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불온한 초대 (9/23)

2부

Into the cursed castle.

9. 불온한 초대

벤자민 레안드로스는 객관적으로 아주 보잘것없는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 그의 공식적인 신분은 고작 기사가 됨으로써 얻은 준남작 작위에 그쳤다. 둘째로, 탁월한 재능이 있는 점은 사실이나 아직 일개 아카데미 재학생일 뿐이라 일선에서 두각을 드러낸 것도 아니었다. 셋째로, 그는 어디 눈먼 명문가의 귀족 영애 하나와 약혼식을 올려 미래를 보장받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벤자민은 아주 기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어떤 점이 기묘하느냐 묻는다면, 일개 영식인 그가 독대하고 있는 상대의 정체로 답하겠다.

“떨리느냐?”

황제는 다분히 만족스러운 얼굴로 잔을 들었다. 입가에 은은히 퍼진 미소에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벤자민이 머쓱한 낯을 지어내 보이며 답했다.

“확실히 무대 체질은 아닌가 봅니다.”

“그렇겠지, 숨어 산 지가 그리 오래되었으니.”

그리 말하면서도 눈에는 분노의 기미가 없다. 벤자민 역시 가면 같은 가식으로 가볍게 동조할 뿐이다.

벤자민은 아버지에게 받을 수 있는 것이 적선 같은 동정과 의미 없는 안타까움뿐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벤자민을 궁 밖으로 내치고 그의 어머니가 산송장으로 살게 만들었다.

그러나 벤자민은 황제의 앞에서 그리 힘들이지 않고도 웃을 수 있었다. 도리를 다하지 않았다며 원망을 돌려주기엔 상대가 너무도 아버지 같지 않은 탓이다.

벤자민은 어렸던 기억을 더듬었다. 이 황궁을 걷다 보면 어렵지 않게 황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때를 말이다. 상대를 모략하던 뱀 같은 쇳소리들은 10년 전부터 천천히 정리되어 이제 더는 잡음이 남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로, 승자는 정비인 황후 소생의 1황자 프리모였다. 타고난 성정이 냉철하고 정이 없는 그는 이복동생들을 자비 없이 베었다. 벤자민은 그를 마주칠 때마다 그의 피부밑엔 붉은 피 아닌 쇳가루가 흐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젖살도 빠지지 않은 어린아이를 보며 살인을 획책할 리 없을 테니까.

‘벤자민이라고 했나?’

‘예, 형님.’

‘학문에 조예가 뛰어나다지? 검술에도 소질이 있고.’

‘미력한 솜씨입니다.’

‘겸손은 교양을 말하지. 어린 나이인데 제법 품위가 있구나, 아우야.’

이복동생을 내려다보는 미소가 짙었다. 벤자민은 그 눈 끝에 스친 날카로운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황자들은 사고사 혹은 의문사의 형태로 죽어 나갔으나, 모두가 그것이 타살이라 짐작했다. 당연히 황제 역시 그 사실을 알았으리라. 하지만 황궁은 제 핏줄을 분란의 싹으로 규정하는 비정한 일에 익숙해지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스스로도 형제를 제치고 황위에 올랐던 황제는 1황자의 무자비한 행각을 모른 척했다. 공식적으로 범인이라는 증거가 드러나지 않는 한 프리모의 획책은 안전했다. 나이가 찬 황녀들은 모두 적당한 혼처로 팔려 나갔고, 개중 머리를 좀 쓰는 누이는 형제들처럼 비참한 죽음을 맞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살아남은 건 1황자인 프리모와 그의 동복누이인 이시스 황녀, 그리고 그들을 따르겠다며 발밑에 엎드린 자들뿐이었다. 그 이해타산적인 집합에 벤자민은 포함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비공식적으로’ 살아남았다.

황궁에 피바람이 불자 벤자민의 어머니는 겁에 질렸다. 아이를 잃고 눈이 뒤집힌 후궁이 황후궁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가 즉결 처형을 당한 직후였다. 벤자민의 어머니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어린 아들을 바깥세상으로 잡아끌었다. 벤자민이 고작 열세 살이었을 적의 일이었다.

‘벤자민, 너는 이제부터 황자가 아니다. 다시는 이 지긋지긋한 성을 입에 담아서는 안 돼. 그래야 네가 살 수 있어.’

‘어머니, 하지만 저는 대관절…….’

‘죽어 비단길을 걷느니 이 악물고 살아남아 이승의 진흙탕을 구르는 편이 낫다. 넌 똑똑하니 입신양명에는 문제가 없을 게야.’

‘어머니! 궁을 나가서 어찌 살라는 말씀이세요.’

어머니가 슬픈 눈으로 벤자민을 보며 뺨을 쓸어 주었다.

‘비록 어미가 힘이 없어 도망치지만 너는 황제의 아들이다. 네 고귀함을 잊지 말렴.’

아들을 범부로 키우겠다고 말하면서 정작 혈통의 고귀함을 강조하는 우스움이란.

그녀는 스스로를 감금시켜 제 손발을 끊었고 벤자민은 숙부의 가문에 입양되어 자랐다. 조용히 궁에서 사라진 이름 없는 황자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황제는 재능 있는 벤자민을 아껴 종종 황궁으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거나, 여러 원조를 해 주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벤자민이 후계자가 되길 바라 궁으로 불러들인 것이 아니었다. 벤자민 역시 다시 황가의 가계를 비집고 들어오는 눈에 띄는 짓을 벌여 프리모와 척을 질 생각이 없었다.

‘분명, 아스티나가 괴물 대공과 혼인하기 전까지는 그러했지.’

벤자민은 처음으로 제 무력함에 염증을 느꼈다. 살기 위해 도망침으로써 벤자민은 좋아하는 여자 하나 지킬 수 없게 되었다. 그가 황자로 남아 있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벤자민은 잃어버렸던 것을 찾고자 결심했고, 뛰어난 아들을 아꼈던 황제는 크게 기꺼워했다. 궁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말에 황제는 흔쾌한 허락을 돌려주었다.

벤자민은 이번 수확절 연회에서 황자로 인정받음과 동시, 공식적으로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게 될 예정이었다. 벤자민은 지속적으로 프리모에게 충성을 바쳤던 황자들과는 입장이 달랐다. 황제가 될 생각이 없음을 드러낸들 프리모는 온갖 시꺼먼 속을 벤자민에게 대입할 것이다.

유쾌한 기분은 아니나 벤자민은 프리모에게 위협이 될 자신의 가장 큰 무기를 먼저 거세시키기로 했다. 그가 대적할 인물은 1황자가 아니라 먼 아탈렌타에 있는 대공이었으니.

“아마 네가 힘이 되겠다고 하면 프리모도 기뻐할 게다.”

“너무 오랜만에 얼굴을 비치는 것이라 조금 염려되기도 합니다.”

“내가 프리모에게는 잘 말해 두마. 이젠 형제간의 우애를 다질 때도 되지 않았느냐.”

이는 황위에 가장 가까운 승자가 정해졌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벤자민은 아들들이 죽어 나가는 상황에서 황제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던 이유를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황제는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식에게 주는 총애조차 영리하게 조절하여 결코 그들의 세력이 자신을 넘지 않도록 했다. 영리한 여우는 제위를 물려주고 난 후에도 뒷방 늙은이 신세로만 남지 않을 것이다

“늦게라도 네가 마음을 돌려 그것이야말로 다행이다. 내 언제고 말하지 않았니. 후회할 것이라고.”

술잔에 담긴 주홍빛 액체가 넘실거렸다. 황제는 그것을 느긋이 한 모금 넘기며 덧붙였다.

“황가의 핏줄은 결코 비렁뱅이처럼 살 수 없느니. 네가 우수한 건 좋은 혈통 덕이니 그 재능 역시 황가를 위해 사용해야지.”

그럴 리가. 내 영리함은 나의 것이지. 황가가 물려준 혈통의 특징은 오직 오만과 잔혹성뿐이고. 그게 당신과 당신의 첫째 아들이 피를 마시지 않고서는 배겨 낼 수 없는 이유야.

벤자민은 입꼬리를 들어 웃었다.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다 미력했던 탓이지요.”

“아니, 네 어미가 멍청했던 탓이지 어린 네게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심드렁하게 말하던 황제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어머니는 찾아가 보았느냐?”

“아직입니다. 폐하를 먼저 뵙고 가 보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래, 혹여 네 어미가 쓸데없는 말을 하더라도 귀담아듣지 말거라. 사내대장부는 모름지기 야망을 품고 살아야지.”

황제는 벤자민의 어미가 제멋대로 아들을 황궁 밖으로 내보낸 일에 크게 노했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격언은, 적어도 황제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그는 우수하게 두각을 드러내는 자식들을 아꼈고 벤자민도 그중 하나였다.

황제는 벤자민이 황자의 신분을 버린 일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그러나 벤자민은 아들의 출세보다는 안전을 더 걱정한 어머니 쪽이 훨씬 더 부모답다고 생각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 모든 말들을 아비의 조언이 아닌 타인의 간섭 정도로 받아들였기에, 벤자민은 대수롭지 않게 수긍했다. 그는 황제와의 독대에서 결코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대답을 한 적이 없었다. 황제는 이번에도 제 할 말만을 쏟아 놓고는 벤자민에게 그만 돌아가라 일렀다.

벤자민은 예를 갖춰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문이 닫히자마자 그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들었다. 후련한 걸음이 황제의 방에서 빠르게 멀어졌다.

황좌란 철혈이 흐르는 자들만 앉을 수 있는 자리인가. 벤자민은 형제를 베어 넘긴 황태자와 그런 아들을 보듬는 황제를 보며 메스꺼움을 느꼈다. 그에게는 인간 됨을 버린 자들이 앉는 황좌가 그리 반짝여 보이지 않았다. 만약 프리모와 견줄 만한 패가 자신에게 있었더라도 황위 싸움에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벤자민은 일련의 비극들에 깊은 피로감을 느꼈다.

빨리 돌아가 쉬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벤자민은 머지않아 다시 제자리에 멈춰 서야 했다.

‘늙어 자빠질 때가 되더니 뒤늦게 자식들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졌나 보지.’

벤자민은 가시 돋친 말을 속으로만 읊조렸다.

황궁은 언제나 온화한 그마저도 분노하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벤자민은 황손들이 미쳐 가는 것이 그들의 본성 때문만은 아니리라 생각했다. 이곳의 숨 막히는 공기는 사람의 피를 끓게 만드는 데 대단한 효과가 있었다.

배곯을 일 없이 그저 고상하게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왜 이다지도 추악해져 버리는 것일까. 겉모습은 이보다 더 우아할 수 없을진대.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황녀 전하.”

벤자민이 마주친 건 황궁에서 가장 우아한 얼굴이었다. 그가 도통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낯익다는 말이 그 만남의 반가움을 표현해 주지는 않는다.

벤자민의 얼굴에 떨떠름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상대도 자신과 그리 다른 기분은 아니리라 짐작했다. 이복형제란 도통 반가울 수 없는 종류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어머, 귀하신 곳에 누추한 손님이 왔네.”

과연 그녀는 목소리에 담긴 조롱을 숨기지도 않았다. 벤자민은 무표정을 가장하며 그녀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프리모 황자의 동복에서 나 온전한 황녀로 남을 수 있었던 이시스였다. 그러나 벤자민은 그녀가 살아남은 이유가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프리모는 성정이 잔인하여 가족이라고 남다른 온정을 베풀진 않았기 때문이다. 이시스의 생존은 온전히 그녀의 능력으로 인한 것이었다.

스물네 살의 그녀에게 아직 약혼자가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시스가 혼처를 정하지 못한 이유는 그녀의 하자에 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스스로의 값어치를 지나치게 끌어올린 축에 속했다.

벤자민은 다른 황손들을 제거하는 작전을 진두지휘했던 이가 고작 열 몇 살의 이시스였음을 알고 있었다. 이시스는 프리모를 유력한 후계자로 만듦으로써 스스로의 값어치를 증명했다.

아름다운 얼굴에 교양 넘치는 말씨. 자신이 프리모라 해도 누이를 쉽게 놔주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그녀는 최후의 최후까지 이용당한 뒤 프리모가 정해 주는 적당한 혼처에 팔려 갈 것이 분명했다.

아니, 그녀 정도면 자신이 결혼할 자리 정도는 스스로 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든 프리모의 머리로는 그 속내를 꿰뚫지 못할 테니까.

객관적으로 프리모는 제왕으로서의 자질이 충분한 편이 아니었다. 그는 계책하는 일에 특히 질색했다. 벤자민은 프리모의 진영에서 냈던 몇 번의 절묘한 타개책들이 그의 머리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데 제 기사 작위도 걸 수 있었다.

프리모가 아니라면, 그건 이시스의 것이다.

어찌 보면 프리모가 아니라 이시스를 마주친 게 더 긴장해야 할 상황일 수도 있었다. 이시스가 벤자민을 ‘폐기 처분’ 하기로 결정한다면, 능히 그리될 것이었으므로.

벤자민의 야망은 황제가 되는 데 있지 않았고 따라서 그는 대단한 책사의 심기를 거스를 생각이 없었다. 벤자민은 깊이 허리를 숙인 채 이시스가 작별을 고하기를 기다렸다. 그는 그녀가 그대로 떠나리라 생각했다. 고귀한 황녀는 자신과 말을 섞는 일을 반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시스는 예상과는 달리 벤자민을 향해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벤자민은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먼 거리에 선 경비들이 사물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면 대화 내용이 새어 나갈 일은 없으리라. 들을 귀가 없기 때문인지 이시스는 다분히 격식 없는 투로 말했다.

“그런 인사치레는 됐어. 곧 있으면 공식적으로 너도 황자라고 불리게 될 텐데. 남매끼리 내외하는 건 아무래도 좀 웃기지 않겠어?”

벤자민은 잠시 멈칫했다. 이번 수확절 연회에서 자신이 정체를 밝히기로 한 것은 극비 사항이었다. 대체 어디서 보안이 뚫린 것인가. 소름이 끼쳤다.

이시스가 안다는 말은 프리모도 알게 되리라는 뜻이다.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겠다는 구실 좋은 변명을 프리모가 곧이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확실해지기도 전에 제 목에 위협을 더할 생각이 없었던 벤자민은 놀람을 숨기지 못했다.

“떨리니?”

이시스가 그렇게 물으며 벤자민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창백할 만치 흰 손을 뻗어 벤자민의 턱을 들어 올렸다.

“가엾게도…… 어딘가에 계속 쥐 죽은 듯 처박혀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

“심장을 내놓을 준비는 됐니?”

사람의 가슴을 가르겠다는 말치고는 지극히 유혹적인 어조였다. 모략에 익숙해진 여자는 죽음처럼 달콤한 낯으로 웃었다. 벤자민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소식을 들으셨다면 제가 야망 없는 사내라는 것도 아실 텐데요. 전 황위에 관심이 없습니다.”

“네게 다른 속셈이 없다고 우리가 어떻게 판단하지?”

“저는 황손으로 인정받음과 동시에 황위 계승권을 박탈당하게 될 겁니다. 제게 다른 뜻이 있었다면 귀환은 좀 더 이른 때에 결심했겠죠.”

이시스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겁하게 살아남기로 했구나.”

“적어도 비열하지는 않게요.”

“그 건방진 태도가 화가 되리란 생각은 안 드니?”

“마냥 손 놓고 있을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건 아셨으면 해서요. 하지만 누님은 효율이라는 게 무엇인지 아시는 분이죠. 쓸데없이 날을 세우지만 않는다면, 저희는 서로를 거스르지 않고도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벤자민이 담담히 대답했다. 이시스의 입꼬리가 위험하게 휘어졌다.

“사실은, 나는 그렇게 생각해. 넌 프리모를 건드리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왜―”

“하지만 프리모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잘 모르겠구나.”

반박하기 위해 열렸던 입이 조용히 다물렸다. 벤자민은 이시스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그녀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탓이다.

황궁에서 벌어졌던 모든 참상은 ‘그들’의 뜻이었다. 이시스가 획책하고 프리모가 실행에 옮겼다. 벤자민은 프리모에게서 이시스를 떼어 내고서는 그를 판단할 수 없었다. 그는 이시스가 왜 굳이 프리모와 그녀 자신을 분리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시스의 모호한 말은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벤자민.”

그녀는 여유 있게 이복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이어진 말은 동복에게 향한 것마냥 다정했다.

“지켜 줄까?”

“……무슨 의도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이시스는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벤자민의 앞을 돌았다. 벤자민은 그것이 마치 먹이를 탐색하는 야생 동물의 그것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이시스는 정확히 벤자민의 반대편에서 서고 나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부채를 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재밌는 걸 하나 알려 줄까.”

이시스가 전혀 재밌지 않다는 투로 무감하게 말했다. 그 온기 없는 음성에 벤자민은 울컥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네게 누이가 하나 있었지?”

벤자민의 얼굴이 굳어 들었다. 그에게도 같은 소생의 누이가 하나 있었다. 그것이 과거로 표현되는 이유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벤자민이 황자의 태를 잃고 3여 년 뒤, 그의 누이는 알 수 없는 병으로 조용히 사망했다.

외가가 한미하다고는 하나 어쨌든 황녀였고 벤자민이 가진 일개 영식의 지위로는 그녀의 시신조차 볼 수 없었다. 벤자민은 누이의 죽음을 다른 유명인의 것만큼이나 먼 자리에서 얻어들었다.

몸이 좋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그가 황성을 떠나기 전만 해도 고작 잔병치레를 하는 정도였다. 어머니와 남동생을 잃은 충격이 누이를 더 약해지게 만든 것일까 싶어 벤자민은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죄책감을 담고 살았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벤자민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눈동자 안에서 분노의 기운이 일렁였다. 이시스는 의도한 바를 이뤘다는 듯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네 누이를 죽인 게 바로 프리모다.”

벤자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한낮의 황궁은 소리 없이 지켜보는 이들이 많았다. 이시스가 부채로 입을 가린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리라.

벤자민은 무표정을 가장하며 그녀를 향해 뒤돌았다. 그가 낮고 불안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누님은 병으로 숨졌다고 했습니다.”

“공식적으론 그러했지.”

“그렇다면, 비공식적으로는?”

벤자민의 목소리에 쇳소리가 섞였다. 이시스는 벤자민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녀는 들릴 듯 말 듯 한 크기로 말했지만 그것에 담긴 내용은 능히 사람을 뒤흔들었다.

“그즈음 사냥 대회가 있었어. 네 누이는 거기서 눈먼 화살을 맞고 죽었고, 불의의 사고는 조용히 덮였지. 황궁은 힘없는 소녀보다 더 소중한 걸 보호해야 했으니까.”

“누님은 그런 자리에 참석할 성격이 아니었어요!”

“그녀가 왜 거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프리모가 인간 사냥을 했다고 해도 그리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어. 원한다면 증인이라도 데리고 오지. 그럼에도 네가 프리모를 믿겠다고 말한다면, 글쎄. 너는 내 생각보다 천치로군.”

이시스가 딱 잘라 대답했다. 여유 있게 제 부채에 감긴 레이스를 흘기던 그녀가 이내 눈을 치켜떴다.

“너의 어머니는 여자아이는 안전하리라 생각하여 너만을 궁 밖으로 내보냈지. 우스운 일이야. 무가치한 황녀라는 건, 그만큼 의미 없이 치워 버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시스의 눈에 담긴 조소가 짙어졌다. 그녀의 조롱이 벤자민의 가슴을 어그러뜨렸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더없이 충격적인 이야기였지만 벤자민은 이시스의 진의를 먼저 파악해야 했다.

“저한테 이제 와 이런 말을 해 주는 이유가 뭡니까?”

“네가 황궁에 돌아오겠다고 했으니까.”

이시스가 담백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시스는 더더욱 벤자민에게 이 말을 해서는 안 됐다. 프리모가 벤자민의 누이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리는 건 쓸데없는 적을 만드는 행위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프리모와 이시스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고 가정했을 경우에는 그러했다.

하지만 그녀가 프리모를 돕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벤자민은 본능적으로 이시스의 입에서 나올 말이 그를 함정에 가두리라는 걸 알았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는 결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진 못할 것이다. 누이의 원수를 알게 됐다는 충격 때문이 아니더라도, 극비란 것은 보통 들은 사람의 행동을 제약하기 때문이다. 이시스가 원하는 것도 바로 그 점이리라.

그러나 벤자민은 이시스의 이어진 말을 제지하지 못했다. 그것이 누이에게 바치는 속죄가 되리라는 걸 알았으니까.

“나는 이외에도 프리모에 대해 아주 많은 걸 알고 있지.”

“…….”

“하지만 비리를 손에 쥐고 있는 것과 그것을 터트렸을 때 충분한 효과를 얻을 힘이 있느냐는, 좀 다른 문제거든.”

제 무력을 이야기하면서도 이시스는 벤자민을 자신감 있게 직시했다.

그녀가 말했다.

“날 도와라, 벤자민.”

“그래서 누님은 무엇을 얻습니까?”

이시스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오랫동안 참아 온 흥분이 그녀의 전신을 간질였다. 이시스는 참으로 긴 시간을 기다려 왔다.

“나는 황제가 될 거다.”

오직 이 말을 발화시키기 위해서.

이시스가 프리모를 도운 것은 그를 앞으로 내세워 해치울 공동의 적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냥이 끝나면 더는 사냥개가 필요 없게 되듯, 이제는 멍청하게 제 뜻대로 휘둘려 주었던 오라비를 무너뜨릴 차례였다. 선두로 나서 악명을 뒤집어썼던 남자는 어렵지 않게 침몰할 것이다.

“위험하고도 불가능한 일을 꿈꾸십니다.”

이시스의 말이 더없이 충격적이었기에 벤자민은 잠시 누이의 죽음을 잊고 동요했다. 그에 이시스는 더없이 따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시스는 여자의 몸으로 황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살아온 평생토록 반복해서 가슴에 새겨야 했다. 제국의 시초였던 마티나 여제의 존재가 유명무실하게도 모든 사물과 관습, 그 안에서 자라난 사람들 전부가 말했다. 이시스의 야망은 옳지 않다고. 그리고 이시스는 그 금기에 언제나 이렇게 답해 왔다.

“야망은 사내만을 위한 것이 아니야.”

벤자민은 그 사실에 반박하지 않았다. 벤자민은 프리모의 자질을 의심하면 의심했지 결코 이시스를 무시해 본 적은 없었다. 따라서 그는 결코 제 화를 누그러뜨리는 일 없이 사납게 으름장을 놓았다.

“누님이라고 딱히 더 나은 인간이신 건 아닙니다. 프리모가 내 가족을 죽였다는 게 내가 당신을 도울 이유가 되지도 않고요.”

“나는 내 행동을 포장할 생각은 없다. 네 누이만 내 손으로 처리하지 않았을 뿐 실제로 나는 많은 이복형제를 죽였어.”

“그걸 알면서도 그런 염치없는 말씀을 하십니까? 당신 손에 묻은 피가 얼만데 대체……!”

벤자민이 화를 참지 못하고 그만 언성을 높였다. 이시스가 그의 말을 자르며 속삭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것이지, 난 네 누이를 죽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벤자민을 움직이리라. 이시스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짙어졌다. 그녀는 확실하지 않은 판에 본심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시스는 벤자민을 낚을 가장 강력한 패가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프리모가 황제가 된 궁으로 들어오면 너는 어쩔 수 없이 원수의 비위를 맞추게 될 것이다. 아니, 궁에 들어오지 않아도 언제든 그의 의지에 따라 명을 달리하게 되겠지.”

답은 정해져 있었으므로, 이시스는 그저 오만하게 물었다.

“벤자민, 정녕 비겁한 개가 되어 프리모의 발치에 무릎 꿇을 테냐?”

벤자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주먹 쥔 그의 손이 분노로 경련했다. 이어 눈동자에 형형한 안광이 비쳤다. 벤자민이 목이 졸린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프리모를 죽일 수 있습니까?”

이시스의 만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같은 원수를 두고 있음에야, 프리모를 바닥으로 끌어내린 후의 처분이라면 벤자민에게 맡기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부채를 접어 제 등 뒤로 숨기고는 반대편 손으로 벤자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자연히 등허리에 소름이 끼쳤으나, 벤자민은 이를 악문 채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시스가 연극처럼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수확절에 있을 연회가 참으로 기다려지는구나.”

이어진 작은 끄덕임을 벤자민은 놓치지 않았다.

* * *

“……하여 테리오드 반 아탈렌타와 아스티나 반 아탈렌타 대공 부부를 황성으로 초대하는 바입니다.”

아스티나가 초대장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올 게 왔군요.”

올리버가 겸허히 고개를 끄덕였다. 테리오드는 애매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섰다. 좁혀진 미간에선 곤란함이 엿보였다. 테리오드의 반갑지 않은 기색을 충분히 읽어 냈지만, 그럼에도 아스티나는 의견을 개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얼굴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 말하며 아스티나는 직접 읽어 준 것 외에도 산재해 있던 온갖 초대장을 책상 위로 흩뿌렸다. 바구니에 담겨 있던 질 좋은 종이들이 처량 맞은 행색으로 바닥에 떨어졌다.

고심에 잠긴 테리오드의 눈치를 살피며, 올리버가 민망한 얼굴로 덧붙였다.

“모두 근 일주일 사이에 도착한 것들입니다.”

대공가의 우편함에 불이 난 건 몹시 오랜만의 일이었다. 테리오드가 한참 사교계에서 휘날릴 때 이어지던 초대 행렬은 테리오드가 스물여섯 살이 되었을 무렵 볼품없을 만치 줄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소통의 의미 자체가 완전히 끊겼다.

형식상의 초대는 있었으나 읽을 주인이 없다는 것을 안다는 듯 내용은 성의 없기 그지없었다. 실제로 화려한 미사여구를 써 봤자 읽는 건 집사 올리버의 몫이니 발신자로서는 효율적으로 인력을 절감한 셈이었다.

올리버는 테리오드의 몸이 좋지 않아 참석할 수 없다는 거절을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표현으로 돌려 말해야 했다. 그리고 그 반사적인 거절이 근 일 년에 다다랐을 즈음, 마침내 황성 부처에서도 궁정 무도회의 초대장을 생략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아탈렌타 대공가는 올여름에 있었던 이시스 황녀의 생일 축하 연회에도 초대받지 못했다.

“위험합니다.”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테리오드가 턱을 문지르며 답했다.

“얼굴을 내보일 수 있는 건 고작 하루의 반절입니다. 한데 모두 제가 완전히 돌아온 것으로 알고 있지 않습니까. 혹여 다른 사람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괴물 테리오드라는 오명이 평생 따라붙을 겁니다. 남들에게 보여지지 않는 시간을 내내 의심받게 되겠죠.”

“전하, 지금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 오명에 쐐기를 박는 셈입니다.”

아스티나가 딱 잘라 말했다.

이러한 상황의 발단이 된 건 벨루아 영지에서 대공 부부가 보였던 활약상이었다. 테리오드와 아스티나는 벨루아 영지에서의 일에 이렇게 입을 맞췄다.

홀로 여행을 떠났던 대공비는 산적들에게 휘말려 큰 상처를 입었다. 아내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벨루아로 온 대공은 분노하여 영지를 거의 뒤집어엎었다.

그 와중 대공가의 하녀가 패거리들에게 분풀이 격으로 납치당했고, 천사 같은 대공비는 이를 두고 보지 못했다. 대공가의 사용인을 구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위험에 뛰어든 대공비를, 뒤쫓아온 대공이 단신으로 구해 냈다. 이후 패거리와 벨루아 영주의 접점을 발견한 대공이 격노하여 대단한 보상금을 받아 냈다는 것이 이야기의 결말이었다.

패거리들을 단신으로 짓밟은 활극을 대공비의 몫으로 둘 수는 없었으므로, 오두막에서의 일은 모두 대공의 행적으로 남았다. 증인이 될 사람들은 모두 시신이 되어 진실도 함께 무덤에 묻혔으므로 이야기가 샐 걱정은 없었다.

꽤나 로맨틱한 구석이 있는 서사였기에 이 일은 대공 부부의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쯤으로 나돌았다. 대공 부부의 운명적인 사랑을 말하던 대중의 상상력에 날개까지 달아 준 셈이었다.

이전에도 ‘대공이 저주를 풀고 사람이 되었다’는 소문은 도처에 나돌았지만, 수도까지의 먼 여행을 거치고 나서는 뜬구름 정도의 온도로 식고 말았다. 그간 대공 부부가 모습을 내보인 것은 모두 영지 내의 일이었고 제삼자가 등장하지 않는 선전엔 신빙성이 없었다.

한데 규모 있는 벨루아 영지에서 대공 부부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증인이 차고 넘침에야 이제는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대공이 정말 사람으로 돌아왔다. 팔려 간 제물 신부가 정말 남편의 저주를 푼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모두가 세기의 연인을 보고 싶어 했다.

“어떤 상황인지 아시겠지요.”

아스티나가 삐뚜름하게 눈썹을 들어 올렸다. 테리오드는 억울한 표정이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부인 때문이지 않습니까.”

“괴물 아닌 사람이 되었다는 소문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테리오드의 약한 부분을 직격하는 말이었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 앞에서 사람으로 남는 일에 대한 집착을 지속적으로 내보이지 않았던가. 테리오드의 낯에 곤란한 빛이 떠올랐다. 그가 작게 한숨 쉬며 말했다.

“하기야 늦든 빠르든 벌어질 일이었죠. 본래는 남부에서 먼저 천천히 교류를 시작할 생각이었습니다만…….”

“등장은 큰 무대일수록, 그리고 이목이 쏠릴 때일수록 좋다. 그것이 무도회의 법칙 아닙니까.”

아스티나는 그리 말하며 요염한 귀부인의 낯을 흉내 냈다. 드레스를 입고 부채를 든다면 비교 대상과 다른 점을 찾을 수 없으리라. 테리오드는 아스티나가 자신의 긴장을 풀어 주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책상으로 다가간 그가 아스티나가 읽었던 초대장을 직접 집어 들었다. 확실히 황성에서의 초대는 거절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확실히 황제 폐하는 속이 좀 옹졸하신 편이지요.”

“어머, 수도의 귀공자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답니다.”

“벌써 무도회 준비라도 하시는 겁니까?”

아스티나가 눈을 접어 웃었다.

벨루아에 다녀온 이후 대공비는 이전보다 좀 더 감정 표현이 생생해졌다. 아주 미세한 차이라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듯했지만, 체질 때문에 그녀와 밀접히 생활해야 하는 테리오드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테리오드는 그녀의 미소에 곤혹스러워지는 일이 늘었다.

아스티나가 공중으로 손을 내밀자 올리버가 기다렸다는 듯 지도를 건네주었다. 아스티나가 그것을 책상에 펴 보이며 말했다.

“은밀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공식적으로 대공 전하는 완치된 상태여야 해요. 반편이로 비쳐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대공께서 말씀하신 대로, 짐승인 모습을 들켜서는 안 되겠지요.”

“마땅한 방법이 있습니까?”

“왕궁의 연회는 저녁부터 시작입니다. 주인공은 늦게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지요. 꼭 필요한 일정만 정리한다면 못할 것도 없을 겁니다.”

그리 말하며 그녀가 대공령부터 수도까지 일직선으로 선을 그었다.

“제 계획은 이렇습니다. 우선 침실을 봐 주는 하녀 여럿과 집사가 먼저 수도의 사택으로 가서 저택을 정비합니다.”

아스티나가 그리 말하며 올리버를 쳐다보았다. 주인의 명령에 이의가 있을 리 없었으므로 그는 그저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당연히 수도에 있는 사저에도 따로 두고 있는 관리인이 있었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올리버가 있는 편이 더 마음이 놓였다.

대공가에서도 테리오드의 비밀을 알고 있는 건 극소수였다. 비밀에 관해선 아무리 조심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말이 많이 나돌아서 피해 입는 건 소문의 당사자뿐이었다.

아스티나는 이번엔 지도 위로 에두른 곡선을 그렸다.

“하지만 저희는 그보다 빠르게 출발해 늦게 도착하게 될 겁니다. 일행이 늘어나면 눈에 띄지 않기가 힘듭니다. 대공 전하와 떠날 일행은 최대한 적은 인원으로 꾸려야 합니다. 그 안에 탄 것이 테리오드 대공과 그 부인임이 알려져서도 안 됩니다. 다른 귀족들이 가지 않을 길을 골라 가야 하니, 지름길을 거치는 건 안 될 말이지요.”

“적은 인원이라고 하면?”

“히센과 저, 그리고 대공 전하이십니다. 대공께서 만약의 때에 힘을 쓰지 못하실 수 있으니, 내키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아서의 도움도 받아야겠군요.”

테리오드의 사촌이기도 하니 아서는 제법 믿을 만한 인물이었다. 딱히 그 자체가 믿음직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테리오드에게 해가 되지 않을 존재임은 알았다. 하지만 제멋대로 구는 아서가 동행을 허락할지는 알 수 없었다.

미리 의사를 묻고자 아스티나는 올리버에게 아서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올리버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는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테리오드가 손끝으로 책상 위를 두드리며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넷이라…….”

적은 인원이라고 말은 했지만 정말 단출하기 그지없었다. 테리오드가 손에 턱을 괴었다. 일행의 모두가 검을 쓸 수 있긴 하나 먼 거리를 떠나기에 안심되는 인원은 아니었다. 테리오드 자신도 객관적으로 훌륭한 검사이긴 했으나 하루의 반은 활약할 수 없다는 크나큰 단점이 있다.

“제가 발목을 잡을 일이 생기면 어찌합니까.”

“검을 못 쥐시는 대공께는 이것이 있지요.”

아스티나가 그리 말하며 손을 뻗었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손바닥 밑을 쓸더니 이내 손끝을 잡아챘다. 그녀가 테리오드의 손톱 부근을 문지르며 그와 눈을 맞췄다. 이대로 그녀가 손등에 입술을 내리눌러 와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자세였다.

테리오드는 자신의 파렴치한 상상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도 긴장된 나머지 그녀가 닿은 자리가 따갑게 느껴지는 듯도 했다. 테리오드가 미세하게 갈라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군에게 폐를 끼칠 일은 없습니까?”

“그러시지 않게 하려고 제가 있는 겁니다.”

언뜻 오만으로도 비칠 수 있는 말을 그녀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내뱉었다. 그것은 테리오드의 불완전한 세상에서 진리처럼 읽혔다. 테리오드가 충동적으로 말했다.

“그대를 믿습니다.”

그 말에 아스티나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의아한 눈빛은 잠시, 그녀는 곧 피식 웃음 짓고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손등에 와 닿는 입술의 감각은 상상만큼이나 달콤하여, 테리오드는 그대로 굳고 말았다. 어울리지 않는 표현일지 모르겠으나 테리오드는 그것이 애정보다는 신실함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녀가 내뱉은 말은 테리오드의 감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광입니다, 주군.”

충성 서약이라도 하는 듯한 자세였다. 그녀가 특이한 행동을 하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 테리오드는 이도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었다. 제 손을 덥히던 입술이 달아나 이성을 찾은 덕분이기도 했다.

“꼭 충성을 맹세한 기사처럼 말하고 계신 것 아십니까.”

“그리 보셨습니까.”

“예, 아주 멋있으셨습니다.”

“영광입니다.”

아스티나가 과장스럽게 예를 취했다. 그에 테리오드는 크게 파안하고 말았다. 아스티나의 말이 틀린 것이 없었으므로, 그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며 허락했다.

“말씀하신 대로 하지요, 충실한 기사님의 조언이시니.”

위험 부담이 있긴 했지만 귀족 사회에서 완전히 끝장나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찌 됐든 테리오드도 명예를 목숨과 같이 여기는 귀족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아스티나와 히센 정도의 검 실력이면 크게 걱정할 게 없기도 했다.

“저를 놀리십니까.”

테리오드의 말에 아스티나가 전혀 기분 상하지 않은 어투로 반발했다. 테리오드가 어이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먼저 시작하신 건 부인이 아닙니까.”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벨루아에서 하셨던 말이요.”

테리오드는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이내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테리오드의 낯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가 앓는 소리를 내며 손바닥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만족스러운 반응에 아스티나가 짐짓 건방진 어투로 말했다.

“나를 위해 살아 달라니, 그런 이기적인 말은 참 오랜만에 들어 보았습니다.”

“오랜만이라니, 그런 뻔뻔한 사람이 또 있었습니까?”

순간 아스티나의 입꼬리가 굳어 들었다. 다만 너무도 찰나의 일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그녀가 만면에 내보이고 있는 것은 그저 매끄러운 웃음이었다. 그러나 테리오드는 그것이 다소 가면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책상을 보고 서 있는 테리오드와 반대로, 아스티나는 몸을 돌려 모서리에 엉덩이를 기댔다. 그녀가 산재한 초대장 위를 손으로 짚고는 테리오드를 올려다보았다.

“사실은 이기심에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걸 압니다.”

“…….”

“저를 위로하기 위해 그리하셨던 거지요.”

사실, 위로라기보다는 어떻게든 그녀를 붙잡기 위해서였다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어떤 말이든 하지 않으면 그녀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다. 그 아찔한 상실감에 테리오드는 차마 이성을 추스를 정신도 없었다.

삶에 어떤 미련도 없는 듯한 아스티나를 보며 테리오드는 그녀가 소중한 것을 얻기를, 그리고 동시에 그것이 자신이 되기를 바랐다. 제 곁에서 결코 떠나지 못하도록.

그러나 그러한 지저분한 속내까지 드러낼 수는 없었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와 눈을 맞추며 그가 꺼낼 수 있는 유일한 진심을 말했다.

“그런 허무한 말은…… 그대를 좀먹을 뿐이지 않습니까.”

“저는 몰랐습니다. 제게 더 좀먹을 것이 남아 있는 줄은.”

그녀의 입술이 그리는 곡선은 굽어 버린 등처럼 보였다. 그 사이로 그녀는 늙어 지친 노년의 세월을 뱉는다. 모두가 주름 하나 없는 피부와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의 얼굴에서 천천히 그 간극을 읽어 냈다. 왜 새삼 그녀가 지나온 시간들이 궁금해지는 걸까. 대답은 어렵지 않았다.

테리오드는 부드럽게 부인, 하고 아스티나를 불렀다.

“호기롭게 저를 위해 살아 달라 말했지만, 제 보잘것없는 생을 잇는 일이 그대에게도 큰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번에는 테리오드가 손을 뻗어 아스티나의 손을 쥐어 왔다. 손가락 사이로 겹쳐 드는 접촉을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깍지 낀 손을 입가로 끌어오며, 테리오드가 경건하게 말했다.

“그래도 이것 하나는 약조하겠습니다.”

그녀의 손등은 이전에 맛보았던 입술만큼이나 부드러웠다. 차오르는 충족감을 테리오드는 충분히 즐겼다. 고작 이것만으로도 그는 많은 것을 인내할 수 있었다. 다가오는 사람을 언제나 밀어내기 바쁜 그녀에게 그리 급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무엇을요.”

아스티나가 언뜻 무감하게도 들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테리오드 역시 객관적으로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둔한 편이었지만, 이리 확실한 감정이 자신을 좌지우지하는 와중에야 그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테리오드는 낯선 감각으로 가슴에 그녀의 이름을 새겼다.

아스티나, 티나. 나의 티나.

“그대가 준 삶이니, 나 역시 그대를 위해 살겠습니다.”

나는 그녀를 좋아한다.

* * *

방 안에 가득 찬 분홍빛 기류에 아서는 조용히 문을 닫고 돌아섰다.

“사람을 불러 놓고 왜 저러고 있는 거야…….”

아서도 신혼부부를 방해하지 않을 정도의 눈치는 가지고 있었다. 열을 올리고 있는 게 신부가 아닌 제 사촌 형 쪽이라면 더더욱.

아내의 손을 잡고 끈덕진 시선을 보내는 테리오드의 모습은 영 낯설었다. 아서는 제 사촌 형이 아내를 잘 맞아들인 것인지, 아니면 이 혼인이 그의 불행 중 하나가 될지 도통 판단할 수 없었다. 아스티나가 나쁜 사람이라서는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대공비는 대단한 인물이었고 그녀를 보는 아서의 평가 역시 긍정적인 쪽으로 기울어졌으니까.

그러나 그녀가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이라 해서 연애 상대로도 적합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솔직히 말해 아스티나는 그쪽으로는 영 ‘글쎄다’ 싶은 사람이었다.

‘그건 벨루아에서의 일만 봐도 그렇지.’

대수롭지 않게 떠났다가 팔에 흉터를 만들어 오는 여자라니, 도무지 안심할 수가 없지 않은가. 그녀를 사랑하려면 심장이 여럿이라도 모자랄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정작 아스티나를 찾게 되는 것도 사실이라, 아서로서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제시가 사라졌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도 바로 아스티나였지 않은가. 그녀에게선 어떤 일이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묘한 신뢰감이 느껴졌다.

“안 들어가고 뭐 하세요?”

문고리를 쥐고 어정쩡하게 서 있던 아서가 놀란 얼굴로 몸을 뒤로 물렸다. 바로 뒤편에서 제시가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상대가 눈앞에 등장하자 아서는 몹시 당황했다. 그는 문가에 완전히 몸을 붙이고는 기겁한 목소리를 내었다.

“뭐, 뭐가?!”

“안 들어가고 뭐 하시냐구요.”

아서의 날 선 반응에 제시 역시 당황한 얼굴이었다. 아서가 빽 하고 소리쳤다.

“너, 너야말로 왜 여기 오고 난리예요? 올리버가 부른 건 난데!”

“대공비 전하께 제출할 반성문을 다 써서요.”

제시는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순순히 대꾸했다. 제시에게 아서는 언제나 화를 내는 사람이었기에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녀가 보기에 아서는 기쁠 때든 슬플 때든 상관없이 언제나 화를 냈기 때문이다.

“바, 반성문?”

아서는 말까지 더듬으며 제시가 들고 있는 종이를 살폈다.

아스티나는 경고를 어긴 것을 치죄하듯 대공령으로 돌아오자마자 제시에게 벌을 주었다. 납치당했다가 돌아온 사람에게 내리기엔 매정한 처분이었지만, 제시의 잘못으로 아스티나가 굳이 필요 없는 위험을 무릅쓴 것도 사실이었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한 건 아스티나가 미리 경고한 사항이었으니까.

제시는 기절하고 벌어진 일들을 전부 기억하지 못했다. 무리들이 약을 먹여 재운 후 깨지 않았던 탓이다. 아서는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의식이 없는 사이 제시에게 벌어졌을지 모를 일들을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섬뜩했다. 어찌 됐든 제시를 밖으로 꼬여 낸 것은 자신이었다. 아서는 그 책임까지 그녀에게 떠넘길 정도로 비겁하진 않았다.

아서의 자진 납세로 연무장을 돌아야 하는 죄인은 둘이 되었다. 이번 일에 있어 아스티나는 무척 원시적인 벌을 내렸다. 연무장 100바퀴를 돌아 신체를 고생시키고 나자 이제는 정신을 수양할 일이 남았다. 아서와 제시는 부러질 것 같은 다리로 방에 돌아와 깃펜을 쥐어야 했다. 당연히도 아서는 5초 만에 책상에 코를 처박고 잠들었다. 한데 제시는 며칠 만에 한눈에 보기에도 빽빽한 반성문을 완성해 온 것이다.

위기감이 엄습했다. 아서는 아직도 ‘잘못했습니다.’라고 딱 한 줄만 쓰인 제 반성문의 상태를 상기했다. 상대가 저렇게 열심히 하면 비교가 될 게 분명했다.

그런 아서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제시가 불쑥 물었다.

“조금 더 뒤에 낼까요?”

“어?”

“다 못 쓰셨으면 도와드릴 수도 있어요.”

아서가 죄책감에 그녀를 계속 피해 왔기에, 벨루아에 다녀온 이후 제대로 된 대화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아서는 생각보다 호의적인 상대방의 반응에 당황하여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아서는 벨루아에서 있었던 일에 자신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따라 나갔다가 험한 꼴을 당했으니 제시의 원망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꺼먼 속내로 그녀의 가족들을 설득하러 따라갔다가, 정작 명목으로 댔던 호위조차 빈말에 그치지 않았던가.

아서는 당연히 제시가 자신을 더 싫어하게 됐으리라고 생각했다. 무시 정도가 가장 온건한 대응이라 여겼는데 곧이곧대로 친절한 답이 돌아오자 아서로서는 뭔가 싶었다. 아서의 미심쩍은 시선을 느꼈는지 제시가 설명했다.

“저 때문에 벌 받으신 거잖아요. 제가 얌전히 저택 안에 있었어야 했는데.”

“아니, 잠깐. 먼저 나가려고 했던 건 내 쪽이잖아.”

“그 사람들이 노린 건 어쨌든 저니까요. 도련님만 있었으면 별문제 없었을 거고요. 제가 집에서도 경솔하게 밖에 혼자 나가기도 했고…….”

제시가 또박또박 설명하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어쨌든 죄송해서요.”

“네가 뭐가 미안한데?”

이번에도 아서는 또 화를 냈다. 제시는 앞서 꼽았던 아서가 화를 내는 경우에, 고맙거나 미안할 때도 포함된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서는 벌게진 얼굴로 제시의 역성을 들었다.

“그건 대공비가 화를 낼 일이지 네가 나한테 사과할 일이 아냐. 어쨌든 먼저 너를 밖으로 꼬여 낸 건 나란 말이야.”

아서는 더듬거리면서도 성실히 그 말을 끝맺었다. 제시의 표정이 묘해졌다.

연무장을 돌던 때에도 그녀는 내내 몹시 의외라는 눈으로 아서를 응시했었다. 조용히 모른 척 넘어갈 수 있던 상대가 벌을 자처해 헉헉대며 뛰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던 탓이다.

애초에 그녀는 아서의 잘못을 고해바칠 생각이 없었다. 대공비가 자신을 구해 줄 수 있었던 것도 아서가 재빨리 달려가 말을 전한 덕분이 컸다. 제시는 납치 건은 오로지 자신의 경솔함 때문이며, 아서가 이 일에 도움 외의 영향을 미친 적은 없다고 객관적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그녀가 아서에 대한 인식을 바꾼 계기는 하나 더 있었다.

“그래도 덕분에 부모님이 허락을 해 주셨는걸요.”

“뭐?”

“부모님한테 제 편을 들어주셨다고 들었어요.”

“야 그건……!”

말실수가 그렇게 와전될 줄은 몰랐다. 자격에도 안 맞는 금칠을 당한 기분에 아서는 손에 땀이 찼다. 아서는 황급히 변명을 시작했다.

“그건, 그건 네 가족들이 대공비의 능력에 의심을 가지니까 그런 겁니다!”

제국어를 처음 배운 사람처럼 이상하게 말하는 아서를 두고, 제시가 평온하게 응대했다.

“알아요, 제가 좋아서 그렇게 말씀하신 게 아닌 건.”

“근데 왜…….”

“그래도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저는 그런 얻어걸리는 식의 도움도 잘 받아 본 적이 없거든요.”

제시는 반쪽짜리 친절마저도 고픈 사람이었다. 아서의 의도가 자신을 돕는 게 아니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그 덕분에 가족의 허락을 얻은 건 사실이었다. 제시는 거기서 굳이 나쁜 의도를 찾아내 폄하할 생각이 없었다. 모두가 자의로든 타의로든 이미 충분히 그녀를 방해만 하고 있지 않던가.

제시는 의미 없는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그녀가 힘없이 입꼬리를 당기며 말했다.

“반성문은 다 쓰면 말하세요. 같은 때 낼 수 있도록요.”

정말 그리하겠다는 듯 제시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아서는 제자리에 그저 우두커니 섰다. 제시의 집에 갔을 적, 식탁 밑으로 떨리던 손을 숨기던 그녀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쟤가 지금 날 배려할 처지는 아니잖아.’

울컥한 아서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아서는 사람이 눈물로만 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 장면을 봐 버렸음에야 모른 척 넘어갈 수도 없지 않은가.

“미치겠네…….”

간만에 들은, 분수에 맞지 않는 칭찬에 몸이 가려웠다. 남겨진 아서는 얼굴을 구기며 머리만 벅벅 긁었다. 제대로 되어 가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 * *

사랑을 자각한 부유한 남자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방법은 온갖 호사스러운 방식으로 존재했다. 문제는 그 범위가 너무도 넓어 좀처럼 하나를 고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무엇을 선물해야 할까.”

올리버는 테리오드의 맥락 없는 고민에 익숙해졌다. 그는 어렵지 않게 주인이 생각하고 있는 상대를 유추하고는 적절한 의견을 냈다.

“보통 연인에겐 옷가지나 보석 같은 걸 선물하지요.”

“하지만 그녀는 아직 내 연인이 아니지 않은가.”

“……대공비 전하 이야기를 하시는 게 아닙니까?”

노년의 올리버로서는 부인과 연인을 구분하는 젊은이들의 화법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올리버는 대체 제 주인이 언제 어디서 새 여자를 만났나 의문에 빠졌다.

황당한 오해에 테리오드가 급히 말을 정정했다.

“물론 그녀 얘기가 맞지. 하지만 그녀와 내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올리버는 드물게도 테리오드가 어리게 느껴졌다. 대공비와 대공이 세기의 연인이라고 불리고 있는 와중이었지만, 당연히도 실제로 둘의 사이는 한없이 멀었다.

그러나 올리버는 그에 문제의식을 느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귀족 간의 혼사에선 애정이 피어나는 일이 오히려 더 드물지 않던가. 가족에게도 정을 주지 못했던 테리오드가 ‘사랑’에 대해 말하는 건 몹시 낯선 일이었다. 그리고 상대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치는지 신경 쓰는 건, 어떻게 보나 짝사랑을 앓는 이의 몫이다.

올리버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가늘어졌다. 주인에게 내보이기에 무례한 표정이었지만, 아들처럼 길러 온 테리오드에게 봄이 찾아왔다는데 흐뭇함을 숨기기가 힘들었다.

올리버에게 아스티나는 여러모로 복덩이였다. 평생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던 주인을 다시 사람으로 만든 데다, 업무를 처리하는 능력에도 손색이 없었다. 무엇보다 결국은 이렇게 대공의 마음까지 사로잡지 않았던가.

올리버는 대공비에 대한 충성심을 재차 가슴에 새겼다. 실제로 아스티나는 동경하지 않기가 더 힘든 인물이었다.

올리버가 짐짓 떠보듯이 물었다.

“그게 중요하십니까?”

“선물은 관계에 따라 종류를 달리해야 하는 법 아닌가.”

“시작은 부담 없이 하시는 것도 좋지요. 대공비 전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알면 도움이 되겠습니다만…….”

올리버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색하게 입꼬리를 늘였다. 사용인으로서 인정하기 다소 부끄러운 사실이었으나 그는 대공비의 취향에 대해 잘 아는 점이 없었다. 그녀가 대공저에 있으며 먹어 온 음식들, 치장하는 방식 등은 단순한 기호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테리오드가 말하는 선물은 상대가 받았을 때 기뻐할 특별한 무언가가 틀림없었다.

“어렵군.”

테리오드가 한숨을 쉬며 미소 지었다. 그는 불평조차 애정이 담긴 어조로 말했다.

“정말 어려운 사람이야.”

사람의 속내야 응당 알 수 없는 법이지만, 그렇다고 제 마음까지 이렇게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굴러갈 줄은 몰랐다. 지금 이 시점에서 확실한 건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앞으로도 그들 사이에 별다른 진척이 없다면, 이전에 호언했던 것처럼 그녀는 미련 없이 아탈렌타를 떠날 것이다.

테리오드는 벨루아에서 그녀의 가슴과 함께 제 가슴도 할퀴었던 말을 상기해 냈다.

‘소중한 게 없습니다.’

그리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너무도 무감하여 사람같이 느껴지지 않았을 정도였다. 테리오드가 보기에 아스티나는 몹시도 무결한 사람이었다. 아스티나는 사람이 가지고 태어날 수 있는 온갖 장점은 모두 다 갖추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과 대단한 무력, 한없이 공적인 성격은 그녀가 실수를 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완전한 여자는 불완전한 그의 앞에서 보다 깊은 허무를 말한다. 그녀에게 삶이란 이유를 찾기 위해 이어 나가는 것이었다. 테리오드는 자신이 그 삶의 이유가 되겠다고 호언했지만, 그녀가 살아온 평생 찾지 못했던 것을 제가 선물해 줄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테리오드를 사랑에 빠진 한낱 한심한 애송이로 만들었다.

객관적으로 보기에는 대공인 자신 쪽이 훨씬 더 조건이 뛰어났으나, 테리오드는 종종 그녀와 비교해 초라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리고 그 열등감은 내내 한 가지 불만만을 말했다.

자신이 괴물이 아니었다면, 그녀를 조금 더 잘 아는 이였다면, 혹은 지금보다 대단하고 훌륭한 사람이었다면.

그래서 그녀를 응당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하지만 이는 쓸모없는 고민이지.’

테리오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잘것없는 고민으로 시간을 낭비해 봐야 나아질 것은 없었다. 그녀보다 부족한 사람인 것 같아 걱정된다면, 자신이 지금보다 더 나은 이가 되면 그만인 문제였다.

테리오드는 그녀가 이곳에 남을 이유를 찾을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 볼 생각이었다. 단순히 마음에 드는 선물을 골라 주는 일만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테리오드는 그녀에게 살아가면서 얻을 수 있는 기쁨들을 알려 주고 싶었다.

아스티나가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었듯이, 어쩌면 자신도 그러한 방식으로.

“대공비 전하께서 뭘 좋아하시는지 모르신다면, 대신 필요한 물건을 생각해 보시는 것도 좋겠지요.”

“필요한 물건?”

“네. 곧 수도로 올라가실 예정이시니까요.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우선해서 맞출 것은 연회복이었다. 입고 걸친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교계에서 사랑하는 여자를 주눅 들게 할 수는 없었다. 테리오드는 가진 것이 아주 많은 남자였기에, 많은 선택지 중 오직 하나만 택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선물 공세의 첫 단계를 가장 무난한 것으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재봉사를 불러들이지. 이전에 보니 드레스 룸이 상당히 빈약하던데, 일단 그것부터 채우는 게 좋겠어.”

“그럼 바로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자네가 생각하는 괜찮은 건 모두 다 가져와 보도록 해.”

한도 없는 과제에 올리버가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일과 중 남는 시간엔 주인마님에게 진상할 물건만 생각하게 될 듯했다.

“얼마나 준비하면 될까요?”

“그녀가 됐다며 손사래를 칠 때까지.”

테리오드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하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한 번도 자신의 선조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는데, 부인에게 온갖 호사를 시켜 줄 수 있다는 점만큼은 몹시 흡족했다.

* * *

다음 날 대공비의 방은 대공이 선물한 온갖 물건들로 가득 찼다. 테리오드는 자신과 함께했을 때 그녀가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아주 성심성의껏 보여 주기로 마음먹은 참이었다. 그녀가 물욕 있는 인물이 아니라 해도 모름지기 돈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은 종류의 것이지 않던가. 낡은 신발을 질질 끌며 걷기보다는, 당연히도 호화찬란한 마차로 이동하는 편이 낫다.

그리 자신하며 온갖 사치품들을 방에 밀어 넣은 테리오드는 부인이 부담을 가질까, 나중에 슬쩍 들여다보기만 할 요량으로 자리를 피했다.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들이닥친 소란에 아스티나는 꽤나 당황해야 했다.

일정이 급하다고는 하나 드레스로 기성복을 선택할 수는 없었고, 연회까지 제작을 마치려면 오늘 가봉까지 한 번에 해치워야 했다. 덕분에 방 한쪽 면은 재봉사가 챙겨 온 갖가지 천들로 온통 빼곡했다.

의상을 준비하는 데 장신구를 빠트릴 수 없다. 모자가 한가득에 장갑 역시 종류별로 잔뜩, 천장까지 닿을 높이로 쌓여 있던 구두 상자들은 결국 부주의에 무너져 지나가던 하녀의 머리에 혹을 만들었다.

분명, 과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평소에 갑자기 이런 사치의 행렬이 들이닥쳤다면 아스티나도 능히 이상한 점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수도로 가기 전 의복을 여럿 장만해야 하는 시점이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진 못했다.

대공의 선물이라는 말에 아스티나는 왕년에 사교계에서 이목을 끌었던 테리오드가 대단한 귀환을 계획하고 있다 짐작했다. 세기의 연인이라고까지 소문이 났는데 대공 본인만 광을 낼 수는 없는 법 아닌가. 계속해서 방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값비싼 물건들을 보고 있자니 의심은 확증으로 굳어졌다.

아스티나는 한 일꾼이 나르던 모자를 들어 가볍게 살폈다. 장식으로 쓰인 깃털의 품질이 심상치 않았다. 남쪽 해안가에 서식하는 어린 하리새의 깃이 틀림없었다. 연한 분홍빛과 파란빛이 오묘하게 섞여 윤기 있게 빛나는 것이 언뜻 보기에도 상등품이었다. 워낙 희귀종이라 보통 염색을 한 모조품이 나돌곤 하는데 그런 조잡한 물건은 아닌 듯했다.

가격을 알면 ‘헉’ 소리가 절로 나올 법한 물건이었지만, 아스티나는 태연하게 그것을 머리에 써 보았다. 옆에서 몇몇 물건을 꺼내어 준비하던 여자가 반색했다.

“역시 보는 눈이 있으십니다, 대공비 전하. 귀부인들께서 마실용으로 가장 선호하시는 스타일의 모자랍니다. 품격 있는 하리새 깃털이 꾸민 듯 안 꾸민 듯한 복장에 섬세한 멋을 더해 주지요.”

희고 챙이 넓은 모자는 청초한 모양새였지만, 아스티나의 붉은 머리와 대비되자 고혹적인 인상마저 주었다. 거울 앞에서 가볍게 한 바퀴를 돌아본 아스티나가 그것을 도로 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하리새 깃털 하나에 놀라기엔 비슷한 수준의 물건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아탈렌타가의 부가 확실히 우습게 볼 수준은 아니군.’

일국의 왕이라도 재정이 모자란다면 행하지 못했을 호사다. 아스티나는 손끝으로 상자 위를 쓸며 방을 거닐었다.

“다 내 것이라고?”

“예. 대공께서 따로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더 주문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물건을 잔뜩 팔아 치우게 되어 신난 상인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그에 아스티나의 입꼬리가 묘하게 들렸다.

제국의 수장쯤 되면 사치의 기준이 범인과는 비교가 불가능해진다. 레타 집시 출신이었던 마티나를 검소한 군주로 인식하는 역사 학자들도 있지만 실제로 그녀의 가난은 십 대 시절에 그쳤다. 좋은 물건 하나와 저렴한 물건 여럿 사이에서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아스티나는 고급품의 가치와 품격을 아는 사람이었다.

대륙의 초대 황제가 소국의 왕마냥 옹졸하게 돈을 써도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당연히도 마티나는 의식주에 자신의 권위에 맞는 비용을 지출해 왔다. 레테 백작저에서야 검 하나 마련 못할 정도로 용돈이 모자랐으니 억누르고 살았지만, 이리 돈을 쓰라고 대놓고 판을 깔아 줌에야 수집욕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았다.

새 가죽 냄새란 모름지기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법이었으니. 그녀의 속내가 어쨌건, 테리오드의 선물 공세는 실제로 효과가 있었던 셈이다.

“대공께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군.”

“그 전에 먼저 감사할 일을 만드셔야지요.”

재봉사가 쾌활하게 답하며 몇 가지 천을 끌어왔다.

“대공께서 드레스 룸을 가득 채울 각오를 하라 말씀하셨으니 오늘은 아주 피곤하실 겁니다.”

“쇼핑이란 무릇 사람을 즐겁게 한다는 사실을 모르시는군.”

“사실, 저는 남자들이 왜 이런 신나는 일에 그리도 질색하는지 모르겠답니다.”

둘러싸고 있던 하녀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모시는 안주인이 사랑받는 아내라는 건 아랫것들에게도 기가 사는 일이었다. 아스티나는 가는 눈으로 제 몸에 덧대어지는 온갖 천들을 살폈다.

‘분명 이별이 예정된 아내가 받기에는 넘치는 호사지만…….’

“선물을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아스티나가 만족스럽게 미소 짓자 하녀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검소하게 살림을 일구던 주인이 혹여 이 모든 걸 부담으로 여겨 돌려보내시는 건 아닌가 염려했기 때문이다. 아스티나에게 부담을 주기 위해서는 제국을 바쳐도 모자란다는 사실을 그녀들이 알 리 없었다.

* * *

테리오드가 슬그머니 상황을 살피러 온 건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나서였다. 아스티나가 마음 놓고 고르게 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것이었는데, 집무실에 동떨어져 있다 보니 문득 그녀가 과한 배려라며 선물을 고사하고 있는 건 아닌지 염려가 되었다. 실제로 이전에 의복을 지을 것을 권했을 때 그녀는 과한 친절이라며 딱 잘라 고개를 젓지 않았나.

분명 그녀가 말했던 대로 친구의 의무가 상납이 될 수는 없겠으나, 테리오드의 마음은 우정이 아닌 다른 쪽으로 옮겨 간 지 오래였다. 상대에게 억만금을 가져다 바쳐도 아깝지 않은 것이 바로 사랑이다. 테리오드는 좋아하는 여자에게 환심을 얻기 위해 선물을 하는 일이 즐거웠다.

아스티나는 그가 보다 덜 양심적인 누군가에게 그런 식으로 뜯어먹힐까 걱정이라도 하고 있는 듯했지만, 테리오드는 자신이 좋으면 그것으로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테리오드는 그녀에게 무엇을 주든 아깝지 않은 그의 마음을 아스티나가 알아주었으면 했다.

분명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은 감점 요인이겠으나 연심을 티 내어 나쁠 건 없었다. 모름지기 관계란 그런 식으로 시작되는 법이니까.

“어머, 대공 전하.”

안으로 들어선 테리오드를 발견한 하녀가 재빠르게 허리를 숙였다. 자연히 문가를 향해 시선이 몰렸다. 테리오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안을 살피다 말고 멈칫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숙연했다.

특히 아스티나의 근처에 있던 재봉사가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표정으로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가 들어서자마자 말소리가 멎은 것이, 무언가 들으면 곤란한 이야기라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혹 정말 그녀가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 고집을 피운 것인가.’

대공비가 싫어해도 최대한 구매를 권하라 미리 재봉사에게 신신당부를 해 둔 참이었다. 아무래도 제 명을 이행하지 못하여 저리 눈치를 보는 모양이었다.

테리오드는 상대에게 필요하지 않은 선물을 한 것 같아 다소 후회스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녀가 모든 걸 고사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아마 그녀는 이혼을 염두에 두고 있어 아탈렌타의 재산이 본인 것이 아니라 여기는 게 틀림없었다.

“왜들 그리 놀라는가.”

그렇다고 이를 다그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탐탁지 않은 마음이었지만 테리오드는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미소 지었다. 그의 입가가 호선을 그리자 사용인들도 따라서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부인, 보내 드린 것들은 마음에 드십니까.”

“예, 전하의 마음 씀씀이에 깊이 감동했습니다.”

아스티나가 우아하게 답했다.

그러나 테리오드의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 이전에도 아스티나는 이런 말을 하며 그의 선의를 거절했었기 때문이다. 재봉사 옆으로 다가선 테리오드가, 자연스럽게 부인의 구매욕을 증진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대화를 유도했다.

“어떤 것을 주문하셨는지 저도 알고 싶군요. 무도회에 같이 등장할 파트너이니까요.”

그리 말하며 테리오드는 아스티나 주변에 세워진 옷감들을 살폈다. 그리고 이내 그의 표정이 조용히 굳어 들었다. 오로지 흰 천만 밖에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말했던 대로 ‘비싼 옷감으로 틀을 잡고 온갖 값진 보석을 다는’ 호사를 선물해 주고 싶었던 테리오드는 아연해졌다. 한 가지 색상의 천들을 비교하고 있는 걸 보니 혹시 옷도 한 벌만 짓기로 한 것인가 싶었다. 이전에 드레스 룸을 들여다봤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자신의 아내는 지나치게 검소했다.

하기야 레테 백작가는 가문의 위상이 명예 쪽으로만 특화된 가문이었다. 그녀가 행할 수 있었던 사치에도 한계가 있었으리라. 그리 생각하자 테리오드는 마음이 아프기도 하였다. 그는 그녀에게 제국의 황제에게도 뒤지지 않는 호사를 선물해 주리라 마음먹었다.

“왜 흰 천만 나와 있는지요. 부인께는 다른 색도 무척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만.”

그리 말한 테리오드가 근처에 있던 값비싼 옷감을 끌어왔다. 우아하게 물든 붉은색의 천은 그녀의 머리칼과 몹시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편직된 모양새가 고급스러워 테리오드가 특히 좋아하는 재질이기도 했다.

“그대가 보기엔 어떤가. 내 부인에게 특히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나.”

뒤늦게 정신을 차린 재봉사가 황급히 테리오드의 말에 동조했다.

“대공비 전하께는 어떤 색이든 잘 어울리실 겁니다. 워낙 미인이시기에 외려 옷이 눈에 띄지 않을까 그것이 더 걱정이랍니다.”

테리오드가 흡족한 얼굴로 아스티나를 돌아보았다. 이런 분위기에 휩쓸리면 그녀도 거절을 말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그러나 제 팔 위로 덧대져 오는 천을, 아스티나는 조용히 밀어냈다.

“이미 주문을 마친 참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선물이에요.”

“옷 한 벌 더 주문한다고 무어 대수겠습니까. 부인께 이리도 잘 어울리는 것을.”

당황한 테리오드가 예의 직물을 내려놓았다. 혹여 제가 고른 것이 마음에 들지 않나 싶어 이번에는 녹색의 천을 끌어왔다. 그리고 아스티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털이 달라붙어 안 됩니다.”

할 말이 없어졌다. 테리오드는 그제야 그의 부인이 이전에 흘리듯 꺼냈던 화제를 떠올렸다. 그녀는 평상시에도 밝은 빛감의 옷을 선호했고, 그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흰색이었다. 투명한 은빛의 털은 어두운 옷감에 붙으면 먼지마냥 지저분해 보였기 때문이다. 관리가 하녀들의 몫이라 해도 매일 털 뭉치와 부대낌에야 효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기랄.’

테리오드는 얼굴을 굳히며 속으로 욕설을 지껄였다. 대공은 말씨가 고운 편이었으나 이런 때까지 평상심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금수로 변하는 괴물이라 아내가 입는 옷의 색깔까지 제한해야 한다니, 이 무슨 창피한 일이 다 있는가.

아내를 볼 면목이 없었다. 테리오드는 그녀에게 무엇이라도 더 선물해야겠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골라 두신 색으로 몇 벌을 더 맞추지요. 부인께 좋은 것만 드리고 싶은 마음에 표현한 성의인데, 고작 한 벌로 어디 제 면이 서겠습니까.”

“한 벌이요?”

테리오드의 말 중 어느 한구석이 마음에 걸린 듯, 아스티나가 의아하게 되물었다. 대공의 눈치를 보던 하녀들마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녀들은 무의식적으로 아니라며 고개를 내젓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왜 대공이 들어왔을 때 다들 침묵했던가. 돈을 지불하는 남자의 눈치를 볼 이유는 단 두 가지밖에 없다. 그녀가 대공의 성의를 무시한다 싶을 만치 검소하게 굴었거나, 혹은 지나치게 사치했거나. 테리오드는 전자에 화를 내면 냈지 후자의 경우를 신경 쓸 생각은 없었으므로 이 상황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공 전하, 이것을 잠시…….”

그때였다. 재봉사가 테리오드에게 작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주문서를 내밀었다. 지금까지의 행적을 넘겨주는 통통한 손이 몹시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 대공이 허락한 사항이라고는 하나 ‘이렇게까지’ 해도 되나 싶었던 탓이다.

엉겁결에 받아 든 테리오드가 그것을 소리 내어 읊기 시작했다.

“드레이핑을 위해 잡은 베스산 비단이 무려 세 필에 다이아몬드를 알알이 두른 카라 장식, 아젠키아 레이스를 다섯 겹으로 두른 속치마와 금실로 수놓은 벨트 장식까지…… 계약금만 2,000골드라…….”

테리오드의 목소리가 조용히 잦아들었다. 주문을 받는 것만도 기가 질렸는지 재봉사가 사감을 섞어 적어 내린 문장이었다. 종이 위 흔들리는 글씨를 모두 읊자 사방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테리오드의 곁을 지키던 재봉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했다.

“그다음 장은 이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그 말에 테리오드는 주문서의 다음 장을 넘겨 보았다. 온갖 진귀하고 값진 것의 명칭이 주문서에 널려 있었다. 어쩜 이렇게 비싼 것만 골라 짚어 냈는지 그 안목이 놀라울 정도였다.

테리오드야 사교계의 유명 인사였던 경력이라도 있으나 그녀는 아카데미에서 학업에 열중하던 일개 학생이 아닌가. 정치학과에서 아젠키아 장인이 직조한 레이스의 아름다움을 가르칠 리도 없으니 이건 그녀 혼자 쌓아 온 교양임에 틀림없었다.

첫 번째 장에 있던 것 하나만 해도 좋은 드레스 수십 벌의 비용을 거뜬히 넘긴 가격이었다. 귀족들이 사랑하는 온갖 명품들은 테리오드도 깊은 이해가 있는 분야였다. 그는 이것이 보통 사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테리오드는 그제야 제가 들어섰을 때부터 시작된 싸늘한 침묵을 이해했다. 적어도 그들은 아스티나의 검소한 선택을 염려한 것은 아니었다.

‘상황이 완전히 반대였군.’

대가문의 귀부인이라고 해도 이런 안목으로 옷을 짓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황제에게도 뒤지지 않는 호사를 선물해 주리라 마음먹고 꺼냈던 권유인데, 그것이 매우 보잘것없어지고 말았다. 그의 부인은 부군의 참견 없이도 아주 훌륭한 구매를 마친 참이었다.

“처음으로 참가하는 궁중 무도회라 위엄을 보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최대한 고급스럽게 주문했습니다. 대공 전하의 것도 같이 부탁하였으니 치수를 재고 가세요.”

아스티나가 그리 말하며 재봉사를 향해 손짓했다.

아스티나는 왕년에 사교계에서 휘날렸던 대공을 부끄럽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파트너로 참가할 테리오드의 몫까지 고민하여 모든 설계를 마친 참이었다. 황제 경력의 안목으로, 그녀는 이 연회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짝은 그들 부부가 될 것임을 자신할 수 있었다. 오만한 판단은 아니었다. 오만은 자격이 없는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예…….”

테리오드의 허탈한 목소리에 자를 꺼내 들던 재봉사의 팔이 뻣뻣이 굳어 들었다. 경이로운 매출을 올린 것은 분명 기쁜 일이었지만 그로서는 대공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대공의 몸 위로 오가는 줄자를 살피던 아스티나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참, 수도의 저택에서 입을 평상복을 몇 벌 더 사도 될까요?”

“부인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요.”

오해가 있었긴 하나 어쨌든 원하는 대로 된 바라, 테리오드는 차라리 기쁘게 웃고 말았다.

디자인은 미리 상의를 마친 참이었으므로 테리오드 몫의 주문을 끝내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재봉사는 혹여 대공 부부가 구매를 무를까 걱정되었는지 황급히 옷감들을 챙겨 떠났다. 오래간만에 대단한 판매고를 올린 상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방문객들의 퇴장이 빨라 테리오드와 아스티나는 금방 둘만 남았다. 하녀들이 주변에서 바쁜 걸음으로 사들인 물건을 날랐으나, 그 양이 어마무시해 아무도 대공 부부의 대화를 훔쳐 들을 정신은 없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뒤늦게 아탈렌타의 재정 상태를 걱정한 아스티나가 물었다. 그녀가 그간 업무를 보며 판단한 바로 이 명문의 부가 그리 약소하지는 않았으나, 곧 떠날 부인이 휘두르기엔 역시 과한 감이 있는 금액이었다.

사랑하는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눈이 먼 테리오드는 물론 이렇게 답했다.

“옷을 이리도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진작 말씀하셨으면 오늘 보신 것보다 더 많은 걸 내올 수 있었을 것을요. 수도에 가면 아마 유명한 디자이너들을 불러 좋은 의복을 맞춰 드릴 수도 있을 겁니다.”

“대공께서는 가문의 재산을 좀 더 아끼실 필요가 있어 보이십니다.”

이를 테리오드의 낭비벽으로 오인한 아스티나가 가볍게 눈을 흘겼다. 테리오드는 자신의 재력을 무시하는 말에 자존심이 상하기보다는, 그녀의 걱정이 상냥하게 느껴졌다.

테리오드가 빙그레 웃었다.

“글쎄요, 혹 파산의 위기가 오면 부인께서 저를 먹여 살리셔야지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게요, 왜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까요.”

테리오드는 그 말에 동조하면서도 깊이 한탄했다.

왜 자신은 이리도 부유해 아내에게 책임져 달라 말할 수도 없는가. 중요한 건 돈이 아니거늘.

만약 아스티나가 정말 아탈렌타의 재산을 탕진한다 해도, 그녀는 대공이 길거리에 나앉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마땅히 스스로의 실수를 책임질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되면 차라리 평생을 책임져 달라 뻔뻔하게 우겨 볼 수라도 있었을 것을. 아탈렌타의 재산은 한 사람이 탕진하기엔 지나치게 거대했다.

“재미없는 농을 하십니다.”

영문 모를 소리를 아스티나는 장난으로 이해했다. 그에 반발하듯 테리오드는 진지하게 눈을 맞췄다.

“중요한 건 물질에 있지 않으니까요.”

“대공쯤 되시는 거부가 그런 말씀을 하시면 백성들이 돌을 던질 겁니다.”

테리오드가 짐짓 상처받은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렇다면 부인께서도 제게 돌을 던지실 겁니까?”

그리 말하며 저를 쳐다보는 진득한 눈빛이 심상치 않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이러한 행동이 일종의 애정 결핍으로 인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본래 그러한 마음의 병은 타인의 지속적인 관심으로 낫게 되는 법이다. 따라서 아스티나는 매정한 말은 삼가기로 마음먹었다. 애초에 그녀는 타인에게 돌을 던질 만큼의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스티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약속하지요, 저만은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냥 던진 말도 그녀의 목소리를 빌려 나오면 더없이 신뢰감 넘치게 들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테리오드는 그 다정한 울림에 종종 안심했다. 그를 불안하게도, 떨리게도, 옹졸하게도, 그리고 더없이 기쁘게도 만드는 음성이었다.

테리오드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부인께서 그러시면 제가 자꾸 오해를 합니다.”

하녀가 옮기는 상자로 향했던 아스티나의 시선이 느리게 돌아갔다. 마지막 물건이 드레스 룸으로 넘어가며 문이 닫혔다. 둘만 남은 공간이 이상하게 적막했다.

아스티나는 말없이 뒤편에 있던 소파에 앉았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무슨 오해 말씀이십니까.”

“제게 너무 상냥하시니까요.”

“지난번엔 저를 매정한 사람 취급하셨으면서요.”

“부인께서는 그런 염치없는 파렴치한을 위로하셨지요.”

도무지 이런 일에선 말싸움에 지는 법이 없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말에 반박하는 대신 그의 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목소리가 한결 위태로워졌다고 느꼈다.

“그렇게 다정한 말을 들으면, 제가 주제를 모르게 됩니다.”

대공저에서 지내 온 일련의 시간들로, 아스티나는 자신을 향한 테리오드의 기묘한 집착을 이해하게 되었다. 괴물이 되고 싶지 않은 자가 그 구원의 열쇠를 갈구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에게서 어미를 쫓는 아기 새의 모습을 보았다.

정상적이지 않은 관계라고 생각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욱 부담이 없었던 건 사실이었다. 상대의 요구가 순수한 연심에서 기인했다면 이 내밀한 접촉도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되었을 테니까. 저주를 풀기 위해서라는 위명하에, 아스티나는 과거에 고통받았던 사랑이라는 감정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배려 넘치게도 괴물의 불안함까지 신경 써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

“그리 다정하셔도 짐승은 사람의 염치를 모른답니다.”

“사람의 염치라.”

아스티나가 애매모호한 투로 테리오드의 말을 받았다. 테리오드가 스스로를 비난하기 위해 사용한 호칭은 아스티나에게 꽤나 잔인하게 들렸다.

아스티나가 계산하지 못한 게 있다면, 테리오드는 그녀가 생각하는 것보다 영악한 남자였다는 점이다. 테리오드는 자신의 부족함으로 그녀의 관심을 끌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리할 수 있었다. 그는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이용해 볼 생각이었다. 그것이 한낱 동정이라고 할지라도.

그리하여 남자의 의도대로, 그녀는 이전에 괴물을 안심시켰던 퍽 효과적인 해답을 기억해 냈다.

“안심시켜 드릴까요.”

“어떻게요.”

테리오드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가 느린 걸음으로 그녀에게 가까워졌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앞으로 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남자를 앞에 두고, 아스티나는 문득 물러설 곳을 찾았다. 그러나 등받이로 막혀 더는 몸을 피할 공간이 없었다. 아스티나는 괴물에게서 도망치는 대신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서늘한 손끝이 그의 턱밑에 닿았다. 그것이 목 언저리보다는 입술에 가까워졌을 때, 아스티나는 그대로 그의 얼굴을 제 쪽으로 당겼다. 건장한 성인 남성을 이끌 만한 힘은 담겨 있지 않았음에도 테리오드는 그녀가 의도한 대로 고개를 들었다. 곧이어 입술이 맞닿았다.

기묘한 병력 덕에 감정 없는 상대와 이리 여러 번 살갗을 맞대게 되다니. 테리오드와 입술을 겹친 것은 아탈렌타에 있는 동안 계속 반복돼 온 일임에도, 아스티나는 이 감촉이 제법 낯설다고 느꼈다.

아스티나가 그만 그를 밀어내려 어깨 위에 손을 올렸을 때였다. 입술 위를 미지근하게 누르던 그의 입술이 짧게 꿈틀했다. 슬쩍 눈을 뜬 순간 그대로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저 눈동자가 지나치게 익숙한 탓일까. 그러고 보면 그와 신체적으로 접촉하는 데 딱히 거부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입술을 맞붙인 상태 그대로, 테리오드가 낮게 속삭였다.

“……입술, 벌려요.”

나른하게 뜨인 눈이 올곧게 아스티나를 향했다. 그가 아스티나의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채근했다.

“위로는 제대로 해 주셔야지요.”

망설이던 아스티나는 지난번 자신의 실수를 떠올렸다. 테리오드와의 입맞춤은 단순히 버드 키스에 그쳤었지만 예외인 경우들도 있었다. 바로 아스티나가 그를 테오도르로 착각했거나, 혹은 착각하고 싶었을 때였다.

아스티나는 자신이 품은 죄책감을 테리오드가 알지 못하길 바랐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겹친 것이라 표현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과거의 누군가를 떠올리며 한 입맞춤을 반길 상대는 없을 것이다. 그들 사이에 아무런 감정이 없었더라도 그것은 충분히 예의 없는 행동이었다.

아스티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제 머릿속에서 완전히 과거의 얼굴을 지워 냈다.

아스티나의 입술이 옅게 벌어졌다. 그와 동시에 테리오드가 깊숙이 혀를 묻었다. 입 안 여린 살을 스치는 감각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테리오드가 몸을 일으키며 자연히 아스티나의 등이 등받이에 파묻혔다.

혀를 쓸다가 가볍게 입술을 문다. 입천장을 문지르는 감각이 아찔하게 밀려든다. 서로의 타액을 망설임 없이 삼킨다. 상대가 점점 깊숙이 묻어오는 것은 분명 욕망이다.

“아……!”

아스티나에게서 짧고 허망한 탄성이 새었다. 다음으로 이어진 신음은 남자의 입술로 삼켜졌다.

어딜 보나 상대를 안심시키는 행위보다는 흥분을 위한 접촉에 가까웠다. 하기야 입맞춤으로 사람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상식과는 거리가 머니 이를 따지는 것도 우습나. 여러 생각이 엉겼다.

“으음…….”

잊고 있었던 저릿한 감각이 아스티나의 복부를 채웠다.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는지 그의 오른쪽 허벅지를 감싼 바짓단이 빳빳이 당겨졌다. 아스티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가쁘게 치닫던 호흡이 잠깐의 여유를 두고 멀어졌다.

테리오드의 입술이 완전히 떨어져 나간 순간, 아스티나는 깨달음과 같이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열기로 젖은 남자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자신을 담고 있었다. 감싸 쥔 남자의 목은 열기로 홧홧했다. 맥박 소리가 온통 귀를 울렸다.

단언컨대 그 어느 때보다도 이성적으로, 아스티나가 물었다.

“대공, 진도를 나가 볼까요?”

* * *

‘오늘은 이르게 잠자리에 들지요, 저는 바깥의 욕탕을 쓸 테니 전하께서도 씻고 오세요.’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테리오드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바로 앞의 거울에 얼굴이 비쳐 보였다. 테리오드가 세면대를 짚고 있던 손을 들어 가볍게 제 뺨을 쳤다. 거울 속 멍청한 표정의 남자는 얼얼한 광대 언저리를 굼뜨게 문지르고 있었다.

테리오드는 좀처럼 문밖으로 나서지 못하고 그저 서성였다. 그러나 생각을 거듭할수록 부인의 말이 이해되기는커녕 고뇌만 더욱 깊어졌을 뿐이다. 결국 그는 한숨과 함께 몇 번이고 반복했던 고민을 다시금 읊조렸다.

“대체 무슨 의미지.”

분위기를 이어 그녀에게 입을 맞춘 것까지는 좋았다. 한데 꿈같은 키스가 끝난 후 아스티나가 꺼낸 말은 테리오드를 당황으로 몰아넣었다.

달뜬 숨, 격정에 찬 눈빛, 얇은 살갗 너머로 느껴지던 맥박과 온기.

그 모든 것이 테리오드에겐 너무도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제 욕망이 지나치게 선연하게 비친 것이 아닌가 염려했던 순간, 그녀는 제 위에 올라탄 남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공, 진도를 나가 볼까요?’

테리오드는 그 말을 ‘그런 쪽’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아스티나는 맥락에 맞지 않는 말로 상대를 혼란스럽게 만들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고작 입맞춤 정도로 크게 자극받았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의 부인은 좀처럼 동요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였으니까.

여기서 다시 문제가 발생한다. 아스티나가 말한 진도란 당최 무엇을 뜻하는가.

테리오드는 하반신을 두른 수건을 그대로 걸치고 나가도 될지, 아니면 점잖게 잠옷을 챙겨 입어야 할지 다시 한참을 고민했다. 테리오드는 제게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음험한 본성과 한바탕 다툼을 벌인 후에야 옷을 입을 수 있었다.

고뇌가 길었는지 상대는 먼저 와 테리오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벌써 샤워를 끝내고 침대 위에 올라간 상태였다. 아직 물기가 남은 머리칼이 눈에 들어왔다. 테리오드는 심호흡을 하며 침대로 다가갔다. 그가 좀처럼 이불 안으로 들어오지 않자 아스티나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가만히 서서 뭐 하십니까.”

테리오드는 더 천치 같아 보이고 싶진 않았으므로 주먹을 한 번 쥐었다 펴 스스로의 용기를 북돋웠다. 테리오드가 침대에 걸터앉자마자 아스티나가 거리를 좁혀 왔다. 산뜻한 비누 향이 코끝을 스치자 테리오드는 더더욱 고역이었다.

끈적한 일을 벌이기엔 지나치게 조도가 높은 시간이었다.

그들은 변화의 시간을 일고여덟 시쯤으로 맞춰 둔 참이었다. 시침은 아직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으므로 아직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는 셈이었다. 그 충분한 시간 동안 그의 부인이 하려는 일이 과연 무엇일까.

침대로 오기 전 커튼이라도 쳤어야 했던 건지도 모른다. 사위가 과하게 밝았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의 콧등에 난 작은 점까지도 볼 수 있었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무엇을…… 말입니까?”

그 주제를 직접 입에 담기가 힘겨웠던 그는 확신을 바라는 눈으로 아스티나를 응시했다. 그녀가 말한 것이 정말 자신의 파렴치한 상상과 맞닿아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테리오드에게 아스티나의 행동은 ‘그런 의미’로 읽혔다. 아스티나가 헤어질 의사를 밝혔을 때부터 그가 감히 꿈꿔 오지 못했던 일이기도 했다. 간혹 불을 지폈던 욕망은 발화하지 못하고 조용히 묻혔다. 테리오드는 책임지지 못할 관계를 가져 사랑하는 여자를 더한 곤경으로 이끌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녀가 아이를 원하지 않을 것이라 여겨서였지.’

부부 관계엔 언제나 임신의 가능성이 따라붙는 법이다. 아스티나가 정말 이혼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와의 동침을 이리 쉽게 결정해선 안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걸 감수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라면, 혹 자신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지기라도 했다는 뜻인가.

그녀에게 했던 선물 공세가 이런 식으로 돌아오자 테리오드는 그저 얼떨떨했다. 대가를 바라고 한 행동은 아니었는데 보답이 과하다 싶을 만치 대단했다. 테리오드는 입 안이 점점 말라 감을 느꼈다. 그런 테리오드를 놀리듯 아스티나가 긴 서두를 말했다.

“왜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나 싶기도 합니다. 키스가 효과가 있었다면, 다른 접촉 역시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는 법 아닙니까.”

“아…….”

테리오드는 당혹감에 말을 흐렸다. 그녀는 저주를 풀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가. 과연 그녀의 말은 꽤나 신빙성 있었다. 저주는 분명 입맞춤에 반응했다. 그리고 입맞춤은 신체 접촉이라는 집합 안에 속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테리오드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저주를 풀 가능성보다 그 ‘다른 접촉’이라는 말에 더 관심이 갔다. 그의 울대가 크게 진동했다.

“다른 접촉이라면……?”

“물론 입맞춤과 비슷한 것들이지요. 그러니 일단은…….”

“일단은?”

“손부터 잡아 볼까요?”

테리오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그가 되물었다.

“예?”

아스티나는 재차 설명하는 대신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마른 손가락이 테리오드의 손 틈을 파고들었다. 꽉 맞닿도록 끼워진 깍지에 테리오드는 흠칫 놀랐다.

테리오드는 그제야 아스티나의 말을 이해했다. 그는 스스로에게 일러 주듯 그녀가 허락한 부위를 입에 담았다.

“손이요.”

직접 입 밖으로 내뱉고 나자 더욱 아연하였다. 어정쩡하게 올라가 있던 테리오드의 입꼬리가 빳빳이 굳었다. 테리오드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테리오드를 골릴 요량으로 부러 주어를 말하지 않았던 아스티나도 그 반응을 보고 작게 웃었다.

그녀는 팔을 길게 뻗어 테리오드의 손을 들어 올렸다. 떨어진 손바닥이 차게 느껴지는 듯했지만, 얽힌 손가락은 여전히 제자리에서 서로를 구속하고 있었다.

“실험은 점진적으로 진행해 봐야 하는 법 아닙니까.”

“음, 그렇군요.”

그리 말하면서도 테리오드의 눈은 아스티나의 머리칼로 가 있었다. 그 끝에 맺힌 물방울이 신경을 건드렸던 탓이다. 자신의 시선이 무섭게 느껴질 만치 집요하다는 사실은 인식하지 못한 채, 테리오드가 물었다.

“일찍 잠자리에 들자는 말은……?”

“대공께서 변하시는 시간을 감안하면 실험해 볼 시간이 그리 많진 않으니까요.”

“아, 그렇죠. 저녁이 가까우니.”

여기서 다른 어떤 말을 했다간 곤란해질 것 같았다. 자신의 속내를 내비치지 않을 말을 찾다 보니 테리오드는 점점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없어졌다.

테리오드는 그녀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그는 동침을 요구하는 아스티나를 질색하며 피했었다. 넝쿨째 굴러 들어온 호박을 걷어찬 건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의 발이었다.

테리오드는 내심 한숨 쉬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나.’

정녕 그녀를 욕망하게 될 줄은 몰랐다. 처음 만났을 적만 해도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에게 단순한 명목상의 아내, 혹은 대공령을 돌봐 줄 상대였다. 그때의 거리감이 무색하게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에게 대단히 큰 부분이 되어 있었다.

그녀와 맞닿은 손이 반복해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테리오드의 눈이 고통스럽게 감겼다. 좋아하는 이성과 같은 침대에 있는데 평온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녀에게서 육체관계만 바라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들끓는 하복부를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를 원했다. 가져 본 적 없던 짙은 욕망에 스스로 놀랄 정도로.

그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여자에게 수작을 부리기 위해 이렇게 생각을 쥐어짜 낸 적은, 단언컨대 그의 인생에 있어 처음이었다.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의 엄지와 검지 사이를 문지르며 은근히 말했다.

“한데 이것이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희가 이전에 손을 잡아 보지 않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아스티나는 곰곰이 기억을 되짚었다. 늑대 테리오드가 점점 말을 잘 들었던 것이 처음엔 조련 덕분이라고 여겼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저주가 풀려 가고 있다는 전조였던 것 같기도 했다. 영리한 모습에 갈수록 사람 같아진다며 그녀도 칭찬하지 않았나.

당시에도 손을 잡거나 하는 가벼운 접촉은 했었다. 늑대가 점잖아진 건 그 덕분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테리오드의 말대로 이제 와 새삼 그와 손을 잡아 봤자 큰 효과는 없을 듯했다.

테리오드가 달콤하게 마저 속삭였다.

“무엇보다 말씀하신 ‘점진적으로’의 의미가 통하려면, 입맞춤보다 더한 것을 하셔야지요.”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아스티나는 대수롭지 않게 수긍했다. 사실 본래 그녀의 성미대로라면 이리 소꿉장난 같은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스티나가 단계를 천천히 밟아 가려고 한 건 전적으로 테리오드 때문이었다. 그녀의 기억엔 아직 기겁하며 물러서던 대공의 모습이 선연히 남아 있었으므로.

아스티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포옹을 해 볼까요?”

그러고는 테리오드에게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테리오드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가슴팍에 파고든 아스티나의 몸이 현실 같지 않아, 테리오드는 잠시 숨이 막혔다. 단순히 그녀를 친구로 생각했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팔 안쪽에 닿은 그녀의 살결이 빌어먹게도 부드러웠다.

그러나 좋아하는 여자를 품에 안은 충족감과는 별개로, 꽤나 불편하기도 했다. 아스티나에게서 나는 향기가 그의 어떤 부분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옅은 수증기와 향유의 냄새가 섞여 퍽 음험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테리오드는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드러난 목덜미와 쇄골이 유독 눈에 띄었다. 아스티나의 눈이 닿지 않은 곳에서, 테리오드는 멀리 있을 땐 보지 못했던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이를테면 둥근 귓불이나 그 아래로 이어지는 목선 같은 것들을.

아스티나의 귓가 가까이에 닿을 듯 말 듯 입술을 붙인 채, 테리오드가 속삭였다.

“포옹이 입맞춤보다 의미 있는 접촉일까요?”

“어떻게 보면 그럴 수도 있겠죠.”

아스티나를 끌어안은 것은 테리오드 쪽이었기에 그녀의 손은 가만히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아스티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테리오드의 가슴 언저리로 가져갔다. 그녀가 말했다.

“심장 소리가 들리니까요.”

“……전 부인의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내 박동이 그대보다 훨씬 더 클 테니까.

테리오드는 뒤이은 말을 혀 밑으로 삼켰다. 그의 가슴을 손끝으로 누르던 아스티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물었다.

“떨리십니까?”

그 말엔 분명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가쁘게 뛰는 남자의 심장을 그녀도 알아챘으리라. 다만 그 안에 담긴 것이 단순한 사내의 욕정인지, 진심인지까지는 판단할 수 없었겠지.

테리오드는 그녀의 등허리에 감았던 팔에 힘을 주었다.

“……전하?”

눈 깜짝할 사이에 시야가 바뀌었다. 아스티나는 얼떨떨한 눈으로 테리오드를 올려다보았다. 상대를 경계하고 있지 않아 벌어진 예기치 못한 기습이었다.

그 와중에도 방어를 위해서인지 그녀는 무릎을 굽혀 웅크린 상태였다. 테리오드의 배에 닿아 있는 다리는, 분명 상대가 다른 이였다면 망설임 없이 공격을 위해 움직였을 것이다. 하마터면 통증에 뒤로 널브러졌을 상황이었으나 테리오드는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느리게 답했다.

“저를 또 놀리시는군요.”

아스티나는 내심 혀를 찼다. 팔팔한 이십 대 남성의 생리 현상이 재밌게 느껴져 장난을 친 건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그러한 경험을 너무도 오래전에 겪지 않았나.

“……전에 말씀드렸듯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부끄러워 마십시오.”

아스티나의 시선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부러 하반신은 떨어트리고 있었건만, 아스티나는 이미 그의 상태가 어떤지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테리오드는 이전처럼 이불을 끌어와 제 몸을 가리지는 않았다. 대신 가만히 그녀의 발목을 쥐었다. 아스티나의 다리를 잡아당긴 테리오드가 복사뼈에 경건히 입을 맞췄다. 너무도 엄숙한 행동이라 아스티나는 그것이 손등에 하는 키스와 비슷한 종류의 것이라 착각할 뻔했다.

그러나 그의 입술은 그보다 진득이 아스티나의 살갗에 머물렀다. 아스티나는 제 발목 위로 울리는 남자의 음성을 선연히 느꼈다.

“진짜 부끄러운 게 어떤 것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

“부부간에 진정 자연스러운 일이 무엇인지는요?”

그리 말하며 테리오드가 그녀의 종아리를 제 어깨에 걸쳤다. 자연히 그녀와 하체가 맞붙었다. 몸 위로 실린 남자의 무게는 아스티나에게 옛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신기하면서도 어색한 기분이었다.

치맛단이 걷어 올려진 덕분에 테리오드와 아스티나는 한 겹의 천만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그것이 테리오드와 자신 사이의 예민한 신경줄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가 걸친 옷은 그의 마지막 이성이었다.

한참 아스티나를 내려다보던 테리오드가 채근하듯 말했다.

“대답이 없으십니다.”

“생각 중이었습니다.”

“무엇을요?”

“대공께서 왜 이러시는지에 대해서요.”

아스티나는 그와 자신 사이에 맴도는 열기를 잊고 판단 내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테리오드가 이런 일을 벌인, 가장 유력한 가능성을 떠올렸다.

“제게 경고하고 싶으셨던 거면 성공하셨습니다. 앞으로는 조심하도록 하지요. 그런 것을 놀려 기분 좋을 사람은 없으니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기분 나쁘지 않았습니다.”

“한데 왜―”

“다만 부인께서 먼저 저를 침대로 끌어들이시지 않았습니까.”

이어진 테리오드의 말에, 아스티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테리오드가 자신의 언사를 물고 늘어지자 내심 당황한 탓이었다.

아스티나가 그를 다소 어리게 여겼던 건 사실이었다. 아마 행동에도 그 태도가 묻어 나왔을 것이다. 테리오드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터다. 하기야 일곱 살이나 어린 상대의 도발이 기분 좋을 리는 없다. 그들의 정신적인 나이 차는 테리오드가 알고 있는 바가 아니니.

아스티나가 미간을 좁히며 변명했다.

“그건……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가 어떤 의미입니까?”

“……‘부인께서 저를 침대로 끌어들이시지 않았습니까’의 의미지요.”

“글쎄요, 말씀을 분명치 않게 하시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테리오드가 여유롭게 대답했다. 어딜 보나 아스티나가 저질렀던 장난을 놀리는 말이었다. 아스티나는 슬슬 눌린 허벅다리가 뻐근해졌다. 그리고 제 엉덩이 밑에 자리 잡은 무언가의 형태 역시 신경 쓰였다. 그녀는 더 이상의 의미 없는 설전은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걸 원하지 않으셨던 건 대공 쪽이셨습니다.”

“마음이 바뀌었다고 하면요?”

대꾸는 망설임 없이 돌아왔다. 그와 달리 고민이 필요했던 아스티나는 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테리오드의 하반신을 달아오르게 했을 욕정은 그의 눈 안에도 있었다. 아스티나는 그것을 피해 잠시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단순히 장난으로 시작했던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갈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크게 당황했다거나, 이 상황이 참을 수 없이 곤란한 건 아니었다.

몸을 부대끼고 사는 남녀라면 익히 벌어질 법한 일이다. 기실 일련의 행동으로 적당히 몸이 달아오른 건 아스티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성과의 접촉을 두려워할 풋내기 시절은 이미 지났다. 그녀는 스스로를 기쁘게 할 열락을 모르지 않았다.

‘해도 나쁘지는 않겠지.’

아스티나의 솔직한 심정은 그러했다. 그녀에겐 테리오드를 제지시킬 이유가 없었다. 딱 한 가지 빼고는.

“전하, 관계는 사랑하는 사람과 가지시는 편이 좋습니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에게 이 말을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관계에 그다지 의미를 부여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연인이 있는 상태에서 저지르는 부정이나 강제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스스로의 몸을 어떻게 쓰든 그건 본인의 자유였다.

그러나 이왕이면, 상대가 사랑하는 사람인 편이 좋다고도 생각했다. 몸의 언어만으로 움직이면 종종 후회하는 일이 생기는 법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것이 첫 경험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아스티나가 경험했던 첫 관계는 치욕의 기억이었다. 원수에게 몸을 내어 주고 난 후 모두가 자리를 비운 새벽, 홀로 얼마나 비통하게 울었던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눈물의 기억은 지금까지도 종종 그녀를 괴롭혔다.

아스티나가 처음 테리오드와 만났을 때 관계를 요구했던 건 그만큼 후계 문제가 급했기 때문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면 굳이 강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들 사이엔 일을 치를 어떤 이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가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기묘한 집착을 이해했으나, 동시에 비판적인 시각을 잃지 않았다. 매일 강제되는 입맞춤부터가 정상이 아니었다. 보통의 부부가 아닌 그들이 다른 이들처럼 애정을 쌓아 갈 수 있을 리 없었다. 하물며 아내가 이런 텅 빈 인간임에야, 자신의 존재는 그를 병들게 할 뿐이리라.

“그 말은, 그대를 위한 겁니까 아니면 나를 위한 겁니까?”

테리오드의 눈초리가 언뜻 사나워졌다. 훈계로 비쳐질까 염려한 아스티나가 모호하게 발을 뺐다.

“보편적인 경우를 얘기하는 거지요.”

“그런 고리타분한 생각을 가지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좀 구식이긴 합니다.”

아스티나가 설핏 웃으며 답했다. 테리오드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테리오드의 마음을 알지 못해 한 말이겠지만, 그럼에도 너무도 영리한 회피였다. 테리오드는 그녀를 품기 위해 한 번뿐인 고백을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싸구려 욕정을 위해 희생하기엔 테리오드가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이 너무 깊고도 컸다.

테리오드는 그만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말로는 부인을 이길 수가 없군요.”

테리오드는 아스티나를 놓아주었다. 그는 그녀의 위에서 물러나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웠다. 수작을 부릴 의욕도 없어졌다. ‘관계는 사랑하는 사람과 가지는 편이 좋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그들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만일 그녀가 자신을 원했다면 이런 식의 거부는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테리오드가 기대하는 그들 사이의 연정은, 적어도 그녀에겐 필요가 없었다.

“포옹은 관둡시다. 통상적인 기준으로 따진다면 기실, 이전에 해 온 것들이 더 깊지 않겠습니까.”

자포자기한 목소리에 아스티나는 몸을 일으킨 상태 그대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차가운 손이 테리오드의 눈가로 내려앉았다. 테리오드는 제 이마를 간질이는 그녀의 손길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포옹 같은 건 효과가 없으리라 생각하시나요?”

“부인께서는 아닙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전하의 엉덩이를 함부로 더듬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그리 말하며 아스티나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세상을 삐딱하게 보고 싶은 기분이었던 테리오드는 평소보다 불량스럽게 대꾸했다.

“키스만으로 저주가 풀리지 않는다면요?”

“그럼 강도를 올려서 실험해 보아야겠지요.”

“저와 잠자리라도 가져 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스티나는 잠시 망설였다. 방금의 판단과 위배되는 생각이었지만 만약 그리된다면 별수 없었다. 소중한 첫 경험의 기억보다는, 당연히 괴물이 되는 저주를 푸는 편이 낫다. 낭만은 실리 다음에 위치하는 것이니까.

“그게 저주를 풀 방법이라면요.”

생각보다 흔쾌히 돌아온 대답에 테리오드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실수로 아이가 생긴다고 해도?”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완전히 안전한 피임은 없었다. 무엇보다 관계로 차도가 있다 해도, 그것이 한 번으로 끝날지는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테리오드와 아스티나는 그러한 결론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둘 다 사랑하는 여자를 강제해야 하는 남자나, 자유를 잃은 여자는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생각해 본 적 없는 주제에 아스티나가 다소 곤혹스러운 낯으로 되물었다.

“……어미 없는 아이라 하여 버리시진 않으시겠지요?”

“저와 아이만 두고 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후계가 필요하신 건 대공 전하이시니까요. 미혼모의 아이보다는 대공의 아이가 훨씬 더 좋은 자리이기도 하고.”

“그런 당연한 계산을 하실 줄 아시는군요.”

“세상은 치기만으로 살아갈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왜 정작 부인께서는 불명예스러운 이혼을 택하려 하십니까.”

아스티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실, 그녀로서도 바로 대답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자신은 왜 아탈렌타를 떠난다고 하였나.

아탈렌타에 정이 들지 않았던 처음엔 분명 귀환을 원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지내는 몇 달간, 아스티나는 많은 장점들을 알게 되었다. 테리오드는 좋은 사람이었고 사용인들도 모두 그녀에게 친절했다.

기실 그녀의 신경을 거스르는 단점들은 대공령보다는 레테 백작가 쪽에 더 많았다. 본래 불편이란 물질적인 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테리오드의 말대로, 그와 아탈렌타에 계속 머무는 건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레테 백작가는 이혼당한 과년한 딸을 책임질 정도로 여유 있는 집안이 아니었으니까. 사람이 된 테리오드의 모습은 분명 칸나의 걱정도 불식시킬 수 있으리라.

아스티나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이곳에 머무를 이유가 없다고, 혹은 머무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곳을 떠나고 싶기도, 동시에 떠나지 않고 싶기도 했다.

“그대가 떠나서 얻으려는 게 어떤 것이든 제가 드릴 테니, 여기 계속 있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흔들리는 아스티나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테리오드가 집요히 말했다. 아스티나는 그의 눈을 가렸던 손을 들어 잠시 그를 응시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푸른빛의 눈동자가 깊었다.

그래, 저것 때문이다.

저것이 자꾸 저더러 돌아가라고 말한다. 네 기억으로, 과거로, 결코 잊지 못할 누군가에게로. 그래서 도통 이성적인 결정을 내리질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답하지 않는 아스티나를 테리오드가 그대로 잡아당겼다. 그녀는 힘없이 중심을 잃고 테리오드의 팔 안으로 쓰러졌다. 그의 가슴팍 위로 떨어진 손이 그의 호흡과 함께 들렸다 내려앉았다. 아스티나는 제 손만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아스티나의 입술이 열렸다.

“대공께서는 분별 있는 선택이 가능하신 상황이 아닙니다. 특히 그것이 배우자 문제라면요.”

“정말 저를 걱정해서 결정을 망설이시는 것 같진 않아서요.”

“……대공께선 저를 비겁한 사람으로 만드시는군요.”

그에 테리오드가 설핏 웃었다. 대답을 강요할 생각이 없었던 그는 아스티나를 채근하는 대신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결 좋은 붉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아스티나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 테리오드는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녀가 작게 말했다.

“하지 마세요.”

어떤 것을 말하는 걸까. 그녀를 건드리는 손일까 아니면 그녀에게 쏟아진 기대 쪽일까. 테리오드로서는 둘 다 멈출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지 마세요.”

그러나 아스티나의 손은 테리오드를 제지하는 대신, 테리오드의 가슴 언저리에 얹어진 상태 그대로 머물렀다.

심장 부근을 가리키는 손끝을 보며 테리오드는 벨루아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정말 아픈 상처는 심장 가장 깊숙한 곳에 난다던 말은 그녀의 경험담이었을까. 그래서 그녀는 자신에게 내줄 마음 한구석조차 없는가.

테리오드는 그녀를 욕심껏 끌어안지 않기 위해 팔에 힘을 주었다. 아스티나는 싫다는 말을 잠꼬대처럼 반복하면서도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언뜻 잠이 들었던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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