리를 지켰다. 모르는 이들이 산재한 자리다. 굳이 황궁 무도회에 처음 참석한 티를 낼 필요는 없었다. 늙은 황제의 얼굴이야 나중에라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니 그다지 호기심이 생기진 않았다.
황제는 으레 하는 인사말로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짧게 끝날 줄 알았던 개회사가 길어짐에 몇몇 이들이 지루한 낯을 떠올렸다. 집권 기간 동안 민생을 안정시키기보다는 제 욕심을 채우는 데 집중했던 자답지 않게, 황제는 제법 푸근하게 들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모두들 그간 잘 지내었는지 모르겠소. 건강이 좋지 않아 자주 얼굴을 비치진 않지만 짐은 언제나 신민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사오.”
가느다랗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건강이 좋지 않다 말한 것치고는 정정한 기색으로, 황제가 두 팔을 펼쳤다.
“춤곡을 시작하기 앞서, 오늘 이 자리를 빌려 전할 기쁜 소식이 있소.”
오늘 발표하겠다던 중대 사실이 드디어 나오려는 모양이었다. 대부분은 이제 곧 황제의 뒤에 선 프리모 황자가 앞으로 나오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황제가 전한 건 전혀 다른 소식이었다.
“얼마 전, 어릴 적 요양을 위해 궁을 떠났던 짐의 아들을 찾았소. 안타깝게도 지병으로 황위를 이을 수는 없는 아이이나, 소중한 황실의 핏줄을 찾았다는 건 분명 대단한 기쁨이오. 고귀한 피가 제 자리를 찾기 위해 돌아왔으니 내 이를 반갑게 소개하지 않을 수 없는 바요.”
황제가 다정한 음성으로 제 아들을 불렀다.
“벤자민, 나와서 인사해라.”
익숙한 이름에 아스티나가 설핏 미간을 좁히는 사이, 새 황자가 우아한 걸음걸이로 나와 황제 옆에 섰다. 그는 몹시 깔끔하고 정중한 태도로 자신을 소개했다. 오래 궁을 떠나 있었다는 사실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예상치 못한 기품에 호기심이 일었는지 앞에 서 있던 이들이 단상 가까이로 붙었다. 덕분에 가려져 있던 시야가 드러났다.
‘저건…….’
아스티나는 가까스로 자신의 살을 꼬집으려는 충동을 참아 냈다. 여전히 단상은 멀었고 그 위에 선 이들의 얼굴은 흐릿했으나, 그녀는 6년간 교류했던 친구를 알아보지 못할 천치가 아니었다. 하물며 그 목소리가 저리도 선명하게 홀을 울리고 있음에야.
아스티나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벤자민?”
벤자민이었다.
아스티나는 당황한 낯을 숨기지 못했다. 당최 이것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벤자민의 성인 레안드로스는 한미한 남작 가문이었다. 레안드로스 남작의 먼 친척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신분을 숨기고 있었던가.
‘시골 출신치고 꽤 귀공자스럽다 싶기는 했다만…….’
잘생긴 얼굴과 몸에 자연스럽게 밴 매너는 아카데미에서도 눈에 띄었다. 학우들이 그런 벤자민을 두고 바다 건너 나라의 왕자가 아니냐며 키득였던 기억도 있었다. 그러나 당연히도, 그저 농일 뿐 진담으로 꺼낸 이야기는 아니었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아스티나는 단상 위에 선 벤자민을 눈으로 좇았다. 그러나 아스티나가 무심코 앞으로 나서기도 전, 벤자민은 등을 돌려 뒤로 물러났다. 황제가 무도회를 즐기라는 덕담으로 이야기를 마침과 동시에 춤곡이 시작되었다.
“새 황자라니, 당황스러운 일이 다 있군.”
아비드 백작이 얼떨떨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비단 아비드 백작만의 반응도 아니었다. 새 얼굴의 등장으로 홀 안의 모두가 소란스러웠다. 후계 다툼이 정리되고 오래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하나였다.
“황궁 내 세력 판도에 달라질 점이 있을까요?”
아비드 백작이 진지한 음성으로 물어왔다. 테리오드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폐하께서도 그 점을 감안하여 후계자가 되지 못할 아들임을 못 박으신 거겠지요.”
아비드 백작도 그리 생각하고는 있었으나, 타인이 확언해 주자 더욱 안심이 되었다. 아비드 백작은 모험보다는 안정 쪽이 더 기꺼운 인물이었다. 그가 한시름 놓은 기색으로 작게 말했다.
“하기야 폐하의 말씀처럼 새 황자께 병이 있어 보이지는 않더군요. 어미와 같이 서지 않은 걸 보아 외가가 꽤나 한미한 듯한데, 프리모 황자 전하의 상대가 되진 않겠지요.”
이름 말고는 새 황자에 대해 아무것도 알아낸 게 없는 상황이다. 테리오드는 확신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나 굳이 말을 보태진 않았다.
잠시 찾아온 정적에 아비드 백작은 그제야 아무 말 않고 있는 아스티나를 발견했다. 대공비를 대화에서 소외시켰다고 생각한 듯, 그는 다소 당황스러운 음성으로 화제를 바꾸었다.
“그러고 보니 춤곡이 시작되었군요.”
프리모 황자와 이시스 황녀가 먼저 나서 춤의 시작을 알린 상태였다. 몇몇 여인은 새 황자에게 관심을 보였으나 어딜 갔는지 홀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레이디들의 관심은 곧 눈앞의 상대에게로 돌아갔다. 춤 신청을 받은 영애들이 짝의 손을 잡고 속속들이 플로어에 들어차고 있었다.
“술에 춤이 더해지면 그보다 더 즐거울 수 없지요. 어떻습니까, 대공 전하? 왕년의 멋진 솜씨를 부인께 보여 주시는 건.”
아비드 백작의 장난스런 권유에 테리오드가 아스티나를 응시했다. 대공은 부인에게로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저와 함께 한 곡 추시겠습니까, 부인?”
아스티나는 벤자민을 찾던 눈을 돌려 테리오드를 돌아보았다. 미묘한 당황이 어린 얼굴로, 그녀가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럴까요.”
아스티나는 겨우 표정을 가다듬고 테리오드의 손을 잡았다. 대공 부부가 춤을 추러 나섬에 아비드 백작의 뒤로 다가오던 젊은 부부가 아쉽다는 얼굴로 물러섰다. 선점자가 떠나려는 듯해 슬슬 접근해 볼 참이었는데, 정작 말을 붙이려던 상대가 플로어로 나가 버렸다.
중앙으로 나선 아스티나와 테리오드는 정중히 서로를 향해 인사했다. 곧 가까이 다가선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아스티나도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를 잡았다. 눈앞에서 벌어진 놀라운 일에 잠시 넋이 나가 있었는데, 살갗에 닿는 따듯한 온기가 정신을 일깨웠다.
아스티나는 생각을 다잡았다. 벤자민과는 후에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리라. 우선은 처음 참석한 황궁 무도회를 잘 마무리하는 게 중요했다.
테리오드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춤을 맞춰 볼 생각은 못 했었군요.”
“연습이 필요한 일은 아닙니다.”
“예, 부인께선 뭐든지 다 잘하실 것 같아 제가 많은 걸 잊습니다.”
아스티나의 호언이 괜한 것 같지 않아, 테리오드가 부드럽게 웃었다. 과연 박자에 맞춰 밟아 오는 스텝이 능숙하다. 아카데미에 재학하는 동안은 사교계에 얼굴을 잘 내비치지도 못했을 텐데 언제 이렇게 연습한 걸까.
테리오드는 아스티나의 춤 솜씨가 가장 까다로운 가르침을 받는 황족들에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테리오드는 무의식적으로 아스티나가 당연히 잘하리라 여기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어떤 일에서든 부족함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으니까.
“제가 따로 준비하는 게 없어도, 항상 모든 걸 완벽히 해내시니까요.”
테리오드의 칭찬에 아스티나는 머쓱해졌다. 워낙 오래되어 실수했던 기억이 더 흐릿하긴 하지만, 그녀에게도 모든 게 서툴렀던 때가 있었다. 아스티나가 기억 저편을 더듬으며 애매하게 대답했다.
“많이…… 연습했었습니다.”
처음 작위를 얻고 나서, 그녀는 생활 습관과 자세를 바꾸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해야 했다. 가장 애를 먹었던 건 귀족들의 문화였다. 집시 출신이니만큼 몸치는 아니었으나 귀족과 평민의 무용은 완전히 결이 달랐다. 아무리 재능이 대단해도 어렸을 적부터 반복해 벼려 낸 귀족 영애의 솜씨보다야 서투를 수밖에 없는 분야였다. 날 때부터 숨 쉬듯 익히는, 몸에 밴 예법들은 단기간에 따라잡을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따라서 그녀는 무도회에 참석해서도 이야기만 나눌 뿐, 춤 신청을 모두 거절하곤 했다. 마티나가 왈츠에 익숙해진 건 거절할 수 없었던 상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춤춰 줘.’
그 웃음기 어린 목소리, 장난스러운 눈빛을 기억한다. 스텝이 서투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자신에게 춤을 권하던 그 남자를.
누가 보아도 변덕 어린 흥미였으나 왕의 청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서투른 파트너를 선택한 건 왕의 결정이니 그에 따른 피해도 그가 감수해야 했다. 마티나는 구둣발이란 점을 경고했지만 테오도르는 웃기만 할 뿐 청을 물리지 않았다. 마티나는 내심 짜증스러워하며 왕의 손을 잡았다.
마티나는 무도회가 있을 때만 여성복을 차려입곤 했다. 익숙하지 않은 구둣발은 얼얼했고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치마는 거추장스러웠다. 그를 사랑하지도 않았던 때였다. 걷기만도 부담스럽던 차에 왕의 요청은 그저 곤란했다. 무엇보다 마티나의 고생을 알아주기에 왕은 궁중 예법을 호흡만큼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어색한 스텝에 마땅히 놀림이 돌아오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의외로 간지러운 칭찬을 남겼다.
‘그대는 역시 바지가 더 어울리는 것 같아.’
마티나는 그가 드레스가 안 어울린다는 말을 퍽 고상하게 돌려 말할 줄 아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뒤로 이어진 말에 그 평가는 곧 정정되었지만.
‘다리가 예뻐서.’
테오도르가 속삭이듯 덧붙였다. 마티나는 구둣발로 테오도르의 발을 밟았다. 그녀가 무표정한 낯으로 대꾸했다.
‘희롱이십니다.’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도 내밀라 했지.’
테오도르는 지지 않고 반대편 발을 내밀었다. 딱 좋게 튀어나온 발 받침을 마티나는 사양하지 않았다. 구두 굽을 사정없이 내리찍으며, 마티나가 사근한 웃음으로 답했다.
‘주군께서 원하신다면.’
짓눌린 발등이 꽤나 아릴 법도 한데 테오도르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드레스 자락에 가려져 다른 사람들은 이 무엄한 장난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테오도르는 아예 마티나를 제 위에 얹은 채 그대로 스텝을 밟았다. 움직이는 바닥에 마티나가 비틀거리자 허리를 더욱 단단히 잡아 지탱했다.
곡이 마무리되던 시점이었다. 선율이 가장 높게 치달았을 때, 테오도르는 몸을 기울여 마티나의 허리를 아슬아슬하게 꺾는 묘기를 선보였다.
마티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워낙 유연성이 좋아 삐끗하진 않았지만 상대의 심술로 벌어진 일이라는 점엔 변함이 없었다. 유치한 보복에 마티나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경고했다.
‘두고 보십시오, 내일 대련이 이보다 더 즐거우실 테니.’
테오도르는 꽤 멋들어진, 그러나 아는 사람이 보기에는 퍽 재수 없게 느껴지는 미소를 띠었다.
‘신하의 충성심에 눈물이 앞을 가리는군.’
이후 마티나는 이를 악물고 연습하여 꽤 솜씨 좋은 춤꾼이 되었다. 그 결과로 자연히 테오도르와 춤을 추는 일이 늘어난 것이, 그의 의도였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바다.
“아, 조심하세요.”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의 뒤쪽을 넘겨보며 말했다. 바로 옆에서 춤을 추던 커플이 부딪칠 것처럼 간격을 좁혀 온 탓이었다. 테리오드가 아슬아슬하게 아스티나를 반대쪽으로 당겼다.
“대공께서도 리드가 자연스러우십니다.”
절묘한 솜씨에 감탄한 아스티나가 칭찬했다. 테리오드는 무언가 찔리기라도 한 모양새로 황급히 변명했다.
“막상 실전 경험은 많지 않습니다. 아탈렌타가 자식 교육에 워낙 병적으로 민감하다 보니 연습을 많이 했을 뿐이라.”
“그렇군요.”
아스티나가 심드렁히 대답했다. 사람은 무언가 약점이 생기면 별것 아닌 일에도 지레 겁을 먹고 과민 반응을 하곤 한다. 아탈렌타는 그러한 심리에 퍽 잘 들어맞는 가문이었다. 괴물이 되어 가는 핏줄을 숨기기 위해, 그들은 누구보다도 완벽해지려 애썼을 것이다.
아스티나는 눈앞의 테리오드를 잠시 빤히 응시했다. 그러한 환경에서도 놀랍도록 이타적으로 자라난 특이한 남자를.
아스티나가 문득 입을 열었다.
“어렸을 적, 외롭지 않으셨습니까?”
“예?”
의외의 질문에 테리오드가 무심코 되물었다. 그의 과거사를 아는 이라면 보통 무게 있게 꺼낼 주제였다. 그러나 아스티나의 어조는 비교적 가벼웠다. 테리오드는 자신의 불행이 성역처럼 취급되지 않는 것이,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테리오드는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주변은 온통 소란스러웠다. 사람들의 대화를 덮는 커다란 선율 덕분에 테리오드는 솔직함을 꺼내 들 수 있었다.
“외로웠습니다, 많이.”
“부모님을 원망하시나요?”
“어렸을 적엔 그랬던 것도 같군요. 하지만 결국은 다 같은 피해자 아니었겠습니까.”
“대공은 마음이 넓으시군요.”
아스티나의 칭찬에 테리오드가 글쎄요, 하고 작게 답했다. 그가 이어 알 수 없는 어조로 운을 떼었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을요?”
“무던히도 사랑한 부모를 잃고 괴로운 것과, 애초에 정을 주지 않아 죽음조차 무감히 느끼는 것 중 무엇이 나은 걸까.”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고민이 자신의 것과 꽤나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사랑하여 괴로워지는 것과 사랑하지 않아 외로워지는 것 중 어느 쪽을 택해야 했을까. 마티나는 테오도르와 전자의 경우를 이미 한 번 겪었다. 차라리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사람은 본래 자신이 얻지 못한 것을 욕망하게 되는 법일까, 테리오드가 피식 웃으며 꺼낸 결론에는 반대의 소망이 담겨 있었다.
“그래도 다정한 포옹 한 번쯤은, 받아 보는 편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긴 합니다.”
곡이 끝났다. 아스티나와 테리오드는 다시 간격을 두고 짧은 마무리 인사를 했다. 오래간만에 긴 춤을 추어 플로어 밖으로 벗어나자 몸이 더웠다. 아스티나가 무심코 쟁반을 든 시종에게 시선을 주자, 테리오드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마실 것이라도 들고 오지요.”
아스티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장외로 나왔다. 무도회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남몰래 제 짝을 찾아 숨어들기에는 다소 이른 때다. 평소라면 가득 찼을 테라스는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아스티나는 개중 가장 가까운 곳으로 들어섰다.
“취하진 않은 듯한데…….”
아스티나가 그리 중얼거리며 손등을 뺨에 대었다. 밤바람이 꽤나 시원하게 느껴졌던 탓이다. 그러고 보니 이 몸의 주량을 잘 알진 못했다. 미혼의 레이디가 인사불성이 되기엔 장애물이 너무도 많다. 식사를 하며 종종 와인을 곁들이기는 해도 두어 잔을 넘어선 적은 없었다.
“아스티나.”
아스티나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섰다. 놀란 듯 그녀의 눈은 다소 크게 뜨인 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음료를 가지러 오기로 한 파트너의 목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불한당의 등장을 경계하는 대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벤자민.”
그 부름에 벤자민이 스치듯 웃었다. 커튼으로 완전히 테라스를 가린 그가 아스티나에게로 다가왔다. 옷을 갈아입은 듯 아까 입고 있던 것과 착장이 달라져 있었다. 아무래도 남들의 눈을 의식한 듯했다. 한 번 본 황자의 얼굴을 세세히 기억할 리는 없고, 눈에 띄는 건 아무래도 걸치고 있던 옷 쪽일 테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네가 어떻게…….”
“미안해, 어떻게 봐도 널 속이게 된 모양새라.”
급하게 의문을 쏟아 내는 아스티나에게, 벤자민이 먼저 사과했다.
“널 못 믿어서 밝히지 않았던 건 아냐. 궁에 돌아올 줄은 나도 몰랐기에 말하지 못했어.”
“나도 네게 배신감을 느꼈다거나 하는 건 아냐. 다만…… 놀랐지, 몹시도.”
아스티나가 애매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6년이나 알아 온 친구가 갑자기 황자가 되었다. 놀라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아스티나는 혹 실례가 될지 모르는 어휘를 자제하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어쩌다 궁으로 돌아오게 된 거지? 폐하께서 널 찾아내신 건가?”
“아니, 폐하께선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내 존재를 인지하고 계셨어. 사생아 출신은 아니라는 소리야. 일단은 적법한 후궁에게서 난 자식이니까. 후계자 싸움에 겁을 먹은 어머니가 나를 궁 밖에서 자라게 하셨었지.”
벤자민이 먼저 민감한 부분에 있어 쐐기를 박았다. ‘일단은’이라는 미묘한 뉘앙스가 귀에 걸렸지만, 아스티나는 굳이 그것을 캐묻진 않았다. 그녀가 의아해한 건 다른 부분이었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궁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한 거지? 네가 그런 욕심이 있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벤자민은 그리 출세에 목을 매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모든 수업에 성실히 참가했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성공에 대단한 열의를 보인 적은 없었다.
지위는 사람에게 많은 짐을 지우는 법이다. 의무를 다하는 건 개인의 의지지만 벤자민은 제게 주어진 일을 무시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몹시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기에, 역설적으로 책임이 필요한 자리에는 나서지 않으려 했다. 그런 그가 곤란한 지위를 떠맡은 건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아스티나를 응시하던 벤자민이 툭 내뱉듯이 말했다.
“아스티나 네가 말도 안 되는 결혼을 했으니까. 나는 그런 상황을 타개할 힘이 없었고.”
“그게 무슨 상관이지? 나를 구제해 주기라도 하려 했단 말인가? 벤자민, 네가 아무리 내 친구라도 그럴 이유는…….”
맥락 없는 대답에 아스티나는 자연히 미간을 좁혔다. 반사적인 반문 뒤로, 그녀의 목소리가 이내 조용히 잦아들었다.
친구의 결혼이 장래를 저당 잡힐 이유는 되지 않는다. 벤자민은 그녀의 결혼이 말도 안 된다고 평했지만, 그의 희생이야말로 진정 터무니없었다. 아스티나는 그 사실에 주목했다. 벤자민은 이런 일을 벌여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가 자신을 친구로 생각했다면,
“내가…… 아스티나, 너를 좋아했으니까.”
이래서는 안 된다.
반 박자 빨랐던 예감에 아스티나는 그 충격적인 고백에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들어 벤자민을 응시했다.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 비밀을 정리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황자라니.’
놀라운 신분이기는 하나 황제였던 그녀의 과거에 비견할 바는 아니다. 그의 고백도 그 자체만 놓고 봤을 땐 복잡한 문제가 아니었다. 마음에 없는 상대는 거절하면 그만이었다. 아스티나를 가장 혼란스럽게 한 건 바로 그의 진짜 성이었다.
‘벤자민이 피델리오가의 핏줄이라니.’
벤자민이 황자라고 하면 자연히 그의 선조는 엘시어가 되었다. 친남매처럼 지냈던 엘시어의 후손이라니…….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아스티나는 소름이 끼쳤다. 친우의 증손자를 꼬여 내다니 엘시어를 볼 면목이 없다. 아스티나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도리질을 쳤다.
“안 돼, 이건…… 아니야. 미친 것 같군.”
그 중얼거림에 벤자민은 몹시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믿지 못하겠다는 듯 소름 끼쳐 하는 표정은 고백한 당사자에게 몹시 뼈아프게 다가왔다. 아스티나의 과거를 알지 못하는 그에게는 그저 싸늘한 거부일 뿐이었다.
“이럴까 봐 그간 티를 내진 않았어. 우린 이미 친구였고 그 관계를 깨부수고 싶진 않았으니까. 놀랐다면 미안하다.”
벤자민이 변명하듯 덧붙였다. 그의 목소리는 언뜻 초조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아스티나는 그제야 자신이 친구의 고백에 경기까지 일으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스티나가 황급히 해명했다.
“놀랐을 뿐이야.”
그러나 벤자민은 그다지 충격을 벗어던진 표정이 아니었다. 아스티나는 이 고백을 빠르게 정리할 수 있는 길이 깔끔한 거절뿐이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표정을 가다듬은 아스티나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네 마음을 받아 줄 순 없어. 벤자민, 나는 이미 기혼자다. 너도 알다시피.”
그것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미혼의 황자에게 고백받고 있는 상황이 우습게도, 아스티나는 유부녀였다. 그러나 벤자민은 그녀가 과거에 했던 약속을 지적했다.
“대공과는 헤어질 거라고 했잖아. 혹 그가 너를 붙잡은 건가? 그렇다면 내가 널 돕겠어.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도록.”
“그런 게 아니야.”
“그런 게 아니면, 대공과 정이 들기라도 한 거야? 그래서 마음이 바뀐 거라면…….”
“이건 그와는 관련 없는 문제야. 벤자민, 나는 너를 친구 이상으로 본 적이 없어.”
아스티나가 딱 잘라 말했다. 거부만을 말하는 아스티나의 모습에 벤자민은 잠시 침묵했다. 그가 작달막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알고 있어.”
“벤자민.”
“알고 있었어. 네가 내게 마음이 없다는 것 정도는.”
그가 고개를 숙였다. 아스티나의 얼굴을 마주하고는 차마 남은 속내를 털어 낼 수 없다는 것처럼.
“그래서 대공령에 찾아갔을 때도 거짓말을 했어. 돌아올 게 거절밖에 없다는 것쯤은 이미 예감하고 있었거든. 이번에야말로 새로운 기대를 한 것도 아니고.”
벤자민은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눈에 담았다. 친구로만 접근했던 첫 시작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고백할 엄두도 내지 못해 우정만 굳힌 비겁함이 문제였을까.
그러나 벤자민은 알고 있었다. 모든 인간관계에는 ‘아닌 사람’이 있다. 성향이 맞지 않은 이를 만났을 때 종종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하듯, 아스티나에게 자신은 연인이 될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벤자민은 저를 위해 마음 한편 내주지 않을 여자를 질긴 시선으로 응시했다.
“아스티나, 난 너를 위해 죽을 각오를 하고 궁에 들어왔어. 과거에 내 존재를 이미 한 번 지워 냈던 이 피비린내 나는 황궁에 말이야.”
“애석하게도 난 너의 선택을 책임질 수 없어. 내가 강요한 게 아니니까.”
아스티나는 때로 사람이 매정해야 할 순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맺고 끊는 건 확실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종류의 일이다. 그러나 벤자민은 제멋대로 품은 연정의 보답을 강요하는 파렴치한이 아니었다. 그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네게 부담을 주려고 한 말이 아니야. 내 각오를 말한 거다. 네가 바라지 않는다면 나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을 거야. 믿고 안 믿고는…… 네게 강요할 수 없는 문제겠지만.”
“…….”
“나는 너의…… 도피처 정도는 되어 주고 싶었던 거다. 너는 도무지 울지 않는 강한 사람이지만, 혹 네게 힘겨운 일이 있을 때 잠시 품을 내어 줄 수 있는 정도는 되고 싶었거든.”
벤자민은 사랑하는 여자를 구하지 못하는 무력한 기분을 다신 겪고 싶지 않았다. 아스티나가 도움을 원하기 이전에, 벤자민은 먼저 스스로가 기댐 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분명 사랑하는 여자에게 거절의 답을 들은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녀의 확언은 그의 예감보다 훨씬 더 뼈아팠다. 하지만 열병처럼 앓았던 진득한 사랑에 드디어 답을 얻었다. 본인에게는 결코 털어놓을 수 없었던 감정을 고백한 것만으로 충분히 의미 있지 않은가.
벤자민은 힘겹게, 그러나 진심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스티나, 나는 네가 원하는 걸, 원하는 방향으로 돕겠어. 그게 내가 네게 주는 사랑이야.”
아스티나는 물끄러미 벤자민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생각보다 벤자민이 엘시어와 닮은 점은 눈에 띄지 않았다. 비슷한 것이 있다면 단 하나, 반짝이는 금발쯤일까.
몇 대를 걸쳐 흐려진 피는 아스티나가 향수에 젖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피가 섞였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벤자민은 엘시어와 달랐다. 테리오드가 멀고 먼 선조인 테오도르와 똑 닮았다는 점과 비교되는 일이었다. 물려받은 피의 농도는 벤자민 쪽이 더 짙을진대 왜 그에게서는 엘시어의 외관을 찾아볼 수 없을까.
오히려 닮은 건 외모보다는 관계였다. 마티나의 수하이자 믿음직한 친구였던 엘시어처럼, 벤자민도 아스티나의 친구였으니까. 그마저도 엘시어가 마티나에게 연정을 품은 적은 없었다.
벤자민은 그의 선조와 전혀 다른 인물이었지만, 그럼에도 아스티나는 그에게서 옛 얼굴을 발견해 냈다. 그녀를 위해 헌신하던 올곧은 기사를.
아스티나가 말했다.
“벤자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너는 꽤 어설픈 신사였지.”
아스티나는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스스럼없이 대련을 청하던 벤자민을 기억했다. 그의 어린 손은 어느새 단단한 사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그 간극에서 문득 깨달았다. 6년의 세월은 작은 호감을 깊게 변질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변하지 않은 건 아스티나 하나였다. 그녀는 자라지 못했으니까.
“너는 완성된 숙녀였고 말이야.”
벤자민이 설핏 웃으며 그 점을 지적했다. 거절의 말을 들은 이후임에도 그는 여전히 친절한 친우의 모습이었다. 아스티나는 이전보다 편한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네가 사과시키겠다며 아돌프를 데리고 왔을 때 나는 꽤나 놀랐어. 솔직히 말하자면 검술반에서 좋은 대접을 기대하진 않았거든. 나는 도무지 타인의 비위를 맞출 재간이 없는 성격이니까. 그래도 너는 편견 없이 내게 다가왔지.”
아스티나가 대련에서 이겨 연무장을 차지한 후, 아돌프는 약속대로 그녀가 있을 때면 그곳에 걸음하지 않았다. 적당한 사과가 있었다면 아스티나도 결정을 번복했을 테지만 아돌프는 제 자존심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런 아돌프를 데리고 와 아스티나에게 사과시킨 장본인이 바로 벤자민이었다. 아스티나가 벤자민에게 호감을 가지고 교류를 이어 왔던 것도 그 일 때문이었다.
“너는 좋은 사람이다. 너라면 나 말고도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벤자민의 눈을 마주하며, 아스티나가 진심으로 말했다. 그녀가 담백하게 말을 맺었다.
“그러니 벤자민, 그런 약속은 더 소중한 누군가에게 해 주도록 해.”
단칼에 자르는 아스티나의 말에 벤자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겨우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
“내게 기회라도 줄 순 없는 건가?”
“…….”
“대공과 헤어지게 된다면, 그 언젠가는 내게 올 수도 있다고…… 그런 희망마저도 안 되는 거겠지?”
아스티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을 가로막은 다른 상대가 있었으니까.
“새 황자께 유부녀를 유혹하는 지저분한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싸늘한 음성이 내려앉음과 동시에, 벤자민이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았다. 아스티나의 얼굴에도 따라 곤란한 빛이 떠올랐다. 커튼을 열어젖히고 등장한 건 대공이었다. 조금 전 고백했던 여자의 남편이 나타났음에 벤자민은 몹시 당황했다.
그러나 벤자민은 곧 평정을 되찾았다. 그는 이 결혼의 불합리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판단하기로 대공은 아스티나에게 소유권을 주장할 자격이 없었다. 신부를 사지에 밀어 넣을 뻔한 신랑을 적합한 배우자라고 볼 수는 없을 테니까.
벤자민이 대공을 노려보며 말했다.
“지저분한 취미라니요. 돈으로 신부를 산 무뢰한이 할 말은 아닌 듯합니다, 대공.”
“벤자민!”
아스티나가 앞으로 나서 둘을 중재하려고 했지만 테리오드 쪽이 더 빨랐다.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테리오드가 벤자민에게로 성큼 다가섰다. 상해를 입힐 만한 물건을 들고 있지는 않았으나 그 걸음은 더없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벤자민도 장신이었지만, 테리오드 쪽이 더 눈높이가 높았다. 테리오드가 벤자민을 내려다보며 스산히 중얼거렸다.
“부끄러움을 알면 이만 알아서 물러갈 법도 한데.”
“연적 앞에서 꼬리를 말고 도망갈 정도로 자신 없는 감정은 아닌지라.”
벤자민의 쏘아붙임에 테리오드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대공이 조롱하듯 말했다.
“황자님, 보기 추하십니다.”
“뭐요?”
벤자민이 표정을 구겼다. 테리오드가 입가에 걸린 비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아무리 포장해도 방금의 일이 지저분한 수작이었음엔 다름이 없습니다. 남의 부인을 탐내시다니, 파렴치한 짓도 적당히 하셔야지요. 일국의 황자께서 이리 밑바닥을 보여서야 되겠습니까?”
테리오드의 날 선 응대에 아스티나는 당혹한 낯을 떠올렸다. 아스티나가 알았던 테리오드는 타인에게 이런 험한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생각지 못한 반응에 아스티나는 둘을 말리지도 못했다. 때문에 먼저 침착함을 되찾은 건 벤자민 쪽이었다. 벤자민은 붉혔던 얼굴을 가다듬고는, 한껏 가시 돋친 어조로 되물었다.
“그게 얼마나 갈 것 같습니까?”
“뭐?”
“아스티나는 내게 일 년 후 대공과 이혼할 생각이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그녀는 한 번 결정한 걸 잘 바꾸는 성격이 아닙니다.”
그것은 테리오드도 익히 가슴에 담아 둔 발언이었다. 벤자민은 여유를 되찾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돈으로 여자의 자유를 앗은 대공에게 야유를 보내듯이.
“그 작은 기회나마 잘 끌어안고 살아 보십시오, 오래가진 않을 테지만.”
테리오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들었다. 벤자민을 내려다보는 테리오드의 눈에 흉흉함이 깃들었다. 테리오드가 핏줄이 선 목으로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전하. 그 작은 기회조차 황자님께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걸, 좀 아셔야 할 것 같은데.”
“건방 떨지 마. 그녀의 마음을 못 얻은 건 당신도 마찬가지야.”
“그래도 그녀는 내 아내야.”
벤자민의 지적에도 테리오드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으르렁거리듯 말을 맺은 테리오드가 검지로 벤자민의 어깨를 밀어냈다.
“혼인 서약서가 황궁으로 날아든 이상, 개새끼들은 적당히 꺼지셔야지.”
“이게…….”
벤자민이 반사적으로 주먹을 들어 올렸다. 새 황자가 대공의 얼굴에 주먹질을 하는 말도 안 되는 사건을 터트리기 전, 아스티나는 가까스로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둘 다 그만하세요. 대공, 상대하실 필요 없습니다. 벤자민, 너는 이게 무슨 무례지?”
어쩌다 두 남자를 사이에 둔 여주인공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나. 연극의 한 장면 같은 상황에 골이 다 아파졌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흘렀는지 모를 일이었다. 테리오드가 아니어도 누군가 엿들었다면 곤란해졌을 고백이었다. 후에 이야기하자며 진즉 벤자민을 돌려보냈어야 했는데 자신이 안이하게 반응했다.
벤자민이 무어라 변명하기도 전, 아스티나가 싸늘한 목소리로 상황을 정리했다.
“벤자민, 이만 돌아가.”
자신의 편을 드는 아스티나를 보자 테리오드는 우습게도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반대로 벤자민의 표정은 완전히 일그러졌다. 아스티나의 성격상 법적인 남편의 편을 드는 게 당연한 상황이었다. 벤자민도 자신이 이성적이지 못한 행동을 했음을 인지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짝사랑 상대를 앗아 간 불한당을 앞에 두고 평정을 찾을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욕지거리라도 쏟아 내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벤자민은 그게 아스티나를 더 곤란하게 만들 뿐이라는 걸 알았다. 어찌 됐든 대공과 아스티나는 공적인 부부 사이였다. 벤자민 자신은 함부로 끼어들 수도 없는.
벤자민이 입술을 깨물며 먼저 뒤로 물러섰다. 대공도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음에 잠시 망설이던 그가, 이내 마지막 조언을 남겼다.
“아스티나. 프리모와 이시스에게 다가가지 마. 이시스의 관심을 사서도 프리모의 눈에 거슬려서도 안 돼. 대공비의 자리쯤 되면 풍파에 휘말리지 않기도 힘들겠지만, 너는 똑똑하니까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러고도 잠시간 대공을 쏘아보던 벤자민이, 못내 할 말이 남은 표정으로 아스티나를 응시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짧게 고개만 한 번 더 저어 보였을 뿐이었다.
벤자민이 곧 걸음을 돌려 테라스를 빠져나갔다. 테리오드는 벤자민이 사라지기까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언제부터 들으셨습니까?”
아스티나가 곤란한 음성으로 물었다. 테리오드는 그제야 아스티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테리오드가 딱딱함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게 중요합니까?”
“……거절했습니다. 전하와의 혼인 기간 중에 부정을 저지를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그 말은, 혼자의 몸이 되면 저 남자의 손을 잡기라도 하시겠다는 뜻입니까?”
벤자민과의 사이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려 했던 것뿐이다. 이혼 후라 해서 다른 남자를 만날 생각은 없었던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공격적인 태도에 당황했다. 그의 과민 반응은 그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테리오드가 피식 웃으며 속삭였다.
“부인, 너무 안이하십니다.”
그의 찬 눈이 아스티나의 어깨 너머로 굴렀다. 난간 너머로 흐드러진 나뭇잎에선 바람이 불 때마다 소란이 일었다. 테리오드의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벤자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너는 꽤 어설픈 신사였지.’
아스티나를 찾아 주변을 돌아다니던 중, 커튼 너머로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얼떨떨하게 걸음을 멈춰 세웠던 테리오드는 이어지는 말에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드문드문 들려오는 대화는 몹시 작았지만, 그럭저럭 맥락을 알아챌 정도는 되었다.
‘대공과 헤어지게 된다면, 그 언젠가는 내게 올 수도 있다고…… 그런 희망마저도 안 되는 거겠지?’
이건 사랑 고백이다.
자신이 더 늦게 도착했다면 남자의 토로는 더 길게 이어졌을 테고, 그렇다면 아스티나의 마음을 뒤흔들었을 수도 있었다. 괴물의 곁에도 동정으로 남았던 여자다. 공평한 자비가 타인에게도 내려진들 어찌 불만을 표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는 그것이 자신의 경우처럼, 동정만은 아니었다면?
‘그녀도 황자와 같은 마음을 품었을까.’
테리오드는 그녀가 수도에 두고 온 연인이 있음을 알았다. 옛 연인이라 착각하고 그녀가 쏟아 냈던 고백은 제 심금까지 울리지 않았던가.
테리오드는 벤자민이라는 이름을 기억했다. 무려 대공령까지 검을 선물해 왔던 남자다. 아스티나는 황자를 친구라고 말했지만, 과거의 연인을 숨기기 위해 거짓을 말했을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른 테리오드는 가슴팍에 불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가 성큼 아스티나의 앞으로 다가섰다. 무서운 기세에 아스티나는 무심코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바로 뒤엔 난간이 있었다. 테리오드는 어렵지 않게 아스티나의 앞에 다다랐다.
“아니, 안이한 건 제 쪽이었군요. 부인께서는 처음부터 이혼을 생각하셨던 것을.”
테리오드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감쌌다. 그의 진득한 시선이 아스티나에게로 쏟아졌다. 아스티나는 제 눈 밑을 문지르는 테리오드를 막지 않았다.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래요, 나를 떠나겠다고 하셨었지요.”
“……그건 벤자민과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이 와중에도 제 앞에서 다른 남자를 보호하시다니, 잔인도 하셔라.”
그가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언뜻 차게 느껴지는 목소리와 반대로, 뺨을 감싼 그의 손은 뜨거웠다. 테리오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가 화를 내는 것이 참으로 몰염치하지 않습니까.”
“애초에 대공께서 화를 내실 만한 일은―”
“그래요, 주제 모를 참견임은 나도 압니다. 하지만 부인, 이건 기억하셔야지요.”
테리오드가 평소와 같은 상냥한 투로 경고했다.
“제가 말씀드렸었지요, 괴물은 사람 된 염치를 모른다고. 그렇게 다정하셔서는 안 된다고요.”
“…….”
“그러니 제가 자꾸 욕심을 내는 게 아닙니까.”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에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가까워지는 입술에 아스티나는 급히 팔을 뻗어 테리오드를 붙잡았다. 늘 자연스럽게 입맞춤에 응해 왔던 것과 비교되는 반응이었다. 입술이 완전히 닿기 전 테리오드는 제자리에 멈추었다. 느릿하게 그녀의 눈동자를, 코를, 뺨을 응시하던 그가 곧 조용히 물러났다.
아스티나의 침묵은 테리오드의 의심을 확신으로 굳혔다. 사랑한 연인이, 저는 될 수 없는 그 남자가, 그 인연이 그리도 소중해서.
테리오드가 싸늘히 웃으며 말했다.
“수도에 두고 오셨다는 그 남자가 바로 저치이십니까? 이전의 연인을 보고 나니, 다른 남자와 입을 맞추는 데 새삼 죄책감이라도 느껴지시나 보지요.”
당혹스러울 만치 뜨거운 분노였다. 오롯이 그녀만을 보는 눈동자엔 열렬함이 담겨 있다. 테리오드의 어깨를 잡은 아스티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스티나는 그 터무니없는 오해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에겐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으니까.
아스티나는 떨리는 손을 뻗었다. 천천히 위로 미끄러진 손끝이 남자의 목을 눌렀다.
“저를 그 남자로 착각하셨을 때는 그리도 열렬하셨는데.”
그가 속삭임과 동시에, 아스티나는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그에게서 손을 떼어 냈다. 남자의 살갗 밑으로 맹렬한 박동이 느껴졌다. 서둘러 뜀뛰는 심장을 곧 토해 내기라도 할 것처럼.
아스티나는 테리오드가 말하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대공을 테오도르라고 착각하고 저질렀던, 처음의 그 키스를 말하는 것이다.
당연히도 그건 저주를 풀기 위한 목적으로 했던 것과 확연히 달랐다. 그와 입 맞추는 일이 잦았다고는 하나 결코 테오도르에게 했던 것처럼 행할 수는 없었으니까.
아스티나가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아니, 아닙니다. 그런 게…….”
도통 혀가 제 것같이 움직이지 않았다. 끝내 그녀의 목소리가 완전히 잦아들었다. 꽉 막혀 버린 성대를 대신해 본심이 가슴 아래에서 아우성쳤다.
아니야. 그런 게, 그래서는 안 되는데.
아스티나는 인정했다. 자신은 부정하고 싶었다. 곤란할 뿐인 마음을 인지하여 스스로를 머리 아픈 상황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섣부른 고백으로 상처받지 않으려 애썼지만, 숨기는 행위조차 그저 서툴렀다. 이리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제 마음을 숨길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애초부터 그가 내내 보여 주고 있었던 답은 하나였다. 왜 전처럼 키스해 주지 않느냐는 물음에서 다른 뜻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아, 이리도 뻔한 것을 어째서 몰랐나.
“그래도 그에게로 돌아가실 수는 없답니다, 부인.”
비겁한 괴물이 다정히 속삭이는 소리.
선연히 쏟아지는 질투를 마주하며, 아스티나는 당연히도 깨달았다.
날 사랑한다, 이 남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