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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살인귀 대공 (2/23)

2. 살인귀 대공

고귀한 아탈렌타가의 대공은 야수가 되어 가는 유전병을 앓았다.

병이 발발하며 처음으로 두드러지는 증후는 분노였다. 온화한 성정의 주인이 사춘기 아이처럼 쉽게 화를 냈고 제 행동을 조절하지 못했다.

두 번째로는 피부가 갈라졌다. 건강하던 이가 아픔을 호소하며 온몸을 긁었다. 간지러움을 참지 못한 이들은 피를 보기 일쑤였고 피딱지 밑에선 털이 뭉텅 자라났다. 단단해진 손톱은 보통 연장으론 다듬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방치하면 날카로운 삼각형 모양으로 자라나 흉기처럼 변했다.

셋째로는 이성을 잃었다. 사람으로 났을진대 점점 금수를 닮아 갔다. 그나마 인간으로 보이게 하던 동그란 동공을 잃고 파충류 같은 눈을 얻었다. 몸 전체엔 짐승의 털을 뒤집어써 눈을 빼고 보면 마치 늑대의 형상이었다. 이성이 머무는 건 잠시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미쳐 있는 기간이 길어졌다.

약 한 달여 정도 이성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때가 병의 끝이었다. 그 기간이 지나고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이는 없었다.

기실 병이라고 하기엔 매우 남다른 증세였다.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질환은 아니었다.

다만 사람이 사람이 아니게 되는 병이었다.

광증은 매우 미약하게 도질 때가 있었고 때론 너무도 강렬하여 삽시간에 이성을 잡아먹기도 했다. 어쨌든 아탈렌타의 후계라면 누구나 같은 증상을 보였다.

징조가 나타나는 건 성인이 되는 스무 살 전의 일이었다. 내력처럼 따라붙은 유전병에 아탈렌타는 자식이 성년이 될 때까지 사교계에 내놓지 않았다. 그들은 제 치부를 가리는 데 필사적이었으므로 대공저 밖으로 이 비극이 드러나는 일은 없었다.

백 년 만에 후계가 열다섯이 바뀌었다.

열은 성년에 이르지도 못한 채 인간성을 잃었고 나머지 다섯이 작위를 이어 임기를 채웠다. 후자는 체모가 남보다 많은 수준으로, 하나같이 걸걸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는 데 그쳤다. 아탈렌타 전대 가주와 전전대 가주는 그 운 좋은 다섯에 포함되었다. 현 가주 테리오드 반 아탈렌타의 부친과 조부였다.

이어진 행운에 아탈렌타가의 식솔들은 안심했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유전병이 막을 내리고 피가 희석됐다고 믿었다. 과연 테리오드는 어떤 증세도 보이지 않고 스무 살 생일을 맞이했다. 대공과 대공비는 환희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아탈렌타를 괴롭게 하던 광병이 저물어 간다!]

이후 부모가 마차 사고로 사망하여 테리오드가 어린 나이에 작위를 잇는 비극이 있었지만, 테리오드는 그 날까지도 건강했다. 모두들 장성한 테리오드를 보며 그가 광병에서 안전하리라 예상했다.

그리고 어느 겨울밤, 평소처럼 출근한 사용인들은 온통 난장판이 된 식량 창고를 발견했다.

집사는 이를 겨우내 먹이를 찾지 못해 인가로 침입한 짐승의 짓으로 판단하고 소리 없이 묻었다. 다만 아탈렌타가의 식솔들은 마음속으로 한 줄기 불안을 떠올렸다.

밤사이 저택의 일부가 부서지는 일이 다섯 손가락을 채웠을 즈음, 테리오드는 조용히 집사를 불러들였다. 그가 침음하듯 말했다.

“지난밤의 기억이 없다.”

“피곤하신 탓입니다.”

“잦은 습격이 기이하여 잠들지 않았다. 그런데 기억이 없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올리버?”

노년의 집사조차 울음을 참지 못했다. 테리오드는 한사코 아니라는 말을 반복하는 집사를 밖으로 내쳤다. 그는 스스로가 제정신을 지킬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견했다.

그간 안심하며 지내 온 시간을 비웃기라도 하듯 병은 삽시간에 깊어졌다. 아름답던 얼굴은 골격마저 바뀌어 이전의 미모를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은빛 털만이 대공의 은발을 떠올리게 하여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짐승이 아니되 인간도 아니었다. 모두의 사랑을 받던 테리오드가 괴물 대공으로 불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신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대공이 제정신일 때 여인을 들여 후사를 보게 합시다.”

그러나 사람이 아닌 것에 시집오고자 하는 여성이 없었다. 신부를 찾느라 지체한 사이 테리오드의 광증은 극에 달했다.

“미쳐 날뛰지 못하도록 제발 나를 가둬다오.”

마지막으로 정신을 차린 테리오드는 저를 감금할 것을 명했다. 사용인들은 눈물지으며 침실에 우리를 만들어 테리오드를 가뒀다. 이후 그는 다시 사람의 말을 하지 못했다. 대공을 걱정했던 어린 여종이 침실로 숨어들었다가 죽어 나간 후로 모두가 발길을 끊었다.

젊은 주인을 잃은 건 슬픈 일이었으나 더 중요한 일은 따로 있었다. 테리오드가 남긴 후사가 없었다. 그의 형제들은 어린 나이에 명을 달리했고, 피를 이은 방계들마저 가문을 이었다가 저주받을까 두려워 숨었다.

이대로 있다간 긴 역사를 지닌 아탈렌타가 그대로 멸문할 참이었다. 가신 중 하나가 조심스레 의견을 개진했다.

“짐승도 교미를 합니다.”

비인간적인 발언에 모두가 거부감을 느꼈다. 그러나 날이 지날수록 찬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집사 올리버는 사형수 다섯을 사 와 대공의 침실에 가뒀다. 테리오드의 폭력성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야 했다. 짐승의 흉포한 울음소리에 사형수들은 차라리 깔끔한 죽음을 바랐다. 사지에 내몰린 이들이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노년의 집사는 아탈렌타를 위해서라는 미명하에 그들의 손을 뿌리쳤다.

다음 날, 둘은 죽었고 셋이 살았다. 옆 사람을 씹어 먹는 짐승을 앞에 두고 밤을 새운 탓인지 사형수 하나의 머리가 하얗게 셌다. 올리버는 어쨌든 살아난 사람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괴물은 때로 난폭했으나 때론 제법 온순하기도 했다. 방법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모두가 죽어 나가진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올리버는 적합한 상대를 찾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존엄한 아탈렌타가의 혼인이었다. 그만한 명예와 지식을 갖춘 여성이어야 했다.

마침 레테 백작의 파산 소식이 들려와, 올리버는 재빠르게 그들과 접촉했다. 막대한 채권을 손에 쥔 아탈렌타의 요구에 레테 백작 부부는 입도 벙긋 못 했다.

“딸을 시집보내 대공과 밤을 지내게 하십시오. 대공의 아이를 품으면 모든 빚을 탕감하겠습니다.”

어투는 부드러웠으나 그 내용에 담긴 것은 협박이었다.

레테 백작가에서 신부를 둘째 딸로 바꾸는 소소한 소동이 있었으나 대공가에 있어 손해는 아니었다.

애초에 첫째인 칸나를 요구한 이유도 그녀가 덜 유명세를 탔기 때문이었다. 눈에 띄는 둘째보다는 조용한 맏딸이 더 내어 주기 쉬우리라 예상했기에.

레테 백작의 둘째 여식인 아스티나는 엄격한 벨라체 아카데미에서도 수재 중의 수재로, 특히 미모가 대단하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테리오드와 밤을 보내고 나면 그 예쁜 몸에서 온전하게 남겨 갈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될까. 올리버는 힘들게 얻은 신부가 테리오드의 한 끼 식사가 되지 않기만을 바랐다.

빠르게 혼인 날짜가 잡혔다. 신랑이 식장에 설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필요한 건 서류 작성뿐이었다. 집사는 대공의 집무실로 들어가 그의 인감을 찾았다. 그렇게 대공 본인도 모르는 혼약서가 날조되었다. 남은 것은 신부의 서명뿐이었다.

혼인날만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문득 이성을 잃은 테리오드가 정상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는지에 의문을 품었다. 불안했던 가신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어떤 이가 꺼림칙한, 그러나 누군가는 내놓아야 하는 답을 꺼냈다.

“짐승을 교배할 때 쓰는 약입니다.”

“맙소사.”

독실한 신앙을 가진 가신 하나가 침음했다. 그가 성호를 그었다.

“신이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그 기도에 몇몇은 속으로 반발했다. 신이 있다면 죄 없는 테리오드에게 이런 끔찍한 벌을 내릴 리 없다고.

모두가 부디 무사히 후손이 탄생해 아탈렌타를 구하길 고대했다.

* * *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이었다.

누군가 대공저의 문을 두드렸다. 신부가 도착하기로 한 날보다 하루가 일렀다. 예정된 방문객조차 제때 다다를지 알 수 없는 험악한 날씨였다. 이 밤에 웬 불청객인가 하여, 문지기는 짜증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엔 후드를 뒤집어쓴 여인이 말 위에 고고히 앉아 있었다. 문지기는 순간 마녀를 보았나 싶었다. 바로 이 성안에도 괴물이 사는데 마녀라고 존재하지 않을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그는 그림자 진 여자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대공과 혼약이 약속된 아스티나 레테다. 준비가 덜 되었을 텐데, 이르게 도착하여 미안하군.”

신분을 밝히며 아스티나가 후드를 벗었다. 비로 온통 젖은 얼굴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피곤한 안색이었지만 눈에 총기가 있어 무기력해 보이진 않았다. 고압적인 태도는 방자함보단 위엄에 가까웠다.

문지기는 멍청한 얼굴로 아스티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아스티나는 인내심 있게 문지기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주었다.

“그만 안으로 안내해 주겠나?”

“아, 네, 넵!”

뒤늦게 실수를 알아챈 문지기가 깜짝 놀라 아스티나를 성안으로 들였다. 바닥으로 뛰어내린 아스티나가 사용인에게 고삐를 넘겼다. 긴 여정에 지친 듯 말이 콧김을 뿜었다.

하녀 몇이 다가와 아스티나의 짐을 마저 받아 들었다. 아스티나는 저택 안으로 안내되었다. 소식을 들은 집사가 저 멀리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제 앞에 다다른 올리버에게, 아스티나가 짧게 인사했다.

“늦은 밤에 결례를 끼쳤군요.”

“도착은 내일 오후 아니셨습니까? 이 비 내리는 밤에 홀로 어찌…….”

“사정이 있었어요. 칸나의 고뇌로 벌 수 있는 날이 딱 하루였거든.”

“예?”

이해하지 못할 말에 올리버가 당황하여 되물었다. 아스티나는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두어 시간 전부터 내리던 비에 몸이 온통 젖어 있었다. 길게 설명할 정신이 없었다.

“마땅히 인사를 나눠야겠지만 몹시 지쳐 대화가 힘듭니다. 먼저 부족한 잠을 자고 싶은데, 침실을 하나 내주겠어요?”

“얼마든지요. 궂은 날씨에 고생하셨습니다. 마침 영애께서 묵으실 방의 정리가 끝난 참이었습니다.”

“고마워요.”

아스티나가 성의 없이 올리버를 지나쳤다. 올리버는 갑작스런 아스티나의 등장에 아직 당혹스러움을 다 벗어던지지 못한 상태였다. 어느 누가 죽을 자리를 이리도 부지런히 찾아든단 말인가.

올리버는 뒤늦게 평정을 되찾았다. 그가 침착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아탈렌타 대공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스티나가 눈알을 굴려 노년의 집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윽고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저도 제국 첫째 기사의 고향을 찾게 되어 기쁩니다.”

아스티나의 대답에 올리버는 다소 놀랐다. ‘제국 첫째 기사’는 그녀의 연배가 알 수 없을 법한 오래된 칭호였기 때문이다. 여제 마티나가 제국을 건국하고 처음으로 기사 서임을 내린 이가 바로 아탈렌타 출신이었다.

올리버는 내심 감탄했다. 수재라던 소문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단순히 똑똑하다고 해서 얻을 수 없는 교양 역시 갖추었다.

대기하던 하녀들이 아스티나를 2층 방으로 안내했다. 아스티나는 그녀들을 따라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오래 말을 탔는데도 우아한 걸음걸이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올리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운 인재로군.”

앞길이 창창한 여인을 제물로 삼았다는 생각에 입맛이 썼다.

* * *

하녀들은 공손히 인사를 남기고 방을 떠났다. 목욕 시중을 돕겠다며 나선 이가 있었지만 아스티나는 그마저도 물렸다. 홀로 남은 아스티나는 질척한 옷을 마저 벗어 던졌다. 승마용 바지에 검게 빗물이 들어 있었다.

아스티나는 지체 없이 욕실로 들어섰다. 욕조엔 뜨끈한 목욕물이 가득 받아져 있었다. 그녀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준비한 듯싶었다.

“과연 대공가라 이건가.”

조용히 중얼거린 아스티나가 천천히 물 밑으로 내려앉았다. 레테 백작가에 들러서도 오래 쉬지 못해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다. 칸나가 쫓아올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아스티나는 칸나를 잘 알았다. 칸나는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개중 가장 상냥하기도 했다. 제 목숨 귀한 줄은 알아 아스티나를 바로 쫓아오지는 못했을지라도, 동생의 희생을 모른 척할 수 있는 인물도 아니었다.

칸나의 양심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아스티나가 예상하기로 고작 하루였다. 아스티나는 칸나보다 빨리 대공저에 도착하기 위해 수행원도 없이 말을 달렸다.

기실 수행원이 없었던 건, 부모님과 말다툼을 한 탓이 더 컸다.

레테 백작저에 도착한 아스티나는 부모님을 먼저 찾았다. 갑작스런 딸의 귀가에 백작 부인은 당황한 얼굴을 했다. 돌아오기로 한 인물이 아스티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딸을 판 죄에 부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스티나도 그들의 사정을 봐줄 생각이 없었다. 아스티나가 냉정하게 말했다.

‘왜 언니를 보내려고 하셨어요?’

‘…….’

‘언니는 발악 한 번 못하고 의미 없이 죽었을 거예요.’

그 말에 백작 부인이 눈물을 터트렸다. 그들이라고 좋아서 딸을 내놓았을 리 없었다.

아탈렌타가가 손을 거둔다면 그대로 밑바닥에 내려앉을 상황이었다. 백작을 믿고 투자한 이들의 재산도 함께 파랑에 쓸려 갔다. 어떤 보호막도 없는 상황에서 온전히 살아남기는 힘들 것이다. 다 같이 죽느냐, 하나가 희생하느냐의 문제였다.

저를 보내지 그랬냐는 아스티나의 말에 백작 부인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그들이 칸나를 지목했어!’

백작 부인이 처절하게 말했다.

‘모르겠니 아스티나? 더 죽기 좋은 딸을 택하라니! 내가 뭐라고 그럴 수 있었겠니. 그 선택에 내 의지가 들어가면, 그 이후부턴 내가 직접 딸을 죽이는 게 되는 거야.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겠어! 내가 감히, 감히 어떻게……!’

백작 부인은 체면도 모르고 바닥에 주저앉아 아이처럼 울었다. 그 모습에 아스티나는 뭐라 더 힐난할 수도 없었다. 백작 부부가 자식들을 사랑으로 키웠음을, 아스티나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망한 집안이면 나았을까. 처음부터 몰락한 귀족이었다면 잃을 것도 없었을 텐데.

의미 없는 가정을 하던 아스티나가 고개를 저었다. 마티나였을 적 레타 집시들은 가진 것 없이 가난했지만 이보다 더 끝이 끔찍했다.

“일단 대공의 상태를 봐야겠지.”

후계를 낳아 해결될 일이라면 못해 줄 것도 없었다. 아이를 낳아 주고 저는 레테 백작가로 돌아간다. 이상적인 결말이었다. 대공을 죽인 후 신분을 버리고 숨는 것보다는 훨씬 점잖지 않은가. 아무 일 없이 사태만 해결된다면, 대공이 얼마나 짐승의 행색을 하고 있든 못 견딜 것은 없었다.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아스티나는 욕조 밑으로 깊게 가라앉았다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수증기가 피어나며 찬 공기가 뺨을 식혔다.

‘죽이면 된다.’

짐승의 몸 안에 움튼 남자에게도 그편이 이로우리라.

* * *

아탈렌타가의 아침은 평소보다 이르게 밝았다. 새신부가 어젯밤 급작스럽게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긴 했지만 아직 미비한 점이 많았다. 사용인들은 못다 한 일을 해치우느라 분주했다.

올리버는 날이 밝자마자 아스티나가 머무는 방으로 걸음했다. 한시라도 빨리 혼인 신고서를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뒤늦게 도망이라도 치려 들면 곤란했다.

올리버는 절도 있게 세 번의 노크를 남겼다. 방 안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직 깨지 않은 것인가, 확실히 귀족 영애들이 기상하기엔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긴 했다. 올리버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아스티나를 불렀다.

“아스티나 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이번에도 역시.

숙녀의 방에 허락 없이 들이닥칠 수는 없었다. 올리버가 발걸음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방 안쪽이 아니라 뒤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시죠?”

화들짝 놀란 올리버가 뒤를 돌았다. 아스티나가 헐떡이는 숨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운동을 한 것인지 몸이 온통 땀으로 젖은 채였다. 하나로 틀어 올려 묶은 머리가 보기 좋게 찰랑거렸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지만 혈색이 돌아 더욱 보기 좋았다.

올리버의 손에 들린 서류를 발견한 아스티나가 냉소적으로 웃었다.

“식을 치르기엔 시간이 지나치게 이르군요.”

정상적인 결혼식을 치렀다면 식장에서 서명했을 서약서였다. 아스티나는 이런 날림 결혼은 듣도 보도 못했다.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아스티나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녀로서도 올리버의 빠른 행동은 반가운 일이었다. 이제 칸나가 찾아온다 한들 이 결혼을 되돌리지는 못할 것이다. 아스티나는 죽을 생각이 없으니 칸나가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도 없다.

“대공의 서명은 어떻게 받으셨죠?”

올리버는 당황하여 대답하지 못했다. 흘긋 종이를 내려다본 아스티나가 아, 하고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기야 꼭 서명일 필요는 없지요.”

그녀가 올리버를 지나쳐 문을 열었다. 올리버는 멍청한 얼굴로 그런 아스티나를 쳐다만 보았다. 그동안 올리버가 알아 온 다른 영애들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그네들은 보통 생글생글 웃으며 상냥한 말씨를 쓰지 않던가. 부당한 혼인에 분노했다고 쳐도 울고 달래는 경우만 생각했지 이리도 날 선 어투를 받아 낼 줄은 몰랐다.

아스티나가 새벽같이 기상하여 아침 운동을 마치고 온 것도 의아한 일 중 하나였다. 몸을 단련하는 기사들이나 할 법한 행동이었으니까. 올리버는 갈수록 새 신부를 알 수 없어졌다.

아스티나가 제자리에 굳은 올리버를 향해 말했다.

“들어오세요.”

그러고는 책상 서랍에서 잉크와 깃펜을 꺼내 들었다. 올리버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아래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신랑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해치우는 결혼이라, 올리버가 민망하게 덧붙였다.

“대공께서 인사를 나오실 상황이 아닌지라, 부득이하게 제가 나서는 것임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스티나는 올리버가 건넨 서류를 천천히 읽어 보았다. 칸나의 자리를 대신할 것만 고민하느라 저가 결혼을 한다는 사실 자체는 깊이 생각지 않았었다. 혼약서를 마주한 기분이 묘했다.

그녀는 마티나였을 적에도 혼인한 적이 없었다. 왕세자에게 당한 장난질의 대가로 마티나는 불임의 몸이 되었다. 그 탓에 사랑하는 이의 청혼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상대가 필수적으로 자손을 생산해야 하는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도 결국 자식 없이 제게 이른 죽음을 맞아, 다 쓸모없는 일이 되었지만 말이다. 아스티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제 첫 남편이 될 남자의 이름을 입 안에서 한번 굴려 보았다.

“테리오드 반 아탈렌타.”

테오도르와 이름이 닮았군, 아스티나는 무심히 생각했다.

아스티나는 망설이지도 않았다. 깃펜을 적시고는 단번에 서명했다. 필적이 몹시 유려하여 괴물에게 팔려 온 이 같지 않았다. 올리버는 아스티나가 내민 서류를 유심히 살폈다.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그녀가 적은 건 제 이름이 맞았다.

올리버가 헛기침을 하고는 설명했다.

“합방을 돕기 위해 오후 중으로 팔렛 남작 부인이 드실 겁니다.”

지난밤에 도착하여 아침에 날림 결혼을 치르고 저녁엔 합방이라니.

아스티나는 그만 실소할 뻔했다.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지만 최소한의 절차조차 없었다. 칸나가 왔다면 올리버의 설명을 듣는 순간 눈물을 터트렸으리라. 노년의 집사 역시 민망한지 허둥지둥 아스티나의 방을 나섰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역시 민망한 얼굴의 팔렛 남작 부인이 헛기침을 하며 들어섰다. 그사이 샤워를 마치고 몸을 단장한 아스티나가 단정한 자세로 그녀를 반겼다.

“반갑습니다, 대공비 전하. 부족하지만 대공비 전하의 교육을 담당할 팔렛 남작 부인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팔렛 남작 부인. 아스티나 반 아탈렌타입니다.”

자신을 낯선 성으로 소개하며, 아스티나는 약간의 생경함을 느꼈다. 얼굴조차 보지 못한 남자의 성을 쓰고 있는 상황이 우스웠다.

정작 그 남편은 오늘로 명을 달리할지도 모르는데. 아스티나가 살벌한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말했다.

“부족하지만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아스티나의 점잖은 태도에 팔렛 남작 부인이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곱게 자랐을 귀족가의 여식에게 밤일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팔렛 남작 부인은 고민이 태산이었다. 사람 간의 일이라면 부끄러울 일도 없지만 아스티나의 상대는 테리오드였다. 털가죽을 뒤집어쓴 바로 그 테리오드 말이다.

변이한 테리오드는 전체적으로 늑대와 비슷한 겉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녀는 본의 아니게 갯과 동물의 생태를 알아보아야 했다. 그리고 알아낸 내용들은, 나이를 꽤나 먹은 그녀로서도 충격적인 것투성이였다.

팔렛 남작 부인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어떻게 설명해야 가장 덜 충격적일지를 고민하며, 그녀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대공비 전하께서 여린 마음에 상처 입으실까 싶어,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럽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우선…… 테리오드 님은 늑대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계십니다.”

‘그렇겠지.’

아스티나가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그나마 잘생긴 동물이어서 다행이었다. 기린 같은 걸로 변해 있다면 조금 우습지 않겠는가.

“저희도 확신하는 건 아니나, 어쨌든 그 생태도 늑대와 많이 닮으셨습니다. 하여 밤일에 있어서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리 예상하고 있습니다.”

팔렛 남작 부인은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스럽게 이었다. 아스티나는 가만히 고개만 주억였다. 생각지 못한 사항이었다. 어쨌든 테리오드라는 이름이 있었기에 아스티나는 은연중에 그를 사람에 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늑대와 닮은 모습이라면 교합하는 방법 역시 사람과 다를 것이다.

“우선 주의하실 점은.”

팔렛 남작 부인이 숨을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갯과 동물의 관계는 사람과는 많이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죠?”

“늑대는 짝짓기를 할 때, 수컷의 성기가 부풀면서 암컷의 자궁벽에 닿습니다. 자궁경부에 직접적으로 밀착하여 임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함이지요. 5분 정도 후엔 수컷 늑대가 멈추고 몸을 비트는데…….”

“잠시만요.”

아스티나가 팔렛 남작 부인을 제지했다. 급격히 입맛이 떨어졌다. 그녀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안에서, 부풀 거라고요?”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

아스티나는 침실에 들어가자마자 남편을 살해할 결심을 다졌다.

이야기를 마치고 보니 이미 늦은 오후였다. 대공 부부의 첫날밤을 위해 온 저택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스티나가 오늘 저녁 늦게 도착했다면 기일은 내일이 되었을 테지만, 가신들은 빨리 결과를 확인하고자 몸이 달아올라 있었다.

아스티나는 간만에 자신이 사람이 아닌 수단이 된 느낌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던 건 그녀의 주군 테오도르였다.

그 침중했던 목소리를 기억한다.

[마지막 부탁이다. 마티나.]

[테오도르, 이 역시 내 유일한 바람이다. 그것만은 들어줄 수 없어.]

[그대는 이 일을 해야 해. 그대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왕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테오도르는 마티나와 눈을 맞추는 대신, 그 너머의 것을 보고 있었다. 마티나는 전에 흘린 적 없던 눈물을 보였다.

[어찌 나에게 이러지? 어찌 내게 이리 잔인해?]

[……그대를 귀애했다.]

[그랬다면 내가 이런 끔찍한 기분을 느끼지 않았겠지.]

[…….]

[당신은 나를 사랑한 적이 없어. 그걸 이제 알았다.]

마티나는 돌아섰다. 그리고 정확히 하루 뒤, 테오도르는 그녀를 반군으로 규정했다.

“다 지난 일이지.”

아스티나는 부러 싸늘하게 읊조려 회한을 털어 버렸다. 그때의 기억은 너무도 강렬하여 원하지 않는데도 반복해서 일상에 끼어들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던가. 다시 태어나고도 잊히지 않았는데 도대체 얼마나 더 지나야 자유로워질까. 이미 죽은 사람을 붙잡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아스티나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테오도르의 배신이 뼈아프긴 했던 모양이었다.

“대공비 전하, 손을 다치십니다.”

여러모로 반쪽짜리 결혼인데 사용인들은 대공비라는 호칭을 자연스럽게 읊었다.

하녀의 부름에 아스티나는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주먹을 힘껏 말아 쥐고 있었다. 천천히 손가락을 펴자 손바닥 안쪽에 손톱자국이 남은 게 보였다.

“목욕물 온도가 맞지 않으신가요?”

“아니, 딱 좋아.”

하녀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아스티나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첫날밤을 위해 준비를 시작한 참이었다. 생화가 띄워진 욕탕에선 달큰한 냄새가 났다. 목욕을 더 즐기고 싶었지만 아스티나가 해치워야 할 일은 그 외에도 산재해 있었다.

“목욕 끝났습니다.”

하녀가 아스티나의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두 시간이나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더니 밖으로 나오자마자 오한이 들었다. 하녀들은 부드러운 수건으로 아스티나의 몸을 감싼 후 등받이가 기울어진 의자에 눕혔다.

아스티나는 향유로 번들거리는 제 팔을 가만히 쓸었다. 건조한 날씨에 텄던 피부가 어느새 미끈해져 있었다.

손톱을 가다듬고 검을 쥐느라 박인 굳은살까지 갈아 낸 후, 하녀들은 아스티나의 얼굴로 관심을 돌렸다. 미리 얹어 두었던 두꺼운 팩을 제거하고는 가볍게 마사지를 했다.

그러고는 족히 열 가지가 넘는 화장품이 발라졌다. 아스티나는 그 모든 게 과연 흡수가 되긴 했을지 의심스러웠다. 하녀들은 관리만으로 끝내지 않고 화장까지 마쳤다. 머리는 간단히 가다듬어 앞으로 땋아 내렸다. 아스티나는 관리에 익숙한 편이었지만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걸 동시에 처리한 적은 없었다. 슬슬 지루하다 못해 졸릴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하녀들의 태도가 미묘하게 건성이었다. 하녀장의 지시에 따라 이것저것 많이 손대긴 했지만 열의 없는 눈을 숨기진 못했다.

하기야 신랑이 인간이 아닌데 꾸며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테리오드에게 좋은 인상을 준다 해도 기껏해야 향긋한 먹이라고 생각되는 정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아스티나의 치장을 내팽개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모두가 정중했지만 아스티나는 그 기저에 깔린 생각을 어렵지 않게 읽어 냈다.

이건 사지로 가는 여자에 대한 마지막 예우였다.

아스티나의 생환을 바라는 이조차도 그녀가 온전히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탈렌타가의 입장에선 아스티나가 ‘어떤 형태로든’ 살아남기만 해도 선방이었다. 아이를 볼 수 있는 기회는 남을 테니까.

아스티나는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자신이 안전할 줄 알았지만, 이 저택의 모두가 그 속내를 몰랐다. 그런데도 아스티나를 대공에게 바치는 데 누구도 말리는 자가 없다.

‘이렇게 이기적일 수가.’

아니면 반대로, 그만큼 제 주인이 소중한 것일까.

이전에도 종종 테리오드 대공의 얘기를 전해 듣기는 했다. 이성에게 관심이 없는 아스티나조차 이름을 알 정도로, 그는 지나치게 유명 인사였다. 그의 유명세는 괴물 대공으로 불리며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 테리오드였기에 소문이 더욱 넓게 퍼진 것이다.

성년식을 치르고 사교계에 얼굴을 내민 후로, 그는 언제나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아탈렌타 대공이라는 직함의 영향도 컸지만 가장 큰 화제가 된 건 그의 외모였다. 투명한 은발에 물빛 청안이 마치 그림 같아 뭇 여성들의 마음을 녹였다.

테리오드는 제국의 미혼 귀족 남성 중에서 단연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이었다. 그를 사랑하여 앓아누웠다던 여자들은 어디 가고 왜 저가 대신 팔려 왔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마침내 치장이 끝났다. 아스티나는 제 차림새를 내려다보았다. 걸친 것은 얇은 슬립이 전부였다.

문득 깨달은 것이 있어, 아스티나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웨딩드레스 한번 못 입어 보는군.”

이제는 유부녀의 몸이니 재혼하지 않는 이상 요원한 일이 되었다. 결혼을 바란 적은 없으나 한 번쯤 화려한 웨딩드레스를 입어 보고 싶긴 했다. 아버지의 파산이 없었다면 정상적인 결혼식을 치르게 됐을까?

“흡. 으으…….”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주변에서 급작스레 격한 반응이 터졌다. 유언이라 여겼는지 하녀 하나가 숨을 들이켜더니, 코를 발갛게 물들였다. 곧 닭똥 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울음은 곧 전염되어 모두가 눈시울을 붉혔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아스티나는 다소 당황했다.

“무사하실 겁니다, 대공비 전하.”

하녀장 헤밀턴이 눈가를 적시며 말했다. 완고한 인상의 하녀장은 어린 하녀들에게 있어 무서운 대상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물에 주변이 모두 울음바다로 변했다. 아스티나는 같이 울어 주어야 할지, 아니면 괜찮다고 달래 주어야 할지 고민했다.

‘같이 울면 화장이 망가지겠지.’

그들의 노고를 망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 긴 화장 시간을 다시 견디고 싶지 않았다. 아스티나는 하녀들을 진정시키려 엷은 미소를 띠었다.

“다들 어찌하여 우는지 모르겠구나. 아내가 마땅히 남편을 보러 가는데 무어 잘못됐는가.”

영 좋지 못한 부분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곡소리가 더욱 짙어졌다. 하녀장 헤밀턴은 아예 손수건을 꺼내 코까지 풀었다. 하녀들의 울음소리에 방으로 들어오려던 올리버가 잠시 멈칫했다. 악당이 된 기분에 그가 머쓱하게 문을 열었다.

“대공비 전하, 시간이 되었습니다.”

집사의 알림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아스티나는 미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올리버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올리버가 변명하듯 말했다.

“식사를 하고 난 후엔 온순하십니다.”

괴물 대공은 대체 무슨 식사를 했을까. 아스티나는 수도에 나돌았던 소문을 떠올렸다. 사용인이 죽어 나갔다고 하니 그 먹이가 사람은 아닌지 의심이 되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테리오드가 정말 대공저의 사람을 먹어 치웠다면 사용인들이 저리 주인을 위할 리 없었다.

아스티나가 올리버보다 한 걸음 앞서 걸으며 말했다.

“드디어 신랑 얼굴을 보는군요.”

“…….”

“웃으세요, 기쁜 혼삿날이 아닙니까.”

아스티나가 모범을 보이듯 먼저 사근하게 웃어 보였다. 모든 일을 벌여 놓고 이제 와 죄책감에 시달리는 얼굴을 하는 집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스티나의 말에 올리버의 낯빛이 핼쑥해졌다.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죄송합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면목이 없습니다. 늙은이의 욕심이 커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아스티나는 죄인처럼 고개 숙인 올리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사과를 요구한다고 하면 이 결정에 동의한 가신들까지 불러와야 할 판이었다.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올리버의 선택은 레테 백작가에 있어 행운이었다. 아탈렌타의 도움으로 파산 위기에서 벗어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칸나가 왔다면 반대의 결과가 나왔겠지만, 어쨌든 여기 서 있는 건 아스티나였다.

아스티나는 아탈렌타가가 레테 백작가에 내어 준 돈만큼은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그들은 값을 지불했으니까.

그러니까, 되도록 대공을 죽이지 않는 방향으로.

“여깁니다.”

마침내 대공의 침실에 도착하여, 올리버가 걸음을 멈춰 세웠다. 아스티나 역시 조용히 제자리에 섰다.

대공의 방은 멀리서 보아도 주인이 누군지 쉽게 알 수 있을 듯했다. 커다란 원목을 깎아 만든 문이 마치 예술품 같았다. 장엄한 입구의 좌우로 사용인들이 열 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의사로 추측되는 인물이 여럿이었다.

혹여 대공비가 주저앉으면 부축할 요량으로, 하녀 몇이 아스티나의 뒤에 대기하고 섰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당당한 걸음으로 문을 향해 걸어갔다.

“안이 어둡습니다.”

문 가까이에 서 있던 하인이 아스티나에게 램프와 열쇠를 건네주었다. 그와 동시, 안쪽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사용인들이 일시에 몸을 움츠렸다. 오직 아스티나만이 물러서지 않고 담담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입술을 달싹였다.

“신의 가호를.”

문이 닫혔다. 사용인들은 초조하게 방문을 쳐다보았다. 안을 들여다볼 깜냥이 있는 자는 없었다. 방음이 잘 되는 방인지라 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았다.

반 시진 정도 지났을까. 하녀장 헤밀턴이 올리버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권고했다.

“어린 하녀들은 돌려보내는 게 좋겠습니다. 피를 보고 놀랄 수 있으니까요.”

그 말에 소름이 끼친 듯 가까이 있던 하인 하나가 멈칫했다. 주변을 한번 쓱 둘러본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운 사람들은 이만 숙소로 돌아가도 좋다.”

다섯 정도가 황급히 떠났다. 남은 사람들은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한 시진이 지나도 아스티나가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그녀를 구하러 들어갈 생각이었다. 집사는 의사에게 마취제가 있는지를 물었고, 야생 곰을 재울 만큼 구비해 두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때였다. 방 안에서 커다란 괴성이 터져 나왔다. 포악한 울음소리에 모두가 몸을 떨었다. 신을 믿는 자는 연신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 잠시 후, 언제 그랬냐는 듯 사방이 조용해졌다. 올리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결국 제 주인이 새 신부를 한입에 삼키고 말았구나!

그가 가슴 깊이 탄식했다. 아스티나의 당당한 태도에 저도 모르게 이상한 기대를 걸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장정이 달려들어도 상대할 수 없는 괴물에게, 연약한 여인이 어찌 상대가 되겠는가?

헤밀턴 부인 역시 아스티나의 죽음을 예감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 자리에 선 모두가 짧은 신혼을 추모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보고도 제 눈을 믿지 못했다. 분명 방에서 나온 건 아스티나가 맞았다. 그런데 문을 열고 나온 아스티나의 상태가 지나치게 멀쩡했다. 그녀에게선 어떤 상처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올리버는 문득, 아스티나가 손에 쥐고 있는 털 뭉치를 발견했다. 그것은 언뜻 테리오드의 발 같아 보이기도 했다. 위화감을 깨달은 모두가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문제가 있어요.”

아스티나가 두들겨 패서 기절시킨 ―대공으로 추정되는― 짐승을 가리키며 말했다.

“안 서는데요, 그게.”

* * *

문이 닫히자 시야가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아스티나는 램프 안에서 초를 꺼내 벽면에 걸린 횃불을 밝혔다. 그제야 조금 사위 분간이 되었다.

대공의 침실답게 실내는 몹시 넓었다. 괴물이 있는 방을 청소할 깜냥은 없었는지 모든 가구에 먼지가 슬어 있었다. 커튼은 찢겨 바닥을 나뒹굴었고 카펫 위엔 핏자국이 낭자했다. 때가 타 온통 무채색 빛을 띤 공간에서, 유일하게 반짝이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테리오드를 가둔 창살이었다.

“크르르르르…….”

중앙에 둔 거대 우리에서 사나운 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만들었나 싶을 정도로 커다란 물건이었다. 정신을 잃은 주인일지언정 편히 지내게 하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아스티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괴물이 되기 전의 대공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테리오드가 제정신일 때 남긴 흔적은 하나같이 긍정적인 방향이었다. 사교계에선 세련된 처신으로 칭찬이 자자했으며 사용인들은 따듯한 주인을 그리워했다. 대체 테리오드가 어떻게 살아왔기에 아직까지 사랑받고 있는지 호기심이 일었다.

‘이제는 알 수 없는 일이 됐지만.’

아스티나는 벽면에 장식돼 있던 검집을 뽑아 들었다. 가주의 방답게 쓸모 있는 칼이 하나는 있었다. 그녀는 검을 꺼내 상태를 확인했다. 장식용이라 사용감은 없었지만 그래서 날이 상하지 않은 그대로였다. 아스티나가 눈썹을 들었다 내렸다.

“쓸 만한데.”

그녀는 아스티나가 된 이후로 제대로 된 검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마티나일 적 제 분신처럼 사용했던 검은 유명한 장인이 만든 명검이었다. 다행히 초대 황제의 유물이라 하여 소실되지 않고 아직까지도 잘 보관되어 있었다.

황궁 내 지리는 불 보듯 뻔하니 몰래 훔쳐 올까 고민했지만, 이젠 국보로 지정되어 경비가 삼엄하다는 소리에 결국 포기했다. 아스티나는 국보 대신 보다 접근이 쉬운 히센의 가보를 노려야 했다.

‘돌려주지 말 걸 그랬나.’

아카데미에 가면 부모님 몰래 검을 장만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돌려주었는데, 용돈 사정이 뻔하다 보니 아스티나는 몇 년째 싸구려 연습용 칼에 신세 지고 있었다. 이젠 제 손과 지름부터 다른 까칠한 손잡이가 익숙해졌을 정도였다.

아카데미에서 종종 함께 대련했던 검술반 벤자민은 어이없어하며 이렇게 물었다.

‘그거, 혹시 진 사람에게 일부러 수치심을 주려는 전략이야?’

‘그럴 리가.’

‘그럼 좀 바꿔. 실력 출중한 검사가 정작 검이 그게 뭐야?’

‘안타깝게도 돈이 없어, 벤자민 레안드로스. 충고는 선물과 함께 하면 좋겠군.’

아스티나의 말에 벤자민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알았으니 제발 그 망할 싸구려 좀 버리라는 소리에 결국 처분하였는데, 새 검을 선물 받기도 전에 먼 아탈렌타 대공령으로 시집을 가게 될 줄이야. 급히 아카데미를 떠나느라 알고 지낸 이들에게 인사도 남기지 못했다.

어쨌든 뜻밖의 소득에 아스티나는 꽤나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새신랑보다 잘 보관된 검이 그녀를 더 설레게 했다. 장식용으로 둔 것조차 이리 품질이 좋다니. 과연 아탈렌타, 명문은 명문이었다.

아스티나는 피어오른 물욕에 잠시 갈등했다.

‘대공비가 된 김에 좋은 검이라도 하나 건져 갈까.’

워낙 부유한 가문이니 금고에 조금 손을 댄다고 큰일이 생기지는 않으리라. 이 결혼에도 긍정적인 면이 하나쯤은 있었다.

아스티나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테리오드를 향해 다가섰다. 창살이 좁아 밖에서 괴물의 형체를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와 만나기 위해선 잠겨 있는 우리를 먼저 열어야 했다.

아스티나는 바닥에 램프를 내려놓고 열쇠를 들었다. 방에 들어왔을 때 그러했듯, 그녀는 여전히 망설임 없이 자물쇠를 열었다. 금속이 맞물리며 차가운 소리가 났다. 그에 응답하듯 테리오드가 크게 울부짖었다.

그대로 우리 안으로 들어섰다. 저 끝에서 사람과는 확연히 다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불을 밝혀 둔 탓에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얼굴을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크르르르르…….”

과연 사람인 줄 모르고 보면 웬 늑대인가 싶을 외양이었다. 다만 뱀 같은 눈과, 두 다리로 선 모습을 보아 그와는 또 다른 존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족히 성인 남성의 세 배는 되는 몸집에서 위압감이 느껴졌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저 모습을 마주하는 순간 바지를 적셨을 것이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한가한 생각이었지만, 아스티나는 그의 은빛 털이 꽤나 멋스럽다고 생각했다.

순간 야수의 안광이 번쩍였다.

‘온다.’

아스티나는 본능적으로 검집을 들어 올렸다. 저편에서 튀어 오른 테리오드가 단번에 아스티나가 있는 쪽까지 접근했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가 휘두른 손톱을 부드럽게 흘려보냈다. 늑대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더니, 과연 근력이 훨씬 셌다.

아스티나는 혀를 찼다. 식사를 한 후엔 온순하다고 한 건 어디의 누구인가. 집사의 거짓말은 새롭지도 않았다.

제 공격을 막은 게 의외였는지 야수가 고개를 갸웃였다. 짐승의 얼굴인데도 어렵지 않게 속뜻을 알아볼 수 있었다. 방금의 제스처는 ‘이럴 리가 없는데.’였다. 지금껏 괴물 대공의 영역에 침입한 이들은 단 한 번의 타격에 죽어 나갔으리라.

테리오드가 다시 한번 아스티나에게 팔을 휘둘렀다. 가볍게 피한 아스티나가 뒤로 돌아가 테리오드의 등을 내리쳤다. 칼날에 대공님이 상하는 일이 없도록, 검을 검집에서 뽑지 않은 채였다.

타격이 약했는지 테리오드는 움찔도 하지 않았다. 피부 거죽이 질겨져서인가 맷집이 제법 좋았다. 아스티나는 대공의 공격을 피하며 계속해서 검집을 휘둘렀다. 시간이 갈수록 팔에 주는 힘이 세졌다. 어느 정도가 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선인지 가늠할 생각이었다.

퍽-!

둔탁한 소리가 울린 동시에, 야수가 몸을 움츠렸다. 제법 아팠는지 아스티나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고 덮쳐 왔던 조금 전과 다르게 제자리에 멈춰 섰다.

경계의 눈빛이 느껴졌다. 실제로 괴물 대공은 아스티나의 머리칼 하나도 건드리지 못했다.

‘힘이 대단해도 그래 봤자 짐승, 계산하며 싸울 줄 아는 단련된 일류 기사의 상대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아스티나는 그 일류 기사보다도 훨씬 실력이 출중한 사람이었다. 예의 기사들이 괴물 대공을 베어 이길 수 있는 이들이라면, 아스티나는 외상 하나 입히지 않고 가지고 놀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는 그렇게 했다.

계속해서 얻어맞기만 한 야수가 포효했다. 커다란 고성에 아스티나는 뒤로 물러섰다. 테리오드가 전에 보지 못한 속도로 아스티나에게 달려들었다. 한 번에 끝을 볼 생각인 듯했다. 아스티나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바라는 바였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품 안으로 뛰어들어 그의 급소를 찔렀다. 짐승은 커헉, 하고 제법 사람 같은 소리를 냈다. 아스티나는 이제 상대가 더 이상 일어서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괴물 대공은 그대로 쓰러졌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듯했다. 정신은 남아 있었으나, 본능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챈 듯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아스티나는 널브러진 테리오드에게 걸어갔다. 상대가 움직이지 않으니 이젠 원래 볼일을 처리할 차례였다.

‘모로 가든 결과만 같으면 되지.’

마티나는 경험 없는 숫처녀가 아니었다. 아스티나가 되고 나서는 그럴 일이 없긴 했지만, 아예 성적인 면에 무지한 건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녀는 거리낌 없이 괴물 대공의 고간을 문질렀다. 팔렛 남작 부인에게 들었던 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일단 사실 유무를 파악한 뒤 그를 죽일지 살릴지 정할 생각이었다.

“음.”

아스티나는 운신하지 못하는 상대의 위로 올라탔다. 손에 닿는 감촉이 낯설어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털이 복슬복슬해서일까? 아무튼 사람과는 좀 달랐다.

“…….”

아스티나는 정수리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야수가 애처로운 눈으로 아스티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근육을 끊어 놓은 것도 아니니 움직일 수 없는 건 아닐 텐데, 꼼짝 않고 누운 걸 보니 제가 무서워 그러는 모양이었다. 야생의 동물에게 서열은 절대적이다. 그는 아스티나가 제 위에 있다고 판단한 듯했다.

“수치스럽니?”

당연히 테리오드는 대답하지 못했다. 인간의 성대를 갖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올리버는 테리오드가 모든 이성을 잃어 사람의 사고를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사람 아닌 짐승에게도 수치심은 있는 모양이었다.

아탈렌타가의 번영을 위해, 아스티나는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맹세컨대 그녀의 인생을 통틀어 그 물건을 만지는 데 그렇게 공들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스티나가 맹렬한 눈빛으로 노려볼수록 야수의 그것, 남성의 자존심은 자꾸만 쪼그라들었다.

아스티나는 곤란해졌다. 동시에 억울했다. 막 대공저에서 좋은 검을 얻어 나갈 계획을 다진 참이었다. 제가 실수한 것도 아니고, 상대 쪽의 불능으로 이렇게 허무하게 목표를 잃을 수는 없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용인들을 생각하면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그들이 아스티나가 죽은 줄 알고 들이닥친다면 상당히 민망한 상황이 연출될 것이었다.

아스티나는 결국 이게 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을 인정했다. 성적으로 경험이 없는 건 아니나, 어쨌든 그녀는 생물학적으로 여자였다. 남자의 서사에 알지 못하는 면은 분명 존재했다.

아스티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섬세한 대공님이군.”

아스티나는 테리오드의 발을 질질 끌고 문 앞으로 갔다. 그 과정에서 그가 우리에 머리를 박아 기절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정신을 잃은 대공은 몹시 무거워 아스티나를 짜증스럽게 했다.

아스티나가 문을 열며 말했다.

“문제가 있어요.”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안 서는데요, 그게.”

* * *

“내가 꿈을 꾸었나?”

“아니…… 자네가 저걸 말하는 거라면, 나도 보이는 것 같군.”

정원사들이 잔디를 깎다 말고 멍한 음성으로 대화했다. 그들은 멍청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다가 사이좋게 한 번씩 꼬집어 주기까지 했다. 꿈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두 남자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저 멀리 앞서가는 인영을 응시했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말 그대로 미녀와 야수였다.

하룻밤 사이 유명 인사가 된 대공비 전하는 밝은 빛 드레스를 차려입고 양산을 든 아름다운 차림이었다. 그녀는 고아한 걸음걸이로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흰 레이스 장갑을 낀 손에, 금속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반짝였다. 사슬이었다. 보기만 해도 흉악한 그 물건은 테리오드의 목에 연결되어 있었다.

아스티나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괴물 대공도 보폭을 맞추어 뒤따랐다. 아스티나의 얼굴은 비현실적으로 평화로워 보였다.

두 정원사는 다시 시선을 교환했다. 끔뻑이던 졸린 눈이 이내 크게 뜨였다.

어젯밤 대공저의 사람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대공비 전하의 안위와 아탈렌타의 앞날을 걱정하느라 마음을 졸인 탓이었다. 그런데 아침이 밝자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대공비 전하가 죽지 않았다!]

대공비의 얼굴을 살아 다시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것이 과반수 사용인들의 의견이었다. 소수의 사람들은 그래도 다리 하나, 혹은 팔 하나를 잃고 운 좋게 불구가 되는 선에서 그치리라 미래를 점쳤다. 우습게도 아스티나가 불구가 되는 게 그들이 가진 가장 희망적인 결말이었다.

그런데 죽을 줄만 알았던 대공비가 살아 돌아오다니, 심지어 그 어떤 상처도 입지 않았다고 했다. 옛 동화처럼 기적적으로 미녀와 야수가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것인가. 이야기 속 그 야수는 이성이라도 있었을진대. 믿겨지지 않는 일이었다.

대공의 침실 앞에 대기하며 직접 야수의 울음을 들었던 이들 역시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그들은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했다. 아스티나가 방 밖으로 걸어 나왔을 때 귀신이 아닌가 오인했을 정도로.

살아 있는 아스티나의 등장에 사용인들은 하나같이 몸을 굳혔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완벽한 침묵이 돌았다. 아스티나가 끌고 나온 대공은 기절해 미동도 없었지만 그 생김새는 충분히 흉악했다. 맨눈으로 쳐다보기 힘들 만큼 위압감이 느껴지는 덩치였다.

마음이 여린 사용인 몇이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혼절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그나마 그중 인생 경험이 제일 많은 집사였다. 올리버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대…… 대공비 전하, 대체 그, 그게……?”

“아.”

아스티나가 테리오드의 발을 내려놓았다. 털썩, 둔중한 것이 내려앉는 소리와 함께 괴물 대공의 몸이 크게 경련했다. 아스티나가 얼얼한 왼 손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대공 전하세요.”

“아, 아니. 대, 대공께서 대체 왜…….”

올리버는 말을 잘 잇지 못했다. 그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 외의 다른 이들은 전부 굳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으니까.

아스티나는 그들이 테리오드가 ‘왜’ 저렇게 널브러져 있는지 궁금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스티나는 물끄러미 시선을 내렸다. 뇌진탕이라도 걸렸는지 괴물 대공은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대공을 끌어내다가 우리에 부딪히게 해 상해를 입혔던 일은 감추기로 했다. 모름지기 저에게 해될 일은 숨겨야 하는 법이었다.

“급소를 쳐서 기절시켰어요. 큰 부상은 아니니 금방 정신을 차리실 겁니다.”

“기…… 절시키셨다고요?”

사용인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사실 이건 아스티나로서도 몹시 곤란한 일이었다.

악명이 자자한 것치고는 대공이 몹시, 너무도, 연약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았다면 기겁할 생각이었지만, 아스티나 나름대로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항복하여 늘어진 짐승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스티나가 테리오드를 죽인다면 그건 약자를 괴롭히는 형상이 되리라. 또한 애초에 변제 조건은 ‘대공의 아이를 낳을 것’이었다. 계약 조건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상환을 요청하면 다른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냥 죽여 버리기엔 어느 정도 조련이 가능해 보였다. 흔치는 않지만 야생의 맹수를 길들여 사육하는 이들도 있었다. 조련사와 동물의 사이를 대공과 저 사이에 대입해도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다. 저를 보고 완전히 기가 죽은 상태이니 앞으로 어떻게 노력하면 원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아스티나는 결국 유혈 사태는 최후의 수단으로 미루기로 결심했다.

“무슨 문제라도?”

아스티나가 여상하게 되물었다. 올리버는 입을 다물었다. 이게 꿈은 아닌가 싶었다. 그는 제 늘어진 피부를 세게 당겨 보았다. 통증이 있었다.

통증이, 있었다.

그 사실에 올리버는 뒤늦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올리버의 경악한 얼굴을 본 아스티나는 짐짓 그가 심장 마비라도 걸린 건 아닌지 의심했다. 노년의 집사는 그래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질문에 대한 답이 돌아오지 않자 아스티나가 다시금 운을 떼었다.

“그보다.”

“예, 예?”

올리버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아스티나는 친절하게 재차 설명해 주었다.

“대공께서, 불능이세요.”

하녀장 헤밀턴이 그만 크게 기침했다. 사레가 들린 듯 그녀는 한참 사납게 목을 가다듬었다. 아스티나는 그녀의 거친 숨이 안정될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헤밀턴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안 그래도 아스티나가 테리오드를 기절시켜 끌고 나온 사실에 대단히 충격받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후에 아스티나가 꺼낸 말은 그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올리버는 제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중얼거렸다.

“분명 약을 먹였는데…….”

“저런, 생각보다 대공 전하의 상태가 심각하신 모양입니다. 그래도 효과가 없었다니.”

아스티나는 혀를 찼다.

“어쨌든 이건 제 과실이 아닙니다.”

좀 심각하게 때리기는 했지만, 뼈도 부러지지 않았고 어디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간 것도 아니었다. 남자들은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밤일을 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건 대공의 문제임이 틀림없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아스티나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남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는 언제나 다 이유가 있지요.”

원인을 안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아스티나는 한번 대공의 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문제의식을 갖고 바라보자 테리오드의 환경은 개선 대상투성이였다. 육식만으로 이루어진 식사는 영양이 불균형해 보였고 테리오드가 있는 방은 지나치게 어두웠다. 사람도 빛을 보아야 건강이 좋아지는 법이었다.

무엇보다 테리오드는 운동 부족이었다. 우리가 넓은 편이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라는 명제하에서였다. 야외에서 움직이는 것과는 또 달랐다. 아스티나는 나름대로 대공의 불능 원인에 진단을 내렸다.

“혹 심각한 은둔 생활에 자존감이 내려간 것이 원인 아닐까요?”

그렇게 된 거였다. 기묘한 산책의 시작은.

아스티나는 우선 테리오드를 제어할 수 있는 목줄을 요구했다. 사람들이 있는 바깥에 맹수를 끌고 나갔다가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곧 단단한 금속 사슬이 공수되어 왔고, 아스티나는 내친김에 다음 날 아침 바로 시범 운행을 시작했다.

과연 테리오드 역시 햇빛이 그리웠는지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방으로 뛰쳐나가고 싶어 했다. 아스티나는 그럴 때마다 목줄을 잡아당겨 테리오드를 제어해야 했다. 몇 번 목이 졸리고 나자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이후로는 제법 온순해졌다.

기실 온순해진 것도 처음 밖으로 끌고 나왔을 때와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지, 테리오드는 여전히 심심하면 발작했다. 아스티나는 테리오드가 사람에게 이를 드러낼 때마다 그를 교육시켰다. 자고로 말 안 듣는 짐승은 매가 약이었다.

“내가 아직 꿈을 꾸고 있나 보이…….”

“그래, 자네와 꿈에서 만나다니 기묘하군…….”

정원사들은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리고 다시 잔디를 뽑는 데 열중했다. 생생하게 느껴졌던 통증은 잊어버리기로 했다. 저들이 보고 있는 이 광경이 현실일 리가 없었다.

대공저의 많은 사용인들이 꿈과 현실을 혼동하게 만든 후, 그 원인인 아스티나는 유유히 저택으로 돌아왔다. 낯빛이 퍼런 집사 올리버가 대공의 침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3초에 한 번씩 초조한 시선으로 테리오드를 응시했다. 언제 그가 뛰쳐나가 사람을 찢어 죽일지 모르겠다는 듯이.

아스티나는 올리버에게서 열쇠를 받아 다시 대공을 우리에 가뒀다. 대형견을 산책시키는 일은 많은 체력을 소모했다.

아스티나는 한숨 돌리고는 흘긋 주변을 확인했다.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아도 방 안은 여전히 몹시 더러웠다. 아스티나가 혀를 차며 말했다.

“방 환경이 너무 어둡고 퀴퀴하군요. 대공은 제가 모실 테니 내일 산책 시간엔 미룬 청소를 해 주세요.”

테리오드와 아스티나는 이제 부부 사이였다. 테리오드가 정신이 없을 때 이루어진 날치기 결혼이지만 사실만 보면 그러했다. 공식적으로 아스티나는 그와 같은 방을 써야 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저 먼지 가득한 방에서 테리오드와 같이 눕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큰 공사를 벌일 수는 없겠지만 대청소라면 많은 사람을 들여 빠르게 해치울 수 있으리라. 아스티나는 신혼 방 인테리어에 대한 세세한 지시를 남기고는 제 방으로 돌아갔다.

그날, 올리버는 혹여 제 주인의 정신이 돌아온 것은 아닌가 우리 안을 확인했다가 괴물 대공이 짖는 소리에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 * *

“칸나.”

레이첼이 애타는 목소리를 냈다. 칸나는 그녀가 제게 말을 걸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지만,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럴 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뭐라도 좀 먹자. 응?”

레이첼이 재차 칸나를 불렀다. 수프를 담은 스푼이 들이밀어졌다. 칸나는 고개를 내저어 거절했다. 레이첼은 결국 접시를 물렸다. 그녀가 그릇을 협탁 위에 내려놓으며 걱정스러운 음성을 내었다.

“칸나, 산 사람은 살아야지. 이러다 너까지…….”

“나까지, 뭐?”

칸나의 목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샜다. 말실수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레이첼이 어깨를 움츠렸다.

며칠째 제대로 잠들지 못한 칸나의 두 눈엔 검은 그림자가 깊게 져 있었다. 원래도 마른 몸이었지만 더욱 살이 빠져 몹시 초췌한 인상을 주었다. 늘 잘 관리해서 빗어 넘겼던 머리칼 역시 부스스해, 그녀의 참담한 심경을 엿볼 수 있었다.

칸나가 마른 입술을 짓씹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잠시 미쳤던 게 틀림없어, 칸나는 울컥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아스티나가 저를 대신하여 대공저로 떠난 후, 칸나는 불안한 마음을 품으면서도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게 실수였다. 아스티나가 일상에서 사라진 지 만 하루, 칸나는 도무지 심장이 뛰어 음식을 넘길 수도, 잠을 청할 수도 없었다.

칸나는 아스티나가 떠났던 새벽녘이 돌아와서야 정신을 차렸다. 뺨에 와 닿는 찬 공기가 아스티나와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내가 갈게.’

동생의 덤덤한 어조가 가슴께를 찔렀다. 아스티나는 저를 위해 죽을 결심을 했는데, 비겁하게도 혼자 전전긍긍하며 살길을 도모하고 있었다니. 칸나는 스스로에게 구역질을 느꼈다.

그녀는 뒤늦게 짐을 꾸려 백작저로 귀환했다. 대공령까지 가는 기한이 아직 여유 있었기에 칸나는 아스티나가 아직 집에 남아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칸나의 행동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아스티나가 집에 들르고 몇 시진 지나지 않아 바로 여정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칸나는 저 때문에 아스티나가 부모님과의 마지막 시간도 포기했다는 걸 깨달았다.

백작 부부는 칸나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동생을 버린 칸나 역시 죄책감에 눈물을 참지 못했다. 가족들은 서로에게 죄송하다, 미안하다는 말만 한없이 반복했다. 아직 네 살 난 남동생 레이먼드는 영문도 모르고 함께 울었다.

누구보다 영특하고 당당했던 내 동생, 아스티나가 다름 아닌 저 때문에 사지로 향했다니.

‘죽을까?’

칸나는 불쑥 무서운 생각을 떠올렸다. 상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생각이었지만, 아스티나에게 죄를 갚을 방법은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았다. 칸나의 눈이 형형한 빛을 띠었다.

불안한 예감을 떠올린 레이첼이 헨젤과 눈빛을 교환했다. 헨젤이 분위기를 띄우려 부러 부산스럽게 말을 꺼냈다.

“칸나, 마침 레테 백작저에서 편지가 왔던데 한번 휴학을 말씀드려 봐. 집에서 푹 쉬면 몸이 많이 나아질 거야.”

“맞아, 칸나. 기운 좀 차려. 네가 그렇게 곧 죽을 것같이 구는 거, 너무 무섭단 말이야…….”

레이첼이 동조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가 눈가를 닦으며 경쾌한 어조를 자아냈다.

“헨젤, 칸나도 편지가 보고 싶은가 봐. 네가 전해 줘.”

지난번 칸나의 편지를 제 것으로 착각하고 뜯어 본 이후 레이첼은 매우 조심스러워졌다. 불행한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한 이가 다름 아닌 자신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헨젤이 우편물 꾸러미에서 본인들의 것을 제하고 칸나의 몫을 꺼냈다. 레테 백작가에서 보내온 편지 봉투는 제법 두툼했다. 그들은 이게 비보가 아니기만을 바랐다.

칸나는 힘없는 손을 들어 봉투를 뜯고는, 글을 천천히 읽어 내렸다. 아마 부모님은 제게 다시 사과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서문은 칸나가 예상한 내용으로 시작했다.

[사랑하는 내 딸, 칸나에게.

칸나, 잘 지내고 있니? 너에게 저지른 일로 아직 마음이 몹시 무겁구나. 네가 우리를 이해해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각설하고, 네게 전할 좋은 소식이 있어 이렇게 편지를 쓴다. 이 소식이 부디 네 시름을 덜어 주길 바라마.

마음이 몹시 부풀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스티나는 무사하다. 방금 막 아스티나가 보낸 연락이 도착했단다. 어릴 적부터 비범하더니 언제 부모 모르게 그리 어엿하게 자랐는지 모르겠다.

너도 보아야 할 것 같아, 아스티나의 편지를 함께 동봉한다. 네가 들어줘야 하는 부탁이 있기도 해.]

빠르게 휘갈겨 쓴 듯 글씨가 거칠었다. 점잖은 백작 부인답지 않게 잉크 번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을 정도였다. 어머니가 말한 대로 편지지는 두 장이었다. 칸나는 황급히 두 번째 편지를 열었다. 그리고 익숙한 필체에 왈칵 울음을 쏟고 말았다.

[어머니, 아버지께.

일단 저는 무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집에 갔을 때 심한 말씀을 드려서 죄송했어요. 경황이 없어 상처가 될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은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아직 칸나가 집에 머물고 있다면 소식을 전해 주세요. 그녀가 아카데미로 잘 돌아갔을는지 모르겠습니다. 3번 이상 출석하지 않으면 감점이 있을 테니 긴장해야 할 겁니다. 어디에 머물고 있을지 몰라 우선 칸나에게 할 말도 이 편지에 적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부디 칸나는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고, 이 불행에 어떠한 지분도 없다고 일러 주세요. 언니는 본인 행동에 자책할 필요가 없어요. 굳이 이 상황을 설명하자면 제가 언니의 양심을 도둑질한 셈이지요. 괴로워했을 칸나에게 사과를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칸나가 제가 대신해 무릅쓴 불행이, 심지어는 불행도 아니었음을 알아주길 바라요.

본래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본가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예기치 못한 일로 예상했던 열 달보다는 체류가 길어질 것 같습니다. 어쨌든 대공의 후계를 생산하고자 온 것이니까요. 근 일 년은 집을 떠나 있게 된 셈이네요.

내년 이맘때까지 돌아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디 그때까지 강녕하시길.

P.S 수도 제과점 블랑제리에서 파는 초콜릿이 먹고 싶어요. 인편이 있다면 두 박스 정도 보내 주세요. 대공가는 부유하지만 디저트는 단연 수도가 낫네요.]

편지를 쥔 칸나의 손이 떨렸다.

살아 있다고? 아스티나가, 정말 살아 있다고?

진위를 의심하기엔 아스티나의 필체가 확연했고 말하는 어조 역시 너무도 제 동생다웠다. 항상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것까지, 똑같았다. 돌아오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대공의 아이를 낳고 이혼을 하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칸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칸나가 방을 뛰쳐나가는 걸 본 헨젤과 레이첼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들은 칸나가 남기고 간 편지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그리고 칸나와 같이 놀라움에 환희했다.

칸나는 기숙사를 나와 걸음을 재게 놀렸다. 밖에 나돌아 다니기엔 지나치게 부끄러운 행색이었지만 그런 걸 생각할 짬이 없었다. 집으로 가야 했다. 이 소식이 진짜인지 부모님께 여쭈어야 했다.

교정을 내달리는 칸나의 모습을 본 학생들은 안타까운 얼굴로 그들 자매의 불행을 말했다. 동생이 괴물 대공과 결혼했다더니, 언니도 슬픔에 미쳤나 보다며.

아스티나가 아탈렌타 대공령으로 떠나고 많은 시간이 지난 건 아니었지만, 아카데미 내에서도 소문은 알음알음 번져 있었다. 테리오드 대공의 혼인 서약서가 황궁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 불행한 신부의 이름을 알았다. 아스티나 레테, 아스티나 반 아탈렌타가 되어서는 머지않아 절명했을 여자. 그 소식에 아스티나를 미워했던 옥타비아 교수조차 마지막 가는 길 더 잘해 주어야 했다며 깊이 후회했다.

그때 누군가 칸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갑작스런 등장에 칸나는 달려가던 속도 그대로 남자의 어깨에 부딪혔다. 칸나가 얼얼한 이마를 감싸며 놀란 눈을 들었다. 남자가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칸나, 칸나 레테 양 맞습니까?”

“예? 누구신지…….”

칸나가 당황하여 되물었다. 그녀는 이런 미남을 알고 지낸 적이 없었다. 반짝이는 금발이 햇빛을 받아 광채를 냈다. 학교 내의 인기인인지 지나가던 학생들이 저들끼리 무어라 소곤거렸다. 남자가 급박한 어조로 자신을 소개했다.

“벤자민 레안드로스입니다. 아스티나와는 종종 함께 대련을 하는 사이였어요.”

아스티나의 지인이라니. 칸나는 제 동생이 검술반 학생들과 교류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하기야 아스티나의 무예라면 남자들도 너끈히 상대했으리라.

벤자민이 초조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스티나가 테리오드 대공과 혼인했다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그는 아스티나에게 맞는 좋은 검을 선물해 주고자 굳이 멀리 있는 명장에게까지 찾아갔다 돌아온 참이었다. 비단으로 선물을 소중히 감싸 안고 귀환했는데, 복귀한 그가 처음으로 들은 건 바로 아스티나의 결혼 소식이었다.

그것만도 황당한데 부군 될 자의 이름을 들은 벤자민의 얼굴엔 핏기가 가셨다. 상대는 무려 괴물 대공으로 소문난 테리오드 반 아탈렌타였다.

“사…… 사실이에요. 나를 대신해서.”

칸나는 얼떨떨한 낯으로 대답했다. 그만 다시 울음을 터트릴 뻔하였으나, 부모님에게서 온 아스티나의 생존 소식을 상기하고 감정을 삼켰다.

“그런…….”

벤자민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런 종류의 일에서 헛소문이 번지기 힘들다는 건 그도 아는 바였다. 그러나 칸나의 확언을 들은 벤자민은 터져 나오는 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가 흉흉한 얼굴로 따지듯 물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대체 언제, 어떻게, 왜!”

“아버지께서 파산하셨어요. 아탈렌타가에서 채무를 넘겨받는 대신 혼인을 요구했고요. 저는…… 저, 저는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아스티나가 대신 가겠다고…….”

칸나의 설명을 들은 벤자민의 낯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스티나가 강한 건 사실이나, ―검술반의 누구도 그녀를 이기지 못했다― 혹여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어찌한단 말인가. 대공의 몸을 상하게 할까 봐 아스티나를 침실에 맨몸으로 들인다면? 무기가 없는 이상 그녀가 특기인 검술을 어떻게 펼치겠는가. 벤자민의 상상이 점점 극단적인 곳으로 치달았다.

칸나는 서둘러 그의 불길한 예감을 정정해 주었다.

“아스티나는 살아 있어요!”

“예?”

“방금 부모님께 편지가 온 참이에요. 아스티나가 무사하다고 집으로 연락을 남겼거든요.”

칸나는 초조한 얼굴로 벤자민의 뒤를 흘끔였다. 더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동생의 지인에게도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렸으니 서둘러 백작가로 돌아가야 했다. 칸나는 성의 없는 인사를 남기고는 벤자민을 지나쳐 다시금 뛰기 시작했다.

칸나의 말을 잠시간 이해하지 못해, 벤자민은 그녀를 멍청하게 놓쳐 버리고 말았다. 잠시 후, 벤자민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무사하다고 하니 다행이긴 하나 어쨌든 결혼 소식은 사실이었다. 환장할 지경이었다.

벤자민이 두 손을 들어 제 머리칼을 헤집었다.

“이 망할 여자가.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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