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그런 여자들 (8/23)

8. 그런 여자들

대공 부부의 아침은 언제나 빨랐지만, 오늘은 대공저 전체가 새벽부터 소란스러웠다. 이른 기상이 대개 짜증을 유발하는 것치고 사용인들의 표정은 밝았다. 주인의 부재로 침울했던 지난 일 년이 거짓말인 것처럼 분위기는 활달하기 그지없었다.

아탈렌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를 정성 들여 닦고, 기사단은 그 앞에 열 맞추어 섰다. 기사단장이 군기를 잡겠다며 거칠게 고함치는 소리가 본관의 1층까지 크게 울렸다.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는 고성이었지만 빗질을 하던 하인들은 여유롭게 기지개만 켰다. 기분 좋은 부산스러움이 저택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때아닌 부지런함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간만에 주인의 외출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나들이라면 신경 쓸 일이 많지 않았겠지만, 대공 부부가 처음으로 영주민들에게 얼굴을 드러내기로 한 날이었다.

이를 제안한 건 가신 중 하나인 팔렛 남작이었다. 모두가 돈에 양심을 판 건 아니었고, 풍파가 끝나고 살아남은 가신들의 수는 적되 제법 내실이 있었다. 주요한 인사들의 패악에 차마 나서지 못하고 조용히 몸을 사렸던 현명한 이들이었다. 대단한 공훈은 없었으나 적어도 주인을 배신하지 않았다. 뒤를 맡길 수 있는 자들에게 마음이 가는 건 당연지사였다.

당연한 결과로 잔존한 세력과 대공의 사이는 돈독해졌다. 그들에겐 주인을 향한 믿음이 있었고 테리오드는 그에 후하게 보답했다. 팔렛 남작도 대공의 치하를 받은 그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전하께서 직접 영지를 시찰해 보심이 좋아 보입니다.’

대공이 돌아오긴 했으나 아직까지 그의 귀환은 뜬소문 정도의 무게로 와닿았다. 테리오드가 직접 얼굴을 보인다면 특히도 혹독했던 겨울을 났던 대공령의 분위기도 녹아 들리라. 테리오드는 아스티나와 짧은 상의를 마친 후 긍정의 답을 돌려주었다.

가을에 다다르긴 했으나 수확 철과는 아직 거리가 있어 축제가 벌어지는 시기도 아니었으므로, 외출의 목적은 비교적 단출했다. 대공 부부가 직접 나서 양민들의 생활을 둘러본다는 내용의 보여 주기식 행차였다. 세금을 거둘 철만 되면 영주들은 으레 땅 주인의 위엄을 뽐내곤 했으니 나름의 연례행사라고 봐도 좋았다.

솜씨 좋은 하녀들이 나서 대공비의 치장을 도왔다. 저택 내에서는 대개 편한 옷만 걸치고 다녔던 테리오드도 이번만은 화려한 의복을 갖추었다. 대공은 자리에 따른 차림을 엄격히 구분하는 편이었다. 사교계에서 끗발을 날렸던 당시에는 장식 하나하나를 세세히 살폈으나 집무실에 틀어박힐 때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다. 물론 어느 쪽이든 대공은 아름다웠다.

간만의 단장에 테리오드는 두통을 호소했다.

“어떤 면에선 사람보다 짐승이 더 나을 수도 있겠군. 적어도 부토니에를 흑옥으로 하냐 오닉스로 하냐는 둥의 쓸데없는 선택을 할 일은 없으니.”

늘 귀공자 같던 주인이 저주라는 고초를 겪으며 농담의 수위가 세졌다. 뒤에서 대기하던 올리버가 함을 뒤로 물리라 명했다. 과연 그 위에 놓인 검은 보석들은 육안으로 보기엔 별반 차이가 없었다. 올리버가 짐짓 배려하는 척 말했다.

“원하신다면 다른 색들도 대령하겠습니다.”

“오. 제발 봐줘, 올리버. 이러다 신랑이 부인보다 늦게 생겼지 않나.”

테리오드가 과장스럽게 앓는 소리를 냈다. 올리버는 무슨 소리를 하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주인마님께선 아직 셰인즈(chainse)와 코르사주(corsage)만 겨우 걸치셨다는 데 제 한 달 봉급을 걸지요.”

“자네는 승부사 기질을 이상한 데서 발휘하는군.”

“불필요한 염려는 마시란 소리입니다. 자, 그래서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테리오드는 온갖 색의 장신구가 들려 나오기 전 가장 왼편에 있는 것을 골랐다. 대공의 심미안은 뛰어난 편이었지만 수많은 보석을 하나하나 감정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테리오드는 자신이 고른 것이 흑옥인지 오닉스인지 여전히 분간할 수 없었다.

테리오드는 들릴 듯 말 듯 한 크기로 허밍을 흥얼거리며 준비를 마쳤다. 올리버가 애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그래 보이나?”

테리오드가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설마 그럴 리가’라고 말하는 듯한 반응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올리버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네, 정말 좋아 보이십니다.”

그에 테리오드가 피식 웃었다. 과연 대공은 들떠 있었다. 간만의 나들이 탓만은 아니었다.

‘대공, 외로울 때면 언제든 그대의 친우를 부르세요.’

계속해서 대공의 머릿속을 맴돌던 다정한 말이었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가 들려주었던 그 약속을 몇 번이고 되짚었다. 속내를 들켰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하였으나, 그녀가 기꺼이 내려 준 정의에 이내 마음이 들떴다.

대공비는 그녀와 대공이 친우라고 말했다. 사익으로 맺어진 부부 관계보다 훨씬 울림이 깊은 단어였다. 테리오드는 벅찬 가슴으로 생각했다.

친우라니, 그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테리오드는 그녀와 자신의 접근법이 달랐음을 인정했다. 그녀라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해 혼자 괜히 열을 올렸던 것이다. 이리 대화로 쉽게 풀어질 일을 왜 홀로 앓았던가. 부부로서 헤어짐을 택한다 해도, 그게 그들의 왕래 자체가 끊어진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대공비는 친우라는 말로 앞으로도 이어질 인연의 끈을 만들었다. 대공에게 버려질 것을 걱정하지 말라며 세심한 당부를 남긴 셈이었다.

테리오드는 가벼운 걸음으로 대공비가 있는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올리버가 몇 번이고 붙잡으며 이곳저곳을 건드린 탓에 시간이 다소 지체되었다.

덕분에 테리오드가 아스티나가 있는 곳에 다다랐을 즈음엔 그녀의 치장도 거의 끝난 후였다. 도보로 이동하는 일정이 있기 때문에 연회처럼 겹겹이 부푼 드레스를 차려입은 건 아니었지만, 언뜻 보기에도 호화로운 옷을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대공비는 값진 것들과 제법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테리오드는 가감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아름다우십니다, 부인.”

“감사합니다, 대공께서도 보기에 아주 좋으십니다.”

테리오드는 미소로 화답하며 드레스 룸 안을 둘러보았다. 부유한 대공가답게 옷을 보관하는 장소도 넓기 그지없었다. 벽에 걸린 거대한 거울이나 알알이 굵은 보석으로 장식된 가구들은 황성에 비견해도 뒤처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안이 이상하게 썰렁했다. 테리오드는 옷이 걸려 있는 쪽으로 다가가 가볍게 살펴보았다.

아스티나는 황제였을 적 온갖 호화로운 것들은 다 걸쳐 본 인물이었다. 당연히도 좋은 물건을 감별하는 매서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백작가에 있을 적 풍족하진 않은 형편에도 아스티나는 걸치고 입는 것은 고급으로만 채웠다. 물론, 어디까지나 백작 영애의 기준에서.

질이 뒤떨어지는 옷들은 아니었으나 아탈렌타의 막대한 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레테 백작은 딸에게 색색의 실을 수놓고 갖가지 보석을 다는 호사를 선물해 주진 못했다. 테리오드는 그 점을 지적했다.

“새 의복을 맞추심이 좋겠습니다.”

아스티나도 필요성은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공식 행사에도 나서야 하니 옷을 몇 벌 더 맞추기는 해야 했다. 지금 걸치고 있는 것만 해도 이번 외출로 인해 새로 주문한 것이었다.

아스티나가 동조의 기색을 보이자 테리오드가 상기된 얼굴로 다가왔다.

“비싼 옷감으로 틀을 잡고 온갖 값진 보석을 답시다. 장인이 직조한 레이스는 부인과 아주 잘 어울리실 겁니다. 저희 어머니는 옷을 보관하는 장소가 모자라 이만한 크기의 드레스 룸을 둘이나 더 지으셨지요. 부인께서는 우선, 적어도 이 방 하나는 빼곡히 채우셔야겠습니다.”

아스티나는 갑자기 부담스럽게 구는 대공을 응시했다. 이전에도 퍽 세심하게 굴긴 했으나 아내의 옷까지 챙길 정도는 아니었다.

지난번 나름대로의 위로를 건넸던 일이 그에게 감명 깊게 다가갔을까. 대공에게 그리 의미 있는 사람이 될 생각은 없었던 아스티나로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아스티나의 꺼림칙한 기색을 아는지 모르는지 테리오드가 온갖 호사스러운 보답을 읊었다.

“친정 식구들을 이쪽으로 초대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아탈렌타의 성을 걸고 최고의 대접을 약조하지요.”

테리오드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반색했다.

“아, 가족분들께도 선물을 합시다. 자매가 계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분은 뭘 좋아하십니까?”

아스티나는 마지막으로 봤던 칸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등자에 발을 걸치고 있다가 떨어진 탓에 그녀는 호되게 무릎이 까졌었다. 아스티나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언니의 눈에서 미안함과, 동시에 미약한 기대감을 보았다. 그 삶에 대한 희망은 칸나가 끝내 몸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죄책감으로 번져 칸나의 눈가를 몇 번이고 적시기도 했으리라. 아탈렌타로 온 후 몇 번 주고받았던 편지 속엔 숨길 수 없는 자책이 묻어 있었다. 이 상황에서 대공이 대뜸 선물을 보낸다면 어떻게 될까. 능히 그녀의 울음보를 터트리고도 남았다.

아스티나가 애매한 표정으로 답했다.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신 것 같습니다.”

“선물을 싫어하는 사람이 다 있습니까.”

“상황이 보통과는 달라서 그렇지요. 선물을 주시려거든 차라리 직접 만나서 주세요.”

멀끔한 테리오드의 모습을 보면 칸나도 안심할 수 있으리라. 아스티나의 중재에 테리오드가 기다렸다는 듯 재차 제안했다.

“역시 초대는 가을이 가기 전이 좋겠습니다. 겨울은 이동이 힘든 계절이니까요. 부인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전하, 오늘따라 배려가 넘치십니다.”

아스티나의 말에 테리오드가 눈부신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저희는 이제 친우가 아닙니까. 이 정도야 당연하지요.”

이 말을 꺼낼 것을 기대라도 했던 양 뿌듯한 낯이었다. 하는 행동은 영락없는 팔불출, 사랑꾼인데 내뱉는 내용은 조금 과가 다르다. 하녀들은 부인을 친구라고 칭하는 대공을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불경한 시선을 대공께 직접 닿게 할 순 없었으므로 저들끼리 눈치만 살폈다.

날 때부터 시중받고 자라 온 이는 보통 사용인들의 반응에 관심을 두지 않는 법이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알아채지 못한 테리오드가 다시금 물었다.

“백작 부인께선 어떤 것을 좋아하시는지 알려 주세요. 역시 백작께는 좋은 술을 선물하는 것이 무난하겠지요, 혹 다른 취미가 따로 있으십니까?”

“대공 전하,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렇게까지 신경 써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스티나의 반복된 거절에 테리오드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부인, 저희는 친구가 아닙니까.”

아무래도 저 친구라는 말이 썩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아스티나는 무례를 범하는 대신 그저 가지런히 두 손을 모았다. 그녀는 대공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부를 표하는 대신 상식적인 부분을 지적하기로 했다.

아스티나가 떨떠름한 음성으로 말했다.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친구의 의무가 상납이 아니라면 그 배려는 거두심이 좋겠습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고작 친구가 됐다는 이유로 값진 선물을 하려 든다는 말인가. 물론 아탈렌타의 주인이라면 그런 사치도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나, 역시 과했다. 친분을 이유로 상대에게 비싼 돈을 들여야 한다면 레테 백작가는 누구와도 교제하지 못할 것이다.

아스티나의 말에 테리오드는 다소 머쓱해졌다. 들뜬 마음에 지었던 미소가 어색하게 사그라들었다.

“좋아하시리라 생각했는데요.”

“대공께선 이미 제게 충분히 잘해 주고 계십니다.”

아스티나가 딱 잘라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요구한 것이었고, 테리오드는 그녀에게로 다가가 그 손을 잡았다.

장갑을 낀 상태로는 천 아래의 굳은살을 짐작할 수 없었다. 테리오드는 흰 비단 아래의 노력들을 떠올렸다. 매일 검을 쥐고 휘두르며 그녀가 얻은 영광의 흔적이었다. 테리오드는 자신이 새로 맞이한 친우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란 점에 대단한 충족감을 느꼈다. 그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역시 고우십니다. 다만…….”

“다만?”

“부인께서는 역시 바지가 더 잘 어울리십니다.”

아스티나의 눈이 미묘한 빛을 띠었다. 아스티나는 테오도르의 얼굴을 잠시간 빤히 응시했다. 지난번에도 들은 말이긴 하나 예의상 던지는 칭찬인 줄로 알았다. 한데 반복해 의사를 전하는 걸 보니 정말 그리 생각하는 듯도 했다.

하기야 그녀가 다리 사이의 휑한 감각에 익숙해진 건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지난 생에서 그녀는 평생 검을 휘둘러 왔고 그것은 나풀거리는 치맛단을 걸치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니.

아스티나의 입술 사이로 바람 소리가 샜다.

“보통 레이디는 그것을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답니다.”

“기분이 상하셨습니까?”

“글쎄요, 모범적인 학생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리 모범적인 아가씨도 아니었던지라.”

말을 마친 아스티나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히센이 처음 대공저에 도착했을 적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각난 탓이었다.

신부가 바꿔치기 된 자세한 사연을 궁금해했던 제자 덕분으로, 아스티나는 간만에 그와 술상을 두고 마주 앉았었다. 내용이 내용인지라 분위기는 한없이 밑으로 가라앉았다. 칸나가 눈물지으면서도 대공저에 가겠다 결정했던 일을 말하자 히센이 고개를 주억였다.

‘어쩐지, 칸나 아가씨가 나서서 전하를 대신 보내셨을 것 같진 않았어요.’

‘왜, 장녀라서?’

‘그냥 그런 분이시니까요. 칸나 아가씨는, 뭐랄까…… 레이디의 표상 같은 분이죠.’

아스티나의 입술이 비틀렸다. 아스티나는 잔을 던지듯 탁상 위에 내려놓았다. 맑은 빛의 술이 사방으로 튀었다.

‘언니는 죽으러 가는 걸 알면서도 레이디의 의무를 말했지. 난 그것만큼 바보 같은 일이 또 없다고 생각했어.’

‘…….’

‘내가 잘못된 건가?’

주인의 심기를 상하게 한 것을 깨달은 히센이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가씨는 보통의 귀족 영애들과는 좀 다르시죠.’

확실한 사실이었지만 동시에 의문을 갖게 하는 말이었다. 왜 다를까. 무엇이 다를까.

칸나가 정말로 이곳에 와서 죽었다면, 그녀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을까.

“모범적인 아가씨는 아닐지 몰라도, 훌륭한 사람은 맞습니다.”

매끄럽게 이어지는 대공의 칭찬이 정신을 깨웠다. 아스티나가 반문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대가 제게 주는 개인적인 의미가 아니더라도, 저는 부인을 존경합니다. 하녀들이 괜히 당신을 선망의 눈으로 보는 게 아니에요.”

자신도 인기 없는 주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대공비가 온 이후로는 우선순위를 뺏겼다. 사용인들이 고용인의 위세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흔한 일이나, 대공비는 그들의 인간적인 호감까지 얻었다. 맺고 끊음이 분명한 성격이나 현명한 치세는 훌륭한 권위자 그 자체였다. 테리오드가 웃으며 농을 덧붙였다.

“제가 옷 얘기를 괜히 꺼낸 게 아닙니다. 휑한 드레스 룸으로 들어오는데 하녀들의 시선이 아주 매섭더군요.”

마침 마차 앞에 다다랐다. 테리오드는 그녀를 먼저 태운 후 자신도 건너편 자리로 가 앉았다. 기사단장이 문을 닫아 주며 경례를 하고 떠났다. 이윽고 마차가 출발했다. 엉덩이 아래가 부드럽게 진동했다. 테리오드는 창을 내다보며 손끝으로 가볍게 문가를 두드렸다.

“긴장되십니까?”

“그럴 리가요.”

아스티나의 물음에 테리오드가 코를 찡긋였다.

“다만 감회는 새롭군요. 다시 대중 앞에 나선다는 것이.”

“대공께서는 무대 체질이 아니십니까.”

수도의 사교계에서 널리 명성을 떨쳤던 그의 과거를 말하는 것이었다. 테리오드는 그만 피식 웃음 지었다.

“사실과는 좀 다릅니다. 수도의 귀족들이 얼마나 콧대가 높은지 아십니까. 그들 사이로 파고드느라 꽤나 고생했죠.”

“감히 아탈렌타의 대공에게 선을 그었다는 말씀입니까?”

“귀족들의 친목은 보통 지저분하죠. 오래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아니면 치부를 잘 내보이려 하지 않습니다. 덕분에 저는 성년이 된 후 오랜 시간 수도에 기거해야 했죠. 아탈렌타의 후계들은 다들 그렇습니다.”

확실히 테리오드가 유명세를 떨친 건 아탈렌타가 위치한 남부가 아닌 수도의 사교계였다. 테리오드가 그 특수한 상황에 대해 마저 설명했다.

“어쨌든 돈과 정보가 모여드는 건 황성이 있는 곳이니까요. 성인이 된 아탈렌타의 아들은 수도로 올라가 오래 머무르는 관습이 있습니다. 성인이 되기까지의 부재를 자연스럽게 메우기 위함이지요. 저는 작위 승계를 핑계로 온갖 초대에 응해야 했어요.”

“제가 들었던 모든 소문이 노력의 일환이었군요.”

아스티나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테리오드의 관심이 동했다. 아탈렌타의 대공은 화제를 모으는 인물이었으므로 과거의 행적을 전해 들은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 내용은 조금 궁금했다.

“어떤 소문을 들으셨습니까?”

“별것 아닙니다. 아탈렌타의 젊은 대공이 몹시 아름다워 뭇 여성들의 가슴을 녹인다는 찬사였지요.”

아스티나가 미소 지으며 이어 덧붙였다.

“과연 소문과 다르지 않으셨습니다.”

갑작스럽게 끼어든 칭찬에 테리오드는 다소 당황했다. 대공과 대공비 사이에 묘한 침묵이 돌았다. 멈칫한 테리오드가 무언가 대답을 꺼내려는 참이었다. 그가 입을 벌림과 동시 마차가 멈춰 섰다. 워낙 느린 속도로 달리고 있었던지라 별다른 충격은 없었지만, 그 의외성이 대공 부부를 놀라게 했다.

보통 귀족들이 행차할 땐 길이 막히지 않도록 아랫사람들이 나서 먼저 길을 뚫는다. 목적지에 다다르지 않은 이상 행렬이 멈출 일은 없었다. 하지만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은 목적지와 상이했다. 테리오드는 가까이 있는 기사에게 무슨 일인지 묻고자 창문을 열었다.

그때였다. 문틈 사이로 갈라진 외침이 끼어들었다.

“자비로운 대공비 전하! 소인의 억울함을 좀 들어 주시어요!”

테리오드와 아스티나의 눈이 동시에 마주쳤다.

* * *

제시는 어렸을 적부터 힘이 셌다. 운신이 가능할 무렵부터 열심히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렸다.

성징이 두드러지기 전 아이들은 대개 비슷한 외관을 띠는 법이다.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입은 옷 외에는 다른 점이 없었고 궁색한 형편에 그마저도 비슷한 편이었다. 여아일지라도 오라비의 옷을 얻어 입는 경우가 왕왕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제시는 사내아이들과도 잘 어울렸다. 골목대장이 되어 구역을 평정했을 때는 처음 맛보는 정복감에 가슴이 다 벅찼을 정도였다. 제시는 시장통 아이들의 우상 취급을 받으며 오랜 기간 군림했다.

정확히 말해, 가슴이 봉긋해지며 월경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함께 뛰놀던 여자아이들이 점점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일러졌고 종래에는 아예 무리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 뭣 모를 어린 나이도 아닌데 사내아이들과 어울리는 제시는 이상한 존재였다.

부모님이 걱정을 표했지만 제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찌 됐든 그녀는 무리의 대장으로, 특히 주먹을 휘두르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제시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제가 몇 명의 코피를 터트렸는지 아느냐며 으스대다가 아버지에게 종아리를 맞았다. 어쨌든, 남을 때리는 건 혼날 만한 일이었으므로.

부모의 시름이 깊어졌으나 제시는 절뚝대면서도 다시 골목으로 나갔다. 그리고 늘 그렇듯 저가 속한 무리와 다른 아이들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어른들이 보았다면 귀엽게 생각했겠으나 그들 사이에선 전쟁보다 심각한 자리싸움이었다. 상자를 가득 쌓아 놓은 길목은 아지트로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제시는 용맹하게 상대의 코피를 터트렸다.

‘이 계집애가! 뭐 이런 왈가닥이 다 있어?!’

계집아이에게 처음 얻어맞아 본 소년이 자존심이 상해 소리쳤다. 그의 위에 올라타 주먹을 휘두르던 제시가 생소한 단어에 의문을 표했다.

‘왈가닥?’

‘그래, 여자애가 집에서 인형 놀이나 할 것이지 왜 밖으로 나와선……!’

그 아이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제시의 거센 주먹질에 결국 기절했기 때문이다. 같이 놀던 무리는 그녀의 용맹함을 치하했으나 어른들의 사정은 달랐다.

제시가 신나서 집으로 돌아간 날 밤, 온몸에 멍이 든 소년이 부모의 옷깃을 잡고 찾아왔다.

제시의 부모님은 연신 고개를 숙여 보이며 적당한 치료비를 내주어야 했다. 제시는 저쪽이 먼저 ‘선빵’을 쳤다며 속된 말투로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들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를 늘 걱정스럽게만 보던 어머니가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제시, 제발 얌전히 좀 지내렴. 나중에 시집을 어떻게 가려고 그러니. 여관집 막내딸이 말괄량이에 사람도 패는 깡패라며 벌써 소문이 파다하다.’

결국 제시는 그 일로 골목대장 자리를 불명예스럽게 졸업했다. 오가며 인사를 나누던 아이들도 차츰 멀어졌다. 제시는 거리로 나서는 대신 어머니에게 낯선 자수와 바느질, 집안일을 배웠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나서는 부모님을 따라 여관 일을 도왔다. 접시가 가득 담긴 쟁반을 나르는 데는 남들보다 센 힘이 톡톡히 한몫했다. 제시의 팔근육은 지나갈 때 엉덩이를 툭툭 쳐 대는 취객에게 특히 유용했다.

단골들은 제시의 엉덩이를 노리려면 그 전에 금속 팬티를 챙겨 입어야 한다며 저들끼리 낄낄댔다. 제시는 한심하단 듯 눈을 흘기며 특히 거품이 많이 담긴 맥주잔을 내주었다. 어머니의 불안한 시선은 제시가 주먹 쥔 손을 뒤로 숨기게 하는 특효제였다.

사실, 그날 벌어진 일도 그런 별것 아닌 일상 중에 하나였다.

‘꺄악! 이러지 마세요!’

답지 않게 제시가 크게 비명 질렀다. 진상에 이골이 난 그녀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의 양아치는 치마 위도 아닌, 옷감 아래로 손을 넣어 왔기 때문이다. 이런 또라이는 또 처음이었다.

제시는 놀라움 반, 경멸이 반 섞인 눈으로 상대를 돌아보았다. 느끼한 쌍꺼풀이 짙게 져 부담스러운 인상의 남자가 더더욱 부담스럽게 입술을 핥았다. 그가 추행범답게 유들유들한 투로 발뺌했다.

‘거 내가 뭘 했다고 그러는 거야? 사람들이 오해하겠어.’

‘지금 제 엉덩이 만지셨잖아요!’

제시가 분개하여 소리쳤다. 상대는 사과하는 대신 일행들과 낄낄대기까지 했다.

‘만져 달라고 그렇게 씰룩씰룩대던 것 아니야? 크핫!’

하기야 말로 따져서 알아들을 인종이면 애초에 급사를 희롱하는 정신 나간 짓을 저지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태도는 그저 당당했다.

제시의 눈이 분노로 차게 식었다. 그녀는 천천히 소매를 걷어 올렸다. 저 남자에게도 단골들이 강조하는 강철 팬티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 줄 요량이었다. 그러나 제시의 어머니에겐 천만다행스럽게도, 곧 불의를 참지 못하는 기사 둘이 끼어들었다.

‘제시, 거기서 뭐 해. 나와!’

혹여 딸이 싸움에 끼어들어 사달을 낼까 걱정했던 어머니가 입 모양으로 소리쳤다. 제시는 잠시 망설이다가, 제 앞을 막아선 기사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피했다. 이리로 오라며 손짓하던 어머니가 앞에 다다른 제시를 재빨리 끌어안았다. 팔을 단단히 옭맨 손은 제시의 안위를 위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녀가 날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도움을 주는 기사님들이 있는데 굳이 나설 생각은 없어 제시는 잠자코 관망했다.

상황이 좋진 않았다. 제시를 추행한 양아치들은 다섯이나 됐고 도와주겠다고 나선 두 기사 중 하나는 취해 있었다. 헛발을 짚다가 발목을 잡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제시의 눈이 의심으로 흐려질 때쯤 전세가 급변했다.

처음엔 만담이라도 하려는지 이상한 말을 늘어놓던 두 기사는, 막상 싸움이 시작되자 눈빛을 달리했다. 제시는 단련된 무예가들의 손속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추행범들은 곧 무릎 꿇었고 잘생긴 금발의 기사는 사과를 종용했다. 험악한 남자들이 급격히 풀이 죽어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에 제시는 놀라 뒤로 물러섰다.

당황은 잠시, 곧 다시 화가 치밀었다. 강자 앞에서는 저리도 나약하게 굴 것이면서 여인을 조롱하는 데는 서슴없었다. 아마 제압한 것이 제시 쪽이었다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며 장사가 망해라 저주를 퍼부었을 것이다. 그 광경이 눈에 그릴 듯 예상이 되는 까닭은, 그것이 그녀가 실제로 겪어 왔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분도 힘으로도 상대가 되지 않자 그들은 순식간에 약자의 얼굴을 뒤집어썼다. 울화가 올라오는 듯했지만 제시는 애써 화를 내리눌렀다. 그녀가 최대한 차분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부탁이 있는데요.’

‘예?’

‘이놈들, 저도 때려도 괜찮을까요?’

금발의 기사는 당황한 듯했지만 곧 허락했다. 여자가 힘을 써 봐야 큰 문제가 되진 않으리라 판단한 듯했다. 불량배들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제시의 눈에 불이 붙었다.

‘이 양아치 새끼들, 쓰레기! 삥 뜯으면서 세금도 안 내는 버러지들!’

제시는 철저히 응징했다. 기사의 손속이 제압에 그쳤다면 그녀는 집요하게 느껴질 만큼 그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다. 피 튀기는 현장에 뒤에서 지켜보던 기사 둘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염려스러운 표정의 은인들과 다르게 제시는 보복을 걱정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골목대장 경력으로는 뒷골목 양아치쯤이야 한주먹으로도 상대할 수 있었다. 그날 제시는 오랜만에 두 다리를 뻗고 신명 나게 잠을 청했다.

문제는 그들이 보통의 불량배들이 아니었다는 데서 발생했다.

근방에서 보지 못했던 얼굴이라 제시나 부모님들은 그들을 그저 뜨내기들로 생각하고 있었다. 벨루아는 규모가 큰 영지였기에 여기저기서 흘러드는 이주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사건이 있었던 후 보복을 하러 돌아오기도 했지만, 제시는 어렵지 않게 그들을 모두 물리쳤다. 별 볼 일 없는 행색이나 마찬가지로 평범했던 주먹은 그저 그런 왈패에 불과했다. 만일 그들에게 뒷배가 없었다면 일은 그렇게 마무리됐을 터였다.

그런데 찾아오는 장정의 수가 점점 늘었다. 경비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상하게도 이 일을 유야무야 넘기려 했다. 분개한 제시에게 단골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속닥거렸다.

‘그놈들이 다른 영지에서 유명한 건달들이라는구만. 이번에 영주관 건조 문제로 영주님이 불러들였다고 허이. 공사가 끝나기 전까진 필요한 인력이니 아마 경비대가 손을 안 쓸 게야.’

어려움 모르고 자라난 귀족들이 대개 그러하듯, 벨루아의 영주는 그다지 인정이 없었다. 그는 낡은 영주관을 허물고 새로 지으며 규모를 확대하고 싶어 했다. 황무지도 아닌데 인근 땅에 주인이 존재하지 않을 리 없었다. 영주는 무력으로 그들을 밀어내고 터를 확장했다.

당연히 반발이 거셌다. 억울함에 공사 현장에 나와 농성하는 원주인들이 꽤나 귀찮았던 듯, 영주는 강경책을 썼다. 연장을 꼬나 쥐고 노려보는 깡패들의 등장에 앓는 소리가 쏙 들어갔다.

불량배들의 행패는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권력자가 뒤를 봐주니 무서울 것이 없었다. 상대가 별 볼 일 없는 여관집 딸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동료가 한낱 계집에게 얻어맞았다는 치욕에 그들은 하나가 되어 불타올랐다. 반복된 패배는 더더욱 독기를 품게 할 뿐이었다.

제시는 급사라는 직함에 비해 몹시 강했지만, 열댓이 넘게 몰려오는데 그녀라고 당해 낼 재간은 없었다. 횃불까지 들고 들이닥친 싸움패들이 여관에 불을 지르겠다 협박한 밤, 제시는 결국 도망쳤다.

영지민들의 어려움을 들어 줘야 할 영주는 사적인 일로 폭력배들의 편을 들었으며, 그 원인인 공사는 적어도 이번 년 안으로는 끝나지 않을 듯 보였다. 제시와 가족들에게 여관은 생계를 위한 터였다. 권위자의 부정이란 이런 식으로 사람을 나락까지 떨어뜨리곤 한다.

차라리 나서지 말 걸 그랬다며 뒤늦게 후회하는 제시에게, 어머니가 옷가지를 챙겨 주며 말했다.

‘네 엉덩이에 긍지를 가져라, 제시. 우리 집안 살림보다 비싼 부위다.’

‘그런 말 안 해도 내가 잘못한 거 알아. 진작 성질 좀 죽이고 살 걸 그랬지.’

‘글쎄, 그만큼 비싼 엉덩이라 엄마는 여관 문을 닫아도 별로 아깝지 않구나.’

제시는 알겠다고 대강 대꾸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그녀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제시는 황급히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심약했던 어머니가 장부처럼 제시의 팔을 퍽 소리 나게 두드렸다. 세월의 흔적이 밴 손은 굳은살로 마냥 단단했다.

‘왜 우니, 쟤들이라고 평생 저러겠어. 그냥 죽은 듯이 숨어 있다가 때 되면 돌아오렴, 알겠지?’

메인 목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제시는 고개만 끄덕였다.

제시는 얼마간의 금전을 가지고 아탈렌타에 기거하는 외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보는 손녀라 조부모는 퍽 다정했다. 낯선 타지방이었지만 제시는 마음을 놓고 편히 지냈다.

며칠간은 그러했다.

밤이 됐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뒤이어 벌어질 일도 모르고 두 다리 뻗은 채 잠들었던 그날의 일을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되짚었다. 제 엉덩이를 치고는 느물거리며 웃던 얼굴과 여관 문을 걸어 잠근 어머니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골목을 떠나 가업을 돕게 된 것은 분명 처음엔 원치 않은 일이었지만, 어쨌건 그건 그녀의 일이었다. 누가 뭐래도 제시는 푸른 나그네 여관집의 딸이었다. 그녀의 고향은 아탈렌타가 아니었다.

제시는 여기 있어서는 안 됐다.

‘아탈렌타의 대공비는 자비로워 본인을 독살하려 했던 하녀의 사정도 봐주었다고 했지.’

왜 하필 길을 가다 얻어들은 그 말이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제시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잠을 청하려 애썼다. 그러나 당연히도 새삼 수마가 몰려올 리는 없었다. 제시는 그날도 잠을 설쳤다.

다음 날, 제시의 사정을 알 리 없는 할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그녀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시장에서 야채와 과일을 사 오라며 바구니를 내주어, 제시는 졸린 눈을 끔뻑이면서도 밖으로 나섰다.

시장으로 향하는 길은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 제시는 연신 하품하며 바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그때 멀리서 상인들이 나누는 대화가 제시의 귀를 잡아끌었다.

‘이른 아침부터 무슨 행차야?’

‘대공 부부께서 납셨다는데. 왜, 요 며칠 기사들이 이 근방을 먼저 살피느라 떠들썩했지 않나.’

‘뭐? 그럼 저 마차가…….’

그 말을 내뱉은 상대와 같은 방향으로, 제시는 고개를 돌렸다. 과연 멀리서 봐도 휘황찬란한 마차 하나가 길 사이로 느리게 달리고 있었다. 그 주변을 호위하는 기사들의 위용이 눈부셨다. 그저 길을 지나고 있는 것뿐인데도 장대한 사열식처럼도 보이는 광경이었다. 모시는 주인에 대한 자부심으로 기사들의 눈이 반짝였다.

제시는 물끄러미 그 광경을 응시하다가 이내 등을 돌렸다. 그녀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심부름이나 마저 해야지.’

그러나 제시는 곧 뒤돌아서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생각보다 행동이 더 빨랐다.

제시는 그대로 마차 앞으로 달려들었다.

* * *

대공저는 아침보다 더 소란스러워졌다. 간 크게 마차 앞으로 뛰어들었던 여인을 대공비가 직접 저택으로 데려왔기 때문이다. 소식을 전해 들은 사용인들은 암살 시도인가 싶어 바짝 긴장했다가, 이내 안도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시해를 목적으로 달려들었다기엔 당사자의 행색이 몹시 볼품없었다. 연신 눈치만 살피는 여인의 모습은 동정까지 유발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는 가슴속에 품을 사감일 뿐이고, 어쨌든 공적으로 그녀는 감히 대공 부부의 앞에서 말썽을 피운 범인이었다. 여인에게 쏟아지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치도곤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대공비는 그녀를 알현실로 불러들이는 친절까지 베풀었다.

그 소식에 가장 대경실색한 건 히센이었다. 아탈렌타 기사단에 속하지 않은지라 소속이 애매했던 히센은 오늘 꼼짝없이 저택을 지켜야 했다. 느지막이 연무장에서 아서를 지도하던 히센은 이야기를 전해 듣자마자 아스티나에게로 달려왔다.

“아가씨,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으십니까. 제가 언제나 말씀드리지요. 안전, 또 안전!”

“나는 누누이 말하지, 자네는 그 잔소리를 고치지 못하면 노총각으로 늙어 죽을 거야.”

귀찮은 끼어듦에 아스티나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히센의 잔소리가 애정에서 기인한 것은 알았지만 어쨌든 쓴소리는 쓴소리, 듣기 좋을 리 없었다. 불만스러운 반응에도 히센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저 훈계를 늘어놓았다.

“아가씨가 강하신 걸 제가 모릅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 상식선은 지켜 주셔야지요. 기사들은 뒀다 뭐 하십니까, 차 끓여 드십니까? 모르는 이의 청탁은 일단 한 다리를 거쳐서 받으세요.”

자신이 사람을 끓여 먹게 생긴 관상이라도 되나. 이전에 아서가 했던 의심과 닮은 말에 아스티나는 피식 웃었다. 하여튼 주변 사람들이 더 극성이었다.

황제 시절에도 그녀는 대부분의 일에 직접 나서곤 했다. 마티나가 괜히 일 중독자로 이름을 날렸던 게 아니다. 그녀는 모든 걸 몸소 보고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사치하며 국고를 탕진하는 쪽이 훨씬 편하기야 했겠지만, 그런 삶이 체질적으로 맞지 않음에야 도리가 없다.

“히센…… 자네는 정말…….”

아스티나가 알현실로 들어서며 말꼬리를 늘였다. 그녀는 최대한 솔직하고 명료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로 했다.

“귀찮아.”

“전하!”

아스티나는 그를 무시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장소는 바뀌었지만 아까와 구도는 똑같았다. 아스티나는 자신 앞에 고개를 조아린 여자를 잠시간 내려다보았다. 왜 대공이 아닌 자신을 찾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가 마차로 달려들며 부르짖은 건 대공비였다.

그때 벌어진 일을 설명하자면 대략 이러하다.

‘자비로운 대공비 전하! 소인의 억울함을 좀 들어 주시어요!’

저를 부르는 음성에 아스티나는 잠시간 눈만 깜빡였다. 테리오드는 그녀를 대신해 창밖으로 손짓했다. 기사가 하명하라는 듯 가까이 몸을 붙였다.

‘무슨 소란이지?’

‘여인 하나가 마차 앞으로 달려들었습니다. 금방 치우겠습니다.’

기사가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햇볕에 그을린 것도 아닌데 남자의 뺨이 붉었다. 사랑받는 지주의 호위라 다소 느긋이 굴었던 게 실수였을까, 태만을 지적하듯 곧바로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주인의 성격이 온화하여 따로 질책을 들을 일은 없겠지만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였다.

‘저를 찾는 듯한데요.’

차분한 목소리에 시선이 아스티나 쪽으로 돌아갔다. 옷매무시를 정돈하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테리오드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나가 보려 그러십니까?’

‘영지민의 삶을 시찰하려고 나온 것이 아닙니까.’

아스티나가 태연히 긍정했다. 정말 저 무뢰한의 말을 들으려는 듯했다. 보통의 경우였다면 불경죄로 재판 없이 감옥에 넣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한데 그 탄원을 살피기까지 하겠다니. 조심성 없는 태도에 대공이 반사적으로 제지했다.

‘위험합니다.’

‘위험이요?’

아스티나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되물었다. 그에 테리오드는 아연해지고 말았다. 그도 대공비가 검술에 능통하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방금의 염려는 실상 의미가 없었다. 테리오드의 만류를 뒤로한 채 아스티나가 근엄한 음성으로 명령했다.

‘문을 열어라.’

대공의 눈치를 살피던 기사가 잠자코 말에서 내렸다. 아스티나는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 밖으로 내려섰다. 테리오드 역시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대공 부부의 등장에 길가로 몰려들었던 군중이 모두 허리를 숙였다.

아스티나는 느릿한 걸음으로 행군의 머리 쪽으로 다가갔다. 텅 빈 길목에서 갈색 머리의 여자 하나가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방만했던 행동에 비해 겁이 많은 듯 그녀는 연신 사시나무 떨듯 경련했다. 마차로 뛰어든 상대라고 이것이 중죄라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스티나는 그녀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주목했다.

아스티나가 말했다.

‘나를 불렀느냐.’

‘예, 예예. 전하.’

제시가 소스라치듯 놀라며 대답했다. 계산할 여유도 없이 몸부터 움직였던지라 막상 머릿속은 백지장이었다. 대공비가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러 나섰다는 것에 그녀는 몹시 놀란 상태였다. 겁에 질린 모습이 과연 위협이 될 것 같지는 않아, 테리오드는 마차에 기대서 상황을 관망했다.

‘그대는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는가?’

‘예? 예…… 송구합니다, 전하. 다만 말씀을 전할 길이 없어.’

‘대공저의 알현실은 시장 바닥이 아닐세.’

치죄의 말치고는 그 속에 분노가 없었다. 제시의 눈이 희망에 젖었다. 대공비는 손속이 자비롭다고 들었으니 잘만 하면 자신이 겪은 억울한 일을 해결해 줄 것도 같았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게 이야기책처럼 풀려 가지만은 않는 법이다.

‘저 여인을 억류하여 대공저로 이송하라. 이야기는 오늘의 일정을 끝마친 후 듣겠다.’

이어진 대공비의 말에 제시의 얼굴은 곧 굳어 들고 말았다. 곧바로 제시는 대공저까지 짐짝처럼 끌려왔다.

취급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여인이라고는 하나 기사들의 입장에선 대공 부부의 공식적인 첫 외출에서 말썽을 피운 무뢰한이었다. 말투는 퉁명스러웠고 이끄는 손에는 짜증이 배어 있었다. 덕분에 제시는 답지 않게 주눅 든 상태로 대공비의 귀환을 기다려야 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하라.”

하명이 떨어졌다.

아스티나가 굳이 그녀를 대공저로 불러들인 데는 이유가 있었다. 무슨 말을 할지도 모르는데 듣는 귀 많은 곳에서 이야기를 청할 수는 없었다. 저 여인의 청이 어떤 것이든, 혹은 대공비가 어떻게 결단 내리든 결국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아스티나는 예정대로 영지를 돌아본 뒤, 테리오드에게 뒷일을 맡겨 놓고 홀로 그녀를 만나러 왔다.

제시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하소연을 시작하려던 입은 그저 벙긋거림에 그쳤다. 그녀의 눈이 무언가를 발견한 탓이었다. 그리고 히센도 제시와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 히센이 제자리에서 펄쩍 튀어 올랐다.

“아니, 깡패 급사가 아닙니까!”

알 수 없는 소리에 아스티나가 히센을 돌아보았다. 히센이 곧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도 의외의 인물이라 그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스티나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는 자인가?”

“아, 그것이…….”

히센이 제 뒷머리를 긁으며 말끝을 흐렸다. 당연히도 히센은 제시를 기억하고 있었다. 벤자민과 여관에서 처음 만났을 적, 추행 사건의 피해자가 되었던 여자였다.

당시 많이 취해 있긴 했으나 불량배들을 제압하고 벌어진 일에 눈이 다 번쩍 뜨였던지라 기억이 생생했다. 히센으로서도 그런 재능 있는 주먹은 오랜만에 보았기 때문이다. 기술적으로 불량배들을 패던 발길질이 잊히지 않았다. 참으로 사람을 아프게 때릴 줄 아는 여자였다.

“기, 기사님……?”

히센을 알아본 제시 역시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취권을 선보였던 기사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이내 정신을 차린 제시가 다급한 어조로 외쳤다.

“대공비 전하, 기사님! 부디 소인을 도와주시어요!”

사건이 벌어질 때 함께 있었던 당사자가 대공비의 측근이라니. 제시는 희망에 차 속사포처럼 억울함을 쏟아 냈다. 물꼬를 튼 입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소상히 읊었다.

장정들을 무찔렀다는 이야기는 제가 생각해도 어색하게 들렸으므로, 제시는 꽤나 주먹을 썼던 과거 역시 조금 섞어 말해야 했다. 덕분에 두서없이 시작한 이야기는 생각보다 길게 이어져 그녀의 대략적인 인생사까지 늘어놓게 되었다.

어릴 적 사내아이들과 어울리며 패싸움을 했다는 말에, 히센은 그제야 그녀의 범상치 않은 괴력을 이해했다. 어린 여장부의 서사시는 꽤나 듣는 재미가 있어 입꼬리를 끌어 올리게 했다.

그러나 이어진 이야기에 히센은 곧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보복을 하러 돌아온 왈패들을 직접 물리쳤다는 말은 통쾌했으나, 그 이후로 벌어진 일들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영주가 직접 폭력배들을 끌어들여 영지민들을 압박한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가. 지주의 부덕한 행동 탓에 제시와 같은 상관 없는 이들도 피해를 입게 되었다. 명예를 모르는 영주와 수치를 모르는 사내들의 이야기에 히센의 기사도가 분노했다.

그리고 아스티나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게 전부인가?”

“예? 예…… 그렇습니다.”

제시가 얼떨떨한 어조로 대꾸했다. 이야기를 마치고 나니 얼굴이 다 화끈해져 있었다. 높으신 분 앞에서 할 말 못할 말을 다 쏟아 낸 것 같아 몹시도 민망했다.

아스티나는 무심한 낯으로 제시의 붉은 뺨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로서는 억울한 일이겠으나, 다만 그뿐이었다.

“나는 아탈렌타의 대공비일세. 다른 영지에 손을 쓸 수 있는 권한은 없어.”

아스티나의 말이 사실이었다. 카라벨라는 어디까지나 봉건제 국가였고, 영지에서는 영주의 말이 곧 법도였다. 설령 황제일지라도 명목이 없으면 함부로 사유지를 압박할 수 없었다.

하물며 아탈렌타는 일개 대공령이다. 황제 다음의 권위자를 말하기엔 지나친 폄하인 듯하나, 타 영지의 문제에 관해 손을 쓰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물론 아탈렌타의 권세는 강력하였으므로 굳이 그러고자 하면 다른 핑계를 들어 벌주지 못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아스티나가 처음 본 여자를 위해 그런 귀찮은 일을 무릅쓸 필요는 없었다.

지도자의 행동엔 언제나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아스티나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지엄하신 대공비 전하께서…….”

제시가 더듬더듬 말했다. 안쓰러운 모습이었으나 이번에도 아스티나의 대답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굳이 타 영지와의 마찰을 감수해 가며 그대를 도우란 말인가? 일개 여인 하나를? 수지가 맞지 않네.”

제시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마지막 희망이라 생각하여 떨리는 마음으로 대공비를 찾았는데, 돌아온 건 싸늘한 거절이었다. 품었던 기대가 산산이 부서졌다. 몸을 바들바들 떠는 제시 위로 아스티나가 냉정히 통고했다.

“그 사연조차 믿지 못하겠군. 어찌 일개 시장 아낙이 장정들을 이긴단 말인가?”

그 말에 히센은 당황했다. 언제나 어질던 스승님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무례를 저지른 건 분명 잘못이나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을 이렇게까지 몰아세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

히센은 제시가 휘두르는 주먹을 실제로 보았으므로, 그녀의 말이 거짓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제 말의 진위를 의심당한 제시 역시 억울한 표정이었다. 히센이 조심스럽게 말을 덧대었다.

“전하, 아마 사실이 맞을 겁니다. 그녀의 말대로 제가 바로 그 자리에 있었지 않습니까. 벤자민 경과 제가 보복은 생각 말라며 직접 주의를 남기기까지 했지요. 영주라는 뒷배가 있어 먹히지 않았나 봅니다만…….”

“자네가 보장할 정도인가?”

“힘이 아주 좋은 아가씨더군요.”

히센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한참 물끄러미 제시를 응시하던 아스티나가, 의외의 말을 꺼냈다.

“히센 경, 그녀에게 검을 주어.”

“예?”

“히센 경을 한 합이라도 당황하게 한다면 내 그대의 말을 믿지. 만약 사실이 아닐 경우엔 감히 거짓을 고한 죄로 치도곤을 당할 것이야.”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놀랐다. 당연히도 반응이 가장 거센 건 제시였다. 기사와 검을 맞대라니, 그것이 말이나 되는가. 졸지에 넝마가 되어 내쫓기게 생긴 그녀의 손끝이 하얗게 물들었다.

일이 잘 풀린다 하였더니 그녀에게 찾아든 건 그저 암울한 미래였다. 그렇다고 부당하다며 따지고 들 수도 없었다. 대공비가 조금만 더 민감하게 굴었다면 애초에 마차에 달려들었던 그 자리에서 당장 목이 잘렸을 것이다.

히센은 허리를 더듬어 검집을 풀었다. 천천히 제시에게로 걸어간 히센이 검을 내밀었다. 제시는 떨리는 몸을 채 진정시키지도 못했다. 그녀가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원치 않은 친절에 제시가 파리한 얼굴로 감사를 전했다.

“가, 감사합니다…….”

히센의 가보가 제시에게 돌아갔으므로, 히센은 대신 아스티나의 검을 들었다. 일전에 벤자민이 선물해 주었던 가벼운 아밍 소드였다. 제시의 체격을 생각하면 이 검을 내어 주는 편이 나았을 것이나 대공비의 물건을 일개 평민에게 함부로 넘길 수는 없었다.

히센은 느슨하게 손잡이를 쥐었다. 반사 신경이나 힘이 좋은 여인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범인의 기준에서였다. 히센은 단련된 기사였고 그가 제시를 이기지 못할 리는 없었다. 아마 눈을 감고서도 그녀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그냥 죽으라는 소리잖아.’

히센과 같은 생각을 한 제시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기껏해야 맨손으로 싸워 봤을 뿐, 진검을 쥐어 본 적도 없었다. 히센이 빌려준 무기는 몹시 무거워 제대로나 휘두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먼저 오도록 해라.”

망설이던 히센이 배려하듯 말했다. 대공비가 지켜보고 있는데 더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제시는 눈을 질끈 감고 히센에게 달려가 검을 휘둘렀다.

움직임은 빨랐으나 그뿐이었다. 온갖 데서 보이는 허술함에 히센은 어렵지 않게 검신을 쳐 냈다. 제시는 당황하여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덕분에 히센은 다소 놀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응당 놓치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그럭저럭 제 생명줄을 잘 사수하고 있었다.

히센은 자연스럽게 궤적을 틀어 가로로 베었다. 탁월한 반사 신경 덕에 제시는 간신히 검을 앞으로 내밀어 방어해 냈다. 그러나 히센이 기술적으로 힘을 쓰자 곧 손잡이를 놓쳤다.

“앗……!”

히센의 가보가 처량하게 날아갔다. 제시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평소라면 기사도를 아는 히센이 위로를 건넸을 것이나 이번만은 그럴 정신이 없었다. 히센은 아스티나의 검을 여미고는 쏜살같이 달려가 제 물건의 안위를 확인했다.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아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기본이 없군.”

제시가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제시는 땀에 젖은 손으로 치맛단을 말아 쥐었다.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지만 두려움은 어쩔 수 없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시험을 거친 대가로, 그녀는 곧 만신창이가 되어 내쫓길 것이다.

벌이 없이 어찌 남은 겨울과 봄, 그리고 여름과 가을을 날까. 제시는 공사가 끝나고 왈패들이 사라지기까지의 기한을 애써 가늠해 보았다. 모아 둔 돈이 없지는 않으나 가족들의 생활은 곧 궁핍해질 것이다. 모두 그녀의 과오였다.

어쩌면, 어머니가 당부했던 대로 성질을 좀 죽이고 사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여자답게 비명이나 좀 지르는 것이 그녀가 해야 했던 반항의 전부였을 수도 있다. 후회로 코끝이 아려 오는 듯했다.

제시의 주눅 든 어깨를 보며, 아스티나는 퍽 용맹했을 그녀의 어린 모습을 상상했다. 그때의 소녀는 소년들 사이에서도 당당했을 것이다. 무엇이 그녀가 자랑스럽게 여기던 것들을 후회하게 만들었을까.

왈가닥이라 불리며 자랐다는 제시와 언제나 좋은 신붓감이라 칭찬받던 칸나는 뿌리부터 달랐음에도, 아스티나는 지금 이 순간 언니의 나긋한 음성을 떠올렸다.

‘원래 귀족 영애의 결혼은 다 이런 거야.’

아스티나는 칸나가 말하는 레이디의 의무가 그녀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사내아이들과 어울리며 매번 혼이 났던 제시는, 제 언니와 다르게 행복했나?

레이디라는 군상의 정점에 선 대가로 칸나는 아탈렌타와의 혼사를 받아들였다. 칸나의 명예는 가장 중요한 때에 그녀를 죽음으로 매몰시키려 했다. 그럼에도 제시 같은 규격 외의 여자들은 칸나가 가진 여성성을 강요당했다.

아스티나는 생각했다. 모범적인 레이디와 수선스러운 말괄량이, 희고 가는 손목과 부끄러이 여겨지는 거친 손, 여자다운 여자와 여자임에도 여자가 되지 못한 그녀들,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하지만 힘이 있어. 사물을 보는 눈도 아주 좋아.”

이어진 대공비의 말에 제시는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알현실로 들어섰던 내내 무표정했던 대공비가 미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것이 말하는 바를 알 수 없어 제시는 그저 혼란스러웠다.

“타지방의 영지민을 돕는 것은 도무지 수지가 맞지 않지만…… 내 기사라면 또 모르겠군.”

제시의 눈이 커졌다. 대공비의 목소리는 분명하여 말하는 바가 분명했으나, 막상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시가 더듬더듬 되물었다.

“예, 예?”

“나를 보필하여 주인으로 삼겠나?”

“제가…… 제가 기사가 될 수 있다고요?”

“그대는 기본기가 없어. 지금 이 상태론 종자 자격도 얻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얼마간의 훈련을 마치면 그대가 좋은 검술을 보여 줄 것이라 확신해.”

제시의 힘은 분명 접시를 나르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됐을 것이나, 아스티나는 그것이 더 유용하게 쓰일 데가 있다고 생각했다. 제시가 훈련받은 기사를 이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스티나가 이 시합을 주선함으로써 보려 한 건 가능성이었다.

‘가르친 것이 없으니, 배운 것도 없을 테지.’

레타 집시들은 싹이 보이는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검을 가르친다. 마티나도 그렇게 검을 들었지만, 지난 생에는 왕들을 베느라 바빠 막상 후학은 찾지 못했다. 한결 느긋해진 지금 미처 못해 본 일들을 해치워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검을 배운다고?’

제시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자문했다. 억울함을 고하고자 찾아온 것인데 기대치도 않던 검술의 길이 열렸다.

기사는 고급 인력이기 때문에 시험을 치는데 신분을 가리지 않는다. 통과할 만한 실력을 쌓으려면 상당한 노력과 금전이 뒤받쳐져야 하기 때문에 기사도는 대개 귀족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나, 아예 평민에게 문이 닫혀 있는 건 아니었다. 평민이 귀족이 될 수 있는 방법은 기사 시험이 유일하다고 봐도 좋았다. 본인에게만 머무는 반쪽짜리 작위나마 귀한 기회였다.

그러나 제시에겐 아무도 그런 말을 해 주지 않았다. 누구도 그녀에게 검을 배워 보겠느냐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쏟아진 조언은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일을 도우라는 것뿐이었다.

제시가 대답했다.

“할게요.”

그리 내뱉어 놓고서 제시는 스스로의 목소리에 몹시 당황했다. 분에 넘치는 자비라며 모두가 자신을 욕할까, 제시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히센은 그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아스티나에게 검을 배운 당사자가 그녀의 검술적 견해에 반론을 제기할 수는 없었다. 곤란한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대공비를 향한 시선에선 애정이 묻어났다.

“하겠습니다.”

제시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녀가 이전보다 분명해진 음성으로 반복해 말했다. 차오른 포부가 그녀의 허리를 세우게 만들었다.

아스티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네 이름이 뭐지?”

“제시입니다.”

“좋아, 제시. 충성스런 신하로서 대공가에 들어와 배움에 힘쓰도록 해라.”

“예, 대공비 전하.”

제시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스티나는 말끝을 늘이며 제 턱 밑을 간질였다.

“그리고…….”

눈빛엔 온통 장난기가 가득했다. 조금 전까지의 모든 흐름이 이 결론을 위해서였다는 듯, 그녀는 배부른 음성을 내었다.

“신하의 모욕을 갚는 것은 주군의 일이지.”

아스티나는 기꺼이 제시의 복수를 대신해 줄 명분을 얻었다.

* * *

‘제시의 기본기는 자네가 대신, 아주 잘 다져 주리라 믿네.’

대공비는 무척이나 바쁜 직함이었으므로, 당연히 제시는 히센에게 인도되었다. 히센은 기사이고 기본적으로 군 집단은 상명하복이 원칙이다. 거스를 수 없는 윗분의 명령에 히센은 남몰래 울었다.

젊은 나이에 제자를 둘이나 받게 된 히센은 식사를 하지 않았는데도 배가 다 불렀다. 물론 실상 그의 배 속에 찬 것은 헛헛한 공기였지만, 스승에게 내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동안 배움받은 은혜가 있는데 그녀가 인도한 제자를 받기 싫다며 입을 씻을 수는 없었다.

‘말년에 제자들이 보내는 명절 선물 정도는 풍족히 받을 수 있겠지.’

히센은 그리 마음을 가다듬었다.

하기야 이미 아서라는 혹이 달린 상태에서 새 제자가 들어오는 게 무슨 대수일까. 새삼 대공의 사촌이랍시고 나름대로 아서를 존중했던 순진한 과거가 떠올랐다. 아서라는 인간을 직접 몸으로 겪으며 히센은 그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고쳐먹게 되었다.

생각이 바뀌자 행동이 바뀌는 건 더 쉬웠다. 지도해야 할 일개 제자일 뿐이라 스스로를 세뇌하며, 히센은 아서를 열심히 밟아 눌렀다. 상대가 워낙 말썽쟁이였던 통에 사자의 탈을 뒤집어쓰지 않고서는 훈육이 불가능했다.

히센은 ―누누이 말하듯― 밀크티 같은 매력의 따사로운 사내였으나, 상대에 따라서 태도를 바꿀 줄도 알았다. 덕분에 아서는 요즈음 주기적으로 히센에게 얻어맞으며 미약하게나마 인간의 사회성을 길러 나가고 있었다. 기사 희망생이라기엔 제시의 성별이 좀 낯설긴 하나, 적어도 그 탕아보다는 훨씬 나으리라.

‘누군들 그 건방진 도련님보다야.’

히센은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제시를 기사단 숙소로 안내했다. 연무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종자들이 기거하는 허름한 건물이었다.

“뭐야?”

“뭐, 머리 좀 치워 봐. 누가 새로 왔어?”

“아아악! 여자다!”

금녀의 구역에 등장한 제시의 모습에 웃통을 벗고 돌아다니던 종자들이 황급히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규모가 큰 아탈렌타 기사단에 새 사람이 들어오는 건 낯선 일이 아니다. 유난히 반응이 거센 건 제시의 성별 때문이리라.

카라벨라에 여기사가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대개 고귀한 아가씨들의 밀착 호위를 위해 들인 말동무 정도의 위치였다. 아스티나는 제시를 그런 한정된 용도로만 키울 생각은 아닌 듯 보였지만, 뭣 모르는 남들 눈에 그렇게 비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공비가 직접 들인 여자라는 말에 종자들은 예시의 경우로 수긍하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여기를 쓰면 되겠구나.”

히센은 시종의 안내를 받아 그녀에게 다른 종자들과 층수가 다른 방을 내주었다. 그녀가 머물 곳은 주방과 식재료 창고, 병기 등을 보관해 두는 1층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제시는 종자 신분조차 아니었기에 이 건물에 들이기도 애매했지만, 그렇다고 하녀들이 기거하는 숙소로 안내하는 건 더더욱 안 될 말이었다. 생활 공간을 분리하는 게 안전 문제상 낫긴 해도 필시 뒷말이 나올 터였다.

특별 대우를 하는 순간 그녀가 그들 무리에 섞여 들 수 없는 존재라고 모두에게 인식시키는 꼴이 될 것이다. 제시가 이곳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는 되도록 기존의 무리 사이에 스며야 했다.

“식당은 저쪽이다. 보통 종자들은 모시는 기사들이 나오기 전에 먼저 일어나 무구를 닦아 두지만, 너는 내 종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럴 필요는 없다. 다만 새벽 훈련이 있으니 여섯 시까지 연무장으로 나오도록 해.”

그리 말하며 히센은 제시에게 특별히 더 단단한 자물쇠를 선물했다. 아탈렌타 기사단이 주인의 명예에 누를 끼칠 일을 저지르리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게다가 그게 해 줄 수 있는 특별 대우의 전부임에야.

제시가 열쇠를 받아 들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기사님.”

“앞으론 스승님이라고 불러라. 말썽쟁이 첫째 제자도 그리 부르니 호칭은 통일하는 게 좋겠다. 수업 때 빼고는 히센 경이라고 불러도 좋고.”

“다른 제자 분도 있으세요?”

“애석하게도.”

히센이 우울한 표정으로 답했다. 제시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그녀는 스승의 아픈 곳을 파고드는 대신 자신에게 주어진 새 환경으로 관심을 돌렸다.

원래 숙소로 쓰이던 층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방의 본 용도는 작은 창고였다. 쌓인 낡은 짐을 들어내자 그럭저럭 머물 만한 공간이 나왔다. 꽤 집요히 청소하긴 해야겠지만 제시는 이곳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제시는 들뜬 마음에 먼지 가득한 실내로 뛰어들었다. 여닫이창을 열자 공중을 떠다니던 흰 분진들이 어느 정도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게 꿈은 아닌가?’

제시는 창가로 내다보이는 한가로운 풍경을 보다, 덜컥 겁에 질렸다. 뒤늦게 불안감이 끼어든 탓이었다. 부모님에게 따로 말하지 않고 제멋대로 정한 행선이라 마음이 불안했다.

아탈렌타의 기사가 되기 위해 수련하겠다고 하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저잣거리를 쏘다니던 어린 제시를 애써 집 안으로 들였던 분들이니 좋은 반응이 예상되진 않았다. 그러나 제시는 좀처럼 얻기 힘든 기회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컸다. 자신의 기질을 인정해 주는 사람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방이 마음에 드나 보구나.”

히센이 친절하게 웃으며 말했다. 꿈에 부푼 모습을 보니 그로서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상냥한 응대에 제시가 얼굴을 붉혔다. 혹 히센이 자신을 억지로 떠맡은 짐으로 생각할까 내내 조마조마한 걸음으로 따라왔기 때문이다.

걱정을 버리자 새삼스럽게 히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전엔 취한 모습만 보아서 몰랐는데, 근무 중인 히센 경은 객관적으로 무척 멋진 기사님이었다. 각이 잡힌 움직임이나 말끔한 미소는 술 냄새를 풍기며 흐느적거리던 모습과 확연히 달랐다.

제시가 더듬더듬 방이 무척 마음에 든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 할 때였다. 어디선가 건방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부! 왜 안 와요! 땡볕에 말라 죽는 줄 알았는데!”

껄렁한 걸음걸이 탓에 특히 더 불량스럽게 보이는 소년이었다. 히센의 가까이로 다가온 아서가 방 안으로 흘긋 시선을 주었다. 대공비 전하를 뵙겠다며 사라진 스승이 한참 돌아오지 않아, 아서는 물어물어 히센의 행방을 찾아온 참이었다.

“얜 또 뭐야.”

따로 종자가 없는 히센이 왜 여기를 찾아왔을까 의문이었는데, 그가 지키고 있는 방문 속 낯선 여자를 발견하자 더더욱 아리송한 기분이 되었다.

아서가 가느다란 눈으로 제시를 흘겼다. 아서는 방만한 소년이었으므로 예의 없는 말을 하는 데도 주저가 없었다.

“스승님 애인?”

“쿨럭!”

히센이 거칠게 헛기침을 터트렸다. 이곳까지 오며 통성명한 바로, 제시의 나이는 고작 스물이었다. 서른둘의 히센과는 까마득한 나이 차다. 그 긴 세월을 상기하자 아서의 추측이 더욱 어이없게 느껴졌다.

세상에, 히센이 스무 살 어엿한 성인일 때 제시는 고작 여덟 살이었다!

소아성애자 취급이라도 받은 것 같아 히센은 급격히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아서가 생각 없이 말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다. 면역이 생긴 히센은 그저 조용히 정정해 주었다.

“인사해라, 아서. 앞으로 너랑 같이 수련을 받을 제시 양이다.”

“예?”

아서의 얼굴이 구겨졌다. 제시는 눈치를 보며 창문을 떠나 히센과 아서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가까이서 제시의 얼굴을 확인한 아서가 더욱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검 한 번 안 잡아 봤을 듯 보이는 말간 얼굴의 계집이었다.

제 수준까지 같이 아래로 끌어내려진 기분에 아서가 눈에 띄게 씩씩대었다. 제시의 발길질을 목격하기 전 히센과 벤자민이 착각했던 대로, 그녀는 제법 청순한 외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뭐 이런 애가……!”

아서는 반사적으로 성을 내다 말고 멈칫했다. 자신이 누구에게 져서 히센의 밑으로 들어왔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새로 들어온 이 여자는 대공비와 같이 숨겨진 실력의 소유자일 수도 있었다. 아서의 눈이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아서는 그를 시험하고자 대뜸 제시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처음 보는 사람이 대뜸 공격을 할 줄은 몰라 제시는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아서는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손을 멈추었다.

“뭐야, 못 피하는데?”

아서가 얼빠진 얼굴로 히센을 올려다보았다. 히센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아서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예의는 어디다 팔아먹었냐.”

“아, 아파!”

아서의 눈앞이 번쩍였다. 아서가 억울한 얼굴로 항의했다.

“그만 때려요! 머리 나빠진다니까!”

히센은 다시 손을 휘둘렀다. 머리에 든 게 없어서인지 유난히 울리는 소리가 청아했다. 히센은 앓는 소리엔 신경도 쓰지 않고 아서의 귀를 잡아당겼다.

“제시, 인사해라. 안타깝게도 네 선배가 될 아서 에스테반이다. 아서, 너도 얼른 인사해.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잘 지내라.”

“싫어요!”

아서가 재차 반항했다. 히센은 말없이 그의 귀를 잡아당기던 손에 힘을 주었다. 피로한 얼굴과 달리 힘만은 귀를 뜯어 버릴 듯했다. 아서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 질렀다.

“아, 악!”

제시가 무심코 풉, 웃음을 터트렸다. 먼저 들어왔답시고 무게를 잡더니 히센 경에게 혼나고 있는 모습이 퍽 통쾌했다.

비웃음당했다는 생각에 아서의 얼굴이 벌게졌다. 몇 번 저지른 큰 장난에 히센이 학을 뗀 이후, 그에 비례해 아서를 대하는 태도도 점차 격해졌다. 그렇게 이른 게 이 지경이다. 스스로의 업보라 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슬쩍 테리오드에게 언질하기도 했지만 사촌 형은 허허 웃으며 많이 배워라 덕담만 남겼다. 애초에 소용없을 걸 알아서 대공비 쪽으로는 운도 안 떼었다. 그녀가 히센의 편을 들면 들었지 자신의 편을 들 일은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아서에게 급격한 외로움과 배신감이 파고들었다. 새로 들어왔다는 후배 앞에서 얻어맞기까지 하다니. 어딜 가나 구박데기인 신세가 처량했다. 그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난 이 계집애 후배로 인정 못 해!”

난데없는 적의에 제시도 얼떨떨함을 벗어던지고 아서를 마주 노려보았다. 초면에 주먹을 휘두르더니 이젠 말도 안 되는 억지까지 쓰고 있다.

“누가 할 소리, 선배가 선배답게 굴어야지 대접을 해 주지!”

제시의 날카로운 반박에 아서는 더 위풍당당하게 소리쳤다.

“야, 너 이름 뭐야. 너 어디 가문이야!”

그 물음에 제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대공비의 자비에 취해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평민이 기사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높은 확률로 저 소년은 귀족 출신이리라.

상대가 계급장을 들고 오자 제시의 자신감은 자연스레 졸아붙었다. 대답하지 못하는 제시의 모습에 아서는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왜 대답을 못 해?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말이야―”

아서가 신나서 제 소개를 늘어놓으려는데 히센이 냅다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아서는 얼결에 고개를 숙였다. 뒤통수에서 올라오는 아픔에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서가 입을 벙긋이며 서럽게 말했다.

“또, 또 때렸어……!”

“내 배움 아래에 신분 같은 거 없다. 둘이 같이 말 놓든지 아니면 같이 존대해라. 그래야 싸움이 안 날 것 같으니까.”

또 얻어맞을까 싶었는지 아서는 이번엔 눈빛만으로 제시를 노려보았다. 스승 아래서는 동등하리라는 선언에 제시도 나름 자신감을 얻고 그 시선을 받아쳤다. 그러나 아직 계급장 앞에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으므로 아서보다 눈은 더 자주 깜빡였다.

제시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열심히 수련해서 내 기필코 저놈만은 이기리라.’

아서도 눈을 부라리며 다짐했다.

‘에스테반가의 미친개를 물로 보다니. 엉엉 울려서 내쫓아 주지.’

서로를 향한 적의가 분명하여 히센은 속으로 생각을 정정했다.

‘중간에서 내가 뭘 어쩌든 싸움은 나게 생겼군.’

히센의 시름은 오늘도 깊어졌다.

* * *

아스티나는 한 번 계획한 일은 잘 미루지 않는 성격이었다. 당연한 이치로, 제시의 복수를 그리 뜸 들여 해치울 생각은 없었다. 아스티나는 바쁜 업무를 우선적으로 처리한 뒤 시간이 비자마자 계획에 착수했다. 그 첫 단계로, 아스티나는 우선 변복을 하고 몰래 대공저를 빠져나왔다. 짐꾼이라기엔 지나치게 고급 인력인 남자를 옆에 달고서.

“날이 무척 좋군요.”

테리오드가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로브를 뒤집어썼음에도 그 웃음이 눈부셔 시선을 끌었다. 근처를 지나가던 지긋한 인상의 부인 둘이 걸음을 멈춰 세우고 떡하니 입을 벌렸다.

후드 덕에 은발이 드러나지는 않아 대공임을 알아본 건 아닌 듯했지만, 그래도 얼굴을 내보여 좋을 것은 없었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에게 손을 뻗어 모자를 더 깊이 씌워 주었다. 테리오드의 눈에 얼떨떨한 빛이 스치자 아스티나가 짧게 경고했다.

“대공, 덜 예쁘게 웃으세요.”

“예?”

아스티나의 황당한 당부에 테리오드가 어이없는 얼굴로 되물었다. 아스티나는 눈짓으로 아직까지 제자리에 서서 속닥이고 있는 아낙들을 가리켰다.

“굉장히 눈에 띄십니다.”

“아……, 하하. 예, 유념하지요. 덜 예쁘게.”

테리오드가 사람 좋게 웃으며 옷감을 코밑까지 잡아당겼다. 대공을 특정할 수 있을 만한 부분들이 완전히 가려졌다.

“말도 잘 들었으니, 이제 설명을 좀 들을 수 있을까요.”

사실 아스티나가 처음부터 대공에게 함께 외출할 것을 청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너무 당연하게도 옷을 챙겨 입고 홀로 저택을 나왔다. 정문으로 향하던 중 마침 테리오드와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조용히 저택을 벗어났을 것이다.

‘부인, 아침부터 어딜 가십니까?’

아스티나의 차림을 보고 테리오드의 표정이 묘해졌다. 얼굴을 보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사용인으로 생각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아스티나가 걸친 녹색의 펑퍼짐한 로브는 실제로 하녀들이 외출할 때 걸치는 외투와 비슷했다.

‘남모르게 나가 볼 일이 있습니다.’

‘남모르게요?’

은밀한 외출이라기엔 시간이 무척 일렀다. 귀족들의 신분을 숨긴 마실은 보통 어스름한 저녁에 이루어지지 않던가. 아스티나의 뒤를 흘긋 살핀 테리오드가 날카로운 지적을 던졌다.

‘호위는 두지 않으십니까?’

‘그럴 만한 일은 아닙니다.’

‘그럴 만한 사람이시라는 게 문제죠. 보는 눈이 불편하시다면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대공비가 호위도 없이 나가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테리오드 역시 그녀의 무위를 듣고 보았으므로 그리 걱정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대공이 내건 타협안에 아스티나는 수긍했다. 딱히 그에게 숨겨야 할 일도 아니었다. 이 계획엔 대공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예정이었다. 그녀가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가면서 설명해 드리죠.’

잠시 후, 비슷한 차림을 한 테리오드와 함께 아스티나는 저택을 빠져나왔다. 다른 이의 눈에 띄지 않고 무사히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으니 이제 설명을 들을 차례였다. 테리오드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 조심스럽게 구시니, 목적지가 어딘지 무척 궁금해지는데요.”

“옷을 사러 갑니다.”

아스티나가 짧게 대답했다. 생각지 못한 말에 테리오드가 의문 어린 음성을 내었다.

“재단사를 부르시면 될 일 아닙니까?”

“귀한 물건을 사려는 게 아닙니다.”

아스티나는 상점가가 몰려 있는 길목에서 멈춰 섰다.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던 그녀가 한 가게로 곧장 걸음했다. 테리오드는 앞장서는 아스티나를 뒤따르다 말고, 잠시 멈춰 서 간판을 살폈다.

[아실리의 의상실]

인테리어나 애매한 규모를 보면 대공비의 눈에 찰 정도로 대단한 물건을 파는 곳 같지는 않았다. 그녀가 굳이 변복까지 하고 찾을 정도면 차별성 있는 고품질의 상품을 팔아야 하지 않겠는가.

혹 안에 놓인 상품들은 다른가 하여, 테리오드는 잠자코 안으로 발을 들였다. 먼저 가게에 들어선 아스티나가 걸려 있는 옷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로 다가갈수록 테리오드는 더더욱 의문스러워졌다.

아스티나가 보고 있는 건 꽤나 휘황찬란한 디자인의 블리오(bliaud)였다. 흔하디흔한 튜닉을 굳이 몰래 나와서 살 필요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대공저야말로 온갖 귀한 것이 지천에 널린 보고이거늘.

장식이나 사용한 옷감 등이 꽤나 값나가 보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통 사람들의 기준에서였다. 좋은 것 중에서도 월등히 더 좋은 것만 향유하고 살아온 대공은 쳐다도 보지 않을 수준의 옷이다. 게다가 대공비가 집어 드는 건 하나같이 어디 한 군데가 조악하거나 유치해 보였다.

“이걸 사시려고요?”

테리오드는 대공비의 취향이 그리 저렴하지는 않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질문하는 목소리가 몹시 미심쩍었다.

“네, 아주 마음에 드네요.”

그러나 아스티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아스티나가 지나친 자리에 서 흘깃 가격표를 살펴본 테리오드는 더더욱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그가 비싸다고 생각할 만한 가격은 아니었으나 옷의 수준에 비해서는 확연히 더 값이 나갔다. 테리오드가 보기에 이 가게는 거의 착복을 하고 있는 수준이었다. 아르델 준남작이 열심히 해 먹었던 수도 공사처럼 내실은 엉망이되 돈은 배로 든다.

아스티나가 옷 두 벌을 집어 들고는 테리오드에게 내보였다.

“둘 중 어느 게 나은지 골라 주시겠어요?”

테리오드는 그만 침음할 뻔했다. 그는 침착을 되찾으려 애쓰며 손을 들어 제 뺨 위로 덮었다. 반쪽짜리 마른세수를 하던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꼭 그중에 골라야 합니까?”

테리오드의 시선이 슬그머니 다른 매대 쪽으로 향했다. 그나마 얌전해 보이는 옷들이 걸린 곳이었다. 그의 심미안을 괴롭히는 저 끔찍한 흉물보다는, 그나마 저것들이 훨씬 나을 듯했다.

“어서 오세요, 손님. 마음 편히 둘러보세요.”

그때 방금까지 보이지 않던 점원이 등장했다. 손님이 없는 이른 시각이라 창고 정리라도 하고 있었는지 틀어 올린 머리칼이 부스스했다. 아스티나와 테리오드에게로 다가온 점원이 과장스럽게 손뼉을 부딪쳤다.

“어머, 남편분과 함께 오셨나 봐요? 부군께서 다정하기도 하셔라.”

그러고는 한껏 입술을 끌어 올려 그들 부부를 칭찬했다.

“아침부터 선남선녀가 방문해 주셨으니 오늘 하루 운이 좋겠어요.”

얼굴은 잘 보이지도 않는데 아부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바깥이면 몰라 굳이 모자를 쓸 필요가 없는 실내였다. 수상하게 보일 것이 분명한데 점원은 그다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부인, 정말 잘 어울리세요. 물론 어떤 옷이든 다 잘 어울리실 것 같지만요.”

응대는 분명 상인답게 매끄러웠으나 테리오드는 저 옷들이 잘 어울린다는 말이 과연 칭찬일지 알 수 없었다. 아스티나가 들고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경박해 보였기 때문이다.

“테오, 어떤 게 나아요?”

아스티나의 물음에 테리오드는 잠시간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다정했다. 시선을 돌려 그녀를 보았으나 반쯤 가려진 얼굴 탓에 표정을 살필 수는 없었다.

하기야 점원이 듣고 있는데 대공이라 깍듯이 칭할 수는 없을 것이다. 테리오드는 이전에 가신들을 상대할 때처럼, 아스티나가 상황에 따라 태도를 달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실제로 그녀는 이러한 연기에 별로 감흥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테리오드도 그녀처럼 초연할 수만은 없었다. 애칭을 불리는 일이 몹시도 낯설었다. 테리오드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제 입가를 감쌌다. 턱을 감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테리오드는 조금 뒤에야 덮어쓴 후드 탓에 서로의 얼굴을 잘 들여다볼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인지했다. 그제야 침착함을 되찾은 테리오드가 손끝으로 겨우 왼쪽을 가리켰다.

“왼쪽이…… 낫습니다, 티나.”

‘그나마’라는 말을 힘겹게 생략한 테리오드가, 굳이 그녀의 애칭을 입에 담으며 답했다. 지난번 이름을 줄여 부르는 일로 작은 말다툼을 벌였던 게 생각났다. 벽을 세우는 모습에 기분이 상하긴 했으나, 대공은 그 이후로 굳이 그녀를 ‘티나’라고 부른 적은 없었다. 테리오드는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을 알면서도 행동하는 수준 낮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녀를 티나라고, 한 번 정도는 친근하게 불러 보고 싶었다. 사감을 끌어온 기분이라 테리오드는 괜스레 겸연쩍어졌다. 스스로의 행동에 본인이 다 곤혹스러워, 이어진 아스티나의 끔찍한 주문을 말리지 못할 정도로.

“이것으로 할게요. 비슷한 색의 망토도 보여 주시겠어요? 최대한 레이스가 많이 붙은 것으로.”

아스티나는 눈 깜짝할 새에 계산까지 마쳤다. 둘은 곧 나란히 가게 밖으로 나왔다.

왕년에 사교계에서 휘날렸던 트렌드 리더, 테리오드는 한없이 꺼림칙한 기색으로 제 손에 들린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아내에게 짐을 들게 할 수는 없어 대신 떠안은 것인데 이 안에 담긴 레이스 덩어리를 생각하자 기분이 안 좋아졌다.

“당최 이런 옷이 필요할 이유가 무엇이지요.”

“이런 옷이 어떤 옷이기에 말씀이십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테리오드는 제 생각을 최대한 부드럽게 풀어 말하기 위해 잠시 고심했다.

그러나 이보다 적절한 말을 찾을 수는 없었다.

“졸부 같은 옷이지요.”

그에 아스티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전하의 안목이 정확하시어 아주 큰 도움이 됩니다.”

그녀의 말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대공비가 이전에는 이러한 남다른 외출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테리오드는 그 원인을 어렵지 않게 추측했다.

“혹 수하로 들였다는 그 여인 때문에 이러십니까?”

마차 앞에 달려들어 소란을 피웠던 여인을 거두었다고 들었다. 제 억울한 사정을 들어 달라 외쳤었으니 당연히 뒷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스티나가 가볍게 긍정했다.

“예, 맞습니다.”

“이리 몸소 잠행까지 감행하시다니, 과한 친절 아니십니까.”

사실 대공의 말이 맞았다. 제시를 거둔 것만으로 아스티나는 대단한 은혜를 베푼 셈이었다. 보통의 귀족들은 일개 영지민에게 이렇게까지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녀가 꽤나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글쎄요.”

그러나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결론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잠시 말없이 걸음을 옮기던 아스티나가, 이내 가만히 운을 떼었다.

“전하, 저는 사람에겐 적성이란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성이요?”

“대공께서는 훌륭한 성군이시지요, 대공저엔 이야기 속에 나올 것 같은 집사도 있고요. 정원사는 특히 솜씨가 좋답니다. 적절히 싹을 틔우고 잔가지를 쳐 내 후원의 어딜 가든 아름답지요.”

아스티나가 물 흐르듯 유려히 말을 맺으며 테리오드를 응시했다.

“그런 일이었습니다, 이건.”

아스티나가 보기에 제시는 재능이 있었다. 근력만 따지고 본다면 그녀보다 나을 수도 있었다. 아스티나는 마티나였을 때의 기술은 전부 가져왔지만, 그때만큼 물리적인 힘이 강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스티나가 오랜 세월 동안 쌓아 온 전투의 감을 따라잡기는 멀었으나, 그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인 일이었으므로 객관적으로 제시는 몹시 가능성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제시는 검을 한 번도 쥐어 본 적이 없었다. 무기를 휘두르는 엉성한 폼을 보자마자 알았다. 그 누구도 그녀에게 무예를 가르친 적이 없음을.

“아마 그녀에겐 검을 배워 보라 말하는 사람이 없었을 겁니다.”

여자가 검을 드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대륙의 보편적인 정서와는 달리, 마티나는 여인이 가정을 지키는 것이 당연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마티나가 검을 배우는 데 의문을 가졌던 이웃들은 아무도 없었다.

오웬은 그들 무리 내에서 가장 강한 검사였고, 자연히 그녀의 딸에게 쏟아지는 기대가 컸다. 과연 마티나는 그 기대에 충실히 보답하여 열여섯 무렵에는 어머니를 이길 정도로 성장했다.

아스티나는 생각했다. 만약 마티나가 레타의 딸이 아니었다면 이루지 못했을 일들에 대해서. 제시와 같은 이유로 억압받고, 짓눌렸을 때의 그녀는 그럼에도 황제였을까.

아스티나가 회의적으로 말했다.

“그녀에게 있어선 평생 모르고 사는 게 나았을 재능일 수도 있고요.”

“그렇다면 왜 가문으로 들이셨습니까.”

테리오드의 물음에 아스티나가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역시, 아까운 일이지요.”

아스티나는 손을 뻗어 테리오드가 들고 있는 상자 위를 가볍게 쓸었다.

“이 비싸고 어정쩡한 옷처럼 말입니다. 아실리 씨는 아무래도 옷 만드는 일을 그만두는 게 좋겠습니다. 어쩌면 그녀는 의상실 주인보다는 무역가가 될 재능이 더 넘쳤을지도 몰라요.”

‘아실리의 의상실’의 옷이 별로인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테리오드는 내심 안심하며 기꺼이 대공비의 농에 웃었다.

“그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여인 역시 잘 해낼 겁니다. 그대는 좋은 검사이니까요.”

“제가 검을 들 때마다 심장이 뛰신다는 분이 그걸 어찌 아십니까.”

“떨리는 가슴으로 지켜보았지 않았습니까. 심장이 고장 난 연유는 아직까지 모르겠지만.”

장난스럽게 답하는 테리오드를 보며 아스티나는 고민에 빠졌다. 대공의 자존심을 생각해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인데, 아직까지 골머리를 앓고 있는 모습을 보면 슬슬 진실을 밝혀야 할 것도 같다. 아스티나는 전보다 친밀해진 자신들의 사이를 믿고 입을 열었다.

“전하, 저희가 그로 인해 이상한 오해까지 거쳐야 했으니 밝히는 말이지만…….”

“말씀하세요.”

“솔직히 고하자면 대공께서 정신이 온전치 않을 때, 조금 훈육이 필요한 상태이실 때가 있었습니다.”

“예?”

연유를 알 수 없는 해명에 테리오드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아스티나는 최대한 온건한 단어를 골라 가며 마저 설명했다.

“저는 대공 전하의 사회성을 기르기 위해 몹시 노력했고, 그로 인해 사소한……, 아주 사소한 부작용이 발생했습니다. 낯선 분야를 다룰 때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요. 대공께서도 그리 생각하시리라 믿습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기에 이리 서두가 기십니까.”

테리오드가 사람 좋게 웃었다. 이미 화두를 꺼낸 이상 오래 끌어서 좋을 것이 없다. 아스티나가 짧게 호흡하고는 결론을 꺼냈다.

“제가 그 검으로 조금 때렸습니다.”

“……누구를요?”

“대공 전하의 숨겨진 본능을요.”

“나를?”

“아니요, 엄밀히 말하면 그건 대공 전하가 아니시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온전치 않을 때 하신 행동이 대공 전하의 잘못이 아닌 것처럼요.”

아스티나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만약 테리오드가 그 말에 수긍하지 않는다면, 짐승일 때 저지른 살인조차 그가 한 짓이라 인정하는 셈이 되는 비겁한 화법이었다.

테리오드는 잠시간 눈만 깜빡였다. 그는 이상하게 뛰던 자신의 심장 박동을 떠올렸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다가 그녀가 조금만 힘을 쓰면 발작하던 고장 난 가슴을 말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고장 난 것은 심장이 아닌 기억 쪽이었다.

이성을 좀먹는 저주 탓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오해가 생겼다. 상황을 정리한 테리오드가 그만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그래서, 제가 부인이 검만 들면 두려워 몸을 떨게 되었다 이 말씀이십니까?”

의외의 반응에 아스티나가 의아한 눈을 했다. 대공이 이런 일로 화를 낼 사람이 아닌 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저리 속 좋게 웃을 줄은 몰랐다. 그녀가 테리오드를 보며 물었다.

“화내지 않으십니까?”

“화낼 일이 무엇입니까. 그대에겐 고마운 일뿐인 것을요. 그런 제어가 없었다면 진즉 사람을 물어뜯었을 테니.”

테리오드는 화가 났다기보다는, 차라리 앓던 이가 빠진 느낌이었다. 어차피 제 기억에는 없는 일이었으므로 대공은 대공비가 밝힌 과거에 딱히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테리오드는 종종 고민했다. 왜 그랬을까. 그녀는 아니라 말했고 저도 아니라 생각했지만, 그렇다면 그 두근거림에 대한 답은 무엇이었을까. 연정으로 명명하기를 부정하면서도 못내 미약한 가능성을 남겨 두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니었구나.’

“고맙습니다.”

“고마울 일은 아니지요.”

“다행이에요.”

“다행인 일은 더더욱 아니지 않을까요.”

뚱딴지같은 감사 인사에 아스티나가 이상한 눈으로 그를 흘겼다. 그녀의 반복된 정정에 테리오드는 가만히 고개만 내저었다.

대공으로선 정녕 다행이었다. 그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서. 저 다정하게 무심한 여자를 사랑한다면 분명 상처받을 테니까.

* * *

이른 시각에 이루어진 외출이었기에 대공저에 돌아오고 나서도 해는 중천에 걸려 있었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를 먼저 들여보내고 따로 시간을 내어 히센을 찾아갔다.

경비 등의 업무를 보는 아탈렌타 기사단원들과 다르게 히센은 명확한 소속이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대공비의 호위 명목이었으나 아스티나가 그를 데리고 다니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덕분에 히센은 거의 아서의 검 선생 명목으로 교육에만 매진하고 있었다. 중대사를 맡던 과거의 늠름한 모습은 사라지고, 제자의 말썽에 지친 히센에게선 노쇠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아스티나는 대공령에 온 이후 ―정확히 말하자면 아서의 스승을 맡고부터― 눈에 띄게 늙기 시작한 히센을 잠시 멀리서 지켜보았다. 안타까운 바였으나, 그래서 더더욱 그 피곤한 일을 직접 감당하고 싶진 않았다. 아스티나는 아서를 떠넘겼던 과거의 결정을 칭찬하며 히센에게로 다가갔다.

부지런히 내려치기를 반복하는 제자들 뒤에서, 히센은 뒷짐을 진 채 그들을 매섭게 감시하고 있었다. 근처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곧장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전하,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십니까?”

“자네가 해야 할 일이 있어.”

아스티나가 담백하게 답하며 자신을 따라온 하녀에게 눈짓했다. 공손히 고개를 숙인 여자가 다가와 히센에게 꾸러미를 들려 주었다. 히센이 의아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게 뭡니까?”

“선물이자……, 뇌물쯤 될 것 같군.”

“무슨 일이기에 저한테 뇌물을 다 주십니까.”

“내가 참 힘든 일을 많이 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방금.”

“다른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고생 거리를 더 늘리지만 말아 주세요.”

히센이 농처럼 답하며 꾸러미를 풀었다. 그 안엔 옷이 들어 있었다. 뜬금없이 등장한 물건에 히센은 한결 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내용물은 여행자들이 걸칠 법한 주머니 많은 외투와 편해 보이는 튜닉 두 가지였다. 만져지는 촉감이 부드러워 제법 값을 들였다 싶었다.

“이걸 왜 주십니까?”

“자네가 해 줄 일이 있어.”

히센은 무의식적으로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에 불안감이 떠올랐다. 히센은 다소 서두른 기색으로 들고 있던 옷가지를 다시 하녀에게 떠넘겼다.

“일단 얘기 먼저 듣고 정하겠습니다.”

“무엇을?”

“저걸 받을지, 그대로 돌려드릴지요.”

굳이 부탁이라는 말을 꺼낸 걸 보면 업무 외 노동이 분명했다. 스승에게 보은하겠다는 마음으로 생각지 못한 제자까지 둘이나 얻은 상태다. 더 이상의 고생은 사양이었다. 몸을 사리는 태도에 아스티나가 짧게 혀를 찼다.

“자네는 참 아량이 좁군.”

“여기서 바로 예, 하는 대답이 나오면 학습 능력이 없는 거지요.”

“그게 제자의 한을 갚아 주는 일이라고 해도?”

“예?”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튄 화제에 히센이 당황하여 되물었다. 아스티나는 하녀에게서 옷가지를 넘겨받았다. 그러고는 느리게, 그러나 강압적으로 재차 히센에게 안겨 주었다. 행동과 어울리지 않게 대수롭지 않은 투로 그녀가 마저 설명했다.

“자네가 들일 수고는 하나야. 나와 아탈렌타를 떠나 벨루아까지 함께 이동하는 것. 사실, 원래 업무인 호위에 제일 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지.”

“그게…… 전부입니까?”

“물론 타지방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이동하게 된 건 미안하지만, 제시의 스승으로서 도의적으로 해 줄 수 있는 일이지 않나? 이 정도면.”

왜 갑자기 벨루아 영지로 가시겠다는 걸까. 히센은 제시의 고향을 알고 있었으므로 목적을 추측해 내는 것은 빨랐다. 아스티나는 그가 보는 앞에서 제시의 억울함을 해결해 주겠다 공언했었다. 아마 그녀의 이동은 예의 그 일과 관련이 깊으리라.

히센 역시 제시의 이야기에 분노했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더부룩한 선물을 받아들였다. 그는 권위자의 폭정으로 피해를 보는 양민이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구시대적인 기사도를 품은 사나이였다. 히센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자포자기한 음성으로 답했다.

“사실 제 의사는 별로 상관없겠지요.”

“역시 자네는 현명해.”

아스티나가 만족스럽게 눈꼬리를 휘었다. 필요한 물품을 구비하고 히센을 포섭하는 것까지 준비는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었다. 그녀는 땀을 흘리며 검을 휘두르는 제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몸이 고된지 이따금 팔이 경련했으나 흥미에 찬 눈은 생경한 배움에 즐거워하는 듯 보였다.

아스티나는 스스로가 그다지 정의롭다고 생각하진 않았으나 제 눈에 든 어려움을 모른 척할 정도로 몰인정하지도 않았다. 군주란 얼굴도 모르는 이들에게 책임감을 가져야만 하는 어려운 자리다. 그리고 그녀는 그 이상적인 지배자상에 꽤나 잘 부합하는 사람이었다.

“벨루아 영지에 가서 뭘 어쩌실 예정이십니까?”

“글쎄, 배불리 취한 영주를 도륙 낼까.”

히센의 물음에 아스티나가 나긋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장난기 어린 눈에서 농담임이 티가 났지만, 그럼에도 자연히 소름이 돋았다. 히센이 팔목을 문지르며 말했다.

“무서운 소리를 하십니다.”

“농일세, 이런 일로 사람을 죽이진 않아.”

목숨으로 갚을 죄라면 타인의 목숨을 위협한 적이 있어야 어느 정도 경중이 맞지 않겠는가. 벨루아의 영주는 분명 욕심이 컸지만, 그렇다고 그가 직접 부지깽이를 들고 제시의 머리를 내려치려 한 건 아니었다. 아스티나는 그들이 적법한 벌을 받도록 할 예정이었다.

“사람을 죽여 보신 적도 없으시면서요.”

히센이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그녀의 태도를 지탄하듯 말했다. 확실히 아스티나는 ‘아스티나’일 때 누군가를 베어 본 적이 없었다. 귀족 영애의 평화로운 삶 속에서 사람을 죽일 일이 생긴다면 그도 큰일이다.

“히센, 사실 나는 대단한 학살자라네.”

“저는 한 만 명쯤 베어 봤는데, 전하는 몇 명이나 죽이셨습니까?”

“10만 명 정도?”

쓸데없는 농을 주고받은 사제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직접 제 손으로 베어 넘긴 목이 몇인지는 그녀도 알 수 없는 바이나, 그녀가 벌인 정복 전쟁으로 스러진 목숨을 생각하면 10만이라는 숫자조차도 우습다. 히센은 그녀가 말하는 목숨의 무게를 평생 알지 못할 것이다. 아스티나는 그저 말없이 웃었다.

“아, 거슬리게 옆에서 팔 흔들지 마라, 주세요.”

“베기 연습을 하는데 팔을 안 흔들 수는 없잖아요.”

“좀 떨어지면 되잖아! 요.”

“열 걸음도 더 멀리 있는데, 어떻게 이것보다 더 떨어지란 말씀이세요?”

“아오, 진짜! 스승님! 이 건방진 후배, 분 좀 봐요!”

옆에서 들려오는 괴상한 대화에 아스티나가 고개를 돌렸다. 제시와 아서가 서로를 보며 으르렁대고 있었다. 제시가 아서에게 존대를 하는 것은 그렇다 쳐도, 아서가 보이고 있는 저 반쪽짜리 경칭은 당최 무어란 말인가. 제 성에 못 이긴 아서가 결국 소리 지르는 것을 보며 아스티나가 물었다.

“왜들 저러지?”

“선후배 사이에 분위기가 좋지 않기에 서로를 존중하는 연습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히센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둘 사이의 갈등을 없애 보고자 정한 나름대로의 궁여지책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앙숙이 될 징조를 풍기던 둘은 과연 마주칠 때마다 분란이 생겼다.

아니, 기실 분란이라기보다는 아서가 일방적으로 시비를 걸고 제시는 가끔가다 받아치는 안쓰러운 광경이었다. 아서의 버릇없음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를 처음 만난 제시에겐 이만한 날벼락이 또 없었다.

제시로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밉보여서 좋을 게 없는 입장이기에 먼저 숙이고 들어가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얼굴을 볼 때마다 신경을 긁는데 어떻게 그걸 다 참아 낸다는 말인가. 자신이 훈련을 그만두고 떠난다면 아마 그건 부모의 만류도, 몸이 고되어서도 아닌 저 귀족 나리의 이죽거림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상대가 원하는 바가 분명해, 제시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공정한 스승 히센이 나름의 중재를 해 준다는 점일까.

“둘 다 열심이군.”

아스티나가 제시와 아서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며 칭찬했다. 주춤거리던 제시가 목검을 아래로 내리고는 아스티나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대, 대공비 전하!”

아서를 상대하느라 정신이 팔려 그녀를 이제야 발견한 모양이었다. 아스티나는 제시의 거센 반응을 진정시키며 인자하게 웃었다.

“훈련은 잘되어 가느냐.”

“예, 신경 써 주신 덕분에요.”

아스티나의 물음에 제시가 볼을 붉히며 대답했다. 사실 아서의 방해로 그리 좋기만 한 상황은 아니었으나, 대공비에게 그것까지 내색할 수는 없었다. 대공비는 이미 충분한 기회를 주었고 그 과정을 이겨 내는 건 자신의 몫이었다. 앓는 소리가 나오지 않음에 아스티나가 흡족한 얼굴로 제시를 격려했다.

“아마 함께하는 친구가 협조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아, 아닙니다.”

제시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지만, 아스티나도 아서의 성격을 모르지 않았다. 히센에게 그녀를 보내며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아서 같은 애송이조차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후의 역경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대가 잘 해낼 것이라 믿네.”

“대공비 전하…….”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지는 법이지. 나의 기사는 모든 역경을 담담히 이겨 내야 해.”

“지금 내가 옆에서 듣고 있는 거, 알고들 말하는 거 맞지?”

졸지에 제시의 시련이 된 아서가 어이없는 목소리를 냈다. 삐딱하게 선 자세에는 불만이 가득 배어 있었다. 그런 아서의 얼굴을 흘긋 본 아스티나가 다시 제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성격이 좀 나쁘긴 하지만 검 실력이 나쁘지 않아, 아마 좋은 대련 상대가 될 게야.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성장할 수 있는 검 친구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내 의사는!”

아서가 펄쩍 뛰어올랐다.

“진도 맞춘답시고 다시 가로 베기나 하고 있는 나는 안 보여?!”

관심이 필요한 모습에 아스티나가 옅게 한숨 쉬었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서 에스테반, 만약 성질을 참기 힘들거든 그 혀가 누구의 자비로 붙어 있는지 기억하는 게 좋겠군.”

“…….”

“불만, 있나?”

“아으니…….”

아서가 혀라도 씹은 듯한 얼굴로 겨우 대답했다. 아스티나는 아서의 반항이 관심을 받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도 되는 건 아닌지 잠시 의문에 빠졌다. 한 번 이기지도 못할 것이면서 매번 달려드는 모습이 참으로 오뚝이 같았다. 저런 모습이 나름대로 귀엽게 느껴진다면 자신이 늙은 것일 테지. 아니면 그 사이에 꽤나 정이 들었거나.

아스티나는 둘에게 공정한 축복을 내려 주었다.

“좋아. 그럼 부디 히센의 말을 잘 들어 괄목할 성장을 보여 주길 바라네, 제군들.”

아스티나가 만족한 얼굴로 돌아섰다. 아서가 어이없는 얼굴로 “제군들?” 하고 헛웃음 짓는 것을 제시가 은근슬쩍 노려보았다. 아스티나는 황제일 적의 말버릇이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왔음을 인지했지만 정정하진 않았다. 귀부인이 쓰기 어색한 표현이긴 해도 정 못 쓸 단어는 아니었다.

‘이대로 이혼 수순을 밟는다면 큰일 나겠군.’

레테 백작가에 있을 때는 애초에 이렇게 나설 일이 없어 실수할 건수도 없었는데, 어중간한 지배자의 위치에 서다 보니 적정선의 태도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공비 자리에 오른 지 얼마나 됐다고 일개 귀족 영애였던 시절은 잊고 다시 권력의 맛에 젖어 버렸다. 올리버에게 존대를 하며 1년 후 행할 이혼에 대한 현실감을 다지고 있긴 하지만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아스티나는 다시 연습에 몰두한 제시를 잠시간 빤히 응시했다. 말마따나 1년 후 돌아갈 계획이니 제시를 평생 보살펴 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 기한 동안 그녀가 혼자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훈련에 전념할 수 있게 하려면 신변 정리를 서둘러 주어야겠지.

아스티나는 아서와 제시에게서 떨어져 히센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히센으로선 참으로 당황스러운 명령을 했다.

“히센, 걷게.”

“예?”

“여기서 저 끝까지 걸어가 보라는 말이야.”

히센은 얼떨떨한 얼굴로 걸음을 떼었다. 잠시 아스티나를 돌아보느라 주춤이던 움직임이 곧 씩씩하게 변했다. 타의 귀감이 되는 기사의 단정한 걸음걸이였다. 어중간한 계급의 평기사와는 과연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것을 알고 있는 히센이 더욱 가슴을 폈다. 아스티나가 왜 갑자기 이런 명령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기사로서의 모든 소양에 언제나 자신이 있었다.

“잠깐.”

아스티나가 굳은 음성으로 자신을 멈춰 세우기까지는 분명 그러했다.

“조금 더 어깨를 올려, 으스대는 것처럼. 그리고 발끝이 바깥을 보게 해 껄렁한 느낌이 났으면 좋겠군.”

“예?”

히센은 그리 되물으면서도 반사적으로 아스티나의 말대로 자세를 바꾸었다. 어기적거리는 히센을 보며 아스티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가슴을 너무 당당히 펴고 있지 않나?”

“예? 아니, 아가씨. ‘가슴은 언제나 당당히 펴고’라는 희곡도 못 들어 보셨습니까. 기사들이 등장하는 로망스의 대표곡인데, 그러니까 제 말은 이것은 기사로서 너무도 당연한…….”

영문 모를 지적에 히센이 횡설수설 대꾸했다. 아스티나가 매섭게 불평했다.

“그러니까 너무 늠름하단 말일세. 주춤주춤 얼뜨기처럼 걷도록!”

아스티나가 드물게 큰소리까지 내자 히센은 결국 꼴사나운 팔자걸음을 시연할 수밖에 없었다. 아스티나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히센을 놓아주었다. 기사로서의 위엄을 벗어던져야 했던 히센은 그저 눈물지었다.

* * *

“대공비가 편을 들어주니까 아주 좋으세요?”

귀에 턱 걸리는 비아냥에 제시가 걸음을 멈춰 세웠다. 아니나 다를까 뒤편에 아서가 팔짱을 낀 채 나무에 기대서 있었다. 제시는 묵묵히 목검을 정리하며 대답했다.

“대공비 전하는 제 은인이세요. 당연히 항상 감사하죠.”

“그렇겠지, 참.”

당연하게도, 아서가 이어 비꼬았다. 이제 저 까칠한 말투에는 완전히 적응했다. 제시는 아서를 상대하는 것 외에도 바쁜 일이 아주 많았다.

그녀는 이 저택에서 아주 애매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고 대부분의 일은 혼자서 처리해야 했다. 대공의 사촌으로서 제시간에 훈련장에 나와 얌전히 검술만 배우면 되는 아서와는 입장이 달랐다.

‘저런 망나니가 대공 전하의 사촌이라니.’

제시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고작 한 번이었지만 제시도 대공과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있었다. 대공비가 제시를 가문으로 들이기로 결정한 후, 대공도 그녀를 불러 짧은 격려를 남겨 주었기 때문이다. 몇 마디 오가지는 않았으나 제시는 대공에게서 그야말로 귀공자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귀족의 신분을 한 이들은 대체로 게으른 가축에 가깝다는 것이 제시의 솔직한 감상이었지만, 대공 부부는 벨루아의 영주와는 확연히 달랐다.

한데 사촌이라고는 하나 같은 핏줄을 이은 도련님은 저 모양이라니. 아서 에스테반은 대공과 닮은 점이 머리 색 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야, 넌 왜 이 집에 기어들어 왔어요?”

바로 이 격의 없는 말투처럼 말이다. 저럴 거면 차라리 말을 놓는 편이 나을 것이다. 히센은 싸움이 날 것을 염려해 상호 존대를 명했지만, 제시는 그게 과연 효과나 있었을지 알 수 없었다.

아서는 존댓말을 쓰면서도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심지어 스승의 앞이라고 딱히 더 얌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제시는 ‘싸가지 없음’에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아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재수 없는 도련님 같으니.’

그러나 이는 속으로만 삼켜야 할 말이었다. 똑같이 히센의 아래에 있다고는 하나 입장부터가 다르다. 그녀는 아서의 후배일 뿐이고 그마저도 인정받고 있지는 않으니.

닮지 않았다고 해도 아서는 대공의 사촌이었고 제시는 대공비의 자비로 받아들인 일개 영지민일 뿐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아탈렌타 출신도 아니지 않은가.

“도련님, 전 바빠요. 운동복도 빨아 둬야 하고, 무기도 정리해야 하고요.”

“그래서 나 같은 건 상대를 못 한다 이 말이냐? 입니까.”

뒤이어 이를 악물고 뱉은 ‘입니까’에 제시는 남몰래 진저리를 쳤다. 차라리 안 듣는 편이 나을 존대다. 어찌나 험악한지 제시는 차라리 히센 경이 보지 않을 땐 말을 놓아도 된다고 허락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아서 에스테반은 대공비와 히센 경이 퍽 무서운지 싫은 소리를 내면서도 그 명령엔 반항하지 못했다.

“저는 도련님이랑 별로 부딪치고 싶지 않아요. 갑자기 후배랍시고 끼어든 건 죄송한 일이지만, 그건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

제시는 대공비가 내려 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대공비가 베푼 자비에 팔자 좋게 불평이나 할 정도로 몰염치하지 않았다. 성질 나쁜 도련님 하나 때문에 선생을 바꿔 달라는 사소하고 무례한 부탁까지 전할 수는 없지 않은가.

본래 성격대로라면 아서를 들이박고도 남았을 것이나,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의 신분이 자신과 같을 때 한정해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아쉽게도 아서가 푸른 나그네 집 여관 단골들이 주장하는 강철 팬티의 필요성을 알게 될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제시는 최대한 공손한 음성으로 말했다.

“최대한 눈에 안 띄게 해 볼 테니 노여움 좀 푸세요. 어차피 훈련 때 빼고는 마주칠 일도 없으시잖아요.”

“야, 뭘 모르나 본데. 네가 내 후배로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수치야. 알아요?”

하지만 이 정도 대화로 알아먹을 상대이면 이런 말도 안 되는 괴롭힘을 계속하지도 않았겠지. 제시는 고개를 돌려 구겨지는 표정을 간신히 숨겼다.

아서는 제시가 혼자 있을 때면 어김없이 찾아와 시비를 걸었다. 추행을 당하거나 어딜 얻어맞은 적은 없지만 꾸준히 당하는 정신 공격도 꽤나 만만치 않았다.

아서는 매일매일 빠지지 않고 제시에게 아탈렌타의 유서 깊음과 소속 기사단의 위대함을 일장 연설하고는, 끝내 그녀가 이 자리에 가당키나 하느냐며 이를 갈았기 때문이다. 기사가 되기 싫어 대공가를 뛰쳐나갔던 과거치고는 꽤나 이곳에 자부심이 넘쳐 보였다.

“그래도 제가 대공가에서 나갈 일은 없을 거예요.”

제시는 단호하게 말하고는 뒤돌았다. 이 소모적인 말싸움을 계속하다가는 정신병까지 도질 것 같았다. 그대로 가 버릴 태세에 아서가 황급히 발을 놀려 제시를 앞질렀다. 그가 인상을 찡그리며 따져 물었다.

“이건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모르겠어요?”

“네, 모르겠어요. 절 위해서라면 마저 정리하게 좀 내버려 두세요.”

종내 제시의 대답이 짜증스러워졌다. 상대의 얼굴을 마주 보자 자신보다 한 살 어린 소년임이 자각되었기 때문이다. 키나 체격은 장성한 남자에 가까웠지만 간간이 눈매에 어리는 치기가 그를 한결 어려 보이게 만들었다.

대공비도 똑같은 나이시라는데 왜 이렇게 다를까. 표정을 숨기려 노력했으나 제시는 전문 시중인이 아니었고, 덕분에 얼굴에 드러난 한심함을 다 가리지는 못했다. 아서는 본인을 욕하는 낌새에 지나치게 민감한 사람이었으므로 당연히 눈이 돌아갔다.

“이봐, 남자라도 평민이 기사가 되기는 힘들어. 그런데 네가 정말 그 말도 안 되는 꿈을 이룰 거 같아요? 어차피 안 될 거, 피차 체면 상하게 하지 말고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차피 안 될 걸, 도련님이 어떻게 아시는데요?”

“기사 시험을 어떻게 보는지 알아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황성으로 올라가서 공인 시험을 거쳐야 하는 건 들어 봤죠?”

잘 알지 못하는 분야였으므로 제시는 입을 닫았다.

“귀족이랑 평민은 시험을 보는 절차부터가 달라요. 귀족은 추천장이 있으면 예선은 보지도 않고 패스지만, 평민들은 며칠간 시험장에 모여서 토너먼트로 순위를 먼저 가리지.”

“그건…… 알아요.”

“예선 시험을 치르는 동안은 인원이 너무 많아서 사람 관리가 안 돼. 천막에 참가자들을 밀어 넣고 거의 방치하는데, 거기서 여자라고 특별 대우가 있을 것 같아요? 넌 남자들만 드글드글한 천막 안에서 2주간 버텨야 한다고.”

아서의 말이 점점 더 험악해졌다. 그가 제시를 내쫓으려는 건 어디까지나 사감이었으나, 그렇다고 지금 거짓을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 경고는 그녀를 위한 가장 객관적인 조언일 수도 있다.

“평민들은 실력이 아주 뛰어나지 않으면 합격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체로 수준이 좋지. 여자치곤 좀 힘이 세다 해도 다른 이들에 비하면 변변찮은 실력일 텐데, 그 짐승 우리 속에 네가 떨어지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 않아요?”

“여기사가…… 없는 건 아니잖아요.”

제시는 남몰래 침을 삼켰다. 어느새 긴장이 어린 그녀의 눈을 보며 아서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여기사들은 여자 귀족들 말동무 같은 거야. 당연히 다 귀족 출신이지. 너같이 무식하게 검 휘두르겠다고 기사 시험을 치르는 여자는 없단 말이세요.”

“대공비 전하는―”

제시가 새벽 훈련마다 놀라운 무용을 보여 주던 대공비를 상기해 냈다. 회심의 반박을 아서는 망설이지도 않고 물리쳤다.

“그 여자는 본인이 강한 것뿐이지 너처럼 기사를 하겠다고 나선 것도 아니에요.”

아서가 이어 짧게 코웃음을 쳤다.

“꿈 깨요, 넌 가능성 없으니. 차라리 용병으로 전향하는 편이 마음 편할걸.”

아서가 긴말을 끝맺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팔짱을 꼈다. 제시를 내려다보는 눈에 포만감이 어렸다.

이제 저 여자는 주눅 든 얼굴로 울음을 터트리며 이곳을 달려 나가야 했다. 그리고 아서는 제시의 마음가짐이 얼마나 나약했는지를 대공비에게 고하여 정당히 그녀를 쫓아낼 것이다.

과연 제시는 고개를 숙인 채 들지 못했다. 아서는 그녀가 곧 꼬리를 내리고 도망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고개를 든 제시의 눈에는 물기가 없었다. 원망이 담긴 눈빛에 아서는 무심코 입술을 벌렸다.

제시는 세게 주먹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한참 그렇게 아서를 노려보았다. 운 좋게 좋은 조건으로 출생한 주제에 본인이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잘난 척하는 꼴 좀 보라.

제시는 모든 걸 가진 주제에 고작 꼴 보기 싫다는 이유로 그녀의 기회를 앗으려 하는 아서에게 원망을 느꼈다. 그녀는 본인의 단점에 대해 이미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평민인 데다, 여자다. 여자인데, 평민이다.

제시는 그것이 도통 ‘기사’와는 어우러지지 않는 이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대공비는 그녀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히센도 곤란한 표정이었지만 안 된다 말하지는 않았다. 그대로 희망에 부풀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저 건방진 도련님은 그녀에게 한 줌 희망도 남겨 주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아서가 귀족만 아니었다면 진즉 주먹이 그의 얼굴로 날아가 꽂혔을 것이다. 제시가 마침내 씹듯이 내뱉었다.

“그렇게 계속 나쁜 말만 하시다간 모두가 도련님을 싫어하게 될 거예요.”

그 짧은 말이 아서의 가슴에 와 박혔다. 그것은 그의 콤플렉스를 직격으로 건드리는 발언이었다. 아서에겐 버려짐의 역사가 깊었다. 아탈렌타에 온 것만 해도 부모님이 그를 감당하지 못해 내쫓긴 것이었으니까.

“네가 뭘 안다고!”

아서가 욱하여 소리쳤다. 펄펄 날뛰는 아서를 보며 제시가 들릴 듯 말 듯 입술을 달싹였다.

“남에게 온갖 상처 될 말은 다 뱉어 놓고, 고작 반박 한마디 들었다고 눈이 뒤집히는 꼴이라니.”

“뭐? 너 방금…….”

제시는 아서의 말을 무시하고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갑작스레 돌아온 표독스러운 말에 멍하여, 아서는 잠시간 움직이지 못했다. 앞으로 걸음을 내딛던 제시가 문득 뒤를 돌았다. 그녀의 입술이 불편하게 달싹였다. 성질을 이기지 못한 제시의 입은 결국 하고 싶은 말을 뱉어 내고야 말았다.

“그리고 도련님만 저 싫어하는 거 아니에요.”

“뭐?”

“저도, 도련님이 만만치 않게 싫어요.”

그 말만 남긴 채로 제시가 달음박질쳤다. 남겨진 아서가 발을 구르며 울화를 터트렸다.

“야, 너 이리 안 와요?!”

당연히도 제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서의 얼굴에 황당함이 서렸다.

“뭐, 뭐 저런 게……!”

* * *

벨루아로 떠날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마침내 당일이 되었다. 그사이 히센은 아주 완벽하게 불량스러운 걸음을 선보였고, 아스티나는 흡족한 얼굴로 통과 사인을 내렸다. 히센이 ‘흑흑…… 난 더럽혀졌어…….’ 하고 울던 모습은 나름대로 재밌는 뒷이야기였다.

“무사히 돌아오세요.”

“예.”

아스티나가 튜닉 자락을 들어 인사하며 우아하게 답했다. 고아한 자태였지만 대공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했다. 테리오드는 미심쩍은 눈으로 ‘아실리의 의상실’에서 사 왔던 예의 옷을 응시했다. 겉에 큰 망토를 둘러 가리고는 있었지만, 테리오드는 그 안에 든 치맛자락이 어떤 물건인지를 알았다.

그리고 비교적 얌전해 보이는 저 흰색 망토는 아스티나가 마차에 타자마자 레이스가 달린 괴상한 물건으로 바뀔 것이다. 현란한 디자인의 옷은 주인의 우아함을 아주 효과적으로 억누르고 있었다.

그뿐일까, 순박한 인상이긴 하나 귀감이 되는 모범적인 기사라 여겼던 히센 경은 얼뜨기 같은 몰골로 서 있었다. 벨루아로 떠난다는 계획은 이미 들었던 바이나, 그것이 이렇게 의문스러운 외양으로 행해질 줄은 몰랐다.

아스티나가 정한 선발대의 인원은 그녀 본인과 히센, 그리고 제시와 아서를 포함한 넷이었다. 본래 아서는 두고 갈 생각이었으나 자신을 내버려 두고 어딜 가냐고 떼를 쓰는 통에 결국 한자리를 내주었다. 아스티나는 얌전히 있어야 한다는 신신당부를 남기고는 동행을 허락했다. 한참 대공령을 떠나 방랑했던 아서에겐 적당한 여행복이 많았기에 그에게까지 새 옷을 선물할 필요는 없었다.

“빨리 인사하고 가자.”

뒤편에 선 아서가 길게 하품하며 재촉했다. 물론, 아무도 그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테리오드가 의문을 버리지 못한 얼굴로 물었다.

“언제쯤 돌아오실 예정이십니까?”

“길어야 3일 즈음이지 않을까요.”

돌아온 대답에 테리오드는 미간을 좁혔다. 아스티나가 떠난다면 자신은 꼼짝없이 침실에 갇혀 그녀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저주받은 몸이란 참으로 불편한 것이었다. 그녀가 있어 나름 규칙적인 생활을 영위하고는 있지만, 이렇게 그녀가 부재하게 될 때는 손쓸 도리가 없다.

“집을 잘 지키고 있어야겠군요.”

“죄송합니다, 전하.”

“아, 불평을 하려던 것은 아닙니다. 그저 농으로…….”

“저도 그에 죄송하다고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전하는 그 3일간 아주 무사히 사람의 태를 입으시게 될 겁니다. 다만 대공께서 해 주실 일이 있어요.”

“제가요?”

의외의 말에 테리오드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도통 계획을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안에 자신의 활약 역시 계산되어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항상 철두철미한 그녀가 이제야 부탁을 전하는 이유는 뭘까. 대공의 의문스러운 속내와는 달리, 대공비는 아주 덤덤한 음성으로 부탁을 전했다.

“예. 제가 벨루아로 떠나고, 내일 아침 무렵 바로 뒤따라오셨으면 좋겠습니다.”

“부인, 그렇지만 입맞춤이…….”

테리오드가 의아한 얼굴로 운을 뗌과 동시, 아스티나가 발끝을 들어 그에게 엷게 입을 맞췄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동행인들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특히 아서는 경악한 얼굴로 아스티나를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저게 남들 보는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하고 소리치려는 아서를, 히센이 재빨리 입을 틀어막아 마차에 태웠다. 제시 역시 대공 부부의 애정 행각을 피해 마차로 숨었다.

그리고 테리오드는 얼이 나가 그 모든 반응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제자리에 굳은 대공에게서, 아스티나가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죄송합니다.”

그녀가 설핏 웃으며 말했다.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진 급습에 테리오드가 놀란 얼굴로 제 입가를 매만졌다.

“이게…….”

“미리 입맞춤을 해 두어야 내일 아침 사람으로 변하실 테니 말입니다.”

제시의 복수를 해 주는 것은 아스티나 개인의 목적일 뿐, 대공이 원하는 일은 아니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직접 입을 맞추게 될 것이 미안해 미처 이 부탁을 하지 못했다. 대공은 그녀의 접촉에 있어 몹시 내외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처음 초야를 거부당했던 것은 그녀로서도 기억에 남는 일이었다.

“아, 그렇지요. 사람이…….”

테리오드는 말을 잇지 못하고 낯을 붉혔다.

지난번 여러 시험을 반복한 바로, 그들은 대공이 사람이 되는 여러 가지 조건을 알아냈다. 낮이든 밤이든 변하는 시간대는 상관이 없다. 사람일 때든 그가 짐승으로 변해 있을 때든, 입맞춤은 시기에 구애받지 않고 기능한다. 다만 오직 열두 시간의 간격만이 유효하다.

이 사실을 알아낸 이후에도 대공 부부는 테리오드의 이성이 멀쩡할 때 입맞춤을 시도하진 않았다. 생활 공간이 같아 굳이 떨어질 일도 없었고, 늑대일 때 가볍게 해치우는 편이 훨씬 더 간단했기 때문이다.

테리오드는 방금 느꼈던 말캉한 감촉에 좀처럼 당황을 벗어던지지 못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아스티나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대로 마차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잠시 가만히 서 테리오드를 응시했다.

일정한 간격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 다행히 이러한 계획을 정하는 데 있어 도움을 얻고 있긴 하지만, 그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제한 시간이 딱 열두 시간인 걸까. 하루의 반은 짐승으로 살고 남은 하루의 반은 사람으로 사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러고 보니 오래된 기사 로망스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었더랬다. 음유시인이 노래하는 옛 군주 아서왕 이야기에서, 그의 충실한 기사 가웨인은 왕의 부름을 받들어 추녀와 결혼했다.

마녀였던 아내는 사실 그녀의 형제에게 저주받아 추한 겉모습을 뒤집어쓴 것이었다. 가웨인과 결혼함으로써 저주의 반이 풀린 아내는 밤이 되자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녀로 변했다.

그녀가 놀라워하는 가웨인에게 물었다.

[저는 낮과 밤 중 한때에만 이 모습으로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어느 때 아름답기를 원하십니까.]

가웨인은 대답했다.

[나는 그대가 나만 볼 수 있는 밤에 아름답기를 원하오.]

그러나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저는 사람들이 저를 볼 수 있는 낮에 아름답고 싶은걸요.]

[그렇다면 그대의 뜻대로 합시다.]

가웨인은 망설임 없이 아내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빛에 감싸인 아내가 환히 웃으며 답했다.

[그 대답으로 저주가 모두 풀렸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밤에나 낮에나 아름다울 것입니다.]

저주를 완전히 푸는 방법은 남편 된 자가 자신의 의견을 굽히고 그녀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문득 떠오른 그 옛이야기에, 아스티나가 테리오드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며 물었다.

“대공께서는 어느 때 사람으로 계시는 것이 좋으십니까?”

“그야 낮이지요. 대공령의 일을 처리해야 하니까.”

테리오드가 다소 얼떨떨한 낯으로 대답했다. 사실 대답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공은 타고난 일 중독자로 대부분의 시간을 집무실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은 옆에서 일을 도왔던 아스티나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진행이 조금 다르게 되는 듯도 했지만, 그녀는 이야기에서 나왔던 말을 그대로 읊어 보기로 했다.

“저는 그대가 나만 볼 수 있는 밤에 미남이기를 바랍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그거?”

테리오드의 눈에 황당함이 스몄다. 그러고 보니 대사의 순서도 바뀌었다.

멍청한 짓이었다는 생각에 아스티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테리오드가 짐승에서 사람이 됐을 때도 옛이야기처럼 그의 뒤에서 후광이 비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이게 저주를 풀 답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아스티나는 담백한 인사를 남기고는 그대로 마차에 올라탔다. 일행이 다 자리에 앉자 곧바로 마부가 말을 출발시켰다. 느리게 구르던 바퀴가 점점 힘을 더해 갔다.

남겨진 테리오드는 마차의 뒤꽁무니를 아주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그는 방금까지 아스티나가 닿아 있던 입술을 매만졌다. 지난번 이마를 간질여 주었던 그녀의 손이 생각나는 듯도 했다.

테리오드가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여자야.”

* * *

빅터는 그럭저럭 쓸 만한 양아치였다.

그는 태생부터 뒷골목 사나이였다. 정확히 말해서 그의 어미가 어두운 골목길에서 산통을 겪었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탯줄만 겨우 잘린 채 상자 속에 담겨 버려졌고, 내내 거리에서 자라 왔으므로 골목이 낳은 아이라고 말해도 크게 어폐는 없었다.

날 때부터 버려진 고아가 무사히 자라 성인이 되기까지, 그리 온건한 과정을 거쳤으리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물론 추운 밤 몸을 떨던 어린 빅터가 구원을 꿈꿔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어느 마음씨 좋은 부인이 따듯한 침대를 내주는 낭만적인 일은, 적어도 그의 인생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빅터는 말도 다 떼지 못한 어린 시절부터 길거리에서 구걸을 했고, 머리가 좀 굵어지고 나서는 소매치기 생활을 했다. 완연한 성인이 되고 나서는 그저 그런 패거리 속에 들어가 주먹을 휘두르며 살았다. 소시민들을 폭력으로 위협하며 돈을 뜯어내는 것이 그의 직업이었다.

자릿세를 내라며 좌판을 뒤집어엎고 돌아온 날, 대장이 중대 선언을 했다.

‘벨루아로 간다.’

‘네에에?’

패거리의 대부분이 경악한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이게 무슨 미친 소리인가 싶었다.

벨루아가 멀리 떨어진 영지는 아니었지만 깡패 짓도 어디까지나 자리싸움이었다. 대단한 무장 병력도 아닌 그들이 낯선 땅에 가서 무사히 적응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무리에 대한 공포도 어느 정도는 역사가 있어야 기능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벨루아의 영주가 머저리가 아닌 이상 그들 같은 양아치가 이주하는 걸 두고 보겠는가. 귀족 나으리가 그렇게 대대적으로 미칠 일은 없으니 아무래도 미친 건 대장 쪽이 분명했다.

대장은 자신의 실성을 의심하는 부하들을 보며 헛기침을 했다.

‘거기 영주가 싸움꾼들을 불러 모은다더라. 영지민들을 겁줘서 내쫓으면 되는 간단한 일이야.’

설명인즉슨 이러했다. 벨루아의 영주는 영지의 노른자위 땅을 밀고 저택을 확장하고 싶어 했다. 당연히 멀쩡한 소유의 집을 뺏긴 주인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은 사람들은 사리사욕에 도리를 내버린 영주를 지탄하며 농성을 벌였다.

여기서 일은 다소 복잡해진다. 어쨌든 쥐꼬리만 한 보상금이나마 주어졌으므로 영주의 행태는 법적으로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공사장에 열 지어 선 피해자들을 탄압하는 건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무력으로 힘없는 소작인들을 위협하는 것은 크게 지탄받을 만한 일이다. 게다가 그들이 몰려든 이유가 영주의 욕심으로 인한 공사 때문이었음에야, 휘하의 무장 집단을 써서 직접 처리할 수는 없었다.

귀족의 첫째 조건 되는 것이 바로 명예다. 귀족들을 선민으로 여기는 신분제는 푸른 피를 공고히 하는 무기이되, 다른 말로는 그들이 겉으로나마 그 밑의 사람들보다 ‘좀 더 나은 인간’이어야 한다는 제약이기도 했다. 벨루아의 영주는 본인의 귀족성, 즉 명예를 지키기 위해 편법을 쓰기로 했다. 바로 사병이 아닌 근처 영지의 왈패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그 양아치들이 영주가 불러들인 무리임은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영지에 있는 모두가 알았지만 겉으로 보기엔 연결 고리가 없었다. 그들이 영주가 공사를 벌인 땅에서 곡괭이를 쥐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노려본다고 해도, 돈을 받은 현장을 내보인 게 아닌 이상에야 아니라고 잡아떼면 별수 없는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고 비난하면 할 말은 없겠으나 귀족들의 세계란 원래 그렇게 굴러가는 법이다.

어찌 됐든 그런 이유로 빅터와 그 무리는 갔다, 벨루아로.

생활이 조금 더 규칙적으로 변한 것 빼고는 고향에서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뼛속부터 뒷골목의 무리들은 딱히 친지랄 것이 없어 가족들이 그립지도 않았다. 그들은 행인을 위협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았으며 밤이면 술을 진탕 마셨다.

따분한 일과에 그들은 곧 주먹이 심심해졌다. 계약 기간은 한참 남아 있었지만 근육질의 사내들에게 굳이 덤비는 간덩어리 큰 피해자는 없었다. 공사장을 지키는 것이 심심해질 즈음 무리 중 하나가 묘안을 냈다.

‘삥을 뜯자!’

무리는 신이 나서 고향에서처럼 소시민의 주머니를 털었다. 혹여 반항이 돌아오면 흠씬 쥐어 패 주기도 했다. 그리고 당연히도 벨루아의 영주는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더러운 뒤를 봐 주며 상부상조하는데 이 정도 일을 눈 못 감아 주겠는가. 그리하여 그들은 공사장에 남아 있는 시간보다 불쌍한 행인들을 겁박하는 시간이 좀 더 길어졌다. 오늘도 그런 날 중에 하나였다.

멀리서 달려오는 질 좋은 마차를 보고 빅터는 생각했다.

‘털면 돈이 많이 나오겠구만.’

무리 중 하나가 솜씨 좋게 바퀴로 쇠막대를 던졌다. 그 상태로 몇 바퀴 구르던 마차가 턱 걸려든 이물질을 버티지 못하고 삐걱였다. 갑자기 떨어져 나간 바퀴에 차체가 덜컹거리자 말들이 놀라 발을 굴렀다. 곧 사나운 소리를 내며 마차가 멈춰 섰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아가씨.”

곧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 떡 벌어진 어깨가 위협적이긴 했지만 껄렁해 보이는 걸음걸이에서 별 볼 일 없는 태가 났다. 바퀴를 확인한 남자가 마부와 몇 마디 말을 나누는 사이, 그들 무리가 가까이로 다가갔다.

갑자기 주변을 포위한 사내들을 보고 남자가 놀라 소리쳤다.

“깜짝이야!”

좀 위기감 없어 보이는 목소리긴 했지만 불량배들은 개의치 않고 남자를 협박했다.

“가진 것 다 내놔!”

그 말과 동시에 마차의 문이 열렸다. 사나운 소음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놀라 움찔했다. 보통 산적들이 등장하면 대부분은 마차에서 끌려 나올 때까지 숨어 몸을 떨 뿐이다. 지나치게 당당한 등장에 무리는 긴장했다. 그러나 그들의 굳은 어깨는 곧 부드럽게 풀어졌다.

“무슨 소란이지?”

안에서 나온 것은 어려 보이는 여자 하나였다. 표독스러운 목소리는 그녀의 붉은 머리칼과 제법 잘 어울렸다. 사납게 치켜뜬 눈매에서 오만함이 읽혔다. 그뿐인가. 산적질에 도가 튼 왈패들은 여자가 걸치고 있는 옷가지가 꽤나 비싼 물건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가난한 평민들의 옷엔 장식물이란 게 존재치 않는다. 그러나 여자의 블리오엔 온갖 장식이 덕지덕지 붙어 눈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보온보다는 미용에 그 기능을 치중한 듯 보이는 휘황찬란한 옷이었다. 건수를 물었다는 생각에 무리는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빅터가 기세 좋게 선창했다.

“좋은 말 할 때 돈이 될 만한 게 있으면 다 내놔!”

“그래! 그 예쁜 얼굴 찢기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마차는 고작 사람 네다섯이 들어갈 크기였고, 불량배들의 수는 무려 스물에 달했다. 마차 안에 탄 게 모두 장정이래도 우스울 판에 곱게 자란 듯 보이는 아가씨가 등장했다. 빅터는 입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마차 안에서 사람들을 끌어내!”

그 말에 몇몇이 무리 지어 마차로 다가갔다. 곧 그 안에서 나머지 사람들도 끌려 나왔다. 갈색 머리의 계집 하나와 은발의 남자 하나였다. 먼저 마차에서 내려섰던 남자까지 합해 하녀 하나와 호위 둘 정도의 조합인 듯했다.

마차나 걸친 물건에 아무런 무늬가 없는 것을 보고 귀족이 아님을 확인했다. 주인 되는 여자는 돈깨나 있는 부유한 집안의 과년한 딸쯤인 듯했다. 데리고 다니는 호위조차 변변찮아 반항 하나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게 다 무슨 짓이냐! 내가 누구 딸인지 알아?! 레이놀즈 상단가의 장녀다! 날 건들고도 무사할 것 같아?!”

아니나 다를까 여자가 밝힌 신분도 예상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녀를 꿇어앉히던 남자가 놀리듯이 비꼬았다.

“어이쿠, 무서워라.”

레이놀즈 상단이라면 분명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여자의 반항 어린 말에 섞인 미세한 자랑이 읽힐 정도로, 레이놀즈 상단의 수장은 꽤나 이름 있는 자산가였다.

그러나 무리는 입술에 머금은 비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유명세가 있긴 하나 그렇다고 모든 영지를 쥐락펴락할 정도로 대단한 인물도 아니다. 명예를 중시하는 귀족도 아닌 일개 상단가에서, 시집보내면 끝인 딸을 위해 금전을 지출해 가며 수색을 벌일 리는 없었다. 무리로서는 돈이나 뺏고 안전히 보내 준 뒤 적당히 숨어 지내면 그만이었다.

“진짜 대단하지도 않은 집안이 더 위세를 떤다니까.”

“졸부 집안의 딸이라면 가지고 다니는 돈은 많겠어!”

뜻밖의 부수입에 배가 다 불렀다. 불량배들이 낄낄거리며 마차를 뒤졌다. 사람이 그리 많이 필요한 일은 아니었으므로, 남은 여럿은 장난삼아 바닥에 꿇어앉힌 피해자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딘지 불만스러워 보이는 인상의 건방진 은발을 지나, 빅터의 시선이 갈색 머리의 여자에게로 꽂혔다. 쭉 고개를 숙이고 있어 몰랐는데 어쩐지 낯이 익었다.

“이년은……?”

긴가민가하게 중얼거리던 빅터의 말을 그의 친구가 받아쳤다.

“그년이잖아! 존과 캔서를 한 달간 침대 신세 지게 만든!”

그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제시에게로 향했다. 흥분한 무리들이 다가가 그녀를 끌어냈다.

“이년이 어디로 도망갔나 했더니, 다른 지방으로 가서 하녀로 일하고 있었어?”

“벨루아로 가는 길목에 우리가 있을 줄은 몰랐나 보지? 잘 만났다 이년아.”

험악한 인상의 근육질이 거칠게 침을 뱉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순순히 지시에 따르던 붉은 머리의 여자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내 하녀한테 뭘 하려는 거야? 더러운 손 저리 치워!”

“아가씨. 저희가 이년한테 아주 큰 볼일이 있거든요. 예쁜 얼굴 다쳐서 엉엉 울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원래 자리에 처박혀 있으세요.”

빅터가 그녀를 조롱하듯이 말했다. 그러나 간 큰 여자에게는 그의 협박이 그리 와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빅터에게로 달려들어 몸통을 부딪쳤다. 예상치 못한 돌진에 빅터는 반걸음 정도 뒤로 물러섰다.

곱게 자라 지금 상황이 진짜 위험한 줄도 모르나 보지. 빅터는 조금 짜증스럽게 그녀를 밀쳐냈다. 그는 홧김에 단검을 꺼내 들었다. 적당히 겁을 주고 도로 꿇어앉힐 생각이었다. 빅터가 걸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얼굴에 칼자국 나고 싶어? 어?!”

“우릴 보내 줘!”

그러나 붉은 머리의 여자는 앙칼지게 소리치며 다시 빅터에게로 달려들었다. 그에 빅터는 다소 당황했다. 여자의 힘이 꽤나 세어 쉽게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그는 몸을 뒤치어 겨우 여자를 뒤로 밀쳐 냈다. 그러나 아직 손에 단검을 쥐고 있었던 탓에 그 과정에서 그녀에게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여자의 팔이 기묘하게 뒤틀린 듯도 했지만, 제 딴에 칼을 피하려다 도리어 멍청하게 다친 모양새였다. 여자가 몸을 움찔하며 크게 신음했다.

“아……!”

소맷단이 잘려 나간 자리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곱게 자라 왔을 여자는 곧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리라. 몸에 상처를 남기는, 후환이 남을 만한 짓을 하다니. 빅터가 아차 하여 그녀의 얼굴을 살필 때였다. 그는 순간, 상처 입은 여자의 눈이 반짝였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전에 없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었다.

“히센, 쳐.”

히센이라 불린 남자가 벌떡 몸을 일으켜 그대로 앞에 있던 사내를 들이박았다. 여자들은 위협이 되지 않으리라 판단해 남자들의 양손만 묶어 억류해 둔 상태였다. 한데 그들을 묶었던 결박은 어느새 풀어져 있었다. 빅터가 놀라 주춤 뒤로 물러나는 사이 두엇이 바닥에 처박혔다.

히센이라는 사내는 너무도 쉽게 무리에게서 무기를 빼앗은 뒤 순식간에 상황을 정돈했다. 표정만 굳힐 뿐 어떤 반항도 하지 않아 애송이로 여겼던 은발 역시 한 사람의 몫을 잘 해내고 있었다. 동료를 때려눕혔던 제시라는 여자의 무위는 당연히 무시할 수준이 못 되었다.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 빅터는 멍하니 서 있다가 제시에게 뒷목을 얻어맞고 그대로 뻗었다.

그는 흐려지는 눈으로도 제 앞에서 벌어진 난장판을 살피는 걸 멈추지 않았다. 어지러운 싸움 속, 홀로 고고히 선 여자가 붉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이 혼란은 자신과 연관이 없다는 듯 그녀는 일행이 적을 때려눕히는 광경을 관망하고만 있었다.

‘저년이 우두머리다.’

명령하는 사람을 구속하면 수하들도 무기를 놓을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별 볼 일 없는 어린 계집임에야. 빅터는 제 옆에 떨어진 단검을 집어 들고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방금의 상황과 반대되게도, 이번에 그녀에게 달려든 것은 자신 쪽이었다.

‘잡았다!’

빅터가 희열에 찬 얼굴로 그녀에게 단검을 휘두르려 할 때였다. 여자가 무심한 얼굴로 흘깃 그를 돌아보았다. 찰나의 순간 눈이 마주친 듯싶었으나, 자신의 착각이 분명했다. 뭣도 모를 연약한 계집이 장정이 움직이는 속도를 따라올 리 없지 않은가.

“악!”

그러나 빅터는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무엇에 맞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빅터는 사타구니에서 느껴지는, 세상이 쪼개지는 고통에 온몸을 벌벌 떨었다. 그가 눈을 까뒤집으며 소리쳤다.

“이, 이 미친년이……!”

무표정한 낯의 여자가 다시 발을 휘둘렀다. 뒤통수에 어마어마한 고통이 밀려오며 정신이 혼미해졌다. 빅터는 다시 일어서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의 입술에서 앓는 신음이 쏟아졌다.

“아…….”

기억은 거기에서 끊겼다.

* * *

벨루아의 영주, 체스터 벨루아는 새벽부터 헐레벌떡 침실 밖으로 달려 나왔다. 그는 평소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숙면을 취하곤 했었으나, 신변에 큰 위험이 닥쳤을 때 엎어진 몸을 일으키지 못할 정도로 생존 본능이 모자라지는 않았다.

그랬다. 이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벨루아 자작을 깨운 건 하인의 거의 절규 섞인 외침이었다. 체스터 벨루아는 제 앞에서 언성을 높이는 수하의 건방짐을 두고 보는 인물이 아니었으나, 설명을 듣고 나자 이번만큼은 그도 상대를 책할 수 없었다. 그의 발이 전에 없이 빠르게 움직였다. 체스터 벨루아는 하인이 안내해 주는 방에 다다라 문을 열고는 그만 신음했다.

침대 위에는 한 창백한 낯의 여자가 누워 있었다. 언뜻 보아도 병색이 완연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가 황급히 안으로 들어서며 의사에게 물었다.

“뭐지, 어떻게 된 거지? 상태가 많이 심각하신가?”

“상처가 깊은 편은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심신이 미력하시어 큰 충격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베인 상처에 놀라 기절하신 후 도통 깨질 않으신다고 합니다.”

의사가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여자의 상태를 읊었다. 체스터 벨루아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더니 깊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어쩌다 내 영지에서…… 하필 아탈렌타의 대공비가…….”

지금 침상 위에 누워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건 바로 아탈렌타의 대공비였다. 무슨 이런 날벼락 같은 일이 다 있단 말인가.

하인이 전한 정황은 이러했다. ‘하필’ 신분을 숨기고 여행을 떠났던 대공비는 ‘하필’ 벨루아로 향하는 길목에서 산적을 마주쳤다. 그저 돈만 빼앗고 넘어갔으면 신분을 속여 벌어진 일이라 은근슬쩍 책임을 떠넘기기라도 하겠거늘, 산적들은 ‘하필’ 대공비를 상처 입히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산적은 ‘하필’ 벨루아 자작이 증축 공사를 위해 불러들였던 깡패들이었다!

체스터 벨루아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가 거의 울먹거리며 소리쳤다.

“하필, 하필!”

아탈렌타의 대공비라면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아니, 들어 본 것뿐만 아니라 친분이 있는 귀족들과 여러 뒷말을 나누기도 했었다.

레테 백작가의 차녀가 괴물에게 팔려 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애도를 표하면서도 내심 그녀에게 약속된 불행을 즐겼으며, 대공비가 가신들을 휘어잡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사람의 입을 통하다 보니 과장된 것 아니겠냐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대공이 대공비로 인해 사람이 되었다는 소식이 건너 건너 들려왔을 때는 신기한 일도 다 있다며 한참 입방아를 찧기도 했다.

대공은 저주를 풀고 자신을 사람으로 되돌려 준 아내를 몹시 귀이 여겨 하루 종일 떨어지지를 않는다고 했다. 한낮에도 그녀를 집무실에 끌어들이곤 하며, 일과를 끝내고 나서는 초저녁부터 침실에 들어가 도통 나오는 법이 없다는 말까지. 객관적으로 대공 부부는 몹시 유명세를 타는 인물들이었고 세간엔 그들의 금슬과 관련된 온갖 외설적인 뒷이야기가 나돌았다.

그리고 지금 이 침대 위에 누운 여자가 바로 그 소문의 대공비라고 한다. 화제의 인물을 봤을 때 응당 내비칠 호기심 어린 시선은 온데간데없이, 벨루아 자작의 얼굴은 그저 암담했다.

‘대공은 당연히 크게 분노하겠지.’

대공이 이 소식을 듣는다면 부리나케 벨루아로 달려올 것이다. 대공은 당연히 진상을 파헤치길 원할 테고, 대공비를 상처 입힌 게 벨루아 자작이 끌어들인 왈패라는 사실도 어렵지 않게 밝혀낼 터였다. 대공이 무뢰한을 끌어들여 대공비를 상처 입힐 원인을 제공한 자를 용서할 리 없었다.

벨루아 자작은 믿겨지지 않는 불행에 울음이라도 터트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속이 답답해져 와 그는 힘겹게 목 근처의 단추를 끌렀다.

“벨루아 자작님 되십니까?”

벨루아 자작은 굼뜨게 눈을 들어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확인했다. 대공비의 호위로 보이는 기사가 예를 취하고는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대공비 전하의 호위 기사 히센 오스카입니다.”

“벨루아 자작가의 가주, 체스터 벨루아입니다. 호위 기사님은 어디 다치신 곳이 없으신지……?”

주인이 다치는 동안 당신은 어디 가서 뭘 하고 있었냐는, 귀족스러운 면박이었다.

호위만 제대로 일했다면 이러한 사달이 다 났겠는가. 체스터 벨루아는 대단한 무예가들을 불러들인 것이 아니었기에 몰려든 불량배들은 그저 그런 왈패에 불과했다. 수가 차이 난다고 해도 대공비의 호위쯤 되는 훈련받은 기사의 상대가 됐을 리 없다. 그 생각을 하자 체스터 벨루아는 죄 없는 호위 기사에게까지 적대감이 생겼다.

속에 담긴 말뜻을 알아챈 히센이 고개를 숙였다.

“대단한 실력의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거의 상황을 정리해 가던 와중 갑자기 달려든 인물이 있어……. 수가 열 배 가까이 차이가 나 제대로 된 호위가 불가능했습니다.”

히센은 대공비가 호위로 데려온 기사가 둘이었던 데 반해, 불량배 무리는 스물에 달했다고 전했다. 도망친 몇을 제외한 대부분을 직접 억류해 이송하기도 했으니 호위로서는 소임을 다한 셈이었다.

불리한 화제가 등장하자 벨루아 자작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악한 무리들을 처단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벨루아 자작이 남긴 공치사에 히센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제게 주어진 일인 것을요. 다만 대공비 전하께서 크게 다치어 심려가 큽니다.”

히센이 우울한 표정으로 대공비를 응시했다. 대공비의 상처를 확인한 그의 눈에 분노가 서렸다.

“그 음습한 무리들을, 대공께선 절대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체스터 벨루아는 황급히 히센의 팔을 잡으며 부드러운 음성을 내었다.

“그러지 말고 들어가서 쉬십시오. 주인이 걱정되는 마음은 응당 이해하나, 이러다가 기사님 몸까지 축나지 않겠습니까? 불편함이 없으시도록 대공비께 하녀들과 의료진을 내드리지요.”

“감사한 제안이나 그래도 여기 있겠습니다.”

히센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대공비만 두고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물론 히센은 아스티나의 몸 상태를 몹시 잘 알고 있었고, 그녀에겐 자신의 호위 따위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았으나 어찌 됐건 이는 호위 기사라면 응당 보여야 할 태도였다.

“됐으니까 들어가서 쉬어요. 여긴 이제부터 내가 있을 테니.”

체스터 벨루아가 내뱉으려던 말은 맞았으나, 그 태를 빌린 것은 자작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벨루아 자작과 히센의 시선이 문가로 향했다. 삐딱하게 문틈에 기대서 있던 아서가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분은……?”

“아서 에스테반입니다.”

아서가 짧게 인사하며 손을 내밀었다. 벨루아 자작은 얼떨결에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아서 에스테반, 에스테반…….

기억을 더듬던 벨루아 자작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이어진 아서의 비릿한 웃음에 벨루아 자작은 혀를 깨물 뻔했다.

“아탈렌타 대공 전하의 사촌 되는 사람이죠.”

공격받은 건 대공비뿐만이 아니었다. 대공의 친인척까지 등장하자 벨루아 자작은 도통 맨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그 새벽, 체스터 벨루아는 쓰러진 척 눈만 감은 아스티나 대신 진짜 기절을 했다.

* * *

“다 갔으니까 그만 일어나.”

아서의 말에 아스티나는 눈을 떴다. 오랜 시간 눈을 감고 있었더니 시야가 뿌옜다. 아스티나가 몇 번 눈을 깜빡이고는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벨루아 자작이 기절을 해서. 주인 먼저 챙기라고 다 내보냈지.”

아서가 어깨를 으쓱이며 침대 옆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의 말대로 방 안은 텅 비어 둘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아스티나는 붕대가 감긴 손을 뻗어 상처를 확인했다. 비쳐 나온 피는 이미 암적색으로 변해 있었다. 출혈은 진작 멎은 듯했다.

깊게 베이진 않았으나 면적이 큰 편이라, 과연 곱게 자란 십 대라면 기겁했을 법한 상처였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평생을 굴렀던 그녀로서는 손끝이 종이에 베인 정도의 무감함으로 와닿았다. 흉터가 남지 않을 정도로 베인 깊이를 조절하였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아스티나가 팔목에서 시선을 떼며 물었다.

“제시는?”

“방에서 쉬고 있어. 그딴 대책 없는 계획을 출발하고 나서야 알려 주니까 애가 겁을 먹잖아.”

은인이 자신 때문에 검상까지 입으리라는 말에 제시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아서의 비난에 아스티나가 설핏 웃었다.

“마차 안에서는 제시에게 그리도 시비를 걸어 대더니.”

“그건 걔와 나 사이의 일이지. 걔가 놀란 건 놀란 거고.”

아서가 짜증스럽게 답했다.

그가 굳이 이곳까지 따라온 데는 당연히 사적인 목적이 있었다. 아서는 벨루아 영지에서 어떻게든 제시의 흠을 잡아 그녀를 고향에 두고 올 생각이었다. 혹은 가족들과의 정을 강조하여 이곳을 떠날 수 없게 만들든지.

당연히 아스티나가 세운 계획에 있어 자신은 방해만 되리라 생각했는데, 제 존재를 알고 기절까지 한 벨루아 자작을 보자 기분이 영 찜찜해졌다. 아스티나는 대공의 사촌이라는 존재가 벨루아 자작에게 더한 압박을 주리라는 걸, 분명 알았을 것이다.

“이러려고 내 동행을 허락했지?”

“알고 따라온 줄 알았다.”

“계획을 마차 안에서나 밝혀 놓고?”

아서는 아스티나가 이 문제를 신사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리라 생각했다. 그녀가 살생을 할 생각은 아니라 밝히기도 했으니, 굳이 직접 벨루아로 찾아가는 건 제시를 내보이며 영주를 온건한 말로 타이르기 위함이라고 여겼다.

얼뜨기 같은 걸음을 연습해야 했던 히센이 그 우스꽝스러움이 당최 무엇에 필요한가에 의심을 가지긴 했지만, 그도 깊게 파고들진 않았다. 충실한 수하는 주인의 명령에 이유를 찾지 않는 법이었으니까.

“말했다면 대공이 나를 보내지 않았을 거다.”

아스티나가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아서 에스테반, 너라면 기꺼이 사촌 형에게 고자질을 했겠지.”

“내일 벨루아로 달려온 형이 크게 화낼 텐데?”

“그가 부디 무섭게 성을 내어 줬으면 좋겠군.”

아스티나가 여유로운 음성으로 답했다.

제시의 복수를 위해 아스티나는 벨루아 영지의 상황을 속속히 전해 들었었다. 한참 불량배들에 관해 이야기하던 제시는 분통을 터트리며 그들을 이렇게 비난했었다.

‘영지 안에서만 행패를 부리는 게 아니에요. 영지 밖 길목에서 여행자들을 붙잡고 돈을 뜯기도 합니다. 순전히 재미로 그러는 것입니다. 유흥비를 얻겠다면서요.’

아스티나의 계획은 그렇게 세워졌다. 그녀는 불량배들이 일행을 부유한 평민 정도로 착각하고 접근할 수 있게 적당한 의복을 두르고, 상단주의 철없는 딸을 연기해 갈취를 유도했다. 실랑이하던 와중 그들 무리 중 하나가 자신을 상처 입히게 하는 것이 밑손질의 끝이었다. 이젠 대공이 도착하여 상황을 정리해 줄 일만 남았다.

그 완벽한 계획엔 단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아서가 인상을 쓰며 따지고 들었다.

“너, 기분 나빠. 그런 식으로 사람들 조종하면 재미있어? 내가 네 장기 말 같아?”

“정의 구현을 하고는 욕을 들어 먹으니 나라도 조금 억울한데.”

“피를 줄줄 흘리고도 그런 말이 나와?”

“아서 에스테반, 대륙을 유랑하고 온 주제에 담이 작구나. 이 상처는 한 달 정도면 다 아물 거다. 흉터가 사라지려면 좀 더 걸리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가치가 있지.”

아스티나가 그리 말하며 붕대의 매듭을 풀었다. 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아서에게 팔을 내보였다. 곧이어 드러난 검상에 아서가 반사적으로 상체를 뒤로 물렸다. 길게 난 베인 자리가 몹시 아파 보이는데도 그녀는 내내 무표정했다.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 보였던 앓는 모습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아스티나는 대수롭지 않게 붕대를 다시 감았다. 어디서 연습이라도 한 듯 어설픈 구석 없이, 매듭은 도로 말끔해졌다.

“내가 제시의 일에 대신 화내 줄 수는 없어. 그랬다면 분명 웃음거리가 됐을 거다. 나는 벨루아 자작과 그 패거리에 의해 직접 상해를 입은 피해자가 되어야 했어. 그래야 그들을 지탄할 정당한 당위가 생기지.”

“그리고 네가 다쳤지.”

“이게 가장 빠르고 효율적이야.”

아서는 입을 벙긋거리다가 이내 침묵을 택했다. 저 나사 빠진 여자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효율을 이유로 제 팔을 살라 먹는 사람은 듣도 보도 못했다. 형과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부부 싸움을 벌였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그녀는 공감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아서가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걔가 네 상처 보고 달달 떨던 거 못 봤어? 걔도 이런 해결은 안 원했을 거야.”

“난 네가 제시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후배랍시고 그딴 걸 들이밀면 누구나 화내! 아탈렌타 기사단이 장난인 줄 알아?”

한곳에 오래 머무는 성미가 아닌지라 입단하지 못하고 떠나긴 했지만, 아서는 아탈렌타 기사단에 대한 애착이 컸다. 테리오드의 끈기 있는 보살핌을 받았던 장소이기도 하거니와 대륙을 떠도는 동안 그의 목을 지킨 기술의 전부가 그곳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역사 깊은 집단에 대공비가 내킨답시고 개인적으로 집어넣은 여자가 마음에 들 수 있겠는가. 아스티나가 그녀를 명목상의 호위로 쓴다고 말했다면 아서도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공비는 제시를 ‘진짜 기사’로 키우겠다고 했다.

“이건 걔 인생을 위해서 하는 말이기도 해. 걔가 걷는 길마다 가시밭길로 변할 거라고.”

제시에 대한 반감과 별개로, 아서는 이 일을 반박하는 데 있어 항상 사실만 말해 왔다. 아탈렌타 기사단에 이례적으로 들어갈 여기사의 존재와 그로 인해 남들이 입씨름할 정통성의 상실, 쏟아질 비난 등을 차치하고서라도, 아서는 그로 인해 제시의 인생 역시 만만찮게 물어뜯겨질 것을 알았다.

대공비가 효율을 생각한다면 이보다 어불성설인 이야기가 또 없었다. 기사가 되는 과정에서 제시는 누구보다 많은 열기를 소모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대공비처럼 성격이 무던한 인물도 아니었다.

“아서, 네가 모든 걸 남들보다 잘 안다고 착각하지 마라.”

“뭐?”

“제시는 그걸 몰랐을까? 내가 그걸 알지 못해서 그녀의 재능을 응원했을까? 네 걱정은 비열할 뿐이구나.”

“대체 무슨 말이야 그게?”

“제시가 선택한 인생은 그녀가 살게 내버려 두라는 거다.”

아스티나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덧붙였다.

“이번 일에 방해도 하지 말고.”

아서는 잠시 아스티나를 노려보았다. 당연히도 그녀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기에, 결국 그가 먼저 질린 얼굴로 일어섰다.

“몰라. 그건 너 알아서 해. 팔에 칼자국까지 내면서 벌인 일을 방해할 생각은 없어.”

“네가 갈수록 철이 드는 듯해 뿌듯하군.”

아스티나의 칭찬에 아서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지금 이 상황에서 철들 필요가 있는 건 너야. 형이 나처럼 간단히 물러설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

아서의 예언은 한나절 뒤 고스란히 현실이 되었다.

* * *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벼락같은 외침에 벨루아 자작은 어깨를 움츠렸다. 지난 새벽 아탈렌타령으로 파발을 부쳤을 때부터 익히 예상한 반응이긴 했으나, 무서운 기색에 위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출발한 듯 정오 무렵 벨루아에 다다른 대공은 곧장 자신의 아내를 만나러 왔다.

“대공 전하, 고정하시고…….”

“지금 내가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귀 경은 내 아내가 다친 게 보이지도 않는가 봅니다!”

“아이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대공의 격노에 벨루아 자작이 납작 엎드렸다. 자작과 대공이라는 계급 격차, 몇 배나 차이나는 영지의 규모, 그리고 개인적인 무력에서까지도 벨루아 자작은 대공에 비해 우세한 점이 단 하나도 없었다.

영지 관리를 못 했다는 이유로 이렇게까지 성을 내는데, 그 불량배가 자신이 불러들인 치들임을 알게 되면 어떤 보복이 돌아올까. 벨루아 자작은 스스로의 기구함을 저주했다.

그때였다. 도통 깨지 않던 대공비가 마침내 눈을 떴다. 밤새 고통에 신음한 탓인지 그녀는 더욱 청초한 낯을 하고 있었다. 대공을 발견한 대공비가 몸을 벌떡 일으키려다 말고 멈칫했다.

“아……!”

아스티나가 크게 신음하며 팔을 감싸 쥐었다. 테리오드는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끌어안았다.

“부인, 괜찮습니까?”

도통 진정이 되지 않았던 통에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다. 오늘 새벽 사람으로 변하자마자 아스티나가 다쳤다는 말을 들어야 했던 테리오드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벨루아 자작의 사병은 노발대발하는 대공을 보고 소식을 고해바치는 내내 달달 떨어야 했다.

벨루아로 가서 제시의 복수를 해 주겠다더니, 그 길목에서 산적의 습격을 겪었다고 했다. 강건한 대공비가 다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정도라면 필시 무서운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테리오드는 의복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허겁지겁 벨루아로 향했다.

“테리오드……?”

아스티나가 투명한 눈을 깜빡이며 대공의 이름을 불렀다. 테리오드가 황급히 상태를 물으려 할 때였다. 그녀는 다짜고짜 그에게로 안겨 왔다. 당황한 테리오드가 몸을 물리기도 전에 그녀가 흐느꼈다.

“전하, 정말 두려웠습니다. 너무도 무서웠어요……!”

“부인……?”

부인이 괴한의 습격에 두려워 몸을 떨고 있는데 어째서 소름이 돋는가.

테리오드는 아스티나가 아무리 크게 다쳐도 이런 반응을 내보일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잠시 멈칫했다. 테리오드는 그녀가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곧장 이해했다.

테리오드는 어색하게 공중에 떠 있던 팔을 움직여 그대로 아스티나를 부둥켜안았다.

“부인,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흑……. 무서운 괴한들이 저를 위협하여, 저는 도무지…….”

아스티나가 횡설수설하며 눈물을 떨구었다. 가녀리게 몸을 떠는 모습이 동정심을 자극했다. 직접 그녀를 공격한 것이 아님에도, 벨루아 자작은 스스로가 파렴치한이 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건 대공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화가 가득했던 대공의 음성에 극심한 열기가 더해졌다.

“뭣들 하는 것인가! 당장 문제를 일으킨 패거리들을 모두 잡아들이지 않고! 그게 누가 되든 결코 편히 죽지는 못할 것이다!”

몸을 일으킨 대공이 벼락같이 소리쳤다. 마지막 이성으로 지키고 있던 존대까지 집어던졌다. 그가 흉흉한 눈으로 주변에 모인 이들을 노려보았다.

“내 아내를 저렇게 만든 자들은 어디 있는가?!”

“대부분은 관사에 구속해 둔 상태입니다. 도망간 나머지 잔당도 수색을 벌이고 있으니 부디 진정…….”

진땀을 빼는 벨루아 자작에게 대공이 무서운 얼굴로 다가섰다. 앞을 가로막은 남자의 위압감에 벨루아 자작은 결국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는 제 위로 진 대공의 그림자에서 자신의 암담한 미래를 읽었다.

대공의 눈동자는 어느새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테리오드는 노성과는 거리가 먼, 싸늘하게 식은 분노를 말했다.

“벨루아 자작, 만약 내 아내를 저리 만든 범인 전부를 내오지 못한다면 그대에게도 죄를 묻겠소.”

벨루아 자작은 무어라 대답하지도 못했다. 그 패거리를 불러들이든 그렇지 않든, 그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등 뒤가 온통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었다. 벨루아 자작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 입을 겨우 달싹였다.

“수…… 수사에 최선을 다해 협조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테리오드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가 몸을 돌려 다시 아스티나에게로 다가가며 명했다.

“아내와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으니 모두 나가시오.”

사용인들은 물론이거니와 벨루아 자작까지 황급히 문으로 내달렸다. 상처 입은 대공비를 보는 대공의 눈이 너무도 열렬하여 잘못 거슬렸다간 화를 입겠다 싶었다. 그들의 금슬을 말하는 소문은 과장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니, 오히려 축소된 듯한 감이 있었다.

모두가 사라지고 문이 닫혔다.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 앓았느냔 듯 아스티나가 담백하게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잘했다고요?”

테리오드가 그에 반발하듯 되물었다. 벨루아 자작이 있던 때보다는 가라앉은 기색이었지만, 어쨌든 분노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목소리엔 미약한 원망마저도 숨어 있었다.

아스티나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계획을 눈치채고 같이 화를 내 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어느 정도는 진심이 담겨 있었던 모양이었다.

테리오드가 사나운 걸음으로 아스티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그러나 벨루아 자작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녀를 무섭게 내려다보는 대신, 부드럽게 팔을 잡고 상처를 살펴 왔다.

“믿고 보냈는데 이게 뭡니까.”

“흉이 지진 않을 겁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안 다칠 수 있었던 것을, 굳이 다쳐 오시니 하는 말입니다.”

그가 심각한 얼굴로 피가 배어 나온 부분을 짚었다. 상처와 그의 손 사이엔 붕대가 감겨 있는데도 베인 자리가 홧홧해졌다. 아스티나는 내색하지 않고 담담히 대답했다.

“검사로서 이 정도 상처가 대수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다치지 않았다면 해결이 좀 더 번거로워졌을 겁니다.”

테리오드가 입을 다물고는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자신을 책하는 시선이 열렬하여 아스티나는 다소 면구한 기분이 되었다. 아서의 예언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대공은 이 일을 그냥 넘어가진 않을 눈치였다. 그녀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주변 사람에겐 다른 온도로 와닿았던 듯했다.

아스티나는 새삼 지금이 피가 낭자한 정복의 시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되새겼다. 이 평화로운 대륙에도 목숨만 부지하면 행운이라 여기던 때가 분명 있었다.

아스티나가 미소 지었다.

“걱정하셨습니까.”

그 모습에 테리오드는 숨이 턱 막혀 왔다. 분명 화가 났는데 웃는 얼굴을 보니 무어라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이 일의 잘못된 점을 모른다면 앞으로도 비슷한 행동을 할 것이다. 테리오드가 아스티나를 책망하듯 말했다.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마차를 정비할 시간도 아까워 직접 말을 내달려 왔습니다. 왜 미리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까?”

“대공께선 다정하시니까요.”

“…….”

“걱정하실 줄 알았습니다.”

“알고도 그리하셨단 말씀이십니까?”

그가 허탈한 얼굴로 침대맡에 앉았다. 하기야 저 영민한 여자가 그것까지 셈하지 않았을 리 없다. 테리오드는 그녀가 참으로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모두의 반응을 예상하고는 저만 아는 판을 짜 버렸다. 테리오드는 자신이 자해 공갈의 공범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그 말에 테리오드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아스티나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자신이 멀쩡하다는 걸 내보이듯 느리게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에 그치지 않고 붕대까지 풀어 보이려는 아스티나의 손을, 테리오드가 붙잡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일이었습니까? 그대에겐 그대가 다치는 것이 그렇게 별것 아닌 일입니까?”

결국, 테리오드는 이 말이 하고 싶었다.

“왜 그렇게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아스티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생각을 타인에게 완전히 이해시킬 수는 없었다. 지난 생을 말해 봤자 정신병자 취급 외의 것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아스티나는 한 발자국을 디뎌 그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별것 아닌 상처입니다.”

“칼에 베이는 일을 사람들은 보통 별것이라고 합니다.”

상대는 진지하게 한 말임을 알았지만, 아스티나는 왠지 그것이 농같이 느껴졌다. 아스티나는 침대 위에 앉은 테리오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손을 뻗어 테리오드의 어깨를 짚었다.

“전하. 정말 아픈 상처는 이 안, 심장 가장 깊숙한 곳에 납니다.”

손끝이 그대로 테리오드의 가슴팍 위로 미끄러졌다. 무예를 익힌 테리오드는 그녀가 정확히 자신의 심장 근처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저를 꿰뚫는 검 같아 차마 저지하지 못했다.

아스티나가 설핏 웃으며 속삭였다.

“그래서 아무도 볼 수가 없지요.”

테리오드는 머리 위로 기울어진 그녀의 낯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그대로 삼키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테리오드가 무의식으로 턱을 들었을 때였다. 아스티나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스티나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녀가 문가를 응시하며 말했다.

“누가 옵니다.”

그 말에 테리오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스티나는 다시 침대로 들어가 앉고는 이불을 덮었다. 그녀가 완벽히 초췌한 모습을 재연했을 즈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는 허락에 하인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등장했다. 그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영주님께서 억류해 둔 범인들을 직접 심문하실 것인지 여쭈셨습니다.”

“벨루아 자작이?”

테리오드가 미간을 좁히자 하인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감히 대공비 전하를 해치려 한 자들이니 처벌은 전적으로 대공께 맡기시겠다고 합니다.”

달달 떨면서도 더듬거리지 않고 긴 문장을 읊는 것을 보아, 분명 벨루아 자작이 꼭 그 말을 전하라 시킨 듯했다. 상대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었는데 불쾌할 까닭이 없다. 아스티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숨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리오드는 비틀거리는 아스티나를 발견하고는 재빨리 부축했다. 그녀가 아무렇지 않다는 걸 아는 그도 순간 당황했을 정도로 실감 나는 연기였다.

“괜찮으십니까, 부인.”

“예, 순간 몸에 힘이 빠져…….”

테리오드가 흘긋 문가에 선 하인을 넘겨보며 말했다.

“그대를 상처 입힌 불한당들을 확인하고 올까 하는데, 혼자 있어도 되겠습니까?”

“심려치 마시고 다녀오세요.”

그 말에 테리오드가 아스티나를 제대로 일으켜 주었다. 아스티나가 불안정한 음성으로 하인에게 물었다.

“같이 왔던 하녀의 상태를 좀 보고 싶은데, 그녀는 어디 있지?”

“편히 쉬도록 영주님께서 손님방을 내주셨습니다.”

“안내를 부탁하겠네.”

하인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바깥에서 대기하던 하녀를 불렀다. 활달한 인상의 소녀가 눈을 반짝이며 인사했다. 아스티나는 남편에게 아쉬운 입맞춤을 남기는 척,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귀찮은 일을 떠넘겨서 죄송합니다. 저는 제시에게 가 보겠습니다.”

“그대가 원한 대로 혼쭐을 내 주고 오지요.”

테리오드 역시 아스티나의 뺨에 입 맞추며 대답했다. 아스티나는 내색하지 않고 대공에게서 몸을 떼어 냈다. 옆으로 다가온 하녀가 자연스럽게 그녀를 부축했다. 아스티나는 걸음이 지나치게 건강해 보이지 않도록 유의하며 방을 나섰다.

테리오드의 일 처리를 의심하진 않았다. 집무실에서 상대의 능력을 확인한 건 비단 테리오드뿐만이 아니었다. 아스티나는 그가 적당하게 그들을 골려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영주를 압박해 패거리들을 추방한 뒤, 그들 사이의 연결점을 찾아 금전적인 보상을 얻어 내는 것이 가장 원만한 해결이 아닐까. 그리한다면 패거리들도 더 이상 제시가 살았던 ‘푸른 나그네 집 여관’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아스티나는 제시가 은혜를 베푼 주인을 따라가는 모양새를 만드는 것이, 가족들의 허락을 구하는 데 있어서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하녀가 안내한 방은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무래도 대공의 눈치를 본 영주가 일행에게도 극진한 대접을 해 준 모양이었다.

“이쪽입니다.”

안내를 마친 하녀가 물러섰다. 아스티나는 짧게 노크를 남겼다.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던 아스티나가 그대로 문을 열었다.

허락이 들려오지 않았을 때 예상했듯, 방 안은 비어 있었다. 아스티나는 안쪽으로 이어진 욕실 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물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씻고 있는 건 아닌 듯했다. 내부를 둘러보던 아스티나는 한쪽에서 청소 중이던 하녀 하나를 발견했다. 뒷정리를 하고 있는 걸 보아 방의 주인이 자리를 비운 게 틀림없었다.

하녀가 황급히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아스티나가 물었다.

“제시는 어디 있지?”

“예?”

“나와 같이 온 아이 말이다. 분명 방에 있으라 하였는데.”

마차에서 계획을 설명할 적 언질 주었던 주의 사항이었다. 아스티나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며 이부자리를 살폈다. 제시의 흔적은 모두 말끔히 정리되어 사람이 머물렀던 자리 같지 않았다.

“아, 대공께서 도착하셨다는 소식을 듣더니 가족들을 만나러 간다고 하여 옷을 챙겨 드렸었습니다.”

아스티나가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녀는 침대 위 기둥을 가만히 쓸다 말고 천천히 뒤를 돌았다. 제시의 부재를 고한 하녀를 내려다보며, 아스티나가 선뜩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 * *

“아직 멀었어요? 한참 걸었는데.”

“…….”

“진짜 맞게 가는 것 맞아? 나 떼어 내려는 건 아니고요?”

제시는 결국 걸음을 멈춰 세웠다. 뒤를 돌자 느긋이 그녀를 따라오던 아서도 제자리에 섰다. 제시가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좀 더 걸어야 하고, 맞게 가는 거 맞아요. 해 지기 전에 다녀올 거니까 길 잃을 걱정은 안 하셔도 되고요.”

“그럼 진작 설명을 좀 해 주시든가.”

아서의 비아냥 섞인 존대를 듣자 기분이 더더욱 바닥을 쳤다. 제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럴 거면 그냥 반말하셔도 돼요. 안 이를 테니까.”

실제로 지난번 히센에게 고해바치겠다 호언했을 때도 그녀는 결국 침묵을 택했다. 아서에게 제멋대로 몇 마디를 쏟아 내고는 심장이 뛰어서 그날 밤은 잠도 못 잤다.

세상엔 무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게 많았고 권위자의 친척이란 개중 가장 곤란한 축에 속했다. 대공비가 아서의 말을 곧이듣고 자신을 내쫓을 거라 생각지는 않았지만, 그 외에도 대공의 사촌이 자신을 괴롭힐 수 있는 방법은 수백 가지도 넘게 있었다.

그러나 아서는 심각하게 질이 나쁜 일은 벌인 적이 없었다. 그가 제시를 괴롭히는 방식은 이렇게 그녀를 따라와 연신 짜증 나게 쫑알대는 것뿐이었다. 좋게 말하면 순수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바보 같았다.

상대가 워낙 일차원적으로 굴었던 통에 제시는 종종 긴장을 풀고 그에게 건방진 반박을 돌려주기도 했다. 제시가 공손히 말대답을 하나 성질을 내면서 말대답을 하나 아서는 똑같은 온도로 화를 냈으니까.

아서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날 속여 넘기려는 걸 모를 것 같아요? 하여튼 음험해서는…….”

“그렇게 싫으시면 왜 따라오셨어요? 혼자 갈 수 있다니까.”

“무슨 일이 있으라고 혼자 보내? 요!”

아서가 인상을 팍 쓰며 대꾸하다 말고 재빨리 존대를 덧붙였다.

도통 화합하는 법이 없는 제시와 아서는 분명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사건을 설명하자면 한 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야 한다.

대공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시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가족들이었다. 방 안에 머물러 있으라는 당부가 있었던 통에 보고 싶은 것을 하루 내내 참아야 했다. 일이 마무리되는 듯 보이자 더 이상 가게 문을 잠그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제시는 들뜬 마음에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수상하게 몸을 숨겨 가며 이동하던 아서를 발견했다.

‘…….’

‘…….’

마주친 서로의 눈동자가 어색하게 굴렀다. 결국 침묵을 깨고 제시가 먼저 물었다.

‘어디 가세요?’

‘그런 게 있습니다.’

아서가 더없이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대공비 전하가 나가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는 너야말로…….’

이때다 싶어 반박하던 아서가 순간 눈을 가늘게 좁혔다.

‘너, 여기 지리 잘 알죠?’

‘네?’

‘같이 가면 되지. 서로 입 다물면 들킬 일이 뭐 있어요?’

타당한 의견이었다. 제시의 마음이 그와 함께 저택을 벗어나는 쪽으로 기울었다. 자신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아서는 신경 쓰지 않고 홀로 밖으로 나갈 것이다. 그가 혼자서 얄밉게 길거리를 노닐 것을 생각하니 이 기회가 아깝게 느껴졌다.

대공이 도착했으니 일은 마무리 단계에 다다랐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동조자가 생기자 죄책감도 반절이 되었다. 그들은 결국 급속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함께 외출을 감행했다.

‘혹시 모르니까 같이 움직여요.’

저택을 빠져나오자마자 갈라서려는 제시에게 아서는 동행을 제안했다. 제시가 혼자 가겠다고 하자 아서는 조심성 없이 군다며 펄쩍 뛰고는 호위를 자처했다. 조금 감동할 뻔했는데, 길거리 구경에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니 단순히 길 안내역이 필요했던 듯했다.

제시는 한숨을 삼키고는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쉬지 않고 움직인 덕에 머지않아 그들은 목적지에 다다랐다.

[푸른 나그네 집]

유치한 필체로 적힌 간판을 보며 아서가 물었다.

“여기야?”

“네, 목이 좋아서 손님이 많았어요.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요?”

“…….”

아차 하며 뒤늦게 ‘요’ 자를 덧붙이는 아서를 보며 제시는 입을 다물었다. 말을 말자.

제시는 정문으로 들어가는 대신 건물의 모퉁이를 돌아 뒷문으로 향했다. 영업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가게로 통하는 문은 잠가 두었을 것이다. 제시는 뒷문을 두드리고는 가족이 나오길 기다렸다.

머지않아 세 살 차이의 오빠, 빌이 등장했다. 잠시 눈을 끔뻑이던 빌이, 문 앞에 선 아서와 제시의 얼굴을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곧 그가 눈을 크게 뜨며 집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엄마! 제시가 아탈렌타에서 애인을 만들어 왔어!”

아차 한 제시는 황급히 오빠를 따라 들어가 오해를 정정해야 했다. 오랜만에 등장한 딸을 보러 가족들이 황급히 한자리로 모였다. 제시는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가족들에게 일이 모두 해결됐음을 알렸다. 제시는 대공비를 만나고 있었던 일을 최대한 자세하게 읊었다.

가족들이 의심의 눈을 거두지 않았던 통에 아서는 생각지도 않게 이야기의 증인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러나 내내 염려스러운 표정이던 어머니는 제시의 설명이 끝난 후에도 굳어진 낯을 숨기지 못했다.

“그…… 정말 괜찮은 거니? 물론 대공비 전하께는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지만 말이다. 네가 검을 배운다는 것이…….”

“위험하지 않겠니?”

아버지가 말을 받으며 제시를 걱정스런 눈으로 응시했다. 제시의 표정이 굳어 들었다. 제시의 뒤에 서 있던 아서는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목덜미를 보며 혀를 찼다. 아스티나는 자신에게 모든 걸 다 아는 듯이 굴지 말라고 말했지만, 이 보라. 제시의 가족들조차 반대의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아서는 남몰래 고소를 머금었다.

그의 본 목적은 바로 제시의 집에 함께 찾아가 가족들이 그녀를 포기시킬 수 있도록 구슬리는 것이었다. 한데 손쓸 필요도 없이 상황은 정확히 그의 입맛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긁어 부스럼을 낼 필요는 없어 아서는 잠자코 침묵했다.

제시가 빨개진 얼굴로 열심히 해명했다.

“대공비 전하께서는 내가 열심히 수련하면 기사가 될 수 있다고 하셨어.”

“말도 안 돼.”

빌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제시의 어머니는 그 말에 딸이 상처받을까 걱정이 되었는지 아들의 어깨를 약하게 때렸다. 물론 그렇다고 그녀가 제시의 편을 든 건 아니었다. 그녀는 아들보다는 부드러운 투로, 그러나 명료한 반대를 드러냈다.

“제시, 그러지 말고 일이 마무리됐으니 집으로 돌아오는 게 어떻겠니? 새 단장을 하려면 일손이 많이 필요한 걸 알지 않니. 넌 착한 딸이고.”

“그래, 딸아. 홀로 떠나 외지에 있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남자들이랑 같이 생활한다니, 나중에 시집갈 때도 흠이 될 게 뻔해.”

아버지가 진지한 얼굴로 훈계했다. 이것이 그야말로 보통의 반응이리라, 아서는 속으로 퉁명스레 생각했다.

가족들에게서 반대의 말밖에 나오지 않자 제시가 고개를 숙였다. 치맛자락을 쥔 제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서는 식탁 아래로 그녀가 잘게 손을 떠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아서가 그녀의 면전에 대고 현실적인 어려움을 읊었을 때 그러했듯, 제시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제시가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때마침 누군가 아래층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시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서는 그것이 젖어 드는 눈가를 숨기기 위함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누가 왔나 봐요, 제가 나가 볼게요.”

그러고는 손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짚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붉어진 눈가가 선명하여 그녀의 회피는 별반 효과가 없어 보였다. 아서는 내심 혀를 찼다.

“그, 제시의 선배라고 하셨지요?”

빌이 아서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시는 가족들이 놀랄 것을 염려해 대공의 사촌이라는 아서의 신상을 자세히 읊는 대신, 그저 선배로 소개했다. 목적도 이루기 전에 초를 칠 순 없어 아서도 그에 반발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아서는 ‘누가 저런 애의 선배냐’고 따져 묻는 대신 미간만 찌푸렸다.

“맞습니다.”

“선배님이 보시기엔 어떠세요. 정말 제시에게 재능이 있나요?”

곤란한 질문이라 아서는 입을 다물었다. 아니라 답하자니 자신의 안목 역시 부정하는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간 보아 온 바로, 제시는 제법 쓸 만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긍정을 표했다간 제시에게 도움을 주는 꼴이 될 것이다.

아서는 결국 대답하지 않았다. 아서의 침묵을 부정으로 해석한 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리가 없죠. 걔가 어릴 때부터 선머슴같이 굴긴 했지만, 이렇게 사고를 칠 줄이야.”

“빌! 동생한테 못하는 말이 없구나.”

“엄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솔직히 나는 이게 귀족 나리의 장난은 아닌지…….”

빌이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그들은 높으신 나리들이 벌인 일에 어쩔 수 없이 휩쓸리는 소시민에 불과했다. 벨루아 영주가 이번에 행한 폭거로 이를 더욱 절절히 체감했다.

아마 대공비는 힘을 꽤나 쓰는 제시를 보고 흥미를 가져 잠깐의 구경 상대로 삼은 게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면 여기사라는 말도 안 되는 미끼를 들어 제시를 현혹할 리가.

제시의 아버지도 그에 동의했다.

“대공비 전하가 크게 착각을 하신 게 틀림없어. 힘이 좀 세다고는 해도 말괄량이 제시가 여기사라니, 말도 안 되지.”

상황이 대공비의 선의를 의심하는 쪽으로 흘러가자 아서는 당황했다. 아스티나의 분별력이 의심당하는 건 아서에게도 몹시 모욕적인 일이었다. 그에게는 반항 한 번 못 하고 그녀에게 패배한 과거가 있었다.

이후에도 대련을 청해 겨루어 보았지만, 아스티나는 여유 있게 몇 합 검을 부딪고는 쉬이 그를 제압했다. 아서는 그녀가 원했다면 그 몇 합조차 거치지 못했을 것임을 알았다. 대련을 끝내자마자 줄줄이 쏟아진 지적들이 그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서는 창피로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 조언 모두를 마음에 새겼다.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발전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검에 관한 조언에 있어서 이견이 없을 정도로 아스티나는 출중한 실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제시의 가족들은 그 대단한 검사를 모욕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 대공비 전하께서도 여자신데 검에 대해 뭐 얼마나 아시겠어. 제시가 장정을 해치웠다니 호기심이 생기신 게지.”

“대공비 전하가 얼마나 대단한 검사인지 알고는 말하는 겁니까?”

빌이 뭣도 모르고 지껄이는 소리에, 아서가 발끈하여 소리쳤다. 생각도 거치지 않고 반사적으로 나온 반발이었다. 아서는 주먹까지 쥐어 보이며 따지고 들었다.

“두고 보세요! 대공비 전하의 말대로 제시는 훌륭한 기사가 될 겁니다. 대공비의 안목을 무시하다니 이런 얼토당토않은…….”

아서가 그리 외치다 말고 멈칫했다. 이게 아니었다.

“그…… 제시가 정말 재능이 있습니까?”

갑자기 터진 큰소리에 놀랐던 빌이,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되물었다. 아서는 제 등이 식은땀으로 젖어 드는 것을 느꼈다. 방금의 행동을 정정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말을 바꿨다간 얼간이 취급을 받을 게 분명했다.

“후…… 후배가 안 들어오네요. 제가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서는 더 멍청한 소리를 늘어놓는 대신, 우선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아서가 허둥지둥 제시가 나갔던 길을 뒤따랐다.

좁은 계단을 내려서며 아서는 내심 자책했다.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으면 됐을 것을, 쓸데없는 일에 발끈하여 계획을 망치고 말았다. 못내 무시하려 했던 제시의 재능을 제 입으로 인정한 셈이라 아서는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아서도 제시가 제법 괜찮은 검사가 될 것임은 예견할 수 있었다. 진도를 나가는 속도나, 히센의 가르침을 곧잘 습득하는 걸 보면 대공비의 선택이 틀리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검을 좀 쓰면 무엇 하겠는가. 제시는 평민인 데다 여자였다. 신분부터 성별까지, 그녀에겐 검을 다루는 데 있어 장점이 될 배경이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용병쯤으로 활약하는 것이면 몰라, 기사는 아니었다. 설령 그녀가 꿈을 이룬다 해도 입적하는 기사단이 아탈렌타여서는 안 됐다.

아서는 자신이 느끼는 거부감이 사감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지만, 그 반대에 당위가 없진 않았다. 심지어는 가족들까지도 제시의 꿈을 우려하고 있지 않은가. 가족들의 염려에는 아서의 사심 어린 얄팍한 걱정보다는 훨씬 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아서는 제시의 심지가 참으로 굳건하다고 생각했다. 골목대장 자리를 내려놓고 거리를 떠났을 적에도 가족들은 그녀를 교정하려 필사적으로 애썼을 것이다. 가족들의 반대를 익히 예상했을 것임에도 뜻을 굽히지 않는 제시에게 아서는 답답함마저 느꼈다.

‘제시는 그걸 몰랐을까? 나는 그걸 알지 못해서 그녀의 재능을 응원했을까? 네 걱정은 비열할 뿐이구나.’

갑자기 떠오른 아스티나의 목소리에, 아서는 순간 걸음을 멈춰 세웠다.

제시는 집으로 돌아와 소식을 전할 때 가족들이 반대할 것을 정녕 몰랐나?

아니라 답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제시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꿈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아서와 가족들만으로 그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도.

‘제시가 선택한 인생은 그녀가 살게 내버려 두라는 거다.’

그게 무슨 웃기는 소리야?

아서는 속 시원하게 아스티나의 말을 비웃으려 했지만 좀처럼 얼굴 근육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서야말로 자신이 선택한 인생을 마음대로 살고 있는 대표 주자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서는 스스로의 결정에 책임조차 진 적이 없었다. 일을 벌였을 때 수습하는 건 에스테반가나 아탈렌타가의 수하들이지 아서 본인이 아니었다.

“아오, 찜찜하게…….”

아서가 뒷머리를 사납게 긁었다. 가슴속 양심의 주장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그는 자책 대신 사납게 계단을 밟아 내려가는 것으로 답답함을 발산했다. 저 여자는 대체 왜 자리를 비워서 자신이 이런 쓸데없는 고민까지 하게 만드는가.

닫힌 문을 열어젖히며, 아서가 짜증스럽게 제시를 재촉했다.

“야! 왜 안 들어와요? 인사 다 했으면 그만 가…….”

아서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문 너머로 보이는 길목은 텅 비어 있었다. 아서는 밖으로 뛰쳐나가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그의 얼굴이 희게 질려 들었다.

제시가 없었다.

* * *

“뒤통수는 괜찮냐?”

찬 수건이 내밀어졌다. 빅터는 그것을 받아 목 뒤로 가져다 대며 앓는 소리를 냈다.

“너라면 괜찮겠냐? 그 단단한 구두 굽으로 처맞았는데?”

뒷덜미에서 느껴지는 따끔함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빅터는 잠시 이를 악물고는 눈을 감았다. 수건을 건네준 친구 역시 멀쩡한 꼴은 아니었다. 그의 눈두덩은 파랗다 못해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약소한 부상에 신께 감사를 전했다. 이보다 못한 처지의 동료들도 있었으므로.

“잡혀 들어간 놈들을 빼낼 방법은 없대?”

“대공이 직접 취조를 한다던데. 그 새끼들 인생은 종 쳤어.”

빅터는 그만 혀를 찼다. 어젯밤 습격했던 마차에 그런 거물이 타고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차라리 신분을 밝혔으면 몸에 상처를 내는 멍청한 실수는 않았을 것을, 레이놀즈 상단의 장녀를 사칭하여 일을 크게 키운 건 대공비 쪽이었다. 빅터가 분개하여 입술을 짓씹었다.

“멍청한 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공비 일행의 수가 많지 않아 다른 동료들이 포박당하는 틈을 타 도망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빅터는 그 와중 정신을 잃은 자신의 뺨을 후려쳐 깨워 주었던 친구에게 평생의 감사를 전했다.

“그래도 원한 갚을 기회는 생겼잖아.”

빅터는 가는 눈으로 안쪽 기둥에 묶인 여자를 돌아보았다. 그의 입술이 비열하게 일그러졌다. 정신을 잃은 여자는 앞으로 벌어질 일도 모르고 곤히 잠을 청하고 있었다.

지난밤, 겨우 대공비 일행에게서 도망쳤던 빅터와 친구는 발 빠르게 본거지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운 나쁘게 대단한 무예가들에게 걸린 것이라 잊고 넘어가려 했다. 어차피 벨루아의 영주는 자신들의 편이었고, 붙잡힌 동료들은 형식상의 재판만 몇 번 거친 후 빠져나올 것이 분명했다. 대장의 욕설이 돌아왔지만 그도 크게 걱정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빅터와 친구는 재수 없는 하루였다며 술을 조금 들이켜고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그 낙관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건 아침 해가 뜨고 나서였다. 몸 상태가 안 좋아 늘어져 있던 빅터는 제 뺨을 후려치는 매서운 손에 잠에서 깨어났다. 놀라 눈을 뜨자 대장이 무서운 얼굴로 소리쳤다.

‘이…… 이 무식한 새끼들아, 어제 대체 뭔 짓을 한 거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번쩍 잠이 달아났다. 동시에 밑층을 뒤집어엎는 소리가 났다. 대장은 빅터의 멱살을 잡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좆 되기 싫으면 빨리 짐 챙겨!’

빅터는 더듬더듬 눈곱을 떼어 내며 돈주머니부터 챙겨 들었다. 방 밖으로 달려 나오자 밀려드는 경비대가 보였다. 빅터는 대장과 같이 욕설을 지껄이며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누구 하나가 창문으로 뛰어내리자 모두가 그 뒤를 따랐다.

정신없이 도망친 그들은 각자 약속된 비밀 장소로 모여들었다. 외곽 농토 옆의 농기구 창고는 몸을 숨기기 적격이었다. 그러나 푹신한 짚단 위에 몸을 누일 수 있었던 동료의 수는 고작 열에 그쳤다. 마흔에 다다랐던 인원이 볼품없이 줄었다.

내내 뛰어다니느라 지친 숨을 진정시킨 후에야, 그들은 사태를 파악했다. 빅터는 전날 자신이 습격했던 인물이 대공비였음을 듣고는 제 불운에 저주를 쏟아부었다. 영주는 대공비를 공격한 혐의로 패거리 모두를 수배했다. 겁만 줄 생각이었던 빅터로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모두의 원망 어린 눈이 제게로 떨어지자 빅터는 자리를 박찼다.

‘이런 시팔! 그 미친년이 직접 지 손을 베었다니까요!’

빅터는 횡설수설 그때 벌어진 일을 설명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분명 이상했다. 자신은 단검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녀를 밀쳤었다. 한데 대공비는 귀신같이 그 검의 궤적을 쫓아 제 팔에 상처를 남기고야 말았다. 빅터가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대체 우리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

화를 조금 가라앉히고 나자 이상한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빅터의 친구도 같은 사실을 깨달았는지 갑자기 큰소리를 내었다.

‘대장! 그년이…… 그…… 그년이.’

‘그년이 누군데, 뭐, 왜!’

대장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그제야 생각을 정리한 것인지 기세 좋은 외침이 돌아왔다.

‘푸른 나그네 여관집 딸 말입니다! 그년이 대공비 옆에 붙어 있었습니다!’

‘뭐?’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몇 주 전만 해도 벨루아에 있었던 여관집 딸이 어째서 대공비의 하녀가 되어 있다는 말인가.

‘혹시 그년이 복수를 부탁한 건…….’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부정했다. 특히 이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대장이 가장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귀족 나리가 그런 귀찮은 일을.’

‘하지만 아탈렌타의 대공비는 자비롭기로 소문이 자자하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면 도무지 설명이 안 됩니다.’

대공비의 속내는 모를 일이었으나 제시의 원한은 분명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대장도 결론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벨루아의 영주가 자신들을 버리는 패로 삼고 혼자 살아남기로 했다는 것을. 난데없는 불행에 원망은 한 인물에게로 모여들었다.

‘그년만 아니었어도…….’

무리 중 하나가 살벌하게 속삭였다. 그리고 그건 그 자리에 모인 모두의 생각과도 정확히 일치했다. 대공비야 건드릴 수 없는 거물이라 안전히 영주의 보호를 받고 있겠지만, 제시라는 여자는 달랐다. 그녀를 분풀이 삼아 찢어 버리지 않고서는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았다.

빅터와 몇은 얼굴을 숨기고 푸른 나그네 집 여관으로 향했다. 집을 비웠으면 어쩌나 걱정하였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문을 열고 나온 건 다른 가족이 아닌 제시 본인이었다. 원망의 당사자가 모습을 드러냈음에 그들은 희희낙락하며 그녀를 납치해 왔다.

이제 저년을 성질껏 가지고 논 뒤 들판에 내버리는 일만 남았다. 그러면 보다 홀가분히 벨루아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영주에게 받아 챙긴 돈이 넉넉해 먼 여행을 감당할 수준은 되었다.

“그럼 이제 저년을 어떻게 요리하지?”

“저년도 저년이지만 대공비 얼굴에 칼자국 하나라도 내지 않고선 분이 안 풀릴 것 같은데.”

“아서라. 그러다 진짜 큰일 난다.”

빅터가 그리 말하며 단검을 빼 들었다. 대공비를 상처 입혔던 바로 그 물건이었다. 이 칼로 그는 대공비 대신, 제시의 얼굴을 난도질할 생각이었다.

“근데 약이 독했나, 통 안 깨는데?”

“누가 찬물 좀…….”

“근처에 물을 구할 데가 있나?”

“아니, 마침 밖에 비 오잖아. 받아서 쓰면 되겠는데.”

누군가 그리 말하며 버려진 양동이를 하나 집어 들었다. 마침 두어 시간쯤 전부터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도 그들의 도망을 응원하는 게 틀림없었다. 피와 발자국 등은 빗물이 말끔하게 씻어 내려 줄 것이다.

양동이를 든 남자가 바깥으로 설렁설렁 걸음을 옮길 때였다. 문 너머에서 선명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나갔었나?”

나무판자가 울리는 소리는 빗소리와 섞여 더욱 음습하게 들렸다.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아 그들은 오두막 안에 있는 사람들의 수를 한번 세어 보았다. 딱 열이 맞았다.

“이제야 경비대를 따돌린 놈 아냐?”

“아, 그런가 보네.”

비 때문에 괜히 감상적이 된 모양이었다. 자신은 그러지 않았던 척, 몇몇은 고작 노크 소리에 졸아붙은 일행의 심약함을 비웃었다. 이 오두막은 농기구를 보관하는 창고쯤으로 비슷한 건물이 근방에 수십 개나 더 있었다. 경비대가 이곳을 벌써 찾아냈을 리는 없었다.

무리 중 하나가 안심한 얼굴로 문을 열어 주었다. 한데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건 그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그들의 동료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경비대도 아니었다.

“저년은 뭐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은 붉은 머리칼의 여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오두막 안으로 걸음을 내딛더니, 물기가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등 뒤로 쓸어 넘겼다. 젖어 드는 나무 바닥을 보고 그녀가 혀를 찼다. 칠이 되지 않은 마루는 물기에 금방 썩어 들었다.

“말을 타고 우산을 쓸 수는 없어서.”

그 현실감 떨어지는 말이 모두의 정신을 깨웠다. 빅터가 경악한 얼굴로 대장을 향해 소리쳤다.

“대장, 대공비입니다!”

“내 수하를 돌려받고 싶은데.”

그에 아랑곳 않고 아스티나가 담백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는 거침없이 걸음을 디뎌 제시가 묶여 있는 기둥으로 걸어갔다. 그녀를 제지하려는 수하들에게 대장이 황급히 명령했다.

“대공비는 건드리지 마라!”

여관집 딸 정도야 베어도 후환이 없다. 그러나 대공비는 문제가 달랐다. 대공비 습격 명목으로 이리 급하게 벨루아를 떠나게 된 것인데 다른 혐의를 더하고 싶진 않았다. 대장이 대공비의 처리를 고민하는 사이, 그녀가 제시의 앞에 다다랐다.

아스티나는 상체를 숙여 제시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다행히도 아직 무슨 일을 당하진 않은 듯했다. 기절해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약 기운 때문이라면 곧 정신을 찾을 것이다. 제시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아스티나가 다시 몸을 일으켜 패거리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그제야 그녀의 허리춤에 달린 검집을 발견했다. 호신용으로 챙긴 물건이라기엔 다소 본격적이었다. 몇몇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설마 지금 저 검으로 장정들에게 맞서겠다는 것인가?

“제시를 데리고 가겠다.”

“누구 마음대로!”

발끈한 부하를 제지하며, 대장이 그나마 온건한 음성을 내었다.

“대공비 전하, 그냥 보내 줄 테니 좋은 말 할 때 가십시오. 우리는 저 여자만 받아 가면 됩니다.”

“안 될 말이다. 주군은 신하를 저버리지 않는 법이니까.”

교과서적인 답변은 자신들을 놀리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장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혼자서는 돌아가지 않으시겠다?”

“바로 맞혔네.”

아스티나가 턱을 들며 의연히 대답했다. 뼛속부터 고귀한 자의 당당함이 엿보였다. 그러나 밑바닥 인생은 그 귀족다움에 반발감 외의 것을 느끼지 못했다. 대장은 빠르게 결론 내렸다.

“켄서, 아벨. 대공비를 붙잡아 고이 내쫓아 드려라. 분풀이는 그 후에 하는 게 좋겠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두 남자를 보며, 아스티나는 조용히 검을 뽑아 들었다.

“나를 베지 않으면 너희가 죽을 것이다.”

켄서와 아벨이 대장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하느냐는 눈빛이었다. 얼굴엔 이 상황에 대한 귀찮음마저 엿보였다. 확실히 그들 무리는 시간 낭비를 해 봐야 좋을 것이 없는 입장이었다.

대장은 잠시 고민했다. 저 건방진 계집은 본인이 쉽게 건드리지 못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 이리 뻗대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 생각하자 상황을 번거롭게 만드는 대공비에 대한 짜증이 밀려들었다.

대장은 결국 생각을 바꿨다. 여기서 대공비를 안전히 보내 주어 봤자 그들의 꼬리를 밟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살해해 시체를 은폐한다면? 대공비의 행적을 수색하느라 뒤쫓는 인력도 어느 정도는 분산될 터였다.

‘쳐라.’

대장이 눈짓하자 무리들이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가까이 있던 켄서가 대공비에게로 달려 나갔다. 마지막 자비로 숨은 단번에 끊어 줄 생각이었다.

무리는 곧 피를 흘리며 쓰러질 여자를 위해 조롱 섞인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보내 줄 때 얌전히 떠났으면 좋았을 것을, 타고난 건방짐 덕분에 그녀는 결국 제 목숨까지도 내버리고 말았다. 대공비가 검을 고쳐 쥐었을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저것이 곧 바닥에 처박히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허윽. 흐…….”

그리고 대공비의 아밍 소드가 정확히 켄서의 갈비뼈 사이로 꽂혔다. 폐부가 찢겨 나가는 느낌에 켄서는 숨을 헐떡였다. 제대로 된 반항조차 못하리라 생각했던 여자가 망설임 없이 동료의 가슴을 찔렀다. 패거리들은 경악하여 제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했다.

“꺼흐윽…….”

그녀는 켄서의 몸을 완전히 꿰뚫는 대신 적당한 깊이에서 검을 뽑아냈다. 굳이 당장 숨을 끊어 놓지 않아도, 그는 곧 폐부에 혈액이 차 죽을 것이다. 무리는 그 동작이 지나치게 절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름에 목이 쭈뼛해짐과 동시, 대장이 억지로 그 느낌을 억누르며 소리쳤다.

“뭐 해?! 상대는 여자 하나야! 한꺼번에 족쳐!”

무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대공비에게 달려들었다. 믿는 구석 없이 홀로 이곳을 찾아온 것이 아님은 알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공비의 행동이 무모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거대한 몸집의 장정들이 자그마치 열이었다. 기껏해야 셋 정도를 상대하면 힘이 달릴 것이고, 모두가 달려들어 한꺼번에 공격하면 그러한 반항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아스티나는 뒤로 물러서 벽면을 등지고 섰다. 그녀가 자리를 잡음과 동시에 대장이 괴성을 내며 달려들었다. 그의 거대한 도끼가 바로 머리 위를 스쳤다.

아스티나는 몸을 숙여 쇄도한 날붙이를 피한 뒤 남자의 무릎을 베었다. 관절이 잘리는 감각에 대장이 신음을 흘리며 무너졌다. 남자가 무기를 놓치고 바닥에 엎어짐과 동시에 아스티나는 그의 손목을 칼로 쑤셨다.

“으아아아악!”

근육을 완전히 끊어 놓았으니 더 무기를 휘두르진 못할 것이다. 대장의 거대한 몸집 때문에 다가오지 못하던 남자가 흥분해 칼을 휘둘렀다.

아스티나가 공격을 비껴 쳐 내자 그의 무기는 허무하게 허공으로 날아갔다. 입구로 가 꽂힌 제 생명줄을 찾을 여유도 없이, 남자는 그대로 목이 베였다. 성대로 왈칵 쏟아지는 핏줄기에 그가 컥컥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대장의 등허리를 밟고 앞으로 박차는 아스티나의 발을 누군가 붙잡았다. 그대로 넘어진 아스티나는 무릎이 깨지는 고통에 작게 신음했다. 오랜만의 난전이라 멍청한 실수를 했다. 아스티나는 내심 혀를 차며 몸을 굴렸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바로 옆 나무 바닥에 칼이 꽂혔다. 아스티나는 재빠르게 몸을 일으켜 무기를 빼내지 못하고 낑낑대는 남자의 등을 베었다. 제 칼 위로 고꾸라진 남자는 다시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순식간에 셋이 전투 불능이 되자 나머지 패거리들은 본능적으로 겁을 집어먹었다. 아스티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던 둘이 눈짓을 주고받더니 동시에 그녀에게로 칼을 찔러 넣었다. 정면에도 적수가 빼곡히 서 있었으므로 차마 피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그들의 이동을 감지함과 동시에 왼쪽으로 달려 나갔다. 힘껏 검을 찔러 넣는 데만 집중했는지 빈틈이 차고 넘쳤다. 몸을 비틀어 검적을 피하며, 아스티나는 상대의 등을 걷어찼다. 엉겁결에 넘어진 남자는 그대로 동료의 칼에 목이 꿰였다. 친구의 몸에서 쇠붙이를 빼내려 안달하던 이는 그 무방비함 탓에 같은 죽음을 맞이했다.

“이 씨팔……! 죽어라!”

지켜보던 동료들의 눈이 벌게졌다. 그러나 분노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굳어 버린 감각은 곧 패배로 이어질 뿐이다. 본능으로 덤벼 오는 상대를 요리하는 건 더욱 손쉬웠다. 앞서 처리한 넷에게 들인 시간보다 그다음 넷을 베어 넘기는 시간이 더 적게 걸렸다.

제 친우마저 눈앞에서 스러지자, 빅터의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가 괴성을 지르며 아스티나에게 쇄도했다.

“이 개 같은 년이……!”

순간 빅터는 제 몸이 붕 떴다고 느꼈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부유감이 밀려드는 것과 동시, 그의 눈꺼풀이 감겨 들었다. 빅터는 마지막 순간 깨달았다.

그녀는 왜 여기 혼자 왔을까.

빅터는 그 당당함의 이유를 목이 잘림으로써 체감했다. 둔중한 소리를 내며 빅터의 뒤통수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등허리는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지면과 맞붙었다. 아스티나는 검을 회수하며 앞을 가로막은 시체를 넘어섰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남자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남자가 몸을 무섭게 떨더니 무기까지 내버리고 도망쳤다.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아스티나도 순간 놓칠 뻔했을 정도였다.

아스티나는 검을 고쳐 쥐고는 그를 따라 달려 나갔다. 아무래도 상대의 출발이 빨라 잘못하면 놓칠 듯도 했다. 그러나 남자는 문턱을 넘다 말고 잠시 비틀거렸다. 아스티나는 더 거리가 멀어지기 전 휘청이는 남자를 향해 검을 내던졌다.

등허리에 쇠붙이가 꿰인 남자의 몸이 완전히 뒤로 무너졌다. 그의 입가에서 붉은 피가 쏟아졌다. 깔끔한 단명이었다. 그러나 남자를 멈춰 세운 건 아스티나가 아니었다. 아스티나는 그의 가슴팍에 검상이 있음을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문 너머에 한 인영이 서 있었다.

처음 보는 무서운 얼굴을 한 남자가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온통 피로 젖은 그녀의 몸을 꼼꼼히도 살폈다.

팔에 난 상처를 한참 걱정스럽게 살피던 바로 그 눈으로,

“당신 미쳤어?”

테리오드가 이를 악물며 일갈했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습니까? 여기가 어디라고 단신으로 뛰어들어요!”

귀가 떨어져 나갈 듯한 고성에 아스티나는 얼떨떨해졌다. 그러나 무심코 젖은 치맛단을 내려다보고는 곧 그의 거친 반응을 이해했다. 온통 피로 물든 옷은 세탁을 거친다 해도 원상태로 돌아가진 않을 듯 보였다. 아스티나는 축축해진 옷감을 가볍게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무감한 낯의 아스티나를 보고 테리오드는 더더욱 악바리같이 소리쳤다.

“혹시 다쳤으면, 어디 불구라도 됐으면! 어쩌자고 사람이 이렇게 무모합니까!”

그럴 일은 없다. 혹여 객사할까 걱정도 해 본 적 없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반박하는 대신 제 팔목에 닿은 테리오드의 손을 가만히 내리눌렀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으니까.

“다치지 않았습니다.”

테리오드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비를 다 맞아 가며 따라온 것인지 그는 온통 젖어 있었다. 그를 눈부시게 장식하던 옷감이 온통 몸에 달라붙어 처연한 인상마저 주었다.

아스티나는 힘을 주어 그의 손을 떼어 내고는 척척하게 늘어진 치맛단을 잡아 뜯었다. 이대로 있다간 그까지 온통 피범벅으로 만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서가 찾아온 것은 아스티나가 밖으로 나설 채비를 마칠 즈음이었다. 저택까지 힘껏 내달린 듯 그는 목 근처의 단추를 모두 풀어 헤친 단정치 못한 모습이었다. 아서는 숨이 턱까지 차서는 더듬더듬 제시의 실종 사실을 알렸다. 예상한 바였기에 아스티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아서의 입장은 좀 달랐던 듯, 아스티나가 내보인 침착한 태도는 그를 안심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울리고 말았다. 어딘가에 붙잡혀 있을 제시를 위해 아스티나는 무정히 아서를 뿌리쳤다. 그녀는 테리오드에게 소식을 전할 것을 부탁하고는 곧장 저택을 빠져나왔다.

아스티나가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경비대였다. 그녀는 붙잡혀 이송 직전인 패거리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해 냈다. 대공비의 수하로 가장한 아스티나는 경관에게 몇 푼 찔러 주는 것으로 공권력을 대신할 권한을 얻었다. 다행히 열 손가락이 다 달아나기 전 상대는 비밀 장소를 읊었다. 아스티나는 그 길로 말을 달려 이곳까지 찾아왔다. 아서가 부지런히 움직였다면 대공도 소식을 이르게 전해 들었을 것이다.

아스티나는 흘긋 문턱 너머를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대공 역시도 이곳까지 혼자서 찾아온 듯했다. 하기야 대공비가 피를 뒤집어쓴 모습을 보여서 좋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혼자 오셨군요. 잘하셨습니다.”

그녀를 지켜보는 테리오드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내려앉았다. 그가 목이 졸린 듯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잘했다고요.”

“…….”

“단신으로 폭력배들을 상대하겠다고 사라진 사람을 부리나케 뒤쫓아 왔더니, 잘했다고.”

평소와 같은 아스티나의 말은 테리오드를 안심시키지 못했다. 말을 내달리는 내내 테리오드는 섬뜩한 공포를 맛보았다. 그녀가 무사할 것이라 스스로를 세뇌해 보기도 했지만 혹시나 하는 걱정이 그의 가슴을 반복해 좀먹었다. 피가 튄 얼굴로 뛰쳐나온 남자를 보았을 때는 그대로 심장이 발밑까지 내려앉았을 정도였다.

온통 붉게 물든 아스티나를 발견했을 때의 기분은 어떠했던가. 그녀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고, 테리오드는 안도를 느낌과 동시에 참담해졌다.

“오늘 그대의 팔에 난 상처를 보았을 때까지만 해도 그럴 수 있겠다고 이해해 보려고 했습니다.”

“말씀드렸듯 깊은 상처가 아닙니다.”

“그래요, 사람이 태생이 무심하다 보니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모든 걸 무감하게 느끼는지도 모른다고, 그리 생각할 뻔도 했지요.”

“별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대에겐 그 별일이란 게 대체 뭡니까?”

테리오드가 무서운 눈으로 되물었다. 그가 갈라진 음성으로 왈칵 소리쳤다.

“그대는 죽는 게 무섭지도 않아요? 모든 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대체……!”

날것의 감정을 마주하며, 아스티나는 그저 무심히 눈만 깜빡였다. 굳어 버린 심장은 이런 때에도 좀처럼 박동을 빨리하는 법이 없다. 누군가의 걱정, 원망, 혹은 분노를 마주했음에도 그녀는 그저 초연했다. 아스티나의 입이 무의미하게 달싹였다.

“죽어도…….”

이것이 사람의 삶인가?

“어쩔 수 없겠지요.”

그것이 아스티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잃을 것이 많던 시절엔 그녀도 이렇게까지 무모하게 굴진 않았다. 세상엔 개인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많아, 그녀도 제 무력을 광신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테리오드가 염려하고 있는 것은 그녀의 본질적인 결핍과 맞닿아 있었다.

아스티나는 스스로가 소중하지 않았다.

아스티나가 칸나 대신 아탈렌타로 온 데에 숭고한 희생 의식 따위는 없었다. 제시의 복수를 해치우며 대신 상처를 입은 일도 그러했다. 처음 마주친 여자의 원한이 자신의 팔에 난 검상보다 무게 있었다.

아스티나는 다만 그것이 효율적이리라고 생각했다. 칸나와 제시는 삶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보통의 사람이었고, 자신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아스티나는 느리게 숨을 들이켰다. 고개를 들어 삐걱이는 천장을 올려다보던 그녀가 무감한 시선을 내렸다. 눈의 흰자를 드러낸 채 절명한 무뢰배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죽이진 않으려 했었는데…….”

아스티나는 그리 말하며 발밑 시체의 뺨을 가볍게 걷어찼다. 차게 식은 낯이 돌아가며 입가에서 핏줄기가 쏟아졌다. 아스티나가 설핏 웃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나 봅니다.”

대공비의 목소리가 서늘하여 테리오드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계획하지 않은 살인치고는 시신을 대하는 태도가 지나치게 무감각했다.

아스티나가 그를 지나치며 말했다.

“하기야 죽고 사는 게 그리 의미가 있을까요.”

이리 죽어도 다시 태어나겠지. 그녀가 그러했던 것처럼. 어쩌면 이전 생과 이어지는 연속성을 손에 얻을지도 몰랐다. 아스티나는 이 남자가 다음 생에는 부디 더 사람답게 살기를 바랄 뿐이었다.

허무를 말하는 아스티나를 앞에 두고 테리오드는 좀처럼 무어라 반박하지 못했다. 테리오드가 잠긴 목으로 겨우 입을 열었다.

“왜…… 왜, 그런 말을 합니까.”

“…….”

“두고 갈 소중한 것들이 눈에 밟히지도 않습니까?”

이는 기만이다. 테리오드에게도 소중한 것 따위는 없었다. 생을 향한 그의 간절함은 단순한 욕망 그 자체였다. 삶의 이유를 모르는 자가 말하는 생명의 소중함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그의 말은 두 번의 삶을 거친 연로한 여자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아스티나가 말했다.

“소중한 게 없습니다.”

“무슨 그런…….”

“무엇도 바라지 않습니다.”

말을 하다 보니 익숙한 공허가 가슴을 채웠다. 지난 생에도, 이번 생에도 바쁘게 일에 몰두했던 건 이 빈자리를 잊기 위함이었을까. 스스로를 되짚을 시간을 얻자마자 그녀는 고독해졌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를 그리도 애끓게 했던, 무표정한 얼굴과 덤덤한 목소리를 내었다.

“무엇도 소중하지 않고 아무도 지키고 싶지 않으며, 모든 것에 의미가 없습니다.”

그녀의 이유가 되었던 모든 것들은 이미 죽었다.

“그저 삽니다. 이유를 찾기 위해.”

아스티나의 투명한 시선에 테리오드는 숨이 턱 막혀 오는 듯했다. 누구에게도 들어 본 적 없는 공허한 말이 그의 가슴을 할퀴었다. 테리오드는 내내 살기 위해 발악해 왔던 사람이었다. 울컥 차오르는 반발감에 테리오드는 아스티나의 앞을 막아섰다.

그가 충동적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 살아요.”

아스티나가 고개를 들어 테리오드를 보았다. 놀란 듯 그녀의 눈이 크게 뜨여 있었다. 테리오드조차 당황한, 그야말로 엉겁결에 꺼낸 말이었다. 건방진 소리임을 알았지만 테리오드는 제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그대가 없으면 죽는 나를 위해 살아 줘요, 부인. 한 사람을 구원하는 인생이라고 치면 그리 덧없지는 않지 않습니까.”

나를 위해 살라니. 사람을 위로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애원 같았다.

아스티나의 눈이 일순 크게 흔들렸다. 그녀가 느리게 입술을 벌렸다.

“어쩜 이리도…….”

생김새만 닮았다 여겼는데 그뿐만은 아니었나.

아스티나는 멍한 얼굴로 주춤주춤 그에게 다가갔다. 점차로 테리오드와의 사이가 가까워졌다. 아스티나는 마침내 그의 앞에 다다라 손을 뻗었다. 뺨을 매만지는 감촉이 생생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따듯한 살갗이었다.

아스티나는 손을 내려 그의 목을 천천히 감쌌다. 손바닥에서 그의 맥박이 진동했다. 아스티나가 속삭이듯 물었다.

“자신을 잃는 게 두려우십니까?”

“그대는 어째서 그렇게 초연할 수 있는지, 상상도 되지 않을 만큼.”

테리오드의 목소리 역시 가라앉아, 내리는 비처럼 밑바닥까지 젖어 드는 듯했다. 그 깊은 울림에서 아스티나는 타인의 흔적을 보았다. 자신은 어째서 아탈렌타에 남았을까. 왜 평소라면 무시했을 법한 타인의 어리광을 신경 써 달래 주기까지 하였을까.

그녀는 알았다. 괴물 대공을 동정해서, 저가 없으면 대공령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 것을 알아서. 혹은 정말 대공을 친구로 받아들여서. 많고 많은 근거가 있었지만 그녀가 품고 있었던 유일한 속내는 그저 이기적이었다. 아스티나는 자신마저 속이지는 않기로 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옛 연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아스티나는 발끝을 들어 테리오드에게로 입술을 겹쳤다. 맞닿은 살갗은 달큰하리만치 부드러웠다. 그러나 짧은 접점은 곧 허무하게 떨어져 나갔다. 갑작스런 입맞춤에 테리오드가 당황하여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아스티나는 그 질문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입 맞춘 건 과거의 사람이다. 테리오드는 평생 알지 못할 사실이겠지. 졸지에 옛 연인을 대신한 테리오드에게, 아스티나가 미안함을 담아 속삭였다.

“불안해 마십시오, 전하. 내일도 그대는 사람으로 눈을 뜰 테니.”

마법의 주문이었다.

테리오드는 참으로 괴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녀는 검을 들고 있지 않은데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오기 시작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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