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1.
푹신한 침대와 보송보송한 이불.
낯설지만 안락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가이드는 제가 눈을 뜨고 또 벌떡 몸을 일으킨 곳에서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온몸이 삐걱거리면서 고통을 호소했기 때문이다.
최태훈은 잠시 앓는 듯한 신음을 흘리다가, 빈틈없이 붕대가 감긴 제 팔이며, 뺨과 이곳저곳의 생채기가 꼼꼼하게 치료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여전히 머리는 멍했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은 허공을 휘젓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가이드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센터가 폭발했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매캐한 연기가 순식간에 사방을 덮쳤다. 제 앞에 있던 이미현이 앞장서서 불길을 잡았지만, 흉포하게 일렁이는 그것을 완전히 막는 건 쉽지 않았다.
……그리고 지관영. 제 에스퍼.
그는 살아있는 것은 모두 집어삼킬 것 같던 불길 속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목이 찢어져도 좋을 정도로 쉼 없이 그를 불렀던 기억이 났다. 붙잡는 손들을 뿌리치고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날뛰며 불길로 뛰어들어 가려고도 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겪은 몸은 얼마 안 가 마치 물을 먹인 솜처럼 축 늘어졌고 어느 순간 눈앞이 새까맣게 변했다.
최태훈은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잊었던 공포와 절망이 서로 뒤섞인 채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찰칵, 하는 작은 쇳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
가이드는 반사적으로 침대에 도로 누운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심장이 달음박질쳤다. 누군가가 걸어오는 기척이 들렸다.
바닥을 스치는 슬리퍼 소리가 이렇게까지 크게 들린 적은 없었는데. 최태훈은 혹시라도 제가 긴장해 떨고 있는 게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을까 걱정했다.
‘누구지?’
태훈은 머릿속으로 제 연인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떠올렸다. 가장 먼저 그의 머리를 사로잡은 건 선생이었다. 기괴하게 가늘어지던 눈동자와 낄낄대던 웃음소리가 귓가를 시끄럽게 때렸다. 빨라진 박동 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지금 최태훈은 이성적인 판단이 어렵다. 페어 에스퍼를 잃었다는 상실감과, 깊은 트라우마가 주는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싸여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태훈이 완전히 깜짝 놀라 소스라친 건 그다음의 일이었다. 하얗게 뼈가 올라올 정도로 힘이 들어간 손등 위를 따뜻한 온기가 감싸 덮었다.
누군지 모를 이는, 천천히 마른 손을 훑더니 자연스럽게 손바닥을 마주하도록 했다. 빈틈없이 깍지를 낀 뒤 세게 힘주어 잡는 다정함이 익숙했다.
최태훈은 입술을 꽉 깨문 채로 불안함과 들끓는 기대가 뒤섞인 눈을 정말이지 조심스럽게 뜨기 시작했다.
어찌나 꽉 감고 있었는지, 시야가 뿌옇게 흐렸다. 덕분에 가이드는 눈앞의 그린 듯한 미소보다 낮은 목소리를 먼저 듣게 됐다. 그건 사랑에 빠진 지 오래인 사내의 것이었다.
“……일어났어?”
정말 말도 안 되는데.
가이드는 사내의 옅은 웃음기와 귓가에 걸린 나직한 물음, 그 모든 게 실감이 안 났다. 그래서 얼마 안 가 이게 꿈일 거라고, 이런 미칠 듯이 행복한 지금이 현실일 리 없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맞닿은 에스퍼의 손은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따뜻하고 또 부드러웠다. 제 뺨을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한 채 살살 쓰다듬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배려가 달았다.
“어디 불편한 곳 있으면…….”
“-관영 씨.”
왠지 숨이 콱 막혀서,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유독 탁했다. 하지만 지관영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듯 제가 잡은 최태훈의 손끝과 마디마디에 입술을 떨어트리며 대답했다.
“응.”
“……진짜, 지관영 씨 맞습니까?”
“맞아.”
단어 하나하나마다 가득 담긴 불신에도, 에스퍼는 상냥하지만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가이드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최태훈은 여전히 유령을 보는 듯한 시선을 한 채다.
지관영은 그 표정에 결국 작게 웃음이 터져 버렸다.
하지만 그건 오히려 잘한 일이었다. 가이드는 그 간지러운 웃음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천천히 물기가 어리기 시작한 눈으로 제 연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연인의 눈가가 붉게 변한 것을 발견한 에스퍼는 작게 혀를 차며 바짝 붙어 기댔다. 물론 마른 어깨며 그 형태가 또렷해진 뺨에도 연신 입을 맞추면서다.
“……정말?”
“정말.”
“관영 씨, 맞는 거죠.”
지관영은 그 떨림 가득한 물음에 말로 대답하는 것 대신 가볍게 키스하는 걸 택했다. 살짝 까칠하게 변한 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고, 몇 번이고 보드라운 살덩이를 부딪쳤다.
에스퍼의 입맞춤에는 혀가 깊게 섞이는 농염함은 없었지만 연인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다정함이 있었다. 그걸 눈치챈 최태훈의 입에서 헐떡임 같은 감정이 터졌다.
한 달.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을 고스란히 홀로 버텨내야 했던 연인의 울음에 사실 에스퍼는 그 자신도 속이 울컥했다.
지관영은 제가 했던 모진 말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 말에 최태훈이 어떤 눈과 목소리를 했었는지도 당장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다. 완벽에 가까운 에스퍼의 두뇌란 그 어떤 것이든 선명하게 남겼다. 행복했던 순간도, 후회로 가득한 순간도, 모두 다.
“금방 나온다고, 그랬으면서……!”
“응. 알아. 미안해. 무서웠지.”
태훈은 급한 숨을 토해내며 관영의 상체에 매달렸다. 마른 팔은 아직 힘이 채 돌아오지 않아 약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그래서 더욱 필사적인 느낌이 들었다.
가이드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지관영은 제 입술이 닿는 곳마다 몇 번이고 키스하며 태훈을 달랬다. 눈앞의 남자가 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쏟아 냈던 고백이 겹쳐져서 속이 쓰렸다.
지금 관영의 머릿속에는 꽤 많은 기억이 서로 중첩되어 있다. 가장 바닥에 깔린 건 태훈과 함께했던 8개월의 시간이다. 그 위에는 연인을 잊은 한 달간 새로 쌓인 익숙하지만 낯선 기억이, 그리고 또다시 저 가이드에게 빠져들었던 감정의 잔해가 잔뜩 흩어져 있다.
너무나 예쁘지만 또 안쓰러운 최태훈의 고백이 새겨져 있는 것도 그쯤이다. 사실 지관영 그 역시 지난 한 달을 되짚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완전히 모든 체계가 무너졌던 후유증으로 가이드와 함께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몇 시간 전에야 겨우 눈을 떴기 때문이다.
지관영은 코끝이 발갛게 변한 채로 훌쩍이는 가이드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한 달 사이에 너무 자주 울리네.”
엉망으로 얽힌 시간 속에서 또렷한 것 역시 있다.
지금 모든 것을 되찾은 지관영은, 자신이 놓쳤던 기억을 다시 훑으며 연거푸 사랑에 빠졌다. 지난 한 달간의 저 자신을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다.
아니, 사실 꽤 크다.
그게 스스로라는 게 아쉬울 정도다.
최태훈을 잊은 저 자신이 저택에 마련된 기억을 보고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하기는 했었다. ‘고분고분히 받아들이진 않을 텐데’ 하는 걱정도 아예 안 했다면 거짓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말 ‘그따위로’ 말하고 행동할 줄은 몰랐다. 지관영은 처음으로 그를 향한 비판 중 하나를 받아들이게 됐다.
‘성격 더러운 새끼!’
그건 그 자신에게 하는 신경질적인 욕이었다.
한편, 최태훈은 그제야 떠오른 생각 하나에 그렁그렁하게 눈물이 맺힌 얼굴을 한 채로 고개를 들었다.
“관영, 씨.”
“어.”
“……기억. 그러니까, 기억이.”
잔뜩 쉰 목소리로 조금은 확신 없이 흘러나오는 물음이었다. 지관영은 찡그리듯 웃으며 대답했다. ‘돌아왔어.’
* * *
[서울특별시 중구에 위치한 에스퍼-가이드 국립연구센터에서 발생한 화재로 이능력 연구의 60년 역사가 순식간에 전소되었는데요. 화재의 원인은 밝혀졌습니까?]
[예, 현재 센터 고위 관계자들과 경찰이 비공개 수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최태훈은 TV 화면을 가득 채우는 짙은 주황빛 화염을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달콤한 재회도 잠시, 대체 상황이 어떻게 된 거냐는 물음에 떨어진 답은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하는 거였다.
선생이 죽었다.
죽었다고 한다. 그 막막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던 자가.
최태훈은 실감이 나지 않는 문장을 멍하게 곱씹었다. 많은 생각이 머리를 떠돌았다. 잠든 것처럼 늘어져 있던 이한솔의 모습이 목에 가시처럼 걸렸다. 오진우는 해야 할 일이 있다며 그런 이한솔과 함께 모습을 감춘 지 벌써 며칠째였다
덕분에 최태훈은 폭주했던 지관영이 무슨 수로 원래대로 돌아왔고, 또 어떻게 기억을 다시 찾게 되었는지 깊게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치 저만 행복을 찾은 것 같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형! 왜 나와 있어, 들어가 쉬어야지!”
최씨 가문의 차남, 최우진이었다.
태훈은 요 며칠 지관영의 집이 아닌 본가로 와서 지내고 있었다. 흉흉한 바깥 상황을 유독 걱정하는 가족들 때문이었다. 일반인들은 군 에스퍼들의 폭주가 위장된 것이었음을 모른다. 최태훈은 괜찮다는 듯 눈을 휘며 입을 열었다.
“과하게 쉬었어. 너무 누워 있었더니 허리가 다 아픈데.”
“진짜아?! 형, 내가 주물주물 해 줄게! 나 잘해!”
운동을 하는 우진은 확실히 다른 사람들보다 근육이 아픈 곳을 쉽게 짚어내었다. 하지만 온종일 누워 있던 걸로 뭉친 것을 주물러 달라고 하는 건 왠지 좀 머쓱한 일이라, 태훈은 괜찮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 무슨.”
“에이. ……엇, 관영 형님! 형이 아픈 거 주물러 준다니까 자꾸 뺍니다!”
타이밍 좋게 등장한 지관영이었다.
도통 소리를 내지 않고 다니는 그는, 이렇게 종종 전혀 눈치채지 못한 새에 휙 모습을 드러내고는 했다. 심지어는 이렇게 태훈의 본가에 나타나는 것도 거리낌이 없었다.
최태훈은 딱 맞는 슈트를 마치 피부처럼 자연스레 두른 에스퍼의 모습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어디가 아픈데.”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온몸이 다 아프댑니다! 환자가 자꾸 이러면 안 되는데요. 그쵸!”
있지도 않은 병명을 잔뜩 부풀려 대답하는 최우진의 목소리가 능청스러웠다. 태훈은 그걸 들으며 할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미뤄 둔 스케줄이 잔뜩 쏟아졌다는 지관영은, 이렇게 짬짬이 얼굴을 보는 게 다다. 게다가 가끔씩은 센터 붕괴에 대한 책임을 묻는 청문회에도 참석해야 한다고 했다.
가이드는 에스퍼의 날 선 반대로 그것을 면제받았다.
다른 때였더라면 함께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을 태훈이었지만, 한솔의 죽음과 그가 말했던 비밀들을 털어놓는 게 싫어 관영의 결정에 별 반발 없이 따랐다.
에스퍼의 시선이 슬쩍 제 연인에게로 꽂혔다. 태훈은 입꼬리를 올려 웃고는 있지만 묘하게 가라앉은 눈을 한 채다.
“……최우진.”
“넵?”
운동계 분위기 특성상 한 살이라도 더 나이가 많은 이들에게 유독 깍듯한 최우진이었다. 지관영은 제 목을 꽉 얽매고 있던 넥타이를 느긋하게 풀면서 말을 이었다.
“잠깐 나가 있어.”
“하하하! 야한 거 하시게요?”
웃음 가득한 우진의 말에 가이드는 마시던 물을 뿜을 뻔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내뱉은 관영은 별다른 대꾸가 없다. 타이를 잘 정리해 의자에 걸쳐놓고, 살짝 땀이 어린 팔의 소맷부리를 묵묵히 걷어 올리고 있을 뿐이다.
최우진은 그 묘한 분위기에 멍하게 눈을 끔벅였다.
제 형과 연인인 사내의 얼굴이 왠지 조금 나른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태훈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짚었다. 놀려 먹기 좋은 상대를 놓치지 않는 에스퍼의 장난기가 뻔히 보였다.
“……헐. 네.”
유도로 다져진 뛰어난 반사신경을 자랑하는 최우진은, 재빨리 가방과 휴대폰을 들고 달려 나갔다. 그걸 보는 최태훈의 입에서 옅은 한숨도 함께 흘러나왔다. 아무리 나이 터울이 적은 동생이라지만, 살면서 단 한 번도 성적인 농담을 해 본 적 없는 그다.
가이드는 붉게 변한 목을 쓸면서 작게 삐죽거렸다.
“그런 장난치지 마십시오, 좀!”
“뭐 어때.”
어느새 제법 편한 차림이 된 지관영이 최태훈의 앞에 마주 앉았다. 사실 가이드는 느슨하게 풀린 표정을 한 지관영이 말없이 저를 눈에 담을 때까지만 해도, ‘뭐 할 말 있나’ 정도의 가벼운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건, 최우진이 했던 농담을 새삼 되짚어보기 이전까지의 일이다. 가이드는 갑자기 뭔가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떴다.
“지관영 씨.”
“……응.”
반박자 늦게 흘러나온 나직한 대답이었다.
최태훈은 그 느릿함에 입이 바짝 말랐다.
“지금 괜찮으신 거 맞습니까?”
가이드의 물음에 그린 듯한 사내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터졌다. 지관영은 이미 최태훈과의 접촉을 최대한 줄인 채 무작정 버틴 역사가 있다.
묘하게 멍한 상태였던 이유가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태훈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 사내에게 그 어떤 가이딩도 할 수 없었던 한 달의 후유증으로 지관영의 목숨줄이 다시금 손에 쥐어졌다는 사실을 잠시 잊어버렸었다.
가이드는 제가 정신을 차린 뒤 에스퍼와 얼마나 접촉했는지를 떠올려 보았다. 손을 잡거나 가벼운 포옹, 진하지 않은 키스. 심지어 에스퍼는 그마저도 조심스러웠다.
어그러지기 쉬운 귀한 보물을 품은 사람처럼, 숨소리까지도 감히 험하게 섞지 않았다. 지관영은 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가이드를 보며 눈썹을 휘어 웃었다. 그 애정이 뚝뚝 넘쳐흐르는 눈에 조금은 몸이 단건 태훈이다.
“관영 씨, 미안합니다. 제가 깜박했…….”
급하게 열린 가이드의 말이 저를 확 잡아당기는 사내의 손에 뚝 끊겼다. 태훈은 사내의 무릎 위에 올라탄 민망한 제 모습에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고 에스퍼의 애꿎은 셔츠만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부드럽고 따듯한 목덜미에 사내의 입술이 와 닿고, 약간은 앓는 듯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간지러운 감촉에 살짝 어깨를 움츠리자, 쇄골이 움푹 들어가며 깊은 공간을 만들었다. 지관영은 거기에 고개를 묻고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역시 최태훈은, 정말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좋았다.
“아프다며. 무리하지 마. 그리고 미안한 건 또 뭐야.”
“정말 안 아픕니다. 좀 조심하기만 하면 괜찮습니다.”
지관영은 대답 대신 최태훈의 팔에 감긴 붕대를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레 쓸었다. 제가 만든 상처다.
에스퍼인 저라면 단 몇 분이면 회복될 것에, 태훈은 몇 바늘이나 꿰맸는지 모른다. 아마 평생 희미하게 남은 흉을 가지고 살게 될 거다. 덕분에 지관영은 제 페어가 얼마나 연약하고 또 강한지 다시금 깨달았다.
미안한 건, 아니 미안해야만 하는 건 이쪽이었다
하지만 지관영 그는 아직 최태훈에게 사과를 하지 못했다. 기억을 잃고 했던 말과 행동을 용서해 달라는 가벼운 말을 내뱉기에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관영은 삐죽삐죽 날이 서고 일렁였던 제 신경을 둥글게 끌어안는 가이드의 온기에 기댄 채로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난 에스퍼가 된 이후부터, 내가 언젠가는 폭주할 거라고 생각했었어.”
난데없는 말에 태훈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지관영은 그 말간 표정에 흐리게 웃고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더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해 본 적 없었고. 언젠가 버티다 안 되면……. 그땐 그냥 그렇게 죽겠구나. 싶었지. 물론 그 상태로 십 년 넘게 버틸 수 있을 줄은 몰랐지만.”
“…….”
“다행이라는 거야. 안 그랬으면 최태훈 너 만나기도 전에 뉴스에서나 안면 텄겠지.”
장난처럼 덧붙인 말을 듣고서야 심각한 표정이 됐던 최태훈의 얼굴이 좀 풀렸다. 하지만 오늘 지관영은 제 가이드의 마음을 평온히 내버려 두지 않을 작정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처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담담하게 이어진 고백의 무게가 아팠다.
처음으로 살 생각을 했다고 말하는 얼굴은 여느 때처럼 여유마저 보였다. 최태훈은 뭐라도 말하고 싶어서 작게 입술을 달싹였지만, 감히 제가 상상하지 못하는 에스퍼의 삶에 뭐라 함부로 그럴듯한 위로를 건넬 수도 없었다.
“너랑, 네 동생들이랑 같이 농구도 하고…… 네가 말했던 주스도 사 마시고. 조금은 늦잠도 자 보면서, 그렇게. 나도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심을 갖게 됐더라고. 내가.”
지관영은 그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동그란 미간 한가운데 콕 박힌 주름에 입술을 꾹 눌러 키스했다.
기억을 되찾은 에스퍼는 정말이지 한 달여 전보다 몇 배, 아니 몇백 배는 더 다정해졌다. 왠지 속이 조금은 간지럽고 어쩔 줄 모를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태훈은 그 말랑말랑한 기분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저를 흔들림 없이 보고 있는 잘 빚어진 이목구비가 새삼 신경 쓰였다.
“자진해서 불행해질 필요는 없어.”
“예?”
제 생각과 기분을 뻔히 알고 있다는 듯, 한없이 따뜻하지만 또 조금은 타이르듯 말하는 목소리였다. 그건 장남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언제나 누군가를 챙기는 입장이었던 태훈에게는 꽤 낯선 것이었다.
“그 생각으로 오래 살아본 경험상 하는 얘기야. 이제야 겨우 숨통이 트였는데, 좀 안도하고 쉬는 게 뭐가 나쁜데.”
“…….”
지관영의 말이 맞다.
최태훈은 이제야 좀 숨통이 트였다. 요 한 달간 그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가던 악몽 같던 판이 이제야 정리되고, 하나뿐인 연인 역시 제 옆으로 돌아왔다.
사실 상황만 놓고 보면 그 어떤 때보다 행복해하며 펄쩍펄쩍 뛰어도 모자라다. 최태훈이 그러지 못하고 있는 건, 실험이 끝난 뒤 떠나거나 남은 사람들에 대한 걱정과 미안함 때문이다.
하지만 에스퍼의 말처럼 스스로 불행으로 걸어 들어갈 필요는 없다. 그런다고 한들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최태훈은 작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예. 감사합니다.”
“천만에.”
지관영은 팔심으로만 제 무릎에 앉혔던 최태훈을 들어 올려 단단한 원목 테이블에 앉혔다. 머릿수가 많은 집안인 만큼, 최씨 집안의 남매들은 여기서 옹기종기 모여 공부를 하거나 제 할 일을 하고는 했다.
그래서 가이드는 이 테이블에 걸터앉거나 다리를 올리는 제 동생들을 자주 말렸었다. 다 같이 사용하는 건데 함부로 하지 말자는 의미에서였다. 하지만 나른하게 풀린 눈을 한 채 저를 향해 살짝 눈웃음치는 톱스타 앞에서 그런 깍듯한 의견 개진을 하기는 어려운 법이었다.
저와 닿을 때마다 눈에 띄게 기분 좋은 내색을 숨기지 못하는 에스퍼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자 좋은 향이 올라왔다. 예쁘게 세팅되어 있는 검은 머리카락은 빛을 받을 때마다 결 좋게 반짝였다.
“내일은 나랑 같이 센터 청문회 가 볼래?”
최태훈은 난데없는 제안에 작게 고개를 갸웃했다.
센터 청문회라고 함은, 애초에 지관영 그와 센터의 연구원들이 괜히 와서 험한 꼴 보지 말라며 뜯어말렸던 자리다. 그 거대한 센터가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된 걸 해명하려면 필연적으로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정말 다들 우울하고 힘들어하기만 하는지, 아니면-”
“……지관영 씨?”
“생각보다 꽤 잘 버텨 나가고 있는지. 직접 가서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에스퍼의 말은 어찌 들으면 참 건전하고 그럴듯하기 짝이 없었다. 태훈은 그런 이유라면야 얼마든지 청문회 참관을 할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가이드의 표정은 시시각각 기묘해졌다. 약 1분 전까지만 해도 마음을 찡하게 울리는 위로를 건네던 연인의 행동 때문이었다.
“저, 관영 씨. 잠시만요.”
“왜.”
“어어, 어. 그러니까.”
페어가 된 이후로 정말 과장 않고 백번은 더 봤을 몸이다.
같은 동성인 제가 봐도 한숨이 나올 정도로 완벽하게 새겨 만들어진 근육과 가장 이상적인 비율이 있다면 딱 저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팔다리는, 볼 때마다 속으로 혀를 내두르게 하였다. 가끔은 제 네임이 새겨진 등 근육이 움직이는 것만 봐도 입이 마를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제 연인의 나신이 천천히 드러나고 있다. 저를 테이블 위에 앉힌 채 천천히 단추를 풀어내고 있는 사내의 행동 때문이다.
결국 최태훈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어, 옷은…… 왜.”
왠지 말하면서도 뺨에 열이 올랐다. 몸을 안 섞어 본 것도 아니고, 소위 막말로 볼 거 다 본 사이에 겨우 웃옷 하나 벗은 걸로 이렇게 낯간지러운 기분이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최태훈은 감히 제 연인의 맨 어깨에 손을 댈 엄두도 못 내고 쩔쩔 맸다.
“그냥 편히 있어.”
“예?”
“오늘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셔도 되니까.”
최고 주가를 달리고 있는 톱스타는, 심지어 살포시 눈을 접어 웃기까지 했다. 태훈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다가, 어느새 바지의 훅까지 풀고 잘 뻗은 단단한 허벅지가 반쯤 드러난 에스퍼를 보고 기겁하며 외쳤다.
“문! 문 잠가야죠! 누구라도 오면!”
“아하.”
사실 태훈은 에스퍼가 문을 잠그기 위해 일어서면 그때를 틈타 후다닥 제 방으로 도망칠 작정이었다. 섹스, 그래 까짓것 그렇지 않아도 해야 하는 상황인 것 같은데 나쁘지 않았다. 아니, 기꺼이 할 생각이 있었다.
그렇지만 제 동생들이 공부하는 이 테이블 위에서 하는 것만큼은 정말 낯부끄러워서 감당이 안 됐다. ‘제발 그것만큼은!’ 하는 심정이었다.
허나 가이드의 그런 계획은 제 연인이 에스퍼, 그것도 그 힘의 끝을 측정하기 어렵다는 사내였음을 망각한 것이었다. 지관영은 가볍게 손을 튕기는 것만으로도 현관문이 마지막 걸쇠까지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닫히게 했다.
가이드는 그 소리에 저도 모르게 제 연인의 눈치를 봤다.
지금의 에스퍼는 뭔가 평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평소에는 약간 느긋하고 오만한 포식자의 느낌이 났다면, 당장 눈앞에서 옷을 벗는 잘 뻗은 근육질의 사내는 묘하게 제 아래 있는 느낌이었다. 좀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지관영 씨!”
“응.”
“아니, 왜, 왜 그러십니까. 저어, 그냥 방에 들어가서……!”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지만, 마치 제가 지관영이라는 잘생긴 애첩을 둔 황제라도 된 기분을 들게 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완전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 된 에스퍼는, 기꺼이 제 연인의 발치에 앉아 곳곳에 굳은살이 있는 발등에 입을 맞췄다. 최태훈은 이제 얼굴까지 벌겋게 익은 채로 에스퍼의 손에 잡힌 제 발가락 끝을 꽉 오므렸다.
지관영은 그마저도 귀엽다는 듯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약간 이자를 더해서 돌려주는 거라고 생각해.”
“이자를 더하다니요, 뭘…… 아. 아아, 혹시, 그거면!”
가이드는 저를 관찰하듯 보는 사내 앞에서 무엇 하나 걸치지 못한 나신이 된 적 있었다. 그때 지관영은 옷깃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완벽한 차림이었고, 태훈 혼자 제 옷을 모두 벗은 채 그 시간을 버텼었다.
“저 정말로 이제 괜찮으니까요. 관영 씨, 그러니까…… 으읏, 아, 핥지 말고, 좀!”
노골적으로 발등을 핥고 톡 튀어나온 복숭아뼈를 이를 세워 깨무는 감각에 태훈의 무릎이 반사적으로 튀었다. 세상에, 저런 부위도 느낄 수 있는 곳이 되다니. 최태훈은 저도 모르게 내보인 제 반응에 헛웃음이 다 나왔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근사하고 또 야한 얼굴을 한 에스퍼는 그게 마음에 든다는 듯 살짝 눈썹 하나를 휘어 웃으며 짓궂게 속삭였다.
마치 최태훈, 그의 말투를 흉내 내는 듯한 목소리였다.
“기꺼이 즐겨주세요. 최태훈 씨.”
* * *
사실 최태훈은 제 연인과 몸을 섞는 게 기분 좋은 것과는 별개로, 꽤 일찌감치 이런 생각을 했었다.
‘이만하면 저 에스퍼와의 섹스에서 느낄 수 있는 쾌감의 종류는 다 겪어 봤을 거야’. 물론, 그런 생각의 기원에는 다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이유가 있다.
이제껏 지관영은 결코 단 한 번으로 만족한 적이 없었다.
조금은 집요하고 또 벅찰 정도로 달게, 수차례 몸을 꿰뚫고 입을 맞추고 나서야 품 안에서 기절하듯 잠드는 것을 허락하는 게 그였다.
덕분에 최태훈은 원하든 원치 않든 제 연인과 제법 여러 체위로 뒹군 전적이 있다. 가이드의 알 수 없는 확신은 이런 스스로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깍듯하고 예의 바른 다정한 섹스부터 제법 거칠고 머리끝까지 수치심을 빠듯하게 채우는 노골적인 행위까지, 지관영을 만난 후 정말이지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감각들을 수없이 배워 온 태훈이다.
“……저어, 관영…… 씨, 읏, 잠시만…….”
하지만 그 제법 되는 경험 속에서도 이런 건 처음이었다. 아니,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제멋대로에 오만한, 그 자신의 프라이드가 가장 중요한 남자가 제 앞에서 무릎 꿇고 발등부터 입 맞추며 올라오는 모습이라니. 그건 정말 보는 것만으로도 발가락 끝까지 바짝 힘이 들어가도록 하는 거였다.
슬쩍 시선을 아래로 향할 때마다 그린 듯한 근육이 곳곳에 새겨진 몸이 보였다. 이제껏 함께 잠자리에 들 때마다, 때로는 같이 샤워를 할 때마다 수도 없이 봐 왔던 나신이다.
하지만 최태훈은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목부터 열기가 훅 치미는 것 같았다. 저는 옷자락 하나 올리지 않은 채로 저 완벽하다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사내를 완전히 순종하게 만든 것 같았다
얇은 면바지 위로 간지럽게 떨어지는 입맞춤이 야했다.
종아리를 거쳐 무릎, 무릎 안쪽. 그다음은 뜨끈한 열을 품기 시작한 사타구니 사이로 천천히 에스퍼의 고개가 움직였다. 살갗 위로 바로 닿지 않는 은근한 복종은 이제껏 몰랐던 자극이었다.
태훈은 제 에스퍼의 머리가 중심 가까이 왔을 때, 허벅지로 그걸 슬쩍 조였다. 작은 한숨과 함께 그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나온 반응이었다.
아주 천천히, 바지의 훅을 푸는 소리가 났다.
그다음은 지퍼였다. 손이 아닌 이를 이용해 움직이는 그것은, 덕분에 더욱 비이성적인 형태를 띠었다. 손을 뻗자 단단하면서 따듯한 사내의 어깨 근육이 바로 짚어졌다. 에스퍼는 제 연인 앞에 무릎 꿇은 채로 위를 올려다보며 천천히 성기를 입에 품었다.
최태훈이 지관영에게 펠라치오를 받아 보는 건 처음이 아니다. 첫 섹스 때에도 그 축축하고 말랑이는 점막에 자신의 것이 빨려 들어가는 감각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었고, 그 후로도 에스퍼가 제 것을 삼킬 때마다 머리끝까지 벌겋게 변한 채로 더운 숨을 토해 냈었다.
지관영이 하는 구음은 교과서적일 정도로 효율적이다. 그는 저와 같은 신체 기관을 가진 동성의 남자가 흥분할 곳을 정확히 혀로 긁고, 가끔은 꾹 누르고, 입 안을 크게 해서 조금은 힘을 주어 빨아들인다.
이제껏 그건 제 손바닥 위에 가이드를 올려 두고 그 반응을 즐기는 포식자의 여유를 바탕으로 한 행위였다.
“……하아, 으응, 아…….”
최태훈의 무릎이 에스퍼의 머리를 가운데 두고 서로 쓸리고 비벼지고 싶어 안달이었다. 저절로 허리가 들썩이고 발가락 끝까지 힘이 들어간 채 오므라졌다. 관영은 그런 연인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은 채로 제 머리를 더 깊게 처박았다.
타액이 단단한 살덩이와 부딪혀 노골적인 소리를 냈다.
지금, 거만하게 눈짓하는 사내는 여기 없다. 가이드 최태훈을 즐겁게 하는 것만이 그가 존재하는 이유라는 것처럼 기꺼이 입을 벌리고 고개를 움직이는 고아한 짐승만이 있을 뿐이다.
최태훈은 제 중심부터 시작된 찌릿한 자극에 몸 여기저기를 비틀었다. 입 밖으로 저절로 달뜬 소리가 토해져 나왔고, 반쯤은 제정신이 아닌 채 스스로의 팔뚝으로 가슴께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빨리고, 깨물리고, 핥아지는 감각을 아는 유두 끝이 꼿꼿하게 서서 자극을 원하고 있었다. 지관영은 가이드의 그런 야살스러운 행동을 눈치채고 희미하게 눈을 접어 웃었다.
겨우 바지춤만 슬쩍 내린 채로 봉사 받는 것만으로는 모자란, 음탕한 연인인 거다. 지관영은 제 커다란 손으로 흥분한 채 꺼덕이기 시작한 가이드의 것을 문지르며 상냥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슴도 해 줘?”
“……흐윽……!”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최태훈, 네가 할 건 정확하게 시키는 것뿐이야.”
물리계 최강의 에스퍼로 손꼽히는 사내의 입에서 나른하고 색스러운 문장이 흘러나왔다. 그는 마음 같아서는 최태훈의 얇은 티셔츠 아래로 뾰족하게 올라와 있을 자그마한 돌기를 지금이라도 당장 빨며 애태우고 싶다.
하지만, 오늘 이 섹스의 지배권을 가진 건 최태훈이다.
지관영은 그것에 얼마든지 순종할 참이다. 물론 조금은 짓궂고, 또 약간은 그 자신의 희망사항이 포함된 방법이기는 하지만.
가이드는 눈가까지 발갛게 변한 채로 허벅지 안쪽을 떨었다. ‘무엇이든’ 말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 말이라는 건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한평생 보수적으로 살아온 최태훈은 스스로가 원하는 쾌감을 직접 말하며 요구하는 걸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때때로 상황은 인간을 용감하게 하는 법이다.
예컨대 눈앞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저를 올려다보는 말도 안 되는 얼굴을 한 남자가 있고, 근질거리는 가슴께를 팔로 대충 문지르는 것만으로는 피부 안쪽에서 간지럼 태우는 것 같은 감각이 잠들지 않았다.
“……해 주십시오.”
“좀 더 정확하게 명령하셔야 내가 듣겠지.”
뻔히 알면서도 느긋하게 걸린 미소가 조금은 얄미웠다. 하지만 최태훈은 그것보다 당장 쾌감을 기대하는 마음에 더 목마른 채로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가슴…… 아프지 않게…… 빨아 주시면…… 안…… 될까요.”
“이는 세우지 말고?”
“……예.”
한 번. 한 번의 경계를 넘는 게 어려운 법이다.
에스퍼는 곱게 웃으며 최태훈의 헐렁한 티셔츠 사이로 제 고개를 집어넣었다. 말랑해야 할 자그마한 연갈색 살덩이가 뾰족하게 선 채로 올라와 있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야했다.
지관영은 최태훈이 말한 대로 그것을 이를 세우지 않고 살살 아프지 않게 빨기 시작했다.
가끔은 그 근처를 혀로 누르고, 살살 굴리듯 훑기도 했다. 비어있는 다른 한쪽을 손가락 사이에 두고 간질이듯 긁자 최태훈이 허리를 뒤틀며 조금은 꽉 억눌린 숨을 흘렸다. 에스퍼는 티셔츠가 닿으면 살짝 젖어들 만큼 최태훈의 젖꼭지를 빨면서 잔뜩 열이 올라 들썩이는 엉덩이로 제 손을 슬금슬금 움직였다.
갈라진 골의 시작점을 살살 작은 원을 그리듯 건드리며 자극하자, 가이드는 누구보다 애가 달아서 헐떡였다. 말 그대로 구멍 안쪽이 깊고 거칠게 쑤셔지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거다.
가이드는 아직 살짝 뻣뻣한 감이 있는 다친 팔이 아닌 다른 쪽으로 제 에스퍼의 등 근육을 쓸었다. 그 매끈하고 탄탄한 몸 위를 그 어떤 방해 없이 만질 수 있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최태훈은 제 앞에 무릎 꿇은 남자가 저에게 깊게 삽입했을 때 어떤 표정을 하는지 안다. 열이 오른 얼굴 위에 흥분이 차서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덩달아 흥분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강압적으로 엉덩이만 쳐든 자세로 잔뜩 휘저어질 때의 감각이란! 그건 사실 최태훈이 그 스스로 자각도 없이 가장 좋아하는 체위 중 하나였다.
벌름거리는 구멍을 손가락 끝으로 살살 건드리고, 엉덩이골 사이로 두꺼운 기둥을 슬슬 문지르며 애태울 때의 기대감은 그 무엇으로도 대신 표현하기 힘든 순간이다.
가이드는 그 자신이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던 행위를 하면서 더욱 입이 마르기 시작했다. 머리 한구석에서는 적어도 제 방으로 들어가서 해야 한다는 흐린 이성이 깜박이는데, 제 연인과 마음 놓고 몸을 섞는 상황에서 긴장이 풀린 마음은 당장 머릿속을 하얗게 마비시킬 정도로 거칠게 뒹굴고 싶다고 외쳤다.
하지만 그건 지관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세 좋게 봉사하겠다 마음먹은 그였지만, 한 달을 꼬박 넘겨 닿는 ‘가이드’의 감각에 에스퍼의 본능이 자꾸 흉흉하게 머리를 들며 마른침을 삼키도록 했다.
정말이지 눈앞이 몇 번씩 하얗게 변할 정도로 좋았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제 막 발현해서 가이드라는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에스퍼처럼 손가락 끝이 아렸다.
단순한 행위의 만족감으로 묘사하기에는 최태훈이 기꺼이 제 가이드로 남아준 것에 대한 행복을 다 표현할 수 없을 거다. 제가 기억을 잃었던 한 달은, 다시 떠올리고 보니 더욱 처참했다. 최태훈이 저 같은 건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어도 놀랍지 않았을 정도다.
그는 일그러지고 망가진 세상에서 유일하게 시야에 들어왔던 붉은 일렁임을 기억한다. 그건 최태훈의 등에 새겨진 제 이름이다.
최태훈은, 제 가이드이자 연인인 이 남자는 정말로 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곁에 있어 줬다. 모든 것을 잊고 사라지는 순간마저도 스스로가 최태훈의 에스퍼일 수 있게 해 줬다.
지관영은 스스로 바지를 밀어 내리는 제 연인의 들뜬 허릿짓을 보며 붉게 물든 귀를 깨물었다. 기꺼이 저와 함께하겠다 손을 잡은 온기가 예뻤다. 태훈은 붉게 열이 오른 눈으로 제 에스퍼를 재촉하듯 바라보았다. 살짝 뒤로 튼 허리에 점점 땀이 어리고 있었다.
“엎드려서 하는 건 힘들 것 같은데.”
“……하아, 왜……?”
“그 팔로 버틸 수 있겠어?”
제 연인이 워낙 단단하게 받치고 있던 터라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팔의 불편함도 잊었던 태훈은, 그제야 작게 아아, 하는 탄성 같은 소리를 냈다.
지관영은 그런 가이드를 원목 탁자 위에 천천히 눕혔다. 태훈은 차가운 나무의 감촉이 닿는 것마저 자극인지, 에스퍼의 이름이 있는 등을 기대자마자 날카로운 숨을 삼켰다.
한쪽 다리는 올리고 또 그 반대편 다리는 사정감에 축 늘어진 자세였다. 최태훈의 몸에 최대한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그 음란함을 즐기기에 충분한 선택이었다.
제법 진하고 또 유독 많은 양의 정액이 길고 잘 뻗은 다리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지관영은 그 허벅지 가장 깊숙한 곳의 음모와 함께 젖어 있는 가이드의 것을 손으로 훑으며, 꽉 다물린 뒤의 구멍까지 장난치듯 건드렸다. 들어 올린 허벅지를 꽉 붙잡고 움찔거리는 뒤를 살살 문지를 때마다 평소보다 높아진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막 사정한 터라 온몸의 감각이 예민한 탓이었다.
“흐, 히익…… 흐응, 읏, 관영 씨, 빨리……!”
세상천지에 이보다 더 얌전할 수 있을까 싶은 얼굴을 한 사내가 열에 허덕이며 빨리 제 뒤를 쑤셔 달라며 조르는 모습은, 음탕한 포르노라고 해도 믿을 법할 정도로 야했다. 하지만 지관영은 그런 제 연인의 부탁을 순순히 들어주지 않았다.
그건 여유가 넘쳐서가 아니다.
“태훈아. 너 이대로 하면 진짜 다쳐.”
“……왜애, 괜찮아.”
“안 괜찮아.”
최태훈은 열이 올라 조를 때마다 무의식중에 말이 짧아진다.
다른 이였다면 눈썹을 휘며 언짢아했을 그 목소리에 에스퍼는 조금은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잔뜩 달뜬 허리를 들썩이는 모습과는 별개로, 오늘 최태훈의 신체 컨디션은 그렇게 썩 좋은 편이 아니다. 평소에도 한참 공을 들여야 말랑하게 풀어지는 몸이 잔뜩 굳어 있다.
물기 어린 눈이 빨리 해 달라고 올려다보는 것을 무시할 수도, 그렇다고 이대로 삽입하면 열상에 시달릴 연인을 모르는 체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에스퍼는 살짝 혀를 차더니 진작 단단해진 채 아랫배를 뻣뻣하게 당겨오던 성기를 엉덩이골과 탄탄한 허벅지 사이에 문질렀다. 태훈의 사타구니 안쪽은 희뿌연 정액과는 별개로 에스퍼가 열심히 빨고 핥은 덕에 충분히 습해져 있었다.
“흐으으, 응, 읏……, 아, 그거, 이상……하니까, 그만……!”
“후우…… 우선, 이것만, 내보내고 나서 달래 줄 테니까.”
최태훈은 이제껏 해 본 적 없는 낯선 자극에 작게 도리질 치며 구멍을 조였다, 풀기를 반복했다.
그 음란하기 짝이 없는 모습은 삽입 없이도 꽉 조여드는 따끈한 내벽을 상상하게 하기 충분했다. 관영은 머리꼭지까지 빠듯하게 차오르는 열감을 누르며 연인의 허벅지와 엉덩이골 사이에 제 것을 피스톤질 했다.
뒤로 넣는 게 어렵다면 그 외의 것으로라도 몸이 단 야한 도련님을 달래 줄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직접적으로 퍽퍽 처박으며 안을 꽉 채우는 부피감 대신, 예민한 부분들을 단단한 살덩이가 문지르고 찔러대는 자극에 최태훈은 허벅지 안쪽을 달달 떨면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삽입한 뒤 전립선을 두들기듯 누르는 게 시야를 하얗게 변하게 하는 직구의 쾌감이라면, 사정 후 늘어진 성기와 예민한 사타구니 깊은 곳, 그리고 습한 골 사이를 희롱하듯 문지르고 찔러 대는 건 사지로 찌릿찌릿한 전기가 통하는 듯한 쾌감이었다.
절정을 맞은 건 이제껏 단 한 번도 제대로 몸을 더럽힌 적 없던 에스퍼의 정액이 땀이 어린 복근부터 가슴께까지 쭉 흩뿌려졌을 때였다.
최태훈 제게 쏟아진 그것에 순간적으로 드라이 오르가즘을 맞을 정도로 흥분해서 다리로 연인의 몸을 조여 감쌌다.
“아, 흐읏, 응…… 하아, 하…….”
지관영은 새빨갛게 익은 혀까지 할딱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가이드의 흉곽을 손으로 길게 쓸면서 그 자신도 더운 한숨을 토해냈다. 이렇게까지 흥분한 연인이 제 것을 받아 삼킬 수 없는 몸 상태라는 건, 피차 서로 조금은 아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이라면 오히려 잘됐다.
에스퍼의 손이 천천히 흥분으로 꽉 맞물린 구멍으로 쭉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 위를 살살 원을 그리며 굴리자 예민한 부위의 자극에 놀란 최태훈의 허리가 펄떡 뛰었다.
“……후우, 최태훈.”
잔뜩 흥분한 것을 어떻게든 눌러 참느라 낮아진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최태훈은 열에 들떠 멍해진 눈으로 제 연인을 멍하게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쾌감에 배 속이 근질거리고 엉덩이가 움찔거렸다.
“다음은 뭐 해 줬으면 좋겠어.”
오늘, 누구보다 완벽한 저 사내는 최태훈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한다. 가이드는 그런 제 에스퍼를 향해 작게 입을 달싹였다.
그건 힘이 풀려 입 밖으로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한 움직임에 불과했지만, 지관영은 그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보고는 제 고개를 기울여 깊게 입 맞췄다.
* * *
사실 최태훈은 비공개 청문회를 조금 쉽게 생각한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일반적인 청문회들이 보통 약간의 이벤트성을 띤 검증을 목표로 한다면, 이것처럼 전후 사정을 판단하기 위한 경우에는 서로 힘 뺄 필요 없이 건조한 질답으로 진행하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하지만 지금 가이드는 이전까지의 제 생각을 무르는 중이다.
“거의 천 명이 넘어가는 가이드와 에스퍼의 생명이 직결된 문제였다니까요! 이 이상 중요한 게 뭐가 있는데요?!”
“그러니까, 미리 우리 쪽에 알리고 대비했으면……!”
“군 소속 페어까지 모조리 인질로 잡힌 상태에서요? 지금 며칠째 그 얘기 반복이신데, 솔직히 말씀하시죠!”
최태훈은 이제껏 본 적 없는 살벌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미현을 보며 손바닥에 난 식은땀을 바지에 문질렀다. 왠지 모르게 따끔거리는 열기가 전해지는 건, 불의 능력을 다루는 그녀의 특성상 착각이 아닐 것이었다.
“‘건물 날려 먹은 게 아깝다, 그게 다 얼만데. 센터장 잘못 맞지?’ 라고요!”
“거, 이미현 연구원!”
“센터의 60년 역사, 네, 귀중한 가치죠. 아쉬워하는 것도 이해합니다. 그런데 상황 파악 안 되시나 본데, 사실 정말 죽다 살아난 건 그쪽들이거든요! 다들 폭주했으면 이깟 청문회가 있었겠어요?”
못 박듯 이어진 이미현의 말에 연구원들 어디선가 희미한 웃음이 터졌다. 물론 그 진원지가 어디인지 아는 건 불가능했다. 임시 청문회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곳이 한 번에 제법 많은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인 덕분이었다.
청문회 첫날, 센터장 권다희는 일찌감치 사임이 확정됐다.
죄 없는 이들의 희생과 센터 붕괴의 책임을 진 탓이었다. 사실 그것에 놀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청문회의 중요한 지점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런 큰 사건은 어느 한두 사람이 모든 잘못을 뒤집어쓰고 가기 마련이다. 이 자리를 만든 이들도 예외 없이 그걸 원했다.
하지만 연구원들의 목표는 그것과 달랐다.
그들은 이 거대한 폭풍의 책임을 모두가 그 각자 몫으로 나눠 짊어지는 것을 바랐다. 아무리 권다희가 그들의 수장이라고 한들, 손쓸 수도 없이 교활했던 한 에스퍼의 죄를 모두 떠안게 되는 건 너무나도 불합리했다.
“유도신문도 지긋지긋하네요. 애초에 덮어씌울 사람 정한 채로 물어보는데, 저라고 좋게 나갈 필요가 있나요?”
“……흠, 흠! 잠시 20분 정도 쉰 다음 진행하겠습니다.”
결국 청문회는 잠시 휴식을 맞았다.
연구원들 뒤쪽, 사람들의 눈에 안 띄는 곳에 앉아 있던 최태훈은 그제야 꾹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이 청문회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단순 손익을 떠나서, 센터에서 가이드들을 몰래 사찰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 있던 문제부터 온갖 생체 실험까지, 그 종류도 다양한 인권 문제가 걸쳐져 있는 거다.
태훈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한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한솔이다.
선생이 소위 가진 자들의 실험으로 그 능력이 발현된 에스퍼라고 한다면, 한솔은 그 시작부터 끝까지 만들어지고 또 원치 않은 삶을 살아야 했던 에스퍼였다.
이 비뚤어진 과정 속에서 어느 순간 가해자가 되어 버린 피해자는 세 명이다.
이한솔과 오진우, 그리고…… 김가하.
최태훈은 아직 오진우에게 김가하에 대한 말을 하지 못했다. 아니, 이걸 전해야 하는지 아니면 이한솔이 그랬듯 쭉 묻고 지내야 하는지 확신이 안 섰다.
오진우가 며칠째 이한솔의 시신과 함께 자취를 감춘 지금 상황이 다행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를 보면 너무 많은 것들이 떠올라 이성적인 판단은커녕 표정 관리조차 안 될 것 같았다.
“어때. 짐작대로야?”
지관영이었다. 최태훈은 제 옆의 빈자리를 찾아 앉는 연인을 보며 찌푸리듯 웃었다.
“전혀요.”
정말 진심이었다.
그 무엇도 최태훈이 상상한 것과는 들어맞는 구석이 없었다. ‘에스퍼-가이드 국립연구센터 폭발 사건 진상 규명단’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조직과 함께 쉴 틈 없이 이어지는 공방도,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연구원들의 모습도, 그리고…….
“생각보다 잘 놀고 있지.”
지관영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랬다. 최태훈을 가장 놀라게 한 건, 조금은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아닐까 짐작했던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연구원들은 청문회에 참석할 때는 조금 날 서고 긴장한 얼굴이었지만, 이렇게 여유가 주어질 때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최태훈은 저만치에서 어떤 한 연구원을 꽉 끌어안는 이미현을 보며 왠지 울컥하니 올라오는 속을 달랬다. 서로를 달래고 있는 저 두 여인 중 한 명은, 선생의 장난 같은 말 한마디에 제 페어를 잃은 에스퍼였다.
정신계 에스퍼였던 미현의 동료는 가까스로 폭주하지 않고 버텼지만 한 달도 꼬박 넘게 치료를 받다가 오늘 처음으로 청문회에 참석했다고 했다.
“사실 오늘 제일 살벌한 분위기일 문답 주인공은 따로 있었는데…… 안 보이네.”
“살벌한 분위기요?”
제 에스퍼가 어깨선을 살살 어루만져 주는 것이 좋아서, 가만히 그 팔에 기대 있던 최태훈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진우.”
“……아.”
가이드는 순간적으로 연인의 시선을 피해 저 멀리 공연히 눈을 굴렸다. 최태훈은 지관영에게도 자신이 알고 있는 비밀을 털어놓지 못했다.
사실 타인에게 지독히도 무관심한 지관영의 성격상 최태훈과 바로 관련된 일도 아닌 것을 말하지 않는다 해서 서운해할 일도 없었지만, 뭐가 됐든 말 못할 비밀은 무거운 법이었다.
쉬는 시간은 금방 끝났다.
조금은 소란스러웠던 분위기가 정리되고, 다시 각자의 자리에 앉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이가 빠져 있는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지관영은 왠지 모르게 긴장한 듯 보이는 제 연인의 손을 깍지 끼어 잡으며, 살짝 빨라진 심장 박동을 셌다.
“오진우 씨는 아직입니까?”
청문회를 진행하는 사내가 안경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앞쪽 코너 어디쯤 제 연인 박승원과 함께 앉아 있던 오연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며 대신 일어났다.
십 년을 떨어져 지낸 동생은, 예전과는 달리 무슨 생각과 고민을 하는지 쉽게 털어놓지 않았다. 이한솔을 품에 안은 채 잠시 제 할 일을 하고 오겠다며 사라진 얼마 전도 그렇다.
사실 처음에는 무작정 미워만 했었다.
오연과 오진우의 부모는 한평생 에스퍼-가이드 페어 연구에 매달린 저명한 학자였다. 자신들의 아이가 페어 가이드를 죽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명예로웠던 그들은, 차마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십 년간 쉽게 잠들지 못했던 건 오진우뿐만이 아니다. 오연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아주 오랜 시간을 제가 가장 예뻐했던 동생을 증오하고, 또 어느 날은 하염없이 그리워했다가 다시 괴로움에 이를 갈았다.
차라리 제 동생이 이미 죽어서, 그래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라 믿으며 자신을 달랬던 때도 있다. 차라리 남은 건 정말로 저 혼자라 믿는 게 차라리 상처를 무디게 하는 방법이었다.
의무적으로 만나던 페어 가이드였던 박승원이 연인이 되고, 이태원의 현장에서 제 동생의 모습이 찍히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었다.
오연의 입에서 조금은 쇳소리 같은 쉰 음성이 흘러나왔다.
“제가 대신하겠습니다.”
“그쪽은 누굽니까?”
“……에스퍼 오진우의 직계 가족인 연구원 오연입니다.”
여기저기 소란스럽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센터의 주축 중 한 명으로 자주 오르내리던 그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연의 가이드이자 ‘군 에스퍼 거짓 폭동’의 주요 관계자로 참석한 박승원은, 약간 서늘한 눈으로 제 연인을 훑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지금, 국가와 센터를 ‘후원했다’고 알려진 이들이 당장 해야 할 것은 이런 잘잘못을 따지며 책임 전가를 할 사람을 물색하는 게 아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보호가 필요했다.
일련의 사태로 불안 증세를 호소하는 에스퍼와 가이드들이 안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했다. 그는 군인인 만큼 기본적으로 상명하복을 따르는 데에 능한 사내였지만, 그만큼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 더욱 완고한 편이었다.
‘정말 제대가 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
박승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제 꼿꼿한 성격의 연인이 저 이리떼들 사이에 앉아서 질답을 해야 하는 것이 꺼림칙했다. 이미 그날 이후로 여러 방향으로 충분히 시달리는 오연을 봐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박승원의 생각과는 반대로, 오연은 제가 동생 대신에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그에게 자신의 동생은, 미워하고 증오했던 시간만큼 애달프고 또 아픈 손가락 같은 혈육이었다.
그때였다.
굳게 닫혀있던 대강당의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 순간 절대 들릴 리 없는 이질적인 기계음에,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문 쪽을 향했다. 그 끝에 서 있는 건 며칠간 어떤 연락도 닿지 않던 오진우였다. 파리한 안색의 에스퍼를 발견한 최태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오진우는 강당 안을 건조한 눈으로 훑더니, 곧장 비어 있는 그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물론 중간에 제 형을 향해 조금은 흐리게 웃어준 것도 함께였다. 박승원은 연인을 다독이며 다시 자리에 앉혔다.
청문회는 다시 시작됐다.
“‘선생’이라는 에스퍼가 그 누구와도 매칭되는 가이드를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에스퍼 오진우, 당신은 그 가이드와 페어였고요. 맞습니까?”
“……예.”
오진우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가이드가 죽었다고 들었는데요. 사인은 뭡니까?”
“모릅니다.”
“모르다니요. 당신이 그 가이드와 마지막에 함께 있었고, 심지어는 시신과 함께 며칠간 잠적하셨던 걸로 아는데요.”
연구원들은 저들에게 몇 가지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특히, 최태훈과 관련된 것은 더더욱 입을 다물고 감췄다. 센터 소속 가이드이긴 하지만 민간인에 불과한 최태훈이 근 한 달간 겪어야 했던 이야기를 되풀이하며 시달리지 않도록 하는 것에 모두가 동의했다.
덕분에 태훈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제 에스퍼와의 매칭을 빼앗겼던 가이드로만 알려져 있다. ‘한 달간의 실험’ 같은 건, 당장은 센터의 연구원들만 아는 비밀이었다.
“맞습니다만, 그게 제가 모든 것을 알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저는 이한솔의 유언을 도왔을 뿐입니다.”
“유언이요?”
그 누구도 몰랐던 행방불명의 이유가 처음으로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오진우는 저를 향해 초조한 눈으로 묻는 사내를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저 다급함의 이유가 뻔히 그려졌다.
“‘본인의 사후 그 어떤 실험도 거부한다.’”
최태훈은 멍한 얼굴로 오진우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이한솔의 마지막 말을 들었다.
“‘시신은 화장하고, 그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에 나누어 뿌린다.’”
그 시작부터 살아온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스스로 선택권을 가질 수 없었던 실험체는, 그 죽음에 이르러서 드디어 저를 이용하려 눈을 빛내던 이들을 낄낄대며 비웃는 데 성공했다.
오진우는 허둥지둥 저를 향해 질문을 쏟아내는 반대편의 사람들을 보며, 어디선가 제 가이드였던 청년이 웃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뭐, 뭐라고요? 그럼 데이터는……. 그 가이드의 생체 수치라든지! 뭐든지, 뭐, 남는 게 없습니까?!”
페어를 잃고 십 년을 원치 않는 족쇄에 묶여 살아야 했던 에스퍼를 앞에 둔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무례하고 또 난폭한 물음이었다.
오진우는 대답 대신 술렁이는 사람들을 묵묵히 눈에 담았다. 청문회 감사단 중 한 명의 입에서 답답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 죽은 가이드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 줄은 압니까? 어떤 에스퍼와도 매칭되는 가이드라니, 이런 건 전무후무한 결과물이란 말입니다!”
“‘에스퍼’ 이한솔이었습니다.”
입을 굳게 다문 오진우 대신, 조금은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 가이드에게 이끌려 다시 착석했던 오연이었다. 그는 제 동생이 홀연히 며칠간 모습을 감추기 전 이한솔을 본 유일한 사람이다.
최태훈은 오연의 말을 느리게 되풀이했다.
가이드가 아닌, 에스퍼 이한솔.
“그 방법은 모르겠지만, 이한솔은 에스퍼로 죽었습니다. 가이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바라시는 건 시신이 온전했어도 알아낼 수 없으셨을 겁니다.”
눈을 감은 이한솔에게 손이 닿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제 동생의 품에 마치 고운 밀랍 인형처럼 안겨 있는 청년은 더는 가이드가 아니었다. 그에게서는 저와 같은 에스퍼만이 줄 수 있는 묘한 긴장감만이 전해졌다.
덕분에 오연은, 아주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선생이 만든 수많은 금제가 걸려 있던 이한솔이지만, 그 금제의 마지막이 무엇인지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이드가 아닌 에스퍼 그 본연의 삶을 사는 것이다.
최태훈과 이한솔이 함께한 마지막 순간.
아마도 그때에 모든 비밀이 있을 거다. 가이드가 아닌 에스퍼의 삶을 선택하게 되는 최후의 기폭제가 누구보다 선한 디스마스를 통해 건네졌을 거다.
이한솔은 영리한 청년이었다.
그의 계획으로 의도된 상황 속에서 최태훈은 그 자신도 모르는 새에 이한솔을 죽음으로 이끌었을 거다.
하지만 오연은 자신의 가설을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는 옆에 앉아 있는 박승원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때로는 조용히 침묵해야 하는 일들이 있기 마련이다.
오연에게는 이한솔의 죽음이 그것이었다.
너무나 무던하게 이어지는 형제의 말에 완전히 미칠 지경이 된 건, ‘센터의 후원자’라고 불리는 이들이었다.
지관영은 제 가이드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저만치에 있는 그들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그들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빚을 지고 사는 것을 질색하는 에스퍼가 ‘해야 할 일’에 제법 가까이 있을 게 분명한 먹잇감들이었다.
“혹시 모르니 남아 있는 DNA라도 찾아야겠습니다. 어딥니까? 어디에 시신을……!”
오진우의 입에서 조금은 한숨 같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건 시종일관 깍듯한 태도였던 그에게서 나온 최초의 냉소였다.
허나 질문을 이어가던 이들은 그것에 움츠리는 것보다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그를 떠볼 것을 계획했다. 눈앞의 에스퍼가 같은 측정 불가 에스퍼인 지관영과 비교해 꽤나 온화한 성격이라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명성은 허투루 생기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듯, 이제는 ‘첫 번째’의 측정 불가 에스퍼가 된 오진우는 그보다 한발 앞서, 제게 쏟아질 질문을 손쉽게 차단했다.
“……오진우 씨!”
놀란 비명 같은 고함이 터졌다.
오진우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후원자’들은, 그 가운데에 앉아서 질답을 조정하던 안경잡이 사내 한 명을 제외하고는 일제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았다. 청문회실 한구석에 있던 경찰이 허둥지둥 그들의 맥박을 확인했다. 생명에 이상은 없었다. 그저 기절했을 뿐이었다.
질문할 사람들이 없으니 남은 일정이 이어질 리 없었다.
이건 어떻게 보면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참신한 폐회 방법이었다. 오진우는 저를 경악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회자를 마주보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좀 피곤하네요. 내일 이어서 할까요.”
널찍한 대강당 안에서 오진우의 방법이 마음에 든다는 듯 옅게 소리 내 웃은 건 단 한 사람뿐이었다.
* * *
순두부찌개, 크고 작은 고기완자, 계란과 감자 요리들.
오진우는 철저히 10년 전 제가 좋아했던 식단대로 차려지고 있는 테이블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지금 그는 제 형의 연인이라는 한 살 많은 남자와 한정식 식당 안에 나란히 앉아있다.
그나마 드문드문 이어지던 대화는 오연이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운 사이 뚝 끊겼다.
오연이 있을 때만 해도 생긋 눈을 접어 웃으며 붙임성 있게 굴던 승원은, 단둘이 남자마자 완전히 석상처럼 변했다.
사실 박승원 그는 오진우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동생이라는 녀석 때문에 제 에스퍼가 얼마나 마음고생 했는지 근 몇 년을 옆에서 지켜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승원은 작게 한숨을 삼키며 제 눈치를 보는 사내의 컵에 물을 채워 줬다. 덕분에 잠시 넋 놓고 있던 오진우는 그제야 답지 않게 허둥대며 쩔쩔맸다.
그건 불과 한 시간쯤 전에 청문회를 다시없을 극단적인 방법으로 끝낸 최강의 에스퍼로는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어, 어? 어, 그러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죄송합…….”
“됐어. 셋뿐인데 무슨.”
군의 정복 차림인 박승원이 딱 떨어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에, 오진우는 찔끔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눈앞의 가이드는 분명 처음에는 제 형보다 훨씬 가볍고 느슨한 느낌이었는데, 가면 갈수록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은 성격을 드러냈다.
결국 오진우는 완전히 움츠러든 상태로 제 형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렇게 오매불망 기다린 형도 화장실에서 돌아오자마자 무뚝뚝한 얼굴로 툭 입을 열었다.
“다음부터는 나한테라도 말을 해.”
겨우 고기 완자 하나를 입에 넣고 씹으려던 차였다.
오진우는 완전히 ‘얼음’ 상태가 되어 제 형과 그 옆에 있는 가이드를 번갈아 보았다. 사실 오진우 그는 오랫동안 제대로 된 사회생활과 단절되어 있던 탓에, 이렇게 별거 아닌 일상에도 쉽게 깜짝 놀라고는 했다.
그가 뭔가 실수한 게 아닌가 싶어서다.
“……어?”
“방해하지도, 잔소리하지도 않을 테니까.”
에스퍼는 이어진 말에 그제야 문맥을 파악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이 됐다. 혼자 이한솔의 유언을 따르고 온 것을 두고 하는 것임을 깨달은 거다. 박승원은 그런 오진우를 보며 ‘앞으로 저거 참 놀려먹기 쉽겠다’ 하고 생각했다.
“……그, 그게. 혹시 부담스럽고 그럴까 봐……!”
“이제 질렸어.”
그렇지 않아도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딱딱한 내용과 함께 흘러나왔다. 그 냉랭한 기운에 오진우는 형의 눈치를 보면서 입 안에 남은 음식을 제대로 씹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오연은 분명히 10년 전보다 쑥 자라난 사내의 모습을 한 동생이 순식간에 제가 기억하고 있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걸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까마득하게 어린 동생 혼자 걱정하면서 지내는 거.”
오진우는 오연보다 일곱 살이나 더 어리다.
덕분에 오진우는 제 형을 약간 영웅 비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억이 시작되는 지점부터 늘 형인 오연은 언제나 먼저 길을 만들어 주었고, 제가 힘들고 위험할 때마다 항상 앞장섰었다.
‘어린 동생’.
오진우는 참 그리웠던 그 단어를 천천히 되새기며 작게 대답했다.
“……응.”
분명 물리계 에스퍼 중 최강이라 손꼽히는 건 오진우인데, 그런 사내를 꾸짖을 수 있는 건 지능계 에스퍼인 오연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유일한 가이드인 사내는 그걸 보며 작게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건 억지로 그려 만든 웃음이 아니라 정말로 순수하게 흘러나온 감정이었다.
오진우는 형이 둘 생겼다.
한편, 당혹과 정적에 찼던 청문회장에서 재밌어 죽겠다는 듯 근사한 얼굴 가득 미소를 지우지 않던 에스퍼는 그 좋은 기분 그대로 제 저택으로 돌아왔다.
최태훈과의 접촉으로 컨디션도 쭉 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고, 골치 아픈 일들도 하나둘 정리되고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터였다.
“최태훈. 식사는?”
혼자 있을 때는 제대로 챙겨 먹던 일이 드물던 끼니도 제 연인이 함께 있으니 꼬박꼬박 챙기게 됐다. 저는 대충 먹거나 걸러도 상관이 없다지만, 그가 보기에 약하기 짝이 없는 신체를 가진 가이드는 말 그대로 잘 먹이고 잘 재우며 발끝이 땅에 닿지 않게 안고 다녀도 모자랐다.
하지만 최태훈은 대답이 없었다.
소파에 앉아서 뭔가 생각에 빠진 가이드는 연인의 말을 듣지 못하고 멍하게 휴대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에스퍼는 그런 가이드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었다.
그 살랑이는 손길에 잠시 또렷한 초점이 없던 태훈의 눈이 그제야 관영을 눈에 담았다. 흑갈색 눈동자에 천천히 제가 차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지관영은 동그란 이마에 입술을 떨어트렸다.
“있잖습니까. 관영 씨.”
“응.”
아마 저 예쁜 입에서 나올 말은, 제 목소리를 듣지도 못할 정도로 깊게 고민에 잠겼던 것의 결과일 거다. 지관영은 그 내용을 상상하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저 하고 싶은 일이 생겼습니다.”
“뭔데.”
요 며칠 근심에 빠져있던 모습보다야 훨씬 나은 방향이었다. 에스퍼는 그린 듯한 눈웃음을 걸며 최태훈의 옆에 앉았다. 이렇게 다정하고 상냥한 지관영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오로지 그 목숨줄을 쥐고 있는 가이드뿐이다.
연인의 상냥한 다독임에 용기를 얻은 듯한 최태훈은, 잠시 숨을 삼켰다가 단어 하나하나에서 다짐과 의욕이 넘쳐흐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센터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단정한 목소리로 흘러나온 말에 최태훈의 얼굴선을 그리던 지관영의 손이 뚝 하고 멈췄다. 곱게 올라간 입꼬리 역시 살짝 떨렸다. 최태훈, 저 가이드는 자신을 향해 엉엉 울면서 한 고백 중 하나를 완전히 잊은 게 분명했다.
‘앞으로는 센터 편 안 들고 내 편 든다며?’
지관영은 저도 모르게 떠오른 유치한 물음 하나를 삼키면서, 한없이 진지한 얼굴을 한 연인을 바라보았다.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최태훈은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지관영이 센터의 뜻을 어기고 거절하려야 할 수 없는 최강의 패를 집어 들었을 뿐이다. 아니, 이제 그 지독히도 싫어했던 ‘센터’는 지관영 그가 가장 적극적으로 후원해야 할 단체가 될지도 모른다.
“어떻습니까? 저, 정말로 가이드랑 관련된 일들을 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미친 과학자 하나가 푹 빠져들었을 정도로 완벽한 가이드의 모습을 했다는 최태훈은, 센터의 업무를 어렵잖게 해낼 거다. 아니, 예상보다 훨씬 더 잘할 지도 모른다.
어제의 적은 오늘의 동료가 될 수도 있다.
지관영은 저도 모르게 그 말을 떠올리며 최대한 달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멋지네. 정말로 잘 어울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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