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The curse turned him into a beast
1. 여제 마티나
대륙 역사상 유일한 여제, 마티나 오웬 드 레타 카라벨라는 본디 집시 태생이었다.
그녀가 속한 레타 집시의 시초는 아레타 고원 출신의 소수 민족이었다. 후대에 가선 옅어진 피지만 태초, 그들의 피부와 머리는 너무도 검어 날이 저물면 어둠과 구분이 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태생부터 빛의 반대편에 선 이들은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좋은 대상이었다. 아레타 고원과 인접한 블란체 왕국의 권위자들은 소수 민족을 배척하여 제 위엄을 세우고 싶어 했다. 눈에 핏발이 선 이권자들의 말발굽이 온 땅을 할퀴며, 아레타 고원엔 깊은 흉터가 새겨졌다.
악마의 씨앗, 범죄의 근원, 악의 하수인.
아레타 일족에겐 온갖 모욕적인 부름이 뒤따랐다. 농매한 블란체인들은 유약한 소수 민족을 적으로 여겨 그들의 뼈를 부수고 그 피로 땅을 적시라 소리쳤다. 블란체 왕족은 그에 크게 기꺼워하며 만들어 낸 여론을 따랐다.
아레타 지방의 원주인은 몇 번의 침략 끝에 땅을 빼앗기고 거처 없이 떠돌았다. 일족의 근간을 잃은 아레타인들은 치욕을 잊지 않으려 복수의 칼로 먼저 스스로의 이름을 반쪽 내었다. 그 시점 이래 아레타인은 사라지고 레타 집시들이 남았다. 지금에 와선 까마득한 대륙 전쟁보다도 300년은 앞선 일이었다.
이후 레타 집시들은 온 나라를 떠돌며 재주를 부리고 생계를 꾸렸다. 300년은 뼈아픈 핍박이 희석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악마의 이름으로 남은 ‘아레타’라는 단어가 레타 일족의 본명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은 역사학자들의 논문에 몇 줄 고개만 내민 해묵은 역사가 되었다.
블란체 왕국이 내전으로 새로운 공공의 적이 필요해지지 않았더라면, 레타는 그대로 문화의 일부로 섞여 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블란체 왕국의 왕세자는 영민했다. 정실 소생이라는 이점으로 먼저 태어난 이복형을 짓누르고 있었으나 근소한 차이였다. 정통성은 귀족들에게나 인기 있는 서사였고 백성들은 친근한 2왕자를 사랑했다. 배부른 자가 내어 주는 위선 가득한 친절인 줄도 모르고, 왕세자는 우매하다며 백성을 비웃었으나 그건 이복형을 이길 비책이 아니었다.
왕세자는 증오하는 형제와 함께 오래전부터 거슬렸던 벌레를 치워 내기로 마음먹었다. 레타 일족은 공식적으로 블란체의 백성이 아니었기에 세금을 내지 않았다. 레타 일족이 블란체 왕국에서 새끼를 치며 불린 몸집은 작은 영지와 비견되는 수준이었다. 왕세자 입장에선 기생충과 다름없었다.
애초에 블란체의 귀족 남성들은 모계 사회라는 레타 일족의 특수성을 불쾌하게 여겼다. 왕세자는 고대 악마의 이름을 레타 일족과 잇는 데 성공했고 그 악명을 이복형에게 전염시켰다.
[2왕자가 마녀의 힘을 빌려 블란체의 정통성을 위협한다.]
왕세자가 내민 슬로건은 효과적이었다. 2왕자가 마녀와 내통한 증거가 삽시간에 조작되었다. 왕세자는 후계 싸움의 폐단에 깊이 시름하는 척 늙은 왕에게 아첨해 군사를 일으켰다. 잡아들인 레타 일족마다 고문에 못 이겨 거짓을 자백했고 2왕자는 구금되었다.
여제 마티나가 적을 둔 무리는 마지막 사냥감이었다. 독 안에 든 쥐에게는 단칼에 죽을 권리마저도 보장되지 않았다. 레타 일족의 비명은 블란체 군인들에게 있어 교향악을 장식할 화음과 같았다. 마티나가 알고 지내던 대부분의 친지들이 목이 잘렸다. 마티나의 어미인 오웬도 그 희생자 중 하나였다.
오웬은 훌륭한 전사였다. 그녀는 제 딸에게 아름다운 춤과 사람을 죽이는 법을 동시에 가르쳤다. 레타의 검무는 유명한 볼거리였으나 그게 정말 사람을 죽이기 위해 벼려진 날이라는 것은 일족 외에 아무도 몰랐다.
오웬은 방심한 블란체 수뇌부의 목을 여럿 베었다. 대단한 무위였지만 그 결과 중질의 반역자가 되어 온갖 고문 끝에 눈도 채 감지 못하고 죽었다.
마티나는 벼락처럼 분노했고, 동시에 전신을 죄는 무력감에 몸을 떨었다. 복수를 원했으나 단신으로 왕이 있는 도성까지 숨어들 수는 없었다. 마티나는 차라리 어미가 벌인 활약의 대가로 명예롭게 죽기를 원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마티나가 살아남은 것은 바로 그 어미의 무위 덕분이었다.
가장 흉악한 마녀 오웬의 딸.
블란체 군인들은 오웬을 인정했으나 고작 열일곱인 그녀의 딸이 대단한 무력의 소유자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들은 한낱 유흥거리로 마티나를 왕세자에게 진상했다. 승리에 취한 왕세자는 마티나를 침실에 들였다. 마티나는 때를 대비해 숨을 죽이고 기꺼이 겁에 질린 들쥐를 연기했다.
늙은 왕은 반란을 진압한 공을 들어 왕세자를 진정한 후계자로 재공표했다. 왕은 이미 노쇠했다. 말만으로 그칠 일은 아니었고 곧 진짜 승계가 이어졌다.
즉위식이 끝나고 연회가 이어지던 어느 날 밤이었다. 마티나는 풀어진 경계와 어둠을 틈타 제 궁에 구금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2왕자를 찾았다.
그녀가 말했다.
[테오도르 셴 블란체. 증오스런 블란체의 핏줄이여, 당신을 살릴 테니 그 대가로 내게 힘을 다오.]
[나에겐 이제 아무런 힘이 없다, 어린 마녀야. 그대 일족의 치욕이 내게 씌었으니 그저 억울할 뿐이다.]
[내가 왕을 죽이겠다.]
2왕자가 마티나를 비웃었다.
[사지가 찢긴 어미를 보고 미친 것인가?]
[나는 레타의 마지막 딸이자 복수의 칼 그 자체다. 나를 신하로 삼아 치욕을 갚게 해 다오.]
마티나의 눈이 서릿발같이 빛났다. 테오도르 왕자가 어떤 마음으로 그 거래에 응했는지 후세는 짐작만 할 뿐이다. 어쨌든, 테오도르 왕자는 레타 일족과 존망을 함께할 처지였다. 마지막 날숨을 마티나와 나눈 건 의미 없으되 우스운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의미 있는 꿈틀거림이었다.
왕은 오만하게도 제 승리의 상징을 자랑하고 싶어 했다. 그는 연회의 마지막 날, 마티나를 불러 레타 일족이 그리도 자랑하던 검무를 시연하라 명했다. 몰살당한 일족의 상징을 원수에게 구경거리로 내보이라니. 노골적인 행태에 몇몇 점잖은 귀족들이 왕을 말렸으나 그 행동조차 장난스러웠다.
[야만족의 여자여, 검무를 추어라.]
왕은 오웬의 머리를 베었던 검을 마티나에게 던져 주었다. 치욕으로 눈을 내리까는 마티나를 보며 왕은 몹시 기꺼워했다. 아름다운 소녀가 살기 위해 제 발치에서 구르는 것이 그리도 즐거울 수 없었다.
마티나는 떨리는 다리로 서투른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칼끝엔 힘이 없었고 마른 몸은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마녀에게 검을 쥐여 주었음에 잠시나마 긴장했던 기사들은 곧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들은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도록 손잡이에 얹었던 손을 느슨하게 늘어뜨렸다.
마티나가 왕에게 달려든 것은 그와 동시였다.
기사들이 발검하기도 전, 다섯이 찰나에 유명을 달리했다. 검을 뽑은 기사들을 상대로는 한 합 만에 목숨을 앗았다. 붉은 머리칼이 휘날린 자리엔 어김없이 동색의 피가 흩뿌려졌다. 사신과도 같은 모습에 귀족들은 비명 지르며 회장 밖으로 도망쳤다.
경비를 서던 기사들이 왕을 보호하려 했지만 때에 맞춰 2왕자 군이 성 밖에서 밀려들었다. 한 나라를 뒤엎기엔 턱없이 모자란 숫자였으나 성내에 상비한 군들을 처리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테오도르 왕자는 마티나의 생환을 기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 사건을 마녀의 마지막 발광으로 정리해 그녀를 버리는 패로 삼으려 했다. 테오도르 왕자는 연회장에 군을 진입시키는 대신 문을 잠갔다. 쥐새끼들을 독 안에 가두고 하나씩 정리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살아 밖으로 나오는 이가 없었다.
[……지나치게 조용하군.]
테오도르가 중얼거렸다.
이상히 여긴 그가 문을 열라 명했을 때였다. 굉음과 함께 황금 문이 부서졌다. 군이 긴장으로 무기를 틀어쥔 것도 잠시, 드러난 믿을 수 없는 결과에 모두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밖으로 나온 건 피로 온몸을 칠갑한 마티나였다. 왕이 직접 하사했던 하얀 무희 옷이 온통 피로 흥건했다.
살육에 익숙해 있던 군조차 연회장 내에서 벌어진 참상에 침음했다. 얼어 있는 테오도르의 앞에 마티나가 왕을 내던졌다. 오줌을 지렸는지 왕의 사타구니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마티나가 싸늘한 음성으로 비웃었다.
[블란체의 핏줄은 레타와 얼마나 다른가 하였는데, 노란 소변을 보는 건 똑같구나. 아마 그 피 색깔도 우리와 다르지 않겠지.]
마지막을 예감한 왕은 도망칠 용기도 내지 못하고 혼절했다.
마티나는 오웬의 목을 베었던 검을 바닥에 처박았다. 그러고는 테오도르에게 무릎 꿇었다.
[왕이여. 이 목을 제게 주십시오.]
테오도르 왕자는 ‘왕’이라는 호칭이 이젠 제게 주어졌음을 인지했다. 왕이 답했다.
[허한다.]
그러나 마티나는 한 번에 원수의 목을 베지 않았다. 먼저 발목을 잘라 기절했던, 왕이었되 이젠 한낱 범부가 된 남자를 깨웠다.
마티나가 원수를 대하는 방식은 잔악하기 그지없어 그 자리에 있던 모두에게 공포를 심어 주었다. 토악질을 하면서도 군은 일종의 의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의 손속에 눈을 떼지 못했다.
제 이복형제 왈도의 숨이 달아난 후, 새로운 왕이 물었다.
[이 승리에 그대의 공이 크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복수입니다.]
마티나가 절규처럼 말했다.
[제 일족을 멸하는 데 앞장섰던 세 치 혀들을 베게 해 주소서.]
그 기세가 흉흉하여 차마 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국엔 일사천리로 새 바람이 불어왔다. 왕세자의 말만 듣고 아들을 버렸던 늙은 아비는 별궁에 유폐되었고, 곧 소리 소문 없이 죽임당했다.
테오도르 왕자가 왕위에 올라 가장 먼저 한 일은 저를 죽이려 날조되었던 증거의 진위를 가리는 것이었다. 죽은 왈도는 삽시간에 권력에 눈이 멀어 형제를 해친 무도한 자가 되었다. 새 왕은 형제의 죄를 대신해 신께 용서를 비는 모습을 보여 민심을 얻었다.
그 과정에서 레타 일족은 선왕의 간계에 희생된 가여운 이들로 위치를 탈바꿈했다. 테오도르로서는 참으로 기껍지 않은 일이었겠지만, 유일하게 살아남은 레타의 후계 마티나는 왕가의 수호자로 이름을 날렸다.
붉은 사신이자 적(赤)의 검.
그것이 마티나의 이명이었다. 마티나는 왕에게 후작위와 ‘레타’라는 성을 하사받고 어미 오웬의 이름을 미들네임으로 삼았다.
마티나 오웬 드 레타, 모두가 그녀의 무위를 칭송했다. 왕은 저를 위협했던 형제의 세력을 자비 없이 붉은 사신에게 던져 주었다. 마티나는 제 복수를 도운 주군을 위해 기꺼이 왕에 반하는 세력들을 정리했다. 문제는 그녀가 모든 잔당을 처리하고 복수를 마무리한 후에 발생했다.
레타의 이름이 더 이상 사냥개의 위치에 머물지 않았다.
붉은 사신의 명성이 온 나라에 휘날렸다. 레타의 이름이 왕의 위에 그림자를 져 블란체가 적(赤)의 나라로 불릴 정도로 말이었다. 마티나는 모든 재물을 고사하고 아레타 고원으로 귀향했으나 왕은 그녀를 믿지 않았다.
왕은 빠르게 간계를 냈다. 온순하던 그의 성질이 초조함으로 흉포해졌다. 그리도 증오했던 이복형제와 같은 성미가 그에게도 있었다.
결국 레타는 다시 반역자의 이름을 썼다. 마티나가 스물다섯이 되던 해의 일이었다.
마티나는 뒤늦게 탄식했다.
[블란체를 믿어서는 아니 됐다.]
왕이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면 마티나는 백성들 모두가 인정하는 공신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레타 일족이 음해당했던 과거의 일을 잊지 않았다. 자연히 마티나를 응원하는 세력이 많았고 그녀는 기꺼이 그 손을 잡았다. 마티나는 결국 본성을 향해 칼끝을 돌렸다.
왕궁에 다시 피바람이 불었다. 단신으로도 일백의 기사를 베었던 마티나였다. 강건한 세력이 뒷받침되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여기서 후대의 해석을 분분하게 하는 일화가 소개된다.
여제 마티나가 블란체 왕궁으로 진군하는 데는 채 사흘도 걸리지 않았다. 불가능할 만치 빠른 속도에 대부분은 여제의 무위를 칭송했으나 몇 학자들은 의심을 제기했다.
‘마티나가 승기를 잡은 것은 테오도르 왕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여제가 강건하긴 했으나 테오도르 왕이 소유한 군도 대항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에 대한 근거로 마티나 후작을 보필하던 충신 엘시어의 기록을 들었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블란체의 마지막 왕은 도망치는 대신 왕좌에 남아 마티나를 기다렸다고 전해진다.
왕의 배신에 마티나는 오열했다.
[블란체의 마지막 핏줄이여, 그대를 저주한다. 그대가 내게 준 희망을 그대가 앗았다. 내가 겪었던 모든 배신 중 가장 잔악하다.]
[그대에게 할 말이 없다. 마지막까지 이용했음을 사죄한다.]
[하지만 내게 내린 명을 거두지는 않을 테지?]
[그대 할 일을 하라.]
간악한 왕 테오도르는 결국 제 형제와 같은 죽음을 맞이했다.
여제가 마지막 자비로 테오도르 셴 블란체를 왕국 묘지에 안장했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야사일 뿐이다. 저를 버린 주군에게 베풀 자비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전 테오도르가 마티나를 사모하여 여러 번 청혼하였다는 기록도 있으나 대부분은 이가 세를 합치기 위한 정치적 구혼이었다고 평가한다.
이후 마티나는 스스로 왕위를 잇고 어느 누구도 레타의 이름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대륙을 짓밟았다. 그것은 좋은 본보기가 되어 더 이상 감히 아레타를 모욕하는 이가 없었다.
대륙 전쟁으로 제국을 건설한 후 마티나는 국명을 전장의 신 ‘카라벨라’로 바꾸었다. 그녀의 마지막 이름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석 자뿐이던 본명 뒤로 새겨진 것은 그녀가 황제가 된 경위 그 자체였다.
마티나 오웬 드 레타 카라벨라.
여제 마티나는 아레타를 성지로 삼아 그곳에 성전을 세웠다. 그렇게 아레타는 오욕의 땅에서 초대 황제의 본적으로 영광스럽게 자리매김했다.
대륙 통일을 마친 후 여제 마티나는 충신 엘시어에게 제위를 넘기고 남하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슬하에 자식을 두지 않았으며 그대로 레타 일족의 계는 끝을 맞이했다.
* * *
“그래서 이후로 황위를 승계한 황제는 ‘카라벨라’라는 성을 쓰지 못했답니다. 카라벨라는 오직 여제 마티나에게만 허용된 이름이죠.”
깐깐한 인상의 교수가 <카라벨라 제국의 기원>을 덮으며 말을 맺었다. 대단한 여제의 업적에 학생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아니, 모두는 아니었다. 가장 뒤편에 앉은 여학생 하나는 설명이 이어지는 내내 창문 밖만 내다보았다. 도통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마침 바깥에서 불어온 바람에 곱슬 진 빨간 머리칼이 느리게 휘날렸다. 나른하게 뜨인 녹색 눈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 그녀의 생각을 짐작할 수 없게 했다. 무표정한 얼굴이 차가웠지만 유려하게 뻗은 코와 작고 도톰한 입술 등은 분명 대단한 미형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학생의 아름다움은 교수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아스티나 양.”
“…….”
“아스티나 양!”
옥타비아 교수가 짜증스런 목소리로 아스티나를 반복해 불렀다. 그제야 아스티나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녀가 느리게 대답했다.
“네.”
“아무래도 역사학이 너무 쉬웠던 모양이네요. 분명, 수업 내용을 다 이해했으니 딴짓을 하고 있는 거겠죠?”
옥타비아가 날카롭게 질책했다. 아스티나는 이전에도 몇 번이고 주의받은 전적이 있었다.
제국 교육의 정수, 사립 벨라체 아카데미는 졸업이 무척 까다로웠다. 연말마다 진급 시험을 보아 일정 점수를 채우지 못하는 학생은 유급 처리했다. 그마저도 한 번의 유예일 뿐이고 두 번 유급하면 그대로 퇴학이었다.
지난해와 지지난해엔 어련히 알아서 걸러지겠거니 여겨 내버려 두었는데, 그게 실수였다. 아스티나는 수업 태도가 몹시 불량한데도 매번 진급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했다. 그리고 매 수업마다 출석하여 불량한 태도로 ―아스티나는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지만― 옥타비아 교수에게 엿을 먹였다.
옥타비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어려운 질문을 던져 아스티나에게 제대로 망신을 줄 요량이었다.
“여제 마티나가 테오도르 왕을 도와 정적들을 숙청하며 많은 영지들이 왕가로 편입되었습니다. 이때 사라진 가문의 수가 정확히 몇이죠?”
교과서로 쓰는 서적에선 몇몇 명문가의 이름만을 언급했다. 그러니까 옥타비아 교수는 배우지도 않은 걸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은 흘긋 아스티나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아스티나가 곧 얼굴을 붉히며 사과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곰곰이 손가락을 꼽더니, 곧 대답을 내어놓았다.
“열둘입니다. 얕은 보복을 받은 자들은 더 많으나 가주가 숙청당하고 성을 잃은 귀족들의 수만 세면 그렇습니다.”
옥타비아 교수는 내심 당황했고, 동시에 화가 났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수업 자료를 넘겼다. 적당한 다음 질문을 찾은 옥타비아가 숨을 고른 뒤 다시 질문했다.
“좋아요, 테오도르 왕의 고모 되는 셀린느 왕녀는 아탈렌타 공작과 혼인하여 공작 부인이 되었죠. 왕녀 출신의 셀린느 공작 부인이 정실 소생의 왕세자가 아닌 테오도르 왕을 지지한 이유는 무엇이지요?”
“테오도르 왕을 낳은 후궁 앤셀은 샤롯테 백작가의 장녀였습니다. 당대 샤롯테 백작 부인은 셀린느 왕녀가 궁 생활을 할 적 보필한 시녀였고요. 긴밀한 이해관계가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아스티나의 대답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 수 없었다. 이것도 교과 과정에 속한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정답을 판별할 수 있는 옥타비아는 얼이 나간 표정이었다.
그녀의 낯이 갈수록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걸 보며 누군가 속닥거렸다.
“맞았나 봐.”
작은 목소리였지만 워낙 강의실이 조용했던 탓에 옥타비아도 그 말을 들었다. 결국 옥타비아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아스티나 양!”
“네, 교수님.”
차분한 아스티나의 대답에 옥타비아가 숨을 골랐다. 그러나 파르르 떨리는 음성을 전부 진정시키지는 못했다. 옥타비아가 비꼬듯이 말했다.
“아스티나 양이 역사에 아주 해박한 걸 내 미처 몰랐네요. 제 이번 연도 연구에 아스티나 양의 고견을 참고하고 싶군요.”
그녀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옥타비아는 여제 마티나의 활동 시기인 근대사에 있어 제법 권위 있는 학자였다. 그녀는 아스티나가 어떤 대답을 하든 날카롭게 찍어 누르기로 마음먹었다.
“여제 마티나가 테오도르 왕과 나눈 마지막 담화를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마티나가 말하는 배신은 테오도르 왕의 블란체 핏줄 자체였고, 애초에 그녀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계획하에 테오도르 왕의 현안을 흐렸다는 설이 있지요. 이에 대한 아스티나 양의 의견은 어떻지요?”
학부에서 오갈 문답은 아니었다. 설전은 이제 옥타비아의 자존심 문제로 옮겨 갔다. 학생들은 모두 긴장하여 빨리 이 말싸움이 끝나기만을 빌었다.
아스티나는 생각했다.
‘이게 아닌데.’
아스티나는 앞으로도 계속 수업 시간에 딴짓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옥타비아가 공부 자체로는 자신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족족 맞는 대답을 했다. 그런데 옥타비아는 아스티나가 모든 질문에 답하더라도 놓아줄 태세가 아니었다.
아스티나는 앞으로 역사 시간에는 그냥 제대로 수업을 듣기로 했다.
아스티나의 얼굴이 삽시간에 풀어졌다. 그녀는 볼에 홍조를 띠며 부끄럽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마티나에게 있어 테오도르의 배신은 가장 잔악했음이 틀림없어요.”
“왜죠?”
“테오도르 왕을 사랑했으니까요.”
옥타비아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어느 학생 하나가 입을 틀어막았다.
“풉.”
웃음은 전염되어 교실 안이 왁자지껄해졌다. 옥타비아는 아스티나가 저를 놀리는 건가 싶었지만 그녀의 대답은 꽤 진지해 보였다. 정말 그렇게 믿는다는 듯 세기의 로맨스에 감탄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한껏 설레 하는 모습에 무어라 질책할 수도 없었다.
때마침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학생들이 기다렸다는 듯 썰물처럼 교실을 빠져나갔다. 옥타비아 교수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땐, 아스티나 역시 재빠르게 밖으로 달아난 후였다.
* * *
“짓궂네, 내 동생. 선생님한테도 대들고.”
수업 시간에서의 소란이 벌써 소문난 모양이었다. 아스티나는 귀찮게 따라붙은 제 언니 칸나를 무시하며 걸음을 빨리했다.
“이젠 남도 아니고 친언니까지 무시하는 거니?”
칸나가 장난스레 아스티나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스티나는 부정했다.
“대든 거 아니야.”
“강의 시간에 내내 창밖만 봤다며.”
“시상을 떠올려 봤어, 레이디답게.”
아스티나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물론, 칸나는 아스티나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제 동생 아스티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남다른 아이였다.
아스티나가 남들보다 말을 이르게 떼었을 때 가족들은 그녀가 영특한 아이라고만 생각했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 사랑에 눈이 멀어 종종 별것 아닌 일로 제 자식을 치켜세우지 않던가.
과연 아스티나가 자라며 레테 백작 부부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다만 그 빗나간 방향이 남들과는 조금 달랐다.
영특한 정도가 아니었다. 아스티나는 진짜 천재였다.
아스티나는 보통의 어린아이들이 좋아하는 공놀이나 인형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다른 아이들이 밖에서 뛰어놀 때 서재에 틀어박혀 성인도 읽기 힘든 역사서를 제 키만큼 쌓아 놓고 봤다.
레테 백작은 열 살도 안 된 딸이 왜 제국의 역사에 관심을 두는지 의아해했다. 아버지의 궁금증에 아스티나는 영문 모를 대답만을 늘어놓았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봐야겠어요.’
레테 백작은 아스티나의 행동을 천재의 기행으로 이해했다.
남다른 그녀의 깨우침에 레테 백작은 예년보다 일찍 아스티나에게 예법을 가르쳤다. 마침 두 살 연상의 언니 칸나를 위해 가정 교사를 초빙한 참이었다. 준비된 교실에 머리 하나를 더 밀어 넣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어린 칸나는 동생과 같은 수업을 듣는 것을 창피해했다. 아스티나가 언니의 자존심을 위해 눈치껏 진도를 맞춰 주는 일은 없었다. 천재에게도 찻잔을 드는 각도나 걸음을 교정하는 것은 지겨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스티나는 두어 번 수업을 듣더니 다음 날 완벽한 몸가짐으로 나타나 모두를 놀라게 했다. 고아한 움직임은 먼저 배운 언니보다, 아니 가르친 선생보다도 훨씬 나았다.
덕분에 어린 칸나가 스스로를 천치로 오인해 방 안에 틀어박히는 소소한 해프닝이 벌어졌다. 백작 부부는 보통 아이들은 칸나와 같은 속도로 예법을 떼며 그녀의 교육도 이른 편임을 열성적으로 설명했다.
사실, 칸나도 영재의 축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칸나는 자신이 범재가 아니라 아스티나가 천재였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드디어 방 밖으로 나온 칸나에게 아스티나는 위로 같지도 않은 위로를 던졌다.
‘벌써부터 자신에게 그렇게 실망하지 마, 한계가 죽을 날까지 언니를 반복해서 괴롭힐 테니까.’
어린 칸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칸나에게 있어 아스티나는 별종이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얼굴에 우아함까지 갖추었는데 하필 검에 관심을 보이는 점도 그러했다. 열 살 생일날, 아스티나는 아버지에게 검을 달라고 청했다가 크게 혼난 적이 있었다.
그 후 다시 같은 요구를 하는 일은 없었으나 칸나는 아스티나가 종종 후원으로 사라지는 이유를 알았다. 백작의 호위를 맡은 기사 히센과의 남모를 회동 때문이었다.
처음에 칸나는 둘이 남몰래 교제하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당시 아스티나는 열둘이었고 히센은 스물다섯의 건장한 청년이었다. 그리고 둘이 나누는 대화도 조금 이상했다.
‘경은 내가 천치로 보이나? 확실하지도 않을 때 그렇게 크게 내지르기를 하면 검을 회수하기까지의 방어는 어찌할 셈이지?’
히센보다 한참 작은 아스티나가 짜증스럽게 그의 검 버릇을 나무라고 있었다. 히센이 땀을 뚝뚝 흘리며 차렷 자세로 섰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왜 나한테 죄송하지? 하긴, 조금만 실력 있는 살수가 오면 아버지를 지키지도 못하고 개죽음당하겠군. 대단한 일이야.’
‘면목 없습니다, 스승님!’
‘난 자네 같은 제자 둔 적 없네.’
아스티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하다 칸나가 숨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짧은 다리로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들켰다는 걸 깨달은 칸나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아스티나가 대뜸 말했다.
‘비밀 지켜.’
‘왜?’
‘부하의 무능에 아버지가 슬퍼할 테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아버지가 검은 위험하다고 했어.’
‘칸나, 위험한 건 약해지는 거야.’
이번에도 칸나는 아스티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 달간 후식을 양보받는 대가로 비밀을 엄수했다.
이후 막내 기사였던 히센은 점점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최연소 기사단장을 노릴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재능 있는 기사가 고작 열두 살 소녀에게 가르침 받았을 리 있나. 칸나는 자신이 그때 꿈을 꾼 것은 아닌가 의심했지만 아스티나는 그런 칸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꾸준히 검에 매진했다.
어쨌든, 이후 아스티나는 요란스러운 어릴 적 행태와는 다르게 ―적어도 남들이 보기로는― 모든 일에 보편적인 진도를 따랐다. 조기 졸업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학식을 가진 그녀가 계속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는 이유였다.
“교수님을 바보로 만드는 건 레이디다운 일이 아니야.”
칸나가 점잖게 꾸지람을 했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은 길었다. 조용한 개인 공간에 도착하기까진 시간이 걸렸기에 아스티나는 대화에 응했다.
“그런 적 없어.”
“네가 테오도르 왕과 마티나 여제의 사랑 이야기를 믿는다고?”
일부 소설책이나 연극에서 차용하고 있는 소재이기는 하나 어디까지나 허구였다. 그런 걸 ‘저’ 아스티나가 진지하게 생각할 리가 있겠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칸나는 코웃음을 쳤다.
아스티나가 그런 칸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언니는 못 믿을지 모르겠지만, 난 정말 그렇게 생각해.”
옥타비아 교수를 놀리려고 한 말은 맞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아스티나가 천천히 여제의 본명을 읊었다.
“마티나 오웬 드 레타 카라벨라.”
“응?”
불쑥 등장한 긴 이름에 칸나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스티나가 이어 물었다.
“여제의 이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뭐가?”
“‘드’는 블란체 왕국에서 후작위에 따라붙던 이름이야. 그리고 마티나 여제는 제국의 초대 황제였지. 그녀는 왜 자신의 이름을 바꿔 후작이었던 과거를 지우지 않은 걸까? 그것도 배신한 주군이 내린 작위인데.”
“그건……. 음, 그건…….”
칸나가 대답을 찾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이유는 없었다. 이유가 필요할 까닭도 없었다. 여제는 마티나 오웬 드 레타 카라벨라였다. 역사서는 여제의 이름을 그녀가 아직 제위에 있던 백 년 전부터 그렇게 써 왔다. 그건 하늘이 파랗고 추우면 꽃이 지며 더우면 눈이 녹는 등의, 너무도 당연한 사실 그 자체였다. 한 번도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러네? 왜 그랬지?”
결국 칸나는 꼬리를 내렸다. 그녀는 말싸움으로 제 동생을 이겨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스티나가 덤덤하게 이어 설명했다.
“후작위를 뜻하는 미들네임 ‘드’를 유지한 것은 아스티나가 테오도르가 내린 이름을 버리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이야.”
“아스티나가?”
“말실수, 마티나가.”
아스티나가 선선히 실수를 시인했다. 의외로 근거 있는 믿음에 칸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마티나 여제의 마음을 그렇게 잘 알아?”
“잘 알지. 본인 외엔 제일 잘 알걸.”
아스티나가 미소 지으며 말을 맺었다.
“천재잖아.”
그러고는 방문을 열었다.
아스티나와 칸나는 4인실을 썼다. 평민들이 쓰는 기숙사처럼 한방 안에 침실과 공부 공간이 함께 있는 구조는 아니었다. 비교적 넓은 거실을 공동 구역으로 두고 그에 달린 작은 침실 네 개를 하나씩 나누어 쓰는 식이었다.
아스티나와 칸나는 학년이 달랐지만 자매였기에 같은 방을 배정받았다. 나머지 룸메이트는 칸나와 같은 학년이었다. 자매는 그들과도 제법 친했다.
“칸나!”
칸나와 아스티나가 안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누군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룸메이트 중 하나인 레이첼이었다. 예기치 못한 고성에 자매가 굳어 있는데, 레이첼이 희게 질린 얼굴로 뛰어왔다.
그녀의 손엔 편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게 뭔데요?”
아스티나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레이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결국 울음을 쏟아 냈다.
타인의 편지를 실수로 뜯어봤을 때 행해야 할 가장 귀족적인 해결법은 모른 척 다시 봉하는 것이다. 그러나 레이첼은 이번만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안에 담긴 끔찍한 내용이 그녀가 이성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칸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스티나와 눈빛을 교환했다. 아스티나는 레이첼의 손에 들려 있던 편지를 부드럽게 앗아 들었다.
“칸나, 어떡해. 칸나…….”
레이첼이 양손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칸나의 얼굴에 불안이 떠올랐다. 아스티나는 앞선 몇 줄을 읽더니 낯을 굳히고 칸나가 내용을 확인하지 못하도록 그녀를 등졌다.
제게 온 연락임이 분명할진대 왜 본인이 보지 못하게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칸나가 불안한 목소리로 동생을 불렀다.
“왜, 뭔데.”
“…….”
“아스티나, 레이첼! 그게 뭔데, 대체 뭐라고 적혀 있는데!”
편지는 아스티나와 칸나의 어머니인 레테 백작 부인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 안엔 좋은 소식 하나와 나쁜 소식 둘이 적혀 있었다.
나쁜 소식 하나, 무역업을 하던 레테 백작의 배가 풍랑에 휘말려 침몰했다.
사업의 사활을 건 수출이었고 백작은 이번 건에 대부분의 재산을 끌어다 썼다. 레테 백작가는 명문이었지만 그리 부유하진 않았다. 아스티나와 칸나가 4인실을 쓴 것도 부모님께 부담을 지우지 않으려는 의도가 컸다.
애초에 레테 백작가가 분수에 맞지 않는 거대한 저택을 유지하고 있던 것도 백작의 사업 수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젠 그 집조차 넘어갈 판이다.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재산이 다시 돌아오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그들은 평생을 감당하지 못할 빚을 갚는 데 허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좋은 소식.
믿지 못할 행운으로, 레테 백작가와 거래하던 아탈렌타 대공가에서 모든 채무를 변상했다. 아탈렌타가 휴지 조각이 된 채권을 사들인 덕에 레테 백작 부부는 빚쟁이들에게서 안전할 수 있었다.
‘공가에서 조건 없이 이런 은혜를 베풀었을 리가?’
아스티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기쁨은 짧았다. 아니나 다를까 편지는 다시 나쁜 소식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이번 것이야말로 그들에게 닥친 불행 중 가장 질이 나빴다.
“칸나, 네가 아탈렌타 대공과…… 혼인해야 한대.”
레이첼의 말에, 칸나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희게 질렸다.
아탈렌타 대공가는 블란체 왕국의 초대부터 함께한 의미 있는 공신 가문이었다. 여제 마티나가 카라벨라 제국을 건국한 후에도 그녀의 충직한 신하를 자처해 자리를 지켰다.
말하자면 그들, 아탈렌타는 귀족이 아닌 적이 없었다. 신분이라는 것이 존재할 적부터 늘 고귀했던 가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였다. 작은 백작가와 혼사를 진행하기엔 지나치게 격이 높았다. 이렇게 신부를 매매하는 모양새로 혼사를 해치울 이유가 없는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레테 백작가가 돈을 가져다 바쳐도 연이 닿지 않을 가문이다.
원래대로라면.
“아탈렌타 대공이라면……. 괴물 테리오드?”
칸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녀의 어깨가 잘게 경련했다. 레이첼의 구성진 울음이 더욱 짙어졌다.
괴물 테리오드.
아탈렌타의 가주를 가리키기엔 지나치게 격의 없는 부름이었다. 그러나 실상을 알게 되면 그보다 적절한 표현은 찾지 못할 것이다.
테리오드 반 아탈렌타는 괴물이었다. 뱀의 눈을 하고 털가죽을 두른 대공의 소문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말뿐인 이야기라면 대공가는 추문에 난색을 표하며 사람들의 입을 단속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 소문엔 실체가 있었다.
아름다운 외양으로 칭송이 자자했던 테리오드가 왜, 언제부터 그리되었는지 정확히 아는 자는 없었다. 스물다섯이 되던 해 테리오드가 칩거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달 뒤 대공령엔 사람을 찢어 죽이는 괴물 대공의 이야기가 무성해졌다. 대공저에서 근무하던 여종 몇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후로 그 소문은 기정사실화되었다. 그들의 사체는 갈기갈기 찢겨 형상을 알아보기 힘들었다고 전해진다. 유족에게 전해진 엄청난 보상금이 그게 가주의 짓이었음을 말해 주었다.
“아스티나, 그 편지 이리 내.”
칸나는 몸이 약한 편이었다. 나긋한 말투나 가녀린 손목은 레이디의 표상이었다. 그런 칸나가 밀치듯 아스티나에게서 편지를 빼앗았다.
읽는 사람이 달라진다고 내용이 바뀔 리 없었다. 레테 백작 부인은 혼인이 일주일 후로 예정되어 있으니 최대한 빨리 백작저로 귀환하라 전했다.
칸나는 편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새기듯 어미의 전언을 마음에 담으며, 그녀는 곧 진정하는 기색을 띠었다. 이윽고 칸나가 제 감정을 완전히 갈무리했다. 손끝이 떨렸으나 표정만은 차분했다.
그녀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집에 가야겠어.”
“칸나, 너 괜찮아?”
아무 상관 없는 레이첼이 더 유난이었다. 칸나는 대답하지 않고 제 침실로 들어갔다. 뒤따르려는 레이첼을 아스티나가 막아섰다. 아스티나는 느리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울상을 한 레이첼이 발만 동동 굴렀다.
아스티나는 제 언니를 따라 침실로 향했다. 칸나는 넋 나간 얼굴로 짐 가방에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레이스 모자를 소중히 갈무리하던 그녀가, 문득 바닥에 주저앉았다.
칸나가 핏기 없는 입술을 달싹였다.
“가져갈 필요가 없겠구나.”
“칸나.”
“아스티나, 네가 가질래?”
칸나가 어슴푸레하게 웃으며 물었다. 눈가가 젖어 있어 전혀 웃음 같진 않았다.
괴물과 결혼하라니, 사람을 찢어 죽이는 괴물의 아이를 낳으라니! 그게 죽으라는 소리가 아니면 무엇인가.
비명 치듯, 칸나의 입이 벙긋였다. 그러나 솔직한 심정을 내보이기에 그녀는 너무도 잘, 교육받았다. 그녀는 저를 인신 공양 하겠다는 소식에도 변변찮은 욕설 하나 내어놓지 못했다.
칸나를 말없이 내려다보던 아스티나가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러고는 털썩 무릎을 굽혀 그녀와 마주 앉았다. 평소라면 치맛자락이 더러워진다며 타박했을 칸나가 눈시울만 붉혔다.
“내가 아까 놀렸던 거 장난이었던 거 알지?”
“알아.”
“네가 좀 이상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널 사랑해.”
“그것도 알아.”
칸나가 팔을 뻗어 아스티나를 끌어안았다. 아스티나는 제 귀 뒤가 젖어 드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모른 척 칸나의 등을 쓸어 주었다.
아스티나가 불쑥 말했다.
“가지 마, 칸나.”
칸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고상한 레이디답게 귀족의 의무를 말했다.
“우리는 레테 백작가의 손으로 그동안 많은 은혜를 입었어. 이젠 의무를 다할 차례야.”
동생을 설득하기 위해서라기보단, 스스로의 의지를 다지기 위해 하는 말 같았다. 그 증거로 손끝의 떨림이 아직 여전하지 않은가. 칸나가 재차 다짐하듯 말했다.
“원래 귀족 영애의 결혼은 다 이런 거야.”
속는 자가 없어 더욱 애처로운 기만이었다. 그리고 아스티나는 언니의 죽을 결심을 배려할 생각이 없었다.
아스티나가 싸늘하게 반박했다.
“틀려 칸나, 모든 귀족 영애가 죽음을 각오하고 결혼하진 않아.”
아스티나의 지적에 칸나가 숨을 들이켰다. 동생의 매정한 말이 소름 끼쳤다. 그녀는 저를 안고 있던 아스티나를 밀쳐 냈다. 칸나의 얼굴은 완전히 눈물로 절어 있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녀는 소소하게 행복했고 잠자리에 드는 밤까지도 그러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언제나 반가웠던 가족의 편지가 이번만은 그녀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칸나에게서 한 번도 들은 적 없던 고성이 터져 나왔다.
“그럼 나보고 어쩌라는 거니? 나 혼자 살겠다고 도망쳐?! 집안이 무너지면 이보다 더 큰 일이 생길 수도 있어. 그리고 그때 불행해지는 건 나 하나만이 아닐 거야. 내가 가는 게 맞아, 그래야 해.”
“아버지의 실수에 언니 인생을 팔 순 없어.”
“그래서 아버지를 버리겠다고?”
“그렇게 말하진 않았어.”
“너, 몰락한 귀족들이 어떻게 되는지 알긴 아니?”
칸나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아스티나의 만류가 세상 물정을 몰라 나온 천진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스티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날 선 어투로 대답했다.
“알아.”
“뭐?”
“남자들은 해 본 적 없는 노역에 병들 테고, 여자들은 운 좋게 누군가의 정부가 되지 않는 이상 불특정 다수에게 매춘을 하게 되겠지.”
“아스티나!”
칸나가 핼쑥한 얼굴로 동생을 제지했다. 그러나 아스티나의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아스티나는 칸나를 노려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어쨌든 지금도 누군가는 그렇게라도 살아. 그게 뭐든, 언니 목숨보다 더 중요해?”
주변은 온통 조용해 고양된 아스티나의 숨소리만이 번졌다. 아스티나는 분노를 디디고 서 제 언니의 대답을 기다렸다.
칸나가 처연하게 눈을 감았다. 떨리는 숨과 함께 대답했다.
“중요해.”
“…….”
“명예를 버리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아스티나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그녀가 들릴 듯 말 듯 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사람이라 언니를 좋아했지.”
“뭐?”
동생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 칸나가 되물었다. 아스티나는 눈을 굴려 그런 칸나를 무심히 응시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칸나는 순간 제 동생이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나중에 얘기하자, 칸나. 오늘은…… 너무 늦었어. 마차도 잡을 수 없을 거야.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마저 얘기해.”
한숨을 내쉰 아스티나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동생의 휴전 선언에 결국 칸나도 물러섰다.
“알았어. 같이 자자.”
마지막이니까, 칸나는 뒤이은 말을 혀 밑으로 삼켰다.
부드러운 면 잠옷으로 갈아입는 동안 칸나와 아스티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스티나가 제 침실에서 베개를 하나 들고 왔고, 칸나는 이불을 들어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룸메이트 중 하나인 헨젤이 뒤늦게 소식을 전해 듣고 문가에서 잠시 서성였지만 자매를 배려한 것인지 이내 돌아섰다.
자매는 오랜만에 같은 침대에 누웠다. 아스티나의 나이가 두 자릿수가 된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스티나는 등을 돌리고 누운 제 언니를 빤히 응시했다. 여린 목덜미가 희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았다.
아스티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칸나.”
“……왜?”
“히센과의 일, 비밀 지켜 줘서 고마웠어.”
‘그게 진짜 꿈은 아니었구나.’
칸나는 실없이 생각했다. 너무 어릴 때고, 또 워낙 말도 안 되는 일이라 헷갈렸었는데 이제야 확증이 생겼다.
칸나는 짧게 코를 들이켰다. 아스티나가 아예 다른 화제를 꺼내 주어 차라리 고마웠다. 칸나가 새침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말을 해도 아무도 안 믿었을걸.”
“그런가?”
“히센과는 어쩌다 그렇게 됐어?”
“히센의 검을 훔치다가 들켰어.”
칸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린 아스티나가 커다란 검을 질질 끌고 도망가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히센이 자기 검을 훔친 도둑한테 검술을 배웠어?”
“내가 연습용 검 하나만 달라고 우기니까 목검을 쥐여 주더라고. 자길 한 번이라도 때리면 자기 검을 내놓겠다고 으스대면서. 그래서 실컷 두들겨 패 줬지.”
아스티나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칸나가 키득이며 아스티나에게로 몸을 돌렸다. 자매는 서로 마주 보고는 숨죽여 웃었다.
“그래서 그맘때 히센이 자기 가보를 잃었다면서 한참 술독에 빠져 지냈구나?”
“적당히 놀리고 나중에 다시 돌려줬어.”
아스티나에게 보기 좋게 얻어맞은 이후 히센은 그녀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몹시 신기해하며 어디서 검을 배웠는지, 누가 가르쳐 줬는지 등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아스티나는 어쩔 수 없이 어릴 적 신세 졌던 방대한 서고를 핑계 대야 했다. 거기서 검법서를 여럿 보았는데 워낙 천재다 보니 바로 이해가 가더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덧붙여 가며 말이다. 순진한 히센은 그걸 그대로 믿었다.
‘그럴 수가……. 아가씨,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아가씨는 천재예요. 적합한 교육을 받으셔야 합니다.’
사정을 들은 히센은 쓸데없는 고양감에 찼다. 이런 천재를 교육 없이 방치할 수 없다는 기사로서의 책임감이 발동됐다.
결국 히센은 자세를 봐 주겠다며 아스티나의 수련에 귀찮게 끼어들었다. 아스티나는 장단을 맞춰 줄 요량으로 허했다. 그러나 아스티나의 인내심은 한 시간도 채 버티지 못했다. 가르친답시고 휘두르는 검이 정도 이상으로 형편없었다.
‘아가씨, 보세요. 검은 이렇게 쥐셔야 합니다.’
히센의 훈수에 아스티나의 표정이 그대로 썩어 들었다. 곧바로 사제 관계가 바뀐 건 당연지사였다.
비밀 수련을 대가로 아스티나는 히센에게 검을 쓰는 법을 가르쳤다. 아스티나가 아카데미로 갈 적, 히센은 이제 저와 대련은 누가 해 주냐며 서럽게 울었다.
‘아가씨, 가지 마세요! 흐흐흑! 전 아가씨 없이 못 살아요!’
‘누가 들으면 오해할 만한 소리는 지양하게.’
‘조기 졸업 하실 거지요?’
‘7년을 꽉 채울 거야.’
‘……검술학부로 가시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어리둥절해하는 히센에게 아스티나는 그동안 요긴하게 썼던 그의 검을 돌려주었다. 되찾은 가보에 희희낙락한 것도 잠시, 아스티나의 대답을 들은 히센의 표정이 당혹으로 일그러졌다.
‘전공은 정치야.’
칸나는 자신을 따라 정치 학부로 들어온 아스티나를 반가워했다.
그녀는 이미 아스티나의 천재성을 인지하고 저 나름의 자존감을 다진 상태였기에 제법 언니답게 굴었다. 동생의 대단한 학습 능력에 충격받아 방 안에 틀어박히는 일은 없었다는 뜻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스티나와 예법 수업을 같이 들었을 당시 칸나의 나이는 고작 여덟 살이었다.
그들은 드문드문한 어투로 대화했고, 그 밤은 무척 어둡고 또 조용했기에 이야기가 한없이 길게 이어졌다.
자매는 졸음이 담긴 목소리로 끝없이 추억을 얘기했다. 어떤 것은 실없었고 어떤 것은 의미 있었다. 칸나의 음성이 점점 잦아드는 걸 알아챈 아스티나가 이불을 여며 주었다.
“그만 자.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
아스티나의 말에 칸나는 입을 다물고 고개만 주억였다.
레테 백작가는 수도에서 하루를 꼬박 달려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 레테 백작가에서 아탈렌타 대공령까지는 나흘이 걸렸다. 새신부가 가족들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은 단 이틀밖에 없었다.
칸나의 숨소리가 곤해졌다. 감겼던 아스티나의 눈이 조용히 뜨였다. 아스티나는 언니의 눈앞에 대고 손을 흔들어 완전히 잠들었는지를 확인했다. 곧 마른 두 발이 침대 밑으로 내려앉았다.
아스티나는 제 방으로 가 간단한 짐을 꾸렸다. 밤에 걸칠 두꺼운 겉옷, 금전과 귀금속 등을 챙겨 기숙사를 나왔다.
새벽녘의 학교는 조용했다. 그녀는 텅 빈 복도를 걸으며 히센과의 대화를 생각했다.
‘7년은 못 채우겠네.’
평범하게, 남들과 최대한 비슷하게 삶을 꾸리는 것이 아스티나의 본래 계획이었다. 어린 천재치고는 보잘것없는 목표다. 아스티나가 바로 그 ‘어린 천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문제지만.
춤추며 즐겁게 공연하던 집시들, 곧 달아난 그들의 머리, 어미의 죽음. 복수, 광영된 권력, 막대한 부, 사랑과…… 배신.
아스티나는 태어났을 적부터 그 모든 것을 알았다. 붉은 머리의 아름다운 여인이 겪었던 감정 전부를 자기 일처럼 느꼈다. 모든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갓 태어난 아이가 피 튀기는 전쟁의 무서움에 찢어지듯 울었다. 한 살 땐 사람들의 잘린 머리를 보는 데 익숙해졌고 두 살 땐 낯 뜨거운 침실 사정을 기억했다.
아스티나가 완전히 자아를 깨달은 것은 세 살 무렵이었다. 그 전까지는 감각과 기억이 너무도 흐릿하여 저가 무엇인 줄도 몰랐다. 여제 마티나의 건국 비화를 자장가로 들려주는 유모를 보며 아스티나는 실소했다.
‘왜?’
왜 다시 태어났을까. 모든 인류의 바람대로 반복해 생을 얻는 게 당연한 일이라면, 어째서 저만은 전생을 기억할 수 있는 걸까. 그녀 나름대로 진리를 찾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걸음이 가능해진 후부터 그녀는 집 안의 모든 서적을 헤집었다. 저가, 마티나가 죽은 후로 벌어진 일들이 궁금했다. 그러나 이제 와 파헤치기엔 건너온 시간의 골이 너무도 깊었다. 마티나의 죽음 뒤로 벌써 백 년 가까이가 흘러 있었다. 허탈한 일이었다. 자신이 알던 모두가 죽어 답답한 심경을 나눌 이가 없었다.
다만 모두 자신처럼 거듭 삶을 얻었을 거라 생각하니 위안이 되었다.
‘그도 다시 태어났을까.’
아스티나는 누군가를 떠올렸다가 곧 소스라치듯 놀랐다. 들고 있던 역사서를 거칠게 덮고는 추억에서 도망쳤다.
그 밤, 그 꿈, 아스티나는 제 배를 간질이는 따듯한 손의 기억에 찢어지는 비통함을 느꼈다.
‘마티나의 일은 마티나의 일이다.’
아스티나가 절규하며 이불자락에 얼굴을 묻었다. 소리 없는 울음보다 창으로 바람이 들이치는 소리가 더 컸다. 짓무른 입술을 씹으며 아스티나가 결연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아스티나야.’
그렇게 그녀는 옛사람들을 추모하기를 멈추었다.
어렸을 땐 답답함을 참을 수 없어 부러 영특한 티를 내었으나, 그건 마티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아스티나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스티나는 본래 ‘아스티나’에게 주어졌을 삶을 충실하게 살기로 했다. 마티나가 마티나의 삶에 충실했던 것처럼.
“하지만 이번은 예외야.”
아스티나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이전 생에서 온갖 더러운 꼴을 전부 보았다. 억울하게 부모를 잃었고 사랑하는 이에게 배신당해 봤으며, 전쟁의 위험에 빠져 살았다.
칸나의 경우가 유일하거나, 혹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건 그녀가 가장 잘 알았다. 아스티나는 재산으로 취급받는 여자가 어떻게 소비되는지 똑똑히 보아 왔다. 심지어 저조차 어미를 죽인 원수와 동침한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생명을 위협받을 때, 아스티나는 대공을 베고 아무도 모르게 저택을 빠져나올 자신이 있었다. 이전의 신분으로 살 순 없겠지만 어렸을 적 집시의 품에서 자란 마티나에게 방랑은 새로운 일도 아니었다.
레테 백작가에서 없는 사람이 되어도 되는 건 평생을 레이디로 살아온 칸나가 아니라 홀로 사는 법을 아는 아스티나였다.
아스티나는 마구간에서 말을 한 필 꺼내 왔다. 내일 아침 마구간지기가 도난 사건에 머리를 감싸 쥐겠지만 이후 변상하면 될 일이다. 아스티나는 말에 안장을 올리고는 주머니를 짧게 매듭지어 연결했다. 땅을 박차 단번에 위로 올라탔다. 고삐를 당기자 말이 작게 울었다. 아스티나는 부지런히 정문으로 향했다. 아카데미를 나서고 나서는 쉼 없이 달려야 했다.
점점 속도를 내던 아스티나가 미간을 좁혔다. 정문에 누군가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경비는 아니었다. 체구가 몹시 작고 여렸기 때문이다. 아스티나는 얼굴보다도 그 뼈대를 먼저 알아보았다.
칸나였다.
아스티나는 말을 멈춰 세웠다. 칸나가 잰걸음으로 아스티나에게 달려왔다.
“아스티나!”
“자는 게 아니었어?”
제 언니가 남을 속이려 연기를 다 하다니, 아스티나는 조금 놀라웠다.
쌀쌀한 새벽 공기에 칸나의 뺨은 차게 식어 있었다. 그녀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대체 어딜 가는데?”
야반도주하는 모습을 들켰는데 거짓말이 통할 리 없다. 아스티나는 제 행동을 장황하게 꾸며 내는 대신 짧게 답했다.
“내가 갈게.”
목적지는 빠져 있었지만 칸나는 아스티나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미쳤어?”
칸나가 창백한 얼굴로 주먹을 틀어쥐었다. 아스티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난 안 죽을 거야. 언니도 알잖아, 내가 검을 다룰 줄 아는 거.”
“상대는 괴물이야!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고!”
“거부감 없이 벨 수 있겠네. 더 이상 사람을 죽이고 싶진 않거든.”
아스티나가 차갑게 말했다. 더 이상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건 마치, 이전에는 그래 본 적 있다는 듯한 투가 아닌가.
농담이라고 하기엔 아스티나의 낯이 지나치게 비정했다. 칸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제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아스티나……?”
아스티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칸나의 얼굴에 곧 결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칸나는 아스티나가 탄 말을 살폈다. 짐 꾸러미를 발견한 그녀가 재빠르게 고삐를 쥐었다. 불시에 출발하지 못하게 하려는 듯했다.
“같이 가.”
“칸나.”
아스티나가 언니를 부드럽게 제지했다. 그러나 만류의 말이 나오기도 전 칸나는 크게 고개를 저었다.
“일단 집에 가서 얘기해. 내가 가더라도 너는 나를 혼자 보내지 않았을 거잖아.”
아스티나가 짧게 한숨 쉬었다. 뻔히 보이는 속셈에 어울려 줄 이유는 없었다.
“오지 마.”
“그래도 같이 가. 집까지는 같이 갈 수 있잖아.”
“오지 마, 칸나. 마음 약해질 거야. 역시 내가 가야겠다는 말 같은 거 안 할 자신 있으면 와도 되고.”
칸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내가 가야 해, 아스티나.”
“그래서 안 돼. 언니가 따라온다면 나는 언니를 저주하며 죽겠어.”
칸나가 충격받은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잠시 보인 빈틈에 아스티나는 사정없이 제 언니를 밀쳤다. 칸나는 등자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덕분에 삽시간에 중심을 잃고 뒤로 나동그라졌다. 제대로 엉덩방아를 찧은 칸나가 당황한 얼굴로 아스티나를 올려 봤다.
아스티나가 고삐를 들었다. 그녀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말을 출발시켰다.
“아스티나!”
칸나가 주저앉은 채로 제 동생을 불렀다.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날 수 없었다. 머리가 온갖 생각으로 어지러웠다. 더듬더듬 바닥을 짚으며 칸나는 겨우 해야 할 일의 가닥을 잡았다.
일단 관리인을 깨워 마차를 부르자. 아스티나는 승마에 솜씨가 있으니 당장은 따라잡지 못하더라도, 그녀가 저택에 머무는 동안 도착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동생을 쫓아가서…….
맙소사.
칸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오늘처럼 스스로의 저열함을 사무치게 느낀 적이 없었다.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았다.
무사할 자신이 있다는 동생의 말을 믿고 싶었다. 차마 아스티나가 있을 집까지 쫓아, 열성적으로 죽음을 향해 달려갈 자신이 칸나에게는 없었다. 칸나는 엉망으로 까진 무릎의 아픔을 상기했다. 아팠다. 고작 이 정도 상처도 너무나 아팠다.
몸을 일으키는 대신, 그녀는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