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짝사랑이다(I)
수확절 연회까진 여유 있는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아스티나는 부지런히 수도로 떠날 채비를 마쳤다. 지름길을 이용할 수 없었기에 다른 귀족들보다 이른 시점에 출발해야 했다. 주문한 옷은 제작 기간을 맞추기 위해 다른 인편으로 보낼 예정이었다. 숨겨야 할 것은 대공 부부의 참석 여부가 아닌 테리오드의 비밀이었으므로 중요한 물건은 공개적으로 이송할 참이었다.
따라서 대공 부부의 이동 자체는 규모가 상당히 약소했다. 본래 계획에서 추가된 일행은 제시 하나였다. 스스로의 몸을 챙길 수 있는 여성이라는 점에서 제시는 퍽 일행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대공비를 보필할 수 있다는 영광에 제시는 눈을 반짝이며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가기 싫다며 뻗대던 아서도 참석 의사를 전해 왔다.
“사고만 치지 말아라.”
두 제자를 모두 돌보게 된 히센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 불만은 후에 합류한 제시보다는 아서 쪽을 향해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사고를 친다면 후자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네네.”
아서가 성의 없이 대답하며 앞서갔다. 잔소리를 귓등으로나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과연 이 일행으로 무사히 수도까지 갈 수 있을까.’
보통의 여행이었다면 이리 걱정하지 않았겠지만 히센이 호위해야 하는 건 다름 아닌 대공 부부였다. 그들 개인의 무위와는 상관없이 막대한 인력이 달라붙어야 마땅했다. 혹시 모를 만약의 위험이라는 게 허용되지 않는 위치의 사람들이었으니까.
히센이 심려가 깊은 얼굴로 아스티나에게 말했다.
“대공비 전하, 제가 저놈을 믿어야 할까요?”
“그대가 그리 편애하면 제자 하나가 필경 억울해지지 않겠나.”
“제일가는 편애를 하고 계신 건 대공비 전하 쪽이시죠. 제시에게 주시는 관심의 반이나 아서에게 줘 보십시오. 제 고생이 훨씬 덜할 겁니다.”
“내 편애는 사실 자네 쪽에 가 있지. 자네는 특별한 내 첫 제자니까.”
히센은 다소 놀랐다. 아스티나가 이렇게 믿음을 내보이는 건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검술을 배우는 데 있어서는 히센도 아서나 제시와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이견의 여지 없이 완승하고는 상대의 온갖 빈틈을 지적하는 것이 아스티나의 대련 방식이었다.
히센은 자신이 술을 좋아하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아스티나에게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독설에 ‘난 재능이 없는 걸까…….’ 하고 훌쩍이며 넘긴 술병만 해도 셀 수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실력이 점점 일취월장하는 데다 가끔 돌아오는 칭찬이 달다 보니 도통 그만둘 수도 없었다. 참으로 마약 같은 스승이다.
드문 응원에 히센은 눈시울까지 붉혔다.
“전하……. 저를 그렇게 믿어 주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니 일행들 인솔은 믿음직한 자네가 맡도록.”
“…….”
잊고 있었다. 그녀의 칭찬은 새로운 일을 맡기기 위한 전조라는 것을.
히센은 한숨을 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레테 백작의 호위로 오랜 기간 근무했던 그로서는 이 구성이 영 마음에 차지 않았다. 대공 부부와 제시, 히센, 아서 이렇게 다섯에다 마부 명목으로 데려온 기사가 고작 둘이라니.
‘그나마 후자라도 있으니 다행인가.’
마차를 정비하고 있는 군기 잡힌 기사들을 보자 그나마 마음이 풀어졌다. 마부 따위를 하기엔 지나치게 고급 인력들이었으나 보호해야 할 인원을 더 늘릴 수 없어 내려진 특단의 결정이었다. 모두 대공과 긴밀한 인물들로 언뜻 보아도 충성심이 대단했다.
대공의 상태를 생각하면 이 정도가 가장 합리적인 조합이긴 했다. 내심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아스티나에게 우려의 말을 더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길 가다가 마주칠 강도, 혹은 협잡꾼 정도야 아스티나 혼자서도 모두 벨 수 있을 것이다.
“준비 끝났습니다.”
정비를 마친 기사가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짐마차에 실린 것은 수도까지 가는데 필요한 경비와 식량, 간단한 옷가지뿐이었다. 귀족들이 여행을 떠날 때 여러 행렬이 뒤따르는 건 귀부인들의 필수 소양, 즉 드레스의 어마어마한 부피 탓도 있다. 간단한 블리오와 로브로만 찬 옷 가방은 하녀 혼자서도 너끈히 들 수 있을 무게였다.
커다란 마차 하나면 짐과 일행 모두를 태울 수도 있었겠지만, 최종적으로 일행은 두 개의 마차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사용인과 주인의 이동을 분리하겠다는 권위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아스티나는 실리를 아는 인물이었으므로 먼 길을 이동하는 데 쓸데없이 짐을 늘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편함만을 강조하기에, 그녀의 남편에겐 무시할 수 없는 특이점이 하나 있었다.
“이게 뭡니까……?”
히센이 한 손에 들고 온 제 짐을 바닥에 떨구며 되물었다. 그의 눈앞엔 그다지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 놓여 있었다.
“여기에 타야 한다고요?”
“장거리 여행이 편할 수는 없느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스티나의 근엄한 대답에 히센이 아연한 음성을 냈다. 히센은 겉으로는 평범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쇠창살이 빽빽하게 들어찬 특제 마차를 보고 입을 떡하니 벌렸다.
특이하게도 다른 것들처럼 옆면이 아닌, 뒤쪽으로 문이 나 있는 마차였다. 커다란 두 개의 쇠문을 열어젖히고 나면 쇠기둥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즉 문을 두 번 열어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흉악한 범죄자라도 이송할 것 같은 모양새의 탈것이 안이라고 아늑할 리 없었다. 늑대가 된 테리오드가 찢어 버릴까 싶어 가죽 시트는 들여놓지도 않았다. 쇠로 만들어진 의자는 당연히도 끔찍한 승차감을 자랑했다. 출발 전까지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은 건 누가 봐도 고의였다.
아스티나가 히센을 위로하듯 말했다.
“하루의 반만 고생하도록.”
애초에 대공을 위해 설계된 물건이었다. 당연히도 테리오드를 제어하기 위해서는 아스티나도 그 옆에 있어야 한다. 대공이 눈에 띄게 온순해진 건 사실이지만 아스티나는 본인이 자리를 비울 때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아스티나는 스스로의 엉덩이뼈를 끝장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므로 대공이 사람인 시간마저 쇠창살에 자신을 가두지는 않기로 했다. 그리고 주인이 사용하지 않는 동안에는 당연히 아랫사람들이 그 안에 타야 했다. 본인의 결함으로 졸지에 다른 일행들까지 감금하게 된 테리오드는 민망함에 먼 산만 바라보았다.
아서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자마자 극심히 반발했다. 그는 대공의 사촌 되는 권위로 제 선생과는 달리 열성적으로 거부감을 피력할 수 있었다.
“난 저기 못 타!”
예상한 반응이었기에 아스티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준비한 다른 마차도 넷 정도는 넉넉히 탈 수 있으니까요. 아서와 함께 이동해도 될 듯합니다.”
워낙에 제멋대로인 아서의 성정을 알고 있는 테리오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과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긴 했으나 열흘도 넘는 일정이었다. 연애 사업을 이유로 사촌 동생과 평생 척을 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서와 테리오드, 그리고 아스티나가 함께 이동하는 쪽으로 상황이 대충 정리되었다. 제시는 아서와 같은 마차를 쓰지 않아 차라리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벨루아에서 돌아온 이후 아서는 왠지 모르게 제시 쪽을 흘끔거리곤 했기 때문이다. 제 흠을 찾는 것이 분명하다며 제시는 아서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하향 조정했다.
“크네…….”
제시가 창살로 된 마차 문을 열며 중얼거렸다. 대공의 크기를 고려해서인지 마차 자체는 몹시 컸다.
어차피 교대로 바꿔 탈 예정이므로 못 견딜 것도 없었다. 그녀를 거둔 대공비도 같은 고행을 할 예정이니 앓는 소리를 내진 않기로 했다. 제시는 씩씩한 걸음으로 먼저 마차에 올라탔다.
“스승님, 들어오세요. 생각보다 괜찮아요. 둘이 타니까 넓고 좋네요.”
그 쾌활한 목소리에 아서는 무심코 제시 쪽을 돌아보았다. 히센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짐을 던져 넣고는 마차로 올라탔다.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던 아서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서는 정리된 상황을 속으로 읊어 보았다.
‘둘이 탄다고……?’
젊은 남녀가 한 마차 안에서 한참을 이동하게 된다니. 딱 정분이 나기 좋은 환경이었다. 아서는 제시를 히센의 애인으로 오해했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이번 여행 동안 그게 정말 실제가 될 수도 있다.
아서로서는 분명 상관없는 일이었으나, 그 상상은 어쩐지 몹시 거슬렸다. 아서는 잠시 골똘히 고민한 후에야 제 불쾌감의 근원을 찾았다.
후배가 스승의 애인이 된다니. 이 무슨 하극상이 따로 있는가. 과연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서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리도 못한 채로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스승님이 고생하는데 제자 된 도리로 호강할 수야 없죠.”
“……네가 내 제자 아서가 맞냐?”
히센은 천지가 개벽했다는 표정으로 아서를 응시했다. 아서는 어깨를 으쓱이며 성큼성큼 제시 옆에 가 앉았다. 히센과 제시가 붙어 앉게 둘 수는 없었으므로 사이에 틈은 두지 않았다. 히센은 사람 좋게 허허 웃으며 건너편에 자리 잡았다.
아서는 최근의 일로 제시를 조금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보게 된 상태였다. 히센은 좋은 기사였으나 연애 상대로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아서는 제시를 위해서라도 히센의 접근을 막아 주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제시를 단 한 번도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본 적 없는 히센이 들으면 억울해할 소리였다.
“다른 마차에 타신다면서요?”
여행이 불편하진 않겠다며 내심 안심하고 있던 제시가 아서의 등장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리가 넓은데도 굳이 붙어 앉는 모양새가 이상하다.
이것이 신종 괴롭힘은 아닌가 싶었던 제시는 눈치를 보며 자리를 좀 더 왼편으로 옮겼다. 그러나 아서는 굳이 엉덩이를 움직여 그녀 가까이로 왔다. 몸이 닿진 않았지만 애초에 비좁게 앉을 필요가 없는 큰 마차였다. 제시의 눈이 의심으로 세모꼴이 되었다.
“왜 이렇게 가깝게 앉으세요?”
“내가 옆에 앉는 게 싫어요?”
“저기 자리 넓잖아요.”
“싫으면 싫다고 말해요.”
그의 말투에 반사적으로 짜증을 내려던 제시가 멈칫했다. 평소라면 비꼬는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 어쩐지 목소리가 유순했다. 항상 치켜 올라가 있던 눈매가 풀어진 걸 보면 히센 앞이라 성질을 죽인 건 아니었다.
오늘 기분이 좋아서 시비 걸 생각도 없나. 다소 안심한 제시는 솔직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싫어요.”
“……싫어?”
“네.”
“아직도 내가 싫다고?”
생뚱맞은 질문에 제시는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아서가 추궁했다.
“전에 나보고 고맙다고 했잖아요?”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근데 이런 건 왜 물어보세요?”
“아니 저번엔 나보고 고맙다고 했잖아. 싫은 사람한테 고마울 순 없는 거 아니야?”
어쩐지 물음이 다급했다. 제시는 그를 진정시키듯 양손을 들었다.
“도련님께서 인간관계를 잘 모르시는 것 같으니까, 조언 겸 말씀드릴게요.”
“그래, 어디 한번 들어나 보죠.”
“……스승님, 이 소름 끼치는 존대는 그냥 포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히센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아서가 제시를 다그쳤다.
“말하다 끊지 말고.”
“음, 전…… 이제 도련님 별로 싫진 않아요. 어쨌든 절 구해 주셨으니까. 근데―”
“근데?”
“그렇다고 별로 좋지도 않아요.”
“…….”
“전에 말씀드렸던 대로 저는 도련님이랑 별로 부딪치고 싶은 생각 없어요. 그대로 간섭 안 하고 살면 서로 편할 것 같아요.”
아서는 무어라 반박하기 위해 입을 뻐끔였다. 벨루아에서 제시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잘해 주려고 한 것인데, 그녀는 서로 아는 척하지 않는 편이 편하겠다고 한다. 호의로 벌인 일에 이리 매몰찬 대답을 받으니 아서는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동시에, 제시의 말이 몹시 일리 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제시를 향한 아서의 반발감은 이미 한풀 꺾인 상태였다. 제시의 인생은 스스로 살게 내버려 두라는 아스티나의 말이 도통 잊히지 않은 탓이다. 아서도 제시도 더 이상은 쓸모없는 기 싸움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 서로 간섭하지 말자는 제시의 말을 따르면, 그들 사이는 그대로 깔끔히 정리되는 셈이었다.
“내, 내가 딱 원하던 바로군.”
아서가 겨우 말을 더듬으며 대꾸했다. 제시는 그런 아서를 이상한 눈으로 흘겼다. 히센은 겉옷을 깔아도 딱딱한 의자에 연신 한숨을 쉬었다.
승자는 맨정신으로 쇠창살 안에 갇히는 수치를 맛보지 못할 대공 하나였다.
* * *
히센의 걱정과 달리 수도로 가는 여정은 꽤나 순조로웠다. 다른 귀족들이 들를 큰 도시를 우회하느라 시일은 지연되었지만 인적이 드문 길이라 다른 여행객과 마주칠 일이 없었다.
굳이 불편한 점을 꼽자면 테리오드가 늑대의 모습일 때는 마을에 들어갈 수 없다는 점이었다. 어중간한 저녁 즈음 마을에 다다랐을 때는 근처에서 야영을 하며 아침까지 기다려야 했다.
일정이 넉넉한 만큼 서두를 필요가 없었기에 보급은 여유 있게 이루어졌다. 일행은 육포나 건과일로 버티는 대신 느긋하게 조리를 하곤 했다. 호위 대상의 신분이 워낙 대단한 탓도 있었다. 자신들은 풀 쪼가리를 씹어도 대공 부부에겐 짐승을 사냥해다 살덩이를 바치겠다는 아랫것들이 포진해 있음에야 식사에 품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엔 제시 쪽으로 기대의 눈길이 쏟아졌으나, 그녀가 ‘푸른 나그네 집’의 주방에 걸음하지 않았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당연히 제시에게 식사를 맡길 작정이었던 기사들은 퍽 당황했다. 그들도 여행 중 간단히 조리할 수 있는 음식에는 나름대로 식견이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배를 채우는 수준이었다. 주인들의 미식과는 도무지 격이 맞지 않는다.
발을 동동 구르던 기사들은 몇 차례 영양적인 ―그러나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맛있다고는 할 수 없는― 식사를 내놓았다. 이틀간의 식사 끝에 아스티나는 결국 숟가락을 내려놓고 냄비를 집어 들었다.
가까이 지냈던 히센조차 아스티나의 솜씨에 몹시 놀랐다. 그가 생각하기로 그녀는 본인 손으로 무언가를 해 먹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고귀한 레이디가 주방으로 들어갈 일이 대체 어디 있는가. 그러나 아스티나는 간단히 수급할 수 있는 식재료에 통달해 있었으며, 조리 실력이 썩 나쁘지 않기까지 했다. 아니, 오히려 훌륭한 수준이었다.
“이런 건 다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히센이 감탄하며 물었다.
아탈렌타를 떠나고 여러 시일이 지나 있었고 아스티나는 매번 새로운 메뉴로 일행을 놀라게 했다. 바로 어제 들렀던 마을에서 식재료를 넉넉히 사 온 참이었기에, 아스티나는 오늘 영양 가득한 스튜를 끓이기로 마음먹었다.
한 솥 요리답게 조리법은 간단했다. 첫째로 돼지기름을 볶다가 깍둑썬 감자와 당근을 익힌다. 그다음 두툼한 베이컨을 큰 덩이로 잘라 넣으면 곧 고소한 냄새가 올라온다.
“맛있어 보여요.”
옆에서 아스티나를 돕던 제시가 침을 꿀꺽 삼켰다. 기름기가 튀기며 마치 비가 내리는 듯한 소리가 번진 탓이었다. 귀와 코를 자극하는 음식에 더욱 배가 고파졌다.
아스티나가 냄비 안을 살피며 대꾸했다.
“부모님께서 여관을 운영했다면서, 거기선 익히 볼 수 있는 음식 아닌가?”
“거긴 전문 식당이니까요. 야영 중 이렇게 근사한 걸 먹게 될 줄은 몰랐어요.”
“하기야 여행치고 몹시 편하기는 하구나. 소꿉장난 같기도 하고.”
아스티나가 따듯하게 주변을 밝히고 있는 모닥불을 보며 말했다. 안전이 염려스러웠다면 불을 피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황권이 안정돼서인지 카라벨라는 전체적으로 치안이 좋은 편이었다. 인적 드문 길엔 산적들이 있기 마련이나 과거처럼 많은 수는 아니다.
마티나가 집시 생활을 하던 시절엔 산이 무척이나 위험한 곳이었다. 레타 집시들의 검술이 그들 일족의 기원에서 전승된 건 사실이나, 사용될 일 없는 유산이었다면 일찍이 소실되었을 것이다. 그녀들이 검을 익힌 건 전통보다는 생존을 위해서였다. 여자가 대다수인 무리가 습격을 받지 않기도 어려웠다. 마티나의 어미인 오웬이 무리 내에서 맡고 있던 공식적인 직책은 경비였다.
그러나 아탈렌타를 떠나고 일주일의 시간 동안, 일행은 단 한 번도 위험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들이 겪은 가장 큰 위기는 바로 돌부리였다. 험한 길을 버티지 못한 마차 바퀴가 헐거워진 통에 새것으로 갈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반 시진이 지나지 않아 모두 해결했다.
여럿을 먹일 양이라 조리에는 꽤나 많은 시간이 들었다. 야채의 색이 짙어지자 아스티나는 냄비 안을 가볍게 휘저었다. 기름기가 배어 나온 베이컨이 보기 좋은 갈색빛으로 익어 있었다.
싸구려 와인 한 병을 모두 붓자 냄비 위로 수증기가 올라왔다. 알코올이 날아가며 포도주 향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화력이 좋아서인지 보랏빛 국물은 금방 팔팔 끓어올랐다. 염분이 강한 베이컨을 넣어 따로 간을 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아스티나가 기름을 냈던 돼지비계를 골라 건져 내자 제시가 질문했다.
“저건 먹는 용도가 아닌가요?”
“글쎄, 먹어도 상관은 없지만 그 정도로 식재료가 모자라진 않으니까.”
보급품이 모자랄 땐 살코기 없는 비계만으로 기름기를 보충한 적도 있었다. 그마저도 없을 때가 많았으니 꽤 험난한 행군이라 하겠다. 물론 여러모로 부족할 때야 먹는 것이었으므로 아스티나는 아까운 기색도 없이 모두 걸러 냈다.
“여행 중 버터를 쓸 순 없으니 대신 넣는 게다. 꽤 원초적인 풍미가 있기도 하고.”
눈치를 보던 늑대 테리오드가 슬렁슬렁 아스티나 옆으로 다가왔다 제 옆구리를 찌르는 괴물 대공의 등장에 제시는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깜짝이야!”
여러 밤을 지내며 대공의 변화를 보아 왔긴 하나 집채만 한 늑대가 무섭지 않기도 어렵다. 제시가 황급히 옆으로 비키자 테리오드가 바닥에 떨어진 비계 냄새를 맡았다. 제시는 다소 안쓰러운 눈으로 그 모습을 응시했다.
“대공께서는 이 맛있는 걸 못 드시네요.”
“대신 노숙 걱정은 없으시지.”
아스티나가 무심히 답했다. 그가 사람일 때만 마을로 들어갈 수 있었던 덕에 대공이 체감하는 마차 탑승 시간은 길지 않았다. 테리오드는 딱딱한 의자에 앉아 산길을 달리는 고행도 겪지 못했다.
매일 밤 꼬리뼈가 아프다며 울던 히센은 급기야 늑대에게 반감을 드러냈다. 물론 늑대의 성질을 돋울 생각은 없었으므로 그가 불만을 표현하는 방식은 단순한 노려봄에 그쳤다. 아서는 사촌 형이 아스티나에게 애완견처럼 치대는 모습을 보기 싫다며 식수를 구한다는 핑계로 자리를 피하곤 했다.
그리고 정작 아스티나는 대공의 모습이 어떻든 별생각이 없었다. 기실 그녀는 오히려 대공의 변화를 반기는 쪽이었다. 밤중에 늑대로 변한 테리오드를 베고 자면 꽤 편안했으니까. 아스티나는 이 저주가 꼭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공이 들으면 황망해할 소리였다.
“다 된 것 같은데.”
약간의 밀가루로 농도를 맞춘 아스티나가 곧 마무리로 후추를 찧어 넣었다. 완성된 훌륭한 한 끼 식사에 일행 모두가 침을 삼켰다. 처음엔 대공비가 내리는 음식에 감읍하여 어찌할 줄 모르던 이들은 시간이 지나며 점점 식사 시간을 고대하게 되었다.
히센은 재빨리 나서 스튜를 나무 그릇에 나누어 담았다. 먼저 한입 맛을 본 제시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너무 맛있어요!”
오늘 끓인 스튜는 아스티나가 특히 자신 있는 메뉴였다. 군에서도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으려 가끔 특식으로 만들어 주곤 했다. 그 맛이 어찌나 특출났는지 행정관 중 하나는 기록에도 이렇게 남겼을 정도였다.
[마티나 여제를 피도 눈물도 없는 마녀로 폄하하는 이들도 있으나 이는 그녀를 겪어 보지 못한 자들의 평이다. 바로 아래의 수하들이 과로로 고생했던 것은 사실이나 마티나 여제는 훌륭한 지도자로서 아랫사람들에게 일을 미루는 법이 없었다. 그녀가 이룬 업적을 생각하면 사람들은 차라리 그 넘치는 재능을 탓해야 할 것이다.
마티나 여제는 지도자로서 많은 부분에서 두각을 드러냈는데, 그녀의 능력 중 가장 친숙한 것을 하나 꼽자면 바로 요리다. 행군 중 지쳐 있는 병사들에게 내렸던 특식은 불패 신화의 일등 공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정도다. 필자는 바로 이곳에 여제에게서 직접 전수받은 조리법을 옮겨 적는다.]
그가 집필한 건 바로 요리책이었다. 아스티나가 과거를 살피려 온갖 도서를 탐독하던 어린 시절에 발견했던 물건이다. 그는 마티나가 해 주었던 음식 중 서른 가지를 엄선하여 자신 있게 출판했다.
정작 사람들은 앞선 서두를 ‘믿거나 말거나’쯤으로 취급하는 모양이었지만, 안에 담긴 레시피가 훌륭한 건 사실이었다. 덕분에 책은 아스티나가 태어날 때까지 여러 수정과 재판을 거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스티나가 오늘 만든 것은 그 요리책 중에서도 가장 첫 장에 있는 음식이었다. 반응이 나쁠 수가 없다.
“대공비 전하께선 못하시는 게 없는 것 같아요.”
칭찬 대상의 신분을 생각하면 아부라고도 생각될 수 있는 말이나, 제시는 어디까지나 진심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아스티나가 대답했다.
“못하는 게 딱히 없긴 하구나.”
농인 줄 알고 웃으려던 이들은 아스티나의 진지한 표정에 그만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반발하고 싶은 기분인데 반박할 말이 없다.
아스티나는 포근하게 익은 감자를 맛보았다. 햇감자라 특히 맛있다며 상인은 값을 치르는 일행에게 한바탕 호들갑을 떨었었다. 과연 포슬포슬한 식감이 훌륭했다. 짜게 염장 된 베이컨도 간이 빠져 딱 먹기 좋았다. 심심한 스튜는 늦은 밤 식사로 삼기 제격이었다.
두어 입 정도 삼킨 아스티나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서가 늦는군.”
식수를 챙기겠다며 사라졌는데 도통 돌아오질 않는다. 홀로 쏘다니길 좋아하긴 하나 음식이 완성될 때면 어느새 나타나 있곤 했는데 말이다. 아스티나가 미간을 좁혔다.
“들짐승이라도 만났나?”
“그걸 못 이길 실력은 아닐 텐데요.”
히센은 그다지 걱정이 없는 표정이었다. 아서 역시 제 몫을 다하는 검사였으니까. 하지만 나이가 들면 느는 것은 걱정뿐이라 했던가, 일행 중 가장 연장자인 ―물론 몸의 나이로 치면 가장 어렸다― 아스티나는 그릇을 내려놓았다.
“피를 보았으면 냄새를 맡고 더 몰려들었을 수도 있어. 아무래도 가 봐야겠군.”
“그럼 제가 가겠습니다.”
히센이 황급히 입가를 닦아 내며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고 기사 둘도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아스티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찾으러 가지.”
“대공비 전하, 산길은 위험합니다. 저희가 가 보겠습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마저 들도록.”
“하나 이는 아랫사람들이 해야 할 일인데…….”
“뺨에 묻은 것부터 좀 닦게나.”
아스티나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식사 준비부터가 마땅히 아랫사람이 해야 할 일이었음을 지적하는 말이었다. 기사 둘은 쌍둥이처럼 동시에 제 뺨을 훔쳤다. 능숙하게 테오를 철창 안에 가둔 아스티나는 그들을 두고 사뿐한 걸음을 옮겼다. 기사들은 그런 아스티나의 뒷모습을 멍청히 쳐다보았다. 그중 하나가 황급히 히센을 불렀다.
“히센 경, 경께서 가 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경은 대공비 전하와 긴밀하시니 전하께서도 불쾌해하시지 않을 듯한데…….”
“우리 셋을 모두 합쳐도 그분만 못하니 염려 말게.”
“예?”
“앉아서 식사나 하란 소리야. 금방 돌아오실 테니.”
히센의 태평한 얼굴에 기사들은 그에 대한 평가를 하향 조정했다. 음식에 정신이 팔려 주인의 호위를 내버리는 이는 기사 자격이 없지 않은가. 얼떨떨한 표정의 기사가 중얼거렸다.
“……영 불길한데.”
“뭐 무슨 일이 있겠어.”
“그래도…….”
남자가 염려스러운 눈으로 아스티나가 사라진 자리를 응시했다.
* * *
아스티나는 눈앞으로 늘어진 나뭇가지를 신경질적으로 헤쳤다. 검을 들고 오기를 잘했다. 혹시나 해 챙긴 것인데 이리 길을 뚫는 용도로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괜히 찾으러 왔나.”
꽤 오래 걸은 것 같은데 수로는 발견할 수 없었다. 아마 아서도 물을 찾느라 시간을 지체한 모양이었다. 길엔 아서가 지나가며 남긴 듯한 발자국이 조심성 없이 이어져 있었다. 바닥에 널려 있는 나뭇가지들은 아마 그가 베어 넘긴 것들이리라. 만약 누군가 추적을 결심했다면 이보다 붙잡기 쉬운 표적이 또 없었다.
아스티나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애는 애지.”
아니면 자신이 오히려 지나치게 조심하는 쪽인가.
자신이 살았던 때와 다른 시대라는 걸 알면서도 종종 착각하고 만다. 특히 이곳처럼 신분이 모호해지는 공간에서는 말이었다. 레테 백작저에서, 아카데미에서, 혹은 사교계에서 아스티나라는 사람을 지탱했던 것들은 문명과 멀어지면 의미를 잃는다. 야영은 오히려 그녀가 마티나일 때 더 익숙했던 것들이었다. 그녀는 궁에서 지낸 시간보다 전장에서 보낸 시간이 더 길었다.
‘아스티나는 몰라야 하는 것들이지.’
그녀는 달라진 자신의 이름을 곱씹어 보았다. 이십여 년에 가까운 세월을 보내자 새 삶에 적응하지 않기도 힘들었다. 분명 아스티나는 ‘아스티나’로서 잘살고 있었다. 대공령에 오기 전까지는.
새 삶을 살겠다는 그녀의 다짐은 근래 들어 종종 어그러졌다. 차라리 마티나는 사료에 남지도 않았을 먼 미래에 태어났다면 차라리 나았을까.
한참을 걷고 나서야 먼 곳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자리를 편 곳과는 꽤 거리가 있어 뒷정리를 해야 할 기사들이 고생할 듯싶었다. 발걸음을 빨리하자 금방 시야가 트였다. 계곡보다는 샘에 가까운 크기의 시냇물이 달빛을 받아 빛났다.
아스티나는 물길에 가만히 손을 담가 보았다. 얼음장 같은 온도에 손가락이 반사적으로 곱아들었다. 천천히 허리를 편 아스티나가 저 너머를 응시했다. 과연 인기척이 있었다.
아서는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었다. 무엇에 열중했는지 아스티나가 다가가 말을 걸기 전까지는 접근을 알아채지도 못했다.
“무슨 일이지?”
“아악!”
아서가 비명을 질렀다. 워낙 소리가 컸던 덕분에 아스티나는 무심코 귀를 막아야 했다. 아스티나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왜 소리를 지르는 거냐.”
“그러는 너야말로 왜 아무 소리 없이…….”
아서가 놀란 가슴을 문질렀다. 달빛이 밝았던 통에 아스티나는 그의 옷에 묻은 흙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아스티나의 시선을 알아챈 아서가 머쓱히 변명했다.
“오다가 넘어졌어.”
시냇물에 진흙을 털어 내느라 늦었다 이 말이었다. 아스티나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굽혔던 허리를 세웠다.
“별일 없어서 다행이군.”
“지금 날 걱정했다는 거야?”
“아닌 것 같으냐?”
아스티나의 물음에 아서가 얼떨떨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의 걱정이 몹시 의외였던 탓이다. 그녀와 자신의 사이가 나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친분이 있지도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악연 쪽에 가깝지 않을까.
아서는 자신이 벌였던 소동들이 아스티나에게 당연히 나쁘게 기억됐으리라 생각했다.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에 익숙했던 아서는 근래 들어 쏟아지는 인정에 몹시 낯이 간지러워졌다.
“깡패 급사나 그 은인이나…….”
뺨을 붉힌 채 제시의 별명을 읊는 아서를 보며 아스티나는 옅게 웃었다. 얄밉다가도 어린 티가 나면 마음이 약해진다. 손자를 보는 기분과 비슷할까. 아서가 알면 소름 돋아 할 생각을 하며 아스티나가 말했다.
“이만 돌아가자. 음식이 다 식겠구나.”
아서는 투덜거리면서도 곧잘 아스티나를 따라왔다. 둘이서 걸어서인지 돌아오는 길은 짧게 느껴졌다. 아서는 아스티나의 바로 뒤에서 걸으며 그녀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뒷짐 진 모습이 아무리 봐도 십 대의 풍채가 아니다.
아서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혹시 어디 산에서 자랐어?”
“그런 건 왜 묻지?”
“어디서 도인이라도 만나 수련했나 싶어서.”
“재밌는 상상이군.”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서는 포기하지 않고 따져 물었다.
“이것 봐, 말투도 이상하잖아. 네가 무슨 노인도 아니고.”
“다른 사람 말투를 신경 쓸 시간에 네 행동거지나 돌아봐라, 아서.”
“아니, 맨날 나한테만―”
저에게로 돌아온 지적에 아서가 곧바로 반발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앞서가던 아스티나가 걸음을 멈추고는 더 다가오지 말란 듯 옆으로 팔을 뻗었다. 얼결에 그녀의 팔꿈치와 부딪칠 뻔한 아서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떴다.
“왜?”
“……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 안 들리나?”
아서는 잠자코 귀를 기울여 보았다. 바람 소리와 함께 흐릿한 소란이 들려오는 듯도 했다. 아서와 눈을 마주친 아스티나는 그대로 땅을 박찼다. 야영장으로 돌아갈수록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누군가의 습격이든 자리에 남아 있는 이들의 실력을 생각하면 크게 염려가 가는 바는 아니다. 아스티나가 걱정한 건 늑대가 된 테리오드였다. 혹여 그가 구속에서 풀려 날뛰기 시작하면 아스티나 외에 말릴 수 있는 자가 없다.
“히센 경, 옆으로 비켜요!”
수풀을 헤치고 목적지에 도달하자마자 고성이 귀를 스쳤다. 기사 하나가 히센을 향해 소리치며 맞붙은 상대를 내던졌다. 날아오는 덩치에 깔릴 뻔한 히센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넓게 좀 싸웁시다, 퍼시벌 경! 경은 협동이 뭔지 모릅니까!”
아스티나는 어느새 아수라장이 된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일행들이 나누고 있는 태평한 대화처럼, 크게 걱정할 상황은 아니었다. 밀려온 인원이 많긴 하나 무력이 대단해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아서와 아스티나까지 합류했으니 큰 무리 없이 상대할 수 있으리라.
문제가 되는 건 약한 적보다는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가 들어 있을 마차부터 살폈다. 픽픽 쓰러지는 동료들을 보고 안 되겠다 싶었는지 습격자들은 마차부터 부수고 있었다. 인력만 잃고 물러설 순 없으니 금품이라도 챙겨 달아날 생각인 듯했다.
문제가 있다면 그 마차에 든 것이 금품이 아닌 대공이라는 점이다.
“당장 거기서 손 떼!”
아스티나의 외침에 모두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특히 습격자 쪽은 반색하는 얼굴이었다. 잘못 방심했다가 사고를 칠지 모르는 사내들과 달리, 젊은 여자는 붙잡아 두면 이곳저곳에 이용하기 적격이었다. 후자는 드는 품에 비해 시킬 수 있는 일이 많았다. 무엇보다 이런 상황에선 좋은 인질로 삼을 수도 있다.
아스티나 가까이에 있던 사내가 우락부락한 팔을 뻗었다. 단번에 그녀의 목을 졸라맬 생각이었다. 그러나 당연히도 남자는 목적을 이루기도 전에 바닥에 쓰러졌다. 팔이 베인 남자가 고통에 신음하며 침을 질질 흘렸다.
아스티나가 뺨에 튄 피를 닦아 내며 히센을 향해 물었다.
“이게 무슨 소란이지?”
“모르겠습니다! 슬슬 뒷정리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습격이, 윽!”
히센은 몰려드는 상대를 제압하면서도 성실히 대답했다. 아스티나는 빠르게 상대편의 무장을 살폈다. 제대로 된 검은 몇 되지 않았고 도끼같이 용도가 다양한 날붙이가 대부분이었다. 어딜 봐도 제대로 훈련받은 병력은 아니다. 그렇다면 단순한 산적일 뿐인가.
아스티나는 덤벼드는 사내들을 거침없이 베어 넘기며 마차를 향해 달려갔다. 무쌍한 그녀의 검술에 기사들은 정신이 팔려 입만 떡 벌렸다. 대공비가 검을 다룬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탓이다. 그제야 히센이 대공비를 따라가려는 자신들을 말린 걸 이해할 수 있었다.
모자란 실력을 머릿수로 보강하겠다는 생각인지 습격한 자들의 수는 많고도 많았다. 계속 앞을 막고 달려듦에야 아스티나도 진로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스티나가 베어 넘긴 동료의 수가 많아질수록 그들은 독기가 올랐다. 아스티나는 상대의 숨을 끊는 것을 포기하고 상대가 전의를 잃을 정도로만 손을 보았다. 싸움에 익숙하지 않은 자들은 약간의 부상만으로도 쉽게 위축되곤 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 번 검에 베인, 혹은 찔린 자들은 제 몸만 지혈할 뿐 다시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마차에서 떨어져!”
그러나 아스티나의 경고에 남자들은 그 안에 무언가 귀한 것이 담겨 있다 짐작한 듯했다. 짐이 든 아래 칸을 열어젖히다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그대로 문고리를 내리쳤다. 완전히 부서진 문이 처량 맞게 떨어져 나갔다.
아스티나는 머리끝까지 화가 솟구쳤다. 테리오드가 타고 있던 건 대공가에서 개별 제작한 특제 마차였다. 그것이 고장 나면 더 테리오드를 옮길 수단이 없었다.
“으아악!”
쇠문을 열어젖힌 남자가 그 안에서 테리오드를 발견하고는 그만 엉덩방아를 찧었다. 겉으로는 평범했던 마차 안에 쇠창살이 달려 있는 데다, 그 안엔 집채만 한 늑대가 들어 있는 게 아닌가.
남자는 황급히 고장 난 문고리를 쥐었다. 그러나 주변에서 벌어진 아수라장에 테리오드는 이미 흥분으로 숨이 거칠어진 상태였다. 몸을 낮춘 늑대가 도움닫기를 하여 위로 뛰어올랐다.
당연히도 사람은 온 힘을 다해 문을 향해 몸을 부딪치는 늑대를 이겨 내지 못했다. 문고리를 붙잡고 있던 남자가 꺾인 손을 틀어쥐며 나동그라졌다. 테리오드는 으르렁거리며 곧장 아스티나 쪽으로 달려오려 했다. 그녀에게로 달려들며 위협하는 남자들을 처단하기 위해서였다.
“테오, 꼼짝 말고 거기 있어!”
그런 테리오드를 향해 아스티나가 악을 쓰듯 소리쳤다. 그녀의 명령에 테리오드가 본능적으로 주춤였다. 늑대가 고개를 갸웃이며 제자리에 앉았다. 옆에서 벌벌 떨고 있던 남자가 의아함에 고개를 들었다.
상황은 거의 다 정리되어 있었다. 분투하는 아서와 제시, 실력 좋은 기사 둘과 히센까지. 아무리 물량 공세를 쏟아부어도 질을 따라갈 수는 없는 법이다. 아스티나는 앞서 쓰러진 친구를 보고 굳은 사내를 상대도 않고 지나쳤다.
손목을 움켜쥐고 있던 남자는 빠르게 판단했다.
‘명령을 들은 걸 보니 길들여진 짐승이야. 사람을 공격하지 않게 훈육시킨 게 분명해.’
저 무서운 여자가 민감하게 반응한 게 바로 이 늑대의 존재였다. 그는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의 약점이라고 판단하고는 그 옆으로 슬금슬금 기어갔다. 싸움에 끌어들이지 않는 걸 보면 무서운 외관과는 다르게 약한 짐승인 듯했다. 산적은 늑대에게 칼날을 겨누며 기세 좋게 소리쳤다.
“우릴 그냥 보내 줘! 안 그러면 이 늑대를 내가…….”
그리고 테리오드는 그를 앞발로 후려쳐 그대로 바닥에 처박아 버렸다.
앞으로 다가가던 아스티나가 당황한 얼굴로 멈춰 섰다. 제 발과 쓰러진 남자를 한 번 번갈아 본 테리오드가 칭찬해 달란 듯 꼬리를 흔들었다.
“컹!”
아스티나는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남자는 엄청난 고통에 혼절한 듯 미동도 없었다. 테리오드가 힘껏 내리친 왼팔 쪽은 완전히 으스러져 있었다. 다시 저 팔을 쓰는 건 평생 불가능하겠지만, 머리가 깨지는 것보다는 양호한 처사인 듯도 했다.
아스티나는 착잡한 얼굴로 다리에 몸을 비비는 테리오드를 쓰다듬어 주었다. 사실 서둘러 달려온 건 인간 쪽의 테리오드를 걱정한 탓도 있었다.
‘다신 정신을 잃고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고 했으니까.’
아스티나는 사람의 뼈를 부순 괴물이 애교스럽게 눈을 깜빡이는 걸 보며 잠시 고뇌했다. 죽이는 것과 팔 한쪽을 못 쓰게 만든 것엔 크나큰 차이가 있었지만, 어쨌든 사람을 해쳤다는 점은 같았기 때문이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머리에 손을 올린 채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대공께는 비밀로 해야겠군.”
* * *
“그래서 왜 습격했지?”
히센이 인내심 있게 물었다. 사방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말로만 질문할 때 대답하는 게 좋을 거다. 무력이 필요하게 되면 나도 어디까지 힘을 써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그리 말하며 히센이 무게감 있는 시선으로 사내들을 짓눌렀다. 그들은 상당히 움츠러든 기색이었지만, 그럼에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히센은 짜증스럽게 쇠창살 사이로 나무 막대를 찔러 넣었다. 허벅다리를 얻어맞은 남자가 ‘억!’ 소리와 함께 허리를 숙였다.
본래 테리오드를 가두는 용도였던 마차는 죄인들의 차지가 된 상태였다. 자리를 뺏긴 테리오드가 바닥에 드러누워 길게 하품했다. 번뜩거리는 이빨이 드러날 때마다 사내들은 눈에 띄게 움찔했다.
테리오드의 위에 앉아 있던 아스티나가 무심히 입을 열었다.
“그만해라, 히센.”
“대…… 아니, 아가씨. 하지만 누군가 다른 뜻이 있어 보내온 암살자들일지 모릅니다.”
‘대공비 전하’라는 호칭을 황급히 정정한 히센이 아스티나를 만류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목적은 별 특별할 게 없겠구나. 노략질을 일삼는 인간들이다. 재물은 뺏고 사람은 어딘가에 팔아 치우려 했겠지. 단순히 운이 나빴던 게다.”
대공 부부의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히센은 의심을 벗어던지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그렇게까지 상황을 꼬아 볼 생각은 없었다.
아스티나 레테라는 이름이 벨라체에서 수재로 유명했다고는 하나 사교계에 제대로 얼굴을 비친 적은 없었다. 테리오드와 결혼한 이후 공적인 자리에 참석한 적도 없으니 대공비의 생김새는 알음알음 말로, 혹은 초상화로만 전해졌을 것이다. 대공비라는 직함에 비해 아스티나는 지나치게 얼굴이 덜 팔린 편이었다.
제대로 정치적 노선을 표명하지도 않은 대공 부부에게 목숨을 위협할 정도의 견제가 들어올 리는 없었다. 굳이 원한을 꼽자면 아탈렌타의 숙청된 가신들인데, 이쪽은 이미 정리를 마친 후라 제대로 된 세력이 남아 있지도 않았다. 아스티나의 판단으로, 그들은 운 나쁘게 사냥감을 잘못 고른 평범한 산적들이었다.
“산에서 밤에 불을 피우면 짐승뿐 아니라 사람의 눈에도 띄지. 마침 산세가 깊어 여럿 죽여 치우기 딱 좋은 위치였고.”
아스티나의 서늘한 눈이 산적들에게 닿았다. 만약 이곳에 자리를 편 것이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많은 적을 감당하지 못하고 약탈당했을 것이다. 테리오드를 위해 대단히 크게 제작한 마차임에도 모두를 가두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아스티나는 바닥에 떨어진 무기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제대로 된 병기는 값이 나가지. 수가 이 정도 되니 말단까지 검을 내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그저 그런 산적들에 불과해.”
“하지만 아가씨, 일부러 그렇게 위장을 한 것이면요?”
“암살을 위해서였다면 더 대단한 살수를 보냈을 거다. 굳이 어중이떠중이를 보내 노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릴 필요는 없지. 저들은 너무 약하고 물러. 히센, 자네는 일을 너무 돌아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문제야.”
그리 답하며 아스티나가 제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들이 가장 먼저 노린 건 제시였겠지?”
“예? 네, 네.”
이름이 불린 제시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이들이 처음부터 무기를 들고 접근하진 않았다. 먼저 몇몇이 다가와 길을 잃은 척 바람을 잡으며 도움을 요청했다. 수상히 여긴 히센이 자리를 비킬 것을 요구하자 그들은 눈을 번뜩이며 제시부터 붙잡으려 들었다. 문제가 있다면 제시가 그 눈먼 손에 잡혀 줄 정도로 호락호락하진 않았단 점이다.
제시가 자신을 공격하던 남자를 쓰러뜨리자 무리는 황급히 대기하고 있던 친구들을 불러들였다. 육탄전은 그렇게 벌어진 거였다.
“여자를 먼저 포획하려고 한 거야. 싸움 중에 혹 외관이 상하면 안 되니까.”
아스티나가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느린 걸음으로 쇠창살 가까이 다가갔다. 의중을 파악당한 사내들이 고개를 숙여 눈을 피했다. 아스티나가 그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간 어떤 식으로 노략질을 했지?”
“…….”
“사람들을 붙잡아 어디에 팔았나? 아니면 도망치지 못하게 가둬 두고 잡일을 시켰든가.”
입을 열어 봤자 불리한 대답밖에 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카라벨라 제국에서 사람을 노예 삼는 것은 불법이었으나 보는 눈이 없는 음지에서는 여전히 거래가 이루어졌다. 범죄자들이 제게 해가 될 일을 순순히 자백할 리 없다.
아스티나는 그들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는 좀 더 험악한 방법을 사용해야 함을 이해했다. 잠시 고민하던 아스티나가 팔짱을 꼈다.
“너희들이 이곳을 작업장으로 삼은 이유가 있겠지. 일을 벌이고 손을 씻을 물도 있고, 무엇보다 인적이 드물어 사방이 쥐 죽은 듯 조용하구나. 방해할 자들이 없음은 물론이고.”
정말 누구 하나가 죽어 나가도 모르겠군.
아스티나가 들릴 듯 말 듯 하게 중얼거렸다. 가까이에 있어 그 말을 들은 사내 하나가 소름이 끼쳐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을 찬찬히 살피던 아스티나가 낮은 목소리로 테리오드를 불렀다.
“테오, 이리 와.”
바닥에 널브러져 게으름을 피운 게 언제냔 듯, 늑대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아스티나에게로 다가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육중한 짐승의 모습에 산적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아스티나가 테리오드의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한동안 육식을 하지 못했지, 아무래도 사람들의 눈이 걸려서 말이야……. 하지만 이런 인간 말종 몇쯤 삼키도록 던져 준다고 무엇이 문제 될까?”
아스티나가 산적들을 향해 상냥히 웃어 보였다.
“시꺼먼 속은 알 수 없는 바나 먹이로 쓰일 영양은 있겠지. 그렇지 않나?”
생포됐음에 그대로 관청에라도 잡혀 들어갈 줄 알았던 산적들이 기겁한 소리를 내었다. 개중 오줌을 지리는 자들도 있었다. 자신들을 잡아 둔 건 현상금 따위를 얻고 싶어서가 아니라 저 늑대의 먹이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생명의 위기를 느낀 산적들은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한 사내가 제일 먼저 철창을 쥐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어찌나 빠른지 아무도 그 변절을 말리지 못했다.
“잘못했습니다, 살려 주세요! 여, 여자들은 팔았습니다. 사내들은 값이 비싸지 않아 재산을 넘기면 그냥 보내 주어, 누굴 함부로 죽이거나 한 적은 없습죠!”
“어디에 팔았지?”
“모…… 모릅니다. 남몰래 재미를 보고 싶어 하는 귀한 나으리들이 많아 우선 수도로 보냅니다. 그 외엔 정말 모릅니다. 참말입니다!”
“수도라…….”
황궁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는 인신매매라. 모름지기 도성이 돈과 사람이 모여드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범죄의 근거지 노릇까지 할 줄은 몰랐다. 이렇게 숨 쉬듯 마주칠 수 있는 범죄라면 거래의 꼬리를 밟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 쉬운 일을 해치우지 않았다는 건 공기관과 결탁해 저지른 비리라는 소리다. 아스티나가 당장 처벌할 수 있는 건 눈앞의 산적들뿐이었다.
‘하기야 언젠들 이런 일이 없었나.’
아스티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히센, 지금 바로 출발하는 게 좋겠다. 다음 영지로 들어가자마자 저들을 관청에 넘겨야겠어.”
“하긴 습격했던 자들을 옆에 두고 자면 잠자리가 사납긴 하겠죠.”
휴식은 없다는 선언에 히센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일행들도 동의하는 표정이었다. 칼부림이 있었던 자리에서 뒤숭숭해 제대로 쉴 수나 있겠는가. 제시와 아서가 눈치껏 짐을 챙겨 들었다.
“잠은 마차 안에서 자면 돼. 이제껏 마부석에 탔던 경들이 마차 안에 타도록 해. 히센과 내가 말을 몰지.”
아스티나의 기행에 익숙해져 그러려니 하는 히센과는 달리, 아탈렌타의 기사들은 대경실색했다. 대공비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은 그들도 이미 깨달은 바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 마차를 끄는 험한 일까지 시킬 수는 없었다.
“대…… 아니, 아가씨! 안 될 말씀이십니다.”
비밀스러운 이동임을 상기한 퍼시벌 경이 가까스로 히센처럼 호칭을 정정했다. 그가 당황한 틈을 타 아스티나는 깔끔하게 상황을 일축했다.
“내일 오전까지 다음 도시에 도착하도록 속도를 내야 해. 자네들이 졸다가 길이라도 잘못 들면 그게 더 큰 일이야.”
기사들은 남몰래 눈물을 삼켰다. 본래라면 아스티나는 누구보다 수도까지 편하게 이동해야 하는 인물이었다. 늑대일 때를 기억하지 못하는 주군은 그렇다 쳐도 도무지 레이디를 볼 면목이 없다. 이 빈약한 행군의 원인이 된 게 바로 자신들의 주군이라 원망을 돌릴 상대마저 마땅치 않았다.
기사들은 억울한 얼굴로 태평한 낯의 늑대를 응시했다. 테오는 그들을 먼지 보듯 하며 느리게 하품만 했다.
“길은 아십니까?”
히센의 물음에 아스티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100년의 세월도 대륙의 주축이 되는 큰 산맥까지 허물진 못했다. 그녀가 정복 전쟁으로 얻은 수확물 중 하나는 지리에 대한 통달이었다. 지도가 없는 것도 아니니 길을 잘못 들 걱정은 없다.
아스티나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 되물었다.
“내가 혼자 말을 타 아탈렌타까지 찾아갔던 걸 잊은 건 아니겠지?”
납득한 히센이 고개를 주억였다. 아스티나의 승마 실력은 히센도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승마와 마차를 모는 일엔 분명 차이가 존재하나, 말의 생리를 이해하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으리라. 무엇보다 그의 주인은 무언가를 하겠다 선언하고 실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저 그런데 아가씨…….”
제시가 조심스럽게 아스티나를 불렀다. 아스티나가 눈만 굴려 돌아보자 제시가 어깨를 움츠렸다.
“저 상태로 가도 될까요?”
아스티나는 제시의 시선이 향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테리오드를 위해 특수 제작된 마차는 싸움의 여파로 반쯤 부서져 있었다. 이동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지만, 쇠로 된 골조 위에 위장용으로 둘렀던 나무 벽이 거의 날아간 게 문제였다. 덕분에 쇠창살 안에 감금된 산적들이 그대로 들여다보였다.
“천이라도 위에 둘러 둘까요?”
“그게 좋겠군.”
아스티나가 선선히 대답했다. 마차 주변을 돌아다니며 연신 으르릉거리는 늑대 탓에 산적들의 훌쩍임이 짙어졌다. 아스티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기사들에게 큰 천을 둘러 못질을 하라 일렀다. 어려운 명령이 아니었으므로 완성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음…….”
지켜보던 히센이 애매하다는 듯 뺨을 문질렀다. 제시가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천이 좀 부족한 것…… 같죠?”
이런 일이 생길 걸 예상치 못해 마차를 다 덮을 정도의 큰 천은 구비하지 못했다. 위에서부터 씌운 천은 산적들의 얼굴만 간신히 가리는 데 그쳤다. 낡고 해진 포목 아래로 이어지는 쇠기둥은 몹시 흉물스러웠다.
특히 그 사이로 드러난 사내들의 다리털은 보는 이들이 절로 눈을 피하게 만들었다. 못이 모자라 제대로 고정되지 않은 천이 바람이 불 때마다 작게 펄럭이기까지 한다. 길을 달리면 분명 속이 훤히 보일 것이다.
아서가 짧고 명료하게 평했다.
“우리가 인신매매단 같은데?”
그러나 마차를 고치자고 여기서 나무를 벨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스티나는 어깨만 으쓱였다.
“뭐 별일이야 있겠나?”
* * *
달빛이 밝아 새벽에 이동한다 해서 큰 문제는 없었다. 험한 산세는 금방 잦아들었고 큰길로 나오고 나서도 다른 객들을 마주치진 않았다. 다행히도 이 시간에 산을 넘는 사람은 또 없는 모양이었다.
영지의 초입에 다다른 건 동이 트기 전이었다. 더 오래 걸리면 아서와 교대할 생각이었던 히센은 다소 아쉬운 낯으로 혀를 찼다. 자신은 잠도 못 자고 범죄자들을 인도하고 있는데 제자들은 편히 쉬고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배가 아팠기 때문이다.
히센은 뻐근한 허리를 두드리며 왼편을 돌아보았다. 말을 얼러 완전히 멈춰 세운 아스티나가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당연히도, 자세는 여전히 꼿꼿하기 그지없었다.
‘기인 수준이지, 저건.’
내심 감탄하며 히센 역시 마부석에서 내려섰다. 아스티나는 제 옆으로 와 몸을 치대는 늑대의 콧등을 가볍게 쓸어 주었다.
다른 쪽 마차에 네 명 정도는 넉넉히 태울 수 있었지만, 짐승이 된 테리오드까지는 무리였다. 테리오드는 어쩔 수 없이 제 다리로 직접 달려 이동해야 했다. 당연히 지쳐 있을 줄 알았는데 늑대는 평상시보다 훨씬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래간만에 마음껏 달려 신이 났구나.”
아스티나가 깨달음처럼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대형에 흐트러짐이 없어 사람의 눈이 없는 곳은 이런 식으로 이동해도 좋을 듯했다. 계속 우리에 가둬 두면 늑대에게도 좋지 않을 것이다. 대공저에 있을 때도 저택 안에서만 머물렀으니 분명 답답했을 터였다.
아스티나는 아탈렌타에 돌아가서도 테리오드가 마음껏 달릴 기회를 주기로 결심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사항은 대공의 저주를 푸는 것이었으나, 그렇다고 이 연약하고 귀여운 짐승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늑대의 양육 환경을 개선하겠다는 아스티나의 계획은 아직까지도 유효했다.
아스티나는 테오를 뒤로하고 산적들 쪽을 흘긋 살펴보았다. 바로 뒤에서 무섭게 쫓아오는 늑대를 마주한 덕분인지 몇몇은 게거품을 물고 기절해 있었다. 물론, 아스티나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마차가 멈춘 걸 알아챈 기사들이 곧 문을 열고 나왔다. 언뜻 들여다보이는 안에선 아서와 제시가 사이좋게 머리를 맞대고 잠들어 있었다. 깨어 있을 땐 그리도 견원지간처럼 굴더니 평안히 잠든 모습은 꼭 남매 같았다.
그리고 그와 대비되게도 기사들의 낯은 몹시 칙칙했다. 딱 봐도 한숨도 자지 못한 얼굴이었다. 분명 안에서도 ‘주군께 이런 무례가!’라는 등의 말을 외치며 발만 동동 굴렀을 것이다. 아스티나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고지식한 기사들이란…….”
“아가씨! 몸은 괜찮으신지요!”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잠깐 눈을 붙이시지요! 검문을 통과하면 당장 숙소를 잡는 게 좋겠습니다.”
기사들의 아우성에 아스티나가 손사래를 치며 마차로 다가갔다. 그녀는 편히 잠든 아서와 제시를 자비 없이 흔들어 깨웠다.
“잠깐 밖으로 나와라.”
그리 말하며 아스티나가 흘긋 테리오드 쪽에 눈길을 주었다.
“영지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해야 할 게 있으니.”
슬슬 테리오드가 사람으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미리 입맞춤도 해 두어야 한다. 다 아는 일행들 앞에서야 상관없으나, 오늘은 보는 눈들이 있으니 마차 안에서 해치울 계획이었다. 잠에서 깬 둘은 턱에 흐른 침을 닦으며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테오, 이리 오련.”
아스티나가 손짓하자 테리오드가 신난 기색으로 마차에 뛰어들었다. 육중한 무게감에 진동이 느껴졌는지 말이 깜짝 놀랐다. 자연스럽게 말들을 진정시킨 히센이 대신 마차 문을 닫아 주었다. 아스티나는 닫힌 문을 안에서 한 번 더 걸어 잠갔다.
테리오드와 아스티나가 함께 들어가지 못할 크기는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자연스레 몸이 좀 붙었다. 아스티나는 늑대의 턱을 가볍게 긁어 주고는 짧게 입을 맞췄다. 저주를 푸는 마법의 주문치고는 지나치게 간단한 방법이다.
이 일에 꽤나 익숙해진 듯 늑대는 입맞춤을 마치자마자 그대로 아스티나의 발치에 털썩 앉았다. 해가 뜨려면 아직이므로 이대로 한두 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다.
아스티나는 사람이 된 테리오드에게 새벽의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늑대의 푸른 눈동자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이것도 꽤나 불편하구나. 같이 겪은 일인데 두 번 설명해야 하는 것 말이야.”
“컹!”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늑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심코 넘기려던 아스티나의 눈에 약간의 놀라움이 스쳤다.
“지금 말을 알아들은 건가?”
그러나 테오는 더 고개를 끄덕이거나 내젓는 대신, 흥미 잃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스티나의 눈썹이 애매하게 들렸다. 저주를 푸는 데 진척이 있는 거라면 좋을 테지만, 단순히 늑대가 영리한 탓일 수도 있다. 사냥꾼들은 농담처럼 사람보다 더 똑똑한 것이 늑대라며 그 아름다운 산짐승에 대해 칭송하곤 했으니까.
“다가오지 마!”
순간 바깥에서 울려 퍼진 고성에 아스티나는 고개를 들었다. 또 산적들이 소란을 피운 건가 싶었다. 늑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말썽이 생기다니, 아스티나의 눈썹이 삐딱하게 들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그대로 마차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참으로 뜻밖의 상황과 마주쳤다. 발판으로 걸음을 내딛던 아스티나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동료인가?”
그녀의 미간이 좁혀 들었다. 아스티나는 마차에서 나오다 만 상태로 바로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란을 눈에 담았다.
웬 남자 하나가 단검 하나를 엉성하게 들고 산적들을 가둔 철창 앞에 서 있었다. 처음엔 누군가 탈출에라도 성공한 줄 알았으나, 아무리 봐도 지난밤 확인했던 얼굴은 아니었다. 저런 생김새의 남자를 못 보고 지나쳤을 것 같진 않았다. 남자는 한눈에 봐도 꽤나 잘생긴 얼굴이었으니까.
그리 정돈된 차림은 아니었지만 잘 꾸며 놓으면 귀공자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을 외관의 소유자다. 아스티나는 그를 제압하는 대신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다들 물러서! 곧 내 동료들이 올 거다. 우릴 얌전히 보내 주는 게 좋을 거야!”
남자가 재차 소리쳤다. 아무래도 정말 저 산적들과 한패인 모양이었다. 뒤쪽에서 난 인기척을 알아챈 히센이 아스티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친 히센이 눈을 찡긋였다. 허락을 구하는 모양새였다. 아스티나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히센이 빠르게 남자에게 접근했다.
“아악!”
남자는 히센에게 속수무책으로 무장을 해제당했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른 히센이 손목을 쳐 단검을 뺏고는, 손잡이로 뒤통수를 갈겼다.
“으…….”
정신을 잃은 남자는 그대로 축 처졌다. 일련의 공격은 몹시 쉽고, 또 빠르게 이루어졌다.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무술에 소질이 있었다면 불가능했을 간단한 진압이었다.
히센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일그러졌다.
“뭐야……? 왜 이렇게 약해?”
그들이 일정을 논의하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등장한 남자였다. 몰래 잠금쇠를 풀려던 남자는 그만 쇠붙이를 잘못 건드려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한데 발각되고도 날쌔게 도망치는 대신 기다렸단 듯 단검을 꺼내 드는 게 아닌가.
단신으로 찾아왔기에 실력자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약하다고 생각했던 저 산적들보다 훨씬 더 약했다. 히센은 어이없는 얼굴로 남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히센이 눈을 들어 아스티나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아스티나는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허리를 굽혀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본 후, 그의 팔을 가볍게 걷어찼다. 팔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손이 펴졌다. 아직 사위가 그리 밝진 않았지만 형태를 분간할 수준은 되었다.
아스티나는 남자의 손을 꼼꼼히 살피고는 몸을 일으켰다.
“히센.”
“예.”
“잘못 골랐다.”
“……예?”
마음속으론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였지만 그다지 인정하고 싶은 현실은 아니었다. 아스티나가 마차에 두른 천을 가볍게 걷었다. 산적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들을 구하려던 남자에게로 가 꽂혔다. 사실 확인을 위해 아스티나가 짧게 물었다.
“저자를 아나?”
얼떨떨한 얼굴의 산적들이 아스티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들의 고개가 동시에 좌우로 흔들렸다.
* * *
에드윈 트리스탄은 낯선 천장 아래 눈을 떴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그는 그대로 앓는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먼지라도 낀 것마냥 정신이 멍하여, 에드윈은 잠시 자신이 어쩌다 이곳에 눕게 된 것인지를 떠올려 보았다. 도통 마을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기묘한 새벽이었다.
이동 시간을 잘못 계산했던 탓에 에드윈은 그만 한밤중 숲속에 놓이게 되었다. 일행이 있으면 몰라, 홀몸으로 야영을 했다간 맹수들의 한 끼 식사가 되기 십상이었다. 때문에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말을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앞서가는 두 마차를 처음 발견했을 때, 에드윈은 제 눈을 의심했다. 처음엔 뒤에 바짝 따라붙어 달려가는 늑대에게 시선이 갔다. 비탈길을 빠르게 달리는 마차는 언뜻 맹수를 피해 전력 질주를 하고 있는 듯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련하게 거리를 조절하는 모습이 아무래도 사람 손에 길러진 짐승인 듯싶었다.
그러나 에드윈은 안심하고 그들을 쫓던 속도를 늦추지 못했다. 길을 왼편으로 틀며 늑대와 마차의 사이가 잠시 벌어졌을 때, 그 너머로 보인 무언가 때문이었다.
에드윈은 처음엔 자신이 달빛의 환상에 현혹되기라도 한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최 마차에 쇠기둥을 꽂아 넣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늑대를 가둘 용도라고 생각하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그 안에 탄 건 사람이었다. 펄럭이는 천 아래로 드러난 인영에 에드윈은 소름이 끼쳤다.
‘인신매매단이다.’
굳이 이 새벽길에 달빛에 의존하여 달리는 것도 날이 밝기 전 이동을 마쳐야 하기 때문이 분명했다. 고삐를 쥔 에드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무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길거리에서 싸움이 붙었을 때 일방적으로 얻어맞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평균 아래의 무력을 가진 그에겐 안타깝게도 보통 이상의 인정이 있었다. 에드윈은 인신매매단에게 잡혀가는 사람들을 보고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홀로 도망갈 수 없었다.
‘구할 수 있을까.’
인신매매단 모두를 상대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그들이 방심한 틈을 타 사람들을 도망시키는 정도라면, 자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에드윈의 눈에 결연함이 깃들었다. 되도록 인신매매단이 다른 동료들과 세를 합하기 전에 일을 벌이는 쪽이 성공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에드윈은 그들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따라잡을 듯 말 듯 한 거리를 유지했다. 시간이 동틀 무렵과 가까워졌을 때 마침내 그들이 멈춰 섰다. 에드윈은 해가 뜨기 전, 그것도 영지 바로 앞에서 휴식을 취하는 그들을 보고 마음속으로 확신을 굳혔다. 당당한 사람이라면 검문을 앞에 두고 굳이 진입을 지체하진 않을 것이었으므로.
“어떻게 인두겁을 쓰고…….”
먼 수풀 뒤에 숨어 그들의 동태를 살피던 에드윈이 탄식했다. 그들은 그리 대단한 범죄자처럼 생기지도 않았다. 굳이 구별하자면 선량함에 가까워 보이는 생김이었다.
에드윈의 미간 사이가 더욱 깊이 파였다. 마차에서 붉은 머리칼의 여자가 내려섰을 때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기까지 했다. 아름다운 얼굴과 고아한 걸음걸이 등에서 꼭 귀부인 같은 기품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우아한 낯의 여자는 자연스럽게 뒤따라온 늑대를 얼렀다. 맹수를 길들이는 데 많은 품이 드는 걸 생각하면 퍽 호사스럽게도 보이는 광경이다. 그러나 저 늑대로 사람들을 위협하여 잡아들였다 생각하면 그저 공포스러웠다.
저들이 정녕 수십의 사람을 팔아 치우는 범죄자들이란 말인가. 아무리 사람의 인격이 외관과는 관련이 없다고는 하나, 저들이 일반인처럼 군중 사이에 섞여 들 걸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다.
붉은 머리의 여자가 늑대와 마차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에드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지금이 기회야.’
때는 지금이었다. 맹수가 없고,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팔렸을 때.
짧게 심호흡을 한 에드윈이 숨죽이며 가까이로 접근했다. 만약 들켰다간 자신 역시 저 창살 아래 가둬지리라.
‘정말 잡히면 어떡하지.’
기실 그 만약의 상황에 대한 대비책이 없지는 않았다. 에드윈은 발각된다면 바로 신분을 밝히고 가문에 금품을 요구하라 회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누이가 목숨값을 대 줄지는 아무래도 미지수였지만.
다행히도 마차까지 향하는 것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앞으로 다가온 에드윈을 보고 잡혀 있는 사람들이 작게 웅성거렸다. 에드윈은 입가에 검지를 붙이고는 황급히 속삭였다.
“구해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러고는 황급히 문고리를 들어 그 안에 쇠막대를 쑤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쇠로 된 철창은 몹시 단단하여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손에 땀이 찼던 탓일까, 에드윈은 쥐고 있던 자물쇠를 그만 놓치고 말았다.
챙!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에드윈의 등허리가 딱딱하게 굳어 들었다. 그는 천천히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인신매매단과 그대로 시선이 마주쳤다.
“저게 무슨…….”
단단한 체구의 남자 하나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에드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재빠르게 허리춤에 찬 단도를 꺼내 들었다.
“다가오지 마!”
그들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얼굴로 멀뚱히 에드윈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나 상황이 좋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소란을 알아챘는지 곧 마차에서 붉은 머리칼의 여자가 걸어 나왔다. 늑대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음이 다행일까. 에드윈은 제 이마를 적시는 식은땀을 느꼈다. 에드윈이 더듬더듬 소리쳤다.
“다들 물러서! 곧 내 동료들이 올 거다. 우릴 얌전히 보내 주는 게 좋을 거야!”
홀몸으로 돌아다니는 에드윈은 존재도 않는 동료들을 팔았다. 단신이라고 하면 얕보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에드윈의 가장은 그다지 소용이 없었던 듯했다. 단단한 체구의 남자는 너무도 쉽게 에드윈의 단검을 빼앗더니, 그대로 뒤통수를 내리쳤으니까.
“뭐야……? 왜 이렇게 약해?”
멀어지는 정신 너머로 들려오는 혹평에, 에드윈은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했다. 재능이 없다 하여 아예 손을 놓지 말고 호신술이라도 배워 둘 것을.
거기까지 되짚은 에드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제 손을 결박한 구속구나, 눈을 덮은 안대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에드윈은 황급히 손으로 제 몸을 더듬었다. 얼얼한 뒤통수 빼고는 아픈 곳이 없었다. 딱히 누군가에게 더 얻어맞은 건 아닌 듯했다.
혹 지나가던 기인이 자신을 구해 주기라도 한 것인가?
에드윈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흔한 구조의 객실이었지만 그가 자주 이용하는 저렴한 1인실보다는 넓은 크기였다. 충전재가 꺼지지 않은 침대와 깔끔한 실내를 보아 제법 값이 나갈 듯했다.
그러나 에드윈을 가장 놀라게 한 건 낯선 여관방에 누워 있는 자신의 상태가 아니었다. 창가 가까이에 앉아 있는 누군가를 발견한 에드윈이 눈을 크게 떴다.
“사람인가…….”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은발의 남자에게서 시선이 도통 떨어지지 않았다. 에드윈은 제 뺨을 느리게 쳤다. 아픔이 느껴지는 걸 보아 결코 꿈은 아니었다.
‘천사인가?’
사람이 저렇게 생겼을 리 없었다. 저 얼굴은 결코 자연적으로 가능한 조합이 아니었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이렇게 편애를 티 내어서는 안 되었다. 원래도 무신론자였던 에드윈은 신에 대한 불신을 더욱 키웠다.
그러나 동시에, 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발은 더없이 성스러워 보였다. 평생 제 생김새에 불만을 품고 살아온 적이 없는 에드윈조차 저렇게 생긴 건 어떤 기분일까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였다.
천사가 고개를 들어 천천히 에드윈 쪽을 살폈다. 에드윈이 깨어난 걸 알아챈 남자가 입가에 상냥한 미소를 띠었다.
“일어나셨습니까?”
“말도 하네…….”
“예?”
에드윈의 헛소리에 남자가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 현실적인 반응에 에드윈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말이 통하고 대륙어로 된 책을 읽는 것을 보아 사람은 맞는 듯했다. 이곳이 저승 아닌 이승이라면, 자신이 인신매매단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 건 아니라는 소리였다.
에드윈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약간 휘청이긴 했으나 그럭저럭 넘어지지 않고 은발의 남자에게 다가설 수 있었다. 에드윈이 어기적거리며 악수를 청했다.
“혹시 당신이 저를 구해 주신 겁니까?”
“구해 주었다라…….”
에드윈의 손을 맞잡은 남자가 애매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그가 곤란한 음성으로 양해를 구했다.
“잠시 여기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상황을 설명해 줄 다른 분을 데리고 오지요.”
에드윈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문을 열고 나갔다. 방에 홀로 남은 에드윈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상황을 설명해 줄 사람이 온다고 하니 곧 해소될 의문이긴 했으나, 그럼에도 궁금증이 도통 사그라들지 않았다. 에드윈은 조금 전 자신과 인사를 나누었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아름답고 잘생겼다는 온갖 유명 인사를 다 만나 보았지만 저만한 미인은 보지 못했다. 중저음의 근사한 목소리와 사람을 대하는 태도까지, 귀공자 같지 않은 구석이 없는 남자였다.
‘혹 귀족인 걸까?’
그렇다면 자신이 모를 리가…….
“……있긴 있나?”
에드윈이 화려한 사교계를 떠난 지는 꽤 오래되었다. 새로 등장한 얼굴이라면 보지 못했을 법도 했다. 에드윈은 남자가 다시 돌아오면 그의 이름을 물으리라 다짐했다.
다행히도 얼마 기다리지 않아 문이 열렸다. 다시 등장한 은발의 남자를 보고 에드윈은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뒤이어 들어온 여자를 발견했을 때, 그는 침대에서 미끄러져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이…… 이, 인신…….”
‘매매단’이라는 단어를 모두 끝맺진 못했다. 지금 등장한 건 분명, 늑대를 어르던 바로 그 여자였다. 저 짙게 반짝이는 붉은 머리칼을 못 알아볼 수는 없었다.
혹 이 방에 있던 남자는 저 여자의 노예였던가?
저렇게 생긴 남자가 자의로 사람을 사고팔았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에드윈의 희망 사항과 달리 남자는 여자에게 과한 예를 취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저 동료일 뿐인가.
어느 쪽이든 그녀와 한패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에드윈의 눈이 빠르게 무기를 찾았다. 그러나 그의 짐은 방 안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해되지 않는 점은 한 가지 더 있었다. 왜 자신을 가두지 않고 이리 귀빈 대접을 하듯 고이 모셔 놓은 걸까.
‘내 정체를 안 것인가? 정말 가문에 몸값을 뜯어내려고?’
에드윈의 눈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자신의 가정이 맞다면 당장 절명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에드윈은 불안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스스로도 후보지로 뒀던 방법이긴 하나, 트리스탄 가문이 집 떠난 탕아를 위해 거금을 내어 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홀로 이런저런 가정을 해 봤자 의미는 없었다.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선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는 게 먼저다. 에드윈이 결연한 낯으로 소리쳤다.
“원하는 게 뭡니까!”
여자와 남자가 눈을 맞췄다. 그 모습이 어쩐지 의미심장했다. 잠깐의 침묵 후, 앞으로 나선 건 여자 쪽이었다. 그녀가 덤덤한 투로 말했다.
“일단 저희 일행의 실수를 사과드립니다. 당신을 기절시킨 건 고의가 아니었어요.”
“고의가 아니었다고? 사람을 감금하는 일도 고의가 아니라 말해 보시지요!”
에드윈이 분개하여 소리쳤다. 여자가 곤란한 낯으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큰 오해를 하고 계신 모양입니다.”
“무슨 오해 말입니까? 내 눈으로 당신들이 사람들을 가두고 팔아 치우려 하는 걸 똑똑히 보았는데!”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에드윈의 말을 듣고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에드윈은 더 어이가 없어졌다. 죄라고는 지어 본 적 없는 듯한 저 말간 얼굴로 자신을 조롱할 셈인가?
남자는 그에 그치지 않고 적발의 여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대체 제가 없는 사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정의를 구현했을 뿐입니다.”
“정의? 저엉의?! 사람을 팔아 치우는 게 정의라니 지나가는 개가 다 웃겠습니다!”
에드윈이 끼어들었다. 맹렬한 비웃음에 여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걸음이 천천히 에드윈에게로 가까워졌다. 에드윈은 범죄자 앞에서 당당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거리가 좁혀 들수록 자신감은 졸아붙을 뿐이었다.
“일단 정의감이 투철하신 분인 것은 알겠습니다.”
“……같잖은 영웅 심리를 발휘하다 잡힌 나를 비웃는 겁니까?”
에드윈의 눈을 들여다보던 여자가 픽 웃었다.
“그런 용기를 내기도 쉽지 않지요. 이타심이 뛰어난 선인을 책할 마음은 없으니, 저희도 방금 당한 무례를 따져 묻진 않겠습니다.”
“그게 무슨…….”
혼란스러운 표정의 에드윈에게, 여자가 종이 하나를 품에서 꺼내 내밀었다.
“현상금을 받았다는 증빙이 되는 영수증입니다.”
“…….”
“인신매매단은 저희가 잡아 가둔 장정 쪽이었고요. 근방에서 유명한 패거리라고 하더군요.”
“…….”
“사람들을 구하려다 기절하신 분을 산길에 두고 올 수 없어 여관까지 모셨습니다. 이해하셨습니까?”
“그게, 그게…….”
에드윈은 무어라 반박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는 여자가 내민 종이를 꼼꼼히 읽어 보았다. 위조된 물건이라기엔 양식에 틀림이 없었다. 그것을 다섯 번 정도 반복해서 살펴본 에드윈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핼쑥해져 있었다. 여자는 이제 오해가 풀렸냐는 듯 어깨만 으쓱였다.
에드윈은 그녀에게 쏟아 냈던 폭언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꿈이어야 해.
* * *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아스티나는 몇 번이고 반복된 사과를 무심히 넘겼다. 그녀는 소모적인 대화를 반복하는 대신 그에게 질문을 돌려주었다.
“식사는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빈속이실 듯한데.”
“저는 수프와 빵으로…… 아, 아니……. 쓰레기가 어떻게 식사를 하겠습니까? 그냥 굶어 죽어야지요…….”
에드윈은 곧 죽을 듯한 얼굴로 식탁에 재차 머리를 처박았다. 그의 자학에 어느새 익숙해진 아스티나가 급사를 불러들였다. 주문을 마친 그녀는 에드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상대가 하도 고개를 들지 못했던 통에 그의 얼굴보다는 정수리 쪽이 더 익숙했다. 한 시간 내내 반복된 사과가 짜증을 불러일으키긴 했으나, 그것이 진심임을 감안하면 그럭저럭 유해질 수 있었다.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 않습니까.”
“제가 좋으신 분들께 흉기까지 들이밀고……. 정말,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흉기라.’
아스티나는 단도를 휘두르던 에드윈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자 그것을 과연 흉기라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소소한 의문이 찾아들었다. 흉기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어디까지나 ‘사람을 죽이거나 해치는 데 사용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에드윈의 단검은 그 어느 경우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그가 그것을 코앞에서 휘두른다 해도 일행 중 어느 누구도 상처 입히지 못할 것이었으므로. 에드윈의 연약함에 크게 당황한 히센이 차마 쓰러진 그에게 더 손대지 못했을 정도의, 그야말로 눈먼 위협이었다.
“통성명은 다 마치셨습니까?”
뒤편에서 들려온 테리오드의 목소리에 아스티나가 시선을 돌렸다. 일행이 여럿이니 누군가는 따라왔을 법도 한데 테리오드의 옆은 비어 있었다.
“혼자 오십니까?”
“아서와 제시 양은 들어가자마자 뻗은 모양입니다. 히센 씨는 말을 손보러 나갔고요.”
뜬눈으로 새벽을 지새운 탓에 기사 둘은 방을 잡자마자 곧바로 기절했다. 어찌나 피곤했는지 침대에 반만 올라탄 상태로 잠들어, 그들을 발견한 테리오드가 마저 위로 끌어 올려 주어야 했다.
‘얘기를 들으면 대공께 폐를 끼쳤다며 또 소란스럽게 굴겠지.’
아스티나는 굳이 그들에게 그 일을 알리진 않기로 마음먹었다. 충성심은 그녀가 사랑하는 소양 중 하나였으나, 때때로 몹시 귀찮기도 했다. 주군을 보필하는 기사의 세심함은 때때로 부모의 과보호와 닮았다.
“무엇을 주문하셨습니까?”
어느새 바로 옆으로 온 테리오드가 자연스레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가볍게 닿았던 손은 그만큼이나 가볍게 떨어져 나갔다. 아스티나가 안쪽으로 자리를 비켜 주며 답했다.
“수프와 빵, 샐러드 같은 것들로 간단하게 주문했습니다.”
“주방장의 솜씨가 좋기를 기대해 보죠.”
그리 말한 테리오드가 외따로 붕 뜬 붉은 머리칼 한 가닥을 쓸어 넘겨 주었다. 물 흐르는 듯한 행동에 아스티나는 조금 뒤에야 제 머리칼이 엉켜 있었음을 깨달았다.
자연스러운 접촉에 에드윈의 눈이 어색하게 굴렀다. 테리오드를 여자의 수하로 오해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접촉이 자연스러운 점으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둘은 부부 내지는 연인 관계인 듯했다.
“두 분께선 혹시 무슨 사이신지…….”
에드윈의 물음에 둘이 동시에 대답했다.
“친구입니다.”
“부부입니다.”
그리고 테리오드와 아스티나는 동시에 서로를 마주 보았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하냐는 듯한 표정의 아스티나를 발견하고, 테리오드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는 대공과 이성 관계로 엮이는 일에 대해 계속해서 거부감을 비쳐 왔다. 테리오드가 그들 사이를 친구라 소개한 것은 어디까지나 그런 아스티나를 위한 일이었다. 길 가다 마주친 모르는 사람에게마저 사이좋은 부부 연기를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와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이런 생각을 했다.
‘길 가다 마주친 모르는 사람에게 왜 굳이 거짓말을?’
아스티나의 눈빛을 읽어 낸 테리오드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가 의아한 낯의 에드윈에게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좋은 친구이자 좋은 배우자이지요.”
“아, 그렇군요.”
훌륭한 해몽에 에드윈이 밝은 표정으로 응수했다. 테리오드의 말이 꽤나 좋게 들렸기 때문이다. 그 역시 결혼을 한다면 부인을 그렇게 소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에드윈이 재차 질문했다.
“그 늑대는 두 분께서 같이 기르시는 동물입니까? 크기가 대단하여 길들이느라 꽤나 힘드셨을 것 같던데요.”
테리오드는 물을 들이켜다 말고 그만 뱉어 낼 뻔했다. 다행히도 그와는 달리 아스티나는 평상심을 잃지 않았다.
“예, 원래부터 사람 손에 나고 자란 아이라 크게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사람을 해치는 것도 싫어하고요.”
“그래도 위험한 맹수인데 대단하십니다. 아, 그놈은 혹시 어디 있습니까? 여관에서 마구간을 내어 주진 않았을 것 같은데…….”
테리오드가 부자연스럽게 에드윈의 시선을 피했다. 아스티나는 그런 테리오드를 잠시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으로 응시했다. 그녀가 대답했다.
“여관 안에 있습니다.”
“여기요?”
“네, 만약 파손이 있다면 보상해 주기로 약조하고 방에 두었지요. 지금은 잠들어 있습니다.”
“그렇군요. 어제 보았을 땐 어찌나 머리털이 쭈뼛 서던지……. 하핫! 나쁜 놈들을 위협하실 때 꽤나 유용하셨겠습니다.”
에드윈이 그리 말하며 과장스러운 웃음소리를 내었다. 아스티나는 작게 미소 지으며 잔 겉면에 어린 물기를 매만졌다. 그들 사이에 초면인 사람들이 으레 거치곤 하는 어색한 침묵이 떠올랐다.
에드윈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질문했다.
“혹 행선지가 어디십니까?”
“바실로 갑니다.”
“수도까지면 일정이 얼마 남지 않으셨겠군요. 혹 수도에 다른 연고가 있으십니까? 어디서 묵으실 예정이신지요?”
무심코 대답해 주려던 테리오드가 지나치게 상세한 질문에 얼굴을 굳혔다. 여전히 친절하지만 동시에 거리를 두는 어투로, 테리오드가 되물었다.
“글쎄요, 그런 것은 왜……?”
곤혹스러운 상대의 음성에 에드윈이 화들짝 놀라 도리질을 쳤다. 그제야 제 물음이 무례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지한 듯했다. 에드윈이 손까지 내저으며 해명했다.
“아, 실례였다면 죄송합니다. 사실 너무도 죄송한 마음에…… 여행에 도움 드릴 일이 없을까 하여 여쭈었습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테리오드가 딱 잘라 대답했다. 에드윈은 다소 머쓱한 기분이었으나 은인의 앞에 대고 티를 내진 않았다.
“워낙 저지른 실례가 많아 그렇습니다. 제 마음이 편하고자 그러는 것이니 약소한 성의나마 받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래 준비한 여행이라 도움을 청할 일이 마땅치 않습니다. 덕분에 무료함을 덜었으니 그것으로 잊지요.”
아스티나의 유려한 응대에 에드윈이 눈을 휘었다. 오해를 벗고 이야기를 나눈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는 이들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크게 성을 내었을 일에 온건하게 반응하는 것도 그렇고, 충분한 보답을 받을 만한 교양 있는 인물들로 보였다. 이들이라면 자신의 신분을 밝혀도 문제 되지 않으리라.
“꼭 묵을 곳을 내어 드리는 정도에 그치지는 않겠지요.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제 본명은 에드윈 트리스탄으로, 트리스탄 후작가의 장자이자 현 가주 앤서린 트리스탄의 오라비 되는 사람입니다.”
그 말에 잠시 사위에 정적이 돌았다. 에드윈은 의외의 높은 신분에 그들이 놀란 것이라 생각했다. 에드윈이 어색하게 웃으며 마저 설명했다.
“누이와 제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은인에게 보답할 줄 아는 인정 있는 아이라서요. 아마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여러분을 도와줄 겁니다.”
그리 말한 에드윈이 제 가방에서 휴대용의 작은 깃펜과 종이를 꺼내 들었다. 글을 적을 줄 아는 것을 내보이면 신분에 대한 나름의 증명이 될 것이다.
에드윈은 깔끔한 필기체로 단문의 편지를 적어 내렸다. 잉크가 마르자 그것을 반으로 깔끔히 접었다. 테리오드와 아스티나는 앞으로 내밀어진 쪽지를 멀뚱한 눈으로 응시했다.
“이것을 들고 트리스탄가를 방문하시면 금전적으로든, 아니면 다른 어떤 식으로든 보답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둘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에드윈의 눈에 약간의 당황과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가 예상한 반응은 놀람이나 감탄같이 표출의 방식이 극명한 것들이었다. 숨 막히는 정적은 미처 생각지 못한 바였다.
그러나 이쪽의 사정을 안다면 에드윈도 이 침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테리오드는 무심코 오른손을 들어 제 입가를 문질렀다.
‘트리스탄이었다니. 이 무슨 기막힌 우연이…….’
사교계에서 한 끗발을 날렸던 테리오드가 온갖 귀족들의 성에 익숙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트리스탄이라는 성은 아탈렌타에게 있어 특히 각별했다. 좋은 쪽이 아닌, 나쁜 쪽으로.
트리스탄가와 아탈렌타가의 악연은 사람들에게 있어 꽤나 유명한 것이었다. 호전적인 트리스탄과 점잖은 아탈렌타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툼이 발생했을 때 종종 대유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들의 불화는 대륙이 통일되기 전부터 유서 깊게 전해져 내려왔을 정도로 역사가 깊었다.
그 시초가 먼 과거 가주들이 벌였던 도박판의 말다툼이었음은 꽤나 재밌는 비화이나, 이후로 이어진 온갖 정치적 설전들을 생각하면 그냥 웃고 넘어갈 문제는 아니다. 권위자의 사적인 분노는 종종 공적인 영역까지도 어지르곤 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 두 가문은 사업상에서도 부딪치지 않기가 더 어려운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트리스탄가는 대대로 나라를 지켜 왔던 그들 가문의 특성을 이용하여 병기 사업을 벌였다. 대륙이 통일됐다고는 하나 각 영지 간의 소모적인 다툼은 여전히 존재했고 대부분의 영주는 언제나 성능 좋은 무기에 관심을 두고 살았다.
그러나 남부의 실권을 쥐고 있는 아탈렌타는 공성 무기를 공국 안에 들이는 데 굉장한 거부감을 보였다. 대륙 전체를 다스리는 황제가 영주들 간의 싸움을 일일이 중재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보다 작은 크기의 공국은 신하들과의 사이가 보다 긴밀했다. 아탈렌타 휘하의 영지들은 분란이 발생할 시 함부로 무력을 쓰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다.
드넓은 가능성의 남부 시장을 두고 진입을 저지당한 트리스탄은 독재적인 행각이라며 아탈렌타를 비난했다. 아탈렌타 역시 피를 보지 않고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야만적인 이들이라며 코웃음 쳤다.
몇 대에 걸쳐 쌓인 앙금은 마침내 상대 가문의 식솔이 조금만 흐트러진 걸음을 보여도 그의 난잡한 밤 생활을 비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비슷한 시기에 가주 승계가 이루어지며 양측이 가문을 재정비하는 사이 잠시 휴전을 맞이한 듯도 했으나, 결코 종전이라 표현할 수는 없었다.
테리오드 역시 아탈렌타의 사람이었기에 에드윈을 보는 눈에 꺼림칙한 기색이 떠올랐다. 아탈렌타의 대공이 트리스탄가의 장자를 구했다고 나서지 못하는 건 당연하거니와, 더욱이 그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수도의 수확절 행사에 참가하러 가시는 것인지요?”
바로 옆에서 들린 아스티나의 목소리에 테리오드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뜻밖의 날카로운 질문을 받은 에드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곧 그의 얼굴에 애매한 웃음이 떠올랐다.
“아닙니다. 저는 가문을 나온 지 오래된 사람이라서요. 성을 버리진 않았으나 사교계에 다시 얼굴을 비칠 생각은 없습니다.”
테리오드는 그제야 자신이 왜 에드윈을 알아보지 못했는지, 그리고 그 역시 왜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이 역시 유명한 소문이었다. 날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장남 대신 딸인 앤서린 트리스탄 쪽이 가문을 물려받았다는 것은. 에드윈 트리스탄은 스무 살 이래 조용히 잠적하여 이후로는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었다. 그것이 7년 전의 일이니 테리오드와는 면식이 없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생각 외로 에드윈은 건강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혈색 좋은 볼이나 건장한 체격 등은 분명 보통의 남성들과 비슷했다. 저보다 어린 누이에게 가주직을 양보할 정도의 하자는 찾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가문을 물려받지 못한 그에게 온갖 모욕적인 추측이 쏟아졌던 것을 생각하면 몹시 의문스러운 일이었다. 적어도 대공 부부 앞에 앉아 있는 에드윈은 몸에 장애가 있다거나, 정신이 이상해 보인다거나, 그도 아니면 더없이 추한 외모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수도에 들르시지 않을 거라면 저희와는 방향이 갈리겠군요.”
“예. 저는 동쪽으로 이동할 생각입니다.”
“본가와도 먼 곳일 텐데, 혹 그 지방에 다른 연고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리로 가는 것이고요. 에드윈은 뒷말을 혀 밑으로 삼켰다. 다행히도 그 이상의 질문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스티나는 친절한 방식으로 대화의 맥을 끊었다. 약간의 사적인 염려와 함께.
“안전한 여행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되도록 위험한 일엔 나서지 말고 몸을 보전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하하, 명심하지요.”
에드윈이 호탕하게 대답했다. 그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앞에 앉은 한 쌍의 남녀를 응시했다.
대가문의 귀족을 앞에 두고도 부부는 덤덤한 태도였다. 에드윈은 테리오드와 아스티나가 고귀한 신분이라 내심 짐작했으나, 굳이 성을 캐묻지는 않기로 했다. 제 이름을 밝혔을 때 통성명이 돌아오지 않은 걸 보아 그들은 신분을 숨기고 여행 중인 듯했다.
에드윈으로서는 은혜를 갚으면 그것으로 된 일이었으므로, 굳이 그들의 정체까지 알아낼 생각은 없었다. 그들이 귀족이라 하면 제 누이를 찾기는 오히려 더 수월해지리라. 따라서 그는 사적인 부탁만을 하나 더 남겼다.
“혹 수도에서 앤서린을 만나신다면 안부를 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는 아주 건강히 잘 지내고 있으니, 누이 역시 잘 지내라고.”
“……만일 그분을 뵌다면, 그리 전해 드리지요.”
테리오드와 잠시 시선을 주고받은 아스티나가 무심히 응대했다. 때마침 식사가 나왔던 탓에 대화가 자연스럽게 끊겼다. 아침부터 부담스러운 음식을 주문하진 않았으므로 식사를 마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당연히도 더 이상 일정을 함께할 이유는 없었다. 에드윈은 성의 표시라며 모두의 식사비를 지불하고는 작별을 알렸다. 그는 그다지 기대하지 않는 투로 이렇게 인사했다.
“다음에 연이 닿으면 또 뵙지요.”
요란했던 등장치고는 몹시 조용한 퇴장이었다. 멀어지는 에드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아스티나가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폈다. 에드윈이 남긴 것이었다.
“무어라 적혀 있습니까?”
“별 내용은 없군요.”
아스티나가 시큰둥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들은 에드윈을 배웅하고자 잠시 여관 밖으로 나온 상태였다. 아스티나는 발걸음을 돌리며 테리오드가 확인할 수 있도록 편지를 건네주었다.
[앤서린, 오랜만이구나. 에드윈이다.
7년씩이나 지났으니 네가 내 필체를 알아볼지는 잘 모르겠구나. 보낸 편지에 도통 답장이 돌아오지 않으니 나로서는 네가 내 소식을 전해 받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말이다.
이분들은 내가 크게 신세를 진 분들이다. 가능한 선에서 마땅한 도움을 드리면 좋겠구나. 오랜만에 연락하여 전하는 것이 이런 부탁이라 미안하다. 몸 건강히 잘 지내렴.]
아까 나눈 대화 이상으로 무언가를 유추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성의 없는 눈으로 뒷면을 확인한 테리오드가 도로 그것을 아스티나에게 건네었다. 아스티나는 종이를 품 안에 넣었다. 테리오드가 농처럼 말했다.
“7년간 왕래가 없었다니, 남매 사이가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는군요. 그걸 가져다줬다가 오히려 앤서린 후작이 노하여 내쫓는 건 아닐까요?”
“안타깝게도 그가 은인을 실험 대상으로 삼는 파렴치한인지는 알아볼 수 없을 것 같군요. 저희가 이 편지를 전할 일은 없을 테니까.”
언뜻 딱딱하게도 들리는 아스티나의 말에 테리오드의 낯이 미묘하게 밝아졌다. 아무래도 갑자기 등장한 젊은 남자가 영 신경 쓰였던 탓이다. 아침에 깨었더니 못 보던 사람이 일행에 끼어 있어 테리오드는 몹시 당황했었더랬다. 그가 트리스탄가의 사람이라 하니 오히려 반가울 지경이었다. 명석한 대공비는 정치적으로 복잡한 관계의 남자에게 경계 없이 다가가진 않을 것이었으므로.
테리오드가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며 말했다.
“그에게 호감이 있으신 줄 알았는데요.”
“저는 사람을 그리 쉽게 좋아하거나 싫어하게 되진 않습니다.”
“그런 것치곤 과한 친절을 베풀지 않으셨습니까.”
“히센이 그를 오해하여 제압한 건 사실이니까요.”
“그렇다면 다른 뜻은 없으셨습니까?”
의미심장한 물음에 아스티나가 곧바로 반문했다.
“다른 뜻이라면?”
“그거야…….”
계단을 올라서던 테리오드가 몸을 반쯤 돌렸다. 제때 속도를 늦추지 못한 아스티나는 그와 같은 높이에 섰다. 복도가 좁았던 탓에 둘의 간격은 과하다 싶을 만치 가까워졌다.
테리오드는 아래쪽에서 더 올라오는 사람이 없는지 흘긋 살폈다. 아침 무렵이라서인지 방이 있는 2층으로 향하는 이는 없었다. 테리오드는 오른손을 뻗어 아스티나의 왼손을 쥐었다.
예상치 못한 접촉이었지만 아스티나는 그를 밀쳐내는 대신 시선으로 그의 움직임을 쫓았다. 뼈마디를 짚던 손이 곧 아스티나의 약지에 다다랐다. 그는 중지와 약지 사이의 틈을 가볍게 문지르더니, 그대로 에둘러 원을 그렸다.
따로 차고 있는 장신구는 없었으나 아스티나는 쉬이 알아차렸다. 그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를.
“기혼자의 덕목은 배우자에게 충실한 것이 아닙니까.”
그들이 나누지 못한 결혼반지였다.
지나치게 약식이었던 결혼 과정의 일환으로, 그들 사이엔 이렇다 할 패물이 존재하지 않았다. 테리오드가 많은 장신구를 선물하긴 했지만 의미가 될 법한 물건은 아니었다. 분명 존재도 않는 결혼반지건만, 이상하게도 아스티나는 약지가 죄여 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의 손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들어 지그시 눈을 맞췄다. 긴 속눈썹이 들리며 생긴 그림자가 깊었다. 남자의 입꼬리가 매력적으로 휘어졌다.
“되도록 외간 남자와는 엮이지 않으심이 좋겠습니다.”
그 안에 낮의 조도와 어울리지 않는 진득함이 비치는 것은 착각인가.
아스티나는 그와 마주 보며 잠시 눈을 깜빡였다.
“불필요한 걱정을 하시는군요.”
“그렇다면 다행이지요.”
테리오드의 손은 생각보다 미련 없이 떨어졌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이미 사라진 감촉이 다소 신경 쓰여, 저도 모르게 그가 닿았던 자리를 살폈다. 당연히 그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굳이 평가하자면…….”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던 아스티나가 곧 입을 열었다. 잠깐의 고민 끝에 그녀는 적절한 혹평을 던졌다.
“쓸데없이 정의로운 사람이었지요.”
“좋은 평가를 안 좋게 표현하신 건 고의십니까?”
테리오드의 미간이 애매하게 좁혀졌다. 그녀의 진의가 무엇인지 잘 짐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가 에드윈을 마음에 들어 했다고 생각했다. 오해로 벌어진 일이긴 했으나, 에드윈이 큰 실수를 저지른 건 사실이었다. 좋은 일을 하던 걸 오인해 흉기까지 휘두르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의 부인은 경솔함보다는 내면의 정의로움을 좋게 평가한 듯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자신을 위협했던 인물을 친절히 모셔 오진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테리오드의 예상과 반대로, 아스티나는 상황을 이렇게 일축했다.
“능력에 맞지 않는 간섭은 화를 부르니까요. 만약 우리가 진짜 범죄자였다면 그는 끔찍하게 죽었을 겁니다.”
“그에게 친절을 베푸시기에 호감이 있으신 줄 알았습니다.”
“저는 되도록 사람을 평가할 때 의도를 보려고 합니다.”
“의도요?”
“예, 이를테면…….”
층고가 그리 높지 않았던 탓에 2층 복도에 내려서는 건 금방이었다. 아스티나의 침실은 계단 바로 옆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방으로 들어가는 대신 돌아서 벽에 어깨를 기댔다.
이번에 테리오드의 앞을 가로막은 건 아스티나 쪽이었다. 아스티나는 고개를 삐뚤게 들어 테리오드를 올려다보았다.
“벨루아에서 전하가 제게 화를 내셨던 일처럼요.”
“그건…….”
“사실 위험한 일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보셨을 테지만.”
테리오드는 반박하려다 말고 그만 입을 다물었다. 분명 그녀 혼자 처리했을 적들은 전부 깔끔한 외양을 하고 있었다. 훼손된 시신은 곧 난전을 말한다. 힘이 부칠수록 동작에 군더더기가 붙게 되는 법이니까.
그러나 오두막 안의 시체들은 모두 몇 합 안에 숨을 잃은 듯 보였다. 베인 단면 역시 전혀 거칠어지는 법이 없었다. 균일한 검상은 그녀가 장정 열을 상대하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는 걸 말해 주었다.
객관적으로 훌륭한 검사에 속하는 테리오드조차 그렇게 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불가능했다. 소름 끼치도록 날카롭게 벼려진 검술은 그녀가 거쳤을 훈련의 강도를 차마 짐작할 수조차 없게 했다.
테리오드가 설핏 인상을 찡그렸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어도 전혀 웃는 것 같지 않은 얼굴로,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 걱정이 귀찮으셨습니까?”
“조금요?”
“그럼 앞으로는 어디를 가신다 해도 잘 다녀오시라 손만 흔들까요.”
“그거야말로 나쁜 의도에 속하지 않겠습니까.”
테리오드의 투정 같은 목소리에 아스티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질책할 목적이 아니었다는 듯, 삐딱하게 기울어졌던 그녀의 목이 바른 자세를 찾았다. 테리오드는 그제야 그녀의 눈에 담긴 장난기를 발견해 냈다. 풀 죽은 남자의 얼굴이 꽤나 취향에 맞았던 탓일까, 아스티나는 드물게도 상냥히 말했다.
“걱정인 걸 알아 기분 나쁘지 않았습니다.”
테리오드는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부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침묵에 아스티나의 눈이 의아한 빛을 띠었을 즈음이었다. 테리오드가 불쑥 말했다.
“일부러는 아니겠죠.”
아스티나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도 전, 테리오드가 손을 들어 그녀의 턱을 잡아당겼다. 아랫입술을 스친 엄지가 그 아래의 파인 자리를 문질렀다.
정오에 가까워지고 있는 시간이었다. 눅눅한 나무 냄새가 나는 복도엔 약간의 군내가 배어 있었고, 창에서 들어온 햇빛은 주변에서 천천히 떠다니는 먼지를 비췄다. 그것이 어느 한가로운 낮을 말하는 것 같아, 아스티나는 잠시 그의 어깨 너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정신이 팔려 있었다는 것은 진짜인가 변명인가.
테리오드는 그대로 아스티나의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아스티나가 일순 몸을 움찔했다. 무심코 물러서려던 아스티나의 움직임은 자신을 남자와 벽 사이에 가둔 셈이 되었다. 반사적으로 감겼던 눈이 곧 느리게 뜨였다. 아스티나는 바로 앞에 늘어진 긴 속눈썹을 들여다보았다.
곧 테리오드의 푸른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아스티나는 저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을 마주했다. 시선을 맞춘 채로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질근거렸다. 아프다기보다는 간지러운 감각이 느껴졌다.
“……이상합니다.”
그가 잠시 멀어진 틈을 타 아스티나가 툭 내뱉었다. 테리오드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가 말씀이십니까?”
정략결혼을 한 부부에게 도통 어울리지 않는 습관이지만 그들 사이에 키스는 몹시 익숙한 일이었다. 어찌 됐거나 좋든 싫든, 테리오드와 아스티나는 매일 입을 맞춰야 하는 사이였으니까.
그런데 그것이 무언가 다르다. 테리오드의 입술이 떨어져 나간 후에도 그 감각은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아스티나는 좀처럼 위화감을 벗어던지지 못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그가 닿았던 자리를 눌렀다. 이윽고 늘어뜨린 손끝은 젖어 있었다. 그녀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입맞춤 말입니다. 변하셨을 때 해도 상관이 없는 일인데 요즘―”
그러나 아스티나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테리오드가 다시금 그녀의 입술을 삼켜 온 탓이었다. 아스티나는 경험으로 그다음에 이어질 자연스러운 수순을 알고 있었다.
아스티나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가 밀려 들어왔다. 테리오드는 그대로 제 시야를 어지르던 붉은 살덩이를 입 안에 가두었다. 천천히, 그러나 노골적으로 반복해 아스티나의 입술 전체를 빨아들였다.
아스티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바깥바람 탓에 목덜미와 얼굴 부근은 차게 식어 있었다. 그 반동일까 미지근한 혀가 이상하게 따듯이 느껴졌다. 입 안 여린 살을 건드릴 때마다 아스티나의 눈꼬리가 작게 움찔했다. 호흡이 오가는 틈 사이로 가는 신음이 샜다.
“아…….”
자연스레 아스티나의 허리를 향해 뻗어지던 손이 멈칫했다. 테리오드는 가볍게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펴고는 그대로 벽을 짚었다.
입맞춤이 깊어질수록 몸이 가깝게 맞붙었다. 아스티나의 허벅지 사이로 파고든 무릎이 단단히 자리 잡았다. 아스티나는 저도 모르게 테리오드의 팔을 붙잡았다. 뒤로 기울어진 고개 탓에 호흡이 쉽지 않았던 탓이다. 아스티나의 미간이 찌푸려짐과 동시에 테리오드가 고개를 들었다.
아스티나는 참았던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더 이상 입술은 맞닿아 있지 않았지만 감각은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테리오드의 눈 밑이 이상하게 그늘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탁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이런 걸 그 늑대와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당연히 늑대와는 이런 짓을 하지 않지요.”
“진도를 나가 보자고 말씀하셨던 것은 부인이시고요.”
아스티나는 그의 눈에 담긴 장난기를 보고 당황했다. 그건 이미 끝난 일이 아니었던가. 그를 놀렸던 일에 대해 충분히 사과했다 생각했는데 테리오드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아스티나는 이게 자신을 놀리기 위함인지, 아니면 정말 저주를 풀기 위한 목적으로 벌인 일인지 의심의 시선으로 보았다. 그러나 테리오드는 꽤나 태연했다.
“점진적인 진도가 바로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닙니까. 키스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으니까요.”
능청스럽게도 들리는 말이다. 자연스러운 태도는 의심의 여지를 완전히 자르는 듯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그의 말에서 다른 의도를 느꼈다.
근래의 테리오드는 이상했다. 꼭 제게 연인을 대하는 것처럼 굴고 있지 않은가.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몹시 애를 써야 했다. 이를테면 저 푸른 눈동자가 지나치게 열렬하게 느껴지는 것이 착각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과거의 아스티나는 같은 모양의 입술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을 달콤하게 받아들이곤 했다. 그녀는 오직 제게 사랑만을 이야기하던 저 얼굴을 기억했다. 지금 자신이 그때의 감각을 되새기고 있는 건 아닌가.
아스티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테리오드의 낯을 살폈다. 말끔한 표정에서 의중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그녀의 시도는 애석하게도 오히려 판단을 흐리는 결과를 낳았다.
“저주 때문이라 이 말씀이십니까?”
“부인께서 혹시 심술을 부리실까 걱정되어 그런가 봅니다. 제게 불만이 생겨 입맞춤을 건너뛰시면 어떡합니까.”
아스티나가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테리오드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언뜻 처연하게도 보이는 표정을 하고서, 그는 씁쓸한 음성을 내었다.
“계속 괴물일 것이 두려워서요.”
그녀의 공적인 성격이 이 순간만은 불합리하게 작용했다. 그녀에겐 괴물을 동정하는 어리석은 자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를 밀어내려던 손을 멈췄다. 긴가민가한 눈으로 미간을 좁히는 그녀를 보고 테리오드가 스치듯 웃었다.
“키스에 담긴 다양한 의미를 아십니까?”
“……이상한 것에 관심을 가지시는군요.”
아스티나의 핀잔에도 테리오드는 의연했다.
“입맞춤으로 저주를 푼 남자이니 마땅히 이 정도는 알아봐야지요. 어떤 조건의 키스가 또 저를 구원할지는 모르는 일이니.”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의 손을 조심스레 쥐어 왔다. 어정쩡하게 들려 있던 팔은 별다른 거부 없이 끌려왔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의 손등 위로 경건히 숨을 묻었다.
“손등에 하는 키스는 애정과 존경을 담지요. 기사들이 주군에게 하듯이.”
“그런 것이라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손바닥엔 질투의 뜻이 있는 것도 아십니까?”
“…….”
“혹은 원망이나.”
아스티나의 팔목을 들어 올린 테리오드가 세워진 손 위로 입을 맞췄다. 손바닥 위로 닿는 살갗에 아스티나는 무심코 손가락을 움츠렸다. 손 틈 사이로 저를 올려다보는 남자의 눈과 마주친 탓이다. 선명한 푸른빛의 눈동자는 몹시도 아름다웠다.
아스티나가 그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제 됐습니다.”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요. 재밌으실 겁니다.”
“글쎄요, 흥미가 생기지 않는데요. 이런 장난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주만 염두에 둘 일은 아니지요. 배우자 아닌 다른 사내들에겐 어디까지 허락해야 하는지, 부인도 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녀가 아는 귀족들의 무도회는 분명 구식이었다. 그러나 유행은 변했으되 지켜야 할 예절까지 크게 달라졌을 성싶진 않다. 테리오드의 친절은 아스티나에겐 불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끈질기게 따라오는 남자의 시선은 도통 그치질 않았다.
이곳은 어디까지나 공용 복도였다. 누군가 올라오기라도 하면 민망한 꼴을 보이게 될 것이다. 아스티나가 결국 마지못해 답했다.
“그럼 간략히만요.”
그러자 아스티나의 미간 위로 입맞춤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이마에 문대 오는 부드러운 살갗은 꽤나 간지러웠다.
“이마에는 믿음과 신뢰를 담고―”
말을 멈춘 테리오드가 고개를 낮췄다. 자연스럽게 아래로 미끄러진 입술이 눈두덩에 닿았다. 아스티나는 눈을 감았다.
“눈가에 하는 입맞춤엔 구애의 뜻이 있지요.”
“간지럽습니다.”
“그런가요.”
아스티나의 불퉁한 어깃장에 테리오드가 작게 웃었다. 아스티나는 귀를 스치는 저 저음이 꽤나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도 왕 테오도르와 다른 부분 중 하나였다.
“목덜미는…….”
테리오드는 그대로 그치지 않고 천천히 아스티나의 턱을 타고 내려왔다. 목 근처에서 느껴지는 숨결이 간지러워, 아스티나는 아스라이 눈을 떴다. 잠깐 감고 있었던 것뿐인데 이상하게 눈꺼풀이 뻑뻑했다.
그리고 저편에서 나무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테리오드와 아스티나는 동시에 계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추워라. 바람이…….”
두 팔을 문지르며 뛰어 올라온 히센이 말을 멈추었다. 그의 눈이 멍청하게 끔뻑였다. 밤을 새운 히센은 분명 잠이 고픈 상태였으나, 기이하게도 졸음은 순식간에 달아났다. 아무래도 하룻밤 잠보다는 목숨 쪽이 더 귀한 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전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 무시무시한 푸른색 눈동자를 피해, 히센은 그대로 제 두 눈을 가렸다. 숨 막히는 정적이 이어졌다.
아스티나가 짧게 말했다.
“그만 비키세요.”
“……예.”
테리오드가 놓아주자마자 아스티나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소리가 서늘했다. 히센은 눈을 가린 상태 그대로 가재걸음을 옮겼다. 뭔진 모르겠지만 서둘러 제 침실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히센의 불면은 계속될 모양이었다. 몹시도 상냥한 대공의 음성이 그를 붙잡았으니까.
“자네는 잠깐 나 좀 보지.”
* * *
“앤서린 후작님! 큰일 났습니다!”
한 중년의 남자가 헐레벌떡 연무장으로 달려들어 왔다. 활을 조준하던 여자는 흘긋 그쪽을 살피고는 다시 과녁에 집중했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그대로 정중앙에 꽂혔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명중이었다.
“대단하십니다, 후작님!”
주변에 서 있던 수하들이 휘파람을 불며 손뼉 쳤다. 시끄러이 울리는 환호에 뛰어오던 남자는 그대로 인상을 구겼다.
‘저저, 잘난 척으로는 따라갈 사람이 없다니까.’
가문 소속의 기사들이 수련을 할 때, 굳이 옆에서 활을 쏴 대는 이유는 뻔하다. 가주의 등장에 검을 맞대던 기사들은 자연히 그녀 뒤에 줄지어 섰다. 근육질의 사내들이 화살이 과녁에 꽂힐 때마다 손뼉을 치는 모습은 언뜻 보기에 장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잘난 사람이 잘난 체를 한다고 그게 비난받을 일인지는 잘 분간할 수 없는 바다.
객관적으로 앤서린 후작은 잘난 사람이 맞았다. 타고난 신분만도 고귀할진대 학식이 깊으며 무술이 뛰어났고, 예를 취하는 자세는 그야말로 귀족다웠다. 그에 더해 얼굴까지 잘생겼으니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엔 억울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은 그녀가 가진 성별에 가 붙으면 다소 애매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도통 귀족 사회의 레이디를 칭찬하는 수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몇몇 호사가들은 작위를 물려받은 앤서린을 보며 점잖지 못한 여자라며 혀를 찼다. 그들에겐 앤서린의 잘난 외관마저 뒷이야기의 대상이 되었다. 분명 그들의 말대로 앤서린의 얼굴은 예쁘다고 표현하기엔 어폐가 있었다. 그녀의 외모는 영애보단 영식에 가까운 모습이었으니까.
그러나 앤서린은 제 외모에 관한 험담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사교계에서 활약할 때 그녀의 무기는 드레스가 아니었으므로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제복을 입은 그녀는 어느 대단한 가문의 귀공자마냥 고귀했고, 객관적으로 모두에게 인기 있는 편이었다.
레이디들은 신사다운 앤서린에게 연정의 마음을 품었다. 가주직을 잇고 보인 몇 년간의 파격적인 걸출함으로, 젊은 영식들 역시 앤서린의 능력을 인정한 지 오래였다. 그 과정이 결코 순탄하다고 볼 수는 없었으나 결론적으로 앤서린 후작은 누구도 얕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어느 것 하나 특출난 점 없는 일반인이 보기엔 영 재수 없는 인생이다.
앤서린의 앞에 다다른 남자가 숨이 차 헉헉거렸다. 다시 화살을 활시위에 걸며, 앤서린은 그가 호흡을 가라앉히기를 기다렸다. 뒤뚱뒤뚱 뛰어오던 모양새부터가 아무래도 영 힘들어 보였던 탓이다.
“무슨 소란이지?”
겨우 고개를 든 남자에게 그녀가 물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남자가 주먹 쥔 손을 힘껏 흔들었다.
“테리오드 대공이 수도로 왔다고 합니다! 제정신을 찾았다던 소문이 말뿐이 아니었어요!”
허공을 조준하던 앤서린 후작이 자세를 풀었다. 그녀가 무심한 눈빛으로 제 신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입술에서 비틀린 탄성이 샜다.
“쯧. 다 보내 놓은 줄 알았더니, 아쉽게 됐군.”
“아쉽다 정도입니까?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다 있답니까! 대공이 자리를 비웠을 때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무궁무진했는데!”
“그런 불행이 벌어지다니 우리에게 있어 참 다행이 아니었는가. 트리스탄 후작가의 대단한 행운이 결국 막을 내렸군.”
경악한 수하와는 다르게 앤서린의 반응은 덤덤했다. 확실히 과한 행운이기는 했다. 그리도 상대하기 힘들던 정적이 한순간 제풀에 나가떨어진 것이다. 가문을 정비하자마자 아탈렌타를 향해 신경을 곤두세웠던 앤서린으로서는 허탈한 일이었다.
광증이 도진 대공이 잠적한 지 어언 1년, 트리스탄가는 그가 제정신으로 돌아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고 그저 희희낙락했었다. 적의 우두머리가 자리를 비우고 나니 온통 세상이 제 것 같았던 탓이다.
“그래도 시기가 공교로워 당시 문제가 됐던 관세 관련해서는 우리 뜻대로 된 상황이야.”
“그것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그렇지요!”
수하가 아깝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앤서린은 그가 뜀뛰기를 할 때마다 함께 뛰는 뱃살을 흥미 있는 눈으로 지켜보았다. 태연자약한 상사의 태도에 남자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후작님은 걱정도 안 되십니까……?”
그 걱정스러운 물음에 앤서린이 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대공이 자리를 비운 건 행운이었지. 하지만 처비, 기억하게. 진정한 트리스탄의 덕목은 아탈렌타를 깔아뭉갬으로써 증명받는 법이야.”
앤서린의 선언은 위풍당당했다. 당당한 모습에 수하들의 눈엔 어느새 존경이 묻어났다. 앤서린이 품은 속내를 알고 있었다면 반 토막이 났을 감탄이었지만.
‘테리오드 대공이라.’
앤서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반짝이던 은색의 머리칼은 앤서린에게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공은 한 번 보면 도통 잊을 수 없는 외관의 소유자였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앤서린의 관심이 이성적인 방면으로 뻗어 나간 건 아니었다. 보기 드문 미인인 건 사실이었으나 앤서린이 매력을 느낀 건 완전히 다른 부분이었다. 말하자면, 그녀에게 테리오드는 아주 좋은 사냥감이었다.
여자의 몸으로 가주직을 계승하는 데는 상상도 못 할 노력이 요구되었다. 아무리 재능을 내보여도 둔재인 오라비의 보조 정도로만 취급받았던 게 현실이다.
주류 사회엔 남성들만이 자리했고 그녀에겐 언제나 비집고 들어갈 틈이 필요했다. 앤서린은 가주 자격으로 사교계에 편입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해야 했다. 그 와중 남자보다 더 남자다워져야 했음은 물론이다. 안 그래도 좋은 건수가 필요하던 차에, 대공의 등장은 차라리 반갑기까지 했다.
앤서린은 가볍게 미간을 좁혔다. 트리스탄의 가주로 행동하는 데 더없이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기억 저편의 누군가가 떠올랐던 탓이다.
‘누이야. 나는 네가 후작이 되는 편이 더 좋구나.’
‘왜 그런 말을 하지?’
‘네가 나보다 잘난 걸 알거든. 너는 야망도 있고 똑똑하고 심지어 제 몸까지 지킬 줄 알지. 아버지는 천치란다.’
‘후작가의 장자로서 위엄을 지켜.’
‘앤서린, 아버지를 봐. 내가 벨라체 아카데미에서 낙제하였을 때도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하셨었지. 나는 내가 남자인 것 외엔 그 쓸모를 모르겠구나. 반편이를 후계 삼고 싶어 하시는 아버지가 미친 게지.’
‘너는 무엇이 그리 쉽지?’
‘내 양보에 의미를 찾지 말렴. 원래 네 것이란다.’
어느 한가로운 오후, 오라비와 단둘이서 나누었던 밀담이었다. 어딘가 위태로운 미소를 지었던 에드윈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본가를 떠났다. 에드윈에게 작위를 물려주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던 아버지는 뒷목을 부여잡았다.
앤서린의 오라비인 에드윈은 타고난 성정이 유했다. 객관적으로 모자란 사내는 아니었으나 앤서린 쪽이 확연히 재능이 뛰어났던 건 사실이다. 에드윈의 말처럼, 가주라는 직위는 앤서린에게 꼭 제 것처럼 들어맞았다.
그러나 앤서린은 이것이 양보받은 자리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에드윈이 포기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맛보지 못했을 영광을.
앤서린은 흥미를 잃은 표정으로 사용인에게 활을 건넸다. 활 통마저 벗어 던진 그녀가 수하를 향해 물었다.
“대공이 수도에 올라온 건 수확절 행사 때문인가?”
“예. 멀쩡해진 모습을 보이겠다며 황궁 연회에 참석한다고 합니다. 동태를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참석해야 할 자리이긴 하지. 아탈렌타와 세를 같이 하는 가문들의 반응은 어떻지?”
“그것까진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기이한 것이, 분명 아탈렌타는 아직 준비에 한창이라 들었는데 오늘 새벽 대공 부부가 수도의 사저에 입성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신분을 숨기고 몰래 올라왔나 보군. 그럴 필요까진 없었을 텐데…….”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앤서린이 이내 피식 웃었다.
“새로 들인 대공비가 조심스러운 성격이신가?”
“부부 사이가 좋다는 소문이 파다하긴 하지요. 애지중지한 아내를 내보이기 꺼렸다든가…….”
“처비, 잉꼬부부로 소문났던 인물 중 어디 외도 한 번 저지르지 않은 이가 있던가? 그런 좋은 소문은 걸러 들어야 옳지. 만들어 낸 쪽이 분명하거든.”
삐뚜름한 미소를 내보인 앤서린이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젖은 손을 감싼 장갑을 신경질적으로 벗어 던졌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지면에 떨어진 가죽 장갑을 주워 들며, 처비가 황급히 그녀를 뒤따랐다.
“그래서 어찌하실 계획이십니까?”
“글쎄, 일단 대공의 낯짝이나 보아야 답이 나오지 않겠나? 그나 나나 탐색전은 필요할 거야. 허니…….”
“허니?”
“일단은 말을 보러 가야겠다.”
“예?”
처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놀라건 말건 앤서린은 곧바로 외출 준비를 하라 일렀다. 이미 제복을 걸치고 있었으므로 옷을 갈아입을 필요는 없었다. 앤서린은 말의 등 위에 안장이 얹어지기를 기다렸다. 옆에 있던 처비가 의문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말이 당최 대공과 무슨 연관입니까?”
“무도회 다음엔 사냥 대회가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트리스탄이 사냥에 있어 면을 구길 수는 없는 노릇이지. 품종 좋은 말이 나왔나 한번 보아야겠다.”
호전적인 성격의 앤서린은 평소에도 사냥 도구에 관심이 많았다. 왜 이른 낮부터 활시위를 당기고 있나 하였더니, 예의 대회를 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수확절에 열리는 연회는 2주간 이어지는 규모로 몹시 성대했다. 하늘에 제를 올리며 시작된 축제는 사냥 대회로 막을 내린다. 제단의 불을 꺼뜨리지 않고 살려 두었다가, 가장 상등품인 사냥감을 하늘에 바치는 것이다. 제물을 잡은 자가 그 해의 우승자가 되며 황제에게 직접 치하받는 영광을 얻었다. 대회에 보이고 있는 열의를 증명하듯, 지난 3년간의 챔피언은 앤서린이었다.
‘대공이 안 왔어도 보러 갔을 말이면서.’
처비는 남몰래 입술을 삐죽였으나 당연히도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진 못했다. 안장 위에 가볍게 올라탄 앤서린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다녀올 테니 저택이나 잘 지키고 있도록. 요즘 그대 뱃살을 보면 이르게 절명할까 걱정될 지경이니 운동도 좀 하고.”
발끈한 처비가 항변했다.
“아내는 좋아합니다!”
“그걸 믿는가? 그 아둔한 믿음을 유지하려거든 어디 가서 트리스탄의 책사라 하지 말게.”
앤서린이 코웃음 치며 말을 출발시켰다. 멀어지는 그녀를 망연히 응시하던 처비는 물끄러미 시선을 내려 제 배를 꼬집어 보았다. 주인은 나날이 복근이 짙어지는데 부하는 갈수록 살이 말랑해진다.
‘이게 누구 때문인데.’
야근과 야식의 늪에 빠진 처비는 피눈물을 흘렸다.
* * *
수확절 행사가 성큼 앞으로 다가온 탓인지 마시장도 번잡했다. 품종 좋은 동물들만 비싼 값에 취급하는 거래소는 당연히 귀족을 주 고객층으로 삼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사냥 대회에 쓸 말을 보러 나온 영식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아이고, 후작님 오셨습니까! 너희들 뭐 해, 시원한 음료라도 가져다 드리지 않고!”
바쁜 와중에도 지배인은 우량 고객 앤서린의 등장에 맨발로 달려 나왔다. 지배인이 뒤편을 향해 고함치자 직원 하나가 얼음을 띄운 차를 가지고 왔다. 앤서린의 취향에 꼭 들어맞는 음료였다.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그녀는 바깥쪽부터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앤서린이 본래 타던 말은 세 마리로, 반응이 민감하여 가장 사냥에 적합한 하나는 현재 부상 중이었다. 지난번 마상 무예를 무리해 연습하다가 다리를 다친 탓이다. 그리 위험한 상처는 아니었으나 말에겐 곧 급소인 부위였다. 환부가 환부이니만큼 상세한 보살핌이 필요했다.
때문에 앤서린은 이번 대회에서는 아예 새 말을 타 볼 생각이었다. 아직 시일이 충분하니 그때까지 합을 맞출 수 있으리라. 앤서린이 짚고 있던 목책을 느리게 두드리며 나아갔다. 다들 상태가 좋아 보이기는 했으나 한눈에 들어오는 건 없었다.
앤서린은 발목이 적당히 기울어져 있는지, 발굽이 틀어지지 않았는지 등을 유심히 살폈다. 지형이 험한 곳에서 탈 것이니만큼 어깨의 각도도 중요했다. 엄연한 트리스탄의 후작이 탈 말이었으므로 얼굴 역시 잘생겨야 한다.
조건이 까다롭다 보니 고르기도 쉽지 않았다. 얼굴이 마음에 들면 다리 모양이 마음에 차지 않고, 제법 괜찮다 싶으면 크기가 애매한 등의 실격 사유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건…….”
그때였다. 앤서린의 걸음이 멎었다. 앤서린의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주 좋은데.”
“아주 좋은데.”
말을 내뱉은 앤서린이 눈을 크게 뜨고 왼편을 돌아보았다. 당연히도 자신에게 같은 말을 두 번 내뱉는 이상한 버릇은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 역시도 놀란 듯, 마찬가지로 앤서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상한 인물이었다. 모자를 깊이 눌러써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눈높이를 생각하면 여자인 듯했다. 방금 들린 목소리나 로브 바깥으로 뻗은 손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가늘고 흰 손마디에서 굳은살을 발견한 순간, 앤서린은 저도 모르게 친절한 미소를 머금었다.
“좋은 말이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예, 혹 먼저 보고 계셨습니까?”
“레이디께서 원하신다면 먼저 시승해 보셔도 좋습니다.”
앤서린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상대는 얼떨떨한 듯 보였지만 곧 감사합니다, 인사하고는 사람을 불렀다. 한번 타 보겠다는 말에 직원이 발 받침을 내왔다.
“밟고 올라가시면 됩니다.”
우아하게 그 위로 올라선 초록색 로브는, 곧 그만큼이나 가볍게 말에 올라탔다. 몹시도 유려한 폼에 지나가던 손님이 휘파람을 불었을 정도였다.
자리를 비키려던 앤서린도 걸음을 멈춰 세우고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아무래도 양보한 보람이 있어 보였다. 앤서린의 눈에 들어온 만큼 제법 훌륭한 종자인 듯했는데, 여자는 본래 제가 길렀던 동물인 양 능숙하게 어르고 있었다.
말을 타고 가볍게 한 바퀴를 돌아본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녀가 바닥으로 사뿐히 착지했다.
“이 말로 할게요.”
이런저런 질문이 돌아올 줄로 예상했던 직원이 눈만 끔뻑였다. 초록색 로브는 멀뚱히 서서 뭐 하냐는 듯한 시선으로 그런 남자를 응시했다. 그가 ‘계,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하고 외치고는 부리나케 자리를 비켰다.
“아.”
목책 너머에 선 앤서린을 발견한 여자가 가까이로 다가왔다. 앤서린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짙어졌다. 로브를 입은 여자가 말했다.
“양보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말을 얻었네요.”
“별말씀을요. 동시에 손을 뻗었던 것뿐인데.”
“예, 사실 놓쳤다면 퍽 아쉬울 뻔했습니다.”
사교계에서 지나치게 남자처럼 굴었던 일의 여파로, 앤서린은 습관적으로 영애들에게 몹시 친절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번은 보통의 경우와는 다르다. 무예를 익히는 여자들은 몇 되지 않았고 앤서린은 그들에게 강한 동질감을 느꼈다.
여인의 손에 남은 굳은살은 정확히 검사들의 그것이었다. 검 손잡이를 따라 난 궤적은 그야말로 지난한 수련의 결과다. 앤서린은 기꺼이 눈앞의 무사에게 경의를 표할 수 있었다.
“무슨 용도로 타려고 하십니까?”
“사냥용으로 길들여 볼까 합니다.”
여자가 말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사냥용이라는 말에 앤서린은 다소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혹 이번 사냥 대회의 참가자인가?’
가난한 평민들은 올 수 없는 공간이었으므로 앤서린의 의심은 합당했다. 앤서린은 여자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로브를 뒤집어쓴 모습으로는 도통 외관을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나 바실에 기거하는 모든 영애의 목소리를 아는 앤서린은 단언할 수 있었다. 앤서린이 참가했던 온갖 사교 모임에서, 눈앞의 여자를 만난 적은 없었다. 게다가 상대도 앤서린을 알아보는 눈치가 아니었다. 몇몇 무가의 성을 되새긴 앤서린이 설핏 미간을 좁힌 채 물었다.
“어떤 무기를 다룰 줄 아십니까?”
“검을 주로 씁니다.”
“아, 그 종류 말입니다. 아무래도 라피에르 같은 가벼운 검이 편하시겠죠?”
“제 검술과는 잘 맞지 않아서요. 저는 아밍 소드를 씁니다. 평균보다 가볍게 무게를 줄인 것이긴 하지만.”
앤서린은 몇몇 인물을 다시 후보지에서 지웠다. 무예를 익히는 영애들의 수는 한 손으로도 꼽을 수 있었고, 여자와 같은 검을 쓴다고 알려진 영애들은 모두 앤서린과 나름의 친분이 있었다. 그러니 눈앞의 여자는 완전히 모르는 사람이다.
“영애께서는요?”
의문에 잠긴 앤서린에게도 질문이 돌아왔다. 생각지 못한 발언에 앤서린은 잠시 당황했다. 그 질문이 곤란했다기보다는, 여자가 제 성별을 완벽히 맞혀 온 데 놀랐기 때문이었다. 앤서린은 치마를 입고 있지 않았고 머리카락은 짧았다. 목소리마저도 저음인 편이라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영락없는 남자였다.
“제가 여자인 걸 어찌 아셨습니까? 아, 물론 레이디를 속이려 한 건 아니나 첫눈에 알아보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요.”
“골격이 다르니까요, 그리고 목젖도.”
여자가 그리 말하며 제 목 언저리를 눌렀다. 앤서린은 그만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제가 검사를 얕보았군요. 그네들처럼 사람의 골격을 잘 아는 치들이 또 없을 텐데 말입니다.”
“밝히고 싶지 않으셨던 거라면 죄송합니다. 불쾌하셨다면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셔도 좋아요.”
“아닙니다. 먼저 여쭸던 것은 제 쪽이니, 정작 제가 대답하지 않으면 우습지 않겠습니까. 저는 활을 주로 씁니다. 혹 관심이 있으신지요?”
“익혀 두긴 했으나 그리 뛰어난 건 아니라……. 아무래도 실력 있는 궁수는 기르기 힘든 법이니까요.”
앤서린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이야기가 길어질 듯하여, 앤서린은 지나가는 사람을 피해 여자를 목책 가까이로 인도했다. 다분히 사심이 담긴 행동이었다. 근거리 무기와 원거리 무기 사이에는 먼 차이가 있어, 때때로 전자가 후자를 무시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간만에 견해가 겹치는 인물을 만나자 반갑기 그지없었다.
“잘 아시는군요. 사실 활만큼이나 섬세한 무기도 없지요. 먼 곳에서의 공격이 비겁하다는 인물들도 있지만, 어찌 궁수 없이 대규모 전투를 논하겠습니까?”
“팔 힘이 대단해야 하는 데다 좋은 시력까지 필요해 전제 조건이 특히 까다롭지요. 제일 비용이 많이 드는 병력 중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 아니, 마티나 여제도 대륙 전쟁을 위해 궁수들을 대규모로 양성했지 않습니까.”
여자의 말에 앤서린의 뺨이 달아올랐다. 이런 교류까지 기대했던 것은 아닌데, 상대는 활이라는 무기에 관해 꽤나 이해가 깊어 보였다. 거기에 자신이 우상으로 둔 마티나의 이야기까지 나오자 앤서린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티나는 분명 대단한 위인이었지만, 그녀가 얼마나 천재적으로 병력을 운용했는지까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앤서린이 재능을 보였던 많은 병기 중에서 굳이 활을 고집했던 건 전적으로 마티나 때문이었다. 어릴 적 읽었던 서적에 나온 여제의 기록이 앤서린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던 탓이다.
[많은 이들은 전쟁을 머릿수 싸움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전장에서의 미학이란 적은 수의 군사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운용하느냐에 있으며, 그것은 단순한 물량 공세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병사를 단순히 숫자로 인식하는 이들은 체감하지 못할 사실이다.
죽음에는 하등의 의미가 없으며 미래는 살아남은 자에게 있다. 사용자의 안전을 보장하는 화살은 그래서 소중하다. 원거리 공격이 비겁하다 탁상공론하는 자들은 내리는 화살 바다에 몸을 맡겨라. 그 속에서 입을 놀릴 수 있다면 그래도 좋다.]
앤서린이 마티나의 명언을 멋지게 인용하려 할 때였다. 뒤편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사람들의 비명과 고함이 귀를 찢을 듯했다. 무심코 뒤를 돌아본 앤서린은 그대로 굳었다.
흥분한 말이 미친 듯이 질주해 오고 있었다. 당연히도 사람은 말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충혈된 눈의 동물은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다랐다.
‘늦었다.’
앤서린은 당연히 마상 무예에도 통달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전속력으로 달려온 말이 순식간에 말발굽을 내려침에야 별다른 타개책이 없었다.
앤서린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었던 건 옆에 선 여자를 끌어안고 몸을 굽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앤서린은 그 숭고한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제 팔에 감겨들어야 할 여자가 말을 향해 달려 나갔기 때문이었다.
앤서린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앤서린은 오늘 발생할 피해가 기껏해야 뼈가 부러지는 정도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더 심각한 종류의 부상을 보게 될 듯했다. 짐승은 제 아귀를 향해 달려 나간 여자의 몸을 그대로 짓밟을 것이다.
앤서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곧 사람의 뼈를 부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히히힝!”
말의 울음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리고, 정적이 찾아들었다.
‘뭐지?’
여자가 기행으로 자리를 피했더라도 말은 계속 달려 나가야 하며, 혹 하나의 피해자를 내고 그쳤다 해도 그만한 타격음이 들려야 한다. 그러나 주변은 온통 조용했다. 앤서린은 당황하여 눈을 떴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광경과 마주쳤다.
한낮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까마득히 높은 하늘엔 작열하는 태양이 걸려 있었으므로, 앤서린은 반사적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손을 들어 눈가 위를 가렸다. 무심코 입을 벌린 앤서린에게, 역광으로 얼룩진 여자가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빛에 익숙해진 눈에 천천히 주변의 광경이 담겼다. 경악한 얼굴의 사람들, 제자리에 멈춰 선 말, 그리고……
그 위에 앉은 여자.
여자가 깊숙이 눌러쓰고 있던 모자는 어느새 바람에 벗겨져 있었다. 로브 자락과 함께 은인의 머리칼이 흩날렸다. 얼굴은 잘 알아볼 수 없었으나 선명한 붉은빛만은 강렬히 각인되었다. 그것이 태양의 색과 닮아, 앤서린은 그만 무심코 이렇게 중얼거렸다.
“마티나…….”
일 리는 없지.
앤서린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저만 들릴 크기로 읊조린 게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망신을 당할 뻔했다.
앤서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은 여전했다. 앤서린이 마지막으로 본 건 목책을 밟고 뛰어오르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그대로 말 위에 올라탄 것인가? 급격히 온순해진 동물에게선 방금의 날뛰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게…….”
앤서린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여자가 물었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예, 괜찮습니다만, 그…….”
“다행입니다. 관리가 미비해 큰일이 날 뻔했네요.”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앤서린의 경악 어린 물음에 여자가 가볍게 말의 갈기를 쓸었다.
“고삐가 안장에 끼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고삐가 당겨지면 말은 흥분하니까요. 목이 많이 죄인 듯하기에 끈을 빼내어 진정시킨 것뿐입니다.”
그 짧은 시간에 그것을 다 봤단 말인가?
앤서린의 얼굴에 불신이 떠올랐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의심할 정도로,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원인을 발견한 것만도 놀라운 일인데 흥분한 말의 위로 몸을 던지기까지 했다. 배짱이 두둑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겁이 없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두 표현 모두 여자에겐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의 선택은 더없이 이성적인 판단으로 내려진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앤서린이 입을 뻐끔이건 말건, 이야기를 마친 여자는 그대로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제야 뒤에서 멍청히 지켜보고만 있던 지배인이 달려 나왔다. 그는 사람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말을 관리하던 남자를 크게 꾸짖었다. 그것을 이 소란의 면죄부로 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이…… 이 쓰레기 같으니라고! 손님이 다치셨으면 어쩔 뻔했어! 말 하나 관리를 못 해서 이 사달을 내!”
언성만 높아진 게 아니고 손도 같이 올라갔다. 어느새 다시 모자를 눌러쓴 여자가 지배인에게로 다가갔다. 다른 고용인들이 지천에 널려 있는데도 그녀는 굳이 지배인에게 고삐를 내주었다.
“받으세요.”
“예? 예, 예……?”
몇 번 멍청히 되물은 지배인이 황급히 끈을 받아 들었다. 역시 멍청한 얼굴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을 향해 여자가 손을 까딱였다. 아까 계산서를 가지러 갔던 남자였다. 여자는 종이 위에 매끄러이 서명했다.
“여기요. 대금은 이쪽에서 받아 가시면 됩니다.”
앤서린은 그 서명을 확인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가볍게 고개를 까딱인 여자가 그대로 자리를 떠나려 했기 때문이다. 앤서린은 황급히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만요!”
여자가 멈춰 섰다. 방금의 소란이 믿겨지지 않는 태평한 어조로, 그녀가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저를 구해 주셨지 않습니까. 몸을 웅크리긴 했어도 최소 골절이었던 데다, 운이 나빠 머리를 부딪쳤으면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예, 그대의 수많은 미래를 지켜 드릴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여자가 우아한 투로 예를 취했다. 상황을 정리하려는 것이 티가 났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시적인 인사였다. 앤서린은 답지 않게 얼굴까지 붉혔다. 그녀는 열렬한 구애자마냥 필사적으로 은인을 붙들었다.
“이대로 가시면 제 면이 서지 않습니다. 무언가 보답이라도, 그래, 잠시 제 자택에 들르시지요.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여자의 얼굴에 곤란한 표정이 떠올랐다.
“저를 은인께 아무것도 베풀지 않는 파렴치한으로 만드실 생각이십니까?”
앤서린은 이때다 싶어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밀어붙였다. 언뜻 상처 입은 듯한 기색으로 눈을 내리깔았음은 물론이다.
“……그럼 잠시만입니다.”
결국 상대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앤서린의 낯이 환히 밝아졌다.
* * *
맹세컨대, 아스티나는 이럴 계획이 아니었다.
“향이 참 좋지 않습니까? 대륙 너머에서 들여온 귀한 차랍니다.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것이라 저도 친우를 통해서나 알음알음 얻어먹고 있습니다.”
친근하게 말을 붙이는 상대의 재간에 아스티나는 엷게 웃었다. 물론 마음에서 우러나온 미소는 아니었다.
여자의 이름은 앤서린 트리스탄, 후작가의 일개 영애라 해도 귀한 신분인데 그녀는 무려 가주의 위치에 있었다. 아스티나가 수도로 올라오며 마주쳤던 에드윈의 누이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공적인 시각으로 읽어 내자면, 아탈렌타가의 정적이자 앞으로 사교계에서 아스티나가 대적해야 할 여자다.
‘이 무슨 기막힌 우연이.’
수도로 향하는 여정에서 트리스탄 가문의 남매 둘을, 그것도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앤서린을 따라 마차로 향했을 때까지만 해도 아스티나는 별생각이 없었다. 한데 그녀를 깍듯이 대하는 시종의 태도에서부터 이상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은 앤서린의 집에 도착하고서 확신으로 변했다.
커다란 저택과 열 지은 사용인들, 한눈에 보기에도 거대한 규모는 주인의 부를 말해 주었다. 언뜻 보아도 대귀족의 사저였고, 고용인들은 모두 공손히 앤서린을 후작님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응접실로 안내받은 후, 앤서린이 제 본명을 소개했을 때는 정작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인이 작위를 물려받은 후작가는 트리스탄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얼굴을 가렸으니 상관없겠지.’
아스티나는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해 보았다. 말에 올라탔을 때 급히 움직이느라 모자가 한 번 벗겨지긴 했으나, 자신은 햇빛을 등지고 있었다. 아마 상대도 제 얼굴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좀처럼 대답이 없는 아스티나를 보고 앤서린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 자리가 불편하십니까?”
“아니요, 그런 게 아닙니다.”
사람을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는 건 결례다. 아스티나는 고개를 내젓고는 사실에 가까운 변명을 돌려주었다.
“다만 정말…… 정말 예상치 못했어서요. 설마 그 트리스탄가의 가주이시라고는.”
“죄송합니다. 거기서 신분을 밝히면 왠지 부담스럽다며 그냥 가 버리실 것 같았거든요. 하하하.”
앤서린이 호탕하게 웃었다. 벌어지는 입의 모양을 보니 왜 진즉 알아보지 못했나 싶다. 앤서린과 에드윈의 웃는 모습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앤서린이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남성복을 걸친 상태라 더더욱 그렇다. 사람들도 그들을 남매보다는 형제라 소개받는 편을 더 자연스럽게 여길 것 같았다. 은인에게 빚을 갚겠다고 나서는 모습까지도 마냥 판박이다.
앤서린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물었다.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은인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아스티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티나입니다.”
아스티나도 트리스탄의 가주 앞에서 아탈렌타의 대공비라 밝힐 깜냥은 없었다. 아탈렌타의 대공비가 트리스탄가의 응접실에서 사이좋게 차를 마시고 있다고 하면, 그 어느 누가 믿겠는가?
아스티나는 급격히 싸늘해질 분위기를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앤서린의 말을 대충 들어 주다가 적당히 몸을 빼내는 편이 나을 것이다.
혹여 나중에 사교 행사에서 마주칠 일을 염려하여, 아스티나는 아까부터 의식적으로 목소리를 낮추고 있었다. 로브를 챙겨 오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아스티나는 하필 이날 외출을 결심한 스스로의 무의식을 질책했다.
일행이 수도에 도착한 것은 오늘 새벽의 일이었다. 힘든 행군이 아니었다고는 하나 장거리 여행은 사람을 지치게 하는 법이다. 그들은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침대 위로 엎어졌다.
저택은 대공령의 본가와 비교해 모자란 점이 없었다. 원래도 세심히 관리되었던 데다, 먼저 도착했던 올리버와 본가의 사용인들이 모두 단장을 마쳐 놓은 참이었다. 아탈렌타에 있는 것보다는 약소한 크기였지만, 그들은 침실에 둔 철창까지 아주 훌륭히 재현해 냈다. 아스티나가 자리를 비웠을 때 테리오드가 몸소 스스로를 가둘 곳이었다.
방으로 들어선 테리오드가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건 바로 그 우리였다. 그는 말없이 회색빛 창살을 쓰다듬었다. 덤덤한 표정이었지만 그 모습이 못내 신경 쓰여, 아스티나는 그에게 수확절 연회에 관해 질문했다.
수도에 있는 벨라체에서 수학한 만큼 아스티나가 축제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대공비로서의 참석은 처음이기도 하다. 생각 없이 행동할 자리가 아니니만큼 대공에게 적절한 행동반경을 물어 둘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다른 이야기를 하면, 보고 싶지 않은 현실에서 그가 잠시 눈을 돌릴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연회는 총 7일간 아주 성대하게 이루어집니다. 매일 참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만, 저는 보통 첫날과 마지막 날만 참석했습니다. 폐하가 등장하시는 것도 그때이니까요. 아, 부인께서는 연회가 끝나고서 열리는 사냥 대회에 참석하셔도 좋을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춤보다는 그쪽에 더 흥미가 있으실 것 같고. 테리오드가 뒷말을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그 와중에도 부인의 취향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답답하면서도 더없이 그답다. 어찌 됐든 테리오드의 말대로, 아스티나는 그 사냥 대회에 급격히 관심이 갔다.
벨라체 아카데미에 있을 때는 학기 중이라 축제를 제대로 즐기기가 불가능했다. 연회는 물론이거니와 사냥 대회에도 참석해 본 기억이 없다. 본래 무도회에는 흥미가 없는 편이나, 병기를 다루는 일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아스티나의 관심사는 대체로 그녀의 머리칼과 닮은 핏빛을 띠었으니까.
참석을 결심한 아스티나는 내친김에 말을 보러 나왔다. 테리오드도 함께 오고 싶어 했지만, 그는 수도로 입성하자마자 날아든 많은 편지에 몹시 성의 있는 답장을 해야 했다. 수도의 사교계에서 교류했던 인사들과, 그 외의 관련 없는 온갖 이들에게까지 연락이 밀려들고 있었다. 관심의 홍수에 빠진 테리오드를 두고 아스티나는 저택 밖으로 도망 나왔다.
아스티나는 내심 혀를 찼다.
‘그러지 말 것을.’
“티나라, 예쁜 이름이십니다. 혹 성은…….”
무심코 질문하던 앤서린이 아, 하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밝히고 싶지 않으시니 말씀하시지 않은 거겠죠.”
“성이 존재하지 않아 말씀드리지 않은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엔 너무 자연스러우십니다. 평민이라 신분을 속이고 싶으셨거든 더 어색하게 행동하셨어야지요.”
앤서린이 능청스레 아스티나의 우아한 예법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것을 끝으로 앤서린은 아스티나에 관해 더 캐묻지 않았다. 상대의 곤란을 염려한 앤서린이 먼저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무엇보다 제가 원래 하려던 이야기는 다른 것이니까요. 마땅한 보답을 드려야 할 텐데……, 혹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감사 인사를 받은 것으로 된 일입니다. 크게 심려치 마세요.”
“명예를 아는 사람이라면 은인에게 반드시 보은하는 법이지요. 혹 여행 중이시라면 필요한 물품들을 원조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저희 트리스탄에서 기꺼이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아스티나는 미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아탈렌타가의 사람인 것을 알고도 이 말이 나올까. 트리스탄가의 두 자녀에게 은혜를 베풀고, 보은을 확답받다니 황송하기 그지없었다.
“당분간은 수도에 머물 생각이라 괜찮습니다.”
“따로 원하시는 게 있다면 부담 없이 말씀해 주세요. 그 정도의 염치는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그에 아스티나가 작게 웃었다. 에드윈도 앤서린을 설명할 때 같은 표현을 썼던 탓이다.
“재미있군요.”
“무엇이요?”
“수도까지 오는 길에도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났었거든요.”
이왕 여행자로 가장한 것, 이참에 에드윈과의 일을 밝혀도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소지품 정리를 하지 않아 가방 안엔 여전히 에드윈이 준 편지가 들어 있었다. 이대로 보관만 해 두기도 찝찝했는데 마침 전달할 기회가 생겼다. 아스티나는 편지를 꺼내어 앤서린에게 내밀었다.
“사실 얼마 전 후작님의 형제분을 뵈었습니다.”
“형제라면…….”
“그분은 에드윈 트리스탄이라고 본인을 소개하더군요.”
순간 앤서린의 표정이 흐려졌다. 곧 감쪽같이 숨어든 반응이었으나,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아스티나는 충분히 알아챌 수 있었다. 앤서린은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종이로 손을 뻗었다. 그 얇은 종잇장이 자신을 위협할 것 같기라도 했는지 몹시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앤서린은 천천히 아스티나가 준 편지를 읽어 내렸다. 그러고는 언뜻 다급하게도 느껴지는 음성으로 에드윈의 행방을 캐물었다.
“혹시 어디서…… 어디쯤에서 그를 만나셨습니까?”
“첼본 영지 초입에서였습니다.”
“수도와 가까운 곳이 아닙니까? 혹 수도로 오겠다고 하던가요? 아니면 트리스탄 영지로 향하고 있었다든가.”
“동쪽으로 이동한다고 하시더군요. 딱히 후작님께서 언급하신 곳들에 들를 생각은 없어 보였습니다.”
아스티나가 고개를 저었다. 앤서린의 어깨에 힘이 빠졌다. 앤서린은 등받이에 완전히 몸을 묻었다.
“그렇군요…….”
오른손으로 입가를 쓸며, 앤서린은 들고 있던 편지를 탁상 위에 내려놓았다. 에드윈의 글씨가 바닥 면을 향하게 한 채였다.
아스티나는 편지를 덮은 앤서린의 손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종이 위엔 어느새 옅은 땀 자국이 난 채였다. 젖은 손바닥은 긴장을 말한다. 편지에 별다른 내용이 없다고 생각했던 아스티나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반응이었다.
앤서린은 가볍게 입술을 깨물더니,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부러 어조를 높여 말했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저희 남매 모두의 은인이시라니, 기묘한 인연이군요.”
“저도 후작님의 소개를 듣고 많이 놀랐답니다.”
“에드윈에게는 어떤 도움을 주신 겁니까?”
“도움이라기보단……. 그분께서 저희 일행에게 실례를 저지르셨었지요. 산적들을 붙잡아 이송하던 저희를 보고 인신매매단으로 오인하여 공격하셨었습니다.”
아스티나의 간략한 설명에 앤서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앤서린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예? 그 약골이요?”
아스티나가 스치듯 웃어 보였다.
“평가가 박하시군요.”
“몸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변변찮던 사람입니다. 어디 몸 상한 곳은 없어 보였습니까?”
“예, 다행히도요.”
앤서린이 무어라 더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에 아스티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둘은 제삼자를 통해서만 근황을 주고받게 된 걸까.
적대적인 가문 간의 관계를 떠나 생각해 보면, 앤서린과 에드윈은 객관적으로 좋은 사람들이었다. 에드윈이 누이를 말할 때 내보였던 꺼림칙한 기색이 잘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에드윈은 누이와의 만남을 피하며 앤서린은 오라비의 이야기를 듣고 표정을 굳힌다. 그들 남매 사이는 어쩌다 갈라진 것일까.
보통의 후계 싸움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스티나는 앤서린이 얼마나 뛰어나건 말건, 에드윈이 원했다면 그녀에게 후작위가 돌아가지 않았으리란 걸 알았다. 결정은 어디까지나 전대 후작의 몫이고 보통 귀족들은 가주의 책임감이란 고간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니까. 그 살덩이는 기억도 나지 않는 먼 옛날부터 퍽 대단한 연대로 자리해 왔다.
“걱정되시나요?”
아스티나는 앤서린의 의중을 떠보았다. 앤서린이 고개를 내저으며 답했다.
“……장성한 남자가 여행 좀 하기로서니 무슨 걱정을 하겠습니까. 몸 상하지 않았다면 됐지요.”
“예. 자신은 잘 지내고 있으니 후작님께서도 건강하시라고. 그리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앤서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기야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아스티나가 그것을 에드윈에게 전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동쪽으로 떠난 남자와 수도에 머물 아스티나가 재회할 일은 없을 것이다. 에드윈이 향하지 않은 장소에 있을 앤서린 역시.
“이야기도 다 전했으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스티나는 로브를 다시 한번 깊이 눌러쓰고 일어났다. 외출로 예상보다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말았다. 오랜만에 방문한 수도라 아스티나의 일정은 빽빽이 채워져 있었다. 무도회 참석을 제외하고서도 해치울 일이 산더미다. 내일은 친정 식구들이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기에 손님을 맞을 준비도 해야 했다.
생각에 잠겨 있었던 탓에 앤서린의 반응은 느렸다. 앤서린은 뒤늦게 아스티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가 보십니까?”
“예, 말씀도 다 나누었고요.”
“하지만 저로선 감사한 일이 늘었을 뿐 보답을 드리지도 못하였는데요.”
앤서린이 다급히 말했다. 사감에 잠겨 상대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음을 자각한 탓이었다. 자책하는 낯을 한 앤서린에게 아스티나가 절충안을 내밀었다.
“그리 원하신다면 말씀하신 보답은 나중에 꼭 받도록 하지요. 그때까지 기억에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당연히 잊지 않을 겁니다. 트리스탄의 명예를 두고 약조하겠습니다.”
앤서린이 가슴에 주먹 쥔 손을 올리고는 당당히 말했다. 아스티나는 그런 앤서린의 모습이 제법 신의 넘쳐 보인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 고귀해야 할 귀족들 중에서 오히려 더한 추악함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잦다. 적어도 앤서린 후작은 덕을 본 일에 감사할 줄 아는 격이 있는 인물이었다. 아스티나는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스티나는 사뿐히 고개를 까딱이고는 문을 나섰다. 앤서린이 배웅을 하겠다며 따라나서려 했으나 돌아온 건 정중한 거절이었다.
아스티나의 등을 멍하니 쳐다보던 앤서린은 도로 의자 위에 앉았다. 그녀의 시선이 문득 에드윈이 전한 편지 위로 닿았다. 앤서린은 그 위로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힘을 주어 종이를 구겼다.
의식적으로 오라비의 소식을 머릿속에서 지워 내며, 앤서린은 대신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티나라…….”
그러고 보니 이름마저도 마티나와 닮았다. 붉은 머리칼이나 곧은 자세에선 기품이 느껴졌다. 성도 밝히지 않은, 싸구려 로브를 눌러쓴 여자에게서 위엄을 느꼈다면 그것은 과장일까.
앤서린은 어릴 적 우상으로 여기던 마티나의 모습을 곧잘 그려 내곤 했다. 여자는 어린 앤서린이 상상하던 마티나 여제와 쏙 닮아 있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제위를 거머쥔 무소불위의 황제이자 주군 되는 자들의 모범. 천재적인 무위로 유명했던 그녀라면, 티나라는 여자가 보여 줬던 묘기도 손쉽게 시연해 보일 것이다.
앤서린은 말도 안 되는 상상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꼭 마티나의 환생 같은 여인이었어.”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