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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래된 기억 (4/23)

4. 오래된 기억

동그란 정수리가 뜨끈하게 달아오른 여름날이었다. 저마다 그늘진 나무 밑이나 건물 속을 찾아들었고 필요에 의해 밖을 오가는 이들은 짜증스러운 얼굴을 했다.

보통 이런 날엔 훈련을 쉴 만도 하련만 오늘도 벨라체 아카데미의 엘리트들은 열정적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들이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은 대륙 제일검을 향한 정진이 아니라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다는 바로 그― 싸움 구경이었다.

검술학부 연무장에 모인 인파는 대단했다. 그들 모두는 저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건의 주인공이 선 중앙을 주시하고 있었다.

놓고 간 물통을 가지러 왔던 벤자민은 연무장 안으로 들어서다 말고 멈칫했다. 곧 점심시간이니 썰물처럼 빠져나갔음이 옳은데 머릿수는 오히려 더 늘어 있었다.

동물보다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친우들이 민감한 배식 순서를 뒷전으로 하고 새삼 배움에 대한 열의를 불태울 리는 없었다. 벤자민은 의아함에 동기들의 시선이 향한 곳을 살폈다.

사람들의 가운데 선 건 웬 여자아이였다. 붉은 머리카락이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검 대신 곰 인형 하나를 안고 있으면 딱일 것 같은 생김새의 소녀. 그녀가 들고 있는 검집은 주인의 몸집에 비해 지나치게 길고 컸다. 손잡이를 쥐고 있는 작은 손이 버거워 보일 정도였다.

“뭐야?”

벤자민이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작은 소리였지만 마침 근처에 있던 같은 학년 친구 데비는 그의 음성을 알아보았다. 데비가 벤자민을 돌아보며 작게 속닥거렸다.

“저 신입생 여자애가 연무장을 쓰게 해 달래.”

“뭐?”

벤자민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저 가느다란 손목으로 대체 무슨 훈련을 하겠다고 나서는 건가. 분명 이야기책에서 본 여기사에 대한 로망이나 몇 줄 가슴에 품고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리라.

또래보다 키가 커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 봤자 여자아이였다. 2차 성징이 나타나지 않았으니 지금이야 동기 소년들과 힘이 비슷하겠지만, 2년 정도만 지나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막 열다섯이 된 벤자민과 비교해 봐도 저 여자아이는 확연히 작았다. 성인 체격에 가까운 고학년들과 비교하면 삼촌과 조카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녀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칙적으로 벨라체 아카데미의 모든 학생들은 이 연무장을 사용할 권리가 있어.”

벤자민은 그녀의 녹안이 꽤나 똘똘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게 검술과 관련이 있을는지는 둘째 문제였지만.

“하……. 꼬마야, 이러다 다쳐요. 좀 가라. 응?”

중등반 아돌프가 피곤한 음성으로 말했다. 한참 입씨름을 했는지 그는 제 미간을 문지르고 있었다.

“방해가 되진 않겠어.”

“네 존재 자체가 방해예요, 꼬마 아가씨.”

“말투가 무례하군.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해서 현명한 기사가 될 수 있겠나?”

소녀의 비꼼에 모두가 눈만 끔뻑였다. 무려 그녀는 선배에게 반말을 쓰고 있었다.

아돌프는 입술을 깨물더니, 곧 배를 부여잡고 폭소를 터트렸다. 그가 눈가에 고인 물기를 닦아 내며 제 친우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겨우 중심을 잡은 그가 비꼬듯이 물었다.

“아아, 그래요? 그 대사는 어디서 봤니? 언니가 물려준 로망스 소설?”

“그대가 익혀 온 기사도가 그리 저급하다면 선생을 바꾸는 편이 낫겠어.”

“이게…… 좋게 말했더니.”

아돌프가 인상을 찡그렸다.

벤자민은 흥미롭게 둘의 설전을 지켜보았다. 한마디도 안 지고 달려드는 모습을 보아 집안에서도 말썽꾸러기일 듯했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애늙은이 같은 말투였다. 검술학부 아이들은 저 소녀가 따박따박 돌려주는 말대꾸가 웃겨서 식사도 거르고 여기 머물러 있는 것이리라. 과연 혼자 보기는 아까운 광경이었다. 벤자민은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장난기를 거둔 아돌프가 잘라 말했다.

“검술반 학생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야. 다른 학부생에게 내어 줄 수는 없어.”

“다시 말하되, 그런 조항은 없어.”

“여기가 장난으로 장식용 검이나 휘두르는 곳인 줄 알아?”

아돌프가 벌컥 짜증을 내었다. 더 이상 소녀의 장난을 참아 줄 수 없었다. 소녀는 입을 다물었다. 벤자민은 이제 그녀가 기죽은 얼굴로 연무장을 떠나가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침묵하던 소녀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좋아.”

“뭐?”

“장난이 아님을 증명하면 허락해 주겠어?”

아돌프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제 친구들에게 물었다. 야,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냐? 친구들은 킬킬거리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시정잡배 같은 모습에 아스티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돌프가 결린 어깨를 두드리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어떻게 증명할 테지? 저 통나무라도 베어 보겠어? 귀한 손목이 부러질 텐데.”

그의 엄지 끝이 연무장 저편의 나뭇더미를 가리켰다. 초등반 아이들이 할당받는 목재였다. 저 통나무들을 베는 것이 여름 과제 중 하나였다. 단면의 깔끔한 정도에 따라 점수가 매겨졌다. 이맘때쯤 졸업생들이 엉망이 된 목재들을 모아 캠프파이어를 벌이는 전통이 있어, 꽤나 상징적인 시험이기도 했다.

“깔끔하게 해치우면 뭐, 귀여운 신입생들만큼의 재능은 있다고 생각해 주지.”

아돌프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돌프는 그녀가 목재의 두께에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설 것이라 생각했다. 소녀가 자존심을 부려 시험에 임하리라 예상한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상상한 결과는 어디까지나 실패였다.

다들 기대하는 얼굴로 붉은 머리 소녀를 쳐다보았다. 검술반에서 여자아이는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소녀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어려울 텐데.”

웃음기 섞인 말에 아스티나가 턱을 들었다. 그녀는 무심한 시선으로 아돌프와 통나무를 번갈아 보았다. 비교를 마친 아스티나가 말했다.

“하긴, 저 나무가 네 머리보단 단단하겠군.”

“뭐? 이 계집애가 보자 보자 하니까…….”

아돌프가 왈칵 성을 냈다. 조그만 애가 와서 수련을 하고 싶다고 하니 귀여운 마음에 상대해 주었는데, 하는 말이 점점 정도를 넘고 있지 않은가. 아돌프는 자신이 내뱉은 비웃음이 전부 진실이라고 생각했기에 제 언행은 돌아보지 않았다.

아돌프가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됐다. 이제 그쯤 했으면 나가 봐. 더 이상 한가하게 네 말 상대 해 줄 시간 없으니까.”

“말이 자꾸 바뀌는군. 통나무를 베면 허락해 준다고 하지 않았나.”

“저깟 통나무가 뭐라고 여자에게 검술을 허락해?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돌프가 언성을 높였다. 아스티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아돌프를 응시했다. 서늘한 시선에 아돌프는 씩씩대다 말고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이쯤 됐으면 울음을 터트리거나 사과하고 도망가야 하는데 지나치게 반응이 점잖았다. 아니면 충격받아 굳어 있을 뿐인가.

아돌프는 순간 화를 참지 못한 것이 민망해졌다. 고작 막 아카데미에 입학한 조그만 여자아이일 뿐이지 않은가. 잘 몰라 그런 것이 분명했다.

그가 머쓱하게 사과의 말을 꺼내려 할 때였다. 미안함을 느낀 것도 잠시, 아돌프는 제 얼굴을 때린 실크 장갑에 그만 뻣뻣이 굳고 말았다.

“나, 아스티나 레테. 비웃음당한 통나무를 위해 결투를 신청한다.”

아돌프는 멍청한 얼굴로 상황을 파악하느라 콧등을 때렸던 장갑이 발치에 떨어질 때까지 어떤 말도 내뱉지 못했다. 행동도 말이 안 되거니와 그녀가 결투를 신청하며 한 말도 웃겼다. 비웃음당한 통나무라니, 아돌프는 그런 우스운 말은 처음 들어 보았다.

그러나 콧잔등은 얼얼했고 아스티나가 던진 장갑은 발등 위에서 선연하게 제 존재를 알렸다. 우습게도 아돌프는 그제야 자신이 진실로 결투 신청을 받은 것임을 깨달았다.

아스티나가 검을 뽑아 들며 주변에 서 있던 학생에게 물었다.

“저자의 이름이 뭐지?”

질문받은 학생은 아스티나의 너덜너덜한 낡은 검을 보고는 놀라 제때 대답하지 못했다. 저 고물로는 교수라도 아돌프 선배를 이기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를 대신해 옆에 있던 조그만 체격의 신입생이 눈치껏 대꾸했다.

“아돌프 반델라 선배요…….”

“좋아, 아돌프 반델라. 명예를 안다면 결투에 임해라.”

인내하듯, 아돌프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나 심호흡만으로 화가 가시지는 않았다. 아돌프는 분노한 걸음걸이로 아스티나에게 다가섰다. 건방진 행동을 봐 넘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가 씹듯이 말했다.

“네 행동을 후회하지 마라.”

“혀가 길군.”

그 말과 동시에 아돌프가 검을 휘둘렀다. 그는 아스티나의 검을 장외로 쳐 내 한 합에 시합을 끝낼 생각이었다. 여자아이와 육탄전을 벌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러나 아돌프는 미끄러지듯 중심을 잃고 걸음을 주춤거렸다. 그는 당황하여 잠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아스티나가, 꼬마 계집이 자신의 검을 흘려 냈다. 아돌프는 수재였지만 아직 학부생이기도 했다. 예기치 못한 사태에 곧바로 적응할 실전 감각은 없었다. 어버버거리는 아돌프에게 아스티나가 검을 휘둘렀다. 아돌프는 가까스로 그것을 막았다. 아돌프는 뒤늦게 침착을 되찾았다. 둘은 체격 차가 컸고 힘적인 부분만 봐도 상대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검이 날카로운 이유는 세게 휘둘러야만 상처 입힐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쉽사리 결판이 나지 않자 모두가 아스티나를 주목했다. 아직 어렸기에 완력은 약한 편이었지만 완급을 조절하는 실력이 좋았다. 필요한 힘을 딱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만 쓸 줄 알았다. 그야말로 낭비가 없는 검술이었다. 그 절제된 솜씨에 졸업 학년 몇은 실력을 알아보고 입을 떡하니 벌렸다.

다른 학생들도 난리 법석이었다. 아돌프의 고전을 눈치채지 못할 천치라면 입학도 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들은 5분 전까지만 해도 저 소녀가 한 합 만에 울면서 연무장을 뛰쳐나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몇 번 검이 부딪친 후, 그들은 그 예상을 전면 수정해야 했다. 결과가 뒤집혔다는 표현을 쓰기도 어색했다. 승리는 처음부터 아스티나의 것이었다.

끓는 혈기를 느낀 학도들이 소리쳤다.

“아돌프! 쪽팔리게 꼴이 그게 뭐냐!”

“검술반의 수치다!”

아돌프는 욕설을 내뱉고 싶었지만 그럴 짬이 없었다. 쇄도하는 아스티나를 막아 내는 것만도 벅찼다. 코앞을 스쳐 지나간 쇳소리에 모골이 송연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팔이 부러졌을 것이다.

아돌프가 아스티나의 검을 힘으로 걷어 내고 크게 휘두를 때였다. 아스티나가 몸을 낮추더니 그 틈 사이로 파고들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아돌프는 제 코앞으로 다가온 아스티나의 얼굴을 보며 침을 삼켰다. 몸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제 목에 겨눠진 이 차가운 기운이 쇠붙이 외의 다른 것일 리 없기 때문이다.

아돌프는 처음 그녀와 검을 맞댔을 때부터 했던 생각을 그제야 입 밖으로 냈다.

“너…… 너 뭐냐?”

아스티나가 천천히 검을 거둬들였다. 아돌프는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을 들어 제 목덜미를 문질렀다. 목이 제대로 붙어 있나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날이 닿았던 부분을 한참 문질렀지만 손에 피가 묻어 나오진 않았다. 아돌프는 아스티나의 검날이 거의 뭉개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경악했다. 저러니 살에 닿아도 피가 배어 나오지 않은 것이다.

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저따위 검으로…… 나한테 이겼어?’

아돌프는 저 검의 출처가 어딘지 알 것 같았다. 학교 측에서 구색을 맞추기 위해 가져다 둔 연습용 칼이었다.

허세 빼면 시체인 귀족들이 한낱 보급품을 사용할 리 없었다. 10년 전 입고됐던 다량의 검들은 그대로 창고에 처박혀 천천히 녹슬었다. 아돌프가 그걸 알아본 건 손잡이 끝에 각인된 벨라체 아카데미의 상징, 독수리 문양 때문이었다.

“과연, 네 말이 맞군.”

아스티나가 말했다. 아돌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직도 패배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멍청하게 눈알만 굴리는 아돌프에게, 아스티나가 짐짓 온화한 낯으로 물었다.

“이곳이 장식용 검이나 휘두를 곳은 아니야, 그렇지?”

아돌프의 가슴에 불안이 스며들었다. 아무래도 좋은 얘기는 아닌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스티나는 더없이 산뜻해 보이는 얼굴로 말을 맺었다.

“앞으로 내가 있을 땐 여기 오지 말도록.”

아돌프는 대답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따지고 싶었지만 우스운 꼴밖에 되지 않을 걸 알았다. 남들이 전부 지켜보는 앞에서 패배했다는 수치심에 아돌프의 눈이 젖어 들었다.

아돌프는 몸을 일으키고는 양 뺨을 감싼 채 연무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나이는 아직 열다섯, 마음 어느 한구석에서 신화 속 흑염룡이 날뛸 나이였다.

아스티나는 아돌프의 뒷모습엔 시선도 주지 않고 검 끝을 매만졌다. 그녀가 짧게 혀를 차며 무기를 갈무리했다. 모두가 숨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와중, 가장 뒤편에 서 있던 벤자민이 앞으로 나섰다. 친구들을 밀치고 나온 벤자민이 아스티나를 불렀다.

“이봐, 이봐!”

아스티나가 고개를 들어 벤자민을 쳐다보았다. 그 무심한 눈빛에 벤자민은 꽤나 당황했다. 열세 살 소녀에게서 볼 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긴, 열세 살 소녀에게서 볼 검술도 아니었지.’

벤자민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칭찬과 함께 악수를 건넸다.

“아스티나 레테라고 했나? 반갑다. 나는 벤자민 레안드로스라고 해. 솜씨가 아주 좋던데.”

아스티나는 바로 그것을 맞잡는 대신 물끄러미 시선을 내렸다. 아스티나가 제 손가락만 바라보자 벤자민은 등허리에 땀이 차는 것을 느꼈다. 인사가 잘못되기라도 한 걸까. 방금 한 말을 점검하는데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가볍게 두어 번 악수한 벤자민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너와 대련해 보고 싶다.”

“내기는 이미 이겼어.”

아스티나가 삐딱하게 눈썹을 들었다. 연무장 한구석을 쓰고 싶었던 거지 도장 깨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다. 아돌프라는 소년을 이겼으니 공식적으로 그녀에게 뭐라 할 사람은 없어야 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검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증명했으니까.

“내기가 아니라, 너와 겨뤄 도움을 받고 싶어. 너만 한 검술을 쓰는 자는 별로 없으니까 말이다. 부디 내 행운을 앗아 가진 않았으면 좋겠구나.”

아스티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눈알만 굴렸다. 사실 그녀는 다소 후회 중이었다. 좀 더 온건하게 연무장으로 들어설 방법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제 자존심을 건드리는 이 앞에서 후퇴를 택할 수는 없었다. 아스티나만큼 스스로에게 긍지가 넘치는 이가 드물었다.

그녀는 언제나 물러서지 않고 살아왔다. 그것이 연인의 죽음이든, 전쟁이든, 혹은 제게 대련을 청하는 이 금발의 소년에게 응하는 하찮은 일일지라도.

아스티나가 결국 한숨 쉬며 대답했다.

“아스티나 레테다. 반갑다, 벤자민 레안드로스.”

머리맡으로 늘어진 햇빛에 잠에서 깼다. 아스티나는 눈을 깜빡이며 옆자리를 살폈다. 따뜻한 온기를 품은 늑대 한 마리가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그녀는 무심결에 그 털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왜 그때 꿈을 꿨지?’

의미 없는 자문이었다. 무의식을 파헤치는 것만큼 광활하고 쓸모없는 일이 또 없었다. 아스티나는 침대에서 내려오자마자 그 꿈을 잊었다.

정확히, 그날 오후 벤자민 레안드로스가 비바람을 뚫고 아탈렌타의 성문을 두드리기 전까지는.

* * *

아탈렌타 대공령에 지겨운 장마가 찾아왔다. 비는 모름지기 내리지 않는 편보다 내리는 편이 낫지만, 외출을 삼가야 한다는 점은 퍽 아쉬웠다.

덕분에 테리오드는 바깥을 나돌아 다니는 대신 저택 이곳저곳을 누벼야 했다. 대공저는 몹시 넓어 본관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적당한 운동이 되었다.

그 어떤 특별한 것이라도 반복되면 일상이 된다. 첫날 테리오드의 코끝만 봐도 기겁하던 사용인들은 어느새 익숙해져 그가 옆에 있어도 묵묵히 제 할 일만 했다. 관심을 잃은 것이 아쉬웠는지 테리오드는 가끔 늑대 울음소리를 냈다. 반쯤 그를 개로 착각하고 있던 아스티나가 그 소리에 놀라 성 밖으로 뛰쳐나갈 뻔한 적도 있었다. 인가를 습격하려는 들짐승 무리로 안 것이다.

“대공비 전하,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 너무 무섭습니다. 좀 말려 보십시오.”

“두어라, 귀엽지 않느냐.”

하녀들의 장난스런 투정에 아스티나는 인자하게 대답했다.

사실 아스티나가 참기 힘든 건 다른 문제였다. 잠시 흥미를 보였던 도장 찍기 놀이는 이틀 만에 효용을 다하고, 테리오드가 다음 목표로 삼은 놀잇감은 아스티나였다. 아직 인주 자국이 다 사라지지도 않은 발로 테리오드는 그녀에게 지겹게 몸을 치댔다.

아스티나는 낚싯대를 공수해 와 고기를 매달아 놓고 흔들며 놀아 주었다. 나름대로 효율적인 방안이었지만, 타고난 사냥꾼은 간식을 먹어 치우는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다. 아스티나는 결국 포기하고 테리오드의 애정 행각을 맨몸으로 받아들였다.

값비싼 옷감에 잔뜩 묻은 털은 빨래방 하녀의 새로운 고민거리가 되었다. 괴물 대공은 몸집이 무척 컸기에 날리는 털도 장난으로 넘어갈 수준이 아니었다.

부군의 사랑에 대공비는 시름에 겨웠다.

‘조치가 필요하다.’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깔끔한 의복은 중요했다. 결국 아스티나는 옷을 전부 흰색으로 맞췄다. 그러자 은빛 털과 색이 교묘하게 섞여 잘 티가 나지 않았다.

부부 ―라기보단 견주와 대형견에 가까운 모습이었지만― 가 비슷한 색의 옷을 두르고 다니자 세트로 맞춘 느낌이 났다. 고성이 오가고 이혼을 논하는 여타 불행한 기혼자에 비해서는, 확실히 사이좋은 부부였다.

“차를 좀 드릴까요?”

“중간에 요의가 느껴지면 집중이 깨져서, 사양하지요.”

올리버의 물음에 아스티나가 그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고 답했다. 아스티나는 벌써 반나절을 꼬박 의자에 앉아 있었다.

노년의 집사는 혹여 주인의 몸이 상할까 전전긍긍했다. 올리버에게 아스티나는 아탈렌타가에 평화를 되찾아 준 귀인이었다. 말과 행동이 달랐던 가신들과는 달리, 적어도 올리버는 정말 아탈렌타를 사랑했다.

테리오드의 출생보다 더 먼저부터 대공령을 지켜 온 올리버에겐 다른 이들과 비할 수 없는 충정심이 있었다. 그는 저의 주인을 자랑스러워했고 그를 보살피는 스스로에게는 긍지를 가졌다.

올리버의 마음속에서 새로운 주인이 된 아스티나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아랫사람들에겐 자애로웠고 저를 거스르는 이에겐 손속이 무자비했다. 아스티나는 언뜻 너무하게 느껴질 만큼 상벌을 정확히 구분했다. 저택의 사용인들이 그녀를 좋아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아스티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제 편으로 포섭하면 했지 결코 적으로 두지는 않을 것이다.

멍청한 가신들은 그 사실을 파악하기도 전에 감히 그녀를 거스른 죄로 권력에서 멀어졌다. 자리를 보전한 이들은 쥐 죽은 듯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 지냈다. 대공비에게 걸렸다간 뼈도 못 추린다는 사실을 몸으로, 눈으로 배웠기 때문이었다.

가신들의 재판이 거의 끝나 갈 시기였다. 버논 남작이 벌인 암살 시도엔 당연히 공범이 있었다. 몇몇은 추방당했고 몇몇은 죄질이 심각하여 목이 잘렸다. 잘린 머리는 음울한 빗물과 함께 세상에 효수되었다. 감히 대공비의 암살을 사주한 대가였다.

당연히도 그 모든 일을 처리하는 동안 아스티나는 숨 가쁘게 바빴다. 대공비는 현명한 만큼 일 욕심이 많았다.

“버논 남작의 재산 문제는 어떻게 되었죠?”

“완전히 몰수한 것으로 압니다. 다만 그 식솔들이 아직도 빼앗긴 저택에서 농성하고 있다는군요.”

“그들의 논지가 뭡니까?”

“엘리제에 관한 건입니다. 본처에게서 난 자식도 받지 못하는 재산이 왜 한낱 하녀에게 가느냐는 거지요. 특히 전대 가주였던 버논 남작의 부친이 매우 정정하여 계속 난동을 부린다고 합니다.”

“버논 남작의 범죄를 알고 있는 것은 맞고요?”

“입장이 버논 남작과 같습니다. 강압에 의한 관계가 아니었으며, 또한 그 일이 재산을 노리고 벌인 사기극이라고 말합니다.”

아스티나는 고개를 들고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깃펜을 쥔 손을 흔들던 그녀가 곧 명령했다.

“버논 남작의 저택 내에서 일했던 하녀들을 수소문하세요. 그놈이 하나만 손을 댔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피해를 입은 이를 찾아 진실인지 구별하여 마땅한 보상을 내리는 게 좋겠습니다.”

“저번처럼 버논 남작의 측근을 심문할까요?”

아스티나는 저 혼자 살기 바빠 주인의 범죄를 거리낌 없이 털어놓던, 신의 없는 남자들을 떠올렸다. 버논 남작에게는 불행이었지만 아스티나가 그의 부족한 인덕을 가엾이 여길 필요는 없었다. 아스티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내역은 전대 버논 남작에게 모두 안내하세요. 그들도 알 권리가 있지.”

과연 그들은 알 권리가 있었다. 그들의 재산이었던 것이 얼마나 많이, 잦게 몸집을 줄여 가는가에 대해서. 그리고 그 돈들이 어떤 과오로 인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역시.

아스티나가 관련 내용을 새 종이에 적어 내리고는 사인을 남겼다. 그녀가 그것을 집사에게 건네며 말을 맺었다.

“그러고도 만일 더 불만이 있다면, 언제든지 버논 남작이 내게 보냈던 선물의 맛을 알려 줄 수 있다 전해요.”

아스티나는 버논 남작에게 본인이 준비했던 독약을 친히 하사해 주었다. 그 독이 어찌나 악랄했던지 버논 남작은 피를 토하다가 내장이 터져 죽었다.

단순한 암살을 위해서였다면 그리 요란하고 고통스러운 물건을 고를 필요는 없었다. 복수를 위한 약이었다. 아스티나를 죽이는 일만으로 그치지 않고, 마지막 가는 길 누구보다 큰 고통을 겪게 하겠다는 결심이 돋보였다.

아스티나는 감히 죄인이 안장되어 영면하지 못하도록 사체를 들판에 내다 버렸다. 공범자였던 여자에게 내렸던 자비에 비해 몹시 비정한 결정이었다.

‘엘리제에게 너무 자비로웠을까.’

하녀들 사이에서 말이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살인 미수였고, 무엇보다 그녀들은 엘리제에게 당한 일이 많았다. 아스티나가 엘리제를 대공령에서 내쫓기는 했으나 만족할 만한 처벌은 아니었다. 그조차 그녀의 미래를 위한 안배였기 때문이다.

이 성안에서 엘리제가 버논 남작에게 겁탈당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곧 대공령의 모두가 알게 될 것이었다. 엘리제는 아탈렌타 땅에서 다시는 전처럼 돌아다닐 수 없게 되었다. 적당한 재산을 가지고 먼 지방에 정착하면 그럭저럭 남편 잃은 아낙 행세를 하면서 살 수는 있으리라.

엘리제의 약혼자는 결국 그녀를 품지 않았다. 지난 과오를 사과하는 엘리제에게 괜찮다고 답해 준 하녀도 없었다. 개중 몇이 마지못한, 그럼에도 약간의 연민이 담긴 눈으로 떠나서도 건강히 지내라는 염려를 전한 것이 끝이었다.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는 자리, 엘리제는 꼿꼿한 걸음으로 돌아서 대공저를 떠났다. 타지방에 정착한 그녀는 사망한 남편의 추억을 꾸며 내며 스스로를 과부라고 칭하게 될 것이다.

‘자업자득이라고 하기엔 저당 잡힌 미래가 너무도 길지 않은가.’

아스티나는 두 번의 생을 살았지만 그럼에도 아직 미완의 인간이었다. 그녀는 엘리제가 저의 역린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 존엄하던 마티나조차 원하지 않는 남자와 동침한 경험이 있었다. 자의가 아닌 색사는 끔찍하고 참담하여, 정신력이 강한 그녀조차 회복하기 쉽지 않았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는 아주 끔찍한 변태였지.’

왕세자는 흉포했다. 레타 집시들을 살육한 이후부터는 피에 취해 거의 반쯤 미쳐 지냈다. 별것 아닌 일에 화를 냈고 조금만 제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참지 못했다.

마티나는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온갖 구역질 나는 일들을 해야 했다. 흡족한 듯 미소 짓던 입은 아직도 기억에서 선명했다. 아스티나는 버논 남작의 발광에서 그 모습을 보았다.

반면 네 쪽 난 성기는 어찌나 볼품없던지.

테리오드가 피를 보고 달려들까 싶어 그는 침실에 남겨 두었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고통스러워하는 버논 남작을 그대로 갈가리 찢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짐승의 이빨이 옆에 있었다면 충분히 그렇게 했으리라.

아스티나는 제 심장이 불안하게 뛰는 것을 느끼고는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동요가 심한 걸 보니 피곤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아스티나는 손등으로 눈가를 덮었다. 적당한 찬기가 미세한 열기를 식혀 주었다.

주인의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망설이던 올리버는 그동안 쭉 품어 왔던 의문을 꺼냈다.

“대공비 전하, 혼인 전에는 그렇다 치시더라도 왜 제게 말을 놓지 않으시는지…….”

아스티나가 눈꺼풀 위에 올린 손을 그대로 둔 채 되물었다.

“올리버, 그대 나이가 몇입니까?”

“올해로…… 칠순이 됩니다만.”

올리버가 긴장하여 대답했다. 아스티나가 그의 은퇴에 대해 얘기하려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또래에 비해 정정한 편이었지만, 아스티나가 그의 일 처리에 불안을 느낀다면 뒷방으로 물러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알 수 없는 대답을 했다.

“그래섭니다.”

“예?”

“난 원래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한테 말 안 놔요. 가정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서.”

그렇게 대답하며 아스티나는 몸을 바로 세웠다. 누군가는 그 표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른을 공경하는 건 언뜻 예의 있게 보여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국을 건국한 마티나에겐 그것이야말로 ‘잘못된’ 교육이었다.

마티나가 황제의 딸로 태어나 황제로 자랐다면 모두를 하대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어미는 천한 집시였다. 오웬은 아름답고 강했으나 누구에게 명령한 적 없는 삶을 살았다. 그녀가 딸에게 가르칠 수 있는 건 친절과 윗사람에 대한 존경이었다.

마티나의 권위가 올라서며 점점 모든 신분을 발아래에 두었지만 딱 하나, 나이는 그녀가 원한다고 해서 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티나는 어미에게 배운 모든 것을 가슴 깊이 새겼다. 그야말로 어쩔 수 없이. 그녀가 검을 쥐게 하고, 제 목숨을 지킬 힘과 의지를 주고, 마침내 복수를 이루게 한, 그 모든 인생이 다 오웬의 가르침이었으니까.

‘지금 내 나이가…… 벌써 예순이 넘었나.’

아스티나는 오른손으로 왼 손등을 두드리며 곰곰이 셈해 보았다. 마티나는 마흔두 살에 죽었고 아스티나는 열아홉이었다. 살아온 날들만 쳐도 벌써 예순이었다. 당연히 나이로 치면 존대할 만한 상대가 마땅히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올리버는 지나치게 오래 살았다. 카라벨라의 평균 수명은 그보다 훨씬 짧았다. 아스티나는 이 대공령에서 제게 존대를 받을 만한 나이의 사람이 한 손에 꼽힐 거라고 예측할 수 있었다. 올리버는 아스티나에게도 특이한 경우였다.

‘무엇보다 진짜 대공비면 몰라, 어차피 일 년 뒤면 이혼할 심산이지 않은가.’

반면 그녀는 십 대의 아카데미 선배들에겐 지나치게 자비 없었다. 교수에겐 눈치껏 존대를 했지만 도무지 어린 학생에게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아이들을 선배라고 부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때문에 아스티나를 잘 모르는 대부분의 위의 학년들은 버릇없다며 그녀를 싫어했다. 아스티나는 손아랫사람에게 특히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데만 익숙했기 때문이다.

벤자민은 아주 특이한 경우였다. 아스티나가 반말을 고수하는데도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그녀를 챙겼다. 종종 대련을 했고 가끔 외출하는 날이면 필요한 물건을 사다 줄 때도 있었다. 아스티나는 그와 있으면 오래된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생각났나?”

“예?”

뜬금없는 말에 올리버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스티나는 고개만 한번 저어 보였다. 고작 꿈 얘기를 진지하게 나누는 것은 조금 웃겼다.

그때 누군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아스티나가 허하자 하녀 제인이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들어섰다.

“대공비 전하, 손님이 오셨어요.”

아스티나는 흘긋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스티나가 대공저에 도착했던 때의 갑절은 되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스티나가 검지 끝으로 창가를 가리키며 물었다.

“지금?”

덕분에 제인은 다소 민망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꿋꿋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스티나는 잠시 침묵했다. 대체 대공령까지 달려와 저를 찾을 인물이 누구란 말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칸나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자신은 괜찮으니 졸업까지 악착같이 시험을 향해 달리라고 재차 편지를 보냈는데. 장마 때문에 간식을 보낼 만한 인편이 없다더니 혹여 본인이 직접 가지고 오기라도 한 것일까. 아스티나가 수도 블랑제리의 디저트를 좋아하긴 했지만, 언니의 졸업 성적을 제물 삼고 싶을 만큼은 아니었다.

그녀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누구지?”

“벤자민 레안드로스 님이라고 하십니다. 일단 응접실로 모셨습니다.”

아스티나는 잠시 당황했다. 단순히 개꿈이라고 여겼는데 그 주인공이 정말 실제로 나타나다니.

잠시 멀뚱히 눈만 깜빡이던 아스티나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나가 보지.”

빠른 결정에 제인이 앗, 하고 다시 주인을 불러 세웠다. 이어진 덧붙임에, 아스티나는 혹 수도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은 아닌가 염려하게 되었다.

“참, 레테 백작저에서 오셨다는 히센 오스카 경도 함께 계셨어요.”

참으로 영문 모를 조합이었다.

* * *

레테 백작의 호위 기사, 히센 경을 만난 것은 벤자민 레안드로스로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벤자민은 정확히 아탈렌타에 도착하기 5일 전 벨라체 아카데미를 빠져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아스티나의 결혼 소식을 전해 들음과 동시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기 위해선 휴학계를 내야 했다.

행정 절차가 처리되는 동안 벤자민은 아버지를 찾아가 담소를 나눴다. 허락 없이 학교를 때려치우기엔 부친의 격노가 두려웠다. 벤자민의 아버지는 그가 이전에 일 년의 휴학 기간을 가졌을 때도 마땅찮게 여겼다.

벤자민이 말했다.

‘잠시 학업을 쉬고 아탈렌타 대공령에 다녀오고자 합니다.’

‘아탈렌타 대공령엔 갑자기 왜?’

‘아스티나 양이 부친의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대공과 결혼했습니다. 이것이 강제라면, 그녀에게 자유를 주어야 해요.’

여자 하나 구하자고 일 년을 날리겠다는 말이었다.

벤자민은 몹시 긴장하여 손바닥에 난 땀을 무릎에 닦아 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아버지의 반응은 차분했다. 단지 그는 무표정한 낯으로 되물었다.

‘어떻게?’

벤자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탈렌타 대공과 이혼시킬 힘이 제게 어디 있단 말인가. 벤자민은 이 매매 결혼의 법적 맹점을 파고드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래도 통하지 않으면, 마지막 수로 기댈 곳은 오로지…….

‘후회할 거라고 하지 않았느냐.’

아버지가 온화하게 웃어 보였다. 벤자민 역시 미소로 화답했으나 굳은 입꼬리를 숨기지 못했다. 이후 벤자민은 간단한 짐을 꾸려 수도를 떠났다.

살아 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래도 남편이 바로 그 ‘괴물 대공’이었다. 벤자민은 아스티나의 무력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동시에 그녀에게 많이 무르기도 했다. 어찌 됐든, 그녀는 벤자민이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틀 밤낮을 달리고 삼 일째 되는 날 여관에서 쪽잠을 잤다. 꼬질꼬질한 행색에 여관 주인은 방을 내주는 것도 꺼렸다. ―물론, 씻고 식당으로 들어선 벤자민의 얼굴을 보고는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벤자민은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는 마시장으로 가서 말을 바꿨다. 지친 말이 지난 이틀과 같은 속도를 낼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벤자민은 다시 지겨운 안장에 얼얼한 엉덩이를 얹었다. 허리가 부러질 듯한 통증이 스쳤지만 그저 이를 악물고 참았다. 지금은 대공령에 빨리 다다르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마침내 나흘째 되던 날, 벤자민은 어이없는 방해꾼에 발목을 붙잡혔다. 폭우였다.

‘일찍 그칠 비가 아닌데.’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당연히도 영지와 영지 사이는 수도처럼 잘 닦인 길이 아닌 비포장도로였다. 말을 타고 속력을 내다가 미끄러지면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 쏟아지는 찬비 속에서 부상당한 몸으로 하룻밤을 지새우면 목숨도 보전하기 어려우리라.

결국 벤자민은 출발을 유보했다.

“빈방 있습니까?”

벤자민의 물음에 여관 안주인이 흘긋 그를 넘겨보았다. 벤자민은 불안하게 1층 식당을 살폈다. 만석이었다. 비 오는 날 굳이 외식을 나올 리는 없으니 이 손님들의 대부분이 투숙객이라는 소리였다.

“잠시만요.”

그렇게 답한 안주인은 계단으로 향했다. 그녀가 벽면에 손을 짚으며 소리쳤다.

“제시, 2층에 방 있니?”

2층에 있는 급사에게 질문한 것 같았다. 벤자민은 계단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그 대답까진 못 알아들었지만, 돌아온 안주인은 상냥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딱 하나 있답니다. 운이 좋으셨어요.”

“다행이군요.”

벤자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2층으로 안내받아 짐을 풀었다. 까딱하면 마구간에서 말과 함께 노숙할 뻔도 하였는데 운이 좋았다.

벤자민은 간단하게 몸을 씻고는 옷을 갈아입었다. 짐에도 빗물이 들어 물기가 비쳤지만, 완전히 폭삭 젖은 옷을 입고 있는 것보단 나았다. 벤자민은 동전을 몇 푼 챙겨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당에서 배를 채울 요량이었다.

시간이 늦어 대부분의 손님들은 식사보다 술잔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맥주를 마시고 싶긴 했지만 술이나 넘길 상황은 아니었다. 벤자민은 구운 닭 요리와 물을 부탁했다.

원래도 장사가 잘되는 곳인지 사람이 많은데도 급사들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벤자민은 오래 기다리지 않아 주문한 식사를 넘겨받았다. 딱히 기대하지 않았는데 음식이 꽤나 괜찮아 보였다. 두껍게 저며 구워 낸 닭 다리 살 위에 야채 조림이 올려져 있었다. 소스를 겸하는 것 같았다.

벤자민은 잘 구워진 닭 껍질을 포크로 눌러 보았다. 바삭한 표면이 식기를 넘어 손까지 느껴졌다.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맥주가 당겼다.

벤자민은 욕구를 누르며 닭 다리를 잘라 한 입 물었다. 육즙이 배어 나오는 데다 식감까지 부드러웠다. 벤자민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술을 한 잔 걸친 상태로 다음 날 일찍 일어날 수 있을까.’

그러나 벤자민의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뒤편에서 웬 비명이 들려온 탓이었다.

“꺄악! 이러지 마세요!”

“거 내가 뭘 했다고 그러는 거야? 사람들이 오해하겠어.”

“지금 제 엉덩이 만지셨잖아요!”

“뭐? 이 여자가…….”

급사의 앙칼진 따짐에 남자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곧 제 동료들과 낄낄대었다.

“만져 달라고 그렇게 씰룩씰룩대던 것 아니야? 크핫!”

그 대화를 들은 벤자민은 정확히 이렇게 생각했다.

‘뭐지, 이 진부한 양아치는?’

평민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모험 소설에선 항상 불량배가 급사를 추행하지 않던가. 주인공은 정의감에 분노하여 그들을 처리하고 말이다. 벤자민은 우스운 상상에 고개를 내저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당연히, 기사 된 도리로 곤경에 처한 여인을 구해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벤자민이 이 서사의 주인공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너희들, 지금 급사라고 여인을 무시하는 거냐아……!”

옆 테이블에서 얼굴이 잔뜩 벌게진 남자 하나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벤자민은 그가 일행이 있는지를 살폈다. 일행을 믿고 나섰거나, 아니면 그 멍청한 결정을 말려 줄 일행이 없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안타깝게도 그 남자는 후자에 속했다. 허리춤에 칼을 차고 있긴 했지만 맨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제대로 힘을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자식은 또 뭐야.”

벤자민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 급사를 추행한 남자가 헛웃음을 지었다. 벤자민은 혀를 차며 상황을 중재하려고 나섰다.

“적당히들 하시죠.”

“이 새낀 또 뭐고, 아 진짜. 뭐 별일이라도 있었어? 아무 일 아니니 그냥 가던 길들 가쇼.”

“그럼 별일이 없었습니까. 이분을 추행하셨는데.”

벤자민이 딱딱하게 대답하며 겁에 질린 급사를 제 등 뒤로 숨겼다. 그녀는 몇 번이고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재빨리 도망쳤다. 딸이었던 듯, 아까 보았던 안주인이 그녀를 끌어안고 팔을 쓸어 주었다.

먹잇감을 놓친 남자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어쭈, 폼 잡네?”

“그냥 보내 드릴 일은 아니니 치안대로 갑시다.”

“누가 간대? 야,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벌어진 소란에 벤자민은 골이 아파 왔다. 일개 동네 양아치일 뿐이다. 제압하는 건 쉬운 일이나 조사를 위한 증인이 되는 건 곤란했다. 비가 그치는 대로 빨리 출발해야 했으니까.

벤자민은 옆에 선 취객을 흘긋 살펴보았다. 대신 일을 맡길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아무래도 이자의 증언은 쓸모가 없을 듯했다. 만취한 사람의 말은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 깨어났을 때 이 일을 기억이나 하면 다행이었다.

“너는…… 내가, 누군지 아라?!”

벤자민에게 한 말을 제게 한 것으로 오인한 취객이 벌컥 성을 냈다. 단전부터 끌어모은 듯 고성이 대단했다. 그가 꼬인 혀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나아…… 느은 말이다. 우리 아가씨로부터 검을 사사 받았어.”

취객의 말에 추행범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검지를 제 관자놀이에 대고 돌리는 시늉을 하더니 제 친구들과 다시금 낄낄거렸다.

“계집에게 배운 검이 참 쓸모도 있겠네. 푸핫.”

“아오! 이 멍청한 것들이! 우리 아가씨는 진짜 천재란 말이닷!”

무어 그리 모욕적이었는지 취객이 벌컥 성을 냈다.

“우리 아가씨이는! 여섯 살에 이틀 배워 예법을 떼셧꼬! 열 살에 책만 보고도 모든 검법을 익히셔쓰며! 너희 같은 양아치들은 한 수레로 갖다줘도 단숨에 베어 버릴 분이닷!”

듣고 있던 주변 사람들은 모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만히 두면 나뭇잎을 타 강을 건너고 모래로 쌀을 만들었다는 말까지 나올 판이었다.

그러나 벤자민은 실제로 그렇게 했던 인물을 하나 알고 있었다.

“아스티나?”

벤자민은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외딴 마을에서 아스티나에게서 검을 배웠다는, 레테 백작가의 기사를 만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가 아스티나를 찾아 대공령으로 가고 있지 않는 이상…….

“…….”

벤자민은 잠시 침묵했다. 이곳은 수도와 레테 백작령에서 일직선에 있는 마을이었다. 가능성은 충분했다.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이름에 취객이 고개를 돌리며 불쑥 아는 체를 했다.

“어? 댁이 그 이름을 어떻게 알지?”

히센의 눈이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이어 그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헉! 스파이냐!”

‘술은 절대 먹이면 안 되겠군.’

벤자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취객의 행색을 살폈다. 어쩐지 옷이 좋아 보인다 했더니 레테 백작가의 기사였던 모양이었다. 목적지가 같으니 버려두고 가기도 뭐했다. 벤자민은 그가 제 말을 알아들을 수나 있을지 의심하며 대답했다.

“아스티나 양과는 같은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습니다.”

“아카데미 동기요?”

“아뇨, 일단 학부가 다른지라. 하지만 같이 대련을 하던 사이였습니다.”

“대련…….”

벤자민의 말에 히센의 어깨가 축 처졌다.

“부럽다…….”

도저히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벤자민을 당황하게 한 히센은 그대로 울상을 지었다. 그가 소매로 닭똥 같은 눈물을 닦아 내며 말했다.

“우리 아가씨가…… 흐흑…… 물론 보통 아가씨가 아니긴 하지만. 이렇게 빠르게, 그런 집으로 시집을 가시다니…….”

벤자민이 위로의 말을 건네려 할 때였다. 히센이 흥분하여 벌컥 소리쳤다.

“아직 가르쳐 주시기로 한 검법 마지막 장은 다 못 떼었는데!”

“…….”

그리움의 원인은 그거였던 모양이었다. 어이없는 상황에 벙쪄 있던 양아치들은 곧 제 분노를 되찾았다. 그들이 위협적으로 일어섰다.

“이놈들이 사람 불러 세워 놓고 뭐 하는 거야?”

“야, 고작 둘이야. 쳐!”

대화가 또 삼천포로 빠질 것을 막기 위함인지 그들은 대뜸 주먹부터 들이댔다. 벤자민은 손쉽게 피해 내고는 빠르게 취객을 살폈다. 기사라고는 하나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 상태에서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히센은 검집으로 양아치들을 때려잡기 시작했다. 패는 소리와 타격감이 어찌나 경쾌한지 식당 안 사람들이 전부 흥미롭게 지켜볼 정도였다. 벤자민은 그 검법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아돌프 때랑 똑같은데.’

아스티나가 이전에 제 친우를 가르치며 행했던 훈육법과 정확히 동일했다. 검집만으로 사람을 어찌나 제대로 두드리는지 피부엔 생채기도 없는데 내상으로만 하루를 앓을 정도였다. 당시 아돌프는 매일 밤 피멍에 신음하며 이를 갈았다. 이후 아돌프는 놀라운 성취를 얻었으나 모두가 받을 만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벤자민은 히센의 움직임을 구경하면서도 어렵지 않게 상대를 제압했다. 별 볼 일 없는 양아치 다섯이 무릎 꿇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벤자민이 말했다.

“사과하세요.”

“까불어서 죄송합니다…….”

일동이 모기만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벤자민은 고개를 저었다.

“피해자에게 사과하세요.”

“죄송합니다…….”

그들이 방향을 바꿔 다시 고개 숙였다. 추행당했던 급사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곧 침착을 되찾은 그녀가 히센과 벤자민에게 몇 번이고 감사를 표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어 물었다.

“혹시…… 부탁이 있는데요.”

“예?”

“이놈들, 저도 때려도 괜찮을까요?”

벤자민은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뭐. 그러십시오.”

청순한 얼굴의 여자가 조심스럽게 양아치들에게 다가갔다. 여자에게 맞아 봐야 얼마나 아프겠냐는 생각으로 그들은 얌전히 자리를 지켰다. 적어도 벤자민이나 히센에게 다시 얻어맞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여자는 무지막지한 발놀림으로 양아치들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이 양아치 새끼들, 쓰레기! 삥 뜯으면서 세금도 안 내는 버러지들!”

그녀가 발을 휘두를 때마다 ‘퍽’도 아니고 ‘뻑’ 소리가 났다. 식당 안 사람들은 타격음이 들려올 때마다 몸을 움찔했다. 자신이 맞아도 아플 것 같았다.

한참 뒤에야 분노가 풀린 급사가 뒤로 물러섰다. 불량배들의 얼굴은 어느새 피떡이 되어 있었다. 염려스러운 마음에 벤자민은 그들에게 보복을 할 시엔 다시 돌아와 가만두지 않겠다는 주의를 남겨야 했다.

* * *

“그렇게 된 거야.”

“재밌는 우연이군.”

이야기를 다 들은 아스티나가 우아하게 찻잔을 들었다.

차를 한 모금 들이켠 그녀가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왜 이 우천 속에 도착한 거지?”

“출발하고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비가 왔어. 아무래도 장마니까.”

그러고 보니 지난 새벽 잠시 비가 멎었다가 아침이 되자 다시 쏟아졌었다. 아탈렌타 대공령까지 오는 길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벤자민과 히센은 그야말로 물에 젖은 생쥐 꼴이었다.

둘의 얼굴을 천천히 살피던 아스티나가 물었다.

“둘 다 좀 씻는 게 낫지 않겠어?”

벤자민의 얼굴에 약간의 당혹감이 떠올랐다. 그 역시 짝사랑 상대에게 추한 꼴을 내보이고 싶진 않았다. 다만 그보단 아스티나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지난 5일간 그를 쉼 없이 달려오게 한 힘의 원천은 아스티나를 향한 걱정이었다.

그런데 막상 대공저에 도착하고 만난 그녀는 지나치게 평화롭고, 또 안정되어 보였다. 하녀들을 능숙하게 부리는 태도는 현숙한 대공비 그 자체였다. 완전히 아탈렌타 대공령에 적응한 모습에 벤자민은 이질감을 느꼈다. 자신의 상상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수도에선 아스티나가 첫날밤을 치르기도 전에 죽었을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의문을 해소해 줄 칸나가 본가로 가 돌아오지 않았기에 온갖 추측만 무성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사망 소식이 전해지지 않자, 궁리하던 대중은 아스티나가 괴물 대공에게서 도망쳐 살아남았을 두 번째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 서사에는 여자 혼자 힘으로 대공령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당연한 전개가 뒤따랐다.

결국은 가신들에게 끌려와, 죽을 날만 기다리며 매일 밤 눈물로 손수건을 적실 가련한 여자. 수도에서 바라보는 아스티나의 이미지는 대체로 그러했다.

아스티나의 괴기한 힘을 아는 검술반 학생들은 막연히 그녀의 생존을 예상했으나 이조차 현실과는 달랐다. 아돌프는 분명 아스티나가 괴물 대공을 죽여 대공령에서 남몰래 그녀에게 수배령을 내렸을 것이라 말했다.

그러나 아스티나의 현 상태는 그 어떤 가설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벤자민은 허탈한 마음에 그만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피곤한 눈가를 문지르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결혼했지.”

“……그건 보면 알아.”

목 아래에서 무언가 울컥 차오르는 느낌이었지만, 벤자민은 가까스로 덤덤하게 대답했다. 아스티나는 벤자민에게서 시선을 돌려 히센을 응시했다.

“술을 마셨다고?”

히센이 볼을 붉혔다. 아직도 취기가 가시지 않은 듯 그가 어눌하게 항변했다.

“아가씨의 이른 결혼이 너무 가슴 아픈 나머지…….”

“이해해라, 아스티나. 네가 그리웠던 모양이야.”

히센이 눈물짓는 모습을 보았던 벤자민이 대신 변명해 주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히센 경은 원래 술을 좋아해, 내가 가보를 뺏었을 땐 슬프다고 술독에 빠졌고 돌려줬을 땐 기쁘다고 술판을 벌였지.”

“가보?”

아스티나는 히센의 허리춤에 달린 검을 턱짓했다. 불량배들을 때려잡던 바로 그 물건이었다.

웃는 얼굴엔 침 못 뱉는다고 하지 않았나. 히센은 변명 대신 웃어 보이고자 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해장도 하지 않은 채 벤자민을 따라 쉼 없이 아탈렌타를 향해 달렸다. 솔직한 심정으론 당장 양동이라도 얻어 와 토하고 싶었다.

“두 분께서 먼저 얘기 나누시죠.”

히센이 슬금슬금 엉덩이를 들었다. 그는 아스티나의 안위를 한 번도 걱정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히센은 부모인 레테 백작 부부보다 더 아스티나를 잘 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레테 백작이 노기를 드러낸 열 살 생일 이후 아스티나는 쭉 자신의 무력을 숨겨 왔으니까. 벤자민 역시 아스티나가 열셋일 때부터 보아 온 오래된 지인이나, 히센이 그녀를 지켜본 기간은 그보다 3년이나 더 길었다.

히센은 당연히도, 보통의 십 대 소녀가 성인 기사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실력이 없는 이였어도 경악할 일인데 심지어 자신은 나름대로 촉망받는 인재였다.

아스티나는 타고난 힘의 부재를 좀 더 빠르게, 그리고 좀 더 날카롭게 파고드는 것으로 메꾸었다. 무예를 이해하지 못한 자가 보일 수 있는 몸놀림이 아니었다. 열심히 배우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때도 있었지만, 히센은 이제 스스로의 한계를 깨닫고 아스티나를 영원한 스승으로 인정한 참이었다. 그리고 그의 영원한 스승은 고작 괴물 대공 따위에 굴할 존재가 아니었다.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아가씨, 전 아가씨를 믿었습니다.”

“걱정은 안 했다는 말 잘 알아들었네, 가서 속풀이라도 좀 하도록.”

“예!”

히센이 씩씩하게 대답하며 응접실을 나섰다. 벤자민은 어이없는 눈으로 그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출발을 재촉할 때 묘하게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라니. 주인 아가씨를 야수에게 시집보낸 슬픔에 취한 게 아니라 그냥 본인이 음주를 좋아했던 거였다.

벤자민은 이 재회가 슬픈, 혹은 진지한 분위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극의 당사자가 저리 덤덤해서야 무슨 위로를 한단 말인가. 벤자민은 마지막 기대로 혹여 그녀가 숨기고 있을지 모를 설움의 흔적을 찾았다. 그리고 더없이 태평한 아스티나의 눈을 마주했다.

“분명 걱정해서 왔을 테지, 고맙다.”

“……나는 이 결혼이 강제라고 생각했어.”

“물론 칸나에게는 강제였지, 하지만 나에겐 괜찮은 장사였어. 덕분에 레테 백작가가 망하지 않았으니까.”

아스티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벽시계를 살폈다. 먼 거리를 찾아온 벤자민이 고맙기는 했으나 묘하게 건성인 태도는 숨기지 못했다. 테리오드를 두고 나온 게 신경 쓰인 탓이었다.

아스티나는 가여운 동물에게 연민을 느꼈다. 계속해서 얼굴을 보고 있으니 제법 정이 들었고, 무엇보다 그녀가 없으면 테리오드는 계속 갇혀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아스티나에게 굴종한 후, 테리오드가 우리 안에서 지내는 시간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산책만 함께했던 것이 이젠 대공저 밖으로 외출할 때가 아니면 항상 붙어 있을 정도였다.

아스티나는 지금도 집무실에 홀로 남겨졌을 테리오드가 걱정되어 도통 집중할 수 없었다. 그녀의 애완동물은 매우 외로움을 탔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지난 발광이 고독 탓이었다고 관대하게 평했다.

“억지로 한 결혼이라면, 내가 너를 거기서 구해 주겠어. 아스티나.”

아스티나의 염려스러운 표정을 본 벤자민이 몸을 낮추며 말했다. 뜬금없는 제안에 아스티나가 시계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일개 준남작이 무슨 힘으로?”

순수하게 궁금해서 한 질문이었다. 아탈렌타 대공에게서 구해 준다고 약조하기엔 그의 지위가 대단히 볼품없었다. 벤자민은 레안드로스 남작의 먼 친척으로, 기사 시험을 통과하고 얻은 준남작 작위 외엔 가진 게 없었다.

벤자민이 그나마 겉으로라도 귀족의 껍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제국법 때문이었다. 카라벨라는 고급 인력인 기사를 준귀족으로 취급해 공인 시험을 통과하면 본인에 한해서 작위를 주었으니까.

“네가 허락만 한다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

벤자민이 진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스티나의 투명한 눈동자에 언뜻 이채가 비쳤다. 아스티나는 그 대답을 들음과 동시에 생각했다.

‘나를 좋아하나?’

눈치 없이 굴기엔 살아온 세월이 길었다. 그러나 확실하지 않은 일로 오래된 친우의 마음을 모욕 줄 생각도 없었다. 아스티나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친구로서?”

벤자민은 당황하여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여기서 고백해 봤자 결코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으리란 사실을.

망설이던 벤자민이 겨우 입을 열어 답했다.

“물론……, 친구로서.”

“네 신의에 감사를 표한다, 벤자민.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아스티나는 가차 없이 친구의 참견을 거절했다. 벤자민의 얼굴에 약간의 후회가 스쳤다. 연애 감정을 품은 것이었으면 몰라, 고작 친구의 위치로 결혼 문제에 왈가왈부할 수는 없었다. 벤자민은 자신이 내보일 수 있는 가장 공적인 변명을 생각해 내야 했다.

“물론 네가 강하다는 건 알아. 그렇지만 너라고 모든 경우를 다 예상할 수는 없어. 사람이 금수가 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가 너를 해치지 않는다고 어떻게 확신하지?”

“음.”

아스티나는 잠시 고민했다. 테리오드를 보여 준다면 벤자민의 걱정을 완전히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문 밖의 사람에게 테리오드를 함부로 내보이기는 꺼려졌다. 어찌 됐든 그녀는 지금 아탈렌타의 대공비였고, 이 결혼을 유지하는 동안은 형식적이나마 가문의 비밀을 지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아스티나의 망설임이 무색하게도 응접실 바깥에서 낑낑거리는 기척이 들려왔다. 괴물 대공이 내는 소리라기엔 지나치게 위엄 없었으나, 사실 최근의 테리오드는 주인에게 목을 매는 애완동물에 더 가까웠다.

아스티나는 말없이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경첩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거구의 짐승이 아스티나에게 달려들었다. 벤자민은 깜짝 놀라 그만 검을 꺼낼 뻔했다. 그러나 만약 반격이 필요했다면 아스티나가 그보다 빨랐을 것이다. 아스티나는 집채만 한 늑대를 자연스럽게 쓰다듬었다.

“테오.”

아스티나가 다정하게 테리오드를 불렀다. 벤자민은 꼬리를 흔드는 거대한 털 짐승을 보고 기겁했다. 장식물이어도 놀랐을 크기인데, 그건 분명 움직이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턱을 쓰다듬었다. 혀를 내민 모습이 영락없는 개였다.

“인사해.”

“아스티나, 그게…… 설마.”

벤자민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아스티나가 담담하게 마저 설명했다.

“테리오드 대공이야. 나는 테오라고 부르지.”

“컹!”

테리오드가 인사하듯 짖었다. 아스티나가 “귀엽지?”라며 동의를 구해 왔지만, 벤자민은 평범한 사람이 그 날카로운 송곳니를 봤을 때 느낄 당연한 감정을 떠올렸다.

공포였다.

“벤자민, 잠시 휴학하고 대공가에서 일해 보지 않겠어?”

“뭐?”

벤자민이 경악을 다 추스르기도 전, 아스티나가 이해할 수 없는 제안을 던졌다. 벤자민은 식은땀이 난 손으로 겨우 소파 등받이를 잡고 일어선 참이었다. 주춤이던 자세를 바로잡은 그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제야 머리가 돌아가는 듯했다.

“저…… 늑대가, 대공이라고?”

“그래, 그보다 내 제안에 대한 대답은?”

“제안이라면―”

“스카우트지. 너는 좋은 인재니까.”

대공가에서 일해 보라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아스티나는 다른 사람보다 많은 것을 받아들이고 빠르게 판단하는 나머지 종종 범인의 평균치를 잊었다. 그녀와 대화하는 사람들은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종종 버벅거려야 했다.

“대공의 부재로 인해 영지 내 사정이 좋지 못해. 가신들이 부정부패하여 대부분을 치워 낸 참이다. 새바람이 필요한 때야. 너는 영민하고 강건하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들어오면 기쁘겠어.”

아스티나가 현재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벤자민은 그녀가 아탈렌타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아스티나는 겉으로만 대공저에 적응한 게 아니라 전반적인 업무까지 보고 있었다. 영지민들의 삶에 관여하는 직책을 가진 자는 그 땅을 친숙하게 대할 수밖에 없다.

벤자민은 얼떨떨한 낯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건 아스티나의 결혼 생활이지 영지의 미래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감히 그 상대가 되진 못하더라도, 제 짝사랑이 만족할 남자를 만나 행복하길 바랐다.

그러려면 적어도, 그녀의 부군은 금수가 아닌 사람이어야 했다.

‘이러려고 참아 온 마음이 아니다.’

벤자민은 이를 악물었다.

“아스티나, 너는…….”

벤자민은 울컥 치솟는 반발감을 느꼈다. 방금 아스티나는 저에게 사랑하는 여자의 남편을 위해 일해 달라는 말을 건넨 셈이었다. 쓸모를 다하지 못하고 버려진 걱정보다 그것이 벤자민을 더 괴롭게 했다.

벤자민이 반항 어린 어조로 되물었다.

“거절한다면?”

잠시 골똘히 고민하던 아스티나가 뜻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영문 모를 불길함에 벤자민이 몸을 긴장시킬 때였다. 아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테오, 물어.”

그 명령에 벤자민의 눈이 당황으로 크게 뜨였다. 거대한 늑대 앞에서 초연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테리오드 쪽을 살폈다. 다행히 늑대는 미동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친우의 격한 반응에 아스티나가 머쓱하게 해명했다.

“그런 건 가르치지 않았어.”

미안해하는 말투치고 입꼬리는 여전히 장난스럽게 올라가 있었다. 정말 위협하려고 한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직된 분위기를 풀고자 친우를 놀린 것뿐이었다. 훈육은 대공의 사회화에 큰 도움을 주어, 그는 더 이상 사람을 물지 않았다.

아스티나는 벤자민의 불쾌함이 무리한 요구 탓이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기점에서 졸업을 유예하는 건 당연히 부담스러운 일이었으니까.

물론, 이해와 서운한 마음은 별개였다.

“거절에 대한 심술쯤은 이해해 주겠지?”

“장난을 쳐도 꼭……, 악!”

벤자민이 핀잔하다 말고 기겁하며 검집을 들었다. 갑자기 뒤편에서 뛰어오른 늑대가 제게 이빨을 보이며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아스티나 역시 당황했다. 이전에는 시늉을 보여야지만 겨우 알아챘는데, 근래의 테리오드는 꽤나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들었다.

아스티나는 황급히 팔을 뻗어 테리오드를 뒤로 물렸다. 사이에 아스티나가 끼어들자 테리오드는 급히 이를 감추었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훈계했다.

“사람한테 이 드러내면 된다고 했니, 안 했니.”

본인이 시켰으면서, 벤자민의 얼굴에 어이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테리오드 역시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다만 테리오드 갱생 계획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던 아스티나는 이 상황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까딱하면 그동안의 교육이 전부 무로 돌아갈 판이었다. 아스티나는 진지하게 테리오드를 꾸짖었다.

“언제 사람 되려고 그래?”

벤자민은 어디서부터 그 말에 트집을 잡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테리오드 역시 억울한 표정이었다. 짐승의 표정이 읽힌다니 신묘한 일이었다.

벤자민이 아스티나를 말리려 나설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응접실 문이 다시금 열렸다. 아까보다 훨씬 안색이 나아진 히센이 등장했다.

“아가씨, 친우분과 얘기는 다 나누셨…….”

두 눈을 느리게 끔뻑이던 히센이 테리오드를 발견하고는 멈춰 섰다. 그가 느리게, 그러나 강한 힘으로 제 뺨을 쳤다. 분명 통증이 느껴졌을 테지만 그 행동은 한 번으로 멎지 않았다.

그리 오래 살진 않았어도 남들보단 많은 걸 보고 들었다고 생각했던 히센조차 그런 광경은 난생처음 보았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히센은 그대로 몸을 굳혔다.

보다 못한 아스티나가 히센을 불렀다.

“인사하게 히센, 테리오드 대공이다.”

결국 히센은 주저앉았다. 벤자민은 자신이 저런 모습까진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소파가 없었다면 그 역시 히센처럼 풀린 다리를 추스르지 못했을 것이다. 괴물 대공은 그만큼 흉악한 모습이었다. 저 괴물을 애완동물 취급하는 아스티나를 본다면, 누구나 그녀의 정신 병력을 의심하지 감히 저 괴물을 길들였다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맙소사…….”

히센이 눈을 질끈 감았다. 괴물 대공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정말 ‘짐승’이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가 무례인 줄도 모르고 되물었다.

“사람은 맞습니까……?”

“지금은 아니지.”

아스티나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테리오드를 아끼긴 했지만 현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아스티나의 꾸짖음에 기가 죽은 괴물 대공이 몸을 낮추었다.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은 아스티나가 벤자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생각해 봐. 일 년만 졸업을 유예하면 되니까. 대공가에서 일한 경험은 벤자민 네 향후 장래에도 도움이 될 거다.”

“일 년이라니, 하지만 네가…….”

벤자민과 히센은 어쨌거나 평범한 사상을 가진 이들이었다. 이 상황을 쉽게 납득할 수는 없었다. 두 남자의 궁금증이 엉켜들었다. 히센이 벤자민의 앞으로 나서며 재빠르게 물었다.

“아가씨, 잠시만요. 저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지금…… 저 늑대가 테리오드 대공이라는 말씀입니까?”

“정확한 이해야, 같은 질문은 두 번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맙소사…… 신이시여. 아가씨, 본가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건 말도 안 돼요, 어떻게 아탈렌타가는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런…….”

아스티나는 두 사람의 만류에 슬슬 짜증이 났다.

그녀 역시 인간이 아닌 자와 결혼하는 게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외엔 아버지의 부채를 감당할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의 일 년을 헌납하는 정도로 가족의 평생을 살릴 수 있으면 나름대로 수지맞는 장사였다.

아스티나는 결국 말을 돌리기로 했다.

“히센, 혹시 칸나에게 부탁받은 건 없나?”

“네? 아가씨께요?”

히센이 고개를 갸웃였다.

아스티나는 히센의 방문이 칸나에게 했던 부탁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고작 초콜릿을 사다 달라는 명을 이수하기에 히센은 지나치게 고급 인력이었지만, 가문의 사활을 짊어진 딸에게 잠시 내어 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아스티나가 의문 어린 목소리를 내었다.

“……전해 줄 게 있어서 온 게 아니었어?”

“저는 백작님께서 보내셔서 온 겁니다. 아가씨의 사람으로요.”

“나의 사람?”

아스티나가 미간을 좁혔다. 그녀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투로 되물었다.

“아버지가 백작저 내에서 가장 실력 있는 기사인 너를 보내셨다고?”

“정정해 주세요. 가장 실력 있는 기사는 아가씨죠.”

“난 기사가 아니야.”

아스티나가 딱 잘라 말했다. 그녀가 쓰는 검술은 기사들이 쓰는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히센에게 사사한 것도 정규 교육과는 거리가 먼 잔기술들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스티나는 히센에게 사람을 죽이는 법을 가르쳤다.

마티나가 어머니인 오웬에게 전수받은 레타 집시의 비기는 사람의 피를 보기 위해 존재했다. 모든 검술이라는 게 다 그럴 테지만, 결투를 위해 형식화되고 정제된 교본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 레타 집시들은 사람의 몸을 가장 효과적으로 고통스럽게 하는 방법을 알았다. 그들 일족의 기원이 곧 복수였으므로.

레타의 딸들은 설욕을 위해 살아남았다. 마티나는 바로 그 마지막 검이었다. 일족이 몰살당하고 남은 유일한 딸은 기꺼이 블란체의 핏줄을 영면으로 인도했다. 출생부터 테오도르는 결국 제 손에 살해당할 운명이었던 걸까. 아스티나가 쓰게 웃었다.

“물론, 공식적으로 아가씨는 레이디지요.”

“……그 호칭도 그다지 마음에 들진 않는군.”

아스티나가 눈을 돌리며 말했다. 히센은 그제야 여유를 되찾고 한숨 쉬었다.

“저도 아가씨가 제 호위가 필요한 분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만, 형식의 문제입니다. 아시다시피 백작저가 경황이 없어 여러 구색을 못 맞추지 않았습니까. 현재 시녀도 두지 않고 계시고요.”

“필요 없어.”

“그게 그렇게 말할 게 아니라…….”

히센이 장황한 설명을 내놓으려 할 때였다. 아스티나는 단칼에 그의 말을 잘랐다. 그녀가 단호한 어조로 설명했다.

“아니, 말 그대로 필요 없다. 일 년 후엔 이혼할 생각이니까. 편지에 충분히 의사를 적어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부모님이 생각보다 보수적이었나 보군. 마침 둘이 모인 김에 한꺼번에 설명하지.”

“예?”

“아탈렌타의 후계를 낳고 일 년 뒤 돌아간다. 그게 내 계획이야.”

말을 마친 후, 아스티나는 이제는 반려보다는 반려견에 가깝게 된 귀여운 늑대를 내려다보았다. 하도 애완동물로 취급하다 보니 그와 그런 걸 해야 한다는 게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 전에, 아무리 내용물은 사람이라지만 임신이 가능하긴 한 걸까? 아스티나의 눈에 의심이 서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도 회의적인 마음이었다.

그런 아스티나의 속내를 읽기라도 했을까. 벤자민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말이 돼?”

어이없는 상황에 벤자민의 가슴에 차올랐던 울화가 흔적도 없이 가라앉았다. 아스티나는 그를 항상 당황하게 했다. 놀랍게 했고, 행복하게 했으며, 때론 너무도 아프게 했다.

가장 억울한 점은 그 무엇도 아스티나를 완전히 밉게 만들지는 못했다는 사실이다.

“돌아온다고?”

벤자민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감정과 별개로 아스티나는 모두에게 신뢰를 주는 인물이었다. 벤자민은 그녀가 제 사람에게 매정하게 대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일단은.”

아스티나가 그를 안심시키듯 옅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배려 섞인 음성에 벤자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마 마음을 고백해도 그녀는 다정하게 거절하겠지. 그럼에도 그것은 단호한 거부일 뿐이라 결국 자신을 아프게 할 것이다.

“나는 너를 믿는다, 아스티나. 언제나 그래 왔지.”

벤자민은 정제된 진심을 꺼냈다. 드물게 진지한 모습에 아스티나는 몸을 그에게로 틀었다. 그녀가 기대와 함께 물었다.

“나를 도와줄 건가?”

“물론, 네가 돌아오기로 마음먹었다면 나는 언제든 너를 돕겠어.”

“그럼 벤자민 네게 줄 직책을 생각해야겠군. 네가 일하고 싶은 분야가 있다면…….”

“아니, 난 여기 남지 못해.”

벤자민의 거절에 아스티나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한참 도울 의사를 밝혀 놓고 막상 돌려주는 것은 거절이라니.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도와준다는 건 빈말이었나?”

“우리는 좀 더 나은 관계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이미 우리는 충분히 좋은 친구다, 벤자민.”

“너는 신의를 말했지. 나는 언제나 네게 더 큰 것을 주고 싶었다.”

아스티나는 침묵했다. 벤자민의 말이 그녀의 추억을 두드린 탓이었다.

마티나는 그다지 인기 있는 주군은 아니었지만 대륙의 모든 사람이 그녀의 이름을 알았다. 적이 많은 대신 숭배하는 자 역시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중 마티나를 가장 충직하게 보필했던 사람은 역사서에도 남았듯 엘시어였다.

엘시어가 마티나에게 바친 사랑은 성애와는 의미가 달랐다. 블란체의 명문가 소생이던 엘시어는 마티나의 무예를 경애하여 마침내 그 본인 앞에 엎드렸다. 그녀에게 엘시어는 수하이자, 오른팔이자 곧 친남매와 같았다. 살아 있을 적 그는 마티나의 모든 행적을 따랐으며 심지어 죽음까지도 곁을 지켰다. 마티나는 그에게 제위를 넘겨주고 물러선 일을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

마티나의 믿음직한 친우 엘시어는……

테오도르처럼, 그녀를 배신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사랑보단 생산적인 관계였지.’

아스티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벤자민과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나 역시 항상 너를 믿는다, 벤자민.”

“그렇다면 언제든지 돌아와, 아스티나.”

“그렇게 하겠어.”

아스티나의 대답을 들은 벤자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공령에 도착해 이루려 했던 목적을 반쯤은 해결한 셈이었다. 말뿐인 계획이긴 해도 어쨌든 아스티나는 귀환 의사를 밝혔다. 벤자민은 아스티나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그녀를 도울 생각이었다.

“나는 수도로 바로 돌아가 보겠어.”

“피곤하지 않겠어?”

“네 무모한 계획만 할까.”

벤자민이 쓰게 웃었다. 아스티나는 그가 수도로 돌아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 가장 처음으로 떠오른 우선 과제는 졸업이었다. 한 사람의 제대로 된 몫을 하려면 학교를 떠나는 게 먼저였으니까.

아스티나는 벤자민의 결정을 말리지 않았다. 덤덤히 거절을 받아들인 아스티나가 대신 히센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굴릴 수 있는 인력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히센, 당분간은 검을 놓아야겠다.”

“예?”

“일손이 부족하고 믿을 사람은 없지. 자네는 글을 아니까 도움이 될 거야.”

“지금 저보고…… 서류 정리를 하라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히센이 몹시 당황하여 되물었다. 귀족이니만큼 당연히 글을 알긴 했으나 한평생 검을 놓아 본 적이 없었다. 현명한 아가씨가 제게 그런 말도 안 되는 명을 내릴 리 없지 않은가.

그러나 아스티나는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이 대꾸했다.

“히센 오스카 경, 그대는 이제부터 아탈렌타 대공령 겨울 대비 수도 공사의 책임자다.”

급속 승진에 히센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를 몰랐다.

* * *

“아가씨, 저는 아직도 제 쓸모를 잘 모르겠습니다.”

“자네는 여길 근엄하게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

“더 근엄해지기 위해서는 역시 아가씨의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생각지는 않으십니까?”

“맡긴 일을 잘 해치우면 혼자 했던 훈련의 성과를 봐 주지.”

사심 어린 물음마저 단칼에 잘려 나갔다. 결국 히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주인은 존경할 만한 인물이었으나 자상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타인에게 자신이 벌인 일을 이해시키는 데 있어 몹시 불친절했다.

히센이 앓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그 할 일이 대체 뭔데 그러십니까.”

히센은 아스티나와 함께 마을에 나와 있었다. 낯선 얼굴의 등장에 인부들이 모두 그를 흘끔였다. 히센은 그들의 관심을 피하려 노력했지만 따끔한 시선은 도통 멎을 줄 몰랐다.

아르델 준남작은 동료를 팔아넘긴 대가로 혀를 지켰으되 실직은 면하지 못했다. 관리자가 사라진 배관 공사는 자연스럽게 중단되었지만, 꼭 필요한 일이니만큼 이대로 흐지부지 겨울을 지날 수는 없었다. 지난해엔 준비가 미비하여 오수가 얼어 넘치는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민들까지 대공의 빈자리를 느끼게 할 수는 없었다.

관련 책임자들이 초조함에 대공저의 문을 두드릴 무렵, 아르델 준남작을 대신할 새로운 인사가 등장했다. 히센 오스카 경이었다.

삽시간에 그에 대한 소문이 대공령 전체에 번졌다. 대공비의 고향에서 온 기사라는 말에 가신들은 불편한 속내를 내보이며 코를 찡긋였으나, 입 밖으론 반대의 말을 내지 못했다. 더 이상 무언가를 잃고 싶진 않았던 탓이었다. 그들은 이전에 빼앗긴 권위를 추스르는 일만으로도 바빴다.

밀린 임금을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인부들은 대체로 그 인사 결정을 환영했으나, 막상 현장에 도착한 히센을 보고는 각자 불안함에 수군거렸다.

아르델 준남작은 문인답게 마르고 유약한 인상이었다. 속내야 돈에 대한 열망으로 지저분했어도 겉으로는 그럭저럭 온순해 보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히센 오스카 경은 검을 잡는 기사답게 대단히 우락부락했다. 히센은 스스로를 밀크티같이 부드럽고 따듯한 남자로 평했으나 첫인상에서 그의 진가를 알아챌 사람은 없었다.

히센은 차라리 아탈렌타의 기사들과 함께 섞여 들어 훈련을 하고 싶었다. 그는 정신력보다는 몸을 고생시키는 편이 훨씬 더 익숙했다.

히센이 불편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인부들을 겁주는 것 외에 다른 뜻이 있으십니까?”

“물론, 나는 사람을 언제나 적재적소에 쓴다네.”

아스티나가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그녀가 근엄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인이 품었던 부를 드러내는 그럭저럭 훌륭한 저택이었다.

수도관은 마을의 주축이 되는 건물부터 이어져 있었다. 딱히 계급적인 우선권이 아니더라도 부유한 이들의 거주 구역에 먼저 접근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아스티나는 오래된 수도관과 함께 앓던 이를 하나 뽑아낼 생각이었다.

아스티나의 눈이 정확히 대문을 향했다. 히센은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을 조심스럽게 살폈으나, 그저 꼿꼿이 선 철문만 보일 뿐이었다.

공사를 재개하는 날이라고는 하나 대공비가 이런 곳까지 나설 필요는 없었다. 굳이 감사를 선언하며 수도관에 열성적인 관심을 보인 것치고 막상 공사를 살피는 눈엔 성의가 없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히센은 그녀가 진짜 치워 내고 싶었던 오수가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정확히 정오가 되었을 때, 한 노년의 남자가 저택의 정문을 사납게 흔들기 시작했다.

“문을 열어라! 이곳은 내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대부터 버논가의 소유였다! 이런 막돼먹은 법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왔군.’

아스티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악을 쓰는 노인을 응시했다. 올리버에게 들었던 대로 전대 버논 남작은 매일같이 저택에 나와 농성하고 있었다. 과연 가신들은 오랫동안 주인을 잃었던 모양이었다. 길들여진 개가 이렇게 나설 데를 분간 못하고 짖을 리 없으니까.

아스티나가 고개를 까딱였다.

“히센, 끌고 오게.”

“예?”

“대공비가 직접 지시한 공사를 방해하고 있지 않은가, 공무 집행 방해죄로 연행하도록.”

히센은 주인의 명령에 이유를 따져 물을 정도로 충성심이 모자란 이가 아니었다. 표정을 굳힌 그가 병사들을 데리고 대문으로 향했다. 험상궂은 사내들의 등장에 노인은 짐짓 겁에 질렸으나, 아스티나의 앞에 끌려오고 나서는 곧 용기를 되찾았다.

“대공비 전하! 억울한 늙은이의 말을 들어 주십시오!”

“말해 보라.”

올리버와 대등할 정도로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아스티나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하대했다. 부모는 언제나 자식을 이기지 못하는 법이었다. 마티나는 어미 오웬의 가르침을 따르되 언제나 일정 부분은 반항해 왔다. 그녀는 노인 공경에 저만의 원칙을 하나 더했다.

‘인간 된 도리를 못하는 자를 인간으로 취급할 필요는 없지.’

노인이 그 속내까지 알 리는 없었다. 대공비의 허락에 노인은 이때다 싶어 바닥에 엎드렸다.

“저의 아들이 부족하여 대공가에 누를 끼쳤음은 인정합니다. 죽여 마땅한 잘못이었습니다. 분명 그러합니다! 다만, 그 남은 식솔들은 어찌한단 말입니까.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은 가족들이 매일 밤 목 놓아 웁니다. 늙은 몸 하나 자식의 죄로 죽는 건 두렵지 않으나 줄줄이 딸린 아이들이 여럿이옵니다! 대공비 전하, 부디 자비를 베푸소서!”

노인이 몇 번이고 주름진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그 안쓰러운 광경에 모두가 대공비의 눈치를 보았다. 주인을 시해하려고 한 혐의만 보면 재산을 몰수함이 옳으나 가족들에겐 죄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노인의 말대로, 이 처분은 어디까지나 대공비의 자비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를 지켜보는 아스티나의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사실대로 말해 보시오.”

아스티나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 싸늘한 태도에 노인이 당황하여 고개를 들었다.

“예……?”

“듣는 귀 없는 밤, 아들과 함께 이렇게 말하진 않았소? 어리석은 여자, 감성에 눈이 멀어 뭐가 중한지도 모르는 치녀, 이래서 계집이란…….”

“…….”

“그대 아들의 마지막 발악은 대충 그러했는데.”

아스티나는 천천히 노인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낯이 점점 벌겋게 달아올랐다. 생경한 모욕에 몸이 떨려 왔다. 그는 지난 평생을 아탈렌타가의 충직한 가신으로서 살아온 남자였다.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더니, 주인 모르게 혼인한 여자가 감히 그 권위를 쓰고 제 아들을 벌주는가.

버논 남작이 마지막 계략을 들켜 사형당한 건 그들 일가에게 있어 대단한 비극이었다. 노인은 슬픔으로 눈물지음과 동시에 아들의 멍청함을 탓했다. 고작 주인의 씨를 잇기 위해 들인 여자에게 장손이 죽어 나가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노인에게 아스티나는 그래 봤자 여자였다.

여자, 감성적인 여자, 가슴 아픈 이야기에 눈물지을 어리석은 여자여.

아들의 죽음과 별개로 버논 일가는 살아날 길을 찾아야 했다. 그는 저택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원수에게 무릎 꿇을 자신이 있었다. 유약한 여주인은 가엾은 노인을 두고 보지 못하리라.

그러나 아스티나가 돌려준 건 비정한 일갈이었다.

“그대는 내가 천치로 보이나?”

“대, 대공비 전하…… 그게 무슨 망측한…….”

“지하 감옥에 있던 버논 남작이 어떻게 독을 얻었을까?”

일시에 노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무심코 주먹을 틀어쥐어, 차디찬 모래가 손바닥 안으로 흘러들었다.

“수상한 대금이 부친인 전대 남작의 이름으로 거래되었고, 이틀 뒤 아내는 남편을 보러 면회를 신청했더군. 그래, 그대와 그대의 며느리 말일세.”

“저, 전하……. 그것은 절대 사실이―”

노인이 겨우 뻣뻣한 혀를 움직였다. 아스티나는 그의 변명을 듣지도 않았다. 대공비는 저를 죽이려 한 일가에게 섬뜩한 저주를 내렸다.

“착각하지 마라, 어리석은 남자야. 내가 그대들을 살린 건 밑바닥에서 발버둥 치다 죽기를 바라서이다.”

아스티나가 마지막으로 내릴 수 있는 벌이자 자비는 그것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을 위해 어미라도 내어 주는 일. 밑천 하나 없는 여자는 홀몸으로 자식들을 돌보다가 병들어 죽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녀가 쓸모없는 시아버지를 버리기로 결정한다면 그보다 재밌는 일이 또 없었다.

“다시 한 번만 더 소란을 피우면 그 발악마저도 못하게 될 것이다.”

아스티나가 냉정히 통고했다. 자존심을 완전히 짓뭉개는 발언에 노인은 이성을 잃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그가 벌떡 일어나 대공비에게로 달려들었다.

깜짝 놀란 히센이 아스티나의 앞을 막아섰다. 노인은 순식간에 포박되었다. 그가 험악한 눈으로 아스티나를 노려보며 외쳤다.

“이 천하의 악녀 같으니……! 네년이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네 죽음이야말로 그보다 비참할 것이다. 씨받이 주제에 어딜 감히 주인 행세를 하느냐! 어디 욕심껏 아탈렌타의 대를 이어 보아라! 대공가에 내린 저주가 네 아들까지 잡아먹을 것이야!”

‘저주?’

아스티나는 노인이 말한 단어를 속으로 곱씹었다. 저주라, 하긴 단순한 유전병이라고 치기엔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특이한 내력이었다. 무언가 신비한 힘이 섞여 들지 않는 이상 사람이 금수가 될 일은 없었다.

아스티나는 노인의 앞으로 가 무릎을 굽혔다. 그녀가 속삭이듯 물었다.

“그 저주에 대해 잘 아는가?”

흥분에 눈이 먼 노인은 대뜸 아스티나에게 침을 뱉었다. 뺨으로 떨어진 진득한 액체에 아스티나의 눈이 차게 식었다. 노인이 승리감에 취해 말했다.

“네 자식이 절대 구원받지 못할 것만은 안다.”

“제 명을 알아서 단축하는군.”

아스티나가 몸을 일으켰다. 히센이 내민 손수건을 받아 들며 그녀가 짧게 명령했다.

“불충함이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이다. 두 번이나 대공비를 시해하려 한 죄로 저자를 감옥에 가두어라.”

“대공비 전하.”

히센이 주인의 낯선 명칭을 불렀다. 그의 얼굴엔 당혹스러움이 떠올라 있었다.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심이 좋겠습니다.”

“그래야지.”

아스티나가 선선히 대답했다. 애초에 대공저 밖으로 나선 목적은 전부 이루었다. 아스티나는 침실에서 저만 기다리고 있을 테리오드를 떠올렸다. 길들였다고 생각했는데, 그녀 역시 함께 길들여진지도 모를 일이었다. 테리오드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그나마 나아졌다. 아스티나는 끌려가는 노인을 뒤로하고 주인 잃은 저택을 나섰다.

대공저로 돌아오고 나서도 히센은 아스티나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아스티나를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나 어디까지나 물리적인 부분에 한해서였다. 어쨌거나 히센에게 아스티나는 집과 아카데미라는 온실 속에서 큰 굴곡 없이 자란 레이디였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히센이 바뀐 호칭도 잊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스티나는 잠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이 말인가?”

“험한 일을 당하지 않으셨습니까.”

어느 귀부인이 뺨에 침을 다 맞아 본단 말인가. 히센은 기사도를 지켜 한 번도 노인을 때린 적이 없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대신 나서 그를 벌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게 별일인가.”

아스티나가 심드렁한 음성으로 답했다. 그녀의 기분이 저조한 이유는 노인이 행한 모욕 때문이 아니었다. 당연히 불쾌하기는 했으나 마땅한 벌을 내리면 되는 일이었다. 고작 이런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기에 그녀는 너무도 험난한 인생을 살아왔다.

“별일이 아니라뇨, 누가 그런 일을 당한단 말입니까.”

“자네는 심성이 너무 물러.”

히센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저는 아가씨를 잘 모르겠습니다.”

“잘 알아야만 하는 사이도 아니잖나.”

아스티나의 대답에 히센이 충격받은 얼굴로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귀여운 반응에 아스티나가 웃으며 말을 돌렸다.

“농이라네.”

히센에게 화풀이를 한 건 사실이었다. 노인의 무례는 신경 쓸 바가 아니었으나 그가 언급한 저주가 신경을 건드렸다.

아스티나의 심술궂은 태도에 히센이 확신을 가지고 결연히 말했다.

“역시 마음의 상처가 심하셨군요.”

아스티나는 결국 짜증을 내고 나서야 그의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스티나는 홀로 남아 침실의 문을 닫았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그녀의 늑대가 반갑게 몸을 치대었다. 싸울 때는 두 다리로 섰던 걸로 기억하는데 최근의 테리오드는 언제나 네 발로 걸었다. 확실히 그게 더 동물에 가까운 모습이기는 했다. 본능적으로 귀엽게 보일 방법을 아는 걸까.

아스티나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머리칼을 쓸며 읊조렸다.

“저주라고?”

의사들은 당연히 이 유전병을 해결할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 현상의 본질이 저주였다면, 그걸 풀 방법도 존재하는 게 아닐까.

‘그 방법을 몰라 지금껏 이어진 병력이겠지만.’

아스티나가 쓰게 웃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저를 따르는 늑대를 아꼈으나, 그가 사람이 되어 행복하다면 그렇게 해 주고 싶었다. 위로하듯 이마를 치대는 테리오드를 보며 아스티나가 문득 중얼거렸다.

“점점 사람 같아지는군.”

함께 지내다 보면 동물들도 사람의 말을 알게 된다. 테리오드는 그 생소한 언어가 원래 본인의 것이었다는 걸 알까.

“네가 영리해서 다행이다.”

괴물 대공이 아스티나에게 머리를 내밀었다. 마치 칭찬해 달라는 듯한 행동이었다. 아스티나의 눈이 의아한 기색을 띠었다.

“쓰다듬어 달라는 거니?”

아스티나가 얼떨떨한 얼굴로 쳐다보기만 할 뿐 손을 내밀지 않자, 테리오드는 직접 그녀의 품에 안겨 들었다.

괴물 대공은 온순해진 후에도 종종 그녀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 행동의 근원은 그녀의 향기를 맡고 싶은 것이지, 살갗 밑의 피를 보고 싶은 건 아닌 듯했다. 장막처럼 희뿌옇던 의식이 아스티나와 있을 때면 조금은 맑아졌다. 사람을 물어선 안 된다는 사실 정도는 학습할 수 있을 정도로.

처음엔 그녀를 죽여 버리고 싶었을 정도로 증오했으나 점차 정신이 들고 그녀가 다정해질수록 테리오드의 감정도 바뀌었다. 무서운 여자에서 이상한 여자, 이상한 여자에서 이상하고도 묘한 여자. 묘한 여자에서 다시 상냥한 손길이 떠오르기까지는, 그다지 빠르진 않았어도 속절없는 흐름이었다.

“요즘은 네가 아주 어여쁘다. 신하들은 주인만 못하구나.”

애교가 기특하여 아스티나는 그에게 짧게 입 맞추어 주었다. 개나 고양이에게 하듯 장난스런 키스였다. 기분이 좋아진 테리오드가 그녀의 얼굴을 핥으려는 듯 맞서 혀를 내밀었다. 신랑의 애정 공세에 부인은 황급히 도망쳤다.

그날 아스티나와 테리오드는 평소보다 이르게 잠자리에 들었다. 전대 버논 남작의 등장을 예상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그게 그녀를 피곤하게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저주와 아탈렌타, 야수와 사람…….’

아스티나는 아탈렌타의 저주를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테리오드는 이미 수마에 빠져 곤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잘 때도 테리오드를 우리에 두는 대신 제 옆자리를 내주었다.

‘내일은 인부를 들여 저 우리를 치울까…….’

아스티나가 멀어지는 의식 끝에서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그녀는 잠귀가 밝았다. 테리오드를 가두지 않고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도 그가 몰래 빠져나갈 때 알아차릴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녘, 아스티나는 제 옆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인기척이었다, 짐승의 것이 아닌.

아스티나는 번쩍 눈을 떴다. 처음으로 떠오른 것은 제가 밟아 놓은 가신들이 자객을 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저택의 경비는 강화되었고 그들의 동태는 항상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수상쩍은 움직임이 있었다면 계획 단계에서 알아차렸을 것이다.

무엇보다 침입자는 너무도 온건하게, 그저 아스티나의 옆자리에 누워 있었다. 등을 돌리고 있었으나 달빛에 반짝이는 머리칼의 색이 은빛인 것만은 확실했다. 결정적으로 암살자였다면, 굳이 괴물 대공의 목줄을 빼내 제 목에 걸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로서도 드물게, 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더듬거렸다.

“내……, 내…….”

아스티나의 애완동물이……

사람이 됐다.

* * *

원수의 피라고 해서 특별히 악취가 나거나 향기로운 건 아니다.

적어도 블란체 궁 안에서 풍기는 망자들의 냄새는 어디든 공평했다. 장엄하게 늘어졌던 대리석 기둥 위로 핏자국이 가득했고 그 아래엔 심장을 꿰뚫린 병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테오도르는 연회장 문을 잠그기 전 발 빠르게 도망쳤던 귀족들을 끌고 와 마티나에게 내주었다. 그녀는 무감한 얼굴로 그들 모두의 목을 베었다.

시체들을 모아 한꺼번에 화장해야 했으나 반란을 저지른 당일부터 부지런하게 해치울 일은 아니었다. 테오도르는 충격받은 아랫것들을 추스르는 대신 일거리를 주지 않고 방치했다. 기실 이는 전시에 가까웠다. 사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성내의 사람들은 새 왕에 대한 경외를 키울 것이다.

왕 왈도의 목이 심장과 영원히 이별한 밤, 마티나는 그의 침소로 돌아가 잠을 잤다.

왕위를 찬탈한 테오도르가 알았다면 무엄함에 경을 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마티나에겐 원수의 존엄을 짓밟을 충분한 권리가 있었다.

침실로 들어선 그녀는 곧바로 침대 머리맡에 놓인 왈도의 초상을 짓찢었다. 왕의 물건은 대체로 형태를 유지하지 못했으나 단 하나, 반짝이는 왕관만은 그녀의 머리 위에 놓였다. 도망치던 왈도가 꼴사납게 넘어지며 연회장에 떨군 물건이었다.

마티나는 왕의 권위와 함께 침대에 누웠다. 그러고는 잃었던 모든 것들을 생각했다.

‘오웬, 이 복수에 만족해?’

그녀는 죽은 어미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당연히도 망자는 답이 없었다. 마티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웬이 진정 설욕을 원했을지 알 수 없었다.

잔독한 왕 왈도는 마티나에게 매일 밤 잠자리를 요구했다. 반란이 성공하기 전 마티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의 침소에서 머물렀다. 왈도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이 된 이후 왈도는 세자 시절의 총명함을 잃고 본능에 눈멀었다. 마티나를 취해도 포악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 정도가 훨씬 덜하여 신하들마저 동침을 반겼다.

원수에게 몸까지 바쳐 가며 기회를 노린 딸의 끈기를, 오웬은 칭찬할까 아니면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떨굴까.

마티나는 가급적이면 전자이기를 바랐다. 차마 행하지 않을 수 없던 복수였다. 상냥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얼굴들이.

“괴물을 베어도 죽은 자들은 돌아오지 않는구나.”

마티나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허망한 가슴이 시려 그 위에 손을 얹고서야 잠들 수 있었다.

다음 날 정오까지 왕의 궁은 텅 비어 있었다. 왈도를 보필하던 시종들의 대부분이 척살당한 탓이었다. 테오도르는 전왕과 긴밀했던 자들을 망설이지 않고 뿌리 뽑았다.

덕분에 마티나는 테오도르가 명하고도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의 부름을 전해 들었다. 그마저도 긴 공복에 식사라도 하려 복도를 거닐다가 발견된 것이었다. 아랫것들이 수선을 피웠던 통에 마티나는 공로에 비해 몹시 궁색한 차림으로 테오도르의 앞에 놓였다.

한참 마티나를 내려다보던 테오도르가 권태롭게 말했다.

“늦었군.”

마티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주군의 앞에 서자 침소에 두고 나온 왕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왕좌에 앉은 테오도르의 이마가 훤했다. 그의 흑발은 금빛 장식품과 꽤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마티나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테오도르가 미미하게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 사라진 줄 알았다.”

“평생의 염원을 이뤘는데 왜 도망치겠습니까.”

마티나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너무도 복수만을 열망해 온 나머지 이후의 미래가 불투명했다. 마티나는 원수를 죽인 후의 일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왈도의 폭정은 그만큼 마티나의 인생을 축소시켰다.

“난 그대가 멍청하지 않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대는 현명하다기보단 이상한 사람이로군.”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마티나는 그가 마저 설명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테오도르가 돌려준 것은 도리어 질문이었다.

“왜 아무 말 않지?”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그대를 버릴 생각으로 문을 잠갔다.”

마티나는 잠시 눈만 깜빡였다. 그녀는 테오도르의 선택을 배신이라 생각지 않았다. 덕분에 왈도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사전에 막을 수 있었으니까. 테오도르의 속셈을 알아채지 못했던 건 아니나 그 깨달음조차 무감각했다.

마티나는 테오도르를 주군으로 추대했지만, 제 안엔 그를 향한 어떤 충정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직 설욕을 위해 손잡은 관계였다.

‘배신감도 믿음이 있을 때 생기는 것이 아닌가.’

새 왕의 이름은 테오도르 셴 블란체였다. 마티나는 그 성을 모르지 않았다.

“왕이여, 나는 블란체 핏줄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테오도르가 침묵했다. 그의 손가락이 조용히 왕좌를 두드렸다. 고민하던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위협하듯, 그의 음성은 더욱 낮고 위태로워졌다.

“내가 쓸모없어진 그대를 죽여 치우겠다면 어쩔 테지?”

마티나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제가 벤 왕의 목이 둘이 될 것입니다.”

알현실 전체가 싸늘해졌다. 테오도르의 수하들은 흥분을 참지 못했다. 그들이 마녀의 무례를 소리 높여 지탄할 때였다. 테오도르가 정숙을 명하듯 손을 들어 올렸다. 신하들이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마티나는 평온한 얼굴로 왕의 분노를 예상했다.

‘당연히 경을 치겠지.’

마티나는 테오도르가 제 목을 자르라 명령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엄한 발언을 사과하는 대신 뻑뻑한 눈만 깜빡였다. 너무도 피로하여 삶의 의욕조차 느낄 수 없었다. 원수의 피 맛을 보았으니 당장 눈감아도 정녕 억울하지 않았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마티나에게 의외의 답을 돌려주었다.

“짐은 그러기 싫군.”

“…….”

“짐은 그대를 죽이려 하고 그대는 짐을 죽이려 하고, 못할 것도 없으나 그러고 싶지가 않아.”

테오도르가 마티나를 불러들인 건 그녀를 처분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다만 혼란스러울 때 해치우지 않으면 후엔 고치기 어려운 것을 다잡고자 했다.

바로 포상과 처벌이었다. 승냥이들이 주인 없는 이권을 물어뜯기 전 먼저 적임자에게 마땅한 대가를 내려야 했다.

‘백성들은 2왕자야말로 성군이 되리라 평했던가.’

마티나는 자존심보다 공명을 택한 테오도르에게 내심 감탄했다.

차가운 태도를 벗어던진 테오도르가 언뜻 자상하게도 느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의 공을 높이 사 후작위와 새로운 성을 내리겠다.”

“왕이여, 제겐 명예의 이유가 없습니다.”

마티나가 머뭇대며 대답했다.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테오도르가 의아한 기색을 내보였다. 왈도를 죽임으로써 마티나는 약속을 지켰다. 마땅한 대가를 얻음이 옳은데 그녀는 포상을 저어하는 태도였다. 마티나는 예상치 못한 블란체의 친절에 말까지 더듬대었다.

“왕을 도운 이유가 오직 사사로웠으니 더는…… 얻을 것도, 얻고 싶을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원하지?”

“원하지 않습니다.”

마티나는 대답을 내놓자마자 스스로 놀라움에 몸을 떨었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하였다. 그녀는 지난밤 제 가슴을 채웠던 게 바로 공허였음을 깨달았다. 마티나가 충격을 추스르지 못하고 마저 속삭이듯 말을 맺었다.

“삶의 이유가…… 없습니다.”

집시들의 치맛자락 안에서 온 지방을 떠돌던 때가 까마득했다. 어머니의 엄한 가르침과 이웃의 친절, 벌이가 좋은 날 입 안에 삼키었던 달콤한 과자의 맛이 기억나지 않았다.

달콤하였는데, 그것이 분명 참으로 달았는데.

“마티나 오웬 드 레타, 그대에게 어머니와 일족의 이름을 내리겠다.”

정신을 깨우는 테오도르의 음성에 마티나가 고개를 들었다. 충혈된 눈에 물기가 맺혀 잠시 사위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왕관을 쓰지 않아도 그는 참으로 왕다워서, 마티나는 그만 그가 블란체인 것을 잊었다.

“이유가 없다고?”

짐짓 허망하게 되물은 테오도르가 곧 미소 지었다. 젊은 왕의 눈이 야망으로 빛났다.

마티나의 주군 된 남자가 계시처럼 말을 맺었다.

“그렇다면 짐을 위해 살아.”

그제야 아스티나는 초점을 맞추어 테리오드를 제대로 눈에 담았다.

잠에서 덜 깬 눈이 느리게 뜨였다. 은발에 청안, 얇은 입술이 비열하기보다는 청초하게 보이는 미인이었다. 날 선 코끝엔 옛 절색들의 고전적인 우아함이 있었다. 누구든 처음 보는 순간 감탄했을 법한 얼굴이었지만, 아스티나가 떠올린 건 오직 과거의 사람이었다.

왕 테오도르와 지독히도 닮은 남자였다.

테리오드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늑대가 자취를 감추고 사람이 되었음에,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불청객의 위에 올라탄 상태였다. 제 옆에 누운 이가 괴물 대공이 맞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상황적인 맥락은 그러했다.

아스티나는 숨이 멎는 듯하였다. 두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아스티나는 목이 메어 무어라 말해야 할지를 몰랐다. 테오도르가 100년도 더 전에 죽었음은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 얼굴은 분명 지난 제 사랑이 맞지 않은가.

‘그도 다시 태어났을까.’

아스티나는 열 살 무렵 떠올렸던 과분한 바람을 다시금 상기했다. 정말 그라면, 이 남자가 정말 그가 맞다면.

사람의 목은 짐승과 비교가 되지 않는 두께였다. 헐거워진 사슬은 본 용도를 잃고 겨우 걸쳐지기만 한 모양새였다. 아스티나는 줄을 당겼다. 손을 뻗어 목젖 언저리를 느리게 만졌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테오?”

그가 잠긴 목소리로 느리게 말했다.

“그대는―”

“당신이, 어떻게…….”

아스티나는 참지 못하고 목줄을 조였다. 순식간에 숨을 쉬지 못하게 된 남자가 기침을 뱉어 냈다. 그는 아스티나를 밀어내는 대신 목에 감긴 쇠사슬만을 긁어 댔다.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데다 호흡마저 어려웠다. 남자는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도 파악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건 아스티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테오도르, 테오, 나의 테오.”

몇 번이고 그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른 아스티나가, 결국 짙은 눈물을 떨구었다.

“그렇게 죽어서 행복했나? 날 두고 가서 편했어? 나는 매일 지옥을 보았는데……!”

아스티나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마티나가 있었다. 배신당한 여제가 과거의 연인을 저주했다.

“한시도 그대를 원망하지 않은 적 없다. 단 하루도 그대를 잊지 못했어. 내 손으로 직접 목을 베게 만들더니, 무슨 염치로 다시 나를 찾아왔지?”

두 번째 삶을 얻은 후, 무엇도 그녀를 이렇게 감정적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아스티나는 차마 오열을 참아 낼 수도 없었다. 비정상적으로 눈물이 많이 흘렀다. 고장 난 것은 눈만이 아니었다. 아스티나는 잠긴 목으로 비통하게 소리쳤다.

“그대를 위해 살았는데, 오직 그대를 위해 살았는데!”

갈라진 음성은 절규에 가까웠다. 그녀가 떨리는 눈으로 테오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머리카락이 은발인 것만 빼고는 모든 것이 그녀가 사랑한 테오도르였다.

“간악하다, 간악하고 잔악해. 그대를 저주한다. 테오도르.”

잔인한 운명이었다. 그 운명이 저를 인도함이었던가. 이제야 그를 만나, 자신의 회한이라도 풀어 주려고?

아스티나는 분노했지만, 동시에 아주 간절한 감정을 떠올렸다. 모든 원망이 자리를 감췄다. 아스티나는 마침내 깨달았다. 그녀 인생의 기저를 이뤄 온 것은 언제나 복수였으나, 테오도르에게만은 그것을 원한 적 없었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이며 그에게로 숨결을 묻었다.

“그럼에도 사랑해.”

입술이 부딪쳤다. 애절한 빨아들임이었다. 호흡을 막던 목줄이 달아났음에 남자는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마냥 아스티나의 숨을 앗았다. 아스티나가 떨리는 손으로 그의 눈가를 쓸었다. 손끝의 감각이 선명한 걸 보아 꿈은 아니었다. 부러 잊고 살려 노력했으니 제 간절함이 빚어낸 환상조차 아니리라.

“당신, 흐, 지금……. 젠장.”

남자가 기침을 쏟아 내며 갈라진 음성을 내었다. 그것이 무언가 달랐다. 그를 소중히 매만지던 아스티나의 낯이 일순 창백해졌다. 뺨을 적시던 따듯한 눈물이, 깨달음을 기점으로 시리도록 차게 느껴졌다. 남자의 눈에서 아주 낯선 무언가를 발견한 탓이었다.

테리오드가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그 남자가…… 대체, 누구기에.”

그것은 무지였다.

* * *

정확히 스무 살이 된 이후로, 테리오드 반 아탈렌타는 완벽한 후계자였다.

대공가의 적자라는 것은 출생 자체로 유구한 영광을 뜻한다. 그러나 몇 눈치 좋은 이들은 그 행운에 감탄하기보단 앞선 스무 살이라는 전제에 주목할 것이다.

아탈렌타의 유전병은 성년이 되기 이전에 발병했다. 자연한 결과로 미성년이라면 아들이라 해도 가문 내에서 대접받지 못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성인이 되지 않은 자식은 그저 반편이었다.

테리오드는 날 때부터 외동은 아니었다. 그보다 앞서 태어난 남자아이 둘이 있었지만 열 살을 넘기지 못했다. 하나는 테리오드가 태어나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고 테리오드가 기억하는 세 살 차이의 형은 여덟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가문의 사람들은 짐승이 되지 않고 죽었으니 유전병 탓은 아니라고 말했다. 의사 역시 사망 원인이 열병 때문이라 진단했다. 그러나 테리오드는 그 진위를 알 수 없었다. 형제들은 공식적으로 유전병이 아닌 이유로 생을 떠났으나, 집안에 드리워진 죽음의 분위기는 어린아이에게 공포를 심어 주기 충분했다.

아들을 둘이나 잃은 대공 부부는 테리오드에게 정을 주지 않았다. 아이가 돌을 넘기지 못하는 일이 흔한 시대였다. 워낙 신생아 때 죽어 나가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의 부모들은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시기를 넘기고 나서야 자식에게 이름을 주곤 했다. 아탈렌타가에서는 특이하게도 그 기점을 성년으로 규정했다.

스물을 넘기지 못하면, 아탈렌타가 아니었다.

혹 존재가 드러날까 어린 자식들을 한 번 저택 밖으로 내보내는 일이 없었다. 어린 테리오드가 참지 못하고 칭얼대었다.

‘아버지, 저도 밖에 나가고 싶어요.’

‘테오, 네 방에 모든 것이 있지 않느냐.’

‘모두 지겨워요. 저도 바다를 보고 싶어요. 메어리가 마차로 하루만 달리면 있다고 하던걸요.’

전대 대공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가엾은 내 아들.’

따듯한 손바닥이 머리를 느리게 쓸었다. 그 눈이 몹시 슬퍼 테리오드는 더 조르지 못했다.

아탈렌타는 대대로 벨라체 아카데미에도 자식을 보내지 않았다. 테리오드는 저택 내에서 모든 것을 배우고 익혔다. 검을 대련하는 상대조차 가문의 기사들에 한정됐다.

기실, 객관적으로 말해서 테리오드의 성장에 부족한 것은 없었다. 식사는 영양학적으로 훌륭했고 고픈 지식은 손만 뻗으면 얻을 수 있었다. 대공가는 반감금 상태에 소중한 씨앗이 미칠까 인성 교육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완벽히 축소된 작은 세계에서 테리오드는 그림 같은 대공으로 자라났다.

아름다운 얼굴에 귀족의 품위가 담긴 말씨, 위엄까지도 갖춘 후계자가 마침내 성년을 맞았다.

테리오드는 그날 처음으로 부모의 눈물을 보았다. 대공 부부는 사랑을 말하며 자신들의 진정한 아들을 끌어안았다. 테리오드는 그저 얼떨떨했다. 아들을 둘이나 잃은 대공 부부는 테리오드에게 정이 들 것을 염려하여 자주 대면하지도 않았다. 테리오드에겐 차라리 유모 메어리가 더 익숙했다. 그래서 메어리가 장성한 자신을 보고 눈시울을 붉힐 때만큼은 그도 눈물을 숨기지 못했다.

“이젠 실성할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도련님, 무서운 말 마십시오.”

“그저 기뻐서 그런다.”

테리오드는 울면서 웃었다. 메어리가 하나만 하라며 핀잔했다. 그도 차라리 웃고만 싶었으나 눈물이 잘 멎지 않았다. 그의 평생을 좌우했던 유전병에 대한 두려움이 마침내 막을 내렸다. 우스운 꼴이었지만 그 광경을 보았다면 누구도 그를 비웃지 못했으리라.

이후 테리오드는 본격적으로 가문의 일을 배웠다. 작위를 이어받기에는 어린 나이였으나 아탈렌타는 승계 시기가 타 가문들보다 일렀다. 아탈렌타의 가주에게는 필히 해치워야 할 일이 있었다. 일찍 혼인하여 자식을 보는 것이었다. 테리오드도 반편이 아닌 후계를 생산해 가문의 명맥을 이어야 했다.

후계자 수업이 마무리에 달해 테리오드가 대공 대신 일을 보는 데 익숙해졌을 즈음, 사고가 벌어졌다.

급작스러운 마차 전복으로 대공 부부 내외가 사망했다. 그리 정을 준 부모는 아니었지만 저를 아꼈다는 것만은 알았다. 테리오드는 그들의 방어 기제를 이해하였으므로 성년 전의 방치에 있어 딱히 그들을 원망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리 슬프지 않았다.

“부모가 죽었는데 슬프지 않다니, 참으로 완벽한 저주가 아닌가.”

“대공 전하, 아랫것들이 듣습니다.”

올리버가 당황하여 만류했다. 저를 어릴 적부터 보아 온 노년의 집사였다. 테리오드는 무덤을 내려다보던 눈을 들어 올리버를 응시했다. 투명한 청색 눈동자가 마치 사신 같았다.

그가 죽으면 슬플까?

테리오드는 자문해 보았다. 다행히도 올리버의 영면엔 눈물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피를 나눈 이들보다 일개 사용인을 더 아끼다니 우스운 일이었다.

대공 부부도 처음부터 테리오드에게 쌀쌀맞았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앞서 두 아들이 죽어 나간 상태에서, 테리오드마저 잃었다면 더는 버티지 못했으리라. 아탈렌타에 내린 저주는 부모와 자식 사이를 완전히 끊어 놓았다.

테리오드는 근심했다.

“사람으로 살아남은 자조차도 정신이 금수가 되는 병이다.”

기실 테리오드조차 그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는 제 부모로서의 자격에 의심을 품었다. 제대로 기르지 못할 아이라면 낳지 않음이 옳았다.

그는 어릴 적 아주 많은 책들을 보았다. 부모가 부모로서, 자식이 자식으로서 기능하는 이야기였다. 비정상적인 아탈렌타의 경우는 애초에 비교군에서 제외였다. 그는 가족 관계마저 책으로 학습하여 이상만을 품었다.

그는 완벽한 대공이었으나 그래서 부자연스러웠다. 테리오드는 이 저주가, 자신을 사람 아닌 인형으로 길렀음을 깨달았다.

“내가 멀쩡한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

“자꾸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말해 보게, 올리버. 나는 내가 아이를 안는 모습이 도무지 상상이 가질 않아.”

올리버는 테리오드의 근심을 별것 아닌 것으로 취급했다. 오래 살아온 노인답게 쓸모없는 말을 거를 줄 알았다. 어쨌거나 싫든 좋든, 테리오드는 아탈렌타를 이어야 했다.

“대공께선 육아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잖나.”

“초상화나 좀 보십시오. 어느 분이 마음에 드십니까?”

“치워라, 보고 싶지 않다.”

테리오드가 심드렁한 얼굴로 제 앞에 놓인 초상들을 밀어냈다. 주인이 완강하니 신하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다들 그가 앞으로도 건강하리라 생각했으므로 결국 후계 문제는 뒤로 미뤄졌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유전병을 아는 사람들은 테리오드의 발병 소식을 듣고 슬퍼하였으나, 첫째로는 공포에 질렸다. 성년이 되었다고 하여 안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지긋지긋한 유전병이 마침내 아탈렌타를 끝장내리라.

불행의 전조를 알리듯 온화한 대공이 처음으로 분노를 드러내는 일이 벌어졌다. 테리오드는 일주일간 이성을 잃었다가 겨우 사람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점점 잦고 길어지는 주기에 테리오드는 행색조차 돌보지 못했다. 단정히 잠갔던 단추가 짝이 맞지 않았고 엉망으로 자란 머리는 부스스했다. 다시 사람이 되었을지언정 정신은 온전치 않았으리라.

겁에 질린 가신들은 테리오드에게 달려와 후사를 보라 권했다. 그들의 노골적인 아우성에 테리오드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가 제자리에서 사납게 일어섰다.

“내가 가축인가!”

노성에 모두가 움찔했다. 테리오드는 흉흉한 얼굴로 그들 하나하나를 노려보며 삿대질했다. 테리오드가 이를 악물었다.

“그대들에겐 내가 종마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그대들이 진정 사람인 나마저 짐승으로 만들고 있지 않아!”

온순하던 테리오드가 처음으로 집기를 부쉈다. 광인의 행색에 모두가 기겁하여 도망쳤다. 테리오드는 지친 몸을 끌고 침실로 돌아갔다. 엉망이 된 집무실을 치우며 하녀들은 눈물지었다.

같은 일이 몇 차례 날씨만 바뀌어 반복되며, 테리오드는 점점 말이 없어졌다. 생기 있던 눈이 빛을 잃고 움직임이 줄었다. 그저 사물처럼 굳어 가던 나날, 테리오드는 올리버를 불러들였다. 그는 면도와 몸단장을 마치고 정복을 차려입은 상태였다.

오랜만에 보는 주인의 늠름한 모습에 올리버가 그만 입을 막고 오열했다. 테리오드는 그의 눈물을 보지 못한 척 위로도 건네지 않았다. 저를 감금할 것을 명한 마지막만큼은 그도 초연했다.

“미쳐 날뛰지 못하도록 제발 나를 가둬다오.”

그리고 테리오드는 제 발로 철창 안에 들어갔다.

테리오드는 자신이 사람으로 남지 못해 슬픈 점을 생각해 보았다. 막상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멀쩡하리라 예상했던 아들조차 죽어 나갔음에 대공 부부는 절망했겠지만, 그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지 않은가.

테리오드는 스무 살까지 그 무엇에도 마음을 붙이지 않고 살았다. 지난 5년이라고 딱히 특별할 것은 없었다. 허무함에 가슴이 비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살고 싶다니 우스운 일이었다.

어느 밤 눈 감은 순간, 그는 저가 다시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정신이 들었을 때 테리오드는 드디어 저승에 다다른 줄로만 알았다. 아마 주인의 병증을 참지 못한 이들이 주인을 죽이지 않았겠는가. 배신감도 들지 않았다.

테리오드는 자신의 위에 올라탄 빨간 머리의 사신을 보며, 옛 동화에서처럼 초월적인 존재는 과연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비현실적인 외모의 여자가 테리오드의 생명을 앗아 가려는 것처럼 팔을 뻗었다.

“……테오?”

익숙한 아명이었다. 역시 하늘의 사람은 모르는 것이 없군. 테리오드는 온전치 않은 정신으로 생각했다. 점점 시야가 트이며 그는 주변 풍경을 눈에 담았다. 창가로 들이치는 바람이 뺨을 할퀴었다.

‘분명 하녀들이 닫아 두었을 텐데…….’

테리오드는 무심코 그리 생각하다 말고 멈칫했다. 저 창은 대공저의 침실에 달린 것이었다. 흰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 역시 익숙한 모양이었다. 마침내 테리오드는 이곳이 자신의 방임을 깨달았다.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 걸까. 그렇다면 지금 자신을 내려다보는 저 여자는 누구란 말인가.

사신인가, 아니면 간자인가.

“그대는…….”

누구……

테리오드가 잠긴 음성으로 겨우 말을 꺼냈을 때였다. 그는 그 단어를 채 문장으로 만들지 못했다. 여자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테리오드의 목을 졸라 왔기 때문이다.

차라리 스스로 목을 매었으면 영원히 사람으로 남았으리라는 생각에 못내 아쉬워하긴 했지만, 정말로 그 고통을 각오한 것은 아니었다. 테리오드는 언제 감아 두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 사슬에 몹시 당황했다.

그리고 곧바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찾아왔다. 몸을 짓누른 아귀힘이 상상 이상이었다. 만일 자신이 이미 숨진 사람이라면 이 같은 고통은 없으리라.

쇠사슬이 시시각각 살갗을 파고들었다. 안 그래도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호흡까지 어려웠다. 여자가 무어라 절규했지만, 테리오드는 그 말을 알아듣지도 못했다.

테리오드에게 있어 억겁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여자가 줄을 놓았다.

“그럼에도 사랑해.”

그녀가 테리오드에게 키스했다. 테리오드는 입맞춤에 놀라기보다 그 입술에 담긴 숨을 받아먹는 데 더 급급했다. 가슴이 거칠게 헐떡였다. 단비 같은 들숨에 테리오드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여전히 제 위에 올라타 있는 여자가 보였다.

“당신, 흐, 지금……. 젠장.”

그녀의 절규를 다 듣지는 못했으나 마지막 말만큼은 똑똑히 귀에 박혔다. 사랑이라니, 저는 기억에도 없는 여자였다. 후사를 보기 싫어 또래의 영애와 교제한 적도 없었다.

그녀가 원망하는 상대가 누구든, 적어도 자신은 아니었다.

억울하게 겪은 위기에 테리오드가 이를 갈며 말했다.

“그 남자가…… 대체, 누구기에.”

숨이 가빠 그 짧은 말도 한 번에 내뱉질 못했다. 호흡이 여의치 않아 테리오드의 낯이 일그러졌다.

중간에 포기했다고 쳐도 감히 대공을 시해하려 했다. 엄벌에 처할 일이었으나 테리오드는 판단을 유보했다. 가쁜 숨이 본래의 속도를 찾으며 이성이 돌아온 탓이었다. 깨질 것 같은 머리를 감싸며 테리오드가 물었다.

“그대는, 누구지?”

막 사람으로 돌아온지라 그녀의 사정을 짐작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짐승이었던 자의 목을 조르는 데엔 마땅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테리오드는 그녀가 이해할 만한 대답을 돌려주길 기다렸다.

그러나 여자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몸이 무섭게 경련했다. 충격으로 굳은 얼굴이 너무도 창백하여 건강이 의심될 정도였다. 덕분에 테리오드는 목이 졸린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쏟아 내려던 화를 잊었다. 그가 얼얼한 목을 매만지며 참을성 있게 다시 물었다.

“대공의 침실에 침입한 자가 어떻게 되는지 아나? 목숨이 중하다면 정체를 밝혀라. 왜 여기 있지?”

“…….”

“아니…… 지금 날짜가 어떻게 되는지 아나? 내가 정신을 못 차린 지 얼마나 지났지?”

대답 대신 여자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테리오드는 당황하여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혹여 그녀가 다시 자신을 공격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는 테리오드에게 달려드는 대신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테리오드는 그녀를 쫓으려다 말고 멈칫했다. 당연히도 야수에게 옷을 입힐 미친 작자는 없었다. 이불이 덮여 있어 몰랐는데 알몸이었다. 테리오드는 욕설을 짓씹으며 서둘러 옆방으로 넘어가 옷가지를 꺼냈다.

그가 바지춤을 겨우 여밀 무렵이었다. 소란과 함께 어둡던 저택에 불이 켜졌다.

새벽녘, 대공저에 비상이 걸렸다.

올리버는 분신 같은 안경도 챙기지 못한 채 잠옷 차림으로 제 주인 앞에 다다랐다. 올리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무엄하게도 손을 들어 테리오드의 얼굴을 더듬기까지 했다.

“테리오드 님……?”

그 심정이 이해되어 테리오드는 신하의 무례를 탓하지 않았다. 여자가 나가자마자 올리버가 나타나다니, 그녀가 집사를 불러오기라도 한 것일까.

테리오드는 황망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도 어이없는 일인지라 도통 상황 파악이 되질 않았다. 올리버를 찾은 걸 보면 살수는 아님이 분명한데, 대체 왜 제 목을 졸랐단 말인가. 이어진 입맞춤까지 이해 가지 않는 것투성이였다.

덕분에 테리오드는 지금이 며칠인지, 혹은 제가 얼마나 오래 사람이 아니었는지 묻는 것도 잊었다. 그는 대신 이렇게 질문했다.

“그 여자는 누구지?”

“아…… 두 분,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아주 심각한 일이 있었지, 자네가 잘 아는 자인가?”

심각한 일이라는 말에 올리버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테리오드를 올려다보았다. 아스티나가 찾아왔을 때는 단순히 대공이 사람이 되어 놀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테리오드가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어디서부터 설명할지 고민하던 올리버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했다. 아스티나의 존재를 말하려면 자신들이 벌인 가짜 혼인까지 고해야 했다. 노인이 주눅 든 음성으로 겨우 대답했다.

“대공비 전하이십니다.”

“대공비?”

테리오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그 말을 입 안에서 굴렸다. 카라벨라에 존재하는 대공가는 아탈렌타가 유일했다. 여제 마티나가 수도에서 먼 땅을 공국으로 삼아 아탈렌타가에 내렸기 때문이다. 대륙 통일에 엘시어 다음가는 도움을 준 공로로 아탈렌타는 일개 공작가에서 대공가가 되었다.

“……내 비라는 말인가?”

테리오드가 어이없는 얼굴로 되물었다. 잠들었다 깨었더니 유부남이 되어 있었다. 여자가 저를 죽이려 들 만한 치정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이 없는 사이 상황이 바뀌어 있었다. 적어도 그녀는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 그들 사이는 이성 관계의 끝인 부부였으니까.

“후사를 위해서입니다.”

“모두 돌았군.”

테리오드가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렇게 후사를 권하더니 설마 짐승에게까지 여자를 붙이려 할 줄은 몰랐다. 역겨움 다음으로 찾아온 건 의문이었다.

“그런데 저 여자가 어떻게 살아남았지?”

혹여 올리버가 사람을 들여 주인에게 목줄을 맨 것일까. 테리오드는 제게 감겨 있던 목줄의 용도를 그제야 깨달았다. 여자가 괴물에게서 살아남으려 저지른 정당방위일 수도 있었다.

“그분은 특별하십니다.”

올리버의 뚱딴지같은 대답에 테리오드가 인상을 찡그렸다.

“……정신이 이상한가?”

테리오드는 여자의 이상 행동을 떠올렸다. 제정신이 박힌 부모라면 이런 남편에게 딸을 시집보낼 리 없다. 생김새는 멀쩡할지언정 속은 실성한지도 몰랐다. 테리오드의 솔직한 속내에 올리버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예? 그보다 총명하신 분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올리버가 저를 이상한 사람 보듯 하여 테리오드는 당황했다. 노년의 집사는 항상 대공을 극진히 모셨기 때문이다.

“……일단 나 모르게 생긴 아내 얘기는 이쯤하고, 그간 자리를 비운 사이 영지가 얼마나 엉망이 됐는지 봐야겠어. 내가 정신을 잃은 후 얼마나 지났지?”

테리오드는 하루아침에 생긴 아내를 파악하기를 포기했다. 그는 책임감 있는 가장이 아니었으므로 그가 관심을 두고 있는 건 차라리 대공령의 일이었다. 업무부터 찾는 성실한 주인에게 올리버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일 년이 좀 안 됩니다.”

“미치겠군. 그럼 벌써 다음 해 여름이란 말인가?”

“가을에 가깝습니다.”

“준비하던 수도 공사가 완전히 개판이 되었겠어. 아르델 준남작은 어디 있지?”

유능한 집사가 이 질문에서만은 잠시 머뭇거렸다.

“공사 대금을 착복한 혐의로 관리직에서 해임되어 자택에 구금 중입니다.”

“뭐?”

테리오드가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 왜 올리버가 대답을 망설였는지 알 것 같았다. 하기야 주인이 없는 사이 욕심을 품는 자도 있었으리라. 벌어질 법한 일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입맛이 썼다. 테리오드의 얼굴에 착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럼 버논 남작에게 일을 넘겨야겠군. 그가 이 공사의 초안을 내었으니까.”

이어진 테리오드의 말에 올리버가 드물게도 눈치를 보았다. 이를 이상히 여긴 테리오드가 캐물으려 할 때였다. 올리버가 쥐 죽은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버논 남작은 대공비 시해 시도 혐의로 사형되었습니다.”

황당한 일이었다. 대체 자신이 정신을 놓은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테리오드는 저 없이 지나간 시간에 좀 더 조심스럽게 접근하기로 했다. 그가 신중히 질문했다.

“……크란셀 자작은?”

“그 역시 같은 혐의로 사형 집행일을 받아 놓고 지하 감옥에 감금되어 있습니다.”

테리오드가 제 마른 뺨을 문지르며 다시금 물었다.

“벤티 준남작도?”

“그는 살아 있습니다. 불러 드릴까요?”

“아니, 됐네…….”

신하들의 실종에 대공은 혼란스러운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죽을 운명은 자신이라고 생각했는데 눈을 떠 보니 외려 앞길이 창창하던 버논 남작이 절명해 있었다. 그 비보가 믿어지지 않아 테리오드는 애도조차 표하지 못했다.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테리오드는 충성스럽던 가신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아르델 준남작의 구금 소식은 차라리 가볍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버논 남작은 무려 대공비를 시해하려다 사형되었다지 않은가.

테리오드는 그 대공비라는 직함에 약간의 거부감을 느꼈다. 본인도 모르는 아내였으니 가신들도 같은 충정을 바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최 그녀를 살해하려 할 이유가 무어 있다는 말인가. 후사를 생산하고자 하는 목적에 정확히 역행하는 행동이었다. 죽여 치울 여자라면 애초에 이런 말도 안 되는 가짜 결혼을 벌여 가며 집안에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이었다.

“혹시 판례를 정리한 것이 있나?”

“아르델 준남작 건 말씀이십니까?”

“전부 다 보겠어.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군.”

“집무실로 가시면 정리해 둔 자료가 있습니다.”

테리오드는 걸치고만 있던 셔츠 단추를 마저 잠갔다. 침실을 나서는 그의 표정이 복잡했다. 이렇게 긴 시간이 빈 것은 처음이었다. 테리오드가 짐승으로, 그리고 다시 사람으로 변하는 주기는 한 달을 넘지 않았다. 고작 두 주를 건너뛰었을 때도 테리오드는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엔 일 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니.

테리오드가 그 말을 듣고 미치지 않은 건 그보다 사람으로 돌아왔다는 기쁨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영원히 금수로 남으리라 여기며 마지막 눈을 감았었으니까.

올리버가 먼저 앞서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테리오드가 다칠까 걱정하는 태도였다. 오랜만에 돌아온 주인이라 혹여 몸에 무리가 올까 염려한 듯했다. 과보호가 다소 거슬렸으나 저를 걱정하는 행동에 미운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테리오드는 말없이 집무실로 들어섰다.

주인의 빈자리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안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다만 테리오드는 그 안에서 나던 종이 묵은내가 사라졌음을 알아챘다. 더 강렬하게 코끝을 스친 건 완전히 다른 냄새였다. 그 정체를 알아채는 데는 기민한 감각도 필요치 않았다.

“……웬 개 냄새가 이렇게 나지?”

테리오드의 의문 어린 음성에 올리버가 거칠게 기침을 토해 냈다. 테리오드는 그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다시 집무실 내부를 살폈다.

이상하게도 창가에 커다란 쿠션이 놓여 있었다. 게다가 그 옆에는 낚싯대 모양의 장난감도 함께 늘어져 있었다. 너무도 예상치 못한 광경이라 테리오드는 기분이 상하기보다는, 차라리 황당해졌다.

“누가 여기서 개를 길렀나?”

“대공 전하, 그것이…….”

“그 건방진 작자가 대체 누구지?”

테리오드는 천천히 창가를 등진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기억하던 것과 정리된 방식이 조금 달랐다. 잉크는 항상 끝으로 밀어 두었는데 위치가 전보다 가까웠다.

업무를 보는 도구는 보통 손에 집히는 대로 늘어놓게 되는 법이다. 딱 손 한 뼘 정도의 간격에서 테리오드는 그동안 이 책상에 앉았을 타인의 흔적을 읽었다. 테리오드로서도 이해 가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는 오늘 처음 본 붉은 머리의 아내를 떠올렸다.

“대공비인가?”

테리오드의 미간이 좁혀 들었다. 올리버가 어찌할 줄 모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다만 그 개라는 것이…….”

“내가 부재일 때 일어난 일을 어찌하겠나. 다만 털이 날리는 건 주의해 달라고 해 주게. 공기가 엉망이로군.”

올리버는 제가 다 모욕당한 표정으로 황급히 창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그 모습을 보며 테리오드는 여자가 그에게 꽤 좋은 인상을 남겼음을 짐작했다. 집사는 대공비의 변호에 여념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테리오드는 그 온도 차를 이해할 수 없었다. 테리오드가 아는 올리버는 주인에게 해가 될 이를 아낄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뼛속부터 아탈렌타의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가신들은 그녀를 시해하려다 중벌에 처해졌다. 어디서부터 비틀린 상황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테리오드는 올리버가 내민 서류를 하나씩 넘기기 시작했다. 가장 우선해서 확인한 것은 버논 남작에 관한 건이었다. 아르델 준남작이나 크란셀 자작은 아직 살아 있어 판결을 번복할 여지가 있다고 쳐도 그는 되살릴 수 없는 몸이었다.

테리오드는 굳은 눈으로 서류를 꼼꼼히 읽어 내렸다. 그 안엔 혐의와 함께 재판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버논 남작이 가장 처음으로 기소된 건은 대공저 내 금품에 대한 유출이었다. 빼돌린 패물과 유산의 수를 셀 수 없어 황당할 지경이었다. 가보로 여겨질 만큼 가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아탈렌타의 유구한 역사와 함께한 물건들이었다. 당연히 보통 죄로 처벌할 일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뒤로 이어진 혐의는 절로 테리오드의 목소리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버논 남작이 저택의 하녀를 겁박했나?”

“그것이…… 송구하지만 그렇습니다.”

올리버가 몸 둘 바를 모르고 대답했다. 테리오드의 기분은 점점 더 바닥을 쳤다.

“……재산을 빼돌리는 데 그치지 않고 혐의를 잡아낸 대공비를 시해하려고 했군.”

“그 역시 사실입니다.”

“암살 시도 과정에서 겁탈 건까지 밝혀진 것이고.”

버논 남작가는 대대로 아탈렌타와 명맥을 함께한 가문이었다. 그가 작위를 몰수당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음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다만 테리오드는 바로 그 ‘그만한 이유’를 받아들이기가 몹시 힘들었다. 이는 착복보다 더한 배반이었다.

테리오드가 거칠게 종이 뭉치를 내려놓았다. 지나온 시간만큼이나 사람과 상황이 바뀌어 있었다. 기억과 현저히 다른 현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그런 인물이 아니다. 애처가로 유명했던 치가 아닌가.”

“……대공 전하, 무엄한 말씀이지만, 아랫것들은 윗사람에게 자신의 치부를 내보이지 않습니다. 하녀들은 언제나 똑같이 공손한 얼굴로 주인을 맞지요. 하지만 그네들도 저들끼리 있으면 온갖 이야기를 떠드는 사람입니다.”

“버논 남작이 나를 속였다는 말인가?”

“대공께 친절한 사람이 누군가에겐 괴한일 수 있습니다.”

테리오드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언제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었으나 이는 만들어진 성품이었다. 교육되고 짜 맞추어진, 오직 아탈렌타의 후계로서 기능하는 사람.

그는 가신들을 가신이 아닌 사람으로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의 사생활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기실 보통의 경우라면 그편이 더 옳기도 했다. 그러나 테리오드가 인과를 살필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처럼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난생처음 겪은 배신에 속이 쓰렸다. 그가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대가 사실이라 말했으니, 나도 믿겠어.”

테리오드가 무거운 마음으로 이어 물었다.

“그 하녀는 어떻게 되었지?”

“대공비를 시해하려 한 죄가 크긴 하나 버논 남작의 협박이었던 점을 고려해 대공령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마무리했습니다.”

“보상은?”

“버논 남작에게서 재산을 몰수해 양육비를 대기로 했습니다. 보상금으로 먼 지방에 자리 잡은 줄로 압니다.”

테리오드가 맥이 탁 풀린 음성으로 읊조렸다.

“깔끔하군.”

탈력감 가득 찬 얼굴로 테리오드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는 이어 전보다 성의 없는 태도로 다른 재판 건을 살폈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내용에 반박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내던지듯 신하들의 부정을 치워 버렸다. 올리버가 바닥으로 떨어진 종이를 묵묵히 주워 들었다. 테리오드는 피곤한 낯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차가운 손가락이 이마를 미지근하게 식혀 주었다.

잠시 후 마음을 다스린 테리오드는, 그러나 여전히 흥분을 삭이지 못한 태도로 다음 서류를 펴 들었다. 수도 공사 건에 관한 내용이었다. 믿었던 관리자마저 잘려 나갔으니 분명 보고가 한 아름 쌓여 있으리라. 그러나 내용을 살피던 테리오드는 다시금 미간을 좁히고 말았다.

이상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테리오드가 당황하여 중얼거렸다. 그는 이전보다 좀 더 빠르게 다음 서류를 찾았다. 그리고 그다음, 다시 다음…….

“이게…….”

테리오드는 말을 잇지 못했다. 밀린 일이 거의 없었다. 말이 안 되게도, 영지가 제대로 굴러가고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어디서부터 이유를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테리오드는 가장 가능성 있는 상황을 유추했다.

“대리인을 썼나?”

그렇다면 주인 대신 비리를 잡아내어 모두를 벌준 상황이 이해가 갔다. 그가 어떻게 저 없는 사이 대공의 권위를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보면 잘된 일이었다.

테리오드는 그 대리인을 데려왔을 법한 올리버를 응시했다. 그는 집사가 저지른 월권에 그다지 화가 나지도 않았다. 어차피 자신은 손댈 수 없는 상황의 일이었지 않은가. 그나마 영지민들이 좀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었던 건 올리버의 결단 덕분이었다.

그런데 올리버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아니라고?”

“대공비 전하께서 모두 처리하신 일입니다.”

노인의 얼굴엔 소년과도 같은 홍조가 어려 있었다. 테리오드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올리버를 빤히 응시했다. 그가 저에게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이리도 훌륭한 일 처리를 그 어린 사람이?”

테리오드는 그녀의 얼굴을 알았다. 자신의 목을 졸랐던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천치다. 그의 아내는 아무리 높게 쳐 봐야 스물 초반, 더 가능성 있는 건 십 대 후반 정도였다.

그 낯선 숫자에 테리오드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가신들은 그렇게도 어린 여자를 괴물의 침실에 들이며 죄책감이나 느꼈을까?

“나이는 열아홉이시지만 어느 노인보다도 지혜로우십니다.”

올리버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지난 시간을 알아 갈수록 오히려 그의 아내에 대해서는 더욱 무지해지는 기분이었다.

테리오드는 시선을 내려 책상 위에 놓인 물건들을 살폈다. 업무 공간은 딱 그녀의 몸집에 맞게 축소되어 있었다. 테리오드는 의자 가까이에 놓인 깃펜을 가볍게 들어 보았다. 자신이 쓰던 물건은 아니었다. 아마 새 주인의 것이리라.

문득 그는 자신이 부인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테리오드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녀의 이름이 뭐지?”

“레테 백작가의 차녀인 아스티나 레테 님이셨습니다.”

테리오드는 올리버의 말 뒤로 무엇이 축약되어 있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그가 손안에서 깃펜을 유려하게 한 번 굴렸다. 이어 허탈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는 아스티나 반 아탈렌타이고 말이야.”

“……화내지 않으십니까?”

“무엇을?”

“대공 전하의 뜻을 무시하고 멋대로 벌인 일들 말입니다.”

테리오드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괴물은 사람의 선택을 탓할 자격이 없다네.”

“차라리 화를 내 주십시오.”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분노가 생기지 않는군.”

테리오드가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천장 위를 올려다보자 침실과 비슷한 양식의 벽지가 눈에 들어왔다. 다만 창문 틈으로 어느새 해가 비치고 있어 새벽보다 밝은색을 띠었다. 샹들리에를 장식한 크리스털로 떨어진 빛이 산란했다.

눈부셨다.

테리오드가 건조한 눈을 깜빡이며 자문했다.

“왜 돌아왔을까.”

“…….”

“이게 꿈인가 싶어. 나는 그때가 마지막인 줄 알았거든.”

아득하게 정신이 꺼지는 순간, 저가 자신이 아니게 되는 비참한 순간의 반복.

다시 겪기 싫은 일이었지만 불행은 반복해서 테리오드를 찾아왔다. 주기는 점점 짧아질 뿐 자비가 없어 마침내 테리오드를 시커먼 아귀에 삼켰다.

테리오드는 처음으로 자신의 병증을 자각했던 날을 떠올렸다. 그야말로 발이 땅 밑으로 꺼져 드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다신 그 깊은 수렁을 빠져나올 수 없게 되리라.

처음 보는 주인의 약한 소리에 올리버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가 울컥 치솟는 감정을 삼키며 테리오드를 위로했다.

“대공답게 의연하셨습니다.”

“아니, 나는 너무도 무섭다네.”

테리오드가 덤덤한 어조로 대답했다. 피로한 눈을 감으며 말을 맺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다를 것 없이, 나는 언제나 그 순간이 두려워.”

* * *

대공이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대공령 전체로 번졌다. 해가 뜨자마자 소식을 전해 들은 가신 무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대공저로 달려왔다.

이를 닦다가, 혹은 기운찬 아침을 맞아 아내의 란제리를 끌러 내리거나, 아니면 굼뜬 눈으로 수프를 뜨고 있었거나, 하루를 시작하는 방법은 가지가지였지만 테리오드의 귀환 소식을 듣고 나서의 반응은 똑같았다.

먼저는 잠이 덜 깼느냐며 하인에게 경을 쳤다. 주인보다 아침이 빠른 하인은 당연히도 결백했고 곧장 새벽간의 일을 읊었다. 넋이 나간 가신들은 마침내 허겁지겁 옷을 주워 입었다.

저택으로 달려온 무리 중 제대로 된 차림새를 한 이는 없었다. 대개는 단추의 순서가 잘못되었거나 웃옷을 바지에 다 욱여넣지 못한 모습이었다. 아예 겉옷을 거꾸로 뒤집어 입고 온 경우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공 테리오드가 다시 제정신을 찾으리라고 어느 누가 예상했던가?

그가 야수에서 사람으로, 사람에서 야수로 변하는 것은 여러 번 반복돼 온 일이나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짐승의 몸으로 테리오드보다 오래 버틴 아탈렌타의 아들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야수로 탈바꿈한 후 일 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사람이 된 것은 오직 테리오드 하나였다.

생각지 못한 기적을 맛본 모두가 흥분했다. 혹 불행이 다시금 찾아와 그를 재차 야수로 만든다 해도, 한 번 가능한 일이라면 두 번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게 말이나 되는가?”

“나는 도통 믿어지질 않는군.”

“만약 대공께서 쾌차하신다면…….”

들뜬 어조로 대화를 쏟아 내던 이들 사이에 미묘한 침묵이 돌았다.

대공비의 손속으로 그들 대부분은 실각한 상태였다. 돌아온 테리오드가 자신들을 구해 주리라는 희망에 가슴이 뛰었지만, 그들이 저지른 부정은 여전히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애초에 테리오드의 귀환을 염두에 두지 않고 저지른 짓들이었다. 주인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살아 있을 땐 차마 엄두도 내지 못했던 부패함이다. 대공이 그에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었다.

“……설마 하루아침에 생긴 부인의 말을 믿으시겠소? 우리는 대공께서 한참 어릴 적부터 보아 온 사람들이 아니오?”

“맞소. 혹여 격노하신다 해도 그것은 후의 일이야. 우리가 먼저 잘 설명드리면 될 일이네.”

그들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희망적인 미래를 점쳤다. 그 말에 안심한 듯 무리의 표정이 밝아졌다.

테리오드가 없는 사이 욕심을 부려 일을 벌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간 보아 온 정이 있었다. 적어도 테리오드는 대공비보다는 그들을 자비롭게 다룰 것이다. 존재도 몰랐던 아내가 아닌, 오래 보필해 온 신하를 돌보는 게 도리에 가깝지 않겠는가.

“……대공께서 늦으시는군.”

“우리가 온 것을 모르시는 건가?”

앞에 선 남자가 초조하게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정오에 가까웠다. 저택에 다다른 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 대공은 아직 얼굴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가신으로서의 권위를 잃은 그들은 대공저로 들어가 직접 테리오드를 찾을 수도 없었다.

애탄 시선이 일제히 굳게 닫힌 정문을 향했다.

* * *

모두가 애가 타 발만 동동 구르던 그 시각, 대공은 여느 때보다 느긋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테리오드는 소파에 길게 누워 찬찬히 서류를 살폈다.

올리버는 집무실로 들어서다 말고 그만 걸음을 멈춰 세웠다. 대공이 계속 영지의 일을 확인하고 싶어 했기에 업무 중에도 먹을 수 있는 간단한 식사를 챙겨 온 참이었다. 당연히 빈속이어야 할 대공은 집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 무언가를 입에 넣고 있었다.

올리버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대공 전하, 지금 뭘 드시고 계신…….”

테리오드가 눈을 들었다. 그가 탁자에 올려 둔 그릇을 성의 없이 가리켰다.

“이 간식은 대공비의 취향인가?”

“……그건 어디서 찾으셨습니까?”

“서랍 안에 담겨 있더군. 과자를 숨겨 놓는 여인은 들어 봤어도 육포를 숨겨 놓고 먹는 부인은 처음이야.”

테리오드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가 육포를 마저 씹어 넘기며 말을 덧붙였다.

“한데 이거 꽤 맛있군.”

“대공께선…… 참 한결같으십니다.”

올리버의 눈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는 차마 주인에게 그간의 일들을 밝힐 자신이 없었다.

짐승으로 변하는 일만으로도 자존심에 큰 상처가 될 고귀한 신분의 남자였다. 대공비에 의해 목줄까지 매여 가며 훈육당했던 일을 어찌 쉽게 전할 수 있겠는가.

올리버는 슬그머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낚싯대를 들어 등 뒤로 숨겼다. 그러고는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가신들은 안 만나 보실 예정이십니까? 아우성이 대단합니다.”

올리버의 말에 테리오드의 미소가 사그라들었다.

테리오드는 아침나절 내내 집무실에 머물렀다. 자신이 부재할 때 가신들이 어떤 일을 벌였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마음이 편했을까 싶을 정도로, 결과는 엉망이었다.

모두가 죄목을 하나씩은 달고 있어 차라리 어떤 혐의도 없는 자의 수를 세는 게 더 빠를 지경이었다. 테리오드의 눈이 전에 없이 싸늘한 빛을 띠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육포를 그릇 위로 던졌다. 그리 재주가 좋지 않아 단번에 목표를 달성하진 못했다. 탁자 위를 구르던 붉은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테리오드가 말라붙은 살덩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도무지 피를 보지 않고 일을 처리할 자신이 없군.”

“모두 물릴까요?”

“대공비가 내린 처분이 명확해 더 손을 댈 것도 없다. 근신을 명 받은 자들 중 멋대로 빠져나온 이가 있다면 가중 처벌만 하도록.”

“그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올리버가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섰다. 그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테리오드가 불쑥 몸을 일으켰다.

“아니, 됐네. 아무래도 직접 가야겠어.”

올리버는 들고 왔던 샌드위치를 탁자 위에 내려 두었다. 아무래도 그가 준비한 식사가 주인의 양분이 될 일은 요원할 것 같았다. 테리오드는 집무실을 나서며 올리버를 돌아보았다.

“혹시 대공비가 어디 있는지 좀 찾아봐 줄 수 있겠나? 지난밤 뛰쳐나간 이후 보이질 않는군.”

“침실에도 없으십니까?”

올리버가 당황하여 되물었다. 대공비를 마지막으로 본 이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보통 아스티나가 가장 오래 머무르는 장소는 집무실과 침실이었다. 워낙 일이 바빠 따로 영지를 둘러볼 필요가 없는 이상 외출은 후원을 둘러보는 데 그쳤다. 그마저도 대개는 테리오드를 산책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런 그녀가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인가.

괴물에게 팔려 온 점을 감안하면 당연히 도망을 염두에 두겠지만, 아스티나는 그 보통의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그만큼 대공령에 완벽히 적응했다. 올리버는 이제 대공비가 아닌 아스티나의 모습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올리버마저 행방을 짐작지 못하는 듯해, 테리오드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야수가 사람으로 변하는 광경이 얼마나 충격적인지 상상해 보려 애썼다. 그게 아니면 아내의 도피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침실엔 방금 다녀왔는데 없더군. 그녀와 이야기를 좀 나누어야겠는데 당최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

“나누실 이야기라면……?”

올리버의 의문에 테리오드가 밖으로 나서던 걸음을 멈춰 세우며 덧붙였다.

“그간의 일을 살피며 내가 그녀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 아주 많다는 걸 알게 됐거든. 그럼 부탁하겠네.”

말을 마친 테리오드가 복도로 나섰다. 긴 일직선의 길을 걸으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솔직한 심정으론 꼴도 보기 싫을 만큼 가증스러운 가신들이었지만, 사람일 때 그들을 처리해 두지 않으면 그의 성실한 부인까지 곤란해질 것 같았다.

테리오드가 아스티나가 관리해 온 서류를 검토하며 읽어 낸 건 유려한 필체만이 아니었다. 그는 활자 속에서 현명함과 날카로운 결단, 그리고 인정과 마주쳤다. 정식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그 행적으로 아내를 짐작하게 되다니 우스운 일이었다.

‘아스티나 반 아탈렌타라니.’

생소한 이름이 대공가의 가계에 더해졌다. 문득 뺨 언저리가 간지러웠다.

저 모르는 사이 타인이 멋대로 붙인 여자이니 처음엔 누구든 상관없이 그저 불쌍할 뿐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행적을 읽어 갈수록 호기심은 꼬리를 물어, 이제 테리오드는 아스티나라는 사람 자체가 몹시 알고 싶어졌다.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건 그녀의 일 처리뿐만이 아니었다.

‘왜 내 목을 졸랐을까.’

험악한 잠버릇일 뿐인가?

‘그렇다면 왜 눈물을 보였지.’

그녀를 다시 만나 보기 전까진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테리오드는 때마침 마주친 경비를 불러 대동하고는 저택의 정문으로 향했다. 농성하던 가신들이 대공을 발견하고는 안색을 달리했다. 눈에 띄게 밝아진 그들의 표정과 반대로, 테리오드의 눈빛은 깊게 침잠했다.

“대공 전하, 정말 다행입니다!”

“이게 무슨 신의 은총이란 말입니까!”

테리오드의 사람 된 모습을 직접 확인한 이들이 기쁨에 눈물지었다. 드디어 자신들을 구원할 진짜 대공이 돌아온 것이다. 당장 대공의 손을 잡고 입이라도 맞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럿이 문을 열어 달라며 애타게 매달려 온 탓에 철창이 크게 흔들렸다.

테리오드는 그런 가신들을 차분히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군.”

“대공 전하! 정말 걱정이 많았습니다. 문을 좀 열어 주십시오. 저희가 드리고 싶은 말들이 아주 많습니다.”

“예, 전하. 그간 대공 전하께서 없는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시면 무척 놀라실 겁니다. 그것이…….”

테리오드가 차가운 목소리로 그들의 아우성을 끊어 냈다.

“그대들이 쥐새끼처럼 아탈렌타의 광을 갉아먹은 일 말인가?”

언제 소란스러웠냐는 듯 삽시간에 사위가 조용해졌다.

가신들은 그제야 대공이 그가 부재했을 때의 일들을 모두 알고 왔음을 깨달았다. 사람이 되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은지라 벌써 업무를 살폈을 줄은 몰랐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가신 하나가 애타게 문을 흔들었다. 대공의 앞으로 달려가고 싶었으나 길을 가로막은 철창이 너무도 높았다.

“대공 전하! 사실이 아닙니다! 이는 모함입니다.”

“모함이라?”

“그…… 물론, 오해할 만한 일이 있었음은 부정치 않겠습니다. 하지만 전하! 저희의 충정을 의심하셔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희 가신들이 언제나 아탈렌타를 위해 일해 온 것을 대공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열렬한 변명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담스러울 만치 간절한 시선이 대공에게로 향했다. 테리오드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그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들을 믿었다.”

가신들이 반색했다. 역시나 그들의 대공은 갑자기 등장한 악녀 대신 신하를 믿어 주었다. 대공만 있다면 그 시건방진 대공비를 치죄하여 내칠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그녀에게서 후사를 보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세간의 시선을 의식하여 여자의 신분을 따졌던 것인데, 배운 것이 많은 귀족가의 여식은 과연 총명하여 되레 그들이 내쫓기는 사달이 났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다음엔 조건이 미비하더라도 말 잘 듣는 계집을 구할 예정이었다.

그들이 비단길 같은 미래를 상상하며 꿈에 부풀 때였다. 테리오드가 한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감긴 눈 아래로 속눈썹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 그림 같은 모양새는 테리오드의 이어진 말까지도 연극마냥 극적으로 들리게 했다.

“사자 없는 산에서는 토끼가 왕 노릇을 한다지.”

테리오드가 옛 격언을 읊조렸다. 가신들은 따라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 있어 왕 노릇을 한 토끼는 사특한 대공비였다.

대공이 고해하듯 말했다.

“내 불찰을 인정하겠네. 이 일은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야.”

“아닙니다. 저희가 잘 모르고 감히 대공의 짝으로 악녀를 들인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사죄가 필요한 이는 저희일 것입니다.”

여전히 저택 밖에 내쫓긴 처량 맞은 행색이었음에도 불구, 가신들은 위엄 있는 주인과 충성스러운 신하의 환상을 보았다. 그들은 대공이 부재한 동안 저지른 잘못도 잊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이어진 테리오드의 말엔 낯을 굳히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다. 내가 어리석었어. 어리석었기 때문에 그대들을 믿어 이 사달을 냈다.”

“대공…… 전하?”

얼떨떨한 음성마저 가증스러웠다. 테리오드가 싸늘하게 물었다.

“주인 없이 벌인 연회는 즐거웠나?”

테리오드가 에둘러 모욕을 준 상대는 대공비가 아니라 자신들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가신들이 당황한 낯을 띠었다. 그들은 황급히 화살의 방향을 대공비로 돌리려 했다.

“대공, 저희, 저희가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그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닙니다! 대공의 눈을 현혹케 한 악녀를 끌고 오십시오! 저희가 직접 벌할 것입니다!”

“아탈렌타로 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대공비가 어찌 반년 전의 장부를 조작한단 말인가?”

테리오드가 경멸의 목소리를 내었다.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서 결백을 주장했던 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상세한 내용까지 보았단 말인가.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었다.

“대공 전하, 그간 대공비 전하의 무엄함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는 진정 사실입니다. 대공께서도 놀라실 줄로 압니다.”

“주인을 배신한 신하보다 더 무엄한 자가 있나?”

테리오드는 마지막 발악을 선연하게 비웃었다. 상대가 핏줄이 선 목으로 소리쳤다.

“예, 무엄하고 말고 말입니다! 그 악독한 년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십니까? 글쎄, 감히 대공 전하를 조련하려 들었습니다! 저희는 그저 막막하여 대공 전하의 귀환을 바라고 또 바랄 뿐이었지요.”

쓰레기들의 말을 귀담아들을 생각은 없었으나 이상한 단어가 테리오드의 관심을 끌었다. 조련이라니, 그 말에 다른 의미가 또 있단 말인가.

테리오드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소?”

“대공께 목줄을 매어 구속한 것도 모자라, 대공비가 전하를 쥐어 패 가며 조련하였나이다……!”

가신이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그가 말하고자 한 건 테리오드가 아는, 본 의미의 그 뜻이 맞았다.

테리오드는 지난밤 보았던 아스티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울고 있었고 몹시 가녀린 인상을 주었다. 붉은 머리가 강렬하긴 하나 다만 그뿐, 그저 미인이라고만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제 손 한 줌에 잡힐 법한 손목이 아니던가.

가당찮은 이야기에 테리오드가 고개를 내저었다.

“믿을 수 없군.”

“사실입니다아……!”

테리오드의 불신에 상대는 눈물까지 내보였다. 이번만큼은 정녕 억울하였다. 테리오드는 그제야 그 말이 진심임을 깨달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테리오드가 지금까지 보고 온 것이 바로 그 이변의 족적이었다. 대공령 내에서 단기간에 처리한 일들만 꼽아도 그의 부인이 보통 인물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테리오드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가신들은 그가 화낼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은 어조로 되물었다.

“그렇다면 다행이 아닌가?”

“예?”

“칼리, 이번만은 사실을 말해 주길 바라. 내가 그전에 사람을 죽였나?”

이름을 불린 남자의 낯빛이 희게 질렸다. 대공저 내의 사용인들을 추궁하기만 하여도 들을 수 있는 과거였다. 그는 감히 그런 뻔한 사실까지 거짓을 고하진 못했다. 그가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그건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짐승을 제어하는 것도 불가피한 일이다.”

뒤편에서 침묵을 지키던 가신 하나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어느 아녀자가 감히 대공께 그런 무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대들은 그깟 체면 때문에 은인을 죽이려 했군?”

가신들은 그대로 몸을 굳혔다. 주인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차갑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테리오드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말했다.

“자네들은 천치인가?”

“…….”

“말해 보아, 생각이란 걸 하지 못하고 사나? 언제부터 내 가신들이 그리도 머저리였지?”

테리오드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남편의 진짜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아내조차 이리 도움을 주었는데, 그가 진정 믿어 온 자들은 무슨 짓을 저질렀던가.

다시는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 여겼던 때보다 더 허탈하였다. 제가 사람으로 있을 때 이뤄 온 모든 게 사라졌음을, 아니 어쩌면 애초에 쌓아 온 것이 존재치 않았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테리오드가 끓는 음성으로 읊조렸다.

“아니, 이제 알았다. 내가 사사로운 정에 눈이 멀어 보지 못했을 뿐이로구나.”

이후 뜨인 테리오드의 눈이 새파란 분노로 형형하였다. 테리오드는 전에 없던 격노를 내보였다.

“저놈들이 다신 대공저에 얼굴을 내밀지 못하도록 하라. 혹여 인정을 바라고 나를 찾는 이가 있다면 내 괴물 된 자의 손속을 보여 줄 것이다.”

명령을 들은 경비들이 고개를 숙였다. 가신들이 그리도 염원했듯 철문이 열렸으나 이는 그들을 내쫓기 위함이었다. 험악한 표정의 경비들이 범죄자를 우악스럽게 이끌었다. 테리오드는 과거의 신의가, 애정이 처참히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뒤돌아서는 그의 낯이 배신감으로 일그러졌다.

곁을 지키던 기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공 전하, 수감된 가신들도 만나 보시겠습니까?”

“되었다. 혼자 있고 싶으니 모두 물러서라.”

테리오드는 뒷모습만을 보인 채 후원으로 향했다. 주인의 걸음은 분명 꼿꼿하였으나 기사의 눈에는 왜인지 휘청이는 듯 보여 못내 불안하였다.

산더미같이 쌓인 부에 주인의 부재에도 받는 녹은 여전하였고 사용인들은 부지런히 저택을 지켰다. 잘 정돈된 정원은 작년 이맘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바뀐 점이라고 하면 올해의 유행으로 예상되는 종자가 몇 가지 늘어난 정도일까. 빗물을 잔뜩 머금은 식물은 그저 싱그러웠다.

테리오드는 다른 이들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후원의 구석까지 들어섰다. 커다란 나무 뒤로 장대하게 늘어진 대공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그는 아탈렌타의 자식으로 태어나 얻은 것을 셈해 보았다.

막대한 금전과 거대한 저택, 좋은 옷감의 의복과 사치스런 금품.

어느 하나 사람과 관련된 것이 없었다. 부모는 본인이 상처받을 게 두려워 자식에게 따듯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겁쟁이였고 충실하다 생각했던 심복들은 그의 빈자리를 틈타 권세를 갉아먹는 살쾡이였다.

심지어는 아내조차 제 뜻대로 들이지 못하였는데.

헛웃음을 짓던 테리오드는 문득 미간을 좁혔다. 나무 덤불 너머에서 어떤 붉은 것이 시야를 스친 탓이었다. 장미의 색이었다. 여름의 막바지라 철이 지났음이 분명한데도.

테리오드는 무의식적으로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소리가 점점 잦아들며 이내 완전히 멈춰 섰다. 테리오드가 허탈한 웃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어디 있나 하였더니…….”

빨간 머리의 여자가 나무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새벽에 보았던 그녀와 똑같은 얼굴이다. 저의 아내라는 여자임이 분명했다.

무엇이 그리 마음에 안 들었는지, 꿈을 꾸는 와중에도 여자는 미미하게 인상을 찡그린 채였다. 테리오드는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가 이마 언저리를 눌렀다. 보통 악몽은 아닌 듯 손끝에 힘을 주어도 그녀의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이 여자가 야수를 길들여 사람을 해치지 못하게 하였다니.

테리오드는 지난밤의 일을 떠올렸다. 목덜미를 감쌌던 손은 분명 힘 있었으나 아마 자신이 정신을 차리지 못해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햇빛에 비친 그녀 역시 그다지 강인한 인상은 아니었다.

장정이 달려들어 해치운 일이라 해도 의심할 텐데 일개 귀족가의 영애라니. 괴물을 조련한 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그림 같군.”

테리오드는 무심코 그리 내뱉고는 당황했다. 말을 주워 담고 싶었으나 어차피 들은 사람이 없었다.

가신들 앞에서는 아내를 변호했지만 그녀가 해냈다는 일이 잘 믿어지지 않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테리오드의 불신은 아스티나의 외관에서만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평생 괴물을 제어하는 일이 불가능하리라 여기며 살아왔다.

대공비는 대공령의 은인만이 아니었다. 바로 테리오드 자신의 은인이기도 하였다. 살상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었다는 말에 그는 가슴이 벅찰 지경이었다.

괴물이, 사람을 죽이지 않을 수 있었다. 그의 부인은 자신이 금수가 되어도 최소한의 인간성은 잃지 않도록 도울 수 있었다.

테리오드가 아스티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말했다.

“부인과는 시차가 잘 맞지 않는 듯합니다. 필히 나눌 이야기가 많을 텐데.”

곤히 잠든 사람을 깨울 수는 없었다. 아마 이리 불편한 곳까지 찾아든 이유도 갑자기 사람이 되어 놀라게 한 부군 때문이리라. 테리오드는 아스티나의 어깨를 흔들어 단잠을 깨우는 대신 조용히 그 옆에 앉았다.

공기가, 냄새가, 혹은 햇빛이 지나치게 안온했던 탓일까. 그는 반쯤 눈을 감고 천천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테리오드는 아침나절 집무실에서 보았던 물건들을 떠올렸다.

사람도 여럿 올라갈 수 있을 법한 거대한 쿠션과 낚싯대, 집무실 안에 온통 날리던 털과 서랍에 준비해 둔 육포.

하나같이 테리오드는 막상 만나 보지 못한 개의 흔적이었다. 게다가 제 옆에서 잠든, 괴물을 조련했다는 아내까지. 테리오드는 저가 괴물일 적의 모습이 늑대에 가깝다고 들었다. 그리고 어쨌거나 늑대는 갯과에 속하는 동물이었다.

그렇다면…….

“그 개가 설마?”

테리오드는 침묵했다. 답을 돌려줄 부인은 여전히 곤히 잠들어 미동이 없었다.

* * *

[그대에게 내가…… 중한 사람인가?]

그럴 리가 있나. 마음을 버린 지 오래다.

[짐의 어디가 좋은지 말해 보오, 명령이니.]

어느 곳 하나 좋은 구석이 없었는데.

[내가 그대를 사랑해.]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야. 예쁜 빛에 속아서 스스로를 아프게 하고 말았지.

[평생 그대만 짐의 옆에 두겠어. 내 충직한 신하, 평생의 우정, 하나뿐인 사랑.]

참을 수 없었다. 아스티나는 귓가를 울리는 음성으로부터 도망쳤다. 그녀가 울부짖듯 소리쳤다.

“그렇다면 왜, 나를 믿지 않았어?”

눈물과 함께 눈을 떴다. 평화로운 후원의 푸른 들풀이 시야에 담겼다. 아스티나는 잠시간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가슴이 가쁘게 솟았다 내려앉았다. 잠이 깨며 단번에 상체를 일으킨 탓인지 허리가 뻐근했다. 그녀는 넋 나간 얼굴로 치맛단에 배인 풀물을 응시했다. 헐떡이던 숨이 이내 가라앉았다.

‘꿈이었다.’

“부인.”

귓가를 스친 음성에 흠칫 몸을 뒤로 물렸다. 인기척에 놀란지라 상대가 말한 단어의 뜻은 뒤늦게 이해했다.

아스티나는 당황하여 불청객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혹 자신이 꿈 안의 꿈에서 깬 것은 아니었는지 의심에 빠졌다. 그녀를 괴롭게 했던 기억의 낯이 바로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을 되찾는 건 금방이었다. 확연히 다른 은빛의 머리 색이 그가 왕 테오도르와 다른 존재임을 상기시켰다.

“……깨우시지 그러셨습니까.”

아스티나가 차분한 어조로 대꾸했다. 목이 잠겨 있긴 했으나 응대엔 모자람이 없었다. 뒤늦게 새벽녘에 있었던 일을 상기해 낸 탓에 멍청한 꼴은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방금의 잠꼬대를 들었을까?’

아스티나는 대공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미세한 당황의 흔적이 그 안에 있었다. 귀가 없지 않은 이상 못 들었을 리는 없었다. 아스티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스티나의 예상대로 테리오드는 그녀가 깨어나며 한 말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테리오드의 관심을 잡아챈 건 그 뒤로 자신에게 건넨 인사 쪽이었다. 문맥을 파악할 수 없는 말에 내보일 반응은 의아함뿐이었지만, 조금 전까지 악몽을 헤매던 여자의 평온한 응대는 당혹까지 선사했다.

아내와 남편의 눈이 마주쳤다. 그 명칭이 우습게도 초면에 가까웠다.

테리오드는 곧 혼란을 갈무리했다. 서로 잔디를 깔고 앉은, 지나치게 격식 없는 자리였지만 그는 더없이 귀족적으로 인사했다.

“정식으로 인사를 드려야지요. 처음 뵙겠습니다, 테리오드 반 아탈렌타입니다.”

왕 테오도르의 모습을 한 자가 저를 낯설게 대하는 것은 기묘한 경험이었다. 아스티나는 대공의 성명을 천천히 곱씹었다. 이름이 비슷하다는 생각에 늑대일 때의 그를 ‘테오’로 불렀었는데, 정말 그 애칭의 주인과 같은 얼굴이었을 줄이야.

지난밤 그녀는 침실을 뛰쳐나오며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생각했었다. 아스티나가 떠올린 건 그다지 까마득하진 않은, 옥타비아 교수와의 문답이었다.

‘좋아요, 테오도르 왕의 고모 되는 셀린느 왕녀는 아탈렌타 공작과 혼인하여 공작 부인이 되었죠. 왕녀 출신의 셀린느 공작 부인이 정실 소생의 왕세자가 아닌 테오도르 왕을 지지한 이유는 무엇이지요?’

‘테오도르 왕을 낳은 후궁 앤셀은 샤롯테 백작가의 장녀였습니다. 당대 샤롯테 백작 부인은 셀린느 왕녀가 궁 생활을 할 적 보필한 시녀였고요. 긴밀한 이해관계가 있었습니다.’

덤덤히 교수에게 대답을 돌려줄 때만 해도 이런 일은 예상하지 못했다. 100년 전, 테오도르의 고모인 셀린느 왕녀가 시집을 오며 아탈렌타가에도 블란체의 피가 흐르게 되었다. 테오도르와 테리오드가 닮은 건 신기하되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아스티나는 이 상황에 대단한 공교로움을 느꼈다. 마티나는 테오도르와 결혼하지 못해 남은 평생 역시 미혼으로 살았다. 그런데 다음 생에서 부부의 연으로 이어진 자가 테오도르와 똑 닮았다니. 알맹이가 다르다는 걸 알았음에도 마음이 사무쳤다. 대공을 보는 눈빛에 많은 것이 담길 것 같아, 아스티나는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아스티나입니다.”

모르는 사람이니 그에 맞는 예의로 대해야 했다. 아스티나는 첫 만남에 저지른 잘못을 어떻게 변명할지 고민에 잠겼다. 그런데 먼저 사과를 건넨 건 오히려 테리오드 쪽이었다.

“첫인상이 좀 특별했지요. 지난밤 놀라게 해 드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테리오드가 불쑥 오른손을 내밀었다. 아스티나는 의외라는 눈으로 대공을 응시했다.

손등에 입술을 맞추면 맞췄지, 어떤 신사도 레이디에게 악수를 권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스티나는 그 특이한 응대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기꺼이 자신에게 내밀어진 단단한 손을 맞잡았다.

“사과가 필요하다면 그건 제 몫일 것 같은데요, 저야말로 대공께 저지른 무례에 사죄드립니다.”

아스티나가 침착하게 사과했다. 함께 가볍게 흔들었던 손은 곧 떨어져 나갔다. 아스티나는 그가 늑대일 적의 감촉을 떠올렸다. 털인 쪽이 더 부드럽기는 했으나 따듯한 점은 똑같았다.

테리오드가 언뜻 장난스럽게도 들리는, 그러나 뼈 있는 질문을 던졌다.

“실례가 아니라면 이유가 알고 싶군요. 잠버릇이 목을 조르는 것인 아내와 동침할 수는 없으니까.”

그럴듯한 변명거리가 있을 리 없다. 아스티나는 뻔뻔하게 ‘실수’를 고집하기로 했다. 실제로도 아스티나에게 있어 그 일은 실수였다. 여제 마티나가 결코 그런 감정을 표현해서는 안 될, 왕 테오도르는 배신자였기 때문이다.

“잠결에 저지른 실수였습니다.”

“잠결에 사람의 목을 조르는 버릇이 다 있단 말입니까?”

테리오드가 황당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전혀 믿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아스티나는 처음의 입장을 고수했다.

“자주 그러지는 않습니다.”

“방금도 악몽을 꾼 것으로 보였습니다만.”

아스티나는 침묵했다. 굳게 다물린 입술을 보며 테리오드는 그녀가 내보였던 감정을 상기했다. 믿음과 사랑, 사람들은 대체로 그것을 연인에게 바치는 마음으로 축약했다. 테리오드가 그럴듯한 의문을 내보였다.

“고향에 두고 온 연인이라도 있었습니까?”

“그저 꿈이었습니다.”

“애절해 보이던데요.”

“애절한 꿈이었죠.”

아스티나가 덤덤하게 덧붙였다.

“이제는 깨었으니 되었습니다.”

테리오드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하루아침에 생긴 아내에게 어떤 이성적인 감정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저 차가운 낯의 여자가 그리도 사랑한 남자가 있었다고 생각하니 조금 신기했다.

혹 아탈렌타로 팔려 오게 된 탓에 억지 이별을 하게 된 것은 아닐까. 괴물과의 결혼이 그리 정상적인 과정을 거쳤을 것 같지는 않았다. 당연히도 권세나 부를 이용해 강제로 벌인 일이었으리라.

부재중에 벌어진 일이라고는 하나 테리오드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어찌 됐든 이 결혼은 그녀에게 있어 불행으로만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새 신부가 감내해야 했던 건 반쪽짜리 신랑뿐만이 아니었다.

테리오드는 본래 그녀를 만나자마자 하려 했던 말을 꺼냈다.

“가신들이 그대를 시해하려 하였다고요.”

인사 바로 다음에 이어지기엔 다소 곤란한 화제였다. 약간의 불쾌함이 담긴 어조에, 아스티나는 기민하게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가 정을 준 늑대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짐승의 감정은 기억하지 못했다. 대공이 그녀를 질책한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오래 보아 온 그들이 아닌 하루아침에 생긴 아내의 말을 믿어 주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예. 그렇습니다.”

그 말에 숨은 뜻이 있는 것 같아 테리오드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긴가민가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제가 그대를 탓하려는 것처럼 보였습니까?”

“……아니기를 바랍니다.”

“아니, 아니…… 그대를 탓하려는 게 아닙니다.”

테리오드는 잠시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더듬거렸다. 다행히 오래 지나지 않아 그는 지금 그녀에게 건네야 할 가장 적합한 말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냈다.

“제가 없는 동안 일을 잘 처리해 주어 놀랐습니다.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어요.”

이 역시 뜻밖의 일이었다. 깨어나자마자 대공령의 일을 살핀 것도 놀랍지만 그것이 대공비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로 이어진 점이 특히 그러했다. 아스티나가 눈썹을 추어올리며 되물었다.

“대공의 권위를 건드린 일에 화내지 않으십니까?”

“가신들의 일로 그대가 아탈렌타인들을 수준 이하로 보게 된 것 같아 두렵군요. 적어도 나는 상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은인에 대한 감사를 표할 줄은 압니다.”

권위자들은 형식적으로라도 자존심을 내세우는 법이다. 단순한 습관이거나 혹은 계산하였거나, 이유는 다를지라도 상대의 무례를 따짐으로써 앗아 갈 수 있는 것이 많음을 알기 때문이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의 권위가 도를 넘지 않도록 그녀를 단속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기심보단 이타심을 발휘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본 주인보다 나은 처신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폐가 아니었다면 다행이지요.”

상대가 자세를 낮춰 대화에 임했기에, 아스티나 역시 겸손함을 표했다. 테리오드는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폐라니요. 부인, 그 본 주인의 모습을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껏 보아 온 것이 그뿐일 테니.”

“대공께선 훌륭한 분이셨다고 들었습니다.”

“지켜보는 이 없는 자리이니 솔직해집시다. 나는 반편이입니다. 사실 그 반편이조차도 아니죠. 지금 당장이라도 인간성을 잃고 괴물이 될지 모릅니다.”

테리오드가 자조했다. 그의 입가엔 쓰디쓴 패배감이 배어 있었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에게 그가 썩 괜찮은 야수였다고 칭찬해 주고 싶었다. 당연히도 안 될 말이었지만.

“그대에겐 고마운 마음뿐입니다. 다만…… 그간 있었던 일들이 잘 믿어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테리오드가 착잡한 얼굴로 말을 맺었다. 아스티나는 그의 기울어진 눈썹에서 시차를 보았다. 괴물 대공은 지난 일 년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고 했다. 아스티나는 긴 잠에서 깨어난 그가 어떤 심정일지 상상해 보았다. 눈 깜빡한 사이 한 해를 보낸 셈인데 그가 알던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지 않았다.

부패한 가신들을 쓸어 냈을 뿐이라고는 하나, 어찌 됐든 아스티나도 그 변화에 일조한 사람이었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에게 위로를 돌려주었다.

“사람은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 법입니다.”

“제가 누울 자리였다는 말입니까?”

“대공께서 정신이 온전할 땐 그러지 못했으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대공의 무지는 죄가 아닐 것입니다.”

아스티나는 이어 초연한 얼굴로 삶의 교훈을 말했다.

“다만 사람이 악하거나 선하거나 한 가지 성미만으로 표현되지 않음을, 앞으로는 아심이 좋겠습니다.”

테리오드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에게 반박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라, 어린 아내가 들려준 말이 그보다 갑절도 넘게 산 집사 올리버의 것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녀가 그런 말을 하는 게 딱히 어색하지도 않았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를 빤히 응시했다. 아스티나는 곧게 그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테리오드가 불쑥 물었다.

“그대는 어떤 사람입니까?”

“무슨 의미이십니까?”

“그대를 가장 잘 아는 자는 그 본인일 것입니다. 제 목을 조른 것은 악인의 행각이고 대공령을 보듬은 것은 선인의 모습인데, 제가 부인을 어찌 파악하면 되겠냐는 말입니다.”

테리오드는 아스티나의 말을 전부 믿지는 않았다. 정말 꿈에서 과거의 연인을 보아 저지른 일이라 해도, 그녀에겐 사람을 죽이고 싶을 만큼의 분노가 숨어 있었다.

테리오드는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기에 성년도 되지 않은 나이로 살의를 품을 수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직접 만나면 그 답을 알게 되리라 여겼건만, 테리오드는 여러 대화를 나눈 지금도 좀처럼 아내를 파악할 수 없었다.

대공이 조금만 더 오만했다면 아스티나를 차차 알아 가며 풀릴 문제라 자신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에 덴 자리가 아직은 마냥 벌겠다. 테리오드는 오독 대신 그녀를 곱씹어 읽는 편을 택했다.

“그러지 마십시오.”

아스티나가 충동적으로 대꾸했다. 오랜만에 과거의 감정이 튀어나온 탓일까. 아스티나는 마티나를 조롱하듯 말을 맺었다.

“사람에 확신을 가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없답니다.”

테리오드는 그에 긍정하거나 혹은 반박하는 대신 아스티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열아홉 소녀의 입에서 나올 말이, 표정이, 눈빛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그만큼 아프게 한 남자가 존재했을까.

테리오드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

마침내 마티나가 간언했다.

“전하, 혼인은 안 하십니까? 후계를 보셔야지요.”

테오도르는 대놓고 픽 웃음 지었다. 딱 봐도 확연히 기분이 상한 얼굴이었다. 마티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지 않은 반응이 돌아올 줄은 알았지만 기운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티나의 편치 못한 기색을 읽은 것일까, 왕이 심히 불량스러운 태도로 탁상에 다리를 올렸다. 나른한 눈이 불쾌히 뜨였다.

“나보고 외척이란 말에 눈이 벌게진 돼지들의 자식을 품으란 말인가?”

“그게 왕의 의무 중 하나입니다.”

마티나는 정공법을 택했다. 아름다운 영애들을 궁 안에 들여 우연한 마주침을 계획하거나 자주 연회를 벌이는 등의 우회책이 그간 전혀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테오도르가 왕좌를 차지하고 벌써 일 년 가까이가 흘러 있었다. 왕권과 내실을 다졌으니 슬슬 후사 걱정을 할 단계인데 마티나의 주군은 너무나도 태평했다.

혼인을 권하던 신하들은 엉덩이를 걷어차여 내쫓겼고, 궁리하던 그들이 마지막으로 찾은 건 마티나였다. 고집이 심한 테오도르 왕도 공신의 말은 어느 정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마티나는 본의 아니게 몇 달째 수도에 머물고 있었다.

본디 후작위는 수도에서 먼 변경의 땅을 관리하던 자들에게 주어지던 작위였다. 천한 집시가 귀족이 되는 파격적인 인사에 별말이 나오지 않았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 결정엔 마티나를 변방으로 보내 그녀의 무력을 이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투명히 비쳤다.

그런 마티나가 왕의 일로 수도의 귀족 행세를 하고 있으니 이도 웃기게 된 일이다. 테오도르는 앞선 결정과는 반대되게 마티나에 대한 총애를 거침없이 드러냈다. 자연히 그녀를 향한 견제의 시선이 벌게졌다. 마티나는 테오도르가 저를 말려 죽이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짐은 이 청춘을 조금 즐기고 싶다네.”

테오도르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마티나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밤에 여인이라도 들이시면 또 모르겠습니다.”

마티나로서도 불쾌히 생각하는 점이긴 하나, 한 체제의 꼭대기에 선 남자라면 자연히 부와 명예에 이어 여색을 탐하게 되는 법이다. 그것이 그야말로 보통의 경우였다.

그러나 마티나가 알기로 지난 일 년간 테오도르의 침실에 들어간 여자는 궁의 시녀들 외에 아무도 없었다. 그 시녀들을 추궁해 보기도 하였지만 테오도르의 정절에 더욱 감탄하게 됐을 뿐이다.

이는 혈기왕성한 이십 대 남성이 취할 태도가 아니었다. 원하면 누구든 취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라면 더더욱 말이다. 테오도르가 백의 처첩을 들여 복상사하길 바라는 건 아니었지만 수절은 더더욱 안 될 말이었다.

“내 침실 사정을 그대가 어떻게 알지?”

마티나의 말이 귀 언저리에 턱 걸려, 테오도르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근래 테오도르는 마티나가 자신의 특정한 분야에 관심을 보이는 데 심히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마티나는 무표정하게 픽 웃어 보였을 뿐이었다.

“시녀 아이들이 그리도 떠드는데 모를 수가요. 다들 저희 왕의 불능을 염려하느라 걱정이 많습니다.”

테오도르가 그대로 등받이로 늘어졌다. 김이 샌 태도에 마티나의 눈이 의아한 빛을 띠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테오도르가 언뜻 장난스럽게 물었다.

“걱정되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마티나가 반문했다.

“뭐가 말씀이십니까?”

“짐의 불능이.”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여전히 주군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불능으로 야기될 상황이라고 하면 블란체의 대가 끊기는 일뿐이었다. 기실, 그건 마티나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왕이 성을 내린 이래 마티나는 주군을 성실히 보필해 왔다. 다만 보통의 귀족이 왕가 자체를 경배한다면 마티나의 충정은 테오도르 단 한 사람에 한정했다. 그녀가 왕으로 받아들인 인물은 오직 그 하나였다.

블란체 왕가가 대대로 영광스러운 삶을 사는 데는 관심이 없다 못해 불쾌하기까지 하였으나, 테오도르의 자식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마티나는 왕이 애써 이룬 것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는 결국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솔직히 저는 블란체 왕가의 존속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내 말은…….”

“제가 걱정하는 건 테오도르, 당신의 미래입니다.”

테오도르가 그녀의 말을 저지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당황해하는 마티나를 뒤로하여 홱 몸을 돌렸다. 왕은 잠시간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창가만 내다보았다. 이윽고 그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명령했다.

“나가 봐.”

손가락에 입술이 짓눌린 탓인지 발음이 불분명했다. 왕의 표정을 볼 수 없었으나 마티나는 충분히 그 분노를 짐작했다. 그녀가 어금니를 깨물며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 충성은 당신을 향한 것이지 블란체를 향한 게 아닙니다.”

마티나는 왕이 저의 불완전한 충정에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귀족들은 겉으로나마 평생을 왕가에 충성할 것을 맹세하지 않던가. 왕이 그동안 저를 유하게 대해 와 본인도 그만 실수를 저지른 것 같았다.

마티나가 스스로의 방만을 자책할 때였다. 테오도르는 이번에도 알 수 없는 질문을 했다.

“그대에게 내가…… 중한 사람인가?”

마티나는 잠시간 눈만 깜빡였다. 잠시 쓰게 웃었으나, 그 미미한 미소는 사라지지 않은 채 마티나의 입꼬리에 머물렀다.

“삶의 이유 아니십니까.”

테오도르와 마티나는 각기 서로에게 두 번째 생을 주었다. 마티나는 테오도르를 왕으로 만들었고 테오도르는 마티나에게 여생의 목표를 만들어 주었다. 그보다 더한 의미가 있을까.

마티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왕에게 맹세했다.

“앞으로도 남은 평생을 당신을 위해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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