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어린 불청객 (7/23)

7. 어린 불청객

대공이 제정신을 찾은 후 아탈렌타령은 조금 더 활기차졌다.

인기 있는 미남의 비극이란 보통 좋은 이야깃거리지만, 거기에 여러 사람의 목이 걸리게 되면 당사자의 불행으로만 끝나지는 않는 것이다. 테리오드가 괴물 대공으로 변모한 후 가신들이 저지른 부정부패는 영주민들의 삶까지 건드렸다. 권위자의 학정은 피지배자들의 불행과 비례하므로, 억울하게 일가가 나앉거나 상인들이 정당히 따낸 납품권을 잃고 빚을 지는 일이 왕왕 벌어졌다.

덕분에 정당성을 상실한 혼약이었음에도 상대적으로 대공비의 인기는 좋은 편이었다. 그녀가 영지 내의 부정부패를 쓸어 낸 덕택으로 다수의 양민들은 살 만해졌다.

그런데 공정한 치세도 모자라 대공까지 제정신이 돌아오게 하였다니. 요즈음 대공비는 우스갯소리 반, 진심 반으로 행운의 여신이라 불리고 있었다.

대공비의 활약은 기분 좋게 취한 주말의 술집에서 특히 인기 있는 소재였다. 개중 억울하게 실직했다가 부패한 상사가 잘려 나가며 복직한 병사, 곤트 씨는 그녀의 발이라도 핥을 수 있는 기세였다. 뇌물을 먹여 한자리 차지했던 조장이 끌려 나갈 때 곤트 씨는 신나게 달려가 그에게 주먹감자를 선물했다.

브라 도뇌르!(Bras d'honneur) 그것은 정의의 힘이었다.

“그분은 과연 아탈렌타의 복이시라네!”

그 커다란 목소리에 막 가게 안으로 들어서던 손님이 멈칫했다. 후드를 눌러쓴 보통 체격의 남자였다. 옷 밑으로 드러난 하관에선 다소 앳된 티가 났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당겨 약간의 불쾌함을 표현했으나 모르는 사람의 입가를 유심히 살필 사람은 없었다.

다른 손님들이 소음에 놀라건 말건, 곤트 씨는 신난 기색으로 으스대는 걸 멈추지 않았다.

“얼마 전엔 협박당해 자신을 시해하려 한 하녀까지 용서하셨다지?”

“자비롭다, 자비로우셔.”

곤트 씨에게 술을 얻어먹게 된 친구는 잠자코 대공비 찬양에 응했다. 사실, 그녀의 칭찬거리를 짜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대공비의 덕택을 본 이들은 자식으로, 친척으로, 혹은 이웃으로 얼마든지 존재했으니까. 그의 친구는 희대의 폭군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공 전하는 정말 결혼 잘하신 거야. 아주 복덩이가 굴러 들어왔다는 거 아냐!”

곤트 씨가 그리 소리치며 잔을 치켜들었다.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그보다는 덜 열정적인 기색으로 건배를 해 주었다. 소란스럽게 잔이 부딪침과 동시에, 방금 가게로 들어선 남자가 우뚝 멈춰 섰다.

이목이 남자에게 집중됐다. 수상하게 검은색 옷을 뒤집어쓰고 가게 중앙에 멈춰 선 사람이 눈에 띄지 않을 리 없다. 게다가 남자의 기이한 행동은 그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아는 사람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성큼성큼 걸어 곤트 씨에게로 다가갔다.

“이봐요, 지금 뭐라고 했어요?”

제 어깨를 당기는 강한 악력에 곤트 씨가 식겁하여 고개를 돌렸다. 혹 그가 내내 욕하고 있던 예의 상사와 공교로이 마주친 것은 아닌가 싶어서였다. 부정을 저지른 건 상대였으므로 객관적으로 그는 당당한 입장이었지만, 어깨를 무섭게 조이는 손은 긴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무, 무슨……?”

곤트 씨가 당황한 음성으로 물었다. 남자는 곤트 씨를 돌이켜 세운 것으로 멈추지 않고 사납게 후드를 벗었다. 모자 속에서 탁한 빛의 은발이 쏟아졌다. 이십 대 초반, 적게 보면 십 대 후반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어린 인상의 사내였다.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조장이 아니었음에 곤트 씨는 안심했다. 그러나 그것이 다행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 처음 보는 남자가 제게 얼굴을 들이밀고 흉흉하게 캐물어 왔으므로.

“누가 결혼했다고?”

* * *

주말은 일에 파묻혀 사는 대공도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었다. 책을 보며 늘어진 테리오드 위로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었다. 선선한 날씨에 창으로 들이닥친 바람이 곧잘 이마를 간지럽혔다.

책장은 얼마 넘어가지 못했다. 테리오드는 한 문장을 다섯 번 정도 더듬어 읽다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먼 곳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아침 미사가 끝나고 울려 퍼지는 종소리도 함께였다.

끔찍한 저주에 신에게 버림받았다 생각한 것일까, 아탈렌타 대공가는 대대로 신앙을 가지지 않았다. 테리오드는 자신을 보듬지 않는 신을 원망한 적은 없지만 답을 주지 않는 상대에게 일방적인 애정을 바칠 생각도 없었다. 다만 성스러운 찬양가만은 듣기에 몹시 감미로웠다.

덕분에 테리오드는 답지 않게 얕은 잠에 빠졌다. 반쯤 무의식의 경계에 섰을 때, 누군가 그를 건드렸다.

“침실로 가서 주무시지요, 전하.”

천천히 눈을 떴다. 햇빛의 방향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잠든 지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은 듯했다. 테리오드는 눈가를 가리던 서적을 치웠다. 창문을 등지고 선 대공비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역광이 밴 붉은 머리가 타들어 갈 것처럼 빛났다.

그가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이쪽이 편해요.”

“딱딱한 소파가요?”

“침대에서 자고 싶지 않습니다.”

“침실이 싫다는 사람은 또 대공께서 처음입니다.”

그 말에 테리오드가 씁쓸히 읊조렸다.

“내가 괴물임을 상기시키는 장소가 싫어서요.”

공식적으로 테리오드는 완전히 저주를 푼 것으로 되어 있었다. 시중을 드는 극소수의 믿음직한 사용인들 빼고는 모두 테리오드가 영영 돌아온 줄로만 알았다. 불완전한 변태가 약점이 되리라 여겨 숨긴 탓이었다.

테리오드는 새벽녘 눈을 떠 해가 지기 전 정신을 잃었다. 따라서 그는 밖을 자유로이 오가다가도 시간이 되면 침실로 돌아와야 했다. 대공은 꾸준히 그 방에서 자신을 잃었다. 테리오드는 아침나절에 침대에서 늦장을 부리는 일이 없어졌다.

테리오드를 무심히 내려다보던 아스티나가 창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정원도 볕이 좋습니다.”

“그곳에서 낮잠을 잘까요.”

“해먹을 하나 다는 것도 좋겠지요.”

그 배려가 꽤나 다정하였다. 기실, 대공비는 선을 넘지 않는 상대에게 굉장히 자애로운 사람이었다. 테리오드가 처음 도움을 청했을 적에도 그녀는 기꺼이 받아들였지 않은가.

대공비와 자신은 나빠질 것 없는 사이였다. 그녀는 부친의 부채를 갚아 준 대신 테리오드가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돕겠다고 말했고, 테리오드는 저주가 풀리면 그녀를 돌려보내 주겠다고 했다. 그로서는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였다.

생각을 정리한 테리오드가 지난여름, 후원의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장미 정원 옆에 두면 여름엔 흐드러지게 아름답겠지요. 대공저는 조경이 꽤나 좋은 편입니다. 부인께서도 마음에 드실 겁니다.”

“전하를 위해 말씀드린걸요.”

“같이 써요. 제가 일주일 내내 낮잠을 자진 않을 것 아닙니까.”

“자랑하고 싶으신 풍경인가 봅니다.”

“어머니께서 온갖 종자를 끌어모은 탓에 그만한 절경이 또 없지요. 저주가 일찍 풀려도 그것은 보고 가세요.”

아스티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테리오드는 자신의 말이 그녀를 붙잡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는 다른 가능성도 제시했다.

“후에 손님으로 오셔도 좋고요.”

만약 저주가 풀린다 해도, 그들은 합리적인 이별을 택했을지언정 평생 못 볼 사이는 아니었다. 아스티나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녀는 대공령을 떠나고 다시 이곳에 돌아올 일은 없다 여겼었다.

“그러지요.”

아스티나가 이내 선선히 응했다. 테리오드는 나른한 몸을 일으키지 않고 그대로 아스티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날 선 콧대 아래로 얕은 그림자가 져 있었다.

요즘의 대공비는 많은 시간을 연무장에서 보냈고, 당연히 치마를 입고는 몸을 단련할 수 없었다. 품이 남는 흰 셔츠와 아이보리색 승마 바지는 그녀의 피부색과 잘 어울렸다.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모양 좋은 손이 이어졌다. 그녀의 손바닥은 굳은살로 꽤나 딱딱한 편이었다. 테리오드는 그것이 꽤나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항상 흰옷만 입으시는군요.”

대공비는 그 원인이 대공임을 밝히는 대신 조용히 웃었다. 테리오드는 영문 모르고 같이 미소 지었다. 느리게 달아나던 잠이 전부 자취를 감췄다. 몸을 일으키자 기울어졌던 대공비도 시야 속에서 바로 섰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니오, 대공께서는요?”

“저도 아직입니다. 같이 가시죠.”

테리오드는 자신이 벌여 놓은 책을 정리하는 하인에게 식사를 준비시키라 일렀다. 그들은 먼저 주방으로 떠난 사용인보다 느린 걸음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내일은 밤에도 변화가 가능한지 시험해 볼까요.”

“그것도 나쁘지 않군요.”

아스티나의 물음에 테리오드가 선선히 수긍했다. 그들은 이것저것 시험해 봐야 하는 입장이었다. 낮에 모습을 드러내는 걸로 모든 일을 해결하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귀족들의 사교 모임은 보통 저녁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시간을 조율할 수 없다면 대공은 앞으로도 대외적인 자리엔 참석치 못할 터였다.

“열두 시간의 간격을 감안하여 내일 낮은 입맞춤을 생략하고, 저녁 무렵 행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아스티나가 무심한 어조로 설명했다. 밤에도 변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려 했던 건 이전에도 의논해 둔 사항이었다. 그러나 그러려면 낮을 한 번 건너뛰어야 했고, 일이 밀린 주중에 해치울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마침 주말이 되었으니 지금쯤 시험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테리오드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얼굴을 내보일 수 있는 시간의 범위가 커지면 저 역시 좋으니.”

“별로 기대하시는 표정은 아니시군요.”

“언제나 새벽에 눈을 떴으니 말입니다. 처음엔 잠들기 전 입을 맞췄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도 제가 제정신을 차린 건 동틀 무렵이었지요.”

“처음이었으니 변화에 시간이 걸렸을 수도 있지요.”

“그보다는 사실 그 낮이라는 것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가…….”

테리오드가 말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아스티나가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테리오드는 꽤나 당황하여 오른손으로 뺨을 더듬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아스티나의 시선이 느리게 떨어져 나갔다. 이런 일은 꽤나 잦게 일어났다. 그녀는 종종 알 수 없는 눈으로 테리오드를 응시하곤 했다.

아스티나가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몇 번을 겪어도 신기한 일이라 그렇습니다.”

하기야 그도 잘 적응이 되진 않았다. 익숙해졌다고 더 이상 비참하지 않은 건 아니다. 올리버에게 말했던 대로 그는 괴물이 되는 순간이 언제나 두려웠다. 사람일 때마저 반편이로 보이고 싶진 않아 억눌러 온 사감이나, 솔직한 진심은 그러했다.

“사람이 되실 때, 어떤 기분이십니까?”

아스티나가 물었다. 의외의 질문에 테리오드는 그녀를 어깨 너머로 넘겨보았다. 자신이 겁내는 소리를 내었던 것이 신경 쓰였을까. 답해 본 적 없는 질문이라 무어라 확실히 표현할 수가 없었다. 테리오드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가슴이 덜컥이는 느낌?”

심장이 멈췄다 뛰듯, 거센 박동이 귀를 먹어 치운다. 잠겨 있던 의식 저편에서 깨어나는 감각은 생소하면서도 익숙하다. 마치 물속을 부유하다가 뭍으로 빠져나온 느낌이라고 하면 꼭 맞을까. 테리오드가 긴가민가한 낯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아……, 그래. 마치 오래 숨을 참고 있다가 수면에서 끌어 올려지는 기분입니다.”

잠들어 있다가 변할 땐 아무 감각이 없으나 깨어 있는 상태에선 속이 다 울렁거렸다.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린 테리오드가 더부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스티나가 빠르게 사과했다.

“제가 괜히 곤란한 부분을 여쭈었군요.”

“아닙니다. 익숙해져야지요.”

그들은 식당으로 들어섰다.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다가와 의자를 빼 주었다. 대공 부부는 거대한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았다. 둘만 식사하기엔 아까울 정도로 장대한 크기였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음식이 내어져 왔다. 아스티나가 포크를 들어 애피타이저로 나온 페스츄리를 짓이기며 물었다.

“다른 친척들은 없으십니까?”

내용물은 크림소스로 조리한 굴 요리였다. 수도에 있을 땐 해산물 요리를 잘 먹지 못했다. 신선도가 좋은 것을 찾기도 어려웠을뿐더러 가격이 무척 비쌌기 때문이다. 아스티나는 바다 향을 음미하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돌아가면 이런 사치는 조금 그리울지도 모르겠다.

“대공가는 손이 많지 않습니다. 친척이라고 하면 외가 쪽이 다수지요. 아서 에스테반이라고, 이모님의 아들인 사촌 하나가 저와 제법 친했습니다.”

“지금 대공령에 머물고 있진 않나 보지요?”

“이모님께서 그 아이를 아탈렌타로 들여 기사 서임을 받게 하고자 하셨으나…… 아서는 워낙 자유분방한 놈이라서요. 종자 생활을 몇 년 하다가 도망쳤습니다.”

아스티나는 대공이 ‘놈’이라는 격의 없는 표현을 썼음에 주목했다. 테리오드는 남 이야기를 함부로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꽤 버릇없는 동생이거나, 혹은 그런 막역한 호칭이 자연스러울 가까운 사이일지도 모르겠다.

“찾지는 않으시나요?”

“아서를 마지막으로 본 게 2년 전입니다. ‘강해져서 돌아오겠어!’라고 외치며 달려가더군요.”

아무래도 후자의 경우인 모양이었다. 테리오드는 애정 어린 태도로 사촌 동생의 말투를 흉내 냈다. 대공과 비슷한 생김새의 소년이 홍조 띤 얼굴로 야망을 외치는 모습이 떠올랐다. 아스티나는 그에 설핏 웃었다.

“나이가 어린가 보지요?”

“아직 애송이입니다. 그때가 열일곱이었으니, 지금 막 열아홉이 되었을걸요.”

귀여운 사촌을 생각하며 웃음 짓던 테리오드가 잠시 멈칫했다. 그는 입가를 애매하게 굳힌 채 제 아내를 응시했다. 아스티나가 무엇이 문제냐는 듯 그 시선을 되받아쳤다. 테리오드의 목이 빳빳해졌다.

‘열아홉이라니.’

테리오드는 그의 아내가 몇 살이었는지를 새삼 되새겼다. 일곱 살 어린 동생은 한없이 꼬마로만 보였는데 같은 연배의 아내는 왜 이리도 어른스럽게 느꼈는지 모르겠다 덕분에 나이 차이를 좀처럼 실감하지 못하고 있지 않았는가.

묘한 죄책감에 테리오드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뻣뻣한 손으로 포크를 움직였다. 식탁 위에 갑작스럽게 침묵이 찾아들었다.

그를 어리게 취급하는 아스티나가 알았다면 어이없게 느꼈을 일이나, 테리오드는 진지하게 자괴감을 느꼈다. 자신이 앞길 창창한 어린 영애의 장래를 아주 효과적으로 망치고 있음을 상기한 것이다. 테리오드는 이혼한 여자가 어떠한 추문에 휘말릴지 모르지 않았다. 인생의 반도 채 살지 못했을 대공비는 남은 평생을 손가락질당하게 될 것이다.

테리오드는 고뇌에 잠겨 한없이 땅굴을 팠다. 그의 손에 들린 건 삽이 아니라 포크였기에 바닥 대신 접시를 긁었다.

은근히 신경을 건드리는 소음에 아스티나가 그를 제지하려 할 때였다. 굉음이 입구에서 울려 퍼졌다. 다행히도 폭발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거대한 문이 사납게 벽에 부딪힌 것뿐이었다.

그러나 후에 회고하기로, 아스티나는 그때 들었던 폭발음이 단순히 착각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분명 폭탄이 맞았다.

“아서……?”

테리오드가 놀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아스티나는 갑자기 등장한 남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주근깨가 남은 뺨과, 재기 어린 표정은 어쩐지 소년 같은 느낌도 주었다.

‘그 예의 사촌인가.’

테리오드보다 탁하긴 하지만 그럭저럭 볼 만한 은발이다. 대공의 머리 색깔은 어머니 쪽에서 온 모양이었다. 담담히 불청객의 행색을 살피는 대공비를 본체만체하며 상대가 테리오드에게 말했다.

“못 본 사이 유부남이 되어 있을 줄은 몰랐어, 형.”

돌아온 탕아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 * *

“어떻게 된 거야?”

응접실에 몸을 앉히자마자 아서가 한 말이었다. 테리오드는 아직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기도 전이었다. 테리오드는 이 버릇없는 사촌의 심상치 않은 기색을 보고 곧장 식당 밖으로 끌어냈다.

사촌 형의 옆에 모르는 여자가 앉아 있으면 보통 누구냐고 물을 것이다. 정체를 궁금해하지 않은 건 그가 대공비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서가 인사를 생략한 건 다분히 고의적인 의도였다.

“그건 내가 물어볼 말이야. 갑자기 무슨 일이지?”

테리오드가 황당하기까지 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아서는 껄렁하게 다리를 흔들었다.

“2년 만에 본 사촌에게 할 말이 그것뿐이야?”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아서.”

아서가 떠난 것은 2년 전이었으므로, 그동안은 자신이 ‘괴물 대공’으로 변했던 일을 모르고 있었을 터였다. 설령 소식을 들었다 해도 단편적인 소문뿐이었으리라. 테리오드는 어디서부터 아서에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상대는 곧바로 코웃음을 쳤다.

“알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2년 만에 봤다고 했지만 난 반년 전에도 아탈렌타에 왔었어. 형을 만나지 못했으니까 재회로 치고 있진 않지만.”

“아탈렌타에 왔었다고?”

“그래, 우리 안의 괴물을 보고 그대로 다시 떠났지.”

말투에 지나치게 격식이 없었다. 그러나 테리오드는 자신을 괴물로 칭하는 사촌 동생을 제지하지 않았다. 불량배처럼 행동하는 태도와 별개로 그의 목소리가 점점 젖어 들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는 대륙의 최남단에 있어 형의 소식을 듣지 못했어. 생선 하나는 물리도록 먹고 올라오니 대공 테리오드가 괴물이 되었다는 소리가 들리더군. 허겁지겁 달려와서 집사의 멱살을 잡았지만 그렇다고 형이 사람이 되진 않았어. 그때 나는 생각했지. 아, 드디어 이 집구석이 망했구나!”

지난 행적을 읊던 아서가 말을 멈추었다. 그의 눈가가 빨개져 있었다. 아서는 고개를 숙이고 훌쩍대는 대신 테리오드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하면 눈가에 고인 눈물이 마르기라도 할 것처럼.

“걱정을 끼쳤구나.”

테리오드가 누그러진 음성으로 위로했다. 2년 전보다 몸은 자라 있었으나 테리오드에게 아서는 아직 어린 동생이었다. 아서는 소매로 제 눈가를 벅벅 닦았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그가 되는대로 지껄였다.

“병신같이 유언 하나 안 남길 건 뭐야? 나한테 재산이라도 다 물려준다고 썼어야지.”

입만은 예전부터 참으로 자유분방한 사촌이었다. 테리오드는 그에게 객관적인 평가를 들려주었다.

“종자 생활도 힘들어서 때려치우고 나간 애한테 뭘 믿고 맡기겠니.”

“씨이발……, 이럴 때까지 냉정해.”

아서는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짜증이 나는데 안심이 되고 반가우면서도 화가 났다. 가족들이라는 게 다 어째 이 모양 이 꼴이었다.

아서가 종자 생활을 하던 시절에도 테리오드는 사촌이라고 뭐 하나 봐주는 법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친절했던 사촌 형만 믿고 훈련을 땡땡이친 날, 어린 아서는 죽음을 보았다. 테리오드는 아서에게 연무장 100바퀴를 돌 것을 명하고는 해가 질 때까지 그것을 지켜보았다. 덕분에 아서는 도망치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100바퀴를 채웠다.

테리오드는 바닥에 늘어져 헉헉거리는 아서에게 다가가 물병을 건넸다. 그리고 말했다. 땀범벅이 된 사촌과는 어울리지 않게 몹시도 평온한 어조로.

‘다음엔 그러지 마라.’

당연한 소리였다. 미쳤다고 그 같은 꼴을 또 당하겠는가. 대신 아서는 매번 새로운 방법으로 반항했다. 세기의 말썽쟁이 자리가 있다면 그건 아서에게 주어져야 했다.

오죽했으면 부모님조차 망아지 같은 행동에 혀를 내두르며 그를 아탈렌타로 내쫓지 않았던가. 아서는 사람이 돼서 돌아오라며 엉덩이를 걷어차던 어머니의 얼굴을 잊지 않았다. 분명 속 시원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덕분에 아서는 열세 살 때 아탈렌타로 와 열일곱까지 머물렀다. 벨라체 아카데미에서 반년 만에 퇴학당해 가능했던 독보적인 행보였다. 쫓겨나듯 틀어박힌 땅이었지만, 그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운 4년을 이곳 아탈렌타에서 보냈다. 어찌 됐든 버릇없는 아서를 그만큼 인내심 있게 지켜봐 줬던 건 테리오드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 형이 아탈렌타에 전해지는 저주로 괴물이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 아서는 몹시 충격받았다. 스물을 넘으면 무사한 것 아니었냐며 비명 지르는 아서의 등을 올리버가 부드럽게 두드렸다. 체념의 기색이었고, 아서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곧장 대공저를 떠나 광증의 기원을 쫓고자 방방곡곡을 헤맸다.

그런데 테리오드의 상태를 살피러 잠시 돌아왔을 때, 마을의 초입에서부터 들려온 건 대공의 귀환 소식이었다. 그리고 그 곁다리엔 처음 듣는 여자의 존재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단순한 곁다리라기엔 비중이 무척 컸다. 대체로 이야기는 대공비의 현명한 치세를 칭송하며 흘러갔기 때문이다.

그는 사촌 형이 제정신을 찾았다는 소식에 기뻐함과 동시, 새로운 등장인물에 대한 의심을 싹 틔웠다. 그가 대륙을 헤집으며 알아낸 게 있다면 아탈렌타의 광증을 해결할 방법은 없다는 절망적인 사실뿐이었다.

아서가 미심쩍은 눈으로 물었다.

“어떤 여자야?”

“‘어떤 분’이냐고 물어야지. 그 자리에 내버려 뒀다간 이렇게 사고 칠 줄 알았다.”

“그럼 여자라고 하지 어떤 남자냐고 할까?”

“네가 2년간 방랑하며 배워 온 건 무례뿐이로구나.”

그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서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운명적 상대의 입맞춤에 사람이 되었다고?”

유전병의 존재를 아는 건 극소수였고 무지한 양민들은 단편적인 이야기를 만들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괴물이 된 대공을 대공비가 사랑의 힘으로 돌이켰다고 말이다. 괴물 대공의 이미지를 탈피하려면 이 일련의 사건이 가능한 한 아름다운 동화처럼 보여져야 했다. 테리오드와 아스티나는 그 소문을 알면서도 막거나 정정하지 않았다.

저주의 내력이 고작 테리오드가 괴물로서 보낸 1년인 줄 아는 사람들은 쉽게 대공 부부의 사랑 이야기를 소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서는 이것이 대공가에 대대로 내려온 병력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까, 최대의 부를 가진 그 지엄한 아탈렌타조차 해결하지 못했던 저주라는 것을.

“지나치게 말이 돼. 지나치게 그림 같다고.”

아서가 연거푸 말했다. 테리오드가 돌아온 것은 분명 기쁜 일이나 아서는 찝찝함을 벗어던지지 못했다. 테리오드가 진정하란 듯 그에게 찻잔을 밀어 주며 설명했다.

“사실이다. 운명의 상대라는 수식은 제하더라도 맥락은 비슷해.”

“입맞춤으로 정말 사람이 되었다고?”

“그래.”

테리오드가 곧은 시선으로 아서를 마주 보았다. 아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강직한 형이 거짓을 말할 리는 없었다. 그러나 아서는 세상을 좀 더 비뚤게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세 살배기 시절에도 동화책을 내던졌던 남자다. 스물이 가까운 나이에 듣는 미담이 새삼 귀에 감길 일은 없었다.

“난 그 병신 같은 소리 안 믿어. 분명 그 여자가 수를 쓴 거야.”

테리오드는 아서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키스로 인한 변화는 아스티나와 테리오드가 여러 시험을 거치며 확신한 사항이었다. 그 과정 동안 테리오드는 그녀가 자신에게 해를 입힐 사람이 아님을 확신했다. 천천히 쌓아 온 믿음을 타인에게 단시간에 이해시킬 수는 없는 법이다. 따라서 테리오드는 우선 짧게 부정했다.

“아서, 그녀는 수상한 사람이 아니야.”

“이 집안에 기어들어 온 여자가 제대로 된 여자겠어?”

“선대 대공비들을 전부 욕보이는 발언이다.”

“그들은 저주를 몰랐지. 사기 결혼이었지만 그래서 악당은 대공뿐이었어. 이 집안은 여자를 제물로 삼아 잡아먹다가 탈이 난 거야.”

대대로 대공가에 시집왔던 여자들은 결혼 전엔 광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식을 올리는 것만으로 효과적인 감금은 시작됐다. 여자들은 자신의 아들이 저주받으리란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도망치지 못했다. 귀족들의 결혼은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었고 그것이 깨졌을 때의 파문은 일개 영애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불쾌한 뒷이야기에 테리오드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도 그녀를 욕하나?”

“그러니까 말하잖아. 여기가 괴물 소굴인 걸 알면서도 시집온 유일한 여자라고. 맹수한테 잡아먹힐 걸 각오하고 들어온 사람이 보통내기는 아니겠지. 실제로 보기 좋게 형을 되돌렸잖아?”

“아서 님, 대공비 전하께 무엄하십니다! 그분은 대공가의 은인이십니다.”

옆에서 묵묵히 듣고만 있던 올리버가 소리쳤다. 충실한 집사는 주인의 대화에 끼어드는 법이 없었다. 지금은 정말로 화가 난 것이다. 아서는 그런 올리버를 빤히 응시하다가 테리오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서가 엄지 끝으로 집사를 가리키며 아무렇지 않게 비꼬았다.

“저 깐깐한 집사까지 구워삶았으면 답은 둘 중 하나야. 진짜거나, 가장 질 나쁜 가짜거나.”

가만히 듣고만 있던 테리오드가 양손을 깍지 꼈다. 그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는, 지긋한 시선으로 아서를 쳐다보았다. 부담스러운 눈길에 아서는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그 여자를 은인으로 생각하는 형을 앞에 두고 조금 과하게 떠든 것 같기는 했다.

테리오드가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못 본 사이 버릇이 아주 안 좋아졌구나, 아서.”

아이를 어르는 듯한 음색에 아서는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다. 아서가 무의식적으로 몸을 뒤로 물리며 대답했다.

“……설마 전처럼 연무장 100바퀴를 달리라고 할 셈은 아니겠지?”

“네게 필요한 건 근력이 아니라 지성이다. <은인을 접대하는 99가지 방법>을 가져다 전 페이지를 필사하도록. 벌은 도서관에서 직접 책을 찾아내는 것부터.”

“말도 안 돼!”

아서가 빽 소리 질렀다. 그러나 그는 무어라 거부하든 소용이 없음을 알았다. 그의 사촌 형은 대쪽 같아 한 번 결정한 사항을 번복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받아들일 수 없다며 도리질을 쳤지만 테리오드의 다정한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서는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안, 안 해. 틀린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해야 할 거야.”

“나도 이제 열아홉이야, 곧 성인이라고! 형 잔소리나 들을 나이가 아냐!”

“아서, 성인은 스스로의 말에 책임질 수 있는 나이를 말하는 거다. 너는 아직 멀었구나.”

아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대로 테리오드에게 붙잡힐 수 없다는 듯 그대로 응접실을 뛰쳐나갔다.

테리오드는 그제야 느긋하게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아마 한 시간 정도 저렇게 저택 내를 숨어 다니다가, 제풀에 지쳐 도서관으로 향할 게 분명했다. 테리오드는 아서가 머무는 4년 동안 그가 피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아주 잘, 교육시켰다.

올리버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책도 다 있습니까?”

“아니, 나는 모르지.”

테리오드가 너무도 단번에 부정해 와, 올리버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테리오드가 그런 제목을 외고 있는 것이 신기하여 물어본 것인데 본인도 출처를 모른다니, 그럼 아서에게 한 말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올리버가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그럼……?”

잔을 내려놓은 테리오드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밤늦게까지 못 찾겠다고 울고 있으면 적당히 비슷한 내용으로 가져다주도록 해.”

아서가 들었다면 응접실을 뒤집어 놓았을 말이었다. 올리버가 염려의 목소리를 내었다.

“눈이 뒤집히실 텐데요.”

“그게 귀엽지 않나.”

테리오드가 짧게 웃었다. 그가 저 소악마를 귀여운 동생 취급할 수 있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 * *

“젠장, 젠장! 빌어먹을!”

쉴 새 없이 울화통을 터트리며, 아서는 힘 있게 복도를 디뎌 나갔다. 조금 전까지 그는 도서관에서 온갖 서적들을 뒤엎으며 <은인을 접대하는 99가지 방법>을 찾고 있던 참이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까지 책장을 뒤집어엎었는데도 이상하게 테리오드가 말한 책은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돌아올 거면 후원에서 땡땡이를 치는 게 아니라 책부터 찾았어야 했나, 불안으로 아서의 이마엔 한 줄기 식은땀이 흘렀었다. 시키는 대로 필사해 두지 않으면 언제 분량이 두 배로 늘지 몰랐다. 그리고 그의 사촌 형은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그걸 충분히 시켜 먹을 사람이었다.

아서가 다시 처음부터 살피려 걸음을 옮길 때였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올리버가 책 한 권을 내밀었다.

‘뭐야, 예의 있는 접대법? 이건 형이 말한 책이 아니잖아.’

‘이걸 필사하시면 됩니다.’

‘마음대로 책 바꿔서 하다가 큰일 나.’

‘아니요, 이게 맞을 겁니다.’

수상한 대답에 아서는 즉시 눈빛을 바꾸고 집사를 추궁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농락당했었는지를 샅샅이 알게 됐다.

대체 지금 이 시각까지 했던 고생은 다 뭐였던가!

배신감에 몸부림치던 아서는 책을 뺏어 들고 테리오드의 침실로 향했다. 뒷수습 따위는 알 것이 없고, 이 물건을 사촌 형이 보는 앞에서 내던져야 좀 화가 풀릴 것 같았다.

한창때 소년의 뜀박질을 노년의 집사가 따라잡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올리버가 ‘지금 가 봤자 못 만난다.’는 말도 채 끝맺기도 전에 아서는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똑같은 기세로 테리오드가 있을 침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형!”

아스티나는 첫 만남과 조금도 다를 것 없이 등장한 아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갑작스러운 등장이었지만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발을 구르는 소리가 복도 저편에서부터 들려왔기 때문이다. 아스티나는 시선을 돌려 마저 가운을 걸쳐 입었다.

“예의가 없으시군요.”

이것으로 두 번째 얼굴을 본 것이었다. 처음엔 아서가 들이닥치자마자 테리오드가 그를 데리고 나갔고, 아스티나에게 돌아왔을 때 테리오드는 혼자였다. 아스티나가 불청객에 대해 묻자 테리오드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답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아직 나이가 어려 버릇이 없어 그럽니다.’

그러고는 다음에 시간을 내어 아서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말했다. 아마 테리오드가 두려 한 유예는 저 사촌 동생의 불타는 성질을 삭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아스티나는 상대가 자신에게 적의를 품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처음 만났을 적 제게 닿은 소년의 눈이 어쩐지 싸늘했기 때문이다.

“아, 결혼했지.”

형의 침실에 있는 여자에게, 아서가 성의 없이 비꼬았다. 그것 때문에 말싸움을 벌였던 것이면서 아서는 그제야 그 사실을 실감했다. 그의 사촌 형은 이제 침실을 같이 쓰는 여자가 있었다. 아서가 이전처럼 주기적으로 발작하며 들이닥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아서는 별로 미안함을 느끼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에게 예의란 걸 가르칠 만한 사람들은 모두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졌고, 유일한 교육자 테리오드는 그를 제지할 상황이 아니었다.

“레테 백작가의 차녀, 아스티나 반 아탈렌타입니다. 아서 경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상대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려지고 싶진 않았으므로, 아스티나는 우선 마땅한 자기소개를 했다.

당연히도 아서가 그에 순순히 응할 리는 없었다. 방 안에 있는 사람은 대공비와 자신뿐이었다. 일 중독자 사촌은 아직까지 집무실에 머물고 있는 게 분명했다. 침실 안에서 테리오드를 발견하지 못한 아서의 행동은 조금 더 건방져졌다.

“난 기사가 아니야. 그리고 당신이 내 이름을 알 필요는 없어.”

아서는 그렇게 말하며 솜씨 좋게 아스티나를 비웃었다. 아스티나는 아서의 행동에 모욕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다만 오랜만에 맛보는 적의는 신선했다. 가신들을 치워 내고 나니 더 까다로운 적이 왔다. 모름지기 남편의 부하보다는 친척이 더 건드리기 어려운 법이다.

“너, 고작 열아홉이라지? 그 나이에 어떻게 솜씨 좋게 저 숙맥을 구워삶았어?”

“무슨 말씀이신지요?”

“무슨 수작을 부렸든 나는 안 속아. 검은 꿍꿍이속이 있으면 빨리 토해 내는 게 좋을 거야. 형이 돌아온 건 사실이니 적당한 값은 쳐 주지.”

“그게 대체…….”

“아탈렌타의 곳간을 전부 털어먹을 생각이면, 글쎄. 그게 평범한 사람이 소화할 수 있는 재화가 아니라는 걸 아는 게 좋을 거야.”

아스티나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하고 입을 다물었다. 왜 저리도 죽일 듯 노려보나 했더니, 아무래도 검은 속내를 품고 돈을 요구하려는 기회주의자로 보인 게 틀림없었다. 하기야 자신이 보기에도 좀 수상한 상황이기는 했다. 제삼자의 눈으로 보면 이보다 공교로운 진행이 또 없을 것이다.

지난 백 년간 풀리지 못했던 아탈렌타의 저주에, 한미한 집안의 신부가 고작 입맞춤으로 사태를 해결했다라. 이야기를 만들기는 좋겠지만 그래서 더욱 작위적인 냄새가 났다.

“대공 전하께 이야기를 전해 듣지 못하셨군요.”

그러나 자신이 일 년 후 아탈렌타를 떠나기로 한 걸 안다면 저런 오해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스티나의 담담한 대꾸에 아서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대화를 청하고 싶으시면 날이 밝고 찾아오세요.”

아스티나가 상황을 일축했다. 어차피 대공 본인이 아스티나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데다, 그녀가 아탈렌타를 통해 얻어 나갈 것이 없음은 후에 자연히 밝혀질 문제였기 때문이다. 아스티나는 자신에게 의미 없는 사람을 위해 시간을 쓰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램프를 들고 침대맡에 마저 초를 피웠다.

저를 무시하는 태도에 아서가 발끈했다.

“형이 없으니 나는 속일 필요도 없다는 뜻이냐? 어떻게 부정도 않는군! 여간내기가 아니야.”

“아무래도 다시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저는 아스티나 반 아탈렌타입니다.”

“네 이름 따윈 관심 없다고 했지!”

“성질만 나쁜 줄 알았는데 머리도 나쁘시군요. 저는 대공 전하의 부인으로, 마땅히 제게 예의를 갖추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스티나가 그렇게 말하며 램프의 불을 껐다. 침대맡에 은은히 빛나는 초를 빼고는 주변이 온통 어두워졌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아스티나는 침대 안으로 손을 뻗었다. 이미 이불 안에 잠들어 있는 늑대 테리오드 덕에 시트가 따끈따끈했다. 그녀는 색색거리는 은빛 털 짐승을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내려다보았다. 저런 귀찮은 사촌을 선물해 놓고는 혼자만 편히 잠든 모습이 묘하게 거슬렸다.

침구를 매만지는 아스티나를 보고, 아서는 그녀가 저를 두고 잠을 청하려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일그러졌다. 그가 황급히 반박했다.

“나는 테리오드 형의 사촌이야!”

“그래서 저는 마땅히 존대를 하고 있지요, 진정 사람 아닌 취급을 해 드려야 마음에 차시겠습니까?”

아스티나의 목소리가 종내 짜증스러워졌다.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고 적의를 드러내는 상대를 보자 잠시 반짝였던 흥미도 곧 부스러졌다. 그저 애송이였고, 무엇보다 몹시 귀찮았다. 아스티나는 대거리해 줄 의욕마저 상실했다. 그녀는 저런 애송이를 조용하게 만드는 법쯤은 서른 가지도 넘게 댈 수 있었다. 다만 그것을 남편의 친척에게 행할 수는 없어 참고 있을 뿐이었다.

아스티나는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웠다. 상대는 자신에게 최소한의 관심조차 없음을, 아서는 곧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그가 모욕감을 느낀 부분은 우습게도 테리오드가 반응했던 지점과 똑같았다. 바로 그녀의 무관심이었다.

“이게……! 사람을 뭐로 보고!”

아서는 대뜸 걸음을 디뎌 방 안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침대 앞으로 다다른 그가 이불을 젖혔다. 아스티나는 당연히 잠옷 차림이었고, 잠자리에 누우며 치맛단이 원래의 길이보다 걷어 올려진 상태였다.

아서의 유일한 장점을 꼽자면 그가 여성을 추행할 정도의 쓰레기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고개를 홱 돌리며 볼을 붉혔다.

“저, 정숙하지 못하게!”

아스티나는 황당한 얼굴로 아서를 올려다보았다. 올곧은 테리오드와 전혀 닮은 점이 없는 친척이라 여겼는데, 이상한 데서 민감하게 구는 것은 똑같았다. 아스티나는 치맛단을 정리하는 대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가 한숨지으며 말했다.

“대공께서 없을 때 저희끼리 이야기해 봤자 의미가 없을 겁니다. 후에 정식으로 자리를 마련하지요.”

“굳이 다음으로 미룰 것 있어? 형이 어디 있는지나 말해.”

아서가 사납게 물었다. 아스티나는 시선을 내려 늑대의 등을 쓸었다. 아서가 홱 인상을 찌푸렸다.

“그 개새끼는 또 뭐야.”

아무래도 저 동생은 아스티나가 저주를 반쪽만 해결했다는 사실도 모르는 듯했다. 실제로 아서가 성내를 도망 다녔던 통에 테리오드는 그를 붙잡고 설명해 줄 여유도 없이 늑대가 되었다. 때문에 아서는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영지민들 사이에 도는 소문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알고 있었다.

“형을 봐야겠어.”

그 형이 눈앞에 있는 줄도 모르고, 아서가 당당하게 요구했다. 아스티나는 물끄러미 테리오드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내 말 안 들려? 형을……, 형을……?”

아스티나의 시선을 따라 침대 위 늑대를 흘기던 아서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그 개는…….”

이윽고 아서가 침묵했다. 기억 속 분위기와는 다르나, 아서가 마지막으로 아탈렌타에 들렀을 적 보았던 괴물 대공과 똑같이 생긴 동물이었다. 다만 그때 그가 흉흉한 얼굴로 연신 이를 드러냈다면, 지금의 테리오드는 그저 온순히 잠을 청하고 있었다.

아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혀…… 형을 잡아먹을 셈이야?”

그 밑도 끝도 없는 비약에 아스티나는 황당해졌다.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이 소년은 자신이 한 번 내뻗은 생각에 한없이 빠져드는 성미인 듯했다. 아스티나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요?”

“이, 이 마녀가…… 형을 개로 만들어서 스튜를 끓여 먹을 생각인 게지!”

아서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분명 테리오드는 저주를 해결하고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낮에 보았던 대공은 자신이 알던 사촌 형이 맞았다. 한데 지금 대공비의 옆에 누운 테리오드는 다시 짐승의 행색을 하고 있지 않나. 저 간사한 여자가 무슨 수를 쓴 게 틀림없었다.

어떻게 저주를 해결했나 하였더니, 저 여자는 진짜 마녀였다. 테리오드를 사람이 되게 하였다가 짐승이 되게 하였다가 하며 대공가를 주무르고 있는 것이다. 아서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상상력이 풍부하군.’

아스티나는 표정만 보고도 아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완벽히 이해했다. 그녀는 그의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제지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잠시 망설이던 아스티나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저런, 들키고 말았네.”

목소리가 삽시간에 요사스러워졌다. 아스티나는 오른손을 들어 느리게 뺨을 두드렸다. 가늘게 뜬 눈이 아서를 향했다.

“젊은 사내아이가 왔으니…… 순서를 바꿔도 좋지 않을까?”

“무…… 무슨 순서 말이야?”

“요리해 먹을 순서 말이다. 아가야.”

아스티나가 위협적으로 입술을 핥았다. 아서의 얼굴은 백지장이 되고 말았다. 아스티나는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아서가 고개를 저었다.

“오지 마.”

“가엾게도, 입은 조심스럽게 놀렸어야지.”

“오지 마! 오지 말라고 했어!”

아서는 다리를 떨며 그녀가 다가오는 대로 걸음을 뒤로 물렸다. 그가 들어왔던 입구에 뒷걸음질 쳐 닿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복도로 나선 아서가 비명 지르며 달음박질쳤다.

“아아아악!”

아스티나는 문가를 쥐고 복도를 넘겨보았다. 꽁지 빠지게 도망간 아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비명 소리는 계속해서 멀어지고 있었다. 아마 다시 돌아오지는 않으리라.

아스티나의 얼굴이 일순 무표정하게 변했다. 그녀는 그대로 문을 닫았다. 이제야 좀 잠을 청할 수 있을 듯싶었다.

* * *

아스티나는 불청객의 방문에도 평소처럼 생활했다. 새벽에 나가 운동을 했고, 정해진 훈련을 마치고는 집무실로 돌아왔다. 오늘은 테리오드가 밤에도 변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기로 했기 때문에 혼자 업무를 봐야 했다. 짐승이 된 대공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보여서는 안 됐으므로 테리오드는 침실에 그대로 묶어 두었다.

병색이 드러나기 전 테리오드는 하루의 대부분을 집무실에서 보냈다. 하루의 반절을 잃게 되자 당연한 이치로 업무 시간 역시 현저히 부족해졌다. 허덕이는 테리오드의 모습에 아스티나는 대공령의 일을 돕겠다 말했던 이전의 약속을 이행하기로 했다. 그녀도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 인종이었던 데다, 어차피 사람 테리오드가 없던 시절에는 혼자 처리했던 것들이라 부담이 덜했기 때문이다.

홀로 일하던 때보다 훨씬 줄어든 분량에 아스티나는 안심하여 얼마간 훈련에 파묻혀 지냈다. 덕분에 무심코 살펴본 책상 위 서류의 탑은 전보다 조금 높아져 있었다. 그에 대한 약간의 죄책감으로, 아스티나는 테리오드가 깨어나기 전 급한 일을 먼저 처리해 둘 심산이었다.

공국 정도의 책임자가 완벽한 일 처리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처리할 업무는 끝도 없어진다. 그녀는 주말임에도 불구 점심까지 거르고 서류를 보았다.

대공비가 설마 주말까지 집무실에 처박혀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으므로, 불청객의 재방문은 다소 늦게 이루어졌다.

“네가 왜 여기 있어!”

‘귀찮은 게 왔군.’

아스티나는 문을 열어젖히고 등장한 아서를 무시했다. 서류 위로 시선을 고정한 채 깃펜을 움직였다. 유려한 필체가 막힘없이 이어졌다. 아서가 분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올리버에게 다 들었어, 잘도 나를 속였더군.”

지난밤 침실에서 도망쳤던 아서는 그대로 올리버에게로 향했다. 저 마녀의 행적을 고해바쳐 그대로 대공저에서 내쫓을 심산이었다. 대공비의 역성을 들던 집사지만, 마녀에게 홀려 있었던 것뿐 실상을 알려 주면 자신의 편이 돼 주리라 여겼다.

방에 도착한 아서는 흥분한 얼굴로 집사의 어깨를 흔들었다. 올리버는 더듬더듬 안경을 끼고는 몹시 지친 기색으로 일어섰다. 자꾸 새벽에 잠을 깨었던 통에 노년의 집사는 이제 불면에 시달릴 지경이었다.

제멋대로 구는 소년이 짜증 날 법도 하건만, 충실한 고용인 올리버는 아서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을 모두 정정해 주었다. 그는 테리오드가 미처 전하지 못했던 반쪽짜리 해결에 관해 세세하게 설명했다. 부디 아서가 은인에 대한 오해를 풀고 사죄하길 바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서.

그러나 대공비가 테리오드를 짐승으로 만든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아서는 또 다른 곳에서 분노했다. 아스티나가 저를 완전히 놀려 먹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계집애가 발칙하게도 자신을 겁주어 내쫓다니,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아서는 제가 묵는 방으로 돌아가 화를 삭이려 노력했지만, 도무지 분이 풀리지 않아 그만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는 아침이 밝자마자 대공비에게 따지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런데 침실과 후원, 식당 등을 아무리 뒤져도 대공비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몰라 방문한 집무실에서 아스티나를 발견하자 그는 더더욱 어이없어졌다. 저 계집이 대체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내 말 안 들려?”

그가 성큼성큼 걸어 아스티나에게로 다가섰다. 다소 거친 기색으로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그제야 아스티나의 고개가 들렸다.

“형은 어디 있어?”

아서가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아스티나는 잠시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고민했다.

지금, 이 애송이가 나를 건드린 게 맞나?

있을 수 없는 일일 텐데, 조금 전 해치운 서명의 끝은 분명 미묘하게 비틀려 있었다. 상대가 갑자기 끼어들어 팔을 잡아챈 탓이었다. 기분 나쁘게 살을 죄어 오는 악력에 아스티나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아스티나가 짧게 명령했다.

“놔.”

“말이 짧다? 하긴…… 내가 그걸 따질 군번은 아니지.”

“놓으라고 말했다. 아서 에스테반.”

“이 계집애가, 어제 날 속여 놓고도 무사할 줄 알아? 올리버에게 다 들었어. 네가 마녀가 아니…….”

“이야기를 전부 듣지는 못했나 보군.”

아스티나는 구둣발로 아서의 발을 짓밟았다. 눈이 튀어나올 듯한 고통에 아서는 그만 그녀를 놓치고 말았다. 아스티나는 뒤로 물러선 아서를 순식간에 책상 위로 메쳤다. 쑤셔 오는 갈비뼈에 아서는 숨을 몰아쉬었다.

아스티나는 발로 아서의 가슴을 짓누른 채 탁상 위에 올려 두었던 칼을 쥐었다. 봉투를 뜯을 때 사용하는 작은 물건이었지만 위협이 되기엔 충분했다.

“마녀도 아닌 내가 어떻게 괴물 대공에게서 살아남았는지, 혹시 궁금하지 않았나?”

아서는 목에 겨눠진 나이프를 보고 숨을 들이켰다. 그 일련의 행동이 너무도 빠르게 이루어졌던 통에, 아서는 어쩌다 자신이 이런 꼴이 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올려다본 아스티나의 눈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몇 번이고 예의를 차리라고 경고하였지.”

“이, 이, 이게…….”

아서는 마저 답할 수 없었다. 아스티나의 손가락이 그의 입술 사이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혀끝을 잡아챈 손가락이 그것을 밖으로 끌어냈다. 아서는 아스티나가 든 칼이 제 혀 위에 얹히는 것을 경악스러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벌어진 입에서 침이 뚝뚝 떨어졌지만 아스티나는 그것을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서는 그녀가 이러한 짓을 처음 해 본 것이 아님을, 그 자연스러운 행동에서 깨달았다. 그녀가 자문하듯 읊조렸다.

“멍청한 혀가 달아나고 나면 조금은 얌전해질까?”

“으, 으…….”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 보아. 친절한 대공이 사촌의 혀를 자른 아내를 용서할지 아니면 벌할지, 궁금하지 않니.”

아스티나는 그렇게 속삭이고는 입을 다물었다. 테리오드라면 사촌의 실수에 그녀에게 고개 숙여 사과할 것이다. 이 일을 밝히면 대신 마땅한 벌을 줄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사촌을 벙어리로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모든 일에 온화한 대공은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리라.

아스티나는 제 자존심과 대공과의 관계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저울질해 보았다. 아서에겐 참으로 안타깝게도, 전자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네 반복된 무례를 내가 계속 참아야 할까?”

아스티나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물었다. 그 기세가 흉악하여 목이 막혔다. 아서는 생리적으로 튀어나온 기침에 몇 번 턱을 뒤틀었지만 혀를 붙든 손은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저건 진심이야.’

기사 서임을 받지 못하고 도망쳤긴 하나 아서도 훈련을 거친 검사였다. 그가 기사가 되지 못한 것은 다른 자질이 부족했기 때문이지 검 실력이 모자라서는 결코 아니었다. 아서는 여기서 잘못 대답했다간 제 혀가 진짜로 날아가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보통의 귀부인들은 날붙이를 다루지 못한다. 호신용이라고 하면 그럴 수는 있으나, 그러한 시시한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대공비는 자신을 제압함으로써 증명했다.

“자…… 잘모해쓰…….”

아서가 불완전한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아스티나는 손을 놓았다. 그녀가 턱을 까딱였다. 계속 말하라는 뜻이었다. 아서가 얼얼한 혀를 삼키며 재차 사과했다.

“잘못…… 했습니다…….”

가슴 위에 놓였던 발이 달아났다. 아스티나는 손수건을 꺼내 타액을 닦아 내고는, 들고 있던 칼을 추슬렀다. 날붙이가 탁상 위로 떨어지며 맑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경황없이 늘어져 있던 아서는 식겁하여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풀려 뒷걸음질 치다 말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서가 사납게 기침을 토해 내며 말했다.

“뭐…… 뭐야 당신……. 뭐예요……?”

아서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아스티나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아서는 겁에 질린 눈으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대륙을 돌아다니던 2년 동안에도 이런 무서운 경험을 하진 못했다. 강도 같은 범죄자들을 마주쳐도 제압하면 그만이었고, 힘에 부칠 인원일 경우엔 돈을 내어 주고 도망쳤다. 혀를 잘릴 뻔한 경험은 당연히 없었다. 죽여 버린다는 협박쯤은 그도 익숙했으나, 방금의 일은 실현 가능한 공포라는 점에서 더 무서웠다.

“닦으렴.”

아스티나가 손수건을 내밀며 말했다. 아서는 제 턱 밑이 완전히 젖어 있다는 걸 알았지만 감히 그 물건을 받아 들지 못했다. 덜덜 떨기만 하는 아서에게로 아스티나가 손을 뻗었다. 그녀는 아서의 턱을 쥐고는 천천히 그가 흘린 침을 닦아 주었다.

“으, 으…….”

다시 제 얼굴을 잡은 아스티나의 악력에 아서는 방금의 공포를 상기했다. 식겁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으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젖은 손수건은 아서의 셔츠 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아스티나는 아서를 천천히 지나쳐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녀가 손목에 뺨을 괴며 말했다.

“흥분했군.”

상대가 너무도 건방지게 굴었던 통에 순간 눈이 뒤집혔다. 종종 군림할 때의 성질을 내보이게 되는 건 그녀에게도 큰 고민거리였다.

아스티나는 황제일 때의 버릇을 삭이려 노력했다. 지금의 그녀도 대공비이기는 했으나 이혼 후엔 잃어버릴 직위였고, 테리오드가 없는 그녀는 그저 백작가의 차녀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당연히도 황제처럼 모든 일에 우위에 설 수는 없는 신분이었다.

사색에 잠긴 아스티나에게, 아서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뭐예요……. 뭐냐고, 방금.”

“버릇없는 어린 양에게 자비를 베풀었지.”

아스티나가 짧게 대답했다. 아서의 기색은 이미 누그러졌으나, 그에게 다시 존중하는 말씨를 사용할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당신…….”

잠시 말을 멈췄던 아서가 핼쑥한 얼굴로 이어 물었다.

“암살자야?”

아스티나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아서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은 상태였지만 눈에는 힘이 있었다.

충격으로 인해 아서는 정상적인 판단이 가능한 상황이 아니었고, 설령 가능했다고 한대도 애초에 그다지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아스티나의 비현실적인 무력까지 확인한 아서는 허무맹랑한 가설을 내세웠다. 그는 마지막 용기까지 끌어모아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형을 죽이고 대공가를 함께 집어삼킬 셈이지, 그렇다면 나도 살기를 바라 애원하지는 않겠다. 나는 결코 악의 세력에 굴복하지 않아!”

“시끄럽구나.”

아스티나가 따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에 자연히 아서가 움찔하여 입을 다물었다. 아스티나는 이쯤에서 아서에게 사실 관계를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첫째, 나는 암살자가 아니다. 둘째, 마녀도 아니지. 셋째. 네 멍청한 상상력이 어디까지 뻗어 갔는지 모르겠지만, 대공을 잡아먹을 생각도 없다.”

아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젯밤 자신이 지껄였던 수치스러운 발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올리버에게 들은 모든 게 사실이란다. 나는 입맞춤을 하여 대공의 저주를 풀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그는 하루의 반을 사람으로 지낼 수 있게 되었지.”

“그, 그걸 믿으라고? 분명 꿍꿍이가…….”

“올리버는 알지 못하는 사실이지만 저주를 해결한 뒤 나는 아탈렌타를 떠나기로 대공과 약조했다. 그러니 네가 바라는 대로 내가 가문의 재산을 내어 먹는 일도 없겠구나.”

그것을 어찌 믿으란 말인가. 아서는 반발심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테리오드에게 물어보면 바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을 거짓말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아서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아스티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똑똑하지 않았으나 그다지 멍청하지도 않았으므로, 그녀가 자신을 겁만 준 이유에 주목했다.

아서의 의심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녀는 본색을 드러낸 순간 자신을 죽였어야 했다. 아예 무력을 숨겼으면 몰라, 수상한 점을 드러내고 난 후에도 증인을 그대로 두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정말 검은 꿍꿍이속을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대공비는 아서를 위협한 후에도 당당했고,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결백을 말했다.

아스티나가 상황을 일축했다.

“오해가 풀렸기를 바란다, 아서 에스테반. 내가 대공과의 불화를 자처하기 전에.”

그 불화란 아서, 자신의 안전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게 틀림없었다. 무의식중에 어깨를 움츠린 아서는 흩날려 발치에 떨어진 종이들을 살펴보았다. 자신이 들이닥치기 전 대공비가 처리하고 있던 서류였다. 그는 음모의 흔적을 찾아내려 했지만 그것은 그저 경비대 휴가일 산정에 대한 안건일 뿐이었다. 어딜 봐도 돈을 내먹을 구석은 없는, 성실한 업무 처리 그 자체였다.

아서가 긴가민가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뭔가 이상한 수를 쓴 게 아니야?”

“아니다.”

“암살자가 아니라고? 사람을 죽여 본 적 없어?”

“암살을 해 본 적은 없다.”

암살과 다른 종류의 살인을 해 본 적은 있다는 뜻이었지만, 아서는 흥분하여 그 미묘하게 다른 어미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가 확인을 위해 재차 질문했다.

“마녀도 아니고?”

“네가 날 짜증 나게 할 심산이었다면 성공했군. 지금 같은 기분이면 마녀다운 짓을 몇 가지 저질러도 좋을 듯해.”

“그럼 방금은 뭐지?”

“무엇이?”

“나…… 나를 제압했잖아. 엄청 강한 힘으로.”

아스티나는 물끄러미 아서를 응시했다. 질문과 함께 점점 자신에게로 다가온다 싶더니, 그는 어느새 그녀가 앉은 소파 가까이에 눈을 반짝이며 붙어 있었다. 이러고 있으니 앳된 얼굴이 티가 났다. 아스티나는 자신이 스물도 되지 않은 애송이에게 진지하게 반응했다는 데 심각한 자괴감을 느꼈다.

‘몸이 어리니 정신 연령도 함께 어려진 건가.’

아스티나가 대답하지 않자 아서가 몸을 일으켰다. 대공비의 수상한 계획을 캐낸다는 목적은 이미 머리 어딘가에 날려 버린 후였다. 자신이 당한 일이라는 점이 좀 문제이긴 했으나, 객관적으로 그녀의 무예는 무척 멋있었다. 아서는 자신을 내려다보던 싸늘한 눈이 숙련된 검사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대공저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테리오드가 말했던 대로 아서는 ‘강해져서 돌아오겠어!’라고 외치며 아탈렌타를 떠났었다. 모험의 목적대로 그는 강한 검사를 만날 때마다 배움을 청했다. 모든 오해가 풀린 지금, 어쩌면 자신은 지금 ‘다음 스승’을 찾은지도 몰랐다.

“검을 잘 다루나 보지?”

아서가 재차 대답을 재촉하듯 물었다. 아스티나는 이 귀찮은 소년을 어떻게 하면 떼어 낼 수 있을지 잠시 고민했다. 어쩌면 자신을 수상한 사람으로 오해하던 아까보다 더 번거로운 방향으로 상황을 이끈 건지도 모르겠다.

아스티나는 더 이상 제자를 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타인을 교육하는 게 귀찮은 일이라는 걸 히센을 가르치며 절절히 깨우쳤다. 지도에 따라오지 못하는 제자를 보며 아스티나는 자신의 어머니이자 스승이었던 오웬을 생각했다.

마티나는 천재적인 자질을 가져 히센처럼 버벅거리는 일은 없었으나, 어찌 됐든 기본부터 차근차근 설명받아야 했던 건 똑같았다. 아스티나는 히센이 실수할 때마다 뒤늦게 어머니의 사랑을 되새겼다.

“아가씨, 오늘 대련은…….”

사자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아무렇지 않게 집무실로 들어오던 히센이 멈칫했다.

집무실 안은 엉망이었다. 아스티나가 아서를 내던지느라 어지른 책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바닥엔 종이가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게다가 어딘지 단정치 못한 행색의 소년 하나가 아스티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대공비 전하…….”

히센이 침음했다.

“범죄는 안 됩니다.”

아스티나는 히센의 말에 짜증스럽게 면박 주려다 말고 멈칫했다. 좋은 생각이 났다. 그녀는 검지를 내밀어 아서의 턱을 들었다. 예상치 못한 접근이었는지 의외로 상대의 반응은 순순했다. 아스티나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검에 관심이 있나 보지?”

“가르쳐…… 줄 거…… 야요?”

어쩐지 무서운 기색에 아서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혀를 뽑아 버리겠다고 협박하고 무섭게 윽박지르다가, 갑자기 상냥한 말투로 변하니 이상했다. 아서는 자신이 건방지게 굴지만 않았다면 대공비는 첫인상 그대로 내내 예의 있었으리라는 사실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배움에 정진하는 것은 물론 좋은 태도야.”

“가, 가르쳐만 준다면 나야…….”

어영부영한 아서의 대답을 듣자마자 아스티나가 히센을 향해 말했다.

“히센, 이 애가 앞으로 네 제자다.”

“예?”

“이름은 아서 에스테반, 대공 전하의 사촌에 나이는 열아홉이라는군. 잘 가르쳐서 써먹도록 해.”

폭탄 발언을 전한 아스티나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멀뚱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두 남자를 무시한 채로, 아스티나는 그대로 집무실을 나섰다.

순식간에 제자 하나가 굴러떨어졌다. 히센은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 채 파악도 하지 못했다.

남겨진 기사와 소년이 눈을 마주쳤다. 아서는 잠시 히센의 행색을 살폈다. 단단한 체구와 듬직한 모습이 과연 검 선생으로서 손색이 없어 보였다. 아서가 더듬더듬 히센을 불렀다.

“스승…… 님?”

“…….”

히센은 앞으로 절대 먼저 아스티나를 찾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 * *

테리오드는 어렸던 날의 꿈을 꿨다.

여섯 살 무렵인지 일곱 살 무렵인지 잘 분간은 가지 않는다. 어쩌면 단잠 속 환상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이제 와서는 몹시 흐릿해진 기억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테리오드는 그때 자신이 무엇을 본 것인지 정확히 알게 되었고, 따라서 그건 분명 실제로 경험했던 일이 맞았으리라.

아탈렌타 저택은 한때 이 근방을 지배했던 왕국이 남긴 성채의 일부였다. 정복 전쟁 중 대부분의 외벽이 헐벗어 복원보다는 무너뜨리는 편이 빨랐고, 비어 버린 땅엔 영지민들이 자리 잡았다. 이전의 영광보다는 축소된 규모였지만 당연히도 보통의 귀족들이 사용하는 저택에 비해서는 대단히 거대했다.

특히 지하에 위치한 감옥은 광활한 미궁에 가까웠다. 미로 같은 지형에 초심자들은 길을 잃기 일쑤였다. 아탈렌타의 가주들은 안전을 위해 지하 감옥의 극히 일부만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출입을 통제했다.

테리오드는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대공저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창때 소년의 호기심은 나갈 수 없는 세상 대신 거대한 대공저를 탐험하는 것으로 채워졌다. 당연히 그의 모험 대상엔 예의 지하 역시 포함되었다.

심심할 때마다 온갖 곳을 헤집는 어린 소년만큼 숨은 지형을 찾아내기에 적합한 탐사자는 없을 것이다. 테리오드는 마침내 비밀 통로 하나를 발견했고, 흥분하여 안으로 들어섰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분명 이상했다. 잊힌 공간이라면 당연히 먼지가 수북하게 쌓였을 테고, 진입하는 길은 그저 어두워야 옳았다. 그러나 지하라 공기가 답답한 것만 빼면 예의 통로는 꽤나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돌벽 사이엔 새 초가 꽂혀 있었으며 그중 몇 개는 드문드문 불을 밝히고 있기까지 했다.

테리오드는 넓은 복도를 따라 걷고 또 걸었다. 아이의 걸음으로는 힘겹고 어른의 걸음으로도 다소 지칠 즈음의 거리를 지나, 테리오드가 마침내 멈춰 섰다.

감옥답게 길의 끝에는 당연히 철창이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비어 있어야 할 그곳에서 생명의 숨소리가 들려왔다는 점이다. 혹시 남몰래 처리해야 할 범죄자라도 있는 걸까. 테리오드는 침을 삼키며 철창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흉흉한 안광과 마주쳤다.

“으아악!”

테리오드는 비명을 참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날카로운 이빨이 곧장 철창을 물어뜯었다. 뱀 같은 눈은 연신 테리오드를 흘기고 있었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이 쇳덩이만 사라지면 네까짓 것쯤은 한 입에 삼킬 수 있다는 듯이.

테리오드는 주저앉은 그대로 돌바닥을 손으로 짚어 가며 허겁지겁 물러섰다. 살갗을 따끔하게 스친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혹 자신이 어둠에 현혹되어 환상을 보고 있는 걸까.

그것은 그동안 보아 온 어떤 동물과도 같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늑대에 가깝기야 하겠으나, 테리오드는 저것이 그깟 산짐승이 아니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괴…… 물이야.”

테리오드가 덜덜 떨며 중얼거림과 동시, 철창 안의 괴물이 사납게 울부짖었다. 흉악한 손톱이 연신 벽을 긁었다. 창살이 긁히며 비명과도 같은 날카로운 쇳소리가 복도 내에 울려 펴졌다. 괴물이 콧김을 내뿜으며 낮게 울었다.

“크르르르르…….”

테리오드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뒷걸음질 쳐 물러서다가는, 등을 돌려 죽을힘을 다해 왔던 길을 되짚어 뛰어갔다. 테리오드가 지하를 벗어나기까지 귀를 울리는 괴물의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어린 소년은 그 기나긴 복도를 달리는 내내 생각했다.

저것이 나를 잡아먹게 두어서는 안 돼.

그날의 테리오드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의미 있는 생존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테리오드는 우습게도, 어른이 된 지금에 와서야 그 동화 같은 조우의 의미를 알아챘다. 복도를 쩌렁쩌렁 울리던 처절한 울음소리, 야수는 내내 어린 테리오드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친애하는 어린 괴물아, 이게 네 미래란다.

“허억……!”

한순간에 현실로 끌어 올려졌다. 테리오드는 허우적거리며 필사적으로 눈앞에 있는 사람을 잡아챘다. 손아귀 속에 부드러운 팔목이 감겼다. 테리오드는 상대의 가슴팍에 얼굴을 처박은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친 호흡이 도통 진정되질 않았다.

달콤한 체취가 순식간에 그에게로 스몄다. 테리오드는 그제야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절박한 안도감이 치밀었다. 테리오드는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눈을 떴다.

“아…….”

테리오드는 그만 손을 놓았다. 대공비가 자신을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식은땀으로 젖은 등줄기가 차게 식었다. 테리오드는 힘없이 팔을 늘어뜨렸다.

그는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실은 어두웠다. 창문 너머로 마력 같은 월광이 스몄다. 테리오드는 오른손을 들어 땀으로 젖은 얼굴을 가렸다.

“성공했군요.”

밤에도 변할 수가…….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저녁에도 사람으로 운신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테리오드는 기뻐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쫓아오던 공포가 너무도 생생했다.

“찬물을 내오라 시킬까요.”

“아니요, 아니…… 됐습니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를 밀어내며 고개 저었다. 절박한 마음에 그만 앞에 있던 대공비를 끌어안고 말았다. 다행히도 자신의 체면을 배려한 것인지 하반신엔 흰 시트가 감긴 채였다. 테리오드는 안도인지 앓는 소리인지 모를 신음을 내어놓았다.

“입으세요. 뒤돌아 있겠습니다.”

아스티나는 그에게 옷가지를 내밀고는 돌아섰다. 테리오드는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옷을 집어 들었다. 먼저 속옷을 입고 바짓단에 다리를 끼워 넣었다.

문제는 허리를 여미는 데서 발생했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테리오드는 짜증스럽게 단추를 당기다가, 이내 침대 위에 도로 주저앉았다. 가쁜 숨이 여직 가라앉지 않았다. 맥이 풀린 테리오드가 갈라진 음성으로 말했다.

“추한 꼴을 보였군요.”

무서웠다. 이대로 의미 없이 죽어 버릴 것이 두려워 겁쟁이처럼 산 사람을 붙들었다. 공포에 질린 눈동자를, 그녀는 보았을까?

테리오드의 말에 아스티나가 뒤를 돌았다. 아직 옷을 다 걸치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중요한 부위는 가려진 상태였다. 이 정도면 테리오드도 부끄럽지 않으리라 판단하여, 아스티나는 그를 그대로 응시하며 대꾸했다.

“추하지 않았습니다.”

아스티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겪어 본 적 없는 고통을 무시할 정도로 그녀는 경우 없는 인물이 아니었다. 직접 그와 같은 상황에 놓이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아마 아스티나는 괴물이 되는 기분을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테리오드의 두려움을 감히 폄하할 생각이 없었다.

테리오드는 아직도 경련이 멎지 않은 손을 주먹 쥐었다. 손등이 하얗게 변했지만 떨림은 잦아들지 않았다. 그가 자조하듯 말했다.

“부인께는 자꾸 나약한 모습만 보여 드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분야만 다를 뿐,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한 부분엔 나약하지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덤덤한 응대에 테리오드는 고개를 들어 아스티나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끌어안고 헐떡이는 사내를 비웃지 않을 만큼, 그의 부인은 언제나 자비롭고도 공정했다. 그러나 테리오드는 그 사실에 의문이 드는 것이다. 그녀가 모든 것에 여유 있게 마음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여유를 잃을 정도의 간절함이 없기 때문은 아닌가. 테리오드는 도무지 아스티나를 알 수 없었다.

동정하지 않는다 말하면서 그를 돕는다. 그를 돕는다 말하면서 괴물의 외로움은 보지 않는다. 언젠가 떠나겠다고 매 순간 주지시키면서 꼭 필요한 순간에 다정하다. 그 친절에 속아 선을 넘을 때마다 매섭게 내쳐짐으로써 깨닫는다.

그녀는 내 두려움을 모른다.

저열한 감정에 테리오드는 숨을 들이켰다. 그녀에게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싶어진 걸까. 대공비는 반쪽짜리 인간에게 이미 필요 이상으로 잘해 주고 있었다. 더 이상의 요구는 그의 염치없음을 말한다. 그러나 양심은 가슴속의 괴물이 이미 잡아먹었을까, 테리오드는 그만 충동적으로 질문했다.

“그렇다면 부인의 약점은 무엇입니까.”

테리오드의 말에 아스티나가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 선연한 시선에 테리오드는 몹시 부끄러워졌다. 그녀의 서늘한 눈빛 아래 서면 항상 발가벗겨지는 기분이었다. 특히 이런 추태를 보이고 난 후에는 더더욱.

“알 이유가 없으신 것 같습니다.”

단호한 거절이었다. 평소의 테리오드라면 바로 무례를 사과하며 한 발짝 물러섰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벗어던진 염치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테리오드는 아이 같은 어리광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불규칙한 높낮이로 말했다.

“그대는 나의 밑바닥을 아니, 부부로서 그게 공평하지 않겠습니까.”

대공답지 않은 요구에 아스티나가 멈칫했다. 그 막무가내의 태도가 과거의 누군가를 상기시켰다. 달빛은 테리오드뿐만이 아니라 아스티나도 충동질했다. 테오도르의 얼굴을 보며 아스티나는 쓰게 웃었다.

“저는 사사로움에 눈먼 천치랍니다.”

“그대만큼 공명한 이가 또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의미 없는 사람들에겐 그렇지요.”

“나는 부인의 냉철한 모습만을 보았는데, 그렇다면 그대에겐 모두가 의미 없었습니까?”

아스티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테리오드가 재차 물었다.

“그대를 사사롭게 만들었던 사람은 누굽니까?”

“대공.”

지나친 참견에 아스티나가 대공을 제지했다. 그녀가 매끄럽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주제넘으십니다.”

테리오드는 모욕감을 느꼈으나, 동시에 그녀가 진정 무례해서 그런 감정이 든 게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에게 모든 치부를 내보였다고 해서 그녀 역시 같은 바닥으로 떨어질 필요는 없었다. 그들은 그 정도의 친밀감도 존재치 않는 사이였다.

이전에 엇갈렸던 지점에서, 테리오드와 아스티나는 다시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를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부인은 대공에게 관심이 없었다. 이를테면 서로에게 둔 무게의 차이였다.

아스티나는 어느새 테리오드의 큰 부분이 되었다. 미래에 저주가 풀리든 풀리지 않든, 그래서 후에 아스티나가 필요 없게 되든 아니든 테리오드에겐 아무 상관이 없었다. 지금의 테리오드는 그녀가 있어야만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모든 약점을 보였으며, 심지어는 대공령의 일까지도 도움을 얻고 있었다. 성애의 의미가 아니더라도 테리오드는 아스티나를 제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인 지 오래였다.

테리오드는 이제 알았다. 대공비가 떠나겠다고 말했을 때, 그는 깊이 실망했다. 그녀가 자신을 의미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 싫었다. 반복해서 버려졌음에도 괴물은 여전히 상처받을 것이 두려웠다. 자신을 두고 떠나겠다고 이성적으로 말하는 그녀에게,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배신감을 느꼈다.

누구보다 내 곁에 가까이 다가와 놓고 왜 그대는 그리도 쉽게 떠나겠다 말해.

테리오드는 그만 숨을 들이켰다. 그는 그녀를 말로 표현하려고 할 때 여러 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저 여자는 고민할 의욕조차 없을 것이다. 투명한 시선에 무관심이 여실했다. 테리오드는 가슴 언저리가 턱 막혀 오는 기분이었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대화로 풀어야 할지 몰랐다.

그는 쭉, 지금까지 벽에 대고 말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떤 반응도 없는 그저 거대한 벽.

잠시 바닥만 내려다보던 테리오드가 고개를 들었다. 늘어진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대는 내가 죽으면 울어 줄 수 있습니까?”

“질문의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키우던 개도 죽으면 우는 법입니다. 부인에게 내가 그 정도는 되느냐고 묻는 겁니다.”

아스티나는 그의 질문이 맥락에 맞지 않다 여겼다. 이상하다는 듯한 시선이 테리오드를 스쳤다.

“말씀의 저의가 이상하십니다. 당연히 슬프지 않겠습니까.”

“내 말은…….”

테리오드는 자신의 심정을 설명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에게 관심을 구걸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테리오드는 자신이 얼마나 볼썽사나운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제멋대로 대공비에게 의미를 둔 것뿐, 그녀는 자신에게 무관심한 것이 당연했다.

테리오드 반 아탈렌타는 아스티나 레테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당연한 이치를 깨달은 순간, 테리오드의 얼굴이 생경한 감정으로 벌게졌다.

“됐습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납게 문을 열고 나갔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에 아스티나는 잠시간 그의 빈자리를 응시했다. 그러나 무게를 두지 못한 시선은 금방 떨어져 나갔다.

* * *

늘 그렇듯, 집사 올리버의 아침은 일렀다.

그는 우선 창고에 남아 있는 술이 어느 정도인지를 헤아렸다. 대공과 대공비, 그리고 아서가 함께하는 만찬을 슬슬 준비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테리오드의 문제로 좀처럼 함께할 자리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다지 멀지 않은 때에 이루어질 것임은 분명했다.

올리버는 와인 병의 개수를 세고 맛이 변하진 않았는지 살폈다. 마지막으로 은식기의 상태까지 점검한 후, 그는 느긋이 걸음을 옮겨 집무실로 향했다. 대공 부부가 오기 전에 짧게 환기를 해 둘 요량이었다. 올리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에구머니나!”

창문으로 다가서다 말고 그가 기겁하여 소리쳤다. 집무실에 이미 누군가 있었다. 의자 등받이가 상대의 몸을 가려 가까이 갔을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거기엔 테리오드가 턱을 괸 자세로 앉아 창가를 내다보고 있었다. 올리버는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물었다.

“벌써 나와 계십니까?”

목소리에 밴 황당함을 지우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고작 여섯 시였기 때문이다. 아침 식사까지도 한참 먼 시간이었다.

아무리 제 주인이 일중독이라지만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나. 속으로 안타까워하던 올리버는 책상 위가 비어 있는 걸 확인하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업무를 보는 게 아니라면 그가 왜 여기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전하, 언제부터 여기 계셨습니까?”

“……지난밤 자정부터인가.”

테리오드가 확실치 않은 기색으로 대답했다. 지난밤 자정이라니, 그 말에 올리버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밤에도 사람으로 머물 수 있는지 실험해 본다고 하시더니, 결국 보란 듯이 성공한 게 틀림없었다. 올리버가 기쁜 기색으로 소리쳤다.

“밤에도 변하실 수 있게 된 거군요!”

그러나 마땅히 함께 기뻐해야 할 주인은 반응이 없었다. 민망한 적막이 이어졌다. 올리버는 분위기를 띄우고자 이렇게 덧붙였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그래 보이나?”

그러나 돌아온 건 냉소적인 목소리였다. 집사의 어깨가 늘어졌다. 그가 한결 작아진 음성으로 솔직히 답했다.

“사실 별로 안 좋아 보이십니다.”

테리오드는 그제야 엷게 웃었다. 작게 들리는 웃음소리에 올리버가 조심스럽게 테리오드에게 다가갔다. 대공이 피곤한 눈가를 문지르며 의자를 돌렸다.

“차를 내올까요?”

“좋지.”

올리버는 금방 뜨거운 물과 찻잎을 준비해 왔다. 주름진 손으로 티팟을 만지면서도 그는 면밀히 주인의 표정을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확실히 잠을 자지 못한 듯 피곤해 보이는 낯이었다.

올리버는 불면에 도움이 되는 허브를 선별해 차를 우렸다. 이윽고 따듯한 향기가 실내에 번졌다. 한 모금 들이켠 테리오드는 전보다 이완된 기색으로 잔을 내려놓았다.

테리오드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책상 모서리를 두드렸다. 원목과 부딪혀 딱딱한 소리를 내던 손마디가 이내 조용히 멎었다. 테리오드는 올리버로서는 참으로 알 수 없는,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내가 괴물이기 때문에 싫은 걸까?”

“예?”

종잡을 수 없는 화제에 올리버가 입을 벌렸다. 그러나 집사를 향한 질문은 아니었던 듯, 테리오드는 확신 가득한 어조로 결론지었다.

“아니, 당연한 질문을 했군. 괴물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올리버가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테리오드가 화제로 삼을 여자라면 대공비 하나밖에 없었다. 주인의 여성 편력이라고는 이 ‘속도위반’ 결혼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통상적인 의미가 아닌, 당사자들의 합의 없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이루어진 혼사라는 점에서 그리 부른 것뿐이었다.

“대공비 전하와 싸우셨습니까?”

올리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테리오드는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으나 고민 어린 낯은 숨기지 못했다.

“싸운 게 아니야. 내가 당연한 사실을 간과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결혼했다고는 하나, 그녀는 하루의 반을 짐승으로 머무는 남편이 싫은 게야.”

그 말에 올리버의 얼굴이 얼떨떨해졌다. 보통의 경우라면 타당한 가설이겠지만 사실과는 전혀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대공비가 좀 비범한가.

늑대일 적을 기억하지 못하는 대공은 모르는 일이나, 대공비는 한 번도 ‘괴물 대공’의 모습에 거부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기실 대공비의 호감도를 따지자면 늑대 쪽이 훨씬 우세한 것 같기도 했다. 올리버가 회의적인 음성으로 대꾸했다.

“글쎄요, 대공비께서는 아마 대공이 동물이신 편을 더 좋아하실 겁니다.”

“날 위로할 필요는 없네, 올리버.”

“진심입니다. 대공비 전하께서는 대공께서 외로워하실 것을 염려하여 항상 곁에 두셨어요. 집무실에 놓여 있던 쿠션이며, 육포며 전부 보셨지 않습니까.”

제 말에 한 점 거짓도 없다는 듯 올리버는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테리오드는 자연히 이곳에 산재했던 개의 흔적을 상기했다. 집무실에 온통 흩날리는 짐승의 털에 기겁했던 일이 떠올랐다. 확실히 대공비가 괴물 대공에게 거부감을 느꼈다면 그리 가까이에서 보살피지는 않았을 것이다. 침실엔 테리오드가 직접 부탁하여 설치한 철창이 어엿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두고, 들여다보지 않으면 끝이다. 그편이 훨씬 효율이 좋을 것임은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괴물 대공을 곁에 두고 돌보는 편을 택했다.

어쩌면 정말로, 괴물 대공을 경멸하지 않아서.

‘그렇다면 왜 떠나려 하는 거지?’

테리오드는 혼란스러워졌다.

테리오드는 그녀가 무엇을 원하든 어렵지 않게 그 앞에 대령해 줄 자신이 있었다. 대공이 소유한 아탈렌타의 부를 안다면 그 말이 허풍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 것이다. 아스티나의 선택은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몹시 이해하기 힘들었다. 사교계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될 이혼 딱지보다는, 당연히도 아탈렌타의 대공비가 훨씬 더 나은 결과다.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을 팔아 얻은 것이 행운이라 여기도록 만들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게 그리도 중요한 일일까. 그깟 설욕 같은 것은 잊고 행복해질 생각은 없는 걸까. 테리오드는 자신이 그녀의 행방에 대해 한 가지 결론만을 내려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앞으로도 내 옆에 계속…….

“피곤한 게 맞나 보군.”

테리오드가 신음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채 반도 비우지 못한 찻잔을 살피며 올리버가 당황한 음성으로 물었다.

“침실로 가십니까?”

“아니, 후원으로 가겠어.”

테리오드가 짧게 대답하며 집무실을 나섰다. 걸음은 대공비가 있는 곳과 반대편으로 멀어졌다. 이런 기분으로 그녀에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 * *

아스티나는 혼자서 눈을 떴다. 여전히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녀는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몇 번 묵직한 눈을 깜빡이다가 차가운 베개 위를 쓸었다.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안 들어왔나 보군.”

그렇게 방을 나서고 대공은 아스티나가 잠들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아침이 되면 어련히 옆에 누워 있겠거니 했는데, 아무래도 그때부터 자신은 쭉 혼자 있었던 모양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이 침실은 테리오드의 것이었다. 대공에게 불만이 생겼다면 밖으로 나가야 하는 건 아스티나 쪽이라는 소리였다. 그는 왜 제 것인 공간을 두고 때아닌 가출을 한 걸까.

‘사춘기인가.’

실없는 생각이었다. 대공은 이십 대 중반의 어엿한 청년이지 않은가. 오래 살아온 탓으로 그를 어리게 보고 있긴 해도, 테리오드가 사촌인 아서마냥 치기 어린 십 대는 아니었다.

그리 긴 기간은 아니었으나 테리오드와 함께 지낸 몇 주가 마냥 짧지만도 않았다. 그리고 아스티나가 판단하기로, 테리오드는 별것 아닌 일로 그렇게 감정을 드러낼 사람은 아니었다. 과거를 캐내려 집요하게 굴던 대공의 모습은 과연 평소답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 혼자 이상한 질문을 하고, 또 저 혼자 성을 내다 나가 버렸다. 아스티나는 굳이 그런 테리오드를 뒤쫓진 않았다. 정략결혼으로 맞은 남편의 기분을 신경 쓰려 몸에도 맞지 않는 섬세함을 뒤집어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아침까지 돌아오지 않자 약간의 궁금증이 생겼다.

아스티나는 지난밤의 일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그대는 내가 죽으면 울어 줄 수 있습니까?’

옛이야기를 캐묻더니 이어 던져졌던 생뚱맞은 질문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거쳐 그런 결론이 나왔을까.

아스티나가 보기에 테리오드는 지금 어느 때보다 안정된 상태였다. 제 덕에 꾸준히 사람으로 변하게 된 데다, 업무 처리 시간이 부족할 듯해 일까지 도와주고 있지 않던가. 아스티나는 대공에게 최선의 호의를 베풀고 있었다. 대공 역시 그걸 알아 그녀에게 자주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나.

그러나 달빛 아래에서 마주쳤던 남자는 낮의 모습과 조금 달랐다. 땀에 젖은 채 두려움에 헐떡이던 얼굴, 갈망하는 눈으로 올려다보던 시선이 잊히지 않았다. 마치…….

“개 같았지.”

아스티나는 그것이 다른 의미로도 해석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이어 정정했다.

“강아지 같은 건가.”

어울리지 않는 비유일지도 모르지만, 아스티나는 어젯밤 저를 흘기던 테리오드의 눈에서 그의 다른 모습을 상기했다. 그녀가 일에 집중해 있을 때면 늑대는 종종 관심을 달라는 식으로 옷자락을 물어 당기곤 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그 원망 어린 눈빛과 지난밤의 불화가 겹쳐졌다.

‘하기야,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상념을 털어 버리고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방문을 닫고 나선 남편을 붙잡지 않았듯, 그녀는 그 없는 일과를 충실히 소화하기로 했다. 아스티나는 옷을 갈아입고 평소처럼 밖으로 나섰다.

“꼭, 하아암― 이 시간에 훈련을 해야 돼?”

매일 반복하던 새벽 훈련에 새 얼굴이 늘었다. 낯익은 목소리에 아스티나는 연무장으로 들어서다 말고 잠시 멈칫했다. 히센의 옆에 아서가 불량하게 짝다리를 짚고 서 있었다.

연신 하품을 하며 눈물까지 보이던 소년이 아스티나를 발견하고는 몸을 굳혔다. 급격히 없던 열의가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아서가 군기가 바싹 든 목소리로 물었다.

“뭐부터 할까요?”

아스티나의 얼굴이 얼떨떨한 빛을 띠었다. 이렇게 빨리 다시 마주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귀찮은 마음에 히센에게 떠넘겼던 소년이 아닌가.

아스티나는 멈췄던 걸음을 디뎌 히센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미미하게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뭐지?”

“제 제자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마땅히 함께 검을 수련해야지요.”

히센이 뻔뻔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스티나는 그런 히센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부담스러운 시선에 히센은 고개를 돌렸다.

귀찮은 일을 떠넘긴 건 사실인지라 아스티나로서도 무어라 책할 수가 없었다. 아닌 척 딴청을 피우는 제자를 보며 아스티나는 그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식으로 보복을 하겠다?”

“보복이라뇨, 아가씨의 도움으로 이뤄 낸 검 실력, 직접 인도해 주신 제자에게도 잘 가르쳐 보려고 하는 거지요.”

연습이라도 한 듯 히센이 천연덕스럽게 변명했다. 그에 아스티나 역시 아서를 떠넘긴 동기를 생산적인 방향으로 포장했다.

“자네는 좋은 검 선생이지 않나.”

“아가씨도 좋은 스승이십니다. 좀 폭력적이신 것만 빼면.”

아스티나가 호오, 하고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녀의 손이 서늘한 기색을 뽐내며 검 손잡이로 가 닿았다.

“스승의 폭력성이 새삼 궁금해졌나 보지?”

그 말에 히센이 기겁하며 물러서기도 전, 아서가 세모눈을 뜨며 끼어들었다.

“네가 히센 경을 가르쳤어?”

아스티나는 부담스럽게 다가온 아서의 머리를 검지로 밀어냈다. 때리기라도 하려는 줄 알았는지 아서가 티 나게 몸을 떨었다.

“저번엔 존대를 섞어 하더니, 반말로 정착인가?”

“……동갑이잖아…… 요.”

눈치를 보면서도 기어코 대드는 모습이 마치 오뚝이 같았다. 아스티나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논리였으나,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여기다 대고 전생의 나이를 내세우며 실제로는 까마득한 연상이라는 말을 덧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서와 아스티나는 객관적으로 상호 존대를 하거나, 같이 말을 놓아야 하는 연배였다. 그리고 아스티나는 저 철없는 소년에게 다시 존대를 쓸 생각은 없었다. 아스티나는 한쪽 눈썹을 비뚜름히 들어 올렸다.

“그래, 일관적인 태도가 깡은 있군.”

아서의 얼굴에 순식간에 화색이 돌았다. 동갑과 맞먹는 게 그렇게도 좋을까. 아스티나가 속으로 혀를 차는 것도 모르고 아서가 재차 질문했다.

“정말로 히센 경을 가르쳤어?”

“그래.”

“히센 경이 너보다 훨씬 나이도 많잖아. 게다가 어제 대련해 보니 스승님은 엄청 강하던데.”

벌써 스승님 소리가 입에 익은 모양이었다. 아스티나는 대답하지 않고 아서를 흘긋 넘겨보았다. 그는 불신의 눈으로 그녀의 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르침과 배움에 있어서 나이란 의미가 없단다.”

히센이 대신 끼어들어 아스티나를 띄워 주었다. 그의 표정엔 뿌듯함이 가득했다. 히센은 그의 주인 얘기만 나오면 지나치게 들뜨는 경향이 있었다.

백작저에서 근무하던 시절에는 아무에게도 아스티나의 무예를 자랑할 수가 없었다. 아가씨의 부모님인 레테 백작 부부는 물론이거니와, 그녀에게 검을 도둑질당하던 견습 기사들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이었다. 히센은 스승의 대단함을 아는 사람들이 늘어 감에 대단한 성취감을 느꼈다.

히센까지 끼어들자 대화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아스티나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대답했다.

“히센은 재능이 있었지,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가르칠 수 있었다.”

너는 아니니 이 부담스러운 눈빛 좀 치우라는 소리였다. 아스티나는 아서가 대련 따위의 것을 청하지 못하도록 먼저 선수를 쳤다. 남편의 사촌에게까지 보모 노릇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서의 관심사는 아직 거기까지 닿진 못한 모양이었다. 그가 의문 어린 눈으로 물었다.

“넌 나랑 동갑이잖아. 대체 히센 경을 몇 살 때부터 가르친 거야?”

대답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고작 열 살 때 스물셋의 기사를 지도했다고 어떻게 밝히겠는가. 아스티나가 말을 돌리려는데 히센이 재차 끼어들었다.

“무려 열 살 때셨지! 체구는 작으셨지만 검을 쥐는 폼이 어찌나 정확하시던지! 근력이 약해 진검을 휘두르실 정도는 아니었지만 검법을 보는 데는 그만한 눈이 또 없으셨다.”

그 당시 아스티나는 히센을 몸보다는 말로 지도했다. 체격 차가 워낙 커서 잘못된 자세를 지적해 주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히센이 ‘한 대라도 자신을 치면 검을 내주겠다’고 말해 아스티나가 그에 응했을 때도, 공격 자체는 가능했지만 그다지 의미 있는 타격은 입히지 못했다.

다만 힘 외의 모든 것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히센은 피할 수 없는, 그러나 정작 아프지는 않은 목검의 세례에 따가워 연신 몸을 긁어 대야 했다. 어린 몸으로 방방 뛰어다니던 모습은, 정작 아스티나는 별로 떠올리고 싶진 않은 기억이었다.

“당시엔 이론적으로만 조예가 있는 수준이었다.”

아스티나가 히센의 말을 정정했다. 그에 히센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다시금 소리쳤다.

“체격 문제였을 뿐, 모든 면에서 저를 완전히 압도하셨지 않습니까!”

“히센…….”

아스티나가 신음하며 서늘한 시선으로 히센을 돌아보았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히센이 자랑스러운 눈으로 엄지를 추켜세웠다. 저 만개한 꽃밭에 뭐라고 책할 수도 없었다. 아스티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대체 이게 무슨 시간 낭비인지 알 수 없었다.

“천재구나.”

아서가 경탄한 어조로 말했다. 허탈함도 언뜻 비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스티나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히센의 말은 허풍이 반이다.”

“하지만 저 강한 히센 경이 너를 스승으로 부르는 것도 사실이잖아. 너는 나랑 동갑인데, 내 스승의 스승이 되는 거라고.”

그 말을 하는 표정이 어쩐지 침울하였다.

아스티나에게 제압당했던 어제, 히센 경에게 떠맡겨졌을 때만 해도 아서는 노력하면 그녀를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는 대공비의 고향에서부터 따라왔다는 히센 경이 그녀의 검 스승이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러니 대공비도 자신을 저 남자에게 인도한 것 아니겠는가.

과연 대련으로 확인한 히센 경의 무력은 아서가 겨뤄 왔던 검사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레테 백작가에서 최연소로 기사단장 자리에 올랐다던 소개가 이해되는 무예였다. 어린 검사는 투지에 불탔다. 저 강한 여자를 가르친 남자는 역시 대단하다며, 자신도 그만큼 성장할 날을 꿈꿨다.

한데 지금 제 앞에서 나누는 대화가 조금 이상했다. 자꾸 대공비를 스승이라 칭하는 히센 경이 이상하여 물어본 것인데 돌아온 대답은 더욱 기이하다. 그 까마득히 어린 시절부터 히센 경을 지도했다니. 그렇다면 지금의 아스티나는 대체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말도 안 돼.”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자신을 제압하던 대공비의 모습이 떠올라, 아서는 이어 넋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천재는 다르구나…….”

‘쓸데없는 비교를 하는군.’

아스티나로서는 곤란한 일이었다. 물론 마티나였을 때의 자신도 찾아보기 힘든 천재는 맞았으나, 열 살 무렵부터 훈련된 기사를 가르칠 정도는 아니었다. 아스티나가 어릴 적 거둔 성과는 비겁했다. 그녀의 무예는 ‘아스티나’만의 몫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눈알을 부라리던 소년이 의기소침해져 있으니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어릴 적 칸나에게 했던 말을 다시 해 줘야 할 판이었다.

‘벌써부터 자신에게 그렇게 실망하지 마, 한계가 죽을 날까지 언니를 반복해서 괴롭힐 테니까.’

황제인 자신을 버리고 아스티나의 삶으로 스미려 노력하며, 그녀는 범인의 사회성을 얻었다. 그때의 말을 적절히 걸러 내고 이렇게 내뱉을 줄 알게 됐다는 소리였다.

“자신에게 그렇게 실망하지 마라. 내가 얻은 성취가 대단하다고 네가 얻은 성취가 보잘것없어지는 게 아니다.”

“하지만…….”

아서가 반박하려는 듯 운을 떼었다. 아스티나는 단호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

“네가 비교해야 하는 상대는 언제나 너 자신이다.”

힘든 훈련에 마티나가 이를 악물 때면 오웬이 종종 해 주던 말이었다. 스승이라고는 하나, 마티나도 항상 어미에게 지는 자신에게 열등감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고 이겨 보겠다며 이를 가는 딸을 보며 오웬은 그저 웃었다.

과연 그녀는 훌륭한 스승이었다. 자신은 60년을 넘게 살고 겨우 뱉을 수 있게 된 말을 오웬은 겨우 서른에 제 딸에게 전했다.

“그러니 조금 더 스스로에게 긍지를 가져라.”

아스티나가 담백하게 말을 맺었다. 내내 무례하게 굴었던 상대가 뜻깊은 조언을 해 주자 아서는 기분이 머쓱해졌다. 고마움 반 민망함 반, 아서가 코를 훌쩍이며 대꾸했다.

“위로 고맙다……. 근데 넌 왜 말을 이상하게 해? 완전 노숙하게…….”

“…….”

아스티나는 입을 다물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히센이 참지 못하고 폭소했다. 자신이 그녀에게 가르침받던 9년 내내 했던 생각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십 대 소녀치고 아스티나의 말투는 지나치게 근엄했다.

아스티나는 말없이 한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늘하던 하늘빛이 점차 밝아지고 있었다. 평소엔 연무장을 가볍게 몇 번이고 돌았을 즈음이었다.

“쓸데없는 잡담으로 시간을 낭비했군.”

그 말에 히센이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긴장한 스승의 태도에 아서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아스티나의 입꼬리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상냥한 미소가 어째서인지 지난 새벽의 추위만큼이나 서늘하였다.

아스티나가 그들에게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낭비한 시간만큼이나 충실히 훈련에 임해야겠지?”

그리고 아서와 히센은 딱 죽기 직전까지 굴렀다. 가벼운 몸풀기 시간이었던 새벽 훈련이 극한의 혹한기 훈련으로 변질되는 순간이었다. 몇 번 아스티나의 심술을 겪은 적 있는 히센은 그럭저럭 사람의 꼴을 하고는 있었으나, 의욕에 가득 차 시키는 대로 임하던 아서는 결국 넝마가 되어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아스티나는 한결 상쾌해진 기분으로 저택을 향해 걷다 말고 돌아섰다. 지레 겁을 먹은 히센이 엉덩이를 뒤로 뺐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히센 대신 아서에게 다가가 그의 정수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처량 맞게 축 처진 은빛 머리칼을 보자 누군가가 생각난 탓이었다.

아스티나가 귀찮다는 얼굴로 물었다.

“혹시 장미 정원이 어딘지 아나?”

그것은 일종의 변덕이었다.

나오는 길에 잠시 들렀던 집무실은 비어 있었고, 새벽 동안 사라졌던 대공이 아침이 되었다고 새삼 나타날 것 같진 않았다. 왜 침실로 돌아가려던 순간 아름다운 장미 정원을 말하던 테리오드의 얼굴이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스티나는 그날 내친김에 하인에게 해먹을 설치하라 명한 참이었다. 아서와 면담하느라 테리오드는 미처 알지 못했겠지만, 그가 혹여 장미 정원에 들렀다면 부족한 잠을 그곳에서 채웠을 수도 있었다.

대공저의 후원은 넓디넓어 잘못하면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초행길인지라 아스티나도 단번에 목적지를 찾진 못했다. 덕분에 아스티나가 대공의 반짝이는 머리칼을 발견한 건 한참이 지나고 나서였다. 어느새 슬금슬금 올라온 해가 머리 위에 걸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스티나의 예상대로 그는 해먹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하인들이 제법 위치를 잘 정한 모양인지 늘어진 그늘 덕에 참으로 편안해 보였다. 아스티나는 조용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어쩐지 푸석해 보이는 대공의 얼굴을 응시했다.

높게 선 콧대가 멋스러워 이대로 초상화를 그려도 좋겠다 싶었다. 긴 속눈썹은 가지런히 늘어져 웅덩이 같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얕게 벌어진 입술에서 불규칙적인 숨소리가 났다. 조금씩 제 마디를 찾아가던 소음이, 이내 조용히 꺼져 들었다. 풀벌레 우는 화원 위로 한숨이 울려 펴졌다.

“……할 말이 있으면 해요.”

테리오드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머리 위로 진 그림자에 정신을 차린 지 오래였다. 상대가 자신을 깨우길 기다렸는데, 말없이 서 있는 모습을 보면 이대로 몇 시간이고 기다리고만 있을 태세였다. 대공비가 덤덤히 대답했다.

“깨실까 봐 그랬습니다.”

“용건이 있으면 깨우셔야지요.”

“저 때문에 늦게 청하시는 잠 같아 그냥 두었습니다.”

테리오드는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멈칫했다. 그녀의 배려에 다시금 기분이 묘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이 대공답지 않아 아스티나는 결국 이 말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전하, 왜 기분이 상하셨습니까.”

제 마음이 상한 줄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테리오드는 그녀가 그 사실을 알아줌에 다소 기분이 나아짐과 동시, 고작 이런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신이 한심하기도 하였다. 그가 자조하듯 말했다.

“기분이 상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왜 어제 그렇게 나가셨는지요.”

테리오드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붙잡지도 않으셔 놓고 왜 그게 뒤늦게 궁금해지셨을까요.”

맞는 말이었다. 아스티나는 이 질문을 어젯밤 했어야 했다. 테리오드가 집무실에서 밤을 지새우고, 집사에게 말도 안 되는 고민을 말하기 전까지.

혹은, 후원으로 왔다가 해먹을 발견한 테리오드가 자신의 말을 기억해 준 그녀에게 반사적으로 반가움을 느끼고는 이어 스스로의 한심함을 비난하기 전까지.

“돌아오실 줄로 알았습니다.”

아스티나가 말했다. 그녀의 입술이 채 다물리기도 전, 테리오드가 지체 없이 되물었다.

“그래서 기다렸어요?”

“…….”

“나를 기다렸습니까?”

아스티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짓을 말하고 싶진 않았고, 진실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에 테리오드가 설핏 웃었다. 안 어울리게도, 반항아라도 되는 것처럼.

“아니면서.”

그것을 끝으로 대화가 멈췄다. 아스티나는 자리에서 일어선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녀로서는 대공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아낼 바가 없었다. 아스티나는 대공의 심리 변화가 괴물과 사람을 오가며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변화가 제게서 기인할 리는 없지 않은가.

“왜 그러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스티나의 의아한 태도에 테리오드는 어제와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도 명석한 대공비가 왜 대공의 외로움만은 알아채지 못할까. 답답한 일이었으나 사실 테리오드는 그것이 왜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대공의 감정에 주의를 기울일 의사 자체가 없었다.

테리오드는 아내의 유리알 같은 눈을 잠시간 들여다보았다. 그 투명한 빛이 그를 충동질했다.

“부인께서 남편에게 관심이 없으니 억울해서 그렇습니다.”

참으로 예상치 못했던 동기였다. 덕분에 아스티나는 어울리지 않게 눈을 크게 뜨기까지 하였다.

“……관심이 필요하십니까?”

그걸 상대방의 목소리로 직접 듣고 나니 스스로가 더욱더 한심해졌다. 테리오드는 대공비가 자신의 기분을 알아주길 바랐다. 그는 점점 밑바닥으로만 가라앉는 자신을 느끼면서도 억지 쓰는 일을 멈추지 못했다.

“궁금하십니까?”

“네.”

“좀 더 진심으로 말해 보세요.”

“……대공 전하가 왜 그러시는지 궁금합니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요구에 순순히 응했다. 자신의 관심이 왜 필요한지는 모르겠으나 불화가 오래 이어져서 좋을 게 없었다. 그녀는 테리오드의 이상 행동을 계속 신경 쓰고 싶진 않았다. 상대방의 감정 변화에 날을 세우는 건 무척 귀찮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묘하게 건성인 태도를 알아챈 테리오드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애석하게도 대공비의 성의 없는 화해 시도는 더욱 대공의 빈정을 상하게 할 뿐이었다.

“제가 속이 좁아 그런가 보지요.”

말을 마친 그가 장미 정원을 벗어나려 몸을 돌렸다. 테리오드의 입매가 쓰게 일그러졌다.

처음엔 저주를 해결한 후 아탈렌타를 떠나겠다는 대공비의 말을 엉겁결에 받아들였다. 그러나 테리오드는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결심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에겐 이곳을 떠날 이유가 없었다.

분명 가문 간의 거래에 의해 이루어진, 감정 없는 결혼인 것은 사실이나 귀족들의 혼사는 대부분 그러했다. 오히려 마음이 통해 연이 닿은 것이 더욱 희귀한 경우다. 그리고 조건으로 치자면 테리오드보다 우위에 설 신랑감은 없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떠나겠다고 말하며 대공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았다.

테리오드도 정략결혼에 사랑 같은 걸 바라는 건 아니었다. 대공조차 그녀에게 연애 감정을 품은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일단 부부가 되었으니 당연히 행해야 할 도리가 있고, 서로에게 지킬 예의가 있는 법 아닌가.

테리오드는 아스티나가 들풀을 보는 시선과 저를 보는 시선에 한 점 다른 게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공비가 ‘괴물 대공’일 때의 자신에겐 마냥 물렀다던 올리버의 말은 특히나 더 굴욕적으로 다가왔다.

‘사람인 남편보다 짐승에게 더 정을 주었다고.’

테리오드는 그대로 물러나려다, 문득 참을 수 없어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갑작스러운 진로 변경에 아스티나가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테리오드는 주지하듯 아스티나의 앞에 대고 검지를 흔들었다.

“그 개도 납니다.”

테리오드는 참지 못하고 속에 쌓인 말을 마저 뱉어 냈다.

“같은 사람인데 왜 자꾸 다르게 봅니까. 그 늑대에겐 퍽 신경을 썼다면서요.”

“……말씀의 저의를 알 수가…….”

“그대에겐 내가, 그 말 못 하는 짐승보다 못 합니까?”

테리오드가 억눌린 음성으로 따져 물었다. 아스티나의 얼굴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도무지 어떠한 연계로 저 말이 나왔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대공 전하?”

아스티나의 부름에 테리오드는 그만 정신을 차렸다. 잠시 멈칫한 테리오드가 입술을 깨물었다. 도통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듯 보이는 대공비처럼, 대공의 기분도 엉망이었다. 테리오드는 말없이 뒤돌아섰다. 이번에도 대공비는 멋대로 성을 내고 사라지는 대공을 붙잡지 않았다.

테리오드는 한참 뒤에야 사나운 걸음을 멈춰 세웠다.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던 대공비를 떠올리자 기분은 완전히 엉망이 되었다. 테리오드는 그녀를 붙잡을 길이 점점 더 요원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스로가 한심했다. 테리오드는 제 머리를 헝클이고는, 목을 갑갑하게 조이는 타이를 풀어 헤쳤다.

“……젠장!”

그것으로는 속이 풀리지 않아 천 조각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하찮은 화풀이였다. 대공의 속을 상하게 한 그녀는 알아주지 못할 마음이었기에.

* * *

대공과 대공비의 미묘한 불화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 이어졌다.

우선 그 시점 이후 둘의 대화가 멎었다. 업무 시간도 절묘하게 분리되어 마주칠 여지가 없었다. 아스티나로선 상대의 영문 모를 성질을 파헤칠 의욕이 없었고, 테리오드는 완전히 자신을 무시하기 시작한 대공비의 행동에 더더욱 속이 상했다.

짐승일 적의 자신이 대공비와 친밀하게 붙어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대공의 기분은 더더욱 바닥을 쳤다. 날이 갈수록 어둑해지는 대공의 표정에 아스티나는 조용히 물러서기만 했다. 연로해진 사람은 되도록 타인의 기류에 휘말리는 일을 피하게 되는 법이다.

그동안 올리버는 남은 와인 병의 수를 일곱 번 더 세었고, 날은 조금 더 쌀쌀해졌으며, 히센은 버르장머리 없는 도련님의 반항에 완전히 적응했다.

그리고 아서와 아스티나는 그럭저럭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니까 아서가 제멋대로 이런 질문을 던질 정도로는.

“혹시 형이랑 싸웠어?”

아스티나는 생선 살을 부숴 입에 넣다 말고 멈칫했다. 하얀 도미 살을 마저 씹은 그녀가 태연하게 냅킨을 집어 들며 대꾸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콩물로 낸 소스는 흰 살 생선과 제법 고소하게 어우러졌다. 과연 대공가의 주방장은 솜씨가 좋았다. 그러나 아서의 질문을 기점으로, 아스티나는 혀끝에서 뭉개지는 살덩이가 어쩐지 퍽퍽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무표정한 낯으로 와인만 한 모금 넘겼다. 이 정도면 제법 태연하게 응대한 듯한데 상대는 쓸데없이 캐묻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점심은 형이랑, 저녁은 너랑 같이 먹는 게 이상해서. 왜 둘이 같은 시간엔 안 와?”

원래 저 나이 땐 저렇게 호기심이 왕성한가. 아스티나는 제 까마득한 십 대 시절을 떠올려 보았지만 기억이 흐릿했다. 그도 그럴 것이 좀 오랜 시간이 지났던가.

불덩이처럼 펄떡이던 심장은 이미 과거에 한 번 죽었다. 열정으로 가득 찼던 젊은 날은 사라지고,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연마된 기술과 노련함뿐이었다. 한 번 한계까지 타들어 갔던 사람은 다시는 전과 같은 열기를 내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젊고 세심한 대공은 아스티나가 상대하기 힘든 부류였다.

“훈련 때문에 바쁘다. 저녁은 대공께서 운신하시기 불편한 시간이고 말이야.”

“그건 핑계야. 보통 셋이 다 같이 모일 자리가 한 번쯤은 있어야 하거든. 올리버가 괜히 매일 주방까지 내려가 은식기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고.”

“대공 전하가 보고 싶은가 보지?”

“형 얼굴은 이미 실컷 봤어. 갈수록 안색이 수척해지기만 하던걸.”

“그리 우애가 친밀하다면 만찬이 있고 없고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군.”

아스티나가 스푼을 내려놓았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접시와 커트러리를 거둬 갔다. 아서가 손도 대지 않은 생선을 아무렇게나 포크로 찍으며 대꾸했다.

“형이 나한테 너를 소개해 줄 자리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거야.”

“우리는 이미 퍽 자기소개를 잘 마친 참인데, 그런 자리가 꼭 필요할 까닭은 없지.”

“아오, 답답해! 그러니까 여기가 그렇게 형식 없이 굴 집안이 아니라니까?”

아서가 제 성질을 참지 못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스티나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런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움찔한 아서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좀 시끄럽긴 하나 알아서 숙이고 들어오는 아서가 오히려 더 대하기 편할지도 모르겠다. 아스티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 궁금하거든 네가 직접 대공께 물어보면 되겠구나. 왜 그러시는지 나도 모르겠으니.”

말을 마치자마자 아스티나는 후회했다. 답답한 마음에 괜히 운을 떼었다. 아서는 순식간에 승리자의 오만한 미소를 뒤집어썼다. 보기에 퍽 거슬리는 광경이었다.

“역시 싸웠구나?”

“……싸우진, 않았다.”

아스티나가 한 단어 한 단어 끊어 답했다. 아서는 흠, 하고 팔짱을 끼며 등받이로 늘어졌다.

“형이 뭐라고 하는데?”

“네게 털어놓을 일은 아닌 듯하군.”

“난 테리오드 형과 친하잖아. 괜찮은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을걸.”

“아서 에스테반, 부부 사이의 일에 관심 가질 것 없다.”

“그럼 알아서 좀 잘해 보든가. 형이 굶어 죽으면 책임질 거야?”

아스티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음 접시를 내오는 하인을 향해 손을 들었다. 식사를 마치겠다는 표시였다. 주방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접시는 다시 트레이에 담겨 고스란히 출신지로 돌아갔다. 사용인들을 모두 밖으로 물린 아스티나가 허심탄회한 어조로 말했다.

“좋아, 들어나 보지.”

“네가 먼저 말해야지. 형이 언제부터, 왜 저러는데?”

아스티나는 아서의 조언을 구하는 자신이 꽤나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아스티나보다는 아서 쪽이 테리오드와 연배가 가까웠다. 같은 성별에 친척이기까지 하니 적합한 고민 상담자가 돼 줄 수 있을 듯도 했다. 아스티나는 그간 테리오드의 행적 중 가장 이해가 가지 않던 말을 입에 담았다.

“자신이 죽으면 울어 줄 수 있겠냐고…… 묻더군.”

“뭐?”

급격히 심각해진 대화에 아서가 얼굴을 구겼다. 사촌 형의 어른스러운 면모에 익숙해졌던 아서로서는 그의 나약한 말이 낯설었다. 이십 대 중반으로 들어선 이후 테리오드는 앓는 소리를 내는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자신의 죽음에 울어 줄 수 있겠냐니, 아서는 그렇게 청승맞은 대사도 또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저 말을 들은 당사자가 도통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자 더더욱.

“형은 네가 꽤 마음에 들었나 본데.”

취향 참 독특해. 아스티나는 이어진 아서의 빈정거림은 무시했다. 그녀가 덤덤하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어떻게 봐도 싫어할 사람한테 할 말은 아니잖아. 그게 전부는 아닐 텐데, 형이 그 말만 했어?”

“……키우는 개도 죽으면 우는 법이라고, 내게 자신이 그 정도 의미는 있냐고도 물었지.”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는데?”

“당연히 슬프겠다고 했다.”

“그런 표정으로?”

아서가 검지로 그녀의 무표정한 낯을 가리켰다. 아스티나가 대답하지 않자 아서는 어깨에서 힘을 풀며 탄식했다.

“허어…….”

늘어지는 아서를 두고 아스티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거북한 대화였지만 대공과의 갈등을 계속해서 끌어간다면 아탈렌타에서 지내는 일이 배로 불편해지리라.

아서는 찬찬히 상황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너는 사는 데 별로 재미가 없어 보여.”

“틀리지는 않군.”

아스티나가 따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미지근한 태도에 아서마저 반발감을 느꼈다.

“테리오드 형이 너한테 어떤 의미가 있긴 있어?”

“정략혼의 상대일 뿐이고, 그건 대공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말에 아서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봐, 넌 형을 사람으로 만들어 준 여자잖아.”

그들의 부부 관계를 상기시키는 말이었다.

아스티나가 이십 대 청년의 감정에 좀 더 세심히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제 육안상의 모습과 한창때 사내의 조합이 꽤나 자연스러우며, 또한 마땅히 벌어질 법한 일이라고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대공과 자신 사이에 이성적인 무언가가 생겨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애초에 어떠한 부부로서의 관계도 약속할 수 없다 말한 건 테리오드 쪽이었던 데다, 젊은 남성의 구애를 받았던 경험은 그녀에게도 까마득한 과거였다. 아스티나는 이런 일에 일일이 얼굴을 붉힐 만큼 순진하지 않았고 그다지 감정적이지도 못했다.

“대공과 나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나는 저주를 해결한 뒤 친정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형한테 이혼…… 그래, 생각해 보니 그게 문제였구만.”

아서는 이 상황의 근본적인 문제를 짚어 냈다. 기실 아서만큼 테리오드를 적절히 파악하고 있는 이는 없었다. 아서의 말투는 버릇없게 느껴질 만큼 직설적이었으나, 적어도 지금의 아스티나에게 있어 그건 행운이었다. 아서는 아스티나가 보통 사람만큼의 인정머리는 있기를 바라며 테리오드의 과거사를 읊었다.

“대공가의 저주에 관한 건 잘 알겠지.”

“대충은.”

“아텔렌타가 괴물의 씨앗을 어떻게 취급하는지는 알아?”

아스티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테리오드에 대해 아는 건 스무 살 생일까지 대공저 안에서만 살았다는 것과, 이후 혜성처럼 사교계에 등장해 인기를 휩쓸었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꽤나 긍정적으로 들렸다.

“좋아, 그럼 잘 들어. 우선 아탈렌타가에서는 다섯 살 때까지 아들을 방에만 둬. 설령 괴물이 되지 않더라도 감기에 걸린다거나, 다른 요인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아. 최대한 많은 위험 요소를 없애는 게 중요하니까 날카로운 쇠붙이나 혹 다칠지 모르는 물건은 아예 방으로 들이지도 못하게 해.”

아스티나는 고개를 왼편으로 기울였다. 계속하란 듯 고개만 까딱였다.

“그렇게 열서너 살이 될 때까지는 대공저 안도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해. 후원에 나가 봤자 감시 속에,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만을 산책하지. 그러니까 적어도 12년 동안은 꽉 막힌 감금 상태라는 거야. 웃기는 건 그 과보호 속에서도 애들은 픽픽 죽어 나가. 테리오드 형 위로 있던 두 아들 모두가 그 전에 죽었어.”

형제가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한 번도 얘기를 들어 본 적 없어 날 때부터 외동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기야 이런 유전병이 내려오는 집안에서 자식을 적게 둘 리가 없다.

아서가 손가락으로 스물까지 남은 숫자를 펴서 보여 주며 마저 설명했다.

“그리고 성인이 되기까지는 더 힘들지. 머리가 굵었을 때니까. 먹고 입고 자는 것 전부를 통제당하는 데다 바깥으론 나가지도 못해. 솔직히 말해서, 나는 대공가의 가주들은 다 또라이였다고 생각해. 회까닥 돌지 않고서는 버티기 힘든 집안이거든.”

아스티나는 그에 순순히 동의했다. 20여 년간을 감금당해 산다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복수를 위해 숨을 죽이고 왈도의 침소에서 기거했던 당시, 기괴한 성관계 다음으로 마티나를 괴롭게 했던 건 자유에 대한 갈증이었다. 스스로의 의지로 구속된 자도 그러할진대 자의가 아닌 감금은 얼마나 견디기 힘들까.

아스티나가 드물게도 연민이 섞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부모님밖엔 의지할 구석이 없었겠군.”

“그마저도 아냐. 형은 늘 혼자 자랐어. 전대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는 마음이 여린 분이셨거든.”

아스티나는 턱을 들고는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자식을 살피지 않는 게 마음이 여린 것과 무슨 상관이지?”

“아들이 죽었을 때 차마 견딜 자신이 없으셨던 거야.”

아스티나는 코웃음 쳤다.

“비겁한 변명이군.”

동의하는 바였지만, 아서는 자식을 잃는 슬픔을 외면하고픈 대공 부부의 마음 역시 어느 정도 이해했다. 그가 전보다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어쨌든 대공 테리오드는 그래서 항상 외로웠지. 주변 사람들은 나를 두고 테리오드 형이 은혜 모르는 탕아에게 아까운 정을 베푼다고 말했지만, 난 내가 형한테 항상 받기만 했다고는 생각지 않아.”

말을 마친 아서의 입이 삐뚜름한 호선을 그렸다. 그것은 비웃음도 조소도 아닌, 일그러진 슬픔이었다.

“마음 붙일 곳이 없으면 보통 사람은 미쳐.”

단정 짓는 말에 아스티나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녀는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이 죽임당한 후의 마티나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았다. 실로 미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고독이었다. 테오도르가 자신을 위해 살라며 이유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면, 복수를 끝낸 후 텅 빈 자신은 그대로 고꾸라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항상 형이 편히 마음 줄 수 있는 사람과 오래오래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나 같은 사람이 부인 자리를 꿰차 미안하군.”

“너만 한 적임자는 또 없었겠지. 형을 사람으로 되돌려 놓은 게 너잖아.”

“대공께 그 외엔 아무것도 해 줄 게 없다.”

“그러니까. 형은 주제 모르고 그 외의 뭔가를 바랐었나 보지.”

아스티나는 무의식적으로 반박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그녀는 아서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완벽히 이해했다. 잠시 크게 뜨였던 그녀의 눈이 곧 차분히 깜빡였다.

테리오드가 그리 상처받은 얼굴을 하며 대화를 피하지 않았다면 좀 더 일찍 알아챘을지도 모르겠다. 대공의 가정사를 미리 들었다면, 그가 무엇을 갈구하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했을는지도.

아스티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아서 에스테반.”

아스티나는 아서가 제법 속정이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릇없긴 해도 제법 눈치 빠른 소년이었다. 그의 이런 면에 대공도 정을 붙였을까. 사촌 형의 유전병을 해결하고자 반년간 온 지방을 떠돌았다는 과거가 새삼 무게감 있게 다가왔다.

버려진 말썽쟁이는 분명 도움이 필요했고 덕분에 사촌 형을 종종 무리하게 했지만,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대공에게는 의미가 되었을 것이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가 제 안위보다 대공령의 일에 집착했던 이유를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내내 마음 붙일 곳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애착은 언젠가부터 그를 사람으로 존재하게 하는 아내에게로 옮겨 갔다. 외로운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의미 없는 만남을 그만 운명으로 착각하여.

‘칸나가 왔으면 그에겐 더 나은 위안이 되었겠군.’

마음씨 여린 칸나는 저보다 그를 더 살갑게 보살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왜 대공은 하필 자신 같은 사람을 구원의 열쇠로 맞이한 걸까. 처음 만났을 적 철창 속에 갇혀 있던 늑대의 모습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무관심 속에 살아왔던 괴물을 재차 방치하고 있었다.

“고맙다.”

아스티나는 깨달음을 준 아서에게 진심으로 인사했다. 자신의 무심함으로는 대공과 의미 없는 입씨름만 반복했을 것이다. 장담한 대로 아서는 과연 좋은 상담자였다. 언젠가 히센이 했던 말처럼, 가르침과 배움은 나이를 막론하고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어 덧붙였다.

“형을 생각할 줄 아는 착한 아이구나.”

“이런 미친…….”

아서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아스티나는 속으로 담담히 생각했다. 과연 자라나는 소년, 아직은 칭찬이 부끄러울 나이였다.

* * *

이번에도 테리오드는 어스름한 새벽에 눈을 떴다. 어지럼증은 들지 않았다. 그는 새벽의 공기만큼이나 조용히 눈꺼풀을 들었고, 저를 내려다보는 녹색 눈동자와 그대로 마주쳤다.

테리오드는 잠시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고개를 왼편으로 돌렸다. 창 너머로 어스름히 아침이 찾아들고 있었다. 테리오드는 몇 번 눈을 깜빡이고는 다시 아스티나를 올려다보았다. 제 위에 올라탄 아내는 그의 다리 위에 앉은 자세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뭐 하는 겁니까.”

그리 묻고 나니 더욱 황당하였다. 테리오드는 지끈한 머리를 짚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아스티나가 그의 어깨를 손으로 밀며 저지했다.

“이대로 있으면 대공께서도 피하지 못하시겠지요.”

테리오드는 그녀를 밀치고 나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평생 만남을 피할 수는 없었다. 대공은 지금이 나잇값이라는 걸 해야 할 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더 응석을 부려 대공비를 곤란하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테리오드는 내심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도 자신이 유치하게 굴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녀만 보면 자꾸만 울컥 진득하고 지저분한 감정이 올라와 얼굴을 마주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공비와 말을 섞지 않으면 적어도 그가 더 비참해지는 일은 없었다.

테리오드는 지난 며칠간 열성적으로 그녀를 멀리하며 지냈다. 충실하게 업무를 보는 일상에 언뜻 성취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도 잠시였다. 그녀의 인정으로 매일 아침을 맞고 있다는 걸 깨우칠 때면 기분이 다시 바닥을 쳤다.

테리오드는 제 밑바닥을 드러내게 만드는 그녀가 싫었다. 아니, 싫지 않았다.

괴물을 두고 떠나겠다는 그녀가 미웠다. 아니, 밉지 않았다.

그의 고독함을 상기시키는 그녀가 지긋지긋했다. 아니, 지긋지긋하지 않았다.

“피한 적 없습니다.”

테리오드는 그저 부정했다.

“아니면서.”

그에 아스티나가 피식 웃었다. 지난번 테리오드가 그러했던 것처럼.

테리오드는 제 어깨 위로 닿은 그녀의 손가락이 뜨겁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살갗에 느껴지는 감각은 그저 차가웠다. 그 기묘한 차이에 테리오드는 문득, 지금 이 순간이 꿈같이 느껴졌다. 덕분에 테리오드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을 꺼내고 말았다.

“그대가 나를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테리오드가 머뭇거리며 뒤이어 말을 덧붙였다.

“심술 맞게 군 일 말입니다.”

더는 대공이 피하려는 기색이 없어 아스티나는 잠자코 그를 누르던 손을 거두었다. 솔직한 토로에 대공을 칭찬하기라도 하듯 옆으로 비켜 주었다. 거동을 막던 장애물이 사라졌음에도 테리오드는 눕힌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 쓴 웃음이 걸렸다. 그녀를 피했던 시간들이 의미나 있었을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여전히 괴물이고 그녀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변하지 않았는데.

창밖으로 바람이 유유히, 그러나 빠르게 흘렀다. 나뭇잎들이 서로 몸을 부딪으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윽고 완벽한 고요가 찾아들었다. 밤도 아니고 아침도 아니었으므로, 사위는 어둡지도 그렇다고 그다지 밝지도 않았다. 어슴푸레하게 번지는 탁한 하늘빛에 눈이 따가웠다.

테리오드가 읊조렸다.

“타인의 동정으로 살아남는 기분을 압니까.”

“…….”

“나는 그대가 없으면 죽어요.”

“정확히 말하면 이성을 잃는 것뿐이죠.”

자신을 낮추는 테리오드의 말을 아스티나가 최대한 온건한 방향으로 정정했다. 그러나 테리오드는 그 배려가 동정에서 기인함을 알고 있었다. 테리오드를 가장 비참하게 하는 건 자신이 바로 그 동정에 삶을 구걸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테리오드가 자조했다.

“내가 나로 남지 못하는데 그것이 죽음이 아니면 또 무엇입니까.”

“대공.”

“당신은 이게 어떤 간절함인지 모를 거야.”

테리오드가 단언했다. 당연히도 아스티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는 방치된 괴물로 살아 본 적이 없었다.

대공비를 멀리하며 홀로 있을 시간이 많아진 덕에, 그 유예의 시간 동안 테리오드는 스스로의 감정과 자주, 반복해 마주쳤다. 덕분에 그는 그녀에게 품은 감정을 제법 정확히 정의 내릴 수 있게 됐다.

괴물을 사람으로 만들어 준 구원자, 잃어버린 삶을 건넨 그녀는 테리오드에게 있어 큰 존재였다. 상대의 무관심 앞에서 테리오드는 고독했다. 잠깐 찾아들었던 충족감이 잔상처럼 남아 그를 괴롭혔다. 그를 완전하게 만들어 줄 대상이 눈앞에서 어른거림에야 욕심내지 않을 수 없었다.

평생을 외로웠는데 불쑥 등장한 새 얼굴에 어찌하여 또 기대를 하였나.

테리오드는 미련한 천치를 비난했다. 그가 조용히 운을 떼었다.

“어렸을 적 괴물과 만난 기억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아스티나가 짧게 응수했다. 테리오드는 이상하게도 그 무뚝뚝한 목소리에 안심했다. 그는 과거를 더듬듯, 시간을 거스르듯 꿈결같이 말했다.

“혹 본성의 지하 감옥을 본 적이 있습니까? 아주 넓고 광활한 곳이에요. 이곳저곳 예상치 못한 데 숨겨져 있는 입구가 많고, 그 의외성만큼이나 감옥 내의 길도 들쭉날쭉합니다. 어찌 보면 개미굴 같기도 하지요. 어렸던 제가 탐험했던 곳도 그 숨겨진 장소 중 하나였습니다.”

“겁이 없으셨군요.”

아스티나의 말에 테리오드가 가볍게 웃었다.

“그곳에서 저는 괴물을 보았습니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저와 똑 닮은 모습이었겠죠. 그때는 마냥 두려웠건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노쇠한 짐승이었어요. 아마 아버지의 형제였거나, 혹은 아탈렌타의 후계자였던 다른 누군가였겠죠.”

테리오드는 잠시 침묵했다. 이윽고 그는 연극 같은 어조로 비극을 말했다.

“괴물이 된 후계자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로군요. 해가 떠오르면 그림자는 뒤로 물러나야 하는 법이지요.”

어린 테리오드가 기억을 더듬어 다시 그곳을 찾아갔을 때, 철창 안은 비어 있었다. 괴물과의 마주침이 한여름 밤의 꿈이라도 되었던 것처럼.

테리오드가 만났던 야수는 푸석한 털이나 갈라진 이빨 탓에 더욱 끔찍하게 보였으나, 아마 외관이 말하는 세월만큼이나 약해져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테리오드의 방문 이후 수명을 다해 죽었을 수도 있다. 혹은 가문의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핏줄을 영면으로 인도했을는지도.

테리오드는 대답을 바라지 않고 물었다.

“내가 왜 침실에 나를 가둬 달라 부탁했는지 아십니까.”

“…….”

“차마 그곳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나에게도 그런 비참한 결말이 예정돼 있었다는, 그 끔찍한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차라리 그들이 나를 견디지 못하고 죽이길 바랐어요.”

테리오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스티나는 그가 말하는 ‘그들’이 누구일지 약간의 궁금증을 가졌다. 그를 사랑하는 사용인들일까, 혹은 대공저의 잊힌 망령들일까.

대공비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고, 테리오드는 지금이야말로 그녀가 제게서 완전히 정을 뗄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심장을 집어삼킨 어둠을 말하지 않고서는 자신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테리오드는 깊이 탄식했다.

“하지만 죽음조차 두려웠습니다.”

대공은 한 번도 죽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그는 쭉, 살고 싶었다.

“가슴속에 파인 이 자리를 제가 어찌해야 할까요.”

테리오드는 입을 다물고는 옆에 앉은 대공비를 올려다보았다. 깊이 침잠한 초록빛 눈동자가 그를 여실히 비치고 있었다. 테리오드는 그 안에서 상처받은 괴물을 봤다. 저만큼 추악하고 혐오스러운 모습이 또 있을까.

테리오드는 무심결에 손을 들었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허리 바로 옆에 앉아 있었고, 그는 어렵지 않게 대공비의 눈꺼풀을 덮어 줄 수 있었다. 그녀의 눈에 담겼던 괴물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스티나는 제 얼굴 위로 와 닿은 서늘한 손이 제법 기분 좋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테리오드는 제 손 아래로 그녀가 짓고 있을 표정이 궁금하기도, 혹은 확인하기 두렵기도 하였다. 아스티나는 가만히 손을 들어 제 눈을 가린 테리오드의 손 위로 겹쳤다. 테리오드는 자연히 움찔했으나, 곧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엇이 말입니까. 저도 제가 억지를 쓰고 있다는 걸 압니다.”

아스티나는 그의 손목을 쥐어 제게서 떨어뜨렸다. 그러나 그의 팔을 내던지는 대신, 가만히 손끝을 내려 깍지를 꼈다. 갑작스런 접촉에 테리오드는 다소 당황했다. 아스티나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하께서 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압니다.”

사람은 어울려 사는 동물이라 외따로 노는 개체를 별종으로 여긴다.

열 살 무렵이 될 때까지, 그러니까 아스티나로 살아갈 것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그녀는 가족들에게 그다지 정을 두고 살지 않았다. 귀족들은 직접 자식을 양육하지 않기에 자주 마주치는 칸나를 제외하면 딱히 제 가족 같지도 않았다.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적은 없으나 아스티나는 알았다. 백작 부부가 자신을 대함에 있어 어색함을 느꼈다는 것을. 그리고 그때와 같은 기억이 반복되고 있었다.

테리오드는 사람 간의 애정을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하고 자랐다. 그의 부모는 그를 자식으로 보듬지 않았고 형제는 모두 죽었다. 아스티나는 그가 부인이라는 새로운 가족에 매달리고 있음을 알았다.

‘가엾다 말하기도 가엾구나.’

객관적으로 제 잘못은 아니었으나, 아스티나는 다소 미안하기도 하였다.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고 결코 대공에게 보통의 부인이 돼 주지는 못할 터였다. 그의 애착은 그다지 좋은 자리를 찾아가진 못했다.

“누군가를 옆에 둔 것이 너무도 오래되어 그렇습니다. 제가 잊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사람과 사람이 어울리는 게 퍽 따듯한 일이라는 것을요.”

아스티나는 테리오드가 얼마나 괴물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지 알았다. 그는 언제나 표정으로, 행동으로, 그리고 목소리로 반편이의 애환을 말해 왔다. 저주를 해결한 후라는 전제를 붙이기는 했으나, 하나뿐인 희망이 돌아갈 계획을 말했을 때 그는 못내 불안했을 것이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맞출 생각은 없었고 세심한 위로에는 더더욱 재간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에게 이 말은 전할 수 있었다.

“이전에 대공께서 말씀하셨었지요, 장미 정원을 보러 다시 돌아오라고. 떠난다고 해서 끊길 인연이 아님은 그대가 제게 일러 주었습니다.”

아스티나의 손을 쥔 테리오드의 악력이 세졌다. 테리오드는 이 또한 그녀의 연민임을 알았지만, 너무도 따듯하여 그 배려를 받아 삼키지 않고서는 배겨 낼 수 없었다.

아스티나는 처음으로 괴물의 두려움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녀는 확신 가득한 눈으로 그의 불안을 내리눌렀다.

“대공, 외로울 때면 언제든 그대의 친우를 부르세요. 그대는 혼자가 아닙니다.”

더없는 안심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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