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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삿된 사람들 (3/23)

3. 삿된 사람들

수도의 사정을 모르는 아스티나는 매우 평화로운 한때를 보냈다. 그녀 인생에서 이렇게 한가로웠던 적이 또 없었다.

마티나였을 때는 매일이 말 그대로 전쟁이었고, 아스티나가 된 후 강도가 덜해지긴 했으나 어쨌든 마찬가지로 부지런한 삶을 살았다. 전생을 기억해 낸 탓에 아스티나는 모두가 먹고 자기 바쁜 유년조차 지난 역사를 알아보는 데 할애해야 했다. 산 넘어 산이라고 했던가. 그녀가 겨우 아스티나의 삶을 받아들이기로 했을 즈음엔 아카데미 진학 시기가 다다라 있었다.

벨라체 아카데미는 귀족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거치는 교육 기관이었다. 평민도 입학이 가능은 했으나 매우 특수한 경우였다. 세기에 남을 천재가 아닌 이상 두꺼운 계급층을 비집고 들어오긴 힘들었다.

귀족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학교이니만큼 교육비가 상상을 초월해 7년 내내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독종이 아니면 버텨 내질 못했다. 때문에 그들은 남들이 잠든 새벽까지 책에 파묻히곤 했다. 아스티나는 그만큼 열성적으로 학업에 매달리진 않았으나 부모님을 위해 매해 적당한 성적을 유지했다. 귀족이라고 졸업이 쉽지만은 않았다.

특히 까다로운 건 출석이었는데, 3번 이상 수업에 빠지면 진급 시험에서 감점이 있었다. 덕분에 아스티나 역시 매번 지겨운 수업에 얼굴도장을 찍어야 했다. 아스티나는 이번 해 칸나의 유급이 몹시 염려되었다. 저를 쫓아왔다면 수업을 여러 번 빠졌을 테니 말이다.

칸나는 이미 한 번의 휴학으로 스물하나에 졸업 학기를 이수하고 있었다. 본래는 열셋에 들어가 스물에 마치는 학사 과정이었다. 한 번 더 졸업을 유예하는 건 부모님에게나 칸나에게나 곤란한 일이었다. 그녀 역시 결혼 시장에 나서야 할 시기였기 때문이다.

칸나와 아스티나처럼 늦게까지 약혼자가 없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래서 아탈렌타가 칸나를 지명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남의 약혼녀를 뺏는 것은 대단히 야비한 일로 도덕성에 큰 지탄을 받았으니까.

아스티나는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신부가 죽을지도 모르는 혼처만큼 비열한 것도 또 없겠지만.’

어쨌든 이 결혼으로 인해 아스티나는 당분간 모든 일에서 느긋하게 멀어질 수 있었다. 결혼이 휴가가 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아스티나는 간만에 찾아온 단비 같은 휴식을 한껏 즐기고 있었다. 오늘은 특히 날이 좋아 후원에 조촐한 티타임을 벌인 참이었다. 알싸한 차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아스티나는 천천히 들고 있던 책장을 넘겼다. 독서에 심취한 눈동자가 부드럽게 굴렀다. 이미 끝마친 책 몇 권이 테이블 너머로 밀려나 있었다. 제목은 대체로 비슷했다.

<우리 개가 달라졌어요>

<명견으로 가는 100가지 훈육법>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아스티나는 들고 있던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는 바로 다음 것을 집어 들었다. 특히 마음에 들어 가장 마지막으로 미뤄 두었던 책이었다. 제목부터 그녀의 현주소와 정확히 일치했다.

<현명한 안주인이 늑대를 길들이는 방법>

아스티나는 책을 중간부터 펴 들었다. 훈육의 기본은 방금까지 읽은 것들로 모두 익힌 참이었다. 이제는 심화 학습이 필요했다. 아스티나는 설렁설렁 본문을 읽어 내렸다.

[“아흑!”

저를 간질이는 손길에 그만 신음을 참을 수 없었다. 지엄한 공작 부인의 흐트러진 모습에 그의 눈이 맹렬하게 불타올랐다.

그는 공작 부인의 사랑을 갈구하는, 마치 한 마리의 늑대였다. 공작 부인은…….]

“…….”

아스티나는 책을 덮었다. 제목만 보고 골라 왔더니 이런 불상사가 발생했다. 사실 아스티나가 테리오드와 해치워야 하는 일은 이 책에 더 가깝기야 하겠으나, 테리오드의 상태가 나아지지 않는 이상 다 무용지물이었다.

그녀는 눈을 돌려 조금 떨어져 있는 테리오드를 응시했다. 아스티나는 책을 보면서도 손에 쥔 목줄을 놓지 않고 있었고, 덕분에 괴물 대공은 꼼짝없이 그녀의 발치에 엎드려 시간을 죽여야 했다.

아스티나는 책들을 테이블 너머로 치워 버리고는 바닥에 두었던 양동이를 열었다. 순식간에 퍼지는 피 냄새에 늑대가 고개를 들었다. 아스티나가 준비한 건 익히지 않은 소고기였다.

훈육을 위해서는 채찍과 당근 두 가지가 필요했다. 전자는 아스티나만으로 충분했으나 괴물 대공이 무엇을 상으로 받아들일지는 불분명했다. 고민하던 아스티나는 보편적인 상인 간식을 준비했다. 나쁜 선택은 아니었는지 테리오드 역시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이제부터 그에게 사람과의 교감이라는 걸 가르쳐 볼 생각이었다.

“테오.”

멋대로 테리오드의 이름을 줄여 부른 아스티나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

테리오드의 앞발이 아스티나를 빠르게 후려쳤다. 아스티나는 뒤로 물러서 아슬아슬하게 그것을 피했다. 괴물 대공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어쨌든 앞발을 내밀었으니 명령을 따른 걸로 보아도 될까, 아스티나는 잠시 고민했다. 태도가 심히 불량하긴 했지만 처음부터 많은 걸 기대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아스티나는 양동이에서 고기를 꺼내 테리오드에게 주었다. 항상 때리기만 하던 여자가 먹을 것을 내밀자 상대는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식욕을 이기진 못했는지 곧 조심스럽게 받아먹었다.

“테오, 앉아.”

아스티나가 다시금 명령했다. 테리오드는 미동도 없었다. 고기를 다 먹어 치운 괴물 대공은 대놓고 아스티나를 외면했다. 아스티나가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많이 어렵니?”

생각해 보니 방금은 손을 내밀면서 말해 대충 알아들었겠지만, 앉으란 말은 이해가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에게 시범을 보이기로 했다.

그녀는 테리오드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물론 그녀에게 있어서만 지그시 누른 것이었고 테리오드는 어깨가 떨어져 나가는 감각을 느꼈다. 늑대의 눈에 분노가 차올랐다. 저 여자를 만난 뒤로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사냥 본능을 억눌러야 하는 건 둘째 치고 시시때때로 목줄을 조이고 때리는 통에 나날이 고통스러웠다.

힘에서 밀리는 순간 패배라는 걸 알았지만, 괴물 대공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무릎이 굽혀졌다. 맹수의 자존심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그의 목에서 가련한 신음이 흘렀다.

“아주 잘했어.”

아스티나가 흡족한 얼굴로 박수를 쳤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녀가 훈련에 보이고 있는 열정은 어디까지나 그에 대한 호의에서 기인했다. 레테 백작가의 빚을 갚아 준 건 결과적으로 테리오드의 돈이었다. 공가의 모든 게 그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병을 낫게 하진 못하더라도, 그가 저 없이도 사람들 속에 섞일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모두에게 사랑받았던 옛 테리오드 대공에 대해 어느 정도 연민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티나는 현명한 주군이었지만 사랑받는 우상은 아니었다. 그녀의 혈통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고귀하다고 말하긴 힘들었다. 하층민 출신에 대한 편견의 시선이 사회 전체에 깊었다. 마티나가 힘을 얻고 난 후에도 은근한 멸시는 계속 이어졌다.

특히 테오도르에게 작위를 수여받고 난 직후에는 견제가 극심했다. 유서 깊은 귀족들이 마티나에게 보이던 건방진 태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뒤로 숨어들었지만, 결코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제위에 오른 마티나가 그들을 통치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은 공포였다. 효과적이었지만, 사람을 진심으로 따르게 하진 못했다. 날 때부터 왕자님이었던 고귀한 테리오드 대공과는 다르게.

아스티나는 단 한 가지만 교정되어도 이 훈련이 성공적으로 끝나리라 생각했다.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 것. 그러려면 우선 주인에 대한 존경심을 가져야 했다. 그녀가 독파한 애견 서적들이 준 깨달음이었다.

“다시, 앉아.”

어깨가 부러지고 싶지 않았던 테리오드는 결국 스스로 무릎을 굽혔다. 아스티나는 생경한 기쁨을 느꼈다. 그녀는 동물을 길러 본 적이 없었지만 이제 애견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스티나가 테리오드를 칭찬하며 그의 머리털을 헤집을 때였다. 누군가가 대경실색한 얼굴로 달려왔다.

“저…… 저 무엄한……!”

머리가 다 벗겨져 정수리가 훤한 중년 남성이었다. 차림새가 제법 기품 있는 것을 보아 귀족인 듯했다. 대공저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외지인은 없으니 가신 중 하나가 분명했다.

“대공비 전하, 지금 지엄하신 가주님께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가 벌컥 화를 냈다. 아스티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저를 무시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대공비에게 감히 취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엄한이라니, 제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떠드는가.

대공가의 가신들은 테리오드를 아끼는 데 반해 다른 사실엔 지나치게 관심이 없었다. 후손을 생산하고자 사지에 여자를 들이는 일이 그에 속했다. 아스티나는 대공에게 약을 먹이자는 의견이 가신들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남자의 뒤로 익숙한 얼굴이 쫓아왔다. 집사 올리버였다. 그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얼굴이었다. 중재하려는 듯, 올리버가 매끄러운 투로 아스티나에게 남자의 이름을 일러 주었다.

“대공가의 가신 중 하나이신 버논 남작이십니다.”

남자가 그런 올리버를 밀치며 재차 아스티나를 꾸짖었다.

“아무리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고는 하나 엄연한 지아비이거늘. 이게 무슨 추태입니까, 대공비!”

아스티나의 눈이 서서히 가늘어졌다. 아스티나가 곁에 없었다면 테리오드 곁에 다가오지도 못했을 인간이 온갖 위세는 다 부리고 있었다.

아스티나가 싸늘하게 말했다.

“뒤에서 비겁한 계략을 짜고는 숨은 이가 누군가 하였는데, 제법 행동에 맞는 생김이시군.”

비열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딱 간신의 상이었다.

아스티나의 날 선 비웃음에 버논 남작의 얼굴이 당황을 띠었다. 저보다 한참 어린 아스티나가 감히 대들 줄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이젠 대공비가 되어 저보다 신분이 높긴 하나, 버논은 그녀를 그저 돈으로 사 온 신부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그의 눈빛에 담긴 멸시가 몹시 불쾌했다. 그녀가 팔려 왔다면, 버논 남작 역시 그녀를 사는 데 동조한 이들 중 하나였다.

올리버가 말리려 들었으나,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버논 남작은 제 성질을 그대로 드러냈다.

“대공비 전하, 지금……!”

“그래, 내가 대공비인 것으로 알고 있소만. 그대는 나를 일개 시장 아낙처럼 대하는군. 이 불손함이 대공가에 대한 반기라고 보아도 될까?”

우아한 음성으로 비꼰 아스티나가 제 발치에 앉아 있던 테리오드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상냥하게 그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니, 테오?”

늑대가 이를 드러냈다. 아스티나를 향한 반항심 때문이었지만, 공포스러운 모습에 버논 남작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아스티나는 천천히 굽혔던 허리를 세우고는 마저 일갈했다.

“대공 전하께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이상 아탈렌타가는 그의 부인인 내가 통솔하는 것이 맞겠지. 앞으로는 선을 넘지 않길 바라오.”

아스티나가 손을 들어 버논 남작의 뺨을 툭툭 쳤다. 모욕적인 행태에 버논 남작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별다른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 테리오드가 송곳니를 내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스티나가 자애롭게 말을 맺었다.

“그 매끄러운 혀는 지켜야지.”

버논 남작이 당황한 얼굴로 더듬더듬 답했다.

“말,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대공비.”

“제 잘못을 돌아볼 줄도 모르는 자군, 금수보다 인간 된 도리를 몰라서야 사람으로서 면이 서겠나?”

아스티나가 비웃듯이 대꾸했다. 날것의 비난에 버논 남작은 체통을 지키지 못했다. 그는 황급히 제 행동에 대한 변명을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대공비 전하께서 하신 행동은 엄연한 대공 전하에 대한 모욕으로써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어찌 신하 된 도리로 이를 모른 척하겠습니까!”

아스티나는 그의 가치관이 꽤나 우습다고 느꼈다. 그녀가 보기에 버논 남작만큼 제 주인을 무시하고 있는 자가 없었으니까. 테리오드의 상태 호전에 대한 일말의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으면서 뒤늦게 아스티나가 그를 길들이자 불평만 쏟아 놓다니. 그녀가 없었다면 사람이 몇이나 더 죽어 나갔을지 모를 일이었다.

아스티나가 테리오드와 혼인하며 구한 것은 레테 백작가만이 아니었다. 우리에 가둬 두었다고는 하나 맹수였다. 관리의 문제로 언젠가는 사고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안이한 성미는 그가 피해를 보지 않는 계급이기 때문에 나온 것이겠지. 괴물 테리오드를 돌보는 것은 사용인이지 탁상공론을 나누는 가신들이 아닐 테니 말이다.

아스티나는 은혜도 모르는 치에게 싸늘하게 웃어 보였다.

“존경하는 대공께 약을 먹여 가축 취급하는 건 모욕이 아닌가?”

허를 찔린 버논 남작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이 당혹으로 굳어졌다. 본인이 저지른 짓을 상기한 탓이었다. 자신도 알게 모르게 주인을 짐승 취급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가 아는 테리오드라면 애초에 이 끔찍한 결혼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협박으로 신부를 들여 억지로 합방시키는 짓은, 더욱이 경멸하다 못해 격노했을 터였다.

버논 남작은 무어라 대답하려 하였으나, 입 밖에 꺼내 놓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대공비의 말이 정확히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아스티나는 그에 그치지 않고 버논 남작의 죄에 쐐기를 박았다.

“누가 감히 주인의 교배를 명하지?”

목소리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아스티나는 스스로의 힘으로 인간들 중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지배에 익숙했다.

문득 입 안이 건조해진 것을 느껴, 버논 남작은 그만 침을 삼켰다. 어느새 저도 모르는 사이 주먹을 말아 쥐고 있었다. 긴장한 그의 얼굴을 보며 아스티나가 피식 웃었다.

“위아래 구분이 되었다면, 이만 가도 좋소.”

그녀가 묵직하게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먼지를 털어 주는 듯한 행동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제 위에 있는 사람에게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버논 남작은 아스티나가 저를 한없이 아래로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건 실제로도 사실이 맞았다. 버논 남작이 행했던 무례와는 다르게.

그가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무례에 사죄드립니다. 대공비 전하.”

아스티나는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까딱였다. 버논 남작은 입 하나 벙긋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경직된 걸음걸이로 그가 후원을 떠났다.

아스티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냥 말로만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이것으로 주제를 깨달으면 좋겠지만, 아스티나가 살아온 경험으로 유추하기에 그는 조만간 크게 사고를 칠 성미였다. 일을 크게 키우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싹을 밟아 주어야 했다.

버논 남작이 사라져 보이지 않을 즈음, 아스티나가 올리버에게 물었다.

“저자가 대공저에 출입한 이유가 뭡니까?”

올리버는 아스티나가 저에게 존대를 쓰는 것에 몹시 당황했다. 그녀가 대공저에 도착했을 무렵부터 그래 왔던 일인데 말이다.

올리버는 아스티나가, 존대보다는 반말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대공과 혼인하기 전 그녀는 백작가의 일개 영애일 뿐이었기에. 낮은 신분은 아니었으나, 누군가에게 그렇게 고압적으로 굴 수 있을 만한 위치도 아니었다.

올리버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대공저에서 회의가 있는 날이라 그렇습니다.”

“그걸 나는 왜 지금 알았을까?”

아스티나의 음성이 차가워졌다. 올리버가 황급히 변명했다.

“원래 대공비께서는 회의에 참석지 않으십니다. 그건 대공의 의무이십니다.”

귀부인에겐 가주의 일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의 권위가 남편의 힘을 빌려야만 기능하는 이유다.

아스티나가 싸늘하게 말했다.

“의무 없는 권리는 없어요.”

“예?”

“나는 내 권리를 찾아야겠어.”

아스티나가 예기치 못하게 걸음을 떼었다. 놀란 테리오드가 아스티나를 따라가지 않고 바닥에 버티고 섰다. 그녀가 목줄을 홱 잡아당겨, 테리오드는 그대로 맥없이 끌려왔다. 아스티나를 황망하게 쳐다보던 올리버가 뒤늦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스티나는 빠른 걸음으로 정원을 지나쳐 저택으로 들어섰다. 하녀들이 이동하다 말고 멈춰서 대공비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아스티나는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테리오드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오래 사용되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사용인들의 주의가 각별하여 먼지가 쌓이는 일은 없었다.

책상으로 다가선 아스티나가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빳빳한 새 종이와 잉크, 그리고 깃펜이 놓인 공간이었다. 아스티나는 그것을 모두 꺼내 들었다. 일어선 자세 그대로 빠르게 무언가를 써 내렸다.

아스티나는 시선도 돌리지 않고 올리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요.”

“예? 무엇을…….”

“혼약서 위에 대공 모르게 찍었던 그 인감.”

올리버는 그만 혀를 씹었다. 순간 농담인가 싶었지만, 아스티나의 태세는 무서웠다. 지은 죄가 있었기에 그는 얌전히 비밀 장소에서 대공의 인감을 꺼내 왔다. 잠시 고민하던 아스티나가 이내 테리오드의 발을 잡았다. 그러고는 도장을 그에게 쥐여 주었다. 우스운 광경이었지만 올리버는 웃지도 못했다.

테리오드와 손을 겹친 아스티나가 곧장 제가 작성한 서류 위에 도장을 찍었다. 괴물 대공이 반항하지 않아 아스티나는 그 일련의 행동을 쉽사리 해치웠다. 올리버는 도통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 혹 그게 무엇인지 여쭈어도 될지요.”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숨길 것도 없었다. 아스티나는 덤덤하게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읊었다.

“테리오드 반 아탈렌타는 그 부인인 아스티나 반 아탈렌타에게 결혼 기간 동안 본인의 전권을 위임한다.”

“예?”

“명문이군요.”

아스티나는 그것을 반으로 접어 제 품에 넣었다. 올리버의 눈은 이미 튀어나올 듯 크게 떠져 있었다. 아스티나가 개의치 않고 말했다.

“가신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안내하세요.”

“아…… 안내하겠습니다.”

올리버는 아스티나의 행동에 몹시 놀란 상태였으나, 동시에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미칠 듯이 궁금해졌다.

올리버는 황급히 그녀를 회의실로 안내했다. 집무실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심지어는 같은 층이었기에, 아스티나는 몇 걸음 걷지 않아 목적지에 다다랐다.

커다란 양 문 앞에 선 아스티나가 흘긋 제 옆에 따라붙은 테리오드를 내려다보았다.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그동안 사람이 많은 곳에 데려간 적은 없었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에게 가벼운 주의를 남겼다.

“얌전히 있으면 며칠간 때리지 않을게.”

당연히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스티나는 오늘의 훈련을 떠올렸다. 앉으라는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해 직접 시범을 보였었지. 아스티나는 몸짓으로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하기로 했다.

그녀는 테리오드의 등에 묶어 두었던 검을 꺼냈다. 혹시 훈육에 필요할까 싶어 챙겼지만, 들고 다니기는 번거로워 택한 방법이었다. 아스티나는 검집을 툭툭 치고는 손가락을 교차해 엑스 자를 표시했다.

그리고 괴물 대공은 그 행동을 정확히 이렇게 이해했다.

[이 칼로 너의 목숨을 완전히 끝내 주겠다.]

테리오드가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졌다. 늑대는 영리하다더니 과연 말을 잘 듣는다며 아스티나는 만족했다.

아스티나는 그대로 문을 열었다. 갑론을박을 나누던 가신들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지금까지 그들이 이야기하고 있었던 대상이 바로 그 대공비였기 때문이다. 그 필두에 선 것은 당연히도 버논 남작이었다.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대공비에게 당한 모욕을 쏟아 놓으며 그동안 저가 얼마나 공가를 위해 몸을 바쳐 왔는지, 신의를 의심당한 기분이 어찌나 참담했는지를 극적인 어조로 떠들었다.

그 이면의 속내로 버논 남작은 이렇게 생각했다.

‘한낱 씨받이 주제에 감히…….’

오늘 대공저로 오기 전까지, 버논 남작에게 아스티나의 위치는 고작 그 정도였다. 유서 깊은 레테 백작가의 자손이기는 했으나 만약 자신들이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몰락했을 가문이었다. 그들이 종종 딸을 판 레테 백작을 비웃곤 했던 건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가신들은 아스티나에게 죄책감도 가진 적이 없었다.

‘백작이 그대로 파산했다면 오늘내일했을 목숨이 아닌가?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마찬가지인 것, 아탈렌타와 거래한 건 수지맞는 장사였다.’

같은 무리이니만큼 가신들은 뜻을 공유했다.

테리오드가 온순해진 건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사람으로 돌아온 것도 아니었다. 가신들은 정신이 온전치 않은 테리오드를 등에 업고 일을 벌이는 아스티나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심지어 테리오드를 길들인 일조차 간사한 수라며 폄하했다. 그게 무엇인진 알 수 없으나 수상한 방법을 쓴 게 분명하다며 말이다.

첫날밤 문 앞을 지켰던 사용인들에게 ‘대공비가 대공 전하의 급소를 찔러 기절시켰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걸 믿는 이는 없었다. 연약한 여인이 힘으로 맹수를 길들이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러나 그들은 회의실로 들어선 대공비를 본 순간 경악해야 했다. 가신들 중 테리오드의 상태를 실제로 본 이는 많지 않았다. 그들은 괴물이 된 주군의 상태를 살피려 위험을 감수하기엔, 제 안위를 너무도 끔찍이 아끼는 사람들이었다. 이는 대공비가 괴물 대공을 길들인 일을 가볍게 여겼던 이유기도 했다.

“처음 인사드리는군요, 아스티나 반 아탈렌타입니다. 다들 만나 뵙게 되어 기쁩니다.”

아스티나가 정중하게 인사한 뒤 상석으로 올라섰다. 누구도 그를 막지 못했다. 흉흉한 기색의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의 옆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괴물 대공이 제 옆자리를 스쳐 지나가자 두려움에 오줌을 지리는 자도 있었다. 담이 약한 몇몇은 비명 지르며 회의실을 뛰쳐나갔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조차 굳은 몸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나마 먼저 테리오드를 보아 익숙해진 버논 남작이 물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대공비 전하.”

“아시다시피 대공가를 위해 헌신하는 가신들께 인사드릴 일이 없었지 않습니까. 저는 오늘 후원에서 뵌 버논 남작님 빼고는 아는 분이 없답니다.”

아스티나는 버논 남작이 아닌 가신들 전체를 내려다보며 답했다. 그중 하나가 쥐꼬리만 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여긴 대공비 전하께서 오실 자리가 아닙니다.”

“주인이 제 것을 살피는 데 이유가 있습니까?”

“주인이라뇨, 대공비 전하. 아까 전부터 생각했는데 언행이 무도하십니다. 대공 전하가 어엿이 살아 계시거늘 비전하께서 어찌 주인이 되신단 말입니까.”

버논 남작이 마지막 용기를 끌어 올려 반박했다. 그는 제 밥그릇엔 누구보다 민감했다.

아스티나는 말없이 집무실에서 작성했던 위임장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그것을 펼쳐 버논 남작에게 건네주었다. 버논 남작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 이건. 아니, 이게 무슨……!”

“앞으로 공가에 대한 관리는 제가 맡습니다.”

좌중을 둘러본 아스티나가 이어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반대는, 대공 전하 본인이 아닌 이상 듣지 않습니다.”

버논 남작의 놀란 반응에 다른 가신들이 황급히 그에게서 서류를 뺏어 들었다. 웅성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가신 하나가 시뻘겋게 변한 얼굴로 소리쳤다.

“이,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대공께서 어떻게……!”

“대공께서 직접 승인하신 사항입니다.”

아스티나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아스티나가 올리버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지요?”

“예, 예…… 맞습니다만…….”

문 앞에서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올리버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어쨌든 사실은 맞았으니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속으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걸 감히 입 밖으로 내는 자는 없었다.

그들의 대공비는 방금 목줄을 건 테리오드를 끌고 들어옴으로써 괴물 대공을 길들였다는 소문이 진짜임을 증명했다. 버논 남작에게 듣기로는 후원에서 무엄하게도 테리오드를 조련하고 있었다고 했다. 맹수를 앞에 두고 함부로 반발하기엔 그들은 몹시 담이 작았다. 혹시 그녀가 마음에 안 드는 이를 물어뜯으라 시킬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테오, 불만 있니?”

아스티나가 테리오드의 등을 쓸며 물었다. 순간 괴물 대공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아스티나가 회의실로 들어오기 전 자신을 완전히 죽이겠다고 말했던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아스티나가 만진 위치는 하필 그녀가 검을 매어 둔 곳이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테리오드가 그만 참지 못하고 짖었다.

“컹!”

“없다는군요.”

아스티나가 뻔뻔하게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반발은, 당연히 나오지 못했다.

* * *

“젠장, 빌어먹을!”

쾅, 부서질 듯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한 남자의 격한 움직임에 흰 먼지가 일어났다가 공중에 흩날렸다. 창 하나에서 들이친 빛이 겨우 사위 분간이 될 정도만 방을 밝히고 있었다.

그러나 어두운 실내는 음울한 행색과는 반대로 고양된 분위기였다. 그곳엔 중년 남자 열댓 명 정도가 심각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울분을 삭이지 못한 낯엔 하나같이 분노가 서린 채였다.

누군가 거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누가 항의는 해 보았습니까.”

동시에 저마다 먼저 발언하려고 하여 삽시간에 주변이 왁자지껄해졌다. 공기를 채운 건 대개 강아지로 시작해 성기를 뜻하는 비속어로 끝나는 말들이었다.

말을 꺼낸 이가 놀라 몸을 움츠리자, 그 옆에 있던 가신 하나가 귓속말을 속닥거렸다.

“불만 있으면 대공님과 단둘이 얘기해 보라고 하십니다. 아탈렌타 가주의 집무실은 언제나 열려 있다고요.”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을 크기는 아니었던지라 누군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화를 참지 못하고 고함쳤다.

“이런 개좆같은 일이 다 있나!”

체통 따윈 집어던진 쌍욕이 튀어나왔다. 그는 그에 그치지 않고 제 앞에 놓여 있던 서류 뭉치를 집어 던졌다.

귀족으로서 어울리지 않는 처신이었지만, 다들 똑같은 심정이었기에 아무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거침없는 쏟아 냄에 대리 만족을 느꼈다. 요 며칠 내내 가슴께가 답답하였는데 잠시라도 속이 시원해지는 듯했다.

특히 버논 남작은 크게 감명받았는지 예의 욕을 입속으로 반복해 곱씹었다. 그 대상이 그들의 대공비, 아스티나인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앞으로 공가에 대한 관리는 제가 맡습니다.’

아스티나가 대공의 전권을 위임받겠다고 선언한 이후 가신들 전부에겐 비상이 걸렸다. 한때 충정을 맹세했던 열의 있는 젊은이들은 여기 없었다. 늘어난 뱃살과 이마에 돋아난 여드름이 그들의 기름진 생활을 반증했다.

테리오드 대공이 정신을 놓은 이후 그들은 내내 방목당했다. 견물생심이라고 했던가. 주인 잃은 막대한 재산을 보고 욕심을 품지 않을 자는 없었다. 심지어 그들이 빼낸 재화는 아탈렌타의 막대한 부에 비해 약소하여, 육안으로 보기에 그다지 티가 나지도 않았다. 가신들의 눈이 벌게진 건 당연지사였다.

웃긴 것은 그들이 테리오드에게 가진 연민이, 그렇다고 거짓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가신들은 진심으로 그들의 귀공자를 아꼈었다. 다만 호감과 실리는 대상을 달리했다. 그들은 제정신일 때의 테리오드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것과 착복은 다른 문제였다. 기실 가신들은 테리오드가 정신을 잃은 후 그를 더 좋아하게 됐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후사 문제에 제 일처럼 매달릴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보면 한 가지였다. 가신들에게 아탈렌타가는 일종의 직장이었다. 후사가 끊기면 그들이 충성할 가문이 사라지며, 이는 곧 실직을 의미했다. 황가는 후계를 잃은 대공령을 기꺼이 제 아귀에 삼킬 것이다.

그러나 테리오드가 후사를 보면 명목상이나마 아탈렌타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자식이 성년이 되기까지 기다리는, 20여 년의 시간 동안은 그네들의 세상이 도래하게 되는 셈이었다.

‘잘만 하면 삼대가 놀고먹을 수 있다.’

그들은 기회주의에 취했다. 이전에도 그러했던 이들은 욕심을 더 키웠고 이전에 그리하지 않았던 이들은 조심스레 발을 담갔다. 그 수위가 점점 발목을 넘어 턱 언저리까지 치달았음은 당연지사였다.

한참 물욕을 유영하던 이들은 문득 제 머리 위에 진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대공비의 형상이었다. 그제야 그들은 제가 몸담은 욕심이 바다가 아니라 좁디좁은 연못이었음을 깨달았다. 도망칠 곳은 없었고 유일한 입구는 맹수가 지키고 있었다. 마땅한 수를 내지 않으면, 곧 잠겨 죽을 것이다.

“어차피 어린 계집에 불과하니, 겁이나 좀 줍시다. 사내를 시켜 욕을 보이면 다루기 더 쉬워지지 않겠소.”

막다른 상황에 험악한 의견이 튀어나왔다. 새어 나간다면 반역으로 목이 잘릴 법한 말이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가신들이 그에 동조했다.

“완전히 없애는 건 곤란합니다. 그래도 대공이 실제로 제어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나마 온건한 사상을 가진 이가 만류했다. 무엇보다 아스티나가 아이를 낳기도 전 그녀를 대공가에서 치울 수는 없었다. 아탈렌타엔 후계가 필요했다.

“진짜로 끝까지 일을 벌일 필요는 없소. 오밤중 대공비가 사라졌고, 하녀들이 구겨진 이부자리를 발견했다는 결말이면 만족스럽지. 추문을 만들어 두는 걸로 충분합니다. 반쪽짜리 명예를 지닌 대공비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어 있겠소?”

누군가 음험한 어조로 반박했다. 마음에 드는 비책에 늙수그레한 얼굴의 남자가 껄껄 웃었다.

“간만에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시는군.”

“나야말로, 이번 기회에 다시 봤소.”

똘똘 뭉친 가신들은 그들만의 친목을 다졌다.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친구라더니, 공동의 적이 등장하자 반목하던 이들조차 화기애애해졌다. 과반수가 아스티나를 납치하는 데 찬성했고, 그들은 빠르게 역공을 모의했다.

과연 완벽한 비책이었다. 정조 잃은 대공비라, 속은 썩어 문드러졌을지언정 겉으로는 금욕을 숭상하는 귀족 사회에서 이보다 낯부끄러운 일이 없었다. 추문만으로도 그녀의 명예는 땅으로 추락하리라.

다만 그 계획에 문제가 있다면, 아스티나가 싸움의 첫째 원칙인 ‘먼저 치는 사람이 이긴다.’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우당탕거리는 시끄러운 소음이 복도부터 번져 들었다. 큰 소란에 가신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오를 때였다. 그들 무리 중 하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 들어왔다.

“큰일 났소이다!”

“이게 무슨 소란이야, 지금 회의 중인 거 안 보이나? 늦게 왔으면…….”

이 상황에서도 체면을 따지는 동지들에, 남자가 그만 악을 쓰듯 소리쳤다.

“아르델 준남작이 체포되었어!”

* * *

아스티나는 계획적인 생활을 준수했다.

새벽 다섯 시면 기상해 연무장에서 검을 연마했고 ―이 시간에 출근하는 기사가 없어 집사 외의 그 누구도 이 사실을 몰랐다― 씻고 단장을 마친 후엔 테리오드와 함께 산책을 돌았다.

대공가의 저택은 넓디넓어 후원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후엔 대체로 책을 보거나 하며 시간을 때웠으나, 그녀가 대공의 대리인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집무가 시작되었다. 아스티나의 꿀 같은 휴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잃어버린 휴식이 아깝긴 했으나,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그게 그녀의 본성이었기 때문이다.

‘슬슬 심심하기도 했고.’

황제일 적의 그녀는 단 한 번도 쉬어 본 적이 없었다. 마티나가 왕위에 오른 건 전적으로 테오도르 때문이었지만, 이후 이어진 열정적인 정복까지 그 상처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지나치리만큼 세력을 확장한 이유는 마티나가 너무도 대단한 일 중독자였기 때문이다.

마티나일 때의 그녀는 무시당하는 게 곧 죽음인 삶을 살았다. 레타의 일로 첫 깨달음을 얻었으며, 황궁에서는 얕보이는 것 그 자체로 약점이 되었다. 마티나는 언제나 저를 내려다보는 자들을 짓밟고 올라섰다. 그녀는 감히 아탈렌타의 가신들이 저를 아래로 보는 걸 견딜 수 없었다. 그 고귀한 아탈렌타조차 한때는 그녀의 신하였다.

‘칸나, 위험한 건 약해지는 거야.’

어릴 적 칸나에게 했던 말은 바로 그녀의 인생관이기도 했다. 아스티나가 유명무실한 대공비로 남았더라면 앞으로도 이 결혼과 같은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아스티나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아주 불쾌한 일들이 말이다.

대공비라는 작위가 있다고는 하나 아내가 가문에서 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친정의 힘이 막강하여 남편도 눈치를 보거나, 아니면 부인을 진정으로 사랑하여 귀애하거나.

아내의 힘은 남편에게서 나온다. 그러나 괴물이 된 테리오드가 아스티나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 힘을 실어 줄 일은 없었다. 방법은 전무했지만, 아스티나는 무언가를 원해 갖지 못한 적이 단 한 번밖에 없었다.

아스티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대공의 힘을 빌리는 게 아닌, 아예 훔쳐 오면 되는 문제 아닌가.’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했다. 괴물 대공을 거느린 아스티나에게 감히 대들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아스티나 자체가 테리오드보다 더 강하긴 했지만 인간은 시각적 동물이었다. 살벌한 늑대의 이빨에 모두가 겁을 먹었다. 덕분에 아스티나는 어렵지 않게 집무실을 제 공간으로 삼을 수 있었다.

당연히도 밀린 일은 너무도 많았다. 그렇다고 아랫사람들이 게으름을 피웠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의견이 나와도 승인해 줄 머리가 없으면 일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법이다. 심지어 그들의 보고서엔 열의 외의 다른 장점이, 정말이지 단 하나도 없었다.

아스티나는 밀린 서류들을 검토하고는 가차 없이 평했다.

“개판이로군.”

벌써 가을이 가까웠다. 겨울을 대비해서 수도를 정비해 두어야 하는데 공사가 지나치게 미진했다.

아스티나가 검토한 서류 중 가장 많은 건수를 자랑하는 건 특산물 개발에 관한 것이었다. 기획이 채택되면 돈벌이는 자연히 따라오겠으나, 정작 가장 중요한 건을 두고 급하지도 않은 일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사람의 주시가 없는 곳에선 종종 눈속임이 발생한다.

아니나 다를까 아스티나는 착복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공사가 이루어질 규모에 비해 구입한 자재는 적었고 동시에 다른 여느 시세보다도 비쌌다.

‘차액은 관리자의 뱃속에 있겠지.’

“이 공사, 관리자가 누굽니까?”

올리버는 아스티나의 말에 단번에 대답하지 못했다. 집무실 책상 근처에 엎드려 졸린 눈을 감고 있는 테리오드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멍하니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긴 꿈은 아닌가.’

사실이라면 허탈할 지경이었다. 괴물 대공에 대한 공포가 이렇게 쉽게 막을 내릴 일이었다니. 그것도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수들 중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기실, 방법을 알았다고는 하나 아스티나가 없었다면 감히 행하지 못했을 일이기도 했다. 올리버는 멍하니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에 대해서 생각했다. 비록 아스티나를 이 집에 들인 건 천인공노할 짓이었지만, 그러기를 잘했다고, 정말이지 신의 인도 그 자체였다고 올리버는 먹먹하게 기도했다.

집사의 시선이 어디 있는지 깨달은 아스티나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녀는 깃펜을 내려놓고는 책상 모서리에 두었던 그릇에서 육포를 하나 집었다. 올리버는 그것이 허공을 날아 테리오드의 입 안으로 착지하는 걸 착잡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테리오드는 맛있게 간식을 씹어 넘기고는 포만감 어린 표정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지난번 회의실 사건 이후 괴물 대공은 급격하게 온순해져 아스티나의 말을 곧잘 따랐다.

쓸모없는 시도라는 걸 깨달았는지 사람을 물려고 하는 일이 사라졌다. 다만 정원에 나설 때마다 작은 들쥐나 토끼를 보면 흥분을 참지 못했다. 육식 동물에게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아스티나는 그것만은 눈감아 주었다.

괴물 대공의 신체 능력은 대단한 수준이었고 사냥감을 놓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목표를 말살하고는 아스티나를 돌아보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올리버의 주의를 제게로 돌린 아스티나가 짧게 명령했다.

“수도 정비 관련 담당자를 불러와요.”

“아르델 준남작이라면 마침 저택 아래에 있습니다.”

아스티나는 고개를 돌려 흘긋 창을 내다보았다. 아르델 준남작으로 보이는 이가 소란을 벌이고 있었다. 어찌나 열심인지 지나가는 사용인들이 한 번씩은 돌아보았다.

아스티나가 고개를 까딱였다.

“기사를 대동해 끌고 오세요.”

5분도 지나지 않아 아르델 준남작은 거지꼴로 집무실에 안착했다. 어쩐지 아침부터 소란스럽다 싶더니 저택을 시끄럽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여기 있었다. 본래는 아스티나에게 항의하기 위해 찾아왔던 것인데, 기세가 흉흉하여 집사가 아예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고 했다.

출입을 거절당한 아르델 준남작은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좀 더 과격한 방법을 취했다. 바로 아스티나가 밖으로 나올 때까지 그녀를 비겁자라며 비난하는 것이었다. 그래 봤자 집무실은 워낙 방음이 잘 되어, 아스티나는 창가를 내다보기 전까지 그의 존재를 몰랐다.

끌려가지 않으려 바닥을 구른 듯 아르델 준남작은 온몸에 흙이 묻어 있었다. 다만 눈만은 희열이 일렁였다. 제가 받은 이 말도 안 되는 대접을 퍼트려 그녀를 천지 분간 못하는 망나니로 만들 작정이었다.

아르델 준남작이 입바른 소리를 내었다.

“대공비 전하! 이젠 정녕 법도도 무시하는 것입니까? 대공비 전하의 독재를 더는 참을 수 없어요!”

“나는 그대가 저택 앞에서 농성을 한다 하여 불러온 것이 아닌데.”

아스티나가 덤덤하게 말했다. 아르델 준남작의 눈이 의아한 빛을 띠었다. 아스티나가 바닥에 놓아 준 장부를 보는 순간, 그의 얼굴엔 일시에 생기가 가셨다.

“이, 이게 무엇입니까.”

“모른다면 그대는 천치가 틀림없군. 무지하다면 어울리지 않는 작위를 잃을 것이고 안다면 벌을 받을 것이야.”

아르델 준남작은 빠르게 그 말을 저울질했다. 카라벨라 법령에 의거하면 그에게 내려질 구형은 벌금이나 근신이었다. 귀족의 태를 잃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르델 준남작은 빠르게 태도를 바꾸었다.

“죄송합니다, 대공비 전하. 제가 미천하여 감히 욕심을 참지 못했습니다. 벌을 내리소서.”

아랫것들이라고 있는 게 다들 이따위라니.

아스티나는 내심 한숨 쉬었다. 대공비라는 작위가 종신직이었으면 일을 도와줄 인력을 구인하였을 텐데. 일 년짜리 일에 그만한 열의를 들이는 건 아스티나도 귀찮았다. 아스티나는 되는대로 헌것을 고쳐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대 죄를 인정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대공비 전하, 이런 제 간언이 무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저는 공가를 위한 충정으로 지난 10년을…….”

“무엄하오.”

아스티나가 사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르델 준남작이 말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대공비를 올려다보았다.

아스티나는 우아한 움직임으로 바닥에 놓아 주었던 서류를 들어 올렸다. 손가락이 흰 종이 끝을 리듬감 있게 두드렸다.

“착복이 드러난 자가 혐의가 밝혀지고 쓰는 말이 감히 충정이라니, 너무 무엄하여 견딜 수가 없는 지경이오.”

아르델 준남작이 얼떨떨한 눈으로 아스티나를 응시했다. 아스티나가 상냥하게 웃었다.

“다신 그릇된 말을 품지 못하도록 혀를 지져야겠소.”

“대, 대공비 전하!”

아르델 준남작이 기겁하여 아스티나를 불렀다. 혀를 지지는 건 분명 과한 처사였다. 그의 죄는 그렇게까지 심각한 일도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녀가 데려온 아르델 준남작은 개중 비교적 죄질이 약한 이였다. 그리고 아스티나가 그를 선례로 삼은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가장 적게 남겨 먹은 자가 가장 호되게 처벌당한다면, 억울함을 배겨 내지 못할 테니까.

“저…… 저는 처자식이 있는 몸입니다. 대공비 전하, 세습도 안 되는 준남작 작위로 어찌 가족을 부양하며 살겠습니까? 생활이 빈곤하여 순간의 유혹을 참지 못했습니다. 부디 저를 가엾게 여기어 주십시오.”

아스티나가 더없이 진심으로 보였기에, 아르델 준남작은 잠시 체면을 잊고 바짝 엎드렸다. 창가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괴물 대공의 존재감 탓도 컸다. 대공비가 옆에 있을 때 테리오드가 사람을 함부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생리적인 두려움은 별개의 문제였다.

아르델 준남작이 목청을 키워 더욱 열성적으로 빌기 시작했다.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관리가 말을 못하면 나가 죽으란 소리가 아니십니까……! 차라리 죽여 주십시오.”

“더 온건한 방법이 있기야 있지.”

아스티나의 고민 어린 음성에 아르델 준남작의 눈이 일순 반짝였다. 어린 계집의 비위를 맞추는 것쯤이야 못할 것도 없었다.

아스티나는 아르델 준남작에게로 다가갔다.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일이었지만, 아르델 준남작은 그 와중 아스티나의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었다. 창가를 등져 역광이 비춘 그녀의 붉은 머리칼은 성스럽게도 보였다.

다만 아스티나의 입에서 다음 말이 나온 순간, 그는 그게 사신의 형상이었음을 깨달았다.

“아르델 준남작 독단으로 벌인 일은 아니라고 믿소.”

“…….”

“그래서, 얼마나 알고 있지?”

‘그래서, 얼마나 있는데?’

흡사 뒷골목 양아치가 소시민의 주머니를 터는 듯한 광경이었다. 이건 다른 이들의 비리를 팔고 혼자 살아남으라는 말이었다.

바닥에 무릎 꿇은 준남작이 긴장으로 굳어 들었다. 모골이 송연하였다. 그의 눈이 빠르게 아래를 찾았다. 몸은 어느새 사시나무 떨듯 경련하고 있었다.

‘우리가 사자를 데려왔구나!’

그러나 그는 고개를 공손히 조아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 * *

아르델 준남작을 체포하여 본보기를 보인 이후 대공비의 무능을 염려하는 말은 삽시간에 사그라들었다. 가신들이 그리도 논란을 만들려 노력했던 ‘독재하는 대공비’라는 구호는 몇 번 사용되지도 않고 제 용도를 잃었다.

웃기는 것은 정작 처음 잡혀 들어갔던 아르델 준남작은 경미한 처벌을 받고, 이어 줄줄이 엮여 들어간 이들만 욕을 보았다는 점이었다. 아직 구형은 내려지지 않았지만 몇몇은 중형을 피하기 힘들 것이라 여겨졌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괴물 대공의 등장 이래 가장 위세를 부렸던 이들이었다. 가신 무리의 우두머리 격이기도 했다. 위치가 높으니 더 많이 해 먹기야 했겠지만, 그 노골적인 처벌에 담긴 뜻을 이해 못할 자는 없었다.

새로운 대공비가 제게 해될 세력을 골라 미리 쳐 낸 것이다.

‘이제 누구도 감히 영민한 대공비를 거스르지 못하겠구나.’

매서운 손속에 모두는 제 마음 한구석에 있을지 모를 불충을 검열했다.

아스티나가 집무를 이어받고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인수인계라도 있었다면 그 시간 동안 어떻게 서류라도 조작했으련만, 그녀는 이전에 가문을 관리해 본 적이라도 있는 것처럼 빠른 시일 내에 대공령 내의 일을 검토했다. 그 놀라운 속도에 아랫사람들은 쫓아가기만도 바빴다.

부패한 관리인들이 잘려 나갔고 그 바로 아랫사람은 특급 승진을 이루었다. 조직의 변화에 윗선은 반발했지만 말단은 기뻐했다. 당연히 수적으로는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아스티나가 가장 많은 인기를 얻은 직업군은 단연 하녀들이었다. 식당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하녀들은 낮의 새이자 밤의 쥐였다. 대공가의 일원을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는 그녀들이 모르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저마다 아는 사실에 살을 붙여 무성한 이야기꽃을 피웠다.

“대공비 전하 말이야……. 너무 멋있지 않아?”

어린 하녀 제인이 제 뺨을 감싸고는 벅찬 한숨을 내쉬었다. 그 건너편에 앉은 안젤라가 흥분하여 속사포같이 말했다.

“난 아스티나 님이 처음 대공저에 오셨을 때부터 뵈었잖아. 그때 직접 말을 타고 오셨는데 어찌나 위엄 있으시던지, 꼭 마티나 여제가 생각나지 뭐니.”

“맞아, 붉은 머리도 똑같으시잖아.”

여제 마티나는 아직까지도 많은 여자들의 우상이었다. 여자의 몸으로 황제가 된 인물은 그녀 하나밖에 없었다. 승계여도 힘들었을 일을, 마티나는 무려 스스로 대륙을 정복하여 해냈다.

더욱이 카라벨라가 건국되기 전 대다수의 나라는 극심한 가부장제 사회였다. 지금이라고 별반 다르진 않지만, 당시엔 정도가 더욱 심했다.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이들은 남자들뿐이었고 가계에 딸린 여자는 재산 취급을 받았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된 존재였다.

가장의 권위는 상상을 초월했고 때론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식을 때려죽일 권리까지도 보장받았다. 여성으로서의 가치는 스스로의 처녀성을 소중하게 지켜, 저를 부양해 줄 남편에게 바치는 것이 전부였다. 그에 비하면 카라벨라는 급진적으로 보이리만큼 여성에게 많은 권리를 주었다.

여제라는 선례가 생겨나자 극소수의 여자들이 가문을 승계받는 일이 일어났다. 비록 아들을 낳지 못했거나, 그 아들에게 심각한 하자가 있는 경우였지만 전무한 것보다는 나았다.

가능성이라는 말은 몹시 달콤하여 재능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고위 귀족 중에선 드물게도 트리스탄가의 앤서린 영애가 후작위를 물려받아 화제를 모았다.

“집권하자마자 가신들을 싹 갈아 치우시다니, 정말 대단하셔.”

“가신이라고 부르지도 마. 주인 재산을 내먹는 놈들이 어떻게 가신이야? 난 그놈들이 미친 줄 알았어. 동물과 동침하라니, 그게 사람이 할 소리냔 말이야.”

“자기 일이 아니라 이거지. 자기 딸이나 부인이면 그랬겠어?”

제인이 비꼬듯 대답했다. 그녀는 아스티나의 업적에 완전히 취해 있었다. 고귀한 대공비 전하에게 해를 입히려 든 자들은 모두 다 파렴치한 쓰레기들이었고 걸러 냄이 옳았다. 그 맹목적인 태도에 주변 하녀들이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얼마 전 다 같이 몰려와서 무릎 꿇고 비는데 어찌나 통쾌하던지. 그동안 알게 모르게 얼마나 비리가 많았니?”

“심지어 주방에 들어가는 식재료비도 몰래 빼돌려서 우리 식사가 별로 안 좋았잖아.”

“아, 주인이 잘 들어서면 이렇게 편하구나.”

그들은 오래간만에 나온 특식으로 배를 채운 상태였다. 맛있는 음식은 주인에 대한 존경심을 고취시켰다.

누군가 문득 생각났다는 투로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버논 남작에게 줄 섰던 엘리제 꼴도 엄청 우습게 됐네.”

“그러게, 버논 남작도 같이 잡혀 들어갔다지? 평생 감옥에서 못 나올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밖으로 나오면 영지에서 추방당하는 경우일 거라고.”

“뒤 봐주는 사람 좀 있다고 그렇게 기세등등하더니, 꼴좋다.”

엘리제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하녀 하나가 코웃음을 쳤다.

처음 같이 저택에 들어왔을 때는 엘리제도 그러지 않았다. 근 일 년 사이 아예 다른 사람처럼 변한 엘리제는 권력의 무서움을 보여 주었다. 그 알량한 뒷배가 무어 그리 자랑스러웠는지 그녀는 망아지처럼 날뛰었다.

같은 하녀 주제에 버논 남작에게 줄을 대었다고 어찌나 동기들을 부렸던가.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되었으니 앞으로는 얼굴도 들지 못하리라.

“너희 지금 뭐라고 했어?!”

아니, 정도 이상의 철면피라면 못할 것도 없었다. 막 식당으로 들어서던 엘리제가 사나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무서운 기세에 하녀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이젠 그녀에게 아무런 힘이 없다는 걸 알았으나 그동안 당해 온 역사가 있어 쉽게 반항할 수 없었다.

개중 하나가 용기를 내어 반박했다.

“왜, 뭐 잘못됐니? 사실이잖아.”

“이게!”

엘리제가 팔을 휘둘렀다. 어찌나 힘이 세던지 뺨을 얻어맞은 하녀가 바닥에 쓰러졌다. 포악한 행태에 다들 기겁하여 일어섰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미쳤어?”

“다들 똑똑히 봐 둬. 함부로 남 얘기를 떠들면 어떻게 되는지.”

“너, 진짜 정신 나갔구나?”

“불만 있으면 너도 한 대 치든지.”

“뭐? 엘리제, 네가 이럴 수 있는 것도 이제 끝이야. 버논 남작이 잡혀 들어갔다는 거, 이 저택의 모두가 다 알아.”

“그래, 나도 알아. 그러니까 제발 날 좀 내버려 두란 말이야!”

엘리제가 악을 쓰듯 소리쳤다. 그녀의 눈엔 어느새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엘리제가 황급히 제 얼굴을 가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음식은 입에도 대지 못한 채였다.

식당 안 분위기가 더없이 싸늘해졌다.

숨 막히는 침묵 끝에서 누군가 입을 열었다.

“설마…….”

“버논 남작한테 줄을 댔던 게…….”

“진짜……?”

그들의 눈이 마주치며, 동시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 * *

‘이러지 마세요, 나리. 저는 마을에 약혼자가 있어요.’

‘하찮은 농노 말이냐? 네게도 내 첩실 자리가 훨씬 나을 거란다.’

‘저와 그이는 사랑하는 사이에요. 제발 보내 주세요.’

‘앙칼지게 생겨서는 반항도 제법이구나. 충분히 귀여워해 줄 테니 걱정 말렴.’

사탕발림은 속에 담긴 음험함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다. 게걸스레 목표물을 취한 남자가 알량하게 속삭였다.

‘내가 한탕 해치우면 너에게도 한자리를 주마.’

‘두려워요, 저를 놓아주세요.’

‘어차피 버린 몸, 네가 홀로 어디를 가겠느냐. 내 말을 들어라.’

비난과 칭찬이 교묘했다. 예쁘다고 말할 때는 정말 어여쁘게 보는 것 같았고 버린다고 말할 때는 진실로 내칠 것 같았다. 그래도 강압적이었던 처음 이후로는 퍽 다정하였다. 그녀가 쓸모없는 반항을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내 너를 아끼는 것을 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 커지는 동안 반대로 시야는 좁아졌다. 몸을 버린 것이 죄스러워 마을에 있는 약혼자에게 이별을 고했고 부모님과 연락을 끊었다. 영문 모를 파혼에 상대는 무릎까지 꿇으며 붙잡았지만 사실을 털어놓을 자신이 없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짜증을 부리는 일이 늘었다. 작은 일에도 화가 났고 잠 못 드는 밤은 불안했다.

그리고 얼마 뒤, 엘리제는 태기를 느꼈다.

‘나으리, 책임져 주세요. 임신한 하녀를 계속 부릴 저택은 없습니다.’

그녀가 절박하게 매달렸다. 귀찮다는 듯 저를 보던 눈동자가 느리게 굴렀다.

‘그래, 그러고 보니 대공 밑의 하녀였지.’

‘예?’

‘내 말을 잘만 들으면, 아이를 키울 수 있도록 원조해 주마.’

엘리제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애초에 불신하긴 했지만 이리 대놓고 안면 몰수 할 줄은 몰랐다.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배를 끌어안으며 더듬더듬 말했다.

‘집에 들여 보살펴 주시겠다고…… 하셨잖아요.’

‘내 어찌 평민을 가계에 들이겠느냐? 무서운 소리 말거라.’

그가 웃기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손사래 쳤다. 선연한 비웃음에 가슴이 철렁하였다.

그녀를 절망으로 이끈 남자는 이어 이전의 달콤한 목소리를 내었다.

‘지금 대공저엔 주인이 자리를 비웠지 않니. 나를 도우렴. 네가 조금만 힘쓰면 내 일이 훨씬 더 수월하겠구나.’

‘그럴 수 없습니다, 나리. 들켰다간 정말 목이 잘릴지도 모릅니다.’

그가 상냥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런, 가엾은 엘리제. 처녀가 아이를 배면 그 어디서든 제대로 살 수 없단다.’

숙소로 돌아온 엘리제는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혀를 깨물고 죽을까 했지만 무서웠다. 배 아래에 저 모르는 생명이 잉태되었다는 사실은 공포스럽기만 했다.

아이를 낳았다간 저택에서 쫓겨나 그대로 길거리에 나앉게 될 것이다. 엘리제의 가족이 명예를 버린 그녀를 보듬어 줄 리 없었다. 엘리제는 아이를 동정했지만, 모성보다는 살고 싶다는 절박함이 앞섰다. 이 불행을 떼어 내지 않는다면 굶어 죽는 수밖에는 없었다.

‘죽고 싶지 않아.’

그날 밤 엘리제는 계단에서 굴렀다.

하혈했지만 아이는 떨어지지 않았다. 의사에게 보였다간 태기를 알아챌 것이었다. 엘리제는 골병든 몸을 끌고 다음 날 대공저로 나가 걸레질을 했다. 다리를 절어 전처럼 빠르게 움직일 수 없었다. 엘리제의 일까지 대신해야 했던 동기는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며칠간 잠도 들지 못한 상태였다. 엘리제는 제 귀를 스치는 모욕적인 말들을 다 알아듣지도 못했다. 그녀는 마루 사이의 틈을 내려다보며 어지러운 머리로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하지?’

순간 엘리제의 눈에 불이 붙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그녀는 벌떡 일어나 제 앞에 선 동기의 뺨을 쳤다. 그러고는 버논 남작을 찾아갔다.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할게요. 저를 지켜 주세요, 나리.’

‘내 그럴 줄 알았단다.’

남자는 입꼬리만으로 웃었다. 그 눈빛이 서늘하여 엘리제는 못내 불안하였다. 하지만 걱정을 이기려 더욱 필사적으로 남자의 비위를 맞췄다.

‘이것 보아라. 너도 나를 원하지 않았니.’

‘나리, 약속 지키실 거지요?’

‘갈수록 귀엽게 구는구나. 내 너를 귀애한단다.’

입 안의 혀처럼 구는 엘리제에게 버논 남작은 많은 것을 주었다. 패물 반지를 몇 개 받았고 약간의 금전도 주머니로 들어왔다. 엘리제가 원하는 정보를 가져갈 때마다 버논 남작은 크게 기꺼워했다. 그가 엘리제를 아낄수록 하녀들 사이에서의 위신이 높아졌다.

엘리제는 이를 악물었다.

‘내가 원해서 이렇게 된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그런 것도 같았다.

‘모든 게 내 선택이었다.’

그녀는 버논 남작으로 인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시험해 보았다. 동료들에게 패악을 부렸고 제멋대로 말했다. 전전긍긍하여 지냈던 세월들과 반대되게 그 모든 이점들이 달콤했다. 멋대로 굴어도 그녀를 막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엘리제는 희열에 취했다.

스스로 했던 세뇌는 몹시 효과적이어서, 본인이 처음부터 이를 노리고 버논 남작에게 안긴 것 같았다. 버논 남작은 엘리제를 만날 때마다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선택이었음을 강조했다.

‘너도 좋지 않았니.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니라.’

어느덧 시간은 흘러 아이를 품은 지 4개월이 지났다. 후계를 위해 대공비가 들어왔지만 엘리제는 그녀가 제 인생에 영향을 끼칠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녀의 주인은 몹시 포악하여 우리에 들어간 여자를 살려 보낼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날 기상한 그녀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아름다운 대공비가 옛 동화마냥 괴물 대공을 길들였다!]

대공비는 그에 그치지 않고 대공의 권위를 삼키더니, 곧 저택을 장악했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버논 남작도 함께 쓸려 나갔다.

살아서는 감옥을 나오지 못할 거라는 소식에 엘리제는 절망했다. 그녀는 약간의 금전이라도 구걸하러 몰래 감옥으로 숨어들었다. 초췌한 버논 남작을 보고 약간의 통쾌함도 느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녀 역시 죽은 목숨이었다.

‘엘리제, 내 마지막 부탁이다. 이 독을 대공비의 차에 섞어라. 너와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사람을 죽이라뇨, 어떻게 제게 그러세요.’

‘내가 죽으면 너는 무사할 것 같으냐? 정보를 빼 준 게 다름 아닌 네년 아니냐! 나와 뜻을 함께하지 않으면 머잖아 너도 죽을 것이다!’

엘리제는 떨리는 손으로 약병을 받아 들었다. 사람을 죽이라니, 저가 살기 위해선 사람을 죽여야 한다니. 엘리제는 겁에 질렸다.

기실, 그녀는 언제나 겁쟁이였다. 그녀를 여기까지 끌고 온 가장 밑바닥의 감정이 바로 두려움이었다.

엘리제는 다시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그러나 그녀의 결론은 언제나 한 가지로 다다랐다. 대공저 밖으로 도망쳐도 돌아갈 집은 없었다. 파혼한 약혼자를 찾을 수도 없었다. 엘리제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은 불행하게도 그녀를 겁간한 버논 남작뿐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친다 쳐도 아이가 마음에 걸렸다.

‘마을 사람들이 탕녀라며 나를 돌로 쳐 죽일 것이다.’

엘리제는 공포에 시달렸다. 실제로 한미한 시골에선 그런 일이 종종 벌어졌다.

얼마간의 불면 끝에 그녀는 대공비의 차를 내는 일을 인계받았다. 엘리제는 버논 남작에게서 받은 독을 소매에 숨기고 집무실로 들어섰다. 서류를 살피는 대공비는 몹시 우아하여 이상한 감상을 자아냈다.

‘내가 저런 여자였으면 무엇이 달랐을까.’

만약 아스티나가 엘리제의 입장이었다면, 그렇게 힘없이 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이를 배지 않았을 것이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누구보다 멋지게 복수했을 것이다. 엘리제는 아스티나가 존경스러우면서도 증오스러웠다.

어째서 세상의 모든 불행은 나에게만 오는가.

엘리제는 속마음을 숨기고 찻잎을 담았다. 대공비는 귀찮게 달라붙는 괴물 대공 ―이젠 그렇게 부르기가 우습게 되었지만 명칭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을 손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이거 가지고 노는 거 아니야.”

테리오드가 다시금 책상에 코를 들이밀었다. 처음엔 육포를 달라고 하는 줄 알았는데 시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아스티나는 그가 붉게 찍힌 인장을 보고 있음을 알아챘다.

“도장이 찍고 싶니?”

아스티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다 사용한 이면지를 뒤집더니 하나씩 밑에 내려놓았다. 곧 테리오드의 크기에 맞는 종이 바닥이 만들어졌다. 아스티나는 그에 그치지 않고 인주를 가져와 괴물 대공의 발에 묻혀 주었다. 조심스레 바닥에 제 발을 찍어 본 테리오드가 신이 나 겅중겅중 뛰었다.

“거기서 나오면 안 돼.”

근엄하게 명령한 아스티나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읽고 있던 서류를 집어 들던 그녀가 잠시 멈칫했다. 차를 따르기 위해 들어온 하녀가 지나치게 오래 머물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그녀의 귀 끝이 빨개진 것을 발견했다. 이상함을 눈치챈 아스티나가 엘리제를 더욱 자세히 살폈다.

한참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하던 아스티나가 말했다.

“배가 불렀구나.”

엘리제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뒤돌아 있어서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한 엘리제는 급격하게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녀가 머뭇머뭇 대답했다.

“……살이 쪄서 그렇습니다.”

“누구 아이니?”

아스티나가 서류를 팔랑 넘기며 물었다. 엘리제에게 시선을 두지도 않은 채였다. 그녀의 거짓말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손안에 든 건 꺼내지 않는 편이 좋을 거란다.”

엘리제는 그만 혀를 깨물었다. 그녀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엘리제는 방금 찻잔으로 부으려 했던 약병을 그러쥐었다. 모서리에 눌린 손바닥이 저려 왔지만, 떨리는 몸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주먹 사이에 틈이 있지 않니. 차라리 물에 미리 타 오는 편이 나았겠구나.”

아스티나에게 투시 능력이 있을 수는 없었으므로, 하녀가 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다만 방 안에 들어왔을 때부터 떠는 모습이 몹시 신경에 거슬렸다.

시기가 공교로웠다. 가신들이 재산을 빼내려면 내부에도 동조자가 필요했다. 무소불위의 권위를 휘두르던 이들이 하녀 하나 미리 꼬여 내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주인 몰래 넣으려는 저것이 영양제는 아닐 것이다.

“대공비 전하, 살려 주세요!”

죽음을 예감한 엘리제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아스티나가 무심한 얼굴로 답했다.

“나를 음해하려 한 자를 저택에 두란 말인가?”

“천한 것이 잠시 미쳤었습니다. 예, 아이가 있습니다. 잡혀 들어간 버논 남작의 아이입니다. 마님, 남편 없이 출산한 어미가 어찌 되는지 아십니까. 죽는 신세만도 못합니다. 제가 두려움에 미쳐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렇게 비오니 부디 목숨만은 보전해 주십시오, 자비로운 대공비 전하……!”

엘리제가 허겁지겁 사죄를 쏟아 내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아이는 책임질 수 있는 상대와 갖는 게다.”

“전하, 비정하십니다. 그걸 몰라서 아이를 가졌겠습니까. 처녀가 아이를 배는 데엔 자의가 아닌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아스티나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엘리제는 극심한 공포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너무도 무서워서 그랬습니다. 천한 것이 방자하여 감히 살고 싶었습니다……. 살고 싶었습니다, 전하……!”

엘리제가 오열했다. 아스티나는 그런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잠시 뒤 아스티나가 말했다.

“이리 내놓거라.”

“예?”

“그 독, 다시 쓸 심산은 아닐 테지?”

믿을 수 없는 행운에, 엘리제의 얼굴에 불신이 스쳤다. 그러나 설령 아스티나가 그녀를 봐주지 않을 심산이라 해도 반항이 가능할 리 없었다. 그녀는 황급히 아스티나에게 독약을 내어놓고는 깊숙이 절했다. 다행히도 대공비는 경비를 부르지 않았다.

아스티나는 제 발에 입 맞추려 드는 엘리제를 방 밖으로 물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창가로 향하며 팔짱을 꼈다. 대공저의 후원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스티나의 곁으로 테리오드가 다가섰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머리 부근을 쓰다듬었다.

문득 시선 끝에 테리오드의 등에 매달아 둔 검이 스쳤다. 괴물 대공은 몹시 온순해져 더 이상 손을 댈 일이 없었다. 이제 굳이 훈육을 대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폭력이 남용되어서는 안 되는 법이니까.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등에 걸어 두었던 검을 완전히 빼내었다. 이대로 침실에 돌려놓을 심산이었다. 그녀에게 떨어진 품위 유지비는 백작가와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이어서 좋은 검을 하나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끼잉…….”

검을 쥐는 아스티나의 모습은 대단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테리오드의 눈이 축축해졌다.

“왜 그러니?”

“끼이잉…….”

테리오드는 눈물을 삼켰다. 그동안 말도 잘 들었는데, 결국 이 무서운 여자는 자신을 죽일 심산이었던 거다.

그러나 그녀는 검을 뽑아 저를 내려치는 대신 목을 끌어안아 주었다. 아스티나는 푹신한 은빛 털에 얼굴을 묻으며 고민했다. 조금 전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울지 마라, 뭐 씹을 것이라도 주련?”

테리오드가 몸을 뒤로 뺐지만 아스티나는 괴물 대공의 목을 안고 놓지 않았다. 결국 늑대도 몸에서 힘을 뺐다. 무서운 여자의 목덜미에선 의외로 좋은 냄새가 났다.

* * *

다음 날 버논 남작은 지하 감옥에서 끌려와 아스티나의 앞에 놓였다.

비교적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남자는 낯빛이 창백해져 있었다. 마른 입술이 부르텄고 눈 밑은 검었다. 빛에 적응하지 못한 눈이 부자연스럽게 깜빡였다. 재판까지는 얼마간의 시일이 남아 있었기에 그는 매우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아스티나의 옆에 선 엘리제를 본 순간, 그의 낯빛은 흑색이 되었다. 엘리제에게 저지른 일에 대한 후회는 아니었다. 버논 남작은 그녀에게 시켰던 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분명 중간에 들켰거나 아니면 사실을 고해 대공비 옆에 붙은 것이다.

버논 남작은 고개를 숙이고 남몰래 이를 갈았다. 얼마 전엔 임신을 하여 제 발목을 붙들더니, 마지막까지 도움이 되는 일이 없었다.

아스티나가 피곤한 얼굴로 물었다.

“버논 남작, 그대가 왜 여기 있는지 알고 있소?”

“예?”

“그걸 안다면 일말의 이해라도 해 보도록 노력하지.”

어제 아스티나는 생각을 정리한 후, 숙소에서 떨고 있던 엘리제를 다시금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그동안 그녀가 어떤 일을 당해 왔는지 듣기를 청했다. 엘리제는 자신이 겪었던 모든 것을 낱낱이 고했다. 그 내용들은 하나같이 지저분하기 그지없어, 아스티나는 오랜만에 생리적인 불쾌함을 느꼈다.

시작은 버논 남작이 약혼자가 있던 엘리제를 억지로 범한 것이었다. 대체로 카라벨라인들은 순결을 버리면 그 상대와 결혼해야 한다고 믿었다. 엘리제조차 예외가 아니라 그녀는 버논에게 순응했다. 엘리제가 아이를 배자 돌봄을 인질 삼아 여러 가지 요구를 했고, 마지막 명령은 바로 대공비의 차에 독을 타는 일이었다.

엘리제를 돌려보낸 아스티나는 버논 남작이 부리던 사람들을 잡아들여 취조했다. 측근에게 나온 증언은 사건을 어떻게든 축소시키려는 티가 났지만 그럼에도 모든 게 사실이었다.

이야기의 끝, 아스티나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금수는 주군이 아니라 그 신하였구나.’

아스티나는 어젯밤 내내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엘리제가 아이를 생각하며 지새웠을 밤만큼은 그녀도 함께 고민해 보고 싶었다. 당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로 시작했던 아스티나의 고뇌는 동이 틀수록 양상을 달리했다.

떠오르는 해를 보는 아스티나의 눈이 노기로 일렁였다.

‘이놈을 어떻게 조지지?’

“모르겠나?”

아스티나가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버논 남작은 얼떨떨한 낯을 내보이며, 동시에 머리를 맹렬하게 돌리기 시작했다. 만일 아스티나를 살해하려 한 일이 발각된 거라면 이런 질문조차 돌아오지 않고 즉각 사형당했을 터다. 버논 남작은 멍청하게 스스로의 범행을 자백해 자승자박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저질렀던, 그나마 가벼운 범죄들을 떠올렸다. 기억에 짚이는 일은 많았지만 그중에 엘리제에 관한 것은 없었다. 버논 남작은 그게 잘못이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모르겠습니다. 대공비 전하.”

“모르겠다?”

“부디 우매한 신하에게 잘못을 일러 주십시오. 크게 반성하겠습니다.”

아스티나는 다리를 꼬고 앉았다. 엄지로 아랫입술을 느리게 문지르며 그녀가 질문했다.

“이 여자를 임신시킨 것이 네가 맞느냐?”

버논 남작은 속으로 조금 놀랐다. 임신 사실까지 알고 있다니, 모르긴 몰라도 엘리제가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고해바친 게 분명했다. 버논 남작은 철면피를 두르고 부인했다.

“아닙니다.”

“아니라?”

“원래 음란한 탕녀입니다. 색이 좋아 약혼을 깬 전적까지 있는 여자지요. 유혹하기에 일을 치른 것뿐, 제 아이인지 어떻게 안단 말입니까.”

버논 남작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엘리제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강간마가 감히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주먹 쥔 손이 분노로 떨려 왔다. 엘리제가 발끈하여 소리쳤다.

“거짓입니다!”

“그 입 닥쳐라!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나의 명예를 더럽히느냐!”

버논 남작이 벌떡 일어나 엘리제에게 삿대질을 하려 했다. 그 기세가 제법 험악하여 엘리제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대기하던 기사들이 버논 남작의 어깨를 붙잡았다.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버논 남작은 악을 썼다.

“억울합니다, 이것만은 억울합니다. 대공비 전하!”

“엘리제의 말로는 네가 그녀를 범하였다 하였다.”

아스티나의 말에 버논 남작이 입술을 이죽였다.

“아닙니다. 처음은 다소 거칠었을 수 있으나, 본래 여자들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입으로는 싫다 하나 속으로는 좋아하지요.”

“아닙니다! 좋은 적이 없습니다. 단 한 번도 기쁜 적이 없었습니다.”

엘리제가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버논 남작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가 구속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다. 저는 진정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나중엔 좋다고 매달린 것이 네년이다. 닥치지 못하겠느냐!”

“처녀가 버린 몸을 가지고 어찌 다른 남자에게 가겠습니까…….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울음이 짙어 엘리제는 말을 잘 잇지도 못했다. 넘어갈 듯한 숨소리가 애처로웠다. 그 처량한 낯에 방 안엔 동정의 여론이 감돌았다. 기사들이 경멸의 눈으로 버논 남작을 내려다보았다. 불손한 시선에 버논 남작이 눈을 까뒤집으며 발작했다.

“저는 강제로 한 적이 없습니다! 대공비 전하, 여자가 격렬하게 반항하는데 어찌 간음이 가능하겠느냔 말입니다. 이것은 화간이 되면 되었지 절대 범죄가 아닙니다!”

버논 남작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어지간한 일엔 미동도 않는 아스티나도 혀 아래로 욕설을 삼켰다. 반항하지 않는다고 강간이 강간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었다. 마티나는 왕세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동침 요구를 받아들였지만, 그건 오로지 살아남기 위함이었다. 만약 왕세자에게 반항했다면 마티나는 복수의 기회도 얻지 못하고 목이 잘렸을 것이다.

끔찍한 일이었지만, 동시에 살아남기 위한 일이었다.

마티나는 그 일로 자신이 더럽혀졌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녀는 레타의 딸로서 원수를 베어 충분한 복수를 했다. 그러나 그것이 보통의 여성들은 따라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마치 엘리제처럼.

“들을 가치가 없군.”

아스티나가 딱 잘라 말했다.

“시간 낭비를 했다. 괜히 불러내었구나, 귀만 더럽혀지는 것을.”

아스티나가 혀를 차자 버논 남작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는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의 두 눈이 재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버논 남작은 벽 쪽에 붙어 선 하녀들을 보고는 구세주를 발견한 표정을 지었다.

“여봐라, 저년이 네년들에게 패악을 부리지 않았더냐! 그래, 인정하기 힘들지만 남자가 어떻게, 몹쓸 짓을 저지를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억지로 당한 여자가 어찌 그 남자의 위세를 보호막으로 쓴단 말이냐. 안 그렇소 기사 양반, 아니 그런가 너희들! 당장 사실을 고해!”

“사실은…… 맞습니다만…….”

흉흉한 기색에 하녀 몇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버논 남작의 말이 사실이긴 했다. 엘리제는 그녀들에게 제법 못되게 굴었으니까. 순간 몇 달 전 지나치게 불안해 보였던 엘리제의 행동이 이 일로 인했던가 싶었지만, 대공비 앞에서 거짓을 고할 순 없었다.

엘리제는 배신당한 기분에 참담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스스로가 삶이 끔찍하다 하여 남에게도 상처를 주고 할퀴고 싶었다. 그 발악이 이런 결과가 되어 돌아올 줄은 몰랐다. 억울한 마음에 무어라 따져 들고 싶었지만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모든 걸 포기한 듯 엘리제의 눈이 느리게 감겼다. 그에 버논 남작은 자연히 기세등등해졌다.

“제 권세를 업고 난리를 쳤던 년입니다. 대공비 전하, 진정한 죄인을 똑바로 보십시오. 거짓을 말하는 저년의 혀야말로 징벌 대상이란 말입니다! 저 패악을 부리는 악녀가 진정 처벌받아야 합니다!”

아스티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버논 남작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자신의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버논 남작의 입가가 천천히 굳어 갔다. 그는 본능적으로 아스티나가 내뱉을 다음 말이, 저에게 해가 되리라는 걸 알았다.

“그녀의 성격이 이 일과 무슨 상관이 있지?”

아스티나가 무엇이 문제냐는 듯 되물었다. 엘리제의 눈이 크게 뜨였다. 버논 남작은 당황하여 제때 대답하지 못했다.

아스티나가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버논 남작, 피해자가 항상 도덕적으로 결백할 필요는 없네.”

“…….”

“자네가 도덕이라는 말은 입에도 담지 못할 버러지인 이상은 말일세.”

설마 대공비가 지금 제 편을 들어준 것인가. 제가 들은 게 사실이 맞나.

엘리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스티나를 올려다보았다. 비록 버논 남작에게 휘둘려 벌인 일이라고는 하나 그녀도 이번 일에 있어서만은 공범자였다. 어쨌든 독이 든 병을 들고 대공비의 집무실을 찾은 건 본인이었으니까. 대공비의 자비에 엘리제가 그렁그렁 맺혀 있던 눈물을 떨구었다.

아스티나가 그녀를 불렀다.

“엘리제.”

“예, 예…… 예, 전하.”

“버논 남작의 강압에 의한 일이었다 하여 그대도 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압니다, 알고 있습니다, 전하. 다만 제 말을 믿어 주셔서 너무도 감사합니다.”

엘리제는 버논 남작이 한 짓을 밝혔을 때 제게 돌아올 것이 비난이 되었으면 되었지 저에 대한 격려가 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마침내 가슴에 있었던 응어리가 풀리는 듯하였다.

엘리제는 바닥에 엎드려 몇 번이고 대공비에게 절했다. 아스티나가 그를 제지하며 말을 이었다.

“나는 나를 해칠 마음을 품었던 자를 곁에 둘 만큼 자애롭지 못하다. 자네를 이 저택 안에 더는 둘 수 없다는 말이야.”

“당연한 말씀입니다.”

엘리제가 감내하는 표정으로 답했다. 암살 시도를 하고도 살아남은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처사였다. 심지어 대공비는 자신의 사정을 봐주어 증오스런 버논 남작까지 벌주려 하지 않는가.

“대공비를 음독시키려 한 혐의가 있긴 하나, 미수로 그친 점을 고려하여 대공령에서 추방하는 선에서 마무리하겠네.”

생각보다 가벼운 처벌에 반색하는 엘리제에게, 이어 아스티나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만약 이전 약혼 상대가 결혼을 원한다면 적당한 지참금을 내어 주겠네. 양육비 역시 수거한 버논 남작의 재산에서 빠져나갈 것이야.”

“대, 대공비 전하……?”

“이는 위로금일세. 가신을 제대로 잡도리하지 못한 주인의 죄를 인정하겠어.”

엘리제는 순간 제가 들은 말이 꿈인가 하였다. 그러나 경련하는 손등 위로 떨어지는 눈물의 감촉이 너무도 진실 되었다.

엘리제는 극심한 흥분으로 몸이 벌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 은인에게 어떤 화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감사하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감사합니다. 대공비 전하,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할 일은 아닌 듯하군.”

아스티나가 딱딱한 음성으로 답했다. 그녀는 버논 남작이 없었다면 당연히 엘리제가 가졌을 것들을 돌려준 것뿐이었다. 그마저도 엘리제의 약혼자가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면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그러나 엘리제는 그 가능성만으로도 기뻐 보였다.

“대공비 전하!”

그 광경을 지켜보던 버논 남작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지금 내려진 결론을 믿을 수 없다는 태도였다. 버논 남작이 떠올린 감정이 낭패감인지 좌절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제 죄를 반성하고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아스티나는 그의 바지 사이를 내려다보았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린 저 물건이 과연 세상에 필요할까 싶어서였다.

‘아닌 것 같군.’

아스티나는 빠르게 결론 내렸다. 명령은 짧은 고민만큼이나 빨랐다. 그녀가 담담하게 명령했다.

“다신 여인을 농락하지 못하도록 저자의 음경을 베어라.”

“예, 전하.”

아스티나의 말에 버논이 발버둥 쳤다. 제게 닥친 불행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한 번도 안위를 걱정해 보지 않았던 부위였다. 상상만 해도 아랫도리가 서늘해졌다. 하지만 짓누르는 힘이 완강하여 도무지 벗어날 수 없었다.

기사들은 사색이 된 버논 남작의 바지를 빠르게 벗겨 냈다. 다리털이 무성히 돋아 흉측한 종아리가 드러났다.

그를 지켜보던 아스티나가 다시금 명령했다.

“두 번 베어라.”

“예?”

좌중이 조용해졌다. 아스티나의 이어진 말에 기사들은 무의식적으로 제 사타구니를 가려야 했다.

“세로로 한 번, 가로로 한 번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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