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뜻밖의 감정
아스티나는 오래전 오웬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마티나, 남자는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되는 생물이란다.]
초겨울 추위에 모녀가 딱 달라붙어 잠을 청해야 했던 밤이었다. 마티나는 어미의 말을 그다지 귀담아듣지도 않았다. 남자를 논하기엔 그녀의 나이가 몹시도 어렸다. 적어도 일곱 살 여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건넬 만한 충고는 아니었다.
연령대를 고려하지 않은 주제 선정에 마티나는 흥미 없는 눈을 숨기지 못했다. 무관심한 딸을 잡아끌며 오웬이 재차 강조했다.
[알겠니, 내 딸? 쭉정이 같은 놈들이 온갖 감언이설로 꼬여 내도 함부로 넘어가서는 안 돼.]
당시에도 마티나는 상당히 ―어쩌면 지금보다 더― 되바라진 성격이었다. 계속 잠을 깨우는 어미에게 짜증이 났던 그녀는 불퉁하게 되물었다.
[엄마가 그 감언이설에 넘어가서 지금 내가 아빠가 없는 거야?]
마티나는 자신의 부친이 누군지 몰랐다. 오웬이 아비 없이 아이를 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레타 일족은 모계 중심 사회였기에 여타의 미혼모들이 겪는 핍박은 없었다.
일족의 대부분은 마티나가 그동안 들렀던, 어느 지방에선가 벌어진 하룻밤 불장난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굳이 그것을 입 밖으로 내어 소중한 재원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므로 마티나는 편견 없이 자유롭게 자랐다.
무엇보다 레타 집시들에겐 그러한 출생이 몹시도 흔한 경우였다. 보금자리 없이 떠돌고 싶어 하는 영주민은 없었기에 집시들의 사랑은 대부분 하룻밤 불장난으로 끝났다. 오웬도 그 비슷한 경우였으리라.
[이게, 엄마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알았으니까 얼른 좀 자, 난 결혼 안 할게.]
그때 장난처럼 했던 다짐이 문제였을까. 정말 남편 없이 생을 거둘 줄이야.
마티나의 불운한 미래를 예견한 것인지 오웬은 진지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마티나, 이건 엄마가 살아오면서 깨달은 가장 원초적인 진리야. 그러니까 마음에 깊이 새기도록 해.]
[그게 뭔데?]
마티나는 빨리 잠들고 싶은 마음에 뒷이야기를 재촉했다. 크게 숨을 들이켠 오웬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근엄함으로 말을 맺었다.
[남자는 애가 아니면 개란다.]
그렇다고 다음 생에 정말 개를 남편으로 들이게 될 줄은 몰랐지.
“끼잉?”
아스티나는 제 앞에 앉은 늑대와 한참 시선을 마주했다. 생김새는 험악하였으나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이는 모습이 영락없는 개였다. 딱히 오웬이 말한 인생의 진리를 마음에 새긴 적은 없었지만 아스티나도 이번만큼은 그녀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래 꾸준히 새벽 단련을 했던 탓에 아스티나의 기상 시간은 몹시 일렀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평소처럼 연무장으로 나서는 대신 침실에 머무는 중이었다. 벌써 시간은 일곱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괴물 대공에게서는 아무리 기다려도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정말 입맞춤 때문인가.’
어제와 다르게 생략한 점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이외에는 안고 함께 잠들었던 것까지 평소와 똑같이 이행했다. ‘키스’가 진짜 해결의 실마리인지, 아닌지는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다.
아스티나는 오랜만에 긴 심호흡을 했다. 나이를 꽤나 먹었지만 짐승이 사람으로 변하고, 사람이 다시 짐승이 되는 일은 그녀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하물며 제가 행한 행동이 그 열쇠가 됨에야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테리오드와 내린 가정이 맞다면, 아스티나는 그가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인물이 되는 셈이었다. 아스티나는 그 사실에 약간의 부담감을 느꼈다. 테리오드가 얼마나 괴물이 되지 않길 바랐는지 알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고작 팔려 온 신부가 맡기엔 몹시도 막중한 임무였다.
‘평소처럼 하면 된다.’
아스티나는 전혀 평소 같지 않게 마음을 다잡고는 테리오드에게로 손을 뻗었다. 지난 경험으로 벌써 익숙해진 것일까. 아스티나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챈 늑대가 컹! 하고 짖으며 그녀에게 코를 부딪쳤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방심했던 아스티나는 그만 뒤로 넘어갔다. 뒤늦게 순발력을 발휘하기엔 상대의 몸집이 너무 크고 무거웠다. 테리오드가 눈가를 열렬하게 핥아 왔던 통에 아스티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달려드는 남편을 밀어냈다.
“테오, 그만…….”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제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눈꺼풀에 와 닿던 축축한 혀가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밀어내던 가슴팍이 지나치게 단단해졌다. 분명히 자라난 털로 푹신했던 부위였는데 무언가 올록볼록한, 이를테면 근육 같은 것이 만져졌다.
아스티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늑대의 침으로 젖은 눈가가 따끔했으나 사위를 분간할 정도는 되었다. 아스티나는 이제는 익숙해진 남편과 다시금 눈을 마주쳤다.
“아…….”
정말 변했구나.
그리 생각한 아스티나는 천천히 테리오드의 몸을 살폈다. 얼굴에서부터 발끝까지, 그는 이번에도 온전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늑대일 적 옷을 걸치지 못하는 남자는 이번에도 알몸이었지만, 아스티나는 자신이 남자의 헐벗은 몸에 감흥을 가지기엔 지나치게 연로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녀는 담담하게 결론만을 내놓았다.
“키스가 맞았네요.”
뒤편의 창으로 역광이 비쳐서일까, 언뜻 남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처럼 보였다. 아스티나의 말과 동시에 정신이 들었는지 남자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테리오드는 어울리지 않게 급박한 움직임으로 시트를 찾아 헤매었다.
아스티나는 발개진 그의 귀 끝을 보고 그가 부끄러움을 타고 있음을 알아챘다. 실제로 대공은 사람으로 돌아온 상황임에도 기쁨을 내보이지 않고 있었다.
“걸치세요.”
아스티나는 시선을 돌리며 제 엉덩이 밑에 깔려 있던 이불을 내밀었다. 저리 숨기고 싶어 하는데 계속 훔쳐보는 것도 못할 짓이었기 때문이다. 테리오드는 온몸을 시트로 감싼 채 잠시간 침묵했다. 이윽고 그가 갈라진 음성으로 아침 인사를 내놓았다.
“……다음엔, 좀 덜 낯부끄럽게 해 줄 수 있겠습니까.”
아스티나는 수줍은 어린 청년의 요구에 순순히 수긍했다.
“그러지요.”
“그리고 입고 계신 옷도 너무―”
테리오드가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그에 아스티나는 제가 걸친 잠옷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민소매 형태의 슬립으로, 그다지 몸의 굴곡이 드러나는 옷은 아니었다.
고작 이런 차림에 신경이 쓰였을까. 아스티나는 이전에 ‘괴물 대공’의 불능을 염려했던 일을 떠올렸다.
‘좋을 때군.’
더는 괜한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전하, 혈기왕성한 나이엔 자연스러운 일이니 부끄러워 마십시오.”
테리오드가 경악한 얼굴로 입을 벙긋였다. 한참 대공비를 노려보던 대공이 곧 자리를 박찼다. 그는 이불을 두른 모습 그대로 방을 나섰다. 큰 소리를 내며 닫힌 방문을 아스티나는 한동안 멀뚱히 쳐다보았다.
* * *
대공 부부는 처음으로 아침 식사를 함께했다. 연속으로 등장한 ‘사람’ 대공에 하녀들은 혼란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음식을 날랐다. 집사는 안도감 섞인 눈물을 닦아 내느라 제 방에 숨어 도통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
정적이 내려앉은 식당에서 아스티나는 제 나름대로의 추리를 내어놓았다.
“시간대는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잠들기 전이나, 일곱 시를 넘었을 때나 둘 다 효과가 있었던 걸 보면 제약은 열두 시간의 간격만이 아닐까요. 눈 뜨는 시기를 조정할 수 있다면 대공께서 일을 보시는 게 더 편해지시겠죠.”
아스티나가 냅킨으로 입을 닦아 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타인이 해도 효과가 있는 방안인지 역시 실험이 필요하겠어요. 그동안 저만이 입을 맞춰 보았을 뿐, 정말 저라서 할 수 있는 일인지는 모르는 일이니까요.”
곧 운동을 나갈 참이었기에 아스티나가 요구한 음식은 몹시 단출했다. 약간의 빵과 수프를 비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깔끔하게 식사를 끝마친 아스티나가 고개를 들었다.
대공은 그때까지 아스티나에게 어떤 대답도 돌려주지 못하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 빠진 테리오드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아스티나는 반복해 그를 불렀다.
“전하.”
“…….”
“대공 전하.”
테리오드의 손에 헐겁게 쥐어져 있던 포크가 떨어졌다. 아무래도 제 말이 처참히 무시당한 듯했으나, 아스티나는 재차 인내심 있게 되물었다.
“제 말 듣고 계십니까?”
그 말과 동시에 건너편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커다란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덮으며 테리오드가 잠시 마른세수를 했다. 그 피곤한 기색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스티나는 몸이 한순간에 뒤바뀌는 일이 엄청난 기력을 요구하는지도 모르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녀는 대공을 재촉하는 대신 얌전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아…….”
그러나 한참 뒤, 테리오드가 재차 내뱉은 것 역시 한숨이었다.
“피곤하시면 조금 뒤에 이야기할까요.”
“아니, 아닙니다…….”
되었다는 듯 고개를 내젓던 테리오드가 다시금 깊이 신음했다. 그는 5초 전의 부정을 다시금 부정했다.
“아니, 역시 조금 뒤에 대화를 나누는 편이 좋겠습니다.”
“몸이 많이 안 좋으신가 보군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아스티나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침 댓바람부터 사내의 알몸을 본 것치곤 몹시 담백한 태도였다.
정작 몸을 내보인 테리오드는 충격을 쉽게 내던질 수 없었다. 지난번엔 정신을 차리니 나신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던 것도 모자라, 오늘은 부인의 위에 올라탄 상태로 눈을 떴다. 그것만도 혼란스러울진대 그 경험을 공유한 부인은 저와 전혀 공감대를 형성해 주지 않았다. 차라리 아스티나가 함께 민망해하는 편이 그에게는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상대의 태도가 초연함을 넘어 완전히 무감했던 탓에, 테리오드는 제 성적 가치관이 이상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적어도 테리오드에게 알몸은 보는 사람이나 보이는 사람이나 부끄러워해야 할 종류의 모습이었다.
테리오드가 심란한 얼굴로 물었다.
“원래 그렇게 부끄럼이 없습니까.”
아스티나는 테이블에서 다리를 빼내다 말고 멈추었다. 상황을 정리하려는 그녀와 반대로 대공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듯했기 때문이다. 아스티나는 그가 아침에 나신을 보였던 일을 떠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대공비는 의연하게 남편을 위로하기로 했다.
“어쩔 수 없었던 일에 그리 연연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를 위로해 주시는군요.”
“부끄러워하고 계신 건 대공 전하가 아니십니까.”
그 말이 사실이었다. 부인의 말이 몹시도 합리적이라 테리오드는 약간의 혼란을 느꼈다. 여러모로 대공비는 상식이라는 것을 깨부수는 존재였다.
부인이 남편의 알몸을 보고도 이리 무감하게 굴다니, 남자로서 자존심이 상해야 하는 문제가 아닌가 테리오드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테리오드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제 입가를 감쌌다. 아침나절의 감촉이 아직까지 잊히지 않았다.
테리오드가 사람이 된 것은 늑대인 제가 한참 아내의 눈가를 핥고 있던 와중이었다. 테리오드는 혀끝에 와 닿는 생소한 살갗의 감각에 깊은 당혹감을 느꼈다. 덕분에 그는 본모습을 찾게 해 준 대공비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마저 잊었다.
눈을 감은 채 제게 몸을 맡긴 여자를 보고 이상한 방향으로 상상이 뻗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가 재빨리 몸에 무언가를 두르고자 했던 데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한데 대공비는 그 사실에 전혀 감흥이 없어 보였다.
테리오드는 피곤한 낯으로 제 콧등을 문질렀다. 그가 겨우 생각의 마디를 붙잡으며 되물었다.
“그대는 아무렇지 않았습니까?”
아스티나는 잠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처음엔 단순히 부끄러움을 타서 그런 것인가 했는데, 계속된 질문에서는 일종의 오기까지 느껴졌다. 아스티나는 스물여섯 청년의 어리광에 그리 휘둘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담백하게 대꾸했다.
“예,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염려는 접어 두세요.”
그러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냔 말이었다. 테리오드는 식탁 위로 두 손을 올리고는 짧게 주먹 쥐었다 폈다. 그가 심각한 어조로 운을 떼었다.
“저번부터 느꼈는데, 부인께서는 꽤나 개방적이신 것 같습니다.”
“저번부터요?”
“그때…….”
“초야 말씀이십니까?”
테리오드가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아스티나가 단정 짓듯 물었다. 되도록 돌려 말하려 노력하던 테리오드는 맥이 풀렸다.
“……그래요, 그거 말입니다.”
낯부끄러운 마음에 부러 언급하지 않아 왔으나, 테리오드는 그때의 당혹스러움이 아직 생생했다. 만나자마자 잠자리를 요구받았던 일을 어찌 잊으랴.
그의 부인은 더없이 이성적이었고, 후계는 분명 중요한 사안이었기에 의도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머리로는 이해가 갔지만 감정은 자꾸 다른 말을 했다. 테리오드는 가족의 의미를 책에서 배웠고 그 안엔 물론 부부 관계도 포함됐다. 그리고 종이 속의 부부는 보통 로맨틱하게 묘사되는 법이다.
“지난번 일은 저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아스티나가 담백하게 사과했다. 테리오드가 도중 늑대가 되었을 때는 좀 더 빨리 일을 치를 것을 후회했으나, 나중이 되자 괜히 그를 다그쳤나 싶었다. 그녀도 순진한 청년을 꼬드겨 동침하는 취미는 없었기 때문이다.
테리오드가 꾸준히 사람으로 변하게 된 지금에 와서는 그 필요성조차 의미를 잃었다. 만약 이대로 이 저주가 풀린다면 꼭 자신이 후계를 낳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온전한 대공이라면 얼마든지 괜찮은 결혼 상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당사자들의 동의 없이 벌어진 혼담이 아닌가.’
남편은 모르는 이혼 계획이었지만, 아스티나는 마음속으로 언제나 돌아갈 때를 계산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결혼이 몹시 기형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대공이나 자신이나, 서로 목표한 것을 이루고 나면 더는 유지할 이유를 찾지 못하게 되리라.
“그러고 보니 그때 같은 요구는 하지 않으시는군요.”
그가 의아한 목소리를 내었다. 이후로는 꽤나 온건했던 그들의 관계를 상기한 모양이었다. 아스티나가 짐짓 유혹적으로 물었다.
“그러길 바라시나요?”
테리오드는 재빨리 부정하려 했다. 그러나 대공비의 얼굴을 본 순간 그것이 단순히 저를 곤란하게 만들려 한 말이라는 걸 알았다. 덕분에 대공은 그만 쓰게 웃고 말았다.
“저를 놀리시는 것이 부인께 새로운 재미가 되었나 봅니다.”
“전하는 좋으신 분입니다.”
갑작스런 칭찬에 테리오드가 멈칫했다. 진심이었기에 아스티나는 그에게 꾸며 내지 않은 미소를 보일 수 있었다.
“그러니 제가 이리 방만하게 굴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부인은 방만하지 않습니다. 그저…….”
“제가 문란하다 생각하십니까?”
대공비가 스스로를 힐난하자 테리오드는 제가 다 모욕당한 기분이 되었다. 객관적으로 테리오드에게 아스티나는 좋은 사람이었고 그녀를 낮잡는 말은 듣고 싶진 않았다. 비난의 주체가 설령 그녀 본인이라도 말이다. 테리오드가 얼떨결에 분개한 어조로 대꾸했다.
“부부 사이에 문란하다 여길 일이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그럼 아무 문제가 없군요.”
아스티나가 유려하게 응대하며 미지근한 물을 입에 머금었다. 테리오드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가 말한 대로 이 모든 것은 부부 사이에선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이 부부 관계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건 자신뿐인 걸까. 하루아침에 결혼 상대가 생겨난 건 대공비도 마찬가지일 텐데, 테리오드 혼자만 모든 일에 열을 내고 있었다.
“그래요, 아무렇지 않으시다니 차라리 다행입니다.”
테리오드는 곧 한숨과 함께 모든 고뇌를 날려 버렸다. 무릇 안 좋은 일을 곱씹어 남을 것은 더 선명해질 기억밖에 없었다. 테리오드는 되도록 아침나절의 일을 최대한 흐릿하게 만들어 빠르게 기억 저편에 처박고 싶었다. 더는 의미 없는 설전이 벌어지지 않음에 아스티나도 만족했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아스티나가 재차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무장한 기사가 정중히 허락을 구하며 식당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대공에게 경례한 남자가 딱딱한 말투로 아침나절 벌어진 일을 쏟아 내었다.
“대공 전하, 성 밖의 가신들이 다시 농성을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뭐?”
테리오드가 어이없는 얼굴로 되물었다. 안 그래도 컨디션이 좋지 못한 아침인데 한때 부하였던 자들까지 속을 썩였다.
대공은 저주를 푼 방법이 혹여 대공저 밖으로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입단속을 시킨 참이었다. 섣불리 이야기가 번졌다가 야기될 것은 혼란뿐이었다. 모든 건 확실해진 뒤에 발표해도 늦지 않았다. 따라서 가신들은 대공이 다시 괴물로 돌아간 줄로만 알고 일을 벌였으리라.
“그런 고얀…….”
주인조차도 우습게 보아 저리 방종하게 구는데 대공비가 무서웠을까. 테리오드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기사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대공께서 돌아오신 것을 몰라 그러는 듯합니다. 대공비 전하를 부르며 나와 보라 난리입니다.”
대공비가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아스티나는 기민하게 그가 제 얘기를 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사실, 가신들이 농성을 벌일 만한 이유가 대공비가 저지른 일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이 저택의 주인은 둘이었고 그중 하나는 지난 일 년간 금수로 살았다. 본디 인과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법이다.
“같이 가시죠.”
아스티나의 말에 테리오드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데까지 그녀에게 폐를 끼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대공령의 업무를 봐 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데 부수적인 일로 욕까지 보게 할 수는 없었다. 악밖에 남지 않은 이들이니 무슨 짓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부인은 저택 내에 있으세요. 제가 나가 보겠습니다.”
“대공비에게 나와 보라 요구하고 있다지 않습니까.”
아스티나는 해야 할 일을 미루는 성미가 아니었다. 하기 싫어 미뤘던 것이 더 편해져서 돌아온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제때 해결하지 않으면 곪아 들어가는 종류의 일도 있었다. 그리고 아랫것들의 불충은 개중 가장 우선으로 두어야 하는 사항이었다. 윗사람에 대한 존경은 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완강한 대공비의 태도에 테리오드도 수긍했다. 둘은 나란히 식당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사정이 어쨌든 겉모습만으로는 퍽 다정하였으므로 하녀들이 대신 설레 볼을 붉혔다.
물론, 대공과 대공비 사이에 오가는 한없이 공적인 대화를 들었다면 부부의 핑크빛 미래를 점치는 낙관적인 여론은 결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주인의 부재를 아니 아랫것들이 방종하게 구는 것입니다. 괴물 대공이라는 단어를 불식시킬 수 있을 때까지 꾸준히 얼굴을 내비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보다 우선 삼아야 할 것은 부인의 권위입니다. 제가 밖에 나서지 못할 때에 부인께서 일을 해결해야 할 경우가 많을 겁니다.”
그리 답한 테리오드가 걸음을 멈춰 세웠다. 아스티나 역시 제자리에 서 그를 응시했다. 테리오드가 다소 곤혹스러운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그가 뜸 들이며 운을 떼었다.
“그리고 대대로 대공비의 위엄은…….”
이어 내밀어진 남자의 손을, 아스티나가 자연스럽게 맞잡으며 대답했다.
“곧 좋은 금슬에서 나오지요.”
굳이 어려운 길을 골라 갈 이유는 없었다. 둘이 남몰래 나누었던 약조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떠벌릴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반쪽짜리 결혼은 당사자에게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남에게까지 반쪽짜리로 보여서는 곤란했다.
둘 사이에 사적인 감정이 존재하든 아니든, 모름지기 정 없는 부부보다는 금슬 좋은 한 쌍의 남녀로 보이는 편이 좋았다. 남들이 온통 제멋대로 씹어 댄 결혼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테리오드는 처음으로 마주 잡은 아내의 손에 약간의 어색함을 느꼈다. 사교계에서 활동하며 술잔만큼이나 많이 스쳤던 것이 여자의 손이거늘 이번만은 감회가 남달랐다. 아까도 언쟁했듯 그들 부부는 대체로 진도가 빨랐다. 단계를 밟아 가며 맞닿은, 그 조심스럽고 생소한 감각에 어쩐지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이만 갈까요.”
속내를 숨긴 채 테리오드는 능숙하게 아스티나를 에스코트했다. 아스티나는 제 남편이 사교계에서 이름을 날렸던 것을 떠올렸다. 과연 허울뿐인 명성은 아니었다.
뜨내기가 자리 잡기에 귀족들의 사회는 몹시 냉혹했다. 성년이 되기 전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았던 대공이 완벽히 귀족 사회로 섞여 들 수 있었던 데는 물론 고귀한 신분이 한몫했겠지만, 남자 본인의 노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다정히 짓는 미소는 한 폭의 그림 같아 아침나절의 솔직한 반응을 떠올릴 수 없게 했다.
‘그편이 생동감은 있었지.’
아스티나는 새빨갛게 달아올랐던 남편의 얼굴을 떠올렸다. 저밖에 그 광경을 본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기도 하였다. 테리오드를 ‘얼음 기사’ 따위로 왕왕 수식하며 수선을 떨었던 영애들을 생각하자 그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소란스러운 아기 새들의 수다는 대개 허구가 반이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아스티나의 미소를 알아챈 테리오드가 말을 더해 왔다. 아스티나가 입꼬리를 늘인 그대로 선선히 대꾸했다.
“그런가요.”
“예, 저희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귀찮은 일을 처리하러 가는 중이었던 듯한데 말입니다.”
테리오드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는 제 아내의 취향을 도통 파악할 수 없었다. 남은 질색을 할 일에 웃고 충격받을 일엔 무던하며. 무엇보다 부끄럼이 없다. 열아홉 소녀를 표현하기에 그리 적합한 말은 아니었다.
‘하기야 그런 잣대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님은 처음부터 알았지.’
테리오드는 도통 솔직해지는 법이 없는 아스티나의 눈을 응시했다. 그녀는 사교적인, 풀어 말하자면 그다지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공치사를 돌려주었다.
“대공께서 안정을 찾으신 듯하여 기뻐 그렇습니다.”
“부인 덕분이죠.”
“오늘은 여러모로 좋은 시작점이 되겠군요.”
그러나 좋은 시작점치고 저택 앞은 몹시 시끄러웠다. 아스티나는 주인이 자리를 비운 자리가 어디까지 엉망이 될 수 있는지를 아탈렌타에 와서 간략하게나마 체험했다.
그녀는 마티나일 적 제 빈자리를 걱정하여 후계를 찾는 데 혈안이던 남자를 본 기억이 있었다. 쓸데없는 걱정이라 미련히 여겼는데, 사람의 난 자리는 이 정도로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는 하나 그게 단상 위에 선 모두가 똑같다는 소리는 아니다. 일례로 권세를 탐할 목적에 가슴이 부풀었던 가신들은 제 이기심 하나 추스르지 못하고 이리 추태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이 악독한 마녀야!”
“대공비가 대공 전하를 숨긴 것이 틀림없다! 대공께서 이리 빨리 괴물이 되신 적은 없다. 분명 권세를 잃을 것을 걱정한 마녀가 수를 쓴 게야!”
가신들의 목덜미는 고성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잠시 잦아드는 듯했던 그들의 열정은 테리오드가 사람으로 돌아온 이후 더욱 열렬히 불타올랐다. 가신들은 대공에게 당한 거부를 인정할 수 없었다. 마지막 희망으로 삼았던 유일한 동아줄이 이리 쉽게 자신들의 손을 쳐 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대공이 자신들의 사정을 들어 주리란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기에, 테리오드가 다시 야수가 되었다는 소식에 가신들은 절망했다. 온화한 대공이 작금의 결정을 재고해 주리라 여겼는데 저택에 남은 것은 그 잔독한 대공비뿐이라니, 여럿이 시름에 겨워 침대에 드러눕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꾀병으로 차지한 병상은 제 등허리를 간지럽게 할 뿐이었고 그들은 결국 사람을 모아 재차 대공저로 찾아들었다. 평생을 바쳤던 가문에서 이대로 내쫓길 순 없다는 절박함이 그들에게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대공비 때문이다.’
그들은 본인의 모습에서 폭군에 항거하는 공신을 비춰 보았다. 한 번 그리 생각하고 나니 제법 이입이 잘되었다. 자신들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충언을 바치는 외로운 혁명가였다. 그들이 왜 대공저 밖으로 내쫓겼는지 생각하면 그보다 우스운 망상이 또 없었다.
“대공 전하를 돌려줘!”
애절한 외침에 테리오드는 골이 아파 왔다. 테리오드는 그들을 이번에야말로 모두 감옥에 처박으리라 결심하며 대공비에게 변명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저는 그들을 용서해 주겠다 말한 적이 없습니다.”
“대공께서는 역시 사랑받는 주군이십니다.”
대공비는 귀족적으로 돌려 말했으나 테리오드는 이것이 자랑스러워할 일이 아님을 알았다. 그는 신하들의 비틀린 애정이 몹시 부끄러웠다.
어느 충직한 가신이 그리도 사랑하는 주군의 재산을 남몰래 갉아먹는다는 말인가. 테리오드는 이런 뻔뻔한 경우는 듣도 보도 못하였다. 테리오드가 분노 가득한 노성을 내었다.
“시끄럽다! 이게 다 무슨 소란인가!”
익숙한 목소리에 모두가 멈칫했다.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의 음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존재할 수는 있으나 저렇게 말을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어야 했다.
가신들은 모습을 드러낸 대공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다시 만나기만 고대했던 상대가 드디어 성문을 열고 나왔다.
“대공 전하! 아직 온전한 정신이셨군요!”
반색하던 가신들은 이내 멈칫했다. 대공의 바뀐 모습에 집중하느라 미처 발견하지 못했는데, 그의 옆엔 대공비도 함께 서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의 대공은 그 마녀를 무척이나 소중하게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알이 재빠르게 굴렀다. 그리고 가장 위험 부담 없는 선택을 했다. 아스티나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대공 전하, 저희는 대공 전하를 걱정하느라 잠도 잘 이루지 못했습니다. 아이고…….”
본디 아랫사람이라면 윗사람을 봤을 때 응당 먼저 인사를 해야 하는 법이다. 아스티나는 가신들의 새로운 응대에 신선함을 느꼈다. 이리도 명백한 무관심을 받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벨라체 아카데미에서 연무장에 유례없이 난입했을 때도 이런 취급을 당하진 않았다. 그녀가 수련할 때마다 몇 마디씩 틱틱대는 이들이 있었으나 나름대로 귀여운 수준이었다. 눈앞에 선 가신들은 십 대 소년들보다도 저열하게 굴고 있었다. 이에 테리오드는 그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나 역시 그대들이 몹시 걱정된다네. 다들 벌써부터 눈이 침침할 나이는 아니지 않은가?”
대공비에게 돌아가지 않은 인사를 책하는 말이었다. 테리오드의 지적에 억지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던 이들이 침음했다.
그들이 아스티나를 두려워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테리오드에게 빌린 권세이고, 둘째는 그녀의 말만 듣는 괴물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였다. 그러나 대공비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던 날카로운 이빨은 사라지고 오랜 세월을 함께한 주군이 돌아왔다. 온화한 권력자보다는 당연히 눈앞의 사나운 짐승이 더 무서운 법이다.
계산을 마친 한 중년이 기세 좋게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 정말로 마녀의 농간에 넘어가 저희들은 보이지도 않게 되신 겁니까! 저희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탈렌타의 금고에서 초대 대공의 초상과 금품 여러 점을 빼돌렸던 자입니다, 전하.”
옥구슬 같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어투는 한없이 온화했으나 내용만은 매서웠다. 아스티나와 입장을 함께하는 테리오드조차 놀라 그녀를 응시했다. 아스티나는 부채로 입술을 누르며 가신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응시했다. 귀부인다운 면박이었다.
대공비의 말을 뒤늦게 이해한 가신들이 당황하여 술렁거렸다. 그중 하나가 빽 소리쳤다.
“이 간사한! 그 입 닥치지 못하겠느냐!”
“죄 없는 하녀들과 하인들을 문책하여 저택에서 내쫓은 자입니다. 빈자리를 자신의 사람들로 채운 후, 대공저에 물건을 납품하는 업체를 바꿔 가며 뒷돈을 챙겼지요.”
“대공 전하! 저희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저 마녀가 무어라 고해바쳤든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저 남자는 존재하지 않는 사업을 벌인 척 승인을 받아 투자금을 노린 자입니다. 동시에 벌인 사업체의 수가 열다섯이었으니 눈 가리고 아웅 할 의지조차 없었던 듯합니다. 이것이 아탈렌타에 대한 능멸이 아니면 또 무엇이겠습니까?”
아스티나는 느릿한 어조로 조목조목 그들이 저지른 짓들을 읊었다.
테리오드는 대공비와 처음 언쟁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의 대공비는 귀족 영애보단 노련한 협상가에 가까웠다. 고상한 귀부인을 흉내 낸 지금과 방식은 판이했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적절한 때 적합한 방식으로 대화하는데 도가 튼 여자였다. 자신의 경우에도 가지고 놀듯 혼을 쏙 빼놓더니, 결국 갑의 입장에서 여유롭게 부탁받는 상황을 만들지 않았던가.
삽시간에 사위가 조용해졌다. 혹여 호명되었다가 대공의 눈 밖에 날까 전부가 입을 다물었다. 대공비는 모든 죄목을 다 외우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들 사이에 찾아든 침묵을 보고 테리오드는 더욱 분노했다.
“내가 진정 그대들의 주인이 맞나?”
“…….”
“그대들은 나를 대체 무엇으로 아는 건가? 내가 짐승이 되는 병을 앓고 있다고 하니 돌아와서도 천지 분간 못할 것 같았나 보지. 그게 아니고서야!”
테리오드의 말이 사실이었기에 그들은 얼굴을 들지 못했다. 이성을 잃은 지 오래된 주인이니 그들 뜻대로 주무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를 보필하는 모두가 입을 모아 거짓을 말한다면 어찌 부재중에 벌어진 착복을 알아채겠는가? 그러나 대공비가 번번이 그의 귀에 진실을 속삭임으로써 그도 다 그른 일이 되었다.
“퍼시벌! 어째서 죄인들이 밖을 나돌아 다니고 있는 건가!”
테리오드가 핏줄이 선 목으로 소리쳤다. 가신들이 달려들지 못하도록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던 기사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아직 재판을 다 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워낙 그 수가 많아 처리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을 더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겠군.”
테리오드가 싸늘한 목소리를 내었다. 결국 그들은 제 명을 재촉하게 된 셈이었다. 그중에서도 격렬하게 느껴지다시피 몸을 떠는 이가 하나 있었다. 사업 계획을 꾸며 내 투자금을 받아 챙겼다던 남자였다.
걸치고 있는 옷들은 하나같이 고급품이었으나 관리되지 못한 피부는 그저 칙칙했다. 좋은 차림새와 싸구려 화장품 냄새가 따로 놀아 참으로 어정쩡한 사내였다. 향수로 가리긴 했으나 가까이 가면 어젯밤 진탕으로 놀아났던 술자리의 냄새가 역력했다. 중독자 같은 텅 빈 눈이 이내 질끈 감겼다.
‘끝장이다.’
쉽게 얻은 돈은 그만큼 처분도 쉬웠다. 남자는 예의 투자금으로 받아 챙긴 돈을 도박판에서 탕진했다. 그가 져야 했던, 용기 있는 배팅에 따른 책임은 어마무시했다.
본래 그가 졌던 빚은 약간의 부담 정도로, 티 나지 않게 공금을 빼돌리는 정도로 해결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스스로의 과오를 남의 재산으로 덮을 수 있음을 깨닫자 도박장에 드나들던 발길은 좀 더 대담해졌다. 지금의 치세가 영원히 갈 것 같았고, 남자는 아낌없이 진창에서 굴렀다.
이제 그가 진 채무는 몸을 토막 내 팔아도 갚지 못할 수준이었다. 한탕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카드 게임에서 빠져나올 생각도 못했다. 도박장을 나오고 그는 ‘다른 쪽의 한탕’을 노리지 않으면 그대로 패가망신할 상태임을 깨달았다. 그가 억지를 써 가며 욕심껏 자금을 빼돌렸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는 이전처럼 대공저의 재산을 내먹어 이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대공비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어렵지 않게 해치웠을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남자는 형을 선고받고 징역을 살 위기에 있었다. 돈을 갚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면 사채업자들은 자신이 지하 감옥 안으로 숨기도 전 죽음의 도끼를 휘두를 것이다.
두려움에 온몸이 차게 식는 것과 동시, 그의 눈이 분노로 번들거렸다. 그리고 분노란 보통 위가 아닌 아래로 흐르는 법이었다.
‘대공비만 없었다면.’
대공에게는 차마 화낼 용기도 없었으나 저 반편이 계집은 얘기가 달랐다. 대공저에 오지 않았다면 빚을 갚으려 남의 집에서 종살이나 하게 됐을 여자였다. 자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알고 대공의 옆에서 알랑거리는 저 꼴을 좀 보라!
그는 순간적인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바닥에서 돌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대공비를 향해 내던졌다.
“죽어라! 이 사악한 악녀 같으니!”
난데없는 돌팔매질에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의 앞을 막아섰다. 고개를 젖혀 피할 생각이었던 아스티나는 의외의 보호에 테리오드를 올려다보았다. 자신도 꽤 장신인 편인데 그녀의 남편은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테리오드가 검집으로 날아온 돌을 쳐 내며 소리쳤다.
“이런 무엄한 자를 보았나!”
식겁한 얼굴의 기사들이 재빨리 대공 부부를 둘러쌌다. 돌을 던졌던 남자는 변변찮은 반항도 못하고 억류되었다. 그가 비명 지르듯 소리쳤다.
“전하! 한순간 실수했을지언정, 긴 세월 당신을 보필했던 자가 진정 누구인지 잊지 않으셔야 할 것입니다!”
테리오드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억눌렀다. 그가 조금만 덜 공정했다면 재판 절차 없이 칼을 휘둘렀을 것이다. 제정신으로 저 소리를 지껄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테리오드가 노여운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광증에 미칠 때 그 무엇도 나를 구원해 주지 않았지. 그런데 그녀가 와서 비로소 사람으로 돌아왔다. 이 모든 게 전적으로 대공비의 공이거늘, 다들 사익에 눈이 멀어 그녀를 헐뜯기만 바쁘구나.”
“대공 전하,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스티나가 우아하게 화답했다. 상황과 맞지 않는 평화로운 목소리에 테리오드가 일순 멈칫했다. 그녀는 자신을 돌아보는 대공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혹 제가 입은 모욕을 직접 대갚음해도 될까요.”
아스티나가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대공에게서 검집을 앗았다. 그 묵직한 힘에 테리오드는 홀린 듯이 손을 놓았다. 아스티나는 나긋한 걸음걸이로 제게 돌팔매질을 했던 남자에게 다다랐다.
“스턴스 테말라. 그대의 인생을 건 도박을 할까.”
“이, 천하의 악녀가 무슨…….”
그렇게 말하면서도 남자의 눈은 사방으로 굴렀다. 도통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혹여 저 여자는 자신의 뒷조사까지 해치운 걸까.
치부인 도박이 언급되자 남자는 자연스럽게 위축되었다. 대공비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대는 문관이지, 아마 검에 관한 견문은 좁을 것이다. 그대는 대공 전하께서 휘두르는 이 검이 양날인지, 외날 검인지 아는가? 맞히면 죄를 사하도록 하지.”
그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으려 애썼다. 하지만 말마따나 그가 테리오드의 검이 어떤 종류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가 만져 본 무기라고는 호신용의 작은 단도가 전부였다. 누군가 알려 주지 않는 이상 본인의 지식만으로는 답을 맞히지 못할 것이다.
한편으로 남자는 이 질문에 무슨 의미가 숨어 있는지 고민했다. 만약 자신이 무지하여 아무거나 고른다고 쳐도, 그가 이길 가능성은 무려 절반이나 됐다. 남자가 지나온 모든 판들 중 이보다 자비로운 확률은 없었다.
“답을 말하라.”
대공비가 재촉하듯 검을 뽑아 들 자세를 취했다.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그의 승부사 기질은 이 순간에도 어김없이 발휘되었다. 남자는 자신의 감을 믿고 기세 좋게 소리쳤다.
“외날 검입니다!”
“그럼 시험해 보지.”
남자의 대답을 듣자마자 아스티나가 발검했다. 대공비가 칼을 남자의 목에 겨누며 말했다.
“두 방향으로 다 베어 보면 외날 검인지, 양날 검인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제 목을 시험대로 삼겠다는 말이었다. 남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무엇이 정답이든 간에 검증을 거치고 나면 자신의 목숨은 성치 못할 것이다. 아스티나가 검을 치켜들었다.
매서운 칼끝이 제게로 날아들 때, 남자는 그만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 질렀다.
“끄아악! 사, 사람 살려!”
퍽,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로 남자의 귀 옆으로 칼이 처박혔다. 어찌나 깊이 들어갔는지 방향을 조금만 달리했다면 목숨을 앗았을 힘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광경을 코앞에서 본 남자는 겨우 눈알만 굴려 칼날을 살폈다. 바로 눈 옆을 비껴간 손속에 남자는 오줌을 지리며 혼절했다.
기절한 남자는 듣지 못했을 테지만, 아스티나는 기꺼이 그에게 인생의 교훈을 남겨 주었다.
“도박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라네.”
그리 말하며 땅에 박혔던 검을 뽑았다. 다시 검집으로 칼을 정돈하는 대공비의 손길이 몹시 유려하였다.
그 자리에 선 모두가 놀라 지켜보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테리오드 역시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감탄하여 입을 벌렸다. 검을 처음 만지는 자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괴물 대공의 손에서 살아남은 이유가 있었군.’
대공비가 자신을 조련한 사실은 알았지만 도통 그 방법이 짐작이 가지 않았는데, 이제야 좀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알 것 같았다. 테리오드는 찬탄과 동시에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고는 미간을 좁혔다. 고통스럽게 가슴께에 손을 가져가는 테리오드를 보고 기사가 부축하려 나섰다. 테리오드가 그를 물리며 말했다.
“되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뛰어서 그렇다.”
상황을 설명하고 보니 더욱 이상했다. 그는 훈련된 기사였으므로 검에 두려움을 느낄 리는 없었다. 그리고 부인에게 향하는 심장의 박동은 보통 연정이어야 함이 옳았다.
‘이것이 사랑의 현기증인가?’
그렇다면 칼을 빼 드는 모습을 보고 사람을 좋아하게 될 만큼 자신에게 폭력적인 성향이 있었단 말인가?
테리오드로서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대공비에게 떨림을 느끼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나, 그 외에 이 상황을 설명할 방도는 없었다. 대공비가 검을 휘두를 때 맹렬하게 두방망이질 치는 이 심장을 어찌 다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의 무위에 연모를 품은 것이라면 계속 지켜보고 싶어야 할 텐데, 대공은 맹렬하게 침실로 돌아가 안정을 취하고 싶었다. 왠지 몸이 떨리며 오금이 저려 오는 듯했기 때문이다. 검집을 쥔 그녀의 손에서 왜인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졌다.
‘몸이 안 좋은가 보군.’
아무래도 한순간 모습이 바뀌며 육체에 부담이 된 모양이었다. 괴물 대공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숨기지 못하고 그만 돌아섰다. 상황을 정리하라고 명한 테리오드가 피곤한 음성으로 말했다.
“부인 걱정이 없으니 이만 들어가서 쉬어야겠네.”
* * *
히센이 대공저에 다다른 것은 정오 무렵의 일이었다. 오가며 친해진 사용인들이 반갑게 인사했다.
“기사님 오셨습니까?”
한참 말을 달린 탓에 더운 날씨가 아님에도 히센의 몸에서는 땀이 흘렀다. 아침나절 차려입고 나올 때만 해도 적당하다 여겼던 차림새는 대공령에 다다를수록 점점 더 거추장스럽고 덥게 변했다. 점심때가 가까워지며 꼭대기로 치달아 오른 해 덕분이었다.
말에서 내려온 히센이 무거운 망토를 벗어 던지며 대답했다.
“감찰이 끝나서 당분간은 대공저에서 머물 것 같아. 반가운 일이지.”
과연 그 이야기를 전하는 히센의 얼굴에선 화색이 돌았다. 하녀 하나가 고생했다며 수선을 피운 뒤 물을 내왔다. 히센은 성난 사람처럼 단번에 잔을 비웠다. 그제야 갈증이 좀 가셨다. 그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히센이 처음 대공령에 도착했을 때는 험악한 생김새의 낯선 기사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히센은 텃세 아닌 텃세를 받으며 외로운 생활을 해야 했다.
오래 봐 온 아가씨 옆에 머무르면 차라리 좀 나았으련만, 그녀는 히센이 대공령에 도착하자마자 수도 공사의 책임자로 임명하여 그를 방방곡곡 떠돌게 했다.
‘그때의 마음고생이란.’
대공비가 아랫것들의 기를 죽이려 데려온 무서운 기사라는 소문이 돌며, 실제로 기가 죽은 쪽은 오히려 히센이었다. 그는 검술 외의 부분에선 어디까지나 마음 여린 도시 남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차츰 –본인이 누누이 주장했던― 히센의 밀크티같이 따사로운 매력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덕분에 최근의 그는 아탈렌타에 꽤나 잘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그의 외로운 타지 생활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건 하녀들이었다. 그녀들은 흠모하는 대공비의 수하인 히센에게도 꽤나 관심이 있었다.
어린 하녀들이 어김없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바로 대공비 전하께 가십니까?”
“그래야겠어. 수하를 열심히 부리셨으니 공치사라도 몇 마디 해 주시겠지.”
그도 그렇거니와 공사 내역에 관해서도 보고를 해야 했다. 히센의 장난스러운 대답에 하녀들이 작게 키득였다. 그들 중 하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아!” 하고 소리쳤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쏜살같이 사라졌던 하녀가 이내 무언가를 품에 안고 돌아왔다.
“가는 길에 대공비 전하께 이것 좀 전해 주세요.”
“이게 무엇이지?”
히센이 무심코 꾸러미를 받아 들며 되물었다. 물건을 넘긴 여자가 싹싹하게 대답했다.
“방금 인부가 도착했거든요. 일단 선물 같아 보이기는 하는데…….”
“선물?”
“보낸 주소는 벨라체 아카데미로 적혀 있었어요. 아무래도 검인 듯한데 기사님께서 확인하시고 전해 주세요.”
과연 묵직한 무게감이나 손잡이가 두드러진 포장은 누가 봐도 장검 같았다. 위험한 물건을 확인도 없이 전하기는 염려스럽고, 그렇다고 이대로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약삭빠르게 대공비를 오랜 세월 보필했다던 히센에게 위험 물품을 처분했다.
그 사실을 알아챈 히센이 피식 웃음 지었다. 어린 아가씨들의 꾀가 제법 귀여웠다. 도움 주지 못할 것도 없었으므로, 히센은 잠자코 발신인을 확인했다.
“벤자민 레안드로스?”
낯익은 이름을 발견한 히센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지난번의 짧은 동행 동안 히센은 벤자민에게서 꽤나 좋은 인상을 받았다. 나약한 귀공자들과 달리 자기 몸은 지킬 줄 아는 괜찮은 사내였다. 아마 이 검은 아스티나의 무위를 알고 선물한 것이리라.
레테 백작은 자식들이 먹고 입는 것에 그다지 돈을 아끼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부모 눈을 피해 좋은 검을 마련할 정도의 큰 용돈을 주지도 않았다. 아스티나는 히센에게 가보를 돌려준 이후 아카데미에 구비된 고물 검을 휘둘렀고, 방학 때 집에 돌아와서는 견습 기사들의 연습용 검을 주인 모르게 빌려 썼다.
주인 아가씨의 수련에 희생당한 견습 기사들 사이에선 여름과 겨울 요정에 대한 괴담이 번졌다. 아카데미 방학 시즌이면 할당받은 검을 잃어버리고 어리둥절해 있다가, 개학 무렵 이상한 곳에서 분실물을 찾아내는 기현상이 종종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 범인을 아는 히센은 보급품을 분실한 후배들을 차마 책하지 못했다. 기강을 잡아야 할 기사단장이 도둑질을 한 장본인에게 검술을 사사 받고 있다고 어찌 말하랴?
덕분에 히센도 자신의 스승이 변변찮은 검 하나 갖지 못한 것에 마음 쓰이던 차였다. 아무리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지만 좀 심각하게 격이 안 맞았다.
‘드디어 정착을 하시겠어.’
히센은 제가 다 설레어 감겨 있는 천을 벗겨 냈다. 발신인이 아는 인물이기는 했지만, 혹시 모르니 일단 확인이 필요했다.
“좋은 검이군.”
자신의 물건이 아님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히센의 입에 걸렸다. 칼끝으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적당한 크기의 아밍 소드였다. 그다지 특색 있는 모양은 아니었지만 잘 벼려진 날이 장인의 노고를 짐작케 했다. 손잡이에 별다른 장식이 없다는 점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벤자민이라는 아가씨의 친구는 이 칼이 장식용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아는 듯했다.
히센은 검집째로 가볍게 한번 휘둘러 보았다. 남성 검사보다 근력이 부족한 아스티나를 위해 비교적 가볍게 제작된 것 같았다. 평가를 마친 히센은 선물을 다시 원래대로 포장했다. 지켜보던 하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대로 대공비 전하께 전해 드리면 되는 건가요?”
“물론, 아주 좋아하실 거라네.”
“검을요?”
“아가씨께서 검을 쓰시는 모습을 못 봤나 보지?”
하녀들은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번 대공비 전하가 가신에게 검을 휘둘렀다는 무용담을 듣긴 했으나 실제로 보지는 못했다.
대공비가 괴물 대공을 길들인 일은 대체로 동화처럼 꾸며져 소문이 났다. 그러니까 대공비가 실제로 벌인 매타작 덕분이 아닌, 두 사람이 운명적인 사이기에 가능했던 사랑의 힘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 가설은 대공비와의 결혼 후 대공이 정신을 찾게 됨으로써 신빙성을 얻었다.
“대공비 전하는 훌륭한 검사이시지. 나 정도는 눈을 감고도 이기실 능력자시니까.”
자신을 깎아내리면서도 히센은 제 주인의 무용에 으스댔다. 혹 놀리려는 말이 아닌가 싶었으나 하녀들은 곧 의심을 지웠다. 주인을 자랑하는 기사의 표정이 너무도 진실 됐기 때문이다. 놀라움으로 그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게 정말인가요? 정말 대공비 전하께서 히센 경보다 더 강하세요?”
대공비의 검술은 보지 못했어도 히센의 훈련하는 모습은 이전에 몇 번 본 적이 있다. 히센 경은 아탈렌타의 기사들과 대련할 때 손쉽게 연승하지 않았던가. 그의 대단한 실력은 타지의 기사들과 사이를 돈독히 하는 데 도움을 준 일등 공신이었다.
“내게 검을 가르친 것이 그분인걸. 꼬꼬마 때부터 자세를 봐 주었던 고향의 스승님이 무색하게도, 내 모든 검 버릇을 교정해 주셨지.”
히센이 그렇게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주인의 검을 소중하게 끌어안은 남자가 그만 가 보겠다며 자리를 떴다. 그들 대공비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감탄하던 하녀들이 이내 아차 했다.
“참, 대공 전하의 소식을 안 전했네.”
대공께서 다시 제정신을 찾았다는 소식은 아직 먼 마을까지 전해지지 않았을 터였다. 테리오드가 변화의 규칙성을 확실시하기 전 말이 새어 나가는 걸 꺼려 한 탓이었다.
지금이라도 히센에게 달려가 붙잡고 설명해 줄까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기도 했다. 히센의 보폭을 따라잡는 게 귀찮았던 하녀들은 어깨만 으쓱였다.
“대공비 전하께서 알려 주시겠지.”
덕분에 히센은 아무것도 모르고 휘파람을 불며 집무실로 향했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 저택도 나름대로 익숙해졌다.
사실 히센도 아탈렌타로 온 게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당연히도 타지에 적응하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었고, 그는 개중 성공적으로 적응한 편에 속했다.
애초에 히센 본인의 동의가 없었다면 이 먼 지방까지 떠나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만 스승의 옆에서 더 배우고자 찾아온 목적과 다르게, 아가씨가 저를 지나치게 좋은 일꾼으로만 쓰고 있다는 게 문제긴 했다.
‘이번에야말로 수련을 봐 달라 말씀드려야지.’
히센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새로운 검술을 익힐 생각에 설레어 어제는 술도 먹지 않았다. 집무실 앞에 다다른 히센은 들뜬 마음으로 노크를 했다.
똑똑.
“들어와.”
안에서 들려온 허락에 히센은 반사적으로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집무실로 들어서는 대신 문밖에 그대로 멈춰 서고 말았다. 문고리를 돌리자마자 깨달은 것이 있어서였다. 방금 허락을 전한 건 분명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안에 있는 사람은 아스티나가 아니었다.
히센은 멀뚱히 눈을 깜빡이며 책상 앞에 앉은 남자를 응시했다. 낯선 이의 등장에 테리오드가 먼저 물었다.
“누구지?”
히센은 멍청하게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상대는 굉장한 미남자였다. 놀란 얼굴마저도 그림 같아 그가 혹여 인간 외적인 존재는 아닌가 진지하게 의심까지 했다. 환상치곤 몹시 생생했으나 그만큼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미색이었다. 히센은 언 상태 그대로 문을 닫았다.
‘뭐지.’
그는 닫힌 문을 앞에 두고 생각했다. 대체 저 남자가 누군데 난데없이 집무실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단 말인가.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히센은 재차 문을 열었다. 혹 헛것을 본 건 아닌가 싶어서였다. 남자의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외모도 그 의심에 한몫했다.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저를 어이없게 쳐다보는 그 눈빛 그대로.
결국 히센이 질문했다.
“누구…… 세요?”
테리오드가 몹시도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내가 먼저 물었던 것 같은데.”
“실례지만 대공비 전하의 집무실 위치가 바뀌었습니까?”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일은 그만해 주면 좋겠군. 자네는 누구인데 그녀의 행방을 찾지?”
명령조가 자연스러웠다. 히센은 이상함도 느끼지 못하고 순순히 제 신상을 읊었다.
“저는 레테 백작님의 호위로 근무했던 히센 오스카입니다. 백작님의 명으로 따님이신 아스티나 님을 호위하려 아탈렌타령에 왔습니다.”
물론 그 호위랄 것도 못 하고 온 지방을 떠돌았지만 말이다. 테리오드는 어김없이 그 맹점을 지적했다.
“처음 듣는 소린데. 내 아내는 호위가 없네.”
“그건 제가 아가씨의 명령으로 그간 다른 지방에 가 있어서…….”
히센은 황급히 변명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사나운 딸꾹질이 튀어나와, 그만 제 목젖을 주무르며 캑캑대고 말았다.
“예? 아내요?”
겨우 목을 가다듬은 히센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는 대공비를 아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대공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의외의 상황에 얼빠진 듯 굴긴 했으나 그 정도까지 멍청하지는 않았다.
히센이 황당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테리오드의 정체를 짐작했다.
“설마 대공 전하이십니까?”
대체 언제 또 사람이 된 것인가, 왜 자신은 모르고 있었을까. 히센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다. 그는 그 와중에도 지난번 아스티나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아주 잘생긴 분이셨다. 본모습이었다면 아름다운 얼굴로 꽤나 연인을 울리셨겠더구나.’
무뚝뚝한 주인 아가씨가 웬일로 외양을 칭찬하시나 했더니 과연 그럴 만한 미남이었다.
‘정말 여자들을 꽤나 울렸겠군.’
그리 생각하며 히센은 깨달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가 자신의 정체보다는 외양에 더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로, 테리오드는 낯선 기사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무래도 저 남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이제야 알아챈 모양이었다.
설마 대공저에서 저를 모르는 사람을 만날 줄은 몰라 테리오드도 내심 당황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이전에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면 알아채지 못할 만도 했다. 은발에 청안이라는 외관이 유명하긴 했으나 생각이 거기까지 닿지 않았을 테지. 늑대인 모습만 보아 왔다면 그럴 법도 했다.
“처음으로 인사하지. 테리오드 반 아탈렌타일세.”
테리오드가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히센의 앞으로 다가온 그가 악수를 청했다. 얼떨떨한 얼굴의 히센은 경황이 없어 인사치레도 생략했다.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히센에게, 테리오드가 빈 집무실을 내보이며 말했다.
“대공비를 찾아온 것이라면 훈련장으로 가야 할 거야.”
“훈련장 말씀이십니까?”
“몸이 굳는 것 같다더군.”
업무를 볼 사람이 돌아오자 대공비는 집무실에 머무는 시간을 대폭 줄였다. 그러고는 밀린 운동을 해야겠다며 곧장 연무장으로 향했다. 분명 땀을 잔뜩 흘리고 있는데도 표정은 홀가분해 과연 무인 체질이다 싶었다. 안색이 좋아진 대공비와 대조적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대공의 시름은 깊어졌다.
지난번 겪었던 가슴의 떨림은 결국 원인을 찾지 못했다. 테리오드는 그 기묘한 감정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종종 연무장으로 가 그녀의 훈련을 구경했다.
그러나 머무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는 아내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만 보면 심장이 뛰었으나 동시에 몹시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어찌 보면 반사 조건 같기도 했다.
“그건 무엇이지?”
테리오드가 히센의 품에 안긴 꾸러미를 발견하고는 물었다.
“예? 아…… 대공비 전하께 들어온 선물입니다.”
히센이 그리 답하며 무심코 그에게 검을 내밀었다. 대공 전하라고 하니 왠지 물건을 내보여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공은 대공비의 부군이었고, 어찌 됐든 이것은 외간 남자가 보낸 선물이었다.
왜 아내에게 들어온 물건을 자신에게 건네는지 의아했으나 테리오드는 잠자코 그것을 받아 들었다. 꾸러미를 더듬은 그가 손쉽게 내용물을 유추했다.
“검인가?”
천 사이엔 편지도 하나 끼어 있었다. 테리오드는 무심한 얼굴로 뒤편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벤자민 레안드로스.’
“누구지?”
테리오드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벨라체 아카데미에서의 학우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히센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상대는 아무 생각 없이 한 질문인 걸 알았음에도 몹시 긴장되었다. 히센이 보기에 벤자민은 분명 아스티나에게 마음이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결혼 후에도 꺼지지 않은 연정이다. 히센은 만약 아가씨가 정말 성공적으로 이혼 절차를 밟는다면 둘이 이어지는 것도 기대해 볼 만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서사에는 대공이 평생 짐승으로 머문다는, 당연한 전제가 하나 필요했다. 한데 지금 제 앞에 선 대공은 분명 사람이 아니던가. 히센은 머리가 어질해져 왔다.
“다, 당연히 그냥 친구 사이십니다.”
안 하는 편이 나았을 덧붙임이었다. 아무 의심 않던 테리오드는 히센의 변명에 다른 데로 생각이 뻗쳤다.
‘수도에 두고 왔다던 연인이 혹시 이자인가.’
테리오드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는 문득, 이 선물에 동봉된 편지를 읽어 보고 싶다는 수준 낮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이는 청렴한 대공이 저지를 법한 일이 아니었다.
“벨라체 아카데미라…….”
테리오드가 들릴 듯 말 듯 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외부인으로만 참관했던 장소였다. 유전병 내력이 아니었다면 그 역시 제국의 다른 영식들처럼 그곳에 진학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공비와 학교 안에서 마주쳤을 수도 있었다. 이 선물을 보낸 그녀의 친구라는 남자처럼 말이다. 테리오드는 그의 아내가 어떤 학창 시절을 보냈는지 궁금해졌다.
‘말 잘 듣는 학생은 아니라 했지.’
테리오드는 조용히 웃고는 편지를 여몄다. 그가 히센에게 말했다.
“이건 내가 전해 주겠네.”
몰래 뜯어 볼 수 없다면 아내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는 문제였다. 테리오드는 저를 붙잡지 못하고 굳어 있는 히센을 두고 밖으로 나왔다. 대공비가 연마하고 있을 검술을 생각하자 가슴이 다시금 울렁거렸으나 애써 꺼림칙한 감정을 치워 버렸다. 마음이 불편하긴 해도 그녀 자체를 향한 거부감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공비는 자신의 은인이 아니던가.
근래의 테리오드는 가장 마음 편한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사람으로 돌아와서도 해치우는 일은 업무가 태반이었으나 객관적으로 충분히 충실한 삶이었다.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쓰지 않으려 한 건 아니었지만 결국은 밀린 일이 마음에 걸려 책상으로 돌아왔다.
이끌리듯 서류를 집는 테리오드를, 대공비는 다소 착잡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한숨과 함께 의자를 끌고 와 그의 옆에 앉았다. 테리오드는 빠르게 일을 해치우는 아내의 능력에 감탄하며, 종종 집중하는 어린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곤 했다. 그럴 때면 대공비는 귀신같이 알아채고 이렇게 말했다.
‘많이 한가하신가 봅니다.’
그제야 멈춰 있는 손이 움직이곤 하였다. 일중독이라는 공통점 덕분에 대공 부부 내외는 대체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대공은 한순간에 제 인생에 이리도 깊이 파고든 여자에 대해 약간의 생경함을 느꼈다.
테리오드는 이 기적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잊지 않았다. 혹여 타인의 입맞춤으로도 가능한 일인지 실험을 해 보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원인을 알 수 없었으나 명제는 분명했다. 그를 사람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은 대공비였다.
그가 희미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낮엔 사람이고 밤에는 짐승이라.”
어찌 보면 희곡의 한 구절 같기도 하였다. 여전히 비참한 저주였으나 영원히 괴물로 머무르는 것보다는 나았다.
괴물을 사람으로 되돌려 주는 주문은 얼마나 달콤한가.
그에게는 내일이 있었고 곧 그 꾸준함에 매혹되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테리오드는 제가 사고할 수 있음에 깊이 안도하였다.
‘나는 아직 사람이다.’
저택을 나서자마자 따가운 빛이 이마를 내리쬐었다. 테리오드는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점심때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정원수가 정수리 위로 그림자를 만들었다. 짐을 들었음에도 연무장으로 가는 걸음이 꽤나 가벼웠다. 테리오드는 제 손에 쥐인 물건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받으면 좋아할까.’
이리도 검술에 매진하는 부인이라면 흔치 않게 반색할 것도 같았다. 그리 생각하자 자신이 먼저 선물했어야 하는 물건은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뒤늦은 후회에 테리오드는 혀를 찼다.
그는 타인을 기쁘게 하는 데 몹시 미숙한 사람이었다. 또래의 영애들과 잠깐 만남을 가졌을 때도 장신구나 옷 정도만을 선물해 보았다. 그마저도 집사가 주선한 것이지 자신이 생각해 낸 게 아니었다.
‘분명 잘 어울리겠지.’
테리오드는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보검을 찬 아내의 모습을 상상했다. 자신이 쓰는 검술과는 맞지 않아 보관만 해 두었는데, 그녀에게 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라면 대공비와도 격이 맞는 무기일 것이다.
여자가 무슨 검이냐며 쓸모없는 정당성을 따질 보수적인 가신 대부분은 이미 파랑에 쓸려 나간 참이었다. 게다가 대공비가 정당한 주인이 아니라면 또 누가 사용할 수 있겠는가.
테리오드는 연무장 앞에 멈춰 서서 눈을 가늘게 떴다. 제 손에 들린 선물을 내려다보는 눈빛이 몹시 탐탁지 않았다. 안에 든 것이 어떤 보검이든 그는 더 좋은 것을 내줄 수 있었다.
‘검이 두 개일 필요는…….’
“대공 전하, 오셨습니까.”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몸을 돌리자 대공비가 있었다. 아스티나가 수건으로 이마를 닦아 내며 물었다.
“어인 일로 오셨는지요. 혹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테리오드의 방문이 멎은 지가 꽤 되었기에 아스티나의 눈은 의아한 빛을 띠고 있었다. 테리오드는 그녀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다지 의미는 없는 결심이었다. 어차피 그가 쥐고 있는 검도 그녀에게 내줄 물건이었으므로.
“수도의 친구분으로부터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은폐가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테리오드는 아스티나에게 잠자코 선물을 내주었다. 말없이 꾸러미를 받아 든 아스티나가 천을 펼쳤다. 그 안에서 매끄러운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연 대공비는 눈을 반짝였다.
“벤자민에게서 온 물건이군요.”
안에 든 편지를 보지 않았음에도 선물을 준 상대에 대한 추정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것이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테리오드가 짐짓 관심 없다는 듯 물었다.
“가까운 친우입니까?”
“저와 종종 대련을 함께했지요. 믿을 만한 남자입니다.”
아스티나가 담백하게 대꾸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갑작스런 발검에 테리오드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곧바로 나오는 몸의 반응이 몹시 기이하여 테리오드는 잠시간 입을 열지 못했다.
‘정말 내가 그녀에게 마음을 품은 것인가.’
테리오드는 심각하게 고뇌했다. 자신이 들고 있을 때만 해도 멀쩡하였는데, 저 검이 그녀의 손에 쥐여지자마자 재차 가슴이 떨려 오는 까닭은 무엇인가. 혹여 이것은 겪어 본 적 없는 질투가 아닌가.
어쩐지 입 안이 마르고 어깨가 뻣뻣해졌지만 그 외에 설명할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그러한 기색이 반복됨에야 아스티나도 모른 척하기 힘들었다. 그녀가 날 끝을 매만지며 물었다.
“왜 계속 제 눈을 피하십니까?”
속내를 드러내자니 무척이나 민망하였다. 이성에게 쉽게 마음을 주는 가벼운 남자로 보이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인을 속이고 싶진 않았으므로 테리오드는 솔직히 대답했다.
“부인이 검을 드는 모습만 보면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거려 그렇습니다.”
“아…….”
저도 모르게 신음 같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말과 동시에 지난 모든 일들을 완벽히 이해했다. 그녀는 잠시 뜻 모를 눈으로 테리오드를 응시했다.
아스티나는 자신이 검만 들면 몸을 움츠렸던 늑대를 기억했다. 훈육의 흔적이 사람 테리오드에게까지 남을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까지 험악하게 대하지는 않았을 것을.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거린다는 남자의 반응은 생리적인 공포가 틀림없었다.
‘그나저나, 자꾸 서글프게 울어 댄 것이 그래서였단 말이지.’
똑같은 공포를 겪었을 늑대를 생각하자 조금 웃음이 나기도 하였다. 머리로는 같다는 걸 알았으나,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테리오드의 두 모습을 별개의 객체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늑대와 사람은 각각 다른 기억을 가진 존재였으니까. 한데 또 아예 연관이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스티나는 자신의 늑대를 위해 검을 내려놓았다. 테리오드는 그제야 숨이 조금 트였다.
그는 잠시 아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는 인과 없는 감정이었고, 그래서 사람인 테리오드는 알아챌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남자는 빠진 퍼즐 조각을 두고 꽤나 오랜 시간 고민했었다.
그가 내린 결론은 결국 이것이었다.
“제가 부인을 좋아하는 걸까요.”
테리오드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아스티나는 그만 헛기침을 터트리고 말았다. 드물게 격한 표현에 테리오드가 당황해 손을 뻗었다. 아스티나는 입가를 막고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대공의 사고가 어째서 그리로 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가슴의 두근거림은 보통 연인 간의 설렘으로 표현되겠지만…….
‘그렇다고는 하나 보통 공포와 연정을 착각하진 않지.’
이 기묘한 상황이 연출 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로 테리오드가 늑대일 때를 기억하지 못하여 자신이 부인에게 두려움을 느낄 일은 없다 여긴 것이고, 둘째는 그가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스티나는 남자가 꽤나 순진하다고 생각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테리오드가 실제로 품은 것과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완전히 결이 다른 감정이라는 사실을 알 터였다. 아스티나는 고개를 저었다.
“알아 온 시간이 중요하지 않은 인연도 있으나, 이번엔 그런 경우가 아닌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 감정이 대체 무엇입니까.”
두려움이라고 대답하여 대공의 면을 상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스티나의 눈이 곤란한 빛을 띠었다.
“대공께서 진정 저를 마음에 품으셨다면, 그 심장은 평소에도 뛰어야 함이 이치에 맞지 않을까요.”
“하지만…….”
“착각이십니다.”
아스티나가 딱 잘라 말했다. 분명 약조한 것은 대공령의 일뿐인데, 대공을 돌보는 직무가 더 늘어난 기분이었다.
단호한 태도에 테리오드는 다소 기분이 상했다. 이것이 연정이 맞는지는 그도 의심스러운 바였지만 이리 대놓고 면박을 받으니 마음이 좋진 않았다. 그로서도 오랫동안 품고 있다 꺼내 놓은 고민거리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쩐지 그녀의 말은 ‘당신은 나를 좋아하지 않아.’가 아닌 ‘당신은 나를 좋아하면 안 돼.’라는 의미로 읽혔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일에 허락이 필요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왜 제가 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확신하십니까?”
테리오드는 오기로 대답함과 동시에 그것이 억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인의 표정이 묘해졌다. 테리오드는 일곱 살이나 어린 아내에게 추태를 보였음을 깨달았지만, 입은 그의 의사와 정반대로 움직였다.
“제 속내와는 상관없이, 부인께서는 단순히 제가 부인을 마음에 품지 않길 바라시는 것 아닙니까.”
그 말이 사실과 다르지 않았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가 저와 왜 이런 말싸움을 벌이는 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테리오드 역시 착각하고 있을 뿐, 자신을 이성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눈을 들여다보며 자신이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에게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대공은 단순히 빚을 갚아 줄 계약 상대였고 정을 준 늑대조차 말 잘 듣는 애완동물일 뿐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대공은 자신을 아내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생각이 자꾸만 이성적인 쪽으로 뻗쳐 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스티나는 상대의 착각까지 배려해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짧게 잘라 말했다.
“예.”
“…….”
“그러시지 않길 바랍니다. 대공.”
테리오드의 감정이 어느 것이든 이젠 의미가 없어졌다. 대공비는 그의 마음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대공비는 어째서 대공의 사랑이 필요 없을까. 부인이 왜 남편의 마음을 거추장스럽게 취급하는 걸까. 테리오드는 순수한 의문이 동했다.
“왜 남편이 부인을 좋아해서는 안 됩니까.”
“귀족들의 결혼이 원래 그런 것이랍니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싹튼 정도 자를 이유입니까?”
“전하, 다시 말씀드리지만 착각하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참으로 우스운 광경이었다. 남자는 이것이 사랑이 맞다 말하고 여자는 아니라 말하며 실랑이를 하고 있지 않은가. 테리오드의 눈이 바닥에 내려놓은 검에 가닿았다. 그는 결국 건드려선 안 될 선을 밟고 말았다.
“수도에서 왔다는 선물에 지난 감정이라도 동하셨습니까? 그래서 제가 다가오는 게 못마땅하신 건지요.”
불시의 공격에 아스티나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벤자민은 친구입니다.”
“이름을 부르는 모습이 퍽 다정하십니다, 부인.”
“대공께서 이리 유치하신 분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도 다른 남자의 이름을 부르셨지요.”
그것이 아스티나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다. 그녀는 치부를 내보였던 그때의 일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왕 테오도르와 전혀 다르다 싶었더니, 신경을 긁는 말투는 조금 닮은 것도 같았다.
‘안 좋은 점만 똑같군.’
아스티나의 눈이 싸늘해졌다. 그녀가 차게 식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까지 들으셨습니까?”
“그럼에도 사랑해.”
그가 기억하는 한마디였다. 그 짧은 말의 의미가 깊어 갖은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남의 입을 통해서 나온 제 열렬한 고백을 듣자마자, 아스티나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검을 집어 들었다. 그 사나운 기색에 테리오드는 내심 당황하였다. 아스티나는 허리춤에 찬 검과 벤자민의 선물을 쥐고는 수풀 쪽으로 힘껏 내던졌다. 삽시간에 검 두 자루가 자리를 감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테리오드의 심장 박동은 더없이 안정적으로 변했다. 테리오드가 그에 얼떨떨함을 느낌과 동시, 아스티나가 더없이 딱딱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연정을 착각하신 기분이 어떠십니까.”
“…….”
“머리를 좀 식히셔야 할 것 같군요. 집무실로 돌아가 보시지요. 아마 더없이 안정되실 겁니다.”
아스티나가 테리오드를 쏘아보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부인이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낸 건 두 번째 일이었다. 그것도 두 번 다 그녀의 옛 남자와 관련이 있을 때였다.
그러나 대공비의 말대로 거세게 박동하던 심장은 한없이 조용히 잦아들어, 연정을 주장했던 일이 몹시도 보잘것없어지고 말았다. 결국 이번에도 그녀의 말이 맞았던 셈이다. 괜한 이야기를 꺼내 일을 키운 것은 자신이었다. 그렇지만 테리오드는 멀어지는 대공비를 붙잡고 사과하지 못했다.
테리오드는 하찮은 반발심으로 바닥을 걷어찼다. 잔디가 파이며 흙바닥이 드러났지만 조경만 나빠졌을 뿐, 그의 기분이 나아지진 않았다.
“……돌겠군.”
한심하게도 오기를 부려 말다툼을 하고 말았다. 테리오드의 시선이 문득 물건이 날아간 수풀로 향했다. 대공은 그 사이를 헤쳐 그녀가 내던졌던 검을 찾아냈다. 대공비의 손에 있을 땐 한없이 자신의 가슴을 떨리게 했던 물건이, 막상 자신이 들자 그저 딱딱한 사물 같기만 하였다.
마땅히 돌려주러 가야 했으나 당장 그녀와 얼굴을 마주하고 싶진 않았다. 왈칵 치솟았던 화가 방향을 잃어, 테리오드는 허탈함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가 제 마른 뺨을 느리게 쓸었다.
“이런 멍청한 일이 다 있나.”
억울했다. 짝사랑 따위는 아니었음에 반가워해야 할 일이거늘,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게 억울하기는 참으로 처음이었다.
* * *
대공은 오늘도 혼자서 눈을 떴다. 어느덧 3일째였다. 언제나 다디달게 느껴졌던 햇빛이지만 테리오드는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차라리 말로 하면 좋겠는데.”
그의 부인은 너무도 공과 사를 잘 구분했던지라 그를 골리려 입맞춤을 생략하는 일은 없었다. 테리오드는 꼬박꼬박 사람으로 변했지만 그 3일 내내 대공비는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그것이 말다툼을 하기 전과 확연히 달랐으므로, 바보가 아닌 이상 아내의 불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각방을 요구하진 않았음이 다행일까. 테리오드는 손을 뻗어 타인의 흔적이 남은 베개를 더듬었다.
말다툼 전엔 대공비와 함께 아침을 맞았었다. 테리오드가 알몸을 드러내는 일을 부끄러워하였으므로, 대공비는 잠들기 전 미리 늑대에게 입을 맞추고 꼼꼼히 이불을 덮어 주었다. 남편이 황급히 옷을 챙겨 입는 모습이 보기에 퍽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테리오드가 잠에서 깨 몸을 일으킬 때면 그녀는 새벽 훈련을 위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굿모닝 키스 따위가 오가는 금슬 좋은 부부는 아니었으나 어찌 됐건 아침 인사는 꾸준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그 딱딱한 말 한마디가 뭐라고. 평생 혼자 잠들고 깨었는데 잠깐 침대를 나눠 썼다고 옆자리의 온기가 익숙해지기라도 한 것인가.
이 감정이 연심이 아님은 진즉 밝혀진 바나 객관적으로 그의 아내는 몹시 관심을 끄는 존재였다. 테리오드는 자꾸 대공비를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늘은 제대로 사과를 해야겠군.”
테리오드는 한숨을 쉬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모름지기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였다.
“저언하……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하시죠.”
늘어진 히센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아스티나는 허리춤에 매달린 검집을 빼내어 그런 히센의 허리께를 꾹꾹 눌렀다.
“하지 마십시오, 아가씨……. 지금 숨 쉬기가, 힘든, 흐웁.”
“지쳤다고 전장에 널브러져 있다간 순식간에 저승을 건넌다네. 이게 진검이라면 자네는 이미 죽은 목숨이야.”
“여기가, 전쟁 통은, 아니, 아, 아픕니다!”
히센은 결국 옆구리를 쑤시는 고통을 이겨 내지 못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히센을 제압한 아스티나는 평소보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히센은 흡사 폐가 찢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딱딱한 물건이 허리까지 찔러 오자 숨 쉬기도 버거웠다. 바닥에 엎어져 있을 때도 힘겨웠거늘, 넝마가 된 몸을 일으키니 근육이 배로 쑤셨다.
상대의 고통스러운 행색에 아스티나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늘였다.
“수련을 봐 달라면서.”
저것은 악마다. 히센은 억울함에 입을 벙긋였다.
물론 아침나절부터 아스티나를 찾아와 검술을 봐 달라 조른 것은 자신이었다. 피곤하다는 아가씨의 발 앞에 드러누워 진상을 부린 사람도 저였다. 계속 애처럼 바닥을 뒹굴면 정말 연무장에서 구르게 해 주겠다는 협박에 호기롭게 응했던 것도…… 물론 자신의 선택이긴 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오랜만에 본 제자의 애교 정도로 넘어갈 일이 아닌가. 그 제자라는 것이 스승보다 나이가 열셋이나 많기는 하나 그것은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히센은 나이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깨어 있는 사람이었다. 스승이 왜 스승인가. 제자보다 지혜로우니 스승인 것이다.
“기분 나쁜 일이, 헉, 흐으, 있으신 거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원래 이러시는 분 아니잖습니까.”
아스티나는 히센의 조름에 언제나 어른스럽게 응대했다. 대련 중 자신을 노려보는 형형한 눈을 마주했을 때, 히센은 정확히 이렇게 생각했다.
‘날 잘못 잡았다.’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히센은 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스승에게 매타작을 당했다. 좀 눈치 없이 굴었다고 비명횡사할 뻔한 히센은 툴툴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기분 상하신 일이 있으시면 그 사람한테 가서 푸셔야지요.”
“대공께 이런 무엄한 짓을 할까.”
“여기서 대공 전하가 왜 나옵…… 부부 싸움 하셨습니까?”
히센이 말하다 말고 멈칫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아스티나는 대답하는 대신 검을 다시 허리에 찼다. 히센은 다소 신기한 눈으로 아스티나를 응시했다. 제 아가씨는 좀처럼 감정에 변화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주인이 드물게 화를 내니 이유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왜 싸우셨습니까?”
“싸운 게 아니야.”
아스티나가 딱 잘라 말했다. 자신이 화를 낸 이유는 좀 다르긴 하나, 어쨌든 대공과 다툰 표면적인 원인은 ‘사랑싸움’에 가까웠다. 아스티나는 대공이 자신에게 연심을 품었다 착각했던 일을 남에게 떠들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상대가 스물여섯 살 애송이였음에야. 그리 생각하니 열을 올렸던 일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아스티나의 미간이 짜증스럽게 좁혀졌다.
‘그런 영양가 없는 짓을 잘도 했군.’
아스티나는 3일간 평정을 되찾고 대공에게 ‘어른스럽게’ 화해를 청하려 노력했다. 이런 하잘것없는 일에 마음을 쓰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자놀이를 가로지르는 미묘한 짜증은 도통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녀는 인정했다. 지난 20여 년간 그녀의 신경을 이렇게나 거슬렀던 일이 또 없었다. 단순히 험악한 욕설을 들었다면 오히려 아무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건드린 것은 과거의 상처였고 예민한 신경줄은 해묵은 흉터까지 끌어냈다.
‘실수했지, 잠결이라 하여 그런 말도 안 되는 착각을.’
아스티나는 그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새벽이 벌인 환상은 얼어 버린 줄 알았던 가슴마저 충동질해 사달을 내고 말았다. 똑같은 얼굴을 착각하여 과거사를 들려준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상대는 그때 일을 말싸움에 끌어오기까지 했다.
그 일이 두고두고 언급될 줄 알았더라면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을. 그것은 그녀 자신조차도 잊고 싶은 기억이었다.
“대공과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무엇을?”
“그분께서 제정신을 찾지 않으셨습니까. 당연히 짐승일 때와는 다를 테고요.”
히센의 말투가 조심스러웠다. 아스티나는 자신이 흔치 않게 열을 내어 히센의 걱정을 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공을 몇 번 만나지 않은 그의 입장에선 경계심이 들 터였다.
“걱정할 일은 없을 거다. 상식적인 분이니까.”
“그럼 웬만하면 대화로 푸시죠.”
아스티나의 눈치를 보며 히센이 말했다. 어떻게든 둘의 불화를 좁혀 보려는 모습이었다. 부부 싸움에 끼게 되면 제삼자는 보통 중재에 힘쓰는 법이다. 히센은 분위기를 살리려 애썼다.
“말씀하신 대로 대공께선 굉장한 미남이시던데요. 얼굴 보고 푸시죠.”
애석하게도 그가 밟은 것은 지뢰였지만.
“볼 게 얼굴밖에 없는 남자지.”
아스티나가 불퉁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이내 아차 싶었다. 그녀는 자신이 욕할 대상을 착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얼굴이 같다고 다른 쪽의 불만까지 끌어와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테리오드와 테오도르는 어디까지나 타인이었으니까.
“그 외관만으로 모든 단점이 상쇄되는 분이시던데요, 왜 그리 짜증이 나셨습니까?”
아스티나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스스로의 행적을 되돌아보며 물었다.
“내가 화나 보이나?”
“저한테 하신 게 화풀이가 아니면 뭡니까.”
“아니, 난 그래선 안 돼.”
아스티나는 열이 오른 이마를 한 손으로 짚었다. 그녀는 미간을 좁히며 가슴을 덥히는 감정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만일 대공이 테오도르를 언급하며 조롱하더라도 자신은 아무렇지 않게 굴어야 한다. 아스티나가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테오도르가 아스티나까지 휘둘러서는 안 돼.
그 주문은 효과가 있었다. 아스티나는 멍든 기억을 삼켜 냈다. 그녀는 이내 평소처럼 담담한 음성을 내었다.
“별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럼 저 좀 쉬어도 됩니까?”
“물론, 내가 어른스럽지 못했어.”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대상은 자리에 없는 대공인가 철없이 군 제자인가.
어른스러운 태도를 요구받을 나이의 소유자는 아스티나보다는 히센 쪽이었지만, 그는 잠자코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스티나는 평소의 무감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훔쳐 듣는 버릇이 좋지 못하십니다.”
그 말에 히센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그제야 건물 뒤편에 선 남자를 발견했다. 테리오드는 전면으로 나서기 앞서, 대공비에게 어떻게 말을 꺼낼까 잠시 고민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테리오드가 그림자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한숨지었다. 준비 없이 끌려 나온 얼굴엔 민망한 빛이 역력했다.
“찾아오는 것까지 피하시진 않는군요.”
“저는 전하를 피한 적이 없습니다.”
아스티나가 그리 말하며 히센을 응시했다. 히센은 편했던 엉덩이를 들어 조용히 퇴장했다. 떠나갈 때를 아는 자가 아름다운 법이다.
대공과 둘만 남자 아스티나는 몸을 돌려 그를 마주했다. 한 번 화를 가라앉히고 나니 충분히 사감 없이 응대할 수 있었다. 그엔 몸을 잔뜩 써서 힘을 빼 둔 것도 단단히 한몫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교롭게도, 전하도 저도 바빴던 모양이지요.”
과거의 불화를 들추는 건 귀족다운 언행이 아니었다. 테리오드는 대공비가 그때 일을 언급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잘못을 저지른 것은 제 쪽이었으므로 또다시 아내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테리오드는 신중히 그녀를 떠보았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쭉 바쁘실까요.”
“한가함을 찾은 참이었답니다. 용건은 그뿐이신지요?”
테리오드는 아스티나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지난 3일간 저를 피했던 것과 달리 그녀에겐 어떠한 앙금도 없어 보였다. 정말 단순히 개인적인 일로 바빠 마주치지 못했나 싶을 정도였다. 한 시각만 더 일찍 왔으면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을 테지만, 테리오드로선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대신 욕받이를 한 히센의 공적은 안타깝게도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테리오드가 짐짓 망설이며 운을 떼었다.
“바쁜 일에 관해 여쭤서는 곤란하시겠지요.”
“이해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전하께 개인적인 일로 심려를 끼쳐 죄송스럽군요.”
“저야말로 연장자답지 못하게 굴어 마음이 쓰였습니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를 잠시 응시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가 등 뒤로 숨겼던 검을 내밀었다.
“받으셔도 이상한 오해는 않겠습니다.”
착각한 연심과 벤자민의 일, 둘 다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아스티나는 기꺼이 그가 건넨 사과를 받아들였다. 안 그래도 되찾으러 돌아갔을 땐 이미 사라져 있어, 누가 주워 간 것은 아닌가 염려하던 차였다. 홧김에 내던졌던 분실물은 의외로 싸운 상대가 소중히 보관해 주고 있었다. 아스티나가 설핏 웃으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이리 덮어 두고 넘어간 셈이었으나 테리오드는 어쩐지 꺼림칙하였다. 지금의 정제된 봉합에 비해, 그들이 벌였던 말싸움은 좀 더 날것의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제 속을 내보이는 일이 없던 대공비를 더 숨어들게 한 것은 아닌가. 테리오드는 내심 후회하며 용건을 꺼냈다.
“부인이 집무실에 없어 처리하지 못한 일들이 있습니다.”
“무엇이지요?”
“확인할 문제가 있어서 말입니다. 지난번 소동을 벌였던 가신들에게 상당히 약소한 처벌을 내렸던데요.”
업무를 보던 테리오드는 간만에 이전의 감각을 체험했다. 대공비가 처리한 서류들을 보며 그녀의 행적을 되짚어갔던 일을 말이었다. 그 말끔한 손속은 아내의 능력에 감탄하는 첫 계기가 됐더랬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대공비는 자신에게 불경을 저지른 인물들을 지나치게 자비롭게 보아 넘기고 있었다. 그녀가 내린 구형은 보석금이나 좌천 정도로, 그들이 저지른 무례에 비해 몹시 보잘것없었다.
그는 이것이 혹여 자신을 염려한 결정은 아닌가 싶었다. 가신들이 대공비 앞에서 대공과의 지난 정을 강조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공비가 자신을 배려하여 약소한 선에서 처벌 내린 걸 수도 있었다.
사사로운 정에 눈이 멀어 공정성을 잃은 대공이라니, 그러한 평가를 얻었다는 건 몹시 부끄러운 일이었다. 테리오드가 강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를 걱정하신 거라면 그럴 필요 없습니다. 본보기를 보여 처벌 수위를 높이는 것으로 결론짓겠습니다.”
“처벌 수위를 높이셨다면, 어느 정도로?”
이때 아스티나의 눈썹이 미묘하게 들렸다.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테리오드가 떳떳이 대답했다.
“벌금형으로 끝났을 일을 형을 살 정도로.”
아스티나가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술에서 새어 나온 한숨에 테리오드는 의아한 기분이 되었다.
“왜 그러십니까.”
“괜한 배려를 하셨습니다, 전하.”
배려는 그녀가 자신에게 한 것이라 여겼는데 대공비는 반대로 말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에 테리오드가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들에게 작은 처벌을 내린 건 어디까지나 제 의사였습니다. 저를 존중하신다면 그 명을 거두어 주시지요.”
테리오드는 더더욱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대체 대공비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파악이 되질 않았다. 그가 감이 잡히지 않은 얼굴로 우선 변명했다.
“그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쓸려 나간 가신의 수가 너무도 많습니다. 일 처리를 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단순한 경범죄로 처벌할 일까지 대역 죄인 취급하시면 그 빈자리는 누가 메우겠습니까.”
“누구든 적합한 사람을 찾아야겠지요. 배신자들이 아니라.”
“한 점 흠 없이 청렴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대공께서 제게 돌려주신 것은 배려가 아니라 과로입니다.”
대공비의 응대는 내내 열기가 없었다. 그 무심한 태도에 테리오드는 어이가 없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를 끌어내려 한 이들과 어찌 다시 일할 수 있겠습니까?”
“효율을 생각하는 겁니다.”
대공비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단기적인 시각이고, 차후를 생각한다면 오염된 자리는 바로 잘라 내는 것이 맞았다. 테리오드는 현명한 대공비가 왜 한 치 앞만 보고 판단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 번 주인을 문 개가 두 번은 그러지 못할까. 임시방편으로 목줄을 맬 순 있겠지만 언젠가는 곤란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단기적으로 보면 그러하나 장기적으로는…….”
테리오드는 말을 멈추었다. 기시감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어떤 점에서 대공비에게 불편함을 느꼈었는지를 상기했다. 이제는 그 미묘한 불쾌감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을 듯했다.
지난번, 자신은 왜 별것 아닌 일로 대공비에 그렇게 열을 내었을까. 상대가 모든 것을 너무도 열의 없는 눈으로 보니 그런 것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매정하다 싶을 만치 그와 사적으로 가까워지는 걸 피하고 있었다. 강 건너 불 보듯, 언제나 한 걸음 떨어진 간격을 유지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타인임을 매 순간 주지시키는 것처럼.
테리오드가 한없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그대는 곧 떠날 사람처럼 구는군요.”
아스티나는 물끄러미 테리오드를 응시했다. 대공이 자신의 생각보다는 눈치가 빨랐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떠나간 후까지 고려하여 과중한 일을 떠맡을 생각은 없었다.
아스티나는 그를 속이지는 않기로 했다. 사실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다. 상대를 달래기 위해 머무르겠다 말하는 건 어울리지 않게 다정한 짓이 아닌가.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전하의 병환이 나아진다면 제가 더 머물 필요는 없지요. 저희는 적절한 대리인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대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지 않았습니다. 떠날 생각은 처음부터 하고 있었다는 뜻이겠지요.”
상황을 정리하고 보니 더욱 황당하였다. 그렇다면 처음에 대공령에 남겠다 약조했던 일은 무엇인가. 그녀가 마음 내킬 때 행하는 잠깐의 변덕일 뿐이었던가.
“……본래 일 년의 기간을 생각하고 있긴 했습니다.”
아스티나가 다소 곤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런 생각까지 밝히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이. 그것이 저를 완벽한 제삼자로 구분하는 말이라 테리오드는 황당하기까지 했다.
“그때 기간을 말하진 않았어요. 왜 그랬습니까?”
“…….”
“가엾은 짐승을 동정해서?”
테리오드는 그만 헛웃음을 지었다.
어디서부터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테리오드는 고개를 돌려 이마를 짚었다. 관자놀이를 문질러도 두통은 가라앉지 않았다.
대공비에게 도움을 얻기로 한 뒤, 테리오드는 고마운 마음에 정략결혼일지언정 아내와 가까워지려 노력하고 있었다. 꼭 이성적인 방향으로 흐르진 않더라도 그는 자신의 은인과 잘 지내보고 싶었다. 한데 상대는 계속해서 떠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단 말인가.
“만약 병이 나으신다면, 당장 후계가 필요하진 않겠죠.”
아스티나가 매끄럽게 응대했다. 테리오드가 무의식중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건 그렇지만…….”
“이 저주를 해결하기 위해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저는 본래 후계를 낳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만, 전하께서 이후 다른 혼사 계획이 있으시다면 그 아이도 방해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완쾌하신 후에 다른 여인을 들여 재혼하심이 바람직해 보입니다.”
세심하다고 느껴질 만치, 그의 대공비는 자신이 아니어도 되는 이유에 대해 소상히 설명했다. 실제로 테리오드는 아스티나를 붙잡을 그 어떠한 명목도 없었다. 그들은 저주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금은 그녀가 있어야만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으나, 저 말마따나 이 저주가 완전히 풀린다면 곧 필요 없게 되리라. 두 사람이 합의하여 헤어지고 나면 테리오드는 아스티나와 전혀 상관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대공은 자신이 연심을 착각했을 때 대공비가 왜 특히나 매정했는지를 깨달았다. 그녀에게 있어 그것은 주제넘은 참견이었다.
“그대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테리오드는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테리오드는 지나치게 초연한 대공비의 태도가 이해 가지 않았다. 괴물인 신랑을 상대할 때는 마땅히 돌아가고 싶을 수 있으나, 이제는 경우가 달랐다.
병을 앓기 전까지만 해도 테리오드는 손꼽히는 신랑감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병환은 나아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꾸준히 사람이 됨으로써 그는 아내에게 많은 것을 선물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그녀는 그 어떤 것도 원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테리오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욕심나지…… 않습니까?”
“무엇이요?”
아스티나가 의아한 눈으로 되물었다. 테리오드는 그녀가 내버리려 하는 것들에 대해 몹시 길고 성의 있게 열거했다.
“아탈렌타 대공가입니다. 비록 병으로 악명을 얻긴 했으나, 그래도 여전히 가진 것이 많습니다. 부친의 부채를 갚아 주는 것 정도는 오히려 약소한 수준일 겁니다. 상상할 수도 없는 부의 주인이 될 수도 있는데, 그대는 이 모든 것들이 탐나지 않습니까?”
아스티나는 이미 그보다 더한 것을 거머쥐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얻지 못한 영광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대단한 자산가인 대공보다 그녀가 이 대화에서 훨씬 더 여유로울 수 있는 이유였다.
“레테 백작가는 이미 충분한 원조를 받았습니다.”
“더 얻어 낼 수도 있지요.”
“대공 전하.”
아스티나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저희 아버지가 딸을 팔아 얻은 게 행운이었다 여기도록 만들 수는 없습니다.”
아스티나 본인에게 파혼은 그다지 큰 흠이 아니었지만, 그 나이 대 남성들은 대개 처음에 대한 집착이 컸다. 레테 백작은 딸에게 남은 이혼의 흔적을 볼 때마다 자신의 잘못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테리오드는 제 부모에게 상처 주기 위해 돌아가겠다는 부인의 말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 부부가 씻지 못할 죄를 지었음은 사실이나 아스티나는 그에 큰 타격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테리오드는 그녀가 괴물 대공에게 죽임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이곳으로 왔음을, 이제는 알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제 부모에게 일종의 벌을 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을 잔인하다 표현해야 할지 비범하다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친정으로 돌아가고 싶다 하면, 돌려보내 주신다고 약조하셨었지요.”
아스티나는 쐐기를 박듯 지난번 테리오드의 약속을 입에 담았다.
그는 그녀의 말에 어떠한 논리적 허점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잠시 곤혹스러워졌다. 천천히 되짚어 보니 과연 그녀의 말대로였다. 테리오드는 일을 해결하고 돌아가겠다는 대공비의 요구에, 자신이 어째서 반발심을 느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들 사이는 이렇게 정리되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테리오드는 이번에도 올바른 결정을 내놓아야 했다.
“그대가 그것을 원한다면…….”
그녀를 돌려보내 주는 것이 맞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 난 후, 집으로 돌려보내 주겠습니다.”
테리오드는 합당한 대답을 했다. 그를 언제나 마음 편하게 하고 안정시켰던, 이치에 맞는 말이었다.
“감사한 말씀입니다.”
배려에 감사를 표하는 대공비의 미소가 몹시 아름다웠다. 그러나 자애로운 대공의 마음이, 이번만은 왜 이리도 편치 않은지 모를 일이었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